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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트 Celts | |||||
켈트족의 팽창[1]과 현대의 켈트어파 사용권역 | |||||
위치 | 유럽, 아나톨리아 |
언어별 명칭 | |
<colbgcolor=#f0f0f0> 영어 | Celts |
그리스어 | Κελτοί |
독일어 | Kelten |
프랑스어 | Celtes |
아일랜드어 | Na Ceiltigh |
웨일스어 | Y Celtiaid |
라틴어 | Celtus |
Gal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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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켈트어파 언어를 사용하거나 켈트 문화와 관련된 민족들의 총칭이다. 현대 남아있는 켈트인들은 게일인들과 브리튼인들로 나뉜다.2. 어원과 개념
'켈트'의 어원은 그리스어 'Κελτοί'로, 라틴어에서 그리스어를 차용한 'Celtae'에서 유래하였다. 라틴어의 또 다른 이름 'Gallus'는 이들의 일파가 살던 땅을 가리키던 갈리아의 어원이 되었다.영어 Celt의 직접적인 어원은 프랑스어 Celte이기 때문에 본래는 셀트(/selt/)라고 읽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언어학이 발전하면서 궁극적인 어원인 Κελτοί를 존중하자는 의미에서 영미권 학계를 중심으로 '켈트'(/kelt/)라는 발음도 도입되었다. 켈트어파에서는 /k/ 발음을 c로 쓰므로 켈트인들은 모어에 관계없이 당대 민족주의 열풍을 타고 Celt의 발음을 /kelt/로 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현대에는 /kelt/도 표준이 되었다.출처
켈트족 자체가 고대에 켈트어를 쓰던 집단에서 파생되었기에, 근대 이후의 민족에 대입해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중위도 하단에 위치한 일부 유럽 국가에서는 북아프리카, 중동-레반트 지역의 거주민들과 유사한 유전적 관계를 부정하기 위해서 켈트족의 역사를 본인들의 국가의 역사에 유리하게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데, 주로 레딧이나 유튜브 댓글에서 출몰하여 논쟁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2]
그러나 이들의 주장과는 달리 켈트족의 개념 자체는 현대의 민족보다는 문화권의 개념으로 광범위하게 해석하는 것이 더 옳바른 견해로 보는 편이다. 예를들어 '튀르크어족'이라거나, 남아프리카를 석권한 '반투어족' 같이 인종 상관없이 켈트어족의 언어를 사용을 했으면 켈트족이 되는 것이다. 켈트족의 기원이 되는 할슈타트 문화는 대략 기원전 1200년대에서 7세기경에 번성하기 시작한 문화권이라고 학계에서 추정한다.[3]
3. 범위
현재는 게르만족, 라틴족, 슬라브족 같은 유럽의 여러 주요 집단들에 비해 소수에 불과하지만, 로마가 존재하기 이전 고대에는 유럽 전역에 분포하면서 일대의 맹주 노릇을 했다. 켈트인들의 최대 영역은 매우 넓어서 전성기에는 흔히 켈트족의 영역이라고 여겨지는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전역과 이탈리아 북부, 동유럽, 바다 건너 아나톨리아와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4], 흑해 부근까지 진출했다고 한다. 특히 흑해 연안은 갈리아인들의 본래 근거지였을 가능성이 높다.이러한 원정은 스키타이의 활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스키타이가 폴란드와 보헤미아에 영향을 끼치며 그 지방 부족들의 세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 켈트족은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를 자주 약탈했다.
기원전 390년 켈트족은 대대적으로 에트루리아를 침공했다. 이때 에트루리아의 두개 도시를 빼앗고, 각각 메디올라눔(현 밀라노)과 보노니아(현 볼로냐)로 개칭했다. 위기감을 느꼈던 에트루리아는 한때 지배했던 로마 공화국에 원군을 요청했고, 로마에서 온 지원군들의 활약으로 수도 클루시움을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자 켈트족은 목표를 바꿔 에트루리아는 포기하고 남하하여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군사적 역량이 부족했던 로마 공화국은 7개월간 처절한 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패퇴을 거듭했고, 결국 중심지인 로마까지 함락당했다. 항복을 선언한 로마인들은 화평의 대가로 재물을 바쳤는데 이때 저울이 균형이 맞지 않아 당초 약정한 무게보다 더 많이 내놓게 되었다. 로마 측에서 항의하자 켈트 족장 브렌누스는 재물 위에 검을 얹으며 "패자에겐 비애뿐."(Vae victis)이라고 조롱했다.
로마에 입성한 켈트족들은 건물이나 시설은 거의 손을 대지 않은 채 약탈만 하고 돌아갔다. 그 이유는 나중에 로마가 약탈 당한 피해를 회복을 하면 다시 약탈하기 위함이었다. 이때 로마가 약탈당하면서 로마의 각종 기록들이 대규모로 유실되었다보니 기원전 390년 이전 로마사는 신화와 실제 역사를 구분하기가 어렵다. 이후 로마인들은 켈트에게 당한 굴욕을 잊지 않기 위해 침공당한 그날에는 개를 패고 거위는 방석에 모시는 퍼포먼스를 취했다. 그 이유는 켈트군이 쳐들어왔을 때 개들은 조용한 반면, 거위들은 소리를 지르며 대항했기 때문이다.
켈트 남부 부족이 이탈리아 반도을 약탈할 때, 동방 부족들은 흑해 연안까지 진출하고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그리스를 침공했다. 이때 그리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코린토스 전쟁를 겪은 직후였기 때문에 켈트 부족들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결국 델포이 신전까지 약탈당하는 굴욕을 겪었다.[5]
4. 켈트어
자세한 내용은 켈트어파 문서 참고하십시오.5. 종교
현대 켈트인들도 사는 지역이나 나라마다 종교적인 차이가 있다. 아일랜드와 브르타뉴는 가톨릭이 주류이지만,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개신교가 주류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칼뱅주의 개신교의 일파인 장로회가 다수이고 국민교회(National church)로 지정되었다. 웨일스에는 잉글랜드처럼 성공회가 강세이다. 북아일랜드는 가톨릭을 믿는 토착 아일랜드인과 브리튼 이주민이 충돌하여 유혈 사태로까지 발전했고, 지금도 서유럽에서 드물게 내전이 언제 다시 발발할지 모르는 세계의 화약고로 취급된다.5.1. 켈트 신화
자세한 내용은 켈트 신화 문서 참고하십시오.켈트족과 관련된 신화로 켈트 신화가 있다. 아서 왕 전설 신화도 켈트 전설이다.
5.2. 켈트 십자가
자세한 내용은 켈트 십자가 문서 참고하십시오.6. 역사
6.1. 기원
켈트인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는 아직까지도 논쟁거리인 주제다. 하지만 주류 견해는 기원전 1000년경 중부 유럽의 언필드 문화[6]에서 기원해 유럽 곳곳으로 뻗어나갔다는 주장이다. 켈트인들은 이 언필드 문화로부터 수백년간 서부, 남부 유럽으로 진출해나갔는데, 이게 철기의 도입과 함께 할슈타트 문화의 전래와 겹치면서 완전한 켈트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된다.[7] 이 할슈타트 문화는 기원전 450년 나타난 '라텐 문화'[8]로 발전하며 알프스 이북에서 켈트족으로서의 발전을 계속해나간다. 이 것이 바로 '언필드-할슈타트 이론'으로 20세기 내내 정론으로 여겨졌고 현재까지도 큰 틀에서 여전히 받아들여지는 이론이다.
언필드-할슈타트 이론이 등장한 가장 큰 원인은 헤로도토스의 기록 때문이다. 1846년 요한 게오르그 람자우어가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 할슈타트에서 독특한 부장품들이 묻힌 고대 묘지를 발굴했다. 헤로도토스는 '다뉴브강 근처에 '켈토이'가 살고 있다'라고 언급했는데, 마침 이 묘지의 연대가 딱 헤로도토스의 시기와 겹쳤던 것이다. 람자우어는 이 묘지가 켈트족의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후 그 근처에서 비슷한 형태의 유물과 무덤들이 속속 발굴됐고, 이 문화권은 처음 묘지가 발견된 마을의 이름을 따 '할슈타트 문화'라고 불리기 시작했다. 1857년에는 스위스에서 '라텐 고고학 유적지'가 발견됐다. 이 곳 역시 초기 켈트족들이 많이 모여살았던 곳이었기에 라텐 유적지 역시 켈트인들의 유산이라고 여겨졌고 19세기, 20세기까지만 해도 이 언필드-할슈타트 이론의 권위에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들어 이 언필드-할슈타트 이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 언필드-할슈타트 이론에 따르면 켈트족은 알프스 이북에서만 주로 거주하는 민족이었는데, 북이탈리아와 이베리아 반도에서 켈트어 비문들이 발견되며 알프스 이남까지도 남하했다는 사실이 새롭게 밝혀졌기 때문. 게다가 이 비문들은 모두 기존의 할슈타트 문화나 라텐 문화에 속하지조차 않았다. 게다가 언필드-할슈타트 이론은 부정확하기로 유명한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만 지나치게 의존한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어려웠다.
그래서 학계에서는 '켈트족'을 특정 민족이나 혈통군으로 보던 기존의 시각 대신 '켈트어군 언어를 쓰는 민족들 전부'로 개념을 확장시켰다. 이 개념을 고수하는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켈트족은 중부 유럽이 아닌 대서양 연안에서 유래했다. 유래 연도도 기존보다 훨씬 빠른 기원전 3000년대로 앞당겨잡았고, 켈트인들이 대서양 연안에 퍼져 살다가 점점 서쪽으로 이주하면서 확산됐다고 주장했다. 대서양 연안이 아닌 프랑스 어딘가에서 처음 유래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대략 기원전 2000년 경에 처음 발생해 기원전 1000년부터 점차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는 주장인데, 이 역시 확실하지는 않다.
현대 고고학계에서는 언필드-할슈타트 이론과 새롭게 발견된 자료들을 절충시킨 것이 유력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2022년 기준 문화인류학계의 정론은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의 크림반도에서 살았던 인도유럽어족 계통의 유목민인 킴메르족들이, 중부유럽으로 진출하면서 북부 알프스 기슭 할슈타트-라텐 인근에서 켈트족으로 분화하며 켈트의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럽으로 내려온 원시 인도유럽인들 중 발칸 반도 북부를 거쳐서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된 분파는 라틴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7. 지역별 켈트족
로마 카피톨리노 미술과 소장 '죽어가는 갈라티아 (갈라타) 인'. 기원전 3세기 아나톨리아로 진출한 켈트족 전사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한때 지중해권을 제외한 유럽 전역을 지배했거니와 야만족답지 않게 군사기술적으로도 우월해서 로마를 비롯한 여타 유럽 문명에 자신들의 군사기술을 널리 전파시킨 전투종족이었지만[9] 기원전 2세기부터 거짓말처럼 몰락하기 시작했다. 가장 주된 이유는 로마가 팽창했기 때문이었지만, 대체로 각 지역별로 켈트족의 몰락은 다음과 같은 양상을 띤다.
7.1. 갈리아
자세한 내용은 갈리아 문서 참고하십시오.갈리아인의 복식 | 항복하는 베르킨게토릭스 |
갈리아인들, 즉 프랑스 일대에 정착한 켈트족들은 상당히 호전적인 민족이었다. 발칸 반도로 진출해 부유한 고대 그리스 폴리스들을 약탈하려 시도한 민족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279년 벌어진 제1차 그리스 침공에서 갈리아 군대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국왕 프톨레마이오스 케라우노스를 죽이는 전과를 올렸고 부유한 마케도니아 교외를 약탈하다가 마케도니아 군대에 격퇴당했다. 바로 다음 해에 벌어진 제2차 침공에서는 테르모필레에서 그리스 연합군을 포위섬멸시켰지만, 델포이에서 격파당하며 또다시 침공에 실패하고 아예 그리스 밖으로 쫒겨났다.
갈리아인들은 이후에도 용병 노릇을 하며 먹고살았다. 특히 기원전 278년에는 비티니아의 니코메데스 1세의 초청을 받아 1만명의 갈리아인들이 소아시아로 진출하기도 했다. 이 갈리아 전사들은 얼마 못가 셀레우코스 왕조에게 진압당하기는 했지만 패권에 대한 야심은 접지 않아서 아나톨리아에 꾸준히 공물을 요구했다고. 특히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4천의 갈리아 병사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려 들었는데, 이들이 역으로 반란을 일으켜 이집트를 집어삼키려 시도하기까지 했다. 물론 놀란 프톨레마이오스 2세가 나일강의 외딴 섬에 고립시켜버리는 바람에 실패했지만.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도 갈리아인들은 한니발 장군의 카르타고 군대에 고용되어 싸웠다. 갈리아인들은 칸나이 전투에도 참전하기도 했으며 강력한 그리스계 식민도시 마실리아를 공격해 궁지에 몰아넣은 적도 있다. 이후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고 세력이 승천하던 로마 공화국은 점차 북쪽으로 뻗어나가면서 갈리아 일대까지 진출했다. 로마인들은 기원전 125년 처음으로 갈리아 남부에 개입하기 시작했고, 기원전 121년에는 프랑스 남부 지역을 정복하고 '갈리아 나르보넨시스' 속주를 세웠다.
갈리아 남부는 기원전 120년대에 이미 로마의 영향권 아래로 편입되었지만 갈리아 전역이 로마에 편입된 건 기원전 58년 갈리아 전쟁 이후에야 일이다. 당시 로마의 풍운아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빚을 갚기 위해 금이 필요했고, 또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줄 전과가 필요했다. 갈리아 원정은 이 2개를 동시에 채워줄 수 있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카이사르는 사분오열된 갈리아 부족들을 각기격파하며 빠르게 갈리아를 정복했다. 부족들 간의 불화를 교묘하게 이용하며 쉽게 승리했던 것. 그나마 아르베르니족의 베르킨게토릭스가 갈리아족들을 통합하고 로마의 동맹부족이었던 하이두이족까지 통합해 로마와 일전을 벌이려 시도했지만, 결국 카이사르에게 패배하고야 말았다. 베르킨게토릭스가 처형당하자 구심점을 잃은 갈리아인들은 약해졌고, 결국 게르만족과 로마에게 시달리다가 완전히 로마에게 편입되고야 만다.[10]
로마 제국에게 편입된 이후의 갈리아는 '로만 갈리아'라고 따로 부른다. 갈리아인들은 드루이디즘을 비롯한 전통 문화를 잃어버렸지만 대신에 로마식 문명을 기초로 하여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 갈리아어는 거의 소멸하고, 로마의 라틴어가 바로 이를 대체하였다. 갈리아인들은 상류층들을 중심으로 로마의 문화를 흡수하며 빠르게 로마화되어갔다. 갈리아인들은 로마 제국 아래에서 수백년의 세월을 거치며 갈리아-로마 문화를 만들어나갔고, 이는 훗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까지 이어진다.
7.2. 이베리아
기원전 300년 이베리아의 민족 분포[11] | 누만티아 전쟁 |
켈트족들은 대략 기원전 6세기 경부터 이베리아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일된 국가나 왕국을 이루지는 못하고 모두 뿔뿔히 흩어져 씨족 체제로 살았다. 기원전 6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까지 켈트족들은 점차 도시화, 국가화가 이루어졌는데, 가장 대표적인 증거가 바로 무덤이다. 기원전 6세기에는 귀족들의 무덤이 주를 이루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전사들의 무덤이 더 많아졌기 때문. 전사들이 많아졌다는 것은 싸울 일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고 즉 인구 증가와 도시화로 인하여 세력들 간의 충돌이 더욱 빈번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기원전 3세기가 되자 이베리아 켈트족들은 완전히 씨족 체제에서 조그마한 도시국가들이 난립하는 구조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잘살던 이베리아 켈트족들에게 닥쳐온 재앙은 바로 로마였다. 이미 이베리아 켈트족들은 기원전 3세기부터 로마와 접촉하거나 충돌하고 있었는데,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겪으며 본격적으로 로마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 켈트족들은 한니발 휘하의 용병으로 참전해 알프스를 넘어가기도 했다. 다만 카르타고가 포에니 전쟁으로 패망하고 로마의 패권이 확립된 이후부터는 점차 로마에게 하나하나 정복당했다. 켈트족들은 기원전 2세기부터 무려 100여 년에 걸쳐 로마와 투쟁했지만, 결국 로마의 압도적인 물량과 기술을 이기지 못하고[13] 기원전 80년 세르토리우스 전쟁을 마지막으로 로마에 완전히 복속당했다.
7.3. 독일·알프스·북이탈리아
독일 지방은 켈트족들이 유럽에서 가장 먼저 정착한 지역들 중 하나다. 기원전 1000년 경 켈트족들의 기원으로 알려진 언필드 문화가 독일을 포함한 중부 유럽 일대에서 득세했기 때문. 남독일 일대에서 발원한 할슈타트 문화는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전 6세기까지 서유럽과 중부 유럽의 지배적인 문화였다. 그 뒤를 이은 기원전 5세기부터 1세기까지는 라텐 문화가 이어졌다. 켈트족들은 언필드 문화, 할슈타트 문화, 라텐 문화 등을 거치며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지중해 문명권과도 교역을 계속했는데,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도 피레네 이북 독일에 거주하는 켈트족들이 나와있을 정도.그러나 기원전 700년대부터 북부에서 게르만족이 밀려오자 켈트족들은 이들을 피해 알프스를 넘어 남하, 더 따뜻한 북이탈리아로 몰려왔다. 게르만족들이 스칸디나비아 일대에서 남하해오자 이들에게 체격적으로 크게 열세였던 켈트족들이 어쩔 수 없이 내려와야만 했기 때문. 기존 켈트족들이 살던 독일과 중부 일대는 이 이후부터는 게르만인들의 영토로 바뀐다. 대신 켈트족들은 알파인 패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의 포 계곡 일대에 정착하고 라텐 문화, 카네그라테 문화 등을 꽃피우고 나름 세력을 떨쳤다. 밀라노를 세운 것도 바로 이 켈트족들이다.
기존의 이탈리아인들은 이렇게 북이탈리아에 새로 정착한 켈트족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느꼈다. 특히 자신들과 다른 야만족이 바로 위에 거주한다는 것은 로마 중심의 이탈리아 지배가 고착화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즉 로마가 아무리 아니꼽더라도 인간 같지도 않은 야만족속들을 막기 위해서 로마를 중심으로 단합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 과정과 그 이후에 북이탈리아의 켈트족들을 수시로 공격했다.
기원전 3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북이탈리아 공격은 한니발 전쟁기를 제외하면 상시적으로 일어났으며 끝내 북이탈리아의 갈리아인들은 로마의 물량빨로 패망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북이탈리아의 켈트족들은 로마에 끈질기게 저항했고 2차 포에니 전쟁 이후에도 7번이나 로마의 집정관-법무관 군대를 격퇴시켰으나, 그래봤자 그 다음 해에 똑같은 규모로 다시 쳐들어오니 끝내 이기지 못하고 GG. 기원전 192년 마지막 남은 켈트 독립 세력이 로마에 무릎꿇으면서 북이탈리아의 켈트족들은 모두 로마에 동화된다.
7.4. 발칸
고고학적으로 선주민이었던 스키타이인들을 학살하고 동화시켰다고 확인되지만 기록이 충분하지는 않다. 그리고 그리스의 로마군과 카르파티아의 다키아인들에게 밀려서 거의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다키아인들 중 상당수가 켈트족 혈통이라고 추정한다. 실제로 문화적으로 다키아인들과 켈트족의 관계는 깊다.[14]일리리아의 켈트족 또한 비슷한 과정을 겪는다. 그들은 현재 보헤미아라는 지명의 기원이 된 보이족을 중심으로 통합하였지만 다키아인과 게르만족, 사르마티아인, 로마인이 진출하여 1세기에 복속되었다.
7.5. 갈라티아
자세한 내용은 갈라티아 문서 참고하십시오.기원전 3세기에 그리스를 공격한 후 헬레스폰토스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에 이주한 켈트족들은 소아시아 서부 내륙지역인 갈라티아에 정착하여 그들의 왕국을 세웠다. 갈라티아의 켈트족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셀레우코스 왕조의 전쟁에 용병을 파견하면서 디아도코이 왕조 간 전쟁의 큰 변수가 되었다. 하지만 기원전 189년 로마에 복속되었다. 이후 미트리다테스 전쟁 등 전화에 휩싸이고 최종적으로 속주가 된 때는 기원전 25년. 하지만 그들의 문화는 오랫동안 유지되어 기원후 4세기에도 켈트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다고 한다.[15]
성경의 갈라디아서가 이 갈라티아 지역의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7.6. 브리튼 제도
브리튼 섬에 건너간 켈트 족들은 이후 브리튼과 아일랜드 등 브리튼 제도 곳곳으로 퍼졌다. 브리튼 섬의 켈트족들은 여타 지역의 동족들이 모두 로마에 복속된 이후에도 로마의 정복 활동에 맞서 끊임없이 저항했다. 기원후 43년 로마 제국이 브리튼섬 남부를 정복하여 브리튼인들이 로마에 복속된 이후에도 하드리아누스 성벽 이북 픽트족들은 끝내 로마의 통치를 받지 않아 전 유럽에서 유일하게 켈트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지역이 되었다. 이들은 로마 제국 말기까지도 지속적으로 로마화한 브리튼인들을 상대로 침략전쟁을 벌였다. 이후 쇠퇴기에 접어든 로마 제국이 브리튼섬에서 철수하면서 브리튼섬은 오랜 혼란기에 접어들었다.중세에는 게르만족의 한 일파인 앵글로색슨족이 네덜란드를 거쳐 바다를 건너와 침략해왔고 북쪽에서는 스칸디나비아에서 역시 게르만족의 일파인 노르드인(바이킹)이 침략해 왔다. 이때 브리튼 섬 남부의 브리튼인들 중 앵글로색슨족과 노르만족들에게 지배당하거나 섞이기를 거부한 브리튼인들은 웨일스로 쫓겨났다. 이때 브리튼인들이 자신들을 구원해줄 인물을 신화화한 것이 아서 왕이다. 아마도 잠시나마 앵글로색슨족을 막아냈던 어떤 브리튼인 지도자가 미화되어 전설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다.
[16]
그리고 11-12세기에는 윌리엄 1세가 이끄는 노르망디의 노르만족들이 브리튼 제도를 남쪽에서부터 휩쓸었고 그 과정에서 브리튼 인들은 노르만 계통 왕조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13세기 에드워드 1세에게 웨일스가 완전히 정복되며 그 이후로도 1370년대부터 15세기 초까지 반란을 일으키다 완전히 잉글랜드에 동화되었다.
한편, 스코틀랜드의 켈트족들은 스코틀랜드 왕국이라는 잉글랜드와 별개의 나라를 구성했지만 1603년에 제임스 1세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되면서 정치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고, 1707년에 잉글랜드와 공식적으로 통합되어 영국이 되었다.
그래서 현재까지 남은 켈트족 위주의 나라는 아일랜드가 유일하다. 하지만 아일랜드를 400년간 지배한 영국에 의해 영어가 깊숙히 퍼진 데다가 영어의 힘에 압도되어 현재 아일랜드 인구의 대부분은 아일랜드어가 아닌 영어를 상용어이자 모어로 사용들 한다. 아일랜드 정부가 아일랜드어를 퍼트리고 유지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하고는 있지만 상용자는 여전히 적다. 언어에서는 오히려 가장 먼저 잉글랜드의 영토가 된 웨일스가 가장 잘 보존하고 있다. 웨일스인들의 웨일스어 화자 비율은 영어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타 켈트 지역 주민들의 켈트어 화자 비율보다 높다.
외세에 지배당했지만 문화적으로 완전하게 동화된 것은 아니어서 켈트족의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웨일스, 북프랑스의 브르타뉴 지방 등이 연합왕국의 구성원이 되거나, 프랑스의 한 지역으로 편입된 것은 겨우 근대 이후의 일이며, 지금도 그들의 민족적 문화적 자부심이 대단하다.[17] 역사적으로도 그들의 입장에서 이민족 침략자였던 잉글랜드(앵글로족)를 싫어하고 배척한 나머지 아일랜드인과 스코틀랜드인들이 잉글랜드의 전통적인 라이벌 프랑스에 가서 용병으로 활약한 경우도 적지 않으며, 스튜어트 왕조 이전까지도 스코틀랜드 왕실은 물론이고 아일랜드, 웨일스의 여러 귀족들도 프랑스 왕족과의 꾸준한 통혼을 통해 옆의 잉글랜드를 견제하려 애썼다.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사람들끼리도 "우리야말로 진짜 켈트 문화, 켈트 민족의 종주국이다, 너희는 찌질하게 잉글랜드 지배나 당했다"(아일랜드인), "아니다, 너희가 잉글랜드 꼬붕으로 보냈던 시절이 더 찌질했다(스코틀랜드인)"는 식으로 서로 놀리며 상호 디스하는 풍경을 에든버러, 글래스고, 더블린의 술집에서 종종 볼 수 있다. 이 두 나라는 물리적인 거리나 문화적인 거리도 상당히 가깝고 예나 지금이나 얼스터 지방과 하이랜드는 인구, 사회, 문화적 측면에서는 한 나라라고 볼 만큼 같이 해온 역사와 상호 소통, 교류가 깊어 스코틀랜드에도 아일랜드인들이 굉장히 많고 아일랜드에서도 스코트인들이 많이 산다.[18]
다만 이렇게 혈통적으로는 가깝고 친밀할 것 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관계도 역사와 종교 부분으로 들어가게 되면 험악해진다. 아일랜드로 건너간 스코틀랜드 개신교도들이 아일랜드 독립 이전까지 아일랜드 지역에서 지주로서 토착민 가톨릭교도들을 소작농으로 부리며 착취하고 탄압한 역사나, 감자 대기근 이후 고향을 떠나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에 대한 토착 스코틀랜드인들의 차별과 탄압의 역사,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북아일랜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19] 1990년대-2000년대까지 벨파스트 같은 북아일랜드 도시에서 농담이랍시고 이런 주제에 대해 잘못 말했다간 진짜 총폭탄이 날아왔다.[20]
영국의 켈트족들은 켈트족의 전성기였던 고대에는 동족들과 실질적으로 단절되어 기술적, 문화적으로 뒤떨어진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륙의 동족들이 로마화하여 정체성을 잃어버렸음에도 꾸준히 살아남음으로써 존재감을 지속하였고, 때문에 오늘날 내려오는 켈트족의 이미지는 대부분 이들에게서 비롯되게 되었다. 상체만 벌거벗은 채 푸른 물감[21][22]을 몸에 바르고 바지[23]를 입고, 독특한 헤어스타일[24]을 한 채 싸우는 야만적인 켈트 전사의 이미지는 실질적으로 브리튼 섬의 켈트족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역시 이런 문화적 특성을 갈리아 전쟁 당시 브리튼 인들이 갈리아 인들에게서 구분되는 주요 차이점으로 묘사하였다.
참고로 영국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 선사 시대의 건축물 스톤헨지는 켈트족 도래 이전에 지어진 것이다. 후대에 켈트족들이 들어와서 종교적 의식에 쓰이긴 했지만.
영화 폼페이: 최후의 날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마일로'는 이 영국에 살고 있던 켈트족이다.
8. 특징
영어로 발음하면 셀틱으로도, 켈틱으로도 모두 발음하며, NBA 농구팀 보스턴 셀틱스도 여기서 딴 이름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를 연고지로 하는 유명 축구팀 셀틱 FC도 있다. 둘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팀의 창단 기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현 프랑스 일대의 켈트족은 골족이라고도 불리고, 유명한 프랑스의 만화 아스테릭스도 켈트족의 영웅 아스테릭스가 로마에 점령당하지 않고 오히려 괴롭히는 내용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자기네 선조들의 역사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하는 만화라고 하면서 매우 좋아한다. 물론 근대 이전의 프랑스인들은 엄밀히는 골족과 라틴족과 프랑크족의 혼혈이지만[25], 라틴족은 프랑스어가 로망스어군에 속하긴 하나 이탈리아에서 기원하였고 스페인이나 루마니아 등지에도 많이 살고 있고, 프랑크족은 일단 독일과 연관이 깊은 게르만족의 분파였으므로 자존심 강한 프랑스인들이 선조라고 받아들이기는 어려웠고 프랑크족과 프리시족의 혼혈이기도 하지만 언어로 볼 때 프랑크족의 직계후손인 네덜란드인이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 그와 달리 갈리아의 골족은 의심할 여지 없이 그들만의 선조였고 영국와 한창 사이가 좋지 않을 때는 스코틀랜드나 아일랜드와 공조해서 영국과 대립하기도 하였다.
인터넷에서는 아래와 같은 글이 고대 켈트족의 전통 기도문이란 이름으로 떠돌아다니고 있다. 다만 정확한 출처는 불분명하다.[26] 당장 지폐라는 단어만 봐도 고대의 기도문은 절대로 아니다.[27]
당신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당신 지갑에 언제나 한, 두 장의 지폐가 남아 있기를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태양이 비치기를
가끔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 대해선 가난하고, 축복에 대해선 부자가 되기를
적(敵)을 만드는 것에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빠르기를, 이웃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안 하기를
당신이 죽을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당신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늘 당신 곁에 함께 계시기를
아일랜드 켈트족 전통 기도문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태양이 비치기를
가끔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불행에 대해선 가난하고, 축복에 대해선 부자가 되기를
적(敵)을 만드는 것에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빠르기를, 이웃들은 당신을 존경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안 하기를
당신이 죽을 것을 악마가 알기 30분 전에 당신은 이미 천국에 들어가 있기를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 겪은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늘 당신 곁에 함께 계시기를
아일랜드 켈트족 전통 기도문
9. 켈트 해
켈트 해는 영어 표기로는 Celtic Sea이며, 영어 발음에 가깝게 하는 표기법으로 적용될 경우, 셀틱 해로 표현한다. 통상적으로 아일랜드 섬 남쪽의 대서양 해역을 지칭한다. 동부는 세인트 조지 해협과 브리스틀, 영국 해협 등을 경계로 정한다.중국에서는 凱爾特海(Kǎiěrtèhǎi, 개이특해)로 음차했다.
10. 매체에서 등장
북유럽 신화와 함께 현대의 "중세풍 판타지물"에 정말 많은 영향을 준 문화이기도 하다.특히, 게르만 신화의 영향이 크거나 켈트와 비등비등한 미국이나 유럽 등지에 반해 일본에서 나온 중세풍 판타지는 대체로 켈트 문화의 색채가 매우 강한 편.
애니메이션이나 게임(특히 쯔꾸르 계열)에서 채용되곤 하는 BGM이나 OST들 중 뭔가 중세 유럽 분위기의 멜로디가 나온다 싶으면 보통 이 켈트족의 전통 멜로디가 모티브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부류를 많이 접한 사람의 경우 유튜브 등지에서 Celtic folk라 검색해서 들어보면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본, 상당히 익숙한 느낌의 멜로디를 많이 접할 수 있을 것이다.
10.1. 소설
10.1.1. 얼음과 불의 노래
웨스테로스의 3대 민족 중 하나인 최초인들은 켈트족이 모티브다.10.2. 게임
10.2.1. 문명 시리즈
문명 2부터 문명 5까지 등장했다. 역대 지도자로는 부디카(2, 4~5), 브렌누스(3~4), 쿠노벨리누스(2) 등이 나왔다.- 문명 3: 식량을 추가로 제공해 도시의 성장을 빠르게 하는 농업적 특성과 문명의 전체적인 운영을 원활하게 해 주고 행복과 문화에 약간의 보너스를 주는 종교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유 유닛인 갈리아 검사는 일반적인 검사보다 행동력이 빠르다.
- 문명 4: 언덕에서의 방어전, 기동성 등에 보너스를 받는 갈리아 전사를 고유 유닛으로 받으며, 고유 건물인 산성도 이런 보너스를 제공한다. 지도자인 브렌누스는 문명의 전체적인 운영을 원활하게 해 주는 종교적 특성과 행복 보너스를 제공하고 유닛들의 진급에 경험치가 덜 필요한 매력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부디카는 매력적 특성과 함께 유닛들의 전투력을 증가시키는 등 전투와 관련이 있는 공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 문명 5: 숲과 인접한 도시가 자동으로 신앙을 생성하여 빠르고 편하게 종교를 창시할 수 있으며, 고유 유닛인 픽트족 전사는 일반적인 창병과 달리 기병 계통 유닛을 상대로 전투력 보너스를 받지 못하지만 적을 제거할 때마다 신앙을 제공한다. 고유 건물인 케일리 홀은 행복을 다량으로 제공하여 운영을 보다 편하게 해 준다. 다만 도시와 인접한 숲에 시설물을 건설하면 신앙 보너스가 날아가는데다 신앙과 행복 외에 문명의 발전에 도움이 될 만한 요소가 달리 없어서, 그다지 강력하다는 평을 받지는 못한다.
10.2.2. 도미네이션즈
적군에게 투창을 던져 공격하는 전술성 병력으로 등장한다.자세한 내용은 켈트 전차(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자세한 내용은 켈트 철공소(도미네이션즈) 문서 참고하십시오.
10.2.3. 타임 크라이시스 4
VSSE 소속 주인공들의 서포터이자 특수부대 소속의 대위인 윌리엄 러쉬가 켈트족의 후예인 아일랜드계으로 나온다.10.2.4. 켈트의 전설
[1] ■ : 할슈타트 문화
■ : 켈트족의 최대 강역
■ : (논쟁)
■ : 현재 켈트어파 사용 구역[2] 혹은 본인의 얼굴이 금발벽안에 전형적인 서양인이라면서 우월감을 드러내면서, 본인 가족들과 지인들도 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외국인들이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유럽 국가들 중 대표적인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조차도 금발벽안타입 외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유럽에서도 머리색은 밝은 갈색도 많고 눈색깔도 갈안 계열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3] 레딧이나 유튜브에서 키배를 벌이는 유저 본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연관성이 짓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켈트인들은 할슈타트 문화에서 기원이 된 켈트족이다. 그러나 켈트족 자체가 원시 인도유럽인에서 분화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민족으로 중부유럽과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전 켈트족과 라틴족의 공통 조상 혹은 켈트족의 조상이 존재했으며 이들 일부가 유럽 각지로 먼저 이동을 했는지, 할슈타트 문화가 기원이 된 중부유럽에서 먼저 정착을 한후에 유럽 각지로 이동을 한 것인지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현재로써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확실한 것은 눈크고 코가 오똑하고 브이라인 얼굴형에 팔다리가 긴 체형을 가진 유럽인은 현 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에서 기원된 할슈타트 문화에서 기원이된 켈트인이다. 이들의 조상인 원시 켈트인들은 서아시아 지역인 캅카스와 우크라이나 일대중에서 흑해연안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킴메르족에 기원이 된 민족이었는데, 이들은 생김새가 현대 유럽인 보다는 캅카스 3국이나 러시아 남부 지역의 소수민족인 서아이아계 민족들과 유사한 외형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이 원래 기원이 되었던 서아시아와 흑해지방 보다는 위도가 보다 높고 알프스 산맥 처럼 추운 지방에서 정착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외형이 현대 유럽인 처럼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요청을 받아 켈트족 용병대가 내려와 복무하고, 그 대가로 파윰 분지를 받아 정착했다.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침략해서 갈라티아 왕국을 세운 켈트족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정착한 것이다. 현재 이집트의 켈트족 후손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이집트 아랍인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현대에는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을 믿는다.[5] 그리스 역사가인 스트라본은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을 약탈하려는 순간, 아폴로 신이 나타나서 지진을 일으키고 벼락을 내리쳐 켈트족들을 쫓아내어 신전이 무사했다고 기록했으나 그로부터 174년 후인 기원전 105년 무렵, 로마 장군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갈리아 남부의 마을인 톨로사(프랑스 남부 도시인 툴루즈)에 살고 있던 켈트족들의 신전을 방문했다가 과거 그들의 조상이 그리스로 쳐들어가서 약탈해 와서 신전 안에 보관해 둔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발견했다는 로마인들의 기록을 본다면, 스트라본은 켈트족들의 델포이 신전 약탈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숨기기 위해 역사왜곡을 했다고 추정된다.#[6] 언필드 문화는 후기 청동기 유럽의 주요 문화들 중 하나로 대략 기원전 1300년부터 기원전 700년까지 번성했다.[7] 발트족과 슬라브족 같은 다른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이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과 달리, 켈트족은 유럽의 할슈타트 문화로부터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물론 할슈타트 문화도 결국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이주민들로부터 형성된 문화이므로, 이들 역시 흑해 너머의 러시아 남부나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켈트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이후에 넘어왔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8] 'La Tène' 문화. 라틴 문화와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다.[9] 켈트식 장검과 투구, 갑옷은 로마군에게 거의 그대로 차용되어 로마 제국 시기는 물론, 중세까지도 이어진 유럽인들의 군사기술의 기초가 되었다.[10] 알프스 이남의 켈트 세력은 로마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소모전으로 나온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실제 기록상으로, 오랜 전란으로 약화된 켈트인은 포에니 전쟁 이후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동수의 로마군을 수차례 격파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러 단편적인 기록을 검토해봤을 때, 리비우스가 켈트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겪은 패전을 다수 생략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이런 패배를 메꿀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지만 이미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인수브리-보이족 켈트 세력은 이를 메꿀 역량이 없었다.[11] ■ 켈트족[28]
■ 켈트화된 인도유럽어족
■ 이베리아인
■ 투르데타니아인
■ 바스크인[12] 문화적으로는 거의 켈트화가 되었다. 그러나 혈통적으로도 루시타니아인이 켈트계열 민족이 아닌 라틴계 민족의 조상격인 이탈리아어족을 사용하는 원시 라틴 민족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리고 세부적인 혈통 상황을 보면, 지배계층이었던 부족의 추장이나 귀족이나 인도유럽어 계열 민족 비율이 높았지, 피지배계층인 노예나 부족원들은 토착 이베리아인과 페니키아 혈통 주민들이 많았다. 다만 언어 만큼은 혈통 상관없이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루시타니아어를 사용했으며, 켈트어파의 어휘나 문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언어였다. 그래도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갈리시아는 켈트인과 루시타니아인의 혼혈이 이루어진 유일한 지역이었다. 나중에는 게르만계 왕족과 귀족이 갈리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으로 부터 저항하면서 현재 유일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유럽인에 부합하는 외모가 도드라지는 지역이 바로 갈리시아이다.[13] 그 유명한 누만티아 전쟁도 바로 이 이베리아 켈트족들이 로마로 복속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14] 물론 다키아인들은 켈트가 아닌 트라키아인들에게서 파생된 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화적으로는 트라키아와 스키타이의 영향이 더 짙다. 다만 켈트족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15] 그런 이유로 오늘날 독일 지역인 게르마니아에 살있던 켈트 계통 주민들과 통역이 없이 서로 대화가 통했다고 한다. 출처: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 라인하르트 쉬메켈 지음/ 한국 게르만어 학회 옮김/ 푸른역사[16] 지도에서 북부 스코틀랜드에 침입한 것은 노르만족이 아니라 노르드인이다. 노르만족은 11세기에 와서야 남쪽 노르망디에서 올라온다.[17] 같은 영국 국가안에 있지만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축구 시합을 하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18] 스코틀랜드라는 국명의 기원이 되었던 스코트족 자체가 원래는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종족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상한 스코트족이 브리튼 섬 북부로 건너가서 패권을 잡으면서 스코트족의 땅, 즉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특히 얼스터 지방)는 거리가 가까워서 교류가 많았다.[19] 위에서 말한 스코틀랜드계 개신교도 중 상당수가 북아일랜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일랜드 독립 이후 남부 지역의 스코틀랜드계 개신교도들이 북부로 이주하였다.[20] 첨언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로울랜드 스코트인들이 영국 왕의 비호를 받아 주로 얼스터로 이주하였고, 아일랜드인들 역시 가난한 조국을 떠나 발전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로울랜드로 이주했다. 이들이 결성한 축구팀이 셀틱 FC. 그때까지 켈트족 풍습이 많이 남아 있던 하일랜드 주민들은 촌놈 취급당했다. 현재도 스코틀랜드는 로울랜드-하일랜드 간 지역 감정이 꽤 깊으며, 이때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을 차별했던 과거로 인해 현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반인종차별적, 진보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21] 예부터 파란색 천연안료의 재료로 쓰이는, 대청이라고 부르는 유럽쪽풀을 빻은 가루에 물과 함께 오줌을 섞어 발효시킨 것으로 출진 전에 몸에 워페인트를 그렸다.[22] 여담으로 B.C. 50년 이베리아 반도의 켈트족은 오줌으로 입을 헹궈 치아 미백효과를 냈다. 기사[23]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켈트족의 먼 후손인 근대~현대 스코틀랜드에선 킬트라는 치마를 입어 로마 등의 고대 지중해 복식의 전통을 본토보다 더 잘 지키며 보존하고 있다.[24] 투블럭과 비슷하게 앞머리만 남겨두고 옆, 뒷머리를 삭발한 헤어스타일을 했다.[25] 근대 이후에는 다른 이주민들도 들어왔기 때문에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생긴 시점의 근대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26]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으로 시작하는 축복문('Go n-éiri an bóthar leat')은 있기는 한데 오역이다. 그냥 대충 '좋은 여행이 되기를'이라는 말인데, 여기에 살이 더 붙여 켈트식 축복/아이리쉬 축복(기도)문이라는 형태로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27] 지금까지 알려진 지폐 중 가장 이른 것은 북송의 교자. 10-12세기 것이다.
■ : 켈트족의 최대 강역
■ : (논쟁)
■ : 현재 켈트어파 사용 구역[2] 혹은 본인의 얼굴이 금발벽안에 전형적인 서양인이라면서 우월감을 드러내면서, 본인 가족들과 지인들도 다 자신과 똑같이 생겼다고 주장하는 외국인들이 커뮤니티에 상주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유럽 국가들 중 대표적인 국가인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조차도 금발벽안타입 외모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며 유럽에서도 머리색은 밝은 갈색도 많고 눈색깔도 갈안 계열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3] 레딧이나 유튜브에서 키배를 벌이는 유저 본인들이 자신들의 민족과 연관성이 짓다고 강력하게 주장하는 켈트인들은 할슈타트 문화에서 기원이 된 켈트족이다. 그러나 켈트족 자체가 원시 인도유럽인에서 분화되는 과정에서 탄생한 민족으로 중부유럽과 이탈리아 반도로 들어오기전 켈트족과 라틴족의 공통 조상 혹은 켈트족의 조상이 존재했으며 이들 일부가 유럽 각지로 먼저 이동을 했는지, 할슈타트 문화가 기원이 된 중부유럽에서 먼저 정착을 한후에 유럽 각지로 이동을 한 것인지는 추정만 할 수 있을 뿐 현재로써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 확실한 것은 눈크고 코가 오똑하고 브이라인 얼굴형에 팔다리가 긴 체형을 가진 유럽인은 현 오스트리아와 독일 남부에서 기원된 할슈타트 문화에서 기원이된 켈트인이다. 이들의 조상인 원시 켈트인들은 서아시아 지역인 캅카스와 우크라이나 일대중에서 흑해연안 지역에서 살고 있었던 킴메르족에 기원이 된 민족이었는데, 이들은 생김새가 현대 유럽인 보다는 캅카스 3국이나 러시아 남부 지역의 소수민족인 서아이아계 민족들과 유사한 외형이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들이 원래 기원이 되었던 서아시아와 흑해지방 보다는 위도가 보다 높고 알프스 산맥 처럼 추운 지방에서 정착한 후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외형이 현대 유럽인 처럼 변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4]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요청을 받아 켈트족 용병대가 내려와 복무하고, 그 대가로 파윰 분지를 받아 정착했다.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침략해서 갈라티아 왕국을 세운 켈트족들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이집트에게 용병으로 고용되어 정착한 것이다. 현재 이집트의 켈트족 후손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이집트 아랍인에게 동화되었기 때문에 현대에는 아랍어를 쓰고 이슬람을 믿는다.[5] 그리스 역사가인 스트라본은 켈트족들이 델포이 신전을 약탈하려는 순간, 아폴로 신이 나타나서 지진을 일으키고 벼락을 내리쳐 켈트족들을 쫓아내어 신전이 무사했다고 기록했으나 그로부터 174년 후인 기원전 105년 무렵, 로마 장군인 퀸투스 세르빌리우스 카이피오가 갈리아 남부의 마을인 톨로사(프랑스 남부 도시인 툴루즈)에 살고 있던 켈트족들의 신전을 방문했다가 과거 그들의 조상이 그리스로 쳐들어가서 약탈해 와서 신전 안에 보관해 둔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발견했다는 로마인들의 기록을 본다면, 스트라본은 켈트족들의 델포이 신전 약탈 사실을 부끄럽게 여겨 이를 숨기기 위해 역사왜곡을 했다고 추정된다.#[6] 언필드 문화는 후기 청동기 유럽의 주요 문화들 중 하나로 대략 기원전 1300년부터 기원전 700년까지 번성했다.[7] 발트족과 슬라브족 같은 다른 인도유럽어족 계통 민족들이 중앙아시아나 러시아 남부에서 이주해 온 것과 달리, 켈트족은 유럽의 할슈타트 문화로부터 정체성을 형성하였다. 물론 할슈타트 문화도 결국 인도유럽어족 계열의 이주민들로부터 형성된 문화이므로, 이들 역시 흑해 너머의 러시아 남부나 중앙아시아에서 왔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다만 켈트족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된 이후에 넘어왔는가 아닌가의 차이일 뿐이다.[8] 'La Tène' 문화. 라틴 문화와는 다른 별개의 문화권이다.[9] 켈트식 장검과 투구, 갑옷은 로마군에게 거의 그대로 차용되어 로마 제국 시기는 물론, 중세까지도 이어진 유럽인들의 군사기술의 기초가 되었다.[10] 알프스 이남의 켈트 세력은 로마와의 처절한 전투 끝에 소모전으로 나온 로마군에게 패배했다. 실제 기록상으로, 오랜 전란으로 약화된 켈트인은 포에니 전쟁 이후 새롭게 업그레이드된 동수의 로마군을 수차례 격파했다. 현대 역사가들은 여러 단편적인 기록을 검토해봤을 때, 리비우스가 켈트와의 전쟁에서 로마가 겪은 패전을 다수 생략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나 로마는 이런 패배를 메꿀 인적, 물적 자원이 충분했지만 이미 포에니 전쟁 이전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인수브리-보이족 켈트 세력은 이를 메꿀 역량이 없었다.[11] ■ 켈트족[28]
■ 켈트화된 인도유럽어족
■ 이베리아인
■ 투르데타니아인
■ 바스크인[12] 문화적으로는 거의 켈트화가 되었다. 그러나 혈통적으로도 루시타니아인이 켈트계열 민족이 아닌 라틴계 민족의 조상격인 이탈리아어족을 사용하는 원시 라틴 민족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리고 세부적인 혈통 상황을 보면, 지배계층이었던 부족의 추장이나 귀족이나 인도유럽어 계열 민족 비율이 높았지, 피지배계층인 노예나 부족원들은 토착 이베리아인과 페니키아 혈통 주민들이 많았다. 다만 언어 만큼은 혈통 상관없이 인도유럽어족 계통인 루시타니아어를 사용했으며, 켈트어파의 어휘나 문법의 영향을 많이 받은 언어였다. 그래도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갈리시아는 켈트인과 루시타니아인의 혼혈이 이루어진 유일한 지역이었다. 나중에는 게르만계 왕족과 귀족이 갈리시아 지역에서 이슬람 세력으로 부터 저항하면서 현재 유일하게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유럽인에 부합하는 외모가 도드라지는 지역이 바로 갈리시아이다.[13] 그 유명한 누만티아 전쟁도 바로 이 이베리아 켈트족들이 로마로 복속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14] 물론 다키아인들은 켈트가 아닌 트라키아인들에게서 파생된 민족으로 추정되며, 문화적으로는 트라키아와 스키타이의 영향이 더 짙다. 다만 켈트족과 부대끼면서 그들의 영향도 받았을 것이다.[15] 그런 이유로 오늘날 독일 지역인 게르마니아에 살있던 켈트 계통 주민들과 통역이 없이 서로 대화가 통했다고 한다. 출처: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 라인하르트 쉬메켈 지음/ 한국 게르만어 학회 옮김/ 푸른역사[16] 지도에서 북부 스코틀랜드에 침입한 것은 노르만족이 아니라 노르드인이다. 노르만족은 11세기에 와서야 남쪽 노르망디에서 올라온다.[17] 같은 영국 국가안에 있지만 잉글랜드가 프랑스와 축구 시합을 하면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프랑스를 응원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18] 스코틀랜드라는 국명의 기원이 되었던 스코트족 자체가 원래는 아일랜드에 거주하던 종족이었다. 아일랜드에서 발상한 스코트족이 브리튼 섬 북부로 건너가서 패권을 잡으면서 스코트족의 땅, 즉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특히 얼스터 지방)는 거리가 가까워서 교류가 많았다.[19] 위에서 말한 스코틀랜드계 개신교도 중 상당수가 북아일랜드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고, 아일랜드 독립 이후 남부 지역의 스코틀랜드계 개신교도들이 북부로 이주하였다.[20] 첨언하자면, 스코틀랜드의 정치적 중심지였던 로울랜드 스코트인들이 영국 왕의 비호를 받아 주로 얼스터로 이주하였고, 아일랜드인들 역시 가난한 조국을 떠나 발전한 잉글랜드나 스코틀랜드 로울랜드로 이주했다. 이들이 결성한 축구팀이 셀틱 FC. 그때까지 켈트족 풍습이 많이 남아 있던 하일랜드 주민들은 촌놈 취급당했다. 현재도 스코틀랜드는 로울랜드-하일랜드 간 지역 감정이 꽤 깊으며, 이때 아일랜드계 노동자들을 차별했던 과거로 인해 현대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보다 반인종차별적, 진보적 성향이 강한 편이다.[21] 예부터 파란색 천연안료의 재료로 쓰이는, 대청이라고 부르는 유럽쪽풀을 빻은 가루에 물과 함께 오줌을 섞어 발효시킨 것으로 출진 전에 몸에 워페인트를 그렸다.[22] 여담으로 B.C. 50년 이베리아 반도의 켈트족은 오줌으로 입을 헹궈 치아 미백효과를 냈다. 기사[23]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켈트족의 먼 후손인 근대~현대 스코틀랜드에선 킬트라는 치마를 입어 로마 등의 고대 지중해 복식의 전통을 본토보다 더 잘 지키며 보존하고 있다.[24] 투블럭과 비슷하게 앞머리만 남겨두고 옆, 뒷머리를 삭발한 헤어스타일을 했다.[25] 근대 이후에는 다른 이주민들도 들어왔기 때문에 프랑스인의 정체성이 생긴 시점의 근대 이전을 말하는 것이다.[26] '당신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으로 시작하는 축복문('Go n-éiri an bóthar leat')은 있기는 한데 오역이다. 그냥 대충 '좋은 여행이 되기를'이라는 말인데, 여기에 살이 더 붙여 켈트식 축복/아이리쉬 축복(기도)문이라는 형태로 여기저기에 떠돌고 있는 것이다.[27] 지금까지 알려진 지폐 중 가장 이른 것은 북송의 교자. 10-12세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