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666633>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제국군의 장성급 장교 | ||
{{{#!wiki style="margin:-0px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 야전원수 Генерал-фельдмаршал | |
육군 원수 | 명예 니콜라 1세 | 명예 카롤 1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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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대장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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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colcolor=#0039A6>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총사령관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Lavr Georgievich Kornilov | ||
출생 | 1870년 8월 18일 | |
러시아 제국 세미팔라틴스크주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군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現 카자흐스탄 동카자흐스탄주 외스케멘) | ||
사망 | 1918년 4월 13일 (향년 47세) | |
남러시아 정부 예카테리노다르 | ||
복무 | 러시아 제국 육군 | |
1892년 ~ 1917년 | ||
남러시아군 | ||
1917년 ~ 1918년 | ||
최종 계급 | 보병 대장 (러시아 제국 육군) | |
주요 참전 |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러시아 내전 | |
주요 서훈 |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2등급 성 스타니슬라우스 훈장 4등급 성 안나 훈장 2등급 성 안나 훈장 3등급 성 게오르기 훈장 3등급 성 게오르기 훈장 4등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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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외모는 전형적인 동아시아인 내지 유라시안으로 보이는데, 코르닐로프의 자세한 혈통은 불명이나 모계 유전으로 인한 폴란드인과 알타이인의 혼혈 또는 카자흐인으로 추정된다.
2. 생애
2.1. 러시아 제국의 군인, 코르닐로프
라브르 코르닐로프의 유년시절에 대해 알려진 정보는 적다. 확실한 점은 1870년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에서 시베리아 카자크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1885년 옴스크의 군사학교에 입학했고 1889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에 입학해 튀르케스탄 군관구에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 시기에 동투르키스탄,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 등 중앙아시아를 탐사하고 현지 주민들의 언어를 배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정보장교였고 당시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 제국이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던 와중임을 고려한다면 그의 탐사는 의미심장해진다.
러일전쟁 때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참모장으로 산데푸 전투, 묵던 전투에서 참전했고 용맹과 공적을 인정받아 훈장을 받고 대령으로 진급한다. 전후에는 중국에 군사무관으로 파견되었고 중국에서도 중국어를 배우고 각지를 탐험하며 이에대한 자세한 보고서를 본국에 보내기도 했다. 중국에서 귀환한 이후에는 몽골 서부와 카쉬가르 등 중국 국경 지대에서 중-러 국경에서 근무했고 이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사단장으로 주둔하는 등 거의 대부분의 생애를 아시아 방면에서 거쳐왔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는 최전선으로 보내져 갈리치아, 카르파티아 방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하게 되었고 이듬해에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후퇴하던 러시아 본대에서 낙오한 그의 사단은 오헝 군에 포위되었고 그도 사단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포로로서의 대우는 신사적이었으며 참모총장인 회첸도르프 원수와의 개인적인 면담을 가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1916년 코르닐로프는 자력으로 탈출해 업무에 복귀했다.
2.2. 러시아 공화국의 반역자, 코르닐로프
코르닐로프와 러시아군 참모진[1] |
혼란 끝에 총리와 전쟁부 장관을 겸직하게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역시 전쟁을 지속하는 길을 택했고 명망이 높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7월 초 렘베르크 방면으로 케렌스키 공세가 개시되었다. 공세 초기는 성공적이었지만 독일군의 저항과 병사들의 항명으로 돌격이 둔화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의 역습으로 공세 시작지점에서 240km를 후퇴하며 전쟁 이전의 국경보다도 더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곧이어 발트에서 독일이 상륙전을 감행하며 리가를 빼앗기며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상실했고 페트로그라드마저 위협받게 되었다. 이 추태라고 할 수도 있을 참패 동안 그나마 승리를 거두었던 것은 코르닐로프의 부대 뿐이었고 패전을 책임지고 물러난 브루실로프의 후임으로 코르닐로프가 총사령관이 되었다.
케렌스키 공세가 실패로 돌아가는 동안 국내 상황도 더욱 악화되어 7월 시위라고 하는 대규모 시위가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시위자들은 무력으로라도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할 것을 요구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볼셰비키 지도부는 우물쭈물했고 임시정부는 시위가 잦아들자 볼셰비키들을 원흉으로 지목했다. 트로츠키, 카메네프 등은 수감되었고 레닌은 가발을 쓰고 핀란드로 도주해야만 했다.
케렌스키의 정책은 이렇게 민중들에게 환영받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보수파의 마음을 샀던 것도 아니라서 군부나 구 귀족, 자본가 등의 계층은 그를 경원시했고 특히 케렌스키 공세의 대실패로 군부에서 케렌스키의 이미지는 아주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코르닐로프는 케렌스키에게 '후방에서의 사형 부활', '지휘관 권한 회복', '병사위원회 권한 제한' 등의 조건을 내걸었고 군부를 다독여야했던 케렌스키는 이를 수용했다. 브루실로프도 이런 조건을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코르닐로프의 기세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일련의 사건들로 자신의 세력이 강화되었고 케렌스키의 정국 주도권이 한계에 달했다고 판단한 코르닐로프는 9월 10일 드디어 케렌스키의 명령을 사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 쿠데타의 구호는 질서의 회복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와해당한 상태였던 소비에트 정부의 완전 폐지를 내세웠고 그 목표는 페트로그라드였다. 코르닐로프의 쿠데타에는 코르닐로프 개인의 사상, 보수파의 불만 뿐 아니라 영국의 개입이 있었다. 영국 주재무관이 코르닐로프와 동행했으며 러시아군 군복으로 갈아입은 영국인 부대가 쿠데타 병력에 합류했다.
쿠데타는 케렌스키의 이름을 빌어 일어났지만 그 케렌스키는 오히려 쿠데타를 예상하지 못했고 소비에트에 손을 내밀었다. 소비에트와의 협상 과정에서는 민심을 얻기 위해 트로츠키 등을 석방하고 레닌의 수배령을 철회했다. 또 노동자들에게 무기를 나눠주어 도시를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임시정부나 케렌스키가 아닌 노동자 스스로를 위하여 코르닐로프를 막아낼 것을 주장했다.
결국 거대하게 진행될 듯하던 쿠데타는 볼셰비키의 구호에 동조한 철도 노조원들이 병사들을 태운 열차를 멈춰세우거나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면서 허무하게 끝나버렸고 코르닐로프를 비롯한 쿠데타 주동자들은 수감되었다. 군의 총사령관직도 케렌스키가 겸직하게 되었고 군부와 케렌스키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기회를 잡았다.
2.3. 소비에트 러시아의 적, 코르닐로프
11월 7일(구력 10월 25일) 레닌의 지시에 따라 볼셰비키의 무장조직인 적위대가 페트로그라드를 장악했다. 적위대는 코르닐로프 쿠데타를 막기 위해 나누어준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고 페트로그라드에서 케렌스키의 편에 선 세력은 거의 없었기에 10월 혁명 자체는 거의 무혈로 볼셰비키가 승리했다. 이것으로 러시아 공화국이 멸망하고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다.한편 코르닐로프는 비호프(오늘날 벨라루스의 비하우)의 감옥에 수감되었지만 감옥을 지키던 군인들이 대부분 코르닐로프 지지자라 11월 19일 쉽게 탈옥할 수 있었다. 탈옥한 이후에는 반볼셰비키세력이 한창 결성되던 돈 지방으로 갔고 그곳에서 백군 남러시아군을 창설했다.
의용군의 첫 거점은 로스토프나도누 근교의 노보체르크카스크로 이곳은 돈 카자크의 거점이기도 했다. 의용군은 코사크들이 자신들에게 합류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양측이 붉은 군대에 반대한다는 것 정도를 제외한다면 접점이 별로 없었기에 세모으기에는 지지부진했다. (의용군 창설시 병력이 3000명이었는데 이듬해 1월의 병력이 4000명정도였다.) 대도시였던 로스토프를 함락하는데 실패하고 북쪽에서 붉은 군대가 남하하기 시작하자 의용군은 재정비를 위해 남쪽으로 거점을 옮기기로 하고 1918년 2월 13일 출발했다.
남쪽으로의 이동은 얼음행진 혹은 1차 쿠반 전역이라고 명명되었다. 볼셰비키로부터의 피난에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들도 같이 이동하며 행렬이 길어졌다. 그러나 이것이 여러 곳에 소문이 나고 합류하는 인원이 생기면서 오히려 병력은 6000명까지 올라갔다.
남러시아군은 볼셰비키를 피해 남부의 주요 도시였던 예카테리노다르(오늘날의 크라스노다르)까지 내려갔지만 그 곳 역시 볼셰비키들의 장악이 끝난 곳이었다. 4월 10일 코르닐로프의 명령에 도시의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수비병력은 공격병력의 두 배였고 지상 병력과, 장갑차, 노획한 해군 함선까지 이용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도시의 공략은 잘 진행되지 않았다.
4월 13일 코르닐로프는 도시 외곽의 마을의 농가에서 작전회의를 하고 있었고 그 위로 볼셰비키 측의 포격이 떨어지며 그대로 허무하게 사망했다. 정말 운이 없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집에서 포격을 입은 곳이 코르닐로프가 있던 방밖에는 없었고 사망한 사람도 코르닐로프 한 명 밖에 없었다. 그의 시신은 마을에 묻혔지만 며칠 후 볼셰비키가 그 마을을 탈환하며 무덤에서 파헤쳐서 쓰레기 더미 위에 던져놨다. 남러시아군의 지휘는 안톤 데니킨이 그의 뒤를 이어 맡게 되었고 백군의 주요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레닌은 "이제 내전은 종결되었다."라고 선언했지만 내전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3. 매체에서
영화 제독의 연인에서도 짦게 등장하는데 2월 혁명 이후 혼란에 빠진 러시아 공화국의 상황을 두고 콜차크와 의논하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개봉판이 아닌 TV 감독판 시리즈 4화에서만 등장한다. 감독이 굳이 개봉판에는 씬을 삽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아예 삭제시킨듯. 배우는 러시아 배우 겸 예술가인 유리 이츠코프(Юрий Ицков)가 맡았다.
Hearts of Iron 시리즈의 모드인 카이저라이히에서는 예카테리노다르 공략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남아 백군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 공화국의 원수가 되어 등장한다. 1936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두마(러시아 하원)의장이 암살[3] 당하고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는데 보리스 사빈코프 대통령으로 계속 진행하려면 코르닐로프에게 지원요청하는 선택지를 골라야 한다. 다른 선택지를 고르면 사빈코프도 암살당하거나 케렌스키 살인 혐의로 체포 당한다. 또 사빈코프는 검과 면류관을 상징으로 쓰고 있는데, 코르닐로프의 1차 쿠반 전역(빙상 행진) 메달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레드 플러드에서도 등장하는데 실제 카자흐스탄 외스케멘 출신인지라 러시아 군벌 세력들 중 하나인 대초원 총독부의 수장으로 등장한다.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끄는 제정 러시아가 드로즈돕스키의 군사정변에 휩싸이면 자연스럽게 대초원 총독부가 독립하게 되는데 그때 본격적으로 플레이 할 수가 있다. 제작진이 초상화를 코르닐로프 충격연대 복장으로 편집한건 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