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2:12:31

한대화/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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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4.1. 2013년4.2. 2014년

1.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 시절

1997년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현역생활을 마감한 뒤 곧바로 모교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해 2003년까지 감독으로 대학 야구 선수들을 지도했었다. 프로 출신 1호 대학 감독[1]이었기 때문에 화제가 되었다. 게다가 당시 나이가 만 37세로 상당히 젊은 나이였다.[2]

동국대 감독 재임 시절 프로 출신 선수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대표적으로 박한이, 강귀태, 서승화, 이대환, 박정권, 유한준, 박희수,[3] 송광민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흑역사로는 2000년에 체육특기생 입학과 관련, 학부모로부터 수천만원을 받은 혐의로 약식기소가 되었다는 어두운 이면이 존재한다. 링크 다만 처벌을 받았다면 자리 보전은 커녕 야구계에서 퇴출됐을 것이고[4], 이후 별다른 결과가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면 정식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파일:attachment/한대화/한대화2.jpg

참고로 2001년 8월 당시 선동열과 같이 나와 시구와 시타를 하기도 했다.

2. 삼성 라이온즈 코치 시절

파일:external/spnimage.edaily.co.kr/PP09092400100.jpg
삼성 라이온즈 No.86
한대화(韓大化)

2003년 시즌 종료 후, 김응용 감독 임기 막바지 즈음 선동열 수석코치를 위주로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영입되었다.[5] 2004년 한 해는 1군 타격코치로 활동했고[6] 2005년 시즌을 앞두고 김응용 감독이 구단 사장으로 승진한 뒤 선동열 수석코치가 삼성 라이온즈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자 그를 보좌하는 수석코치로 보직을 변경했다.

이 시절 동국대 제자였던 박한이를 만나 재회했다. 그리고 2009년 첫 FA 때도 상담을 해줬다고 한다.

다만 한대화가 삼성 코칭스태프로 합류하고 삼성 타선이 물타선으로 변해버리면서 이 당시 코치로써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사실, 한대화가 오기 전인 2003년까지 삼성은 이승엽, 마해영, 양준혁, 브리또 등 장타자들을 집중 배치해 타자 친화적인 홈 구장의 이점을 활용, 공격 위주의 뻥야구를 하며 약한 투수력을 커버하였다. 하지만 선동열-한대화 체제를 거치면서 장타 위주의 공격야구 대신 1점 내고 한 점도 안 내주며 최대한 투수진을 쥐어짜내 승리하는 작전야구로 스타일이 바뀌었고, 덕분에 2005년~2006년 삼성이 2년 연속 우승했음에도 삼성 타선은 최약체라는 평가를 듣기 일쑤였다.

물론 나름 변명의 여지는 있다. 이마양의 해체 후 김응용과 선동열 시기 전력누수가 꽤 있었다. 당장 리드오프를 맡던 강동우는 트레이드, 이승엽은 일본으로 진출, 마해영은 FA 자격을 얻어 KIA로 이적, 틸슨 브리또는 무릎 부상으로 재계약이 불발되며 전력 누수가 발생했다. 거기에 FA로 60억을 줘가며 데려온 심정수는 4년 계약 중 2년은 위력적이었으나 2년을 부상으로 날리며 은퇴하고 말았다. 같이 데려온 박진만 역시 무릎 부상 여파로 인해 2007년 이후 타격이 사실상 죽어버렸고, 김한수, 김종훈 등은 노쇠화를 피하지 못하며 은퇴했다. 그나마 양준혁은 꾸준했지만 선동열 시기 갈등을 비롯해 성적에 기복이 좀 있었다. 즉 빠른 79년생으로 서른을 코앞에 둔 박한이가 타자 주전 중 막내였을 정도로 삼성 타선은 상당히 노쇠화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타선 리빌딩을 해야했다. 그렇다고 유망주들만 봐도 발 빠른 멸치들만 뽑아댄 데다가 이들이 즉전감으로 잘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당시 감독은 투수진을 최대한 쥐어짜내서 지키는 야구, 스몰볼을 즐긴 선동열이였기에 가시적인 성과나 나오긴 힘들었다. 게다가 이 시기 1군 메인 타격코치는 박흥식이었지, 한대화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7]

그러나 후에 강봉규, 신명철이 20-20을 찍는 등 활약했고, 대타자가 되어가는 박석민-최형우-채태인 타선을 구축한다.[8]

3.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한화 감독 시절 공식 응원가
한화 이글스 No.80
한대화(韓大化)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10 한화 이글스 133 49 82 2 8위 -
2011 133 59 72 2 6위 -
2012 105 39 64 2 8위[9] -
총계 371 147 218 6 ­

3.1.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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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9월 24일, 계약이 만료된 김인식 감독의 뒤를 이어 한화 이글스의 감독으로 내정되었다. 비록 빙그레 혹은 한화에서 선수생활은 하지 않았으나 구단 역사상 첫 대전광역시 태생 감독이다 보니 당시 지역 내에선 기대가 컸었다.[10]

그러나 2009 시즌이 종료 직후 팀의 주축 선수였던 김태균이범호가 모두 일본프로야구로 진출해버렸고, 마무리투수였던 브래드 토마스마저 재계약에 실패하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야말로 차포 떼고 시작하는 격이었다.

불암콩콩코믹스에서는 이게 리빌딩이냐 재창단이지!!라는 대사까지... 그리고 왠지 시즌이 진행될수록 만화 속에서 자꾸 개그 캐릭터가 되어가고 있다. 세이콘에 의해 지옥으로 보내질 때 했던 대사가 음…, 차라리 지옥이 나을 수도 있지.실제로도 인터뷰 내용을 살펴보면 위트있고 재밌는 답변이 많다. 주로 암울한 팀 사정을 빗댄 자학개그지만. 한술 더 떠 남의 팀 트레이드때마다 "우리도 선수 필요한데 선수 좀 주세요." 하면서 구걸개그까지 시전한다.

별명으로 대전간디, 대전호구, 돌대화가 추가되었다. 보다시피 하나같이 안 좋은 의미의 별명들이다.

3.2.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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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7월 23일 올스타전에서 프로야구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10에 유일한 현역 1군 감독으로 선정되었다.

2011년 들어 한화가 작년과 같이 어이없이 무너지지 않으며 탈꼴찌에도 성공하고 5월에는 SK 와이번스와의 3연전에서 야신 김성근 감독과의 지략싸움에서까지 승리를 거두며 와이번스를 터는 등 선전하자 팬들 사이에서 새로이 나온 별명은 야왕이었다. 한대화 본인은 야왕이란 별명을 아들에게 전해 들었고, 간혹 야황(野皇)으로 불리기도 했다.

3.3.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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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lh6.googleusercontent.com/%25EB%258F%258C%25EB%258C%2580%25ED%2599%2594.jpg

땡깡왕 돌대화.

시즌 개막 전에는 선수들이 감독의 재계약을 원한다는 기사가 나올 정도로 언론과 팬들이 호의적이었다. 2011 시즌에 끈기를 보여주며 6위에 올랐고 한대화의 작전 야구가 잘 통하기도 했으니 기대가 있을 만했다. 거기다가 김태균박찬호가 팀에 합류하면서 올해는 정말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이 보이기도... 희망과 기대에 찬 2012 시즌이 개막, 그리고 한화는 멸망했다.

팀의 총체적인 부진도 그렇고 본인의 용병술에도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아 재계약을 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럼에도 중도 퇴진은 없을 것이라고. 구단은 한대화 라인의 코치들을 2군으로 보내고 사실상 경고를 했고, 야인이던 김용달을 1군 타격코치로 영입한다.

하지만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한화의 부진은 계속되었고, 결국 9월도 안 됐는데 한화는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됐다. 이에 대한 대가로 한화 프론트는 태풍 볼라벤이 상륙하기 전 밤이었던 8월 27일 한대화 감독을 전격 경질하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한대화 감독의 후임으로 그의 스승이었던 김응용 전 해태/삼성 감독이 선임되었다.

3.4. 총평

부임 당시만 해도 한대화가 한화의 감독으로 부임할 것으로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당시 언론이나 팬 모두 김인식 다음 한화 감독에게 펼쳐진 것은 고난과 욕의 행군 뿐이라고 한마음 한뜻으로 말하던 상태. 심지어 앞으로 감독이 할 수 있는 것은 구단의 총알받이 역할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즉, 누가 한화 감독이 되더라도 자신의 경력만 망칠 게 뻔한 상태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전까지 한화 구단과 별 연관성이 없었던 한대화가 감독에 임명된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등장이었고, 한화 감독직을 수락한 한대화는 대인배라고 말하는 사람조차 있었다.[11][12] 이 때문에 감독 부임 초창기에는 웬만하면 까지 말자는 공감대가 은연중에 형성되어 있었다. 즉 반쯤 까방권을 획득한 상태로, 2010년 그의 행적이나 팀 성적에 대해선 어느정도 눈 감아 주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뜬금없이 2011년 야왕이라 불리며 야구 관련 커뮤니티에서 스타로 등극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 2010년에 비해 한대화가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거나 한화의 사정이 객관적으로 나아진 것은 아니었고, 그야말로 우주의 기운이 몰린, 전반적으로 운이 좋았던 시즌이었다. 사실 세이버메트리션 사이에서는 2011시즌 한화가 6위를 달성한 것이 대한민국 야구 역사상 최고 미스테리일 정도였다.[13] 이런 상황에서, 2012년에는 박찬호, 송신영을 영입하고 김태균까지 복귀하면서 갑작스럽게 한화도 4강이 가능하다는 설레발이 등장한다. 결국 이전 해의 야왕 신드롬과 그 해의 전력보강 설레발로 어느 정도 성적은 내야 되지 않겠느냐는 팬들이 늘어났으나, 결과는 망했어요였다. 이 과정에서 한대화가 보여 준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인간성 좋고 유머감각 있기로 소문난 사람이라서 기자들 상대로 드립치는 능력만은 전임 감독 정도로 탁월했지만 그마저도 성적이 워낙 좋지 않자 기자들을 상대하는 시간이 줄어들면서 곧 잊히고 말았다. 그 밖에 불펜 운용, 2진급 선수 발굴 및 활용, 작전 수행 능력, 어려운 상황에서의 리더십 등등은 평범 혹은 평범 이하였다. 특히 지나친 좌우놀이나 1루에 주자가 나갈 시 자동 번트, 히트 앤드 런[14] 등 유치원생도 예상가능한 작전을 즐겨 썼는데, 한화 선수들은 이마저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신통한 모습을 보이며 번번이 실패. 돌 같은 감독에 돌 같은 선수가 무엇인지를 팬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었다.

특히 2012년은 각 팀의 전력평준화 현상이 유독 심한 해로 6개 팀이 옹기종기 모여 비슷한 성적을 찍어준 시즌인데, 유독 한화만 저 멀리 아래쪽에 머물러 있으니 팬들로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로 인해 2012년 중반기가 되자 부임 당시 획득한 까방권이나 2011년 야왕놀이 따위는 모두 잊고 소수의 냉정한 시각으로 지켜보던 팬들을 제외하고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감독 경질을 외치게 된다. 심지어 몇몇 팬들은 야왕이라고 불렀던 것을 창피하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야왕이란 별명도 '야병신' 이라며 까는 용도로 전락했다.

결국 부임 당시 '누가 와도 망함\'이라고 사람들이 예상한 그대로의 결과였다. 즉, 누가 감독으로 오더라도 현 한화 이글스의 성적에 큰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다만 한대화는 리빌딩이란 최소한의 목표도 없이 성적을 내기 위해 타팀 30대 노장선수 영입에 유망주를 다 퍼다 주고[15]도 성적이 똥망했기에 까여야 마땅하다. 리빌딩은 고사하고 암흑기만 연장시킨 꼴이었으며 그야말로 잃어버린 3년이 되었다.

그래도 업적을 굳이 꼽아 보자면 그의 재임 기간에 최진행, 김혁민, 안승민, 오선진, 송창식 등의 성장이 있었다는 것 정도를 꼽아 볼 수 있겠다. 2009년 한화 방출자 명단에 좌완투수 박정진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여기서 박정진을 구제한 사람이 한대화로 밝혀졌다. 좌완이라 살아남았다라고 하면 할 말 없지만, 2017 시즌까지의 박정진의 존재를 감안하자면 그래도 업적이라 할 만하다. 만일 2010 시즌 이후 박정진마저 없었다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 혹자는 2011년에 탈꼴찌에 성공한 것 자체만으로도 6년 연속 꼴찌라는 불명예를 피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의견도 있고, 스프링캠프 후반기 연습구장 구해달라는 감독의 요구를 무시한 채 감독이 직접 연습구장을 마련하려고 뛰어다니게 한 프런트의 삽질을 감독 한명으로 덮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다.[16]

2015 시즌 후 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재평가를 받고 있다. 그저 당시 프런트가 역사상 최악이었고 선수 복을 누리지 못했을 뿐, 만약에 한대화에게 정근우, 이용규, 권혁, 배영수, 송은범, 윌린 로사리오, 제라드 호잉, 최재훈, 정우람, 박상원, 송광민[17]이 있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났을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한대화 감독도 2012 시즌 전에 김태균과 송신영, 박찬호를 지원받았으니 무능하다고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송신영이 먹튀가 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팀을 떠났다.[18]박찬호도 나이 때문인지 크게 도움이 되는 선수는 아니었고[19] 애초에 선수인생 마지막을 고향에서 보낸다는 의미로 영입한 면이 더 컸다.

무엇보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한화의 센터라인은 정근우, 이용규, 하주석, 최재훈이 오기 전까지 답이 없는 한화의 수비를 만드는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저 넷이 뛰던 때엔 한화의 센터라인 약점이 사라진 상태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정근우는 이글스 역대 2루수 WAR 순위를 석권했고[20], 이용규는 부상으로 한 시즌에 한 달은 빠지고 아예 한 시즌은 항명 때문에 출장정지 징계를 받는 대형사고도 쳤지만 타격이나 수비면에서는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애초 이용규 이전의 한화의 중견수는 제이 데이비스 이후로 땜빵으로만 버텨오던 포지션이었으니. 하주석은 아직은 기복도 심하고 부족한 면이 보여도 수비는 확실히 탄탄했으며 타격 역시 펀치력을 갖고 있었다. 이에 반해 한대화 감독 시절의 한화는 장타력 있는 타자가 없어서 손지환, 김용호, 심지어는 포수 신경현까지 클린업을 들어가기도 했으며 전현태가 6번을 치는 수준이었으니 전역 후의 하주석 정도면 꽤 괜찮은 자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최재훈은 애초에 두산에서도 아깝다고 했던 자원이고, 한화에 합류하자마자 포벤저스(조인성, 차일목, 정범모, 허도환)를 정리해버리고 2020 시즌엔 3할까지 쳐내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위의 저 선수들이 가세하기 전과 후는 확실히 타격이나 수비에서 큰 차이를 보였다. 역으로 보면 한대화 감독과 비교대상으로 거론되는 그 사람은 저 중 호잉과 최재훈, 박상원을 제외하고 전부 갖고 있었음에도 그런 성적을 낸 것이다.

2012년 한화 이글스의 성적은 분명 감독이 경질될만한 실패한 시즌이었다. 그러나 이는 감독 잘못이라기보다는, 앞서 말했듯이 이미 늙어버린 박찬호와 일본에서 돌아온 김태균, FA 선수인 송신영 셋만의 영입으로 탈꼴찌를 넘어 상위권이 가능하리라고 착각했던 프런트와 팬들의 설레발이 가장 큰 실패 원인이었다. 2012 시즌의 한화와 한대화에 대해서 4강 이상을 노려볼 만한 전력으로 일관되게 8위를 함으로써 팬들의 기대를 개발살내버렸을 뿐 아니라 선수와 팬 모두에게 한화는 답이 없다는 패배근성의 그림자를 확실하게 드리운 역대 최악의 시즌이라는 의견도 있는데, 앞서도 말했듯이 애초 한화의 전력은 4강권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2012 시즌 직전 자체 전력평가에서 한대화 감독 이하 코칭스탭들은 불안한 센터라인 수비(특히 포수)와 불확실한 선발 로테이션을 근거로 들어 대략 6~7위를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야구 모르는 프런트와 모기업의 높으신 분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발끈하면서 작년에 공동 6위였고, 올해는 박찬호와 김태균, 송신영이 가세했으니 4강은 기본이고, 가급적 우승을 목표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 한다.

종합적으로 당시 한화가 역대 최악의 전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선수들의 기본기 부족과 더불어 윈나우 스탠스를 취하는 바람에 전반적인 평가는 부정적이다. 그나마 2011년 6위를 찍으며 꼴찌는 피해 6년 연속 꼴찌라는 대기록은 막았다는 점이 한대화의 유일한 감독으로써 호평 요소이다. 특히 이후 한화가 전폭적인 투자를 했음에도 2015년이 돼서야 겨우 6위를 찍어본 점 때문에 더욱 평이 갈리게 되었다. 부정적으로 평하는 쪽은 2011년의 성적은 우연히 좋은 것이고 그 전 및 그 후에는 본 실력대로 8위를 찍은 것이라고 본다. 근거로는 2011년의 아무 이유없이 높은 대타성공률이나 4할도 채 되지 않았던 낮은 피타고리안 승률 등을 꼽는다. 긍정적으로 평하는 쪽은 아무리 운빨이더라도 그게 1년이나 지속될 리 없다고 보는 측이다. 밖에선 알 수 없지만 뭔가 잘 운용했기에 좋은 성적이 나온 것이지 1년 내내 운이 좋겠냐는 논리. 또한 만약 운빨이라 쳐도 어쨌든 888899라는 전무후무한 비밀번호를 찍을 뻔한 걸 막았다는 점만은 좋게 평가한다.

2016년 들어서는 재평가의 움직임이 많이 보인다. 지금의 선수층을 가지고 8~9위 싸움을 하는 김성근 감독과 비교되면서, 전근표를 4번으로 쓰던 시절에 저 정도면 훌륭하다라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으며, 김성근이 경질당하기는커녕 한화 이글스에서 사실상 1인자로 군림함과 동시에 선수 혹사는 멈출 줄을 모르니, 이쯤 되면 한화 이글스 구단 사장직을 맡기자는 목소리가 간간히 나올 정도다.[21]

일부 팬들은 지금보다 안 좋은 팀 상황에서 어떻게 6위를 했는지에 대해 재평가를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결론은 2011 시즌이 플루크 시즌이라는 것이고, 그러한 플루크는 기아 2군에서 그대로 밑천이 드러났다. 하지만 한대화의 감독 시절의 업적이 2015년 김성근 감독 부임 이후 엄청난 혹사 논란과 육성 문제까지 겹치면서 재평가받고 있다. 최진행 발굴, 박정진 등용, 김경언 트레이드부터 시작해서 조인성 트레이드의 시발점이 되었던 이대수 영입에 없는 선수로 6위를 했다. 그 당시 2015년만큼의 지원이 있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한화 팬들이 한입을 모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대급 지원을 받은 김성근 감독이 끝없는 추락을 하기 시작하자 한대화는 진정한 야왕이었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2018년에 우주의 기운이 한화로 모인 덕에 비밀번호는 한 번 끊었으나 그 후 베테랑과의 불화와 멍청한 경기운용, 선수기용으로 좋지 못한 성적을 기록한 한용덕의 이면이 드러나면서 '차라리 2015년에 망했다 치고 한대화에 기회를 한 번 더 줬으면 플레이오프까진 갔겠다'며 무한으로 재평가받는 중이다. 한대화가 감독이었던 시절 한화 이글스의 라인업을 보자. 눈물만 나온다.

여담으로 한대화 감독 재임시기엔 선수 - 감독간의 위계 없이 사이가 굉장히 편안했다고 한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를 한대화가 밝히기로는 어느날 갑자기 선수 와이프에게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부부싸움을 했다며 한 감독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감독으로서 이런 고민도 들어줘야 하나 생각들었지만 그 정도로 선수들에게 신뢰받고 있단 생각에 뿌듯했다고 한다.[22] 하지만 이후 한대화가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자기 스승[23]그 후임자가 팀을 맡던 시절엔 선수들이 굉장히 위축되고 감독과 위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선수들이 도통 감독에게 다가가기 어려워져 버렸다고 한다.

김성근 감독 이후 한용덕 감독이 10년에 걸친 비밀번호를 끊으면서 명장 소릴 들었으나 다음해 베테랑과의 갈등이 계속 드러다더니 준수한 외국인 타자와 10승 투수 2명을 가지고도 9위를 찍었고, 2020년에는 구단 최다연패인 14연패를 찍고 사퇴하면서 '한대화에게 배스나 션 헨 같은 선수말고 서폴드같은 선수라도 있었으면 중위권은 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4. KIA 타이거즈 2군 감독, 수석코치 시절

KIA 타이거즈 No.89
한대화(韓大化)

파일:external/pbs.twimg.com/BCkbQoQCYAAeV_y.jpg

2013년, KIA 타이거즈 2군 총괄코치라는 호칭으로 타이거즈 공식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24]

2012년 10월 24일, KIA 타이거즈가 2군 감독으로 한대화를 선임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선동열이 삼성 감독 시절 수코를 역임한 바 있었기 때문에 선동열과의 인맥으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잘리자마자 다시 부활했다.

4.1. 2013년

2012년 시즌 후 KIA가 본격적으로 2군 물갈이를 시작하면서, 2013년에는 2군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2군에 다녀온 안치홍이 컨디션을 회복하고, 무엇보다도 김주형이 살아나면서(!) KIA 팬덤에서 야왕매직은 실존한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즌이 지나면서 여론이 좋지 않게 흘러갔다. 퓨쳐스리그 남부리그 최하위권인 건 그렇다 치더라도, 타자진이나 투수진 모두 성적이 좋은 편이 아니었으며 무엇보다도 투수 전향 1년차 김윤동이 과부하에 걸려 재활군으로 가면서 선수 발굴은커녕 없는 자원마저 갉아먹냐며 비난을 들었다. 당연히 KIA 타이거즈 갤러리에서도 돌대화라고 까였다. 어차피 선동열 사단인 점도 있고, 선동열 감독이 경질된다 하더라도 후임 감독으로 선임될 가능성은 희박해보인다.

4.2. 2014년

2013년 10월 5일 이순철 수석코치가 경질되면서 후임 수석코치로 거론되기 시작했고, 10월 17일에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이후 2014 시즌 동안 선동열 감독을 보좌했고, 선동열이 자진 사퇴하고 김기태 신임 감독이 부임하면서 같이 정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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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야구협회와 KBO의 갈등관계 때문에 프로 출신들이 아마야구 지도자를 못 하도록 규정이 있었다. 그래서 인스트럭터 같은 명목으로 활동해야 했는데 한대화는 이 규정이 없어진 이후에 정식으로 취임한다.[2] 프로야구 초창기에도 나이가 30이 되었으면, 바로 은퇴 또는 코치로 들어가는 시기였다.[3] 한대화의 대전고-동국대 직계 후배로 박희수에게 직접 동국대 진학을 제안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박희수는 대전고 시절 부상 여파로 인해 동국대 입학 직후 팔꿈치 수술을 받아 재활하느라 한대화가 감독으로 있던 시절에는 거의 등판하지 못했고, 대학 리그에서 제대로 활약하기 시작한 건 한대화가 삼성 코치로 떠난 2004년 이후다.[4] 롯데 자이언츠 감독 임기가 끝나고 실형을 살았던 양승호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인맥이나 독립리그 지도자 등의 활동에서 볼 수 있듯이 야구계와는 완전히 인연이 끊긴 것은 아니지만 입시비리를 저지른 지도자인지라 프로야구 감독이나 아마야구 감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5] 이 당시 김응용 감독을 필두로 해서 선동열 수석코치 겸 투수코치, 한대화 타격코치, 이만수 배터리코치를 영입해 초호화 코칭스태프를 꾸릴 계획이 있었지만 앞서 영입에 성공한 선동열, 한대화와는 다르게 이만수는 삼성의 프랜차이즈이자 레전드였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부름을 받지 못했다. 자세한 건 이만수/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6] 2004년 삼성에는 한대화를 포함해 김종모, 박흥식까지 3명의 타격코치가 1군에 있었다. 이 중에서 한대화 코치 혼자서만 온전한 타격코치 임무를 수행했으며 김종모 코치는 해태 시절처럼 외야수비코치 겸임, 박흥식 코치는 1루 주루코치를 겸임했다. 2004년 시즌 종료 후 김응용 감독이 물러나고 선동열 수석코치가 감독으로 승진하는 과정에서 한대화는 수석코치로 영전하는 데 성공했지만 김응용의 직계로 평가받던 김종모 코치는 해임됐고, 박흥식 코치는 두산에서 김평호 주루코치가 새롭게 부임하면서 타격코치만 전담하게 되었다.[7] 물론 2007년부터 삼성의 1군 타격코치가 이종두로 교체된 뒤에도 타격이 영 시원치 않았던 데다 당시 수석코치면서 나름대로 팀 타격에 관여를 꽤나 했던 한대화가 욕을 안 먹을 수가 없었다.[8] 다만 강봉규-신명철 듀오는 당시 선동열 감독의 주니치 인맥이었던 나가시마 타격코치의 조언 덕이 컸고, 이후 이들이 이만큼 타격을 보여주지 못해 사실상 플루크 시즌으로 본다. 또 채최박의 결성에는 당시 사장이였던 김응용의 입김이 있었다는 후문이었다.[9] 시즌 도중 경질.[10] 당시 삼성에서는 2군에 있던 이종두, 강성우, 하나마스 코지 3명의 코치가 한대화 감독을 따라 각각 1군 수석, 1군 배터리, 1규 트레이닝 코치로 동행했다. 사실상 김인식 사단(유지훤, 우경하, 김호)이 빠지고 빈 자리를 채운 셈이었다.[11] 하지만 한대화가 대전 출신이고, 선수 때도 늘 고향 팀에서 뛰고 싶다고 트레이드 파동까지 일으킨 사람이다 보니 고향 팀 감독을 하는 것이 한대화 입장에서는 꽤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선수 시절 입어보고 싶었던 고향 팀 유니폼을 감독이 되어 입는데 성공했으니 그만큼 고향 대전으로 금의환향하는 기분도 들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성적과는 별개로 프로 팀 감독 출신이라는 이력 하나 추가하면 팀을 심각하게 망가뜨리거나 엄청난 사건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은 야구계에서 먹고살 걱정은 안해도 된다.[12] 다만, 감독으로서 성적이 좋지 못하면 타팀으로서 감독 및 코치로서 부임이 쉽지는 않고 최근 추세는 우승을 하더라도 이후 성적이 부진하면 잔여계약이 남아 있더라도 과감히 경질이 이루어지는 만큼 감독으로서의 성과 및 성적이 좋지 않으면 지도자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기가 힘든 게 사실이다. 대표적인 예로 우승을 했고 이후 잔여계약기간이 남았음에도 성적부진으로 경질이 된 이동욱, 김원형이 있다.[13] 실제로 팀 득실점으로만 승률을 예측하는 피타고리안 승률은 채 4할도 되지 않는다.[14] 팀 타자들 주루 능력이 시원찮으니 그랬겠지만, 매번 히트 앤드 런을 거는 것만으로도 문제지만 볼카운트 상관 없이 작전을 걸어댄 것이 더 큰 문제였다. 히트 앤드 런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작전은 타자에게 볼카운트가 불리할 땐 매우 위험한 작전이 되어버린다.[15] 34살의 장성호를 데려오려고 27살의 안영명을 KIA로 넘긴 것이 대표적이다.[16] 구대성 은퇴식, 송광민 시즌 중 현역 입대 영장, 한대화 경질 등등 이 당시 한화 프런트는 심히 맛이 가 있었다.[17] 몇 개월 쓰지도 못하고 군대로 보냈고, 전역 후에는 3할만 3번을 쳤으니 여기에 포함시킨다.[18] 물론 송신영이 기록한 성적에서 알겠지만 이닝을 꾸준히 먹으면서 1군에서 던질 수 있는 계투요원이지만 4점대 평균자책점을 찍는 평범한 선수였던지라 호성적을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며 나이도 37살로 많은 편이었다.[19] 성적에서 볼 수 있듯이 제법 기복도 심했고 마지막 5경기는 아예 승을 거두지 못했다.[20] 정근우를 제외한 최고순위에 해당하는 5위인 정원석이 수비가 구멍이었던 걸 감안하면 그냥 이글스 2루의 역사를 바꿨다고 해도 무방한 수준이다.[21] 선수 시절 김성근 감독과 철전지 원수관계였던 박종훈 단장을 내정했으나, 팬들의 반응은 허수아비가 될 거 뻔하다는 불신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는데 결과적으론 김성근 감독이 박종훈 단장과의 갈등으로 자진사퇴해버렸으니 기우였던 셈이었다.[22] 그만큼 선수들과 감독간의 신뢰감이 돈독했었다.[23] 일단 김응용 감독의 야구관이 선수들 개개인과 그리 친밀해하는 것을 꺼리는 스타일이다. 불필요한 오해를 만들 수 있기 때문. 더군다나 당시 코치진들보다도 1세대 전의 인물인지라 코치진들도 어려워하는 감독인데 선수들은 당연히 더 어려워 했다.[24] 조범현 체제 이후 KIA 타이거즈는 다른 구단들과는 달리 1군 감독이 1군은 물론 2군, 3군까지 직접 총괄하는 형식이고 선동열 감독 부임 이후 그러한 경향이 더 강해졌다. 이는 선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선 감독 후반기에 2군 감독 대신 2군 총괄코치로 장효조를 임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