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2 00:17:14

한성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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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공화국
大朝鮮共和國
파일:3.1 운동 태극기.svg
국기
1919년 4월 23일 ~ 1919년 6월 6일
위치경성부
국가애국가
정치체제민주공화정
국가원수집정관총재
언어한국어
역사 • 1919년 4월 23일: 임시정부 수립
• 1919년 6월 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

1. 개요2. 활동3. 각료 목록4.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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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미 독립선언 이후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경성부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로, 1919년 4월 23일 24인의 13도 대표자들이 [서울 서린동 봉춘관]에서 13도 대표 국민대회를 열어 <국민대회 취지서>를 발표하고, 인근 [종각]에서<임시정부 선포문>을 선언함으로써 수립되었다.

13도 대표들은 선포문에서 “3 •1 민주혁명을 바탕으로 국민대회를 조직하고, 본 대회는 민의에 기(基)하여 임시정부를 조직, 약법(約法)을 제정하여 이를 선포한다”고 밝혔다. 당시 미국 최대 통신사인 UP통신(UPI통신의 전신)은 한성정부 수립을 전 세계에 타전했다.

파일:external/www.loverokorea.org/2.4.jpg

한성정부에서 대내외적으로 내세운 국호는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이었다. 민주공화제를 국체로 삼았으며, 국가원수는 집정관총재(執政官總裁)였다.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에 추대되었다. 1919년 5월 31일 신흥우에게서 한성정부 수립의 문건을 건네받은 이승만은 6월 14일부터 President of Korea라는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이용하여 대외활동을 시작했다. 안창호는 이 'President'를 '대통령'으로 이해하여 이승만에게 아래와 같은 서신을 보냈다.
상해임시정부는 국무총리 제도이고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 제도이며 어느 정부에나 대통령 직명이 없으므로 각하가 대통령이 아닙니다...(이하 생략)... 헌법을 개정하지 않고 대통령 행세를 하시면 이는 헌법 위반이며, 정부를 통일하던 신조를 배반하는 것이니 대통령 행세를 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5일 안창호의 서신
만일 우리끼리 떠들어서 행동이 일치하지 못한 소문이 세상에 전파되면 독립 운동에 큰 방해가 있을 것이며 그 책임이 당신들에게 돌아갈 것이니 언급하지 마시오.
- 1919년 8월 26일 이승만의 답신

이 일화를 두고 이승만이 대통령 직함 사용에 집착했다고 하거나, 심지어는 '대통령 참칭'이라고까지 규하려는 주장이 있는데 이승만은 '집정관총재'라는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려면 president가 적절하다고 생각하여 영어 명칭으로 president를 썼을 뿐 한국어 명칭을 '대통령'이라 한 적은 없다. 당시 한성정부의 수장은 집정관총재였고 그 밑에 국무총리는 별도로 존재했다. 그러므로 집정관총재에 prime minister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나마 가장 적절한 표현이 president였던 것. 하지만 집정관을 뜻하는 영어단어 'consul'이 있음에도 굳이 'president'를 칭했다는 점에서 안창호의 지적은 타당성이 있다.

결국 1919년 9월 안창호의 주도로 통합된 상해 임시정부가 탄생되는데, 이때의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된다.

이승만의 직책변화를 살펴보면
1. 19년 4월 13일 상해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2. 19년 4월 23일 한성정부 집정관총재 이승만
(안창호와 이승만의 서신 이후)
3. 19년 9월 통합된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기치를 내걸고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 중국 상하이상해임시정부도 설립되었는데, 분산되어 있을수록 항일투쟁이 힘들다는 의견이 모아져서 서로 통합을 계획하게 된다. 1919년 9월 11일 이들과 통합해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범되었으며, 위치나 과정상 상해임시정부가 중심이 됐지만 명목상의 법통은 한반도 내에 있던 유일한 정부였던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1]

2. 활동

한성 정부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a]
1. 임시정부 조직의 건.
2. 일본 정부에 대하여 대한 통치권의 철거와 군비의 철퇴 요구의 건.
3. 파리 강화회의에 출석할 인원 선정의 건.
4. 한국인은 일본 관청에 대하여 일체의 청원 및 소송 행위를 하지 말 것.

또한 임시 헌정을 채택하고 일반 국민의 준수 요건을 결의하였다.[a]
임시 약헌[4]

제1조 국체민주제를 채택함.
제2조 정체대의제를 채택함.
제3조 국시국민자유권리를 존중하여 세계 평화의 행운을 증진케 함.
제4조 임시정부는 다음의 권한을 가짐.
1. 일체의 내정
2. 일체의 외교
제5조 한국 국민은 다음의 임무를 가짐.
1. 납세
2. 병역
제6조 이 약헌은 정식 국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반포할 때까지 적용함.

일반 국민의 준수 요건

1. 나라 위해 목숨 버리고 싸울 것.
2. 동포끼리 서로 구할 것.
3. 어질고 옳음으로 모진 것을 누를 것.
4. 정부에 복종할 것.
5. 마음과 힘을 뭉칠 것.
6. 자주 독립을 위할 것.
7. 재정적 의무를 질 것.

또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될 국민 대표위원으로 이승만, 박용만, 김규식, 안창호, 이동휘, 노백린 등을 선출하였다.[a]

3. 각료 목록

한성정부는 민주공화제 정부로써 집정관총재 제도를 채택했으며, 내각은 7부 1국제로 시행되었다.[6]

집정관총재 이승만(李承晩)
국무총리총재 이동휘(李東輝)

내무총장 이동녕(李東寧)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
군무총장 노백린(盧伯麟)
재무총장 이시영(李始榮)
법무총장 신규식(申圭植)
학무총장 김규식(金奎植)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

참모부 총장 유동열(柳東說)
노동국 총판 안창호(安昌浩)

4. 해체

3.1 운동 이후에 한국에는 여러 정부가 거의 동시다발적으로 수립되었으므로 임시정부가 난립한다는 것은 곧 한국인 분열상을 외국에 보이는 결과가 되어 대외 활동에 불리했기에 국내, 미주, 노령, 중국의 교포를 대표하여 상해에 와 있던 대표자들은 서로를 대표한 지역의 의견을 상호 절충시키는데 고심을 하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1919년 6월 6일, 임시정부 법통을 한성에 부여하고 그 산하에 뭉칠 것을 합의하여 다음과 같은 일치된 의사로 단일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설립하였다.[a]
1. 상해와 노령에서 설립한 정부들을 일체 해소하고 오직 국내에서 13도 대표가 창설한 서울 정부를 계승할 것이니, 국내의 13도 대표가 민족 전체의 대표인 것을 인정함이다.
2. 정부의 위치는 당분간 상해에 둔다.
3. 상해에서 설립한 정부가 실시한 행정은 유효임을 인정한다.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서도 한성정부를 법통으로 함을 명문화했으며, 제헌 헌법에서도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라는 문구를 넣어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한성정부에 있음을 명확히 했다.


[1] 비유하자면 A(상해 임시정부)와 B(한성정부)라는 두 기업이 인수합병을 하여 통합회사 이름을 A(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하는 대신, 사장은 B쪽(한성정부의 이승만)이 맡은 셈이다.[a] 許政, 《雩南 李承晩》, 1970, 太極出版社, p. 37~39[a] [4] '한성정부 약법'이라고 부르기도 한다.[a] [6] 구조를 보면 알겠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비슷하다.[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