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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tablebgcolor=#fff> [1] | 주식회사 경향신문사 株式會社 京鄕新聞社 The Kyunghyang Shinmun |
<colbgcolor=#2c4a79><colcolor=#fff> 국가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
설립 | 1946년 10월 6일,([age(1946-10-06)]주년),[2] | |
창간 | ||
본사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3 ,(정동 22), | |
대표자 | 김석종[3] | |
임원진 | 대표이사 사장, 발행·인쇄인 김석종 경영총괄 · 전무 장정현 광고마케팅본부장 겸 광고국장 · 상무 박문규 편집인 겸 논설주간 · 이사 이기수 칼럼니스트 · 이사 김민아 미래전략사업본부장 · 이사 최병준 | |
업종명 | 신문 발행업 | |
상장여부 | 비상장 기업[4] | |
기업 규모 | 중견 기업 | |
임직원 | 520명 (2019년 12월) | |
매출액 | 836억 1,057만 9,012원 (2022년 연간) | |
영업 이익 | 47억 1,941만 6,990원 (2022년 연간) | |
순이익 | 40억 5,025만 3,995원 (2022년 연간) | |
최대 주주 | 경향신문 자기주식[5] (지분 43.69%) 경향신문 임직원 (지분 33.93%) | |
링크 | <colbgcolor=#2c4a79><colcolor=#fff> 웹 사이트 | |
소셜 미디어 | | | | | | |
유튜브 | 링크 | |
구독자 | 7.78만명[A] | |
조회 수 | 57,734,319회[A] | |
가입일 | 2012년 5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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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두려운 것은 오직 독자밖에 없습니다.
2001년 광고에서[8]
1946년 10월 6일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창간·발행한 전국 종합 일간지.[9] 1963년 매각 이후 천주교와는 무관해졌다. 이른바 한경오라고 일컬어지는 대표적인 진보 성향 일간지 중 하나이다.2001년 광고에서[8]
대한제국이 일본에 침략당하고 있던 1906년, 서울교구의 전신인 천주교 조선대목구에서 창간, 발행하다가 1910년 국권 피탈 직후 일제의 탄압으로 폐간당한 舊 《경향신문》의 계승을 표방하였다. 다만, 창간사에서 과감하게 “속간(續刊)이 아닌 창간”이라고 규정하였으므로, 신 경향신문의 역사는 1946년부터 센다.
1959년 소위 '여적필화(餘滴筆禍) 사건'으로 이승만 정부에 의해 강제 폐간당하는 등 수난을 겪다가 1962년 여러 가지 사정으로 민간에 매각되어 천주교 재단에서 분리되었고, 이제 경향신문에서 천주교의 흔적은 이름에 붙은 경향(京鄕)밖에 없다. 경향이란 라틴어 “Urbi et Orbi(로마 시와 전 세계에)”[10]를 한문으로 번역한 것으로, 우리말로 바꾸면 '수도와 지방' 또는 '도시와 시골' 정도에 해당하는 뉘앙스인데, 천주교 언론의 정체성을 살리면서도 전국 단위 종합일간지의 이름으로 매우 적절했던 제호 선정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비슷한 제호를 가진 경향잡지는 전형적인 천주교 잡지다. 위에서 설명한 舊 경향신문의 부록인 '보감'으로 발행되다가 1910년 舊 경향신문이 폐간되자 보감만이라도 살려 경향잡지로 분리 발행하기로 하여 일제강점기에 명맥을 유지하였고, 광복 이후 신 경향신문 창간 이후에도 서울교구에서 신 경향신문과 함께 발행하였으나 1959년 경향신문이 또 다시 강제폐간되자(...) 경향잡지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로 넘어가 한국 천주교의 공식기관지로 남게 되었다.[11] 경향잡지는 대한민국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잡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노조는 민주노총 언론노조 소속이다.
협력관계에 있는 해외 언론사는 산케이 신문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 역대 사시
2.1. 1946~1974년
- 공정 신속한 보도로써 진정한 민의를 대변한다
- 올바른 세론을 계도하며 명랑하고 안정된 사회의 건설의욕을 고취한다
- 품위와 권위를 견지하여 거시적인 민족의 지향과 진로의 지침이 된다
2.2. 1974~1981년
현재는 문화방송이 사시로 사용한다.- 자유: 진실의 추구와 전파를 위하여 자유를 지킨다
- 책임: 개인과 사회에 대하여 스스로 책임을 진다
- 품위: 사회 양식에 따라 높은 품격을 지닌다
- 단합: 민족단합과 국력배양의 선도적 기능을 다한다
2.3. 1990년 이후
- 진실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할 말은 하고 쓸 것은 쓰는 사회공기로서의 사명을 다한다
- 부정부패, 폭력을 배격하고 자유, 정의, 인권을 수호하는 데 앞장선다
-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발전시켜 민주복지국가를 완성하는 데 전력한다
- 민족의 이익을 도모하고 조국의 밝은 미래를 창조하는 데 선도적 역할을 수행한다
3. 사가
3.1. 문화방송-경향신문 시절(1974 ~ 1981)
작사는 박목월, 작곡은 손석우가 맡았으며, 원래 MBC 사가로 사용한 걸 개사한 것이며, 현재도 MBC에서 사용 중이다.(1절)세계로 향하여 펼친 네트웍 / 오늘의 산역사를 바로 잡아서 빠르고도 알찬 방송 정확한 보도 / 사회에 불을 켜는 우리 문화경향 (2절)폭넓게 대중의 뜻을 모아서 / 찬란한 내일로 뻗어나가는 슬기롭고 밝은 방송 신속한 보도 / 영광의 선두주자 우리 문화경향 (후렴)날마다 새로운 꿈을 심으며 / 새 역사 가꾸는 우리의 보람 MBC 경향신문 빛의 메아리 |
3.2. 경향신문사 사가(1990년 이후)
작사는 시인 구상, 작곡은 장일남이 맡았다.(1절)겨레의 새 삶과 더불어 출발하여 / 역사의 가파른 고비를 함께 넘으며 이 땅의 자유를 한사코 지키기 위해 / 이 나라 기틀을 올바로 다잡기 위해 우리는 펜 하나에 몸마음을 바친다 (2절)드높은 예지와 드맑은 감성으로 / 이 겨레 모든이 마음에 불을 밝히고 슬기와 솜씨를 일깨워 북돋아주고 / 저마다 그 삶의 보람을 누리기 위해 우리는 펜 하나에 몸마음을 바친다 (후렴) 푸르른 자유혼이 불꽃튀는 경향신문 / 영원속의 오늘을 조명하는 경향신문 |
4. 사옥
4.1. 소공동 사옥 (1946~1974년)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74번지[12] 소재. 1946년에 천주교 측이 舊 조선정판사 건물을 불하받아 쓰던 곳으로써 격동의 순간을 함께 해왔다. 1974년 정동 이전 이후 한일은행이 인수해 쓰다가 1980년 5월경에 철거되었다.4.2. 정동 사옥 (1974년 이후)
주소 : ㉾04518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3 (정동, 경향신문사)
설계자는 김수근[13], 시공사는 현대건설. 1971년 5월 31일에 준공되었으며, 1974년 경향신문과 문화방송을 합병 후 입주했다. 당시에는 신문사, 윤전 공장, TV 및 라디오 방송국에 체육관과 문화관광호텔 등 상업시설까지 한 군데 있는 복합문화미디어공간.[14] 5공화국이 출범하면서 언론기본법에 따라 신방 겸영이 금지됨에 따라 문화방송이 분리되어 한 동안 한지붕 두 가족 신세를 지다가 문화방송은 1986년 4월에 라디오와 FM 방송, 보도국을 여의도 스튜디오 증축 공사 후 여의도로 이전시키고 경향신문만 남았다.
사진에서 보이는 저층에 큰 유리창 부분이 문화방송 편집국, 보도국, 라디오스튜디오, 촬영실 등이며 윗쪽 작은 창문들이 호텔 부분이며 뒤에는 문화체육관이 있었다. 문화방송이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경향신문은 문화체육관(팝콘하우스) 일부(윤전 공장 입주)를 사용했다. 호텔 부분 창문은 TV 브라운관 모양으로 설계한 것. 옥상에 있는 철탑이 바로 문화방송 VHF 11번 채널과 문화방송 라디오 송출 안테나인데 지금은 그냥 장식으로 전락한지 오래되었다. 동아일보 광화문 구 사옥[15]와 비슷한 경우다.
사진에 보이는 문화체육관은 변웅전이 사회를 보며 명랑운동회를 하던 곳이 바로 그 곳.
이 사진은 체육관을 개조해 뮤지컬 전용관 팝콘하우스로 운영하던 때 찍힌 것이다. 현재는 윤전공장은 가산동으로 이전하고, 철거 후 고급아파트인 정동상림원을 지었다. 경향신문은 드물게 윤전 공장을 아직도 외주화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신문사인데, 종업원 지주회사이다 보니 해고 및 외주화가 쉽지 않은 것이 이유.
현재는 5층이 사장실 및 임원실, 6층이 경향신문/스포츠경향 편집국, 7층이 주간경향/레이디경향/출판부, 8층이 행정실로 4개 층을 사용. 1~4층은 장난감박물관, 공연장 등인데 '국내 최초 심야 영화관'였던 스타식스 영화관이 있던 자리였다.
그외에 9층 구내 식당은 원래 호텔 라운지 '럭시'였는데, 문화방송 사원들이 외상을 너무 많이 긋는 바람에 망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신문사의 건물 옥상은 ‘본 건물은 보안상 옥상에서 사진 촬영을 할 수 없으며 또한 출입을 엄격히 통제합니다’라는 문구와 함께 출입이 제한되어 있다.[16]
사옥 대지 중 40%를 11층에 있는 정수장학회가 가지고 있다. 정수장학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 경향신문-문화방송 최대 주주이고 현재도 문화방송 지분 30%, 부산일보 지분 100%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토지 소유권도 가지고 있는 것. 따라서 경향신문은 매달 토지 사용료를 정수장학회에 내고 있다. 현금으로 주지는 않고 사옥 한 개 층을 임대료 없이 정수장학회가 사용한다.
원래 방송국이 있었던 건물답게 보안상의 이유로 내부 구조가 복잡하게 되어 있다. #
참고로 오티스 엘리베이터의 직류무기어(VIP-260 계열로 추정)가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현역으로 운행하던 곳이다. 지금은 현대엘리베이터 루젠(LXVF나 WBLX) 계열로 교체되었다.
5. 역사
경향신문 창간호 1면 우측에는 이승만 前 대통령의 "축 경향신문 창간", 좌측에는 몽양 여운형의 "공명정대"라는 축하휘호가 나란히 실렸던 적이 있다. 초대 편집국장은 횡보(橫步) 염상섭.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창간 과정은 역설적이었다. 경향의 창간은 미군정의 좌익언론 탄압의 수혜를 받은 사례 중 하나로 꼽히는데, 초기에 썼던 소공동 사옥은 사실 미군정으로부터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몰수되었던 정판사 건물과 인쇄시설을 불하받은 산물이었다.
당시 천주교 서울교구장인 노기남 주교는 미군의 서울 입성 나흘째인 9월 12일, 존 리드 하지 군정장관의 정치고문인 세실 나이스트와의 면담에서 미군정 당국과 함께 일할 한국인 지도자 60명을 추천하는 지위를 부여받을 정도로 미군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런고로 미군정은 먼저 노 주교에게 정판사 불하를 권한 것이었다.
노 주교가 추천해 준 60명은 우남 이승만, 백범 김구, 인촌 김성수, 고하 송진우, 설산 장덕수 등 우익인사 일색이었는데, 노 주교 본인도 평안도 출신 반공투사로서 신자들에게 순교정신을 갖고 반공투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며 유지급 신자들에게 한민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에 나서도록 한 것이었다. 경향 역시 그의 노선이 상당 부분 반영되었다.
거기에 정판사 시설은 당시로선 국내 최상이었는데, 경향은 타 신문사에 없는 오프셋 인쇄기 2대를 인수함은 물론, 타 신문사가 쓰는 누런 화선지가 아닌 질 좋은 갱지를 대량 확보했다. 해방 이후 종이부족 상황 하에서 경향은 후발주자임에도 창간 이후 1만 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간 이후엔 그야말로 고난의 행로를 걸었다. 1947년 1월 15일자 1면 칼럼 코너인 '여적'(餘滴)에 주한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문제를 실은 것이 문제가 되어 필자인 정지용이 미군 당국자와 '백골단' 등 극우 단체로부터 곤욕을 치렀다. 1952년 '발췌개헌안'에 대해 비판적인 보도를 하자 우익폭력단인 '땃벌떼'가 습격하기도 했다.
1957년 7월 2일부터 조간 2면과 석간 4면을 발행하고, 1958년 12월 17일부터 조석간 8면을 발행했다. 1959년 자유당 독재체제가 굳어지자 반독재 노선을 분명히 했으며, 천주교 신자인 장면 부통령 피습사건 이후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런 자세는 독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아 당시 발행부수 20만 부를 기록했다. 1959년 2월 4일 '여적'란에 실린 당시 국회의원 주요한의 "현 한국정세는 공명선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무력에 의한 혁명이 일어날 전조를 보이고 있다"라는 내용이 미군정 법령 88호(신문과 정기간행물 허가에 관한 조항, 1961. 12. 30 폐기)에 위반된다 하여 필자와 당시 사장 한창우가 2월 28일 기소되었고, 신문은 4월 30일 강제 폐간당했다. 이것이 유명한 여적 필화 사건이다.
이러한 조치에 불복하고 정부를 상대로 법정투쟁을 벌여 승소했으나, 정부는 폐간조치를 무기한 발행정지처분으로 바꾸어 발행을 막았다가 이듬해 4.19 혁명 이후 복간되었고, 1963년에는 운영권이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 이준구[17] 사장에게로 넘어갔다.
1961년 박정희의 5.16 쿠데타 이후 더욱더 고난의 행로를 걷게 되었다. 박 정권은 비판적 논조를 이유로 1965년에 이준구 사장에게 반공법 위반혐의를 뒤집어씌워 구속시켰고, 신문사는 공매 처분되어 1966년에 기아산업으로 넘어갔는데, 당시 기아가 법정관리 상태에서 강제로 떠맡은 터라 어찌보면 기아의 흑역사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1969년에는 신진그룹이 인수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경향신문은 비판성향 간부들이 대거 숙청되면서 독재정권과 자본가 계급을 대변하는 신문으로 변모해갔다.
이 와중인 1970년 전태일이 노동실태 설문조사 결과를 노동청에 제출한 것이 이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1974년 8월 30일에는 문화방송과 합쳐져 상호명도 '(주)문화방송·경향신문'으로 바뀌어 매스컴센터로 변모했다. 계엄하인 1980년, 김대중 前 대통령이 군부의 내란 음모 조작 사건으로 복역할 당시 신군부의 지시에 따라 '김대중의 사악한 마키아벨리즘과 국가 전복 음모'를 사설에 싣기도 했으며 여느 신문처럼 전두환 대통령 취임 축하기사를 실었다.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에 따라 폐간된 신아일보 인력을 인수한 뒤 민간지분이 KBS로 매각되었고, 1981년 언론기본법에 명시된 신방겸영 금지에 따라 문화방송에서 분리된 뒤 사단법인으로 탈바꿈하여 사실상 서울신문처럼 관영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리스의 사회주의 내각 수립과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의 취임 소식을 '유럽 공산화의 전조'(...)라고 해석하는 병크를 터뜨리기도 했다.[18] 당시 중앙일간지 가운데서는 친정부 성향으로는 서울신문과 쌍벽을 이뤘고, 이 때문에 6월 항쟁 와중에는 군부독재정권의 확성기로 매도당해 시위대가 경향신문을 불태우는 흑역사를 겪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 사내 노조가 설립되면서 이전의 색채를 벗어날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했지만 내부 갈등도 만만치 않았을 뿐더러, 언론자유화로 경쟁신문사가 늘어나면서 수익성이 떨어졌다. 1990년에는 한국화약그룹에 인수되어 주식회사로 전환해 중앙일보처럼 재벌 언론이 되었다. 1992년부터 CTS 전환 후 1995년에 '매거진 X' 지면을 신설하고 1면 광고를 없애는 등의 온갖 시도를 했으나, 유력신문사들에게 밀려 적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97년 가로쓰기 실시 후 1998년 한화그룹이 경영권을 포기함으로서 마침내 한겨레와 마찬가지로 정부나 자본의 입김에서 벗어난 신문이 되었다. 이 때부터, 국내 언론사 중 드물게 사원주주제를 시행하고 있다. 경향 이외에 사원주주제를 시행하고 있는 신문은 한겨레신문, 내일신문 등이 있다. 서울신문도 사원주주제를 시행했지만 공기업 지분이 사원주주의 두배가 넘었고, 결국 2021년 호반건설이 최대주주가 되면서 옛말이 되어 버렸다.
창간 70주년을 맞은 2016년에 창간 이래 최초 여성 편집국장을 배출했다.# 같은 해에 청년기획 <부들부들 청년>을 연재하였다.
5.1. 경찰의 정동 사옥 진입 사건
2010년에 민주노총을 경향신문 사옥 세입자로 맞이했다. 2013년 12월 철도파업의 여파로 서울이 온통 난리였던 분위기 속에 민주노총의 산하 지부인 철도노조의 지도부가 사무실에 숨어있다는 얘기가 나오는 바람에 2013년 12월 22일 경찰이 철도노조 지도부를 체포하기 위해 강제진입을 시도하면서 조용하던 일요일 아침 사옥이 탈탈 털렸다.
경향신문이 설립되고 최초로 일어난 일이며, 정동사옥이 열린 뒤 언론사가 공권력에 털린 최초 사례로 남게 되었다. 사옥 정문이 완전히 박살나고 사무실로 통하는 계단과 문짝, 집기가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참고로 신문사들은 관례적으로 일주일 중 토요일 하루를 쉰다고 한다. 일요일에는 신문을 발행하지 않기 때문. 하지만 일요일은 월요일자 신문을 찍어야하기 때문에 근무한다. 즉, 신문사 직원들이 근무 중일 때 사옥이 털렸다는 소리다. 피해상황.
근데 정작 털어놓고 보니까 철도노조 지도부는 이미 오전 중에 빠져나간 상태였고 경찰의 삽질은 대대적으로 비웃음을 당했다. 빠져나간 철도노조는 조계사에 피신했다고. 또 이와중에 일부 의경이 사무실에 비치된 커피 맥심을 훔치는 촌극을 벌여 경찰이 잡은건 맥심밖에 없었다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리고 아침 댓바람에 경찰한테 호되게 당한 경향신문은 사건이 터진 다음날부터 며칠 동안 계속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연속적으로 내보냈다. 사건 다음날인 12월 23일자 사설. 경향신문은 해당 사설 <경향신문사 난입은 반언론적 폭거다>를 통해서도 "언론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며 "이번 반언론적 폭거가 어떻게 기획ㆍ실행됐는지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엄중 처벌할 것을 정부에 강력히 촉구한다"고 밝혔다. 사옥 침탈에 분노한 경향.
6. 성향
기본적으론 진보-좌파 성향이다. 일단 보수-우파 성향의 조중동이[19] 주류를 점하는 국내 신문 시장에서는 한겨레, 오마이뉴스와 묶어서 진보 좌파 성향의 한경오라고 하지만, 실제 세부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세 매체들도 논조상의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정리하자면, 3대 진보 매체중 한겨레와 오마이뉴스는 기본적으로 진보 좌파 논조를 유지하되, 사안과 국면에 따라 드물게는 범민주당계 정당의 의제에 관심을 가지는 논조를 보이기도 하지만, 경향신문은 시종일관 선명한 진보 좌파 논조이고, 민주당계 정당과는 매우 거리가 멀며, 특히 민주당 내의 주류적 개혁 세력에게는 명확히 적대적 성향을 드러낸다. 정리하자면, 한겨레가 '비(非) 민주당' 성향이라면, 경향신문은 '반(反) 민주당' 성향인 것.정의당, 녹색당, 노동당 등의 진보 진영 내에서도 소수의 강성 좌파 성향을 나타내는 정당과 조직에게는 호의를 보이며 민주당계 정당 소속일수록, 민주당 내 주류 세력의 정치인 일수록 가차없이 깐다. 특히 친노, 친문, 친명 등의 범민주당 계열 인사들에 대해서는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한다고 날이 선 비판을 자주 가한다. 입으로는 서민경제, 민생경제 운운하지만 정작 선명한 좌파적 노동자, 성소수자, 페미니즘, 사회적 소수자 등의 의제에는 적극적이지 않고, 적극적 재벌 개혁에 대해선 애매모호하며, 기타 사회 이슈에서도 선명한 진보 좌파 노선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결국 보수 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은 아무런 차이가 없으니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논리인 것이다.[20]
흥미로운 지점은, 민주당 내의 소수파 선명 개혁 세력일지라도, 민주당의 주류 세력이 되는 순간 경향신문의 강력한 비판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친노, 친문, 친명 등의 민주당계 정당 내부의 정통적 주류 세력이 한때 당내 선명 개혁파 비주류이던 시절에는 경향신문이 일말의 호의나 관심을 주곤 하지만, 이들이 세력을 키워서 당내 주류파가 되는 순간 가차없이 경향신문의 비난의 대상이 된다.[21] 반대로 거대 양당에서 십수년에서 수십년간 기득권 정치를 해오다 당내 권력싸움에서 밀러나 창당해 소수 정당이 된 이준석이나 이낙연에게는 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22]
다시 말해, 경향신문은 주요 일간지 중에서 한겨레보다도 선명한 진보 좌파적 색채를 띄는 언론이라 자평한다.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의 거대 양당 체제를 '보수 양당제'라는 시각으로 혹평하며, 상대적으로 정의당 내의 류호정, 장혜영 등의 신예 신좌파 정치인들이나, 원외의 녹색당, 노동당 등의 진보 정당 계열에게는 매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이런 맥락의 연장에서 노무현 정부, 문재인 정부 및 이재명 대표 체제의 다양한 정책과 방향, 특히 검찰 개혁 의제, 공수처 의제 등은 그들만의 싸움이라는 냉소적인 논조를 보였다.[23] 위에 언급된 대목처럼, 한겨레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진보를 표방하긴 하나, '범진보'적 관점에서 민주당의 쟁점 의제에 대해 사안에 따라 때로는 호의적 입장을 취할 때도 있는 반면, 경향신문은 민주당의 여러 쟁점 의제에 대해 호의를 표하는 일이 거의 없다.
일례로 노무현 前 대통령 퇴임 후에는 '굿바이 노무현'이라는 제목의 칼럼을 통해 "노무현 당선은 재앙의 시작이었다", "환멸의 씨앗을 모두 거두어 장엄한 낙조 속으로 사라지라"고 저주에 가까운 주장을 펼쳤던 곳이 바로 경향신문이었는데, 흥미롭게도 노 전 대통령 서거 후에는 말을 정반대로 뒤집어서 "수백만의 노무현으로 부활하자"고 주장했던 곳도 경향신문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두 칼럼이 똑같은 이대근 논설위원의 글이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한 지점. 어쨌든 당시 이런 경향신문의 급격한 논조 전환이 나름 언론계에서도 조롱거리였던지, 심지어 보수 언론인 동아일보에서 경향신문의 이중성을 저격하는 기사를 썼을 정도였다.# 이에 경향신문도 사설을 통해 '우리가 사실 잘못은 하긴 했는데, 조중동 너희들은 우리한테 그런말 할 자격 있냐?'는 식으로 소심한 항변을 했지만, 그야말로 궁색한 변명이었다.#
또한 2016년 총선 이후에는 대선 경선 국면의 확고한 선두주자였던 문재인 후보에게 경선 패널티를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공개적으로 한 곳이 경향신문이었으며, 2020년 총선 국면에서 임미리 교수의 '민주당만 빼고 투표하자'는 주장의 칼럼을 공개적으로 지면에 실은 곳도 경향신문이었다.# 이런 논조는 4년 후인 2024년 총선 국면에서도 변하지 않아서, 선거를 약 한달 반 앞둔 2월 말에는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재명 당대표가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칼럼을 지면에 싣기도 했다. 그런데 총선이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으로 끝난 이후에는 해당 칼럼 대한 별다른 변명을 내놓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해당 칼럼을 쓴 사람이 바로 이대근 전 논설위원이었는데, 상술된 '굿바이 노무현'의 바로 그 필자였다. 어쨌든 이런 감정적인 논평 내용 때문에 오마이뉴스에서 해당 경향신문 칼럼에 대한 비판 칼럼을 싣기도 했다.#
어쨌든 이러 저러한 이유 때문인지 경향신문 독자들 중에선 한경오로 묶여 불리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경향신문은 어디까지나 한겨레나 오마이뉴스와는 논조와는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는 것. 비슷한 측면에서 보수 진영의 조중동 독자 중에서는 그래도 경향신문이 한경오 중에서는 가장 낫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왜냐면 진보 매체 중에서, 보수 진영의 경쟁자인 민주당계 정당을 가장 강하게 비판하며 각을 세우는 매체이기 때문.
한편 과거 한화그룹에서 독립해서 사원주주 회사로 새출발한 1998년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오마이뉴스와 한겨레보다는 확실하게 온건한 진보노선을 띄고 있었다. 당시 경향신문은 전체적으로 리버럴 성향을 보여주면서 좌파적인 색채를 아주 약간 가미하는 수준으로 당시 TV방송에선 중도신문이라고 대놓고 광고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중후반 정확히는 참여정부 말기부터 정권을 비판하면서 조금씩 좌클릭하기 시작했고, 특히 2011년 이대근 편집국장 체제 이후로는 명백하게 리버럴 성향이 옅어지고 뚜렷하게 강경진보 성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같은 진보 언론으로 묶이는 한겨레신문, 오마이뉴스와도 여러 차례 충돌하였다. 일반적으로 외부에선 한경오라고 싸잡지만 사실 세 매체는 기본적인 관점이 매우 다르며 특히 2010년대 이후 한겨례와 경향은 북한의 3대세습,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 야권연대론, NL주사파 종북 논란,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건, 통합진보당 해산 문제 등에서 여러 번 정면충돌하였다. [24]
민족주의, 대북정책, NL에 대한 입장이 다른 점이 많다. 특히 경향은 북한의 핵개발, 인권탄압, 3대세습, 선군정치 등에 대해서 끊임없이 비판하며 2010년 김정은이 차기 지도자로 확정받았을 때 민노당에서 세습을 우회적으로 인정하는 듯한 입장을 표명하자, 논설위원인 이대근이 민노당 NL계와 통일운동단체들을 공격하면서 북에 대한 태도를 명확히 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8년부터는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개선되자 북한에 유화적인 측면이 있는 성향이 나오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자세한 얘기는 관련 내용 참조. 그러나 이후 남북관계 경색 국면에 들어서자 다시 북한에 대한 시선도 냉담해진 편.
2010년대 초반, 이대근 편집국장 체제가 출범한 이후에는 한국 사회의 소통을 명분으로 내걸고 보수 성향 논객들을 대거 칼럼리스트로 영입하였다. 중앙대 이상돈 교수, 전원책 변호사 등이 그들이며, '한국, 소통합시다'(2009년), '이상돈, 김호기의 대화'(2010년) 등의 시리즈를 통해 PD성향 인사들과 우파 성향 인사들의 대담록을 시리즈로 연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일보 주필 및 논설위원을 지낸 류근일 논설이 칼럼을 기고한 바도 있다. 다만 이러한 기획도 몇년 후에는 흐지부지 되었다.
의외로 반일도 친일도 아닌 이낙연과 같은 지일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한일갈등 언론비평①] 사실에 집중해야 진영논리 넘어선다, 새겨들어야 할 <경향> 칼럼들
제21대 국회 선거제 개편 논의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준연동형 유지를 택하자 구국의 결단이라는 투로 찬양하는 사설을 냈다.# 대부분의 제도권 언론사가 부정적으로 평하는 사설을 내고, 진보 언론사인 한겨레나 경남도민일보조차 씁 어쩔 수 없지 정도의 옹호에 그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러면서도 경향신문은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소수정당에 의석을 대폭 양보하고 희생해야만 한다는 논지를 펼쳤다. 사실 소수 진보 정당과 경향신문의 이런 논조가 21대 총선에서는 오히려 범 진보 지지층에게 극도의 반발심을 유발시켜 민주당과 연대한 진보당과 우호적 관계를 가졌던 조국혁신당을 제외한 독자 노선을 선택했던 녹색정의당과 새로운 미래는 괴멸적 타격을 입고 국회에서 퇴출 되었다.
7. 신뢰도
한국기자협회와 여론조사회사가 실시한 2016년 언론 신뢰도 조사에서 한겨레신문 - JTBC - 조선일보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2013년에는 2위를 하는 등, 지난 10년래 전문가-일반인 조사 모두에서 신뢰도는 신문-방송-통신사 통합 5위권 내에 늘 드는 편.[25]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사' 순위에선 위 원그래프에 표기된 6위 한겨레 다음 중앙일보-MBC에 이어 9위를 기록해 다소 편차를 보였다.[26]
2017년 기자협회 조사에서는 신뢰도 순위가 7위로 떨어졌다. jtbc-한겨레-KBS-중앙일보-한국일보-조선일보-경향신문-YTN-MBC-연합뉴스 순.[27]
2023년판 로이터 연구소 디지털 뉴스 리포트[28]에 따르면 신뢰도는 37%, 불신도 25%, 신뢰도 불신도 하지 않는 반반(neither)은 37%였다.#
참고로 해당 조사 중 1위 미디어인 MBC는 신뢰율 58%/불신률 20%/반반 23%이며, 꼴찌인 조선일보를 보면 33/40/26로, 보수 매체들은 타 매체에 비해 불신도 수치가 상당히 높다. 다만 대체로 방송 미디어의 신뢰율이 높고, 신문매체는 대체로 신뢰율이 40%(한겨레)~33%(조선일보)로 도긴개긴이다.
자세한 내용은 한국언론진흥재단 문서의 논란 부분 참조.
8. 재정 상태
1996년 이후부터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으나[29] 2008년 촛불집회 이후 판매 부수가 대폭 늘었다고 한다. 하지만 광고 단가가 올라갈 만큼 판매 부수가 늘어난건 아니어서 오히려 경영상황이 더 어려워지기도 했다. 2009년 회계연도 기준 누적 부채액수는 2000억 원에 달했다. 덕분에 2000년대엔 사장이 교체되는게 다반사였다.하지만 2009년 이후 반전되어, 3년 연속 흑자를 내는 등 그나마 숨통은 트였다고 한다. 사장 인터뷰내용.
2015년 경향신문은 매출액 874억원에 영업 이익 88억, 2016년에는 매출액 840억원에 영업 이익의 85억의 실적을 올렸다.
9. 주요 보도
9.1. 성완종 회장 인터뷰 보도
경항신문은 성완종 회장의 자살 직전 인터뷰를 했는데, 이 때 녹취록이 정치권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왔다. 인터뷰 내용에는 성완종 회장이 누구에게 돈을 주었는지와, 언제 돈을 주었는지가 있었으며, 이완구 당시 국무총리를 두고 정작 사정을 받아야 할 사람이 사정권을 휘두르고 있다고 맹비난하는 내용이 있었다.경향은 이 녹취록을 몇 파트로 나눠서 보도했는데, 여권에서는 이야기가 다 나오지 않은 채로 섣불리 대응하기가 매우 곤혹스러웠다. 김무성 당시 대표는 경향신문은 이 녹취록을 하루빨리 전부 보도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사실상 애원했을 정도. 그러나 이 과정에서 JTBC가 경향신문이 검찰에 제출했던 녹취파일을 입수해서 자신들은 경향과 상관없다면서 보도 전날 모두 방송해버리는 일을 저질러버려서 JTBC와 갈등의 골이 깊어졌다.
한편 JTBC에 파일을 넘긴 사람은 IT보안전문가 김인성으로, 블로그를 통해 시인했다. 김인성의 사과문
10. 유튜브 채널
11. 비판 및 논란
자세한 내용은 경향신문/비판 및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12. 주요 행사
- 이화경향음악콩쿠르
- 경향하우징페어
- 대통령금배 전국고교축구대회
13. 자매지
2011년 기준으로 자매지인 레이디경향이 42,100부 수준이었다. 여성지 가운데 여성조선(44,600부)과 비슷한 수준이다. 2012년엔 여성종합지 가운데 1위를 했다고 한다. 2016년 4월호를 끝으로 정간에 들어갔다. 사실상 폐간이라고 받아들이는게 대세.
주간경향#의 경우 한동안 뉴스메이커, 위클리경향 등 제호를 바꿔가며 죽을 쒔지만, 현재는 2만 부를 조금 넘기는 수준으로 뉴스위크 한국판과 비슷한 수준이다. 주간지 시장은 대체로 진보 매체가 강한 편이지만 한겨레21이나 시사in에 비하면 부수가 낮은 편이다.
스포츠신문인 스포츠경향#은 2005년 스포츠칸이란 제호로 창간했다가 '명칭통일화'에 의해 2008년 현재 제호로 바뀜. 부수는 2010년 기준으로 105,307부 수준이라고. 그 외에 <소년경향(1983~1987)>, <월간경향(1965~1989)[30]>이 있었다.
경향게임스#는 게임 전문 타블로이드판 신문으로, 독립법인이며 경향신문과는 제호 사용 계약만 하고 있다.
14. 여담
- 야구에선 1955~1998년까지 '백호기'라는 명칭으로 전국종합야구선수권대회를 후원했고 바둑에선 1958~1969년까지 왕좌전, 1975~1996년까지 국기전이라는 프로기전을 주최한 바 있다.
- 2010년 5월, 위클리경향 875호에 용자 기사가 실린 바 있다. 앙? 담당기자가 원래 덕후 성향이 있다. 그리고 트윗 봇에 관한 기사를 쓸 때 리그베다 위키의 트위터 봇/목록 항목을 인용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언더그라운드.넷 항목 참조.
- 2013년 11월 3일부터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 경향신문이 운영하는 페이스북에서 기사를 공유할 때마다 기사에 절묘하게 들어맞는
약빤짤방을 매치해 호응을 얻고 있다. 사례. 또한 페이스북 관리자 ‘향이’가 댓글을 달아주기도 한다.
- 현재의 사옥 소재지는 원래 러시아 정교회 성당이 있던 자리였다고 하며 사옥 인근에 옛 러시아 제국 공사관의 건물 한 동이 남아 있다. 現 경향신문 사옥에서 걸어서 10분 안에 있다.
- 2000년 3월경 제작된 광고. 일부 케이블 방송에서는 아직도 이 광고를 틀고있다(...) 정말 여담으로(?) 광고 속 조홍민 기자는 2019년 1월부터 자매지인 주간경향의 편집장으로 부임하고 있고, 문주영 기자는 2019년 4월 현재 국제부 차장으로 부임한 상태. 2020년 JTBC 드라마 허쉬 티저 영상에서 이 광고를 패러디했다.
- 문화방송과 합쳐져 있었을 당시의 TV 편성표에는 MBC가 제일 먼저 실렸고, MBC 신입사원 공채 합격자 명단도 이 신문에 꼭 실었다. MBC와 분리된 이후에도 그 현상은 1990년까지 한동안 계속되었다가, 1990년 후반기부터 KBS1, MBC, KBS2 순으로 싣기도 했다.
- '경향'으로 줄이면 경향신문과 상관없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 검색 알고리즘이 되기 때문에 공적 평가를 듣기 매우 어려워 '경향신문' 위주로 줄이지 않고 평가해야 알고리즘이 바로잡히는 문제가 있다.
15. 관련 문헌
16. 역대 임원
16.1. 회장
- 초대 노기남 대주교 (1946~1963)
- 2대 홍용택 (1963~1966)
- 3대 김철호 (1966~1969)
- 4대 김제원 (1969)
- 5대 고광만 (1969~1971)
- 6대 김창원[31] (1971~1974)
- 7대 최석채 (1974~1980)
- 직무대행 조태호 (1980)
- 8대 김승연 (1992~1998)
- 9대 조응준[32] (2002~2003)
16.2. 부회장
- 최종률[33] (1995~1996)
- 조응준 (2002)
16.3. 명예사장
- 양기섭 (1949~1953)
16.4. 대표이사 사장
- 초대 양기섭 (1946~1949)
- 2대 한창우 (1949~1961)
- 3대 윤형중 (1961~1962)
- 4대 이준구 (1962~1965)
- 5대 홍용택 (1965~1966)
- 6대 박찬현 (1966~1969)
- 7대 김제원 (1969~1971)
- 8대 최치환 (1971~1974)
- 9대 이환의 (1974~1980)
- 직무대행 임택근 (1980)
- 10대 이진희 (1980~1981)
- 11대 정구호[34] (1981~1986)
- 12대 최재욱 (1986~1987)
- 13대 노철용[35] (1987~1988)
- 14대 장명석 (1988~1990)
- 15대 심상기[36] (1990~1992)
- 16대 최종률 (1992~1995)
- 17대 안신배 (1995~1998)
- 18대 홍성만 (1998~2000)
- 19대 장준봉 (2000~2002)
- 20대 이채락 (2002~2003)
- 21대 조용상[37] (2003~2006)
- 사장대행 구운회 (2006)
- 22대 고영재 (2006~2008)
- 23대 이영만 (2008~2009) - 중간평가로 임기 중 낙마
- 24대 송영승 (2009~2015) - 재선, 삼선 실패
- 25대 이동현 (2015~2019) - 재선
- 26대 김석종 (2020~ )
16.5. 사장대리
- 이복영 (1946~1947)
- 한창우 (1947~1948)
16.6. 부사장
- 윤형중 (1946~1947)
- 한창우 (1947~1949)
- 이관구 (1959~1960)
- 신태민 (1961~1962)
- 최영해 (1962~1963)
- 박상일 (1963~1964)
- 엄익호 (1966)
- 서임수 (1967~1969)
- 김동극 (1969~1971)
- 이영진 (1973~1974)
- 김희중 (2001~2003)
- 이채락 (2001~2002)
- 박명훈, 이상문 (2006~2008)
- 정동식 (2012~2016)
16.7. 부사장대우
- 최종률 (1991~1992)
17. 역대 법정등록인
17.1. 발행인
김석종17.2. 편집인
양권모(2020.03.02.~ )17.3. 인쇄인
김석종18. 주요 간부
18.1. 논설고문
- 손광식 (1990~1991)
- 이광훈 (1997~2006)
- 고영신 (2009~2016) [38]
- 조호연 (2020~ )
18.2. 주필
- 정지용 (1945~1947)
- 조용만 (1947)
- 오종식 (1947~1948/1953~1954/1957~1958)
- 이관구 (1960)
- 김팔봉 (1960~1961)
- 박상일 (1962~1964/1966~1968)
- 서정억 (1974~1979)
- 김병수 (1980)
- 이규행[39] (1980~1981)
- 윤상철[40] (1981~1987)
- 손광식 (1987~1990/1991[41])
- 최종률 (1991~1992)
- 이실 (1999~2001)
18.3. 부주필
18.4. 논설주간
- 임홍빈 (1974~1975)
- 김병수 (1976~1978)
- 이규행 (1978~1979)
- 손광식 (1986~1987)
- 이광훈 (1993~1996)
- 홍성만 (1996~1998)
- 이실 (1998~1999)
- 송충식 (2009~2012)
- 이대근 (2015~2018)
- 조호연 (2018~2020)
- 이중근 (2021~ )
18.5. 논설위원실장
- 지용우 (1988~1991)
- 이광훈 (1991~1993)
- 홍성만 (1994~1996)
- 강신철 (2000~2002)
- 박명훈 (2002~2003)
- 이상문 (2003~2004)
- 송영승 (2004~2005)
- 김학순 (2005~2006)
- 송충식 (2006~2009)
- 김철웅 (2009~2013)
- 양권모 (2019~2020)
- 이중근 (2020~2021)
- 김민아 (2021~ )
18.6. 편집국장
- 염상섭 (1947)
- 오종식 (1947~1948/1953~1954[42]/1957~1958)
- 우승규 (1948~1949)
- 신태익 (1949~1950[43])
- 민재정 (1950~1953/1954~1955/1964~1965)
- 정인준 (1956~1957)
- 강영수 (1958~1959)
- 이관구 (1959~1960)
- 최석채 (1960~1961)
- 박운대 (1961)
- 주효민 (1961~1962)
- 김광섭 (1962~1963/1966)
- 김현제 (1963)
- 박상일 (1964/1966)
- 서임수 (1964/1967~1968/1968~1969)
- 조동건 (1965)
- 송건호 (1965~1966)
- 손연순 (1966~1967)
- 조용중 (1968/1969~1971)
- 김경래 (1971~1973)
- 어임영 (1973~1974)
- 최치근 (1974~1976)
- 서동구 (1976~1978)
- 김병수 (1978~1979)
- 이규행 (1980)
- 정구호 (1980~1981)
- 이용승 (1981)
- 장명석 (1981~1985)
- 손광식 (1985~1986)
- 이형균 (1986)
- 이광훈 (1986~1987)
- 강한필 (1987~1989/1990~1991)
- 김용술 (1989~1990)
- 홍성만 (1991~1994)
- 박종화 (1994~1997)
- 이실 (1997~1998)
- 이채락 (1998~1999)
- 김희중 (1999~2000)
- 박명훈 (2000~2002)
- 강기석 (2002~2003)
- 김지영 (2003~2004)
- 이영만 (2004~2006)
- 송영승 (2006~2009)
- 박노승 (2009~2011)
- 이대근 (2011~2013)
- 조호연 (2013~2014)
- 박래용 (2014~2016)
- 김민아 (2016~2017) - 첫 여성 편집국장[44]
- 이기수 (2017~2019)
- 최병준 (2019~2020)[45]
- 안호기 (2020~2021)
- 오창민 (2021~2022)
- 김광호 (2022.06.23.~ )
18.7. 편집위원실장
- 장명석 (1985)
19. 관련 문서
[1]
창간 70주년을 맞이해 제작한 아이콘이다.[2] 현재의 경향신문이 계승을 표방하는 '舊 경향신문'의 창간일은 1906년 10월 19일이며, 1910년 12월 30일 제22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3] 전임 이동현 대표이사는 기업 유착 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4] 본래 상장 기업이었으나 주식 분산 요건 미달로 상장 폐지(舊 경향신문(현 문화방송)). 설립 이후 비상장(新 경향신문)[5] 자사주라고도 한다.[A] 2023년 5월 14일 기준[A] [8] 공모전에서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이 대상을 받은 카피라고 한다.[9] 과거 법률상 발행기관은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현재의 천주교서울대교구 유지재단)으로, 서울대교구의 국내법상 법인명이다.[10] 새로 즉위한 교황이 첫 축복을 하면서 꺼내는, 이를테면 "신사 숙녀 여러분"과 비슷한 정도의 의례적 인삿말로 널리 쓰인다. 따라서 새 교황의 첫 축복의식 그 자체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11] 법률상 발행기관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인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한국 국내법상의 법인명이다.[12] 1974년 기준. 이후 소공동 72-2번지를 거쳐 현재는 남대문로7길 23으로 주소가 바뀌었다.[13] 지금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트윈 트리 타워가 들어선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도 그가 설계했다.[14]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 한 개가 쓰기에도 모자라다고 느끼지만,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이 "31층이나 된다고" 지금의 63빌딩처럼 대접받던 시절임을 생각해 보자[15]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동아일보는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때까지 신문사 산하 방송국을 통해 AM 792㎑ 주파수로 라디오 방송을 했다. 때문에 세종대로사거리(구 광화문네거리)에 있던 사옥 옥상에 라디오 송출 안테나가 있었다. 언론통폐합 이후 용도를 잃은 안테나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남아있었지만 1990년대 광화문 사옥 옥상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철거했다.[16]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주 오래 전 어떤 사람이 경향신문 사옥의 옥상에서 청와대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는데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본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바로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17] 서울 세종대로 이마빌딩 관리업체인 이마산업 및 심재문화재단 설립자이기도 하다.[18] 여담이지만 훗날 경향신문을 인수해 8년간 경영했던 한화그룹은 이 그리스 사회주의 내각과 밀월관계였다(...)[19] 조중동을 보통 묶어서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사이에도 꽤 큰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일보가 전통적인 이념적 반공주의 보수 우익 성향이라면,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태생 답게 시장주의 보수 우파 노선, 동아일보는 둘 다 적당히 손잡고 가는 주류적 대중 우파 노선에 가깝다. 물론 시대상에 따라 중앙일보가 조선일보만큼 확고한 이념 우파적 성향을 보일 때도 있고,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 강경 보수 우파 논조를 맞출 때도 있었다. 중앙일보는 한때 범민주당계와도 손을 잡을 때도 있었고, 간혹 친페미니즘 기사가 출몰하기도 하며, 대북 정책에 관심이 많은 사주인 홍석현의 성향에 맞춰서 대북 정책에서도 비교적 유화적인 경우가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 같은 시장자유주의 + 친미 노선을 타면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대한민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주미 대사로 임명했던 것이나, 참여정부 시기에 중앙일보가 GDP 1%를 대북경제지원에 쓰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홍 회장이 주미대사에서 잘리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참여정부 까기를 시전하면서 과거의 보수 성향으로 돌아갔다.[20] 실제로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의 진보 정당의 열성 지지자들이 가지는 민주당에 대한 시각이 정확히 이러하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정책적, 정파적으로는 둘이 아무 차이가 없고, 똑같이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논리인 것. 반대로 민주당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저러한 시각을 잘 알기 때문에, 과거 한때는 진보 세력까지 '범 민주-진보'의 가족으로 생각하며 연대했지만, 지금은 그들을 그냥 '국민의힘 2중대' 정도로 생각한다. 소수 진보정당 세력들이 민주당계 정당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민의힘과 암묵적 연대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기 때문이다.[21] 어쨌든 민주당이 빅텐트 특성을 보이는 거대 정당인 이상, 제아무리 소수의 선명 개혁파라고 하더라도 일단 당내의 주류파가 되는 순간 수권 정당으로써 온건 개혁의 면모를 보여야만 하는 것인데, 이런 지점을 경향신문은 결코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22] 거대 정당에 있다 튕겨져 나와서 소수 조직이 되면, 대중이나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선명한 구호를 내세우거나, 거대 정당에 있을 때는 거들 떠도 안보던 소수 정치세력이나 시민단체와도 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23] 경향신문 뿐 아니고 대부분의 언론 매체, 특히 신문 매체들은 검찰 친화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특히 법조 기자는 기사 소스 자체를 검찰에게 취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검찰과 법조 기자들은 종속 관계를 넘어 주종관계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받는다. 오히려 언론기관들 자체가 합법적 국가 폭력을 독점한 검찰을 극도로 두려워 한다. 쉽게 말해 쿨한 척하지만 실상은 무서워서 찍소리 못한다는 이야기.[24] 하지만 실제로는 두 매체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좌파 쪽의 비판도 존재한다. 한겨레의 ‘맏형 콤플렉스’와 경향신문 ‘이대근 체제’ - 2012년 두 매체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보도를 다룬 칼럼이다.[25]물론 조선일보가 3등 이라는 시점에서 이 조사 과연 얼마나 객관적이가는.... 이란 문구가 있었지만, 사실 조선일보의 영향력은 한경오는 물론이고 중앙일보, 동아일보보다도 무척 크다.[26] 한국기자협회 창립 52주년 기자 300명 여론조사#[27] 한국기자협회 창립 53주년 여론조사 #[28] 옥스포드대학과 공동 연구.[29] 사실 한화그룹이 경향신문을 독립시킨 것도 이 때문이다.[30] 원래 <정경연구>라고 한국정경연구소 기관지였으나, 1976년에 인수된 후 <정경문화>로 개칭.[31] 신진자동차, 신진자동차고등학교 설립자.[32] 前 GC녹십자 사장, 녹십자생명 회장.[33] 前 중앙일보 주필.[34] 이후 청와대 공보수석비서관 겸 대변인, KBS 사장, 미디어서비스코리아 사장 역임.[35] 前 동양통신 편집국장.[36] 前 중앙일보 편집국장, 서울미디어그룹(서울문화사) 창업주.[37] 前 삼성증권 고문, 삼성투자신탁증권 대표.[38] 유튜브를 하고 계신다. #[39] 퇴사 이후 한국경제신문 사장, 문화일보 사장/회장, 중앙일보 고문 역임. 2007년 작고.[40] 김영삼 정부 시기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역임.[41] 이후 문화일보로 이직.[42] 이후 한국일보로 이직.[43] 한국전쟁 당시 납북됨.[44] 매체 신뢰도 하락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자진 사퇴했다.[45] 기업 유착 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
창간 70주년을 맞이해 제작한 아이콘이다.[2] 현재의 경향신문이 계승을 표방하는 '舊 경향신문'의 창간일은 1906년 10월 19일이며, 1910년 12월 30일 제220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3] 전임 이동현 대표이사는 기업 유착 논란으로 자진 사퇴했다.[4] 본래 상장 기업이었으나 주식 분산 요건 미달로 상장 폐지(舊 경향신문(현 문화방송)). 설립 이후 비상장(新 경향신문)[5] 자사주라고도 한다.[A] 2023년 5월 14일 기준[A] [8] 공모전에서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이 대상을 받은 카피라고 한다.[9] 과거 법률상 발행기관은 '경성구천주교회유지재단'(현재의 천주교서울대교구 유지재단)으로, 서울대교구의 국내법상 법인명이다.[10] 새로 즉위한 교황이 첫 축복을 하면서 꺼내는, 이를테면 "신사 숙녀 여러분"과 비슷한 정도의 의례적 인삿말로 널리 쓰인다. 따라서 새 교황의 첫 축복의식 그 자체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한다.[11] 법률상 발행기관은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인데,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한국 국내법상의 법인명이다.[12] 1974년 기준. 이후 소공동 72-2번지를 거쳐 현재는 남대문로7길 23으로 주소가 바뀌었다.[13] 지금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트윈 트리 타워가 들어선 중학동 한국일보 사옥도 그가 설계했다.[14]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면 신문사 한 개가 쓰기에도 모자라다고 느끼지만, 종로구 관철동 삼일빌딩이 "31층이나 된다고" 지금의 63빌딩처럼 대접받던 시절임을 생각해 보자[15] 현재 일민미술관으로 쓰이는 건물이다. 동아일보는 1980년 11월 언론통폐합 때까지 신문사 산하 방송국을 통해 AM 792㎑ 주파수로 라디오 방송을 했다. 때문에 세종대로사거리(구 광화문네거리)에 있던 사옥 옥상에 라디오 송출 안테나가 있었다. 언론통폐합 이후 용도를 잃은 안테나는 1980년대 후반까지도 남아있었지만 1990년대 광화문 사옥 옥상에 대형 전광판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철거했다.[16] 들리는 이야기로는 아주 오래 전 어떤 사람이 경향신문 사옥의 옥상에서 청와대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었는데 플래시가 터지는 것을 본 청와대 관계자로부터 바로 전화가 왔다는 이야기가 있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17] 서울 세종대로 이마빌딩 관리업체인 이마산업 및 심재문화재단 설립자이기도 하다.[18] 여담이지만 훗날 경향신문을 인수해 8년간 경영했던 한화그룹은 이 그리스 사회주의 내각과 밀월관계였다(...)[19] 조중동을 보통 묶어서 이야기하지만, 구체적으로 파고 들어가면 조선일보, 동아일보와 중앙일보 사이에도 꽤 큰 차이가 존재한다. 조선일보가 전통적인 이념적 반공주의 보수 우익 성향이라면, 중앙일보는 삼성그룹 태생 답게 시장주의 보수 우파 노선, 동아일보는 둘 다 적당히 손잡고 가는 주류적 대중 우파 노선에 가깝다. 물론 시대상에 따라 중앙일보가 조선일보만큼 확고한 이념 우파적 성향을 보일 때도 있고, 동아일보가 조선일보와 강경 보수 우파 논조를 맞출 때도 있었다. 중앙일보는 한때 범민주당계와도 손을 잡을 때도 있었고, 간혹 친페미니즘 기사가 출몰하기도 하며, 대북 정책에 관심이 많은 사주인 홍석현의 성향에 맞춰서 대북 정책에서도 비교적 유화적인 경우가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 FTA 같은 시장자유주의 + 친미 노선을 타면서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을 대한민국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주미 대사로 임명했던 것이나, 참여정부 시기에 중앙일보가 GDP 1%를 대북경제지원에 쓰자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던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물론 홍 회장이 주미대사에서 잘리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참여정부 까기를 시전하면서 과거의 보수 성향으로 돌아갔다.[20] 실제로 정의당, 노동당, 녹색당 등의 진보 정당의 열성 지지자들이 가지는 민주당에 대한 시각이 정확히 이러하다. 민주당이나 국민의힘이나 정책적, 정파적으로는 둘이 아무 차이가 없고, 똑같이 '그 놈이 그 놈'이라는 논리인 것. 반대로 민주당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저러한 시각을 잘 알기 때문에, 과거 한때는 진보 세력까지 '범 민주-진보'의 가족으로 생각하며 연대했지만, 지금은 그들을 그냥 '국민의힘 2중대' 정도로 생각한다. 소수 진보정당 세력들이 민주당계 정당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민의힘과 암묵적 연대를 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기 때문이다.[21] 어쨌든 민주당이 빅텐트 특성을 보이는 거대 정당인 이상, 제아무리 소수의 선명 개혁파라고 하더라도 일단 당내의 주류파가 되는 순간 수권 정당으로써 온건 개혁의 면모를 보여야만 하는 것인데, 이런 지점을 경향신문은 결코 용인하지 못하는 것이다.[22] 거대 정당에 있다 튕겨져 나와서 소수 조직이 되면, 대중이나 언론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선명한 구호를 내세우거나, 거대 정당에 있을 때는 거들 떠도 안보던 소수 정치세력이나 시민단체와도 연대해야 하기 때문이다.[23] 경향신문 뿐 아니고 대부분의 언론 매체, 특히 신문 매체들은 검찰 친화적인 성향을 띄고 있다. 특히 법조 기자는 기사 소스 자체를 검찰에게 취득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검찰과 법조 기자들은 종속 관계를 넘어 주종관계에 가깝다는 평가까지 받는다. 오히려 언론기관들 자체가 합법적 국가 폭력을 독점한 검찰을 극도로 두려워 한다. 쉽게 말해 쿨한 척하지만 실상은 무서워서 찍소리 못한다는 이야기.[24] 하지만 실제로는 두 매체가 별반 차이가 없다는 좌파 쪽의 비판도 존재한다. 한겨레의 ‘맏형 콤플렉스’와 경향신문 ‘이대근 체제’ - 2012년 두 매체의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보도를 다룬 칼럼이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