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1 23:00:05

후지모토 겐지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넘어옴
<colbgcolor=#024FA2><colcolor=#fff> 후지모토 켄지
[ruby(藤本,ruby=ふじもと)][ruby(健二,ruby=けんじ)] | Kenji Fujimoto | 등본건이
파일:Kenji Fujimoto image(54).jpg
본명 (비공개)[1]
출생 1947년 ([age(1947-12-31)]–[age(1947-01-01)]세)
연합군 점령하 일본 아키타현
국적
[[일본|]][[틀:국기|]][[틀:국기|]]
거주지
[[북한|]][[틀:국기|]][[틀:국기|]] 평양시
직업 요리사

1. 개요2. 상세3. 생애
3.1. 초기3.2. 북한으로 가다3.3. 김정일의 요리사3.4. 체포와 북한 귀환3.5. 가택연금과 탈북3.6. 김정은과 재회3.7. 재입북
4. 여담
4.1. 과장?4.2. 오류
5. 저서

[clearfix]

1. 개요

일본요리사, 작가.

북한의 제2대 최고지도자였던 김정일의 전속 요리사가 되어 13년간 근무한 인물로 유명하다.

2. 상세

1982년에 전속 요리사로 스카우트되어 북한에 거주했으며, 2001년에 전격 탈북일본으로 귀국했다. 장장 13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 동안 김정일을 지근거리에서 보아온 경험을 토대로 그의 일가에 관한 정보를 담은 책을 저술하면서 그동안 베일에 싸여 있던 북한 최고지도자 가족의 뒷이야기를 파헤친 인물로 유명세를 떨쳤다.

책을 낸 뒤 한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불성실한 성격으로 인해 자국에서 요리사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직을 전전하다 보니 북한에서의 호화로웠던 생활을 그리워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김정일이 사망한 이듬해인 2012년 북한 측으로부터 제안을 받아 월북하면서 다시 북한으로 들어갔다. 이후 현재까지 평양 시내에서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 관련 연구를 한 경력도, 학위를 받은 적도 일절 없지만 오랫동안 북한 최고위층을 대상으로 일해왔다는 경험 덕에 북한 정세 전문가에 준하는 대우를 받고 있다. 일례로 김정일의 뒤를 잇는 후계자는 과연 누구일까를 두고 2010년 전후로 온갖 추측이 난무하던 시절 김정은을 차기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이 예측이 정확히 들어맞은 바 있다.

3. 생애

3.1. 초기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북한과 관련되지 않은 사생활에 대해서는 일본인답게 유독 말을 아끼는 편이다. 생일에 대해서도 난색을 표하면서 1947년생이라는 것만 가르쳐줄 정도. 일단 밝혀진 바를 종합하자면 1947년 아키타현에서 태어났으며, 긴자의 유명 초밥집 스시센(壽司淸)[2]에서 정통으로 일식을 공부하여 요리사의 길에 입문했다.[3] 1966~1967년 사이에 첫 번째 결혼을 하여 두 딸을 낳았으나, 후술할 것과 같이 북한을 드나드는 사이 엄정녀에게 반하는 바람에 1989년 1월에 이혼하게 된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으며 어머니, 형, 누나 등의 가족이 있다.

3.2. 북한으로 가다

일본도쿄에서 초밥 요리사로 일했던 그는 일본 요리사 협회 회장의 주선으로 1982년 7월 북한의 일식당 안산관(安山館)의 요리사로 월급 50만 엔에 1년간 일한다는 계약을 하고 처음 북한에서 일하게 되었다. 당시 평양에는 일본 요리를 그리워하는 북송 재일교포들이 많았는데, 이들 상당수는 큰손이라서 장사는 매우 잘 되었고 소문이 퍼져서 후지모토는 김정일을 접대하기 위해 초대소에서 초밥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된다. 김정일은 후지모토의 초밥에 큰 만족을 표하면서 그를 만날 때마다 적어도 5만 엔 가량의 팁을 두둑이 쥐어주곤 했는데, 당시 북한인 요리사의 월급은 겨우 2만 엔 정도였다.[4]

한 번은 김정일이 수고했다면서 팁이 든 봉투를 집어던지듯이 준 적이 있는데, 이에 발끈한 후지모토는 팁을 거절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정일은 그 사건으로 후지모토를 더욱 눈여겨보게 되었다. 후지모토는 자신이 김정일을 위해서 초밥을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되자 거물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무척이나 뿌듯해하였고, 한 번은 김정일과 악수를 요청해서 허락을 받기도 했다.[5] 그러다가 1983년 5월에 이르러 안산관 담당자와의 불화로 1년을 다 채우지 않고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나 1년이 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2천만 엔 정도의 목돈을 만질 수 있었다고. 이때 김정일에게 작별 선물로 송이버섯 통조림을 받고 귀국, 사이타마현 카와고에 시의 유명 초밥집에서 5개월 정도 일하게 되었고 가게를 맡기고 싶다는 제안도 받게 된다. 하지만 후지모토는 이를 거절하고 최종적으로 2년 정도 더 일하다가 1985년에 쓰쿠이의 초밥집으로 옮기게 되었는데, 자신을 고용했었던 조총련 회사인 닛초 무역상사를 통해 다시 북한에서 일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한다.

그러다가 1987년, 북한에서 후지모토의 통역을 맡곤 했던 림상종이 직접 후지모토가 일하는 곳까지 찾아와 그에게 다시 북한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고 후지모토는 반색하며 이를 받아들인다. 북한 측에서는 다시 후지모토를 고용하고 싶다면서 3년 계약을 제안하였고, 당시 30만 엔의 월급을 받던 후지모토는 60만 엔의 월급과[6] 퇴직 후 일본에 초밥집을 차려줄 것이며, 30만 엔은 현지에서 지불, 30만 엔은 일본으로 송금하며 1년에 2번 일본 귀국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이를 승낙하고 1987년 8월부터 다시 북한에서 일하게 된다.

이번에는 고려호텔 지하의 일식집을 경영하게 되었으며 역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김정일은 후지모토가 돌아왔다는 말을 듣고 그를 즉시 불러서 다시 초밥을 만들게 했다. 김정일은 한 달에 세 번 정도 정기적으로 후지모토의 초밥을 먹었고 그를 총애하여 벤츠를 하사하기도 했다. 김정일은 후지모토에게 10년 계약을 제안하며 기본 월급 50만 엔은 물론이고 평양에 초밥집을 차리게 해줄 것이며 합영법을 무시하고 그에게 모든 수익을 가지게 해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지만, 후지모토는 일단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을 회피했다. 후지모토는 자신의 행운에 기뻐했으나 북한 체제의 엄혹함을 눈치채지 못하고 북한 간부들의 생활상에 대해서 서신으로 누설하는 등의 행동을 하여 문책을 받았으며, 1988년 5월의 일시 귀국 때 눈치 없이 김정일에 대한 얘기를 술자리에서 떠들었다가 북한 측에게 걸리는 바람에 김정일에게 사죄서를 바치고 5년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게 되면서 북한에 완전히 발이 묶이게 된다.

1988년, 김정일은 후지모토를 눌러앉히기 위해 초밥을 만들기 위해 온 후지모토가 가수 엄정녀에게 반하자 이를 눈치채고 위자료를 자신이 내줄 테니 일본의 아내와 이혼할 것을 종용하였다. 조총련 측도 후지모토에게 아내가 바람을 피운다는 정보를 주며 부추겼고, 결국 후지모토는 아내와 통화한 끝에 이미 가족관계가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고[7] 1988년 12월, 김정일의 특별 허가로 일시 귀국하여 위자료 3,000만 엔과 양육비 1,800만 엔을 주고 1989년 1월 아내와 이혼한다. 귀국 후 후지모토는 충성의 의미로 일본 여권을 당에 바치고 1989년 2월에 자신보다 20살 어린 북한 여자 엄정녀와 결혼하고 당 간부들을 위한 고급 아파트에서 살게 되는데, 이 아파트에는 현재 김정은의 집사로 알려진 김창선 등이 살고 있었다. 후지모토의 결혼식에는 김정일, 당 비서인 허담, 김용순, 부부장 장성택 등이 참석했고, 후지모토가 헤네시 코냑 한 병 반을 비우고 기절하자 김정일이 사람을 시켜 후지모토의 음모를 모조리 밀어버리는 장난을 쳤다고. 후지모토가 너무 많은 위자료를 지불했다고 일부 간부들이 볼멘소리를 했지만 후지모토가 일본의 교육비가 비싸서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자 김정일이 후지모토의 편을 들어주며 간부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고 한다.

3.3. 김정일의 요리사

이런 초대소 시설이나 김정일 패밀리의 생활상은 풍요로운 나라 일본[8]에서 온 나조차도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놀라웠다. 그러나, 그들의 성역바깥으로 한 걸음만 나가면 그날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후지모토 겐지 저 <김정일의 요리사> 中. 김정일의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일상을 서술한 내용이다.
이후 후지모토는 본격적으로 김정일의 요리사 겸 측근이 되어 그의 사생활을 수행하게 된다. 김정일의 요리를 만들어줌은 물론 김정일의 연회, 골프, 승마, 낚시, 사냥, 수상스키, 오토바이 경주 등 각종 취미를 참관하며 일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이나 평가를 내려주었다. 초기엔 눈치 없이 김정일과의 경주에서 김정일을 이겨 화나게 한다거나, 1992년 수첩에 '이런 사회주의 나라는 정말 싫다'라는 낙서를 했다가 리명제 부부장에게 들켜서 김정일에게 보고하겠다고 화를 내는 통에 경을 치기도 했다. 이때 그냥 혼자 화풀이하는 수단이라면서 리명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울며 빌어서 겨우 넘어갔지만 10년치 일기를 모두 압수당했다. 그 외에도 상당히 기묘한 광경을 보게 되는데, 김정일이 승마를 하다가 낙마해 기절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정일은 치료하는 과정에서 마약진통제를 맞으며 자신의 측근들에게 모두 맞게 했다. 이는 김정일이 혼자서 마약에 중독되기 싫다고 한 짓이었는데, 당연히 치료용으로 놓는 주사 정도로 중독될 리는 없었다고.[9] 1996년 즈음부터는 김정철, 김정은 등 김정일의 아들들의 놀이 상대도 되어주었다. 김정일 외의 엘리트로는 정무원 외교부장, 국제비서를 지낸 허담, 서기실의 김창선 등과 친했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의 상당한 신뢰를 받게 되어 1990년에 조선로동당 입당이 허용, 박철이라는 조선 이름을 받았으며, 김정일에게서 금반지를 하사받고 그가 "10년 후(2000년)에 만나서 술 먹자"라고 했다고 한다. 밀레니엄 반지였던 셈인데, 막상 2000년을 앞둔 시점에서는 그들 중 세 명이 숙청에 두 명은 병사, 한 명은 체포 상태였다고. 1991년 김정일의 최고사령관 취임 기념 사진 촬영 때도 동석할 정도였다. 이러한 신임을 바탕으로 후지모토는 로열 패밀리를 관찰하면서 훗날 그의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고급 정보들을 입수하게 되는데, 다름아닌 김정일의 아들들에 관한 것이 그 중 하나다. 후지모토는 김정일이 측근들을 불러모으는 중요한 자리에 장남 김정남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북한에 있을 때 김정남의 존재조차 몰랐을 정도로 그가 비중이 없다면서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저서에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글 내용을 보면 차남인 김정철은 지나치게 유약하고 여성스러워 김정일이 탐탁지 않게 생각했으나, 막내 김정은은 어린 나이에도 후지모토에게 당당히 지시를 하고 농구 시합 때도 명령을 하는 등 리더스러운 면모가 보인다고 평가했다.

이때는 김정은이 후계자는 커녕 그 존재조차 북한 밖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았을 때였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 최소한 본인의 생각엔 솔직한 평가라고 봐도 될 것이다. 특히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확정되면서 후지모토의 몸값이 상당히 올라 여기저기 세계 각국의 언론이나 학자들로부터 인터뷰 제의가 많이 들어와 2009~2010년대 초반 사이에 다큐멘터리나 특집 방송에 꽤 많이 나왔고, 북한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 때 김씨 일가, 특히 김정일 개인에 집중하는 다큐멘터리다 싶으면 후지모토가 매우 높은 확률로 등장했다. 김정일의 장례식에서 처음 등장한 김여정을 김여정이라고 증언한 인물도 바로 후지모토다.

후지모토는 이 시기에 신나게 지냈는데, 김정일의 특별 허가를 받고 마카오로 놀러가서 도박을 실컷 즐기다 오기도 했고 김정일의 요리를 만든다는 빌미로 세계 각국을 뻔질나게 오갔으며 그때마다 김정일은 만족을 표하며 금일봉이나 상도 많이 내렸다. 한 번은 초대소에 놀러갔다가 급히 평양으로 소환되는 바람에 객실을 청소할 틈도 없이 나서야 했는데, 그 다음 투숙객이었던 부부장 김충일이 객실이 개판인 걸 보고 중앙에 보고하여 하마터면 혁명화를 당할 처지에 놓였지만 김정일이 편의를 봐주어 6개월간 평양 지남체육관에서 초밥을 만드는 것으로 해결되었다.

이 시기 후지모토의 행적은 상당히 흥미로운데, 스스로를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요리사라고 정의하는 사람이 김정일의 총애를 통해 북한 권력의 핵심에 접근하고, 그 권력에 의해 주어진 호화로운 삶[10]에 만족하여 아내와 이혼하고 북한 여성과 결혼하는 등 사실상 북한에 영주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며, 김정일이라는 권력자가 자신의 요리 실력을 매번 극찬하면서 총애하는 것을 두고 남자는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는 일본 속담을 인용하는 등 일종의 사무라이적인 충성 정도를 바치며 뿌듯해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했을 때는 장례식 참가도 허용되어 조선중앙텔레비죤 화면에 서기실 부원 자격으로 조문하는 후지모토가 스쳐지나갈 정도였다. 하지만 생방송 때는 나왔는데 녹화방송 때는 후지모토의 모습이 지워졌다. 나중에 태영호 등이 김정일 서기실에 대해서 증언하면서 뒤늦게 달려졌지만, 서기실은 그야말로 북한 권력의 숨겨진 중핵으로 김정일의 이목구비, 수족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다. 그런 서기실의 부원이 됐으니만큼 후지모토도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위세도 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소련 대사, 대외정보조사부장을 지낸 권희경이 김정일 앞에서 불손하게 앉아있자 후지모토가 장군님 앞에서 그러면 안 된다고 자세를 고치라고 훈계한 적도 있다고 회고할 정도다.

하지만 손님의 입장이었을 때는 헐겁고 유화적이던 감시와 억압 체계가[11] 내부자가 되어가면서 점차 자신을 옥죄어오자 비로소 독재 권력의 공포를 깨닫고 탈출을 시도하는 모습은 거대하고 제한 없는 권력이 개인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에 대한 실제 사례로써 상당한 가치가 있다. 또한 후지모토가 북한에 대해 보이는 태도를 보더라도 '이런 사회주의 국가는 정말 싫다'라고 수첩에 낙서할 정도로 북한 체제의 빈곤과 잔학상, 모순을 명백히 파악했고, 자기 자신도 북한의 감시와 억압 체제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상황을 겪었으면서도 자신에게 개인적인 호의를 보이는 김씨 일가의 구성원들을 호의적으로 평가하는 모습에서도 일종의 스톡홀름 신드롬과 같은 거대 권력 앞에 선 개인의 심리적 반응을 엿볼 수 있다.

3.4. 체포와 북한 귀환

1996년 9월, 식재료 구입을 위해 일본에 귀국한 후지모토는 봉변을 당하게 된다. 북한에서 감시책으로 붙인 김용남과 강상춘이 일본 비자를 얻기 귀찮아서 당시 북한에서 하던 관행대로 도미니카 여권으로 입국하다 체포되면서 후지모토도 연루된 것이다. 김정일은 즉시 후지모토에게 북한에 돌아오라고 지시했으나 경시청에서 후지모토를 나리타 국제공항에서 입국관리법 위반 방조죄로 체포하였다. 후지모토는 처음에 모른다고 잡아떼다가 경찰들의 윽박에 하는 수 없이 자백했고, 경시청으로부터 북한의 정치범 탄압에 대한 정훈 교육을 받음과 더불어 북한으로 가지 말라는 종용을 받게 된다. 후지모토는 그만한 월급을 주는 데가 없다고 버텼으나 경시청이 놓아줄 기색을 보이지 않자 북한에 가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풀려난다.

이후 후지모토는 오키나와에서 일하게 됐으나, 18만 엔 정도의 월급에 눈물이 나올 정도로 실망했고 이후 25만 엔을 주는 곳으로 옮겼지만 그곳에선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언제 북한에서 데리러 올지 모르니 점장급으로 승진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다가 1998년에 조총련에서 접촉을 해왔고, 후지모토는 1998년 6월에 중국을 거쳐 북한으로 돌아간다. 후지모토가 없는 동안 김정일은 그가 배신한 것으로 알고 성을 내며 그를 암살하라고 지시하려 했으나 고용희가 옆에서 일본인인 후지모토가 일본이 좋아서 남겠다는데 그걸 왜 뭐라 하느냐고 뜯어말려서 없던 일이 되었다고. 어찌되었건 후지모토는 돌아오게 되면서 별다른 잡음 없이 가족과 재회하고 다시 김정일을 위한 요리를 만들게 된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김정일의 총애를 받는 후지모토에 대한 시기를 품는 사람도 많이 늘게 되었으며, 후지모토가 이너써클 안에 너무 깊숙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의 태도나 충성심 또한 전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받게 된다. 1996년에 후지모토는 김창선이 조총련에서 1995년에 작성한 자신의 감시 파일을 보여주면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일본에서도 감시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는데, 자신이 김정일을 위해 어떻게든 더 좋은 생선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닌 것은 일언반구도 없이 악의적으로 보고서가 쓰인 것에 짜증이 났으며 심지어 이혼 후 왕래가 없어진 큰딸의 주소를 반드시 알아내겠다는 추신이 붙어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게 되며 단순히 김정일의 요리사가 아닌, 당성 충만한 북한인이 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정권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한 번은 개사료를 나르다가 너무 힘들어서 자신을 미행하던 조총련 스파이에게 좀 도와달라고 하려 했으나, 어차피 다 들키고 있던 스파이가 모른 체를 하면서 도와주지 않자 욕이 나올 정도로 화가 난 적도 있다고 한다.

3.5. 가택연금과 탈북

그러던 중 북한 귀국 5개월 만인 1998년 11월, 후지모토는 식재료 공수를 위해 베이징으로 출장을 가라는 김정일의 지시를 받게 된다. 후지모토는 북한 당국의 허락을 받아 일본의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였는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 자신의 편의를 봐주었으며 북한에 돌아가는 대신 그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외국에 나올 때마다 자신에게 연락을 해달라고 부탁한 경시청 형사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도청을 피하기 위해 간단하게 전화를 끊었으나 북한 당국은 후지모토의 객실 전화기에 미리 도청장치를 숨겨둔 상황이었고, 모든 대화 내역은 낱낱이 당에 들어가게 된다. 나중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이를 김정일에게 보고한 것은 국제부 부부장, 서기실 부부장 길재경이었다. 귀국 후 그는 일본 경시청 스파이 혐의로 추궁을 당하게 되었는데, 형사에게 "맡긴 것을 잘 부탁한다."라고 말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그 부분을 집중 추궁당하게 된다.[12] 후지모토는 결국 일본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찢어버린 북한 그린 여권을 맡겨둔 것이라고 둘러대어 스파이 혐의는 벗을 수 있었지만, 그의 성분에 대한 의심은 가중되어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다행히 후지모토는 평양의 고급 아파트에서 가족들과 같이 머무를 수 있게 되었지만, 경시청에 체포되었을 때 형사들이 그가 북한에 돌아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읽게 한 탈북자 수기들에 적힌 고문이 생각나서 공포에 질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곧 로열패밀리의 생일이나 기념일이 되면 자신을 불러 요리를 시킬 것이라고 믿으며 전전긍긍했지만, 1998년은 물론 1999년 한 해가 다 가도록 김정일은 그를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후지모토는 1년 6개월을 아파트에서 술만 퍼마시면서 기껏해야 일본 스모 방송을 라디오로 듣는 것이 소일의 전부일 정도로 폐인처럼 지내야 했다. 아내 엄정녀도 처음에는 태연한 척하려 했으나 결국 불안이 폭발해서 울면서 여길 떠나자고 했을 정도였다고.

1999년 12월 31일이 되자, 1990년에 김정일이 2000년을 다 같이 맞이하자고 준 반지를 끼고 김정일이 부르길 기다렸으나 역시 소식이 없다가 2000년 4월이 되어서야 김창선을 통해서 다시 부름을 받게 된다. 김정일을 다시 만나서 울면서 용서를 빈 다음 다시 그의 요리사로 일했으나, 이 경험으로 인해 후지모토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북한 정권에 학을 떼게 된다.[13]

이후 김정일의 아내 고용희의 배려로 다시 일본으로 출장도 갈 수 있게 되면서 김정일과 같이 찍은 사진을 미리 복사하여 일본에 옮겨놓았으나, 자신의 출국을 주선해준 고용희의 체면을 생각해 그땐 탈북하지 않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다. 이후로도 이런저런 굵직한 이벤트가 있어 2000년 정주영 회장의 방북과 제1차 남북정상회담 등을 겪게 되는데, 일본인인 후지모토의 존재가 노출될까 봐 원산의 초대소에 숨어야 했다. 정주영의 귀국 후에는 김정일과 함께 정주영이 선물한 막걸리를 마셨다고. 이때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그가 요리를 준비한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왔으나 후지모토는 자신은 오로지 김정일을 위해서만 요리를 만들었다고 부인했다.

다시 해를 넘겨 2001년, 탈북하기로 완전히 마음먹은 후지모토는 김정일에게 홋카이도성게알 요리를 해주겠다고 그를 구슬러[14] 일본 출장 허락을 받게 된다. 탈북 직전 승마를 하다가 낙마하는 통에 크게 다쳐서 한동안 요양을 해야 했지만, 더 있다간 다신 북한을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라 여겨[15] 후지모토는 다소 무리하여 2001년 4월에 탈북하게 된다. 김정일이 후지모토가 떠나기 전날 "사요나라"라고 인사했는데, 후지모토는 과거 김정일에게 사요나라 라는 인삿말은 다신 안 볼 때 하는 것이라고 웃으며 가르쳐줬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돌아오지 않을 생각이었기 때문에 아무 대꾸없이 목례만 간단히 했다고 한다. 다만 북한을 떠나기 전 김정은과 포옹으로 작별 인사를 하며 꼭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하였다. 탈북 직전에는 김정은이 수령이 되어 자신에게 같이 공화국으로 돌아가자고 하는 꿈도 꿨다고. 결국 20년 후 후지모토가 김정은에게 한 약속은 사실이 되었다.

한편 그의 탈북으로 인해 평양에 남아있던 엄정녀와 그의 자녀들은 수용소로 끌려가 힘든 생활을 했다고 전해졌는데[16], 최근 기사에서는 평양에 살고 있고 가족과도 만났다고 전해진다. 아마 후지모토의 재입북을 준비하느라 석방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이후 후지모토는 2003년 <김정일의 요리사>를 집필한 것을 시작으로 약 10년간 일본에서 칩거하며 북한 김씨 일가에 대한 정보를 많이 까발렸다. 김정일의 사생활을 퍼트렸으니 혹시나 북한에서 암살자 등을 보내 해코지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살았으며[17], 이 때문에 TV에 출연할 때마다 북한의 살인 청부업자로부터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큰 스카프선글라스시체매 조종수처럼 변장해서 얼굴을 감췄다. 근데 이 모습이 더 눈에 띈다... 가명을 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라고. 여하튼 북한에 있을 때 호의호식한 것도 사실이라서 <김정일의 요리사>를 맨 처음 내놓을 때 책 후기로 김정일에게 보내는 사죄문을 써서 13년이나 김정일을 모실 수 있었던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지만, 주체사상을 공유하지 않는 일본인이 김정일의 측근이 되는 것은 무리였다면서 상당히 저자세로 사과를 하고 있다.[18]

이후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김정일의 사치 행각을 지적하면서 그를 폭군으로 생각하지 않느냐는 유도성 질문에도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그 정도는 대단한 사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 등 김정일을 원색적으로 비방하는 것은 거부했으며, 기쁨조 문제에 대해서도 김정일을 모시는 무용수들이 간부들 상대로 성접대를 강요당한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며 그럴 리도 없다고 부정했다.

3.6. 김정은과 재회

2011년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이 정권을 잡은 후 2012년 김정은의 초청으로 7월 21일부터 약 2주일간 북한을 방문했다고 한다. 2012년 6월 16일 후지모토가 편의점에서 신문을 사서 돌아오는데, 어떤 사람이 북한에 남겨진 가족의 사진과 편지, 그리고 김정은의 서한을 전해주었다. '안전은 보장되어 있으니 걱정말고 방북하라.'라는 메시지가 있었지만 김정은의 서명이 없어서 믿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한 달 뒤 다시 그 사람이 찾아와서는 상술한 "2001년의 약속을 지켜달라."라는 김정은의 말을 전했는데, 이는 후지모토와 김정은 두 사람만 아는 내용이라 방북에 대한 확신이 섰다고 한다.[19]

파일:김정은 후지모토 재회.jpg 파일:북한 재회2.png

그리하여 마침내 후지모토는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은, 김여정과 재회하였고 리설주 등을 만났는데, 그가 울면서 한 "배신자 등본건이[20]가 돌아왔습니다."라는 첫 인사에 김정은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웃으면서 "됐다. 배신한 건 잊은 지 오래다. 어릴 때부터 함께 놀았던 것 기억하고 있고 고마웠다. 앞으로는 언제든지 조선(북한)에 와도 좋다."라고 응수했다고 한다. 이때는 선글라스와 스카프도 착용하지 않았고 턱수염도 밀어버렸는지 보이지 않는다.

결국 김정은이 그를 초청한 목적은 은밀한 성향이었던 아버지 김정일과 다르다는 김정은의 개방적 성격을 국제 사회에 선전하기 위한 목적과, 김정일 가족의 비밀을 많이 아는 후지모토에게 철저히 비밀을 지키게 하려는 목적 등이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북한 입장에서는 명백한 배반자이다 보니 김정은이 직접 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 간부들은 후지모토에게 김정은 앞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 같은 배반자를 환영하지 않는다."라고 발언했으나, 김정은은 "다 옛날 일인데 왜 자꾸 그러냐? 그만해라."라면서 주변의 반발을 넘겼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후지모토는 변장을 하지 않은 모습이었으며 사진이 언론을 통해 뿌려지는 바람에 더 이상 변장이 소용없게 되었다. 김정은이 직접 환대했을 정도면 최소한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어느 정도는 해방된 셈이기도 하다.

사실 굳이 김정은의 환대가 아니더라도 후지모토의 책을 보면 딱히 북한에서 위협받을 만한 건덕지가 없었다. 물론 김씨 일가의 사생활을 적어놓기는 했지만 책 내용에선 그다지 나쁘게 적어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씨 일가의 사치스러운 생활에 대한 내용이 많기는 하지만 어차피 그 부분은 전 세계에 여러 통로를 통해 다 알려져 있는 내용일 뿐이고, 북한 주민들에게만 알려지지 않고 숨기면 되는 내용이라 북한에서 그 책을 출판해 인민들에게 보게 해주는 정신 나간 짓을 저지르지 않는 이상 애초에 본질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21] 그리고 사생활이라 해봐야 무슨 대단한 가십거리가 아니고 그저 외부에서 알기 힘든 가정사와 여러 일화 정도이며, 오히려 외부에 정신병자 내지는 망나니 수준으로 알려져 있던 김정일의 인간적인 면들이 고스란히 묘사되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북한 지도부 입장에서는 꽤 고마운 사람이다.[22] 읽다 보면 의도적으로 본인이 살해당할 만한 내용은 쓰지 않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또한 후지모토는 무슨 핵개발과 연루된 것도 아니고, 정치 군사적으로 하등 상관없이 그냥 요리사일 뿐인 사람이라서 숙청할 건덕지조차 없다. 게다가 이미 후지모토는 외부 세계에 나름대로 유명해졌기 때문에 이제 와서 그를 위협하면 당연히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북한이 폭압적인 나라라고 광고하는 꼴이고[23] 북한은 이전에 납북 일본인 사건으로 큰 곤욕을 치렀기 때문에 굳이 외국에서 쓸데없는 암살극을 벌이는 것은 괜히 어그로일 뿐이다.

또한 후지모토는 김씨 부자의 산해진미를 제공한 장본인이다. 따라서 김정일, 김정은의 입맛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라서 그에 맞게 요리를 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찾아내기 굉장히 어렵다. 다른 사례로 사이쇼 죠타이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최측근에서 모신 골수 히데요시 신봉자였을 뿐만 아니라 히데요시에게 임진왜란을 계속 부추긴 장본인이라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살해당할 상황이었으나, 도쿠가와는 이런 사이쇼를 살려서 자기 측근으로 재활용했는데 그 이유는 사이쇼가 한국어(조선), 중국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에 모두 능했기 때문이다. 후지모토 역시 김정은이 계속 요리사로 써먹어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후지모토는 일본에서 서방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도 김정일을 쇼군(장군)이라 부르고 김정남, 김정철, 김정은 삼형제는 왕자, 김여정은 공주라고 부르는 등 깍듯한 태도를 유지했고[24], 어느 날 김정일이 자신을 좋아하냐면서 좋아한다면 뽀뽀를 해달라는 요구를 하길래 그의 뺨에 무수히 입을 맞추어주었다는 일화나 김정일에게 성게알의 맛을 가르쳐 주었던 일화를 소개하는 등 북한 입장에서 전혀 거슬리게 느낄 일이 없었다. 납북 일본인 문제도 김정일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에게 사실이라고 인정하기 전까진 북한이 무슨 이익이 있어 그런 짓을 하겠냐고 경시청 형사들에게 반박하기도 했고, 김정일의 김일성 암살설에 대해서도 모두 낭설이라고 부인했다. 그리고 한 가지 정말 재밌는 점은 암살당한 이한영은 김정일의 측근들의 각종 비리와 사고 친 경력을 실명을 그대로 까서 마구 적어놓은 반면, 후지모토는 김정일의 측근들에 대해서도 그냥 술자리 일화 정도의 가벼운 가십만 얘기한다거나[25] 고위직임에도 훌륭한 인품을 가졌다고 칭찬하는 등(가령 허담, 김기남, 김시학 등) 매우 조심스러운 서술을 했는데, 이것이 북한에서 그를 살려둔 또 다른 이유가 될 수가 있다. 그리고 굳이 누가 좀 째째하게 굴었다고 욕을 할 때는 실명을 적지 않기도 했다.

방북 당시 김정은이 '북한과 일본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후지모토는 "최악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방북 직후인 2012년 8월 말에 북한으로 이주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는 기사가 보도되었으나, 그 뒤의 여러 상황을 보면 사실무근인 듯 하다. 사실 2012년 9월에 다시 한 번 방북하려 했으나 북한에서 입국 허가를 내주지 않아 못 들어갔다는데, 후지모토 본인은 일본 정부의 방해로 인해 생긴 일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여담으로 이후 북한, 특히 김정은에 대해 알게 모르게 옹호 발언을 하게 된다. 사실 후지모토는 외부와 격리된 것만 제외하면 북한 체제에서 엄청난 혜택을 받았던 사람이니 그의 발언이 일본을 비롯한 서방 국가의 입장과 배치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종북마냥 무작정 옹호하는 것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북한이 올바른 길로 나가기를 바란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기사를 요약하자면 "정치범 수용소를 닫아 정치범을 석방하고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납치한 사람들은 조국으로 돌려주며, 북한 인민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노력해 달라"

최근 미국인 기자가 가서 인터뷰를 했는데, 일본식으로 직답 없이 둥글둥글한 내용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이 미국인 기자가 내린 결론은 "이 사람은 나이 먹어가는 일본인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젊은 아내(엄정녀)와 자식이 있는 북한으로 가서 호텔에 식당을 내고 호의호식하고 싶어 한다"였다. 그리고 이 분석은 사실이 되었다.[26]

2013년 말에 장성택이 처형되자 이에 대해 다소 흥미로운 발언을 했는데, 김정은이 사실은 여러 여자와 만나는 것을 극도로 꺼리며 이 때문에 기쁨조를 창시하는 등의 문란한 가치관을 지닌 장성택을 제거해 버렸다고 증언했다. 실제로도 김정은의 에 대해 설만 난무할 뿐 실제로 확인된 바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럴듯하기도 하고, 거기에 2017년 3월에 기어코 죽여버린 자신의 이복형 또한 실제 여러 첩을 뒀던 것을 감안할 때 두 사람의 특유의 여성 편력이 혐오스러웠던 것도 제거 이유 중 하나로 보인다. 물론 그렇다고 단순히 취향이 다르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런 건 아니고 체제 유지에 위협적인 존재인 점이나 둘 다 친중파라는 점 등 정치적인 이유가 더 컸겠지만 말이다. 다만 저 주장이 장성택의 처형으로 인한 두려움이 반영된 것이라 신뢰할 수 없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3.7. 재입북

2017년 2월, 김정남 피살 사건을 계기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는데, 몇 달 전 재방북 이후 주변 사람들과의 연락이 끊긴 상황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후지모토가 북한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다녔기 때문에 김정은에게 처리되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2017년 1월에 평양에 음식점을 개업했다는 소식이 나왔으며, 일본에서는 그에게 외환법 위반 혐의가 있다고 보는 듯 하다. 일본은 북한의 핵, 미사일 개발 등에 따른 대북제재의 일환으로 인도적 목적의 지원을 제외한 대북(對北) 무역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이 때문에 북한은 싱가포르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 위장 기업을 설립해서 고위층의 수요가 많은 일본산 식품이나 의류, 가전제품 등을 1월 동안 같은 수법으로 우회 수입하고 있다가 일본 경찰에게 적발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2002년부터 17년 동안 북한에 레이더를 밀수출했다가 적발되었다.

2017년 2월, 평양에 라멘 음식점을 개업했다고 한다. 김정일 시절처럼 전속 요리사는 아니라도 김정은과도 어릴 적부터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계속 배려를 받는 듯 하며, 북한에서 특권층만 살고 있는 평양 중심부[27]에 거주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사실상 암살 우려는 사라진 듯하다. 하지만 장성택의 예도 있다시피 암살에서는 어느 정도 자유롭지만 아직 사형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다는 드립이 나오기도 했다.

강철환의 경우에는 김정은이 후지모토를 환대한 것은 김정은 집권 초기 일본과의 관계 개선의 일환이었는데, 북일관계 개선에 실패하면서 후지모토는 이제 인질에 불과한 찬밥 신세가 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후지모토가 민주당 중의원 노다 요시히코와 접촉하는 등 일본과 북한 사이의 창구 역할을 어느 정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던 2019년 6월 26일, 돌연 북한 당국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카더라가 전해졌는데 같은 해 7월 18일에 조선신보의 보도로 오보임이 밝혀졌다. 콜린 크룩스 당시 주북 영국 대사[28]와 인증샷을 찍기도 하는 등 여전히 건재한 듯 하다.

2020년 이후 코로나19로 인해 북한 정부가 국경을 폐쇄하고 대사관들도 닫아버리면서 근황이 전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제 와서 숙청당할 이유는 없기도 하고[29] 2024년 현재도 평양에서 그대로 거주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2021년 어느 유튜브에서 후지모토가 운영하는 요리집에 직접 가본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가게 이름은 타카하시(たかはし)이며[30], 2017년에 업로드된 다른 방문 영상[31]을 보면 주 메뉴는 세트당 50~150달러 상당의 초밥 일식(초밥 세트)이다. 물론 곁가지 메뉴로 우동이나 라멘들도 판매하고 있지만 주력 메뉴는 아닌 듯. 북한 사람으로 추정되는 조수 역시 그처럼 두건과 앞치마를 두르고 있다. 초밥집 사진 모음

4. 여담

  • 북한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요인 중 하나가 북한 요리를 좋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첫 북한 방문 때도 북한 측에서 내놓은 요리에 대단히 만족했으며, 일본 요리보다 상당히 매운 맛이었음에도 매운걸 즐기기 때문에 식생활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이 간 다른 일본인 요리사는 매운 걸 전혀 못 먹어서 대단히 고생했다고.
  • 최초로 북한을 방문한 시점이 김일성이 건재하던 시점인지라 김일성을 위해서도 요리를 만든게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고, 나무위키에도 그렇게 적힌 적도 있었지만 후지모토는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오로지 김정일을 위해서만 만들었다고 분명히 밝혔다. 김일성은 만난 적도 없다고 한다.
  • 국내 연구자로는 북한 엘리트에 대한 권위자이자 세종연구소의 북한센터장인 정성장 교수와 교류하였다. 정성장 교수는 그의 김정은 후계자론에 대해서는 신중한 입장을 보였으나, 후지모토와의 2차례 직접 인터뷰와 서신 교환을 통해서 북한 로열 패밀리에 관한 상당한 정보를 입수하는데 성공했고, 나중에 상당수 사실로 드러났다. 근데 후지모토가 북으로 넘어가면서 이젠 교류도 힘들듯….
  • 키가 160cm도 안 될 정도로 일본인 평균을 밑도는 단신이다. 위의 김정은과 포옹하는 사진으로 알 수 있는데 김정은도 168cm로 그리 큰 키가 아닌데 그런 김정은보다 훨씬 키가 작다.
  • 돈을 상당히 밝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책 김정일의 요리사에서도 김정일에게 고용될 때, 다른 사람들의 두 배를 받고 싶다고 욕심을 부리는 내용이 들어가있으며,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나 다큐멘터리 출연료를 언제나 꽤 세게 불렀고 북한에 다시 넘어간 것도 김정일 최측근으로 누리던 호화로운 생활을 잊지 못해서였다고 한다. 물론 일본으로 다시 갔을 때 요리 실력이 부족해 받았던 급여가 일본에서 풍족하게 먹고 살기에는 부족한 돈이었고, 암만 책 팔아서 돈을 벌었다고 해도 북한 물가가 일본 물가보다 훨씬 싸니 그간 모은 돈으로 북한에서 넉넉하게 대접받으며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할 여지가 크기는 했다.
  • 후지모토 겐지와 비슷한 사례로 우간다의 독재자인 이디 아민의 요리사였던 오톤데 오데라가 있다. 그는 케냐 출신으로 우연히 이디 아민이 이끄는 부대의 주방 일을 하면서 눈에 띄어 그의 전속 주방장이 되었다. 이디 아민은 그의 음식을 좋아해서 오데라는 매우 후한 대우를 받았지만, 이디 아민이 워낙 제멋대로인지라 항상 공포를 느끼며 살아왔단다. 결국 우간다와 케냐 간의 외교 갈등이 벌어지자 케냐 출신이란 꼬투리가 잡혀서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강제로 쫒겨났다고. 이디 아민의 주방장으로 활동하면서 접한 그의 사생활에 대해 회고하였는데 그의 각종 기행들은 대부분 사실이라고 인정했으나 사람 고기를 먹었다는 식인설은 강하게 부정했다고.

4.1. 과장?

책에서 지나치게 자기 과장이 심하다. 자신이 만능 스포츠맨이고 잡기에 상당히 능하며 몸매도 근육질에 우락부락하다고 했으나 주변인들에 증언에 의하면 학창시절 운동능력도 그닥이었고 학업성취 능력도 대단히 떨어졌다고 하며 통통한 편이었다고 한다. 성격은 욕심이 많고 이기적이며 승부욕이 강했다고 한다. 또 허풍이 심했다고 한다.

요리 실력은 그 입맛 까다로운 김정일이 총애했을 정도이니 그런대로 좋은 편이기는 한 것으로 보이나, 자서전에서는 이 역시 대단히 과장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김일성보다 오히려 더 방탕한 생활을 하며 온갖 산해진미만 먹었다던 김정일이 본인의 요리에 맛들린 뒤로는 "제 아무리 실력 좋다는 요리사들도 이런 요리는 못 만든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나 그전까지 북한에서 일식요리를 만드는 요리사가 마카오 호텔에서 잠깐 일식요리 파트를 맡아본 중국인을 데려오는 수준에 불과했다가 10여년 경력의 일본인 요리사가 만드는 일식을 먹었으니 저런 반응이 나왔던 것일 확률이 높다.[32] 이 사람과 같이 식당에서 일했던 주변인들에 말에 따르면 북한에서 김정일 전속 요리사로 있었다길래 파격적으로 조리장으로 채용을 했는데 대단히 불성실하였고 요리실력도 조리장급 수준은 아니었다고 한다.[33][34]

4.2. 오류

  • 기억에 의존하는지라 발언이 좀 왔다갔다 할 때가 있다. 예컨대 그는 2001년에 탈북했는데 나중에 2003년, 이라크 바그다드가 함락될 때 자신이 김정일 옆에 있었다는 주장을 했다. 본인도 확신은 못하고 "후세인이었던가? 누군진 몰라도 어느 나라 독재자가 망할 때 옆에 있었는데…"라고 한 것을 보아서 91년 걸프전과 헷갈렸거나 아님 정말로 다른 나라 독재자가 망하던 순간(예를 들어 89년에 죽은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등)과 헷갈린 모양이다.[35] 하지만 대부분의 중요한 주장이 일치하고 그가 북한에서 김정일의 측근으로 오래 일했다는 증거가 확실하여서 매우 중요한 북한통으로 인정받고 있다.
  • 현재 북한의 2인자로 끈질긴 정치적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최룡해가 1998년에 처형되었다는 잘못된 정보를 기술하였다. 당시 최룡해가 비리 혐의로 숙청된 것은 사실이나 혁명화 작업 정도를 거쳤는데 건너 듣는 특성상 처형설을 잘못 들었는지 지금까지도 잘 나가는 최룡해는 <김정일의 요리사>에선 외화 잘못 쌓아뒀다가 죽은 양반으로 나온다. 다만 최룡해는 당시 자강도로 추방되어 혹독하게 고생하다 자살시도까지 한걸로 알려졌고 북한의 혁명화는 거의 죽다가 다시 못돌아 오는경우도 많거나 팔다리 하나 잘린다음에 간신히 사는 경우도 있으니 당시 경험상 아주 틀렸다고 보긴 어렵다. 나중에 나온 책에서는(북한의 후계자가 왜 김정은인가 등) 자신도 최룡해가 다시 김정일을 수행하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다면서 오류를 정정했다.
  • 김여정의 존재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데 이름은 김일순으로 적었다. 애초에 김여정이란 이름이 평양시내 주소록에 본인 단 한명일 정도로 나중에 고르거나 타인들을 강제 개명시킨걸로 추정되므로 원래 이름으로 추정. 이한영도 원래 본명은 이일남이었으니 있음직한 이름이다.
  • 가장 유명한 오류로 김정은의 이름을 김정운(雲)으로 소개했다. 사실 이 문제는 후지모토 개인의 문제만도 아니고 당시 학술서나 정부 보고서에도 죄다 김정운으로 적고 있던 판이며, 2010년에 김정은 찬양 포스터가 공개되고 나서야 김정은인게 확인될 정도였다. 이에 대해 후지모토는 정은이나 정운이나 일본인의 귀로는 분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랬다고 해명했다. 김정철의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한자를 써서 정확한 철자를 물었기 때문에 확실히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고용희의 경우에도 고영희로 오타를 냈다. 하지만 2012년 방북했을 때 고용희의 묘를 참배하게해달라고 부탁한 후 정확한 이름 표기를 확인하게 되면서 기존의 고영희 표기가 오류라는 인터뷰를 함으로 이를 시정했다. 김정운이 잘못된 이름이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대북 정보력의 한계가 있음이 드러난 사건이 학계에 어느 정도 충격을 주었다. 다만 평양 방언에서 /ㅡ/와 /ㅜ/, /ㅗ/와 /ㅓ/, /ㅛ/와 /ㅕ/ 등의 모음은 한국어의 타지역 방언보다 유독 더 비슷하게 발음하는 경향이 있고, 일본어로는 한국어의 "은"이나 "운"은 모두 ウン로, "용"이나 "영"은 모두 ヨン로 표기하기 때문에 후지모토도 번역하는 과정에서 몰랐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은 일본어 화자 입장에서 평양 방언 화자가 발음한 '김정은'은 김종운인지, 김종은인지, 김정운인지, 김정은인지 구분이 굉장히 어렵다. 다만 김정은의 아버지 김정일, 형인 김정철의 가운데 글자가 '정'인것은 후지모토는 명백히 알고 있었으므로 배경지식이 없던 마지막 글자 '은'을 구별하지 못한것이나, 후지모토의 구술증언을 종합한 북한 전문가들이 남자이름이 정은인것보다 정운인것이 좀 더 합리적으로 보여 이로 확정한 것이 오류로 이어진것이다.

5. 저서

  • 김정일의 요리사 (월간조선사, 2003년)
    현재는 절판되어 시중에서 구하기는 몹시 힘드므로, 흥미 있는 사람은 공립도서관을 찾아보는 쪽이 빠를 듯도 하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도 본문 내용을 볼 수 있다. 내용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먼저 김 씨 일가와 지나치게 가까운 입장에서 쓴 것이라 객관성이 상당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김정일 및 그 주변 인물의 생활상을 근거리에서 관찰한 자료로써 가치도 대단하다. 참고로 그의 직업이 요리사다보니 김정일에게 그가 해줬던 요리 이야기와 음식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책 내용도 가십을 모아놓은 것에 가까운 가벼운 구성이라 읽기 편하다. 사실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는 그런 구성 때문에 '또 일본 찌라시들이 북한 가지고 괴담 늘어놓고 있다'라는 식으로 무시당한 측면도 있다. 내용이 자극적이지 않은 데다, 후지모토 겐지라는 인물이 실제로 북한에서 일하다 왔다는 것이 경찰 등을 통해 확인되었고, 무엇보다 그가 후계자로 예측한 김정은이 실제로 3대 세습으로 권좌에 오르면서 현재는 상당히 신뢰성 있는 자료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후지모토 겐지의 반응을 삭제 했다고 출판윤리까지 들먹이며 큰 문제로 주장하는 의견이 있으나 원래 번역판은 원저자의 상의하에 편집을 하는 게 기본이다. 지금까지 후지모토측에서 항의했다는 어떠한 보도도 없는판에 별 근거없는 억지 추측이다.
    여담으로 북한에서 김정일의 실체가 드러나는 데에는 이 책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2006년부터 북한 무역관계자들과 중국 방문 북한인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중국 단둥연길 지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자 북한 사람들이 중국에 나오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후지모토의 책을 주문할 정도였는데, 한 조선족은 북한 사람들이 처음에는 "우리 장군님을 중상 모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책이다"고 흥분했지만, 책 내용에 실린 사진들[36]을 보고는 얼굴색이 변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2000년대 후반부터는 김정일의 호화찬란한 식탁과 기쁨조 파티가 북한 내에서도 널리 알려져 김정일이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 金正日の私生活: 知られざる招待所の全貌(김정일의 사생활: 알려지지 않은 초대소의 전모)(東京: 扶桑社, 2004).
  • 核と女を愛した將軍樣(핵과 여자를 사랑한 장군님)(東京: 小学館, 2006).
  • 北の後継者キム・ジョンウン(中公新書ラクレ, 2010):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라는 제목으로 맥스미디어에서 2010년 정발.
  • 引き裂かれた約束 全告白·大將同志への傳言(찢어진 약속: 전고백, 대장동지의 전언)(東京: 講談社, 2012)[37].

[1] 현재까지 공개한 적이 없다.[2] 당시 도쿄의 평균 초밥 가격이 한 접시에 100엔 하던 시절인데 스시센은 3천 엔을 받을 정도로 정통 고급 초밥집이었다.[3] 성깔이 있는 게 이때 보여지는데, 보조 시절에 도미로 장난을 치다가 크게 꾸중을 듣게 되자 대판 싸우고 때려치우려 했는데 어머니가 주방장에게 눈물로 싹싹 빌어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고 한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에서 부모가 직접 나서서 사과를 하면 상대방은 짐짓 용서하는 척 넘어가주는 게 관례이다.[4] 다만 이건 당시 경제력의 사정을 감안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이 당시의 일본에서야 2만 엔이 잘해봐야 누추한 방 1달치 월세 정도지만, 북한에서는 2만 엔을 당시 환율로 계산하자면 100원으로 평범한 직장인 1달치 봉급이었다. 한국으로 치면 인도네시아필리핀, 베트남에 취직해서 월 100만 원을 받았는데 해당 국가에서 월 100만 원이 직장인치고 많이 받는 것이지만 한국 기준에서 박봉인 것과 마찬가지이다. 거꾸로 얘기하자면 후지모토가 북한 직장인 두세 달치 급여를 단박에 받을 정도로 특급으로 대접을 받은 것이다.[5] 이때 감정 변화가 생겼는지 김정일이 돈봉투를 던진 것은 다시 생각해보니 그냥 테이블에 내려놓는다는 게 모서리에 부딪히면서 바닥에 떨어진 걸 괜히 오해한 거 같다며 실드치기도 했다.[6] 다른 일본인 요리사들의 월급은 40만 엔이라서 닛초 무역에서 난색을 표하기도 했으나 후지모토가 자신의 급여를 숨긴다는 조건으로 성사되었다.[7] 1987년 10월 조총련으로부터 아내의 바람 소식을 듣고 통화를 해보았으나 도중에 아내가 끊어버렸으며, 이후 1988년 귀국 때는 가족들 중 누구도 얼굴도 안 내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지모토는 가정을 팽개치고 북한에만 있었는데도 23년이나 결혼 생활을 유지해준 아내가 고맙다면서 이 부분에는 말을 아끼고 있다.[8] 참고로 당시 북한은 일본이 선진국이라는 사실도 은폐해 일본이 (남조선보다도 가난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착각하는 사람까지 나왔다.[9] 학자들은 김정일이 중독 운운한 것은 핑계고 암살을 두려워해서 이랬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10] 요리사로서 김정일을 따라다니며 각종 호화로운 레저를 즐긴다거나, 벤츠를 선물받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160km에 이르는 질주를 즐긴 이후 자신이 일본에서 평생을 초밥 요리사로 일했다고 이런 차를 몰아볼 수 있었겠느냐고 기뻐하는 등 사실상 김정일 정권에 의해 주어진 혜택을 꽤나 즐겼던 것이 거의 확실하다.[11]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고영희가 "우리가 한 일이 아니다. 무슨 나쁜 일만 있으면 다 우리가 했다고 누명을 뒤집어씌운다"라고 말하는 등 북한 생활 초기에는 일종의 외부인으로서 함부로 건드리지도 않고 속내를 보여주지도 않는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12] 정확히 뭘 맡긴 건지는 후지모토는 책에서도 밝히지 않았다.[13] 후지모토가 없는 동안 마카오 사업가가 김정일을 위해 출장 요리사를 불렀으나 후지모토보다 실력이 못한지 김정일이 만족하지 못했다고 한다.[14] 지난번 일본 방북 때 계획적으로 성게알 맛집 탐방 프로를 비디오로 녹화해서 챙겨둔 상황이었다.[15] 불과 2달 후 김정남 추방 사건이 벌어졌고, 2002년 1차 북일 정상회담과 납북 일본인 사태가 벌어져 실제로 경계가 더 삼엄해졌다.[16] 월간조선과의 인터뷰에서 후지모토는 이러한 얘기에 당혹해하면서 사생활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겠다고 답변을 거부했다.[17] 실제로 1982년 탈북해 대한민국에 정착, 김정일의 여러 사생활을 폭로했던 처조카 이한영은 1997년 간첩에 의해 자신의 자택 앞에서 살해당했다. 일본도 조총련이 있기 때문에 북한의 암살 위협으로부터 안전하지 않다.[18] 이 편지에서 1998년 무렵 후지모토를 탐탁지 않게 여긴 김정일이 오키나와로 공작원을 보내 그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고용희가 "후지모토는 자기가 편해서 일본에 있는 것이니 그냥 놔두면 안 되겠느냐"라고 만류해 그 계획을 포기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19] 다만 이 약속 자체는 예전에 후지모토 스스로 자기 저서인 <김정일의 요리사>에서 언급한 바가 있다. 물론 저서에 안 쓴 내용이 있을 가능성은 염두에 둬야 한다.[20] 일본 이름인 藤本健二의 한국식 한자 독음[21] 이한영은 책 내용에 김씨 일가에 대한 비방 내용이 적힌 것 때문에 결국 암살당한 것과 대비된다.[22] 실제로 책을 보면 김정일이 내가 지도자인 거 신경 쓰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내기하자는 호탕한 모습도 나오고, 성혜림이 밖에선 뭔 일만 터지면 공화국 탓 좀 안했으면 좋겠다는 등 나름 북한 입장을 대변해 주기도 한다.[23] 물론 남한에서 북한의 이미지는 더 떨어질 데도 없지만, 남북한 외부에는 어쨌든 정상적인 주권국가로 취급받고 있기 때문에 이미지 관리를 하긴 한다.[24] 김일성에 대해서는 故 김일성이라고 적을 정도다.[25] 예외가 있다면 김명국 대장의 술자리 실언 사건 정도. 하지만 이건 김정일이 이미 알고 있던 일이라서 책에 적어도 추가 처벌을 받을 일이 아니었다.[26] 엄정녀와 자식들은 후지모토의 탈출 이후 지방으로 쫓겨나 에스키모(아이스크림) 장사를 하며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후지모토는 엄정녀와의 사이에서 1남(정웅) 1녀(정미)를 두었는데, 아들은 후지모토의 재방문 3주 전에 돌연사했다고 한다.[27] 410호 구역이라고 하는 농촌이 있는 평양 외곽과도 차별적으로 대우받는 것이다.[28] 현재는 주한 영국 대사다. (2022년 부임)[29] 이미 대놓고 김정은과 얼싸안으며 해후했고, 배신자는 쳐내야 한다는 주변의 반발에도 김정은이 그저 웃어넘기는데 숙청할 이유는 전혀 없다. 애초부터 정치와 관계가 없는 요리사라서 그렇다.[30] 일본에서는 그의 본명으로 추정한다.[31] 이 영상은 북한의 선전 당국에서 올린 것인데, 1분 7초 경에 썬연료가 대놓고 보인다.[32] 부자세습이나 1983년 아웅 산 묘소 테러로 북한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 북한에 가기 꺼렸기 때문이었다.[33] 다만 후지모토 겐지가 북한의 왕족들을 위해서 오랫동안 요리를 했기 때문에 그들의 입맛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 저런 평가를 들었을수도 있다. 그래도 요리사라고 불릴 자격 정도는 있는 듯하다.[34] 본인도 김용삼 월간조선 편집장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요리 솜씨가 최고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며 '일본에는 나보다 요리를 훨씬 잘하는 사람이 많다'고 인정했다. 실제로 일본은 프랑스와 함께 미쉐린 가이드 3스타급 식당이 가장 많은 국가에 속할 정도로 뛰어난 요리사들이 많다.[35] 어쨌든 그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이 테레비를 보다 말고 문제의 독재자에게 바보라고 욕을 했다고 한다.[36] 김정일/여담 문서의 2.2.1 / 2.2.2 문단에 실린 김정일의 별장 사진들을 포함한 것이다.[37] 2012년, 김정은의 초청을 받고 북한 방문 후 쓴 마지막 북한 관련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