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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대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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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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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순 공방전 203고지 전투 봉천 전투 황해 해전 쓰시마 해전

1. 개요2.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2.1. 대한제국
2.1.1. 친러 동맹국 시나리오2.1.2. 열강이 공인한 중립국 시나리오2.1.3. 러시아의 한반도 병합 시나리오
2.2. 러시아 제국2.3. 일본 제국2.4. 청나라2.5. 영국2.6. 독일 제국
3. 전쟁 발발 이전에 러일 양국이 한반도 분할에 합의했더라면?
3.1. 대한제국
3.1.1. 친러 위성국 vs 친일 괴뢰국 시나리오3.1.2. 고립무원 끝에 멸망 시나리오3.1.3. 자체 공산혁명 후 소련 구성국 편입 시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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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일전쟁으로부터 파생되는 대체역사에 관한 문서.

2. 러시아가 전쟁에서 이겼더라면?

2.1. 대한제국

2.1.1. 친러 동맹국 시나리오

러시아는 극동부동항을 간절히 원했던만큼 자국과 가까운 한반도 북동부의 항구도시 함흥이나 원산 앞바다인 영흥만, 혹은 대한해협을 통해 동중국해서태평양 방면으로 진출할 수 있는 한반도 동남부의 부산 절영도 등지를 조차하거나, 아예 해당 지역에 러시아 해군 기지를 건설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한국이라는 나라 자체는 친러 성향의 동맹국이 될 확률이 높다. 당시 러시아 정부는 한국의 완전한 식민화를 원하던 일본과 달리 한국을 자국 영토로 합병하는 것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의 동아시아 방면 최대 관심사는 만주 석권이었다. 니콜라이 2세와 대부분의 러시아 제국 각료들은 만주에 비하면 가치가 떨어지는데다, 설령 손에 넣는다 하더라도 애초에 러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시베리아 횡단철도바이칼 호 구간 노선이 미처 완공되지 못한 탓에 육군 병력을 대규모로 신속하게 극동 현지까지 파병하기도 어려웠으므로, 오래 지켜내지도 못할 한반도의 식민화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러시아에게 만주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완충지대 정도의 가치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식민화를 시도하더라도 경쟁관계이자 러시아보다 해군이 강력하며, 영국령 홍콩을 영유하고 있어 한반도에 훨씬 쉽게 접근이 가능한 영국처럼 러시아의 확장을 견제하려는 서구 열강들의 압박 문제도 있고 하니, 굳이 한국까지 무리해서 식민 지배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러시아 제국은 대한제국을 러시아의 극동 방면 인접국으로서 상호 동맹관계를 맺는 편을 더 선호하였다.

이 경우라면 대한제국은 대한국 국제의 내용에서 보듯이 전제군주국을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정치체제도 비슷하고 독립도 유지시켜 준 승전국인 러시아 제국과 함께 입헌군주국 동맹인 영일동맹에 맞서는 전제군주국 동맹인 한러동맹이 생겨나 대륙세력 vs 해양세력의 구도가 나타났을지도 모른다.

2.1.2. 열강이 공인한 중립국 시나리오

한편, 러시아 제국 외무성 일각에서 나온 주장대로 한반도를 해양세력인 영국-미국-일본과의 완충지대로서 중립화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러시아가 승전했다면 당장 러시아 견제에 열을 올리던 영국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영국의 대외정책 기조는 러시아 봉쇄였다. 당시에 영국 정계에서 가장 경계한 것이 바로 러시아의 인도 제국 침공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인도의 침공을 예방하기 위해서 인도 주변의 땅을 모조리 식민화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침공 루트로 예상되는 중앙아시아중동 지역에 첩보망을 꾸준히 펼치고 가동하여 지역 정보를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영국은 러시아의 확장주의적 행보가 영국의 안보와 유럽 정세, 나아가 영국의 세계전략에 불리할 것이라 판단하고 러시아의 부동항 확보를 저지하려 했다. 그렇기에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영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정치에 개입했을 것이다. 러시아 또한 자국 영토였던 크림 반도에서 벌어졌던 크림 전쟁에서조차 자국에 기어코 패전을 안겨준 압도적인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과의 일전은 피하고 싶었다. 때문에 해군보다 육군이 상대적으로 약한 영국이 쉽사리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힘든 내륙의 만주만을 확보한 채 한국을 양국 사이의 중립국으로 놔두는 게 편했을 것이다. 영국도 사실 아시아에서 인도나 홍콩 이외 지역의 영유에는 큰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이전에 자국이 잠시 점령한 바 있는 거문도를 비롯하여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견제할 요충지가 될 만한 한국의 몇몇 섬을 한국 정부에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는 한국의 영토를 무리하게 병합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패했더라면 일본 역시 국력이 심하게 손실되어 대한제국을 재차 침탈할 힘이 부족해질 뿐만 아니라 전쟁 중의 무리한 재정소모와 사회동원의 여파로 전후 경제위기에 시달릴 가능성이 높으므로, 대한제국은 근대화를 할 시간을 더 벌 수 있었을 것이다. 대한제국의 유효한 근대화 개혁으로 평가받는 광무개혁도 러시아의 개입으로 대한제국이 잠깐 동안 열강들의 중립지대가 됨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렇지만 "중립화가 약소국인 대한제국이 열강의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는 것이, 러일전쟁 이전까지 개항 및 열강과의 수교를 맺으면서 한국이 지게 된 최혜국 대우 및 조계 같은 불평등 조약의 결과는 중립화된 대한제국의 국력으로 단시간에 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근대화의 여정을 밟아 나가는 대한제국이 한동안은 이 리스크를 안고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1.3. 러시아의 한반도 병합 시나리오

러일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가 부동항을 차지하겠다는 의지는 굉장히 강했다. 심지어 1903년에는 러시아가 한국을 북위 39도선을 기준으로 분할 통치하자고 일본에 제안하였다가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1] 1902년 9월 12일 주일 러시아 공사였던 로젠 남작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상신한 보고서에서 한국 합병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 경우라면 대한제국이 러시아에게 흡수되어 일개 지방으로 남게 되거나, 뒤이어 등장할지 모를 소련의 구성국인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전락하여 심하게는 1991년의 소련 해체 때 해방되거나, 아니면 현재까지 독립하지 못하고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티베트 자치구 꼴이 났을 수도 있다.

적백내전의 치열함을 생각한다면 핀란드처럼 적백내전 동안에 독립했을 가능성도 있지만[2][3] 원 역사대로 소련군이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을 작살내고 적백내전에서 승리하면서 재병합하거나, 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 타지키스탄처럼 러시아의 공산화 완료 후 소련의 구성국으로서 참여했을 가능성도 장담할 수 없다.

한반도가 소비에트 연방의 구성국으로 전락한다면, 소련 해군 태평양함대의 모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부산이나 진해구로 바뀔 것이고, 대한해협 일대에 오스카급 잠수함, 타이푼급 잠수함 같이 미국이나 서방과의 전쟁 시 이들 국가들로 바로 SLBM을 발사할 전략 핵잠수함들이 우글거릴 것이다. 거기에다가 소련이 훗날 대구나 강릉 일대에 비행장을 건설하고 MiG-29Su-27 같은 전투기들을 배치한다면 한반도 전체가 불침 항공모함이 되어 일본은 심각한 안보 위협을 받게 된다. 독도울릉도는 일본이 영유하게 되거나 소련이 영유하게 되면 독도나 울릉도에 레이더 기지를 설치하여 일본 제국 해군 연합함대의 동향을 감시할 가능성도 있다.

원 역사대로 냉전이 도래한다면 미국이 핵우산을 유지했으면 했지 일본의 핵개발을 허락하진 않을 것이다. 징병제 또한 계속 유지될 것이며 서방으로부터 수많은 지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소련이 현 중화인민공화국이 추구하는 전략처럼 하와이을 기준으로 미국과 태평양을 양분하려고 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이것은 미국이 일본 해상 자위대 지원을 해줄테니 소련 해군이 태평양에 영향을 끼칠 가능성은 여전히 적을 것이다.

2.2. 러시아 제국

러일전쟁에서 이겼더라면 전쟁 말기에 러시아 수도에서 발생한 피의 일요일 사건을 잘 봉합할 수 있을 가능성이 커졌을 것이다. 해당 사건은 10여 년 뒤 러시아 혁명으로 이어지는데, 전쟁에서 이겼다면 이를 잘 무마해 내부 문제에도 불구하고 제정 러시아는 상당 기간 중흥했을 것이다. 따라서 소련이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생기므로 전세계와 한반도에 공산주의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여 남북분단의 비극도, 북한의 탄생도 없었을 것이며 세계의 역사도 크게 바뀔 것이다.

다만, 이렇게 되면 당시 러시아는 영국과 한창 그레이트 게임을 치르던 상황이고, 더 넓은 지역에서 끝없는 군비경쟁을 반복하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처럼 국력의 한계 탓에 산산이 조각날 확률이 높다. 영국도 러일전쟁 중에 이미 일본의 패배를 감안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를 조성하는 등 러시아에 맞설 계획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패배한 직후 바로 영국이 한국에 마수를 뻗칠 수도 있었다. 이러면 러시아는 일본에 이어서 영국과 1:1 대결을 펼치게 되는데, 국내에서 공업화도 막 시작한 후진국 러시아가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해군을 갖춘 영국과 계속 대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제국군을 상대로는 동프로이센 지역에서 벌어진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야포 10발을 쏘면 그동안 러시아군은 겨우 1발 쏘는 등 전투를 할 때마다 엄청난 손실을 입으며 싸우는 족족 패배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는 독일에게 반격당하여 바르샤바벨라루스를 내어주는 등 이탈리아군 못지않은 졸전을 거듭하였다. 그나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상대로는 비록 브루실로프 공세로 오헝제국의 전쟁수행능력을 급감시켰지만, 러시아 제국도 한계를 초과한 물량을 소모한 탓에 러시아 제국 붕괴의 원인 하나를 제공해주는 꼴이 되었다.

서방세계보다 낙후된 제도와 산업을 지닌 러시아 제국은 국민 대부분이 농노이며,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안으로부터 곪고 있었고, 무능한 정부는 민중들의 분노를 자기네들보다 훨씬 무능하고 국가 막장 테크를 제대로 타고 있던 오스만 제국이나 카자르 왕조 페르시아, 청나라 등과 같은 만만한 나라들을 박살내면서 얻은 승리로 해결했던 데다가,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무능 및 최악의 비선실세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국정농단 같은 사례를 고려한다면, 러일전쟁에서 승전하더라도 니콜라이 2세와 라스푸틴의 수명이 5년 정도 더 늘어날 뿐, 레닌의 혁명으로 소련이 건국되었을 수도 있다.

반면, 크림 전쟁을 치르며 영국의 강대함을 너무나 잘 인식하고 있던 러시아가 무리하게 영국과의 군비경쟁에 나섰을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오히려 만주와 요동, 한반도를 확보한 뒤 영국과의 약한 긴장관계 속에서 무역을 유지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을 것이다.

2.3. 일본 제국

어떻게 패전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 전술적으로는 우세였으나 전쟁이 너무 장기화되어 돈이 떨어졌다던가, 어찌어찌 무승부가 되었다던가 하는 경우 원 역사보다 불리한 위치에서 협상테이블로 끌려갈 가능성이 크지만, 한반도를 일부라도 얻는 등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이 시종일관 수세에 몰리면서 러시아가 압도적인 우세를 차지하여 승리하였을 경우 최악의 국면을 맞이할 수 있다.

실제 러일전쟁에서도 일본은 러시아가 자존심 탓에 자국의 패전을 결단코 인정하지 않아 배상금을 받지 않은 채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고 국제적인 위상의 상승 이외에는 실질적으로 크게 얻은 것이 없는 피로스의 승리를 거두었다. 게다가 전쟁 말기에는 영국과 미국이 더이상 일본의 국채를 사주지 않아 자칫 승전하고도 국가가 파산할 수 있는[4] 위기에까지 몰렸었다. 그런데 만약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했다면 파산은 기본이요, 러시아가 요구하는 배상금까지 짊어지게 되어 굉장히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일본이 러시아의 식민지나 속국으로 전락하는 지경까지 가지는 않았겠지만, 한반도와 요동 반도 및 만주에 대한 이권 역시 모조리 잃었을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홋카이도, 쿠릴 열도 같은 일부 영토까지 러시아에 할양해야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보다 더 문제인 것은 일본 내의 여론이다. 승전한 상황에서도 테러가 발생하는 지경이었는데, 패전했다면 여론이 그야말로 극악에 달하여 반정부 세력의 반란이나 심하면 내전이 터졌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의외로 낙관적으로 바라볼 면이 있는 편이다. 러일전쟁 패전을 계기로 제국주의에 대한 회의 여론이 일본 내에서 일어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러일전쟁 패전 후의 일본은 경제적인 어려움과 내부 불안 때문에 팽창 정책을 펼치기가 무척 어려울 것임이 분명한데, 이는 훗날 태평양 전쟁에서 절정을 이루는 군국주의의 광기에서 일본이 일찌감치 벗어남을 의미하며, 수천만에 달하는 태평양 전쟁의 희생을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남기게 된다. 일본 입장에서는 원래 역사대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의 길을 걸을 경우 의외로 늦게나마 한반도, 만주 지역을 세력권으로 획득할 수 있다. 또한 러시아가 강대국이 되는 것을 당시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이 경계하였다는 점을 고려할 때, 러일전쟁에서 졌다고 해서 일본이 순식간에 국제적 왕따가 된다던지 하는 건 아니다. 의외로 유럽 몇몇 국가들과 협력 관계를 맺었을 가능성도 있다.

2.4. 청나라

청나라 역시 위태로워진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패배하고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북쪽에서 더욱 창성할 러시아 제국주의로 인하여 청나라가 이전에 러시아에 빼앗겼던 연해주처럼 북만주 내지는 러시아에 점령된 요동, 요서 및 만주 전체뿐만 아니라 외몽골이나 위구르만리장성 이북에 펼쳐진 러시아 영향권 내의 지역들을 아예 러시아에게 빼앗김으로써 영토가 산해관을 기점으로 송나라명나라 시대의 강역으로 축소될 가능성이 커진다. 뿐만 아니라 티베트, 칭하이성, 허베이성, 러허성, 산서성, 섬서성 또한 러시아의 간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며, 심지어 대한제국이 친러 동맹국으로 변모했을 시에는 부산과 진해라는 든든한 부동항을 확보한 러시아가 한반도를 거쳐서 직접 중국 본토로 진출한 뒤 회하를 기점으로 중원을 분할하는 제2의 정강의 변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2.5. 영국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함으로써 영국과 러시아 사이에 장장 1세기 간 펼쳐졌던 그레이트 게임이 종결되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승리한다면 제국주의 러시아의 흥성으로 인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이 계속되었을 것이고, 영국과 러시아는 계속해서 전세계 곳곳에서 대치했을 것이다. 영국은 거문도를 점령했던 것처럼 한반도, 그리고 이제 약소국으로 전락할 일본에 러시아에 대항할 군사기지를 건설했을 것이고, 그레이트 게임의 종결은 더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상황은 제1차 세계대전의 화약고였던 발칸 반도보다 한반도의 정세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 어쩌면 제1차 세계대전이 유럽 한복판이 아니라 영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해가 크게 걸려 있는 중국 동부과 만주, 한반도가 자리한 동북아시아에서 터졌을 수도 있다.

2.6. 독일 제국

직접적인 연관은 적은 편이나 의외로 러시아의 승전이 독일에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러일전쟁의 결과가 영러협상으로 이어져서 영국과 러시아의 대(對) 독일 공동전선 결성까지 성사되는데, 그레이트 게임의 종결이 뒤로 미뤄지면 영국이 독일만을 무한 견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제1차 세계대전의 한 축인 삼국 협상도 생겨나지 않아 이래저래 독일에는 호재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더 안 좋게 흘러가면 영국을 견제하고자 독러관계한독관계가 밀월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 이건 유럽 대륙에 자국의 대항마가 될 패권국이 생기는 사태를 어떻게든 막으려는 영국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라 할 수 있다.

3. 전쟁 발발 이전에 러일 양국이 한반도 분할에 합의했더라면?

상술했듯이 전쟁 직전의 러시아는 한반도보다 만주에 더 관심이 많았다. 때문에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의 즉위 기념 축하연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된 민영환이 제의했던 조러동맹안에 대해서는 러시아 측이 냉담하게 반응한 데 반하여 같은 시기 파견된 극동의 만주 레이스 경쟁자 일본의 특사 야마가타 아리토모와는 비밀회담을 열었다. 다만 이때는 "한반도를 북위 39도선에서 양국이 나눠 갖자"는 일본의 제안에 대해 러시아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다가 때는 흘러 1902년 영일동맹이 결성되어 극동에서 러시아의 남진이 저지되기 시작하자, 1903년 주일 러시아 공사 로마노비치 로젠은 7년 전 일본이 던진 제안에 관하여 다시 검토해보자고 일본에 제의한다. 이때 양국은 전쟁의 기운이 감돌고 있는 만큼 예전보다 더 진지하게 회담에 임했는데, 이때의 공식 문서에는 "39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중립지대로 하며, 한국의 독립은 러일 양국이 보장한다"고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일본이 러시아의 제안에 원칙적으로 찬성했다가, "중립지대의 범위를 만주 남부까지 확대하자"고 역제의하는 바람에 만주 전체를 제 것으로 하고 싶은 러시아와 만주를 못 먹는다면 한반도라도 전부 먹겠다는 일본의 탐욕이 맞부딪힌 끝에 회담이 결렬되고 전쟁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극동의 작은 섬나라인 일본을 얕보던 러시아와 이번에야말로 어떻게든 한국을 독차지하겠다는 일본의 강경파들 대신 상대국의 잠재력을 두려워하던 세르게이 비테이토 히로부미 같은 양국의 유화론자들의 목소리가 승리하여 1903년에 북위 39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분할되었을 경우의 시나리오는 다음과 같다.

3.1. 대한제국

3.1.1. 친러 위성국 vs 친일 괴뢰국 시나리오

3.1.1.1. 친러 위성국 대한제국
우선 이 분할조약에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내각이 반발할 것은 틀림없으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39도선 이남을 장악하고자 한반도로 속속 상륙할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에 질린 황실과 내각이 39도선 이북의 한반도로 파천을 감행할 가능성도 높다. 무엇보다 일본은 불과 8년 전 조선 왕실이 멀쩡히 입주해 있던 경복궁에 무단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장본인이며, 러시아는 일본의 만행에 두려움을 느낀 고종이 1년간 경복궁을 벗어나 주한러시아공사관에서 일본의 위협을 받지 않고 안전하게 머무를 수 있게 해준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일본의 39도선 이남 한반도 지역 점령을 조용히 묵인하고 싶은 러시아 측이 대한제국 정부의 파천을 막으려고 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나, 이 시점에서 그레이트 게임과 영일동맹이라는 영국의 러시아 봉쇄 장치가 여전히 유지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일단 공식 조약문에서도 39도선 이북의 한반도는 엄연히 "중립지대"이지 명백한 러시아 영토라고 단정짓지는 않았고, 러일 양국이 말뿐일지라도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합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만주, 특히 청일전쟁 승리 후 맺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할양받았다가 러시아가 개입한 삼국간섭으로 러시아에 빼앗기고 만 요동 반도에 대한 미련, 더하여 러시아에 대한 원한이 굉장한 일본을 견제할 방파제로써 러시아가 39도선 이북으로 파천하는 대한제국 황실과 내각을 이용하려 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통념적으로 "러시아나 일본이나 힘 없는 우리나라를 수탈하고 내정간섭하여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이 양국 모두에 마냥 적대적이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조선책략 같은 반러 도서가 한때 유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한인들은 일본보다 러시아에 비교적 우호적이었다. 러시아의 고려인 역사학자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박이 외국인은 자유로운 자료조사가 힘든 러시아연방문서보관소의 제정 러시아 시절 정부 문건을 연구하여 저술한 <러시아와 한국>(동북아역사재단 펴냄, 2010년)에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거쳐 제정 러시아 측이 조선 조정 및 연해주로 건너온 조선인들과 접촉하고 기록한 1차 사료들이 자세히 실려 있는데, 러시아의 극동 현지 당국자가 러시아 정부에 상신하는 자료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본의 핍박에 시달리는 조선 조정, 또 함경도 지방 탐관오리의 수탈과 생활고를 피하여 연해주로 넘어온 재러 조선인들과 연해주 지방정부 사이의 조러관계는 우호적이었다고 밝힌다. 가령 연해주와 함경도 사이의 무역 현안에 대해서도 마냥 쇄국정책을 펼쳤을 것 같은 조선 측이 러시아의 통상 요구에는 비교적 긍정적으로 나오며, 연해주에 정착한 조선인들은 근면성실한 데다 러시아로 귀화하고 러시아어를 배우거나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하는 비율이 높아 연해주 당국자가 이들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대목도 나온다.

그러므로 자국에 비교적 우호적이며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더 이상 자력으로 막을 수 없어 러시아에 기댈 수밖에 없는 한국 정부와 한인들을 대(對) 일본 방파제 겸 험난한 연해주 개척을 위한 노동력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 러시아가 대한제국의 중립지대 파천을 허가하고 위성국으로 삼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헌데 러시아의 영역 시작점인 북위 39도선은 북한의 주요 도시인 평양과 원산 바로 아래를 지나는 선이다. 군사력이 미약한 대한제국 정부가 남한 주둔 일본군이 언제든지 침공하기 쉬운 북한의 두 거점 도시를 수도로 삼기는 무리다.

이를 대체할 후보지로는 평안북도의주부[5]함경남도 함흥부가 있다. 의주는 임진왜란선조의 조정이 몽진한 바 있는 곳이며, 한반도 분할 이후 만주를 차지한 러시아의 요동 반도 조차지인 뤼순다롄이 가까워 유사시 러시아 해군과 해병대의 지원을 받기도 쉽고, 애초에 의주 자체가 국경도시이므로 만주의 철도 수비 명목으로 주둔할 러시아 육군의 지원 또한 받기 쉽다. 반면에 함흥은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서 조선 왕조 내내 대우받던 고장인지라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한다는 명분도 있고, 동해를 두고 러시아 태평양함대가 주둔한 블라디보스토크와 접할 수 있어 유사시 군사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으나, 일본 해군 또한 39도선 이남의 남한 혹은 동해 너머 일본 본토로부터 건너와서 함흥을 침공할 수 있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분할조약에서 북위 39도선 이북의 한반도 지역은 러일 양국의 군대가 주둔할 수 없는 중립지대이므로, 러시아군이 조약을 깨고 평양에 육군을, 원산에 해군을 주둔시키지 않는 한 유사시 만주와 연해주의 러시아군이 남한의 일본군보다 먼저 대한제국의 임시수도에 당도하는 것이야말로 대한제국의 국방정책상 굉장히 중요한 현안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아무튼 이렇게 39도선 이북의 대한제국이 성공적으로 안착한다면 당연하게도 대한제국 황제와 내각은 남쪽의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한 수복전쟁을 결의할 것이다. 하지만 정세의 커다란 변화가 없는 한 대한제국이 오랫동안 수세에 몰린 채 남은 영토를 방어하기도 급급할 것이며, 이 과정에서 한국은 더욱 러시아와 밀착하여 사회적으로도 친러 성향이 짙어질 것이다. 압록강두만강 너머 만주와 연해주 모두를 점유한 러시아와 교류하기 위해 러시아어가 제1외국어로 교육될 것이고, 광복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에서 전래된 개신교가 폭발적으로 보급되었던 대한민국의 전후 사회처럼 대한제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가 강세를 보일 것이다. 한러 모두 전제군주국이며 입헌군주국인 영일동맹에 공격받는 동병상련의 입장 또한 밀월을 가속화시킬 요인이다.
3.1.1.2. 친일 괴뢰국 조선 왕국 혹은 일제 식민지 남조선
한편, 고종 황제와 대한제국 내각의 주요 인사가 대부분 중립지대로 파천했다고 하더라도 일본은 권력의 공백이 생긴 서울을 접수하고 남한을 장악하는 데 별다른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간의 한반도 침탈 과정에서 일본을 향한 조선인들의 저항이 극심하고, 이북의 대한제국 정부가 이남의 국민들이 펼치는 대일항쟁을 지속적으로 부추길 것이 명백하므로, 서울 장악 후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직계 황족 혹은 방계 황족을 이왕가로 내세우면서 동양식 제국 관념을 도입하여 앞선 분할조약의 규정상 독립을 보장해야만 하는 대한제국의 제후국인 조선 왕국을 서울에 수립함으로써 저항을 잠재우려 할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 '조선 왕국'은 전제군주인 고종의 통치에 불만이 있는 재야 인사들이나 친일파 대신들을 끌어모아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 내각을 수립한 뒤 한국주차군사령관이나 주한일본공사관의 조종을 받을 친일 괴뢰국이지만 말이다.

반면에 일본이 아예 한반도 병탄을 즉각 개시하여 마치 영국 북아일랜드처럼 한반도의 일부를 영구 점유하고자 조선반도라는 전통적인 지명에서 따온 남조선이라는 식민지로서 조선총독부를 서울에 두고 통치하려 들 수도 있다.

3.1.2. 고립무원 끝에 멸망 시나리오

일단 북위 39도선 이북 한반도에서 대한제국의 국체가 보전되었다 하더라도 후견국인 러시아 제국의 내부모순이 만주 석권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위험이 남아 있다. 결국 발발하지 않은 러일전쟁 대신에 국민들의 사회 불만을 잠재울 다른 이벤트가 있어야 할 테지만, 상술했듯이 삼국협상이 그레이트 게임의 계속으로 말미암아 결성되지 않고, 독러동맹 vs 영일동맹 or 기타 서구열강과의 군사충돌, 혹은 1차 대전 발발의 원인 중 하나였던 범게르만주의 vs 범슬라브주의 갈등을 봉합하지 못하여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서 외교결렬이 벌어지고 군사충돌로 치달을 경우, 덩치만 크지 속은 빈 강정이나 다름없는 러시아군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며 자국민이고 주변국이고 할 것 없이 제정 러시아 정권에 반기를 들면서 러시아 전역이 혼란에 빠질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그때까지도 국체를 유지하고 있던 이북의 대한제국은 러시아 혁명적백내전 루트를 타게 되는 러시아에 의탁할 수가 없어 남쪽에서 호시탐탐 북진 기회만 노리고 있을 일본군의 대대적인 침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군다나 이때의 일본군은 러일전쟁 때의 소모전조차 겪지 않고 전력을 충분히 보충해둔 만전의 상태로 숙원이던 한반도 전역 석권 및 요동반도와 만주 진출을 실행에 옮길 것이고, 그때까지 대한제국군이 러시아의 후견 하에 근대화를 마친다 하더라도 애초에 일본의 후견국인 영국에 비하면 군대와 무기의 수준이 떨어지던 러시아제 무기나 군함, 전술체계로는 파죽지세로 북진하는 일본군을 막아내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밀려난 대한제국 정부와 군은 험준한 개마고원 혹은 러시아의 후원 하에 한인 개척민들이 자리 잡고 있던 한만(韓滿) 국경 너머 간도나 연해주로 넘어가서 항쟁을 계속하게 될 텐데, 적백내전 당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백군을 지원하겠다는 명목으로 극동 러시아에 일본군과 미군이 파병되었던 전례로 미루어보아 일본군이 연해주까지 추격하여 독립군을 괴멸시키려 들 가능성이 있다. 독립군이 주둔한 만주나 연해주 현지의 주력 러시아군이 백군이라면 "붉은 군대와의 전쟁에서 열강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정치적 사정으로 말미암아 독립군에 도움을 주지 않으려 할 수 있고, 붉은 군대라면 제정 러시아처럼 전제군주국인 대한제국의 잔여 병력이나 독립군을 "반동주의자들"로 보고 도움을 주지 않거나 도리어 토벌하려 들 수 있어 한국 망명정부나 독립군으로서는 굉장히 불리한 전쟁을 치르게 될 것이다.

3.1.3. 자체 공산혁명 후 소련 구성국 편입 시나리오

공교롭게도 러시아 혁명이 진행될 즈음 인접국인 대한제국 내에서도 고종 황제 혹은 그 후계자의 무능과 전횡에 질린 반정부세력 중에서 공산혁명을 꾀하는 세력이 나타날 수 있다. 볼셰비키의 준동과 때를 같이 하여 대한제국 내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정권이 뒤집힌다면 좌우대립으로 말미암은 내전이 발생하거나, 이웃으로부터 피어오른 공산주의 혁명의 기운이 일제 치하 남한 내지는 바다 너머 내지까지 침투하는 것을 꺼리는 일본이 북한 중립지대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려 들 것이다.

실제 역사에서처럼 끝내 적백내전에서 승리한 소련이 만주와 39도선 이북 한반도까지 붉은 군대를 보내서 이들 지역까지 '수복'하는 데 성공한다면, 가칭 '대한인민공화국'은 몽골 인민 공화국 같은 소련의 위성국으로 남기보다 아예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처럼 코레야(고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의 소비에트 연방 구성국으로서 소련에 편입될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이곳은 해양세력인 자본주의 진영이 극동의 요충지인 만주로 들어오는 길목이면서도, 개마고원이라는 천혜의 방벽이 자리하고 있어 남부 러시아 평원과 중동 지역을 나누는 유럽 러시아의 카프카스 산맥과 같은 역할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대한인민공화국' 자체의 국력만으로는 일본군을 비롯한 자본주의 진영의 차기 침공을 장기간 막기는 어렵다는 정치적, 군사적 현실이 구성국 흡수 시의 대의명분으로 내세워질 것이다.


[1] 일본 또한 앞서 1896년에 동일한 제안을 러시아에 하였으나 이때는 러시아가 거절하였다.[2] 실제로 적백내전 당시 일본이 시베리아 출병을 감행하였고 미국과 영국도 적백내전에 개입했음을 생각하면 (러일전쟁에 패하여 경제난에 허덕일 일본이 이때 참여할 여력이 있었을지는 둘째치고) 이들이 한국 독립운동세력을 지원했을 것이다.[3] 이쪽이 더 가능성 있는 것이 러시아 지배하에서 독립하기 원한 한국인들은 민심을 잃은 러시아 백군과는 달리 대부분 열렬히 간섭군을 응원하고 지원해줬을 것이다.[4] 쓰시마 해전 이후 전쟁을 빨리 종결짓기 위해 영국 등이 일본을 압박한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출처[5] 신의주는 러일전쟁 중이던 일본이 1905년에 만들고, 1914년에야 의주군으로부터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개편되었으므로 이 시점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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