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리하르트 바그너의 일생을 다룬 문서이다.2. 어린 시절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의 데어 브루홀(Der Bruhl) 거리에 있는 ‘붉고 흰 사자의 집’(House of the Red and White Lion)에서 태어났다.리하르트 바그너의 선조들은 17세기때부터 라이프치히에 정착하며 살았고 대부분 학교 교사나 공무원으로 평범하게 살았으며 남의 눈에 띄는 인물이 없었다. 특히 극장이나 음악과 관련된 재능을 보인 사람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경찰서기였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바그너는 그런 가문에서 별난 인물이었고 라이프치히 사교계에서 인기가 있었고 연극과 극장에도 관심이 많았다. 특히 ‘여배우들에게 관심이 지대하여 어머니가 속상했다’는 소리를 바그너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극장 분야에 대한 그런 관심속에서 아버지 프리드리히는 젊은 배우이자 화가, 시인이었던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를 만나서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된다. 두 사람은 가까운 친구가 됐고 가이어는 바그너의 집에 자주와서 어머니 요한나와도 가까워진다. 그리고 아버지 프리드리히가 죽은지 아홉달만에 어머니 요한나와 결혼했고 1821년에 죽을때까지 리하르트 바그너의 아버지 노릇을 했다. 실제로 바그너는 15살까지 ‘리하르트 가이어’라는 이름이었다가 1828년 다시 바그너로 성을 바꾼다. 여기서 의문의 요점이 발생하는데 바로 이 양아버지 가이어가 진짜 아버지라는 설이다. 단, 근거는 매우 희박하다.[1][2]
1814년 8월 바그너가 막 한 살이 됐을 때 어머니는 루드비히 가이어와 결혼하여 드레스덴으로 간다. 가이어는 드레스덴 궁정 극장에서 일을 했고 작센 왕족들과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일했다. 1815년 모리츠 거리의 집에서 어머니는 결혼한지 여섯달만에 바그너의 여동생 세실리에(Cecille)를 낳았다. 바그너는 어머니를 굉장히 존경했다. 그는 어머니를 ‘아주 훌륭한 여성’으로 칭송했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과 감사로 가득했으며 어머니가 자신에게 예술적인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어머니는 바그너에게 부드러움과 안식을 상징했고 그의 작품 ‘지그프리트’에서도 주인공은 나무 밑에서 앉아서 어머니의 사랑을 그리워한다. 바그너의 어머니는 1848년 2월에 세상을 떠난다.[3] 바그너의 출생에도 루머가 있듯이 그의 어머니의 출생에도 루머가 있다. 공식적인 서류에는 요한나가 라이프치히 부근에서 빵집을 하던 바이젤펠즈의 딸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작센-바이마르의 공작 콘스탄틴의 서자였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요한나 자신의 말에 따르면 바로 그 공작이 자신에게 교육비를 대어 라이프치히의 좋은 학교에 다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나는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했다. 그 대신 교육으로 채우지 못한것을 상식, 이해심, 유머 감각 등으로 메울 수 있었다. 바그너가 말년에 말한 바에 따르면 요한나는 수많은 아이들을 키우느라 고생이 심해서 아이들에게 별로 잘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속으로는 아이들을 사랑하며 잘되기 바랐다는 것이다. 그런 요한나가 바란 것 중 하나가 바로 리하르트 바그너가 두 아버지처럼 극장 같은데 관심을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양아버지가 배우였으니 의도적이 아니라도 바그너는 당연히 극장과 가까워젔다. 가이어는 바그너를 데리고 극장의 연습장에 자주 갔고 곧 바그너는 이 ‘가상의 세계’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바그너처럼 상상력이 강한 아이에게 화려한 무대장치와 공연의 스릴 그리고 배우들끼리의 친밀함이 아주 재밌었을 것이었다. 결국 어머니 요한나의 희망과는 다르게 바그너의 형과 누나 중 4명이 극장과 관계된 일을 하게 되었다. 바그너도 4살에 무대에 데뷔한다. 쉴러의 연극 ‘빌헬름 텔’에서 작은 아들 역을 맡은 것이다. 대사도 한 줄이 있었다. 아버지가 형을 데리고 떠나면서 어머니와 작별할 때 “나는 엄마랑 있을거야!”라고 말한다. 그러나 큰아들 역을 맡은 클라라 누나가 무대밖으로 나갈 때 바그너는 “클라라, 나도 갈래”하면서 따라 나갔다. 그것이 데뷔 무대이자 고별 무대였다.
루드비히 가이어는 바그너를 제대로 키워보려고 했지만 그가 의도했던 것은 극장과 관련된 분야가 아니었다. 가이어는 바그너를 화가로 키우려고 했다. 당시의 화가는 좋은 후원자만 만나면 아주 여유로운 직업이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별로 소질이 없었고 시키는 대로 몇 년간 노력하다가 실망한 뒤에 새로운 분야를 택한다. 가이어는 바그너에게 극장에 대한 영향을 주었지만 다른 분야의 영향을 주기도 전에 사망한다. 바그너는 일곱 살 때에 포젠도르프의 학교로 떠났고 1821년 9월 양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학교에서 드레스덴까지 50킬로미터를 걸어서 돌아왔다. 어머니는 병으로 누워있는 양아버지에게 피아노 연주를 하라고 했다. 바그너는 포젠도르프 학교에서 약간의 레슨을 받았지만 대부분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웠다. 이때 바그너의 연주를 들은 가이어는 “재가 음악에 소질이 있나봐!”라고 했고 가이어는 바그너를 자신의 친구인 칼 마리아 폰 베버(Carl Maria von Weber)에게 소개한다. 당시 베버는 민족 음악가로 젊은 작곡가였고 궁정 오페라의 궁정악장[4]으로 취임한 떠오르는 인물이다. 베버는 드레스덴 오케스트라[5]의 명성을 더욱 굳건히 했고 그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6]는 어린 바그너도 초자연적 공포와 감정 넘치는 음악에 완전히 빠저 버린다. 베버는 가이어가 사망하기 전까지 자주 집에 왔고 바그너는 그를 ‘살아있는 사람 중 최고’라고 평했다. 그리고 ‘마탄의 사수’ 중 몇 부분을 치기 위해서 피아노 연습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바그너에게 음악적 영감을 준 첫 인물은 바로 칼 마리아 폰 베버였다. 그러나 가이어가 사망 한 뒤 극장과의 관계가 끝나고 바그너는 아이슬레벤으로 가서 가이어의 동생 칼(Karl)의 집에서 살게 된다.
그리고 1년 뒤에 돌아와서 1822년 12월 2일에는 드레스덴 왕립 학교(Dresden Kreuzschule)에 입학하여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한다. 바그너가 5년간 공부한 곳은 드레스덴 왕립학교였다. 왕립 학교에서의 공부는 바그너의 상상세계에 뿌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니까 고전을 철저히 가르쳐서 바그너의 환상과 사상에 무게와 체계를 갖게 해준 셈이다. 바그너는 이 곳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고대 그리스 비극과 셰익스피어까지 배웠고 그런 덕분에 베버의 오페라나 호프만의 작품같이 환상적이고 그로테스크한 쪽으로 치닫는 그의 열기는 다분히 진정됐다. 바그너는 특히 영웅과 신, 전설과 신화로 가득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좋아했고,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인 호메로스에 빠진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고전들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형성하게 해주었고 나중에 음악극이라는 자신만의 형식으로 표현하게 된 것이다. 바그너는 자신의 자서전 ‘나의 인생’(Mein Leben)에서 바그너는 자신에게 고전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해준 이 학교에 대해 극찬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바그너는 학과나 음악에서 모범생이 아니었다. 수학에는 관심도 소질이 전혀 없었고 피아노 솜씨도 선생들에게 주목을 끌 정도가 못 되었다. 실제로 학교를 졸업하던 1827년 무렵 14살의 소년 바그너는 셰익스피어의 몰두하며 자신도 시인이 되겠다고 선언한다. 바그너의 천재성은 어린 시절부터 나타나지 않았다.
10대 시절의 바그너는 예민하면서도 활발한 소년이었고 때로는 고집스러워서 어떤사람들에게는 괴짜로 보였다. 그는 언제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음악, 문학, 철학, 정치같은 문제에 관심과 의견을 가젔다. 어린 시절의 건강도 좋지 않았다. 어머니 요한나는 바그너가 너무나 유약해 오래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그너는 아주 창백하고 말랐으며 작고 여윈 체구였다. 그는 특히 피부 알레르기로 평생 고생했는데 그 때문에는 나중에 실크로 만든 속옷과 겉옷을 입어야 했고 그의 적들은 바그너를 비단 옷을 입는 퇴폐주의자(데카당)이라고 공격했다. 신체는 허약했던 바그너였지만 또래 애들과 다름없이 나무에도 올라가고 동네 개들과도 친하게 놀았다. 그리고 매사 아주 부지런하고 열심이었다고 전해진다.
1826년 6월 5일, 바그너의 영웅 베버가 40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그 16년 뒤인 1844년 드레스덴의 카펠마이스터였던 바그너는 사람들을 아주 어렵게 설득하여 베버의 유해를 런던에서 드레스덴으로 옮겼다. 그 새로운 장례식을 위하여 바그너는 베버의 ‘유리안테’(Euryanthe)에서 따온 주제로 장송곡(Trauermusik)을 만들었으며, 횃불을 등고 행진했고 무덤에서 연설도 한다. 바그너가 영웅의 애기를 음악적으로 표현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베버의 죽음 때문이라고 한다.
1826년 바그너의 가족들은 프라하로 갔고 바그너는 학교 친구였던 루돌프 뵘의 집에서 살게 되었다. 사춘기에 이른 바그너는 그 집 딸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1827년 바그너는 학교에서의 수학여행으로 라이프치히에 갔고 대학생들의 자유로운 모습과 화려한 옷에 반하게 된다. 그래서 그 해의 말 가족들이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왔지만 핑계를 대고 라이프치히 최고의 니콜라이 학교(Nikolaischule)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괴테의 제자였던 삼촌 아돌프 바그너와 가까워졌다. 삼촌은 그에게 고전을 읽도록 권했으며 그 덕분에 바그너는 독서의 습관을 갖게 되어 평생동안 다양하고도 많은 양의 독서를 한다. 이 시기에 바그너는 학교 공부를 거의 팽개친 채 지난 2년간 쓰던 셰익스피어 스타일의 5막극 ‘로이발트’(Leubald)를 완성했다. 살인, 유령, 광기로 가득한 이 작품을 보고 삼촌 아돌프와 그 부인은 몹시 놀랐고, 바그너가 쓸데없는 일에 시간과 재능을 낭비한다고 생각했다. 비록 이 때의 창작물들은 좋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끈기와 인내심만큼은 후일의 바그너를 만드는 토양이 됐고 음악과 시, 드라마와 스펙터클을 모두 한데 엮어서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을 만드는 천재성은 어린 시절에 독일의 예술과 정치 변화를 겪으며 상상력을 키웠고 나중에서야 솜씨를 나타나게 된다.
바그너가 작곡에 필요한 기초공부로서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 것은 1828년부터였다. 그리고 그 전 해 3월에 빈에서 사망한 베토벤이 그의 새로운 영웅으로 등장했다. 베토벤의 ‘피델리오 서곡’을 드레스덴에서 듣고 그 오케스트레이션에 감동받았던 바그너는 이제 라이프치히의 유명한 게반트하우스에서 ‘제 7번 교향곡’을 듣고 완전히 반하여 베토벤이 괴테의 ‘에그몬트’에 음악(서곡)을 붙였듯 자신의 ‘로이발트’를 위한 음악을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이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로기어(Logier)의 작곡이론 서적을 프리드리히 비크의 도서관에서 빌린다.[7] 그러나 필요한 재능은 쉽게 얻어지지 않았고 도서 대출금이 밀려 비크의 재촉을 받게 되는데, 이것은 바그너가 평생동안 시달리게 되는 수 많은 빚 독촉의 시작이었다.
목표달성을 위하여 바그너는 동네 음악가 크리스티안 고틀리브 뮐러에게서 몰래 레슨을 받았다. 몇 년간 계속된 이 레슨에 대하여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별로 중요한 언급을 안 했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도움이 됐을 것이다. 바그너가 자서전 ‘나의 인생’에서 자기 인생의 전환점으로 꼽은 사건은 1829년 라이프치히에서 유명한 소프라노 빌헬르미네 슈뢰더-데브리엔트가 부르는 ‘피델리오’를 본 것이라고 했다.
“내 인생 전체를 돌아봐도 이보다 더 커다란 영향을 준 일은 없었다.. 그녀의 공연을 본 날 저녁 나는 내 인생을 운명을 정했다.”
그러나 그때 라이프치히에서 ‘피렐리오’를 공연했다는 기록은 없다. 실제로 바그너가 본 것은 1834년 라이프치히에서 슈뢰더-데브리엔트가 로미오로 출연한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와 몬테키’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존경하던 선배 베토벤의 작품이자 독일 작품으로 바꿔놓은 것이 분명하다. 바그너의 자서전에는 그런 식으로 틀리게 써놓은 일이 많지만 베토벤이 젊은 바그너에게 커다란 영향을 준 것은 틀림없다. 베토벤의 음악은 바그너에게 깨달음을 주었고 그의 외로운 인생과 병 그리고 갑작스런 죽음은 바그너의 로맨틱한 면이 어필했을 것이라고 비평가들은 평했다. 바그너가 한 첫번째 대규모 음악작업은 베토벤의 9번 합창곡을 피아노 곡으로 편곡하는 일이었다. 성공적이지는 않았지만 바그너는 이 작업을 1830년 10월에 끝내어 마인츠의 출판업자 프란츠 쇼트에게 보낸다. 이 악보는 남아있어서 최근에 음반으로도 나왔다.
이 시기에 바그너는 베토벤의 다른 작품도 공부했고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교향곡도 공부했다. 그래서 1829년과 1831년 사이에 나오는 바그너의 어린시절 작품들은 베토벤 스타일을모방한 피아노 소나타와 서곡들이었다. 바그너는 이제 음악공부만 진지하게 했고 다른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다. 그리고 1830년 6월에 라이프치히의 토마스 슐레에 입학한 이후로는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단원이던 로베르트 지프에게서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다. 17세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라이프치히 궁정극장에서의 자선공연에서 바그너의 ‘B플렛 장조 서곡’이 공연됐지만 매 5마디마다 드럼 비트가 들어있어서 관객들은 웃음과 야유를 보냈다.
18살에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지원한다. 다행스럽게도 대학입학시험을 면제받고 음악학도로 등록되어 정식학생으로서 대학을 다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시기 바그너는 바흐도 역임한 바 있던 토마스 교회의 칸토르(음악감독)였던 테오도어 바인리히(Thedor Weinlig)의 제자가 된다. 바인리히는 이 소년의 재능은 있지만 원칙과 방법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화음과 대위법 등의 세밀한 음악교육을 했다. 바그너는 아주 기뻐했고 최초로 출판된 작품 ‘피아노 소나타 B플랫 장조’를 바인리히에게 바친다고 썼다. 이런 바그너를 가장 대견하게 생각한 것은 어머니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때문에 걱정할 일이 많았다. 바그너는 토마스 슐레를 라이프치히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음악을 제외하고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또 과격한 학생 단체에도 가입하였고 술과 도박도 즐겼으며 결투도 할 뻔했지만 다행히도 실제 결투는 일어나지 않았다.
1830년 가을에 바그너는 처음으로 혁명에 가담했다. 파리에서 벌어진 7월 혁명은 중산층과 노동자들이 힘을 합쳐 반동적인 샤를 10세에 맞선 것이다. 3일간의 폭동 뒤 결국 결국 루이 필리프 1세가 프랑스 왕좌에 앉았다. 이 혁명은 바그너가 있는 라이프치히에도 전해져서 부패한 공무원들과 가톨릭을 믿는 작센 왕국 왕족들에 반항하는 폭동이 벌어졌다. 소요가 시작된 한밤중에 바그너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술 마시고 노래하며 형무소로 행진하며 데모를 했다. 그러나 나중에 노동자들의 진짜 폭동이 시작되어 주요 시설을 점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자 당국에서는 바그너를 포함한 학생들을 징발하여 무장시킨 뒤 부유한 사업가와 공장을 폭도들로부터 지키라는 임무를 내렸다.
3. 습작 시대
1832년에 바그너의 정규 음악교육은 끝났다. 바그너는 이제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낼 정도로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했고 몇 작품은 고향에서 연주도 했다. 그때까지 최대의 야심작이던 ‘C장조 교향곡’을 끝낸 뒤 바그너는 더 앞으로 나가기로 한다. 자기 작품 몇개를 들고 빈으로 갔다. 그러나 당시의 빈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에 왈츠에 파묻혀 다른 음악은 들리지 않았고 바그너는 이런 분위기에 실망하며 1827년 친구의 여동생 제니가 있는 다시 가보고 싶었던 보헤미아의 프라하로 갔다. 제니는 부유한 파흐타 백작의 딸 중 하나로 아주 아름다웠다.19살에 작곡한 C장조 교향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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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2년 말, 19세의 바그너는 바로 이 집에 찾아갔고 거기서 바그너 인생 최초의 정규 오페라 ‘결혼’(Die Hochzeit)을 작곡하기 시작한다. 파흐타 백작의 저택에 머무는 동안 바그너는 평생 처음으로 사랑에 빠졌고 그 대상은 백작의 두 딸 중 키가 더 크고 짙은 머리였던 큰 딸 제니였다. 19세의 바그너는 제니를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극치’이며 모든 것을 갖춘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앞뒤 가리지 않았던 바그너의 사랑이 아주 컸던 만큼 바그너의 상대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제니는 바그너에 대해 전혀 호감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를 놀리느라고 그랬는지 제니와 여동생은 끊임없이 찾아오는 수 많은 귀족, 상류층 남자들과 어울리며 불장난을 했다. 결국 제니에 대한 바그너의 사랑은 미움으로 변했다. 그래서 제니의 ‘가벼움과 천박한 인생관’을 저주하다가 자신이 이제껏 화려한 백작의 저택에서 환상적인 ‘달빛 아래의 쇼’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름다운 제니에 사랑이 깨진 뒤로 무거워진 마음과 그 기념품이 된 ‘결혼’의 대본을 들고 바그너는 프라하를 떠나 라이프치히로 향한다.
바그너는 라이프치히에서 7중주 한 곡과 ‘결혼’의 첫 장면음악을 작곡하였고, 스승이던 바인리히는 바그너의 솜씨를 인정했다. 그러나 바그너와 가장 가깝게 지낸 누나이자 여배우인 로잘리는 이 작품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자 바그너는 이 작품이 무대에서 공연될 가망이 없다고 느꼈는지 원고를 없애버린다. 프라하에 잠시 머물면서 ‘결혼’의 대본을 쓰고 있을때 바그너의 ‘교향곡 C장조’가 프라하 음악원 학생들에 의해 연주된다. 또 얼마 뒤 ‘교향곡 C장조’는 라이프치히에서 두번 더 연주되었고 관객과 비평가들에게 좋은 평을 얻어냈다.
1833년 1월의 두번째 공연 때 이 작품을 좋게 소개한 사람은 ‘우아한 세계의 신문’ 편집인이던 하인리히 라우베였다. 이 신문은 1830년대에 ‘젊은 독일’로 알려진 과격파 운동의 중심이었고, 이 문예운동의 정신적 지도자 라우베는 바그너의 누나 로잘리의 친구로 독일 예술을 학문과 고전의 굴레에서 끌어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라우베의 진지함과 대담함 그리고 정의감에 감탄하였고 그의 영향은 바그너의 초기 작품에 나타난다. 바그너의 교향곡에 감명 받은 라우베는 자신이 막 완성한 오페라 대본을 주었다. 원래 이 대본은 당시의 유명 작곡가였던 마이어베어에게 주려고 했던 것이었으며, 마이어베어는 몇 년 후 바그너를 몇 번 도와주게 된다. 이 제의에 대해 바그너는 기분이 좋았지만 그는 이미 다른 사람의 대본을 쓰지 않기로 결심한 뒤였다. 그리고 실제로 바그너는 평생동안 한번도 다른 사람의 대본을 써서 작곡하겠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20살 바그너가 최초로 완성한 오페라 ‘요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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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쯤 바그너는 최초로 완성한 오페라 ‘요정’(Die Feen)의 대본을 쓰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카를로 고치의 희곡 ‘뱀 여인’ La donna serpente)을 각색한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연히 형 알베르트의 제의로 뷔르츠부르크의 코러스마스터 자리도 맡게 되었다. 이 일을 맡은지 한달 뒤인 1833년 2월에 바그너는 ‘요정’의 대본을 완성했고 그 다음해 1월에는 작곡도 완료했다. ‘요정’은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초자연적이며 환상적인 면이 가득한 작품이다. 이런 유행은 베버의 오페라와 호프만의 작품으로 시작되었다. ‘요정’의 플루트에는 금지된 질문이나 사랑을 통한 구원 등 나중에 바그너가 사용한 소재가 들어있다. 이 작품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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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번째 오페라에서 바그너는 기존의 오페라 틀 내에서 재능을 발휘한다. 전통적인 레치타티브, 아리아, 듀엣, 합창 등에는 ‘라인의 황금’ 전까지의 다른 작품들에 나타나는 음악이 기본이 들어있다. 그리고 단순한 동기를 다시 사용하다던가 잘 장식된 관현악 부분이 나오는 등 나중에 바그너의 특징이 될 부분이 확실하게 들어있다. 비평가들은 이 작품도 명작이라고 평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 작품이 너무나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이어서 그랬는지 무시해버렸고 나중에 바이로이트 캐넌에서 빼버린다.
뷔르츠부르크에서 ‘요정’을 작곡할 무렵 바그너는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가난한 지방극장에서 자기에게 많은 돈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처음 맡았던 일 중 하나는 하인리히 마르쉬너의 ‘흡혈귀’에 출연하는 합창단을 훈련시키는 것이었고, 그 작품에서 형이 알베르트가 부를 끝 장면인 아리아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러는 동안 그는 오페라하우스의 실무에 대해 많이 배웠고 또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들도 많이 접했다. 그리고 바그너 자신이 첫연애라고 말한 연애도 했다. 상대는 합창단의 소프라노 테레제 링겔만이었다. 이 연애는 오래가지 못했지만 바그너는 로맨틱한 불장난의 재미를 알았고 평생동안 이 재미를 추구했다.
1834년 1월에 바그너는 완성된 ‘요정’ 악보를 들고 라이프치히로 돌아갔다. 그는 이 작품이 대히트를 칠 것으로 기대했지만 라이프치히 극장의 매니저였던 프란츠 하우저는 바그너의 누나 로잘리가 잘 애기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오페라의 공연을 거부했다. ‘요정’은 바그너가 죽은지 5년 뒤 1888년 뮌헨에서 초연된다.
바그너의 실망은 매우 컸다. 하지만 바그너는 새로운 예술경험을 통해 독일 오페라를 이탈리아 오페라와 비교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빌헬르미네 슈뢰더-데브리엔트가 로미오로 출연한 빈첸초 벨리니의 오페라 ‘카풀레티가와 몬테키가’의 공연이었다. 그 공연을 본 바그너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가진 소리의 아름다움에 이끌렸고 1834년 6월 ‘아름다운 세계의 신문’에 첫 에세이를 쓴다. ‘독일 오페라’라는 제목의 이 글에서 바그너는 학구적인 면에 치중하는 쉬포어, 마르쉬너 등의 독일 작곡가를 공격하면서 따듯하고 표현적이며 정열이 가득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벨리니를 찬양했다. 벨리니는 바그너의 영웅 대열에 끼였고, 바그너는 노래가 가진 감정적 힘을 알게 해 준 이 이탈리아 작곡가를 평생토록 좋게 생각했다.
벨리니의 음악에 도취한 이 시기에 바그너는 친구 테오도르 아펠과 함께 보헤미아에서 휴가를 보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운 오페라 ‘연애 금지’의 줄거리 개요를 만들어냈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셰익스피어의 ‘자에는 자로’(Measure for Measur)를 적당히 각색학 작품이지만, 바그너는 여기에 이탈리아식의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음악을 붙이게 된다.
바그너의 두번째 완성작 오페라 ‘연애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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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아에서 돌아온 바그너에게는 마그데부르크에 본거지를 둔 하인리히 베트만의 순회공연 극단의 음악감독 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공연은 1834년 7월에 바트 라우흐슈타트에서의 여름 시즌이었다. 별로 이름없는 배우들로 이루어진 이 극단에 들어온지 일주일만에 바그너는 모차르트의 ‘돈 죠바니’로 오페라 지휘에 데뷔했다. 충분히 연습도 못했지만 이 공연에 대해서는 모두 만족했다.
바트 라우흐슈타트의 숙소에 머무르던 바그너는 여배우였던 민나 플래너를 만나게 되고 곧 사랑에 빠졌다. 짙은 눈의 머리카락이 매력적인 민나는 바그너보다 4살 연상이었고 뛰어난 용모 덕분에 누구나 무대에서 성공할 것을 믿었다. 따라서 많은 극장 매니저들과 후원인들이 따랐는데 물론 가끔 ‘점잖치 못한’ 의도와 제의나 후원도 있었지만 민나는 그런것도 뿌리치지 않았다고 한다. 민나는 15세 때에 육군 장교였던 에른스트 루돌프와 원조교제 후 나탈리라는 딸을 낳았으며 동생이라고 속이며 키우고 있었다.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자신을 이해 못하고 자신의 천재성을 의심하는 여자”라고 잔뜩 불만을 토로하며 민나의 “신선하고 뛰어난 외모에만 매력을 느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은 자서전을 썼을 당시에 바그너의 두번째 부인 코지마에 대한 고려였다고 많은 비평가들이 추측한다. 당시 바그너가 민나와 친구 테오드르 아펠에게 보낸 여러 편지속에는 바그너가 민나에 대해 깊은 사랑을 느꼈고 절대로 민나를 잃지 않겠다는 결심하는 문구가 가득하다.
순회극단이 마그데부르크로 옮겨간 1834년 후반 바그너와 민나도 함께 갔고, 다음해까지 바그너는 지휘도 하면서 ‘연애 금지’를 작곡하느라 바빴다. 특히 1835년 4월에는 슈뢰더-데브리엔트가 바그너의 지휘로 몇 번 노래했는데, 당시 바그너는 열심히 노력하는 지휘자로 알려졌다. 그러나 극단은 점점 어려워져서 1836년 3월 29일 마그데부르크에서 ‘연애 금지’를 초연한 직후 극단은 해산된다. 말이 초연이었지 표를 산 관객은 모두 세 사람이었고 그나마 막이 오르기 직전에 무대 뒤에서는 프리마돈나의 남편과 남자 주연배우의 주먹싸움이 벌어진다. 바그너는 이 작품을 다시 쾨니히슈타트 극장에서 공연하려고 베를린에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평생토록 빛을 보지 못한다.
이후 바그너는 민나가 출연계약을 맺은 쾨니히스베르크로 갔다. 1836년 11월 24일, 바그너와 민나는 쾨니히스베르크 근교의 트라크하임 교회에서 결혼한다. 양쪽 모두 생각없이 급히 한 이 결혼은 처음부터 불안했고 돈과 여러가지 문제로 난관에 이른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급급한 것에 짜증이 났던 민나는 1837년 5월말에는 디트리히라는 사업가와 몰래 드레스덴으로 달아난다. 질투로 분노한 바그너는 즉시 따라갔고 눈물로 민나를 설득하여 자신이 안정된 직업을 얻으면 다시 돌아오겠다는 답을 받았다.
운이 좋았던지 바그너는 6월에 당시 러시아의 영토였던 리가(Riga)의 음악감독 자리를 맡게 됐다. 리가는 라트비아의 발트해에 있는 역사 깊은 항구로 독일인들이 많은 사는 곳이었다. 8월에 이곳에 도착한 바그너는 이 새로운 환경이 자신에게 새로운 창작열을 키워줄 것이며 결혼도 살릴것으로 기대했다. 곧 민나에게서 용서를 비는 편지가 왔고 10월에 다시 바그너에게 돌아왔다. 야심만만한 바그너는 리가에서 새로운 음악회와 극장의 개혁으로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리가 극장의 단장이던 칼 폴 홀타이는 이에 반대했고 바그너의 적이 된다. 리가에 있는 동안 바그너는 새로운 그랜드오페라의 대본과 작곡을 시작했다. 그가 1837년 여름에 읽은 에드워드 불워 리튼의 소설 ‘리엔치’(Rienzi)였다. 1839년 여름 홀타이 단장은 불미스러운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리가를 떠나게 됐고 바그너 역시 직업을 잃게 된다. 다시 빚쟁이들에게 쫓기게 된 바그너는 몰래 러시아 국경을 달아나서 파리로 간다. 멀리 떨어진 촌구석의 소극장과 달리 대도시 파리에 가면 자신의 새로운 오페라를 알아줄 것이고 돈과 명예도 따를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부채가 많은 바그너, 민나 부부의 여권을 당국이 압수 보관중이었기 때문에 바그너는 리가에서 달아나기 위해 정상적인 방법을 쓸 수 없었다. 옛 친구이던 아브라함 뮐러의 도움을 받아서 바그너 부부는 러시아 국경을 불법으로 넘기로 했다. 국경에는 코사크 순찰병들이 돌아다니면서 수상한 자를 보면 사살했기 때문에 아주 위험했다. 바그너와 민나 그리고 그들이 키우던 뉴펀들란산 강아지 로버는 밀수업자들의 동굴에서 저녁까지 기다리다가 밤에 국경을 넘어 프로이센 왕국으로 갔다. 다행히도 순찰에 눈에 띄지 않았고 거기세 필라우 항구까지 엉성한 마차를 타고 가다가 도중에 마차가 전복되어 민나는 부상을 당한다. 필라우에서 바그너 부부와 강아지는 테티스라는 선원 7명의 작은 범선을 타고 런던으로 향한다. 그러나 항해 일주일 뒤 강한 폭풍에 밀려 노르웨이의 표르드 해안에서 폭풍을 피하는 동안 산드비크라는 작은 어촌에 머무른다. 나중에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이 곳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표르드 해안의 절벽에 메아리치는 것을 듣고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선원들 노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폭풍은 계속됐지만 테티스 호는 결국 1839년 8월 영국에 닿았고 바그너 일행은 런던으로 향한다. 런던에서 바그너는 필하모닉 소사이어티의 지휘자 조지 스마트 경을 찾아갔다. 바그너는 이미 그에게 ‘룰 브라타니아’(영국이여 지배하라)라는 서곡의 악보를 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마침 런던에 없었다. 바그너는 하는 수 없이 ‘리엔치’의 작가 불워 리튼을 찾았지만 그 역시 없었다.
그래서 바그너와 민나는 며칠 관광을 하고는 프랑스로 간다. 증기선으로 해협을 건넌 바그너 일행은 불루뉴에서 거의 한 달간 머물렀다. 우연히도 당시 파리 오페라를 주름잡던 지아코모 마이어베어가 불루뉴에 살고 있었고, 당시 그의 오페라 ‘위그노 교도들’은 단순하면서도 드라마틱한 음악을 좋아하는 프랑스 중산층 입맛에 딱 맞아 대성공을 거둔 때였다. 바그너는 나중에 마이어베어를 공격하지만 1839년 당시에는 아주 부러워했다. 바그너는 당시에 마이어베어의 오페라는 깊이가 얄팍하지만 그의 대성공에 감명받아 독일 음악가들이 드라마틱한 그의 음악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처음 마이어베어와 만난 자리에서 바그너는 ‘리엔치’ 대본을 3막까지 낭독했고 마이어베어는 참을성있게 들어줬다. 그리고 2막까지의 오케스트라 악보를 검토해주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는 바그너에게 파리 오페라 단장이던 샤를르 뒤퐁셀 앞으로 보내는 추천장도 써준다. 이런 행운에 힘을 얻은 바그너는 부인과 함께 불루뉴를 떠났고 1839년 9월 17일 파리에 도착한다.
그러나 바그너의 첫번째 파리 방문은 가난과 실망의 연속이었고 앞으로 나올 바그너의 작품들에 큰 영향을 끼친다. 2년 반이라는 세월동안 바그너는 작곡가로 이름을 알리는데 실패한다. 바그너는 돈과 안면 없이는 유명한 마이어베어의 추천장이라고 해도 파리 오페라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뒤퐁셀 단장은 바그너를 그저 희망에 가득한 젊은 작곡가로 취급했고 두번 다시 만나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그너는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기위해서 유명한 가수들이 부를 노래들을 작곡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것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파리에서는 정장을 하고 정식으로 소개를 받아 사교계에 들어서기 전까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프란츠 리스트가 파리의 샬롱과 사교계의 맨 위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었지만 바그너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잘 연주하는 것도 아니었고 태도도 거칠고 무뚝뚝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고생스럽기는 했으나 독일 화가 프리드리히 페흐트를 비롯하여 주위에 모이는 몇 친구들은 바그너가 가진 투지와 날카로운 유머 그리고 친구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면에 매료된다. 1839년에는 바그너가 라이프치히에서 사귄 신문사 친구 라우베가 파리에 왔다. 그는 자기 아내를 소개했고 또 바그너가 좋아하던 작가 하인리히 하이네도 소개한다. 바그너가 모인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려고 자기가 고생스럽게 탈출하여 항해한 애기를 했고 냉정한 하이네도 재미있어 했다고 한다.
1840년 3월 르네상스 극장으로 마이어베어의 추천으로 바그너의 ‘연애 금지’를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이 극장은 그 다음달에 파산으로 문을 닫는다. 이에 대해 바그너는 자서전에서 마이어베어가 파산 소식을 알고도 자신을 속였다고 불평한다. 그 후 바그너는 출판업자 모리스 슐레징거에게서 일자리를 얻어 다른 작곡가의 작품을 편곡하는 일을 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살며 ‘리엔치’ 작업을 계속한다. 이 작품은 바그너가 이전에 만든 어떤 작품보다도 큰 것이었고 파리를 떠날 무렵에는 거대한 분량으로 늘어난다. '리엔치’ 작곡을 끝내던 1840년 11월은 바그너의 재정 상태가 최악이던 때였다. 10월에 부인 민나가 테오도르 아펠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빚쟁이들의 감옥 속에 갇혀 오페라를 쓰고 있다”고 했다. 물론 아펠에게 돈을 얻기 위해 과장했지만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바그너의 세번째 오페라 ‘리엔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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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리엔치’를 처음부터 프랑스와 이탈리아 스타일로 쓴 그랜드오페라라고 했다. 그리고 실제로 이제까지의 어떤 그랜드오페라 작품보다도 더 요란하고 거대하게 만들려 했다. 전형적인 19세기 중반의 요란한 그랜드오페라인 5막짜리 ‘리엔치’는 실제로 바그너의 일생동안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마이어베어의 도움으로 1841년 6월 드레스덴에서 이 작품 공연을 수락하고 궁정극장에서 공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1842년 10월 20일 초연에서 6시간동안 공연된 이 작품은 대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바그너 본인은 이 작품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1845년부터는 ‘괴물’이라고 부른다. 리엔치는 수작이라고 평가를 받으나 마이어베어와 스폰티니의 향이 너무 짙어 정통적인 바그너 음악극의 계보에 넣지 않는다.
4. 낭만주의 오페라 시대
‘리엔치’를 완성하는 동안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대본 구성도 시작한다. 이 작품은 바그너가 겪은 테티스호의 항해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1840년 5월 바그너는 마이어베어의 대본작가이던 외젠 스크리베에게 대본 초안을 보내면서 공동작업을 가능성을 물어본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마이어베어에게 초벌대본을 보내면서 파리 오페라 신임 단장인 필레에게 전해달라고 한다. 바그너는 파리 오페라에서 작곡 의뢰가 올 것을 기대했다. 그래서 오디션용으로 젠타의 발라드, 노르웨이 선원들의 노래, 유령선 선원들의 노래를 만들었다. 필레는 초벌대본을 보고 마음에 들었지만 바그너에게 작곡을 의뢰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파리에서 활동한지 7년은 지나야 뭔가 작곡을 의뢰할 수 있을 것 이라고 필레는 말했다. 그러면서 다른 유명 작곡가들에게 의뢰할 테니 초벌대본을 500프랑에 팔라고 제의한다. 바그너가 이 제안을 수락한 것은 1841년 7월이었고 이때는 이미 자기 나름대로의 작곡이 한참 진행중이었다. 초벌대본은 두명의 대본작가들에게 넘겨졌고 그들은 네덜란드인의 전설을 담은 ‘유령선’을 완성한다. 여기에 피에르-루이 디에쉬가 작곡을 하여 1842년 11월 파리 오페라에서 공연한다. 그러나 그때쯤 드레스덴에서는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리허설이 시작된다.독자적인 예술세계의 시작을 알리는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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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네덜란드인’의 작곡을 끝낸 1841년 여름에 악보 전체를 베를린 왕립 오페라의 책임자였던 빌헬름 폰 레데른 백작에게 보낸다. 레데른은 작품을 수락했고 결국 1843년 1월 2일 드레스덴에서 초연된다. 이 작품에는 물론 바그너의 테티스호 항해 경험이 들어갔지만 중요한 소스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폰 슈나벨레보프스키의 회상’(1834)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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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과의 대화’(1851)라는 글에서 바그너는 이 작품 중 제 2막에 나오는 젠타의 발라드를 가장 먼저 작곡했으며, ‘음악주제의 씨앗을 미리 적당한 곳에 뿌린 뒤에 발전시켜서 커다란 하나의 드라마를 엮었다’고 했다. 이것이 바그너의 작업방법이 훨씬 예술적으로 변했다는 증거다. 이 작품은 이전의 작품들과는 확실히 다르고 동기의 사용도 발전했다. 바그너의 대본작가 능력을 확실히 보여준 중요한 작품이다.
1841년에서 1842년에 이르는 겨울동안 바그너는 다시 독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그의 향수병에 불을 붙인 것은 프리드리히 라우머가 쓴 독일 이야기 모음집 ‘호헨슈타우펜의 이야기’였다. 이 책에서 얻은 영감으로 바그너는 5막 오페라 ‘사라센의 여인’의 대본구성을 시작했다. 그러나 곧 중세 독일의 다른 전설 ‘탄호이저와 비너스’가 훨씬 더 드라마틱하고 잠재력이 있다고 느껴서 소재를 바꿨다. 동시에 파리에 실망한 바그너는 자신이 하려는 새로운 음악혁명에 적합한 곳으로 독일을 생각했다. 마침 ‘리엔치’와 ‘네덜란드인’을 독일에서 공연하겠다고 수락했으니 바그너와 만나는 친구들과 작별을 한 뒤 파리를 떠나 드레스덴으로 향했다.
바그너와 민나가 라인란트를 지나는 동안 날씨가 춥고 음산했다고 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고생했던 파리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아주 기뻤다. 바그너는 그의 ‘자서전적 스케치’(1843)에서 이렇게 썼다.
”처음으로 라인강을 보는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고였고, 나는 비록 가난한 예술가지만 그래도 나의 모든 생명을 내 조국에 바치겠다고 결심했다.”
아이제나흐 외곽의 바르트부르크 계곡을 지날 무렵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면서 구름 사이로 비추는 햇살이 옛 전설 속의 성을 산 위에 밝혔다. 그곳에서는 13세기에 음유시인(Minnesinger)들이 모여서 노래시합을 했고 출전한 기사들은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발표했다. 파리에서 읽은 독일 중세전설을 읽고 문화적 애국심에 불타오른 바그너는 바르트부르크를 보며 다시 한번 ‘탄호이저’ 전설을 생각하게 된다. 실제로 이때 본 경치는 생생하게 그의 머리속에 남아서 3년 뒤 드레스덴에서 ‘탄호이저’를 준비할 때는 파리에서 온 세트 디자이너에게 아주 세밀한 지시를 하였다.
1842년 4월 12일 바그너와 민나는 드레스덴에 돌아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기도 전에 바그너가 가졌던 독일에 대한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곳은 거친 날씨속에 모두 죽어버린듯 했고 6년만에 어머니와 다른 가족들을 만난 것은 반가웠으나 옛 친구들은 거의 다 사라졌고 드레스덴 오페라단의 딱딱한 관리들은 29세의 바그너를 흥분잘하고 참을성 없는 사람이라고 결론 내렸다. 몇 사람 예외가 있다면 무대 감독이자 코러스마스터였던 빌헬름 피셔와 의상디자이너였던 페르디난트 하이네였다. 두 사람은 바그너를 좋아했고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리엔치’ 리허설을 도와줬다. 그렇지만 바그너는 자신이 한때 잘 알고 좋아했던 드레스덴이 이제는 모두 변해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파리의 친구 사무엘 레흐르즈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드레스덴 욕을 잔뜩 한 뒤에 차라리 드레스덴에서의 성공보다는 파리에서 실패하는게 낫겟다고 썼다.
”내가 지리적으로 어느 쪽을 더 좋아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조국은 그 산과 숲과 계곡이 아름다운 데도 나를 못 견디게 한다. 작센인들은 저주받은 무리들로, 인색하고 느리고 거만하고 게으르고 소란한다. 그런데 내가 이들과 함께 뭘 해야하나?”
독일에 돌아온지 일주일도 못되어서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궁정 오페라 공연을 상의하러 베를린에 갔다. 궁정 오페라의 레데른 백작은 바그너가 파리에 있을 때 마이어베어의 추천으로 작품을 수락한 바 있다. 그러나 베를린에 가보니 레데른 백작은 은퇴하려는 때였고 후임자인 테오도르 퀴스트너는 이미 뮌헨에서 그 작품을 거절했던 인물로 당연히 이 공연에 대해 성의가 없었다. 퀴스트너는 전임자가 수락한 작품을 자기가 거절하기는 곤란했다. 그래서 여러가지 핑계로 질질끌었다.[8]
이 일로 바그너는 베를린으로 간다. 베를린에서의 성공이 자신의 경력에 커다란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았다. 그래서 높은 희망을 갖고 프로이센 왕국의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후원을 얻으려고 했다. 당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베를린을 독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려 했고 마이어베어와 멘델스존을 베를린의 공식직책에 앉혔다. 그러나 유명한 마이어베어의 영향력으로도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공연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멘델스존은 바그너의 도움 요청을 들은 척도 안한다. 파리에 이어 베를린에서도 무시당하자 바그너는 이 두 사람을 비롯한 유대인 음악가들을 싫어하게 된다. 바그너는 ‘오락과 돈벌이만을 목적으로 만든 그들의 천한’ 작품들이 성공한다는 것을 혐오했다.
‘리엔치’의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인 1842년 6월에 바그너는 휴가를 내어 부인과 어머니와 함께 테플리츠 온천에 간다. 친구였던 테오도르 아펠과 8년 전에 왔던 곳이다. 거기 머무는 동안 보헤미아의 전원적 경치에 반한 바그너는 며칠간 혼자 산 속을 거니면서 ‘탄호이저’의 3막 무대 스케치를 한다. 7월이 되자 바그너는 휴가를 중단하고 드레스덴으로 돌아와 흐지부지 상태이던 리허설을 직접 맡는다.
리허설은 원래 궁정악장 칼 코트리브 라이지거가 책임을 맡았지만 그건을 답답하게 여긴 바그너가 직접 발 벗고 자청한 것이다. 여가수 슈뢰더-데브리엔트와 헬던테너 요셉 티차트쉭을 포함한 캐스트는 이 작품을 아주 좋아했고 바그너가 직접 리허설을 맡자 더 좋아했다. 리엔치 역을 맡은 타치트쉭은 3막 끝의 B단조 중창에 아주 감동하였고, 이 장면을 연습할 때마다 모든 캐스트가 바그너에게 은전 한 닢씩 주자고 제안한다. 이렇게 시작된 의식은 바그너를 기쁘게 했다. “모든 그것을 장난처럼 여겼지만 사실 나는 그 돈으로 먹을 식품을 구입할 수 있었다.”고 바그너는 나중에 고백한다.
10월 20일의 초연은 대성공이었고 바그너는 계속되는 관객의 환호성에 답하여 여러번 무대에 나와 인사한다. 누구보다도 기뻐한 것은 오페라 책임자들이었다. 그들은 봉을 잡은 셈이었다. 당시 독일에서 베를린을 제외하고는 아무 곳에서도 로열티를 내지 않았다. 그로 인해 바그너는 300달러에 만족하는 것으로 그쳤지만 오페라단은 그 작품을 얼마든지 더 공연할 수 있었다. 관객들은 ‘리엔치’를 색다른 그랜드 오페라로 생각했다. 작품 줄거리는 주인공인 로마의 호민관 리엔치가 시민을 위하여 부패한 귀족층의 지배를 끝내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니 1815년 빈 협정 이후로 점점 봉건주의로 돌아가는 듯한 독일의 현실에 대한 불만을 가졌던 중산층들에게 어필했던 것 이다.
얼마 뒤인 1843년 1월 2일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초연되었고 역시 성공을 거둔다. 다만, 요란하고 볼거리가 많았던 ‘리엔치’에 비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너무 우울하고 어두워서 반응은 ‘리엔치’만 못했다. 여기서 바그너는 처음으로 관객이나 직업 연주자들까지도 자신의 느낌과 확실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초연이 성공한 며칠 뒤 바그너는 드레스덴 궁정극장의 책임자였던 프라이헤르 폰 뢰티차우로부터 공석이던 부지휘자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러나 바그너는 그런 작은 자리에 앉아서는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고 느꼈고 ‘권위가 없는 자리’라며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러나 뢰티차우는 바그너에게 매년 1,500달러의 급료를 주고 종신직으로 해주겠다며 궁정악장 자리를 제안한다. 당시 바그너의 경제생활이 말이 아니었고 부인 민나는 중산층의 생활을 즐기려 했으니 이런 제안을 거절 할 수 없었다. 결국 1843년 2월 2일 바그너는 작센 왕의 궁정악장이 되었다.
이제 바그너는 궁정의 모든 음악활동을 책임지는 궁정악장으로 오페라와 콘서트를 지휘하며 특별행사용 음악도 작곡해야 한다. 독일에서는 이 자리를 굉장히 영광스러운 자리로 평가했지만 실제로는 근근히 생활을 꾸려 갈 수 있었을 뿐 별로 커다란 경제적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사실 궁정악장이란 궁정의 하인이었고 바그너도 100달러짜리 유니폼을 입고 다녔는데 바그너는 바보의 옷이라고 싫어했다. 또 바그너의 독특한 지휘방법 때문에 몇 가수들과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불만이 커졌다. 그러나 겉으로는 연주가 잘되었고 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2세도 만족했다.
바그너가 ‘탄호이저’의 대본을 완성한 것은 1843년 봄이었으나 작품에 대한 열을 좀 식히기 위해 일부러 작곡을 미루다가 11월부터 시작하여 1845년 4월 13일에 작곡을 완료했다. ‘탄호이저’를 작곡하면서도 바그너는 궁정악장으로 일을 열심히 했고, 갑작스럽게 생긴 연봉으로 바그너와 민나는 그랜드.피아노가 딸린 넓은 새 아파트로 이사했다. 이렇게 자리잡은 바그너는 자신이 버는 것 이상으로 돈을 쓰기 시작했으며 그 버릇은 평생 계속된다. 그는 자신만의 도서관을 만들었고 엄선한 고금의 문학서적으로 채웠으며 나중에 쓰는 음악극 소재를 모두 여기에서 얻는다.
궁정악장이 된지 몇 주일 뒤에 바그너는 친구 사무엘 레흐르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내가 맡은 임무는 이곳에서 음악에 관계된 모든 것을 재정비하여 예술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임무는 바그너 혼자만의 생각이었고 곧 오케스트라 단원을 포함한 드레스덴 음악계의 기존세력 전체와 갈등을 빚는다. 바그너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아르미데’를 성공한지 3주일 후 바그너는 새로운 방식으로 모차르트의 ‘돈 죠반니’를 공연하려고 준비했다. 리허설에서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와 템포 문제로 계속 마찰이 생겼고 오케스트라 리더였던 칼 리핀스키는 귀한 고전작품을 바그너가 멋대로 변형하는 데 대한 불만을 고위책임자에게 알린다. 그 결과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새로운 방법으로 해석하려던 바그너는 그 때문에 반대파들의 공격을 받고 드레스덴에 머무는 동안 계속 이 문제로 고생하게 되었다.
궁정악장의 임무 중 하나는 특별행사를 위한 음악을 만드는 일이었다. 1844년 여름에 바그너는 ‘충실한 백성들이 사랑하는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왕에게 드리는 인사’라는 남성 합창곡을 만들었는데 이 곡은 나중에 ‘탄호이저’의 대합창으로 변한다. 바그너는 7월에 ‘사도들의 사랑 만찬’이라는 오라토리오를 만들어 공연을 지휘했다. 이 작품의 대규모 합창을 위해 작센 전체에서 가수들을 선발하여 드레스덴의 프라우엔키르헤로 모았다. 그래서 사도들과 제자들로 이루어진 1,200명의 거대한 합창단이 100인조 오케스트라와 함께 공연했다. 음악적인 일 이외에도 궁정악장이라는 직책 덕분에 바그너는 궁정 오페라와 관계를 갖게 됐고, 1844년에는 자신의 음악적 영웅이었던 베버의 유해를 런던에서 옮겨오는 일을 다시 추진하는 위원회에 선출된다. 바그너의 도움으로 여러 문제가 해결됐고 결국 1844년 12월 14일, 베버의 관을 끄는 행렬은 엘베 강의 둑에서 가톨릭 묘지까지 행진한다. 바그너는 이 때 목관악기들로 연주하는 장송곡을 만든다.
1845년 4월에 ‘탄호이저’를 끝낸 바그너는 새 작품을 들어가기 전 1년간 공부한다. 1845년 7월에는 바그너 부부는 보헤미아의 마리엔바드로 치료차 휴가를 간다.[9] 매일 아침 숲을 산책하며 바그너는 볼프람 폰 에쉔바흐의 ‘티투렐과 파르지팔’ 그리고 파리에서 처음 읽었던 서사시 ‘로엔그린’을 읽었다. 로엔그린과 성배의 기사들 전설을 다시 읽으면서 바그너의 상상력은 불붙었고 곧 마음속에서 드라마틱한 형태로 변한다.
그러나 의사가 흥분과 자극적인 일을 피하라고 하였기에 바그너는 좀 가벼운 소재를 택했고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3막 대본 초안을 완성한다. 그렇지만 이 동안에도 ‘로엔그린’의 충동을 막을 수 없었다. 바그너 자신의 말에 의하면 어느 날 약수로 목욕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작품을 쓰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고 급히 집으로 와서 ‘로엔그린’ 대본을 쓰기 시작했으며 1845년 8월 3일에 다 끝났다는 것이다. 마지막 대본은 드레스덴으로 돌아온지 한 달이 되기 전에 끝났고, 바그너는 12월에 엥겔클럽에서 가까운 친구들 몇 사람에게 대본을 낭독했다. 이때 모였던 사람중에는 슈만도 있었는데 가수가 혼자 부르는 아리아나 카바티나가 없어서 실망했었다. 슈만은 언제나 바그너의 작품에 대해 그 점을 불만스럽게 말했다.
바그너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페라 ‘탄호이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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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호이저’가 1845년 10월 19일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고 비평가들보다도 일반 관객들이 반응이 아주 좋았다. 바그너는 ‘탄호이저’를 통해서 자신의 창작력이 어느 쪽으로 자신을 이끄는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대본도 쓰고 작곡도 할 수 있을 때에만 오페라에서 뭔가 의미 있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다고 느꼈다. ‘탄호이저’는 바그너의 드라마와 음악의 테크닉이 크게 발전한 작품이여 예술가의 정치적 사상이 그 사회와 대립하는 문제를 다룬 작품이다. 슈만같이 박한 비평가들도 이 작품의 독창성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였고 1846년에는 하인리히 도른에게도 편지를 보낸다.
“바그너의 ‘탄호이저’를 보라고 권하네. 아주 독창적인 작품으로 몇 군데는 어색하지만 이전의 작품들 보다 100배 좋다네. 어쩌면 바그너는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려는 용기는 확실히 갖고 있네. 테크닉과 오케스트레이션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더군..”
그러나 바그너는 ‘탄호이저’에 대해 불만이 많았고 계속 작품을 수정했다. 그래서 처음 만들었던 1845년부터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휘했던 1875년까지 최소한 네가지 버전이 나왔고, 그 중에서는 ‘드레스덴 버전’과 1861년의 ‘파리 버전’이 가장 유명하고 또 가장 많이 공연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파리 버전’이 음악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만 바그너는 기존 오페라의 흔적이 남아있다는 불만 때문에 바그너는 죽기 일주일 전에도 부인이던 코지마에게 “아직도 탄호이저는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탄호이저’를 작곡하는 동안 바그너는 ‘트란지션 테크닉’이야말로 오페라 구성에서 통일을 이루는 것이고, 음악극에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탄호이저’의 ‘트란지션 테크닉’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비해 훨씬 뛰어나고 ‘로엔그린’에 이르면 아주 매끄럽게 흘러간다. 주제의 사용에서도 ‘탄호이저’는 몇 주제를 썼으나 ‘라인의 황금’ 이후 바그너의 특성이 되는 유도동기의 사용은 없었다. 사실 바그너는 ‘오페라와 드라마‘라는 에세이에서 동기와 유도동기의 원칙에 대해 설명했지만 유도동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바그너가 드레스덴에서 이룬 가장 큰 성공은 1846년 4월 5일 성지주일[10] 축제에 베토벤의 교향곡 제 9번 ‘합창’을 공연한 것이다. 이것은 오케스트라 운영진과 스텝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릅쓴 것이었다. 그 다음 달에 바그너 부부는 필니츠 근교의 마을 그로스-그로우파로 갔다. 거기서 바그너는 ‘로엔그린’의 작곡 초안을 썼고 거의 2년 뒤인 1848년 4월 28일에 전체 오케스트라 악보를 완성했다. ‘로엔그린’을 작곡하면서 바그너는 독일의 전설과 그리스 신화에 심취했고 또 좌익 신문에 정치적인 에세이를 몇 편 쓰기도 했다. 이때 공부했던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 야코브 그림의 ‘독일 신화’와 몇 가지 북구전설은 후일 바그너가 만든 ‘니벨룽의 반지’의 원천이 된다.
1847년 2월, 바그너는 자신이 각색한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의 ‘아울리스의 이피게니아’를 공연하여 다시 한번 성공했다. 이제 그의 이름은 독일 작품을 잘 해석하는 지휘자로 유명해졌다. 1847년 11월에는 베를린에서 ‘리엔치’가 공연되었으나 비평가들이 혹평했고, 그 때문에 ‘로엔그린’을 위해 프로이센 왕의 후원을 얻으려던 계획은 실패한다. 게다가 바그너는 ‘리엔치’의 리허설을 위해 두 달간 일한 보수도 못 받았다. 오페라단에서는 바그너를 정식 초대한 것이 아니라 ‘와서 해줬으면 하는 희망사항’ 이었다고 핑계 되었다. 이것으로 바그너가 꿈꾸던 베를린에서의 취직, 성공은 완전히 사라진다. 바그너는 독일의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자신의 작품이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바그너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당시 상황을 이렇게 썼다. “아내와 함께 독일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아름다운 경치에 감동했지만 내가 느낀 절망감을 평생 이보다 더 심하게 좌절할 수 있을까 하는 정도였다.”
‘탄호이저’를 무대에 올린 뒤 바그너는 3개월에 걸쳐 작성한 보고서 ‘왕립 오케스트라에 관하여’를 작성했고 그 속에서 오케스트라를 강하게 만들기 위한 개선책을 조목조목 밝혔다. 바그너는 이 보고서를 1848년 3월에 뢰티차우에게 제출한다. 타당하고 실제적인 제안이 많았는데도 바그너의 변화와 개혁에 대해 위기감을 느낀 사람들이 많아 거절된다. 1848년 5월에는 바그너는 다시 ‘작센 왕국에서의 독일 국립극장 조직에 관하여’라는 극장개혁을 제안했지만 이것 역시 궁정관료들에 의해 거부된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바그너의 불만은 점점 커졌고 예술적 개혁을 이루지 못한 좌절감은 정치쪽으로 방향을 튼다. 기존 음악의 세력은 기존의 음악 취향에 깊이 뿌리를 내린 것이었기에 바그너는 이런 반동세력을 변화시켜야만 자신이 바라는 예술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었다. 빚쟁이들, 자신에게 악의적인 보수적인 비평가들, 부패한 관료들에게 쫓기면서 불만이 가득해진 바그너는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정치적 변화를 기다렸다.
1848년 1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어머니가 사망하여 다른 가족들과 연결된 유일한 고리가 끊긴다. 바그너는 1848년 4월말까지 ‘로엔그린’을 작곡하느라 유럽 전체에서 벌어진 혁명들을 모른 채 지나쳐 버린다. 바그너는 당시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대규모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예상했다. 오히려 3월에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왕이 작센에 진보적인 정부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자 그것을 환영했다. 그러나 이 약속은 거리를 점령한 시민들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고 이것을 사실로 믿은 바그너는 5월에 작센 독립극장을 세울 계획을 올렸으나 거절당한다. 극장과 음악 분야의 개혁안이 모두 거절당하자 바그너는 총체적인 사회개혁을 절실히 필요로 했고 그것을 위해 정치적인 적극 가담한다. 왕족을 비롯한 기존세력 쪽에서 희망을 잃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목표를 위해 반대편 쪽에 기회를 노렸다.
1848년 6월, 혁명적 공화주의자들의 모임인 ‘조국 협회’에 입단한 바그너는 야외집회에서 공화국의 목표와 왕에 대한 연설도 했다. 작센의 베틴 가문를 찬양하며 왕이 새로운 공화정부의 우두머리가 될 것을 제안한다. 이것은 공산주의보다 입헌군주제를 찬성하던 중산층 진보주의자들의 의견에 동조하는 내용이었다. 또 특권층으로 행세하던 궁정관료들을 집중 공격했고 그의 발언은 이후 며칠간이나 장안의 화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이 좋았는지 궁정악장 직책에서 쫓겨나지 않았다. 이 당시 바그너는 자신이 가명으로 몇 번 기사를 써준 공화주의 신문편집자 아우구스트 뢰켈의 소개로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미하일 바쿠닌을 만난다. 바그너는 지칠줄 모르는 에너지의 호감을 가졌으나 두 사람의 사상은 정반대였다. 자서전에서도 바그너는 바쿠닌을 ‘혼란하게 머리가 끓는’ 사람으로 표현했다.
이 시기에 ‘니벨룽의 반지’ 구상도 구체화되기 시작하여 바그너는 1848년 가을에 ‘반지’의 플로트 개요 대부분을 완성했고 제목은 ‘니벨룽의 전설 드라마 스케치’라고 붙였다. 이것을 기초로 바그너는 ‘지그프리트 죽음’ 대본을 썼는데 이것이 나중에 ‘반지’ 시리즈의 마지막 ‘신들의 황혼’이 된다. 이와 동시에 1846년부터 시작한 12세기의 프리드리히 1세 황제의 애기를 다룬 5막짜리 ‘프리드리히 1세’도 쓰려고 했다. 자서전에서는 역사보다 신화가 더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이런 작품을 쓰려고 했던 것을 보면 ‘니벨룽의 반지’에 대한 확신이 뚜렷하지 않았거나 예상보다 잘 안풀린 듯하다. 더구나 ‘지그프리트의 죽음’을 끝내지 겨우 두 달 뒤인 1849년 1월에도 또 다른 드라마 ‘나자렛의 예수’를 시작했다. 이것은 당시의 혁명 사상을 표현한 내용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1851년에 가서 포기했는데 그때 바그너는 ‘반지’ 시리즈를 꼭 완성하겠다고 결심한 듯하다.
정치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바그너는 맡은 임무를 등한시 했고 관리들은 점점 그를 의심스럽게 봤고 세트까지 준비하여 준비를 거의 끝내 ‘로엔그린’ 공연을 뤼티차우가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취소한 것이었다. 바그너는 이렇게 썼다. “그 순간부터 나는 드레스덴의 극장과 극장에 대한 모든 것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1849년 3월 바그너 인생에서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는 통일독일의 왕으로 프로이센의 왕을 추대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확고한 안정을 이룩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이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자 작센도 다른 주와 마찬가지로 프랑크푸르트 회의가 정한 헌법을 무시하고 국회를 해산한다. 드레스덴 시민들은 분개했고,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에 대비한 왕은 프로이센에 군대지원을 요청한다. 당시 임시정부의 일원인 바그너는 병사들에게 뿌릴 전단을 만든다. “당신은 외국 군대에 맞서 싸워야하는 우리편이다!”라는 내용이었다. 곧 프로이센 군대가 진압하러 왔고 5월 5일부터 본격적인 전투가 시작됐다. 바그너는 날아드는 총탄을 무릅쓰고 왕립학교의 탑 꼭대기에 올라가서 적군의 움직임을 관측했다. 급조된 임시정부의 민병대는 프로이센군과 상대가 안됐고 5월 9일 궤멸된다. 당국에서는 주도자를 색출하기 시작했고 곧 뢰켈과 바쿠닌이 체포되어 사형과 종신형을 받는다.
바그너도 이 두 사럄과 비슷한 운명을 겪을 뻔했지만 우연히 체포를 피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바그너는 임시 정부 요원들과 함께 햄니츠로 가다가 일행과 떨어져 혼자 밤에 도착하여 여관에 묵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적의 함정에 걸려들었고 바그너는 다음날 햄니츠를 떠나 바이마르로 갔고 그곳에서 파리에서 처음 만났던 프란츠 리스트가 쉴 곳을 마련하는 등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5월 16일 바그너의 체포영장이 발부되자 급히 독일을 떠난다. 결국 바그너는 부인을 민나를 남겨둔채 떠난다. 이때부터 무려 11년간 조국을 떠나 망명 생활을 하게 된다. 리스트는 바그너가 스위스에 갈 수 있도록 돈을 주었지만 이때 리스트의 형편도 좋지 않았다.[11] 4일 뒤 바그너는 스위스로 망명한다.
1849년 5월 29일 취리히에 도착한 바그너는 알프스와 호수의 멋진 경치를 보고 감동하여 그곳에서 거주허가를 얻기로 한다. 실제로 바그너는 스위스에서 무려 23년간 이상을 살면서 ‘니벨룽의 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를 작곡했고 아주 중요한 에세이도 많이 쓴다. 바그너가 취리히에 대해 갖게 된 것은 그곳 사람들의 동정적인 환영도 크게 한 몫한다. 그는 친구 우흘리크에게 편지를 썼다.
”놀랍게도 나는 이곳에서 아주 유명했다. 나의 오페라 전곡이 음악회용으로 편곡되어 자주 공연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걱정하는 아내 민나와 조력자 리스트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는 새로 스위스 여권을 발급 받았고[12] 파리로 간다. 바그너가 간 파리는 예전과 조금도 다름없는 불친절한 곳이었고 결국 바그너는 아무런 소득 없이 7월에 다시 취리히로 돌아간다.
1849년의 나머지 기간 동안 바그너는 ‘예술과 혁명’, ‘미래의 예술작품’이라는 두 편의 에세이를 썼다. 이것은 바그너가 취리히에 머무는 동안 쓴 중요한 저술의 시작으로 1850년대에 바그너를 유명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된다. 이 두 글에는 바그너는 새로운 예술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먼저 오페라의 혁명에 대해 주장했고 바그너가 이상적인 모델로 삼은 것은 고대 그리스 비극으로 시, 드라마, 음악, 춤 등의 모든 요소가 민중(das Volk)에 의해, 민중을 위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 이었다. 19세기의 극장은 요란한 치장과 볼거리에만 급급해서 고대 그리스의 이상적 극장에서 멀어졌으니, 이를 극복하는 ‘총체예술작품’(Geamtkunstwerk)을 만들어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그너 음악극의 이론이 되는 것은 그 다음 에세이 ‘오페라와 드라마’(1851)로 미래의 드라마를 만들기 위해 유도동기의 구조적 중요성을 주장했다. 나중에 ‘니벨룽의 반지’에서 나타날 작곡의 방법이 이미 이때 그의 머리 속에 있었다.
1849년 9월에는 민나가 취리히에 도착했고 바그너에게 빨리 다시 파리에 가서 성공해야 한다고 보챘다. 또다시 파리로 떠나기 전에 바그너는 좋은 소식을 듣는다. 친구 칼 리터의 어머니이자 자기를 좋아하던 율리 리터 부인이 1년에 800 달러씩 후원금을 주기로 한 것 이다. 그리고 그 부인과 가까게 지내는 젊은 여자로 언젠가 드레스덴까지 바그너를 만나러 왔던 제시 라우소가 보르도의 포두주 사업가 외진 라우소와 결혼하여 살고 있었는데 바그너에게 매년 2,500 프랑을 주겠다고 한다.
1850년 1월 29일 바그너는 세번째로 파리로 향해 떠났으며 프랑스인들의 입맛에 맞으리라 생각했던 ‘대장장이 빌란트’의 대본 초안을 갖고 갔다. 그러나 파리에서 바그너는 전과 똑같은 벽에 부딪쳤고 파리 오페라에서 그의 작품을 거절한다. 너무나도 화가 난 바그너는 친구 야콥 술처에게 이렇게 쓴다. “나는 병들고 병영은 파리다!”
바그너의 마지막 낭만주의 오페라 ‘로엔그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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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8월 28일에 드디어 바이마르에서 프란츠 리스트의 지휘로 ‘로엔그린’이 초연된다. 공연은 성공했지만 바그너는 기존의 극장에서 자기 작품을 공연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친구였던 에른스트 베네딕트 키츠에게 보낸 편지에서 바그너는 처음으로 자기가 설계한 전용 극장을 채우고 최고의 가수들을 데려다가 최고의 공연을 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바그너는 불만스럽다고는 했지만 ‘로엔그린’ 공연을 통해 증명된 것은 바그너의 작품이 조금 작은 규모로도 공연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연 1850년 이후 그의 작품들은 독일 전역의 지방극장에 공연이 그치지 않았다.
‘로엔그린’은 바그너의 마지막 낭만주의 오페라로, 드라마와 음악은 기존 오페라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음악극의 문턱까지 와있는 걸작이다. 특히 뛰어난 오케스트레이션, 섬세한 하모니 테크닉, 음악과 대본과 장면이 서로 어울리는 조화를 보면 앞의 작품 ‘탄호이저’보다 스타일이 엄청나게 발전한다. 이런 점은 첫 부분부터 나타난다.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서곡은 작품의 주체를 미리 다루는 면에서 18세기 중반부터 시작된 전통적 서곡보다 훨씬 더 진일보 한 것이다. 합창도 그의 이전 작품보다 더 드라마틱한 효과를 위해 쓰였으며, 이 작품의 ‘금지된 질문’과 같은 주요한 동기들은 음악과 시가 결합되어 의미를 띠었고 나중에 반지 시리즈에서 제대로 쓰인다.
5. 악극 시대
5.1. 루트비히 2세 후원 이전
바그너는 1851년 초반, 몇 달을 걸쳐 ‘지그프리트의 죽음’ 작곡을 시작했으나 쉽지 않았고 ‘노른’ 장면의 작곡 스케치에 그치고 말았다. 바그너는 음악적 동기의 중요성을 완전히 이해하려면 여러가지 음악적 동기가 서로 상호관계를 갖고 연결되어야 하며, 그런 주제를 처음 소개하고 발전시킬 신비한 배경이 앞에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하면 어떤 사물이나 생각에 대한 동기가 오케스트라로 연주될 때 관객은 그것을 듣는 순간 앞에서 들었거나 봤던 내용을 생각하게 되고 진행되는 장면에 독특한 의미를 더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 ‘니벨룽의 반지’의 구성을 보면 수 많은 여러 가지 동기가 거미줄처럼 얽혀서 네 작품 전체에서 퍼진 채 다양하게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1851년 바그너는 자신이 하는 모든 노력이 어떤 운명처럼 그 방향으로 향한다고 느꼈고 그는 ‘지그프리트의 죽음’ 앞에 뭔가 있어야 ‘반지’의 유도동기를 제대로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5월과 6월에는 ‘젊은 지그프리트’의 대본초안을 썼다.[13] 바그너는 그 해 말에 2부작 구성을 4부작으로 바꾸어 1848년에 구상했던 ‘드라마를 위한 니벨룽 신화 스케치’의 내용을 모두 동원하기로 한다.1851년 8월 브라이트코프와 헤르텔 출판사에서 바그너의 새 오페라 텍스트를 출판할 때 바그너는 ‘친구들과의 대화’라는 제목의 긴 서문을 썼다. 이 글에서 바그너는 자신이 왜 낭만주의를 버리고 신화 드라마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향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9월에 바그너는 온천치료를 받으러 가는데 바로 여기서 ‘지그프리트’ 대본에 맞는 음악을 구상하고, 작품 전체를 프롤로그 ‘라인의 황금’과 세 개의 드라마로 확정했다. 11월에는 다시 취리히로 돌아와 ‘라인의 황금’, ‘발퀴레’의 대본 스케치를 썼고, 리스트에게 편지를 보내 작품의 본질상 어쩔 수 없이 4부작으로 커졌다는 것을 설명한다. 리스트는 세비야 대성당의 애기를 하며 바그너의 용기를 복돋아 준다.
“후세 사람들이 보면서 ‘저런 놀라운 일을 하다니 당시 사람들은 미첬었나 보다’라고 할 그런 것을 만들게. 그런 소리를 들은 세비야 대성당도 결국 세워졌다네.”
율리 리터 부인의 후원금이 800달러로 확정된 것이 이때였고 바그너는 1859년까지 후원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소식에도 바그너의 기분은 썩 좋지가 않았는데 1851년 12월 2일 파리에서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니벨룽의 반지’ 기초작업을 하면서도 바그너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는 사회혁명이 먼저 일어나야 한다고 믿었다. 이 시기에 바그너는 친구들이던 데오도르 우휼리크와 에르스트 키에츠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혁명에 의해 구시대가 철저하게 파괴된 뒤에야 제대로 된 예술가와 관객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14]
1852년 5월에서 11월 사이에 먼저 ‘발퀴레’ 그리고 ‘라인의 황금’ 대본이 완성된다. 그리고 그에 맞춰 ‘젊은 지그프리트’와 ‘지그프리트의 죽음’을 수정한다.[15] 수정은 12월에서야 끝난다. 1853년 2월에는 취리히의 바우어 오 라 호텔에서는 4일간 낭독회가 열렸고 심취한 관객들 앞에서 바그너는 ‘반지’ 전체의 대본을 읽는다.
취리히에 있는 동안 바그너는 여러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은 재정문제를 포함한 여러 가지 도움을 주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실크 사업으로 성공한 오토 베젠동크로 1852년 2월에 바그너와 처음 만난다. 베젠동크는 몇 번이나 바그너의 빚을 갚아줬는데, 바그너는 그의 젊은 아내 마틸데에게 반한다. 바그너는 곧 마틸데와 가까워져 둘 사이의 불륜이 시작됐다. 마틸데 베젠동크는 바그너의 작품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영향을 던져준 여인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베젠동크와의 관계가 영감을 주어 완성한 오페라라고 전해진다. 같은 해에 프랑소아와 엘자 빌레 부부와도 가까워졌고, 바그너는 빚쟁이를 피해 마리아펠트에 있는 빌레 부부의 큰 저택에서 며칠을 지내기도 한다.
1853년에 ‘니벨룽의 반지’의 시를 완성한 바그너는 빨리 음악을 작곡하고 싶었으나 그에게는 어려움이 있었다. ‘로엔그린’을 만들어놓고도 제 1막 피날레를 제외하면 다른 부분을 전혀 들어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는 리스트에게 “나는 로엔그린을 들어야 하네. 그걸 듣기 전에는 다시 음악을 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걸세”라고 편지를 보낸다. 결국 베젠동크의 도움으로 ‘리엔치’,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을 부분 발췌하여 연주하는 등 3회에 걸쳐 콘서트를 열었고 그 마지막 공연은 바그너의 40세 생일이던 1853년 5월 22일이었다. 이 콘서트는 실제로 최초의 바그너 페스티벌인 셈이었고 대성공한다.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지휘자로 더 유명했다. 특히 베토벤의 교향곡과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독특한 해석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이렇게 지휘자이자 작곡가로 유명해지자 후원금이 점점 줄어든다. 덕분에 그의 빚은 엄청나게 늘어 1854년에는 빚이 1만 프랑이 달한다. 경제사정 이상으로 아내 민나와의 사이도 나빠진다. 이런 상황에서 바그너는 ‘니벨룽의 반지’라는 거대한 작품의 작곡을 위해 창조적 안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1853년 8월에는 신선하고 잡음 없는 분위기에서 영감을 얻으려고 이탈리아로 간다. 토리노외 제노바를 지나 라스페치아라는 해변 마을의 여인숙에 든 바그너는 소파에 누워 반쯤 잠이 들었던 9월 5일 저녁 ‘라인의 황금’에 대한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나는 갑자기 급류에 휘말려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그 물소리는 곧 음악소리로 변하여 E플랫 장조의 코드의 여러 조각들이 되어 점점 커졌다. 그 조각들은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었지만 그래도 순수한 E플렛 장조의 코드는 변하지 않고 어떤 무한한 의미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머리 위 높은 곳에서 파도가 출렁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놀라서 깨어났다. 그리고 ‘라인의 황금’ 서곡이 내가 찾아온 것을 알았다. 이제까지 내 속에 있었으면서도 내가 알지 못한 것이다."[16]
다만 이 이야기가 사실이냐 아니냐는 증명할 수가 없다. 그러나 바그너가 라 스페치아에서 뭔가 영감을 얻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는 11월 1일 취리히로 돌아오자마자 서곡을 쓰기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을 ‘세상의 시작’이라고 리스트에게 표현한다. ‘라인의 황금’ 작곡 스케치는 9주만에 끝났고 전체 악보는 1854년 9월 24일에 끝난다. 그리고 이 때쯤에는 이미 ‘반지’의 두 번째 작품 ‘발퀴레’가 진행된다.
1854년 가을, 바그너는 옛 혁명 동지였던 게오르그 헤르베크의 소개로 쇼펜하우어의 저서 ‘의지와 표상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를 읽는다. 바그너는 이 책을 그 다음해에도 무려 4번이나 읽는다. 이 책은 바그너 인생의 큰 영향을 끼쳤고 평생동안 쇼펜하우어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를 열렬히 숭배하게 된다.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토론하고 친구들에게 이 책을 권하였으며 취리히 대학교에서 쇼펜하우어 철학 과목의 강의까지 맡으려고 했다. 쇼펜하우어의 미적 감각과 인생의 비관주의는 바그너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더군다나 ‘니벨룽의 반지’는 쇼펜하우의 책을 읽기 훨씬 전에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과 일치하는 점이 많다. 비극적으로 인생을 끝낸다는 쇼펜하우어의 이론은 이처럼 바그너에게 익숙한 것으로 ‘네덜란드인’에서 이미 표현되었다.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은 뒤로 바그너는 음악만으로 그런 의지[17]를 표현할 수 있었기에 다른 어떤 예술보다도 음악의 잠재력이 크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트리스탄’이나 ‘신들의 황혼’을 작곡할 무렵에는 음악의 역할이 훨씬 더 중요해져서 인물이 경험하는 감정을 오케스트라에 표현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와 달리 사랑의 힘을 통하여 부활하거나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여 눈에 보이는 세계가 사라진 뒤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었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처음 읽을 무렵에 바그너는 마틸데 베젠동크와 관계를 맺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1854년 12월 16일 프란츠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평생토록 이렇게 행복한 사랑을 즐겨본 적이 없다’고 했으며 ‘가장 사랑스러운 이 꿈을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싶다’고도 했다. 플라토닉 러브한 연애로 알려진 두 사람의 관계가 진짜로는 어땠는지 또 얼마나 잘 오페라로 표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나중에 바그너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경험과 현실의 세계에서 완전히 초월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베젠동크 부인이나 쇼펜하우의 철학이 이미 그의 내부에서 자리잡기 시작한 어떤 아이디어에 불을 붙인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만 1854년 말에는 ‘발퀴레’ 마지막 작곡 스케치에 바빠서 바그너는 ‘트리스탄’을 뒤로 미룬다.[18]
1855년 1월에 바그너는 런던에서 8회의 콘서트를 지휘해 달라는 (구)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수락했다. 받기로 한 돈은 겨우 200파운드밖에 안되었지만 런던에서 성공하면 자신의 이름이 유럽 전역에서 유명해질 수 있다는 것과 잘 훈련된 오케스트라와 다시 일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수락한다. 그러나 영국에서의 4개월은 좋지 않았다. 날씨가 매우 좋지 않았고 콘서트 프로그램은 적당히 짠것이 있었으며 매 콘서트마다 단 한번의 리허설만 가능했다. 게다가 관객 수준이 매우 낮았고 언제나처럼 비평가들은 험악했다. 런던의 리젠트 파크 근처 집에서 바그너는 아침 시간에 ‘발퀴레’ 1, 2막을 작곡하려고 노력했지만 건강이 나빴고 또 기분이 늘 우울해서 집중할 수가 없었다. 바그너는 런던을 ‘끔찍한 지옥’이라고 리스트에게 썼다.
하지만 런던에서도 좋은 일도 있었다. 6월 11에 열린 일곱 번째 콘서트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이 참석하여 ‘탄호이저’ 서곡에 앙코르를 보냈고 막간에는 바그너를 로열박스로 불러 오페라 애기를 한다. 또 뉴 필하모닉을 지휘하기 위하여 런던에 와있던 엑토르 베를리오즈와도 친해진다. 바그너는 베를리오즈의 음악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 모두 파리에서 무시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바그너가 런던에서 가깝게 지냈던 사람은 페르디난트 프래거라는 독일인 음악교사였다. 이 사람은 바그너의 사망 뒤에 ‘내가 알던 바그너’라는 책을 냈는데 너무 거짓말이 많은 것으로 밝혀져서 출판사에서 모두 회수했다. 프래거를 통해서 바그너는 리스트의 젊은 제자 칼 클린드워스도 만났다. 이 사람은 나중에 위니프레드 윌리엄즈의 양부가 된다.[19]
이런 중요한 만남은 몇 번 있었지만 런던 생활은 비생산적이었고 생활비가 비싸서 경제적으로 어려웠다. 런던을 떠나는 6월에 바그너는 겨우 1,000프랑을 모았다. 이것을 바그너는 “평생 가장 어렵게 모은 돈”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지휘를 하는 동안 바그너는 오히려 유럽 예술계에 동떨어지게 되는 되었다. 고생으로 쇠약해진 채 취리히에 돌아온 바그너는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고 말한다. 다음해인 1856년 3월, ‘발퀴레’의 나머지 악보가 끝날 무렵에 바그너는 건강, 결혼, 재정이 모두 엉망이었다. 피부병이 그를 괴롭혔고 아내와의 사이도 나아지지 않았으며 베젠동크에 의지하는 신세는 그 부인 마틸데와의 관계때문에 복잡해졌다.
1856년 3월 ‘발퀴레’의 마지막 악보가 끝날 무렵 바그너는 다시 고향으로 가고 싶어한다. 바그너는 독일에서 꼭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작센의 새 국왕 요한은 바그너가 1834년 혁명에 가담했던 것을 잊지 않았고 1856년의 바그너는 아직 ‘요 주의 인물’로 당국의 감시를 받는 몸이었다. 바그너는 자신의 혁명가담이 순수한 예술적인 동기에 의한 것이었을 뿐 어떤 폭력의도도 없었는데 드레스덴 궁전에서 그것을 너무 과장 해석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7년의 망명생활에 지친 바그너는 자존심을 꺾고 요한 왕에게 용서를 빈다. 1856년 5월 바그너는 자술서를 썼고 ‘예술의 범위에서 벗어나 정치에 가담한 죄’를 시인하며 다시는 그런 일을 않겠다고 한다. 왕은 이 편지를 법무부에 보냈으나 그 해 8월에 바그너는 다신의 청원이 거부됐다는 통보를 받는다. 이 당시 작센 국왕에게 편지를 쓰던 날 바그너는 불교의 전설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승리자’(Dir Sieger)의 대본 스케치를 시작한다. 오래 전부터 인도문명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바그너는 불교교리에 대해 공감했고 또 그것은 여러면에서 쇼펜하우의 철학과도 연결된다. 해탈과 윤회에 대한 주제를 담은 이 아이디어는 작품으로 완성되지 못하지만 마지막 작품 ‘파르지팔’의 기초가 된다.
‘발퀴레’를 끝낸 뒤 몸과 마음이 지친 바그너는 ‘지그프리트’를 시작하기 위해 몸을 돌보기로 했다. 발리안트 박사라는 제네바의 한 의사가 물 치료법을 권했고 이제까지 받았던 어떤 다른 치료보다도 통증이 덜해졌다. ‘반지’를 쓰기 위해 평화와 안식이 필요하다고 느낀 바그너는 발리안트 박사의 치료소에 머무는 동안 자신이 살 집을 직접 디자인했고, 작품을 미리 판매하여 그 집을 지으려고 했다. 바그너는 브라이트코프와 헤르텔 출판사에 ‘자기 생애 최고의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를 단돈 1천 달러에 팔겠다고 제안한다. 그러나 미래를 보지 못한 출판사가 그 제안을 거절한다. 이 거절은 바그너에게 충격적이었고 ‘니벨룽의 반지’를 쓰기위한 돈과 여유에 대한 희망도 사라진다.
바그너는 리스트의 친구인 비트겐슈타인 공작에게 “제가 조용히 작업할 수 있는 작은 집은 아마도 하늘나라 발할 궁전 옆에 있나 봅니다”라고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운 좋게도 바로 이때에 다시 오토 베젠동크가 나선다. 취리히 교외에 짓고 있는 자신의 빌라에 딸린 별채를 줄 테니 거기서 살면 세상의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제안이었다. 바그너는 봄에 그리 이사하고 그곳을 ‘아쥘’(Asyl)이라고 부른다. 베젠동크의 관대한 제안으로 신선한 낙관주의가 넘치게 된 바그너는 1856년 9월 ‘지그프리트’의 작곡스케치를 시작했다. 리스트와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이 찾아와 오래 머물며 조용하던 취리히를 파리의 사교계처럼 요란스럽게 만들며 바그너를 방해했지만 1857년 3윌말에 ‘지그프리트’ 제 1막의 악보가 완성된다.
1857년 4월 28일 바그너와 민나는 ‘아쥘’로 이사했고 그곳의 환경은 그에게 영향을 준다. 자서전에서 바그너는 어느 햇빛 비추는 날 ‘아쥘’의 베란다에 앉아 있다가 그 날이 성금요일[20]이라는 것을 알았으머 갑자기 볼프람의 시 ‘파르지팔’이 생각났다고 했다. 그리고 마리앤바드에서 한 번 읽은 뒤로 다시 생각한 적이 없던 그 시가 갑자기 그 성스러운 날 그의 머리 속에서 갑자기 3막 드라마로 펼쳐졌다는것이다. 다만 바그너의 주장과 사실은 다르다. 그 해의 성금요일은 4월 10일이었고 바그너가 아쥘로 이사하기 전이었다. 바그너는 두번째 부인 코지마에게[21] 그 일은 그저 아주 기분 좋은 자연에 힘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게 바로 성금요일의 기분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바그너는 9년간이나 대작 ‘니벨룽의 반지’를 쓰고 있었지만 완성까지는 아직도 먼 상태였다. 돈도 문제였다. 결국 바그너는 뭔가 당장 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는 것을 만들 필요를 느꼈다. 그는 두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브라이트코프와 헤르텔 출판사에 ‘반지’를 사라고 제안했고 그것이 다시 거절당하자 니벨룽의 대작을 완성하겠다는 고집을 꺾고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시작한다. ‘반지’를 멈춘 이유는 돈 때문도 있지만 다른 예술적인 이유도 있다. 우선 출판업자들의 반응으로.보아 ‘반지’는 가까운 시일내에 혹은 영영 공연될 가능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니 지방의 극장에서 공연이 가능한 작품을 만들어 다시 음악으로 대중과의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또 바그너가 ‘트리스탄’과 ‘마이스터징어’를 먼저 만들지 않았더라면 ‘반지’의 마지막 부분 ‘신들의 황혼’은 지금처럼 훌륭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이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복잡한 악보를 보면 바그너가 이 작품에 들인 엄청난 노력을 알 수 있다. 그는 이미 1854년 리스트에게 ‘트리스탄’의 이야기를 했고 대본을 쓰기 전에 몇 부분의 음악을 먼저 생각했다는 증거도 있다. 1856년 말 바그너는 미리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에게 ‘지그프리트’를 작곡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트리스탄’의 작곡으로 넘어갔다고 말한다. 또 이시기에는 바그너가 바젠동크 부인에게 준 음악 스케치에는 이 작품의 개념을 정해주는 서곡의 네 음조가 들어있다. 이렇게 이미 그의 내부에는 자리를 잡고 있던 음악은 외부의 힘, 즉 마틸데 베젠동크와의 사랑, 돈, 쇼펜하우어의 영향 등에 의해 밖으로 나와 꽃피고 열매 맺게 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병적인 사랑과 그리움을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를 찾던 바그너는 혁명적으로 음을 합성하여 화음의 법칙을 낡은 것으로 만들며 새로운 음악의 세계로 들어선다. 당시 사람들은 몰랐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반음계기법(Chromaticism)과 과감하고도 혁신적인 화음 그리고 독특한 오케스트레이션으로 현대 음악을 시작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바그너의 드라마틱한 비전을 보여주는 하나의 경전이 된다.
1857년 8윌 20일 바그너는 아쥘에서 ‘트리스탄’의 대본스케치를 시작했고, 베젠동크 부부는 그 이틀 전 완성된 저택으로 이사왔다. 대본은 9월 18일에 끝났고 그 며칠 후에는 아쥘에서는 모임이 있었다. 한스 폰 뷜로와 19세의 아내 코지마 폰 뷜로[22]가 취리히로 신혼여행 왔다가 바그너외 초대로 아쥘에서 몇 주일 머무르게 되었다. 한스는 ‘지그프리트’의 1,2막 악보를 보면서 곧 피아노로 연주하여 바그너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트리스탄’의 작곡을 시작한 바그너에게 마틸데의 방문이 점점 잦아진다. 그리고 1857년 11월에서 1858년 5월 사이에 바그너는 마틸데의 시 5편에 음악을 붙였다. 남이 쓴 가사에 바그너가 곡을 붙이기는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노래 5편이 ‘베젠동크 리더’(Wesendonk Lieder)인데 ‘트리스탄’에 나오는 특이한 화음이 들어있다. 이들은 계속해서 불륜을 했는데 그것도 민나와 오토에게는 코앞에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1858년 베젠동크 부부가 이 일 때문에 말다툼을 하자 위기를 넘기려는 바그너는 며칠간 파리로 혼자 떠난다. 그러나 돌아온지 며칠 안되어서 바그너와 마틸데는 예술적인 문제로 말다툼을 했다. 그러나 실제 이유는 마틸데의 미남 이탈리아 선생에 대한 바그너의 질투 때문이었다. 그 다음날 1858년 4월 7일 바그너는 미안한지 마틸데에게 편지를 보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서곡 악보스케치에 끼워 보낸 그 편지를 도중에 민나가 가로챈다. 남편이 저지르는 불륜의 증거라고 생각한 민나는 그 편지를 들이밀면서 바그너를 야단쳤고 마틸데에게도 가서 “내가 보통여자였으면 이 편지를 당신 남편에게 줄 것이다”라고 겁준다. 마틸데를 사랑했으나 이러다가 아쥘에서의 편안한 생활이 끝날것 같았던 바그너는 마틸데와의 관계를 냉각시키기로 한다. 그 직후 베젠동크 부부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나고 민나는 브레스텐베르크로의 요양원으로 떠난다.
민나가 다시 돌아온 1858년 7월, 바그너는 꿈속 분위기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제 2막 작곡스케치를 끝냈다. 그러나 실생활은 모든 인물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고 두 여자는 서로 미워하며 말도 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이런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고 떠나기로 한다. 1858년 8월 17일 바그너와 민나는 영원히 아쥘을 떠난다. 둘은 취리히 역까지 함께 간 뒤 서로 헤어진다. 민나는 드레스덴으로 돌아가고 바그너는베네치아로 간다.
바그너는 대운하가 내려다보이는 팔라초 지우스티니아니의 잘꾸며진 아파트를 빌렸고 이 곳에 조용한 분위기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을 계속 작업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병이 도지기 시작했고 또 1848년 혁명가담 흔적이 이탈리아에서도 걸림돌이 된다. 당시 베니스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였고 당연히 빈의 통치를 받았다. 오스트리아 경찰국장 켐펜 폰 피흐텐슈탐 남작은 즉시 외무부에 ‘바람직하지 못한 정치망명자가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 살고 있다’고 보고 한다. 작센 정부에서는 당장 체포해서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오스트리아 외무부는 그저 철저한 감시만 지시한다. 그런데 빈에서 요구하는 정기보고서를 작성한 베니스의 지역 경찰간부 안젤로 크리스피는 바그너가 누군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도 당국이 마음놓을 수 있도록 보고서를 꾸민다. 덕분에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필요한 시간을 얻었다.
작곡을 하는 바그너에게 베니스가 바그너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낮이면 아파트 창문으로 운하에서 펼쳐지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고 밤이면 고요한 적막을 깨며 가끔 지나가는 곤돌라 사공의 슬픈 노래 소리가 시간과 세월을 잊는 도시의 소리처럼 들렸다. 1859년 3월 18일 ‘트리스탄’의 제 2막의 악보를 완성한 바그너는 ‘이제까지 만든 작품 중 최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그너는 3월 24일에 베니스를 떠나 루체른으로 갔다. 슈바이처호프 호텔에서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방을 얻은 바그너는 거기서 1859년 8월 6일 젊은 작곡가 펠릭스 드래제케가 보는 앞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마지막 부분까지 악보를 완성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바그너 최고의 걸작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여 현대음악의 시작에 큰 영향을 미친 작품으로 평가된다.
바그너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트리스탄과 이졸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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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간의 고생 끝에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완성되었고 당연히 바그너는 빨리 공연하고 싶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 런던은 고생했던 경험이 생생했다. 그래서 바그너는 다시 한번 파리를 공략하기로 결정했다. 파리로 가는 길에 바그너는 취리히에서 베젠동크 부부를 만난다. 그간 일어난 일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관계는 아직 좋았다.[23] 돈이 급한 바그너는 오토 베젠동크와 계약했다. ‘니벨룽의 반지’ 4작품을 각각 6천프랑에 모든 판권을 넘기고 바그너는 공연수입만 갖는다는 조건이었다. 계약서에 서명하고 1차 대금을 받은 바그너는 1859년 9월 파리에 도착한다. 뉴턴 거리에 작은 집을 빌렸고 곧 민나가 왔다.
1850년 바그너가 처음 파리를 방문했던 이후로 파리에는 바그너의 팬들이 엄청나게 늘고 있었다. 그것은 몇 안 되는 제자들과 바그너의 추종자들 덕분이었고 그들은 바그너의 성공을 위하여 영향력있는 인사들과 연결을 시도했다. 그 중에서도 퇴역 해군 군의관 오귀스트 드 가스페리니는 파리에 도착한 바그너를 만나서 ‘성스러운 얼굴에 있는 강철같은 굳은 의지’를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파리 사교계의 사치스러운 분위기에는 어울리지 못했고 은둔하듯 집에서 지낸다. 다만 매주 수요일 저녁 당시의 지식인으로 알려진 시인, 음악가, 예술가, 철학자들을 집으르 불렀다. 바그너는 이때도 자기가 주도적으로 토론했으며 자신의 오페라를 부르며 분위기를 띄우며 손님들을 즐겁게 해줬다.
바그너가 파리에 온 목적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무대에 올리려는 것이었기에 바그너는 우선 자기 작품에서 골라낸 곡을 모아 콘서트를 열기로 했다. 1860년 1월과 2월에 파리의 이탈리앵 극장에서 열린 이 콘서트에는 베를리오즈, 마이어베어, 샤를 구노, 샹플뢰리, 샤를 보들레르 같은 당대의 명사들이 모였다. 반응도 성공적이어서 관객들은 매곡마다 열광적인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단 한 곡 ‘트리스탄과 이졸데’ 서곡에는 모두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이로 인해 바그너는 ‘트리스탄’의 공연 가능성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또 이 콘서트는 11,000프랑의 적자를 냈고 그것을 어떻게 갚아야 될지도 막막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이 연주회 직후 프란츠 쇼트라는 음악 출판업자에게 ‘라인의 황금’ 악보를 10,000프랑에 팔 수 있었다. 그래도 돈이 급했던 바그너는 오토 베젠동크에게 ‘니벨룽의 반지’의 아직 쓰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선금도 미리 달라고 했는데 놀랍게도 오토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공연을 포기한 바그너는 대신 ‘탄호이저’를 파리 오페라에서 제작하기로 계획을 세운다. 바그너는 이제 궁전의 유력인사들도 좀 알았고 그들은 이 계획을 강력히 추천하여서 결국 1860년 3월 11일 나폴레옹 3세 황제는 ‘탄호이저’의 공연을 명령했다.[24] 이제 ‘탄호이저’는 프랑스 황제의 명령에 의해 공연하게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이를 지지했다. 작센 대사도 왕에게 연락했고 압력을 느낀 요한 왕은 바그너를 사면한다. 1860년 7월에 내린 사면령으로 바그너는 이제 독일의 어느 곳에도 갈 수 있었으나 작센만은 제외되었다. 8월 12일 11년만에 바그너는 독일 땅을 밟는다.
잠시 독일을 여행한 바그너는 곧 파리로 돌아와 9월 24일부터 파리 오페라에서 ‘탄호이저’ 리허설을 시작한다. 당시 오페라의 규정에 의해 모든 외국작품은 프랑스어로 공연해야 됐다. 이 규정을 따르고 또 자기 작품의 확실한 이해를 돕기 위해 바그너는 ‘네덜란드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린스탄’을 번역하여 출판하도록 했고 ‘미래의 음악’(Zukunftsmusik)이라는 제목으로 서문을 썼다. 그러나 극장에서 당시의 풍습으로 제 2막에 발레를 넣어야 한다는 요청에는 반대했다.[25] 바그너는 ‘탄호이저’의 오프닝이 약하다는 것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베누스베르크 장면을 수정하여 앞부분에 길고 격렬한 바카날 장면을 넣었다. 이 부분과 몇 군데의 수정작업은 1861년 1월에 끝났고 ‘탄호이저’의 ‘파리 버전’이 완성됐다.[26]
최소한 164회의 리허설을 하면서 바그너는 지휘자 피에르-루이 디에쉬와 주역을 맡은 알베르 니만 등과 고생하면 몇 번이나 위기를 겪었으나 1861년 3월 13일 ‘탄호이저’는 드디어 개막되었고 18일과 24일에도 공연되었다. 그러나 이 공연에서 관객 몇 명이 아주 극심하게 방해를 하여 3회의 공연을 모두 망친것은 극장 역사상 유명한 애기다. 샤를 보들레르가 ‘한 줌의 깡패들’ 이라고 표현한 이들은 승마클럽의 젊은이들이었다. 메테르니히 공작부인과 나폴레옹 3세의 친 오스트리아 정책을 반대하는 표시로 이 공연을 방해할 사전계획을 세웠다. 야유와 휘파람에 사냥용 나팔까지 소란하여 공연은 엉망이 되었고 결국 3회의 공연 후 바그너의 요청으로 공연은 취소되었다. 바그너는 이 일에 대해 철학적인 태도를 취하며 자신이 파리에 있는 동안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만난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지난 18개월의 작업이 수포로 끝나서 돈 한푼 없고 더 큰 빚을 지게 된다.
사실 ‘탄호이저’의 티켓 판매는 나쁘지 않았다. 첫 날은 좋았고 다음 날도 예상외로 좋았고 셋째 날은 매진이었다. 그대로 강행했으면 바그너는 최소 25,000프랑을 벌었을 것이니 빚을 다 갚고도 남을 돈이며 다음 작품에 대해서도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파리 오페라에서는 공연을 강행하려고 했고 바그너의 취소요청을 철회해달라고 했다. 만일 공연이 계속되었다면 언론과 여론때문에 승마클럽이 공격을 받아 난처한 처지가 됐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바그너가 이 공연을 취소하게 된 이유는 소란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많다. 오케스트라는 지루했고 지휘자는 좋지 않았으며 무대는 유치했고 가수들은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았다.
파리를 떠난 바그너는 곧 독일 중서부의 카를스루에로 갔다. ‘트리스탄’을 공연하기 위한 재정적 도움을 얻기 위하여 바그너는 앞으로 3년 동안 여러 번 이런 여행을 하게된다. 바덴 대공국의 대공은 ‘트리스탄’을 카를스루에에서 공연하는데 관심을 보인다. 그래서 바그너는 적당한 가수들을 찾기 위해 1861년 4월 빈으로 간다. 바그너는 5월 11일 빈 궁정극장에서 ‘로엔그린’의 공연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거기서 주역을 맡았던 알로이즈 안더가 트리스탄에 적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페라단에서는 그를 보내줄 수 없다고 하면서 대신 ‘트리스탄’을 빈에서 하는게 어떠냐고 제안한다. 빈은 시설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작은 카를스루에보다 훨씬 나았으니 바그너도 동의한다. 그래서 8월부터 연습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갑자기 안더의 목소리가 쉬어서 몇 달간 모든 것을 연기해야 했다.[27]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바그너를 베젠동크 부부가 베니스에서 초대했다. 바그너와의 관계는 전과 비슷했고 부부사이는 아주 가까워졌다. 자서전에 따르면 어느날 베니스에서 세 사람이 티치아노의 작품 ‘성모의 승천’(Assumption of the Virgin)을 보러갔는데 바그너는 크게 감동하여 자신의 그랜드 코믹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를 다시 계속하기로 결심한 것이라고 썼다. 1845년에 쓴 작품스케치는 마침 마틸데가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바그너는 보다 몇 주일 전에 출판업자 프란츠 쇼트에게 이 작품을 완성하겠다고 말했다.
빈으로 돌아온 바그너는 곧 ‘마이스터징어’의 대본스케치를 수정하였고 쇼트에게서 10.000프랑을 선금으로 받았다. 그는 곧 파리로 갔고 볼테르 호텔에 방을 얻어 들어간 뒤 30일만인 1862년 1월 25일에 대본을 완성한다. 이 세상의 근심을 몰아낼 수 있는 활기찬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바그너는 다시 한번 은둔하여 일할 조용하고 평화로운 곳이 필요했다. 쇼트의 집에서 대본 낭독회를 한 뒤 바그너는 마인츠 근처 라인강변의 비브리히에 작은 집을 빌렸다. 그런데 몇 주일 뒤 갑자기 부인 민나가 찾아온다. 두 사람은 다시 가정을 꾸리는 애기를 시작했으나 곧 말다툼이 시작되었고 민나는 다시 드레스덴으로 돌아간다. 그 직후 바그너는 요한 왕에게 민나의 건강을 돌보기 위해 작센에 갈 수 있도록 완전 사면을 요청했고 1862년 3월 28일에 허락을 받았다.
그 동안 ‘마이스터징어’의 작곡은 느리게 진행되어 서곡은 끝났지만 1막과 3막의 스케치 정도가 고작이었다. 1862년 10월에 출판업자 쇼트가 더 이상 선금을 줄 수 없다고 하자 바그너는 ‘마이스터징어’를 중단했고 그 뒤 18개월간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유럽 곳곳에 콘서트를 했다. 11월 1일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서 ‘마이스터징어’ 서곡의 첫 공연을 지휘했고 드레스덴으로 가서 민나와 며칠을 보낸다. 그것이 민나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바그너는 다시 빈으로 가서 ‘반지’와 ‘마이스터징어’의 발췌 곡으로 세 번의 콘서트를 했다. 12월 26일의 콘서트에서는에서는 ‘마이스터징어’ 서곡을 제외하면 모두 초연 되는 곡들이었으나 관객들의 반응은 아주 대단했고 특히 ‘발퀴레의 충돌’(Ride of Valkyries)이 나올때는 열광했다. 물론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혹평하고 빚을 지게 되는 패턴도 역시 똑같았다.
1862년 말 ‘반지’의 대본을 처음 출판할 때 바그너는 머리말을 쓰면서 자신의 오페라를 완벽한 상황에서 공연할 수 있는 페스티발 극장의 아이디어를 밝힌다. 또 그는 독일의 왕족이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해줘야 한다면서 ‘그런 왕은 없는가?’라고 썼다. 그러나 빈에서 진 빚이 심각해진 바그너는 가만히 앉아서 어떤 왕이 도와주기만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1863년 2월에 바그너는 프라하로 가서 콘서트를 했고 다시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8회의 콘서트를 하여 약간의 돈을 모은다. 그러나 5월 바그너는 이 당시 빈 교외의 펜칭으로 이사를 하더니 2층의 자기 아파트를 사치스럽게 장식하느라고 러시아에서 번 돈을 모두 쓴다. 그 해의 남은 기간에 후원금을 얻는데 실패하고 펜칭에서 사치스런 스타일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며 지나간다.
1864년 3월, 바그너의 재정상태는 최악이 되었고 경찰에 있는 친구는 체포되기 전에 얼른 스위스로 달아나라고 충고한다. 달아나던 바그너는 뮌헨을 지나가면서 상점 쇼윈도에 있는 18세의 왕 루트비히 2세의 초상화를 본다. 루트비히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왕의 죽음으로 3월 10일 바이에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바그너는 어린 나이에 그런 어려운 자리에 앉은 젊은이를 불쌍하게 여긴다. 취리히에 도착한 바그너는 베젠동크 부부에게 갈 수 없었고 하는 수 없이 빌레(Wille) 부부에게로 간다. 마리아펠트에 있는 저택에서 며칠을 보낸 어느 날 바그너는 엘리자 빌레에게 소리쳤다.
”내 몸의 조직은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르고 내 신경은 아주 예민하기에 나는 아름다움과 눈부심과 빛을 필요로 한다. 세상은 내게 필요한 것을 모두 줘야한다. 나는 당신이 섬기는 바흐처럼 동네 오르간 연주자로 고생하며 살 수 없다. 내가 사치를 조금 즐길 권리가 있다는것이 그렇게 충격적인가? 나는 이 세상과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그토록 많은 기쁨을 주지 않았는가!”
한 달이 지나자 빌레 부부와의 관계도 예민해졌고 4월 29일 바그너는 ‘마이스터징어’를 계속하려는 생각으로 슈투르가르트에 갔다. 그러나 친구 벤델린 바이스마이하이머가 찾아갔을때 바그너는 우울과 실의에 빠져 최악의 상태였다. 두 사람은 잠시 슈투트가르트를 떠나 ‘지상의 평화’를 찾아보기로 한다. 그런데 떠나기 전 날 저녁 뮌헨에서 온 어떤 신사가 급한 일로 만나자고 연락을 보냈다. 보나마나 빚쟁이일 것으로 예상한 바그너는 그 날 저녁에 만나기를 거절하고 다음날 아침에 만난다. 낯선 신사는 바이에른 왕국의 내각비서 프란츠 폰 피스터마이스터라고 신분을 밝혔다.[28] 그는 루트비히 왕의 반지와 사진을 주며 젊은 왕이 바그너를 존경하기 때문에 어려움을 해결하도록 도와주려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로엔그린’의 작가이자 작곡가를 만나고 싶어하시니 어서 함께 뮌헨으로 가자고 했다. 1864년 5월 4일 바그너는 뮌헨의 궁전에서 처음으로 왕족 후원자를 만나게 되었다.
5.2. 루트비히 2세 후원 이후
루트비히 2세는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왕가의 시골저택인 호엔슈방가우의 오래된 성에서 보냈다.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는 호엔슈방가우 성의 벽면을 독일의 옛 전설 ‘백조의 기사’ 그림으로 장식했고, 감성적이고 낭만적인 루트비히는 이 애기를 아주 좋아했다. 산과 숲에 둘러싸인 곳에서 혼자만의 꿈을 꾸던 루트비히의 머릿속에서 백조의 전설은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그러던 그는 15세에 바그너의 ‘로엔그린’ 공연을 보았고 백조가 이끄는 배에서 성배의 기사가 나타나는 장면에 크게 감동한다. 백조의 전설과 멋진 드라마, 음악을 만들어낸 바그너야말로 자기와 이상이 맞는 예술가라 생각했다. 그런 매력을 느끼던 루트비히는 바그너가 ‘니벨룽의 반지’ 대본 서문에 ‘그런 왕은 없는가?’라고 쓴 것을 읽고 자신이 그 일을 해야할 운명이라고 느낀다. 이 둘의 관계는 바그너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전혀 다른 성격이 두 사람이 개인 차이를 극복하고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순수하고 고상한 예술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바그너를 처음 만나고 이후 루트비히가 보낸 편지를 보면 그런 이상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한 것이 중요하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나는 일상생활의 귀찮고 무거운 짐을 그대의 어깨에서 영원히 지워버리고 싶소. 그래서 그대가 바라는 평화를 얻어 그 천재적인 솜씨로 황홀한 예술의 진수를 펼칠 수 있기 바라오. 모르시겠지만 그대는 나의 어린 시절부터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상대였고 다른 누구와도 다르게 말해주는 친구였으며 나의 스승이었소.”
1864년 5월 4일의 첫 만남 직후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4000길덴을 주었고 바그너는 다급했던 빈의 빚을 갚는다. 6월에도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16,000갈란을 준다. 또 왕궁에서 약간 떨어진 슈타른베르크 호수의 펠레트 저택에 주어 살게 했다. 이런 행복한 상태가 한달 정도 계속될 때쯤 바그너는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절감했고 마틸데 마이어에게 ‘집을 돌봐달라’고 편지를 썼지만 거절당한다. 그런데 6월 29일에 예고도 없이 코지마 폰 뷜로가 두 딸 다니엘라와 블란디네를 데리고 펠레트 저택에 나타난다. 이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 사이에는 사랑 이야기가 없었던 건 같다.[29] 그러나 코지마의 남편 한스 폰 뷜로가 오기 전 일주일동안 두 사람은 불륜에 빠져 관계를 맺으며 가까워진다.[30] 코지마는 바그너가 찾았던 여성상이었다. 자신에게 헌신하며 가정을 돌보며 자신과 동등한 지적 동반자가 늘 필요했던 바그너였는데 코지마는 바그너가 사망할때까지 바그너에게 필요한 감정적 안정을 주었다. 코지마는 자신의 아버지뻘인 남편 바그너에게 평생 헌신했다. 노년에 바그너가 저술했던 저서들은 모두 코지마가 바그너의 구술을 받아써서 완성되었다.[31] 코지마는 박식했으며 지식을 추구했고 독서를 즐겼다. 그리고 현실적인 생활능력과 봉사하려는 의지가 있었기에 바그너에게는 이상적이었다.
바그너와 그의 예술적 사명에 대하여 코지마가 완전히 헌신한 것은 유명한 ‘일기’에 기록 되어있다. 이 일기는 코지마가 1869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바그너가 죽을 때까지 썼다. 놀랍게도 이 일기에는 코지마 자신의 의견이 거의 없다. 코지마는 자신을 완전히 바그너의 생각과 일치시켜서 일기의 내용이 누구의 의견인지 분리할 수가 없다. 또 바그너의 생각과 다른 의견은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오로지 봉사의 일념으로 무장한 코지마의 일기를 보면 바그너에 대한 철저한 영웅숭배가 자주 펼쳐진다. 예를 들면 1878년의 일기에서는 바그너의 눈썹 및 몇 올을 받아들고 신의 선물처럼 감동한다. 그리고 바그너가 자기 오페라 작품을 쓰면서 내용을 상의했던 인물은 코지마 뿐이기도 했다. 또 코지마의 설득력으로 여러 가지 일을 조정하였고 그 결과 여러 번 바그너의 인생항로를 바꾼다.
1864년 7월 7일 한스 폰 뷜로가 슈타른베르크에 도착할 무렵 이미 둘의 불륜관계는 결정된 상태였다. 한스가 아내와 바그너의 관계를 언제 알았는지 확실히 알 수 없지만 펠레트 저택에 왔을 때 ‘통보’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한스는 언제나 코지마에 비해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인 리스트에게 ‘언제라도 코지마가 자기에게 실망하면 보내겠다”고 했다. 한스가 정말 그런 상태로 이미 코지마와 멀어진 사이였다면 코지마가 자신의 스승 바그너라는 존경스런 상대를 선택했을 때 별로 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스 자신도 코지마처럼 바그너의 예술적 임무를 도와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불륜의 소문이 루트비히 왕에게 알려지면 일이 틀어질까봐 침묵으로 동조하며 자기가 맡은 일만 했다.
슈타른베르크에서 몇 주일을 보낸 뒤 바그너와 코지마는 다시 헤어진다.[32] 곧 왕이 돌아오자 바그너는 ‘국가와 종교에 관하여’라는 글을 올린다. 입헌군주제에 관하여 적당히 쓴 이 글과 함께 바그너는 1864년 8월 25일 왕의 19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충성 행진곡’(Huldigungsmarsch)을 선물한다. 그리고 9월 26일에는 자신의 가장 중요한 작품인 ‘니벨룽의 반지’를 쓰기 위해 다른 작업을 모두 중단하겠다고 왕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다음날 ‘지그프리트’를 다시 꺼내 제 1막의 악보를 다시 깨끗이 복사한 뒤 12월부터 제 2막의 작곡을 시작하였고 다음해인 1865년 12월 2일에 끝낸다.
1864년 10월, 바그너는 뮌헨의 브리너슈트라세 21번지에 있는 대저택으로 이사한다. 역시 루트비히가 쓰도록 준 집이다. 10월 18일 루트비히 왕은 바그너가 ‘반지’를 끝마치는데 필요한 재정지원을 하기 위해 재무부에 3만 길렌을 주는 공식계약을 하여 사람들을 놀랍게 한다. 1864년 이후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모두 50만 마르크 이상을 주었다.[33] 왕은 자기 재산이 없었고 모든 것은 국가재정으로 부담했으니 내각에서는 당연히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바그너가 왕의 호의를 이용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위험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반지’를 공식 계악한 루트비히 2세는 이 작품의 공연을 보고 싶어했다. 왕의 재촉으로 바그너는 친구 건축가 고트프리드 젬퍼를 불러 뮌헨에 지을 적당한 극장을 디자인하라고 했다. 이 계획은 내각의 반대에 부딪쳤고 결국 극장은 짓지 못한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 설계에서 숨겨진 오케스트라 피트 등 여러 가지 특성을 나중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하우스에 사용한다. 또 이 당시 계획으로만 끝난 것은 바그너가 제안한 음악학교였다. 바그너의 음악극에 필요한 새로운 독일식 성악을 가르치려는 이 계획은 왕은 지지했지만 내각의 반대로 무산된다.
궁전에 있는 바그너의 최대의 적은 수석장관 루트비히 폰 데어 포르텐이었고 바그너와는 이미 1848년 작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의 문화장관이었던 포르텐은 바그너의 혁명적인 언행을 지적했고 그의 행적을 의심스럽게 봤다. 또 그는 바그너의 음악을 아주 싫어했고 당시 바그너가 가담했던 개신교 혁명세력을 아주 싫어했기에[34] 바그너가 루트비히 왕에게 영향을 주는것을 두려워했다. 때마침 바그너의 제안으로 그의 제자 한스 폰 뷜로가 왕의 시연자(Vorapieler)에 임명되자 뮌헨 전체에는 바그너의 세력이 바이에른 토박이들을 무시한다는 이상한 소문이 퍼진다. 또 바그너의 페스티벌 극장의 건립계획이 나오자 포르텐과 반대파들은 더 이상 참지못하고 1865년 2월 바그너와 왕을 갈라놓으려는 첫 번째 시도를 시작한다. 내각비서 피스터마이스터는 바그너의 잘못을 몇 가지 보고하면서 바그너가 왕을 ‘우리 아기’(Mein Jungen)라고 불렀다는 것까지 일렀다. 화가 난 왕은 2월 6일에 찾아온 바그너를 만나주지 않는다. 며칠 뒤 오해는 풀렸으나 언론들은 바그너를 까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왕에게서 ‘모든 것이 예전과 다름없을 것’이란 확인을 받았고 뮌헨 궁전극장에서 1865년 5월 15일로 예정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 준비에 몰입했다. 지휘는 한스 폰 뷜로가 맡았고 주역은 루트비히 슈노르 폰 카롤스펠트와 그의 아내 말비나가 맡았다. 다가온 공연 날 두가지 문제가 발생한다. 아침에는 파리에서 진 빚을 받으러 빚쟁이들이 집으로 몰려와 소동을 부렸고 오후에는 갑자기 말비나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서 이졸데 역을 할 수 없다는 연락이었다. 어쩔 수 없이 공연은 연기되었고 반대파들은 ‘도저히 인간이 부를 수 없게 만든 오페라’라고 떠들었다.
연기된 ‘트리스탄’의 초연은 결국 1865년 6월 10일에 개막되었다. 극장은 만원이었으며 그 다음 달에 세번 더 공연되었다. 공연은 대성공이었고 무엇보다 슈노르는 트리스탄을 완벽하게 연기했다는 평이었다. 또 국왕 루트비히 2세는 로열 박스에서 환희의 절정으로 몸을 떨었다. 보수적인 비평가들은 언제나처럼 혹평했지만 많은 관객들은 자신들이 음악역사의 커다란 신화가 창조되는 자리에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마지막 공연이 끝난 3주 후에 슈노르가 갑자기 드레스덴에서 사망한다. 사인은 티푸스였지만 트리스탄 역을 하느라고 초인적인 힘을 써서 죽었다는 루머가 퍼진다. 3년 뒤 바그너는 이 소문을 반박하기 위해서 ‘루트비히 슈노르에 대한 기억’이란 글을 쓴다.
루트비히 2세 왕의 요청으로 바그너는 1865년 7월 17일부터 자서전 ‘나의 인생’을 코지마에게 구술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코지마는 바그너의 부인 티를 내고 있었다. 코지마는 바그너의 비서, 가정부, 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바그너도 전적으로 코지마에 의지한다. 1865년 10월 코지마의 성격을 보여주는 사건이 발생한다. 바그너는 돈을 조금 더 달라고 국왕에게 요청했고, 내각에서는 반대했지만 왕의 요청으로 매년 8000 길덴씩 지급하되 그외 별도로 즉시 40.000 길덴을 주기로 결정한다. 마침 바그너의 몸이 불편해서 코지마가 대신 돈을 받으러 갔다. 그런데 가보니 수표나 지폐가 아니라 은화를 몇 자루 담아 놓고 가져가라는 것이었다. 바그너를 난처하게 만들려고 일부러 그렇게 했다는 것을 안 코지마는 침착하게 마차 두 대를 불렀고 직접 그 동전 자루들을 실었다. 이 애기가 퍼지면서 뮌헨 사람들은 바그너와 코지마의 관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페스티벌 극장과 음학학교 계획이 무산되면서 바그너는 자신의 적들이 철저하게 자신을 공격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이 싸움에서 이기려면 왕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1865년 후반부에 바그너는 국정에 관여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반대파들이 바그너를 쫓아낼 동기와 힘을 준 셈이었다. 바그너가 내각에 대하여 왕에게 충고를 하자 피스터마이스터와 포르텐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자신들의 위치가 위험하다는 것을 실감했고 언론을 통해 이에 맞선다.
1865년 11월 26일 뮌헨의 신문 ‘민중의 사환’(Volksbote)이 바그너의 국정간섭을 공격했고, 바그너는 3일 후 신문 ‘최신 뉴스’(Neueste Nachrichten)에 익명으로 답신을 실었다. 이 글에서 바그너는 내각의 2-3명을 파면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반대파들이 기다리는 바였다. 포르텐은 즉시 왕에게 글을 올려 “믿을 수 있는 신하들의 사랑과 존경이냐 아니면 바그너와의 우정인가”를 선택하라고 한다. 루트비히 2세는 바그너를 두둔하고 싶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각료들과 교회 그리고 귀족들까지 집단 사퇴와 혁명 가능성으로 압력을 가한다. 어쩔 수 없이 왕은 바그너의 추방명령을 내린다. 1865년 12월 10일 바그너는 뮌헨 정거장에서 코지마와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바이에른 왕국을 떠난다. 그리고 스위스로 간다.
1866년 1월 초, 제네바에 도착한 바그너는 교외에 집을 얻어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제 1막 작곡을 시작하여 3월 23일에 1막 악보를 모두 끝낸다. 바그너는 루트비히 왕에게 조금도 불만을 표현하지 않았고 오히려 왕이 그런 결정을 내리도록 거짓말과 속임수를 쓴 피스터마이스터와 포르텐을 당장 내쫓아야 한다고 편지를 쓴다. 비록 추방은 됐지만 루트비히 왕이 약속한 보조금은 계속 지급됐고 그래서 바그너는 이제 안주할 집을 구하기로 했고 우선 프랑스로 간다. 1월 말 마르세이유에서 며칠 머무르고 있을 때 드레스덴에서 민나가 갑자기 사망했다는 연락이 왔다. 바그너는 몹시 슬퍼했지만 장례식에 참가는 하지 않았다. 바그너는 민나와 살았던 시절을 회상하면 괴로웠던 때도 있었지만 좋은 추억도 있었다고 말했다.
적당한 집을 찾지 못한 바그너는 다시 제네바 교외로 돌아와 ‘마이스터징어’를 계속 만들었다. 3월 8일에는 코지마가 와서 3월말까지 있었다. 두 사람은 함께 루체른 호수로 여행을 가서 적당한 집을 찾다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저택 ‘트립쉔’(Tribschen)을 발견한다. 며칠 뒤 바그너는 이 집을 1년간 빌렸고 1866년 4월 15일 이사했다. 여기서 바그너는 6년간을 보내게 된다. 코지마가 다시 이곳으로 온지 며칠 지난 5월 15일 루트비히 왕에게 충격적인 전보가 온다. 루트비히가 왕위포기를 결심했고 그렇게 되면 바그너의 행운은 끝나는 것이었다. 바그너는 왕을 만류하는데 성공했지만 루트비히 왕은 비관적이었다. 바그너를 자기 옆에서 쫓아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독일 전체의 정국불안 때문이었다. 당시 프로이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독일 내에서 경제적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해진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 세력을 누르고 독일의 패권을 차지하기 바랐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 내의 작은 왕국들을 동원하여 더 많은 투표권을 유지함으로서 실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구상하는 통일독일제국을 프로이센의 호엘졸렌 왕가가 차지하려면 오스트리아와 전쟁으로 승부를 내야한다고 믿었다. 1866년 초부터 정세는 험악해졌고 독인의 크고 작은 각 왕국들은 한쪽을 선택해야 했고 바이에른과 작센을 포함한 대부분은 비스마르크를 믿지 못하여 오스트리아와 연합했다.
전쟁 위협이 고조될 무렵 루트비히 왕은 바그너에게 프로이센에 대해 여러가지를 물었다. 그리고 5월 22일에는 트립쉔으로 가서 바그너를 직접 방문하기도 하여 내각의 원성을 산다. 독일의 지성인과 진보주의자들 대부분이 그랬듯 바그너도 비스마르크에 대한 의견이 확실치 않았다. 독일의 통일이라는 아이디어에는 찬성이었지만 바그너는 초기에 비스마르크를 거만한 야심가로 봤다. 그런데 전쟁이 시작되자 바그너는 태도가 바뀌며 뢰켈에게 쓴 편지를 보면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 편에 붙으라’고 한다. 바이에른은 전투에서 패배했지만 약간의 보상금을 내는 것을 제외하면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덕분에 루트비히 왕의 입지와 인기는 좋아진다. 또 전쟁의 결과로 친 오스트리아 세력이자 바그너의 적이었던 피스터마이스터와 포르텐은 1866년말 사임한다.
적들이 사라젔지만 바그너는 뮌헨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1866년 시작된 전쟁과 함께 바그너에게도 좋지 않은 일들이 일어난다. 이제 한스 폰 뷜로가 자기 아내와 바그너의 관계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신문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며 세 사람을 공격하자 이에 대한 반항의 표시로 왕의 시연자라는 자리를 그만둔다. 그는 특히 ‘민중의 사환’ 신문에서 “코지마가 루체른에서 같이 지내는 사람은 친구인가 아니면 뭔가?”라는 기사에 발끈하여 편집장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바그너는 급히 루트비히 왕에게 편지를 하여 뷜로의 명예를 지켜주도록 부탁했고 코지마도 왕에게 애원의 글을 덧붙인다. 결국 왕권으로 사건은 무마됐으나 루트비히도 두 사람의 불륜 관계에 의심을 사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침 전쟁이 터지고 이 문제는 잠시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출연했다가 갑자기 사망한 루트비히 슈노르의 미망인 말비나 때문에 이 문제는 11월 다시 거론된다. 말비나는 처참한 꼴로 트립쉔에 찾아와 괴상한 소리를 한다. 남편의 유령이 나타나서 바그너와 결혼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바그너가 당연히 거부하자 말비나는 바그너와 코지마의 관계를 일러바친다. 바그너는 거짓말을 큰 죄악이라고 믿었지만 자신의 미래를 쥐고 있는 루트비히 왕과의 우정을 보호하기 위해 코지마와의 관계를 부정한다. 한스 폰 뷜로 역시 이 일이 밝혀지면 장인[35]을 포함한 모두가 대중의 놀림감이 될게 뻔했으므로 자신의 체면을 생각해서 입을 다물고 있는 수 밖에 없었다.
바그너는 1866년 9월 23일의 ‘마이스터징어’ 제 2막의 오케스트라 스케치를 끝냈고 다음달에는 제 3막 작곡스케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월 17일 코지마는 바그너의 두번째 아이 에바(Eva)를 낳았다. 또 다시 젬퍼를 불러 페스티벌 하우스 설계를 계속하게 했고 뷜로는 궁정악장이 됐으며 나중에 ‘니벨룽의 반지’ 초연의 지휘를 맡게 된 한스 리히터도 바그너의 비서이자 조수로 트립쉔에 합류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바그너는 루트비히 왕이 과연 실제로 새 극장을 지을 것인가에 대해 의문이 짙어진다. 내각에서 정적 둘이 사라젔지만 그렇다고 뮌헨 관료들이 반감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극장에 대해서 말만 많았지 실제로 지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느낀 젬퍼는 1868년 3월 이제까지 한 설계작업에 대한 보수와 비용을 지급 보증해 달라는 법적조치를 취했다. 바그너도 이제 ‘니벨룽의 반지’를 공연할 장소는 뮌헨이 아니라고 확신한다.
트립센의 아늑한 분위기에서 친구들과 여러 애완동물에 둘러싸인 채 바그너는 1867년 대부분을 ‘마이스터징어’ 마지막 부분 작업에 열중하며 보냈다. 이 작품은 10월 24일 완성되었고 다음 해 6월 21일 뮌헨의 궁정극장에서 초연되어 대성공을 거둔다. 왕의 요청에 따라 바그너는 로열박스에서 박수를 받고 인사한다. 바그너가 뭐만 해도 싫었던 언론들은 다음날 ‘예의를 모르는 짓’이라고 비난했다.
바그너의 민족주의가 나타난 걸작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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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징어’는 초연 된지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독일 전역에서 특히 애국적 행사에 필수적으로 공연되는 작품이 된다. 이 작품은 단순한 독일예술의 걸작품으로 칭송 받는 정도를 넘어서 당시 독일 통일을 위해 팽배하던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독일 국민을 단결시키는 작품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한스 작스가 사람들에게 장인의 전통과 ‘신성한 독일정신’을 찬양하는 부분의 원래 의도는 독일 문화와 독일 정신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바그너의 민족주의 사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작품이기에 일부에서는 이 작품을 왜곡하기도 했는데 당시 고조되던 민족주의와 점점 권력이 커지던 중산층에 크게 어필했고 한스 작스의 마지막 호소는 독일의 우월함과 맹목적 애국주의로 해석하기도 했다. 특히 후일 히틀러와 나치는 이 작품을 그런 쪽으로 심하게 해석하고 이용했다.[36] 한때 진보적이었던 바그너의 정치관도 이 시기에 확실히 변했다. 오랜 혁명 동지였던 라우베는 ‘마이스터징어’에서 나타난 바그너의 민족주의를 공격하는 기사를 빈 신문에 내었고 이걸 본 바그너는 몹시 화를 낸다.
1868년 11월 16일, 코지마는 두 딸 이졸데와 에바를 데리고 트립쉔에 입주하는 결정적 행동을 한다. 그리고 1869년 1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하여 바그너가 사망할때까지 쓴다. 뷜로는 아직도 불륜을 부정했지만 끝내는 루트비히에게 둘의 관계를 밝힌다. 약간 불편했던 관계에 있던 바그너와 루트비히 왕의 관계는 이로 인해 더 악화된다. 그러나 코지마가 들어오면서 바그너는 필요한 심리적 안정을 찾게 되었고, 힘을 얻은 그는 다시 창의력을 발휘하며 12년 전에 중단했던 ‘니벨룽의 반지’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 ‘지그프리트’ 제 3막의 작곡스케치는 1869년 3월 1일에 시작되어 6월 14일에 끝났다. 그리고 전체 악보가 끝난 1871년 2월 5일 무렵에 바그너는 자신의 페스티벌에 적합한 장소로 뮌헨보다 바이로이트로 고려하고 있었다.
‘지그프리트’ 작업을 재개한 직후인 1869년 5월에 당시 24살의 문헌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트립쉔으로 찾아온다. 니체는 그 전 해에 라이프치히에서 바그너를 만난적이 있고 앞으로도 여러 번 바그너를 찾아오게 된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니체를 충실한 제자이자 동지로 봤다. 재능있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했던 니체는 1869년 당시 바젤 대학교 고전문헌학 교수로 막 임명 된 상태였다. 그 당시 니체는 바그너의 푹 빠진 상태였고 특히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열정적으로 좋아했다. 그의 첫 저서 ‘비극의 탄생’에서 바그너의 오페라야말로 고대 그리스 비극의 정통성을 잇는 작품들이라고 평한다. 두 사람의 우애는 1876년까지 지속됐으나 둘의 사상의 차이가 보이면서 완전히 갈라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밑에 항목인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를 참조. 니체가 와있던 1869년 6월 6일 바그너의 셋째 아이이자 첫 아들 지그프리트가 탄생한다. 그리고 8일 후 ‘지그프리트’의 작곡이 끝난다. 그 악보를 보면서 코지마는 “이제야 우리 아이가 태어났군요.”라고 말한다.
영향력있는 작곡가를 넘어 당대의 유명인이 된 바그너에게 많은 인물들이 모인다. 여름의 트립쉔에 손님들이 찾아왔고 그 중에는 시인 주디스 고티에도 있었다. 시인 테오셀 고티에의 딸인 주지스는 남편과 함께 시인 빌리에 드 리즐 아담도 데려왔으며 모두 바그너를 존경했다.
1869년 가을 루트비히 왕과 바그너는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기존 극장에서는 ‘반지’를 제대로 공연할 수 없다고 믿은 바그너는 ‘라인의 황금’을 뮌헨에서 초연하라는 루트비히의 의견이 불만이었다. 더구나 뮌헨 사람들이 자기를 태도도 싫어했다. 그러나 루트비히 왕은 바그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을 진행하여 8월에는 리허설을 시작한다. 그런데 처음부터 여러 가지로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하여 바그너의 의견이 옳았다는것을 알았다. 또 지휘를 맡았던 한스 리히터가 그만두자 루트비히 왕은 바그너에게 화를 내며 뮌헨에서의 초연을 방해하려는 속임수라고 야단했다. 결국 뮌헨의 지휘자 뷜러가 바톤을 이어받았고 ‘라인의 황금’은 1869년 9월 22일 초연되었다. 그 다음해에도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의견을 무시하고 밀어붙여 1870년 6월 26일 역시 뷜러의 지휘로 ‘발퀴레’를 초연한다.
(왼쪽) 니벨룽의 반지 대서사시의 시작, 라인의 황금 (오른쪽)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가장 인기가 많은 제1야(夜), 발퀴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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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반지’의 마지막 작품인 ‘신들의 황혼’의 제 1막의 작곡스케치를 하고 있던 바그너는 첫번째 ‘반지’ 페스티벌을 할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한다. 1870년 3월 바그너와 코지마는 백과사전을 통해 독일에서 가장 큰 무대를 가진 극장을 찾았다. 그곳은 바로 바이로이트라는 작은 곳에 있는 마르크래플리쉐스[37] 오페라하우스였다. 페스티벌을 대도시에서 여는 것에 반대하던 바그너에게는 작고 평화로운 바이로이트가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이곳의 위치는 뮌헨과 베를린의 중간이어서 바이에른과 프로이센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바그너의 생각에도 맞았다. 머릿속에는 바이로이트 계획이 빠르게 진행됐지만 가서 조사를 할 수가 없었다. 전쟁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을 빠르게 이루려던 비스마르크는 독일국민의 여론을 통합하고 남부의 왕국들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독일의 적이던 프랑스와의 전쟁이 좋다고 여겼고 1870년 7월 19일 전쟁이 시작된다. 그리고 하루 전 코지마와 뷜로의 결혼이 베를린에서 법적으로 무효가 되고 8월 25일 바그너와 코지마는 루체른의 개신교 교회에서 결혼한다. 그 일주일 뒤 프랑스군은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폴레옹 3세는 폐위됐다. 1871년에는 독일 전체가 하나로 통일된 독일 제국임을 선포한다.
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은 독일에 자부심을 불러 일으켰고 바그너가 있는 트립쉔 분위기도 비슷했다. 바그너는 본인이 미워하던 프랑스에 복수한 기분이어서 1870년 11월에는 ‘참수’(Capitulation)라는 제목의 코미디 연극을 써서 파리사람들을 놀렸으며 한심한 프랑스 오페라나 좋아하면서 자기 문화를 버린 독일사람들도 비꼬았다. 그 해 말에는 바그너의 에세이 ‘베토벤’도 출판된다. 이 해 크리스마스 아침에 코지마는 음악 소리에 눈을 뜨는데 방문을 열어보니 복도와 계단에서 15명의 오케스트라가 ‘코지마의 생일 선물’을 연주하고 있었다 이 노래는 ‘지그프리트 목가’(Siegfried Idyll)로 바그너가 코지마 몰래 비밀리에 작곡하여 코지마 몰래 연습했던 것이다. 또 바그너는 빌헬름 1세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황제행진곡’(Kaisermarsch)을 헌정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끝나자 유럽은 조용해졌고 바그너는 첫번째 ‘반지’ 페스티벌에 몰두했다. 1871년 3월에는 루트비히왕에게 바이로이트 계획을 보고했다. 뮌헨 아닌 곳이 좋을 리 없었지만 루트비히는 그 계획을 인정한다. 4월에 바이로이트를 방문한 바그너는 마그라빈 오페라하우스가 귀족 취향의 극장이고 시설도 부족하여 ‘반지’ 공연에 적합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 새 극장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돈이 필요했고 바그너는 그 뒤 5년간 이 계획에 필요한 돈과 지원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4월말 바그너는 비스마르크를 만남이 이루어졌을 무렵부터 ‘반지’ 페스티벌을 위한 바퀴는 구르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새로 뽑은 사업 매니저이자 젊은 피아니스트 카를 타우지히와 돈 문제를 상의한다. 바그너가 극장을 짓고 페스티벌을 여는데 필요하다고 계산한 30만 달러를 모으기 위해 타우지히는 300달러짜리 후원자증명서를 1천명에게 팔기로 계획한다. 그러나 몇 달 후 타우지히가 사망하고, 그 자리를 이어 받은 만하임의 음악상인 에밀 헤켈은 바그너 협회[38]를 조직하고 경제적 여유가 조금 적은 후원자들이 공동으로 증명서를 사게한다. 1871년 5월, 바그너는 첫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1873년 열릴 것이라고 라이프치히에서 발표한다. 그러려면 ‘반지’ 작품이 모두 완성되어야 했기에 바그너는 곧 트립쉔에 돌아가서 ‘신들의 황혼’ 제 2막 작곡스케치를 시작했고 겨우 4개월 만인 8월에 끝마쳤다.
바이로이트 시의회 의장이자 은행가였던 프리드리히 포이슈텔도 1871년 11월 바그너의 편지를 받은 뒤 돕겠다고 나서 시의원들을 설득했고 결국 극장을 세우기 적당한 장소를 바그너에게 제공했다. 1872년 2월 ‘신들의 황혼’ 제 3막에 들어간 바그너는 잠시 바이로이트로 가서 포이슈텔, 테오도르 뭉커 시장, 지역 변호사 코펠라인이 포함된 페스티벌 위원회를 구성했다. 페스티벌 하우스를 지을 장소가 ‘푸른 언덕’이란 곳으로 결정되었을 때 바그너는 그 일부에 자신이 살 집 반프리트(Wahnfried)를 지을 계획도 포함시켰다. ‘신들의 황혼’ 작곡스케치는 1872년 4월 10일에 끝난다. 그리고 4월 22일 바그너는 6년간 살았던 트립쉔을 떠나 바이로이트로 이사했다. 1872년 5월 22일, 바그너의 59세 생일날,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푸른 언덕’에서 비가 퍼붓는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페스티벌하우스의 초석을 내리는 기념식을 했다. 이 기념식에는 프란츠 리스트가 빠진다. 당연하지만 코지마와 한스가 이혼한 이후 리스트와 바그너의 사이는 냉랭해진다. 루트비히 왕은 축전과 함께 바그너가 써준 시를 보냈고 이 두가지를 넣은 통이 초석과 함께 묻힌다. 축하행사는 마그라빈 오페라하우스로 옮겨 계속되었다. 바그너는 연설도 하고 또 자신에게 커다란 음악적 영감을 준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직접 지휘한다.
1872년 11월, 바그너와 코지마는 여행길에 오른다. 페스티벌에 필요한 가수와 연주자를 찾기위해 독일 전역을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바그너가 생각했던 대로 좋은 가수는 별로 없었다. 특히 지휘자는 더더욱 구하기 힘들었다. 답답한 바그너에게 새해가 되면서 나쁜 소식이 더해진다. 페스티벌 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후원자 증명서가 별로 팔리지 않았고 바그너 협회의 수입도 예상에 비해 훨씬 저조했다. 언제나처럼 바그너의 가장 큰 고민은 돈 문제였고 유일한 해결방법은 전국을 순회하며 콘서트를 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으로 필요한 돈을 어느정도 벌어들여 1873년 8월에는 페스티벌 하우스의 골격 완성을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다. 그러나 이런 연주회 때문에 별로 건강하지 못하던 바그너는 몸이 더 쇠약해진다.
페스티벌 위원회에서는 건축공사를 계속하기 위해 부유한 후원자에게서 자금을 빌리는 방법을 제안했다. 여러 곳에 요청했지만 모조리 거절당한 바그너는 다급해져서 루트비히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루트비히는 이 시기에 여러 성을 건축하느라고 여유가 없어서 이 제안을 거절한다. 어려움이 닥친 바그너는 후원자들에게 페스티벌을 1875년으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1873년 11월 바그너는 다시 한번 궁정서기 뒤플리프를 통해 루트비히 왕에게 도움을 청했지만 역시 거절당했다. 1874년 1월 바그너는 독일 황제에게 도움을 청해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런데 1월 25일 루트비히가 심경이 변하여 ‘절대로 이대로 끝나게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우리의 계획을 살리기 위하여 조치를 취하겠다’고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1874년 2월, 궁정 재무부는 페스티벌위원회와 계약을 맺는다. 10만 달러를 빌려줄테니 후원자증명서 판매대금으로 갚으라는 것이었다.[39] 또 루트비히는 이와 별도로 바그너의 저택 반프리트를 완성하라며 25,000달러를 주었다. 덕분에 바그너의 가족들은 1874년 4월 28일 반프리트[40]로 이사할 수 있었다. 바그너가 죽을 때 까지 살았던 반프리트 저택은 바그너의 예술이 시간이 갈수록 음악뿐 아니라 모든 예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되며, 그래서 현대 문화의 흐름을 바꿔놓게 되자 이곳은 바그너의 사상 바그너리즘의 사원이 된다.[41] 반프리트에서의 생활은 아주 질서있고 규칙적이었는데 작품을 쓰느나라고 받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덜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아침에는 ‘신들의 황혼’ 작곡을 하고 점심은 아이들과 먹고 오후에는 신문과 우편물을 훑어본 뒤에 페스티벌 사업문제를 논의하고, 다음에는 아이들과 공원을 산책했다. 저녁식사가 끝난 뒤에는 코지마와 함께 물러나서 독서를 하거나 작업중인 작품에 대해 의논했고, 때로는 ‘니벨룽의 내각’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젊은 연주자들과 함께 작곡한 부분을 연주해보기도 했으며 성악가들을 코치하기도 했다. 1874년 내내 바그너는 리히터의 도움을 받으며 첫 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출연할 오케스트라 멤버와 가수들을 선정하기에 바빴다. 여러가지 복잡한 준비를 철저히 하기 위해 페스티벌 날짜는 1876년으로 연기되었다.
1874년 11월 21일, 드디어 ‘신들의 황혼’ 악보가 모두 끝났다. 1848년 드레스덴에서 시작된 작품이 도중에 계속 중단되다가 무려 26년만의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페스티벌하우스의 건축비용이 아직도 문제였다. 왕에게 돈을 빌렸지만 모자라서 1875년 전반기에는 하기 싫은 유럽순회 콘서트로 돈을 벌어야만 했다, 지휘료로 받은 돈까지 가을에 새로 완성된 극장 무대에서의 리허설 비용으로 썼다. 바그너는 페스티벌하우스의 새 극장에서 처음으로 무대 밑에 감춰진 오케스트라 피트[42]의 음향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바그너는 꼼꼼하게 리허설을 준비했고 출연자들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스타일로 노래하도록 코치했다. 자기가 직접 노래를 부르면 가르치기도 했지만 동시에 출연자 스스로 맡은 역을 해석하여 그것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것도 허락했다. 다행히도 바그너는 최고의 성악가들을 모을 수 있었다. 보탄 역은 프란츠 베크가 맡았고 지그문트 역은 알베르트 니만, 지그프리트를 게오르그 웅거, 그리고 브륀힐데 역을 아말리에 마데르나가 맡았다. 미술가 요셉 호프만이 디자인한 무대장치를 코부르크의 브뤼크너 형제가 만들었으며 리하르트 프리케가 안무를 맡았으며 한스 리히터는 지휘를 맡았다.
리허설은 순조로웠지만 불안한 재정이 다시 페스티벌을 위기로 몰았다. 1875년 말까지 후원자증명서는 겨우 490명에게 팔렸으니 예상보다 절반에 못미친 수준이었다. 바그너는 황제 빌헬름 1세에게도 도움을 청했지만 정중히 거절당했다. 이제 누구도 돈을 빌려주거나 후원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던 그때 1876년 6월 루트비히 왕은 상환 기한을 연장해줬고 덕분에 페스티벌은 다시 진행된다. ‘니벨룽의 반지’의 총연습은 1876년 6월에서 8월까지 진행됐고 건축과 세트제작도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다. 8월 6일부터 9일에 열린 드레스리허설에는 루트비히 왕도 참석한다. 그는 밤에 갑자기 왔다가 ‘신들이 황혼’이 끝나자 다시 사라진다. 바그너와의 8년만에 재회였다. 사이클을 보고 난 루트비히는 바그너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대는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다. 실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드디어 1876년 8월 13일 첫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렸고 웬만한 당대 유명인사들이 모두 참석했으며 비스마르크와 황제 빌헬름 1세까지 참석한다. 나중에 바그너는 ‘황제와 모든 왕들이 처음으로 예술가에게 찾아온 역사적 순간’이라고 쓴다. ‘반지 사이클’[43]은 8월중에 3번 공연됐고 모두 대성공했다. 루트비히는 바그너의 요청으로 세번째 ‘반지 사이클’에 다시왔고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손님들을 맞는 주인 노릇을 한다. 베젠동크 부부도 이 곳에 참석했고 프리드리히 니체도 반프로이트에 머물면서 리허설과 첫 번째 사이클을 본다.
(왼쪽) 니벨룽의 반지 제2야(夜), 지그프리트 (오른쪽) 니벨룽의 반지 대서사시의 마지막, 신들의 황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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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엄청난 일은 모두 바그너가 혼자의 영감에 의해 시작되었고 끈질긴 노력으로 고집스럽게 추진하여 반대를 이겨낸 기적이요, 바그너 예술의 승리였다. 다만 바그너는 이번 페스티벌에서 15만 달러가 적자가 나자 바이로이트의 미래의 불안감을 느낀다. 바그너는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코지마와 아이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로 갔다.[44] 그러나 바그너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바이로이트로 가득했고 이 페스티벌을 살려내기 위해 방법을 모색한다. 최선의 방법은 뮌헨 오페라가 이 페스티벌을 인수하여 운영하는 것이었으나 루트비히 왕은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뒬리프 궁정비서는 “폐하께서 진행하시는 여러 가지 건축때문에 국고가 딸려서 그런 다른 일에 쓸 예산이 없다”고 했다. 바이로이트의 미래는 어두워졌고, 이렇게 일이 안 풀릴 때 바그너는 습관처럼 창작에 몰두했다. 1877년 2월부터 4월까지, ‘파르지팔’의 대본초안이 만들었다.[45] 그러면서도 바그너는 어떻게든 바이로이트의 적자를 줄여야 했고 결국 런던의 로열 알버트홀에서 20회의 콘서트를 지휘해달라는 제의를 받아들여 5월 1일 런던에 도착한다.
1855년 런던을 처음 방문했을 때의 좋지 않았던 경험 때문인지 바그너는 런던행이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일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이 콘서트의 에이전트 핫지 앤 에섹스는 1만석 좌석을 팔면 수입을 올릴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예상이었고 또 좌석 중 2천석은 회원들의 몫이라 일반관객에게 팔 수 없었다. 결국 20회로 예정했던 콘서트는 8회로 줄어들었고 예술적으로는 큰 성취를 거둔 공연이었지만 바그너는 겨우 700파운드를 받았으며 가수들 출연료까지 자기가 부담했다. 그러나 런던에서의 바그너의 위상은 지난번과 달리 차원이 달라졌다. 모두들 바그너를 대단한 인물로 알아줬다. 덕분에 바그너는 빅토리아 여왕이 윈저 성으로 초대하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고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소설가 조지 엘리엇, 시인 윌리엄 모리스, 화가 에드워드 번 존스 등 영국의 당대 유명 예술가들을 만난다.
한 달간 계속된 이 여행의 수입으로는 바이로이트의 거대한 적자정어리 표면을 약간 긁을 수 있는 정도였다. 가장 다급한 빚을 갚기 위해서 바그너는 개인적으로 저축했던 50,000 마르크까지 내놓았지만 상황은 전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꼬이자 바그너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다시는 독일에 돌아오지 않을 생각까지 했다. 1877년 6월 바그너는 바이로이트 시의회 의장 프리드리히 포이슈텔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 작품은 곳곳에서 공연되어 관객들이 모여들겠지만 바이로이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겠지! 내가 이곳을 택한 것이 잘못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거대한 아이디어를 갖고 이곳을 택했다. 나는 국가의 도움으로 전혀 새롭고 독립적인 무엇을 원했고 바이로이트를 예술의 워싱턴 D.C.로 만들려 했다. 우리 사회의 상류층에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것이다.”
루트비히 왕은 바그너가 이민을 간다는 소리에 놀라기는 했지만 여전히 ‘바이로이트’ 계획에 끼여들기를 꺼렸다. 1877년 9월 15일, 모든 바그너 협회의 대표들이 모인 페스티벌 하우스에서 바그너는 페스티벌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면서 ‘독일식’ 연주방법을 가르칠 바이로이트 음악학교 설립계획을 설명했다. 그러나 뮌헨에서처럼 이 계획도 실현하지 못한다. 9월말부터는 ‘파르지팔’의 제 1막 작곡이 시작됐다.
그러나 1878년 초가 되자 98,634 마르크나 되는 빚은 심각한 문제로 변했고 법적소송까지 가게 되었다. 이런 일이 바그너의 창작과 건강에 영향을 줄까봐 걱정한 코지마는 대담하게 루트비히 왕에게 편지를 보내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코지마의 부탁은 이루어진다. 1878년 3월 31일 바그너와 재무부 사이에는 그 빚을 갚도록 돈을 빌려주되 5퍼센트의 이자를 붙여 갚으라는 계약이 이루어진다. 또 바그너에게는 뮌헨에서 그의 작품이 공연될 때마다 10퍼센트의 로열티를 주기로 한다. 돈 걱정이 사라진 바그너는 ‘파르지팔’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고 1879년 4월에 작곡스케치가 끝났다. 바그너의 마지막 작품이 된 ‘파르지팔’의 주제 속에는 바그너의 사상, 종교관, 그리고 유럽을 타락시키는 퇴폐문화라는 것에 대한 비난이 들어있다.
1879년 말,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바그너는 날씨가 좋은 이탈리아로 간다. 여기서 바그너는 마지막 3년의 대부분을 보낸다. 1880년 1월 바그너와 가족들은 나폴리 항구의 빌라 안제리로 갔다. 밝은 햇빛 아래서 바그너는 다시 ‘파르지팔’의 작곡을 계속한다. 이 당시 바그너는 비스마르크와 독일제국이 군국주의에 열을 올리면서 문화를 천대하는 것에 실망한다. 그리고 바그너는 사회주의를 미래의 희망으로 생각하게 된다. 국가가 자신 같은 예술인들은 지원하려면 그렇게 변화하는 방법 외에는 없다고 본 것이다.
1880년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에서 보내던, 바그너의 빌라 안제리에는 아들 지그프리트의 가정교사로 철학자 하인리히 폰 슈타인이 와있었고 작곡가 엥겔베르트 홈퍼딩크, 젊은 화가 파울 폰 유코프스키도 있었다. 특히 유코프스키는 ‘파르지팔’의 의상과 세트디자인을 맡았고 바그너와 가까운 친구가 된다. 두 사람은 아말피(Amalfi)로 여행하다가 살레르노 만에 있는 루돌프 궁전에 들렀다. 이곳이 바로 ‘파르지팔’의 제 2막에 나오는 클링조르의 마법정원 모델이 된다. 1880년 7월 바그너와 가족들은 나폴리를 떠나서 북쪽의 시에나로 갔고 도시외곽에 저택을 빌린다. 다시 화해한 프란츠 리스트가 이곳으로 찾아왔고 바그너는 자서전 ‘나의 인생’ 마지막 부분을 완성했다. 시에나의 대성당에 갔던 바그너는 그 웅장한 내부에 감동하여 유코프스키에게 스케치를 시켰고 ‘파르지팔’ 첫 공연시 제 3막 성배의 궁정 장면에 참고한다. 바이로이트로 돌아오는 길에 바그너는 뮌헨에 들러서 1880년 11월 12일 로열박스에 혼자 앉은 루트비히 왕 앞에서 ‘파르지팔’ 서곡을 지휘했다. 이것이 두 사람과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바그너는 1881년 5월에 베를린으로 가서 라이프치히 오페라단장 안겔로 노이만이 제작한 ‘니벨룽의 반지’ 리허설에 참가했다. 이후 노이만은 라이프치히 오페라의 유럽 순회 공연으로 바그너의 명성을 유럽에 전하게 된다. 이때부터 바그너는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고 견디다 못해 5월에는 시칠리아로 갔다. 1882년 1월 13일 시칠리아의 팔레르모에서 바그너는 ‘파르지팔’의 악보를 완성했다. 이틀 뒤에는 화가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에게 초상화를 그리게 했는데 ‘개신교 목사’같다고 디스했다.[46] 팔레르모에서 봄을 보낸 바그너는 5월에 바이로이트로 돌아와 다음 페스티벌을 준비했다.
바그너의 종교적인 이상을 담은 마지막 작품이자 걸작 ‘파르지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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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파르지팔’을 신성한 ‘종교 페스티벌 작품’이라고 했다. 이 말을 오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니체처럼 이 작품을 기독교 작품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파르지팔’에는 기독교의 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사상이 함께 들어있다. 바그너는 다른 작품에서도 그랬듯이,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상과 감정의 무의식 세계를 신화와 상징으로 표현한 것이다. 월간지 바이로이터에 ‘기고한 종교와 예술’(1880)에서 바그너는 이렇게 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 종교가 가짜처럼 보이게 될 때는 그 에센스를 살리기 위해 예술이 종교를 맡아서 상징적 가치를 알려줄 수 있다. 종교에서는 있는 그대로 전하지만 예술에서는 아이디얼한 방법으로 그 속에 있는 깊은 진리를 보여줄 수 있다.”
페스티벌이 시작되기 전 바그너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후원자협회를 해산했고 그 덕분에 일반 관객에게 표를 팔 수 있었다. 1882년 7월 26일의 ‘파르지팔’ 초연 지휘자는 유대인 헤르만 레비였다.[47] 이것은 1878년 바그너가 루트비히 왕과 약속한대로 뮌헨 궁정극장 오케스트라를 썼기 때문이다. 처음에 '파르지팔'을 초연한다고 했을 때 루트비히 2세는 헤르만 레비가 지휘를 맡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그너는 '파르지팔'이 기독교적 내용의 오페라이므로 유대인이 지휘하면 곤란하다면서 거절했다. 하지만 루드비히 왕이 집요하게 주장하는 바람에 수락할수 밖에 없었다.
‘파르지팔’은 모두 16회 공연을 했고 마지막 공연인 8월 29일에는 제 3막의 무대전환 장면에서 레비의 바톤을 받아든 바그너가 끝까지 지휘했다. 루트비히 왕이 오지 않은 것이 슬펐지만 이 페스티벌은 예술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대성공이었다. 티켓 판매의 수입으로 이제 페스티벌은 다음 해에도 가능하게 됐다.
6. 사망
‘파르지팔’을 준비하면서 바그너의 건강은 극도로 나빠졌고 특히 가슴의 통증이 아주 심해졌다. 그래서 1882년 9월에 햇빛을 찾아 가족과 함께 베니스로 갔고 대운하가 보이는 팔라초 벤드라민의 한 층을 빌린다. 베니스에서 바그너는 주로 독서를 하거나 ‘파르지팔’에 대한 글을 쓰고 또 코지마와 함께 곤돌라를 타고 다니면서 조용히 보낸다. 11월에는 프란츠 리스트가 찾아와서 두 달쯤 묵으며 ‘우울한 곤돌라’라는 피아노 장송곡을 작곡했고 또 바그너에게 교향곡을 작곡하라고 권한다. 덕분에 바그너는 갑자기 교향곡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82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코지마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오케스트라를 조직하여 자신이 50년 전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한 C장조 교향곡을 지휘했다.1883년 2월 12일 저녁, 화가 유코프스키가 독서하는 바그너의 모습을 스케치한 후[48], 다른 사람들이 모든 잠든 뒤에도 바그너는 늦게까지 혼자 피아노로 ‘라인의 황금’ 마지막 장면의 라인 처녀들 탄식 부분을 쳤다. 그 다음날 늦게 일어난 바그너는 며칠 전부터 쓰기 시작한 ‘인간의 여성적인 면에 대하여’라는 글을 계속하기 위해 서재로 갔다. 사랑, 결혼, 성적인 동등함에 대한 바그너의 생각을 세밀하게 표현한 글이었다. 다음 날, 유코프스키가 2시쯤 저녁을 먹으러와보니 코지마가 바그너와 여자문제로 아침에 다툰 뒤 눈물이 글썽인 채로 피아노에 앉아 슈베르트의 ‘눈물 찬미’를 치고 있었다. 바그너는 몸이 안 좋아서 점심을 안 먹겠다고 전했다. 그 직후 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서 하녀가 들어가보니 바그너는 책상에 앉은 채로 다 쓰지도 못한 원고 앞에서 고통스럽게 신음하고 있었다. 곧 코지마가 달려왔고 의사를 불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심장경련을 일으킨 바그너는 오후 3시 30분쯤 코지마의 품에서 사망한다. 1883년 2월 13일이었다.
다음날 조각가 아우구스토 벤베누티가 바그너의 데스마스크를 만들었고[49], 2월 16일 그의 관은 곤돌라에 실려 역으로 간 뒤 거기서 다시 바이로이트로 향한다. 남편의 시체를 24시간 이상 붙들고 있던 코지마는 큰 충격과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한동안 생명이 위험할뻔 했다. 루트비히 2세 왕은 “이런 천재를 볼 수 있던 우리는 행운의 시대에 살았다.”고 글을 보냈고[50], 유럽 전역에서 바이로이트로 보내온 많은 조문과 메시지는 바그너의 예술이 당시 유럽에 커다란 영향을 주고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2월 18일 아침, 장례행렬은 사람들이 모인 거리를 지나 마지막 안식처에 도착한다. 반프리트 정원에 마련된 개인 묘지에서 가까운 친구 몇 사람만이 참석했다.
바이로이트 반프로이트에 있는 바그너 묘지 |
[1] 바그너는 자신 인생의 여러가지를 사실과 다르게 왜곡했고 바그너는 평생 동안 필요에 따라 여러 번 자신의 과거를 새로 만들어냈고 아버지에 관한 부분은 만년으로 갈수록 그 깊이와 껍질이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가이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바그너가 반유대주의가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1868년 바그너의 두번째 아내 코지마가 ‘일기’에 기록한 것을 보면 “바그너는 가이어를 친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바그너는 ‘나의 아버지 가이어’라는 말을 자주 썼고, 거의 말년이던 1870년대에도 가이어가 어머니 요한나와 결혼하여 그 많은 아이들을 맡게 된 것은 ‘커다란 희생’ 이었으며 뭔가 ‘죄책감’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2] 또 한가지 가이어를 친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1813년 7월에 요한나가 겨우 두 달밖에 안된 리하르트를 데리고 고생하면서 보헤미아의 테플리츠에 있는 가이어를 찾아간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반대편의 주장은 당시의 라이프치히가 너무 위험했기 때문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는 것이며 이 주장이 더 신빙성이 있다. 사실 가이어가 바그너네 집에 들락거리기는 했지만 프리드리히가 살아있는 동안에 요한나와 어떤 관계를 가졌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또 바그너의 체구가 작고 머리가 유달리 크다는 것은 바그너 가문의 특징이었다.[3] 바그너의 나이 35세 때였다.[4] 카펠마이스터, Kapellmeister[5] 지금은 Staatskapelee Dresden[6] 이 오페라의 첫 공연은 독일 음악 발전의 전환점이었다. 로시니를 대표하는 이탈리아식 오페라를 벗어나 독일식 낭만주의 오페라가 시작된 것 이었다.[7] 여담으로 이 집의 딸 클라라 비크가 나중에 슈만과 결혼한다.[8] 결국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1844년 1월 7일에야 베를린에서 공연된다. 드레스덴에서 초연이 있은지 1년이 지난 뒤였다.[9] 피부병과 위장병 때문이다.[10] Palm Sunday, 부활제 직전의 일요일로 예수가 수난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들어간 일[11] 러시아 황제가 칼로리네 공작부인을 직무이탈로 판정하여 3만 명의 소작인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압류했기 때문이다.[12] 여기서 바그너의 키가 168cm로 기록되어 있다.[13] 이것이 나중에 ‘지그프리트’가 된다[14] 약긴 공산주의 냄새가 나는 이 편지들은 나중에 부인 코지마가 일부 삭제한다.[15] 이 제목은 1863년 ‘지그프리트’와 ‘신들의 황혼’으로 수정된다.[16] 자서전에서[17] 만물의 본질 혹은 기쁨, 괴로움, 사랑 같은 완벽한 가치[18] 트리스탄은 1857년 8월에 반지의 작곡을 중단한 채 대본 초안 작업을 한다.[19] 위니프레드는 바그너와 코지마의 아들 지그프리트의 부인이 되며 히틀러 집권 시기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운영을 맡게 된다.[20] 부활절 금요일[21] 1879년 4월의 코지마 일기에 의하면[22] 프란츠 리스트와 다구 공작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딸[23] 그러나 마틸데는 바그너가 베니스에서 보낸 편지들을 뜯어보지도 않은 채 보관하고 있다가 바그너에게 돌려준다.[24] 황제를 움직인 여인은 오스트리아의 대사의 부인이던 파울리네 폰 메테르니히 공작부인이었다.[25] 이것은 당시 부유층의 모임이던 승마클럽 멤버들이 언제나 조금 늦게 도착하기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다.[26] 이와 구별하기 위해 이전의 것을 ‘드레스덴 버전’이라고 한다.[27] 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는 이 일을 증거로 내세우며 바그너의 오페라는 인간이 부를 수 없는 작품이라고 주장했다.[28] 사실 피스터마이스터는 몇 주일간이나 바그너를 찾으러 고생했다.[29] 자서전에는 1863년 11월에 이미 서로의 소유임을 약속했다고 하지만 신빙성이 없다.[30] 그래서 약 10개월 뒤인 1865년 4월 10일 바그너의 첫 아이 이졸데가 태어난다. 참고로 이 날은 한스 폰 뷜로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시작한 첫날이었다.[31] 사실 뷜로와 코지마의 관계는 시작 전부터 비극의 씨앗을 품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코지마가 다름아닌 바그너의 열렬한 빠순이였던 것이다. 코지마와 뷜로가 맺어지려고 할 때 세간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코지마가 아깝다, 뷜로에게 코지마는 과분한 여자라고 했다. 그런 평에도 불구하고 코지마가 뷜로와 결혼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뷜로가 바그너의 수제자였기 때문이었다.[32] 그리고 1864년 11월 뷜로 가족이 뮌헨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바그너는 코지마를 만나지 못한다.[33] 이와 비슷한 액수가 나중에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계획에 투자되었고 바그너의 후손들이 갚는다.[34] 당시 바이에른 왕국은 가톨릭이었다.[35] 당시 프란츠 리스트는 사제가 됐다.[36] 제2차 세계 대전 후반에는 바이로이트에서는 ‘마이스터징어’만 공연했고 전선에서 온 부상병과 가족도 ‘총통의 손님’으로 초대됐다.[37] 영어로는 마그라비[38] 이 협회는 아직도 존재한다.[39] 이 돈은 나중에 바그너의 후손들이 다 갚았는데 1달러는 약 3마르크로 계산되었고 총액은 216,152마르크였다.[40] 환상으로부터 해방이라는 뜻[41] 현재는 바그너 박물관이 됐다.[42] 젬퍼가 처음으로 고안했다.[43] 니벨룽의 반지 4작품 전체[44] 바그너는 이 여행 중에 1876년 11월 소렌토 바닷가에서 니체와 마지막으로 만났다.[45] 1865년에도 썼지만 다시 새로 썼다.[46] 초상화 보기[47] 바그너와 헤르만 레비는 친구였다. 바그너는 레비의 재능을 높게 평가했다.[48] 그림 보기[49] 사진 보기[50] 바그너가 사망한지 3년 후, 루트비히 왕은 슈타른베르크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