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사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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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사적 제7호 | ||
경주 망덕사지 慶州 望德寺址 Mangdeoksa Temple Site, Gyeongju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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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유적건조물 / 종교신앙 / 불교 / 사찰 | |
면적 | 23,506㎡ | |
지정연도 | 1963년 1월 21일 | |
제작시기 | 통일신라 신문왕4년(684) | |
위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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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망덕사 동목탑과 서목탑의 추정도 및 복원도 |
신라시대에 지어진 대사찰로, 지금은 터만 남은 절.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956 소재. 옆에 있는 사천왕사의 존재를 당나라에게서 숨기려고 지었다는 특이한 기록이 있다. 인지도는 낮지만 13층 쌍목탑이 있던 한반도의 거찰이기도 했다. 망덕사지는 대한민국의 사적으로 지정[1], 경내의 망덕사 당간지주는 대한민국의 보물로 지정되었다.[2]
2. 역사
황룡사에 황룡이 나타났다는 전설이 있듯, 어지간한 역사가 있는 절들 대부분은 그럴듯한 전설이 전하지만, 망덕사 창건설화는 좀 기이하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70년 나당전쟁이 발발해 신라와 당나라가 대립했고, 670년과 671년에는 당나라 수군 함대가 폭풍으로 침몰하는, 훗날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스러운 일이 발생했다.[3]당나라는 신라 사신 김인문과 박문준(朴文俊) 등을 나당전쟁의 책임을 물어 감옥에 가두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난 뒤 당고종이 박문준을 문책해 묻자 박문준이 아래와 같이 답했다.
저희 신하들은 당나라에 온 지 10여 년이나 되었기 때문에 본국의 사정을 모릅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들었을 뿐입니다. 우리나라가 상국의 은혜를 두텁게 입어 삼국을 통일했기 때문에, 그 은덕을 갚으려고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창건하여 황제의 만수를 빌기 위해 오래도록 법석(法席)[4]을 열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신라와 당나라가 당시 전쟁 중이었으므로 얼핏 생각하면 위 대사가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신라가 나당전쟁을 일으킨 이유는 옛 백제 땅(웅진도독부)과 옛 고구려 땅(안동도호부)에서 당나라를 쫓아내고 한반도는 신라 영토라고 당나라에게 인정받은 뒤 전쟁을 끝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라는 선빵을 쳐놓고도 계속 사죄사를 보내는 등 당나라를 여전히 명목상 상국으로 받들었다. 물론 당나라 입장에서 보기에는 어이없는 기만이었겠지만 명분상으로는 그랬다. 나당동맹의 약속을 취리산 회맹 등으로 먼저 어기고 뒷통수를 친 쪽이 당나라기도 했고. 아무튼 당고종은 악붕귀(樂鵬龜)라는 사람을 사신으로 보내 박문준이 말한 절이 정말로 당 황제의 만수무강을 비는 절이 맞는지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사천왕사는 실제로는 당나라 같은 외세를 물리치기 위해 만든 절이므로 당나라의 조사를 받으면 들통날 것이 뻔했기에, 신라 조정은 당나라 사신 악붕귀에게 보여주기용으로 미리 사천왕사 남쪽에 새 절을 날림으로 지었으니 바로 망덕사다.
예상대로 악붕귀는 오자마자 먼저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는 천왕사에 들르고 싶다고 말했다. 신라인들이 악붕귀를 망덕사로 인도해 보냈더니, 그도 뭔가 미리 입수한 정보가 있는지 망덕사의 문 앞에 서서 "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신라에서 악붕귀에게 금 1천 냥을 주어 매수했고(...) 그 사신은 본국에 돌아가 당고종에게 황제의 수명을 축하하는 절이 맞더라고 거짓 보고를 올린 덕에 무사히 넘어갔다.
악붕귀가 말한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란 말은 의미가 불확실하다. 삼국유사 원문에는 "기사립어문전왈其使立扵門前曰 불시사천왕사不是四天王寺 내망덕요산지사乃望德遙山之寺"라고 하였다. 번역하면 【그 사신(악붕귀)은 절의 문 앞에 서서 "(이곳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의 절乃望德遙山之寺이다." 하였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망덕요산지사(望德遙山之寺)'란 부분을 '망 / 덕요산지사'라고 띄어 읽어 '덕요산의 절을 바라보았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만약 덕요산이 (사천왕사가 있는) 경주 낭산을 가리킨다면, 삼국유사의 해당 구절을 【그 사신(악붕귀)은 절의 문 앞에 서서 "(이곳은) 사천왕사가 아니다."라고 말하고는 낭산(덕요산)의 절(사천왕사)을 바라보았다.】라고 다르게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해석의 치명적인 약점은 낭산이 '덕요산'이라고 불렸다는 기록도 없고, 근처에 다른 덕요산도 없다는 것. 이 해석을 따르려면 '근거는 없지만 낭산이 덕요산이라고도 불렸을 것이다.' 하는 가정을 해야 한다. 그렇다고 '망덕요산'이라는 한 덩어리 단어로 해석하자니, '덕을 바라보는 멀리 있는 산'이란 뜻이 되어 왜 악붕귀가 그렇게 말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또한 '망덕요산'이 어떤 특정한 산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망덕사를 가리키는지도 알 수가 없다. 만약 덕(德)이 중국 황제, 즉 당나라를 가리킨다면 '당나라를 바라보는 멀리 있는 산'이라고 해석할 수 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는 않다. 이러한 이유로 악붕귀가 했다는 말은 망덕사를 보고 진짜 사천왕사가 아니라고 태클을 걸었다는 것 외에는 정확한 뜻이 무엇이라고 확정지어 해석할 수가 없다. |
어쨌든 나중에 신라와 당나라가 전쟁을 끝내고 국교를 회복하면서 망덕사는 당나라를 위한 절로 남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훗날 경덕왕 때인 755년에 13층짜리 두 탑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떨어졌다 붙었다 하며 곧 넘어질 듯하고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진이 일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공교롭게도 그 해 당나라에서는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혼란스러웠기에 당나라와 연관된 이 절이 거기에 감응한 것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798년과 804년에도 두 탑이 서로 부딪히도록 흔들렸다는 기록이 나온다. 근데 사천왕사나 황룡사 같은 다른 목탑이 같이 흔들렸다는 기록은 딱히 없어서 삼국유사 기록대로 서둘러 부실공사하느라 망덕사만 더 많이 흔들렸을지도(...)
3. 현재의 망덕사지
위치는 경주 사천왕사지에서 남쪽, 즉 7번 국도 건너편에 있다. 직선거리로는 150 m도 떨어져있지 않아 그냥 바로 옆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고, 신문왕릉에서는 100 m 정도 거리에 있다. 태생부터가 사천왕사지의 연막용으로 콩라인이라 그런지 사천왕사보다도 훨씬 안 유명한데,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등 몇 차례 발굴로 망덕사 역시 상당히 규모가 큰 중요 사찰이었다고 드러났다.물론 경주의 굵직한 대사찰들에 비하면 면적은 그리 넓지 않지만, 층수로는 황룡사 9층 목탑을 넘는 13층 쌍목탑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에는 상당히 웅장했을 것이다. 바로 옆의 사천왕사에도 쌍목탑이 있었다고 한다.
사실 목탑지의 규모로 볼 때 13층이나 되는 목탑이 둘이나 있었다는 기록은 과장이 아닌가 하는 시각도 있다. 그런데 2015년의 논문 [망덕사지 동서 13층목탑과 정혜사 13층석탑의 상관적 고찰]에서는 지금도 남아있는 국보 제40호 정혜사지 13층석탑과 세운 연대가 비슷하고 둘 다 13층이라는 점에서 비교분석한 연구가 있었는데, 황룡사 목탑처럼 사람이 올라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닌 24미터 정도의 목탑으로 추정했다.
4. 외부 링크
- 한국어 위키백과: 경주 망덕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경주망덕사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망덕사
- 미술대사전(용어편): 망덕사지
- 답사여행의 길잡이 2 - 경주: 망덕사터
- 대한민국 구석구석: 경주 망덕사지
- 두산백과: 경주 망덕사지
5. 사적 제7호
경주 낭산(狼山)의 기슭에 자리하고 있는 절터로 사천왕사와 마주하고 있다. 처음 지어진 때는 정확하지 않으나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로 전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베껴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망덕사지 → 경주 망덕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삼국유사』에 의하면 문무왕 19년(679)에 중국 당나라가 침입하자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고자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 소문이 당나라에 전해지자 당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이를 확인하려 하였는데, 신라에서는 사천왕사 건너편에 이 절을 지어 보여 주었고, 당나라의 덕을 우러른다는 의미에서 망덕사(望德寺)라 하였다고 한다.
경덕왕 14년(755)에 탑이 흔들렸는데, 마침 중국에서 안록산의 난이 일어났으므로 신라사람들은 당나라를 위해 지은 절이어서 그렇다고 하였다 한다. 또한『삼국유사』에는 절을 지은 후 잔치를 베풀 때 효소왕이 진신석가를 알아보지 못하여 조롱을 당했다는 이야기와, 『반야경』을 베껴쓰다가 죽은 승려 선율이 불경의 완성을 위하여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현재 절터에는 동·서 목탑터와 그 북쪽으로 금당터와 강당터, 남쪽으로 중문터, 그리고 이를 둘러싼 회랑터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시대 전형의 쌍탑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이밖에 중문터 남쪽에 계단터가 잘 남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당간지주(보물 제69호)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절은 황룡사, 사천왕사, 황복사와 함께 경주의 중요한 사찰이었던 곳으로서 그 의미가 크다.
※(망덕사지 → 경주 망덕사지)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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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들이 명소로 많이 찾는 곳은 밑줄 표시. | }}}}}}}}} |
[1] 처음 지정될 당시 사적 제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2] 처음 지정될 당시 보물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현재는 문화유산에 번호를 매기는 것이 유산의 중요도로 오인될 수 있음을 고려해 따로 번호를 매기지 않고 있다.[3] 삼국유사에서는 신라의 승려 명랑대사가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 비법이라는 주술을 행하여 일으킨 신이라고 설명한다. 현령곽군묘지명(縣令郭君墓誌銘)에 따르면 곽행절(郭行節)이 나당전쟁에 참전했다가 671년 배가 풍랑으로 부서져 익사했다고 설명하므로, 실제로 폭풍이 불어 당수군이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도 실제로 태풍이 불었는데 그 태풍에 신의 바람이라는 의미를 가져다붙인 것이므로 비슷한 사례라 하겠다.[4] 승려를 모시고 설법이나 독경 등을 하는 규모가 큰 불교행사. 여기에서 야단법석이란 말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