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30 16:23:55

멕시코/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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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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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사2. 아즈텍 제국의 등장3. 스페인의 식민 지배
3.1. 경제3.2. 문화
4. 멕시코의 독립 과정과 아구스틴 1세의 치세5. 아구스틴의 몰락과 첫 번째 공화정6. 산타 안나의 집권과 미국과의 전쟁7. 2번째 공화정과 프랑스의 침략8. 현대사

1. 고대사

기원전 2만년 경에 베링 해협으로부터 건너온 사람들이 멕시코 지역에 정착했으며 일부 부족은 더욱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남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조상이 되었다. 어쨌든 멕시코 지역에 정착한 주민들은 기원전 8000년부터 농경을 시작하였으며 기원전 2300년 경의 토기가 발견되기도 하면서 이 시기부터 문명의 기원이 형성된걸로 보인다. 이후 기원전 14(혹은 12)세기부터 멕시코 동남부 지역에서 올메카 문명이 최초로 등장하였고, 이후 멕시코 본토에서는 사포테카, 미스테카, 테오티우아칸, 톨테카 등의 문명이 형성되고 사라지면서 수많은 국가들이 흥망을 거듭하였으며, 멕시코 남부 및 유카탄 반도과테말라 일대에서 마야문명이 번창하기도 했다. 이들은 매우 정확한 태양력과 태양과 달의 피라미드로 대표되는 건축술, 인신 공양의 제례 방식 등을 공유하였고, 문자도 가지고 있었다.[1]

2. 아즈텍 제국의 등장

그러다가 14세기 경부터 모습을 드러낸 아즈텍 제국이 멕시코 고원의 주도권을 잡고, 북부지방의 톨텍 제국에게서 제국의 타이틀을 빼앗아 왔다. 아즈텍 제국은 이전부터 계속되던 인신 공양의 제례를 대대적으로 확대하는 한편, 텍스코코 호수 중간의 수중 도시인 테노치티틀란에서 '치남파스'라고 불리는 수경 재배 양식을 발전시켜 나갔다. 당시 테노치티틀란은 인구가 15 ~ 30만 명까지 추산되는 세계에서 손꼽을 만한 대도시였다.

하지만 스페인콩키스타도르 에르난 코르테스의 병력 200여 명을 자신들 신화 속의 신 케찰코아틀로 여겼던 황제 몬테수마 2세는 이들을 환대하였다.[2] 1519년 코르테스는 이후 황제를 기습해 포로로 잡고 아즈텍 제국을 유린했으나, 뒤늦게나마 반격을 가한 아즈텍에 의해 코르테스는 쫓겨나게 된다. 이후 코르테스본국의 지시 없이 단독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 자신을 뒤쫓은 1000여 명을 부대로 편입하고 아즈텍 제국의 과도한 공물 요구와 인신 공양 제례에 지쳐 있던 다른 원주민들 10여 만 명의 협조를 받아 1521년 마침내 아즈텍을 멸망시켰고, 아즈텍을 정복한 스페인은 3년 후에는 멕시코 중부 지역에 위치해 있던 다른 원주민 국가인 푸레페차(타라스칸)를 정복하고, 뒤이어 마야 문명이 지배하고 있던 남부 지역과 북부 지역의 여러 군소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상대로 정복전쟁을 벌여 17세기 후반과 18세기에 들면서 멕시코 전역을 식민지화하기에 이르렀다.

3. 스페인의 식민 지배

이후 이곳은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어, '누에바에스파냐'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의 부왕(副王)이 지배하게 된다. 부왕령[3]이라는 개념은 전근대 스페인 특유의 행정 개념으로 여타 유럽 국가들의 봉건제와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중세 레콩키스타 시대 당시 스페인의 왕들은 특정한 수도 내 궁전에서 왕이 머무르는 방식이 아닌 무어인이나 바이킹 등과 대치하는 과정에서 전략적 요충지에 주둔하면서 국정을 살피고, 왕이 당장 관할하기 힘든 지역의 내정을 대신 책임지는 부왕을 두었는데, 이러한 연유에서 부왕이 주둔하거나 관할하는 지역은 국내외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동되곤 했다. 15세기 이래 이탈리아 방향으로 팽창한 아라곤 왕국은 직접 관할하기 힘든 해외 영토에 사르데냐 부왕령, 시칠리아 부왕령을 두고 카스티야 연합 왕국 역시 레콩키스타를 마무리 짓는 과정에서 북부 갈리시아 지방에 별도의 갈리시아 부왕령을 설치하는데 이 부왕령 제도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개척한 서인도 제도 식민지에 새로 부왕령을 설치하면서 아메리카 식민지로 확대되었다.

이 지역에서 유럽인들과의 접촉 이후 아즈텍 또한 천연두로 인해 대대적으로 인구가 몰살당했고,[4] 대항해시대 당시 건너온 유럽 백인들은 앵글로아메리카 쪽의 일부 종교적 소수자 외에는 남자가 대다수이고 여자는 부족하여 현지 원주민 여자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메스티소들이 탄생했다. 물론 강간 등의 성범죄뿐만 아니라 결혼이나 사실혼으로 태어난 메스티소들도 많다.[5] 그 때부터 시작된 메스티소 혈통은 멕시코 인구의 주류를 차지한다.[6] 식민지 계급 제도의 최상층에는 스페인 반도에서 출생한 페닌술라르, 그 다음에는 식민지 현지에서 태어난 백인인 크리오요가 있었고, 원주민 및 흑인 노예들은 사회 하층 계급으로 차별받았다.

누에바에스파냐의 관할 구역은 남쪽으로는 오늘날의 코스타리카에서 북쪽으로는 캐나다의 브리티시 컬럼비아에 해당하는 지역 이르렀다. 하지만 스페인인 정착민들은 고산지대 중에서도 온난한 지역[7]을 선호하였는데, 멕시코 고원 지대는 이미 아즈텍 제국 시대 건설된 사회간접자본이 있어서 개발이 쉬웠던데다가, 코스타리카와 파나마 일대[8]는 상술한 것처럼 말라리아 때문에 스페인인 입식자들도 정착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떼죽음을 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한 편 대항해시대 당시 카스티야 연합 왕국에서 동쪽 해안 지대에 해당하는 아라곤 왕국 주민들은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민한 사람들 상당수는 카스티야-레온 왕국의 하급 귀족들이 많았다. 카스티야-레온과 바스크 일대는 대부분 산지였기 때문에 해당 지방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은 고산 지대를 선호하는 것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9]

스페인은 광활한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2가지 방법을 사용했다. 하나는 상술한 페닌술라르에 대한 공공연한 우대 정책이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 당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유럽발 전염병으로 떼죽음을 당한 사실이 잘 알려져있지만, 아메리카에 정착한 스페인인들 역시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적지 않은 수준이었다. 스페인에서는 노다지 식민지에 파견할 유능한 관료들이 식민지 발령을 거부하거나 군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반도인 즉 페닌술라르라는 감투를 씌워준 이후 식민지 내에서 왕 못지않은 절대권력을 누리도록 허락하였다. 한 편 페닌술라르들이 가정을 꾸리거나 가족들을 데리고 와서 눌러앉으면, 그 후손들은 순혈 유럽인이라도 원주민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핑계로 크리오요로 계급이 강등되어버리므로 부인을 데려온 사람들의 경우 임기가 끝나면 대다수가 귀국을 택해버렸다. 스페인 제국은 이 방법을 사용하여 식민지에 파견한 관료들이 독립 군벌 왕조를 세우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10]

또 다른 하나는 예수회에 막대한 토지를 하사함과 동시에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에 원주민들을 상대하도록 한 것이다. 이들 프란치스코회 등 가톨릭 수도회들은 누에바에스파냐에서 직접 행정력을 행사하기 힘든 지역에 교통망을 유지함과 동시에[11] 현지 크리오요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도 맡았다. 누에바에스파냐 식민지에는 스페인인 군인과 관료, 주교들 이외에도 원주민들을 개종시키고 감독할 예수회/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정착하였다. 특히 유럽에서 파견나온 수도자들이 멕시코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는데 비교하자면 동아시아로 파견된 마테오 리치, 아담 샬,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같은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 조정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화포, 천문학과 역법, 회화 관련 지식과 기술을 주로 활용했다면, 누에바에스파냐로 파견된 수도자들 중에서는 농업 기술 전문가들이 많았다. 예수회/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현지 원주민과 메스티소들에게 유럽 최신의 농업 기술을 이식하고 역으로 신대륙의 작물들을 분석하여 유럽에 도입하는데 힘썼다.

그러나 1776년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스페인과 식민지 내 예수회를 전부 추방할 것을 명령하고, 이후 즉위한 카를로스 4세는 1805년부로 식민지의 성직자들의 여러 특권을 폐지시키는 정책을 취했다. 성직자들의 권익을 제한한 것은 중앙집권화 강화를 위한 조치였다지만, 해당 조치는 당시 사회 인프라가 빈약하던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성직자들은 교육계와 언론에 해당하는 역할도 함께 맡았다는 점을 간과한 것이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추방당한 예수회 수도자들은 자신들의 이권을 축소시킨 스페인 정부에 불만을 쏟아내면서 라틴아메리카 사회를 동요시킨 것은 덤이다.

3.1. 경제

1546년 누에바에스파냐의 사카테카스, 페루 부왕령의 포토시에서 은광에 발견된 이후 스페인은 막대한 은을 채굴해냈다. 이렇게 채굴된 은은 멕시코 서부의 아카풀코 항을 통해 누에바에스파냐의 필리핀도독령을 거쳐 중국으로까지 흘러들어가게 된다. 명나라 시대부터 청나라 중반까지 중국은 서양과의 무역에서 스페인 달러(8레알짜리 은화)로만 결제를 받았다. 은화로 구입한 중국산 물산[12]은 다시 필리핀을 거쳐 아카풀코로, 다시 육로를 거쳐 은화와 함께 베라크루스로 이동된 후 대서양을 건너 스페인 본토의 세비야 항구로 이송되었다. 멕시코 은은 16세기 가격 혁명의 주요한 원인이 되고 일본 은과 함께 세계 경제의 양대 축으로 자리 잡지만, 정작 스페인에서는 바람직한 경제 성장이 이루어지지 않고 물가 앙등의 원인이 되었다.

누에바에스파냐 시절 멕시코의 경제는 쿠바 도독령이나 아니면 프랑스의 생도맹그, 포르투갈의 브라질처럼 노예 대농장에 의지하는 경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흑인 노예의 유입은 적었다. 1518년 카를로스 1세플랑드르 태생의 총신 중 한 명에게 4,000명의 흑인 노예를 식민지에 공급해도 좋다는 특허장을 부여했다. 그후 스페인계 아메리카의 흑인 인구는 매년 8,000명의 비율로 증대하여 1620년이 되면 3만여 명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누에바에스파냐 내륙 일대의 흑인 노예 가격은 1580년부터 1640년까지 400페소, 1650년경에는 350페소, 1750년에는 175페소로 점점 감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노예의 수요가 적었다는 뜻이 된다.

3.2. 문화

오늘날 멕시코는 인류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베르나르디노 데 사아군 수도사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사였던 그는 "의사가 질병에 대해 정확하게 알면 환자를 치료하는데 도움이 되듯,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 종교와 역사를 잘 알면 기독교 복음화에 더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조리있게 설명하는데 성공하면서, 원주민 신학생들을 모아 스페인 정복 이전 아즈텍의 역사와 문화 및 나와틀어를 12권 2,400페이지에 2,500개의 삽화에 담은 플로렌틴 코덱스를 출간했다. 바꿔말해서 이 사람의 노력이 아니었으면 아즈텍 역사, 문화의 상당부분이 여전히 미스테리로 남아있었을 것이다.[13] 다른 한편 베르나르디노는 원주민들을 무력으로 한꺼번에 강제개종시킬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여러 세대를 통해 서서히 개종시킬 것을[14]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주장은 당시 기준으로는 시대를 앞서나간 주장이라 반영되지는 못했고, 결국 누에바에스파냐의 가톨릭은 현지 원주민들의 급속한 개종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유럽 본토의 가톨릭과는 다른 독자적인 면모[15]를 띄게 되었다.

한 편 스페인 식민 지배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후에는 후아나 이녜스 데 라 크루스 같은 스페인어권 전역에서 유명한 문호도 배출되었다. 크리오요 집안의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어린이였을 당시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배운 신동에다가 미녀로도 명망이 높았다. 학문에 대한 열정이 강했던 그녀는 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남학생으로 위장하려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궁정 시종으로, 19살에는 수녀가 되었다. 시인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종종 나와틀어로도 글을 남겼다. 성가 가사를 쓸 때 당시 멕시코에서 유행하던 토착화된 가톨릭 신앙이던 과달루페의 성모가 아즈텍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을 두고, 과달루페의 성모 관련 내용에서 일부 구절은 스페인어 다른 일부 구절은 나와틀어로 쓰면서, 가톨릭이 아닌 아즈텍 전통 신화 관련한 내용을 다소 많이 삽입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아즈텍 주민과 스페인인들 사이에 벌어진 아즈텍 희생제와 가톨릭의 성찬례를 비교하는 내용을 담은 희극을 쓴 적도 있다.수녀가 된 이후에 학자로 명성을 누리며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에서 총애를 받았던 그녀였지만, 그녀 역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한 번은 그녀와 스페인 본토의 비에이라 신부가 서로 서신으로 언쟁을 주고 받게 되었는데, 언쟁이 격화되자 감히 크리오요 출신 수녀가 스페인 본토의 고위 성직자를 여러 차례 비판했다는 점이 문제가 되면서 후아나는 책을 압수당하고 여생 동안 학문 연구가 금지당하는 형벌을 당했다.

한 편 멕시코의 전통 여성 의상으로 알려진 치나 포블라나(China poblana)는 대항해시대 당시 멕시코로 이송된 인도인 여성들이 입던 옷에서 기원하였다. 전근대 멕시코인들은 인도와 중국을 구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에서 멕시코에 온 사람들도 다 치노(중국인)이라고 부르곤 했다.

4. 멕시코의 독립 과정과 아구스틴 1세의 치세

오늘날 멕시코는 자국의 국부산타 안나, 아구스틴 1세 대신 지방에서 반란 직후 진압당했던 미겔 이달고를 추켜세우는데, 이는 그만큼 멕시코 독립 직후의 상황이 실망스러웠고, 당시 지도자들의 역량이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미겔 이달고는 한국으로 치면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만도 못한 포지션으로,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지휘한 것도 아니고 미겔 이달고의 반란이 당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각성시켰다고 보기도 어렵기 때문이다. 원래 스페인 제국의 누에바에스파냐 부왕령의 중심지였던 멕시코의 기득권 계층은 시몬 볼리바르의 반란 초반 당시에는 왕당파의 편에 서서 독립을 반대하던 상황이었다. 미겔 이달고의 반란 당시 멕시코의 크리오요들은 반란군을 자체적으로 진압하였고, 독립 이후 멕시코를 이끌었던 사람들은 바로 미겔 이달고의 반란을 진압했던 크리오요 계급이었다.

스페인 제국은 식민지 내에서 자국 본토 지주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산업이 성장하지 못하도록 제한하였는데, 대표적으로는 올리브포도 재배를 제한한 것을 들 수 있다. 스페인은 미사용으로 사용되는 포도주 생산을 위한 소량의 포도 재배만 허락하고 그 이외에 포도와 올리브 재배를 완전 금지했는데, 당시 안달루시아 지주들의 주 수입원 중 하나가 올리브유와 포도주였기 때문이다. 같은 맥락에서 스페인은 본토에서 라틴아메리카로 수출되는 포도주와 올리브유에 고율의 관세를 매겼다. 누에바에스파냐의 미겔 이달고 신부가 돌로레스 교구 내 농민들의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해 스페인에서 배워온 올리브와 포도 농사를 농민들에게 가르치자, 누에바에스파냐 식민 당국은 이를 제지하였고, 여기에 분노한 이달고 신부는 1810년부로 자신을 따르는 메스티소 10만여 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다. 당시 누에바에스파냐의 상층 크리오요들은 '돌로레스의 외침'이 자신들을 타깃으로 한 것으로 생각하여 식민 당국과 협력하여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스페인이 19세기 초반 나폴레옹 전쟁의 와중에 본토가 유린당하며 해외 식민지를 신경쓰지 못하게 되자 라틴아메리카 식민지 각지에서 크리오요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했는데, 멕시코의 크리오요들은 한동안 스페인 식민 지배 충성파 포지션이었다.

이달고 신부가 1811년 사망한 이후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José María Morelos)가 바톤을 이어받아 4년간 항쟁을 계속하나, 그 역시 1815년 스페인군 소속 식민지군 사령관인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Agustín de Iturbide)[16]에게 패배당하고 만다. 그러나 반란군을 진압했던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왕권신수설 신봉자로서 나폴레옹이 물러난 이후 스페인이 1821년 카디스 쿠데타를 계기로 급속히 자유주의적으로 개혁되는 것을 보고 누에바에스파냐에 충성하는 것에 회의를 느낀다. 반란군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군권을 장악한 아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는 1821년부로 스페인 희대의 암군 페르난도 7세를 농락하면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이후 아구스틴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모방해 스스로 황제 아구스틴 1세가 되어 멕시코 제국을 수립했다. 1823년에는 중앙아메리카 지역이 중앙아메리카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며 떨어져 나간다.

5. 아구스틴의 몰락과 첫 번째 공화정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59px-Primera_Republica_Federal_1825.png
1825년의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의 영토.
이때 멕시코는 현재 미국 서남부 지역인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일대를 차지하고, 파나마 지협 이북의 중앙아메리카까지 모두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1824년 과달루페 빅토리아, 비셴테 게레로, 안토니오 데파두아 마리아 세베리노 로페스 데산타 안나(Antonio de Padua María Severino López de Santa Anna) 등의 쿠데타로 아구스틴 정부가 붕괴하여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이 성립되고 과달루페 빅토리아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멕시코 제1연방공화국의 헌법은 미국 헌법을 모델삼아 쓰여진 것이고, 공화국의 형태 또한 합중국인 걸 보면 여러모로 미국에게 영감을 많이 받은 모양이다.

부정부패와 독재를 일삼던 아구스틴 1세는 쿠테타로 쫓겨난 이후 당시 토스카나 대공국의 일부였던 이탈리아의 리보르노로 추방당한다. 그리고 아구스틴 1세는 이후 다시 돌아왔다가 처형당한다.

1827년 당시 부통령이던 니콜라스 브라보가 공화정부에 대항하며 반기를 드는 바람에 초대 대통령 과달루페 빅토리아는 임기를 마쳐야 했다. 그러나 1828년 니콜라스 브라보는 산타 안나과 비셴테 게레로에게 붙잡혀 에콰도르로 추방당했다. 산타 안나와 비셴테 게레로도 당시 자신들의 무력만으로 멕시코 전역을 제압하기엔 역부족이라 느꼈는지 자신들의 주관 하에 두 번째 대통령 선거를 치르는 선에서 합의한다.

여기서 보수파인 고메스 페드라사(Gómez Pedraza)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강경 자유주의자 비센테 게레로의 쿠테타로 축출당한다. 이후 보수주의자이자 게레로 정권의 부통령 아나스타시오 부스타만테(Anastasio Bustamante y Oseguera)의 쿠테타로 게레로는 축출당한다.

6. 산타 안나의 집권과 미국과의 전쟁

부스타만테 정권의 보수적 정책에 불만을 품은 이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처음 반란은 격퇴되었으나 그 후 산타 안나가 반란에 가담하고 이후 2차례의 전투가 치러진 끝에 부스타만테 정권이 패망한다. 부스타만테는 추방되고 반란군이 원하는 대로 마누엘 고메스 페드라사 (Manuel Gómez Pedraza)가 대통령에 취임한다. 반란군의 지지를 받은 사람답게 페드라사 정권은 발렌틴 고메스 파리아스(Valentín Gómez Farías) 부통령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페드라사의 집권을 도왔던 산타 안나는 페드라사 정권의 자유주의적 개혁에 위기감을 느낀 보수파를 결집시켜 페드라사와 파리아스 총리 등을 축출시키고 본인이 대통령에 취임한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528px-Mapa_Mexico_1845.png
1845년의 멕시코 영토.

산타 안나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형성하고자 하는 노력을 시도하여 멕시코 중앙집권공화국을 수립했다. 산타 안나 정권은 멕시코를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는 스페인의 재침공도 막아낸다.

멕시코의 북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와 텍사스 일대는 선교사들이 설치한 미션(Mission)이라는 선교 기지 겸 요새가 드문드문 흩어져 원주민들을 간접 통제하던 상황으로,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는 해당 지역의 원주민 기병들을 상대하기 귀찮아서 방치하던 곳이기도 했다. 중세시대도 아니고 선교사들이 영토의 상당 부분을 관리했다는 점은 당시 멕시코가 북부 지방 행정력 개편에 얼마나 무성의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작정하고 멕시코 북부의 영토를 노리자 영토는 댕강댕강 떨어져 나가는게 당연했다.

멕시코의 산타 안나 정권은 뉴멕시코와 텍사스 일대의 코만치족들의 침공 문제 등으로 골머리를 앓던 중 미국인들의 이민 유입을 허용했다. 한 편으로는 아파치족들이 미국인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무기로 멕시코 북부 국경 지대에서 소란을 일으키자 멕시코 측에서 미국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결국 결국 1846년에 미국이 전쟁을 일으켜 멕시코 거의 절반 가까운 땅을 왕창 빼앗아 간다. 미국 내부에선 바하칼리포르니아(캘리포니아 반도)와 멕시코 북부 주까지 요구하자는 목소리가 컸고, 아예 이왕 수도까지 점령한 김에 멕시코 전체를 합병하자는 소리마저 나왔지만,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만 해도 광대하다 보니 굳이 이 지역들까지 점령할 필요가 없어 포기했다. 그나마 국가가 멸망하지 않은 이유는(멕시코가 미국에 완전히 먹히지 않은 이유는) 멕시코 민중들이 격렬하게 단결해서 저항해서... 는 아니었고, 19세기 당시 만연했던 미국의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19세기 미국의 파워 엘리트들은 멕시코 전쟁을“규모가 확대된 인디언 전쟁”(a grand-scale Indian war)으로 간주했고(181), “야만을 정복한 신세계에 민주주의와 경제 진보의 장을 건설하는 일이 앵글로색슨족의 사명”이라고 못 박았다(175).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이 체결될 당시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존 칼훈은 한술 더 떠서 “만약 멕시코가 합병되어 미국의 준주가 된다면 멕시코의 잡종 인구들이 인종적으로 순혈인 미국인들과 평등한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므로 결단코 거기까지 가서는 안 된다”(Hine and Faragher 211쪽에서 재인용)고 목청을 높였다. 다음장에서 논의하겠지만, 미국의 사병(私兵) 집단과 ‘명백한 운명’ 간의 연관성을 파헤치는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지적하듯이, “명백한 운명의 인종주의적 경향은 멕시코와의 정전 이후 중미 지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간 여러 군소 군사원정에서 더욱 확연하게 드러났다”(163)
국경의 틈새에서 ‘명백한 운명’을 욕망한 희생양과 사생아 —코맥 매카시의 『핏빛 자오선』 다시 읽기 #

다행히 멕시코로서는 국가가 망하지는 않음으로서 최악의 사태는 피했지만 이 전쟁에서 짐으로써 멕시코는 너무 큰 댓가를 치루고 말았다.[17]
빼앗긴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캘리포니아에서는 이 왕창 왕창 쏟아지고 미국은 강성대국을 넘어서 초강대국이 되었다.[18] 멕시코 입장에서는 해당 지역이 아직도 멕시코 영토라면 멕시코는 오늘날 강대국이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으나, 선 벨트 지역은 미국 자본에 의한 에어컨의 힘으로 급속히 개발되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에어컨이 보급되기 이전 선 벨트는 북부에서 2차 산업이 발전하는 동안에도 1차 산업 위주의 경제구조에 머물러 있었다.

7. 2번째 공화정과 프랑스의 침략

미국과의 전쟁을 거치며 권력이 약해진 산타 안나는 베니토 후아레스 등에게 축출된다. 베니토 후아레스는 자유주의적 연방파를 이끌고 이후 정국을 주도하여 멕시코 제2연방공화국이 수립한고 자유주의적 개혁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보수파의 반발은 거셌고 베니토 후아레스는 내내 반란에 시달려야 했다. 이때 멕시코는 외채가 늘어나 디폴트를 선언했는데 1860년대에 멕시코 내 보수파와 결탁한 멕시코의 주요 채권자 프랑스가 이를 빌미로 멕시코를 침공한다. 그리고 프랑스 제2제국나폴레옹 3세가 자신의 조카였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대공을 괴뢰 황제 막시밀리아노(Maximiliano) 1세로 세워 기존의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멕시코 제2제국을 선포했다. 그러느 프로이센 왕국의 강성화로 인해 본국의 힘을 쌓아야 했던 프랑스가 멕시코에서 힘을 빼면서 멕시코 제2제국은 붕괴하고 막시밀리아노 1세는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의 혁명군에 의해 총살당하고 만다.

독립 이후 반세기 동안은 인구가 급증하는 가운데 멕시코의 경제는 미국,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정체 혹은 퇴보가 이루어졌고 스페인에서 오는 이민자들을 제한하면서[19] 우수 인력과 기술이 원활하게 유입되지 못해서 일반인들의 생활 수준은 독립 직후보다 전반적으로 더 악화되었다.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등에서는 유럽계 이민의 수용과 발맞추어 토지 개혁, 재분배가 이루어지고 사회 인프라가 급격히 확충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비교하자면 19세기 후반 남미의 아르헨티나가 웬만한 유럽 국가들의 1인당 국민 소득을 추월하던 당시, 멕시코의 1인당 국민 소득은 미국, 영국의 1/10 수준에 불과하였다. 유럽에서 신대륙으로 이민하는 사람들은 대개 1인당 국민 소득이 높던 미국이나 아르헨티나 이민을 선호하였고 멕시코로 이주한 유럽계들은 대개 소수의 부유한 사업가들이 주가 되었다.

8. 현대사

1870년대부터 멕시코는 호세 데라크루스 포르피리오 디아스 모리(José de la Cruz Porfirio Díaz Mori)라는 전형적인 개발 독재형 대통령이 정권을 잡아 억압 속의 안정을 이루게 되고, 나름대로 공업화가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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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특권층에 집중된 경제 정책에 반대하여 1910년대부터는 멕시코 혁명의 물결이 멕시코를 뒤덮는다. 디아스는 혁명 진압에 실패하여 권력을 잃고 망명했고 디아스의 정적이던 프란시스코 마데로가 권력을 잡는다. 그러나 멕시코 혁명의 혁명 세력만 마데로에게 불만을 품는 것은 아니었고 전임 디아스 정권의 지지 기반이었던 대농장주, 교회, 기업가 등이 군벌들과 결탁하여 마데로에게 반기를 든다. 마데로는 빅토리아노 우에르타 장군에게 진압을 명령하나 우에르타는 상술한 친 디아스 군벌연합과 손잡고 쿠테타에 가담한다. 우에르타의 쿠테타는 성공하니 이것이 바로 비극의 열흘 사건이다.

한편 이러한 상황에서 판초 비야(Pancho Villa),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 등의 혁명 군사 세력이 이끄는 멕시코 혁명의 불길도 더욱 거세어져 간다. 이 시기를 멕시코 혁명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시대를 상징하는 곡이 바퀴벌레라는 의미가 이후에 알려져서 화제가 되었던 곡 '라 쿠카라차'이다.

그러나 판초 비야는 미국 국경을 넘어 약탈을 벌였다. 약탈이라고 해서 미국 내에서는 도적 취급을 받았지만, 판초 비야 입장에서 보면 상황이 좀 다르다. 당시 판초 비야와 사파타를 포함한 세력이 멕시코를 장악하였는데, 그들 중 하나인

멕시코 혁명 세력이 우에르타 정권을 몰아내고 멕시코를 장악하자 혁명 세력 중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된 호세 베누스티아노 카란사 데라가르사(José Venustiano Carranza de la Garza)가 그런데 카란사는 혁명의 종료를 선언했다. 그런데 혁명 세력 내부에서도 급진 좌파였던 판초 비야와 사파타는 혁명의 종료를 거부했고 카란사 정권을 적대시하기 시작한다. 미국은 카란사 정권을 지원하고 나섰고 판초 비야는 미국 국경을 넘어 약탈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 때 카란사와 비야의 대표적인 전투가 셀라야 전투인데, 이 때 판초 비야 쪽의 미국산 무기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판초 비야가 패하게 된다. 이후 판초 비야는 무기상과 카란사를 지원하는 미국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미국 도시 컬럼비아를 공격한다. 이 '약탈'을 벌였다가 판초 비야는 존 퍼싱 장군의 미군에게 대패하여 군대를 잃었고 추적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판초 비야는 산맥에 숨었고 퍼싱은 지형상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미국의 1차 대전 참전으로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후 판초 비야는 미국을 공격하는 것은 단념하고 다시 군대를 양성해 멕시코 정부를 대상으로 투쟁했으나, 카란사 정권이 무너진 다음에 은퇴해서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이후에 암살당한다. 이에 대해서는 판초 비야가 정치계로 나와서 경쟁자가 될 것을 우려한 카예스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 암살한 것이란 이야기가 돌았다.

사파타는 정부군에 의해 진압되었고 본인도 암살당하여 급진 좌파 세력은 기가 꺾였다. 그렇게 멕시코는 1920년대부터 다시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해 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판초 비야를 몰아내고 사파타를 암살한 카란사 역시 알바로 오브레곤의 반란으로 쫓겨나서 암살당했다. 오브레곤 시대에도 조금은 안정되었다지만 역시 군사 쿠데타가 이어졌다. 오브레곤의 첫 재임기간이 끝나고 집권한 플루타르코 카예스 시대에는 크리스테로 봉기라고 불리는,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가톨릭 교도들과의 사실상의 반란~전쟁상태가 벌어졌다. 과격한 무신론자였던 카예스 대통령과 그의 신정부는 가톨릭 교회를 탄압하고,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고 교회 교육을 강제로 없애는 등 과격한 반가톨릭, 세속주의 강요정책을 시행했고(이를 비공식적으로 카예스법(Calles Law)이라고 부른다), 이에 교황 비오 11세의 허가를 받아 합법적으로 항의하는 가톨릭 신자들의 합법적 청원도 일체 거부하고 신부들을 죽이는 등의 폭압적 정책을 시행했다. 카예스 대통령은 가톨릭 신자들은 멕시코 정부가 아닌 교황청에 충성하기 때문에 문제가 많다는 편협한 주장을 고수했고, 멕시코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교회의 권력과 재산을 몰수하려고 시도했다. 가톨릭 신부들에 대한 핍박과 순교가 이어지고, 결국 가톨릭 농민 신자들과 사제들이 게릴라전을 위시한 광범위한 민중봉기운동을 펼쳤다. 1928년 카예스가 사임한 후 오브레곤이 헌법을 고쳐 재선되었지만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가톨릭 광신도에 의해 암살당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종교의 자유는 1929년 카예스의 첫번째 허수아비 대통령 에밀리오 칸디도 포르테스 힐(Emilio Cándido Portes Gil) 시대에 들어서야 개선되고, 가톨릭 신자들과 정부의 화해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힐 대통령 시기에도 이어진 폭동과 카예스의 두번째 허수아비 대통령 파스쿠알 루비오가 암살당할 뻔하는 등 전반적으로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막시마토[20] 이후 30년대 중후반 라사로 카르데나스 델리오(Lázaro Cárdenas del Río) 집권기 즈음 되어야 멕시코 혁명의 잔불도 진압 되고, 경제도 성장하여 어느정도 안정이 이루어진다.

개혁주의자 라사로 카르데나스 대통령에 의해 보수파의 거점이었던 교회에 대한 압력, 토지 개혁, 보통 교육의 확대, 석유의 국유화 등이 진행되면서 멕시코 사회는 변모해 나갔으나, 단선제이면서도 여당인 제도혁명당에 의해 지속적으로 장악되어 '6년마다 죽는 신'이라고 불렸던 대통령주의와 정권의 보수화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결국 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 등의 인권 탄압으로 인해 제도혁명당은 1940년대 이후 1980년대까지 계속된 진통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때 경제적으로 중공업과 소비재를 중심으로 한 경제발전이 급속하게 이루어지면서 연 평균 4%대의 고도경제성장을 누렸으며 이러한 경제적인 성과를 바탕으로 비록 유혈사태로 얼룩졌지만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1970 멕시코 월드컵이 개최할수있었고, 상당한 중산층이 형성될 수 있었다. 물론 그 와중에 빈부격차 문제는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부정부패는 상당했지만 그랬다 해도 멕시코 경제사적으로 이 때 만큼 건실하게 성장했던 적이 없기는 했다. 그러나 1970년대 초반부터 수입대체산업화는 점차 한계점을 보였으며 1976년 금융위기로 종말을 맞았다.

그래도 경제성장률은 그럭저럭 유지했으며 포르티요 대통령 시기 들면서 석유화학산업으로 눈을 돌리고 석유에 대한 투자를 급속히 늘렸다. 그 결과로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멕시코의 경제는 다시 고성장을 기록하였고 희망적인 분위기가 지배적이라서 이에 따라 대규모 인프라 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으며 이에 따라 공공지출도 대폭 늘어났다.[21]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되는 유가 하락과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빚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는데 미국의 금리인상으로 인해 이자율이 크게 올랐을 때에는 석유가격이 상승세라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22], 정작 1982년부터 유가가 점차 하락세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갚아야 할 빚이 늘어났고[23], 특히 1985년에 일어난 멕시코 시티 지진과 사우디와 영국, 미국의 석유가격 전쟁은 안 그래도 늘어나는 외채로 신음하는 멕시코 경제를 더욱 더 황폐화했다.

이후에 여러차례 채무가 조정되기는 했지만 이미 멕시코의 부채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당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군사정부 하에서 경제성장을 위해 무리하게 돈을 꾸거나 해외투자를 유치했는데 하필 석유파동 때라 수출이 잘 안 되었고 급기야 이자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재정 적자가 급증하였고 그 결과가 경제파탄이었다. 그리고 브라질은 그 후유증이 2000년대까지 갔다.

이 부채 때문에 포르티요 이후의 대통령들은 심각한 재정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후 집권한 대통령들은 재정 위기의 개선과 광범위한 경제부양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1980~90년대에 걸쳐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포함한 시장 자유화 조치도 그 일환으로 행해졌고 구조조정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물론 이 과정에서 빈부격차가 크게 벌어진데다가 구조조정이 적극적으로 행해지면서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아지고 임금도 크게 까이는 건 물론 복지지출도 크게 축소되면서 멕시코인들의 삶이 악화되었다. 멕시코의 복지지출이 OECD에 가입한 나라 답지않게 적고 노동시간도 역시 최장수준인 것도 이 시대의 유산이며[24] 그나마 출산율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은게 다행이다. 1982년 금융위기를 겪지 않았으면 미국이 멕시코를 절대 무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올 지경이었다.[25]

또한 1983년과 1987년 사이에 멕시코 주가가 경제상황과 관련없이 크게 오르기도 했지만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1986년 멕시코 월드컵으로 인해 재정을 추가로 지출해야하는 요인이 생겨버린데다가 설상가상으로 1987년에 블랙먼데이로 인해 멕시코 증권시장의 거품이 붕괴되면서 경제난은 크게 가중되었다. 제도혁명당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져서 1988년 대선에서 민족민주전선으로 정권이 교체될 듯 했지만 선거개표 도중에 정전을 시키고 투표함을 바꿔치기하는 방식의 부정선거로 정권을 연장시켰다.

부정선거[26]로 당선된 카를로스 살리나스 데고르타리(1988∼1994) 대통령은 취약한 정통성과 구조조정에 따른 엄청난 반발에도 시장개방정책을 추진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시켰으며 석유노조를 약화시키고, 1994년에는 NAFTA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그의 재임 후반기는 위기의 연속으로 1994년 3월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되던 집권 제도혁명당(PRI)의 여당 후보인 루이스 도날도 콜로시오가 유세 도중 저격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또 1994년 멕시코 남부 치아파스(Chiapas)주에서 사파티스타 원주민 농민들의 무장투쟁이 발생하면서 정치적 혼란 시기에 접어들었으며, 12월에는 외환위기까지 맞이하게 되었다. 미국과 IMF 등 국제금융기구의 개입으로 일단 경제 위기는 극복되었지만 이후에도 사회 양극화 문제는 전혀 해결되지 않았으며 부정부패도 여전히 심각했다. 그 결과 우파에선 국민행동당, 좌파에선 민주행동당이 크게 세를 넗혔으며 1997년 중간선거에서 제도혁명당은 과반에 밑도는 의석을 얻어서 일당제에서 3당제로 전환되었다.

2000년 7월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보수계 야당인 국민행동당(PAN)의 비센테 폭스(Vicente Fox)가 당선되어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71년 만에 역사적인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폭스 정권 하에서도 빈부격차와 소득분배, 마약 카르텔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부유층들과 대기업들은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뒀지만 대다수의 멕시코 국민들은 지속되는 저임금과 임금정체로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라크 전에도 참전하면서 지지율이 크게 낮아졌다. 이로 인해 2006년에 민주혁명당으로 정권이 교체될 듯 했지만, 선거 막판에 판세가 뒤집히면서 국민행동당의 펠리페 칼데론이 0.6% 안팎의 근소한 표 차이로 당선되어 겨우 정권을 연장하였다. 하지만 국민행동당 정부가 낮은 지지율로 재선된 것을 만회하려고 마약전쟁을 벌이다가 마약과의 전쟁이 별 성과를 보이지 않자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고 말았고, 2008년 세계금융위기의 여파로 경제도 어려워지면서, 2012년에 제도혁명당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가 당선되면서 정권이 교체되었다. 하지만 엔리케 페냐 니에토도 집권 중반기부터는 부패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있고 미국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다가[27], 빈부격차와 카르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고, 경제성장도 침체되었다. 결국 2018년 대선에서 좌파 정당 국가재건운동(Movimiento Regeneración Nacional)의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가 당선되어 12월 1일 취임과 동시에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1] 현재는 이 문자들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사용된다 해도 장식용으로 쓰는 게 대부분으로, 룬 문자오검 문자와 비슷한 상황이다.[2] 그러나 몬테수마 2세코르테스 일행을 정말 케찰코아틀로 여기고 환대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 이유는 아즈텍 제국 측의 기록에는 코르테스 일행을 갑자기 와서 신인 것 마냥 행동하는 것들 이라고 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3] 영어로는 Viceroyalty, 스페인어로는 Virreinato[4] 이 때의 인구감소가 회복되어 만회하게 된건 19세기 후반이 되어서였다.[5] 첫 메스티소인 마르틴 코르테스도 에르난 코르테스와 그의 애인인 말린체 사이에서 나온 자식이다.[6] 2008년 브라질의 브라질리아 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평균적인 멕시코인의 유전자는 백인 29.6%, 원주민 60.1%, 흑인 10.1%로 이루어졌다.#[7] 오늘날의 멕시코 중부 고원지대와 콜롬비아, 에콰도르, 페루 등[8] 다리엔 갭 문서 참조[9] 오늘날 스페인은 국토 1/3이 산지로 평균 해발고도는 660m로 스위스 다음으로 평균 해발고도가 높은 나라이다. 특히 카스티야-레온 왕국에 속했던 영토들은 산지가 많았다.[10] 중세 압바스 칼리프조몽골 제국이 해체된 이유도 지방에 파견된 관료들이나 장수들이 현지에서 세습 왕조를 세우고, 반독립 상태를 유지하면서 거대한 제국이 시나브로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유럽 본토 사이에 거대한 대서양을 끼고 있고 유럽과의 거리가 상당히 먼 라틴아메리카 식민지라면 이런 위험이 더 컸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11] 오늘날 미국 남부의 주요 도시들 상당수는 스페인 수도자들이 설치한 미션(Mission)을 기원으로 한다.[12] 페루 부왕령의 기록을 보면 1591년에는 "중국 상품들이 대체제가 없는 상태에서 무척 저렴한 가격에 들어온다."라는 문장을, 1609년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리마의 유명 상점들에는 중국산 제품이 가득하다."라는 문장을 확인할 수 있다.[13] 비교하자면 스페인 이웃 국가 포르투갈의 경우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무슬림이나 힌두교도들을 이유 불문 무조건 다 죽이고 불지르는 걸로 악명 높았고, 심지어 같은 기독교 국가인 에티오피아에서도 포르투갈인 가톨릭 수도사들이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작업을 무력으로 진행하다 모조리 다 쫓겨났던 바 있다.[14] "적어도 한동안은 멕시코 토속신앙과 가톨릭이 공존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15] 이른바 과달루페의 성모[16] 식민지주둔군 사령관이었다는 점에서 미국조지 워싱턴과도 비슷한면이있다.[17] 저 땅을 잃어버렸음에도 멕시코도 대국이긴 하나 이때 멕시코가 잃어버린 국토는 면적으로는 무려 240만km2{km}^{2}이었다.심지어 텍사스에서는 석유가 캘리포니아에서는 금이 왕창 나왔다고 하니 실로 멕시코로서는 뼈아픈 일일 것이다.사실 상술했듯이 아예 멕시코 전체를 합병하자는 주장까지 미국에서 제기된 바 있지만 다행히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18] 멕시코로서는 이가 갈릴 일인데, 아직도 멕시코는 텍사스와 캘리포니아 같은 곳이 원래 자기들 땅인데 미국이 억지로 빼앗아갔다고 여긴다. 그래서 멕시코 불법이민자들은 텍사스나 캘리포니아가 자국 땅이라면서 '이게 어디가 불법이냐?'라며 궁시렁댈 때도 있다. 물론 미국 경찰은 신경 안 쓰지만.[19] 멕시코의 국수주의와 이민 제한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력 격차를 크게 벌려놓았다. 1800년 당시 멕시코의 인구는 600만여 명으로 당시 미국의 인구가 5,308,483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 독일계,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쏟아지던 때 멕시코의 인구는 거의 자연 증가에 의존하였고, 미멕전쟁 당시에는 미국의 인구가 멕시코 인구의 3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압도하게 되었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격차는 계속 벌어져 1910년 기준으로 멕시코의 인구는 1,500만여 명인데 비해 미국의 인구는 9천 2백만 명이었다. 다만 이후로 멕시코가 미국보다 높은 출산율을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에 미국과 멕시코간의 인구 격차가 크게 줄기는 했다. 하지만 멕시코의 중산층 육성이 별로 성공적이지 않았기에 경제력에서 문제가 있다.[20] 퇴임 후에도 권력을 놓기 싫었던 카예스가 3명의 허수아비 대통령을 앉혀놓고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21] 1980년대 동구권 국가들이 체제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게 1960년대에 성장률 침체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중공업에 투자를 했다가(루마니아와 폴란드가 그 예) 석유 파동으로 한 차례 타격을 받고 1980년 미국의 금리 인상으로 갚아야 할 빚이 크게 증가하자 빚을 갚기 위해 1980년대에 대대적인 긴축 정책을 펼침에 따라 복지 정책을 축소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많다. 당연히 인민들이 크게 반발하였고 거기에 소련이 유가 하락과 아프간전-체르노빌 사건 3콤보로 약해지자 공산당의 입지가 크게 약해졌고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것. 물론 체제전환 이후에도 이런 조치는 한동안 이어졌다.[22] 1981년에 석유가격이 고점을 찍었다.[23] 더군다나 그 기간동안 지하철 공사도 벌이고 송유관 건설사업 등 대규모 공공사업이 진행 중이라 경상수지 적자도 심각했다.[24] 1980년대 초반 대비로 친다면 실질 최저임금이 20%대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1인당 GDP는 1980년대 초의 3배이기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빈부격차가 넘사벽급으로 벌어진데다가 비정규직도 대규모로 양성되었기에 실질적으로 하위층의 삶은 80년대에도 못미치는 수준이다.[25] 1981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DP는 멕시코의 60% 정도의 수준이었는데 2010년대에 미국의 절반 수준으로까지 올라갔다. 만약에 멕시코가 1982년 금융위기를 겪지 않고 이전의 성장세를 미약하게나마 지속적으로 이어나갔다면 미국이 멕시코를 좀처럼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데에는 이견이 없다. 현재의 미국인들이 캐나다를 마냥 무시하지 않은 것도 캐나다가 인구수는 적지만 복지 혜택은 미국보다 더 좋고 결코 못 살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더욱.[26] 선거결과 조작에도 득표율이 50.7%로 사상최저 기록[27] 물론 멕시코의 국력을 감안하면 어쩔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