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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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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室町時代
1392년~1467년[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n-no_Gosho.jpg
무로마치 어소[2]
통일 이전 오닌의 난 이후
남북조 시대 센고쿠 시대

1. 개요2. 역사
2.1. 무로마치 시대의 시작2.2. 요시미츠 치세
3. 시대적 특성4. 사건5. 역대 쇼군6. 한국사와의 관계7. 대중 문화

[clearfix]

1. 개요

[ruby(室町時代, ruby=むろまちじだい)]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가 일본을 통치하던 시대.

가마쿠라 시대에도 시대막부가 위치했던 도시에서 이름을 딴 데 비해, 무로마치 시대는 교토 안에서 막부가 위치했던 한 지역명 무로마치(室町)에서 유래했다.[3]

주로 지명인 무로마치를 따서 무로마치 시대라고 부르지만, 당시 막부의 쇼군(천하인)이 아시카가씨(足利氏)였기 때문에 '아시카가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시카가는 제56대 세이와 덴노의 자손인 세이와 겐지의 분파 카와치 겐지의 방계에 해당하는 범쇼군가의 우지였기 때문에 쇼군직을 별다른 잡음 없이 계승할 수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와 동시기의 조선이나 명나라의 사서에서 아시카가 막부의 쇼군을 족리(足利, 아시카가)씨 대신 원(源, 미나모토)씨로 부르기도 하여 좀 헷갈릴 수 있으나, 이는 조선명나라에 보낸 일본 측 외교문서에서 쇼군들이 자신의 성을 그렇게 칭했기 때문이다. 사료에서 이름을 대조해 보면 쉽게 구분이 가능하여 큰 문제는 없다. 이후 도쿠가와 씨가 쇼군직을 계승하고 에도 막부를 창건한 후에도 외교문서상으로는 역시나 '덕천'씨가 아닌 원씨로 칭했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원씨(源, 세이와 겐지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을 다스리다가, 평씨(平, 타이라 씨/헤이시, 오다 정권-도요토미 정권)의 치세가 되었다가,[4] 다시 원씨의 지배로(세이와 겐지 도쿠가와씨의 에도 막부) 회복되었다고 인식하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실제로 무로마치 시대가 언제 시작되고 끝났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무로마치 막부가 존속한 1336년부터 1573년까지 240여 년을 전부 무로마치 시대에 포함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1467년 오닌의 난이나 1493년 메이오 정변[5]으로 무로마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보는 설도 있다. 이는 그 시점에서 아시카가 쇼군가의 실권과 권위가 상실되면서 사실상 전국시대로 들어섰기 때문이다. 무로마치 막부 정권의 시작에 대해서도 남북조시대가 끝난 1392년[6]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로마치 막부의 권위가 확립되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즉, 가장 짧게 잡은 설을 따르면 100년도 안 되는 70여 년으로 매우 짧은 시대인 셈. 그나마 전성기는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집권한 시대인 1368~1408로 40여 년 정도이다. 세분하면 남북조 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시대로 연결되는데, 명목상으로 남북조와 전국은 대부분 무로마치 시대에 포함되지만 쇼군 정권이 일본 전국에 실권을 행사한 기간은 이 정도였다.

2. 역사

2.1. 무로마치 시대의 시작

시작은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고다이고 덴노에 반발한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천황의 혈통 중에 한 사람을 고묘 덴노로 옹립하여 천황가가 남조북조로 나뉘게 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무로마치 시대 중에서 분리해 따로 난보쿠초 시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무가의 지지를 얻은 아시카가가 옹립한 북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천황을 갈아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한 다카우지는 새로 천황으로 옹립한 고묘 덴노로부터 최고위의 관직인 대납언쇼군의 자리를 받고, 이것으로 명실공히 일본 열도의 실력자가 되어 무로마치 막부를 개창했다. 다카우지가 정권을 장악한 1336년부터 1573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義昭)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교토에서 쫒겨날 때까지 15명의 쇼군이 배출되었다.

2.2. 요시미츠 치세

무로마치 막부의 리즈 시절은 대략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의 치세였다.

이 쇼군 치세에 남북조가 통일되었고, '무로마치 막부'의 어원이 되는 교토의 무로마치 어소도 그의 치세에 지어졌으며, 그 유명한 금각사(킨가쿠지)도 이때에 건설되었다. 금각사는 화려함에 걸맞게 무로마치 막부의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또한, 일본의 전통극 중 하나인 노가쿠도 요시미츠 대에 제아미에 의해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막부의 실질적인 창업자는 아시카가 요시미츠라고 봐도 좋은 셈. 그만큼 정치 수완도 상당히 뛰어난 걸물이었다.

그러나 요시미츠는 일본사에서 5세기(왜5왕시대) 이후 유일하게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인물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츠구를 천황의 양자 겸 황태자로 들이는 식으로 천황가를 자기 핏줄로 집어삼켜 아시카가 가문을 황실로 만들려 했다. 그의 사후 천황가 측의 반발과 아시카가 가문 내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지만 말이다.[7] 그랬기 때문에 정작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제가 확립된 근대 일본 사회에서는 그 평가가 굉장히 박했다.[8]

3. 시대적 특성

오랫동안 지속된 전란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크게 성장하여 훗날 일본의 기틀을 다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분에 연연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주류 세력인 무가부터가 그리 높은 신분이 아니었던 점과, 더불어 오랜 전란으로 인재를 쓸 때 신분으로 가릴 수 없게 된 점 등이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 실력만 있으면 출신 성분은 크게 구애받지 않는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리자, 반대로 실력이 없으면 윗 사람이라도 끌어내릴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서 후의 센코쿠 시대에는 가신들이 다이묘는 물론 쇼군까지 끌어내리는 꼴을 쉽게 볼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하극상이 만연해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고제 유방의 말을 빌리자면 반역하지 않는 신하가 바보 되는 세상인 셈.[9] 대표적으로 무로마치 시대보다 뒤의 센고쿠 시대의 일이지만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씨는 본래 시바씨의 가신이었으나 노부나가 계통의 오다 방계가 오다 직계 및 시바씨의 실권을 뺏어 센고쿠 다이묘가 되었고, 오다 노부나가 사후 그의 가신이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키요스 회의를 통해 오다씨의 실권을 빼앗고, 자기가 천하인이 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2인자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씨의 힘을 꺾어놓은 뒤 오사카 전투를 통해 도요토미가를 멸망시키고, 완전한 천하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시바씨의 실권을 뺏은 게 오다씨고, 그 오다씨의 실권을 뺏은 게 도요토미씨이며, 그 도요토미씨의 실권을 뺏은 게 도쿠가와씨라는 얘기이다. 천하를 다 가진 듯 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오다씨도 천하를 삼켰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도요토미씨도 한 번 삐끗하자 빛의 속도로 몰락했다는 데서 보듯 이 시대가 얼마나 힘으로만 돌아가는 시대였는지 알 수 있다.

간토 지방에서는, 이미 센고쿠 시대에 돌입하기 이전부터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1438년 에이쿄의 난, 1454년부터 시작해서 1483년에 종결된 쿄토쿠의 난 등이 그것이다. 이미 오닌의 난 이전부터, 무로마치 막부의 지배권은 약해지고 있었다.

한편으로 이 시대에는 무라(村)[10]가 구체화되기 시작하고, 농민 봉기인 잇키가 대두되는 등 서민 문화가 태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소와 말을 이용한 경작과 모내기의 확산 등으로 인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시장, 도시의 확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금각사(킨카쿠지)에 버금가는 은각사(긴카쿠지)도 이 시대의 산물이었다.

4. 사건

  • 1336년 남북조 시작
  • 1392년 남북조 합일
  • 1399년 오에이의 난
  • 1400년 오오토 합전
  • 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
  • 1419년 오에이의 외침(기해동정)
  • 1428년 쇼오쵸오의 도잇키
  • 1429년 하리마 국 봉기, 야마토 에이쿄의 난
  • 1438년 에이쿄의 난
  • 1440년(~1441년) 유키 합전
  • 1441년 카키츠의 난, 카키츠의 덕정 잇키
  • 1443년 킨케츠의 변
  • 1443년 카키츠 조약
  • 1454년(~1483년) 쿄토쿠의 난
  • 1458년(~1459년) 쵸로쿠 합전
  • 1466년 분쇼의 대변
  • 1467년(~1477년) 오닌의 난

5. 역대 쇼군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무로마치 막부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6. 한국사와의 관계

무로마치 시대는 한국사고려 말엽에서 조선 중기와 겹치는 시기였다.

또한 전기 왜구가 들끓던 시기라 3차에 걸친(고려 창왕-조선 태조-세종) 대마도 정벌이 이 시기 초·중반에 이루어졌다.

7. 대중 문화

많은 창작물에서 주로 차용되는 헤이안 시대(겐페이 전쟁), 센고쿠 시대(아즈치 모모야마 시대), 에도 시대(막말)에 비해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시대이다. 보통 말기~센고쿠 시대를 다룬 작품이 대부분이고 이 막부의 리즈 시절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 이는 중국사에서 인지도 최고인 《삼국지》가 후한 시대에 포함되나, 정작 후한 시대는 후한말 군웅할거 이외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영 바닥을 기는 점과 비슷하다.

이는 위에 언급된 대로 다카우지가 일본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고다이고 덴노와 대립각을 세우면서 시작한 시대라는 원죄(?) 탓도 있고, 더욱이 제3대 쇼군인 요시미츠는 명나라의 성조 영락제로부터 일본국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영락제의 국서에 대해 요시미츠가 신(臣)이라고 칭한 답서를 올렸을 정도. 거기다 천황위 찬탈 시도 의혹도 있고, 이런 모습들이 아무래도 천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외세에 굴종한 모습으로 보여 일본인들 눈에 영 좋게 보이지 않았던 모양. 거기다 말기 센고쿠 시대가 워낙 인지도가 높아서 전기 시대가 소외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를 다룬 작품이라면 막부 창건자인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대립한 쿠스노키 마사시게닛타 요시사다 같은 이들을 다룬 《다이헤이키》(太平記, 태평기)를 소재로 한 사극이나 소설이 있는 정도. 근데 다카우지보다는 마사시게나 요시사다의 인기가 더 많다.

그리고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승려센코쿠 시대 초창기에 사망한 황실 출신의 승려[11] 잇큐 쇼준(一休宗纯)이 있다.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긴 승려로 망나니 장군이나 미토 코몬 못지 않게 일본에서 역사 인물을 소재로 한 창작물의 단골 소재다. 애니메이션도 제작되었고 덕분에 오늘날에도 일본인들이 흔히 잇큐 상(一休さん)이라고 부를 정도로 대중들에게 친숙한 인물이다.

모노노케 히메는 무로마치 시대, 도로로닌자보이 란타로는 무로마치 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이처럼 기본적으로 일본의 역사를 소재로 한 창작물이나 서브컬처에서는 자주 다루지 않던 시대였으나, 놀랍게도 전국 바사라 시리즈의 최신작으로서 발표된 전국 바사라 4의 무대가 무로마치 시대가 될 예정이라고 한다. 워낙 전국시대로 울궈먹었고 전작인 전국 바사라 3가 전국시대 말기인 세키가하라 전투를 다루었기 때문인지, 시대 설정을 아예 전국시대 이전으로 돌려버리는 것 같다.

[1] 남북조를 통일한 1392년부터 오닌의 난이 발생한 년도인 1467년 까지다.[2] 현재 교토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캠퍼스가 위치한 곳에 있었다.[3] 무로마치라는 지명은 지금도 교토 시내의 도로 무로마치도리(室町通) 같이 몇몇 지명에 남아있다.[4] 오다 노부나가는 헤이시를 자칭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약간 복잡한데 원래는 평씨(헤이시)를 칭했고, 또 잠깐은 등씨(藤, 후지와라씨)를 칭했다가 나중에는 아예 새로운 성을 받아 풍씨(豊, 도요토미시)를 칭하게 되었다.[5] 간레이 호소카와 마사모토의 반란으로 인해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타네가 일시적으로 쫓겨난 사건이다. 아시카가 요시타네는 1508년이 되어서야 겨우 난을 진압하고 쇼군 직에 복귀한다.[6] 한반도에서 조선이 건국된 연도와 동일하다.[7] 요시미츠의 죽음의 원인은 공식적으로는 병사였지만 조정에서 손을 쓴 것이라는 일본사의 음모론도 있다. 뒷날 혼노지의 변에서도 조정이 배후였다는 설과 비슷한 케이스다.[8]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 및 유신 주도 세력들은 심지어 메이지 덴노가 북조 계통임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남조를 진짜 정통으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남조 계통 종가들이 이후 일본 귀족(화족)에 편입되어 고위 귀족 가문이 되었다.[9] 다만 이 말은 유방보다는 그 신하였던 영포가 한 말을 참고한 듯하다. 영포는 옛 주군이었던 유방에게 대놓고 황제가 되고 싶어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일갈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 패해서 참수당했지만.[10] 일본의 전통적인 마을 구성.[11] 막부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출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