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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 왕조/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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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르다시르 1세의 건국과 샤푸르 1세의 제1차 전성기(224년 ~ 272년)3. 제1차 침체기(272년 ~ 309년)4. 샤푸르 2세의 제2차 전성기(309년 ~ 379년)5. 제2차 침체기(379년 ~ 498년)6.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의 제3차 전성기(498년 ~ 590년)7. 호스로 2세: 마지막 전성기와 몰락(590년 ~ 628년)8. 사산 공위시대(628년 ~ 633년)9. 이슬람의 침공과 멸망(633년 ~ 651년)10. 사산부흥운동과 그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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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산 왕조의 역사에 대한 문서.

2. 아르다시르 1세의 건국과 샤푸르 1세의 제1차 전성기(224년 ~ 272년)

파일:Byzantine_and_Sassanid_Empires_in_600_CE.png
로마 제국과의 끝없는 경쟁.

사산 왕조의 발흥은 흔히 파르티아로 알려진 아르사케스 왕조의 약화와 쇠퇴에서 출발한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지방 분권적인 봉건 귀족들의 집합체였던 파르티아 제국은 훨씬 강한 로마 제국을 상대로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으며, 1세기 동안 수도 크테시폰이 3차례나 파괴되고 약탈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이 때문에 아르사케스 가문의 권위와 실력은 점점 더 떨어지고, 지방 통제력은 더욱 악화되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AD 3세기 초 이 문제는 절정에 달했다. 아르사케스 가문 내에서 왕위를 둘러싼 내전이 벌어지고, 이 내전이 채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로마와 대규모 전면전을 치르게 되어 파르티아의 국력이 한계에 다다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니시비스 전투 문서를 참고.

중앙정부의 약화를 틈타 가장 먼저 반란의 기치가 내걸린 곳이 바로 파르스(Fars)였다. 파르스는 곧 과거 아케메네스 왕조의 발상지였으며, '페르시스'(Persis), 즉 '페르시아'의 어원이 되는 곳이었다. 이곳의 호족이었던 사산 가문의 바박(Babak 혹은 Papak)이 아르사케스 가문의 방계 분봉왕을 몰아내고 권력을 탈취한 것이다. 바박은 중앙정부에 자신과 그의 맏아들 샤푸르를 파르스의 새 분봉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고, 얼마 안 가 죽었다. 뒤이어 샤푸르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갑작스럽게 죽었고, 샤푸르의 동생이었던 아르다시르가 파르스의 왕으로 즉위했다. 이때가 대략 212년경으로 추정된다. 그 뒤 12년 동안 아르다시르는 파르스를 완전히 제압하고 서쪽의 후제스탄, 동쪽의 케르만으로 영토를 확대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큰 위협을 느낀 파르티아 황제 아르타바노스 4세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아르다시르를 공격했지만 224년 호르모즈데건 전투에서 패배하며 전사했다. 곧 아르다시르는 자신이 '이란의 황제'(Shahanshah-i Iran)임을 선포했고, 이 시점을 사산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이후 아르다시르는 수도를 파르스의 에스타흐르에서 아르사케스 왕조의 옛 수도 크테시폰으로 옮기고, 이란의 다른 지역들을 차례차례 제압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로마 국경 침범 및 아르메니아의 귀속 문제로 충돌이 일었고, 이는 232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과의 전면전으로 비화했다. 이 전쟁은 3개 분견대로 나뉘어 쳐들어온 로마군 중 1개 분견대가 이란에 의해 격퇴되고 나머지 둘은 철수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양측의 피해가 모두 적지 않아 일단은 소강상태로 마무리되었다. 아르다시르 1세는 240년에 죽었는데, 사산 왕조가 구 아르사케스 왕조의 지배 영역을 모두 확고하게 복속시킨 뒤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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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아누스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 마애상. 무릎을 꿇은 쪽이 발레리아누스, 말을 탄 쪽이 샤푸르 1세다.

아르다시르 1세를 계승한 샤푸르 1세는 동쪽으로는 박트리아와 쿠샨 지역까지 세력을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로마와 지속적으로 대결했다. 고르디아누스 3세 황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필리푸스 아라부스 황제와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했으며, 무엇보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에데사 전투에서 사로잡은 것이 유명하다. 아르메니아의 상당 부분 역시 이란에 복속되었다. 하지만 로마군과 그 동맹인 팔미라의 반격을 받아 패배하면서 로마를 상대로 큰 영토 확장을 시도하지는 못했다. 이후에는 로마군 포로들과 시리아,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등지를 약탈하며 강제로 끌고 온 인구를 후제스탄 지역에 정착시켜 도시와 요새, 교량과 댐 등을 건설했다. 후제스탄의 군디샤푸르, 파르스의 비샤푸르와 호라산의 니샤푸르가 그의 이름을 따서 건설된 도시들이다.

샤푸르 1세는 학술과 문화의 후원자이자 종교적 관용을 유지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마니교의 창시자인 마니가 바로 이 시대 사람으로써 조로아스터교를 신봉하는 이란 내에서 이단적인 종교라 할 수 있는 마니교를 자유롭게 포교할 수 있었다. 아마 대사제 카르티르(Kartir 혹은 Kerdir)로 대표되는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마기) 계급의 득세를 견제하려는 의도였던 것 같다. 로마에서 끌려온 이주민들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기독교도 박해받지 않았으며, 바빌로니아유대교도들 역시 황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3. 제1차 침체기(272년 ~ 3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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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히타로 추정되는 여신에게 제위의 상징을 받는 나르세스 1세.[1]

272년 샤푸르 1세가 사망한 뒤 제위를 계승한 호르미즈드 1세는 고작 1년 만에 죽었고, 그의 아들이 아니라 동생이자 길란의 왕이었던 바흐람 1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그는 독실한 조로아스터교도였던 데다 제위에 오를 때, 대사제 카르티르의 지원을 받았고, 당시 마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충돌이 격화되고 있었으므로 마니를 처형하고 마니교도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한편 바흐람 1세는 당시 독자 세력화를 꾀하고 있던 팔미라제노비아의 요청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지원하기도 했지만, 제노비아가 패배하고 사로잡히자 로마 측에 화평을 요청하며 저자세를 유지했다. 샤푸르 1세 시대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의 태도 변화인데, 원래 영토 크기나 국력으로 볼 때 로마 제국은 사산 왕조보다 큰 강대국인데다, 로마는 마침 아우렐리아누스가 분열된 제국을 막 통합해 낸 상태였던 반면 이란은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의 여지가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276년 바흐람 1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2세가 제위를 계승했다. 바흐람 2세는 부황의 전례를 따라 타종교 탄압 기조를 유지했으며, 카르티르는 제국 전체의 최고 심판관이자 원래 사산 가문의 지위였던 에스타흐르의 아나히타 신전의 수호자로 임명되어 엄청난 권세를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로마와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어 282년 로마군 침공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나타났다. 쿠샨의 왕으로 가 있던 바흐람 2세의 동생 호르미즈드가 주변 세력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바흐람 2세가 이를 진압하러 간 사이 카루스 황제가 이끄는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에 침공한 것이다. 황제와 주력군이 없는 수도 크테시폰은 로마군에게 간단히 점령되어 파괴되고 약탈당했다. 그나마 카루스 황제가 급사하여 로마군이 철수하는 바람에 장기 점령은 피할 수 있었다. 호르미즈드의 반란은 283년 진압되었으나 286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휘하 로마군이 다시 아르메니아로 침입해 왔고, 로마의 지원을 받는 아르메니아 왕자 티리다테스의 활약으로 이란은 대패하여 아르메니아 서부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294년 바흐람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바흐람 3세가 제위를 계승했으나, 연이은 반란과 로마와의 패전 때문에 귀족들이 분열되기 시작했다. 결국 바흐람 3세를 반대하는 귀족들이 왕족 중 가장 권위있는 위치인 아르메니아의 왕이었던 나르세를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바흐람 3세를 퇴위시켜 나르세를 나르세스 1세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르세스 1세는 타종교 탄압을 중지하는 한편, 귀족 세력 불만의 주요 원인인 아르메니아 상실을 만회하기 위해 로마를 공격했다. 그러나 전쟁은 초반에만 잠깐 성공적으로 보였고 나중에는 로마군에게 역관광당해 대참패로 막을 내렸다.[2] 결국 나르세스 1세는 메소포타미아 서부 지역들을 로마에 할양하고 아르메니아에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는 등 굴욕적인 내용의 강화 협상을 체결해야 했다. 이후 페르시아는 로마를 침공하지 못했다.

권위가 바닥까지 떨어진 나르세스 1세는 302년 아들 호르미즈드 2세에게 양위하고 얼마 안 가 죽었다. 그러나 호르미즈드 2세 역시 땅에 떨어진 황제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귀족들의 불만과 발호는 날로 심해졌다. 결국 309년 호르미즈드 2세가 죽은 뒤 귀족들은 곧 포악한 그의 맏아들 아두르 나르세를 살해하고, 둘째는 장님으로 만들고, 셋째는 감금했다. 왕위는 첩 소생의 갓난아들 샤푸르 2세에게 돌아갔다.

4. 샤푸르 2세의 제2차 전성기(309년 ~ 379년)

파일:attachment/shapur_II_head.jpg
샤푸르 2세로 추정되는 두상.

샤푸르 2세는 호르미즈드 2세의 유복자로, 부황이 죽은 뒤 귀족들이 모후의 임신한 배 위에 왕관을 올려놓아 태어나기 전부터 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을 정도다. 이것이 확실한지는 알 수 없지만 최소한 그는 영유아 시기에 제위에 올랐으며, 재위 초창기 10여 년 동안은 모후와 귀족들이 황제를 대신해 섭정했다.

성인이 되어 친정을 시작한 샤푸르 2세는 곧 비범한 군사적 재능을 과시한다. 그의 재위 초기 이란의 혼란과 약화를 틈타 아라비아 반도 북부 지역의 아랍 부족들이 바다를 건너 파르스 일대를 약탈했다. 샤푸르 2세는 곧 소규모 원정군을 조직[3], 아랍인들의 본거지까지 추적해 모조리 섬멸했다. 이때 아랍 포로들의 어깨를 뚫어 줄로 꿰어 끌고 갔기 때문에 "어깨 뚫는 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아랍인들은 큰 타격을 입고 상당 기간 이란을 넘보지 못하게 되었다.

337년부터는 나르세스 1세 시대에 빼앗긴 메소포타미아 서부와 아르메니아를 되찾기 위해 다시 로마를 공격했으며, 이 전쟁은 일진일퇴의 공방과 휴전을 반복하며 30년 가까이 이루어졌다. 359년경에는 스텝 지역의 유목민들인 히온족(Xionites)과 키다르족(Kidarites) 등이 이란 동부를 공격했으나, 급히 로마 전선을 정리하고 달려온 샤푸르 2세의 반격을 받아 오히려 사산 제국에 복속되었다. 로마 전선은 361년 계속된 이란의 도발에 분노한 율리아누스 황제가 직접 이끄는 대규모 로마 원정군에게 패배하면서 위기를 맞았으나, 크테시폰 공성이 실패하고 철수하는 과정에서 율리아누스가 급사함으로써(암살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사히 격퇴되었다. 결국 샤푸르 2세는 로마 황제 요비아누스로부터 과거 나르세 시절 할양했던 영토에 더해 주요 군사도시인 니시비스와 신가라까지 양도받고, 향후 로마가 아르메니아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유리한 강화 조건을 이끌어냈다. 이후 아르메니아의 대부분이 다시 이란에 의해 정복되었다. 태어나자마자 쇠약하고 혼란스러운 제국을 물려받았던 샤푸르 2세는 70년 평생에 이르는 재위 기간 동안 동서의 적을 모두 제압하고, 제국을 다시 강력하게 만든 뒤 379년 숨을 거두었다.

한편 샤푸르 2세는 이란에서 기독교 박해를 다시 시작한 황제이기도 하다. 이는 넓게 봤을 때는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1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에 대한 반작용이며, 좁게 봤을 때는 이란이 기를 쓰고 차지하려 했던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기독교가 반(反) 이란 감정과 분열을 강화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교리 정리가 마무리되어 제국의 공식 교리가 정해지고, 로마와 비슷한 교회 체계를 구축하기 시작한 것 역시 샤푸르 2세 시대로 여겨진다.

5. 제2차 침체기(379년 ~ 4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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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흐람 5세가 자신의 별명('구르')의 유래가 된 야생 나귀들을 사냥하는 장면.[4]

379년에서 498년까지 120년에 이르는 이 기간의 가장 큰 특징은 로마와 이란이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는 것이다. 물론 단기적, 산발적인 충돌은 있었지만 적어도 이전 시대와 같은 대규모 전면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처럼 평화가 유지된 이유로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샤푸르 2세의 긴 치세 동안 이란의 국력이 두드러지게 신장되면서, 150여 년에 이르는 대결의 결과, 로마와 이란이 서로를 완전히 제압할 수 없음이 확인된 것이 첫째 이유이다. 이에 더해 두 제국 모두 동방-북방에서 침입해 오는 이민족들을 상대하고 내부의 혼란을 통제해야 했으므로 서로 전면전을 치를 여유가 없었던 것이 둘째 이유다.

특히 사산 제국에서는 샤푸르 2세의 강력한 힘과 카리스마에 억눌려 있던 귀족 및 성직자들의 발호가 다시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샤푸르 2세의 이복 동생으로서 제위를 계승한 아르다시르 2세는 383년 샤푸르 2세의 아들 샤푸르 3세에게 양위하고 물러났으며, 샤푸르 3세는 재위 5년만에 귀족들에 의해 암살당했다. 38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바흐람 4세는 좀 더 오래 재위하긴 했지만 결국 399년에 암살당하는 결과를 피하지 못했다. 그나마 399년 제위를 계승한 바흐람 4세의 동생 야즈데게르드 1세는 선제들보다는 능력있는 군주였고, 42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을 때까지 제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재위 초기에는 기독교도를 옹호하고 조로아스터교 성직자들을 견제한 반면 말년에는 기독교도가 조로아스터교 사원을 파괴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박해를 용인하여 결과적으로 양쪽 모두의 반발을 샀지만, 대체로 그의 치세 대부분은 종교의 자유가 용인되었다. 야즈데게르드 1세는 로마의 어린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후견인이 되기도 했다.

421년 야즈데게르드 1세가 변방에 체류하던 중 의문사하자 그의 큰 아들 샤푸르와 작은 아들 바흐람 사이에 제위 쟁탈전이 일어났고, 샤푸르는 귀족들의 농간에 의해 암살되었다. 귀족들은 바흐람의 즉위 역시 막으려고 했지만, 바흐람은 이란의 속국이던 아랍계 라흠 왕조의 군대를 빌려 귀족들을 물리치고 바흐람 5세로 제위에 올랐다. 그가 막 즉위한 422년에는 이란 내의 기독교 박해 문제로 로마와 전쟁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평화 상태가 회복되었으며, 427년에는 몸소 동방에 친정하여 에프탈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같은 외치의 성공을 바탕으로 바흐람 5세는 귀족과 성직자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며 재위 대부분 기간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사냥, 스포츠, 연회, 시와 음악 등 궁중 문화가 크게 융성하였는데, 특히 바흐람 5세는 사냥, 그중에서도 야생 당나귀 사냥을 좋아하여 '구르'(야생 당나귀)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

바흐람 5세는 로마측과의 평화 협정에 따라 기독교 박해를 중지했고, 438년 제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야즈데게르드 2세 역시 재위 초기에는 이를 따랐다. 그러나 기독교의 세가 점점 커져 조로아스터교와 충돌하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기독교 박해를 시작한다. 특히 아시리아 교회의 희생자가 많았으며, 기독교 세가 크던 아르메니아를 강제로 개종시키려다 바르단 마미코니안의 대규모 반란을 초래하기도 했다. 기독교에 비해 훨씬 관대한 대우를 받던 유대인들 역시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한편으로 야즈데게르드 2세는 재위 기간 대부분을 훈, 키다르, 에프탈, 아랍인, 튀르크 등 사막과 스텝 유목민들과의 전쟁으로 보냈으며, 캅카스와 호라산에서 각각 승리를 거두어 유목민 침입을 일시적으로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457년 야즈데게르드 2세가 죽자 그의 아들 호르미즈드 3세가 즉위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메흐란 가문의 바흐람과 소흐라 가문의 자르메흐르의 지원을 받은 동생 페로즈 1세에 의해 암살되었다. 페로즈 1세는 캅카스에서 훈족의 침입을 격퇴하고 아프가니스탄에서 키다르를 물리쳤으며, 7년에 달하는 기근을 침착하게 대처하는 등 나쁘지 않은 능력을 보였다. 그러나 483년 그는 대규모의 에프탈 침공군에게 패배해 사로잡혔고, 거액의 몸값을 내며, 아들 카바드를 인질로 잡힌 뒤에야 풀려나왔다. 페로즈 1세는 484년 다시 군대를 모아 출전해 에프탈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를 알아챈 에프탈의 기습으로 역관광당해 전군이 궤멸당하고 본인도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했다. 이때 이란 동부는 에프탈에게 약탈당하고 만다. 헤라트 등 이란 동부를 휩쓸고 돌아간 에프탈은 페르시아에게 막대한 연공 납부를 강요했다. 에프탈에게 두 번이나 크게 패한 페르시아는 막대한 연공을 바쳐야했다. 한편 에프탈 침입 직전 아르메니아도 페르시아가 약해진 것을 알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독립했다.

소흐라의 자르메흐르를 중심으로 이란 동부에 남은 에프탈을 몰아낸 귀족들은 페로즈 1세의 동생이자 행정 수반이었던 발라시를 다음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발라시는 선량한 인물이지만 무능하기 짝이 없어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난국을 헤쳐나갈 만한 혜안은 갖고 있질 못했고, 에프탈에 바치는 막대한 연공 때문에 재정은 바닥을 쳤다. 이런 발라시한테 짜증난 귀족들은 4년 만에 발라시의 눈을 멀게 만들고 유폐시켜 버린 뒤, 에프탈의 지원을 받은 페로즈의 아들 카바드를 제위에 추대했다.

488년 즉위한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의 막강한 힘을 제어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교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마니교와 흡사한 교리를 가진 조로아스터교의 이단 분파인 마즈다크교는 귀족과 부자들이 모든 재산, 심지어 부인들까지 가난한 자들과 공유해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을 펼쳐 하층민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사회에 혁명을 방불케 하는 대혼란이 펼쳐졌다. 카바드 1세는 이들을 의도적으로 지원했고, 당연히 반발한 귀족과 성직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496년 카바드 1세를 폐위시켜 후제스탄의 '망각의 성'이라는 감옥에 가둔 뒤 그의 동생 자마습을 대신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카바드 1세는 곧 탈출하여 트란스옥시아나로 갔고, 그곳에서 에프탈 군대를 지원받아 크테시폰으로 돌아왔다. 자마습은 카바드 1세에게 항복했고, 카바드 1세가 다시 황제로 복위했다.

6. 카바드 1세, 호스로 1세의 제3차 전성기(498년 ~ 590년)

파일:attachment/Anoushiravan.jpg
20세기 초 테헤란에 조성된 호스로 1세 "아누쉬르번"(불멸의 영혼)을 묘사한 기념물.

498년 제위를 되찾은 카바드 1세 앞에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물론 황제를 좌지우지하는 귀족들의 막강한 권력은 한풀 꺾였지만, 왕권이 추락했다는것은 명백했다. 특히 오랜 기근과 유목민들의 약탈, 잦은 전쟁으로 인민의 삶은 피폐해졌고 제국의 재정도 바닥난 지 오래였다. 아르메니아와 이베리아, 그 외 이란에 복속되어 있던 여러 아랍 부족들과 산악 부족들이 이란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독립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으며 지방에 할거한 귀족들의 동태도 심상치 않았다. 이런 가운데 에프탈을 이길 힘은 여전히 없다보니 살려고 연공까지 바쳐야 했다.

달리 재원을 마련할 만한 방법이 없었던 카바드 1세는 로마로 눈을 돌렸다. 과거 로마와 이란이 캅카스 지역을 분할한 뒤, 북방 유목민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로마가 이란에 분담금을 지불해 왔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나스타시우스 1세는 현금 지불을 거부했고, 카바드 1세는 에프탈을 끌어들인 정면 침공으로 이에 화답했다. 502년 시작된 전쟁은 506년 캅카스 지역에 훈이 대거 쳐들어오면서 평화 협정으로 끝났지만 카바드 1세는 약탈로 얻은 전리품은 물론, 점령한 도시를 로마에 돌려주는 대가로 돈을 뜯어내 당장 재정의 급한 불을 끌 수 있었다. 그 뒤 526년 캅카스 이베리아의 귀속 문제를 두고 전쟁이 재발하여 532년까지 이어졌다. 로마와 이란은 서로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면전을 벌였으며, 영토 변화는 없는 대신 로마가 이란에 방어 분담금을 계속 지급하는 방향으로 강화가 이루어졌다.

카바드 1세는 외치에서 거둔 성과를 바탕으로 황폐해진 국내 상황을 전면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했다. 마즈다크교의 세력 확대는 귀족들에 대한 공격과 폭동으로 이어졌고, 마즈다크 교단과 귀족들간의 싸움으로 대귀족들의 세력은 상당히 위축되었다. 카바드 1세는 귀족들의 세력이 충분히 약화되었고, 마즈다크교 세력이 지나치게 강해졌다고 판단되자 정통 교리를 내세워 마즈다크교를 탄압하기 시작했다.[5] 마즈다크교와 귀족들의 대립을 이용해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카바드 1세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을 점차 확대하여 제국 전역의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세제 개혁에 착수했다. 이 개혁 작업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호스로 1세 시대까지 이어진다. 또 카바드 1세는 샤푸르 2세 이후 거의 중단되었던 황제 주도의 도시 조영 작업을 재개하기도 했다.

카바드 1세는 죽기 전 작은 아들인 호스로를 차기 후계자로 지명했고, 531년 카바드 1세가 죽자 호스로 1세가 형 카부스를 물리치고 제위에 올랐다. 마즈다크교를 절멸시키고 폐위 음모를 꾸미던 귀족과 형제들까지 제거하여 절대 권력을 확립한 호스로 1세는 앞서 언급한 내정 개혁을 강행했다. 그 결과 봉건 귀족을 대체하기 위한 '데흐건'(Dehqan, 하급귀족 혹은 소영주) 집단을 육성하고, 재정 확충과 행정-군사 부문의 중앙집권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개혁의 상세한 내용은 아래 "정치" 단락과 "군사" 단락을 보라) 오랜 전쟁과 기근으로 파괴된 농장과 운하의 재건 및 확대, 새로운 도시 조영 등 각종 건설 사업도 정력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같은 내치의 성과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호스로 1세는 적극적인 대외 공세에 나섰다. 557년 중앙아시아돌궐(튀르크) 제국과 연합해 에프탈을 협공, 궤멸시켰으며 571년에는 아라비아 반도 남부의 예멘을 점령, 속국으로 삼았다. 에프탈 멸망 후에는 돌궐이 새로운 위협이 되었으나, 적어도 호스로 1세 치세에는 대규모 침공은 없었다.

에프탈, 예멘과 달리 대 로마 전쟁은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으며, 명백한 승패가 가려지지 않은 채 수십년을 끌었다. 로마와 이란은 532년 휴전 협정을 맺은 상태였는데, 540년 이란측이 조약을 파기하고 로마를 공격했다. 당시 로마 제국은 서부 전선에 치중하고 있었으므로 이 공격에 제대로 맞서지 못했고, 호스로 1세는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이후 호스로 1세가 캅카스의 속국 라지카를 방어하기 위해 군대를 돌린 사이 벨리사리우스의 로마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니시비스를 공격했으나 점령에 실패했다. 뒤늦게 남하한 호스로 1세 역시 에데사를 포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한편 543년 아르메니아로 향하던 로마군은 이란 측의 매복에 걸려 격퇴되었고, 545년 로마와 이란은 로마가 연공을 보내는 조건으로 5년 휴전에 합의했다. 그러나 547년 라지카가 이란 대신 로마와 손을 잡기로 함에 따라 로마군이 파견되고, 로마와 이란은 물론 역내 친로마 세력과 친이란 세력끼리도 충돌하는 혼전이 벌어졌다. 결국 549년 로마와 이란의 전면전이 재개되었고, 10여 년을 끌다가 562년 라지카가 로마 측에 남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571년 아르메니아의 반란으로 양측의 전쟁이 재개되었으며, 로마와 이란은 변경 지역에서 수많은 전투를 벌이고 승패를 주고받으며 전쟁을 지속했다.

579년 호스로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호르미즈드 4세는 단호한 인물로, 국내적으로는 호스로 1세 이후 극적으로 강화된 황권을 적극 행사하는 한편 국외적으로는 로마를 상대로 한치의 양보도 거부했다. 따라서 그의 치세는 대부분 국내 귀족들과의 암투와 변경 지역에서 벌어지는 끝없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 이를 틈타 튀르크 세력이 대규모로 이란을 침공했으나 대귀족인 메흐란 가문의 바흐람 추빈이 이끄는 군대가 이를 완전히 격파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흐람 추빈의 영광스러운 승리는 곧 호르미즈드 4세의 경계심을 증폭시켰고, 양자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다. 결국 590년 바흐람 추빈은 본거지인 메디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크테시폰으로 진군해 왔고, 호르미즈드 4세는 아들 호스로와 공모한 귀족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7. 호스로 2세: 마지막 전성기와 몰락(590년 ~ 628년)

이후 호스로 2세가 제위에 올랐으나, 바흐람 추빈은 이에 개의치 않고 크테시폰을 점령한 뒤 자신이 새로운 황제라고 선포했다. 바흐람 추빈과 싸워 패배한 호스로 2세와 지지자들은 로마 제국으로 도피했고, 아르메니아 서부와 이베리아를 넘기는 대가로 황제 마우리키우스로부터 로마군을 지원받았다. 로마군과 함께 돌아온 호스로 2세는 591년 바흐람 추빈 세력과 격돌, 승리를 거두고 제위를 되찾았다. 얼마 후에는 바흐람 추빈에 대항해 호스로 2세를 지원했던 이란 귀족 비스탐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아르메니아 출신 장군 슴바트 바그라투니[6]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602년 마우리키우스가 죽을 때까지 로마와 이란은 평화 상태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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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년 로마 제국에서 포카스가 반란을 일으켜 마우리키우스를 살해하고 제위를 차지하자, 호스로 2세는 즉각 자신의 은인인 마우리키우스의 죽음을 보복하겠다는 명분으로 로마를 침공했다. 오랜 전쟁과 반복된 내전으로 약화된 로마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수백 년 동안 유지되었던 로마-이란 국경의 요새 지대가 완전히 무너졌다. 최악의 폭군 포카스를 몰아내고 즉위한 새 로마 황제 이라클리오스가 뒤늦게 로마군을 이끌고 반격에 나섰으나, 611년 안티오키아 근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호스로 2세 휘하의 장군 샤힌샤흐르바라즈가 이끄는 이란군에게 대패했다. 이후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아나톨리아가 제대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차례로 무너져내렸다. 616년에는 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마주 보이는 칼케돈 지역까지 이란군이 주둔했다. 동부 변경에서도 619년 슴바트 바그라투니 휘하의 군대가 튀르크의 침입을 격퇴했다. 호스로 2세 치하 시점에서 사산 왕조 페르시아아케메네스 왕조 이래 이래 근동에서 가장 큰 이란의 대제국을 이루었다.

바야흐로 사산 왕조가 동부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고 아케메네스조의 영광을 회복하여, 400여년을 끌어온 로마와 페르시아의 대결이 결국 로마의 멸망과 페르시아의 승리로 끝날 듯했다. 호스로 2세와 이란 귀족들은 주체하기 힘든 엄청난 성공에 취했고, 향락과 사치가 극에 달했다. 하지만 호스로 2세와 귀족들은 로마인들이 계속 당하고만 있을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동로마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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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세기 프랑스에서 묘사된 호스로 2세(가운데)와 이라클리오스(오른쪽)의 싸움. 왼쪽에서 케루빔이 지켜보고 있다.

622년, 절망적인 상황에 몰린 로마의 이라클리오스 황제는 이란군이 점령지 각지에 흩어져 있는 틈을 타 이란의 심장부를 기습 타격하기로 결정했다. 이란이 아직 흑해지중해에 해군 세력을 확보하지 못한 것을 노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바로 배를 이용해 아르메니아로 이동, 그곳에서 이란령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북부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타격하자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과연 적중했고, 이라클리오스는 수차례 같은 공격을 반복했다. 호스로 2세는 급히 본토에서 병력을 차출해 이라클리오스에게 대항했지만 군대를 보내는 족족 격파당했고, 전선의 이란군은 아바르 군대와 함께 626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결국 627년에는 조로아스터교의 3대 성화(聖火)이자 전사-귀족 계급을 상징하는 아두르 구쉬나습의 사원이 로마군에게 파괴되어 호스로 2세의 권위는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호스로 2세는 패전한 병사들을 처형하고 하인, 노예들을 전장에 내모는 등 발작적인 태도로 최후의 발악을 벌이다가 보다못한 귀족들에 의해 폐위되었다.

8. 사산 공위시대(628년 ~ 633년)

628년 귀족들은 유폐되었던 호스로 2세의 아들을 카바드 2세로 추대하고, 카바드 2세는 부황 호스로 2세와 함께 자신의 제위를 위협할 만한 형제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러나 페르시아는 오랜 전쟁으로 인해 기근과 전염병이 창궐했고, 카바드 2세 역시 이에 휘말려 죽어버렸다. 호스로 2세의 전쟁으로 군대의 대부분이 사라지고 수도권이 황폐화되자 대귀족들은 자기들 영지에 할거하기 시작했고, 중앙정부의 통제력은 갈수록 약해지며 제국은 공중분해되었다. 카바드 2세의 뒤를 이은 아르다시르 3세는 겨우 7세의 어린아이였고, 곧 샤흐르바라즈에게 살해당했으며, 샤흐르바라즈 역시 얼마 안 가 암살당했다. 샤흐르바라즈는 죽기 전 휴전하는 대신 모든 점령지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이라클리오스와 강화했다. 이 강화는 페르시아 샤한샤가 로마 황제의 노예라는 명칭까지 쓸 정도로 굴욕적이라 사실상 이란의 항복이나 다름없었다. 그 뒤 잠시 호스로 2세의 딸들인 푸란도흐트아자르미도흐트가 제위에 올랐으나 둘 다 오래가지 못했다. 특히 푸란도흐트 사후 약 2년 동안은 10명에 달하는 제위 참칭자들이 나타나 이란 제국은 끝 모를 나락에 빠져들었다.

633년 최종적으로 호스로 2세의 손자인 야즈데게르드 3세가 단일 제위에 올랐으나, 그 역시 8세의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며 실제 권력을 가진 것은 귀족 로스탐 파로흐자드였다. 이미 약해질 대로 약해진 제국은 주위 모든 세력의 표적이 되었다. 캅카스 지역에서는 하자르가, 동부에서는 튀르크가 침입했으며 로마의 이라클리오스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9. 이슬람의 침공과 멸망(633년 ~ 651년)

쇠락한 이란을 실제로 정복한 것은 새로운 종교 이슬람의 기치 아래 단결한 아랍인들이었다. 호스로 2세는 동로마와 전쟁을 벌이기 직전인 600년 메소포타미아 남부-아라비아 반도 북부의 속국인 라흠 왕조왕을 사형시켜 버리고 이 지역을 이란의 직할령으로 편입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 결과 부유하고 취약한 사산 제국의 심장부와 아라비아 사막의 약탈자들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장벽이 사라졌다. 이는 오히려 라흠 왕조 치하에 있던 아랍인들이 이후 이슬람 세력에 가담하여 이란 정복에 적극 협조하는 결과까지 낳는다.

아랍 이슬람 제국의 군대는 붕괴되는 제국에 물밀듯이 쳐들어왔다.(이슬람 제국의 페르시아 정복) 이미 잦은 정쟁의 여파로 사산 황가에 대한 충성을 저버린 귀족들은 많은 수가 제국을 돕지 않거나 심지어 아랍 측에 협조하기도 했다.[7] 이런 상황에서도 남은 힘을 끌어모은 제국과 아랍군 간에는 수차례 전투가 벌어졌지만, 실질적으로 이란 중앙 정부의 군대는 636년 까디시야 전투에서 궤멸되었다. 수도 크테시폰에서 빠져나온 야즈데게르드 3세는 이란 각지를 돌며 지원을 호소했으나, 642년 메디아의 니하완드 전투(영어명: 나하반드 전투)에서 마지막 충성파 군대가 패배한 뒤로 사산 왕조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아랍 이슬람 세력은 산산이 분열된 이란 각지를 차례차례 접수해 나갔고, 야즈데게르드 3세가 651년 메르브에서 수렌가문의 압박을 받은 평민에게 살해당하면서 사산 왕조는 완전히 멸망했다.

10. 사산부흥운동과 그 이후

야즈데게르드 3세 사후 아들 페로즈 3세바흐람 7세당나라로 도망치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당나라 황제 고종의 윤허 아래에 망명 정부를 열고 당나라 관직에 앉아 부흥운동을 일으켜 백여년 간 이란을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중국으로 간 사산 왕조 충성파들은 당나라 귀족층으로 받아들여졌다가 점차 한족에 동화되었다.[8][9]

사산 왕조가 멸망한 이후에도 잔존 세력은 남아 있어서 타바리스탄 지역에 다부이 왕조, 카린반드 왕조, 바두스판 왕조, 마잔다란의 바반드 왕조등 사산 왕조의 후신 조로아스터교 이란 세력들이 계속 흥기하여 이슬람 세력에 지속적인 저항을 이어 나갔고, 다부이 왕조가 761년, 카린반드 왕조가 9세기 이후로 사실상 멸망하고난 뒤에도 북이란 지역에 두 나라가 남아있다가 바반드 왕조가 14세기 중반, 바두스판과 바반드의 후계인 아프라시압 왕조가 16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349년 바반드 왕조, 1504년 아프라시압 왕조, 1598년 바두스판 왕조의 멸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하여 고전 이란의 역사는 종결되어 이후 페르시아는 이슬람 이란의 시대로 이어진다.


[1] 제위를 찬탈한 나르세스 1세는 대규모 마애상과 비문을 남겨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는데, 이 명문이 보존되어 초기 사산 왕조 역사 연구에 도움이 되었다.[2] 수도 크테시폰이 함락되어 로마군에게 파괴되었고 황후와 후궁들, 자손들이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3] 왜냐면 아랍 부족들은 인구가 적다보니 굳이 대규모로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4] 1430년 티무르 제국 시대 작품으로, 바흐람 '구르'는 화려한 궁정 생활과 일화들을 남겨 오랫동안 이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다.[5] 마즈다크 교단을 그대로 놔둔다면 귀족들처럼 황실을 쥐고 흔들려 할 것이 분명하기에 반드시 제압해야 했다.[6] 성을 보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900년대에 조지아 왕위에 올라서 19세기 러시아에 흡수되기까지 왕위를 지켰고, 러시아 흡수 이후에도 표트르 바그라티온 등의 명장을 배출한 그 바그라티온 가문 출신이 맞다.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세력에 러시아까지 왔다가는 풍파속에서도 1,500년 이상 버틴 명문가인 셈.[7] 이런 상황은 사산 가문이 전대의 아르사케스 가문을 쳐부술 때, 그리고 더 나아가면 그 파르티아가 셀레우코스 제국을 무너뜨릴 때와 상당히 유사하다. 국가 의식이 존재하지 않고 패권자에 충성할 뿐인 귀족들의 묶음인 중동 제국의 특성상 패권국이 쇠퇴기에 접어들어 약해지면 단합하기보다는 간을 보다가 새로운 패권자에게 빌붙는 식의 역사가 똑같이 반복된 셈.[8] 이것에 착안했는지 《쿠시나메》라는, 아랍 정복자에 복수하는 내용의 대체역사성 서사시가 생겨나기도 했다. 《쿠시나메》는 주인공인 마지막 왕자 아비틴이 당나라를 거쳐 신라로 망명하는 내용으로 나오는데 이 신라가 '실라'로 나오며 그곳의 공주 프라랑이 아비틴과 사랑에 빠져 낳은 아이가 페레이둔이라고 한다.[9] 사산 왕조 멸망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파르시"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중국으로 피난간 조로아스터교도들도 인도의 파르시처럼 부유한 무역 상인으로 유명했는데, 당나라 때 속담으로 “의사가 앓고 페르시아 사람이 궁한 상황”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 중국의 조로아스터교도들은 인도에서와 다르게 전부 현지인과 동화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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