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대문역 시절
경성역의 전신인 남대문역의 모습을 담은 엽서(1926년 제작) | 1924년 건축 중인 경성역을 찍은 사진 |
1900년(광무 4년) 경인선의 서울 도심 구간 개통과 함께 남대문정거장으로 개업하여 1923년 경성역(京城驛)으로 이름이 바뀐 뒤 광복 후인 1947년에 현재의 서울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경성역(서울역; Seoul station)이라는 역명은 원래 구 서대문역이 가지고 있었으나, 1905년 그 역의 이름이 경성역에서 서대문역으로 변경되었다. 그 후 남대문역의 역명이 1923년에 경성역으로 바뀔 때까지 17년 간 경성역(서울역)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역사 부지는 원래 만초천이 흐르던 자리였으며, 하천을 직강화하면서 경부선 옆으로 흐르게 만들고, 하천부지는 매립하여 역으로 만들었다. 만초천은 현재 청파로를 따라 복개되어 하천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문배동에 있는 배수펌프장이 만초천이 외부로 드러난 유일한 곳이다.
소설 운수 좋은 날에 묘사된 '남대문 정거장'은 남대문역 당시의 역사를 묘사한 것이다. 사진에서도 인력거 여러 대가 주차되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2. 경성역
일제강점기 경성역사 |
경성역 역명판 |
경성역 역사, 즉 옛 서울역 역사는 1925년 9월에 준공되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이국적인 건물로 석재와 철근 콘크리트, 철골 구조를 사용했으며 비내력벽과 장식에는 목구조와 벽돌, 인조석을 다양하게 섞어 들었고, 중앙 지붕에는 비잔틴풍의 돔을 올린 과도기적 건물이다. 본래 계획은 경성역을 도쿄역과 비슷한 규모로 세워 일본 제국의 위세를 선전하려는 것이었으나 간토 대지진으로 본국의 피해가 막심해 예산이 부족해진 관계로 당초 계획의 1/4 크기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부터 나중에 더 확장할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도쿄역과 비교하면 왜소한 규모로 지어졌다.
역명판의 한글 표기는 1933년 맞춤법 통일안 이전이라 '경셩'이고, 가나 표기는 역사적 가나 표기법을 따라 'けいじやう'이다.
역사 1층은 대합실과 역무공간으로 사용하고, 2층 북쪽 절반은 한반도 최초(호텔 내 레스토랑 제외)의 고급 레스토랑 '그릴'과 고급 다방 '티룸'으로 사용되고 있었는데, 이 또한 도쿄역의 기능을 모사한 것이다. 도쿄역도 상부를 호텔로 쓰고 있었기 때문이며, 옛 부산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당시로서는 조선에서 드물게 '양식'을 먹을 수 있는 명소였으며, 이상의 소설 '날개'에도 등장한다.
이 양식당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서울역 그릴'이라는 이름으로 2021년 11월 30일 폐업시까지 96년간 영업했다. 다만 운영주체가 계속 바뀌며 정통 프랑스식 정찬에서 경양식으로 점차 다운그레이드되고, 2004년에는 신 서울역의 건설로 인해 구 서울역이 철도역의 기능을 상실하면서 레스토랑을 신역사 4층으로 옮겼기 때문에 젊은 세대 중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가 폐점 4~5년 전부터 레트로 붐을 타고 트위터 등에서 입소문이 나서 알려졌다. 물론 장노년층들은 이 곳에서 식사와 커피를 즐기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경양식으로 다운그레이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프랑스 정찬 시절의 흔적을 몇 가지 엿볼 수 있었는데, 후식으로 제공되는 커피의 모습이라든가, 특히 함박스테이크에 곁들여져 나오는 매쉬포테이토를 보면 으깬 감자와 스테이크를 같이 곁들이는 전형적인 프랑스풍이었다. 용산역 앞에 있었던 대한민국 국방부의 '용사의 집'과 마찬가지로 7080 시절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으며, 그 시절 호텔 경양식 맛과 뭔가 촌스러우면서도 레트로풍을 원한다면 가볼 만한 곳이었다. 웨이터 및 웨이트리스도 매우 오랜 근무경력이 있어서 그만큼의 짬이 있었다.
음식 솜씨는 확실히 평균 이상으로, 그 옛날 '호텔 경양식'답게 직접 루를 갈아서 크림의 풍미를 더한 수프라든가 고기의 조리 솜씨도 기본기를 확실히 지켰다. 초기 연수를 일본 도쿄도 치요다구의 테이코쿠 호텔에서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고, 과거에는 철도청이 직접 운영하다가 80년대에는 (현재는 없어진)부산역 그릴과 함께 한화그룹 계열 더 플라자에서 직접 운영한 적이 있었다. 1980년대 경양식 스타일대로 21세기 현재보다 간이 조금 심심하기는 하지만 기성품 특유의 쓴 뒷맛이 없는 고급진 풍미를 보였다. 하지만 그 수프 단품이 한 접시에 5,000원이고 함박스테이크가 25,000원이며 안심스테이크는 4만원대에 육박했기 때문에 학생들이 접근하기엔 부담스러운 면이 있었다. 안심스테이크는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샤토 브리앙이었으나, 이후로는 더 이상 송아지 고기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메뉴 이름이 변경되었다. 그런데 이 메뉴들은 사실상 과거 새마을호 식당차가 플라자 익스프레스였던 때와 거의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에, 그 시절을 기억하는 올드비 철덕들이라면 추억을 회상할 만했다. 연어 카르파초라든가 스테이크의 경우 그때나 신역사 시절이나 같았다.
일본 건축가 다쓰노 긴고(辰野金吾)가 당시 유행하던 절충주의 양식을 따라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모방하여 도쿄역을 지었기 때문에, 서울역도 비슷하게 암스테르담역 혹은 도쿄역을 모방한 것으로 생각되었다.[1] 그러나 이후 서울역의 실제 모델은 스위스의 구 루체른 역이 모델인 것이 밝혀졌다.[a] 시공은 일본의 시미즈 건설사가 맡았다.
화재로 붕괴되기 전의 루체른역 |
과거의 루체른 역사는 서울역사와 거의 흡사한 외형을 가졌지만 1971년 화재로 붕괴되고 현재 구 역의 모습은 건물의 입구(파사드)만 남겨 둔 상태이기 때문에 그 관련성을 알기 어려웠다.[3] 다만 루체른 역에 남은 파사드도 딱 보자마자 서울 사람이라면 "저거 서울역 가운데부분 아닌가?" 싶을 정도로 닮았다. 실제로 화재 후, 루체른 역사 복원을 위해 관계자가 서울역을 방문하기도 했다.
연구 결과 서울역은 외관은 루체른 역사와 유사하나 내부는 오히려 암스테르담 역과 비슷하다고 한다. 외관에 붉은 벽돌을 사용한 점이나, 건축물 안의 공간 구성, 당시 유럽에 일반적이었던 종착역식 역이 아닌 통과식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암스테르담-도쿄-서울역은 유사성이 있다.
서울역을 설계한 건축가는 알 수 없다. 쓰카모토 야스시(塚本靖) 사후 유품으로 그의 이름이 적힌 서울역 설계입면도가 발견되었지만, 건축을 총괄한 건축가가 누군지는 정확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쓰카모토 야스시가 설계에 참여한 것은 사실이다.[4]
2016년 7월 경성역의 준공도면의 원본 문서가 공개되었다. 과거에는 설계입면도와 준공 평면도의 일부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지만 이 도면에 따르면 지금은 민자역사 구조물에 가려져 사라져 보기 어려운 당시의 경성역 뒷면과 우측면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고 한다.[a]
3. 서울역
8.15 광복으로 일제가 한반도에서 축출된 이후 1946년에 경성부는 서울시로 개명되었고, 이에 따라 역 이름도 경성역에서 서울역으로 바뀌었다.6.25 전쟁 당시에는 한강 인도교와 한강철교가 폭파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열차는 한강 이남인 노량진역까지만 운행했고, 이 때문에 서울역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열차들의 종점 역할을 했다. 따라서 이북에서 기차로 서울역까지 온 피난민들은 얼어붙은 한강을 걸어 피난을 가야만 했다. 전쟁 도중 일부 시설이 파괴되었지만, 전후 복구되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제3공화국 시기인 1968년에는 서울역과 그 주변 일대를 아예 대대적으로 부수고, 철도는 복개하여 다시 짓겠다는 내용까지 포함하는 과격한 사업계획안들이 대통령에게 보고되고 일반 시민들에게도 공개되었던 적이 있다.[6] 이후 앞의 글에서 설명된 것처럼 여러 가지 이유에서 무산되었으며, 서울로 7017의 전신인 서울역 고가도로를 짓는 쪽으로 축소된다.
1987년에는 한국화약그룹이 철도청 및 각 민간기업들과 출자해 '서울청량리역사'를 세워 민자역사 착공을 개시했다.
1988년 당시의 서울역 |
2003년 9월, 현역 시기 막바지 당시의 정문 앞 (출처: 地球の歩き方 一歩先の、感動の旅へ)
민자역사 완공 전까지는 열차등급별 대합실(맞이방)이 따로 존재하여 새마을호 대합실은 바로타 구조로, 기타 열차는 지방 대도시 역과 같이 개표구를 나가면 육교를 통해 해당 플랫폼을 찾아가는 방식이었으나, 1988년 민자역사 완공 이후 선상역사 형태가 되어 플랫폼 별로 게이트가 존재하게 되었다.
구 민자역사 당시 게이트에 따른 열차등급 및 행선지는 다음과 같다.
- 1~2번: 장항선
- 3~4번: 경부선 무궁화호, 통일호
- 5~6번: 새마을호 전용
- 7~8번: 호남/전라선 무궁화호, 통일호
- 9~10번: 도착열차 전용
- 11~12번: 도착 및 경의. 교외선 이라고 적혀있었다. 대체로 11번 홈은 9~10과 같이 남부 지역에서 올라온 열차가 종착하는 곳이었고, 12번 홈이 경의선과 교외선의 착발 장소로 사용되었다. 출퇴근 시간대에는 11번 홈에서도 경의선이 착발한다.[7]
민자역사 완공 이후 이 체계는 2003년 12월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러나 KTX 개통에 따라 더 넓은 역사가 필요해져 새로운 역사 건립이 계획된다. 이 역사 역시 민자역사이며, 공사는 2000년 5월 22일부터 시작되었고 2003년 12월 30일에 완공하게 된다. 2003년 11월 말에 서울역 신 역사의 완공이 막바지에 이르자 철도청은 2003년 11월 28일부터 서울역 신 역사로의 임시 이전 영업을 개시했고, 2004년 1월 1일 고건 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신 역사 준공식이 열렸으며, 서울역 구 역사는 78년간의 역사의 기능을 종료했다(1925년 9월 30일~2003년 12월 31일). 이 후 모든 역 기능은 신역사로 옮겨가고 옛 서울역 민자역사는 롯데마트 건물이 되었다. 구 서울역사와 민자역사를 잇던 통로는 철거되었다. 현재 롯데마트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은 구 서울역 민자역사 건물이라고 보면 되는데, 정확히 말하면 1층만 과거 여객업무를 했던 곳이고 2층부터 5층까지는 갤러리아 백화점이 영업했던 곳이다.
또한 민자역사 신축공사와 더불어 서울역 구내 선로의 대대적인 개량이 이루어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 서울역 남쪽에는 서울객화차사무소 가 위치하여 경의선 문산행 완행과 소화물, 그리고 일부 무궁화호 객차의 유치 및 정비를 담당하는 간이 차량기지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해 서울역 승강장의 전체적인 모양이 상당히 구부정한 곡선 형상이었는데[8], KTX 운행을 대비한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로 일직선으로 펴는 과정을 거쳐 지금은 모든 플랫폼이 완전히 반듯한 일자형이 되었고 차량기지업무는 수색차량사업소로 통합되어 없어졌다.
2004년 1월 1일, 서울역 신역사 준공식 |
2004년 KTX 개통 당시에는 서울역에서 경부선과 호남선을 모두 운영하다가, 열차 이용이 상당히 애매한 상태가 되면서 광주광역시나 목포시 등에서 먼저 각 계통별 종착역 일원화를 요구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경부선 계통이 서울역에서만 시종착할 경우 부산행 선행열차를 놓치면 서울역에서 몇 분 뒤의 후행열차를 타면 된다. 하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으로 경부선 계통열차가 서울역과 용산역에 이원화되어 시종착할 경우 용산역에서 부산행 선행열차를 놓쳤는데, 해당 역에서는 후행열차가 긴 시간 뒤에 있고 몇 분 뒤의 후행열차가 서울역에 있는 경우 서울역까지 이동해야 한다. 그렇다고 KTX를 서울역, 용산역에 다 세우게 되면 소요시간이 그만큼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문제와 기존의 서울역 선로용량으로 늘어난 운행편수를 감당하기 힘들어진 관계로 2016년 12월 8일까지 대부분의 광주/목포/여수엑스포/장항경유 익산행 호남선, 전라선, 장항선 계통 열차는 이 역까지 가지 않고 용산역에서 시종착하였다. 도입 초기에는 현재와 비슷하게 호남선과 전라선 KTX 일부 열차가 시종착하기도 하였고, 전용역 제도가 전면 정착한 이후에도 호남선과 전라선 임시열차가 서울역 시종착으로 편성되고 경부선 열차가 용산역에서 시종착하기도 하였다. 다만 전라선 일반열차와 정확하게 같은 운행계통으로 운행하는 서울~여수엑스포 간 남도해양열차는 이전부터 서울역에서 시종착하고 있었다.
전용역 제도는 수서평택고속선이 개통되어 수서역으로 KTX 운영이 분산되면서 폐지되었다. 하지만 전용역 도입이 그랬듯이 서울역과 한국철도공사의 사정에 따라 부활할 가능성도 있다. SR의 지배구조에 변경이 생기거나, 경쟁구도가 지속되면서 코레일의 피해 규모가 생각 외로 심각해지거나, 금천구청까지의 선로용량 개선, 인천/수원발 KTX의 성과 등이 변수이다. 먼 미래에 제주행 KTX나 휴전선 이북으로 운행계통이 확장되어 국제열차가 등장하면 또다른 운영 필요성이 제기될 수도 있다.
KTX 개통 이후 역 업무가 신역사로 옮겨진 뒤, 구 역사는 방치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한국철도공사가 관리를 거의 하지 않았던 것도 있었고 특히 노숙자들이 구 역사로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흉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한국철도공사 입장에서 구 서울 역사는 사적지이므로 함부로 건물을 개축, 증축 등을 할 수 없어 운영비만 낭비하는 곳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2006년 문화재청으로 기부채납, 소유권이 이전되었다. 그리고 2007년부터 구 서울역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하려는 계획이 잡히면서 조금씩 이전의 흉물스러운 모습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는 듯 보였고 실제로 복고 컨셉의 패션 런웨이를 진행하는 등 드디어 흉물 신세에서 탈출하는 것 같았지만, 이는 잠깐뿐이었고 문화공간 개조 계획이 지연되면서 다시 노숙자들의 소굴로 전락했다. 이 상태는 2009년까지 이어지게 된다.
3.1. 식당들
서울역 본 역사에 입점한 식당들로는 패스트푸드 체인점 몇 개와 푸드코트가 있다. 패스트푸드 체인은 롯데리아, 맥도날드, 버거킹, KFC 4대 점포가 있던 적이 있으나 KFC는 태극당 서울역점으로 바뀌었다.4. 문화역서울 284
2009년부터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으로 구 서울역을 문화시설로 리모델링하기 위한 복원공사를 시작하면서 방치 상태를 면했으며, 문화역서울 284로 이름이 바뀌었다. 284는 서울역의 사적번호에서 따온 것이다. 구 서울역사 원형복원 완공은 2011년 8월 9일 테이프를 끊었으며, 문화역서울 284로는 2012년 4월 2일 완공되었다. 복원공사를 통해 노후화된 건물 곳곳을 복원하였고 8년여간 방치되면서 최악이었던 위생상태도 어느 정도 개선되었다. 그 공백기 동안 구 서울역 안에는 예술프로젝트 "카운트다운"이 진행되었다. 복원하면서 나름 상징이라면 상징이라 할 수 있었을 서울역 네온싸인을 떼었다. 그리고 2013년 12월 '문화역서울 284' 간판이 설치되었다. 현재 2004년 역 시설을 현재 신역사로 이전하기 전의 흔적은 중앙홀의 역삼각형 철도청 마크가 있는 시계와 역 광장의 한국철도 100주년 동판뿐이다.
현재 문화역서울 284는 복합문화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2013년부터 연간 운영 체계를 확정하고 예술 감독을 공모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여한 작가, 기획자들에게서 문화예술 프로그램 공간으로는 좋지 않은 이야기가 돌고 있다. 이전의 양식을 복원하는 방식으로 공사가 이루어져 온도, 습도 관리 등의 문제가 있고, 예산도 적기 때문이다. 정부(국토교통부)에서 시범케이스로 철공 재산이 아닌 국유 재산화를 했으나 이것이 별 이득이 없자, 시설을 전용하더라도 소유권 이전을 국유로 하는 사례는 이 사례 이후로 없다.
문화역서울 284로 개조된 이후에는 과거 방치되었던 시절보다는 관리가 잘 되고 있는 모습을 보이나, 여전히 미흡한 부분은 남아있다. 특히 노숙자 상주 문제는 아직 해결되지 않아, 지금도 구 서울역사 앞에 가면 구 서울 역사 건물에 자리잡고 누워있는 노숙자들을 다수 볼 수 있다.
이는 국토부와 문화부가 리모델링 이후에 이곳을 방치한 것으로 인한 문제로서, 문화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고는 하지만 상술한 바와 같이 온습도 문제가 있어 활용도가 낮고, 무엇보다도 끊어진 유동인구로 인해 들끓는 노숙자와 이들이 투척하는 오물 때문에 흉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청소인력뿐만 아니라 특수경비용역까지 상주해서 매번 노숙자를 몰아내는 상태에 있으며, 그에 따른 시설관리 유지 비용이 크다.
신 서울역사의 구내에는 구 서울역사에서 사용하던 구 철도기점비가 버려져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에 있었으나 철도 동호인들의 활약으로 철도박물관에 보존될 수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2017년 11월 28일부터 구 서울역의 여객 기능이 부활하게 되었다. 서부역에 붙어있던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 승강장을 구 역사 바로 옆으로 이전하기 때문이다.
5. 서부역
2003년 촬영된 서울역의 서부역 모습 |
1958년에 서울역 남부역이 지어졌다. 현재의 서울스퀘어(구 대우센터) 자리에 1968년부터 철도청 교통센터를 짓기 시작했으나 다 짓지 못하고 대우그룹에 의해 완공되었다. 당시에는 서울역 근처에 버스 터미널(한진)도 있었다. 현재 서울역에서 북쪽으로 보면 한진택배 로고가 붙어있는 빌딩이 보이는데, 이 건물이 예전 터미널 자리였다.
현존하는 부속 건물들로 현재는 각각 철도빌딩과 롯데마트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이 된 건물이 있다. 각각 1975년, 1988년에 서부역으로 지어진 것이다. 이 중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으로 쓰이고 있는 건물은 개장일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민자역사이다. 영등포역은 민자 사업자 설립일 기준으로 최초이며, 개장일 기준으로는 3번째이다. 현재의 제타플렉스 서울역점 터에 1989년부터 서울프라자쇼핑이 있었으며 한화유통이 위탁운영해왔으나, 1999년부터 갤러리아 명품관으로 리모델링됐다. 2004년 KTX 개통을 앞두고 신 역사가 지어지고 갤러리아 콩코스(현 롯데아울렛 서울역점)이 신 역사로 이전하여 현재의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이 입점하게 되었다. 단, 제타플렉스 서울역점 건물 안에 한화커넥트가 있으며,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에서 서울역 서부 출구로 나가는 길에 있는 골든플레이트 푸드코트는 제타플렉스 서울역점 관할이 아닌 한화커넥트의 관할이므로 이 푸드코트에서는 롯데멤버스를 적립할 수 없다. 갤러리아 콩코스는 영업 부진으로 한화커넥트가 롯데쇼핑과 임대 계약을 맺고 2013년 1월 18일에 롯데아울렛 서울역점으로 바뀌었다.
원래 이 서부역에서는 경의선과 교외선 열차를 취급했었다. 그래서 이들 노선의 비둘기호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서울역 북쪽에 있는 육교를 통해 서부역으로 넘어간 뒤, 서부역에서 표를 사서 이용했어야 했다. 이 육교는 민자역사 준공 이후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지만 거의 20년 이상 유지되고 있다가 2013년 11월경부터 입구가 폐쇄되었다. 현재 제타플렉스 서울역점으로 쓰이는 건물이 민자역사로 쓰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기능은 사라졌다. 2004년 4월에 교외선은 영업이 중지되었고, 경의선은 복선 전철화되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신 역사가 지어지고 서부역과 동부역이 한 건물에 붙게 되면서, 서부역의 개념은 주변 지명이나 서부 출구를 뜻하는 정도로 변하였다. 과거 경의선 착발이 서부역이던 시절에는 제타플렉스 서울역점 뒷편의 현대자동차 영업소/우리은행 서울역지점 옆에 "경의선전철"이라고 찍혀 있는 폴 사인이 있었다가 현재는 구 서울역 북부로 옮겨갔다. 대략 우리은행 서울역지점이나 현대자동차 영업소 근처였는데, 참고로 우리은행 서울역지점은 철도공사 주거래 관계가 아니던 한국상업은행 시절부터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서울역 맞이방과 동부 출구에도 우리은행 ATM이 있으며, 동부출구 바로 건너편 서울스퀘어에도 우리은행 서울스퀘어지점이 있다. 그 외에도 인천국제공항철도 역사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공항에 못들어간 대신 자리잡은 우리은행 환전센터가 있다.
「서울역에 5개 노선 추가된다…'통일시대 교통허브' 개발」, 연합뉴스, 2017년 5월 23일
「쓰레기로 가득 찬 '서울역 무인복합기'」, 중앙일보, 2017년 5월 29일
2017년 11월 28일을 기하여 더 이상 수도권 전철 경의·중앙선의 여객 취급은 하지 않게 되었고, 대신 인천공항에서 들어오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수송용 KTX 임시편성을 취급하게 되었다. 경의·중앙선은 구 서울역 쪽으로 이설해 취급한다.
6. 역 주변
1호선 3번 출구쯤에 있는 관문빌딩(U자형 건물)은 최소 1940년대 이후부터 존재해왔던 역사 깊은 건물이기도 하다. 60년대 말 안양시 주둔 주한미군이 찍었던 사진과 지금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주변에 더 큰 빌딩이 들어섰을지언정 그 빌딩은 크게 바뀌지 않은 채 예전의 모습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다만 그때는 커다란 미싱기 그림이 그려진 미싱광고가 전면을 차지했지만, 지금은 전광판 1~2대 정도가 설치되어있다.치안은 나쁜 편이 아니지만 그래도 일부 노숙자를 조심할 필요는 있다. 서울역은 1930년대부터 부랑자들이 득실대었다. 이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할 경우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곳이 서울역 앞이기 때문에 온갖 뜨내기들이 다 모여들었고 해방 전부터 존재했던 서부역 인근의 빈민굴과 결합하여 거대한 지하생태계가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대적으로 저개발지역이 남아 있다. 서울역 주변에 직업 소개소와 오락실이 꽤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역 앞이나 역 주변 지나다 보면 노숙자들이 많다. 특히 서울역 2번출구 경의선 타는 곳에 널려 있다. 몇몇 고참 노숙자들은 짬으로 인한 여유인지 대낮에 역사 구석에서 팔굽혀펴기를 하기도 한다. 바로 근처에 경찰지구대 및 경찰들이 있다. 현재 서울역은 남대문경찰서와 별도 보안업체까지 고용해서 순찰하고 있는데, SnS라는 업체이다. 경찰은 아니지만 보안업체 직원이 노숙자들에게 반말과 욕설을 가하면서 한 노숙자를 구타하고 바닥에 끌고 가는 경우도 있다. 서울역이 노숙자들이 많기는 하지만 행패를 부리는 경우는 적은 편이고 치안도 괜찮은 편이다.
가끔씩 노숙자들이 "라면 좀 먹게 천원만요", "담배 한 까치만 빌릴 수 있을까요" 라고 하는데, 그래도 가능하면 담배나 돈은 주지 않는 것을 권장한다. 돈을 주면 술을 사먹고, 담배를 주면 옆사람에게 가서 또 담배를 구한다. 담배를 구한 노숙자는 다른 노숙자에게 현금 등으로 교체해서 술을 사먹는다. 실제로 S라운지(흡연실)에서 구걸하는 노숙자들은 얼마 뒤 인근에서 술을 먹고 담배 피는 모습을을 자주 볼 수 있다. 서울역이 크다 보니 노숙자들끼리의 사회 역시 가장 큰 규모로 형성된 편이다. 심지어 노숙자들끼리 선후배 서열 군기잡기도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는 서울 도심을 담당하는 경찰서 중 하나이자 경찰력이 강한 서울남대문경찰서 관할이라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는 생각보다 적은 편이다. 서울역을 비롯해서 종각역, 명동역, 용산역 등 서울 도심 대부분의 역에 현재도 노숙자들이 많은 이유는 시민단체, 종교단체 등에서 운영하며 점심 때마다 트럭을 보내는 무료 급식시스템 때문일 확률이 높다. 용산역의 노숙자들은 지금 용산역에서 용산시장 쪽으로 가는 통로 아래 중간에 보면 나무로 뒤덮인 한 공간이 있는데, 사실상 용산 노숙자 최후의 보루라고 보면 된다.
바다이야기가 전국을 휩쓸기 이전부터 4호선 14번 출구 쪽으로 나가보면 길에 오락실들이 즐비했었는데, 대낮에는 청소년 게임장처럼 운영하다가도 밤만 되면 성인용 비디오 슬롯머신 게임으로 소프트웨어를 스위칭하는 식으로 불법영업을 하기도 해서 언론에서 지탄받기도 하였다. 흔히 꽃놀이, 햄버거 하우스 등으로 통용되었던 체리마스터 혹은 그 계열 비디오슬롯들이다.[9] 이 비디오슬롯머신이 설치된 기계 중 몇몇은 돈 놓고 돈 더 먹는 방식도 있었다. 그러다가 바다이야기 파동 쯤 되면 완전히 도박장으로 변모했었다, 그리고 바다이야기가 여론의 철퇴를 맞아서 그쪽 주변의 오락실들이 다 정리되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청소년 오락실 한 곳이 부활했다가 2015년 폐업했다. 자세한 것은 오락실/서울/폐업 문서를 보라.
4호선 인근이 도박과 노숙자, 오락시설의 온상이었다면 서울스퀘어 주변은 홍등가로 소문난 곳이었는데 이건 상당히 옛날 이야기이다. 원래는 남대문경찰서 뒤편에 속칭 '양동'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창가가 있었는데 1970년대부터 도시 정비가 상당히 진행되어 종로3가(속칭 종삼)과 함께 없어졌고, 종사자들은 대부분 용산이나 청량리로 옮겨갔다. 남대문경찰서 부근의 힐튼호텔, STX 본사 빌딩 등은 죄다 이 홍등가가 재개발된 곳이다.
그러나 현재도 남대문 쪽 오래된 빌딩들 일부에는 간판만 봐도 변종 성인업소인 곳들이 구석구석 있고, 서울역 정문 택시 승강장 부근이나 남대문경찰서 인근 횡단보도에는 아줌마, 할머니들이 여전히 일부나마 호객행위를 계속하고 있다. 밤 12시만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나타나서 지나가는 남자를 붙잡고 호객행위를 하는데 일부는 간이식 의자를 펼치고 자리를 잡는다.
재밌게도 여기 아줌마, 할머니들도 남자를 차별한다. 일반적인 남자가 지나가면 호객행위 한 번 시도하고 거절당하면 그걸로 끝인데 반해, 잘 생기고 키 크고 몸매 좋은 남자가 지나가면 한 번 거절에 굴하지 않고 끈질기게 호객행위를 하지만 절대로 가서는 안 된다. 일단 성매매는 엄연한 불법이며, 불법도 불법이지만 대부분 이런 곳은 낡은 판자촌에서 매매가 이루어져 위생 상태가 나쁘며, 할머니가 말하는 "아가씨"는 절대 아가씨가 아니다. 대부분 40~60대의 아주머니들이다.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아직도 나와서 붙잡는 경우가 있으니 문단에 언급된 곳을 지날 때는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서울역 앞 할머니 등의 괴담도 떠돈다고 한다. 2010년대 후반 들어서는 이 곳도 재개발 바람을 타고 전부 밀릴 것 같다.
역 바로 앞에는 러시앤캐시, OK저축은행, 미즈사랑(전부 같은 계열사 소속) 등 대부업체 여럿이 입주한 건물이 있는데, 메가커피(2022년 이전에는 쥬시)가 입주한 1층과 보청기 판매업체가 입주한 3층을 제외하면 모두 대부업체가 입주해 있다. 이 때문에 인터넷 상에서 우스갯소리로 서울역 앞 죽음의 빌딩, 주한지옥대사관, 대출사지 5층 석탑 등으로 불리고 있다. 사진이 2층부터 찍혀서 5층 건물이라고 불릴 뿐 실제로는 6층이다. 원래는 러시앤캐시가 5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위아래로 확장을 하고 2층을 차지한 것이다.
이러한 서울역 주변의 천태만상은 인문지리학상 한 번 형성된 도시 생태계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역 광장은 광화문광장, 서울광장과 함께 정치 집회 장소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며 1980년 서울의 봄 당시 서울역 회군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후 민주화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기도 했는데,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반대 성향의 태극기 집회 또한 이 쪽에서 많이 열리기도 한다. 촛불집회 쪽은 대개 광화문-서울광장 축선을 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경찰쪽에서 물리적으로 동선을 분리해놓게끔 유도하기도 한다. 다만 2004년 서울역버스환승센터로 서울역 광장 크기가 반토막나면서 집회 규모도 같이 반토막이 났다. 그래도 지방에서 상경한 전국농민회총연맹이나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집회참가자들은 일단 한번 보였다 하면 서울역에서도 모이는 건 여전하다. 2010년대 말에는 기독교 우파의 지원을 받는 보수집회 천막이 정치적 메시지 선전을 위해 상시 터잡고있다.
종교 전도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위의 개신교 전도 위주이며, 상술했듯 기독교 우파적 활동과 겹치기까지 한다. 서울역사 화장실 구내에 가끔 개신교 전도 찌라시가 성인약품 찌라시 등과 더불어 변기 위에 올려지기도 한다. 그외에도 천리교가 가끔 중앙 에스컬레이터 근처에서 포교한다.
서울역 북부에 서울역북부역세권개발사업 이 진행 중이다.
서울역 서부역 방면에서도 조금씩 재개발이 시작되고 있다. 중구 만리동 방면에서는 GS건설이 서울역 센트럴자이, 한라건설이 서울역 한라비발디 센트럴 등을 분양하였고 좋은 주택청약 실적을 보이며 마감되었다. 다만 용산구 서계동 방면은 재개발/재건축이 더디다.
[1] 구 한국은행과 구 부산역 건물 등도 다쓰노 긴고의 설계다.[a] 「서울역 도면 공개 "스위스 루체른 역이 모델"」, MBC, 2016-07-07[3] Luzern railway station, 위키미디어 커먼즈.[4] 관련 자료: 일본어 위키피디아 다쓰노 긴고 문서(일본어), 쓰카모토 야스시 문서(일본어)[a] [6] 이승빈. 「서울역 일대 도시공간 재구성의 무산된 청사진: 1968년도 개발안들의 경계 해체 구상」. 공간과 사회, vol.31, no.2, 2021. pp.171-212.[7] 이 당시에는 상선군(群)과 하선군이 철저히 분리되어 도착 열차는 몰라도 출발 열차는 플랫폼이 항상 일정했던 것에 비하면 플랫폼을 랜덤으로 배정하는 지금이 오히려 퇴보한 셈이다.[8] 새마을호 전용 5,6번 승강장부터 조금씩 곡선 플랫폼이 나타났으며 12~13번 승강장으로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하였다.[9] 관련 영상, 출처: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