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벵거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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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벵거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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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 1997-98 · 2001-02 · 2003-0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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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센 벵거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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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2183a> 이름 | 아르센 벵거 Arsène Wenger[1] | |
출생 | 1949년 10월 22일 ([age(1949-10-22)]세) | |
그랑테스트 바랭주 스트라스부르 | ||
국적 | [[프랑스| ]][[틀:국기| ]][[틀:국기| ]] | |
신체 | 키 191cm / 체중 75kg[2] | |
종교 | 가톨릭[3] (세례명: 가롤로)[4] | |
직업 | 축구 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 |
소속 | <colbgcolor=#12183a> 선수 | FC 뮐루즈 (1973~1975) ASPV 스트라스부르 (1975~1978) RC 스트라스부르 (1978~1981) |
감독 | RC 스트라스부르 U19 (1981~1982) AS 낭시 (1984~1987) AS 모나코 FC (1987~1994) 나고야 그램퍼스 (1995~1996) 아스날 FC (1996~2018) | |
행정 | FIFA (2019~ / 글로벌 디렉터) | |
국가대표 |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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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의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행정가. 현재 FIFA의 글로벌 디렉터를 맡고 있다.
AS 모나코에서의 성공으로 이름을 알렸으며, 이후 나고야 그램퍼스를 거쳐 1996년부터 2018년까지 22년간 아스날의 감독을 역임했다. 특히 아스날에서 2003-04 시즌 리그 무패 우승을 비롯해 프리미어 리그 3회와 FA컵 7회[5] 등 총 17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며 아스날을 유럽 정상급 구단으로 만들었다. 또한 2023년에는 알렉스 퍼거슨과 같이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에 감독 최초로 헌액되었다.
별명은 'Le Boss', 'Le Professeur(교수)'.
2. 선수 경력
벵거는 청소년 시절 아마추어 팀 FC Duttlenheim, AS Mutzig 등에서 활약하였다. 선수 경력은 골키퍼로 시작하였으나, 경쟁력이 없었기에 수비수로 전업하였다. 큰 키를 바탕으로 공중볼을 클리어하는 능력은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선수 생활의 대부분을 아마추어로 보내다가, 차후 프랑스 리그 프로팀인 스트라스부르로 이적하였다.대개 선수들이 전성기에 접어드는 29세 때 1부 리그에 데뷔하였다. 1978-79 시즌, 소속팀 스트라스부르가 리그 1(당시 명칭 르 샹피오나)에서 우승하지만, 출장 경력은 단 11경기에 불과하였다. 이는 벵거의 프로 출전 기록 전부이다.
여담으로 젊은 나이 때부터 건강을 중요시하던 그는 선수단 버스 안이 담배연기로 자욱한 게 일상이었던 이 시절에도 팀 내에서 거의 유일한 비흡연자[6]였다고 한다.
학업과 선수 생활을 병행한 끝에 명문인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차후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지도자 경력
3.1. 리그 1 시절
벵거는 1981년부터 선수 생활을 은퇴하고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의 유소년 팀을 이끌면서 스태프 생활을 시작했다. 선수로서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벵거는 일찌감치 지도자 수업을 쌓으면서 감독이 될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1983년에는 장마르크 기유(Jean-Marc Guillou)가 선수 겸 감독으로 있던 AS 칸에서 1시즌간 코치 생활을 하며 경험을 쌓았고[7], 그 다음해인 1984년 AS 낭시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부임 첫 해에 11위를 기록하며 전 시즌보다는 나은 성적을 냈지만, 바로 다음 시즌에 18위로 강등권을 기록한다. 그래도 강등은 면했지만 세 번째 시즌이자 마지막 시즌이었던 1987년 낭시는 강등당하고 만다.AS 모나코 감독 시절 |
그러던 중 1994년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에서 불거져온 승부조작 의혹이 터지면서 리그 1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나코는 리그 순위가 9위로 떨어지게 되고, 결국 벵거는 보드진과의 마찰에 휘말려 1994년 해임된다. 훗날 벵거는 혹시나 자신의 선수들도 승부조작에 연루된 것이 아닌지 의심했다며 이 당시 자신이 인간 본연에 대해, 그리고 축구라는 스포츠에 굉장히 불신감을 가졌던 암흑기라고 회고했다. 그렇게 모나코를 떠난 벵거에게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감독직을 제의했지만, 정신적인 피로감이 극심하던 벵거는 거절하고 칩거에 들어간다.
3.2. 나고야 그램퍼스
잠시 변방으로 떠났던 나고야 감독 시절 |
특히 벵거는 일본의 식문화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쌀밥과 생선, 그리고 채소 위주로 소식을 하는 일본의 식문화에 아이디어를 얻어 엄격하게 식단까지 관리하는 팀 운영을 하는 계기로 삼았다. 2년도 채 안 되는 부임 기간이었지만 벵거는 최근에도 일본에서의 감독 생활은 자신의 감독 인생의 변곡점과 같은 시절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좋았던 인연으로 퇴임 뒤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으로도 물망에 자주 오르내기곤 했으나, 더 큰 목표를 위해 거절하고는 대신 다른 감독을 추천했는데 그는 바로 일본 대표팀을 2002 한일 월드컵 16강으로 이끌었던 필립 트루시에였다.#
3.3. 아스날
자세한 내용은 아스날 FC/벵거 체제 문서 참고하십시오.3.4. 감독직 복귀?
2018년 8월 지롱댕 드 보르도가 감독직을 제안하려 한다는 기사가 있었으나 리그 1은 감독 연령을 65세로 제한하고 있기에 고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9년 FIFA 이사회 멤버가 되었다. 2019년 9월 본인이 맨유 감독직에 관심이 있음을 내비치면서 현역 복귀를 시사했다는 기사가 떴으나# 더선, 데일리 메일 등의 가짜 뉴스로 밝혀졌다.#2019년 분데스리가의 거함 바이에른 뮌헨이 니코 코바치과 결별하면서 생긴 감독직에 후보로 올랐다. 당초 바이에른 뮌헨이 원하던 아약스의 에릭 텐하흐 감독은 안 간다고 했으며 파리 생제르맹의 토마스 투헬 역시 안 간다고 거절하며 벵거 대세론이 급격히 나오기 시작했다. 이에 벵거 역시 바이에른 감독직이 들어온다면 좋다고 TV쇼에서 밝혔다. 그러나 뮌헨의 감독 대행직을 수행하던 한지 플릭이 뮌헨을 훌륭히 이끌어내며 정식 감독으로 선임되는 바람에 이는 없던 일이 되었다.
2019-20 시즌 종료 후에도 바르셀로나 등 많은 클럽이 감독직을 제안해 오는 것으로 알려졌다. 심지어 2020-21 시즌에는 미켈 아르테타가 말아먹고 있는 아스날이 다시 벵거랑 접촉한다는 썰까지 돌고 있다가 아르테타가 어찌저찌 중위권으로 다시 팀을 끌어올리면서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또 다시 한지 플릭이 2020-21 시즌을 끝으로 팀을 떠난다고 발표하면서 뮌헨의 유력한 차기 감독으로 거론되고 있었으나,[10] RB 라이프치히 감독인 율리안 나겔스만의 선임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어 백지화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블라디미르 페트코비치가 보르도 감독직을 맡으며 자리가 비어버리게 된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을거라는 루머가 돌고 있다. 하지만, 끝끝내 루머였고 정작 벵거는 FIFA 이사회 멤버로 뽑혀 피파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21년 10월 14일 디디에 드록바 재단과 유니세프에서 주관하는 프랑스 레전드들의 자선 경기에 통합 감독직을 맡게 되었다. 또 2022년 1월에 열릴 리야드 시즌 컵에 참가하는 알 힐랄 & 알 나스르 통합 올스타팀을 지휘하여 PSG를 상대했다. 2024년 2월 23일 아마드 빈 알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자선 축구 경기 'Match For Hope'에서는 TEAM CHUNKZ의[11] 감독으로 TEAM ABOFLAH의[12] 안토니오 콘테 감독과 함께 참가했다.
4. 평가
아스날이라는 팀을 상징하는 구단 역대 최고의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단순한 하나의 팀의 감독을 넘어 롱볼축구가 주류를 이루던 프리미어 리그에 당당히 입성해서 패싱 플레이 등 축구 판도를 완전히 바꿨고, 훈련 시스템이나 선수 체크[13] 등의 여러 방면에서 현대 축구계에 큰 영향을 끼친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다.우선 벵거가 아스날에 처음 와서 바꾼 것은 식단이었는데, 선수들의 음주를 금지하고 육식과 채식의 비율을 맞춘 식이요법을 적용하면서 그 결과 후반전만 되면 딸피가 되어버리던 아스날 선수들은 체력이 크게 좋아졌다.[14] 이건 그저 한 예시에 불과하고 벵거를 다룬 칼럼을 찾아보면 대단한 점을 많이 찾을 수 있다. 후에 이런 방식이 널리 전파되고 지금은 아주 당연한 것이지만 당시에는 정말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심지어 알렉스 퍼거슨도 국대에서 만난 아스날 선수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선수들에게 알려주고, 그 선수들이 퍼거슨에게 다시 알려줘서 퍼거슨도 식이요법을 도입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벵거 하면 아스날밖에 생각하지 않는데, 벵거는 AS 모냐코에 대한 기여도 상당하다. 모나코가 명문으로 상당히 인정받았던 시절이 바로 벵거가 이끌었던 시절이다. 밑에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리그 1 우승 1회, 쿠프 드 프랑스 우승 1회에 UEFA 컵위너스컵 준우승, 리그 1 준우승이 3번인데, 한 마디로 모나코 부임 내내 팀을 우승권 언저리에 올려놓은 셈이다.
벵거가 부임하기 직전이었던 1994-95 시즌의 아스날은 리그 12위였다. 이후 벵거가 부임한 1996-97 시즌부터 아스날은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축구 스타일이 지루하다고 지적된 아스날을 부임하자마자 단숨에 바꾼 내공은 무시할 수 없다. 벵거가 부임하기 전 아스날은 프리미어 리그 우승 10회, FA컵 우승 6회라는 성적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이야 명문 취급받지만 당시 트로피 숫자로 보면 넘사벽의 맨유나 리버풀 FC보다는 오히려 에버튼이나 아스톤 빌라와 가까운 클럽이었다. 벵거가 부임하기 두 시즌 전인 1994-95 시즌을 기준으로 보면 에버튼은 리그 우승 9회, FA컵 우승 5회였고, 아스톤 빌라는 리그 우승 7회, FA컵 우승 6회에다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1회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후 에버튼과 아스톤 빌라가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후 부진한 사이 벵거의 아스날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05년까지 리그 우승 3회와 FA컵 우승 4회를 했고[15] 낡은 구장인 아스날 스타디움을 벗어나 새로운 구장인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이사까지 했다.
그리고 1998-99 시즌부터 19시즌 연속으로 챔피언스 리그 본선에 참여했고 2000-01 시즌부터는 17시즌 연속으로 16강에 진출했다.[16] 이런 기록을 가지고 있는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17]나 맨유 정도이다.[18] 가장 꾸준한 것이 가장 쉬워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어려운 법이다.[19]
위에도 써있듯이 세계 최고의 구단인 레알 마드리드는 벵거에게 항상 감독직 제의를 보냈고, 바이에른 뮌헨 역시 벵거가 모나코 감독이었던 시절부터 꾸준히 러브콜을 보냈다. 하지만 벵거는 모나코 감독을 사임하고 바이에른과 J리그 중 J리그를 택했다. 잠시 머리를 식히러 갔던 J리그에서도 1년 만에 트로피를 들어올리고, 팀을 우승권에 바로 안착시키는 등 트로피를 드는 능력도 무시할 수 없다.[20]
무엇보다 벵거의 가장 뛰어난 점이자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점은 바로 구단의 재정 관리 부분인데, 아스날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지은 후폭풍으로 돈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은 땅값이 엄청난 런던의 한복판에 지은 데다가 모든 시스템이 전부 최신이기 때문에 돈은 그것대로 더 들어갔다. 결국 어마어마한 부채를 떠안고[21][22] 경기장을 빨리 짓기 위해 나이키, 에미레이트 항공 등과의 스폰서 계약을 사실상 헐값에 가까운 돈으로 일시불로 받아서[23] 재정적으로 허덕인 탓에 이적료만 쳐주면 에이스든 주장이든 내다 팔아 빚을 갚고 챔스 진출 덕에 확보한 쌈짓돈으로 저렴한 유망주나 사와야 하는 스몰팀이나 다를 바 없이 운영하는 팀을 꾸준히 챔피언스 리그로 이끈 것은 전적으로 벵거의 힘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에 재임 시절 벵거는 아스날 그 자체였다. 단순히 스쿼드 구성뿐만이 아니라 영입이나 행정 등 모든 것을 혼자 담당한 감독이었고, 아스날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둥지를 옮기며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상황을 사실상 벵거 혼자만의 힘으로 버텨냈다. 아스날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지을 돈을 은행에서 대출받았을 때 그 은행이 내건 조건 중 하나가 벵거의 5년 재계약이었을 정도. 구단주의 지원도 없이 클럽이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 있는 상황에서 수많은 클럽을 거절하고 아스날을 지킨 것은 개인으로는 큰 커리어적 희생이었지만, 팀으로서는 기반이 닦여지는 중요한 순간이었다. 벵거가 언제나 자신보다 아스날을 우선시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거기에 프리미어 리그의 스카우터 제도 또한 벵거가 새로운 파도를 일으켰을 뿐더러[24] 선수를 보는 눈 또한 대단하다. 2000~2006년 무렵을 보면 콜로 투레, 티에리 앙리, 알렉스 송, 세스크 파브레가스, 엠마누엘 아데바요르, 로빈 반 페르시, 가엘 클리시, 니콜라 아넬카, 바카리 사냐, 에보우에, 알렉산드르 흘렙과 같은 선수들을 영입해 매우 잘 활용했다. 마티유 플라미니, 윌리엄 갈라스, 애슐리 콜, 로베르 피레스도 장사에는 실패했지만 쏠쏠하게 잘 부려먹었다. 2000년 후반~2010년대 초반에도 영입을 못하지는 않았는데 부상 + 얇은 스쿼드의 한계 때문에 말아먹은 경우가 많다. 다만 부임 당시 가장 진보적인 훈련, 진보적인 선수 관리로 일컬어졌던 벵거의 선수 관리 스타일은 2000년대 후반 들어 집중적으로 부상 병동화가 되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벵거의 축구는 흔히 ‘아름다운 축구’라고 불리기도 한다. 전성기 시절 강한 압박과, 빠른 템포, 눈이 즐거워지는 패스워크로 잉글랜드 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프리미어 리그 출범 이래 유일한 무패 우승의 업적이었다.[25] 자세한 내용은 벵거볼 문서 참고.
물론 22년 동안 벵거가 아스날에서 획득한 트로피 개수는 다른 강팀의 감독들에 비해 비교적 적을 수도 있다. 하지만 벵거의 선진적인 전술과 체계적인 훈련 방식으로 좁게는 아스날에게, 넓게는 잉글랜드의 축구판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 감독이고 이 부분은 단순히 트로피의 횟수로는 정의내릴 수 없는 족적임이 분명하다.
4.1. 비판
다음 중 단 한 번도 빅 이어를 들지 못한 감독은?[26][27][28] |
벵거의 대표적인 비판점을 꼽으라 하면 바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실패를 꼽을 수 있다. 위 사진 속 인물들은 벵거 빼고 모두 챔스에서 한 번 이상 우승을 한 감독들이다.[39] 이 중 리피와 델보스케는 FIFA 월드컵도 우승했으며, 거기에 델 보스케는 UEFA 유로도 우승하였다. 퍼거슨, 무리뉴, 과르디올라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인테르, 맨체스터 시티에서 트레블까지 달성해 클럽 감독 커리어의 정점을 찍은 감독들이다.[40] 또한 퍼거슨은 UEFA 컵위너스컵도 애버딘 시절과 맨유 시절 각각 1회씩 우승하였고, 무리뉴는 UEFA 유로파 리그를 FC 포르투와 맨유에서 각각 1회씩 우승, 과르디올라는 축구 감독 역사상 최초로 트레블 2회 달성에 성공했다. 심지어 디 마테오는 우승한 2011-12 시즌에 첼시에 감독직으로 시즌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시즌 도중에 부임한 감독대행 신분인데도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을 했다.[41]
베니테스는 리버풀에서 밀란을 상대로 전반에만 3골을 먹혔음에도 후반전에 내리 3골을 넣는 기적을 연출해 우승을 했고, 발렌시아에서도 UEFA컵 우승을 하였다. 지단은 감독 부임 첫 해부터 우승을 했고 그 이후 챔피언스 리그 개편 이후 최초의 3연패를 달성했다. 안첼로티는 설명이 필요 없는 챔피언스 리그의 제왕으로, AC 밀란에서의 2회,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3회 우승을 더해 감독으로서 총 5번의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42] 반면 벵거는 2005-06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첫 우승할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바르셀로나를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43] 그리고 그 전에도 1999-00 시즌 UEFA컵 결승전에서 첫 우승할 기회가 있었지만 끝내 갈라타사라이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고 말았다.
과거 벵거를 두고 많은 팬들이 쏟아낸 대표적인 불만은 왜 이리 돈을 안 쓰고 유망주에 집착하냐는 점이었다. 성적을 내기 위해서는 스타 플레이어가 필요함에도 계속해서 어리고 이름이 안 알려진 선수들의 영입만 싼 값에 많이 이뤄졌었기 때문. 그러나 이런 목소리는 벵거에게는 상당히 부당한 비판인데, 위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아스날은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부채를 떠안아야 했고 이는 벵거에게 고스란히 적은 이적 자금 지원으로 돌아왔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벵거는 저렴하면서도 가능성이 풍부한 유망주들에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나중에 부임한 스탄 크뢴케 회장마저 아스날을 방송 수익료나 비싼 티켓값으로 돈을 벌 수 있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밖에 보지 않아 이적 시장 자금 지원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이런 와중에도 벵거는 우승 경쟁까지는 하지 못해도 꾸준히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에 들며 수익과 성적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냈었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 벵거는 단 한 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스스로 모든 비판의 화살을 감당했으니, 사실 그 누구보다도 외롭고 답답했을 사람은 바로 벵거 본인이었다.[44][45]
다만 결국 팬들은 늘 트로피에 목이 말라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트로피를 따지 못한다면 제일 먼저 비판에 오르는 사람은 바로 감독이다. 벵거는 2003-04 시즌 이후 리그 우승을 차지한 적이 없으며, 챔피언스 리그에서 2009-10 시즌 당시에 바르셀로나와의 캄 노우 원정 8강 경기에서 리오넬 메시에게 4골을 먹히는 굴욕적인 결과를 보여준 이후로는 늘 귀신같이 16강에서 탈락해 버렸다. 그나마 FA컵은 몇 번 우승하기는 했으나 팬들은 메이저 트로피를 원했다. 2013년에는 메수트 외질을, 2014년에는 알렉시스 산체스를, 2015년에는 페트르 체흐 같은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했음에도 매년 리그 우승권 경쟁에서 늘 중간에 탈락했고 챔스에서의 성적도 발전이 안 보였으며, 특히 2014-15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 상대로는 AS 모나코가 뽑히자 많은 아스날 팬들은 희망에 차있었으나 허무하게 패배하고 광탈당했다.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점점 벵거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렇게 아스날 팬덤에서는 점점 빠와 까의 대립이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이때는 자금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쓸어담으며 성적을 내는 팀들이 많이 나타남에 따라 벵거의 어려움도 제법 참작되는 분위기였다.
벵거에 대한 비판이 정말 본격적으로 심화되기 시작한 시즌은 바로 2015-16 시즌이었다. 2015-16 시즌은 아스날이 간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하기 절호의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전 시즌 챔피언 첼시는 온갖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지며 유례 없는 추락을 맛봤고, 맨시티는 이도저도 아닌 수준이었던 데다가 맨유도 루이 판할 체제에서 크게 고전 중이었으며, 리버풀은 시즌 도중에야 위르겐 클롭이 새 감독으로 부임해 모든 걸 리셋하는 단계였다. 그야말로 대부분의 강팀들이 전부 고꾸라졌던 시기였고, 여기에 아스날은 전반기 1위를 기록하며 그 기대감은 점점 커져갔다.
하지만 결국 2015-16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레스터 시티가 차지했고, 아스날은 2위에 머무르며 이는 허사가 되었다. 이게 왜 벵거에 대한 큰 비판점으로 작용했냐면 당시 레스터는 아스날보다도 돈이 없고 스쿼드도 떨어지는 팀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발전이 없는 성적에 대한 비판은 여태껏 자금 문제로 정당화가 되었는데, 레스터가 뜬금없이 리그 우승을 해버리자 돈 문제는 더 이상 변명거리가 될 수 없었다.[46] 그리고 아스날이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전에서 3:3 무승부를 거둔 후 리그 우승이 사실상 좌절되자 벵거를 대차게 까는 칼럼이 올라왔다. 아스날이 무너진 10분, 10년의 실패를 보여주다 이렇게 빠와 까의 균형이 무너진 채로 벵거와 아스날은 2016-17 시즌을 맞았는데,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에는 [ WENGER OUT ] 이라는 문구[47]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고[48] 관중석에서도 벵거의 사임을 요구하는 팻말들이 많아졌다. 결국 최종 리그 성적도 5위를 거두며 끝내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실패했고 챔스 16강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총합 스코어 10:2로 깨져버렸다. 보드진 측의 요청으로 1년 더 남아 소화한 2017-18 시즌에는 리그를 6위로 마무리했다.
벵거는 원래 전술적으로 큰 틀만 자신이 짜주고 세세한 디테일은 선수들의 자율성에 맡기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그러나 스쿼드가 점점 빈약해지면서 이것은 곧 에이스 한두 명의 개인 기량에만 의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결국 로빈 반 페르시, 산체스 같은 선수들이 팀을 캐리해야 하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여기에 화려한 패스워크와 테크닉을 위주로 일명 아름다운 축구를 추구하는 벵거의 아스날은 역사적으로 항상 밀집 수비와 피지컬이 좋은 팀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고, 실제로 샘 알라다이스 시절의 볼턴 원더러스와 토니 퓰리스 시절의 스토크 시티 FC가 이를 활용해 압도적인 전력차에 비해 아스날에게 제법 선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진정한 벵거의 천적인 무리뉴는 아스날만 만나면 문자 그대로 박살을 내버렸다. 이 둘이 부딪치기 시작한 지 10년이 넘도록 한 번도 못 이기다가 2015-16 시즌 FA 커뮤니티 실드에서 첫 승을 거두며 무승 행진은 끊어낼 수 있었다.
벵거가 말년에 받은 주요 비판은 바로 전술적 유연함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감독마다 스타일이 다르겠지만 경기의 흐름을 읽고 필요할 때 선수를 교체한다거나 전술에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벵거는 이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벵거가 즐겨 쓰는 포메이션은 전성기 시절부터 이용했던 4-2-3-1로, 본래 카운터에 최적화된 전술이기 때문에 선수단의 대다수가 빠른 주력을 무기로 움직여야 한다. 하지만 벵거볼 문서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자금 부족으로 인한 스쿼드 악화는 전술의 변화를 가져왔고, 벵거의 아스날은 과거의 빠른 카운터가 아니라 점유율 위주의 축구로 변모했다.[49] 이렇다 보니 아스날의 스쿼드에는 그라니트 자카처럼 느린, 즉 애초에 4-2-3-1 시스템과는 맞지 않는 선수가 배치되었는데 벵거는 자카의 장점을 잘 활용하지도 못하고 기동력 등의 단점만 확연히 노출시켰다.
또한 벵거는 엑토르 베예린에게 과감한 오버래핑을 주문하여 베예린의 플레이 스타일이 파악되기 전에는 많은 팀들이 베예린의 오버래핑을 막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줬지만, 이후 파훼법이 나오면서 아스날은 수비 뒷공간을 그대로 노출하기 시작했고 이에 속수무책으로 공략당하며 곧 처참한 성적으로 돌아왔다.[50] 여기에 벵거는 계속해서 패배 후 인터뷰에서 운이 없었다, 심판의 판정이 문제였다, 경기력은 좋았으나 결정력이 문제였다는 말을 무한 반복하여 비판을 받았다.
결국 2016-17 시즌 말에 너무나도 성적이 처참해지자 당시 안토니오 콘테의 첼시를 시작으로 세계 전역에 한창 열풍이던 3백을 도입했다. 비록 경기력 부분에서는 여전히 문제가 좀 있었고 공격도 산체스에게 많은 부분을 의존해야 했으나, 그래도 수비 시 5백이 가능한 포메이션이기 때문에 수비력은 제법 발전되며 성적도 개선된 모습을 보였고 팬들도 벵거의 시도 자체에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2017-18 시즌에도 3백을 이어갔지만 결국에는 부진을 맛보며 4백으로 회귀해야 했는데, 3-4-3 포메이션의 핵심 윙백이던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의 이적과 공격을 캐리하던 산체스의 동기부여 하락으로 인한 경기력 저하가 매우 크게 작용한 것이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로 무턱대고 3백을 이어간 선택이 화근이 된 것.
벵거는 학자풍의 지적인 스타일로, 선수단을 카리스마로 휘어잡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명 아버지 리더십으로 선수들을 따뜻하게 지도하며 포용력이 강한 덕장의 리더십을 가지고 있다. 선수들과 좋은 일이던, 나쁜 일이던 간에 대화를 많이 하고 섬세하게 컨디션을 파악하며 적극적인 신뢰를 보여주는 스타일이다. 벵거의 수하에 있었던 선수들 모두 벵거를 평할 때 친아버지 같은 분이라고 평한다.[51] 그러나 팀이 수렁에 빠졌을 때 퍼거슨처럼 호통을 치건, 과르디올라나 클롭처럼 특유의 화법으로 선수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건 선수들이 정신적으로 재무장하게 만드는 모습이 드물다는 비판도 많다. 말년의 벵거는 경기가 말릴 때 전술적으로 유연하게 변화를 가져오면서 승리로 이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특유의 아버지 리더십도 멘탈이 나간 선수들의 정신력을 돌려놓지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아무것도 못하며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팀이 밀리는데도 경기를 던진 것마냥 아무런 대응도 없이 벤치에서 가만히 있던 벵거는 팬들에게 매우 크게 비판을 받았다.
또한 선수단 관리에도 상당히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어 오다가 2014-15 시즌부터는 더욱 비판받게 되었다. 주로 적절한 체력 관리 없이 특정 선수를 혹사시켜 시즌 후반으로 갈수록 선수가 방전되어 덩달아 팀 성적도 하락한다는 비판을 받았고, 관리가 필요한 선수를 로테이션 없이 계속 돌리는 점 때문에 선수 생명이 우려되는 선수도 나왔을 정도였다. 이에 새 트레이닝 코치를 선임하고 벵거 스스로도 문제점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달라진 건 없었다.[52]
결국 잉글랜드에 새로운 훈련과 스카우팅 시스템, 식단 조절 등 신선한 바람을 가져오며 한때 혁명가라고 불렸던 벵거는 아이러니하게도 역으로 시대에 따라잡힌 셈이 되었다. 벵거의 새로운 시스템들은 어느덧 다른 팀들도 전부 사용하며 더 이상 벵거만의 특별함이 아니게 되었고, 2000년대 초반까지는 잉글랜드 프로 축구의 전술에 새로운 트렌드를 도입하고 좋은 성적을 달성했지만 200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현대 축구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며 낙오되었다. 즉 전체적으로 벵거를 비판하는 이들의 대부분은 벵거의 영광의 10년 역사 이후를 비판하는 경향이 큰 것이다. 쉽게 말해 말년의 벵거는 지장으로서의 모습이 실종됐었고, 이는 팬들에게 충분히 비판을 들을 만했다.
한편으론 이런 비판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는, 심지어 분개하는 아스날 팬들도 많다. 왜냐하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이후의 벵거볼의 퇴보와 아스날의 성적 추락의 가장 큰 원인은 더 이상 아스날이 경쟁 클럽만큼 돈을 쓸 수 없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 비록 말년에 외질, 산체스,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등의 빅네임과 슈코드란 무스타피, 자카 등의 영입에 상당한 이적료를 쓸 수 있긴 하였지만 그 이후 미켈 아르테타가 써온 비용, 맨시티, 첼시, 맨유 같은 다른 클럽들이 리빌딩을 할 때 쓴 천문학적인 비용을 생각해 본다면 말년에 벵거의 빅네임 영입은 그야말로 기아 상태의 환자에게 고기죽 3번을 먹였다고 배부를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시기 벵거에게 주어진 재정적 지원은 그야말로 리그 최하위권 수준이었다.# 이걸 간과하고 단순히 벵거의 역량이 부족하였고, 벵거는 비판을 들을 만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너무나 단편적인 시각인 것이고 심지어 분개하기까지 하는 팬들이 있는 이유는 벵거는 사실 자신의 명예와 커리어를 위해 보다 합리적인 선택을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도 아스날을 위해 헌신하길 자청하였기 때문이다. 너무나 명백하게도 아스날의 재정 악화는 벵거의 잘못이 아니다.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현재도 아스날리쉬를 비롯한 팬 커뮤니티의 상당수는 벵거를 '아버지'라고 칭한다.
5. 어록
벵거의 어록 |
슈퍼스타를 사 오지 않고 키운다.
평가 수치가 높은 선수는 결국 대성했다.
감독은 항상 혁신가여야 한다.
선수의 능력 향상은 경기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설령 정답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해답을 찾아낼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아스날에서 일하는 600명의 고용인을 책임져야 하기 때문에 영입은 신중해야 한다.
앙리, 팬들 야유 제대로 들은거야?
사람들의 판단, 의견, 지난 결과에 따른 실망감은 내 알바가 아니다. 내가 신경 쓸 부분도 아니다
우리는 우승하는데 있어 아무런 문제 없다
유망주의 육성이 어려운 것은 "이 선수에게 출전 찬스를 주자"라는 각오와, 매주마다 정예 멤버를 보고싶어하는 전문가나 서포터를 적으로 돌리고서 "그딴 것보다도 너를 믿기로 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강인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가 인생을 살면서 몸에 익힌 윤리관은 축구를 통해 배운 것이다. 클럽으로서 우리는 교육적인 의무를 지고 있다. 아스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시합이나 행동을 통해 윤리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한다.
"경기력이 나쁠 때의 유일한 해결책은 전력보강이다"라는 풍조를 나는 무엇보다도 증오한다. 해결책은 팀이 단결하고 비판에 응수하며 자신들에게는 충분한 실력이 있다고 증명하는 것이다.
결과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결과는 모든 것이다.
선수의 잠재능력을 꿰뚫어보는 방법이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언제나 상대의 장점을 발견해나가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에게는 무엇인가가 있다. 무언가 좋은 것을 갖고 있다. 라며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90분만으로도 '인생은 멋지다'라고 느끼며 귀가할 수가 있다. 이 사실에 나는 긍지를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프로 축구의 존재의의이다.
축구에는 전세계에 대한 책임이 있다. 프리미어 리그의 빅매치는 전세계의 5~7억명, 가끔은 10억명이 보기도 한다. 인도나 남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집에 앉아서 루니나 파브레가스를 바라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들과 같은 선수의 영향력은 대단히 거대하다.
이 일을 하면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것은 자기자신을 바꿀 수 있는 인간이다. 왜냐하면 자기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가장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걸 할 수 있는 인간이야말로 가장 성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인간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 일을 하고나서 곧바로 자신의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 방법을 익혔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경험이 이 능력을 완벽하게 만들었다. 그 나라의 사람들은 예를 들어 아침에 아내가 죽더라도 직장에 출근하고 심지어 그 사실을 주변에 알리지 않는다. 개인적인 문제로 주변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전쟁이 끝난 직후에 태어나 독일을 미워하도록 교육받으며 자라왔지만, 이윽고 의문을 느끼게 되었다. 국경을 넘어보니 독일 사람들은 우리들과 무엇하나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을 미워하는 것은 정말로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아스날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께서 팀의 가치를 소중히 지켜주길 바란다. 나의 사랑 아스날, 평생 응원하겠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이죠. '오, 오늘 아스날 봐야지, 오늘도 재미있겠네' 그게 기본적으로 제가 하려 했던 일입니다. 사람들에게 일상에서는 없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 매일의 일상이 다 기쁨은 아니죠. 축구는 사람들의 인생에 특별한 순간을 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항상 그렇게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희망은 줘야 합니다. 뭔가 특별한 것을 볼 수 있겠다는 희망. 그리고 매일 경험할 수 없는 뭔가를 경험하는 일.[54]
세상을 떠난 후 신을 만나면 그가 어떤 말을 먼저 할지 생각해보곤 한다. 그는 아마도 사는 동안 무얼 했냐고 물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축구 경기에서 이기려고 노력했습니다!’ 라고 답할 것이다. ‘그게 전부라고?’ 실망한 그가 반문하면, 나는 그에게 경기에서 이기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며, 축구라는 스포츠가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하고 기뻐하며 때로는 슬퍼하는 아주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고 설명해 줄 것이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 RC 스트라스부르 알자스 (1978~1981)
- 디비지옹 1: 1978-79
6.1.2. 출전 기록
연도 | 클럽 | 출장수 | (골) |
1973–1975 | Mulhouse | 56 | (4) |
1975–1978 | ASPV Strasbourg | 80 | (20) |
1978–1981 | RC Strasbourg | 11 | (0) |
8시즌 | 통산 | 147 | (24) |
6.2. 감독
6.2.1. 대회 기록
- 아스날 FC (1996~2018)
- 프리미어 리그: 1997-98, 2001-02, 2003-04
- FA컵: 1997-98, 2001-02, 2002-03, 2004-05, 2013-14, 2014-15, 2016-17
- FA 커뮤니티 실드: 1998, 1999, 2002, 2004, 2014, 2015, 2017
6.2.2. 개인 수상
- 프랑스 올해의 감독: 1988, 2008
- J리그 올해의 감독: 1995
-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감독: 1997-98, 2001-02, 2003-04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감독: 1998년 3월 · 4월, 2000년 10월, 2002년 4월 · 9월, 2003년 10월, 2004년 2월 · 8월, 2007년 9월 · 12월, 2011년 2월, 2012년 2월, 2013년 9월
- 프리미어 리그 명예의 전당: 2023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8
- 옹즈도르 올해의 감독: 2000, 2002, 2003, 2004
- 런던 풋볼 어워즈 런던 클럽에 대한 뛰어난 공헌[56]: 2015
- LMA[57] 올해의 감독: 2001-02, 2003-04
- BBC 올해의 스포츠 인물 감독상: 2002, 2004
- 페이스북 FA 프리미어 리그 올해의 감독: 2014-15
- FWA 공로상: 2005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6
- IFFHS 10년의 감독 (2001–2010)
- 라우레우스 평생 공로상: 2019
6.3. 수훈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2002
- 대영제국 훈장 4등급 (OBE)[58]: 2003
- 이슬링턴의 자유[59]: 2004
- 라이베이라 공화국 공로장[60]: 2018
7. 여담
- 주제 무리뉴가 팀의 승리를 최우선으로 선택하는 실용주의자라면, 벵거는 결과가 다소 좋지 않더라도 자신의 철학을 중시하는 로맨티시스트에 가깝다. 테크닉 축구와 패싱게임의 열렬한 신봉자로 문서 시작의 부분의 말을 봐도 아름다운 축구에 대한 진실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다만 이건 축구장 내에서의 일이고, 축구장 안팎의 일을 통틀어서 본다면 벵거는 합리적인 실용주의자이다. 벵거 자신의 이상주의적 성향 때문에 승리를 놓쳐버린 적이 많다. 이는 승리를 위해서라면 과감히 전술을 바꾸는 알렉스 퍼거슨과 대조되어서 지도력에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구단의 부채 문제, 매년 끊이지 않는 선수들의 부상과 이적 탓도 있다. 그래도 어떻게든 4위 안에 턱걸이는 했다. 2011-12 시즌에 기둥 2개를 팔아먹으며 드디어 나락으로 떨어지나 했지만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주며 3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 벵거의 고향인 스트라스부르는 유럽의 경계도시라는 별명답게 프랑스 치고는 이질적인 문화가 많은데, 아이리쉬 펍도 그 중 하나다. 어린 시절 벵거는 이 펍에서 놀며 깽판을 치는 아저씨들을 보고 자라났다고 했다. 그때부터 술을 극도로 멀리했으며, 그것의 영항을 받아 아스날의 신년파티는 차나 음료수, 초밥으로 조촐하게 치른다고 한다. 그때 어른들이 주고받았던 축구 이야기가 지금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 5개 국어[61]를 구사했으나 지금은 3개 국어로 줄어든 듯 하며, # 2004년 10월 이즐링턴의 자유상을 수상했고 두 개의 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스트라스부르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위를 받았고 하트퍼드셔 대학에서 사회학 학위를 받았다. 또한 프리미어 리그 역사상 최초로 성공한 외국인 감독이다.
- 상당한 지일파다. 일본어도 어느 정도 하는 편이며,[62] 일본 J리그의 나고야 그램퍼스 감독으로 재직하던 시절에 일본 문화가 꽤 인상적으로 느껴졌던 모양이다. 대체적으로 일본인들의 근면성실함과 육류를 적게 먹는 식생활을 높이 평가한다.[63] 아스날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에도 일본 관련 발언을 자주 하며, 최근에도 감독 생활의 마무리를 찍는다면 일본에서 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64] 다만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을 가능성은 적은 편. 대표팀 감독은 마조히스트가 아닌 한 수행이 불가능한 직책이라고 말했다.
- 191cm의 장신이다.[65]이와 관련된 우스갯소리로 페어 메르테사커를 영입할 당시 드디어 벵거가 자신보다 큰 선수를 영입했다는 드립이 나돌기도 했다. 다른 팀 감독들을 능가하는 이기적인 기럭지로 여성팬이 좀 있는 듯하다. 이른바 미노년 간지.[66] 자기관리도 열심히 하는지 70대 노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군살 없는 탄탄한 근육 체형을 가지고 있다.
하늘색(또는 흰색)셔츠에 빨간색 넥타이가 트레이드 마크. |
- 재킷의 주머니에 손을 못 넣는 모습이 잡힌 적도 있는데 주머니 지퍼를 실수로 안 연 것이 원인이었다.
- 이번에는 지퍼가 고장나서 한참 동안 지퍼를 붙잡고 씨름하는 바람에 또 팬들을 빵 터지게 했다. 워낙 빈번하게 나오던 장면이라 훗날 새 유니폼 파트너쉽을 체결했던 푸마에서 벵거를 위해 지퍼가 잘 잠기는 롱패딩을 만들겠다고 공표했을 정도. 이렇게 유독 점퍼를 가지고 애를 먹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 탓에 팬미팅 중에 팬으로부터 언제쯤에야 좋은 점퍼를 입을 수 있는 것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다. 결국 2014-15 시즌부터 아스날의 공식 킷 스폰서가 된 푸마의 롱 자켓 광고를 찍었다. 푸마 자켓은 지퍼가 잘 올라가서 걱정없다는 내용이고, 마지막에 귀요미 표정을 지으며 "I think so too" 라고 말하는 것이 압권. SNL에서 패러디한 내용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약을 빤 광고라 화제가 되었다. 근엄한 교수님 이미지에서 코믹한 이미지로의 변신을 노리는 듯 하다.
- 2013년 5월 4일에는 이런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잡히며 감독계의 짤방 제조기로의 등극을 노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줬다.
- 2010년 10월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에 이어 프리미어 리그에서 두 번째로 오랫동안 감독을 하고 있다. 두 팀이 라이벌이기도 하고, 2000~04년 정도까지만 해도 서로 죽어라 깠는데 요새는 아스날이 우승 경쟁에서 한 걸음 비껴있는 모습을 보이면서 퍼거슨도 그렇고 벵거도 그렇고 서로 다투지는 않는 듯 하다.[67] 그리고 퍼거슨이 2012-13 시즌을 마치고 은퇴하면서 가장 오래된 장수 감독이 되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아스날을 외치다 |
- 2009년 8월 29일 올드 트래포드에서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아스날의 경기에서 로빈 반 페르시의 골이 오프사이드 판정을 받자 격분해서 화풀이로 바닥에 있던 물병을 걷어찼는데, 이를 본 4심이 벵거에게 항의를 했지만 화가 난 벵거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무시했다. 그러자 주심은 벵거에게 경기장 퇴장 명령을 내렸는데[68], 사실 감독 퇴장은 무리한 판정이었고 이게 추가시간도 거의 다 끝났을 때라서 벵거는 그럼 자신은 어디 가 있으라는 말이냐고 항변했던 일화가 있다. 결국 벵거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테크니컬 에어리어 바로 뒤의 관중석으로 올라가 서는 퍼포먼스를 보였다. 벵거의 이런 당당한 모습에 대기심도 제재를 못했고, 맨유 팬들마저도 박수를 치면서 응대했다. 경기는 벵거의 퇴장 후 채 1분이 되지 않아 끝났고, 이후 영국 축구심판협회는 이 퇴장에 대해 벵거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 상대 전적에서는 하이버리 시절만 해도 알렉스 퍼거슨에게 근소하게 우세했으나 역전당한 지 한참되었다. 총 전적은 16승 10무 23패. 많이 밀리지만 퍼거슨이 8패 이상 해 본 유일한 감독이다.[69]
- UEFA 챔피언스 리그나 UEFA 유로파 리그 같은 국제 대회에서는 그다지 인연이 없다. 2006 시즌 챔피언스 리그와 2000 시즌 유로파 리그에서 준우승한 것이 전부. AS 모나코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도 챔스 4강과 컵위너스 컵 준우승이 국제 대회에서 거둔 최고의 성적이다. 유럽 대항전 징크스로 많은 욕을 얻어먹지만 전전임 감독이었던 조지 그래엄의 지루하며 전형적인 영국 구단 아스날을 이 정도로 변모시킨 건 전적으로 벵거의 공이다.[70] 사실 아스날 자체가 벵거 이전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한 경력이 없다. 다만 조지 그래엄 시절 지금은 유로파에 통폐합된 컵위너스컵에서 우승한 적은 있다.
- 어린 선수들을 주로 기용하는 탓에 로리콘 벵거라고 불리기도 한다.[71] 하지만 정작 본인은 24세가 돼서야 프로 리그에 데뷔했다. 이 유망주 정책은 구단의 여유롭지 못한 재정상황 때문이기도 하였다. 벵거 자신도 경제학 학위를 가진 관계로 그런 재정적인 부분을 상당히 신경쓴다. 사실 20대 중, 후반의 저평가되었거나 가치가 하락한 선수들을 영입하여 갱생시키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짓기 전에는 재활 공장장이란 별명이 가장 유명했다. 최근 사례 중에는 2008-09 윈터브레이크 때 적절히 안드레이 아르샤빈을 영입을 한 것도 있고, 2009-10시즌때 비교적 노장인 토마스 베르마엘렌을 데려온 것, 또 2012-13시즌에 루카스 포돌스키와 산티 카솔라 등을 영입한 것이 벵거 본연의 스타일이라고 볼 수 있다.
- 선수에 대해 경영학적 시각을 철저히 견지하는데,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는 앞으로 기량이 상승할 확률이 높으므로 그에 대한 금전적 가치가 많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20대 후반의 완성된 선수를 데려온 경우가 별로 없으며, 그나마 이적료 지출을 극도로 꺼린다.
- 프랑스 출신 선수들을 애용하고 정작 잉글랜드 출신 선수는 애용하지 않아서 한때 아스날은 프랑스 리그 소속팀으로 불린 적이 있는데, 아스날을 테크니컬한 축구를 하는 팀으로 만들려고 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 축구 스타일이 섬세함 축구보다 빠르고 거친 축구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예 유스들을 키우는 전략을 선택했다.
- 지금은 프랑스 출신 선수들의 비율은 줄어들었지만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의 비율은 별로 늘어나지 않아서 FIFA나 UEFA에서 은근슬쩍 까고 있다.[72]그러나 최근에는 잉글랜드 선수들로 팀의 중추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며 자국 유망주들을 많이 기용하고 있다.[73]
- 2009-10 시즌 중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할 것이라는 루머[74][75] 가 파다했다. 벵거도 연이은 무관에 대한 비판에 시달리고 있었고, 레알 마드리드 역시 전통의 라이벌 바르셀로나에 밀려 개혁이 필요한 시점이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벵거는 이렇게 말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어렸을 적에 내가 동경하던 클럽이지만 내게 있어 소중한 것은 자유다. 레알 마드리드는 사온 선수들이 아니라 어린 선수들을 통해 성공을 이뤄야 한다. 사람들은 내가 아름다운 축구에 대해 집착한다고 말하지만, 나는 단지 (현재의)어린 선수들이 계속 성장하고 같이 뛰면서 그들의 게임, 그들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을 사랑할 뿐이다. 맨 처음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을 짓기로 했을때 나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클럽 재정을 건전하게 유지하면서 최고의 레벨에 계속 오르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어린 선수들로 이뤄진 팀을 만들어서 한 걸음 한 걸음씩 위로 올라가는 것. 우리는 이제 건전한 재정을 유지하면서 아주 어린 선수들로, 재정 건전성을 전혀 고려치 않는 팀들을 상대로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150M씩 적자를 내면서 축구팀을 운영하는 건 내게는 속임수나 다름없을 뿐이다.
사실 이 발언 하나에 그동안 벵거를 향한 비판과 계속된 무관, 로리콘, 똥고집, 매우 짠 돈 씀씀이 등에 대한 모든 대답이 다 들어있다고 봐도 무방하다.[76] 또한 레알 마드리드 외에도 파리 생제르맹 FC, 바이에른 뮌헨,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77], 심지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도 감독직 제의가 수없이 들어왔으나 벵거는 모두 거절하고 아스날에 잔류하는 중인데, 그 이유를 벵거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아스날에 충성하는 이유는 변방에 있던 나에게 감독직을 제의했던 것이 엄청난 도박이었기 때문이다. 아스날이 나를 감독으로 선임한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스날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다."
- 아스날이 득점할 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팔을 흔드는 동작을 하는 게 한결같다.
- 2010-11 시즌 말 볼턴 원더러스를 상대로 후반 말 역전골을 허용하고 패배해서 사실상 우승과 거리가 멀어진 경기에서 경기 초반 어이없는 실점을 할 때 지은 표정이 뭔가 오묘해서 잠시 현지 포럼들의 필수요소로 등극하기도 했다.
- 2011-12 시즌 3라운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원정 경기에서 무려 2:8이라는 대패를 당해 115년 만에 아스날의 8실점을 재현하고 말았다. 이로 인하여 엄청난 비난에 직면한 상황이지만 클래스는 역시 클래스인지라 한때 강등권까지 밀려났던 순위를 올리고 또 올려서 결국 챔피언스 리그 직행 티켓을 확보할 수 있는 3위로 리그 일정을 마무리지었다. 물론 여기에는 로빈 반 페르시의 공이 지대하였지만, 반 페르시의 득점포가 박싱데이 이후로 다소 누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3위로 시즌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던 것은 벵거의 능력이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봐야 한다. 2005년 FA컵 우승 이후 무려 7년간 무관이지만, 강등권으로부터 3위까지 팀을 끌어올린 내공으로 인해 이번 시즌을 일컬어 실패한 시즌이라 부르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 2012-13 시즌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상대로 무기력한 경기 끝에 패배가 확정되어가는 시점에 눈에 눈물이 맺혀있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장시간 포착되며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이날은 홈 경기였는데도 불구하고 1:3이라는 스코어로 완전히 압도당한 경기였다. 뮌헨이 원정에서 3골을 득점함으로써 2차전이 뮌헨의 홈 경기인 점을 감안하면 8강 진출에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클럽인 아스날이 유럽 무대에서 다시 무기력하게 탈락할 수도 있다는 좌절감에 사로잡힌 듯. 애증관계가 된 팬들의 가슴까지 뭉클하게 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기간 동안 |
- 2016년 5월, 스트라스부르에 아르센 벵거의 이름을 딴 경기장이 건설되었다. 600석 규모에 10억 원이 투입되었다. 벵거 본인도 개장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 2016년 10월 13일에는 "어린 선수로 구성된 팀은 우승 어렵다"라는 말을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경험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건 괜찮은데 그간의 행적으로 인해 팬들은 "맞는 말인데 벵거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라는 반응이었다.
-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스위스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중 리비오 벵거(Livio Wenger)가 있다. 혈연적 관계는 없고 성만 같을 뿐이다. 그런데 몇몇 짓궂은 아스날 팬들은 이 선수를 유심히 시켜보다가 1500m에서 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일제히 이 사진과 연관시켜 벵거를 깠다.
- 아스날 감독 시절, 월드컵 등으로 리그가 중단되면 프랑스 방송사에서 축구 해설을 맡았었다. 그래서 남아공 월드컵 때에는 옆자리에서 해설을 하고 있던 차범근에게 따봉을 날렸다던가, 4년 후 브라질 월드컵에서는 독일이 우승하자 마찬가지로 결승전을 중계하던 SBS의 해설위원이자 독일과 인연이 깊은 차범근에게 "축하한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78]
- 2020년 11월 1일에는 자서전을 통해 박주영을 영입한 것은 본인의 의사였으며, 능력과 훈련 시의 태도가 훌륭했음을 인정하면서 박주영이 폭망한 원인은 박주영 스스로의 자신감 부족과 벵거 본인이 충분한 기회를 주지 못해서라고 회고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게 사실이라면 박주영으로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상황. 물론 기회가 주어졌는데도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지 못한 건 박주영의 책임이었다.
- 아스날 감독 시절, 리그 무패 우승을 달성하고 선수단과 함께 버킹엄 궁전에 초대를 받았었다. 벵거는 무패우승에 기여한 공로로 아스날 서포터인 영국 왕실에 의해 대영제국 기사단 장교에 서훈되었다. 축구팬들은 만약에 벵거가 영국인이었다면 알렉스 퍼거슨처럼 기사작위를 받았을 것이라고 얘기한다.
-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일화지만 2018 러시아 월드컵이 끝난 이후에 차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후보 리스트에 있던 것으로 알려졌다. 차기 감독 선임을 위해 대한축구협회에서는 1차적으로 비밀리에 접촉을 시도했지만 실패한것으로 보인다.[79] 다만 다른 감독들을 추천해 준 것으로 보이는데 그가 추천한 감독으로 예상되는 감독은 이탈리아 축구 대표팀 전감독이였던 체사레 프란델리, 전 레스터시티 감독 클라우디오 라니에리 (골닷컴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감독직 제안을 받은걸 인정했다.) 등으로 추측된다.
- 2021년 9월 4일, 아르센 벵거는 FIFA 이사회 멤버로 재직하면서 "FIFA 월드컵의 개최 주기를 4년에서 2년으로 바꾸자"라는 파격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 개혁안은 2019년부터 FIFA 이사회 멤버의 행정가로서 오랜만에 개혁안을 발표한 것이라 전세계의 축구 팬들 사이에서도 찬성과 반대의 토론이 계속 이어졌고 그라운드에서 물러나있는 아르센 벵거가 다시금 전세계 축구 팬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격년제 논의에 대해 아시아 축구 연맹과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축구연맹은 지지했지만, 유럽축구연맹과 남미축구연맹은 결사반대하면서 어렵게 되었다. 각자 유로컵과 코파 아메리카 대륙컵에 큰 어려움이 된다고 분노한 두 대륙 축구연맹은 이에 대한 항의로 2020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 2020) 우승팀 이탈리아와 2021 남미축구선수권대회(코파 아메리카) 우승팀 아르헨티나가 내년 6월 맞대결을 벌여 유럽-남미‘왕중왕전’을 시작으로 양 대륙 챔피언들의 맞대결을 3차례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9월 29일(한국시간) 발표했다. 두 단체는 지속적인 협력 사업을 시행하기 위해 영국 런던에 공동 사무소를 마련하기로도 합의했다. 당연히 피파는 이 대회 수익에서 땡전 한푼 받지못하니 분노하지만, 이걸 또 막을 명분이 없다. 유럽-남미 왕중왕전을 여럿 계속 벌인다는 건 그만큼 월드컵 격년제 결사반대 항의이기에 격년제 논의가 어찌될지 모른다.
심지어, 양 대륙에선 월드컵을 보이콧하고 유럽-남미대륙컵을 4년에 한번씩 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그야말로 월드컵에서 비중이 절대적인 유럽과 남미의 보이콧은 피파에게는 월드컵 흥행을 뭉개는 말인데 과연 어찌될지 모른다.
- 2022 카타르 월드컵에 TSG(기술 연구 그룹)의 위원장으로 참여한다. 이 그룹에는 차두리, 위르겐 클린스만 등이 속해 있다.
- 2024 파리 올림픽 남자 축구 결승전에 참석했다.
[1] /aʁsɛn vɛŋ(ɡ)ɛʁ/. Arsène Wenger를 프랑스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면 '아르센 벵게르'지만 Wenger라는 성씨는 독일계 성씨이기 때문에 국립국어원의 표기 용례에서는 감독의 성에 독일어 표기 규정을 적용시킨 '아르센 벵거'를 표준 표기로 삼고 있다.[2] Eurosport 프로필[3] 존 크로스의 책 "아르센 벵거 - 아스날 인사이드 스토리"에 따르면, 2014년 여름 이적시장, 가장 분주했던 마지막 날에 가톨릭 신자였던 벵거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만나러 로마로 갔다고 한다. 참고로 아스날은 2014년 여름 이적시장 마지막 날 대니 웰벡을 영입했다.[4] 풀 네임은 Arsené Charles Wenger이다.[5] FA컵 역대 최다 우승 감독이다.[6] 다만 AS 모나코 감독 시절에는 담배를 피웠다.[7] 장마르크 기유와의 개인적인 인연은 이후로도 오래 이어지는데, 기유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 코트디부아르의 명문 클럽 ASEC 미모사의 단장, 2000년에는 코트디부아르 대표팀 감독 겸임까지 하게 되면서 코트디부아르와의 커넥션을 만들게 됐고 아스날이 훗날 영입한 콜로 투레, 엠마누엘 에부에, 제르비뉴 등의 코트디부아르 선수들이 기유의 추천으로 영입한 선수들이다. 야야 투레는 영입 직전까지 갔지만 워크퍼밋 발급 지연으로 무산됐다.[8] 게다가 5년 동안 아버지와 아들처럼 지냈다고 한다. 훗날 조지 웨아가 조국인 라이베리아의 대통령까지 된 걸 생각하면 엄청나게 성공한 제자가 아닐 수 없다.[9] 벵거의 증언에 따르면 AS 모나코에서 감독으로 있을 때 바이에른 뮌헨을 비롯한 여러 명문 클럽들의 오퍼도 거절했는데, 경질을 당한 배신감에 가장 먼저 오퍼가 오는 팀의 감독으로 가려고 결심하고 있었고 마침 J리그에서 오퍼가 와서 갈지 말지 고민을 하다가 갔다고 한다. J리그로 가기 전에 이미 벵거는 여러 우승 기록을 가진 유럽에서 주목받는 감독이었다.[10] 물론 바이언의 보드진은 그의 사임을 막고있어서 어떻게 될지는 지켜봐야할 부분[11] 주요 선수는 다비드 비야, 에덴 아자르, 인플루언서 CHUNKZ.[12] 주요 선수는 카카, 클로드 마케렐레, 디디에 드록바, 인플루언서 ABOFLAH.[13] 벵거는 아스날 선수들의 경기력 유지를 위해 음식을 철저히 통제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적인 예시로 아스날에서는 케첩도 금지 식품 중 하나인데, 격렬한 운동을 마친 사람이 단시간에 케첩을 많이 섭취할 경우 일시적으로 혈액이 응고되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연구 결과 때문이다.#[14] 다만 최근에는 이 채식 위주 식이요법 때문에 선수들의 부상이 잦아졌다는 의견도 있다.[15] 2016-17 시즌에 첼시를 꺾고 팀 역사상 13회의 우승을 기록했는데, 이는 FA컵 역사상 최고 기록이다.[16] 2017-18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에 참여하지 못하며 이 기록은 깨졌다. 1998-99 시즌 첫 출전에서는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단 이때는 챔스 본선이 32팀이 아니고 24팀이 6개 조로 나누고 각조 1위 팀 6팀과 2위 팀 중에 승점이 높은 2팀이 8강에 진출하는 식이었다. 두 번째 출전인 1999-00 시즌에는 참가팀이 32팀으로 개편되었는데, 이때는 조별리그에서 3위를 기록하고 UEFA 유로파 리그로 밀려났다. 그리고 결승에서는 갈라타사라이에게 패배하며 준우승했다. 이후 3번째 출전인 2000-01 시즌부터 2016-17 시즌까지 조별리그를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다.[17] 레알은 1997-98 시즌부터 2023-24 시즌까지 27시즌 연속 참가 중이다.[18] 바르셀로나는 2002-03 시즌에 리그 6위, 바이에른 뮌헨은 2006-07 시즌에 리그 4위(당시 분데스리가의 챔스 티켓은 3장이었다.)를 기록하면서 챔스 진출 기록이 중간에 끊어졌다. 맨유도 2013-14 시즌을 끝으로 챔스 무대 연속 진출을 마감했다.[19] 지금이야 부활에 성공했지만 리버풀도 샤비 알론소 등의 주축 선수들이 이적한 후 챔스권 진입도 못했고, 첼시는 챔스 우승으로 다음 시즌 챔스 진출권을 획득한 것이지 당시 리그 성적은 6위로 형편없었다. 맨유도 데이비드 모예스 부임 이후 챔스권 진입에 실패했고, 토트넘 훗스퍼도 한 시즌 챔스 진출 이후 다음 시즌은 리그에서 부진했다. 아스날과 비슷한 행보를 보였던 발렌시아, 위르겐 클롭 부임 이전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챔피언스 리그 진출에 잇달아 실패한 사례, AC 밀란이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같은 명문들도 정점을 찍은 이후 중위권에 머무르는 현재만 봐도 챔스 진출권을 꾸준히 획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챔스 진출은 유럽 명문팀들의 사활이 걸린 문제인데, 진출에 실패할 경우 막대한 중계권과 스폰서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아스날이 에미레이트 스타디움으로 경기장을 옮긴 후 가장 재정이 쪼들리던 2000년대 말에 챔스 진출에 단 한 번이라도 실패했다면 엄청난 나락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20] 나고야 그램퍼스는 당시 결코 강팀이 아니었고 리그에서는 부진했다.[21] 풋볼매니저에서 빚이 많은 구단을 해본 사람이라면 더 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짧게는 몇 년에서 길게는 10년 가까이 매달 수억~수십억씩 채무 상환으로 빠져나가는 게 상당한 부담이 된다. 이 때문에 처음에 구단 재정이 넉넉하다고 선수를 마구 사버리면 얼마 안 가 재정난에 빠지기 쉽다. 보통은 챔스 등에 꾸준히 나가면 중계 수입으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으나, 만약 챔스에서 광탈하고 출전 자격조차 얻지 못하면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다. 현실에서 이런 테크로 순식간에 몰락한 대표적인 예로 리즈 유나이티드가 있다.[22] 참고로 풋볼매니저에서 아스날의 구단 부채는 한화로 5000억 원에 이른다. 단순 수치이기는 하지만 몸값만 따진다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리오넬 메시, 네이마르 주니오르 등의 선수들을 몽땅 사고도 남는 금액이다.[23] 즉 몇 년간 스폰서에 의한 수입은 거의 없었던 셈이다.[24] 축구 잡지 포포투에 따르면 타 구단과 다르게 아스날은 특유의 피라미드식 스카우터 제도를 갖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세스크 파브레가스를 손쉽게 영입할 수 있었다. 또한 제2의 파브레가스의 재능이라 불리는 게디온 젤라램 역시 이 제도 덕에 데려올 수 있었다고. 이는 타 구단에 없던 상당히 특이한 제도였으므로 다른 구단들은 아스날의 이 제도를 금방 벤치마킹하게 되었는데, 가장 빨리 벤치마킹을 한 건 당시 퍼거슨이 이끌었던 맨유였고 지금은 타 구단들도 이런 방식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25] 사실 1888-89 시즌에 프레스턴 노스 엔드 FC가 리그 무패 우승을 먼저 달성하기는 했지만, 이 우승은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하기 이전의 기록이고 결정적으로 프리미어 리그가 1992년에 출범한 이후 잉글리시 풋볼 리그와의 역사적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기에 공식적인 프리미어 리그 무패 우승은 2003-04 시즌 아스날의 우승이 현재까지 유일하다.[26] 포즈를 뱡향을 안내하는 삿대질처럼 보이게 붙여놓았다.[27] 참고로 구글에서 비슷한 문구로 검색하면 결과에서 벵거와 아스날가 최상단에 나왔다가 지금은 파리 생제르맹이랑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 밀려서 3위가 됐다. #[28] 벵거를 빼고 보더라도 아스날은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현재까지 한 번도 못했고, 4강 진출도 2006년, 2009년 2회가 전부고 딱 한 번 결승에 갔던 2006년에도 바르셀로나에게 역전패를 당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UEFA 유로파 리그에서도 아스날은 벵거를 빼고 보더라도 UEFA컵 시절까지 포함해도 4강 진출을 한 것이 2000년, 2018년, 2019년 3회가 전부고 결승에 갔던 2000년에는 갈라타사라이에게 승부차기에서 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고, 2019년에도 첼시 FC에게 4:1로 완패하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그나마 UEFA 컵위너스컵에서 1993-94 시즌에 우승하기는 했지만 그 외 1979-80 시즌과 1994-95 시즌에는 준우승에 그쳤다. 즉 유럽 대항전에서 우승한 타이틀도 벵거가 아스날의 감독으로 부임하기 전에 이뤄낸 것이다.[29] 1998-99, 2007-08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우승. 특히 1998-99 시즌에는 트레블을 달성했다.[30] 그 유명한 이스탄불의 기적이 있었던 2004-05 시즌 리버풀에서 우승.[31] 2002-03, 2006-07 시즌 AC 밀란에서, 2013-14, 2021-22, 2023-24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우승.[32] 안첼로티 옆에서 손가락질을 하고 있는 감독으로, 2015-16, 2016-17, 2017-18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이후 유일하게 챔피언스 리그 3연패를 이룬 감독이다. 참고로 2013-14 시즌에는 수석코치 신분으로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했다.[33] 2011-12 시즌 첼시에서 우승. 참고로 여기 있는 감독들 중에서 유일하게 감독대행 신분으로 빅 이어를 들어올렸다. 후술할 델 보스케도 1999-00 시즌 당시에는 감독대행 신분으로 결승 진출을 이끌었지만 결승전 하루 전에 정식 감독으로 승격되어서 우승 자체는 정식 감독 신분으로 이뤄냈다.[34] 1995-96 시즌 유벤투스에서 우승. 이후 2006 독일 월드컵에서도 이탈리아 대표팀을 이끌고 우승하며 UEFA 챔피언스 리그와 FIFA 월드컵을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 또한 2013년에는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의 감독으로 AFC 챔피언스 리그도 우승했다.[35] 1996-97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서, 2000-01 시즌 FC 바이에른 뮌헨에서 우승.[36] 1999-00, 2001-02 시즌 레알 마드리드에서 우승. 이후 스페인 대표팀 감독직을 맡으면서 2010 남아공 월드컵, 유로 2012를 우승하면서 UEFA 챔피언스 리그, FIFA 월드컵, UEFA 유로를 모두 우승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37] 2008-09, 2010-11 시즌 바르셀로나에서, 2022-23 시즌 맨체스터 시티에서 우승. 특히 2008-09 시즌과 2022-23 시즌에는 트레블을 달성하며 두 번의 트레블을 달성한 최초의 감독이 되었다.[38] 2003-04 시즌 포르투에서, 2009-10 시즌 인테르에서 우승. 그리고 인테르 시절에는 세리에 A 소속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달성했다.[39] 본래 위 사진은 안첼로티 혼자 손가락질을 하는 사진이었지만, 지단의 챔스 우승으로 지금과 같이 수정되었다.[40] 특히 퍼거슨은 이 업적으로 잉글랜드 축구 리그의 부활을 이끌고 영국의 자존심을 세웠다는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기사작위까지 받았다.[41] 첼시가 리그에서의 성적을 거의 말아먹었기에 챔스권에 들기는 어려웠다. 근데 다음 시즌 챔스를 가기 위한 대안책으로 챔스 우승 달성이라는 도박을 했고, 정말 드라마틱한 여정을 이어가며 기필코 우승해서 도박에 성공했고 첼시에게 첫 챔스 우승을 안겼다.[42] 안첼로티를 제외하면 아직 챔피언스 리그 4회 우승을 달성한 감독도 없다.[43] 웃기게도 당시 상대팀인 바르셀로나의 감독 프랑크 레이카르트는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거두기 전이나 거둔 후에도 막상 커리어로서는 챔스 우승 1회를 제외하면 벵거보다 한참 못한 감독이었다.[44] 그러나 이건 약간의 핑계도 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장 큰 라이벌 중 하나인 퍼거슨은 1995-96 시즌에 주축 선수들이 떠나자 갓 1군으로 올라온 20대 초반의 유스 출신 선수들을 기용하여 우승했고 말년에 스쿼드가 거의 박살난 상황에서도 리그 우승을 차지한 것과 대비되기 때문. 심지어 이 당시 맨유는 리버풀, 첼시, 맨시티보다 이적료를 적게 썼다. 그리고 퍼거슨 시절의 맨유 역시 2번의 재정 위기를 겪었는데, 첫 번째 위기는 퍼거슨의 부임 직후로 이때 맨유는 파산 직전이었고 잉글랜드 축구 리그는 헤이젤 참사로 침체되어 리그 전체가 암흑기를 격었다. 하지만 퍼거슨의 지휘 아래 맨유는 리그를 넘어 유럽 최강의 팀으로 발돋움하고 1998-99 시즌에 트레블을 이뤄내며 맨유와 잉글랜드 축구 리그의 부활을 이끌었다. 두 번째 위기는 2003-04~2005-06 시즌 당시 글레이저 가문의 구단 인수로 생긴 막대한 빚으로 인한 긴축재정과 주축 선수들의 이탈에 따른 리빌딩으로, 맨유도 자연스레 휘청였지만 퍼거슨의 능력으로 한 번도 리그 3위로 아래로 떨어지지 않았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등의 유망주들이 정상급 선수로 거듭나면서 맨유는 다시 한 번 유럽 정상에 올랐고 빚도 전부 정리되었다. 물론 이건 퍼거슨의 역량이 너무 뛰어난 거지 벵거 같은 상황이면 어떤 감독도 저러기는 힘들다. 또한 퍼거슨 역시 선수들의 식단 관리, 훈련 체계, 선수 체크 같은 면에서 뱅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45] 퍼거슨의 사례를 벵거 비판의 옹호론으로 쓰기도 하는데, 퍼거슨은 재임 기간 내내 적지 않은 이적료를 쓸 수 있었던 감독으로 에미레이트 스타디움 시기 벵거의 지출은 퍼거슨의 맨유에 비할 바가 되지 않는다. # 퍼거슨 시절의 맨유는 10년간 넷스펜딩이 프리미어 리그 20팀 중 무려 20위인데 평균 성적은 3위이다. 극한의 효율이며 효율면에서는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평가도 가능하다.[46] 한 영국 매체에서 벵거의 경질이냐 유임이냐의 조사를 했는데 84%의 팬들이 경질에 표를 던졌다는 기사가 올라왔을 정도였다.#[47] 혹은 'Thanks for the memory, But It's time to say goodbye.' 키워준 건 갓마운데 이젠 나가라[48] 상대 팀 서포터들은 반대로 'Arsene Wenger, we want you to stay'라며 조롱했다.[49] 점유율 축구로 스타일이 바뀐 것은 전술 트렌드의 변화에 따른 부분도 있다.[50] 바이에른 뮌헨과의 2016-17 시즌 챔스 16강 1차전에서 이 문제점이 제대로 드러났는데, 4-2-3-1을 그대로 복붙했고 전술이 통하지 않을 때의 플랜 B도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평상시와 같은 벵거의 선택은 뮌헨의 표적이 되기 딱 좋았다. 티아고 알칸타라-샤비 알론소-아르투로 비달로 이뤄진 뮌헨의 중앙은 아스날의 허리를 압도하며 압박으로 아스날의 허리 공간을 좁혔고, 아스날이 압박해 들어오면 알론소를 중심으로 쉽게 탈압박을 해 나왔다. 여기에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더글라스 코스타-아르연 로번을 위시한 공격진은 수비가 두껍지 못한 아스날의 문전을 계속해서 위협했고, 아스날의 늘어나지 않은 수비 숫자는 특히 1:1에 강한 로번에게 치명적인 기회를 경기 내내 내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경기 기록 또한 말해주는 뮌헨의 일방적인 페이스였다. 점유율 69% : 31%, 성공 패스 694개 : 198개, 패스 성공률 90% : 73%, 슈팅 24개 : 8개 등 뮌헨의 압도적 우위였고 결국 5:1이라는 스코어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2차전에서도 똑같이 5:1 대패를 당하며 아스날은 총합 스코어 10:2로 16강에서 탈락했다.[51] 파트리크 비에라는 이적 요청을 하러 휴일에 벵거의 집에 찾아갔는데, 자신을 따뜻하게 반겨주는 벵거를 보고 자신이 아버지 같은 이 사람에게서 떠나야 하는지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고 한다.[52] 부실한 백업으로 인해 2010년대에 들어 로테이션을 많이 가동하지 않고 주전 라인업을 일정과 관계 없이 거의 풀타임으로 출장시키면서 혹사시켰다.[53] 일명 '벵피셜'. 저 말을 하고 카솔라는 아스날로 이적했다.[54] https://sports.news.naver.com/wfootball/vod/index.nhn?id=427104&category=epl&gameId=2018051310011830742&date=20180513&listType=game 18분 41초 부터, 18분 13초부터 보면 더 좋다.[55] Highbury my soul, Emirates my suffering.[56] Outstanding Contribution to a London Club[57] League Managers Association (리그감독협회)[58] 외국인 대상 명예훈장[59] Freedom of Islington[60] Humane Order of African Redemption[61]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 일본어는 능통하다는 정도까지는 아니고 기본 회화는 충분하다고 했지만, 요즘에는 많이 어려운 듯 하다. 이탈리아어와 스페인어는 많이 까먹었다고 기자회견에서 밝혔지만 독일어와 영어, 프랑스어는 아직까지 능숙하다. 참고로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는 서로의 언어만으로 기본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유사하다.[62] 2015년 2월 영입과 관련된 가디언 인터뷰에서 나고야 감독 시절 배운 일어를 언급했다.[63] 현대 프랑스 요리관이 일본 요리에서 많은 영향을 받은 탓도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일본인들도 1990년부터 육류섭취가 많아지면서 채소 섭취가 적어지고 있다.[64] 또 2010 남아프리카 공화국 월드컵 이후에 혼다 케이스케를 칭찬한 일화라든지, 최근 일본의 유망주 미야이치 료를 영입한 일이라든지 일본 선수에 대한 관심을 많이 표명하는 편이다.[65] 193cm라고도 하는데 대략 191~2cm다.[66] 벵거가 부정할 수 없는 미노년인 것은 사실이지만 간과하기 힘든 것은 노안(老顔)이기도 하다. 젊은 시절부터 머리가 하얗게 샜고, 주름이 움푹 진 얼굴이라 아르연 로번만큼은 아니더라도 나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나이가 더 들어보였다. 다행히 70을 넘긴 지금은 나이에 부합하는 주름과 얼굴로 인해 진정 미노년이라는 표현에 부합하는 인물이 되었다. 어찌 되었든 이런 그의 노안은 가볍게 무시될 정도의 우월한 기럭지, 정장 코디, 그리고 멋지게 생긴 외모는 이른바 미노년의 멋 그 자체다.[67] 2011/12 시즌에는 퍼거슨이 초반 나락에 떨어진 아스날과 벵거에 대해 걱정해주기까지 했다. 물론 팬들은 굴욕이라고 느낄 수도...[68] 이때 주심은 아스날 팬들이 이를 가는 전설의 10bird, 마이크 딘이다.[69] 참고로 무리뉴와 퍼거슨의 상대 전적은 무리뉴 기준으로 16경기 7승 7무 2패이다.[70] 애초에 조지 그래엄이 사퇴하게 된 계기 자체가 선수 영입 대가로 에이전트에게 뒷돈을 받아먹었던 것이다.[71] 이런 선수 기용 때문인지 그를 디스하는 응원곡 중 아르센 벵거의 아버지는 지미 새빌이고 아들은 아담 존슨이라는 내용의 곡 같이 조롱 수준을 넘어선 것 같지만 그의 선수 기용을 조롱하는 노래가 있다.#[72] 영국 언론들도 미친듯이 깠으나 아스날 서포터인 엘리자베스 2세께서 매우 국제적이면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거라고 말씀하시자마자 꼬리를 내렸다.[73] 중하위권 팀에 상당수의 아스날 유스 출신 잉글랜드 선수들이 있고, 그 선수들의 실력이 아스날의 수준에 안 맞는 것일 뿐이다. 이 부분을 아스날의 서포터들은 유스 키워서 2부 리그나 중, 하위권 팀들을 먹여살린다고 주장하고 있다.[74]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가 벵거를 좋아한다는 것도 한몫했다는 설이 있다.[75] 이후 본인 다큐멘터리에서 레알 마드리드에서 2번이나 감독직 제안이 왔다고 한 것을 보면 근거없는 루머는 아니었던 셈.[76] 왜 확실한 공격수를 영입하지 않았는가에 대해서는 샤막은 자신이 정말 좋아하는 선수지만 당시 샤막의 소속팀이었던 지롱댕 드 보르도에서 제시한 금액을 지불할 생각이 없었고, 따라서 샤막에게는 에두아르도 다실바가 돌아왔으니 샤막을 벤치에 앉혀두고 싶은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어서 샤막은 공짜로 아스날로 이적했고, 에두아르도는 결국 주전 경쟁에서 밀려 샤흐타르 도네츠크로 이적했다.[77] 본인 말로는 두세번이나 제의가 왔었다고 한다.[78] 여담으로 차범근 옆에 있던 배성재는 차범근에게 "벵거가 왜 축하한다고 말한 거냐?" 라고 물었고, 차범근은 "나도 모르겠다" 라고 답했다. 물론 진짜 몰라서 그랬을 리는 없고, 단순히 황당해서 이런 반응을 보인 듯하다.[79] 뱅거는 주제 무리뉴와 마찬가지로 국가대표팀 감독 자리는 꺼리는 것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