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30 21:12:14

이위(전진)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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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83D8B><colcolor=#fff> 건녕열공(建寧烈公)
李威 | 이위
시호 (烈)
작위 건녕후(建寧侯) → 건녕공(建寧公)
(李)
(威)
백룡(伯龍)
생몰 ? ~ 374년 3월
출신 진주(秦州) 한양군(漢陽郡)
1. 개요2. 생애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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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진의 인물. 선소제 부견의 모후인 태후 구씨(茍氏)의 사촌동생.

2. 생애

어렸을 적부터 위왕(魏王) 부웅문경지교를 맺어 무척 친밀한 사이였고, 황제 부생 재위기에 발탁되어 좌위장군을 지냈다. 황제 부생은 부웅의 아들인 청하왕 부법과 동해왕 부견에게 위협을 느껴 번번이 그들을 해칠 시도를 하였는데, 그럴 때마다 이위가 나서서 비호해준 덕에 부법과 부견은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에 구씨는 이위를 무척 총애하였고, 부견 역시 이위에게 고마움을 느껴 그를 마치 아버지처럼 대하였다.

수광 3년(357년) 6월, 부견이 폭군 부생을 몰아내기로 결심하자, 이위는 구씨와 함께 부견을 위해 모략을 세웠다. 이후 정변이 성공하여 부견이 부생을 몰아내고 천왕(天王)으로 즉위하니, 이위는 위장군•상서좌복야에 임명되었다. 이위는 왕맹의 비범함을 눈치채고 천왕 부견에게 국가의 정사를 왕맹에게 맡길 것을 권하였다. 부견은 이위의 천거를 받아들이고, 왕맹을 불러 말했다.
"이공(李公)이 경을 이해함은 마치 관이오를 알아본 포숙아와 같도다."
이를 들은 왕맹은 이위를 형처럼 섬겼다.

영흥 원년(357년) 11월, 구 태후가 승상에 오른 부법의 입지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경계하여 이위와 함께 그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고, 이후 실행에 옮겨 부법 독살에 성공하였다. 천왕 부견은 배다른 형의 죽음에 피를 토하면서 슬퍼하였으나, 차마 자신의 생모와 은인에게 죄를 물을 수 없어 그들을 벌하지 않았다.

감로 원년(359년) 12월, 영 호군(領護軍)으로 승진하고, 건녕후(建寧侯)에 봉해졌다.

건원 원년(365년) 7월, 흉노의 우현왕 조곡(曹轂)과 좌현왕 유위진이 모두 전진을 배반하여, 조곡이 20,000 군사를 이끌고 전진의 영역인 행성(杏城)을 침공하였다. 천왕 부견은 친히 조곡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이위를 위대장군으로 삼아 상서좌복야 왕맹과 더불어 태자 부굉을 보좌해 도읍 장안(長安)을 지키게 하였다.

건원 원년(365년) 10월, 천왕 부견이 우현왕 조곡을 요격해 대파하고 그 동생 조활(曹活)을 참수한 뒤, 삭방(朔方) 일대를 순시해 목근산(木根山)에서 좌현왕 유위진까지 사로잡았다. 이때 행성을 지키던 정북장군•회남공 부유(苻幼)가 부견이 바쁜 틈을 타 장안을 습격하니, 이위는 출격하여 부유의 무리를 격파하고 부유를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건원 원년(365년) 11월, 장안으로 귀환한 천왕 부견이 이위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태위로 승진시키고 시중을 겸하게 하였다.

건원 6년(370년) 11월, 전연 정벌 임무를 맡은 왕맹이 마침내 전연의 수도 업(鄴)을 포위하자, 천왕 부견은 100,000 군사를 거느리고 왕맹을 지원하러 떠나며 다시 태자 부굉에게 장안을 맡기고, 이위로 하여금 부굉을 보좌케 하였다.

건원 10년(374년) 3월, 세상을 떠났다. 사후 공작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열(烈)'이라 하였다.

3. 기타

  • 사촌누나인 구 태후와 근친상간하는 사이로 의심되는 일화가 하나 있다. 어느 날, 천왕 부견이 사관들이 써놓은 사서를 열람하였다가 이위가 구 태후와 사통한 기록이 적나라하게 적혀있는 것을 보고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그 책을 당장 태워버리라 명하였다. 그리고 사관들을 조사하여 해당 기록을 쓴 자를 색출해내려 하였으나, 그 기록을 적었던 전(前) 저작랑 조천(趙泉)과 차경(車敬)이 이미 사망한 것을 알고 중지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