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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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전진의 황태자 苻宏 | 부굉 | |
시호 | 없음 |
작위 | 없음 |
성 | 부(苻) |
휘 | 굉(宏) |
자 | 영도(永道) |
생몰 | ? ~ 405년 5월 |
출신 | 악양군(略陽郡) 임위현(臨渭縣) |
부황 | 세조 선소황제 |
형제자매 | 7남 4녀 중 차남 |
국적 | 전진 → 동진 → 환초 |
[clearfix]
1. 개요
전진의 황족. 세조 선소제 부견의 적자. 부비가 연장자였으나 서출이라 그 대신 황태자로 책봉되었다.2. 생애
영흥 원년(357년) 6월, 아버지 부견이 정변을 일으켜 폭군 부생을 제거하고 천왕으로 즉위하자, 부굉을 천왕태자로 삼았다.건원 원년(365년) 7월, 흉노족 철불부가 전진을 배반하여 우현왕 조곡(曹轂)이 20,000 군사를 거느리고 행성(杏城)을 침공하였다. 선소제 부견은 친히 정벌하러 떠나면서 태자 부굉에게 도성 장안을 맡기고, 위대장군 이위와 좌복야 왕맹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케 하였다.
건원 11년(375년) 10월, 선소제 부견이 승상 왕맹의 유언을 받들어 전국적으로 유학을 강조하고, 노장 사상과 도참을 멀리하라는 조서를 내렸다. 부굉은 이에 부응해 공후, 백관들의 자제를 선발한 후 모두 학교에 입학시켜 유학을 공부하도록 하였고, 궁중의 장수와 병사들은 물론 후궁과 환관들까지 박사로부터 수업을 듣게 하였다.
건원 18년(382년) 11월, 선소제 부견이 동진 정벌을 꿈꾸며 조정의 대신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고집을 좀처럼 꺾지 않으니, 부굉이 나아가 간했다.
"지금 오(吳) 땅에 목성이 드리워져 있으니 정벌은 불가합니다. 또, 진나라의 주인은 죄가 없고 사람을 잘 쓰며, 사안, 환충과 그 형제들 모두 나라의 준걸들로, 임금과 신하가 서로 힘을 합쳐 험준한 장강을 끼고 버티니 아직 도모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당장은 병사를 기르고 곡식을 쌓는 일에 몰두하다가 나중에 폭군이 나타나면 그때 단번에 멸망시켜야 합니다. 지금 움직여도 공을 세우지 못 한다면 그동안의 위세와 명망은 땅바닥에 곤두박질 칠 것이고, 재물은 바닥나고 말 것입니다. 과거 성왕(聖王)은 군사를 부릴 때, 그 성패를 확실히 판단한 후에 비로소 이를 이용하였습니다. 저들이 만약 장강에 기대어 굳게 지키면서 강북의 백성들을 강남으로 옮겨 성을 세우고 들판을 비운 다음 문을 닫아걸고 싸움에 응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활을 당기지 않고도 우리 군대를 피폐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그 고장의 풍토병이라도 돌기 시작하면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인데, 그렇게 되면 폐하께서는 장차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이에 부견이 답했다."왕년에 수레를 타고 연나라를 멸망시켰을 때도 목성을 범했으나 결국에는 승리하였다. 이렇듯 하늘의 도란 아득하고도 심오하여 네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거 시황제가 6국을 멸망시켰을 때도 그 왕들이 어찌 모두 포악하였겠는가? 또, 나는 오랫동안 이를 마음 속으로 판단해보았으니, 싸우면 반드시 승리할 것인데 어찌 공이 없겠느냐! 내가 오랑캐에게 명을 내려 그 안에서 공격하게 하고, 단단한 정예병들을 내세워 밖에서 공격한다면, 제아무리 사안이라도 어찌 당해낼 수 있으랴!"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출가 승려 석도안이 말했다."태자의 말씀이 옳습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이를 받아들여주십시오."
하지만 부견은 끝까지 따르지 않았고, 얼마 뒤에 100만 대군을 거느리고 비수대전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다.건원 21년(385년) 정월, 선소제 부견은 전진이 혼란스러운 틈타 반기를 들고 서연을 세운 모용충과 싸우며, 장안성에서 수 개월 동안 승패를 주고 받았다. 서연의 상서 고개(高蓋)가 위수(渭水) 이북에 세워둔 전진의 여러 성채들을 공격하자, 부굉은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 성이벽(成貳壁)에서 고개를 대파해 궤멸시키고 적병 30,000여 명을 참수하였다.
건원 21년(385년) 5월, 관중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농성하는 측인 전진군의 형세는 나날이 불리해져만 갔고, 장안성 내에도 식량이 다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서 선소제 부견이 그동안 믿고 의지하던 맹장인 영군장군 양정마저 서연군에게 사로잡히니, 부견은 무척 두려워 자신이 과거 그토록 배척했던 도참서의 내용을 믿고 오장산(五將山)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선소제 부견은 장안을 부굉에게 맡기면서 그에게 말했다.
"이 말대로 여기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혹시 하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 너를 이곳에 남겨 군정을 모두 맡길 터이니, 도적과 이로움을 다투지 마라. 짐은 마땅히 농(隴)을 벗어나 군사와 식량을 모아서 네게 보내주도록 하겠다. 이것이야말로 하늘의 계시이니라."
그리고는 막내아들인 중산공 부선, 부인 장씨, 딸 부보(苻寶), 부금(苻錦)과 기병 수백 명만 거느리고 장안성을 빠져나왔다.건원 21년(385년) 6월, 도저히 장안성을 지켜낼 수 없다 판단한 부굉은 어머니, 아내, 종실들을 챙겨, 기병 수천 명을 이끌고 하변(下辨)으로 달아났다. 황제와 태자가 모두 탈주하자 장안성을 지키던 백관들은 흩어졌고, 사예교위 권익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후진에 투항하였다.
건원 21년(385년) 7월, 하변에 도착한 부굉은 남진주(南秦州)자사 양벽(楊璧)에게 거부당해 하는 수 없이 무도(武都)로 향하였다. 이때 양벽의 처이자 부견의 딸인 순양공주는 남편을 버리고 부굉을 따라갔다. 이윽고 무도에 이른 부굉은 그곳의 호족인 강희(強熙)의 도움을 받아 동진으로 망명할 수 있었고, 동진 조정에서는 그를 보국장군으로 삼아 강주(江州)에 머물게 하였다.
태원 11년(386년) 10월, 선소제 부견이 후진의 요장에게 살해당하고 그 뒤를 이은 애평제 부비는 무리해서 낙양(洛陽)을 습격하려다 섬(陝)에서 동진의 장수 풍해(馮該)에게 요격당해 전사하였다. 풍해는 애평제 부비의 아들인 태자 부녕(苻寧)과 장낙왕 부수(苻壽)를 생포하여 건강(建康)으로 호송하였고, 동진 조정에서는 조서를 내려 그들의 숙부인 부굉에게 그 처분을 맡겼다. 부굉은 당연히 그들을 주살하지 않고 사면해 살려주었다.
융안 3년(399년) 12월, 부굉은 강주자사 환현과 친분을 쌓아 그 무리에 속하였는데, 환현이 형주자사 은중감을 공격할 때 그의 명을 받고, 양주자사 곽전(郭銓)과 함께 서강구(西江口)에서 은중감의 조카 은휼(殷遹)과 그가 이끌던 수군 7,000명을 격파하였다.
원흥 원년(402년) 2월, 환현이 동진 조정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키자 부굉 역시 종군하였다. 환현이 고숙(姑孰)에 이르렀을 때, 부굉은 환현의 명령에 따라 양성태수 사마휴지가 지키는 역양(歷陽)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원흥 2년(403년) 11월, 조정을 장악한 환현이 제위를 찬탈하고 환초를 세웠다.
원흥 3년(404년) 4월, 유유가 정변을 일으켜 환초의 수도 건강을 빼앗고 동진을 다시 세웠다. 환현은 강릉(江陵)으로 도망쳐 군대를 정비한 뒤, 유유를 토벌하기 위해 함선 200여 대를 이끌고 부굉을 양주(梁州)자사로 삼아 선봉에 세워 출진하였다. 그러나 환현의 군대는 쟁영주(崢嶸洲)에서 유유가 보낸 청주자사 유의, 낭야내사 하무기의 군대에게 대패하였고, 이 전투로 병력과 물자를 모두 상실한 환현은 서쪽으로 도망치다가 익주독호 풍천(馮遷)에게 공격받아 목숨을 잃었다.
의희 원년(405년) 3월, 환진이 운성(鄖城)에서 거병하니, 패전 후 상중(湘中)에 숨어있던 부굉은 환진에게 호응하여 강릉 공략을 도왔다. 형주자사 사마휴지는 패하여 양양(襄陽)으로 달아나고, 환진은 강릉에 입성하였다. 이후 건위장군 유회숙이 운두(雲杜)에서 군대를 이끌고 오자, 부굉은 환진과 함께 사교(沙橋)에서 유회숙을 요격하였지만 패하였고, 강릉성 또한 관군장군 유의가 다시 점령하였다.
의희 원년(405년) 5월, 부굉은 환량(桓亮)과 함께 안성(安成), 여릉(廬陵) 등 10여 곳의 군을 노략질하고 다녔다. 이에 유의, 유도규 등이 군대를 나누어 부굉의 무리를 토벌하였고, 부굉은 상동(湘東)에서 용양장군 단지가 이끄는 토벌군과 싸우다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