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28 12:42:19

3S 정책

자유화 정책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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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3S는 무엇인가?
2.1. Screen (영상)2.2. Sports (스포츠)2.3. Sex (성문화)
3. '정책'의 실존 여부 논쟁
3.1. 스포츠3.2. 스크린 & 섹스3.3. 결론
4. 평가
4.1. 긍정적 평가4.2. 부정적 평가
5. 이야깃거리6. 관련 문서7.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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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80년대 전두환 정부가 군사 독재로 인한 반발을 억제하기 위해 시행된 우민화 정책을 빗댄 용어.

사실 이 정책의 정식 명칭은 딱히 없으며,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불렸던 '3S 정책'이라는 표현이 현재까지 대표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S로 시작하는 세 단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머리글자를 딴 것으로, 삼에스 정책 또는 쓰리에스 정책이라고 읽는다.

이 용어는 본래 일본 제국 말기에 처음으로 사전에 등장하였으며,[1] 당시 일본에 퍼져 있던 반유대주의 선전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2] 이후 미국의 일본 점령기 당시 일본전체주의, 군국주의 탈피를 위해 GHQ가 의도적으로 실시한 정책을 일본인들이 이렇게 부르며 소극적인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3]

사실 독재 정권이 정치적인 이유로 스포츠를 장려했던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비단 올림픽[4]을 체제 선전용으로 활용했던 나치 독일이나 월드컵[5]을 체제선전용으로 써먹었던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뿐 아니라, 중남미에서 독재정권이 축구리그나 야구리그를 활성화시켜서 사람들의 눈을 돌리게 만든다거나 하는일이 많았다. 공산정권 시절의 동유럽에서 아예 트레이닝 시스템을 선진화, 체계화시켜서 애초부터 인구 세계 3위를 차지했던 소련이나 나름대로 인구가 많았던 폴란드뿐만 아니라 당대 기준으로도 인구가 많은 나라로 분류되지 않았던 동독, 헝가리, 불가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등이 줄줄이 스포츠 강국으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였다.[6] 따지고 보면 전두환 정부도 이러한 사례를 참고해서 이러한 기조에 발을 맞춘 것이었다. 참고로 MBC 드라마 <제5공화국> 25부에는 일본의 세지마 류조[7]가 전두환, 노태우와의 식사자리에서 '국민에게 적당히 즐겁고 신나는 일을 만들어주면 정치에 무관심해진다'는 조언을 한다.

정통성 없이 집권한 전두환 정부가 박정희 정권기때의 여러 사회, 문화적 제한을 풀고 정부 차원에서 자유화를 장려했다는 것이다, 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보면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당시 서유럽, 남유럽과 북아메리카, 라틴아메리카 일대에서는 68 혁명과 함께 히피문화, 성해방이 한창 유행이 되었고, 각 나라별로 낙태금지 철폐, 학교내 두발자유화 및 체벌금지같은 문화적 자유주의도 널리 퍼졌으며,[8] 이러한 유행 중 일부는 한국에서도 전파가 되어서 장발과 미니스커트가 유행하였다. 박정희는 자신이 일제강점기 때 교사였었고, 이후로는 여러차례 소속에 변화가 있었지만 어쨌든 군대에 오랫동안 몸담았기 때문에 군대식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문화적 자유화 경향을 아니꼽게 생각한데다가 사회불안의 요인으로도 지목하여 단속하는데 집중했지만[9], 반발을 잠깐 억누르던 수준이었고, 1978년 10대 총선과 1979년 부마민주항쟁에서 드러났듯이 젊은층들의 불만표출을 막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야 말았다.

또한 박정희 사후의 서울의 봄 때에도 민주진영에서는 정치적인 민주화를 주로 요구했지만, 동시에 중·고등학생들이 두발자유화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등 박정희 시절의 통제일변도 정책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문화적 자유화를 요구하는 흐름도 확연해있던 상황이었다. 신군부 세력은 5.17 내란을 시행하여 국회를 강제로 해산했고, 5.18 민주화운동 강제 진압, 언론통폐합으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며 민주화 세력들을 완전히 억누르고 정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지만, 정통성이 취약하다는 사실은 매우 뚜렸했고, 신군부에 대한 반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일단 박정희와는 무언가 다르다는 이미지는 심어주어야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의 머리는 있었다.[10] 때마침 전두환 자신 또한 술과 축구를 좋아하는 향락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11] 그래서 약한 정통성이라는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소위 전문가 직함을 가진 사람들은 가리지 않고 정권에 끌여들이려 애썼는데,[12] 집권 초반에는 언론통폐합과 삼청교육대 같은 군기잡기식 정책을 펼쳤지만, 1981년을 기점으로 정권이 어느정도 안정화되었다고 판단되자, 3S정책도 이 당시 영입된 전문가들의 조언을 받으면서 시행했던 것이었다.[13]

실제로 전두환이 집권하면서 취한 대표적인 조치 중 하나가 컬러 방송 시행이었고[14], 1981년도에 국풍81이 (정권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성공적으로 치러지고 당초 예상을 뒤엎고 1988 서울 올림픽 개최까지 성공하자 여기에 삘받아서 여러 사회규제 완화정책을 펼쳤다. 이 때 시행된 것이 야간 통행금지 폐지였고, 이외에도 두발자유화교복 자율화 등 당시로선 상당히 획기적인 조치들도 여럿 시행되었다.[15]

다만 정치적인 검열을 완화시키는 일은 없었고, 만화 검열제나 가요검열은 이때에도 여전히 잔존하여서, 방송계나 출판계, 문학계에서도 검열이 여전히 잘만 진행되었으며 특정한 이유로 방송 출연이 금지되거나 한수산 필화 사건처럼 소설이나 시를 썼다가 고문당하는 사건들도 당연히 있었다. 만화검열과 가요검열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나 완화되었고, 가요 검열이 폐지된것은 1996년도의 일이었다.

이 때 어떤 식으로 검열이 진행되었는가 하면 대머리주걱턱을 개그 소재로 삼는 것이 금지되었으며[16], 순자라는 여자 이름을 가진 배역이 비천하거나 웃기는 역할을 하는 것도 안 되는 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김성환고바우 영감김수정의 아담과 이브가 대머리를 묘사했다는 이유로 연재가 중단되었던 적이 있으며, 탤런트 박용식이 전두환과 닮았다는 이유로 출연정지를 당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다.[17] 그리고 노동 문제를 다루는 것도 어김없이 검열 대상이었다. 이 당시에는 연간 노동시간이 3000시간에 육박했던 시절로, 많은 직장에서 초과근무와 야근이 일상다반사라서 저런식의 자유화 조치가 이어지다한들 주6일 동안 열심히 일만하다 보니 휴일에는 피곤에 찌들어서 문화생활을 즐길 여유가 없던 경우가 태반이었다.[18]

그리고 당시 뉴스 프로그램과 신문들도 평일 메인 뉴스의 경우에는 전두환과 이순자의 동정소식을 맨 앞에 다루는 것이 당연시 되었으며 신문들도 보도지침이란 명분하에 검열당해야 했다. 당연히 시사 프로그램들도 국내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소재를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이나 사회 문제를 정부에 불리한 쪽이거나 비판적으로 다루는 것도 암묵적으로 금지되었다. 그래서 당시 MBC 리포트나 레이다 11, 추적 60분 같은 시사프로그램들을 보면 사회 비판적인 내용은 있기는 하지만 전두환 정권에 비판적인 내용은 일절 찾아볼 수 없거나 찾아보기 힘들다. 노태우 정권기의 뉴스비전 동서남북, MBC 리포트에서 노태우 정부를 직·간접적으로 비판적인 내용을 볼수 있는 것과는 차이가 크다.

2. 3S는 무엇인가?

3S라는 이름은 전두환 정부가 주력으로 육성한 다음 세 가지 산업의 약어에서 유래했다.

2.1. Screen (영상)

1981년 영화에 대한 규제와 검열이 과거보다 파격적으로 완화되었다. 박정희 정부 시절에도 호스티스물 같은 19금 영화는 있었지만, 전두환 정부에서는 준 포르노 수준의 에로 영화도 허용했던 것이 차이점이다. 이 때문에 저예산 에로영화가 영화관에서 집중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도색영화 범람의 물꼬를 튼 것은 그 유명한 애마부인(1982년 2월)으로, 1982년 극장개봉작 56편 중 무려 35편이 에로 영화였다.[19] 아래의 세번째 S와 깊은 관련이 있다. 또한 컬러 TV가 이 때 보급되기 시작했다.

2.2. Sports (스포츠)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정부의 정당성을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위하여 1981년 10월 1988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데 성공하였으며 "서울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를 위해서 모든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할 시기에 국가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논리로 모든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20] 그리고 정권이 주도해서 1982년 프로야구, 1983년 프로축구 슈퍼리그, 민속씨름 같은 프로스포츠를 급조했다.[21]

2.3. Sex (성문화)

1982년 1월 5일 야간 통행금지가 폐지되어 그에 따른 여러가지 성 관련 산업이 급속도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술집, 모텔, 유흥업소, 성매매 업소 같은 산업. 상술한 도색영화의 범람도 이 S의 범주에서 다룰 수 있다. 더불어 유흥가의 급팽창으로 기생충처럼 따라붙는 조직폭력배도 엄청나게 성장한다. 지금도 회자되는 3대 조폭 OB 동재파(이동재), 양은이파(조양은), 서방파(김태촌)가 이 시절 이야기다.[22] 또한 애마부인 시리즈를 시작으로 에로 영화가 범람하게 만들었다. 다만 에로까지만 인정하고 포르노 합법화는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전두환 정권이 끝난 이후인 1992년에도 마광수 교수가 소설 '즐거운 사라'를 발표했다가 음란물이란 이유로 검찰에 구속되었다.

3. '정책'의 실존 여부 논쟁

전략과 정책으로서의 3S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며, 전두환 정권의 비판자들이 포르투갈 독재정권의 3F 정책을 대입해 진짜로 실행되었던 정책인 양 둔갑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여느 정권이나 국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 '즐길거리'를 만들어 대중에게 공급하려 하며, 그 결과로서 반응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소산이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지지도를 높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국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는걸 막기 위해 우민화 정책을 연구한 것이다'라고 주장하려면 여기에는 내용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정책의 입안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두환 정부의 정책 가운데에서 '3S'로 대변되는 우민화 정책을 연구, 추진한다는 정책문서는 발견된 적이 없으며, 박근혜 정부 시절 '블랙리스트'처럼 장관(당시 조윤선)이 인정한 증인이 있는 것도 아니다. 때문에 실존여부에 부정적인 사람들은 전두환 정권이 그런 방식을 정권 유지에 이용한 것은 인정하더라도, '정치적 우민화'에 대해선 전두환 정권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주장하는 음모론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3S를 두고 당시 운동권들이 만들어낸 허구일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가들은 군부독재를 타도해야 하는 입장에서 국민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필수적이었지만, 전두환 집권 이후 경제는 점점 안정화되어 갔고 과격 운동권에서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을 비롯한 사고들을 치면서 "다소 불만은 있지만 현 체제에 그럭저럭 순응"하는 국민들이 점차 늘어가고 있었다. 때문에 이런 불리함을 타파하고자 경제 성장에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대중의 자유화 요구를 수용한 정책들을 3S 정책이란 이름으로 싸잡아 "전두환의 우민화 정책"이라고 프레임화하였다는 것이다.

실제로 흔히 3S로 일컬어지는 스포츠, 스크린, 섹스 각 분야에서 의도성의 존재에 대한 찬반 양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1. 스포츠

  • 옹호론
    우선 스포츠는 당시 집권자인 전두환이 좋아해서 장려한 것 뿐이라는 주장이 있다.[23] 실제로 전두환은 스포츠계 인사들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으며, 올림픽 유치에 나서기도 했다. 또한 프로스포츠의 활성화는 지역 간 라이벌 의식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김대중의 정계복귀를 앞당긴 일면도 있다.
  • 비판론
    하지만 당시 정부는 재벌 기업들에게 정치 자금과 각종 인허가권을 교환하며, 동시에 스포츠단 창단을 압박하고 종용하였다. 또한 당시 김대중의 귀국과 정계 복귀는 미국 정계와 국제 엠네스티 등의 정치적 압력 때문이었으며, 프로 스포츠의 부흥과는 무관했다. 당시 김대중이 귀국했을 때, 미국 정계는 국내에서의 암살을 두려워하여[24] 미국의 유력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김대중이 타는 비행기에 동행시켰다. 이 때 동행했던 사람이 에드 페이건, 로마스 폴리에타 등의 미 하원 의원과 카터 정부 때 국무성 인권담당차관이었던 패트리시아 데리안, 국무성 인권담당차관보 등의 관료들, 그리고 크리스토퍼 히친스 등의 지식인이었다. 당시 미국의 레이건 정권이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전두환의 미국 공식 방문과 거래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실제 이후 이 협상의 미국쪽 파트너였던 CIA의 도널드 그레그가 1989년에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한다. 또한 야당이었던 미국 민주당의 에드워드 케네디, 앨 고어 상원의원 등도 당시에 김대중의 신변 보장과 무사귀국을 공개적으로 요구하기도 했다. 오히려 국민 관심 회피용 혐의가 짙은 것은 프로 스포츠가 아니라 84 LA 올림픽, 86 멕시코 월드컵,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이었다[25]고 하지만, 그것은 자유화 정책의 일환 중 하나로 평가될 수 있는 사안이지 부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3.2. 스크린 & 섹스

  • 옹호론
    영화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는 선정적인 부분을 찾기 어려웠다. 플레이보이펜트하우스 등도 세운상가에 가서나 몰래 구입할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제한이 풀린 것은 1987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가 어느 정도 이뤄진 다음 전두환 정권이 레임덕에 걸리면서 자유화 바람이 불었던 1987년 하반기였다.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선정적인 문화가 심했던 것은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0년대 중반 연예인들이 누드사진을 대놓고 찍을 때 였다고 하지만, 그런 류의 누드사진은 이미 외국에서는 소프트한 누드에 불과하였다는 점에서 사실이라고는 하기 어렵고, [26] 군부 독재 정권이 20여년이나 지난 시기의 분위기라 비교하기도 부적절하다.
  • 비판론
    군부 독재 정권이 정치적 검열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거세게 하면서 상대적으로 섹스나 스포츠 등의 검열만 풀어주어 이른바 '불만의 가스 빼기'를 했다는 것이 자유화 정책의 주요 비판점이다. 자유화 정책에 대한 비판은 그 이름대로 영상, 섹스, 스포츠 등의 자극적인 문화로 정치탄압에 대한 현실에서 국민의 눈을 돌리려 한다는 데 있는 것이지, 결코 그 정도가 심했다는 데 있지 않다.

    또한 사실관계도 일부 다른데, 유흥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권력과 서서히 결탁하기 시작했던 것이 1980년대였다. 실제 전두환 시기 지방의 유흥업이나 관광호텔의 경우에는 서울의 안기부에서 대놓고 허가권을 휘두르며 관리를 했다. 때문에 전두환 정권이 문화적으로는 섹스를 지향점으로 삼지 않을 만큼 보수적이었을지언정 '성'을 통해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 했다는 주장 자체는 근거가 있다.

3.3. 결론

서구적인 자유민주주의 선진국일수록 영화와 스포츠 문화는 더욱 발전해 있었고 성문화에 개방적이었던 편이다. 스크린 역시 한국은 컬러 TV 등의 보급에서 서방 표준에 한참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자본진영에서는 오히려 문화가 자유로워지면 자유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증폭시켜 서구식 민주주의를 촉진한다고 봤으며, 반대로 독재 때문에 저항 문화가 퍼지는 것을 우려하던 공산진영 국가들에서 문화를 검열하곤 했다.[27] 이는 냉전기 자유진영의 수장이던 로널드 레이건베를린 장벽 앞에 서서 "고르바초프 서기장, 이 벽을 부수시오!"라고 소리친 연설만 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는 "3S 정책을 시행해 국민들을 우민화하고 관심을 돌렸다"는 주장이 일견 모순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프로파간다는 공산진영이나 자본진영을 막론하고 수행되어 왔으며, 시민들을 스포츠나 오락물 등의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려 정치적 무관심을 증폭시키는 정책은 어디에서나 존재했다. 너무 오래된 수법이라 빵과 놀이라는 말도 있을지경. 당대 전두환 정부가 비록 "자본진영"에 속해 있었다고는 하나 진정한 의미의 자유민주주의 국가가 아니었음은 분명한데다, 서구 선진국들과는 달리 전두환 시대의 자유화는 "모든 문화에 대한 자유"라기보다는 (스포츠·스크린·섹스라는) 자극적인 특정 요소들에 한정한 자유와 정치적 풍자 등 나머지에 대한 검열로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즉, 실제로 독재정치를 하며 정치적인 소재의 검열은 철저히 하는 와중에 일부 성적인 것이나 스포츠만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이 바로 3S 정책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는 3S 정책이 명시적으로 추진되지 않았다거나, 문민정부에서 검열이 더 완화되었기에 3S 정책이 실존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적절하지 않은 반론이라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전두환 정부의 부분적인 문화 자유화 정책에 대한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소위 '3S'에 대한 관대함이 정말로 국민들의 자연스러운 자유화 요구를 점진적으로 수용하는 시발점이었는지[28], 아니면 우민화라는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갖고 의도적으로 제한된 영역에서만 연출된 것인지[29]이다. 둘째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국민들이 과연 부분적으로라도 정말로 문화 자유화의 혜택을 누렸는지, 아니면 일제강점기 문화통치[30]마냥 말 그대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는지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는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추측[31]일 뿐이고 후자는 개개인마다 관심 분야에 따라 평가를 달리할 테니[32], 그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 또한 사람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3S 정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민화 정책이라는 마땅한 실증적 근거가 없고, 사회자유화의 일부분으로 사회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를 줬다고 평가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현대 한국 문화 사업을 만드는 것의 기초를 닦았다는 평가를 받는 정책들이다. 1950~70년대, 이승만박정희 정권들을 이어가면서 극도로 경직된 한국 문화와 사회 분위기를 유화[33], 시키는 것에 일조하였으며, 지나치게 억압되며 불문율로써 여겨지던 성문화 역시, 3S 정책이 행해질 당시 해방되면서 더 개방적으로 변했다. 특히 컬러수상기가 도입되고 보급률도 빠르게 상승하여 TV문화가 이전 시대에 비해 훨씬 풍부해졌다.

또한 KBO 리그를 비롯한 프로 스포츠 리그 역시 자유화 정책의 일부로써 만들어지며, 실업 리그와 아마추어 리그만 있던 체육계의 상업화를 가속화시켰으며, 이로 인해 실업 리그, 대학 리그와 프로 리그 간의 관계로써, 인력 시장과 공급하는 하부 리그들의 연계 기틀이 점점 등장하였다.

그리고 문화 사업 협회같은 것들이 이때 등장하였으며, 이로 인해서 가요를 비롯한 여러가지 대중 문화 사업들이 더욱 거대해질 수 있었다. 대학가요제 같은 행사나 그런 곳에서 발굴된 신인 가수들 역시 거대 문화 사업과 연계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3S에 속하는 셋 모두가, 빈곤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면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일본이 1940년대에서 1950년대로 넘어오며 그랬듯이, 한국의 1980년대 역시 급격한 경제성장과 국민소득 향상으로 대중의 생활수준이 올라가며 문화소비욕구가 넘쳐났다. 3S 정책의 아이디어가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모르지만, 프로 스포츠산업 육성, 그리고 컬러TV의 확산에 맞춘 영상물, 음악 정책의 자유화 시작은 그 욕구를 만족시켜주는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마지막 S에 대해서는, 그동안 금욕적으로 묶었던 것을 자유롭게 풀어준 것에 불과했고, 조폭은 그 과정에 큰 기생충이어서[34] 이후 범죄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의도야 어찌되었건 21세기의 시점에서 평가하자면 향락을 금지시킨 독재정권이 자신들이 중요시하는 가치를 국민들에게 주입하는 것으로 국민들을 옭아매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결과적으로 1980년대 3S 당시보다 훨씬 끔찍한 지옥을 지상에다 만들어놨을 뿐이었다. 그리고 1987년 민주화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전두환 시절의 잔재라고 다시 탄압을 하긴커녕 스스로 주머니를 열어 3S를 즐겼다. 지금에 와서 우민화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문화 산업을 즐긴 당대 대다수의 대중들은 엄청나게 경직된 과거 이승만, 박정희 시절에 비해 크게 만족했으며, 그런 산업을 규제했어도 더욱 큰 비난을 가했을테니 무의미한 비난일 뿐이다. 또 그러한 문화 산업을 즐기던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처럼 정치에 아예 무관심하게 '우민화' 되지도 않았다. 정말 멍청하게 우민화가 되었다면 전두환이나 전두환 측 인물들이 1990년대 이후에도 장기 집권을 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4.2. 부정적 평가

3S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우민화 정책으로서나, 경제 부흥 정책으로서나 부작용이 있었던 정책이라 주장한다. 박정희 정권 직후, 한국의 경제는 미국과의 지나친 반목,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한 경제 개혁의 시한부화, 2차 석유 파동,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 공급 불안 등의 사건들로 인해서 유신 말기인 1978년부터 경기가 하강하고 있었고, 1980년 기준, 경제 성장율은 -1.5%가량의 마이너스 성장이 이어졌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서 한강 유역, 강남 등지에 대한 개발 정책들을 펼쳤고, 3S 정책 역시 이 중 일부였다.

하지만 다른 지역 개발 정책들과는 달리, 도리어 갑작스럽게 풀려버린 에로 영화, 유흥 업소 등의 성문화 산업들은 조폭 같은 온갖 조직 범죄들의 손에 관리되는 모습을 가져왔으며, 이는 범죄율 증가와 인신매매같은 치안 악화등의 악영향들을 불러왔다. 또한 전두환 정권 시기부터 ‘가정파괴범’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일반 가정집만 골라 강도를 저지르면서 그 집의 부녀자들을 가족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는 등[35] 흉악범죄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민생치안이 심각하게 무너진 상태였다. 그리고 이로 인해 비대해진 조폭들을 비롯한 여러 조직화 범죄들은 노태우 정부 당시 범죄와의 전쟁 정책을 만들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문화 사업을 비롯한 여러 방송계들의 육성 역시 기만적인 태도로 나왔었다. 언론통폐합을 통해서 반정부 혹은 친좌익 성향을 보이거나, 반정부 성향의 인물이 있는 여러 방송국과 언론사들을 폐쇄시켰고, 또한 연예계 역시 어느 정도 발전하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건전가요금지곡들은 1987년, 6월 항쟁을 통한 민주화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이 여파로 한국 영화의 질적 수준이 한동안 상당히 낮아졌다. 에로 영화가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면서 웬만한 연기파 배우들도 작품성과 상관없이 노출연기와 베드신을 울며 겨자먹기로 해야 했고, 에로 영화가 아니면 투자를 받지 못하니 재능 있는 영화 배우나 감독들은 좌절을 겪어야 했다. 이 때문에 1980년대는 한국 영화 암흑기라고도 불린다. 한 예로 배우 이혜영은 당시 한국 영화계에 상당한 불만을 갖고 있었는데, 1988년 매체 인터뷰에서 “독재정권이 여배우를 창녀처럼 만들었다. 남성 중심의 사고 때문에 여배우들을 정당하고 진지하게 보는 풍토가 생기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였다. 당시 기사

5. 이야깃거리

우스개로 (酒, spirit/sake 혹은 SUL/SOOL) 아니면 스파이(간첩 혹은 무장공비, Spy)를 가해서 4S라고도 한다.[36] 희석식 소주는 주정으로 값싸게 만들어낸 술이라 빨리 먹고 빨리 취해서 빨리 토해버릴 수 있었기 때문. 물론 몸에는 매우 좋지 않다. 그리고 간첩은 언제나 훌륭한 떡밥이었다.

Sorrow(슬픔, 한)를 주제로 한 부분도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 또한 있다. KBS에서 1983년 방송했던 특집 프로그램인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두고 하는 이야기. 실제로 해당 문서에도 기술되어 있지만, 당시 전두환 정부에서는 이 프로그램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대북 심리전에 이용하려는 전략이 어느정도 있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는 이와 거의 비슷한 정책으로 3F 정책을 썼다. 축구(Futebol : 포르투갈어로 축구), 종교(Fatima: 파티마의 성모 사건 참조), 파두(Fado :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의 머릿글자를 딴 것이다. 역시 국민들의 관심을 스포츠, 종교, 음악으로 돌리려는 우민화 정책의 일환이었다. 다만 아이러니한건, 정작 파두 가수들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 섰다는 것. 1974년 일어난 카네이션 혁명 당시 라디오 방송에서 금지곡이었던 주제 아폰수의 곡이 흘러나왔는데 이것이 혁명의 신호탄이었다.

시드 마이어의 문명 시리즈를 하다보면 시민들의 만족 상태를 나타내는 수치인 행복도가 나오는데 이걸 올리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극장, 영화관, 콜로세움 등을 도시에 지어주는 것이다. 스핀오프인 알파 센타우리에서는 먼 미래답게 Screen과 Sports(그리고 해석에 따라서 마지막 S까지)를 가상현실로 한방에 해결해버리는 무시무시한 연출을 보여준다.[37] 행복도가 떨어졌을 때 각종 반란과 생산성 감소가 일어난다.

혹은 마이카 시대가 신군부때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에 착안하여 Speed를 넣어 4S라 하기도 한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등장하는 두 원로원 의원들의 대화는 3S 정책의 본질을 보여준다.
GAIUS: Games! 150 days of games!
무려 150일 동안의 경기라니!
GRACCHUS: He's cleverer than I thought.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황제가 똑똑하군.
GAIUS: Clever? The whole of Rome would be laughing at him if they weren't in fear of his Praetorian.
똑똑하다고? 근위병이 두렵지만 않다면 모든 로마인들이 황제를 비웃을 것이네.
GRACCHUS: Fear and wonder. A powerful combination.
두려움과 호기심. 강력한 결합이야.
GAIUS: Will the people really be seduced by that?
사람들이 정말로 저런 것에 넘어갈까?
GRACCHUS: I think he knows what Rome is. Rome is the mob.
He will conjure magic for them and they will be distracted.
He will take away their freedom, and still they will roar.
The beating heart of Rome is not the marble of the Senate, it is the sand of the Colosseum.
He will give them death, and they will love him for it.
나는 황제가 로마를 제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네. 로마는 오합지졸의 군중이야.
황제는 군중에게 마법을 부릴 것이고, 그들은 현혹될 것이네.
황제는 군중에게서 자유를 빼앗을 것이고, 여전히 그들은 즐겁게 외칠 것이네.
로마인들의 고동치는 심장은 원로원의 대리석이 아니야, 바로 콜로세움의 모래이네.
황제는 군중에게 죽음의 경기를 보여주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황제를 사랑하게 될 것이네

그런데 이것은 리들리 스콧이 청년때는 통했던 얘기지만 현대의 연구로는, 고증을 따지면 완전히 틀린 서술이다. 이 영화의 시놉시스부터가 고증따지면 안 되지만. ○○같지만 멋있는 대사의 사례 중 하나.

국내 프로 스포츠 중 3S 정책으로 생긴 리그만 연고지 몰빵 문제에서 자유롭다. 야구야 워낙 지역에 잘 녹아들었고, 축구도 전국에 잘 퍼져 있다. 농구는 수도권과 부울경 2점 집중이[38], 남자 배구는 수도권 집중이[39] 매우 심하다.

6. 관련 문서

7. 관련 문헌

  • 스포츠와 정치 - 고광헌 저. 푸른나무. 1988.

[1] 1943년 발행된 산세이도(三省堂) 출판사의 《명해국어사전(明解国語辞典)》 초판본에서 이 단어가 처음으로 확인된다.[2] 당시 일본에서는 시온 의정서와 함께, "유대인의 3S 모략(ユダヤ人の3S謀略)"이라는 제목의 음모론이 유포되기도 했다.[3] 일본의 우익 사상가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는 GHQ에서 일하던 '가디너 참사관'이라는 사람으로부터 3R(revenge, reform, revive), 5D(disarmament, demilitarization, disindustrialization, decentralization, democratization), 3S라는 정책 설명을 본인이 직접 들었다고 주장했다.[4] 1936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동계올림픽, 1936 베를린 올림픽.[5]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6] 다만 이렇게 얻은 성과 상당수는 도핑으로 이루어졌다는 문제점이 있었고, 체제 전환 이후로 경제 문제로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줄줄이 스포츠 강국에서 나가 떨어졌다.[7] 박정희의 일본 만주군 장교시절 상관이자 정신적 스승인 일본 보수우익의 거두[8] 물론 이런것들이 단박에 바로 진행된것은 아니었고 나라마다 시기의 차이는 있었다. 미국에서는 공화당이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는 과정에서 문화적 자유주의 경향이 후퇴하는 경향이 었었기는 했지만(이것이 낙태가 미국에서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문제로 남아있게된 원인이다.), 남유럽 국가들에서는 진보정권이 1980년대에 집권하면서 더 길게 이어져서 남유럽 국가들이 성적으로 자유롭다는 이미지를 가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9] 다만 재미있게도 박정희도 젊은 시절에는 아버지 등쌀에 김호남과 억지로 결혼한게 싫어서 이현란과 불륜을 저지른 경험이 있기도 했다. 개구리 올챙이 모른 짓이었다는 것.[10] 전두환이 박근혜를 소정의 돈을 준 뒤에 푸대접을 해줬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물론 박근혜는 5공 치하에서도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만화잡지인 보물섬을 출시하여 꽤 높은 수익을 올렸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부족함없이 살았지만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11]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1980년대 말 5공 청문회때 공개되어서 전국민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보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뇌물을 수천억~수조 단위로 삥뜯어서 주색잡기에 썼다는 사실 그 자체였지만.[12] 1970년대에 박정희를 비판하는 명앵커로 이름을 날리던 봉두완이나 통일사회당 당수인 김철을 끌여들인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1970년대 당시의 스탠스를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었다.[13] 김재익 수석이나 서석준 부총리가 대표적인 예였고, KIST경제기획원이 5공 정권기때에도 높은 자유도를 지닐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언론통폐합을 했을 때에 명목상으로 유럽식 공영방송 체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나 교육정책을 폈을때도 졸업정원제나 교복자율화같은 조치도 미국과 유럽에시 실시하는 교육정책을 어느정도 현지화를 거쳐서 도입한것이다. 다만 인구정책에 있어서도 전문가들의 조언에 너무 억매이다보니(전두환이 집권했을 초에만 해도 인구과잉이 우려되던 상황이라 인구통제를 시행하라는 성향의 학자들 입김이 셌다.) 나중에는 우환이 생겼다는 아이러니도 있기는 했다.[14] 컬러 방송 시행 계획 자체는 당시 웬만한 강대국이었던 소련프랑스, 영국에 비해서도 조금 늦게 시행하는 셈이 되는 1960년대 말부터 있어 왔다. 하지만 컬러 방송을 시행하려 할 때마다 윗선에서 사회 계층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딴지를 걸어서 결국 10년씩이나 늦춰지게 되었다. 참고로 이 날은 하필이면 언론통폐합 다음 날이었는데, TBC는 컬러 방송 한 번 못하고 폐국하였다.[15] 그러나 교복 폐지후에 브랜드 의류 선호로 인해 가계 부담과 학생 간 위화감을 조성한다며 몇년못가 학교 재량으로 바뀌어 노태우 정부 후반기 때 교복이 대세가 되었다. 또한 두발자유화도 명목상은 자유화였지만 실제로는 2000년대의 평균적인 중·고등학교 두발규정과 비슷한 수준으로(물론 그 이전에는 반삭 내지 단발, 양갈래 위주였던 것에 비하면 크게 획기적이기는 했다.), 또한 학교장 재량으로 두발 길이를 단속할 수 있도록 허용한것은 여전하여, 대다수 학교에서 두발단속을 여전히 시행했기 때문에 두발자유화를 시행한다고해서 멋을 낼수있다고 기대했다가, 교사와 학교 선도부에서 학생들의 머리를 여전히 고속도로 내는 경우는 많았기때문에 이게 뭐가 두발자유화라면서 실망한 학생들이 많았다고 하며, 이후로 두발규제의 수위가 오락가락했다가, 2010년대에 진보교육감들이 대거 집권하기 시작한 뒤에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두발단속이 사라졌지만, 아직 대구, 경북을 비롯한 보수적인 지역에서는 잔재해 있다. 이들 지역에서 두발이 가장 자유로웠던 시절이 전두환때라는것은 현역이라는 얘기라는것이다.[16] 왜 대머리나 주걱턱이 문제였나 하면, 전두환이 대머리였고 이순자는 특유의 주걱턱이 웃음거리가 되었기 때문.[17] 정작 전두환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한참 후에 박용식을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과했다고 한다.[18] 이 당시에 외벌이가 일반적이었던 것도 평생직장이 보장되는 대신에 장시간 야근을 감내한다는 개념이 강했던 시절이라서 그렇다. 이 당시에는 여성이 결혼하면 남편과 애를 챙겨주느냐고 야근을 감내하기 힘들었다는 이유로 인해서 결혼을 하면 직장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만두는것이 대다수였고(실제로 1980년대 중반까지 여자가 만 25세가 되면 직장을 그만두는것이 관례였다.), 일을 하더라도 자영업이나 부업을 주로 선택했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로 평생직장이 옛 관념이 되어서 이전보다 고용이 불안정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과도한 교육열로 사교육비의 증가세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다보니 외벌이로는 사교육비 감당이 힘들어졌기 때문에 맞벌이가 대세가 된 것이다.[19] 정치적 검열은 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영화가 개봉한다고 해도 엄격한 검열에 의해 통삭제 되는 일이 빈번하였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반강제적으로 성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20] 전두환 정부는 서울 올림픽을 전가의 보도로 활용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정권에 도움이 되라고 개최했던 올림픽이 오히려 정권의 명줄을 끊어놓았다. 자세한 건 1988 서울 올림픽 문서 참조.[21] 당시 경제 수준에 프로 리그는 확실히 무리수였다. 이 때문에 기업들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여러가지 면세 혜택들을 부여했고, 한국 프로 스포츠는 수익을 내기 위한 독립적인 스포츠 산업이 아니라 재벌 회장의 취미 생활, 즉 펫 스포츠(Pet Sports)로 출발하게 된다.[22] 다만 조양은은 1980년에 체포돼서 15년을 썩었고, 김태촌 역시 1980년에 체포되어 1986년에서야 풀려났다. 그나마 1980년대에 활약한 이동재도 양은이파 계열 순천시민파의 칼에 맞고 일찍 은퇴한다. 물론 두목이 빵에 있는 동안 부하들이 활동은 했으므로 활동 자체가 아예 없었던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신상사나 조창조 같은 진정한 전국구 두목들의 하수인에 가까운 자들이었으며 3대 패밀리라는 것 역시 언론이 만들어낸 과장에 가깝다.[23] 비슷한 예로 축구를 좋아하는 시진핑이 있다.[24] 김대중 이전에 필리핀의 베니그노 아키노가 귀국하자마자 암살당한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25] 86 아시안게임과 88 올림픽에 대한 성공적 개최에 대한 압력은 그야말로 전 사회적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언론과 권력은 이를 이용했고, 이를 통해 모든 반대 세력을 무력화 시키는 명분으로 삼았다.[26] 다만 이런 누드 사진들도 미국이나 유럽에서처럼 성기를 완전히 드러내는 수준은 못되었고, 그저 세미 누드에 불과했다. 현대 한국에서 포르노 그 자체가 완전히 합법이 된 일은 없었다.[27] 단, 이것도 항상 그런 것은 아니라서 68혁명 이전까지는 동독의 성문화가 서독보다 개방적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사실 소련 초기를 봐도 (각국 국력의 전시장으로 쓰이던 스포츠는 몰라도) 영화나 성문화는 서구권보다 훨씬 진보적이었다. 문제는 공산주의 특유의 사회적인 경직성으로 인해 혁명 초창기에 제시되었던 진보적인 사고관들이 80년 동안 더 발전하기는커녕 되려 퇴보했고, 종국엔 자유진영에게 역전당했다는 것이다.[28] 즉, 장기적으로는 점진적인 자유화를 허용할 생각이었으며, 단지 급진적인 개혁의 위험을 줄이고자 가장 국민적 요구가 컸던 3S 영역에 대해 선제적으로 완화했던 것인지.[29] 즉, 애초부터 자극적인 영역만 허용하여 국민들의 관심을 돌릴 뿐 그 이상에 대해서는 고려조차 하지 않았는지.[30] 예컨대 일제강점기조차 중추원을 통해 조선인들을 정치에 참여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3.1 운동 이후 문화통치 시대에는 문관 총독 임명을 제도화하고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일제강점기 때 진정 조선인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한 정책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제강점기 중추원은 그야말로 이름뿐인 형식적인 기구로서 조선인의 정치참여는 거의 불가능했으며, 문화통치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때 실제로 문관이 조선총독에 임명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3S의 실존성을 긍정하는 입장에서는 일제강점기 때 중추원이나 문화통치가 그저 조선인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한 기만적인 조치에 불과했던 것처럼 군부독재정권 시대의 일부 문화검열 완화나 문화 장려도 정치적인 무관심을 조장하고자 의도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31] 전두환은 1987년에 퇴진했고, 그 다음 대통령은 노태우였으며, 정치인을 대놓고 풍자하는 수준의 완전한 자유화는 심지어 민주화 이후에도 한참 뒤에 이뤄졌다. 물론 결과적으로 전두환이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고, 그처럼 드러난 사실을 두고 비판하는 것은 타당하지만, 내심이 어땠는지는 전두환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문제다. 천안문 학살로 자유화를 탄압한 중국이 G2로 성장했고 페레스트로이카로 자유화를 선택한 소련이 공중분해된 걸 보면, 옳고 그름을 떠나 오랜 독재정권으로 사회질서가 왜곡되어있던 상황에서 급격한 사회 자유화는 예기치 못한 결과를 낳았을 수 있다.[32] 전두환 정부가 적극적으로 밀어준 스포츠나 대중영화 분야에 종사하던 사람들은 그 이후 시대에 비해 딱히 차이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 정치적 뉘앙스만 조심하면 그만이던 당대에 비해 오늘날 다종다양한 영역에서 이뤄지는 정치적 올바름에 의한 문화검열이 더 피부로 와닿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시민운동이나 정치평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기만적으로 느꼈을 테고. 일반 시민들 가운데도 예컨대 일본 문화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김대중 때가 가장 자유화된 시절이라 느꼈을 테지만, 군부정권의 국뽕 강제에 거부감이 없는 사람들은 그때야말로 '민족문화를 창달'시켰던 시기였다고 회상할 수도 있다. 여기서 누가 맞고 틀리고를 논할 수는 없고, 민주주의는 다양한 의견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이다.[33] 장발 단속 폐지, 교복 폐지, 미니스커트 단속 폐지, 야간 통행금지 폐지 등.[34] 어느 나라 군사정부라도 정권을 확고하게 잡은 다음에 조폭을 일부러 키워주지는 않는다.[35] 당시 여성들이 성폭력 피해를 당해도 성적 수치심에 신고를 꺼리던 시절이라, 신고하지 못하게 하려는 입막음 효과도 노린것.[36] 실제로 3S의 원산지인 일본에서 술은 사케다.[37] 동영상의 나레이터가 등장 지도자 중에서 가장 독재자에 가까운 인물이다. 인용구는 개인의 관점에서는 극기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국가적인 관점에서 보면 미디어 차원을 넘어서 모든 개인의 오감이 받아들이는 신호에 대한 완벽한 통제를 이야기하고 있다.[38] 비 부울경, 수도권 구단은 강원도 연고인 원주 DB 프로미, 대구 연고인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39] 비수도권은 대전 삼성화재 블루팡스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로, 전부 충청남도권에 있다. 여자도 크게 다를 바 없었지만 지금은 타 종목과 비슷하게 1대 1에 가까워졌고, 비수도권 구단 분포도 충청 쪽의 대전 정관장, 호남의 광주 페퍼저축은행, 영남의 김천 한국도로공사로 남자보다 훨씬 고르게 퍼져 있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