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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da036><colcolor=#fff> 김수정 金水正 | |
출생 | 1950년 7월 31일 ([age(1950-07-31)]세) |
경상남도 진주시 | |
본관 | 경주 김씨 |
가족 | 5남 5녀 중 막내 배우자 유미희(1969년생)[1] 장녀 김유진[A] 장남 김해원(1979년생)[A] 차녀 김시하(2003년생) 손자 김이안(2010년생) |
학력 | 진주금성초등학교[4] (졸업) 진주동명고등학교 (졸업) 진주농과대학 (축산학 / 중퇴) 인덕대학교 (만화·애니메이션학과 / 전문학사)[5] |
직업 | 舊 (주)둘리나라 대표[6], 만화가, 애니메이션 감독, 대학교수 |
데뷔 | 1975년 소년한국일보, <폭우> (신인만화공모 당선작)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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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만화가. 일명 둘리 아빠. 한국 만화계에 한 획을 그은 만화가. 대표작은 아기공룡 둘리.어린이 만화의 선두주자로 현재 본인의 작품 제작과 캐릭터 라이센스, 출판을 관리하는 업체 (주)둘리나라의 설립자이자 구 대표이기도 하다. 현 대표는 배우자 유미희다.
어린이 명랑만화가로 주로 알려졌지만 서민들의 모습과 전쟁의 아픔, 사회적 이슈 등을 특유의 서글서글한 그림체로 꼬집어내는 작가로 아기공룡 둘리 연재 당시 일어난 걸프전에 대한 에피소드는 슬프기까지 하다.[7]
이외에도 현실비판적이거나 시궁창스러운 슬픈 이야기 등을 작품에 종종 집어넣는 스타일의 작가였다. 날자 고도리나 다른 작품을 봐도 그저 웃으며 볼 수가 없을 정도이다.
또한 자투리반의 덧니들은 30여 년 전에 츤데레 및 여러 오덕적인 재미를 넣은 작품이기도 하다.
2. 생애
2.1. 만화가가 되기까지
1950년 7월 31일 경상남도 진주시에서 5남 5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께서 사고로 다치면서[8]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신문팔이, 껌팔이, 아이스케키 장사 등 날품팔이를 하던 시절을 겪었다. 그 와중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축구를 소재로 한 52쪽 짜리 만화책 <저 언덕을 넘어서>를 그려 만화와의 인연을 시작해 중~고교 때는 <금발의 토이>, <아라비안 나이트> 등을 그리는 한편 습작을 거듭해 꿈에 차근차근 나아가게 되었다.그 시절 만화가를 한다고 했다가 큰 형과 말다툼하여 나중에는 죽어라 얻어맞았던[9] 적도 있다. 이로 인해 가족들과의 불화가 심했고 두 차례 가출을 시도했으나 전부 실패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역전에서 깡패들을 만나 포기해 버렸고, 둘째는 김기백[10]을 만나기 위해 무작정 상경하다 집을 못 찾아 포기한 것이었다.
1960년 초반에 나온 동물야구왕[11]이란 만화책에 나온 독자 코너에 어렸을 적 김수정이 보낸 그림(출처는 2012년 6월 8일자 KBS2 VJ특공대에 나온 고전 희귀만화를 3천 권이상 소장한 수집가 오경수가 모은 책).
결국 중고등학교를 마친 뒤 진주농과대학(현 경상국립대학교)를 중퇴하고 군 생활을 거쳐 겨우 1975년에 합동과 만화 독점에서 양대산맥을 이루던 소년한국일보 공모전에 낸 <폭우>가 당선되어 만화가로 데뷔했으나 도무지 벌어먹을 길이 없었다. 당시만 해도 신촌 대통령이라는 악명으로 유명하던 이영래가 만화가들을 대충 부려먹으면서 공장만화 체제를 갖추며 합동출판사라는 이름으로 만화계를 독점하던 시기였는데, 김수정도 여기로 갔으나 무시당했고, 그나마 편집장이 고향이 같은 강철수를 문하생이라도 하려고 소개시켜줘서 강철수를 찾아갔지만 강철수는 김수정의 그림을 보곤 그림은 40점, 글은 60점이라며 나가서 농사나 지으라는 모욕적인 말을 하며 거부했고, 김수정도 격분하여 뒤도 안 돌아보고 뛰쳐나왔다. 지금도 강철수와는 그다지 사이좋게 지내지 않는다고 한다. 결국 만화책을 냈지만 일본만화를 대놓고 표절해 그려야 했다. 덕분에 그림체부터도 도저히 김수정 그림체랑 다른 일본 작화체 야구만화라든지 여러 만화를 그렸는데 김수정 본인도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 기억으로 여겨 후회스럽다고 한다.
1978년경에 생계를 위해 윤성실업이라는 애니메이션 하청업체에서 일하다가 창의성이 결여된 제작 환경에 환멸을 느껴 전기인두를 파는 세일즈맨으로 일하게 되었다. 그나마 기본급으로 월 10만원을 받았으니 공장 만화가와 애니메이터 때보단 훨씬 생활이 나아졌다. 하지만 스스로 말하길, 세일즈맨으로서 재능은 최악이었다고. 회사 일을 하다가 시간이 나면 공책으로 그림을 그리며 연습을 했는데, 친하게 지내서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던 후배 세일즈맨이 이걸 보고 그림이 아깝다면서 형은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몇번이나 말했다고 한다. 심지어 회사 술자리와 개인적으로 김수정에게 찾아와 한잔할때도 간곡하게 권유했다고. 결국 김수정은 3달만에 세일즈맨을 때려치고 만화가로 돌아왔다. 지금도 그 후배와 종종 만난다고 한다.[12]
당연하게도 가난은 늘 붙어있었다. 결국, 생활고를 못 견디고 결혼을 약속했던 동거녀(전 아내)는 처가인 부산으로 돌아갔고 김수정은 겨우 차비를 빌려서 아내의 친정집으로 갔다. 그러자 아내의 오빠되는 이가 나와서 "돈도 못 버는 만화가 때려치지 않으면 내 동생 못 데려간다!"고 일갈했다고 한다. 이에 김수정은 "당신 동생은 포기해도 만화는 포기 못한다"며 그냥 나와버렸고 집으로 올 차비도 없어서 노숙을 해버렸다고 한다. 결국 시계를 전당포에 맡기고 받은 돈 1,000원으로 서울까지 돌아올 차비 700원을 쓰고 300원으로 라면을 사서 배고픔을 달랬다고 한다. 어쩌면 이때의 갈등이 나중에 이혼 및 여러가지 가정적 일을 예고했을지도 모른다.
이런 생활고 속에서 틈틈히 만화를 그렸지만 겨우 연재를 해도 원고료조차 못 받기 일쑤라서 돈이 없으니 당시 쌍문동 공동묘지 앞에 자리잡은 달동네같은 곳에서 살아야 했다. 그 와중에 동갑내기 친구이자 만화가 동료인 김동화(본명:김종철)를 알게 되었다. 둘 다 턱없이 가난하던 시절이라 술 한잔 할 돈도, 커피 한잔 살 돈도 없어서 어찌 시간이 나면 찾아온 김동화와 같이 공동묘지 근처 풀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며 만화와 여러 이야기를 했다고 회고했다. 반대로 김수정이 김동화가 살던 곳으로 찾아갈 때도 마찬가지라서 마포의 한 쪽방을 빌려 겨우 살아가던 김동화는 맞이할 곳이 없으면 근처 아파트 단지 풀밭 위에 누워서 서로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김동화가 회고하길, "당시 수정이에게 하늘 바라보면서 '배고프고 돈 없을 땐 만화가 때려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 란 말을 하자. 수정이는 피식 웃으면서 누워 하늘을 바라보면서 '야, 돈을 보면 돈밖에 안 보이지만 작품은 계속해서 기억되기 마련이야' 지금 생각하니 그놈 참 명언 잘 남긴 거다."
2.2. 데뷔
결국 어찌어찌 1979년에서야 결혼식을 올리고[13], 비로소 자신의 첫 작품[14]이라고 할 1남 4녀 막순이를 연재하게 된다. 그런데, 이 만화를 연재할 당시 대선배 만화가인 길창덕이 만화가들 모임에서 그를 보더니 차갑게 "자네, 일본 만화 어느 걸 베꼈지?"라고 물었고, 이 말에 김수정은 베껴 그릴 바에야 만화가를 때려쳤을 겁니다. 확고하게 대답했다. 이 대답에 길창덕은 "그래, 역시 그렇지. 자네의 독창적 그림체였지? 미안하네. 한번 확인해보고자 일부러 차갑게 말해보았네"라고 웃으며 말하고, 그를 인정해주었다.이렇게 길창덕의 인정도 받고, 꾸준히 작품을 그리긴 해도 그다지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다. 덤으로 대머리 캐릭터를 그렸다가 1980년 초반에 전두환을 연상케한다는 죄목으로 작품도 강제 종료되는 일까지 겪게 된다.[15] 그나마 O달자의 봄이 영화화가 될 정도로 인기를 얻어서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때, 아이가 태어나고 처음으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외식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아기공룡 둘리를 보물섬에 연재하게 된다. 연재 전에 둘리를 친구인 만화가 김동화에게 보여줬더니 대뜸 "뭐야? 이 악어 새끼는?"하고 물었다고… 발끈한 김수정은 "야! 공룡이다. 이게 어디가 악어로 보이냐?"고 했지만 김동화는 "이런 거 인기 못 끌 거 같다. 우리 내기하자"고 했고, 몇 해 뒤에 그 내기로 술 한판 얻어먹었단다.
2.3. 둘리의 아빠가 되다
사실 둘리는 연재 초기에는 그렇게 인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1983년 8월 24일 오후 2시쯤, 무더운 여름에 아기공룡 둘리 6화를 아르바이트하는 문하생들[16]과 같이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원고를 다 끝낼 무렵에 수고했다면서 문하생에게 시원한 콜라라도 사오라고 심부름을 했는데 이 친구가 그만 뭔 심보인지 콜라를 엄청 흔들면서 가져왔다. 당연히 콜라를 따려니까 콜라가 솟구치면서 원고까지 흠씬 젖었고 김수정과 다른 문하생들은 충격과 공포에 비명을 질러버렸단다. 그 문하생은 그 날부터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고.. 이 에피소드는 바로 둘리에서도 쓰이게 된다.[17]그래서 별 수 없이 다시 원고를 그려야 했는데 이 때부터 이상하게도 인기가 생기기 시작해서 보물섬 표지를 장식했고 인기 투표에서도 독보적으로 높은 투표수를 자랑하게 되었다. 김수정은 둘리를 대본소 업체에 팔지 않고, 당시에는 거의 유일한 연재만화 판매 업체인 요요 코믹스를 통해 단행본을 냈는데 요요 코믹스 측이 가장 많이 팔리는 단행본이라면서 꽤나 두둑한 판매 수익비를 줬다고 한다. 김수정은 이 때 만화가도 이렇게 돈을 많이 벌 수 있구나 라는 느낌이 왔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아기공룡 둘리가 TV애니메이션으로 나왔을 때, 자신의 작품 성향은 찾아보기 힘든 아동용 애니로 탈바꿈 된 걸 보고 "이런 건 둘리가 아니야"라며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하며 아쉬워했다는 이야기도 있다.[18][19] 당시 TV애니메이션이 특집 2부까지 방영을 마친 후 50부작으로 제작 제의를 하였지만 원작과 애니메이션과 갭이 크다는 이유로 김수정이 거절하는 바람에 두번다시 KBS에서 애니메이션은 제작되지 못했다.[20] 그에 대한 반발인지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에서 더 시궁창스러운 이야기와 성적인 코드 등을 도입했다가 제대로 흑역사 취급을 받게 된다.
물론 김수정의 그림체가 철저하게 아동용 만화에 특화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TV 애니매이션 버전의 아기공룡 둘리는 아동용 애니로 탈바꿈된 것이다. 그냥 생긴 대로 갖다 붙인 셈이다. 내용이 아동용 만화와 별 상관없어 보이는 날자 고도리 역시 그림체 때문에 아동용 만화로 보인다.
텐아시아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이혼으로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것에 따른 스트레스도 엄청났으므로 그런 어두운 상황이 만화에 투영된 것이라고 한다. #
얼음별 대모험을 만들 때 즈음 "둘리는 어디서 살아요?" 라는 어떤 아이의 편지를 받고 마음을 다잡게 되었다고.
아기공룡 둘리는 그에게 부와 명예를 안겨 준 최고의 히트작이지만, 아기공룡 둘리의 인기 때문에 아리아리 동동, 쩔그렁! 쩔그렁! 요요[21], 볼라 볼라 같이 둘리와 같은 시기에 연재하던 다른 작품이 묻혀버린 면이 없지 않았다. 본인도 그 점에 대해서 상당히 아쉬워하고 있다고. 심지어 아리아리 동동의 연재가 중단된 이유는 당시 편집장의 "둘리보다 재미없다"는 한 마디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표작들 중 일곱 개의 숟가락은 드라마화, 티쳐X는 개그프로의 꽁트화가 되어서 인기를 끌었다. 2008년 말에 새로이 제작된 아기공룡 둘리 TV 애니메이션은 아동에게 충실한 애니메이션을 기본으로 만들었다… 라고 언론에서 밝혔는데 거짓말이었다. 과거 김수정 스타일대로 제작되어서 어른도 즐길 수 있는 내용이다.
특유의 긴 파마머리로 유명하며 작중 가난한 만화가 김파마로 자신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이 파마 머리의 유래는 80년대 장발 단속 당시에 시도한 자신 나름의 저항이었다고 한다. 실제 머리는 긴데 파마 때문에 짧게 보여서 장발 단속을 피할 수 있어서 라고 하는데, 다른 인터뷰에선 머리를 쥐 파먹듯이 잘린 적도 겪었다고 했다. 결국 장발 단속을 완전히 피하지는 못한듯.[22] 그리고 어느덧 나이가 들어서 일흔이 넘어서 노년기가 된 지금은 긴 파마머리를 포기하고 짧은 머리로 활동한다.
1990년대 중반쯤에는 어린이 교육 프로에도 출연하여 기초적인 그림 그리기 기법을 가르치는 코너를 진행하기도 했다.
2.4. 그 후
하지만 90년대에는 만화가 활동을 멈추고 둘리나라 회사 대표로서 회사 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사실 90년대 중후반에 새 만화 연재도 기획했지만, 출판사들이 베이비사우루스 돌리의 실패 때문인지 둘리는 한물갔다면서 연재를 받아주지 않았다고 하여 아쉬움을 나타낸 적도 있다. 1999년에 스포츠서울에서 아리아리동동의 리메이크판을 잠깐 연재한 적이 있긴 한데, 김수정 골수팬들조차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 퀄리티로 별 주목도 못받고 한달도 채 안돼서 연재가 중단되기도 했다. 어떤 의미로는 베이비사우루스 돌리보다도 더한 진 흑역사... [23] 21세기에는 대원씨아이의 잡지 팡팡에서 둘리를 몇 화 기고하고는[24] 그 후 만화 연재는 완전히 포기한 듯 하다. 다만 2016년 현재까지 조선일보에 작은 2컷만화로 둘리의 영어교실같은 걸 연재하였다.현재 회사 둘리나라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데 기업인으로서 오히려 돈을 더 많이 벌고 있다고 한다. 1998년 중앙일보 인터뷰에선 둘리나라로 벌어들인 순수익은 당시 200억이 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부 작품에 한해서 애니메이션 감독을 하였는데 이런 이유는 송정률 감독이 TV 인터뷰에서 김수정 감독의 언급을 까먹고 하지 못하여 김수정 작가가 이후로 토라져서 본인 스스로 애니메이션대학을 나와서 직접 감독을 맡아 본인 스스로 제작하였다고 한다.
2016년으로 치자면 600억 가까운 수익이었고 이후 여러 수익을 더 거둔 건 당연하다. 극장판 얼음별 대모험은 그다지 수익을 얻지 못했는데 항목을 참고할 것. 그 외에도 1998년부터 2년간 한국만화가협회 부회장을, 2000년부터 이두호의 뒤를 이어 2년간 만화가협회장까지 지냈다.
2005년부터 인덕대학교에서 캐릭터 디자인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몇년 못하고 그만두었다. 참고로 당시 이진주가 학과장이었다. 김수정이 애니메이터로 잠시 일하기는 했지만 1970년대의 일이다보니까 디지털 애니메이션 기법을 익힐려고 직접 인덕대에 입학한 것인데 이진주 작가에게 배운 기술로 이후 NEW 아기공룡 둘리의 감독을 맞아 제작하였다.
종영 이후 새로운 극장판은 제작사 문제로 제작 중단되었고 이후 가족들과 함께 캐나다 벤쿠버로 이민하였고 이후 혼자 한국으로 돌아와서 작업실에서 활동하다가 가끔 가족들이 있는 캐나다로 간다고 한다. #
2019년 연말에 동화 작품을 발표했는데 제목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이다. 해당 작품을 내놓게 된 계기는 7년 전 당시 초4였던 늦둥이 딸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2020년 기준 고2라고 한 걸 보아 2003년 생인 것으로 보인다.기사
2021년 9월 10일자로 "사망유희"라는 작품으로 작은 악마 동동[25] 이후 20년 만에[26] 만화 신작을 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소재는 귀신/생사의 양면. 사실 해당 작품은 후술하는 "검열"로 뒤덮이던 시절 구상하던 것들이다. 또한 2014년 예정된 극장판이 무산되면서 아쉬운 마음에 번외편의 형태로 단행본을 출간할 예정이라고도 밝혔다. 참고로 2020년부터 둘리나라에서 도서 출판 사업을 시작해서 둘리나라에서 발행할 것으로 보인다.
2023년 얼음별 대모험의 리마스터링판 개봉을 기념하여 제작 무산되었던 아기공룡 둘리: 방부제 소녀들의 지구대침공이 만화책으로 출간된다고 한다. #
2023년 5월 10일 유퀴즈에 출연하였다.#
3. 이모저모
- 선릉역 주변에서 자주 보인다고 한다.
- 독실한 불자인 듯 하다. 덕분에 아기공룡 둘리 만화책 작중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이 많이 나오기도 하고, '윤회'가 언급되면서 고길동의 전생(?)을 표현한 듯한 고길동 머리를 한 동물들이 보여지는 에피소드와, 신자들에게 시주를 받아서 탱자탱자 살겠다는 둘리를 웃는 낯으로 아주 호되게 엿먹이는 스님이 나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27] 90년대 아기공룡 둘리 극장판에서도 둘리가 핵충에게서 도망가는 고길동을 보고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극락왕생 하이소!'라고 읊는 장면이 있던걸 보면 이 영향일듯. 그래서 "그는 언젠가 자신이 겪은 아픔과 경험, 여기에 먼저 살았던 선인의 지혜를 불교적인 색채로 결합시킨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 동안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현재 무려 70대인 1950년생이다. 그러나 세월을 역시 이길 수 없는지 머리칼도 많이 빠져서 그의 상징이던 파마 머리를 포기했고 짧은 머리로 잘랐다. 그리고 2019년에 칠순을 맞았다.
- 84년작인 자투리반의 덧니들은 요즘 보면 아주 모에 및 츤데레라고 해야할 정도로 오덕들이 좋아할 소재이다. 여주인공 양을채는 토라도라!의 여주인공 아이사카 타이가처럼 츤데레에 작은 키에 빈유(...) 놀랍게도 20세기 시절 80년대 만화임에도 작다고 한마디해준 남주인공 석태에게 분노의 공격을 가하고 석태가 부랴부랴 "정말이야. 작다는 건 바스트가 작다는 것도, 히프가 작다는 것도 아니야! 믿어줘!"라는 대사를 하며 변명하려 든다. 극중 어린 외모에 작은 키에 컴플렉스를 가져 방에 홀로 들어가 여자수영복 입고 괴로워한다든지 여러 장면은 요즘 봐도 어색한 게 없을 정도. 실제 여고생들을 취재한 덕분에 여고생의 심리 묘사도 뛰어나다.
- 1990년에 첫 부인과 이혼한 후 1996년에 현재의 부인을 만나서 재혼했다. 서로 나이 차이가 무려 20살이나 난다고... 이 일로 아들과 첫 부인과의 연락이 끊겼다.
- 야빠이다.[28] 만화가 야구단에서 활동하기도 했고, 과거 해태 타이거즈 팬으로, 김봉연 선수의 팬이다. 역시 동향인 만화가 강철수도 해태빠다. 김봉연 선수의 팬이기에 연고지가 경남권이었던 롯데 자이언츠 팬은 아니다. 아기공룡 둘리나 베이비사우르스 돌리에서도 야구 얘기가 한두편 나오며, 김봉연은 김몽연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 2015년 7월에 둘리 뮤지엄 개관을 기념으로 노컷뉴스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제일 아끼는 캐릭터가 희동이라고 답하였다. 관련기사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아픈 손가락이 없다며 각 캐릭터의 출연 분량을 공평하게 나누려고 신경쓸 정도로 모든 캐릭터들을 아끼지만 그 중에서도 어린 놈이 눈에 제일 밟힌다고 한다.
- 많이 부각되지는 않지만, 사업가로서도 면모도 출중하다. 캐릭터 라이센싱 사업에 대한 개념이 희박하던 90년대 시절, 작가 본인이 직접 자신의 캐릭터를 관리하기 위해 둘리나라라는 사업체를 설립하고 여러가지 사업을 전개한 점은 후에 등장하는 뽀롱뽀롱 뽀로로등 국산 만화 캐릭터 사업의 기반을 닦았다는 평가.#
* 이후 작가도 본인 인터뷰에서 둘리의 악행을 보며 마치 기생충에 비유한 것에 대해 어린 아이의 관점과 길동의 관점의 차이라고 밝혔지만 부분적으론 작가 자신이 말하고자하는 메시지와 실제 어느정도 성장한 독자가 받아들인 해석이 달랐기에 원작자의 작품 내 연출 문제와 적절성 여부와 더불어 어불성설과도 비슷한 이유로 포함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가 자신이 둘리 일당을 항목에 써져있는 만행처럼 연재 당시에 비호감으로 묘사하여 그려놓고선 저런 말을 한다는 건 굉장히 어불성설이기도 한데다 사실 작가가 대표적인 원인이기도 한데 이걸 걸고 넘어지진 않는다는 점도 큰 편이다.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인 날자 고도리의 주인공 고도리도 딱 무능하지만 그러면서도 비호감으로 묘사되는 게 어쩌면 작가의 성향과도 관련 있는 부분일지 싶은 부분.
둘리 일당들이 그동안 친 사고에 대한 인과응보인지는 몰라도 보통 아동 만화들에선 이런 캐릭터들은 속으론 그래도 애정이 있어서 보호도 해주게끔 표현을 보통 하지만 원작 결말부까지도 신세를 진 고길동과의 관계가 끝내 애증도 아닌 증오만 남게 묘사되게 전개된 건[30] 아동 만화인 점을 감안하면 아쉽긴 한 편.[31]
4. 검열과의 전쟁
사실 그 시절은 '심의'가 아니라 '검열'이었고 성적인 내용 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내용도 당연히 포함됐다. 그런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검열하면서 작가들은 만화 아이디어가 없어서 못 그린 게 아니라 검열 때문에 못 그렸다.
둘리 애장판 작가 인터뷰 겸 책 서문
둘리 애장판 작가 인터뷰 겸 책 서문
아동 만화가라는 이미지 때문에 심의가 적었을 것 같지만 상술했듯이 김수정 만화가는 본래 성인 만화가로 당시 시대 기준으로 파격적이거나 암울하고 성적인 코드들과 당대 독재정권을 풍자하는 정치적 코드들을 자주 삽입했다. 그러나 김수정이 한창 만화가로 활동하던 시기의 초입인 1970~1980년대는 이른바 유신정권, 5공 정권 시절로 신문, 방송, 소설, 영화, 만화, 연극, 가요 등 가릴 것없이 문화부문에서 검열이 보편적으로 자행된 시절이었던지라 이런 요소들을 내놓고 그려내면 심의에서 짤리기 일쑤였으며, 이른바 민중만화가처럼 비제도권에서 만화를 그렸던것까지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검열로 많은 시달림을 받으며 많은 고충을 겪었고, 1987년 6월 항쟁으로 정치적인 검열이 어느정도 해금된 뒤에도 YWCA로부터 시달림을 많이 당하기도 했다.
데뷔작인 1남 4녀 막순이 이후 김수정을 알린 작품 중 하나인 아담 그리고 이브가 정부에 의해 검열된 대표적인 피해사례로 14회만에 연재가 중단되었다. 이유는 작 중 대머리 인물이 전두환 전 대통령을 닮았다는 것으로[32] , 이주일등과 마찬가지로 당시 전두환의 외모와 관련된 탄압이다. 당시 도봉동에 거주했는데, 당시에는 도봉동은 시골이었고 집엔 전화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도 못 찾아왔었는데 느닷없이 편집장에게 호출이 와 가보니 주간중앙 편집부가 뒤집어 져 있었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신군부가 들어서기 전이었는데(5.17 내란 이후 8.27 통일주체국민회의 이전), 이 때문에 국보위에서는 ‘왜 이런 게 누설됐나, 사전에 정보가 흘러간 것 아닌가’라면서 난리가 났었다고 한다. 그래서 주간중앙이 완전히 뒤집어졌고, 중앙 일간지에 사과문도 냈으며 김수정을 짤랐다고 한다. 이러한 에피소드를 보면 이주일과 달리 국보위가 직접 나서서 탄압한 일로 보인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와 YWCA에게도 창작 도중 괴롭힘을 당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꽤 맞는 말이다. 특히 YWCA 건은 얼음별 대모험이 개봉할 당시 인터뷰하던 씨네21같은 잡지에서도 그냥 YWCA 이름으로 통일해 보도했다. 정확히는 서울 YWCA 만화 모니터 모임이 했으며 서울YWCA 어린이부가 관할한다. YWCA항목에서도 나오듯이 월간 키노 1998년 1월호에 나온 이들의 반론글(여길 악의 소굴처럼 엄청 비판하던 박무직에게 반론한 글)에서 이 이름과 같이 YWCA 소속임을 밝히고 있긴 하다.
확실히 이 단체에게 엄청 시달림을 받았었다. 둘리가 "아이들이 너무 버릇없고 고길동도 너무 폭력적이다."라며 저질 불량만화로 매도당하면서 1980년대 후반경에 여기서 소환하여 "이렇게 그리지 말라고~" 하자 열 받은 나머지 나중에는 "이렇게 그리면 어쩔 거냐? 날 처벌할 거냐!" 이런 마음으로 당시에는 꽤 파격적인 내용도 넣었다고 하신다.
이것은 YWCA 국한 에피소드가 아닐 수도 있다. TV 인터뷰에서도 당시 80년대 수준으로 둘리 일당의 악동 행위는 충분히 불량아, 문제아의 영역이었다고. 당장 현실에서 저런 자식 키우라면 충분히 문제아이긴 하지만... 기저귀만 입고 있는 희동이가 외설적이라는 딴지는 충공깽이다. 1980년대 후반 당시 김수정은 이런 지적에 너무나도 열뻗쳐서 "당신들은 아기 기저귀 갈아입힐 때도 외설적이라 생각하시나요?" 라는 말로 반격했더니만 한다는 소리가 일상과 만화는 다르다는 말같지도 않은 이유를 들먹였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작중에서 도우너는 고길동을 애완동물로 취급하며 반말을 쓰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고, 게다가 의외로 둘리, 또치도 고길동에게 존댓말을 쓰는 모습도 보인다. 게다가 위에서 말한 대로 부도덕적이며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연재 당시 간윤 사전심의를 거쳐 일부 장면이 이미 삭제된 상태였다.
이를테면, 희동이의 고추를 때린다든지 하는 장면이 들어갔는데, 검열이니 뭐니 이들 잔소리를 피하고자 환경오염 때문에 돌연변이 무가 살아 움직이는 꿈의 세계에서 희동이 바지를 벗겨 꼬추를 때리면서 자연을 오염시키지 말라는 시도를 했다. 그야말로 교훈적인 내용을 추가하는 고단수 명안(…)을 내놓아서 이 단체들이 별다른 말도 못했단다. 존나좋군?
성교육 만화인 귀여운 쪼꼬미까지도 저질 불량만화로 매도당했다.[33] 더 골때린 건 1991년경에 이 만화를 추천만화로 선정하는 통에 아주 열터져 씩씩거리셨단다. 1997년 7월 27일 딱 1회하고 사라진 서울 애니메이션 엑스포[34]에 나와 귀여운 쪼꼬미 홍보 부스에서 사인회도 하셨는데, 당시 사인을 받은 어느 이가 "그 단체에게 시달림 많이 받으셨다고 하셨는데, 대체 어느 정도였나요?"라고 질문하자, 방금 전까지 미소지으면서 답변하던 얼굴이 확 달라지면서 "거기 이야기도 하지 마세요"라며 고개를 돌렸기에 입을 다물었던 적도 있었다.
5. 활동 목록
5.1. 주요 작품들
데뷔: 1975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공모 당선(폭우)[35]- 1남 4녀 막순이(1979)
- O달자의 봄(1981) - 1981.1~1984.9 여고시대 연재.
- 볼라볼라(1981) 1981.3~1983.9 어깨동무 연재
- 날자 고도리(1982) 항목 참고할 것.
- 신인부부(1982) - 여성 월간지 연재만화인데 부부 이야기이다보니, 잠자리 이야기랑 가정이야기 등 가벼우면서도 때론 무거운 소재를 다룬 수작. 아내 가슴 노출 같은게 나오지만 이 시절 이런 노출은 관대하게 넘어가서인지....만화책은 성인만화라고 나왔지만. 여기 한 에피소드는 집에 돌아가면 아내가 반드시 죽은 척을 하고 있습니다.를 아내가 훨씬 먼저 보여준 바 있다...
- 아기공룡 둘리(1983)
- 쩔그렁 쩔그렁 요요(1983~84),(1986~1989) 새소년에 연재하다가 새소년이 망한 뒤 중단하고 재창간한 새소년에 다시 새롭게 연재했다.
- 미스터 점보(1983)
- 자투리반의 덧니들(1984)
- 천상천하(1984) 월간 여학생 연재.
- 미스터 제로(1984) 월간 학생과학[38] 창간호부터 1985년 12월호까지 연재.
- 아리아리 동동(1985) 87년까지 소년경향 연재. 2001년에 작은 악마 동동으로 후속이 스포츠서울에 연재했다가 1달도 안돼 종료했다.
- 꼬마인디언 레미요(1986)
- 소금자 블루스(1987) 1987~1990년까지 월간 하이틴 연재.
- 일곱 개의 숟가락(1990)
- 크리스탈 유(1990)
- 사왕천자 홍도(1993)[40]
- 티처-X(1994) 영챔프 연재[41]
- 베이비 사우르스 돌리(1994)
- 신혼부부
- 한국만화거장전 보물섬 특집 - 이상한 아기 정의의 응징자(2016)
- 모두 어디로 갔을까? (2020)
- 사망유희 (2021)
5.2. 기타 활동
- 1987년: 일요일밤의 대행진 코너 '배추씨' 제작
- 1995년: (주)둘리나라 설립, 우리나라 최초 만화우표(둘리우표) 발행
- 1996년: 아기공룡 둘리 (얼음별 대모험) 제작
- 2000년: (사)한국만화가협회 회장
- 2008년: 2008년 판 아기공룡 둘리 애니메이션 총 감독
좋은 만화영화상 대상수상 - 문체부 주관
한국영상대상 애니메이션상 수상 - 일간스포츠 주관
영화평론가상 수상 - 한국 영화평론가 협회 주관
[1] 류미희라고 알려졌으나 둘리나라 대표이사직엔 유미희라고 올라와있다. #[A] 전처 사이의 자녀.[A] [4] 학교 본관 내에 둘리 인형과 도우너 인형 등이 있다.[5] 現 웹툰만화창작학과[6] 현재는 아내가 대표.[7] 연재 만화의 특성을 살려(?) 에피소드 소재 자체를 당대의 핫이슈와 곧잘 엮어내기도 했다. 위 이라크 에피소드나, KAL기 에피소드 등. 시사 만화가로서의 센스도 지니고 계신 듯.[8] 저 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거나, 김수정이 성공할 때까지 아버지가 살아있었다는 말이 있지만 잘못된 정보다. 김수정이 어린 시절에 사고로 다쳐 집에서 지내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다만 아버지는 유일하게 집안에서 만화가가 되겠다는 자신을 믿어주고 꿈을 잃지말라며 격려해주고 만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을 너무나도 자랑스러워햇으며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 그립다고 한다(둘리 애장판 1권 작가 인터뷰 및 월간 보물섬 1989년 12월호 참고).[9] 1950~60년대에 '만화'라는 것이 사회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있었는지 기억해보자. 그나마 형을 말리던 게 아버지였다. 어머니나 형들은 거지 꼴로 사는 것과 같다고 화냈지만 아버지만 유일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라며 만화가가 되고 싶어하던 그를 막지 않았기에 자신이 만화가가 될 수 있었다고 한다.[10] 1935~2017. 본명은 김기태. 당대 유명 순정만화가 민애니 의 남편이며 본래 시사만화가에서 시작했으나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 철도청을 풍자한 만화로 인하여 필화사건을 겪으며 아동만화가가 되었다. 김영하가 그의 제자였으며 김기백도 당대 유명 만화가였다. 2017년 7월 11일 작고.[11] 이 만화는 김수정이 존경하는 만화가 차형(1940~ ) 이 동물을 의인화하여 그렸다. 그러나 차형 작가는 만화 검열제 항목에 나온대로 검열에 부딪치자 꽤 젊은 나이에 은퇴해버렸다.[12] <한국대표 만화가 18인의 감동적인 이야기(장상용 저)> p73~74 참고.[13] 세는나이 30살이며, 당시 결혼적령기를 감안하면 늦은 편이다.[14] 1990년 보물섬에 회고하길, 이전에 그리던 만화들은 자신의 작품이 아닌 여러가지 사정으로 그리던 작품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거론도 하기 싫은 흑역사였던 셈이다.[15] 당시에는 시사만화가 김성환 작품 고바우 영감은 1950년대부터 대머리 캐릭터였음에도 이 당시 새해 인사한다고 큰절하며 돋보이는 대머리가 전빠박을 비하한다고 신문에 연재를 못했으며 연기자인 박용식이 전두환 닮았다고 방송 활동을 금지먹었다.[16] 만화평론가 장상용의 <한국의 만화가 18인> 같은 책자에선 문하생이라고 나오는데 둘리 애장판에서 작가 인터뷰로 "난 문하생을 쓴 적이 없다"는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정확히는 문하생을 고용한 게 아니라 후배 만화가들이나 출판사 사람이 톤을 붙이는 일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김수정이 여러 곳에서 이 콜라 이야기와 문하생 이야기를 하는 걸 보면 이 일화는 확실한 사실인 듯.[17] 고길동이 콜라 사오라고 심부름하자 둘리가 콜라를 마구 흔들며 가져와 당연히 솟구친 콜라에 고길동이 흠뻑 젖는다.[18] 캐릭터 디자인도 너무 다르고 둘리의 성격도 순한 모습으로 달랐고 정작 김수정은 애니메이션 제작에 크게 관여하지 못했었다. 다만 시기상 TV만화영화 제작 초입기이고, 또한 만화영화 제작이 결정되었을때에는 시사코미디적인 묘사를 넣기에는 위험성이 남아있던 시기이니 대담한 시도를 하기에는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을것이다. 조금 뒤에 MBC에서 사회풍자적인 요소가 있는 도단이라는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기는 했지만 이때는 여소야대/방송민주화로 아기공룡 둘리 1기 제작시와는 정치적 환경이 크게 달라져 있었다.[19]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각색이 있던 애니메이션 덕분에 둘리는 더 폭넓고 대중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당시 둘리가 연재된 보물섬은 월간 잡지라 두껍고 제법 비쌌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구매하기 힘들었지만, 몇번씩이나 재방송된 애니메이션으로 쉽게 둘리에 입덕한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애니메이션으로 입덕했다가, 원작의 매운맛에 놀라는 경우가 꽤 많다.[20] 물론 20년 후 원작의 특성을 살려서 리메이크판 TV애니메이션을 방영했다.[21] 이 작품은 닥터 슬럼프를 표절했다는 의혹이 있다. 자세한 건 닥터 슬럼프 항목 참고.[22] DC 인터뷰에선 단속을 피했다고 하는데 <한국의 만화가 18인>에선 김수정이 직접 그림까지 그려가면서 당시 경찰에게 머리를 억지로 잘리던 걸 회고했다.[23] 돌리는 그나마 아는 사람이라도 은근 많지, 아리아리동동 리메이크판은 정말 아는 사람이 드물다.[24] 당시 시대가 미국과 이라크의 전쟁 시기다보니 석유 아껴쓰라는 메시지가 들어가 있다.[25] 뉴스언론에서는 그저 "아리아리 동동"이라고 하기도 했지만, 2001년에는 아리아리 동동...의 후속작이 연재되었었다.[26] 그 20년 동안은 사실 대부분 둘리애니 제작과 소설에 몰두해 있었다.[27] 다른 작품인 오달자의 봄에서도 주인공 달자를 도와주던 어느 스님에게 달자가 푹 빠져 버리고 달자 부모도 미성년인 달자가 스님에게 너무 빠진 거 아니냐고 우려하자 스님이 고민 끝에 멀리멀리 수행을 간다며 몰래 떠나는 이야기도 있다. 나중에 알게된 달자가 울며불며 슬퍼한다.[28] 아기공룡 둘리 3화에서 둘리가 고길동한테 알밤을 맞으면서 "투 스트라이크 노 볼" 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29] 알코올 도수 15도. 1990년대 초반의 정세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30] 적어도 마지막화에서 정이 들어서 덕담이라도 한마디 하고 보낸다던가 그런거 없다. 그냥 둘리 일당은 각자 갈 길 갔지만, 둘리만 갈 곳이 없어서 고길동의 집에 돌아왔는데 길동은 둘리 일당이 사라져서 마음고생이 사라져서인지 첫등장했을때처럼 살집이 붙었지만, 둘리가 다시 돌아오자 똥씹은 표정을 지었고 둘리는 자긴 갈 곳이 없다며 다시 받아달라고 우는 것으로 끝난다.[31] 비슷한 작품인 톰과 제리도 톰과 제리도 싸울땐 싸웠지만 그래도 막상 서로 없으면 안될 관계였고, 도라에몽의 노진구도 퉁퉁이와 비실이가 와도 맨날 괴롭힘만 당하거나 매번 복수만 할 것 같지만 또 그렇지도 않고 그 사이의 우정도 있었고 물론 극장판은 그게 강해서 이걸 "극장판 쟈이안의 효과"라 하기도 하지만 이부분이 한편으론 좋았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둘리와 고길동과 관계는 물론 도우너와 또치와도 이런 호의적인 부분이 거의없어서 삭막한 점만 남았다.[32] 자세한 내용은 덥수룩 했던 아담의 머리를 보고 이발사가 새로운 뭔가를 보여준다면서 머리를 다 뽑아버리는 장면이었고, 그 장면은 이주일 개그의 패러디 였다고한다(...)[33] 쪼꼬미 자체가 당시 한국 사회 분위기에서는 파격적인 성교육 만화이기도 했지만(...)[34] 일본 극장 애니메이션 및 미국 애니메이션을 원어로 유료 상영까지 했다. 건담 F-91이나 지온의 잔광, 메모리즈같은 애니가 상영했는데 마크로스 플러스는 상영 예정을 잡았다가 뮨을 범하려는 장면이 심의에 걸려서 상영취소되었다. 그것도 상영예정 날에. 덕분에 많은 항의에 환불 요구까지 있었다. 지온의 잔광 상영 때도 자막이 안 나오고 끝부분이 먼저 나오고 처음 부분이 뒤에 나오는 상영 사고가 벌어져 환불 사태가 벌어졌었다.[35] 바로 다음 작품인 1남 4녀 막순이 때와는 전혀 다른, 당시 유행하던 극화체 화풍에 가까운 그림체가 인상적이다. 기존에 없던 그림체를 연구한 끝에 당선되었다고 하나, 부족함을 느끼고 약 4년에 걸쳐 자기만의 그림체를 찾게 된다.[36] 쉽게 말해 아기공룡 둘리의 인간 버전으로 보면 되는데 둘리의 포지션을 홍실이가 맡은 것이다. 그외 홍실이의 부모들은 모두 친부모라는 점과 위로 오빠가 한명있다는 점도 둘리와의 차이점. 특이하게 홍실이의 아버지가 홍실이가 다니는 국민학교{현재 초등학교의 당시 호칭} 교장 선생의 옛 제자였다는 설정이다. 마지막회에서 홍실이 아버지가 미국지사로 발령받아 떠나기전, 학교 정문에다 바리케이트를 세워놓고(도망갈까봐...) 전교생들과 석별의 포옹(...)을 하는데 이게 밤까지 계속되어 경비원이 제발 좀 집에 가라고 하소연을 하는게 개그 포인트. 패륜행위도 있는데 유기견을 데려와서는 개 이름을 자기 아버지 이름으로 짓는다. 더불어 미국으로 간다니까 당시 인기 미드였던 기동순찰대의 판치{에릭 에스트라다 분}와 사귀겠다고 하질 않나, 빨리 학교가라는 아버지를 향해 미국 가기 전 해야 할일이 얼마나 많냐며 일일이 나열하지를 않나(머리에 노랑물은 왜 들여??{홍실이가 미국 가기 전 해야할일들 중 하나로 든게 머리에 노랑물 들이기였다}), 실로 둘리 못지 않은 진상의 진수를 보인다.[37] 그런데 김수정의 딸의 이름이 다름아닌 김홍실인데, 바로 이 만화에서 따왔다고.[38] 한국일보사가 발간한 어린이 대상 과학 잡지. 단 《뉴턴》(당시는 계몽사가 《월간 과학》이라는 표제로 라이선스 발간), 《과학동아》 같은 본격적인 과학 잡지보다는 《소년중앙》, 《어깨동무》와 같은 어린이 잡지 구성에 과학 기사 분량을 높인 데 가까웠다.[39] 성교육 만화. 비록 둘리에서 자주 보던 김수정의 그림체지만 성교육 만화란 특성상 아동들의 성기 노출 등이 자주 나왔다. 참고로 애니화되어 MBC에서 방영 되었지만 시청률이 그리 나오지는 않았는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40] 아이큐 점프 연재. 염라대왕의 아들인 홍도와 홍도의 아들이었다가 인간으로 환생한 순경 민완(성이 민씨고 이름이 완이다.)이 강력 범죄를 해결하는 작품으로, 소년지에 연재된 만화답지 않게 극 중 등장하는 범죄자들의 범행동기라던가 수법이 상당히 잔혹(극중 한 에피소드에서 민완이 우연히 탈옥범에게 잡혀 인질이 되는데 이 탈옥범은 알고보니 억울하게 사람을 죽였다고 오랫동안 갇혔던 무고한 사람이었다. 엽기적인 건 대박 식당으로 큰 성공을 거둬 그 지방에서 유지나 다를 거 없는 베프가 진범이었고 덤으로 이놈이 그야말로 인간말종이라 이 억울한 탈옥범의 친누이동생까지 죽였다. (오빠가 무고함을 드러낼 증거를 찾았기에) 그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하나뿐인 가족까지 죽인 셈. 그걸로도 모자라 두 동생까지 데려와 석궁으로 아예 이 무고당한 친구를 죽이려 했다. 뭐 민완과 홍도 도움으로 일은 해결되는데 이 쓰레기의 두 동생은 오발된 석궁에 맞거나 형이 탄 차량에 치어 죽고, 마지막으로 이 쓰레기도 민완이 경찰임을 드러내면서 모든 진실을 알 증인으로 나서자 흥분해 다른 경찰의 권총을 빼내 쏘려다가 경찰들 총을 무수히 맞고 벌집이 되어 끔살...그럼에도 이런 쓰레기를 학창시절부터 베프로 아끼던 친구는 눈물을 흘린다.)했고, 그 최후 또한 비참했다. 결국 인기를 얻지못하고 흐지부지 갑자기 완결. (홍도의 아우가 갑자기 나타나 아버지가 화냈다고 홍도를 억지로 염라계로 데려가면서 끝났다.) 홍도는 판관 포청천을 많이 참고했는지 검은 피부에 이마에 초승달 점이 똑같았다.[41] 주인공 '부니기'는 학교 교사이지만 키가 심각하게 작다. 선을 보러 갔는데 상대 여자가 거인 수준으로 묘사되었고 그 거인녀의 키가 170cm. 도시전설로 이 만화에서 두 개의 만화가 파생되었다고 전해지는데 하나는 굿모닝 티처(주인공의 직업에서 유래)이며 다른 하나가 그 전설적인 미스터 부(주인공의 이름에서 유래)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