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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 전경 | 주요 관광지인 메블라나 박물관 |
1. 개요
튀르키예어: Konya[1]그리스어: Ικόνιο (이코니오)
튀르키예 중부의 도시. 도시 자체의 인구는 약 140만명으로, 튀르키예에서 7번째로 큰 도시이다. 시가지는 서고동저의 형태로, 동북쪽에 광대한 산업 단지가 있고 그 외곽에 콘야 공항이 자리한다. 북쪽 외곽에는 튀르키예 최대의 공립 대학인 셀축 대학교가 있고, 동쪽에는 사립대인 KTO 카라타이 대학교가 있다. 유서깊은 도시로, 옛 지명은 이코니움 혹은 이코니온이다. 고대부터 아나톨리아 반도의 동서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중시되었고, 중세 들어서는 군사적 요충지로서 기독교 / 이슬람 세력 간에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12-13세기 룸 셀주크의 수도가 되어 번영하였고, 시내에는 루미 영묘와 알라에딘 모스크 등 당시 건축물이 다수 남아 있다. 14-15세기에는 카라만 왕조의 수도였고, 오스만 제국기에는 카라만 에얄레트에 이어 콘야 빌라예트의 중심지였다.
2. 역사
역사상 가장 오래된 도시로 여겨지는 차탈회위크(Çatalhöyük)가 이 도의 춤라(Çumra)군 퀴췩쾨이(Küçükköy)읍에 위치해 있다. 기원전 7000여년 경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사람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이곳은 한때 인구 5,000여명의 거대한 취락지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특이하게도 다닥다닥 붙은 거주지의 천장에 문을 뚫어 사다리를 타고 이동하는 구조로 도시 전체가 거대한 성채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당시의 벽화와 신전의 흔적, 발굴된 대지모신상을 통해 당시의 종교와 사회구조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는 귀중한 곳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지정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2.1. 고대
4세기에 세워진 아야 엘레니 성당 (Aya Eleni kilisesi)
고대의 콘야는 히타이트, 고대 그리스, 로마 제국을 거쳤고 라틴어로 이코니움[2]이라 불렸다. (현지 그리스어는 이코니온) 서기 1세기에는 사도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이곳을 지나갔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 성지로 여겨지는 곳 가운데 하나다. 실제로
특히 콘야 시 근교의 실레(Sille) 마을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어머니인 성녀 헬레나가 예루살렘으로 가던 도중 327년에 세웠다는 성당이 있는데, 이름도 헬레나의 이름을 따 아야 엘레니(Aya Eleni kilisesi)라고 불린다. 이 성당은 아나톨리아 내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 건물로 간주되고 있고, 내부도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징발되어 야전병원으로 쓰이다 버려진 것을 콘야시 당국에서 꾸준히 보수, 복원하여 옛모습을 찾았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콘야 중심가에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기념성당이 있는데 이곳으로도 가톨릭 순례자들이 들른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며, 사제가 상주하지 않는 본당이라 사제가 올 때만 미사를 드린다. 또한 시리아 정교회와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 같은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들도 이 건물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2.2. 중세
구도심 중심부의 모습
동로마 제국기 이코니온은 이슬람 제국에 대항하는 아나톨리아 테마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838년 기존 아나톨리아 내륙의 중심지이던 아모리움이 압바스 왕조에게 파괴된 후 이코니온이 대신 중심지로 부상하였다. 963년 함단 왕조을 마지막으로 한 세기 가량 안정을 누리던 이코니온은 1069년 셀주크 제국군에게 습격당했고,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의 혼란기에 프랑크 용병 대장 루셀 드 바이욀이 장악했다가 1084년 룸 셀주크에게 정복되었다. 이후 지명은 튀르크식인 콘야로 바뀌었다. 이어진 십자군 전쟁기에 콘야는 1차 십자군에게 점령된 니케아(이즈니크)를 대신하여 룸 셀주크의 수도가 되었고, 수차례 전장이 되었다. 1097년 7월 도릴라이온 전투에서 룸 셀주크 군을 격파한 1차 십자군은 이듬달 튀르크 수비대가 도주한 콘야를 습격하였다. 다만 도시를 점령하지는 않고 그대로 킬리키아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1101년의 롬바르드 십자군은 그해 8월, 이번에는 수비대가 배치된 콘야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후 동진하던 십자군은 동쪽 100km 지점 헤라클레아(현 에레을리)에서 막 메르지푼 전투를 승리하고 달려온 클르츠 아르슬란 1세의 매복에 당해 전멸하였다. 다만 승리에 도취된 클르츠 아르슬란은 1107년 모술 원정에 나섰다가 전사하였고, 섭정 하산이 콘야를 장악했으나 1110년에 석방된 클르츠 아르슬란의 아들 멜리크샤 1세가 콘야를 장악하고 술탄에 올랐다. 그 후 1116년 동생 메수트가 다니슈멘드 조의 도움으로 콘야를 장악하며 술탄에 올랐고, 1126년에는 앙카라-카스타모누-찬크르 총독 아랍이 콘야를 포위하자 메수트는 동로마 조정에 망명했다가 요안니스 2세의 도움으로 복위하였다. 1172년 말엽 룸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성지 순례 후 귀국하던 벨프 가문의 바이에른-작센 공 하인리히를 초청해 극진히 대접하였고, 도적떼의 습격이 있던 동로마와 비교되었다.
2.2.1. 이코니움 전투 (1190년)
알라에딘 모스크 앞에 남아있는 옛 셀주크 왕궁 유구 |
1176년 9월 마누일 1세의 동로마 제국군이 콘야로 진격했으나 으스파르타와 콘야 사이의 베이셰히르 호숫가에서 클르츠 아르슬란 2세의 매복에 대패하고 철수하였다. 1190년 3차 십자군이 다가올 무렵 30년 이상 즉위하여 연로했던 클르츠 아르슬란 2세는 장남 쿠트브 앗 딘에게 섭정을 맡겼고, 후자는 콘야에 파견된 독일측 사신 고드프루아 폰 비세바흐를 맞이한 후 사절 토킬리를 트라키아로 보내어 십자군의 안전 통과를 약속하였다. 본래 양측의 관계는 호의적이었으나 살라흐 앗 딘의 사위였던 쿠트브 앗 딘의 심경은 복잡하였고, 술탄이 통제하지 못하는 튀르크 유목민들이 십자군을 습격하여 프리드리히 1세가 분노하자 십자군과 동행하던 사절 토킬리는 고드프루아를 잡아 도주하였다.
이로써 양측은 전쟁에 돌입하였고, 1190년 5월 십자군은 필로멜리온 전투에서 룸 셀주크 군을 격파하고 콘야를 포위하였다. 쿠트브 앗 딘과 클르츠 아르슬란은 성 밖으로 출정했으나 역시 패하였다. 승전 후 독일군은 '쾰른 규모의 도시'라 묘사된 콘야에 입성하여 닥치는 대로 학살을 자행하고 10만 마르크 상당의 전리품을 약탈하였다. 시타델에서 농성하던 술탄은 안전 통행과 물품 교역을 보장하는 조건의 강화를 제안하였고, 이를 수용한 프리드리히는 5일 후 시체 썩는 냄새로 가득찬 시내를 떠나 외곽으로 진영을 옮겼고 다시 3일 후 튀르크인 인질과 함께 남하하였다. 그 후 룸 셀주크와 십자군 간의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6월에 프리드리히가 살라프 강에서 익사하며 3차 십자군 중 독일 병력은 그대로 와해된다.
2.2.2. 안정기
12-13세기 룸 셀주크 시기에 왕실 영묘로 세워진 알라엣딘 자미
두 차례에 걸친 십자군의 점령을 겪은 콘야는 10여년 간의 내전을 끝낸 카이쿠스라우 1세 때부터 안정을 되찾았고, 카이쿠바드 1세 때까지 반세기 가량 번영하였다. 1205년에는 알렉시오스 3세가 복위를 위해 콘야 궁정으로 망명해왔고, 1211년 카이쿠스라우 1세는 그와 함께 니케아 제국을 침공했으나 테오도로스 1세에게 패하고 전사하였다. 이후 콘야의 아미르들은 장남 카이카우스 1세를 추대했는데, 형제인 토카트의 카이쿠바드와 안탈리아의 이브라힘이 반란을 일으켜 한때 후자의 군대가 콘야에 입성했으나 결국 진압되었고 둘다 사로잡혔다. 명군의 면모를 보이던 카이카우스 1세는 1220년 급사하였고, 이에 카이쿠바드가 유폐에서 풀려나 술탄에 올라 전성기를 이어갔다. 이 시기 콘야에는 수준 높은 건물들이 세워졌다.
2.2.3. 몽골의 간섭
1273년 루미가 사망한 후 공사가 시작되어 몽골측 섭정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의 조지아계 부인 구루주 하툰의 후원으로 이듬해 완공된 영묘
1243년 6월 카이쿠스라우 2세는 몽골 제국에 맞서 무슬림 연합군을 이끌고 출정했으나 쾨세다으 전투에서 대패한 후 앙카라로 도주하였고, 무방비로 남겨진 콘야는 재상 무하답 앗 딘이 몽골 진영에 찾아가 항복하며 겨우 파괴를 면하였다. 이후 룸 셀주크는 몽골에 복속하였고, 1256년부터는 일종의 다루가치인 페르반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이 콘야에 상주하였다. 이듬해 5월 콘야 총독 술레이만이 토카트의 반란 진압을 위해 자리를 비우자 술탄 카이카우스 2세는 니케아 제국군과 함께 콘야를 장악하고 마르딘의 아르투크 왕조 및 마야파리킨의 아이유브 왕조와 연대하여 몽골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하지만 돌아온 몽골군에게 패배한 카이카우스 2세는 동생 클르츠 아르슬란 4세에게 카이세리 일대를 내어주었다. 한편 13세기 중반 콘야에는 몽골 지배를 피해 페르시아 문화권에서 몰려든 이들이 다수 이주해왔는데, 그중에는 수피 메블라나 종단의 창시자 잘랄루딘 루미도 있었다.
1261년 8월 몽골 측의 승인과 함께 클르츠 아르슬란 4세는 콘야에 입성하여 단독 술탄에 올랐고, 카이카우스 2세는 막 수복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도주하였다. 이후 무인 앗 딘 술레이만이 재차 몽골측 총독으로서 상주하였고, 더 많은 조공을 위해 높은 세금을 거두었다. 1266년 무인 앗 딘은 클르츠 아르슬란 4세를 처형하고 후자의 아들 카이쿠스라우 3세를 옹립하였다. 1271년 맘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가 엘비스탄 전투에서 일 칸국-룸 셀주크 군을 격파하자 그해 5월 카라만 왕조-멘테셰 후국의 연합군이 콘야를 점령하고 카이카우스 2세의 아들 치미르를 술탄으로 옹립했으나 이듬달 아바카 칸이 친정에 나서자 철수하였다. 다만 카이세리와 달리 콘야에서는 몽골군의 학살이 없었다. 복위한 카이쿠스라우 3세는 1284년 일 칸국의 내분에 가담했지만 지는 편이었기에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는 룸 셀주크 왕실 영묘인 알라에딘 자미에 매장된 마지막 술탄이었다.
2.2.4. 카라만 왕조
이후 카이카우스 2세의 다른 아들 메수트 2세가 옹립되었는데, 일 칸국은 카이쿠스라우 3세의 아들들을 콘야에 봉하며 룸 셀주크를 양분시켰다. 이에 1286년 메수트 2세가 콘야를 점령하고 그들을 처형하며 재통합하였고, 이후 일 칸국에 복속하여 관계를 회복하였다. 다만 1308년 메수트 2세가 사망한 후 카라만 왕조의 바헤레딘 마흐무트 베이가 콘야를 점령하며 룸 셀주크는 멸망하였고, 그는 차남 야흐쉬를 콘야 총독에 봉하였다. 1312년 후일 추판 왕조를 세우는 몽골 장수 초반이 콘야를 점령하였다. 그러다 1360년경 세이페딘 쉴레이만 베이가 재차 콘야를 점령하여 카라만을 대신 수도로 삼았고, 이후 카라만 군주들은 메블라나 영묘에 매장되었다. 14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이 성장하자 카라만 조의 알레에딘 알리 베이는 주변의 제후들과 연합하에 그에 맞섰고, 1389년 1차 코소보 전투 시에 오스만 조의 후방을 공격하였다. 따라서 신임 술탄 바예지트 1세는 1390년 콘야를 포위하였다.비록 주변 국가들의 압력에 바예지트 1세는 현상 유지의 휴전을 맺고 철수했지만 알리 베이가 티무르와 동맹을 맺고 1396년 니코폴리스 전투 당시 재차 오스만 조의 후방을 공격하자 대군을 모아 남하하였다. 알리 베이는 뒤늦게 휴전을 제안했지만 거부되었고, 1397-98년의 공성전 끝에 콘야는 함락되었다. 알리 베이는 처형되고 항복한 그의 두 아들들은 부르사에 감금되며 카라만 조는 일시 멸망하였다. 다만 오스만 조의 콘야 지배는 4년에 그쳤고, 1402년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에 의해 카라만 조가 복구되었다. 15세기 중반, 국력을 회복한 이브라힘 베이는 킬리키아를 점령하였다. 이로써 전통적인 동맹 맘루크 조와의 전쟁이 벌어졌고, 1457년 맘루크-라마잔 왕조 연합군이 콘야와 카이세리를 포위하였다. 전투 끝에 이브라힘 베이는 1458년 이집트로 사절을 보내 휴전을 맺고 킬리키아를 반환하였다. 1464년에는 이브라힘 베이의 아들이자 실리프케 총독 이샤크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샤크는 콘야를 장악, 베이로 즉위하였고 이브라힘 베이는 도주하여 객사하였다. 다만 동생 피르 아흐메트가 메흐메트 2세의 지원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이샤크 베이는 우준 하산의 도움으로 맞섰지만 1465년 결국 전자가 승리하였다. 하지만 피르 아흐메트가 약속한 대로 오스만 측에 넘겨줬던 영토를 메흐메트 2세의 원정을 틈타 재점령하자 분노한 술탄은 1466년 남하하여 콘야와 카라만을 점령하고 일대를 병합하였다. 1471년 오스만 군이 실리프케 등 남은 해안 영토까지 점령하자 피르 아흐메트와 동생 카슴은 우주 하산에 의탁하였고, 이듬해 후자의 아나톨리아 원정 당시 콘야를 수복하였다. 하지만 1473년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우준 하산이 패배하자 피르 아흐메트는 부흥 운동을 포기하였고, 카슴만이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움으로 해안을 수복했으나 1475년 완전히 축출되었다. 정복 직후인 1474년 메흐메트 2세의 차남 젬이 콘야 산작베이 (총독)으로 봉해졌다.
2.2.5. 오스만 제국
1558년에 세워진 셀리미예 자미
1481년 메흐메트 2세가 사망하자 장남 바예지트 2세와 젬 간의 내전이 발발하였고, 카슴은 후자의 편에서 1482년 5월 콘야를 포위했으나 실패하였다. 그해 7월 젬이 로도스로 망명하자 카슴은 오스만 측에 투항하여 실리프케 총독에 봉해졌고, 이로써 카라만 조는 멸망하였다. 15-16세기 콘야는 페르시아와 시리아 방면의 요충지이자 악사라이와 카이세리까지 아우르는 카라만 에얄레트의 치소였고, 젬에 이어 쉴레이만 1세의 자녀들이 차례대로 산작 베이를 지냈다. 먼저 삼남 셀림 (미래의 셀림 2세)이 1542-44년간 부임하였고, 뒤이어 1549년 장남 무스타파가 콘야 산작 베이로 봉해졌으나 뤼스템 파샤의 음모로 1553년 10월 동쪽의 에레을리에서 처형되었다. 사후 콘야 일대에서는 처형에 반발하는 반란이 있었고, 이로써 뤼스템 파샤 역시 해임되었다. 오스만 시기 콘야는 직물업과 광산업으로 번영하였고, 동시에 메블라나 영묘를 찾는 순례객들 (가끔은 술탄들도)로 붐볐다.
2.3. 근현대
1874년 술탄 압뒬아지즈의 모후 페르테브니얄이 세운 아지지예 모스크
카라만 에얄레트는 186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콘야 빌라예트로 개편되었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콘야에는 튀르키예군의 주요 공군 기지가 있었다. 본래 일대, 특히 서북쪽의 실레에는 그리스계 인구가 다수 거주했으나 전후 1923년의 그리스-튀르키예 인구 교환으로 이주되었다. 이후 공화국 시기에 들어 수도 앙카라와 인접해 있는 덕분에 개발되어 현재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3. 지리
콘야 도는 튀르키예에서 가장 큰 면적(41,001km²)을 가지고 있으며, 2013년 기준으로 207만 9,225명이 거주하고 있다. (인구밀도: 51/km²) 북쪽으로 앙카라도, 북서쪽으로 에스키셰히르도와 아피욘도, 서쪽으로 으스파르타도, 남서쪽으로 안탈리아도, 남동쪽으로 카라만, 이첼도, 동쪽으로는 카파도키아지방에 속하는 악사라이, 니으데도와 경계를 두고 있으며, 도 내에는 31개의 군/구(ilçe)를 두고 있다. 이 중에서 셀축루(Selçuklu), 카라타이(Karatay), 메람(Meram)이 콘야 시를 구성하고 있다. 평균 해발고도가 1,016m로 제법 높은 곳에 있어 지중해성 기후대에 속하지만 밤에는 굉장히 쌀쌀한 편이며 강우량도 튀르키예에서 손꼽을 정도로 적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겨울엔 정말로 눈이 많이 온다.
날씨에 대해 덧붙이자면, 콘야에서는 하루에 사계절을 모두 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아침에는 햇볕이 쨍쨍하고 제법 더운데도 한두시간 지나서 갑자기 20-30분 가량 스콜마냥 장대비가 쏟아지더니,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확 떨어져서 아침보다 더 싸늘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겨울이 긴 중부 아나톨리아 지방답게 눈은 4월달, 심지어 5월달에도 내릴 때가 있으며, 6월에도 최고기온이 30도가 채 안되는 날이 많다. 비 한번 내렸다 싶으면 그나마도 20도 밑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건조한 지방이라 여름철 평균 습도는 20%가 채 안되며, 40도가 넘는 불볕더위 속에서도 땀 하나 안나는 (나더라도 금방 증발해버리는) 기적을 볼 수 있다. 콘야의 45도 더위가 한국의 30도 더위보다 더 쾌적하게 느껴진다.[3]
4. 문화
메블라나 박물관의 녹색돔 | 인제 미네라 마드라사의 입구 장식 |
콘야의 황금기는 룸 술탄국의 수도였던 시절로, 오늘날 콘야의 많은 유적들이 이 시대의 것들이다. 잘랄루딘 루미도 이 시대에 이곳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영묘와 학교도 이곳에 남아있으며 무슬림들에게도 중요한 성지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루미 영묘와 함께 종교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곳이라 튀르키예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선거 때 정의개발당 득표율도 튀르키예 전국에서 가장 높은 편.[4] 하지만 튀르키예에서 가장 많이 라크를 소비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실제로 살다보면 겉보기에는 되게 보수적인 동네로 보이지만, 이름만 무슬림인 나이롱들(...)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도 사람 사는 동네다.
유명한 향토음식으로 피데의 일종인 에틀리에크멕(Etliekmek, 고기가 든 빵(...)), 오크라 초르바(Bamya çorbası), 무슬림들이 종교행사때 이웃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선물하는 메블라나 사탕(Mevlana şekeri)이 있다. 셀주크 시절의 영묘와 모스크들도 온전히 남아있어서 몇몇 건물들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으며 튀르키예인들의 순례지이자 지중해에 인접한 휴양지인 안탈리아로 가는 관광객들이 도중에 들르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수피 수도승들이 흰 옷을 입고 빙빙 도는 세마(Sema) 춤의 본산지로 세마 춤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도 온다.
5. 특산품
종교적인 도시답게 테스비흐(Tesbih)라고 부르는 일종의 이슬람 묵주가 유명하고, 카페트의 명산지로도 알려져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옆 동네 으스파르타와 마찬가지로 현재 카페트를 생산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30년 이상은 묵은 것들만 취급하고 있다고 한다.6. 여담
다른 지역에 사는 튀르키예인들은 이곳 주민들이 다소 보수적이고 냉정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며, 한국에서 발행되는 여행 안내 책자 등도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담고 있다. 다만 실제로는 보수적이거나 차갑다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기를 어려워할 뿐이며, 상대가 먼저 말을 걸어오면 반갑게 응해 주며 일단 얼굴을 익히고 친해지면 대단히 헌신적이라고 한다. 도시 내에 술집이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 주민들이 아예 술을 마시지 않는 것도 아니며, 외곽 지대에는 성매매까지 할 수 있는 유흥주점들도 많다.콘야에 위치하는 셀축 대학교(Selçuk Üniversitesi)와 네즈메틴 에르바칸 대학교(Necmettin Erbakan Üniversitesi)는 콘야의 밥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도시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셀축 대학교는 의학, 사회과학에서 튀르키예 상위권에 들만큼 쟁쟁한 학교라 다른 도시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
콘야의 물가는 주변 도시에 비해 정말 저렴하다. 교통비조차도 다른 도시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쌀 수준으로, 셀축 대학교에서 도심 중심지인 자페르(Zafer)까지 거의 20km를 이동하는 마을버스의 요금이 2019년 8월 현재 겨우 3리라다. 고속철도도 뚫려있기 때문에 앙카라, 에스키셰히르, 이스탄불 방면으로 가기도 수월하다. 다만 다른 도시에서는 시외버스 요금을 흥정해서 탈 수 있지만, 이곳에서는 시에서 금지했기 때문에 요금이 항상 정찰제라는 단점은 있다. 출발 5분 전에 버스안에 승객이 4명밖에 없는 데도 정가를 받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상황이면 정식요금의 거의 50%까지도 깎아볼 수 있는데 말이다. 콘야로 가는 버스 구하기도 수월한 편으로 콘야를 중심으로 하는 회사가 Özkaymak(외즈카이막)과 Kontur(콘투르) 2개나 되고, 같은 콘야 도에 위치한 에레일리(Ereğli)군을 중심으로 하는 Ereğli Turizm(에레일리 투리즘)도 있다. 바로 북쪽에 차로 1시간 반 정도 가는 거리에 위치한 군인 악셰히르(Akşehir)를 본부로 하는 Aksel(악셀)도 인구도 적은 시골인 악셰히르가 아닌 콘야를 종착점으로 하고 있다. 이스탄불이나 앙카라를 출발해 남동 아나톨리아로 향하는 장거리 버스노선들도 대부분 콘야를 지나기 때문에 Seç, Ben Turizm, Çayırağası, Aksu, Urfa Cesur, Özdiyarbakır, Mardin Dilmenler같은 튀르키예 남동부지방을 본부로 하는 버스들도 많이 다닌다. 다만 서부 튀르키예 대부분을 커버하는 파묵칼레(Pamukkale)와 최고급 버스회사라 할 수 있는 Ulusoy(울루소이)가 이 도시를 지나지 않는다는게 흠이다.
콘야 에레일리군과 서울특별시 광진구하고 자매결연을 맺었다. 그래서 광진구 어린이대공원역역앞의 광진광장에 오스만 수도시설이 지어져있다.
이곳에서 살다보면 튀르키예 내 다른 지방과 다른 문화 때문에 황당할 일이 꽤 많다. 앞서 언급했지만 이곳은 튀르키예에서 가장 보수적이고 종교적인 지역이라, 라마단 기간에 가면 외지인과 외국인 유학생들이 많이 사는 지역을 제외하면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자체를 찾기가 힘들다. 영업하는 식당들도 창문을 거대한 커튼으로 가려서 밖에서 보면 영업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해놓고 장사한다. 그리고 금요일 정오예배 (주마) 시간에는 시장 전체가 문을 닫는 진풍경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콘야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리고 남녀유별이 콘야에서는 워낙 유별난 편이라, 남성이 처음 보는 여성에게 말을 걸거나, 길을 묻는 것, 혹은 그 반대의 경우도 금기사항이다. 그냥 대답하지 않고 쌩까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에도 이성이 혼자 타고 있을 경우, 우선 엘리베이터를 보내는게 이 지역의 암묵의 룰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스탄불이 워낙 유별나긴 하지만 튀르키예인들은 대체로 동물들을 좋아하는데 콘야 사람들은 유독 개든 고양이든 싫어한다. 길고양이에게 밥과 물을 주는게 튀르키예에서는 굉장히 흔한 일인데 유독 콘야에서는 캣맘, 캣대디와 현지인 간의 갈등이 심하다. 종교적인 도시이고 내륙에 위치한 지역인 데다 대부분 당일치기 여행객들이 많은 콘야라 치안은 좋은 편이다. 이스탄불과는 달리 밤 12시까지도 밖에서 여자 혼자 걸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 인데 2019년 현재 튀르키예 모든 도시들이 그렇지만 시리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빈민가 지역들만 조심하면 된다.
도가 크기 때문에 사실 도내에서도 지역 갈등이 있다. 아피욘카라히사르와 가까운 악셰히르 군 사람들은 콘야 중심지 사람들을 종교적인척 하면서 뒷구멍으로 호박씨까는 위선자들이라고 보는 편견이 있고, 동쪽의 아다나와 가까운 에레일리 군 사람들은 사투리와 기질 모두 아다나와 유사하다고들(...)한다. 그리고 카든하느(Kadınhanı)군 사람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편견이 있다.
진짜 여담이지만 튀르키예 내 대부분 공공화장실은 1리라에서 1.50리라 사이의 요금을 받는게 보통이지만 콘야에서는 시가 운영하는 공공화장실의 경우 요금을 전혀 받지 않는다. 버스터미널과 콘야역에 있는 화장실도 마찬가지이며 그 숫자도 의외로 많다.
요즘 핫한 튀르키예 연예인인 알레이나 틸키와 전 총리였던 아흐메트 다우트오울루의 고향이 콘야이다. 둘 다 자주 고향을 찾아오는 편이며 알레이나 틸키는 의외로 길가다 마주치기 쉬운 편이다.
[1] 발음은 /ˈkoɲ.ja/로 음절이 n과 y 사이에서 나눠지기 때문에 '코냐'나 '코니아'가 아니라 '콘야'이다.하지만 이걸 제대로 반영하는 매체가 거의 없다.[2] 알제의 옛 이름 역시 이코니움이었다[3] 바로 남쪽의 안탈리아도는 상당히 저지대에 지중해, 즉 바다까지 붙어 있어 여름만 되면 기본으로 40도는 넘어가고 바다가 바로 앞에 있어서인지 바닷바람은 많이 불지만 굉장히 날씨도 습해서 부둣가 지역이 아닌 도심지라면 에어컨을 틀어야 할 지경이다. 심지어 겨울에도 10도 밑으로 거의 떨어진 적이 없다.[4] 나열하면 2011년 69.6% (1위), 2015년 6월 65.1% (2위), 2015년 11월 73.9% (2위), 2018년 58.8%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