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호남향우회(湖南鄕友會)는 호남 바깥 객지에서 고향이 같은 전라도인 사람들끼리 만나서 애향심을 매개로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이다. 지역 향우회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타 지역 향우회를 압도하는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세계 도처에 퍼져 있지만 가장 활성화된 곳은 아무래도 서울이다. 원래 자생적으로 발생한 만큼 뚜렷한 구심점 없이 여러 단체가 난립했으며 주로 동 단위로 발생하여 구 단위로 통합 발전하는 형태를 보였다.
특히 호남 지역민들이 오래 전부터 자리잡은 구로구, 영등포구와 강북구 등 구 성저십리 지역에서 먼저 크게 발달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의 호남향우회는 조직이 매우 크고 강해 해당 지역에 사는 비호남인들도 몇몇은 호남향우회 조직의 영향력을 크게 실감한다고 한다.[1]
2. 역사
처음에 호남향우회라는 것은 외부에서 생각하는 단순히 동질적인 집단만은 아니었다. 각 지역에서 이주해 들어온 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형성했던 만큼 원래는 서로 독립된 조직이었다. 처음에는 재경광주향우회, 재경전북향우회 등 전라도 내에서도 출신 지역끼리 다른 단체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런 초기 호남향우회의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는 것이 서울 도처에 존재해 있는 사숙, 즉 호남 출신의 우수한 고교생, 대학생들의 서울 유학을 돕기 위해 호남 지역 자치단체와 재경 호남향우회가 조직, 운영하고 있는 기숙사들이다. 현재 서울의 사숙들은 서울의 자치구 단위가 아닌 호남의 지자체 단위로 운영되고 있다. 현재 서울의 호남향우회들이 주로 서울의 행정구역에 맞게 통합, 정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현재 사숙의 운영 주체는 호남 지역 시청과 군청이 맡는 경우가 보통이고 여기에 해당 지역 호남향우회들이 서포트해주는 형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보인다.이후 지역별로 자체적으로 통합, 재분열을 거듭하며 여러 단체가 난립하게 되었는데 호남향우회가 본격적으로 통합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바로 DJ의 등장 이후이다. 특히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여러 호남향우회들이 연대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호남향우회들이 통합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후 지속적인 통합이 진행되어 2006년 '전국호남향우회'가 출범해 중앙집권적 형태를 갖췄다. 그러나 이후 정치 성향 문제로 '전국호남향우회 중앙회',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 중앙회',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 3개 등으로 나누어졌다가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로 통합되었다.
3. 분포
물론 다른 지역 출신 타지민들도 영남향우회, 호서향우회, 강원도민회 등의 여러 향우회를 조직하지만, 호남향우회 다음으로 규모가 큰 영남향우회도 호남향우회의 규모를 제치지 못할 정도다. 대한민국 해병대전우회, 고려대학교 교우회 등과 더불어 한국의 3대장 단체로 꼽힌다.그야말로 혈연, 학연, 지연의 산물인 조직들이다. 서울, 부산 등 비호남 내 웬만한 대학들, 심지어 인서울 명문대에도 알게 모르게 공식적 단체든 비공식적 모임이든 다 있다시피 하다. 간혹 기숙사 규모가 큰 경우 기숙사에도 호남향우회 모임이 있는 경우도 있고, 교수들 사이에서도 있다.#
실제로 호남향우회는 미국과 캐나다, 영국, 일본#, 중국은 물론 네덜란드, 독일, 멕시코 등 세계 각지에 단체가 존재하고 있으며, 구글 검색을 해 보면 꼭 나오는 것이 호남향우회다. 그러나 공식적인 단체가 아니다보니 구체적으로 타 지역과의 정확한 세 비교는 어려운 실정이지만 확실한 것은 이 두 지역 단체들은 활동도 빈번하여 해외에 나가서도 한인회 활동보다는 향우회 활동을 열심히 한다는 식으로 지역드립에 악용되기도 한다.[2]#
당연하겠지만 주로 수도권에 대부분이 분포해 있는데, 서울특별시에서는 아무래도 민주당세가 높은 지역일수록 호남향우회 세가 큰 경향이 있다. 다만, 호남 출신이 많은 지역들의 절반 이상은 호서 출신 비율도 높은데, 경기 남부권의 경우 충청도에서 가까운 영향도 있다. 또한 부천은 인접한 인천의 영향이 커서 충청 출신 인구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2010년대 초반까지도 호남향우회의 선거 영향력이 큰 것으로 언론에 보도된 곳으로는 노원구, 관악구, 금천구, 은평구 등이 있으며 현재도 호남 출신 장노년층이 많긴 하나 그들이나 그 20·30대 구성원들 상당수가 경기도 외곽 지역[3]으로 이동하고 있다 보니 2025년 현재에는 출신지 비율이 달라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분포하는 이유는 대한민국의 도시개발 과정에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고향에서 살기 힘들어 취업하려고 올라온 호남 출신들이 박정희 주도의 도시개발과 이들 중 일부가 사는 판자촌 정리사업 때 이들을 내보낸 곳이 관악구, 노원구 등이기 때문이고 과거에는 비수도권에서 가진 것 없이 상경한 사람들이 서울에 오자마자 주로 취직한 곳이 공장이었고, 거처할 곳을 알아보는 기준은 기차역이었기 때문에 구로공단이 있던 구로구, 영등포역을 낀 영등포구, 이들과 가까운 관악구 등이 자연스레 호남향우회의 발흥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후 다음 세대의 호남 출신들도 취업 하려고 수도권에 많이 올라왔는데, 한국 경제 구조가 다각화되었고 수도권도 점차 확장됨에 따라 현재 전국의 다양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4]
4. 정치
김대중의 등장과 그들의 많은 인구가 규합되어 생겨난 호남향우회는 그만큼 정치적 성향이 매우 뚜렷한 관계로 호남향우회가 정치적으로도 상당히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1980~90년대 민주당 주요 표밭으로 김대중이 통일민주당 분당과 3당 합당의 여파로 보수정당에게 조직력에서 밀렸음에도 서울과 그 근교 지역에서만큼은 민주당계 정당이 보수 정당과 맞먹을 만큼의 조직력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기 때문에 김대중이 여전히 유력 대권 주자로 남아있을 수 있게 되었고, 당연히 김대중의 당선에도 기여했기에 동교동계와의 연관점 역시 적지는 않다.
다만 200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친노와 동교동계가 따로 놀았기 때문에 호남향우회 조직의 폴가동이 안되는 경우가 많았던 만큼 해당 기간 동안 민주당의 바닥조직력이 안 좋다는 얘기가 나온 원인 중 하나로 손꼽히기도 했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하자면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참패로 지역 조직력이 심하게 박살난 상황에서 민주당과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되어서 열린우리당이 조직력이 심하게 취약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의 역풍으로 승리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부터는 바람선거가 일어나지 않다 보니 코어가 취약한 열린우리당이 지속적으로 패배하면서 조직력이 갖추어질 일이 없었고, 결국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 지방선거 승리로 조직력이 복구될 때까지 2000년대 내내 이어져 내려왔던 것이 컸다.
단 ‘전국호남향우회 총연합회 중앙회’는 박근혜 지지 선언을 할 정도로 친 보수적인 성향이 강해 노무현 쪽과 가까운 문재인보다는 동교동계와 가까운 박근혜를 지지했다. 당장 한광옥, 한화갑, 김경재, 김원길만 보더라도 동교동계에서 친박으로 전향했다.
이처럼 큰 세력으로 인해서 서양의 일루미나티급 흑막으로 매도되기도 한다. 특히 1950년대생 이하에서는 3당 합당 이후로 여러 과정을 거쳐 2000년대 중반 이후로 1950년대생 이하 구 통일민주당 지지층들의 대부분이 보수정당 지지층으로 흡수되어 보수정당이 2/3를 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해당 세대에서 민주당계 정당 지지층이 30% 내외의 수준이기 때문에 그 만큼 매도되기도 쉽기도 했다.
5. 예외
지역에 따라선 호남향우회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지 않은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인천이 있다. 충청도 출신들이 전라도 출신에 비해 많고 인천 토박이나 재한 화교, 황해도와 미수복 경기도 출신 실향민 후손의 비중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충청도 출신[5]들이 인천에서 거주한 지 오래되거나 정착한 사람들이 많은 반면 호남 출신들은 충청 출신 출향인에 비해 늦게 인천에 정착해 실질적인 영향력 차이[6]는 훨씬 크다.특히 인천은 전라도 출신만큼이나 충청도 출신자들이 영향력만큼이나 텃세도 심해서 전라도나 충청도 등 기호지방과 서쪽 지역의 영향력에 비해 동남쪽 지역인 경상도, 즉 영남 출신은 정착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세력이 미약하다. 일단 영남 지역에서 서울 및 수도권으로 이주한 사람이 호남 출신이나 충청 출신에 비해 목소리를 크게 낼 필요성을 못 느꼈기 때문이다.[7][8] 1990년대 이후에는 수도권 집중 현상 심화, 기존 제조업 벨트의 위기로 인해 부산이나 대구에서도 수도권으로 이주하는 청년들이 증가하고 있다.
그리고 부울경 동부 지역의 경우 호남 지역 출신 외지인[9]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지만 수도권에 비해 토박이들이 많고 대경권[10], 제주도[11], 이북 5도 출신 후손들[12]의 비중 역시 적지 않은 특성 상 향우회의 조직이 미약하다. 1970년대에 남동임해공업단지가 개발되면서 호남 출신 주민들이 많이 정착했지만 주류는 전라남도 동부 출신이고, 상당수가 경상도와 문화가 비슷하다 보니 전남 서부 지역[13] 위주인 호남향우회와는 다소 이질감이 있다. 당시 부산을 주름잡던 조폭 조직인 칠성파 등의 조직원들 중에 전라남도 동부 출신들이 굉장히 많기도 했다. 다만 과거 사상공단이나 대구 염색단지가 잘 나갔을 때에는 서울 공단들 못지 않게 규모가 컸기에 먹고 살기 위해 서부 전남은 물론 전북이나 심지어 충청도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사람들도 제법 있었다.[14]
6. 기타
2003년의 브리트니 스피어스, 이후 일본의 그라비아 모델 아가리에 히카리(あがりえひかり)(후방주의)가 입은 원피스에 신흥호남향우회라는 글귀가 적혀 있어서 한국에서 화제가 되었다. 외국인들이 재미있어하는 자음인 ㅎ이 많이 들어가 있어 이들의 눈에 띄었다는 설이 있다. 다른 옷에서도 발견되었다.
[1] 다만 현재 호남향우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곳은 정작 관악구, 구로구, 금천구, 노원구, 영등포구도 아닌 강남구다. 참고로 강남구는 전통적으로 서울에서 집값이 가장 비싼 곳으로, 보통 예전의 호남인들이 쉽게 입성할 수 없던 곳이었지만 서울에 예전부터 정착해 2025년 기준으로 세력권과 경제력을 얻은 호남인들이 강남구 등에도 제법 진출하고 정착하게 되었다.[2] 이런 지역드립 때문에 검색결과가 폭증하는 경향도 있다.[3] 고양, 김포, 남양주, 시흥, 용인, 화성 등[4] 비슷한 사례로 역사적으로 미국도 흑인들이 취업하려고 남부에서 동부인 뉴욕으로 올라와 현재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사실 흑인뿐만 아니라 미국, 유럽의 이민자 그룹들은 특정 지역에 몰려 사는 경향이 한국에 비해 크게 두드러진다.[5] 특히 홍성 + 예산 + 서산 + 당진 + 아산 + 천안 출신 인구가 많다.[6] 그나마 인천에서 비교적 서울의 위성도시 성격이 강한 부평구, 계양구는 호남향우회 조직이 잘 갖춰져 있지만 부평권도 충청향우회 파워가 만만치 않다.[7] 영남은 산업단지가 많고 부산, 대구와 같은 대도시나 울산, 창원, 김해, 양산, 포항, 구미, 거제, 경산 등 공업 도시 및 위성도시가 많기 때문에 충청과 호남 지역에 비해 수도권으로 이주한 인구의 비율이 적다. 다만 서울특별시 강남구, 서초구에는 영남 출신 주민들의 비중도 높다.[8] 경북 북부권처럼 영남이어도 산업화 수혜를 못 받은 곳에서는 호남 못지 않게 이촌향도 현상이 심각하여 이들도 부산, 대구, 수도권으로 이주를 많이 했다. 서울에서 이들의 영향력이 컸던 곳이 바로 동대문구(특히 청량리동).[9] 부산 북구, 사상구, 사하구, 강서구. 부산진구, 김해, 양산 등에 주로 거주한다.[10] 부산에선 동래구, 금정구에 대경권 출신들이 많다.[11] 영도구에 제주은행 부산지점이 있는 것이 그 흔적이다. 제주도 출신들이 많은 이유는 제주 4.3 사건으로 제주도를 떠난 피난민들이 각지로 흩어졌는데 그 중 경상도 지방으로 들어온 일부 제주도인들이 영도에 모여서 거주하게 되었기 때문이다.[12] 주로 원도심에 많이 거주하지만 동부산이나 울산, 창원, 김해, 양산, 거제 등에도 많이 거주한다.[13] 광주, 나주, 목포, 무안 등[14] 강금원이나 김대식이 호남 서해안 지방에서 부산으로 이주한 케이스고 대구 출신 이승엽은 부모의 고향이 전남 강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