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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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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배경3. 특징4. 원인5. 발전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6.1. 1939년6.2. 1940년6.3. 1941년6.4. 1942년6.5. 1943년6.6. 1944년6.7. 194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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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치 독일이 벌인 유대인 학살 홀로코스트의 진행 과정.

2.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을 포함한 전 유럽 대륙에서 반유대 감정은 흔한 것이었다. 먼 옛날 기독교가 유럽 대륙으로 퍼지며 예수와 사도들을 죽인 유대인을 '사탄'으로 규정했다. 거기에다가 자신의 나라 없이 전 유럽 대륙에 퍼져 있으면서도 그 나라에 융화되지 않았고, '유대인은 특별한 민족이다'라는 선민사상과 함께 이질적인 유대인만의 문화를 죽어라 지켜가며 자신들의 영역(마을 혹은 공동체)을 만들며 살아갔기 때문에 만만하게 생각하거나 고깝게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중세시대부터 당시까지 유대인은 박해와 학살을 당하거나 왕따 당하는 존재였다. 흑사병 시기의 유대인 학살이 대표적인 예이며, 홀로코스트에 앞서 러시아에서도 포그롬이 일어난 바 있으며 이보다는 약하지만 폴란드 제2공화국처럼 반유대주의 색채가 강한 국가들도 많이 있었다.

다만 이렇게 넓게 퍼져있다보니 별 감정없는 일반인들도 있었으며, 중세시대 이후 국가관이 종교에서 왕국 혹은 국가에 충성하는 분위기로 접어들며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냉담(즉 이름만 유대인이지 사실상 무종교)이나 타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고, 국가적으로도 종교적 색체가 옅어지면서 자연스래 유대인들은 일반인들 사이로 스며들고[1], 반유대주의 또한 옅어지기도 했다.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 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

그러던 도중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 제국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선포된 베르사유 조약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독일의 경제는 막대한 보상금으로 파멸에 이르렀다.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초인플레이션 등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러는 도중 독일에 패전 책임이 있는 극우, 군국주의자들은 배후중상설을 떠들며 제1차 세계 대전 패배의 원인이 유대인이라는 주장을 피기 시작했다. 배후중상설 참고.[3] 거기에 이렇게 힘든 독일에게 더 큰 시련이 오니, 1929년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 대공황은 더욱더 피폐해진 독일을 사실상 죽음으로 몰고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대인은 자본가•은행가 이미지가 있었기에 반유대주의는 더욱 폭발적으로, 그리고 계층을 따지지 않고 넓게 퍼지기 시작한다.[4]

또한 러시아가 공산화 되자 그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유대-볼셰비즘설(Judeo-Bolshevism)이 널리 퍼졌으며[5], 유대인이 세계 지배 음모를 꾸민다는 시온 의정서가 신봉되었고, 극단적 반유대 언론을 소유한 미국인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도 나치에게 영향을 미쳤다.[6] 또한 온갖 과격한 반유대주의적 주장이 사회에 퍼졌는데, 유대인이 어린아이를 해한다는 blood libel(피의 중상)[7], 매음굴 포주들이 유대인이라는 설, 유대인이 동성애 영화 등의 풍기문란의 주범이라는 설, 1차 대전에서 유대인이 징병을 거부했다는 설, 유대인이 담배를 도래시켰고 담배 산업을 장악하고 있다는 설 등이 있었다.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문서 참조.

이러한 상황에서 빈틈을 파고든 이가 바로 히틀러다. 1차대전의 퇴역 군인이던 히틀러는 나치당 입당 후 연설 능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데, 이러한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8]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물론 히틀러도 처음부터 유대인 대학살과 절멸을 기획한것은 아니고 프랑스령 마다가스카르나 우랄 산맥 너머로 추방시키려했다. 마디가스카르가 유럽과 위낙에 멀리 떨어져있었고, 유럽에 비하면 많이 무덥고 낙후되었기때문에 유대인들을 유럽에 오기 쉽지않게 떨궈내려고했던것으로, 주요 항구와 도시지역들은 SS를 보내서 감독하는 경찰국가로 만들어서. 유대인들을 통제하고, 경제문제는 중앙정부의 도움없이 유대인들이 알아서 자급자족하라는 식으로 해결할 방침이었다.[9] 그러나 현실적으로 독일 본토와 마다가스카르가 거리가 엄청나게 먼데다가 계속된 항공전에도 영국이 계속 해상 제해권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다가스카르로 유대인 추방을 시행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우랄 산맥 너머도 당시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협력관계였던 소련에게 같이 유대인들을 강제이주 시키자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했고[10] 소련을 침공해 정복시킨 뒤 직접 추방시키려했으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패배해 전쟁이 길어지자 아예 유대인을 말살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꿨고 스탈린그라드 전투로 전황이 역전되자 더욱 발악적으로 학살을 전쟁 수행보다 우선시할 정도로 대학살을 벌인 것이다.

3. 특징

파일:WannseeList.jpg
지역
A.
알트라이히[11]
오스트마르크[12]
오스트게비테[13]
폴란드 총독부
비아위스토크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기에
덴마크
프랑스 독일군 점령 지역
프랑스 비점령 지역[14]
그리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131,800
43,700
420,000
2,284,000
400,000
74,200
-유대인 비포함-[15][16]
3,500
34,000
43,000
5,600
165,000
700,000
69,600
160,800
1,300
B.
불가리아
영국
핀란드
아일랜드
이탈리아
이탈리아 점령 하의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포르투갈
루마니아[17]
스웨덴
스위스
세르비아
슬로바키아
스페인
튀르키예(유럽 지역)
헝가리
소련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벨라루스(비아위스토크 제외[18])
48,000
330,000
2,300
4,000
58,000
200
40,000
3,000
342,000
8,000
18,000
10,000
88,000
6,000
55,500
742,800
5,000,000
2,994,684
446,484
도합: 1,100만 이상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의 회의록 문서 중 6페이지. 이는 회의 참가자이자 홀로코스트 실무 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 친위대 중령의 이름을 따 '아이히만 리스트'라 불리는 문서로, 유럽 전역의 유대인 수(학살 대상자)를 정리해 놓았다. 유형 A는 회의가 열렸던 42년 초 시점에 독일이 점령하여 직할하던 지역의 유대인들이며, 유형 B는 그 외의 지역들[19]의 유대인들이다.

홀로코스트는 여타 학살과 구분되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특징은, 전쟁터에서 우발적으로 벌어지는 포로 학살이 아닌, 자국(점령지) 내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한, 매우 체계적인 정책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 사실 홀로코스트라는 건 아돌프 히틀러 혼자만의 작품이 아니다. 나치 독일이 추진한 인종 정책이 갖던 의미는 땅을 점령해서 독일인에게 배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그 영토에 사는 사람들은 독일인이어야 한다"는 논리적 문제가 생기는 거다. 나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슬라브인들을 그 땅에서 추방하거나 잡아 죽이고 그 땅을 독일인에게 준다는 개념을 도출하였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는 자기 민족 (또는 그러한 편인 사람들)에게는 후하고, 아닌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무자비한 배타주의적 민족주의의 소치다. 하지만 위에서 나치가 추구한 '문제 해결' 논리의 연장선 상에서 살펴보면 유대인 학살 또한 그 유대인들이 갖고 있던 경제권과 상권, 자본을 빼앗아 독일인들에게 '돌려준다'는 개념으로 정당화되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실제로 유대인들이 살던 집을 빼앗아 독일인들에게 나눠주는 등의 약탈 정책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그런데 이런 자산 몰수가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면 유대인들이 이를 피하기 위해 자산을 챙겨 미국이나 스위스 등 제3국가로 도피하여 나치 입장에서는 골치가 아파지므로, 나치는 아예 국가 단위로 거대한 강도질을, 아주 체계적으로 저지르게 된 것이다.

홀로코스트의 또 다른 특징은 중간 관리자들에게 있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가 체계적인 말살 정책으로 자리매김하는데는 하인리히 힘러,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아돌프 아이히만과 같은 중간 관리자들의 과당 경쟁이 있었다. 이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보다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학살 방식과 말살 정책을 입안하였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반유대주의적 사상과 언변, 선동 능력을 원동력 삼아 이루어졌다는 인식이 있지만, 사실 히틀러는 "뭉뚱그린 개념"을 구상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홀로코스트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린 것은 아돌프 히틀러이므로, 개념을 구상했을 뿐이라고 해서 히틀러의 죄악이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상술한 바와 같이 홀로코스트란 우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국가가 주도하여 정책과 체계를 가지고 특정 인류 집단을 말살한 것이므로 히틀러 한 사람만의 힘으로 완성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당대 독일(은 물론 유럽)에서는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부터 이미 유대인들에 대한 반발심을 갖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가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이다. 힘러를 비롯한 중간 관리자들은 히틀러의 '개념'에 찬동해 악독한 학살 정책을 입안하며 퓌러의 망상을 적극적으로 구체화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경쟁'은 전쟁이 시작되면서 더욱 과열되고, 그만큼 학살 정책도 폭압적이고 잔학하게 변모하였다.

홀로코스트는 위에서 밝힌, 원래 독일인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을 빼앗아 독일인에게 되돌려주는 개념과 맞물려 약탈 체제로도 구상되었다. 가령 폴란드 등을 침공한 다음, 그곳에 사는 독일계 주민을 선동해서 폴란드인들을 공격하게 하고, 그들로부터 약탈한 물자로 독일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보충하는 식으로 조성된 일종의 체계화된 약탈체제를 구상한 것이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대상에 유대인 뿐만 아니라 장애인, 집시, 동성애자도 들어가 있었다는 점은 위 개요에서 이미 밝힌 바 있다. 나치가 이들 또한 홀로코스트 대상으로 우겨넣은 논리는 이러하다.

먼저 장애인의 경우, 나치당은 이들에 대한 복지정책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장애인에게 복지정책을 실행하는 것은 "재원을 낭비"하는 것으로 간주한 것은 물론이고, 우생학에 기반하여 장애인의 존재는 인종적 오염, 이들을 보호하고 복지를 실행하는 것은 사회적 병폐와 나약함을 키우는 행위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치는 장애인이 도태되어야 아리아인의 공동체가 건강해진다는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인권이라는 개념이 없던 고대에는 사람을 노동력이나 자산의 개념으로 여겼다. 따라서 비장애인과 같은 노동력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여겨진 선천적 장애인들, 그리고 후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게 된 구성원을 추방하거나 죽이는 경우가 파다하였다. 그러나 종교가 나타나는 시기부터 인권과 생명에 대한 가치가 조명되기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람을 일종의 노동력으로 여기던 고대라면 몰라도, 현대에 이르러서 장애인에게 자행된 나치의 홀로코스트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었다.

집시의 경우, 홀로코스트 대상으로 분류된 것은 유대인의 경우처럼 오래 전부터 유럽 일대에 만연하였던 집시에 대한 혐오 의식에 기인한다. 하지만 유대인과는 사상적 관점에서 혐오의 결이 달랐다. 초기 나치당은 극좌 세력과 극우 세력이 혼합된 세력이었고, 나치당의 사상적 근간이 되는 나치즘도 마찬가지로 극좌 요소와 극우 요소가 혼재되어 있었다. 가령 유대인에 대한 혐오는 극좌화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인은 은행업과 고리대금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에 부르주아 계층으로 치부되었고, 유대인에 대한 혐오와 학살은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의 성격을 상당히 띄고 있었다. 반면 집시에 대한 혐오와 학살은 극우 인종주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동성애자의 경우, 당대 유럽의 "전통적 윤리" 개념에 기반하여 혐오와 학살이 이루어졌다. 나치당의 민족적 이데올로기는 우생학적으로 우월한 아리안 인종을 번식하는 개념으로 정리된다. 그런데 동성애자들은 나치당이 원하는 '번식'을 하지 않으므로, 나치 입장에서 동성애자란 "'번식'을 피하는 부도덕한 존재"로 치부되는 것이었다.

이처럼 유대인과 다른 홀로코스트 대상에 대한 나치의 학살은 개념적으로 구분이 되는 것이었다.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학살에는 '부르주아', 즉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매개로 하는 반면성이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아이러니는 외려 나치당원이라는 사람들 중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즉, 극좌적 발상으로 유대 자본가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는 개념을 수반하긴 했지만, 반대로 실상을 보면 부르주아 계층이 같은 부르주아 계층을 좌파 논리에 대입하여 공격한 셈이 된다.

이러한 모호하고 모순적인 증오에 대해 '좌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자본가에 대한 증오 때문에 유대인을 증오하고, 우파 반유대주의자는 유대인 혁명가에 대한 증오로 유대인을 증오한다'는 표현이 유명하다. 이에 대해서 명확히 이해하려면 근대의 유럽에서 도시 시민(부르주아) 계층은 자본가의 산실인 동시에 지식인 혁명가의 모태이기도 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근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급속한 공업화로 농촌 공동체가 해체되고 도시로 인구와 사회적 영향력이 집중되었고, 도시 시민들이 새로운 사회의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기존의 농업 지주를 대신하여 도시의 공업, 금융자본가들이 경제적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도시화한 시민사회 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영향력을 넓히게 된 것.

그런데, 유대인들의 경우 토지 소유에 제약을 받는 경우가 많고 배타적인 농촌 공동체에 편입하기는 어려웠기에 이전 시대부터 도시에 자리 잡고 사는 이들이 많았고, 따라서 도시 시민이 사회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면서 유대인들의 사회적 영향력 역시 성장했다. 즉, 유대인들에 대한 혐오 자체는 중세 이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이고, 이러한 혐오가 부르주아(원문 그대로의 의미로써 부르주아, 즉 도시 거주 시민) 계급이 성장하여 사회적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유대인들이 사회를 장악하고 사악한 음모를 꾸민다'는 망상의 형태로 다듬어진 것이다.

정리하자면, 같은 홀로코스트 대상일지라 하여도 유대인과 집시/장애인/동성애자들과의 개념적인 구분은 약간 다르다.

이에 대해 라울 힐베르그의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라는 책을 증거로 "홀로코스트가 본격화 되기 이전인 30년대 말 괴벨스의 선동으로 벌어진 유대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력 행위조차도 독일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고 했으며. 즉 홀로코스트는 물론이고 그보다 훨씬 더 덜 조직적이고 심지어는 온건해 보이기까지 하는 유대인에 대한 폭력조차도 독일 경제에는 이로울 것이 전혀 없었다"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한 "토지를 차지하기 위한 학살과도 그 궤를 달리하며, 경제 활동의 기반이 되는 "토지"를 가장 적은 비용으로 차지하기 위해 그 토지의 기존 거주자들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학살이 하나의 수단임을 의미하는데,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확실히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인 행위였다"고 반론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에 대해선 헷갈리지 말아야할 부분이 있다.

나치의 경제 계획은 국유화를 통하여 통제 경제적인 방향을 조장하여 전시 대비에는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결론적으로 실패한 경제 정책인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반론하는 사람이 말하는 것은 "결과"지만 당시 나치정권 자체는 그 "결과"에 대해서 몰랐다. 즉, 유대인들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다는 일종의 환상 때문에 그걸 다시 "독일인에게 빼앗아 주면"된다고 생각한 문제인 거다. 또한 후자의 경우 토지에 대한 명분을 가진 인종주의적 학살이라고 보면 된다. 즉, 홀로코스트가 학살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고 보이는 이유는 그 수단을 종합적으로 써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뒤집어 말하면 그 안에도 영토 획득을 하면서 벌어진 인종주의적 관점의 학살행위와, 인종 그 자체를 학살하던 행위라는 점으로 나눠 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겠다. 게다가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나치는 애초에 "우월한 아리아인종"의 씨를 받겠다고 일종의 짝짓기를 시켜먹은 전례도 있을 정도였다.

또한 프로파간다의 성격상 나치당의 정책 자체를 손바닥 뒤집듯 뒤집을 수도 없었을 뿐더러 당내의 좌파적 성격을 지닌 SA출신 집단 등의 계보를 생각해 보면 당연하지만 뭔가 증오의 타겟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유대인이 특별했던 거다. 물론 후대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서 "독일이 유대인들을 탄압한 것 자체가 경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므로 경제적 이유로 유대인 학살의 이유는 없었다"는 결과론적 관점을 제시할 수는 있지만, 애초에 실패한 경제 정책의 경우 그것이 실패할 줄 알고 저지르는 예는 거의 없다.

4. 원인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에 가까운 혐오와 편견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이는 히틀러 집권 이전부터 포그롬 등 유대인에 대한 학살이 걸핏하면 일어났던 기독교 사회의 책임을 히틀러에게만 전가하여 단순화하는 것이며, 홀로코스트의 정확한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일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이라는 저서를 통해 홀로코스트라는 전대미문의 학살이 가능했던 역사와 실체를 어마어마한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1996년에 있었던 골드하겐 논쟁처럼 독일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치의 계획에 찬동하고, 개입했다는 의견도 있다.[20]

홀로코스트의 원인에 대한 주장들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의도주의적 해석은 홀로코스트가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 상층부의 의도에 따라 계획적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보고, 기능주의적 해석은 기존의 반유대주의가 나치의 부추김을 받아 독일국민들에 의해 자발적으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라고 본다. 쉽게 말해 계획대로 vs. 어쩌다보니. 물론 아래에 나오듯이 현실은 저 두 가지 요인의 합작이었고 학자들 역시 이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어느쪽이 더 크냐의 논쟁일뿐이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제2차 대전 당시 나치군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나치군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21]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 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든 존재했다. 대표적으로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잘 알려진 작품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탐욕스러운 상인 샤일록을 생각해보라. 당시 히틀러를 비판하며 나오는 말이 '그가 잘한 일은 유대인 정책 밖에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당시 유럽인들은 유대인들을 자신들의 거주구역에서 쫓아내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나눠주는 것에 아주 찬성하였으며, 유대인들을 죽이는 것에 대해서도 그저 방관했다. 대학살은 절대 비밀스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자랑스럽게 광고해대지만 않았을 뿐이지 시골에서 소식도 안 듣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구든지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의 운명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그저 유대인이 싫어서, 또는 포상금이나 유대인들이 가진 재산이 탐나서 유대인들을 고발했던 것이다.

유럽의 반유대주의는 중세까지는 그리스도교의 영향[22]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국민국가의 등장,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인종주의적이고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폴란드, 러시아의 포그롬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어록이 있다.
처음에 중세의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교 신자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라울 힐베르크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민족들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 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의 유대민족의 섬멸이 될 것이다!"
(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유대인들은 우리가 섬멸(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 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 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
- (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František Chvalkovský)에게 보낸 편지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이상의 발언은 히틀러가 유대인을 절멸시키고자 했다는 근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에 대해서 유명한 홀로코스트 부인론자 데이비드 어빙은 "이 2개의 유명한 어구에서 사용된 vernichtet라는 단어가 실지로는 '절멸'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annihilate로 번역되며 '절멸시키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1:1로 대응되는 것은 아니고 보다 엄격하게 정의하면 폭력을 행사해서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게 한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므로, destroy로도 번역될 수 있고 전간기에 사용된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주로 군사교리의 용어에서 자주 사용되는 '섬멸하다'에 가까운 의미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섬멸하거나 몰살하거나 그렇게 심각한 의미의 차이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 나치당 기관지 Völkischer Beobachter 1922. 3.10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 Das Schwarz Korps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 K. Jager 1941, 12.1

이 외에도 다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당시 나치 독일에서는 '최종 해결'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절멸이라고 명시된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절멸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설이 자주 제시된다.[23] 그러나 아래에서 읽어낼 수 있다시피 '최종 해결책' 혹은 '물리적 해결', '정치적 해결' 등의 단어[24]는 언어를 관용화해 이의 무게를 무화(無化)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해석되는 것이 학계 다수의 의견. 신어를 떠올리면 알 수 있을 듯. 실제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과 예루살렘 재판과 같은 전범 재판 당시 피고로 심문받던 나치 수뇌부들은 관용적인 표현(Redensarten), 선전문구(Schlagworte)를 주로 사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 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25]
이 학살 공장을 돌아가게 한 것은 반유대주의 신념에 찬 나치 수뇌부 관료들만이 아니었다. 내무부, 외무부, 법무부, 경제부, 재무부, 교통부, 체신부, 동유럽부, 선전부 등 거대한 독일 관료 기구 전체가 이 절멸 정책을 구상, 준비, 실행하는 데 참여했던 것이다. 법무부는 학살당할 유대인의 범위를 정의했고, 경제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해 파괴의 그물에 걸려들기 쉽게 했으며, 내무부는 절멸수용소로 이송될 유대인을 포획했다. 또한 교통부 산하의 제국철도는 전 유럽의 유대인을 절멸수용소로 이송하는 업무를 담당했다. 따라서 독일의 공무원들은 정책을 입안하고, 법령을 통과시키고, 사무실에서 회의하고, 전화를 주고받고, 공문에 서명하고, 절멸수용소로 가는 철도 시간표를 짬으로써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엄청난 규모의 학살 과정에 가담한 셈이었다. 파괴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는 데에는 굳이 반유대주의 신념이 필요 없었다.
- 박윤덕 외 23인 공저, 《서양사 강좌》제 22장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26], 576 ~ 577p, 아카넷, 2016.2.20

히틀러의 반유대주의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책임을 추궁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27]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28]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29]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 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 학살 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대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5. 발전

"최종 해결책"의 발전
영상 출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박물관 공식 유튜브 채널

히틀러는 젊은 시절 반유대주의 분위기가 팽배했던 오스트리아의 빈에 머무는 동안 반유대주의적 정서를 흡수했다. 그러나 인종론에 바탕을 둔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세계관이자 이념적 목표가 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부터였다. 히틀러는 독일이 전쟁에서 패한 뒤 당시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패전과 독일이 겪은 모든 수모의 책임을 유대인의 탓으로 돌렸다. 1919년 9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입당할 무렵에 이미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전문가로 불렸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내내 나치당의 반유대주의는 자주 물리적 폭력으로 표출되었고, 1933년 히틀러가 집권한 뒤로 나치의 극렬한 반유대주의는 단발적인 폭력이 아닌 일관성 있는 정책적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치가 패전과 혁명, 정치 위기, 극심한 사회적 빈곤을 초래한 것이 유대인이라고 지목하며,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자 독일 사회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편견은 갈수록 커져 갔다. 이러한 나치의 선전과 활동으로 인해 유대인은 유난히 부자가 많고 경제를 장악하여 해악을 끼치고 문화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고정관념이 날이 갈수록 확산되었다. 그 결과 유대인은 종자가 다르며 독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것은 유대인이라는 생각이 벌써 히틀러가 정권을 잡기도 전에 널리 퍼졌다. 히틀러가 일단 정권을 잡은 후 나치의 반유대주의 구호는 그런 부정적 여론을 등에 업고 사회 구석구석에 스며들었고, 줄기찬 선전으로 부풀려져서 독일의 모든 곳에 퍼졌다. 이로 인해 독일이 다시 부흥하려면 민족을 순화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유대인을 독일에서 내몰아야 한다는 생각이 호응을 얻었다. 이 시기 'Juden Raus'(유덴, 라우스! 즉 "유대인은 꺼져라"라는 뜻)라는 보드게임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1919년부터 히틀러가 추진해야 할 목표로 내세웠던 유대인 제거는 조금씩 실현 가능한 목표로 떠올랐다. 나치당은 히틀러 내각을 새우자마자 그 즉시 유대인 탄압을 시작했다. 그 시작은 1933년 4월 7일에 Gesetz zur Wiederherstellung des Berufsbeamtentums, shortened to Berufsbeamtengesetz전문(독일어) 법률 번역해서 직업공무원재건법을 공포하고 이 법률 3조에 따라 비아리안 공무원 즉 유대인 공무원들을 공직에서 추방한다. 법률안 통과 직전에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이 법안에 반대하는 편지를 4월 4일에 히틀러 총리에게 보냈지만 히틀러는 거부하는 답신을 4월 5일에 보낸다.[30] 그러나 힌덴부르크의 반대가 껄끄러웠는지 답신에 참전용사나 유가족은 추방하지 않겠다고 넣었고 법안도 그렇게 만들었다. 여기에 4월 22일에 발표된 이법의 시행령에 따라 유대인 의사들이 의료보험공단에서 추방당해 사실상 자격을 잃는다. 분명 공무원 법 시행령으로 민간 의사의 자격을 박탈하는 것은 분명한 월권이었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933년 4월 22일에는 유대인 특허 공증인을 금지하는 법이, 5월 6일에는 세무사를 9월 이후에는 변호사를 금지하는 법안이 차례대로 공포되었다. 유대인 예술인의 경우 나치 집권직후 괴벨스를 중심으로 선전부가 만들어졌고 1933년 9월 22일 선전부 산하에 제국문화회의소가 설립되어 여기서 독일의 예술활동을 총괄하게 되는데 한스 힝켈 같은 나치당원들이 문화회의소 총재로 군림하면서 유대인 예술가들은 독일 예술시장에서 추방당한다. 여기에 1933년 10월 4일에는 유대인 신문 편집자를 해고하는 행정명령이 발표된다.[31] 1938년 6월 14일에는 유대인들이 기업의 소유나 이사직을 금지하는 법안을 공포했고, 11월 12일에는 무조건 유대인 이사를 해고하는 법률을 공포한다.[32]

한편 ‘돌격대’를 비롯한 나치당 과격파들이 저지른 유대인 박해는 1933년 나치의 집권이 시작되고 나서 유대인 상점 불매운동이나 유대인들을 길거리에서 폭행하고 모욕하는 방식으로 지속적으로 일어났다. 특히 1933년과 1935년, 1938년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폭력사태가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수정의 밤’으로 불리는 1938년 11월 9일과 10일에 벌어진 유대교 회당 파괴와 유대인 살해, 유대인 상점 습격은 반유대주의 폭력의 정점이였던 사건이었다. 크리스탈나흐트 사건 이전 인종 학살을 통한 유대인 절멸이 처음부터 목표는 아니었다. 하지만 크리스탈나흐트 사건 이후 나치는 유대인에 대해 독일에서 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에서 아예 인간으로써 살 권리를 박탈하는 쪽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반유대주의 폭력이 확산되고 갈수록 과격해지고, 전쟁 발발 후 나치의 유대인 정책이 독일이 아닌 다른 지역으로 유대인을 이주시키는 영토 해법에서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거치며 대량 학살을 통한 절멸 해법으로 바뀐 것은 모두 나치 독일의 전형적인 '누적적 급진화'의 사례였다.

사실 히틀러가 별로 나서지 않았어도 반유대 운동은 저절로 번졌으며, 독일인들이 알아서 유대인 탄압을 이끌고 주도하고 밀어붙였다. 물론 거기에는 이것이 나치즘의 위대한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지도자의 뜻을 좇아 일하는 전형적 사례였다. 물론 사람들은 대개는 실리를 따져서 그렇게 했지만 유대인을 제거할 목적으로 나온 조치는 히틀러의 장기적 목표를 이루는 데 이바지하는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히틀러의 승인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반유대 차별의 급진화를 밀어붙인 조직이나 기관, 개인은 저마다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고 또 노리는 것이 있었다. 이것들을 모두 묶어내고 그럴듯한 명분을 주는 것이 인종 정화의 구상이었고 유대인 없는 독일 건설의 목표였다. 그리고 그 구심점은 지도자였다. 그래서 때로는 영향이 간접적이었을지라도 히틀러의 역할은 중요했다.[33]

6.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6.1.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폴란드 침공 당시 친위대 보안대와 보안경찰을 주축으로 한 친위특무대가 최초로 결성되어 총살 작전을 벌인다. 이 당시 친위특무대의 학살은 딱히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동폴란드에서 소련이 벌인 카틴 학살처럼 폴란드 엘리트층과 민간인, 그리고 잔여 저항 세력이 주 타깃이었는데, 이는 폴란드를 노예화하고 그들의 민족 문화를 말살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폴란드 엘리트층 중 유대인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던 까닭에 결과적으로는 유대인들 또한 다수 살해당했다. 이 살해작전은 1941년부터 소련에서 벌어질 집단총살의 연습이자 청사진이 된다.

장애인 살해계획(T4 작전)이 시작된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다.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했는데, 장애의 정도, 종류에 관계없이 이루어졌으며 부모나 보호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다. 총 희생자 수는 약 20만 명이었다. 이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추정한 수치이다. T4 작전은 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명목상으로 보면 홀로코스트와 큰 관련이 없는 것 같이 보이나, 이 프로그램을 운영한 노하우는 훗날 홀로코스트에 적극적으로 반영된다. 특히 시끄러운 집단 총살이 아닌, 조용하고 대량으로 '처리' 가능한 산업적인 학살의 아이디어가 여기서 비롯된다. 이 작전에 참여했던 인력들은 41년 T4작전이 종결된 직후 라인하르트 작전 등 유대인 대량학살에 바로 투입된다.

6.2. 1940년

북유럽프랑스 등 서유럽 지역을 독일군이 침공하여 유럽 대륙의 서쪽 절반을 장악한다. 벨기에, 북프랑스, 네덜란드,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는 군정청국가판무관부가 설치되어 모든 권한을 독일이 쥐게 된다. 진주한 독일군과 판무관부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장악한 현지 행정력을 이용하여 점령 지역의 유대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법적 권리를 말소시킨다. 비점령 지역이었던 비시 프랑스의 경우 독일의 압박이 딱히 없었음에도 페탱 원수의 명령에 따라 유대인들의 권리를 박탈한다. 프랑스 내에서 유일하게 유대인들이 안전했던 곳은 이탈리아 점령 구역 뿐이었다. 그러나 이미 전쟁이 시작된 관계로 이들은 더 이상 이동이 불가능해진다. 독일은 점령 지역의 현지 행정력까지 동원하며 유대인들과 정치범들을 수용소에 가두기 시작한다.

점령된 폴란드 지역에 게토가 실시되어 유대인들을 지정된 일정 구역으로 강제이주, 거주하게 한다. 게토는 1945년 종전 시까지 운영된다.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바르샤바 총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수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의 2.4%밖에 안 되는 게토 내에서 거주했다. 게토 내에서는 열악한 시설과 과밀한 인구, 부족한 생필품 등으로 인해 전염병 등이 창궐했다. 이후 거의 모든 동유럽 점령지에 게토가 세워진다. 서유럽 지역에서와 달리, 게토 일대에서는 길거리에서 쏘아 죽이는 등의 행위가 무분별하게 자행된다.

현지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직간접적으로 협력한다. 그들은 게토에 대체로 호의적이었다.[34]

6.3.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침공그리스 침공을 통해 발칸 반도 지역도 독일의 세력권에 들어간다. 유고슬라비아는 여러 조각으로 분할 점령당한다. 그리스세르비아 지역에도 독일의 군정청이 세워져 독일군이 행정권을 장악한다. 독일 국방군과 친위대는 해당 지역에서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빙자한 집단총살을 1945년까지 자행한다. 이미 1941년 말이 되면 세르비아 지역의 유대인들은 독일군에 의해 거의 살해되었다. 한편 크로아티아의 파시즘 집단인 우스타샤는 뉘른베르크 법을 본떠 유대인들의 권한을 박탈한 뒤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에서 인종청소를 벌인다. 1941년 8월의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시작으로 여러 개의 강제수용소가 세워진다. 이들의 우선적인 타깃은 유고슬라비아 왕국 시절 헤게모니를 장악했던 세르비아인들이었으나 집시와 유대인들 또한 살해되었다.

당시 발칸 반도에서 유대인들이 안전했던 곳은 이탈리아 왕국의 점령지와 헝가리 왕국에 있는 유대인들 뿐이었다. 이탈리아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와 헝가리 섭정 호르티 미클로시는 유대인들의 지위를 박탈하라는 독일의 압박을 무시했다. 반면 루마니아 왕국의 경우 이미 1941년 초에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유대인들을 살해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자 점령지역에서 대량학살을 벌이기 시작한다. 불가리아 왕국의 경우 이미 1940년에 뉘른베르크 법을 본뜬 반유대주의 법안을 마련하고 본국과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수용하거나 독일로 이송하고 있었다.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을 통해 소련 공격이 개시되며 홀로코스트가 동유럽 전역으로 확대된다. 점령지에 대한 게토 설치가 이루어진다. 대부분의 게토들이 1940년~1941년 사이에 세워졌다. 한편 점령지 각지에서 친위특무대와 국방군, 및 친위대의 집단 총살을 통한 학살이 시작된다. 죽음수용소가 가동되기 전까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35] 아래 유대인, 소련인, 폴란드인을 대량학살했는데, 이틀 만에 3만 명이 살해된 경우도 존재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방식을 통해 총 160만 명이 살해된다.

8월, T4 작전이 공식적으로는 종료된다. 이후 12월에는 최초의 절멸수용소가 헤움노(Chelmno)에 세워진다. 이곳, 헤움노 절멸수용소에서는 가스 트럭을 통한 산업적인 방식으로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 10월에는 친위대 총수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라인하르트 작전(Aktion Reinhardt)'이 개시되며 폴란드 지역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 작전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명령에 따라 루블린 시의 친위대 및 질서경찰 중장이던 오딜로 글로보츠닉의 주도로 베우제츠 절멸수용소(Vernichtungslager Belzec)가 건설되며, 이듬해인 1942년 2월에 운영을 시작한다.

3달 뒤인 1942년 1월의 반제 회의에서 홀로코스트 방침이 절멸로 확정된 후 라인하르트 작전 수용소들은 더 확대되어 소비보르(Vernichtungslager Sobibor), 트레블링카(Vernichtungslager Treblinka)가 연달아 세워졌다. 한편 본래 강제노동수용소였던 아우슈비츠마이다네크는 라인하르트 작전과는 상관이 없었으나 반제 회의 이후 역시 가스 시설을 확충하여 절멸수용소로 개조된다. 일반 친위대 소속 해골부대와 질서경찰이 운영했다. 그 중 라인하르트 작전 수용소들은 몇 개월 전 종료된 T4 작전에 참여했던 이들이 주축이 된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6곳의 절멸수용소들에서만 총 300만 명이 학살당했다.

6.4. 1942년

최종 해결책이 수행되는 동안, 유대인들을 적절한 지침과 적당한 방식으로 동부로 이송시켜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해야 한다. 성별과 노동력에 따라 구분하여 대규모 노동대열로 조직해 도로 건설에 투입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인원은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다.

불가피하게 최후까지 남은 이들은 신체적으로 가장 강인한 자이니 그에 상응하는 적절한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그런 자들은 자연도태를 거친 자들이므로 만약 그들이 풀려나게 되면 새로이 유대인이 번성할 수 있는 생식 세포 역할을 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역사가 주는 교훈을 상기하기 바람).

최종 해결책의 실제적 수행 과정에서 우리는 유럽을 서에서 동으로 쓸어낼 것이다.
{{{#!folding [ 독일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Unter entsprechender Leitung sollen nun im Zuge der Endlösung die Juden in geeigneter Weise im Osten zum Arbeitseinsatz kommen. Im großen Arbeitskolonnen, unter Trennung der Geschlechter, werden die arbeitsfähigen Juden straßenbauend in diese Gebiete geführt, wobei zweifellos ein Großteil durch natürliche Verminderung ausfallen wird.

Der allfällig endlich verbleibende Restbestand wird, da es sich bei diesem zweifellos um den widerstandsfähigsten Teil handelt, entsprechend behandelt werden müssen, da dieser, eine natürliche Auslese darstellend, bei Freilassung als Keimzelle eines neuen jüdischen Aufbaues anzusprechen ist. (Siehe die Erfahrung der Geschichte.)

Im Zuge der praktischen Durchführung der Endlösung wird Europa vom Westen nach Osten durchgekämmt.}}}

-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 총독 대리 겸 국가보안본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1942년 1월 20일 열린 반제 회의에서 '유대인 문제'의 처리 방안에 대해 논하며. 반제 회의 회의록 7, 8 페이지에서 발췌. 7 페이지8 페이지의 상대적으로 밝게 표시된 문단 부분이다.

반제(Wannsee) 회의에서 Endlösung(최종 해결책)이 채택됨에 따라 홀로코스트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7월부터는 게토에서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진다. 상술한 대로 베우제츠 절멸수용소를 필두로 한 학살수용소들이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이 이때부터이다. 1942년 6월 초면 유대인을 서유럽에서 추방하는 사업의 틀이 갖춰졌다. 서유럽 유대인의 수송은 1942년 7월부터 이루어졌고, 대부분은 당시 가동되던 시설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절멸수용소가 있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유대인들과 프랑스, 슬로바키아나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의 경우 소비보르 절멸수용소로 이송되기도 하였다.

'최종 해법'은 실행에 옮겨졌고 조직적 대량 학살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42년 말까지 친위대 자체 집계에 따르면 이미 4백만 명의 유대인이 목숨을 잃었다. 다만 히틀러는 반제 회의에 대한 직접적 관여가 드러나지 않았다.[36] 사실은 관여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 독일이 또다시 세계대전에 휘말려 든 이상 유대인은 각오를 해야 할 것이라고 1941년 12월 명백히 입장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때쯤이면 지역 차원에서는 위에서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유대인 살해에 앞장섰다. 그 중에서도 친위대의 핵심이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히틀러의 포괄적인 유대인 동부 추방령을 등에 업고 유대인 박해를 범유럽 차원의 학살극으로 확대했다.

11월에 독일은 비시 프랑스를 기습적으로 점령한다. 이로서 프랑스 전역이 군정 통치하에 들어간다. 국방군 비밀야전경찰과 보안사단, 그리고 게슈타포와 보안대원들은 무제한적으로 프랑스 유대인들을 색출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대부분 아우슈비츠로, 일부는 소비보르 등지로 수송되어 살해당한다.

6.5. 1943년

5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발생한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저항군들은 무기를 빼돌린 후 독일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으며, 한동안 해방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는 곧 독일군에 진압되며, 체포된 이들은 트레블링카로 보내진다. 소비보르와 트레블링카에서도 각각 6월과 8월에 존더코만도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이들중 다수는 추적에 의해 살해되지만 일부는 살아남았고, 해당 수용소들의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유대인 저항군들은 습지와 숲이 많아 추적을 피하기 용이했던 벨라루스 지역에 주로 분포했다.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한다. 그러나 독일군은 신속하게 북이탈리아를 접수하고 괴뢰정부인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을 수립한다. 많은 이탈리아인들이 이 괴뢰 파시즘 정권에 반발하며 파르티잔 투쟁을 벌이자 독일군과 괴뢰군은 대량학살로 대응한다. 동시에 그동안 독립 국가 시절에는 보호받던 이탈리아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체포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진다.

11월, 폴란드 유대인들 대다수가 살해됨에 따라 라인하르트 작전이 종료된다. 소비보르, 베우제츠, 트레블링카 세 곳의 절멸수용소 또한 폐쇄된다. 이후 남은 유대인들 또한 제거하고자 한 독일은 루블린 시에서 강제노동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을 그러모아 살해했다. 수확제 작전(Aktion Erntefest)으로 알려진 이 작전 기간 동안 무장친위대 5기갑사단과 질서경찰은 약 42,000명을 단 이틀 만에 전부 총살한다. 그러나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는 루블린 일대에서의 노동을 통한 착취 및 폴란드 지역에 잔존한 유대인들을 살해하는 장소가 되어 존속한다. 아우슈비츠 또한 폐쇄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설을 더욱 확장하였고, 1943년 이후 새로 독일군에 접수된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이송받아 살해한다.

6.6. 1944년

5월, 헝가리 왕국의 이탈 움직임이 가속화되자 독일은 마르가레테 작전을 통해 헝가리 전역을 통제하는 데 성공한다. 침공이 시작된 날, 중앙에서 유대인 이송 작업을 총괄하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국가보안본부 요원들과 함께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한다. 이때부터 그동안 보호받던 헝가리 유대인들 또한 본격적으로 학살당하기 시작한다. 헝가리는 자체적인 유대인 인구도 많았으나, 그동안 유럽 내에 몇 안 되는 안전지대 중 하나로서 많은 수의 외국 유대인들이 망명을 온 곳이기도 했다. 이들은 아이히만의 통제를 받는 독일군과 헝가리 헌병대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된다. 5월에서 7월 사이 고작 2개월 동안, 44만명 가량의 헝가리 유대인들이 잡혀 살해된다. 이송된 이들의 80퍼센트는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었고, 20퍼센트는 아우슈비츠 1수용소나 부헨발트 같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6월, 소련군이 바그라티온 작전을 개시하며 소련 영내에서 독일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폴란드와 몰도바에 다다른다. 동시에 서부 지역에서는 서방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통해 프랑스를 해방한다. 이제 폴란드 지역이 전선이 되면서 마이다네크 수용소와 잠시 다시 운영했던 헤움노가 폐쇄되지만, 아우슈비츠만은 계속 운영된다. 이 시기 아우슈비츠는 유일한 절멸수용소로서, 어마어마한 수준의 유대인들, 정치범들을 살해한다. 화장터의 처리 용량을 한참 웃도는 수준의 시체들을 처리하기 위해 공터에 구덩이를 파고 임시 화장장을 만들어 대량으로 불태우던 게 바로 이 시기이다.

8월, 소련군이 제2차 이아시-키시너우 작전으로 루마니아와 자카르파탸 통로를 통해 발칸 반도로 진입하기 시작하자 패닉에 빠진 발칸반도 동맹국들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시작으로 추축국에서 연달아 이탈한다. 이때부터 루마니아에서의 유대인 학살이 끝난다. 같은 달 우스타샤 또한 추축국을 이탈하려다 진압당해 실패한다. 9월에는 세르비아가 파르티잔과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헝가리에서마저 이탈 움직임이 감지되자 독일은 10월에 화살십자당의 쿠데타를 유도하여 헝가리를 강제 점령하지만, 헝가리는 곧이어 몰려온 소련군에 의해 대부분의 지역이 해방된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격은 부다페스트 공방전으로 인해 막히게 되며, 남은 부다페스트와 서북부 헝가리 유대인들에 대한 학살은 1945년 2월 헝가리 전역이 해방될 때까지 계속된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헝가리 유대인들은 이미 살해된 상태였으므로, 아돌프 아이히만은 12월에 부다페스트에 소련군이 당도하기 직전 베를린으로 돌아간다.

연합군이 급속히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학살수용소를 파괴해 증거를 인멸하고 수감자 및 포로들을 이송했다. 이를 죽음의 행진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기아, 구타, 병, 추위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했다. 약 60,000명이 생존했으나 정확한 사망인원은 추산 불가하다.

6.7. 1945년

1월의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로 인해 폴란드 대부분의 지역이 해방된다. 소련군이 폴란드 영내로 쇄도하기 시작하면서 아우슈비츠 또한 폐쇄되지만, 시간이 촉박했던 관계로 독일은 아우슈비츠를 파괴하지는 못한다. 남아 있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은 죽음의 행진을 통해 다하우와 같은 독일 영내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진다. 수용소 폐쇄 후 얼마 뒤 소련군은 마이다네크와 마찬가지로 아우슈비츠 또한 해방하며, 조사를 시작한다.

3월부터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으로 인해 서방연합군들이 독일 영내로 진격한다. 그들은 독일 곳곳에 있는 다하우, 부헨발트, 베르겐 벨젠, 오드루스, 마우타우젠 구젠 등의 노동수용소 및 집결수용소들을 해방하며 충격에 빠진다.[37] 죽음의 행진을 통해 서부로 끌려가던 유대인들도 곧 구조된다. 아우슈비츠에서와 마찬가지로 연합군에 의한 조사가 개시된다.

5월, 베를린이 함락되며 전쟁이 종전된다. 그러나 종전 이후 4주 동안 질병 등의 후유증으로 10,000명이 사망한다.[38] 동성애자들은 종전 이후 해방되기는커녕 나치가 수집한 자료에 의해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서독, 동독 정부에 의해 다시 수감되었다.[39]

이 수용소들를 해방시킨 연합군과 소련군은 나치의 학살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마초기질이 강한 미군 조지 패튼도 홀로코스트 참상을 보고 구역질을 하였고 소련 강제수용소에 수감된 적이 있던 소련군들도 강제노동수용소보다 더 참담한 홀로코스트의 참상에 충격을 먹을 정도였다.



[1] 쉽게 말하면 중세에는 독일 국민이기 전에 유대인이였다면, 근현대에는 유대인이기 전에 독일인이다 라는 관념이 생긴 것이다.[2] 히틀러 평전 참고.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와 군 생활을 같이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빌리면 반유대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철십자 훈장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대위도 유대인이었다.[3] 사실 책임은 온전히 저 극우 군국주의자들에게 있었다. 백일 공세 이후 사실상 독일군은 재기불가능 수준이였지만 철저한 언론통제로 인해 협상국이 독일 국경으로 몰아닥치게 생겼을 때야 자신들이 전쟁에서 지고 있다는 걸 의회가 알 수준이였다.[4] 다만 유대인들 중 자본가가 많았던 이유는 토지소유 금지 등 유대인이 박해받았기 때문이다. 토지소유가 금지되니 당연히 농촌보다 도시 근방에 모여들어 돈을 빌려주는 고리대금이나 은행업, 상업등에 종사하면서 유대인 = 자본가, 상인,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가 생긴것이다. 실제로 16세기에 쓰여진 베니스의 상인에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로 나오는 것에서 보듯이 유대인의 이러한 이미지는 역사가 오래되었다. 현대에도 유럽권 사람들은 유대인하면 은행가, 고리대금업자 등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5] 칼 마르크스, 블라디미르 레닌, 레온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로자 룩셈부르크 등등 수많은 관련 인사들이 유대인이었기에 이런 확증편향이 가능했다. 관련 기사 오늘날에도 노엄 촘스키, 버니 샌더스 등이 유대인인지라 이런 반유대주의의 대상이 된다.[6] 헨리 포드는 나치에게 막대한 돈을 주기도 했다.[7] 이 때문에 당시 상황을 표현한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라는 만화에서는 아이들에게 "유대인들은 너희들을 보따리에 싸다가 잡아먹는다!"라고 겁을 주는 장면도 나온다.[8] 퇴역군인이던 히틀러에겐 안정적인 정치자금이 필요했기에 반유대주의자들의 자본지원 +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실제로 헨리 포드와 같은 반유대주의자들은 히틀러에게 거액의 후원을 해주었다.[9] 물론 이 당시에 마다가스카르는 인구 300만명대 정도에 그친지라 땅이 널널하기는 했지만, 다수의 유대인들은 직접 학살만 없을뿐 상당기간 동안은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거나 겨우내 자급자족하는 하는 식으로 빈곤하게 살았을 것은 명백했고, 설사 이들 유대인이 마다가스카르에서 자리잡더라도 교육수준이 훨씬 우월한 유대인들이 기득권을 차지할 것이 명백했기 때문에 말라가시인들을 비롯한 현지인들의 반발이 일어났을 것인지라 실현되더라도 현대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처럼 갈등과 충돌이 심각했을 것이다.[10] 당시 독일이 유럽을 정복하고 점령지 내에 있던 유대인의 수는 약 200만명이었다. 스탈린 입장에서 무리해서 모조리 강제이주 해봐야 돈과 자원만 낭비하고 별로 이득이 되지 않을 뿐더러 소련의 이미지만 나빠진다.[1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50px-Weimar_Republic_1930.svg.png 1938년 이전의 나치 독일 영토. 바이마르 공화국의 영토와 같다.[12] 합병된 오스트리아 + 운터슈타이어마르크와 고렌스카[13] 독일 제국 시절의 구 동방영토 중 1차 대전 패전으로 상실한 지역으로 서프로이센, 포젠 등.[14] 비시 프랑스.[15] 원문에는 Judenfrei(유덴프라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유대인을 뜻하는 Juden과 영단어 free에 해당하는 Frei가 합쳐진 단어다. 여기서 사용된 free의 의미와 완벽히 대응하는 마땅한 한국어 표현이 없어 '유대인 비포함'이라 번역했지만, 사실 이보다는 유대인들이 '청소된' 또는 '제거된', 'XX 성분이 없는'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다. '무지방'을 뜻하는 영어 표현 'fat free'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이 단어는 유대인이라는 한 인종집단의 혈통을 무슨 제거해야 할 성분처럼 취급하는 끔찍한 의미가 내포된 표현이라 할 수 있다.[16] 비슷한 해석은 유대인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할 수 있다.[17] 베사라비아 포함[18] 비아위스토크는 당시 오스트프로이센에 병합되었다.[19] 적국, 동맹국, 동맹국의 점령지, 중립국 등이 있다.[20]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아들이었던 골드하겐이 쓴 논문에서 경찰조직에 포함되어 있던 나치당원과 일반 독일인의 비율을 근거로 홀로코스트에서 절대로 독일 일반인이 괴리 될 수 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다만 이 논쟁의 경우 골드하겐의 논문의 논리적 약점이 상당히 많기도 해서 문제가 되었으며 '파멸적인 독일인들의 반 유대주의'라는 매우 공격적인 단어를 사용했다. 덕분에 당시 독일의 좌우 언론지에서 대동단결하여 골드하겐에게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비판과 비난을 했다. 다행(?)인 점은 당시 독일에서 신 보수주의자들이 나치와 독일을 괴리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시기였는데 이 논문으로 나치와 독일인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환기 되었다는 점이다.[21] 직접통치지역이었던 독일오스트리아, 폴란드, 체코 같은 데에서는 그야말로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국가에서 유대인 색출에 대한 협력은 각국마다 달랐다. 덴마크불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드러낸 곳도 있었으며(심지어 이들 두 나라는 제2차 대전 당시 유대인들을 적극 보호했다. 다만 불가리아의 경우에는 초기 반유대주의가 성행하여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절멸수용소로 보내기도 했다.) 벨기에이탈리아처럼 사보타주를 벌인 곳이나 아예 유대인 단체까지 색출에 협력한 네덜란드, 나치와는 별개로 현지 정부가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학살, 탄압한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곳도 있었다.[22] 그리스도교에서 신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 못 박은 이가 바로 유대인들이라는 논점. 여기서 유대인이란, 혈통보다는 신앙 측면에서 "예수를 못박은 세력의 가르침을 아직도 따르는" 유대교 신자를 의미했다. 즉 중세때는 유대인도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그냥 기독교인으로 간주했다. 이렇게 타고난 인종이나 민족보다 유대교를 믿느냐 아니냐로 판별하는 기준은 현대에도 유효하다.[23]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 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로버트 위스트리치 에서 재인용.[24] 당시 나치 군체계의 언어로 '최종 해결책'과 '물리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유대인 학살을, '정치적 해결'이라는 단어는 국외 추방을 의미.[25] '눈물의 길'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26] 이 부분의 저자는 이용우 동덕여대 국사학과 교수로,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 석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전문 분야는 세계대전기 각국의 대독 협력과 저항의 역사이다.[27] 관료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일까? 지시한 사장인가? 계획한 과장인가? 실행한 말단인가? 관료제 속에서 죄책감은 모든 관료들에게 배분되어 희미해진다. 역으로 관료제의 이런 속성이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로 까발려지는 계기가 되었다.[28] 비슷한 예시로 유명한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짜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아라'라는 피상적인 명령을 받은 실험자들은 죄수 역의 실험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는 차차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루시퍼 이펙트> 참조).[29] 유대인을 전혀 노동력으로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어린이는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죽였고, 성인은 당장 죽지 않을 만큼 먹을 것을 주면서 일을 시키다가 쇠약해지면 죽였다. 샤워 한다고 속여 구두와 옷은 죽이기 전 벗겨서 재활용했다. 즉 나치가 보기엔 인간 이하 존재인 유대인들에겐 식량과 물자를 주기조차 아까워 한 것. 말기로 갈수록 물자가 부족해지며 잡아들이는 인원은 많아져 죽이는 시기가 빨라졌다.[30] Walther Hubatsch, Hindenburg und der Staat, p375~378[31]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5장 1편 해고.[32] 출처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 5장 1편 해고.[33] 2인자 괴링이 하이드리히에게 모호한 표현인 '최종 해결'을 요청하자 하이드리히가 여러 장관들을 모아 반제회의를 열어 절멸 정책이 시행된다. 이렇게 보면 히틀러 밑선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여 히틀러의 책임이 모호해져 보이지만, 그렇다고 히틀러가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34] 당시 유럽인들의 유대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오를레앙 괴담 문서 참조.[35] 여기에는 별의별 이유가 다 들어갔다. 오늘의 일과는 유대인 하나를 죽이고 끝낸다.(아트 슈피겔만의 참조.)[36] 히틀러는 회의가 열리는 것은 알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사실 현재까지도 히틀러가 반제회의를 정말로 알고 있었는지는 아직도 확실하지 않다.[37] 특히 다하우 수용소의 경우 분노한 미군이 재판 없이 다하우 수용소 근무 친위대원들을 대거 총살해버렸다. 당시 근무하던 수용소 친위대원들은 해방 직전 교체되었고 엄연히 전쟁 범죄였지만 수용소에 복무하며 유태인 학살 행위에 직접 동참했었기 때문에 넘어가게 된다.[38] 일부는 연합군의 판단 착오로 사망하기도 했다. 연합군이 수용소를 해방시켰을 당시 의학에 무지한 병사들이 지나치게 기름진 음식을 줘서 신체에 충격을 받은 수감자들이 사망한 적도 있었다. 이는 몇몇 미디어에서도 묘사되는데 단순히 연합군 측에서 수용소의 사람들을 탄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으나 이것을 알고 보면 왜 그러는지에 대해서 이해하기 쉽다.[39] 동독 수감된 이들은 동구권 특유의 열악한 교도소 환경으로 대부분 얼마 못 가 죽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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