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스 히딩크의 역임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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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감독 | ||||
41대, 48대 | 62대 | 27대 | 9대 | |
56대 | 20대 | |||
클럽 감독 | ||||
29대, 37대 | 47대, 51대 | 47대 | 86대 | |
30대, 37대 |
거스 히딩크의 수상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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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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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05 · 2005-06 |
거스 히딩크의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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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축구인 |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거스 히딩크[1] Guus Hiddink[2] | |||
출생 | 1946년 11월 8일 ([age(1946-11-08)]세) | |||
헬데를란트주 비스[3] 파르세벌트 | ||||
국적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4] | |||
신체 | 182cm | |||
직업 | 축구 선수 (중앙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 |||
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더 흐라프스합 (1967~1970) PSV 에인트호번 (1970~1972) 더 흐라프스합 (1972~1977) NEC 네이메헌 (1977~1981) → 워싱턴 디플로매츠 (1978 / 임대)[5] → 산호세 어스퀘이크스 (1980 / 임대)[6] 더 흐라프스합 (1981~1982) | ||
코치 | PSV 에인트호번 (1983~1987 / 수석 코치) | |||
감독 | PSV 에인트호번 (1987~1990)[7] 페네르바흐체 SK (1990~1991) 발렌시아 CF (1991~1993) 발렌시아 CF (1994) 네덜란드 대표팀 (1995~1998) 레알 마드리드 CF (1998~1999)[8] 레알 베티스 (2000)[9] 대한민국 대표팀 (2001~2002) PSV 에인트호번 (2002~2006) 호주 대표팀 (2005~2006) 러시아 대표팀 (2006~2010) 첼시 FC (2009)[10] 튀르키예 대표팀 (2010~2011) 안지 마하치칼라 (2012~2013)[11] 네덜란드 대표팀 (2014~2015) 첼시 FC (2015~2016)[12] 중국 U-21 팀 (2018~2019) 퀴라소 대표팀 (2020~2021) | |||
기타 | PSV 에인트호번 (2019~ / 기술 고문) | |||
국가대표 | 없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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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 동거인 엘리자베스 피나스[1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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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네덜란드의 축구인으로 축구 역사상 단 9명 밖에 없는 유러피언 트레블을 달성한 감독[15]으로, 클럽팀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모두 성공적인 커리어를 남겼다.
주요 성과로는 에인트호번의 1987-88 시즌 유러피언컵 우승과 트레블, 그리고 에레디비시 6회 우승, 첼시의 2008-09 시즌 FA컵 우승, 네덜란드의 월드컵 4위[16], 대한민국의 2002 월드컵 4위[17], 호주의 2006 월드컵 16강[18], 러시아의 유로 2008 4강[19]이 있다.
2021년 9월 10일, 공식적으로 감독 은퇴를 발표함으로써 지도자를 포함한 54년간의 축구인 경력을 완전히 마감했다.
2. 선수 경력
히딩크는 처음부터 프로선수가 되고자 다른 선수들처럼 유스팀에 입단해서 프로선수가 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 스포츠 전문대학(CIOS)에 입학하여 지도자를 목표로 했다고 한다. CIOS 졸업 후 2급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20] 더 흐라프스합의 코치로 부임했지만 나이도 스물이고 기량도 괜찮았기 때문에 감독이 선수 겸 코치로 활동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를 해 곧바로 수락했다고 한다. 포지션은 중앙 미드필더.1960년대 당시, 에레디비시는 AFC 아약스나 PSV 에인트호번같은 강팀을 제외하곤 급료도 부족한 편이어서 선수들 대부분이 오전에 일하고 오후에 훈련하는 투잡을 뛰었다고 하는데 히딩크는 코치직을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오전에 유소년을 지도하고 오후에 팀 훈련에 참가했다고 한다. 더불어 야간에 체육 전문대학에 입학하여, 체육교사 준비도 같이 했다고. 3시즌 동안 데 그랴프샤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자 PSV로 이적하였는데 주전 경쟁이 심하여 제대로 출전하지도 못했다. 다시 데 그랴프샤프로 이적했고, 후에 네이메헌으로 이적했다.
네이메헌 시절에는 체육교사와 선수를 겸임했는데 특수학교에서 장애아들을 지도하면서 얻은 경험[21]이 훗날 감독 생활을 할 때 많은 도움[22]이 됐다고 한다. 네이메헌 시절에는 시즌 종료 후 즉, 5월부터 다음 시즌이 시작되는 9월 즈음까지 미국에 잠시 임대되어 미국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당시 룸메이트가 조지 베스트였다고 한다. 네이메헌에서 은퇴 후 다시 더 흐라프스합으로 돌아와 코치 생활을 시작했지만 선수가 부족한 탓에 감독의 부탁으로 1시즌 더 선수생활을 하게 됐다. 포지션은 리베로였지만 1981/82 시즌을 끝으로 완전하게 은퇴한다.
3.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거스 히딩크/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4. 대한민국과의 관계
자세한 내용은 거스 히딩크/대한민국과의 관계 문서 참고하십시오.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
- PSV 에인트호번 (1987~1990, 2002~2006)
- 에레디비시: 1986-87, 1987-88, 1988-89, 2002-03, 2004-05, 2005-06
- KNVB 베이커: 1987-88, 1988-89, 1989-90, 2004-05
- 요한 크루이프 스할: 2003
- 유러피언컵: 1987-88
-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1995~1998, 2014~2015)
- FIFA 월드컵 4위: 1998
- 레알 마드리드 CF (1998~1999)
- 인터컨티넨탈컵: 1998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2001~2002)
- FIFA 월드컵 4위: 2002
5.2.2. 개인 수상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2002
- AFC 올해의 감독: 2002
- 리누스 미헬스상: 2004-05, 2005-06
- 네덜란드 올해의 스포츠 코치: 2002, 2005
- KFA 명예의 전당
- KNVB 평생 공로상: 2007[23]
- RFU 올해의 감독: 2008
-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10년의 팀: 2009[24]
5.2.3. 리그 성적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승점 |
1987-88 | 에인트호번 | 1 | 34 | 27 | 5 | 2 | 117 | 28 | 59[25] |
1988-89 | 에인트호번 | 1 | 34 | 24 | 5 | 5 | 78 | 31 | 53 |
1989-90 | 에인트호번 | 2 | 34 | 20 | 8 | 6 | 94 | 36 | 48 |
1990-91 | 페네르바흐체 | 5 | 30 | 12 | 8 | 10 | 53 | 53 | 44 |
1991-92 | 발렌시아 | 4 | 38 | 20 | 7 | 11 | 63 | 42 | 47 |
1992-93 | 발렌시아 | 4 | 38 | 19 | 10 | 9 | 60 | 33 | 48 |
1993-94 | 발렌시아 | 7 | 38 | 14 | 12 | 12 | 55 | 50 | 40 |
1998-99 | 레알 마드리드[26] | 7 | 24 | 11 | 4 | 9 | 46 | 39 | 37 |
1999-00 | 레알 베티스[A] | 18 | 13 | 1 | 6 | 6 | 8 | 19 | 9 |
2002-03 | PSV 에인트호번 | 1 | 34 | 26 | 6 | 2 | 87 | 20 | 84 |
2003-04 | PSV 에인트호번 | 2 | 34 | 23 | 5 | 6 | 92 | 30 | 74 |
2004-05 | PSV 에인트호번 | 1 | 34 | 27 | 6 | 1 | 89 | 18 | 87 |
2005-06 | PSV 에인트호번 | 1 | 34 | 26 | 6 | 2 | 71 | 23 | 84 |
2008-09 | 첼시[A] | 3 | 13 | 11 | 1 | 1 | 24 | 15 | 34 |
2011-12 | 안지 마하치칼라[A] | 5 | 44 | 19 | 13 | 12 | 54 | 42 | 70 |
2012-13 | 안지 마하치칼라 | 3 | 30 | 15 | 8 | 7 | 45 | 34 | 53 |
2015-16 | 첼시[A] | 10 | 20 | 7 | 11 | 3 | 36 | 26 | 31 |
5.3. 수훈
6. 저서
- 마이 웨이(2002년 9월 4일, 조선일보사)
7. 논란 및 사건 사고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에서 벌어들인 광고 수입과 인세를 실제보다 적게 신고했다는 혐의와 월드컵 직후 조세 피난처로 알려진 벨기에 아셀에 집을 얻은 뒤 거주지 허위 신고를 해 17억 가량의 세금을 탈루한 혐의[32]로 인해 호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시절이던 2006년 7월 탈세 혐의로 네덜란드 검찰에 의해 법정에 기소되었다. 이후 2007년 1월과 2월 각각 1, 2차 공판에 나서 본인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결국 유죄 판결을 받고 집행유예 6개월과 벌금 45,000유로(약 5,500만원)를 선고받았다
8. 여담
8.1. 이름 표기
네덜란드어의 g의 발음은 /x/[33]으로 한글로 표기하면 후스 또는 휘스 히딩크가 좀더 가까우며, 2005년 제정된 네덜란드어 외래어 표기법에 따르면 휘스 히딩크로 표기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부임하기 이전 국내 언론에서는 주로 '후스' 히딩크로 표기하였으나, (좀더 쉬운 영어식 발음인) '거스'라고 불러 달라는 본인의 요청이 있은 이후 대한민국 언론에서는 영어식 발음인 '거스' 히딩크라 표기한다.한국에선 부진할 때 '오대영'[34]이라 불리다가, 4강까지 진출한 뒤 '구국의 명장 희동구'라고 칭송받았다. 참고로 중화권에서는 시딩커(希丁克)라고 표기한다.[35]
8.2. 가족
히딩크의 가문은 고향인 파셰펠트에서 수백년간 뿌리를 내린 명성이 있는 집안이라고 한다. 그의 아버지 게트 히딩크는 2차 대전 당시 겉으론 시청 공무원직을 수행하며 암암리에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는데, 직접 총을 들고 싸우진 않았지만 유대인들을 숨겨주거나 배식표를 빼돌려 그들의 끼니를 해결해 주었고, 독일군이 배급하는 식량을 빼돌려 레지스탕스의 군량을 조달했으며, 적지에 떨어진 미군 조종사들을 중립국으로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전쟁이 끝난 뒤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감사장을 전달받았다.6명의 형제 중 3남으로 태어난 히딩크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로 학교 수업을 자주 땡땡이를 치고는 했다고 한다. 사냥을 좋아하는 외할아버지가 부추겼다고 하는데, 덕분에 외할아버지로부터 모험심이나 결단력을 전수받았다고 한다. 아예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입수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36] 아무튼 이런 개구쟁이가 공차는 걸 좋아해서 결국 축구선수가 되었다.
8.3. 여자친구
히딩크의 가족 관계에 대해서는 2002년 월드컵 당시나 지금이나 알려진게 많지 않다. 일단은 1살 연하의 이니 히딩크와 결혼하여 1969년과 1972년에 각각 미셸 히딩크와 마크 히딩크가 태어났지만, 부인 이니와는 이미 2002 월드컵 이전부터 별거 상태였고 20살 연하의 엘리자베스 피나스와 계속 교제 중이며 2022년 2002 월드컵 20주년 기념 행사에도 히딩크와 같이 방한했다. 그녀는 네덜란드 식민지였던 수리남 출신으로, 독일 자동차 브랜드 오펠에서 근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이처럼 부인과 이혼하지 않고 별거 중인 상태에서 애인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다니는게 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유럽에서는 그냥 단순한 사생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지만, 유교적 문화가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영 좋지 않은 시각이 강했던 탓에 히딩크호 출범 초기부터 기자들이 집요하게 정보를 캐내려 했다. 물론 서유럽을 비롯한 서양쪽 문화는 사생활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결례인데다[37][38] 히딩크 본인의 성격부터가 불같기로 유명했던지라[39] 엘리자베스와의 관계를 두고 집요하게 질문을 날린 기자들을 향해 "머리통을 발로 차 버리고 싶다"며 불쾌한 감정을 보이기도 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프랑스와의 2001컨페더레이션스컵 8개국 본선 8강 조별리그 경기와 유럽 전지 훈련에서 체코와의 평가전에서 5-0 으로 참패하는 등 2001년 내내 성적 부진 문제가 제기된 와중이었던지라, 엘리자베스를 자주 만나는 것을 두고 리더십 문제라는 언론의 문제 제기도 있었다.
하지만 커리어 우먼답게 진중한 성격의 엘리자베스가 히딩크의 불같은 성격을 조절하도록 도와주면서 차츰 히딩크가 언론을 대하는 태도가 부드러워졌고, 2001년 말에는 휴가를 추가로 다녀오는 문제로 이용수 당시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과 히딩크 감독이 언쟁을 벌이며 그만두네 마네 등의 험악한 말까지 오가자 엘리자베스가 히딩크를 진정시킨 뒤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을 설득해서 히딩크가 연말 휴가를 다녀올 수 있게 되는 등의 여러 활약을 해냈다.[40] 이용수 전 기술위원장의 인터뷰
뿐만 아니라 사회 활동에도 관심이 있었던터라, 히딩크를 만나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개인적으로 장애인 등의 소외 계층을 지원하는 단체를 찾았고 나중에 히딩크에게 한국에서 자선 활동을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그 결과 탄생한게 바로 히딩크 재단이다. 히딩크의 인터뷰 히딩크가 현재까지도 한국에 주기적으로 방문해서 여러 애정을 표시하고 히딩크 재단 활동도 계속되는 것을 보면, 엘리자베스가 그정도로 영향력이 큰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히딩크 감독이 2002년 7월, 한국을 떠날때 공항 인터뷰에서 굿바이라고 하지말고 '또 보자' 라는 표현인 소 롱(So long)이라고 표현 하라고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인터뷰를 찾아보면 굿바이가 아닌 소롱 이라고 떠나기전 인사를 남겼다.(히딩크 자서전에 자세히 나온다)
이런 식으로 히딩크가 상대방에게 호감을 주는 행동을 하도록 엘리자베스가 조언을 할 수 있었던 비결 중의 하나로, 엘리자베스가 당시 '분쟁조정' 관련으로 석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었던 것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단순히 히딩크의 여자친구로 끝이 아니라, 대표팀 선수들과도 친분을 쌓아서 차두리가 엘리자베스를 누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특히 독일어가 유창한 차두리[41]와 남매같이 지냈다고 한다.
8.4. 그 외
- 아들만 6명인 아들부잣집 출신인데, 동생들과 나이 차가 꽤 있다고 한다. 딸 한 번 낳아보려고 낳은 게 바로 밑 동생이라서 형들과 함께 그 동생을 여자애라고 놀린 적도 있다고 자서전에 나왔다.
- 한국 음식을 그다지 즐기는 편은 아니었는데, 갈비와 생선전은 그래도 입에 맞았던지 잘 먹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게 흰살생선 튀김이라는 점에서 피쉬 앤드 칩스의 피쉬와 만드는 방법이 비슷한데다가 네덜란드에서도 한국의 부침개와 비슷한 파넨쿠켄이라는 팬케이크를 식사로 많이 먹기 때문에 위화감이 적기 때문이다.
- 네덜란드 방송에서 한 시청자의 "한국에 있는 동안 배운 점들 중 가장 중요한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히딩크는 "한국의 예절 문화"라고 답하며 "만약 당신이 한국의 공공화장실에서 시계를 풀고 두고 나왔다면 한국에선 훔치지 않고 주인을 찾아 돌려줄 것이다."라고 말했다.5분2초부터
- 자국어인 네덜란드어와 영어 외에도 독일어, 스페인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한다. 사실 유럽에서는 인접한 국가끼리 언어가 비슷한 경우가 많아서 다국어에 능통한 사람이 드물지 않다. 특히 네덜란드어와 독일어는 어느 정도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그래서 한국 감독 시절 차두리와는 통역없이 독일어로 대화하고, 2002 월드컵 기간 중에도 스페인어나 독일어 등으로 이들 언어권 기자와 직접 인터뷰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전 승리 직후 인터뷰 스페인어로 인터뷰하는 히딩크 또한 2014 월드컵을 앞두고 차범근과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직접 만났는데 이때도 독일어로 대화했다. 당시 영상 영상에서 보다시피 차범근과는 1998 월드컵에서 맞대결을 펼친 악연이 있지만, 이걸 서로 농담 따먹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화한다(사실 히딩크가 2001년 한 해 동안 엄청난 비난을 견딜 때 지지해준 극소수 인물 중 한 명이 바로 차범근이었다). 한국어는 별도로 배우지 않아서 몇몇 한국인들이 히딩크를 비난하기도 했다. 히딩크도 그런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한국어와는 달리 스페인어나 영어 등의 언어를 익힌 이유는 그 언어들이 '세계 축구 강팀들의 언어'이기에 배운 것이라고 밝혔다.[42] 사실 특정 분야에서 매우 영향력이 강한 국가의 언어를 배우는 것은 어느 분야에서든 매우 흔하다. 전 세계 태권도계나 조선(造船)업계에서 한국어를 중요시하게 여기거나, 애니메이션 등의 서브컬처 전반에서 일본어가 중요한 언어로 취급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한 한국어는 서양인이 가장 배우기 어려운 언어 중 하나임을 감안할 필요도 있다.
- 2002 한일 월드컵이 한창인 중에 "히딩크를 구하라"라는 플래시 게임이 나오기도 했다. 유상철이 주인공으로 아폴로 안톤 오노가 당시 미국 대통령인 조지 W. 부시에게 잘 보이려고 납치한 히딩크를 구하는 내용. 보스는 부시가 등장한다. 압권인 건 김동성을 소환해 화면의 적을 모두 제거하는 필살기가 있다. 전반적으로 미국이 비열한 악당으로 그려진 작품인데 이유인즉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2002년 이때만 하더라도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오노의 할리우드 액션으로 인한 금메달 도둑질 논란과 더불어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이라는 대사건이 있었던 터라 국민정서에서 반미감정이 극에 달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 동계 종목에서도 나름 한국에 은혜를 베푼 바가 있는데, 보프 더용 코치가 빙상연맹의 병크를 너무 잘 알고 있어 한국행을 망설이자 자신이 감독으로 있던 기간 동안 한국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경험을 꺼내며 보프 더 용 코치의 한국행을 이끌었다.
- 2002 한일 월드컵이 폐막한 직후 명예 서울특별시민증 수여식에 참여하려고 서울특별시청을 방문했다. 이 때 당시 서울특별시장 이명박의 아들인 이시형과 같이 기념사진을 촬영하였으나 샌들에 반바지 차림으로 참석해서 논란이 일어났다. 서울특별시 명예 시민증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명예국민이 되었다. 명예국민의 혜택은 2가지가 있는데, 첫째로는 무비자로 한국을 방문할 수 있고[43] 둘째로는 명예국민이 신청하면 아무 조건이나 심사 없이 즉시 한국 영주권(F5)을 받을 수 있다.[44] 또 부산광역시에서도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 지도자 스타일에 대해서, 골키퍼는 하늘이 무너져도, 아무리 크게 지고 있어도 절대로 골대를 비우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강하게 갖고 있다. 그래서 그는 골 넣는 골키퍼는 과감히 퇴출시켜버리는 성향이 강하며, 그 때문에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김병지를 단 1초도 출전시키지 않고 오직 이운재로만 고집했다. 달리 말하면, 히딩크는 유사시에 자기 포지션을 윙어로 바꾸는 골키퍼인 마누엘 노이어와는 상극이다. 물론 히딩크의 이런 성향의 덕을 정말 크게 본 경기가 바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 16강 이탈리아전이다. 경기 내내 0:1로 뒤지고 있었어도 이운재가 끝까지 골대를 지킨 덕분에 더 이상의 실점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경기 종료 일보직전에 설기현이 만회골을 넣어 연장전으로 잡아끌었고 이후 안정환이 역전골을 넣었기에 대한민국이 이탈리아를 무너뜨리고 8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 만약 지고 있다고 해서 이운재도 같이 공격에 가담했더라면 카잔의 기적의 독일팀처럼 추가 실점을 당해서 대한민국이 아니라 이탈리아가 8강에 진출했을 것이다. 당사자인 김병지도 이천수의 유튜브에 출연해서 이걸 언급하면서 씁쓸해 했는데, 이런 히딩크 감독의 평가에 한술 더 보탠 사람이 박항서 코치였다는 비화가 밝혀지기도 했다. 히딩크 감독이 갑자기 드리블을 하는 김병지를 보고 당황해 박항서 코치에게 "쟤 왜 저러냐?"라고 묻자 "쟤가 가끔 저럽니다."라는 박항서 코치의 말이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 그와는 별개로 2002년 월드컵 당시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한 누리꾼이 거스 히딩크의 가상 주민등록증을 만들어 인터넷에 유포되었는데, 이로인해 거스 히딩크의 주민등록번호가 유출되었다고 속은 사람들이 생겨나기도 했다.
- 2002 한일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4강 진출 공로자로서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받았다. 즉 본인이 원하면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다.
- 2018 러시아 월드컵 때는 미국 방송사 폭스 스포츠에 해설위원으로 활동했다. 월드컵 직전에는 TV조선의 예능 프로그램 <히딩크의 축구의 신>에 출연하기도 했다.
-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식에도 참석했다.
- 축구인이기는 하지만 야구에도 애정이 많은지 미국에서 체류하는 동안 유소년 야구 지도자 자격증을 취득했다. 애초에 네덜란드 본토는 야구에 크게 관심이 없지만, 해외 영토인 퀴라소 등지에서 유명한 야구선수를 꽤 배출한다. 그래서 네덜란드는 유럽권에서는 야구를 꽤 잘하는 국가이며 관심도도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하면 큰 편이다.[45][46]
- 2021년 5월 15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확진 판정을 받았다. # 당연히 많은 팬들이 그가 회복되기를 바랐고 현재는 다행히 회복된 상태다. 다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 국가대표였던 유상철 감독이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히딩크는 2002년 자신과 함께 4강 신화를 이룩한 애제자를 먼저 떠나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 2021년 12월, 네덜란드의 한 부부가 10년 전 태국에서 한국인으로 추정되는 신혼부부의 삼성 카메라를 주웠는데 이를 히딩크측에 편지를 보내어 주인을 찾는데 도움을 요청했고 히딩크는 사진을 보고 한국인임을 확신하고[47] 히딩크재단에 이 사진들의 주인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보도가 나간지 6시간만에 주인을 찾았다.#
- 세월이 흘러서인지 이제는 많이 늙은 모습이 역력하다. 물론 2023년 기준 77세라는 고령의 나이이기도 하고, 백발이 되었으며, 우리가 알던 그 히딩크는 이제는 온화한 할아버지의 모습이 되었다.
- 세대차이를 느낄 수 있는 축구 감독이기도 한데, 2000년대 이후에 출생한 이들은 히딩크를 모르는 경우도 꽤 많다고 한다. 2002년 월드컵때 활약을 한 축구 감독 정도로 아는 경우는 있어도 인기나 위상을 직접 경험해 본 세대가 아니다보니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 국내 축구 레전드 중 누가 최고인 가를 논하는 '손차박 밸런스 게임'에서 차범근을 최고로 지목했다. 이는 아마도 그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평일 가능성이 큰데, 국내 팬들 중에야 차범근 경기를 못 본 사람이 수두룩하지만 히딩크가 트레블을 달성했던 1980년대에 차범근은 팀을 옮겨가면서 1980년대에 두 번이나 UEFA컵 우승을 경험했던, 소속팀(프랑크푸르트, 레버쿠젠)의 에이스였으니 직접 차범근의 활약을 보았을 것이 확실하다. 이 때문인지 손흥민이 2021-22 시즌에 득점왕을 차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을 꼽는 히딩크를 보면서 사실 국내에서 차범근을 저평가하는 거 아니냐, 생각하는 그 이상의 티어가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 2002년 월드컵 이후 상호에 히딩크가 들어가는 곳도 몇 곳 생겨났다.[48]
- 해당 문서의 개요에도 트레블이라는 9명밖에 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한 감독임이 설명되어 있지만, 의외로 대한민국에서는 4강 신화의 감독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서 트레블 감독임을 모르는 축구팬들이 많이 있다. 과거 PSV 에인트호번 감독시절이던 1987-88 시즌에 네덜란드 리그 에레디비시, FA컵 KNVB컵,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에서 모두 우승을 하여 트레블을 달성하였다.[49]
- 한국대표팀을 떠나면서 한국축구에 큰 조언을 해주고 떠나는데 히딩크 감독이 조언한 내용들을 보면, 2004 아테네올림픽과 2006 독일월드컵을 준비해야하는데 특히 수비진의 세대교체가 절실히 필요 하며 세대교체 과정중에 분명 후퇴할 수도 있지만, 미래를 위한 과정이니까 서두르지말고 천천히 세대교체를 진행해야한다고 했다. 그리고 유럽리그 진출을 위해서 가장먼저 빅리그 보다는 그 한단계 아래 리그에서 부터 시작하라고 조언한다. 덴마크 리그나 스위스 리그 등등 기타 리그에서부터 시작하고 잘하다보면 소문이 돌게되고 유럽 빅리그 스카우터들이 앞다투어 찾아오게 된다고 하였다.[50]
- 어찌보면 축구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사회에 큰 획을 그은 인물이다. 무엇보다 체력을 강조했고 이에 대표팀 선수 개개인별 체력을 수량화 및 객관화시키기 위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훈련에 셔틀런을 도입했던 것이 파격적이었는데, 사실 히딩크 감독 이전에는 체력 단련을 그저 주먹구구식으로 지쳐 쓰러질때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히딩크는 당시 국가대표팀의 셔틀런 측정 후 유럽이나 남미 선수들의 셔틀런 기록을 제시하였고, 이후 대표팀의 셔틀런 기록은 증가했고, 특히 차두리는 150회 이상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후 셔틀런은 PAPS에도[51] 도입되고 국민체력100에서도[52] 측정한다. 그리고 이전에는 정신력을 강조하던 의지드립도 히딩크 이후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고, 드라마 <미생>에서도 체력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2024년 4월 17일, 유 퀴즈 온 더 블럭 240회에 얍 판 츠베덴과 함께 출연하였다.
8.5. 광고
- Nationale Nederlanden(1998) -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찍은 광고다. 독일에게 1명이 퇴장당하고 0-5로 밀리는 와중에 관중석에서 지켜보던 네덜란드 국대 레전드들이 외투를 벗고 튀어나가려는 찰나에 히딩크는 잠에서 깬다.
- 오버히트(2017) - 광고 모델료 전액을 기부하였다.
9. 둘러보기
UEFA 유로 1996 참가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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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참가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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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유로 2008 참가 감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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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네덜란드어 표기법에 따라 표기하면 '휘스'가 맞지만 본인의 요청으로 공식 언론에서는 '거스'라는 명칭으로 통일했다. 영상 한국의 외래어 표기 규정에서는 본인의 요청이나 그에 준하는 요구가 있을 경우, 표기법에 대한 예외를 인정한다. 이와 유사한 사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같은 네덜란드의 레전드 선수 루드 굴리트가 있다.[2] IPA 표기는 [ˈɣys ˈɦɪdɪŋk]로 알려져 있다. 현지 발음과는 별개로 표준 네덜란드어 IPA를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BBC에 의하면 스코틀랜드 영어의 Loch(로흐)에 프랑스어의 u발음을 합쳐서 KHUESS HIDD-ink(휘스 히딩크)라고 하면 된다고 한다.[3] 現 아우더에이셀스트레이크[4] 히딩크가 2002년의 업적 때문에 대한민국 국적을 얻었다고 아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히딩크는 대한민국 명예국민이다. 명예국민은 영주권과 달리 무비자 입국 및 영주권 신청이 가능한 권한으로 제한되어 있다.[5] 워싱턴 디플로매츠는 시즌 종료 후부터 새 시즌 개막 전까지 임대를 다녀왔다.[6] 산호세 어스퀘이크스도 역시 시즌 종료 후부터 새 시즌 개막 전까지 임대를 다녀왔다.[7] 시즌 도중 부임.[8] 시즌 중 경질.[9] 시즌 도중 부임 뒤 성적부진으로 경질.[10] 시즌 도중 부임.[11] 시즌 도중 부임.[12] 시즌 도중 부임.[13] 참조.[14] Elizabeth Pinas. 수리남 출신이다.[15] 네덜란드인으로서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도 유일한 인물이며, 나머지 여덟 명은 셀틱의 조크 스타인, 아약스의 슈테판 코바치, 맨유의 알렉스 퍼거슨, 바르셀로나와 맨 시티의 펩 과르디올라, 루이스 엔리케, 인테르의 주제 무리뉴, 바이에른의 유프 하인케스, 한지 플릭.[16] 4강전 브라질에게 탈락 후 3·4위전(동메달전) 크로아티아에게 패하고 최종 4위.[17] 한국 축구 역사상 조별예선 첫 승, 최초 조별예선 통과(1위), 최초 16, 8강, 4강 진출, 4강전 독일에게 탈락 후 3·4위전(동메달전) 튀르키예에게 패하고 최종 4위.[18] 1974년 서독월드컵 이후 32년만에 16강 진출, 전체 16위.[19] 러시아 축구 역사상 사상 첫 4강 진출, 대회 3위. 유로 대회는 유로 1984부터 3·4위전이 폐지되어 최종 결과는 4강전으로 기록된다.[20] 여담으로, 농구와 야구 지도자 자격증도 함께 취득했다고 한다.[21]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칼을 들고 교실에 들어온 아이도 있었는데, 따끔하게 타일러서 충공깽한 사태를 막아냈다고 한다.[22] 장애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는 학생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연히 심리전에 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슈퍼스타들을 휘어잡은 것이나, 한국에 와서 안정환, 홍명보 등 스타급 선수들을 길들일 때도 유효했다고 한다. 이러한 심리전은 상대팀을 위축시키기도 했는데, 1998년 당시 한국대표팀이 연습장에 도착한 걸 보고도 무시하고 30분 넘게 연습을 이어간 사례나 2002년 천하의 이탈리아를 생까고 8강전을 준비한다며 태연히 스페인과 아일랜드의 16강 경기를 관전하러 갔을 정도로 심리전에 강한 면모를 보였다.[23] #[24] #[25] 당시에는 승리 시 승점이 2점이었다.[26] 경질 당시 성적.[A]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A]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A]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A] 중도 부임 후 시즌 종료 성적.[31]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을 이뤄낸 공로로 수여받았다.[32]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주로 암스테르담에 기거했던데다 히딩크 본인은 해외팀 및 원정팀과의 경기로 인해 실제로 이 집에 거주했던 적이 거의 없었던 사실이 밝혀졌다.[33] 가래 끓는 소리. 바흐, 하바롭스크의 ㅎ가 이 발음이다. 중국어의 /h/이 바로 이 음가이다.[34] 2001년 프랑스와의 A매치, 체코와의 평가전 두 경기를 연속해 0:5로 패배하며 붙은 별명[35] 한때는 후이딩커(暉定克)라고 표기한 적도 있었다.[36]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고, 아들이 땡땡이 치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혼낸 적은 없다고 한다. 장인이 자기 아들이랑 놀고 싶다는데 혼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37] 한국 및 동양권 사람들이 서양쪽에서 흔히 범하는 실수에 속하는게 바로 결혼, 연애, 가족, 자녀에 대한 질문. 아주 가까운 사이일 때 상대방이 먼저 얘기를 해준다면 모를까, 이쪽에서 먼저 "결혼은 했냐", "애인은 있냐" 등의 질문은 매우 큰 결례로 통한다. 왜냐하면 개인주의 문화가 극도로 발달해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은 사생활 침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38] 근데 사실 한국도 2010년대 이후에는 개인주의 문화가 우세한지라 이제와서 생각해본다면 격세지감할 일이다. 축구와 관련된 일도 아닌데 기자가 사생활을 집요하게 파낼려고 했다는건 문화의 차이를 넘어 명백한 무례한 행동이다.[39] 사실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비롯한 북서유럽 사람들은 상대방에게 좀 공격적으로 들리더라도 표현을 직설적이고 솔직하게 하는 편이다. 당장 히딩크와 같은 네덜란드 출신인 조 본프레레 또한 한국 감독 시절 직설적인 인터뷰로 언론과의 관계가 매우 불편했다.[40] 히딩크가 자서전 '마이 웨이'에서 밝힌 바로는 2001년 말에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보낼 겸해서 2주간의 휴가를 보내고 1월 초에 돌아오는 계획을 세웠으나, 축구협회에서 불허해서 험악해졌다고 한다. 히딩크가 직접 알아낸 불허 사유는 '휴가를 5주나 보내줄 수는 없다'는 것이었는데, 이런 과정을 히딩크와 축구협회 양측 모두의 의견을 들은 엘리자베스가, 히딩크에게 '이용수는 축구협회 직원일 뿐 결정권자가 아니니 그에게 항의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라며 이용수에게 화를 내는 것은 그만두라고 하면서 히딩크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축구 협회 해외 홍보 담당자인 '다이애나 강'이라는 사람을 통해 축구협회를 설득("휴가 기간은 5주가 아닌 2주이며, 그 중 1주는 유럽파 점검을 겸해 감독으로서의 업무를 할 것이다")함으로서, 출발 날짜가 2일 연기되었으나 크리스마스 이전에는 출발할 수 있었다고 한다.[41] 독일어-한국어 이중언어 화자로, 필기 등은 독일어로 할 정도로 독일어가 더 익숙하다.[42] 출처: 히딩크의 자서전인 '마이웨이-거스 히딩크'[43] 다만 히딩크는 네덜란드 국적이기 때문에, 이미 네덜란드 여권만 갖고도 대한민국을 무비자로 방문할 수 있다.[44] 영주권자는 한국에서 입국, 거주, 취업에 제한이 없으므로 영구 거주가 가능하다. 그리고 한국 공항에서 내국인 줄로 출입국이 가능하다. 물론 히딩크가 한국 거주를 원할 때나 의미가 있지만, 애초에 조건없는 영주권 부여 자체가 외국인에게는 혜택인 셈이다.[45] 전 KIA 타이거즈 선수였던 로저 버나디나 역시 네덜란드인이다.[46] 네덜란드 역대 최고의 축구 선수인 요한 크루이프도 "나는 축구 선수가 아니면 야구 선수가 되었을 거다." 라고 말했고 실제로 유소년 시절때는 야구를 배웠었다. 포지션은 포수 였으며 "야구장 에서의 경험이 시야를 넓히는데, 큰 도움이 됐다." 라 했었다.[47] 사진들 중에 한복을 입은 사진이 있었다고 한다.[48] 대표적으로 히딩크모텔, 히딩크노래방, 히딩크PC방, 히딩크빌, 히딩크가든(한식요리집) 등이 있으며, 술집 상호에도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고, 심지어 영종도에는 (주)히딩크라는 이름의 회사도 있었다.[49] 세계 최고의 축구 무대라고 불리는 UEFA(유럽대륙)의 9명 중 1인이라는 의미. 전세계(전대륙)로 넓히면 사례가 서너배 쯤 더 된다.[50] 이는 이후 아시아 축구 선수들의 유럽진출의 기본 모티브로 자리잡게 되었다.[51] 초중고생들 사이에서는 삑삑이 또는 요요테스트로 불린다.[52] 일부 기업들이 인사고과 자료로 활용하기도 한다. 사실 체력은 현장직은 물론이요 사무직에서도 매우 중요하다.[53] 원래 2001년부터 2002년까지 1년 계약을 했지만, 4강 신화 이후 2년을 추가로 계약해 2004년 2월까지 광고모델로 활동했다. '당신의 능력을 보여주세요' 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한 광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