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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즉위 이전
(왕은) 근세의 비루한 것을 배척하고 장차 태조의 옛 일을 회복시키려고 하였다.
목은 이색, 《목은문고》 <사귀곡서화찬> (牧隱文藁 賜龜谷書畵讚) 中.
공민왕은 충숙왕과 공원왕후 홍씨의 2남 중 둘째로 태어나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해졌다. 배다른 작은형 용산원자는 공민왕이 태어나기 5년 전인 1325년에 태어나 1341년에 사망했고, 큰형 왕정은 공민왕이 태어난 1330년에 충혜왕으로 즉위했다.목은 이색, 《목은문고》 <사귀곡서화찬> (牧隱文藁 賜龜谷書畵讚) 中.
원 간섭기의 왕씨 왕족들이 거의 그렇듯 공민왕도 원나라에서 10년 동안 볼모 생활을 했다. 이를 '뚤루게(=투르칵(turγaγ), 禿魯花)'라고 하는데, 피지배 지역의 왕족들을 수도 대도에 머물게 하며 정치 자문 등의 역할을 하게 한 원나라의 제도였으며 이들 중 일부는 황제의 최측근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 원나라의 상수리 제도, 기인제도라 할 만한 제도다. 강릉대군은 원 황실의 부마가 되기 위해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한 한편, 뚤루게 생활을 하는 동안 원나라가 제위 다툼과 잇다른 반란으로 점점 쇠락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이후 큰형 충혜왕이 온갖 폭정을 일삼다가 폐위되자 그의 어린 장남인 왕흔이 충목왕으로 즉위했다. 충목왕은 즉위 당시 열 살도 안 된 어린아이였음에도 어머니 덕녕공주와 함께 선정을 펼치는 듯했으나 얼마 가지 못해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다. 이에 고려의 일부 관료들은 장성한 강릉대군을 왕으로 세우고자 원나라에게 요청했지만, 원나라의 선택은 강릉대군이 아니라 충혜왕의 차남이자 충목왕의 이복동생인 경창부원군 왕저였다. 그렇게 경창부원군은 충정왕으로 즉위했으나 충정왕 역시 충목왕 못지않게 어린 나이에 왕이 됐기에 정무를 볼 능력이 거의 없었다. 실권 없는 왕이 두 번이나 연이어 나왔으니 기철 일파를 비롯한 권신들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졌다.
한편 혼란스러운 것은 고려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원나라는 행정체계의 미비와 점점 약화되는 지방 및 하부 세력에 대한 통제력으로 인해 전력을 동원하기 힘들었고, 지배층과 피지배층간의 극심한 대립으로 내부 분열이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교초 남발과 중과세, 한족들에 대한 차별로 인해 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제 중심지인 강남 일대가 원나라의 통제에서 벗어난 것도 치명적이었다. 한편 일본 역시 남북조시대의 진통을 겪고 있었기에 중앙정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 온갖 지방 세력(왜구)들이 창궐해 고려를 수시로 약탈했다.(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 참고) 동아시아 전체가 전란에 휩싸인 그야말로 혼돈의 시대였던 것이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고려는 충정왕의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강릉대군을 새 왕으로 옹립하고자 원나라에 줄기차게 요구했다. 결국 원나라는 해당 의견을 수용해 충정왕을 폐위한 뒤 강릉대군을 고려로 보내 고려 국왕의 자리에 앉혔다. 이후 폐위된 선왕 충정왕은 공민왕 2년(1352)에 원나라에게 독살당했는데, 역사서에는 당시 왜구의 준동과 충정왕의 만행에 질린 대신들이 원나라에 요청해 폐위되어 이후 독살당한 것으로 나오나 오늘날의 역사학계에서는 공민왕의 주도로 보고 있다.
2. 즉위와 개혁
상술했듯 볼모 생활을 하며 쇠퇴해가던 원나라의 모습을 몸소 느낀 공민왕은 이를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할 기회로 보았고, 즉위하자마자 대대적인 반원(反元) 정책을 펼쳤다.공민왕은 그 첫 신호탄으로 병신정변을 일으켰다. 무신들의 회의 기구이자 권력 독점의 기반이었던 정방을 혁파했고, 이름만 남아 있던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을 대부분 폐지했다. 그리고 원에 굴복한 이후 상실한 동북 지역의 영토인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했으며 이때 이자춘 - 이성계 부자가 고려에 귀순했다. 동시에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정한 원칙인 세조구제(世祖舊制)를 기철 일파가 어겼다'는 걸 명분 삼아 부원배들을 숙청하며 기철 일가 대부분을 처형했다. 하지만 그 탓으로 북쪽 지역에서 원나라 장군이자 요동의 군벌이었던 나하추가 침입했으며, 오빠 기철을 죽인 데 앙심을 품은 기황후가 원 혜종을 설득해 덕흥군 왕혜를 왕으로, 조카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세자로 즉위시키기 위해 최유를 시켜 침공해오기도 했다.
이후 공민왕은 찰리변위도감을 전민변정도감으로 다시 세워 기철 일당이 수탈했던 인구와 토지를 재빠르게 정리했으며, 원의 연호와 관제 사용을 폐지하며 원의 풍속인 변발과 호복 또한 전면 금지했다.
'... 그리고 공민이 자리를 이은지 20년 동안 관제를 4번 바꿨다. 혹 옛 관제를 따르거나 혹 새 관제를 만드니, 결국 그 번거로움을 이기지 못했다. ...'
《고려사》 <백관지> 中.
《고려사》 <백관지> 中.
'... 왕이 황포(黃袍)와 원유관(遠遊冠)을 착용하고 태후전으로 가 옥책과 금보를 바치며 존호를 올리길 숭경왕태후(崇敬王太后)라 하였다. ...'
《고려사》 <예지> 中.
《고려사》 <예지> 中.
"고려 민왕(공민왕)의 시대에 참람히 12장의 의복(十二章之服)을 입고 범용되는 문물을 모두 황색으로 했으니(凡物皆用黃色), 태조[1]께선 미처 개혁하지 못하셨다. 태종조[2]에 황색을 금하셨으니 이는 엄격하고 분명하게 되어 전장에 실렸도다. ..."
《세종장헌대왕실록》 中.
또한 공민왕은 원 간섭기 이전 고려의 과거 관제를 회복하는 데에 힘을 기울였다. 고려의 관제는 최전성기였던 제11대 문종 때 완성됐으나, 충렬왕부터 천자국의 관제는 사용할 수 없다는 원나라의 간섭으로 많은 변질을 겪었다. 공민왕은 이렇게 변한 당시 관제 대부분을 문종제로 되돌린 것이다. 오등봉작제, 태후 존호, 폐하 존칭, 황색 사용, 12장 면복 등이 그 예시다. 다만 공민왕의 관제 개혁은 위 《고려사》 <백관지>를 보아도 알 수 있듯 총 4번 진행됐는데, 현실적 한계로 인해 천자국 관제가 도로 폐지되거나 새 관제가 도입돼 정부기관의 혼란을 가중하는 부정적 면모도 있었다.《세종장헌대왕실록》 中.
나라가 서로 우호를 맺은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지금 한적(漢賊)이 크게 일어나, 내가 황제의 명을 받아 남으로 정벌하러가니, 왕은 용감한 정예 군사를 보내 도와 주시오
토크토아, 《고려사절요》 제26권 / 공민왕 1/갑오 3년(1354)
공민왕은 대외 정책에서도 괜찮은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원 혜종의 요청을 받고 강력한 세력을 이룬 군벌인 장사성의 토벌을 위해 인당과 최영을 파견했는데, 이를 통해 원의 어지러운 사정을 간접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또한 지난날 원종이 내전 중이던 쿠빌라이 칸에게 칭신해 국체를 보존했듯, 공민왕도 막 원을 몰아내고 불안한 처지이던 명나라에게 곧 칭신해 명 태조 주원장의 호감을 샀다. 이윽고 공민왕은 제후왕으로 책봉되어 명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반면 이미 기씨 일파의 숙청으로 관계가 나빠진 북원과는 국교를 단절했다.토크토아, 《고려사절요》 제26권 / 공민왕 1/갑오 3년(1354)
한편 공민왕은 세력의 균형을 맞추고자 신진사대부라는 새로운 지식인 계층을 육성 및 등용했다. 이들은 남송에서 발흥한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제현, 이색, 이숭인, 정몽주, 정도전 등이 있었다. 이중 공민왕이 중책을 맡긴 이제현과 이색은 유능한 재상이었으나, 이후 세대보다 상대적으로 보수적이었고 기존 기득권과도 일정 부분 얽혀 있었다. 그렇기에 정도전을 비롯한 젊은 급진파 신진사대부들은 이들과 정치적 뜻을 달리했고, 추후 조선 왕조의 주요 개국공신이 됐다.
3. 요동 정벌
자세한 내용은 제1차 요동정벌 문서 참고하십시오.공민왕은 원나라(북원)와 명나라 모두가 요동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다는 걸 눈치채고, 본래는 고려 안에 있었으나 지금은 요동 지역으로 옮겨진 동녕총관부의 정벌을 명령한다. 이는 926년 발해가 멸망한 지 445년 만에 고려가 처음으로 요동성 점령에 성공한 사건이자 한국계 국가가 마지막으로 요동을 공략하고 실제로 점유했던 시기였다. 이성계가 큰 전공을 세운 첫 전쟁이기도 하기에 《용비어천가》와 《고려사》에도 그 경과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370년 12월, 일시적으로 차지했던 요동 (붉은색 점선) |
4. 위기
하지만 공민왕의 시대는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난세였다. 북쪽에서는 원의 쇠퇴로 말미암아 일어난 한족 반란군인 홍건적이 침입해 들어와 수도 개경을 함락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이때 공민왕은 왕비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까지 파천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남쪽에서는 왜구가 극성을 부려 남해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수도 개경 근처까지 침략했다.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의 전횡과 가뭄이 겹쳐 극도로 혼란스러웠다. 이쯤 되면 그냥 난세가 아니라 헬게이트 수준으로 봐야할 정도.
이럴 때 군주가 굳건한 태도로 일관되게 정책을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예술가적인 예민한 기질을 타고났던 공민왕은 이렇게 급박하고도 엄청난 압박이 가해지는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을 견뎌낼 수가 없었다.
원 - 명 교체기를 틈타 제도를 개혁했지만 원이 제동을 걸면 곧바로 다시 원위치되거나 무마되는 등 상당한 난항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존 기득권 세력이었던 권문세족들의 반발은 실로 엄청나서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이나, 딸들을 원 고관에 바치고 권세를 누리던 부원배 일당들과 지독하면서도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이들은 충목왕과 충정왕 때 추진된 개혁을 무산시켰던 장본인들이었으며, 막대한 토지와 노비, 사병을 거느리고 있었다. 결국 왕은 원이 혼란스러운 틈에 기습적으로 이들을 주살하고 토벌한 끝에야 간신히 숙청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바로 대규모의 기근과 홍건적·왜구의 침입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왜구는 고려 수군을 궤멸시키고 개경 인근까지 북상하여 대살육을 벌였고, 홍건적은 2차 침입 때 수도 개경을 함락시킨 후, 궁을 불사르고 노략질을 일삼는 등 온갖 만행을 자행했으며, 공민왕은 안동까지 몽진해야 했다. 정세운, 안우, 김득배, 이방실의 활약으로 간신히 개경을 수복하며 홍건적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기는 했지만 그들마저도 간신 김용이 꾸민 모략으로 인해 살해당했다.
군사권이 무장들의 손에 놓였던 상황에서 심복으로 믿고 있던 김용의 반란은 공민왕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더군다나 김용의 반란, 즉 흥왕사의 변으로 공민왕의 최측근 세력은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때 공민왕의 큰 신임을 받고 있었던 김용마저 최영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것은 공민왕에게 매우 치명적이었다.
4.1. 홍건적의 침공
자세한 내용은 홍건적의 침공 문서 참고하십시오.굶주림에 지친 홍건적들이 떼거지로 고려에 침입했을 때는 수도였던 개경까지 함락되어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상주 행궁을 거쳐서 안동까지 몽진을 가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공민왕은 원래 말을 탈 줄 몰랐는데, 그래서 이 무렵에 아내 노국대장공주로부터 승마를 배웠다고 한다.
또한 놋다리 밟기 전승은 안동 피난으로 거슬러간다. 홍건적의 침입이 교과 과정에서 생략되는 부분이 있어서 주목을 못 받는 것일 뿐, 실제로는 고려에게 상당한 피해를 안겨다 준 전쟁이었다. 무려 200,000명의 홍건적 대군이 고려의 본토로 쳐들어와 말 그대로 고려의 수도와 영토를 초토화시켰다. 역사가들은 홍건적의 침입이 공민왕의 개혁 실패에 결정타를 안겨주었다며 평하기도 한다.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시기였으나 최영, 이성계, 정세운 등 수 많은 명장들의 활약으로 이를 간신히 격퇴할 수 있었다. 다만 개경 탈환 뒤 간신 김용의 흉계로 정세운, 안우, 이방실, 김득배의 4장군이 살해당한다.
4.2.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자세한 내용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서 참고하십시오.왜구를 근절하기 위한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는데, 당시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1333년에 멸망하고, 1336년 무로마치 막부가 들어섰으나, 무로마치 막부가 일본 열도 전체를 통제하지 못했던 남북조 시대(1336~1392)의 내전 상태라 규슈 일대의 통제는 고사하고, 규슈의 호족과 도적들이 뭉쳐진 왜구들이 수도 교토 인근인 키나이까지 약탈하는 난세였기 때문이었다. 그야말로 당시 일본은 중앙정부 자체가 없어져버려 고삐가 풀려버린 지방 세력들 그 자체였고, 왜구의 준동은 우왕 때까지 이어졌다.
4.3. 흥왕사의 변
자세한 내용은 흥왕사의 변 문서 참고하십시오.4.4. 노국공주와의 사별
1365년, 지극히 사랑했던 아내 노국대장공주가 출산하다가 난산으로 인해 아이와 함께 승하했다. 안 그래도 안팎으로 시끄러운지라 스트레스가 쌓여가던 공민왕은 이 일이 결정타가 되어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다.이후 공민왕은 노국공주를 못 잊어서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고 후궁도 들이지 않았는데, 후일 오랫동안 왕손이 태어나지 않자 후사가 끊길 것을 염려한 어머니 공원왕후와 신하들의 간청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1359년 혼인한 지 10년 만에 이제현의 딸을 혜비로 맞이하고 공주의 사후(死後)에는 덕풍군 왕의의 딸인 익비 한씨[3]와 죽성군 안극인의 딸인 정비 안씨, 곡성부원군 염제신의 딸인 신비 염씨 등 3명의 후비를 더 간택했지만 이는 형식상의 혼인이었을 뿐, 정작 그녀들에게 손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반야에게서 우왕을 볼 수 있었던 것도 반야가 노국공주와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란 이야기까지 전한다.[4]
사실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한 타격은 공민왕의 애정 문제 때문만은 아니었다. 공민왕의 왕비이자 원나라의 공주라는 노국공주의 위치는 공적으로도 공민왕에겐 강력한 정치적 동지이자 친원파 세력과의 대립에서 공민왕을 지켜주던 방패막이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망하면서 공민왕은 그렇지 않아도 부족한 친위 세력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이는 아래에 언급할 신돈의 발탁도 이와 연관된다.
4.5. 신돈의 개혁과 좌절
노국공주의 승하 후 공민왕은 신돈에게 모든 국사를 맡기는데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신돈은 득도하여 욕심이 없으며 미천하여서 친척도 없으니, 대사로 임명하면 반드시 정실에 구애되지 않고 일을 마음먹은 뜻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인정하고, 드디어 일개 무명 승려인 그를 발탁하여 국정을 위임하고 의심하지 않았다.
《고려사》
즉, 당시의 권문세족이나 기득권에 얽혀 있지 않은 완전히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여 자신의 새로운 친위 세력을 만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신돈은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토지개혁을 주도하면서 권문세족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를 원 주인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이는 전란을 진압하면서 많은 토지를 하사받아 전제 개혁의 장애가 되고, 사병을 거느려 위협적이었던 무장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실제 신돈은 집권 후 군사적 실권을 쥐고 있었던 최영부터 좌천시켰다.《고려사》
열 집 가운데 아홉 집이 비어 있다는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는 말이 있던 시대였다. 신돈은 이틀에 한 번씩 도감에 나가 일을 처리했고 실무 책임자는 이인임과 이춘부였다. 신돈의 포고령은 왕권의 확실하고도 철저한 비호 아래 실효를 거둔다. 이를 바탕으로 백성들이 신돈에게 강력한 지지를 보냈다. 이춘부는 홍건적을 몰아낸 전쟁영웅 출신으로, 신돈의 실각 이후 사형당했다. 이인임은 당시 권문세족 중 가장 명신이던 이인복의 동생이었는데, 이인복은 신돈의 개혁에 협조한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신돈에 대항하다가 귀양갔다.
또한 신돈은 성균관을 새로 건축해 미래의 주역이 된 신진사대부 세력을 크게 지원했다. 정몽주, 정도전, 윤소종 등 당시의 권력층인 권문세족을 견제할 신진 문신 세력은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정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공민왕의 주요 개혁 정책인 전민변정도감 설치, 성균관 중흥과 신진 사대부 등용 같은 정책은 노국공주가 난산 끝에 승하하고 신돈이 전면적으로 국정을 본 이후의 일이다. 이러한 노국공주 사후의 신돈 등용에 대해 개인으로서의 공민왕은 노국대장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정치에 뜻을 잃은 채 실의에 빠졌고, 삶의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세계에서 공민왕의 실존은 이미 사라진 채 슬픔에 대한 탐닉과 죽음에의 갈망, 그 사이를 메우는 쾌락만이 남았다. 공민왕릉을 보면 노국공주와 합장되어 있는데, 능 가운데 노국공주의 봉분과 통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놓는 등, 죽어서까지 노국공주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공민왕의 마음을 알 수 있는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후대의 《고려사》 왜곡 가능성을 인지하고 해석해보면, 공민왕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기에 신돈이 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노국공주가 죽은 후 공민왕이 완전히 정사에서 손을 떼고 이상 행동을 했다는 것은 그대로 믿기 어렵다. 만약 그렇다면 공민왕의 개혁 정책이라 부르는 것들이 모두 공민왕과는 상관없이 신돈의 머릿속에서만 나왔다는 뜻이 된다. 특히 부원세력과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새로운 세력을 형성하려는 개혁 정책의 일관성을 봤을 때 갑자기 나타난 미천한 출신의 신돈이 공민왕과 상관없이 이러한 정책을 모두 펼쳐나갔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즉, 공민왕은 흥왕사의 변과 노국공주의 사망으로 인해 측근 세력이 모두 사라지자 신돈을 방패막이 삼아 권문세족을 견제하고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켰으며, 권문세족의 화살이 신돈을 향하게 되자 역모 혐의를 씌워 신돈을 제거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권력을 하루 아침에 천민 출신의 이름 모를 승려에게 빼앗기고 소유하던 토지마저 농민과 천민에게 강압적으로 내주게 된 권문세족들은 신돈에게 엄청난 반감을 품기 시작했다. 신돈에게 떠밀린 세력 중에는 탐욕스러운 대농장주와 부원배들도 있었으나, 양식있는 귀족들과 무장 세력도 있었다. 여말선초의 인물들 중 이 시기에 벼슬을 한 인물들을 살펴보면, 공민왕에게 "신돈을 내치라"는 간언을 했다가 귀양가거나 아니면 파직당했다는 기록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정도로 저항은 엄청났다. 특히 당대 신진사대부들의 큰 존경을 받았던 유숙이나 공민왕의 대개혁을 주도했던 이제현, 이인복 그리고 최고의 명장인 최영 등 당대 활동했던 거의 모든 인물들이 신돈에 반대하거나 저항했다. 이존오는 신돈을 비판했다가 파직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신돈은 민중들의 엄청난 지지를 받았다. 이런 유교적 사대부층은 기존 사대부들보다 불교에 적대적이었고, 불교계 내에서도 왕사 보우는 신돈과 갈등을 빚었다. 신돈은 천민 출신으로 불교계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신돈이 재정과 인력을 소모하고, 사망자까지 늘어 노국대장공주 영전 공사의 중단을 건의하자 공민왕은 다시 자신이 친정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1371년에 역모를 꾀했다는 혐의로 신돈을 붙잡아 수원으로 유배 보낸 뒤 곧바로 처형한다.
5. 최후
5.1. 폐인으로 지낸 말년
《고려사》에 따르면 말년에 공민왕은 거의 반 폐인이 되었다고 한다. 공적 기구인 국왕으로서의 정치와 행정에 대한 전권은 신돈에게 맡긴 채 노국대장공주 영전 건설에 막대한 비용과 인력을 동원했고, 이는 결국 국가 재정 악화와 인부의 사망자 증가를 불러왔는데 언제나 슬퍼하면서 불공이나 탄식으로 날을 지새웠다. 민심도 당연히 악화되었으나 말리는 신하들의 간언을 파면이나 처형 등으로 틀어 막아버렸다. 신돈이 키워놓고 새로운 정치 원동력으로 삼으려고 했던 사대부들조차 공민왕의 영전 공사 강행과 여러 난행들에 실망했고, 공민왕 역시 신하들을 믿지 못하고 흥왕사의 변 당시 자신을 보호했던 환관들만을 믿고 의지했으며 영전 공사에 찬성한 일부 신하들을 비호하였다. 결국 공민왕은 반 폐인이 되어버린 상태에서 모든 육체적, 정신적 동력을 잃어버려 후사의 문제가 다급해졌다. 하지만 공민왕이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서인지 다른 후궁들의 몸에서 공민왕의 후사가 나올 가능성은 매우 낮았으며, 공민왕은 스스로의 수명을 길게 보지 않았고 애써 살려고 하지도 않았다.[5]무엇보다 선왕 충정왕은 16세의 어린 나이로 원나라[6]에게 독살당했고 덕흥군은 역적이 되었던데다 그 왕씨 혈통을 부정했던 바 있어서 당시 살아있는 왕손들은 대부분 공민왕과 촌수가 멀었다.[7] 이래서 공민왕의 후계자 문제는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신돈의 여종이었던 반야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왕우는 공민왕의 아들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어서 공민왕은 "왕우의 생모는 반야가 아니라 죽은 궁녀 한씨"라고 선포해 출신이나 혈통 문제를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멀쩡한 생모를 두고 다른 여자를 생모로 선포한 것은 오히려 왕우의 혈통을 더욱 의심스럽게 했고, 공민왕의 어머니인 명덕태후마저 왕우가 자신의 손자인지 의심해 다른 왕족을 공민왕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특히 명덕태후는 공민왕의 사후에도 이 문제 때문에 우왕의 즉위를 반대한 적이 있다. 이 반야와 우왕 이야기 때문에 "공민왕 본인이 일종의 무정자증이어서 처음부터 후손을 남기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는 루머도 있는데 노국대장공주와 반야가 임신한 것을 볼 때 가능성은 없다.
이후 공민왕은 성적으로 방종해져 여장을 하기도 하고, 자제위라는 미소년 집단을 뽑아 자신을 시중들게 했다. 나중에는 공민왕이 이들로 후궁들을 범하게 해놓고, 자신은 이것을 감독하거나 감상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공민왕의 왕비 중 1명인 정비 안씨는 이를 참다 못해 머리를 풀고 자살을 시도했고, 공민왕도 이에 질려서 잠시 그만두었다는 기록도 있다.[8] 자제위 소속의 젊은이들은 궁에 갇혀 국왕을 상대해야 했기에 그 대가로 많은 부와 권세를 누렸으며 궁녀들과도 문란하게 행동하여 신하들의 지탄을 받았다.
자제위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고립된 공민왕이 젊은 귀족을 모아 친위세력으로 키우려 했다는 견해도 있고, 권문세족들을 믿지 못했던 공민왕이 그들의 자제들을 궁궐에 인질로 잡아두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실제로 《고려사》에도 자제위에 대해 왕권을 강화하고 신변 호위 및 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궁중에 설치했고, 공신과 고위 관직자의 자제를 선발하여 배속했다고 나와 있다.[9]
후에 공민왕을 살해하는 홍륜은 외척 남양 홍씨 가문의 자손인데 공민왕의 어머니 명덕태후 홍씨에게는 친정쪽으로 조카 증손자가 되고, 공민왕에게는 외사촌형의 손자(손자뻘)였다. 홍륜의 아버지인 홍사우도 공민왕에게 홍륜을 멀리하라고 간언할 만큼 홍륜의 집안에서는 홍륜의 사람됨을 우려하기도 했다. 결국 공민왕은 이 자제위 중 하나인 홍륜이 3비 익비 한씨[10]를 임신시키자 공민왕은 이를 은폐하려고 홍륜과 내시 최만생을 죽이려 했다.[11] 다만 《고려사》가 왜곡되었을 수 있다고 보는 현재 역사학계에서는 단지 그들이 사통했고, 공민왕이 그들을 제거하려고 했다고 보고 있다.
5.2. 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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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민왕의 사망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공민왕이 변소에 행차한 것으로 시작된다. 변소라고 하면 단순히 시골에서 볼 수 있는 낡은 화장실을 생각하기 쉽지만 전근대의 변소는 생각보다 규모가 꽤 컸고, 특히 왕실이나 귀족의 화장실은 단순히 화장실 용도로만 국한되지 않고 탈의실의 기능도 겸했으며, 여기서 바깥에서 말하기 힘든 은밀한 사실을 고하거나[12] 남녀끼리 정사를 치르기도 했다.
공민왕에게 내시 최만생이 쪼르르 달려가
"홍륜이 익비를 임신시켰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만취해있던 공민왕은 "홍륜을 죽일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 사실을 고한 최만생에게 "너도 비밀을 아니 같이 죽어 줘야겠어."
라고 말했다. 이에 놀란 최만생은 당사자인 홍륜 등과 모의하여 술에 취해서 잠을 자고 있던 공민왕의 처소로 난입해서 공민왕을 칼로 난도질해 살해했다. 그의 나이 향년 45세였다. 이때 어찌나 처참하게 시해되었는지 뇌수가 벽에 흩뿌려질 정도였고, 시신은 칼에 수없이 난자당한 채 참혹한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 이후 605년 뒤인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시해되기까지 한반도 역사상 시해당한 현직 국가원수는 없었다.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단종 또한 일단 권좌에서 내려온 후에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하다못해 폐위되어 대역죄인이 된 연산군과 광해군도 폐위되어 유배만 됐을 뿐 살해당하진 않았다. 조선의 모든 왕들과 일제시절 모든 조선총독들도 마찬가지.[13]공민왕이 시해당할 때 김흥경 등 몇몇이 상황을 인지하고 "밖에서 역적이 들어왔다!"고 외쳤으나[14], 신하들과 근위병들이 당황하고 두려워해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암살자들은 결국 사태를 보고 받아 출동한 이인임과 근위병들에게 모두 체포된 후[15] 홍륜과 최만생은 역모죄로 거열형에 처해지고, 자제위 역시 모두 참수형에 처해졌다. 홍륜의 아버지인 홍사우 역시 연좌제에 따라 곤장을 맞고 유배된 후 얼마 뒤 처형당했는데 홍사우는 왜구 토벌에 공이 큰 장수여서 홍사우가 죽은 뒤 경상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백성들이 크게 슬퍼했다는 기록까지 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이상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전 왕조인 고려를 깎아내릴 필요가 있음에도 자신이 모셨던 왕인 공민왕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종묘 내부에 공민왕 신당을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왕조 국가에서 종묘의 의미는 상징성이 있는데 조선 왕조에서 진정한 고려 왕조는 공민왕까지 인정한다는 의미라고도 볼 수 있다. 공민왕 신당은 지금까지 현존하고 덕분에 우리는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은 물론 공민왕이 그렸다고 전해지는 <준마도>도 감상할 수 있다. 이성계가 공민왕에 대해 저런 조치를 한 것은 진정으로 섬긴 고려의 마지막 군주가 바로 공민왕이라는 근거가 되는데 우왕과 창왕은 물론, 공양왕도 그저 바지임금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성계가 정계에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가 공민왕 때문이었는데, 공민왕이 쌍성총관부 수복을 위해 그 지역의 천호였던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협력하면서 이성계까지 등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이성계는 공민왕을 섬기게 되었고, 공민왕도 이성계를 우대해주었기 때문에 조선 개국 이후 왕씨 몰살을 자행하고 후에 세종이 고려 왕들의 어진을 불태울 때, 공민왕의 어진만은 분소하지 않았다. 그 영향인지 고려 군주 중 태조와 함께 실제 얼굴을 알 수 있다.
공민왕의 왕릉인 '현정릉'은 지금도 개성시에 있으며 북한 정부가 다른 고려왕릉들에 비해 더 신경을 쓰는 듯하다.
5.2.1. 의혹
이인임과 공민왕 시해의 관련성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어느 부분에도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설을 받아들이자면 이와 같은 사실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한데, 그 부분은 이인임 실각 4개월 후 위화도 회군이 발생하면서 집권을 위해 우왕의 혈통과 공민왕의 총명함을 깎아 내릴 필요가 있었던 이성계 등이 자제위의 홍륜 이야기만을 남겼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상 명백한 루머로, 우선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우선 당시 고려 조정엔 그를 견제할 만한 쟁쟁한 명사와 충신이 너무도 많았다. 또한 익비 한씨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당시 멀쩡히 정사를 볼 정도로 판단력이 있었던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북원 사신의 발언도 정확히는 “바얀테무르 왕(공민왕)이 우리를 배반하고 명나라에 귀부하였으므로 살해한 것을 인정한다.”는 것으로, 정확히는 우왕 원년, 우왕의 즉위 과정을 정당화하는 발언이었다. 이전까지 우왕을 인정하지 않고, 제2대 심왕 왕고의 손자인 제3대 심왕 왕토크토아부카를 강제로 왕으로 세우려던 북원이 이인임의 화•전양면책을 받아들여 고려의 후계 승계에 대해 한 발 양보 발언을 보내온 것이다.또한 이인임이 신돈파여서 공민왕에게 앙심을 품었으리라는 설은 아예 앞뒤가 다른 것으로, 애초에 이인임을 전민변정도감에 넣은 사람은 신돈이 아니라 공민왕 자신이었다. 그 증거로서 당시 신돈의 측근이던 이춘부 등이 신돈 실각과 함께 모조리 사형당한 것과 달리 이인임은 그대로 다시 공민왕의 곁에 돌아왔다. 즉 그는 신돈 일파였다기보다는 공민왕의 수족이었다. 따라서 신돈파였던 이인임이 앙심을 품고 시해했다는 주장은 다소 무리가 있는 주장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고려사》 <이인임 열전>의 원전이 된 《고려국사》는 정도전 등이 직접 나서서 편찬한 책으로 이인임에 대한 비난은 티끌만한 것도 빼지 않았다. 《고려국사》는 단기간에 조선 개국공신들이 편찬에 참여하면서 이들의 사견이 너무 많이 개입됐다는 지적을 받으면서 여러차례 개수되었는데 현존하지는 않는다. 공민왕을 약간 깎아내리기 위해 이인임의 가장 큰 악행을 홍륜에게 옮기고 없던 일로 만들어가며 축소 기록하는 일은 사실상 정도전과 태조의 인격이 뒤바뀌지 않는 한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16]
어쨌거나 홍륜의 공민왕 시해 이후로 신돈의 개혁 운동에 반대하던 자제위의 집안들은 약화[17]되었으며, 이인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익비 한씨 등 우왕에게 위협이 될 만한 존재를 차근차근 정리하여 자신의 정치 기반을 공고히 했다.[18]
[1] 조선 초대 국왕 태조 이성계.[2] 조선 3대 국왕 태종 이방원.[3] 외가의 성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4] 결과적으로 이는 고려의 멸망을 부른 치명적인 자충수 중 하나가 되었다. 전근대시기에는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왕의 성관계는 애정 유무와는 별개로 후사를 위한 중요한 정치적 행위였고, 높은 조기사망률로 인해 신하들이 왕비와 후궁들한테서 자손을 많이 볼 것을 권고하는 시기였다. 그런데 그것을 망각하고 정식으로 맞은 후궁들한테는 손도 안 대더니, 궁 밖에서 살던 신돈의 종 반야와의 사이에서 우왕을 낳았으니, 우왕의 혈통 증거력은 명덕태후부터 의심할 정도였고 생모인 반야는 내가 친모라며 항의하다 임진강에 던져졌다. 당연히 이성계 측은 이를 빌미로 우왕과 창왕은 왕씨가 아닌 신돈의 핏줄이라며 폐위의 명분으로 써먹는다. 정 그렇게 우왕을 정식 후계자로 삼을 거였으면 한씨의 소생이라고 우겨대는 것보다, 진작에 반야를 면천해주고 궁녀로 들여 승은을 입게 하여 우왕을 낳는 것이 훨씬 합당했을 것이다.[5] 다만 《고려사》는 조선 초기에 쓰인 책이므로 조선을 상대적으로 띄워주고, 고려를 깎아내린다는 평도 있으니 걸러서 봐야 한다.[6] 라고 하지만 현재 사학계에서는 공민왕[7] 우왕 때 처형당한 충혜왕의 서자 왕석기는 이 당시 존재가 알려져 있지도 않았다.[8] 이 정비 안씨는 이후 왕대비가 되어 우왕, 창왕, 공양왕의 폐위 조서를 강제적으로 써야했고, 자기 시댁의 왕조를 본인 손으로 닫아야 했다. 그리고 장수하다가 세종 10년에 한 많은 삶을 마친다.[9] 몽골 제국에서 이러한 비슷한 제도인 뚤루게(禿魯花, 독로화)라는 것이 존재했으며, 공민왕도 이 제도로 중국에 있어야 했다.[10] 익비는 원래 고려 왕족 출신으로 왕씨였으나 공민왕의 비가 되면서 한씨 성을 받았다.[11] 익비가 홍륜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은 1376년에 역적의 씨를 살려두면 안 된다는 조정의 여론에 따라 살해되었다.[12] 그렇기에 《삼국지》에서 이적이 화장실에 간 유비에게 암살 음모를 알린다거나 한복이 지우개 칼로 자살하는 얘기가 나온다.[13] 안중근 의사의 의거로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는 흔히 조선총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조선 총독이었던 적 없으면 대한제국 시절 한국통감일 뿐이어서 그 시절 국가원수는 아직 순종이었을 때이다. 거기다 의거 당시 현직이었던 것도 아니다.[14] 김흥경은 자제위를 관리하던 사람이었다. 우왕 즉위 후에 자제위의 공민왕 시해 모의를 알고도 막지 않았다 하여 처형되었다.[15] 처음에는 궁궐에서 일하는 승려인 신조를 의심했으나 처소의 병풍이랑 최만생의 옷깃에 혈흔이 묻은 것을 이인임이 발견한 후 이를 수상하게 여겨 그를 붙잡아 고문하자 최만생이 모두 실토해서 금방 들통났다.[16] 그러나 생각해봐야할 것은 조선 초기 창업자들의 생각에서 고려의 마지막 왕이 공민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조선 창업의 정당성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부정적인 기술을 할 수 있음을 고려해봐야 한다.(우와 창은 신돈의 자식들이니 고려 대상도 아니고, 공양왕은 왕위를 비워둘 수 없는 것이기에 올린 사람이다. 즉, 조선 개창자들-특히 정도전-에게 고려는 공민왕이 사망하면서 끝난 나라였다.)[17] 자제위는 1372년에 설립된 것으로, 그 전해인 1371년에 이미 신돈이 사사되었다. 오히려 자제위는 신돈의 개혁이 사실상 실패가 된 이후 왕이 1인에게 몰아주던 권한을 문벌이 좋으면서 연소한 인재들을 육성하여 향후 집단에게 주기 위한 발판으로 사용되기 위한 것으로 봐야한다.[18] 그러나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굉장히 미묘한 측면이 있다. 공민왕이 후궁들과 자제위 사이에 불륜관계를 만들어서 이를 구경하였다라는 것을 도대체 누가 알 수 있고, 익비 한씨가 임신한 아이가 홍륜의 씨인지 공민왕이 어떻게 특정하였는지는 그렇다고 하더라도 홍륜 하나 죽이는데 무슨 암살 계획까지 하며, 최만생은 공민왕이 임신 사실을 알고 있는 모두를 죽인다라는 말 한마디에 자신이 죽을 것을 염려해서 홍륜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또 자제위의 다른 사람들은 왜 왕이 홍륜을 죽이는데, 자신들을 총애하던 공민왕을 죽이는 것에 동조한단 말인가? 심지어 이 모든 일은 모두 궁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다. 또한 이인임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숫자의 군사--이인임은 군사를 지휘하여 전쟁을 치른 적이 있는 인물이지만 이때 군사들을 거느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사병이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이때 하필이면 최영이 제주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 제압차 개경을 비웠다라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 이상할 따름이다. 추측이기는 하지만 자제위가 공민왕을 죽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궁 방위력이 약화된 잠깐의 빈틈 시기에 이인임이 궁 안에 있던 왕과 그의 친위세력들을 일거에 척살하고, 왕 시해의 죄를 자제위에게 떠넘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