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9 14:18:54

김진표(가수)


[[패닉(가수)|PANIC]]

[ 음반 목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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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NIC
정규 1집
1995.10.01
정규 2집
1996.09.01
SEA WITHIN
정규 3집
1998.05.01
PANIC 04
정규 4집
2005.12.07
<colbgcolor=#353535><colcolor=#FFFFFF> 김진표
a.k.a. JP
파일:김진표 .jpg
예명 JP
본명 김진표 (Kim Jin Pyo)
출생 1977년 8월 13일 ([age(1977-08-13)]세)
서울특별시 중구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78kg, A형
가족 배우자 윤주련(1982년 8월 2일생)[1]
아들 김민건(2008년 10월 16일생)
딸 김규원(2010년 5월 13일생)
학력 숭의초등학교 (졸업)
서초중학교 (졸업)
상문고등학교 (졸업)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 / 중퇴)
경기대학교 (중퇴)
병역 면제[2]
종교 개신교
소속 그룹 PANIC
레이블 없음
데뷔 1995년 정규 1집 'PANIC'
SNS 파일:네이버 블로그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3]

1. 개요2. 경력
2.1. 래퍼로서의 평가2.2. 디스코그래피
2.2.1. 솔로 정규 앨범2.2.2. 관련 영상
2.3. 필모그래피
2.3.1. 영화
3. 논란 및 사건사고4. 레이서 활동5. 여담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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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래퍼, 방송인, 레이서, 기업인 그리고 전 탑기어 코리아 MC. 문구로 유명한 한국파이롯트 공동 대표이기도 하다. 현 쇼미더머니 공무원

2. 경력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던 1995년에 이적과 함께 패닉으로 데뷔했다. 초창기 김진표하면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패닉 활동과 리바이스 CF("난 나야!")이다. 원래는 이적이 솔로로 데뷔할 예정이었으나 앨범 다 만들고 데뷔하기 직전에 기획사에서 김진표를 끌어들여 듀엣 결성했다. 그래서 패닉 1집 앨범에서는 김진표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당시 히트곡이었던 달팽이 방송분을 보면 노래를 부른 부분도 없고 하니 색소폰을 들고 있는 것이 다다.[4][5]

패닉은 처음에는 타이틀곡인 '아무도'가 별 반응을 불러오지 못했지만, 후속곡 '달팽이'가 빵 떠버렸다. 진짜로 앨범 끝자락 트랙에 끼워넣기로 이적 혼자 부르는 노래였는데 그게 얻어걸렸다. 그런데 방송 무대에서 할 게 없었던 김진표는 이적 옆에서 색소폰을 부는 표정연기를 맡았다.[6] 그리고 이적한테 색소폰 손싱크 한건 니가 처음일 거라며 까였다. 후속곡 '왼손잡이'는 원래 앨범 수록 버전에는 랩이 없었지만 김진표를 위해서 방송 활동을 할 때는 랩 파트가 추가됐다.

이렇듯 패닉의 깜짝인기로 큰 인기를 얻고 속칭 연예인병에 걸린 어린 김진표는[7] 아래에서 서술할 이런 저런 사고와 기행을 펼치고 다니고 간간이 신문 사회면을 장식하는 등 패닉의 트러블메이커로 자리잡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적이 녹음실에서 '너 계속 이렇게 살면 안된다. 이렇게 가다간 내가 너를 데리고 음악을 안 할 수도 있다. 나는 너 없어도 음악 할 수 있지만 너는 그럴 수 있냐'고 직언을 날린 것에 충격을 먹고 각성하여 본격적인 래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8] 어찌보면 김진표를 아직 뮤지션으로 살게 해준 은인이 이적이 아닌가 싶다.

이후 패닉 2집인 '밑'에서부터 본격적인 자기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mama와 벌레 두 곡을 썼는데, 과격한 내용으로 인해 두 곡 모두 가사가 잘려나가 버렸다.[9]

이후에는 솔로로 데뷔했다. 1집인 '열외'는 대한민국 최초로 전곡이 장르로 이루어진 앨범으로 알려져 있다.[10] 그런데 모든 곡이 힙합 장르는 아니었다. 타이틀 곡인 Fly - 왜 그렇게 사나요와 사랑해 그리고 생각해가 낮선 장르에도 불구하고 크게 인기를 끌었다.

한편 N.EX.T 멤버들과 노바소닉[11]을 결성하여 밴드로도 활동하였으나, 3집 발표 이후 건강 문제로 탈퇴한다.[12] 대표곡은 오락실 펌프 최고 인기곡이었던 '또다른 진심'(마지막 편지: 그것조차 거짓)과 '나쁜 여자', 'SLAM' 등.[13] 다만 나쁘게 탈퇴한 게 아니라 2010년에 재결합했을 때 몇몇 곡에 참여했고(전곡 참여는 아니다), 2021년에 다시 몇몇이 모여 신곡을 발매했을 때 다시 참여했다.

언급하듯 저 부정맥 때문에 노바소닉을 탈퇴하고 휴식을 취했지만, 의외로 긴 공백기 없이[14] 2003년에 솔로 4집을 내고 2년 뒤에 패닉 4집으로 복귀했으며 그 해 4.5집 겸 베스트 앨범까지 내는 등 휴식기 없이 활동을 이어가다 2006년부터 이혼 등의 문제 때문에 반강제로 휴식기에 돌입해 2008년에 5집을 내기까지 휴식을 취했다.
이렇듯 한국 힙합 1세대로서의 족적이 있으나, 본인 말로는 자기는 그냥 랩퍼지 힙합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모양. 실제로 음악 스타일도 전형적인 힙합과는 거리가 멀다. 애초에 초중반의 커리어를 펑키한 락 혹은 발라드(패닉)[15], 헤비한 락(노바소닉)을 하는 사람들과 보냈기 때문에 다른 힙합 랩퍼들과 비교해 보면 상당히 다른 음악을 한다. 그래도 가장 오래 한국말로 랩을 한 축에 들다 보니 랩에 감정을 넣는 기술은 꽤 뛰어난 편이고, 은근히 힙합적인 트랙들을 선보일 때가 있으며, 힙합 뮤지션들과도 나름 교류를 많이 하는 편. 애초에 이 사람보다 일찍 데뷔한 래퍼는 손에 꼽기 때문에 당연히 힙합 뮤지션들과 친할 수밖에 없다. 후술하겠지만 패닉 전까지는 오로지 힙합만 듣던 사람이었고. 그러면서도 PC통신 등에서 신해철과 친했던 등 패닉 이후로는 락에도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졌던 모양. 노바소닉 활동도 했었고... 그래서 힙합 쪽 인맥과 락 쪽 인맥 둘 다 있는 편. 다만 노래는 잘 부르는 편이 아닌 모양. 패닉 3집 발매 후 출연한 이소라의 프로포즈에서 레너드 코헨의 I'm your man을 딱 한번 부른 적이 있다. 고음불가에 가깝지만 저음이 굉장히 인상깊고 딕션이 좋은 편이다. 래퍼로써는 최고의 목소리를 가진 셈. 방송 진행력도 좋아서 방송에서 탑기어나 쇼미더머니 등에서 MC로 활동하면 호평을 자주 받았고 다큐멘터리 내레이션도 간간히 맡은 적이 있다.

작곡 능력은 그리 없지만 작사는 평이 좋은 편. 특히 사랑노래 가사를 말랑말랑하게 잘 쓴다. 물론 3집 앨범 JP3와 5집 앨범 Galanty Show에서는 대놓고 가사가 시궁창을 시전하였다.[16]

김진표의 솔로 앨범 3집과 'JP STYLE'은 명반으로 꼽힌다.[17] 또한 패닉 3집 역시 명반으로 꼽히는데, 이전 패닉 앨범들과 달리 김진표가 전곡의 랩을 만들며 한 축을 확실히 담당하였다.

2003년에 현대홈쇼핑 쇼호스트 출신 동갑내기 여성과 결혼했으나 2006년에 전격 이혼했다.#[18] 그 뒤 2008년에 5살 연하의 연기자 윤주련[19]과 재혼했다. 이후 아들[20]과 딸[21]을 얻고 잘 살고 있다.

이후 2009년 12월에 싱글 앨범으로 로맨틱겨울을 발표했는데, 피처링이 SG워너비김진호이다. 대중적으로 크게 성공했고 SG워너비 팬들에게는 김진호의 창법 변경 이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2010년에 노바소닉이 Metamorphosis 앨범으로 잠시 재결합을 했을 때 랩 파트에 일부 참여했으나 일회성으로 끝났다.

2011년에는 탑기어 코리아에 고정출연하게 되며 음악 활동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2014년의 쇼미더머니3부터 전속 MC로 출연중이다.

2015년 12월 18일 2년 2개월 만에 신곡이 나왔다. 곡명은 '산타처럼'. 곡 음원에 재규어 F-타입 엔진 배기음과 깜빡이 소리가 나온다. 곡은 브랜뉴뮤직 를 통해 나왔지만 블로그에서 브랜뉴 소속이 아니며 그냥 라이머 와 친한 사이고[22] 종종 싱글곡은 앞으로 브랜뉴를 통해 발매할 것 같다고 밝혔다. 인터뷰에서 밝히길 좋은 가사가 생각나서 라이머에게 곡 하나만 주라고 부탁하면 80개(...)정도를 보내준다고. 거의 작곡 공장 수준이라고 한다. 곡 설명 등 출처

2019년 12월 12일 유튜브 채널 탑기어 코리아에 업로드 된 포르쉐 타이칸 영상에 출연했다. 영상

2021년 오랜만에 가수로 컴백했다. 노바소닉에 객원 멤버로 참여해 앨범 선공개 곡인 'More Money'를 불렀다.

이적에 의하면 방송 활동에 거의 나오려 하지 않는다는 듯. 돌팔매 피쳐링 후 유희열의 스케치북엔 나왔지만 라디오 스타에서 이적이 같이 나오자 했음에도 거절했고, 쇼미더머니 말고는 방송 활동을 그다지 하지 않으려는 듯 하다. 가수 활동도 복귀는 했다지만 8집은 감감무소식이고.

2.1. 래퍼로서의 평가

정박으로 딱딱 떨어지는 플로우로 인해 귀에 가볍게 들어오는 랩이긴 하지만, 재미없고 밋밋하다는 평하는 리스너들도 많은 편이다. 김진표 2집의 수록곡 중 '진표생각 1'의 훅인 '나는 싸가지가 너무 바가지 힙합바지 입고 나가지'는 지금도 김진표를 조롱할 때 종종 인용되는 가사이다. 다만 '진표생각'은 버릴 가사와 라임을 모아 만든 쓰레기통 같은 곡이라고 밝힌 적이 있다. 싱글 발매가 아니라 앨범 발매였기 때문에 이런 구성이 나올 수 있었다고. 본인도 이런 점을 알고 있어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억지라임의 황제"라고 지칭한 가사를 쓰기도 했다.[23] 영어 라임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것 또한 특징. 7집쯤 와서는 훨씬 유려한 라임을 선보이며 이전보다 훨씬 깔끔하게 단어를 배치한다.

그러나 올바른 평가를 하기 위해서 상기해야 할 점은 김진표가 한국 힙합씬 초창기 랩에 있어 rhyme이라는 요소를 알리고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공로는 어떤 고평가를 해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첫 개인 정규앨범을 냈던 년도가 무려 1997년인것을 다시 한번 상기해보자. 당시 엄청난 혁신이었던 김진표의 랩과 라임이 하나의 기틀이 되었기 때문에 타도대상이 되어 엄청난 분석을 당하면서 촌스럽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24]

이현도-김진표-조PD 시절 그들의 랩 스킬을 엉터리였다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당시만 해도 "한국어로 랩 가사를 라임-플로우 형식으로 제대로 쓰기는 힘들다" 라는 인식이 굉장히 팽배했기 때문에, 이현도는 정말 어찌어찌 시도만 했던 실험적 상황이었고, 조PD는 유학파라서 그런지 몰라도 한국어로 쓰다가 안되면 그냥 영어랩으로 넘기기도 했다. 그런 고로 김진표의 라임 방식(이른바 단음절 라임)을 지금 관점에서야 까는건 바람직하지 못하다. 지금의 라임-플로우의 체계가 어느 정도 갖춰진 게 버벌진트-데프콘-피타입의 SNP 및 마스터플랜 때이고 그들이 이 단음절 라임을 까면서 주목받았지만, 그 모든 비판이나 현재 랩의 체계 역시 마찬가지로 김진표가 세워놓은 토대 위에서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2020년대 유명 랩퍼인 정상수를 예시로 들어볼 수 있다.[25] 그의 대표적인 가사로 상당한 평가를 받는 계속해서 매섭게 쏘겠어 죄 속에서 날 대속해와 같은 구절을 보면 라임이 덕지덕지 발라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똑같은 플로우로 '가갸거겨고교구규그기'로 바꿔서 불러본다면 느낌이 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바꿔 보면 신기하게도 패닉 2집 시절 똑같이 라임이 배제되어 있던 김진표의 랩과 비슷해지기도 한다.[26] 90년대의 랩은 뭐가 뭔지 알 수도 없는 각설이 타령이라는 비판도 많이 받았는데[27] 패닉 2집 시절의 랩을 들어보면 일리가 아예 없는 비판이라고 하기 힘들다. 이렇듯 라임이 있는 랩과 없는 랩의 커다랗고 신기한 간극을 보면 그게 아무리 초보적이라도 라임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 과감하게 라임을 핵심 요소로 도입시킨 김진표의 공헌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라임이라는 방법론이 아예 없던 상황에서의 랩은 리듬감 측면에서 느낌이 전혀 달라진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랩은 기본적인 라임조차 구성이 되어 있지 않았고.[28] 그냥 가사에 Yo만 붙이고 랩이라고 우기거나 라임에 맞지 않는 영어만 쓰는 경우도 많았다. 당시 전문가들도 한국어로 수준 높은 랩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대중에게 심어주는데 크게 기여한 점을 높게 평가하곤 했다. 이것이 어느 정도의 기여냐 하면, 비록 이적을 좀 등에 업은 격이긴 했지만 어쨌건 꽤 이름과 명성이 있던 가수인 김진표과 97년과 98년 열외와 JP Style에서 모든 곡을 랩으로 채우고 라임으로 떡칠한 앨범을 2장이나 연달아 발매한 이후 TV 신문 라디오 등 매체마다 돌아다니면서 무조건 랩과 힙합은 라임이라고 공언하고 다니는 통에 한국 대중의 인식이 랩은 라임이 있는 것이구나 하고 자리잡게 되었다.[29] 예시로 들었던 오엔스쿨의 빅뱅이나 정상수의 랩을 라임 없이 가갸거겨고교로 바꾸면 패닉 시절 김진표의 랩과 비슷해진다는 점을 들어서 생각해 보자면, 김진표의 기여는 대중들의 인식에 라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알려준 정도가 아니라 라임이 있는 랩이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면서 스타일을 혁신했다는 점에서도 '라임의 황제'라는 별명은 실로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한국 힙합계의 혁명가 중 한 명이라고 불러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 '열외'와 'JP STYLE'에서 보여줬던 흠잡을 곳 없이 깔끔한 프로듀싱과 치밀한 곡 구성은 씬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이례적인 결과물이었기 때문에 김진표의 마스터피스로 평가받는데, 리드머에서 명반 취급을 받는 4점을 받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 힙합계의 판도를 바꾼 대표적인 인물이자 유명인사였기 때문에 대표적인 표적이 되어 SNP 등 통신상에서 시작한 랩퍼들의 수많은 비판을 받아온 것도 사실이다. 본인도 여러 가지 구설수로 인해 깨끗하지 않은 이미지, 심장 건강문제와 더불어 다른 장르에 대한 관심 등등의 이유로 인해서 금세 바뀌는 랩과 라임의 조류를 제 때 따라가지 못했기에 그 당시 받았던 엄청난 비판이 사라지지 않은 채 저질 라임의 대표주자로 남아 있다. 그 당시 비판이 정당한 부분도 많았지만 남을 깎아내려서 자기 자신을 홍보하려던 의도가 분명히 있었고, 그리고 그런 의도 속에 비판자들이 김진표가 일궈냈던 혁신의 가치를 제대로 평가해주기는커녕 애써 무시했었다.[30]

참고로 이제는 힙합계의 대부가 된 드렁큰 타이거는 당시까지만 해도 한글 가사를 쓸줄 몰랐다. 그리고 그 유명한 '난 널 원해',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의 한글 가사를 써 준 장본인이 바로 김진표였다. 이하늘과 작업한 '이리와', 조PD, 윤희중과 교류했던 '시부렁', '3 VIP', '인터뷰 2', 리사가 피처링한 '너는 니길로', 리사, 드렁큰 타이거, 리오, 다이나믹 듀오와 '폼나는대로', 드렁큰 타이거와 협업한 '푸념' 등 힙합 곡들도 꽤 많이 남겼다. 당시 교류했던 이들의 당시 위상을 보면 김진표의 급을 가늠할 수 있다.

2020년 11월 11일에 발매된 이적의 돌팔매에 한 피쳐링에서 이전보다 좀 더 유려하게 운용하는 라이밍과 플로우를 보여줬다. 쇼미더머니 진행을 하며 영향을 나름 받은 부분이 있는듯하다.[31]실제로 선배님이라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도 가끔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특유의 ~잉 하는 듯한 뉘앙스로 랩을 질질 끄는 일종의 쿠세로 인해 호불호 갈리기도 한다.[32]
이러니저러니 해도 한국 힙합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한국 힙합의 선구자들 중 한 명임은 분명하다. 다만 김진표 본인은 자신의 음악은 힙합이 아닌 팝이라며[33] 만약 어딘가에서 '힙합 공로상' 같은걸 만들어서 자신에게 준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라고 밝혔다.

랩과 별개로 가창력은 없다. 고음불가의 대표격.[34]반대로 그 덕에 내래이션 목소리로는 끝내준다는 평이 많다.

프로듀싱 능력도 뛰어나다는 듯. 룰라의 이상민에 의해 이상민 본인과 김진표, 이현도를 힙합계 3대 프로듀서라고 했는데, 약간 방송 컨셉을 감안해도 이현도와 같이 엮인다는 점에서 김진표의 능력을 볼 수 있다.

2.2. 디스코그래피

2.2.1. 솔로 정규 앨범

2.2.2. 관련 영상

2.3. 필모그래피

2.3.1. 영화

3. 논란 및 사건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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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레이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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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담

  • 아버지 김우옥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장을 지낸 연극인으로 특히 아동극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그리고 전설처럼 전해지는 신동엽의 대학시절 다방 커피 사건[35]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당시 김우옥 교수는 서울예대에서 셰익스피어를 강의하고 있었는데 이 장난을 당하자 크게 분노했으며, 신동엽 본인의 말에 따르자면 거의 퇴학 위기까지 갔다고 한다.
  • 심한 부정맥 탓에 페이스메이커를 달고 있다. 웃옷을 벗고 찍은 사진을 보면 가슴 쪽에 확연히 보인다. 공연 중 몇 차례 실신하기도 했다. 그래서 군대는 면제인데, 한국 힙합 뮤지션들의 병역 문제가 대중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김진표에게만은 면제 갖고 아무도 뭐라 안 한다. 결국 이 문제 때문에 노바소닉 활동도 그만두게 됐다. 특히, 3집 콘서트 당시 부정맥으로 쓰러질 당시엔 진짜 죽을 뻔 했다. 사실상 이 심장질환으로 패닉+노바소닉+솔로로 나름대로 기세가 좋던 가수 김진표가 추락한 원인이 되었다. 참고로 정확한 병명은 심장의 우측이 갑자기 움직이지 않게 되는 '부정맥유발성 우심실 이형증'으로, 이를 방지하기 위해 결국 페이스메이커를 달았다. 그리고 전지를 갈기 위해 일정 기간이 되면 수술을 해야 한다.
  • 2017년도부터 금연에 성공했다.
  • 돌아온 몰래카메라에 출연한 적이 있었으며, 본래는 김현철에게 빚을 졌다는 설정으로 류시원을 속이려는 계획이었는데, 류시원이 그 상황을 눈치채자 이경규가 작전을 바꾸어 역몰래카메라를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류시원이 김현철과 함께 지나치게 살벌한 몸싸움 연기를 벌이는 바람에 시청자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으면서 흑역사화되었다.
  • 꽤나 오랫동안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사귀고 헤어지고 다시 사귀고 또 헤어지고를 여러차례 반복한 모양이다. 이를 노래로 만든 것이 솔로 1집의 '사랑해 그리고 생각해', 노바소닉 1집의 '마지막 편지 그것조차 거짓'[36], 솔로 3집의 '믿을지 모르겠지만', 솔로 4집의 '아직 못다한 이야기' 등.
  • 꽤 일찍부터 PC통신을 드나들었고, 무엇보다 당시로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멋진 개인 홈페이지(JPHole[37])를 스스로 디자인하는 솜씨가 있었다. 과거 조선일보선정 국내 100대 개인 홈페이지에 들었을 정도. 당시엔 개인이 홈페이지를 갖기가 꽤 어려웠던 시절로, 개인 홈페이지 하나 만들기 위해 호스트 등록하고, 태그 배우고 하던 시절이다.
  • 드렁큰 타이거가 한국어에 서툴렀던 시절 대신 가사를 써주기도 하고, 드렁큰 타이거가 앨범에 참여하기도 하는 등 친분이 있는 사이. 김진표의 2집 앨범(1998년) 에 있는 '푸념'이라는 곡은 드렁큰 타이거가 데뷔하기 전에 피처링한 곡이다. 사실상 무브먼트 크루의 초대멤버라 할 수 있으나 음악적인 견해 차이로 탈퇴했다.
  • 해피투게더 시즌 3에서는 싸이와 오랜 친구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어머니가 고등학교 동창, 김진표의 할머니와 싸이의 할아버지가 친구, 즉 3대째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김진표는 싸이와 친해지기 전부터 이미 어머니에게 여러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 활동한 지 꽤 오래되고 친목질에도 능해 이런저런 인맥이 있고 이는 앨범 작업에도 좋게 작용한다. 솔로 정규 3집은 이 인맥을 십분 활용한 김진표 최고의 앨범이며 심지어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팬들 및 아마추어들을 피처링 아티스트로 기용하기도 했다. 이 때 전 스토니 스컹크 멤버이자 현 YG엔터테인먼트 프로듀서인 KUSH(A.K.A 소래눈보이 A.K.A S-Kush A.K.A Shader AKA 이낙) 김병훈이 응모해 캐스팅된 일도 있다.
  • SBS 파워FM에서 매일 0시부터 1시까지 김진표의 야간비행[38]으로 DJ를 맡았던 바 있으며, TV에서도 종종 MC로 활동. 묘하게 게임정보 프로그램 MC를 여러번 담당했다. 그 시절 사람답게 게임 좋아한다. 특히 당시 최대 히트작 중 하나인 심시티...
  • 90년대엔 나름대로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통했다. 1996년 MBC 표준FM 별이 빛나는 밤에의 '잼콘서트'가 끝나고 술집에서 어떤 일행과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 경찰에 입건됐다던지, SBS 한밤의 TV연예의 리포터 조영구가 귀찮게 인터뷰 요청을 해 와 솔로 3집 마지막에 히든 트랙으로 '# 같은 TV 연예'라는 곡을 수록했던 사건 등이 대표적.
  • 당시 김진표의 홈페이지에는 '연예정보프로그램, 특히 한밤의 TV연예는 공공의 적'이라는 뉘앙스의 김진표 글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찰나, 김진표가 심장 수술을 막 받았을 때, 치료 중이던 병원으로 조영구를 비롯한 한밤의 촬영팀이 인터뷰요청차 찾아왔다. 당연히 김진표는 인터뷰를 거부한 후, 밖에서 기다리던 연예가중계팀과 인터뷰를 하고 다시 병상에서 잤다고 한다. 이 후 매니저가 여차저차 설득시켜서 한밤 팀과도 인터뷰를 무사히 했지만, 빡친 한밤은 그 인터뷰를 방송에 공개하지 않았다. 결국 벼르고 있던 김진표의 반격이 이 '# 같은 TV 연예'이다. 문제는 기획사 및 앨범 유통사에서 '이건 도저히 안되겠다' 며 초판CD중 후속 제작된 앨범에서 문제의 곡을 뺀 채 유통시킨것. 왜 노래가 없냐며 항의하던 팬들의 글을 자기 홈페이지에서 본 후 김진표는 사과를 하고 전량 교환조치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진표는 2007년부터 09년까지 선정성으로는 알아주는 tvN에서[39] 연예뉴스 프로그램 tvN eNEWS의 진행을 맡았다. 그리고 당연히 까였다(...) 욕먹으면서도 지지하던 팬덤이 이를 계기로 거의 무너진다.[40]
  • 유승준에게도 곡으로 디스를 했다. 그의 곡마다 West Side시그니처 사운드로 사용했는데[41],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수가 미국식 이스트/웨스트 같은 정체성을 드러내는 게 힙합을 좋아하는 김진표 입장에선 꼴같지 않았던 모양. 뭐 일단 스티브 유는 LA에서 자라긴 했으니 억지로 갖다 붙일 순 있겠지만서도... 그리고 스티브 유도 김진표를 디스했다.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당시 한국 힙합 동호회에선 한국에서 디스랩이 있다는 것 만으로도 꽤 화제가 되었다.
  • 탑기어 코리아 MC 시절에 자동차로 극한의 도전을 하는 메인 역할로 활약한 적도 있다. 시즌 2부터 자동차 스카이 다이빙[43], 시즌 3에서는 자동차 360도 회전, 시즌 4에서는 자동차로 점프대에서 날아가기,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시즌 5에서는 자동차 킥플립 회전을 선보인 바 있다.탑기어에서는 킥플립 도전에 실패했는데 탑기코는 성공 이 모든 도전은 전부 쉐보레에서 지원해줬던 차들(아베오, 스파크, 트랙스, 크루즈)로 이루어졌고 이는 김진표가 쉐보레 레이싱 팀에서 활동하여 협찬받아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 연예계에서도 알려진 굉장한 자동차 애호가이다. 자타공인 포르쉐 마니아인데 정작 포르쉐가 없...었다가 중고 매물을 득템했다. 바로 전 오너가 직수입한 964 쥬빌리 30주년 한정판 009번. 전 세계에 911대 밖에 없는 차로, 터보 카울에 자연흡기 엔진 모델이고 대체로 한을 풀었다는 댓글이 줄을 잇는다. 또 아들인 민건군이 태어나며 산 랜드로버 디스커버리 3와 롱텀 시승을 위해 지원받은 마세라티 콰트로포르테재규어 F-타입도 소유하고 있다.
  • 가수로서의 본업도 손놓은 건 아니고, 벅스와 3년 동안 일정하게 곡을 발표하는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수령하는 계약을 맺어 월급쟁이 가수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흔한 계약 방식이지만 한국에서는 거의 최초 사례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보기 드문 계약 방식으로 화제가 되었다. 이 월급 쟁이 방식 덕택인지 6집도 나이 치고는 꽤 빨리 나왔으며, 이제서야 겨우 잃어버렸던 감을 대부분 되찾은 듯, 곡도 랩도 깔끔하게 잘 만들어졌다.
  • 2012년 2월 10일부터 엠넷에서 방송되는 오디션 프로그램 The Voice Korea의 MC를 맡게 되었다. 톤이 좋고 임기응변에 뛰어난 진행능력을 인정받는 편. 그 이후에는 엠넷 에서 진행하는 래퍼 서바이벌 프로그램인 쇼미더머니 3부터 쇼미더머니 11 까지 진행을 맡고 있다.
  • NC 다이노스의 열성팬이다. 수도권 원정경기가 있는 경우 그 경기장을 찾아가고, 스케줄이 빌 때는 아예 창원시로 내려가서 직관도 한다고 한다. 주로 아들과 같이 야구를 보러 가는데, 아들은 나성범의 팬이라고 한다.[44] 후에 2021년 팬페스트 당시에 공개된 축하 영상에서 밝힌 바로는 2015년 시즌에 아들 덕분에 팬이 되었다고 밝혔는데, 아들이 10개 구단 마스코트 중 단디[45]를 가장 좋아해서 그 때문에 NC 다이노스의 팬이 되었다고 한다. 2020년에는 팀이 통합우승을 한 후 MBC경남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나레이션을 맡았다.
  • 어려서 힙합 외의 음악은 별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고등학교 시절 짝꿍이랑 "Rock이 음악이야???"하고 싸우기까지 했을 정도. 이현도의 2004년 발표 음반인 "The New Classik...And You Don' Stop" 수록곡 <最高(최고)>의 가사를 보면 특히나 2Pac을 엄청나게 좋아했던 것 같다. 하지만 후일 이적과 함께 한 패닉의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음악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 그러나 최근 유튜브 채널인 REP TV의 RAP TALK 인터뷰에서 밝히길 자신의 랩이 힙합과는 멀다고 했다.[46] 또한 이제는 음악을 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좋기 때문에 더 이상 음악을 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완전 은퇴는 아니고 어쩌다 영감이 떠오르면 가사를 쓸 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자신이 최근 발표한 곡들에 유독 피처링을 많이 쓰는데, 이것이 오히려 공연할 때 독이 되어서 돌아온다고 모 인터뷰에서 밝혔던 바 있으며, 상술했듯이 심장질환으로 인해 공연도 많이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상태이다.
  • 스타크래프트:리마스터 런칭 이벤트인 GG투게더의 다큐멘터리, GG않는 이야기에서 나레이션을 담당했다.
  • 탈모가 있다. 블로그에 따르면 2006년 사랑 따위 Pt2 M/V 를 촬영하면서 삭발을 했는데 그때부터 탈모가 시작되었다고.
  • 패닉 초창기에는 상당히 파격적인 헤어스타일로 있다가, 노바소닉 시절에는 지금과 큰 차이 없는 짧은 머리+염색을 유지했었고, 패닉 4집 시절에 수염과 머리를 전부 기른 꽤 충격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언급한 뮤비 촬영을 위해 싹 삭발하자마자 탈모가 와서 더 이상 머리를 기르지 못했다는 듯. 그나마 더 이상 탈모가 진전되지는 않는다는 듯 하다.
  • 2023년 2월 3일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박용하의 사진과 자신에게 보냈던 문자를 공개했다.#

6. 관련 문서



[1] 배우로 활동했지만 결혼 후 배우 활동을 중단했다.[2] 후술할 부정맥에 의한 면제.[3] 현재 비공개 계정이다. 최근에는 페이스북을 더 많이 활용한다.[4] 왼손잡이곡도 이적의 솔로보컬곡이었지만 왼손잡이 곡으로 후속곡 활동 당시 인트로와 중반주에 김진표의 랩파트를 추가하였다. 방송 라이브활동 한정곡 이기에 정식음원은 없다.[5] 김진표 5집 수록곡인 '폼나는 대로'를 들어보면 녹음실에 딱 3일 있었다는 듯하다. 그래도 타이틀곡과 별개로 김진표 솔로곡인 '다시 처음부터 다시'를 사실상의 타이틀로 여기는 듯 하다.[6] 참고로 김진표가 색소폰을 불줄 모르는데 폼만 잡았다고 알려져있지만, 청소년 때 잠시 영국에 살았을 적 학교 기숙사에서 Wham!Careless Whisper의 앞 부분을 연주했더니 많은 학생들이 몰려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는만큼, 나름대로 불 줄은 알았던듯. 다만 방송 무대에서 불진 않았다.[7] 데뷔 때 아직 고3, 달팽이랑 왼손잡이가 뜰 때는 갓 성인이던 시절이었다.[8] 훗날 이적은 "내가 그런 이야길 했었어?" 하면서 완전히 까먹은듯. 혹은 웃기려고 지어낸 얘기일 수도 있다.[9] 수록곡 '벌레'는 교사들의 체벌, 구타를 디스한 곡으로 파장을 일으켰었는데, 그의 고교 재학 당시 교사들은 "가수 한다길래 머리도 기르게 해 줬는데!" 라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학교 체벌이 난무하던 시기이고 김진표의 모교는 그 유명한 상문고등학교라는거.. 김진표 본인은 그렇지 않아도 엉망이었던 모교 상황에다가 실용음악을 하겠다고 연습하는 자신을 교사들이 "나발부는놈"이라고 비하했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10] 최초의 랩 앨범이 하이텔 흑인음악 동호회 'Blex'의 검은소리 Vol.1가 아니냐는 논란이 다소 있었으나, 그건 정식으로 나왔던 앨범이 아니라 그냥 동호회 차원에서 배포했던 앨범인 관계로, 김진표 1집을 최초로 쳐준다.[11] 쉽게 말해 넥스트에 신해철 대신 김진표가 들어간 형태. 물론 음악색도 살짝 다르며 넥스트 시절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하드 락에 집중하면서 음악성이 더욱 매니악해졌다. 또한 락, 메탈을 기반으로 힙합을 제대로 결합한[47] 랩코어, 뉴 메탈 장르를 보여주었다. 다만 뉴 메탈 뿐만 아니라 김진표 대신 다른 가수를 보컬로 섭외하여 락발라드를 시도하기도 했다.[12] 이후 노바소닉에 들어온 멤버는 이현섭(래퍼가 아닌 보컬)으로, 2019년 현재는 N.EX.T의 '잠정' 보컬이다. 신해철 생전 N.EX.T Utd. 더블 보컬이었지만, 그가 의료사고로 인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이후 넥스트의 활동이 안갯속으로 빠졌기 때문.[13] 이렇게 보면 김진표도 은근히 인맥풀이 좋다. 애초에 뮤지션 입문을 도운 이적도 그렇고, 노바소닉 때의 김세황도 그렇고. 후에는 이현도하고 같이 작업한 적도 있다.[14] 사실 연 단위로 보니까 짧아 보일 뿐 2002년 11월에 노바소닉 탈퇴 후 2003년 5월에 솔로 4집을 내긴 했지만 탈퇴 전부터 이미 4집 준비 등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15] 지금이야 이적이 솔로에서의 발라드 스타일 덕에 이미지가 박혀버린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패닉 첫 활동 시절만 해도 사회비판적이고 펑키하고 얼터너티브한 곡을 자주 썼다. 옛날의 이적을 모르는 사람들이 '혀'나 '벌레'같은 기괴한 곡을 듣는다면 충격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에 대해 김진표는 이랬던 이적이 사랑 타령이나 하고 있는 게 말이나 되냐며 깠다[16] 사실 그럴 만도 한 게 3집이 나왔던 2001년 전후반은 인터넷문화가 막 봇물을 이루면서 사회비판 의식이 소수 마니아에서 대중 전반으로 퍼지던 시기였던 만큼 김진표를 비롯해서 당시 활동하던 뮤지션들이 영향을 받았고, 5집은 앨범 제작 기간이 김진표가 이혼 후유증을 겪었던 시기라 여러 모로 감정이 복잡했다. 이혼 후 몇 개월 만에 발표했던 싱글 '사랑 따위'는 김진표가 작사와 작곡을 다 했는데 5집보다 더 암울한 곡이다. 게다가 본인이 직접 삭발하는 뮤비까지 찍었다. 근데 이 때 삭발 씬 이후 탈모가 와버렸다(...).[17] 4집 이후 발매된 리마스터링 베스트 앨범에서도 3집이 32곡 중 8곡을 차지했다. 정규앨범 수록곡이 아닌 곡과 신곡이 포함된 것을 감안하면 가장 많은 편.[18] 전부인은 쇼호스트 그만두고 셰프로 활동했다. The Institute of Culinary Education : Culinary Art, 츠지원 요리과정 수료.[19] 예능 프로그램인 애정만세 2기로 데뷔했는데, 프로그램 자체가 제대로 흥행하지 못하고, 4회만에 종영되어 버렸고, 이후 정식적으로 연기자로 데뷔해서 조연 및 단역을 오갔지만 결국 포텐이 터지지 않았다. 대학시절엔 한예종에서 가야금을 전공했다.[20] 2008년 10월생이다. 현재 나이 [age(2008-10-01)]세.[21] 2010년 5월 10일생이다. 현재 나이 [age(2010-05-10)]세.[22] 중학교 동창이라고 한다.[23] 힙합바지 드립은 후에 이현도의 New Classic 앨범 때 또 써먹는다.[24] 저 구절만 놓고 보면 1집 전체가 저 곡마냥 유치한 라임이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김진표가 만든 가사가 전부 저런식의 억지라임이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말을 빠르게하면 다 랩인줄 알았던 당시로는 제법 신선한 편이었다.[25] 랩보다는 기행으로 유명하지만 1세대와 가까운 스타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26]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노래도 비슷한 느낌의 랩이 있다. 그나마 힙합을 진지하게 열심히 연구한 사람들의 결과물이 그런 것이다.[27] 흑인음악에 대한 진지한 연구를 하지 않던 사람들의 경우 빠른 추임새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유명한 가수로 쿨의 김성수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윤일상이 있다. 사실 미국에서 마이키를 데려오기 이전 김정남 시절 터보 랩을 보면 주영훈도 별 차이가 없다. 이들의 음악적 지향점이 흑인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Run D.M.C의 곡을 제대로 연구한 홍서범의 김삿갓이나 위 곡을 포함해 여러 흑인 힙합을 진지하게 연구한 서태지와 아이들 정도만이 당대 흑인 음악과 유사한 편. 이마저도 홍서범은 1회성에 서태지는 애초 메탈헤드라서 흑인 음악을 깊게 연구하기는 했을지언정 오래 활동하지는 않은 데다 흑인 음악의 탈을 쓴 록 음악이라는 평가를 받은 적도 있어서 듀스 정도만이 정통 힙합으로 활동한 편이긴 한데, 여기도 고작 3년밖에 활동을 안 해서...[28] 김진표와 동시기인 98년 오엔스쿨의 빅뱅이라는 노래도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재즈힙합이었기 때문에 상당히 신경 쓴 노래고, 아마 랩선생들이 붙어서 만들어줬을 랩의 톤과 플로우만 놓고 보자면 당시 1세대들과 비교하면 뒤떨어졌다고 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그러나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서 만들었을 저 랩들도 라임이 전혀 없기 때문에 느낌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98년에 저 정도 랩이면 상당한 힙합전사 수준이기도 하다. 약간 관련없는 얘기지만 사회비판적인 가사에서 당시의 전형적인 갱스터랩의 풍조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29] DJ DOC도 97년에 발매한 4집 앨범은 사실상 라임이라고 봐줄 만한 구석이 많지 않거나 특기할 만하지 않다. 타이틀곡이자 갱스터랩으로 밀었던 삐걱삐걱에 라임이 있기는 한데 어미에 요를 붙여서 존대말로 만들었을 뿐이다. 그 외의 곡에서는 라임이고 뭐고 신경쓰지 않은 노래가 대다수다. 그러나 2000년에 발매한 5집 앨범은 명백하게 라임에 신경썼다. 지누션의 경우 97년에 발매한 1집 가솔린은 라임이 없는 수준이지만 메세지만으로 완벽한 갱스터랩 말하자면 힙합 취급받았다. 후속곡인 말해줘는 라임이 있긴 하지만 삐걱삐걱처럼 어미를 어, 줘, 니, 고, 아, 을 등으로 통일한 매우 단순한 것에 불과했다. 98년 1tym의 1tym 또한 당시 힙합의 추세에 따라 뭔가 메세지적인 부분은 있었지만 라임은 사실상 테디의 간단한 영어라임뿐이었다. 대중가수의 이런 명백한 차이에 있어서 김진표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부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30] 아이러니한 점은 조금 세대 차이가 나면서 위상도 크고 비트메이커로 돌아서서 직접적인 경쟁자의 위치가 아니게 된 이현도에게는 엄청난 존경을 표시하면서 오버에서 수준 높은 사운드를 들려주던 김진표와 조PD 원타임 등에게는 비난을 퍼부었다는 점이다. 김진표는 그래도 무브먼트와 친근하고 대중음악계나 연예계에서 비중도 상당했기 때문에 좀 덜했지만.[31] 발매일도 그렇고 당장 라이브하러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나왔을 때도 역대급이라 평가받던 쇼미더머니 9가 진행중이었고 김진표 본인도 거기서 사회를 보고 있었다. 때문에 마지막화에서 스윙스에게 '이제 그만 도전하고 즐기기를 바랍니다.'라고 선배 플레이어로써 남기는 듯한 멘트도 했다.[32] 대표적으로 6집의 '이를 닦았나'를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33] 힙합 느낌이 나는 곡이 몇개 있다는 것은 본인도 인정하고 있지만.[34] 노바소닉 콘서트 등에서 그나마 목소리를 올리는 곡에서도 2옥타브가 넘어갈까 하며 심지어 탑기어 등에서 냈던 비명소리조차(...) 그렇게 높지 않다. 선천적으로 굉장히 음역대가 낮은 것으로 보인다.[35] 김우옥 교수가 신동엽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켰는데 때마침 커피 자판기가 고장났고 이에 장난기가 동한 신동엽이 다방커피를 주문하는 바람에 커피 배달을 온 아가씨가 강의 도중에 난입한 사건이다. 여담으로 8말 9초 학번들 사이에서 이런 장난을 친 선배가 있다는 전설은 거의 대부분의 대학에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편.[36] 2집의 '어느 새벽, 눈을 감을 때'도 연관이 있다는 추측이 있다.[37] 허클베리피, ZIZO, JJK 등의 래퍼가 청소년기에 이 JPHole을 통해 가사를 주고받는 등 활동을 시작하였다.[38] 지금이야 고릴라나 문자메시지 등을 이용한 라디오 진행 중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당연히 여기지만 당시엔 유일하게 PC통신(천리안)을 통해 청취자 참여가 이루어진 당시로선 획기적인 컨셉이었다. 백승애라는 목소리가 이쁜 보조진행자가 PC통신 화면을 보면서 청취자들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알려주었다.[39] 이 시기 tvN은 성인방송이나 다름없는 막장스러운 방송국이었다. 나영석 영입 이후 대박을 내며 묻힌 것.[40] 그래도 이 때 연예뉴스를 진행한 경험이 5집 제작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41] 당시엔 힙합문화가 한국에서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곡마다 웻~싸이! 하는 걸 유행처럼 따라하기도 했다.[42] 김진표가 합류할 당시에는 팀명이 GM대우 Mighty Blue였다. 이후 2011년에 변경.[43] 다만 스카이다이빙은 차량의 낙하산이 안 펴지는 중대한 문제로 한 번 실패했었다.[44] 2021시즌 종료 이후 기아로 이적[45] 더 정확히는 공룡 마스코드를 좋아해서[46] 옛날부터 본인이 말하던 것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