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9 23:44:49

대연정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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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1일 국민일보 만평. # 왼쪽은 노무현 전 대통령, 오른쪽은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다.

1. 개요2. 배경3. 반응
3.1. 한나라당3.2. 민주당3.3. 민주노동당3.4. 여론조사 및 노무현 지지층
4. 후폭풍과 결과5. 대연정 파동 이후

1. 개요

2005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제안한 열린우리당한나라당연립정부 구성안. 쉽게 말해 소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1명만 뽑는 선거제)에서 중·대선거구제(한 선거구에서 당선인이 2명 이상이 뽑히는 선거제)로 선거 제도가 바뀌는 걸 한나라당이 동의해 준다면 내각을 구성할 수 있는 국무총리를 포함한 장관 임명권을 한나라당에 넘기겠다는 제안이었다.

2. 배경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한 공식적인 이유는 지역주의 타파였는데 쉽게 말하자면 호남에서는 민주당 계열 후보들만 계속 당선되고 영남에서는 당시 한나라당 후보들만 계속 당선되는 지역주의 구도를 깨 버리자는 것이었다. 2010년대 들어 지역주의는 과거에 비해 상당히 붕괴되었다고 평가받지만[1] 여전히 지역주의 구도가 있는 편인데 2000년대 중반 무렵에는 구도가 말할 것도 없이 확고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연정을 통해 호남 입성을 고대하던 한나라당 후보가 2위로라도 호남에서 당선되면 호남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며 반대로 영남 입성을 원하는 민주당 계열 후보가 당선되면 당연히 영남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지역주의를 깨뜨리는 것을 평생 숙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본인부터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진 후 민주당 계열 후보들에겐 '반드시 죽는 곳'으로 변한 부산광역시에 출마를 꾸준히 했고[2] APEC 정상회담을 부산에 유치하는 등 약세 지역에 신경을 많이 썼으며 지역주의를 타파할 새로운 당을 만들기도 했고 더 나아가 이러한 노력의 최종 단계인 대연정까지 제안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총리와 장관 임명권 같은 내각을 만들 수 있는 권한을 넘기겠다고 했으나 나중에는 한나라당에서 이 선거구제 개편에 동의만 해 준다면 본인이 대통령직에서 내려올 수도 있다는 뜻을 숨기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역주의 타파는 그저 허울 좋은 명분일 뿐 실제 의도는 정치적 국면전환을 노린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만만치 않았다. 왜냐하면 정말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라면 국정운영에 힘이 실리던 임기 초반이나 그 전해였던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승리 직후에 해야지 왜 하필이면 임기 중반에 갑자기 그런 제안을 하냐는 것이었다. 즉,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하락과 삼성 X파일 사건, 행담도 사건, 러시아 유전 개발 비리 의혹 등으로 위기를 맞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국면전환용으로 대연정을 제시한 것 아니냐는 주장이었다. 당시 정치권 반응

3. 반응

3.1. 한나라당

이를 들은 유승민 전 당대표 비서실장은 장난하는 것이냐며 냉소적으로 반응하였다. #

3.2. 민주당

민주당 유종필 대변인은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에게 연정을 애원하는 대통령의 모습이 매우 초라하게 보인다”며 “만약 대통령의 말씀대로 열린우리당한나라당의 노선차가 그리 크지 않다면 차라리 합당을 제안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대연정 제안에 대해 "노 대통령의 2005년판 3당 합당 시도"라고 비난하면서 "만일 한나라당과의 연정이 성사된다면 과거 3당 합당 때처럼 호남(민주당)을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면서 "차라리 그럴바에는 열린우리당을 탈당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하라"고 말했다.#

3.3. 민주노동당

민주노동당 심상정 수석부대표는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포기하겠다는 선언”이라며 혹평했다. 심상정은 노 대통령이 정치개혁과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을 제안한 것에 대해 “한나라당과 차라리 합당할 것을 권고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연정 대상으로 거론한 한나라당은 지역주의 타파와 정치개혁을 할 능력과 자격을 못 갖췄다”면서 “지역주의 그 자체인 한나라당과는 지역주의 타파를 논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연정과 선거제도를 교환하겠다는 발상은 정치개혁의 대의에도 맞지 않고 실현 가능성도 없다고 비판했다.#

3.4. 여론조사 및 노무현 지지층

파일:attachment/대연정 파동/후폭풍.jpg

당시 국민 여론은 대다수가 반대 의견을 내비쳤다. 여당 지지층은 한나라당이 싫어서,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기 위해 대선에서 노무현을 지지했는데 그 노무현이 이런 폭탄발언을 던지니 난리가 났다. 정작 야당 지지층도 반대했는데 우리가 참여정부와 왜 손을 잡아야 하냐는 이유 때문이었다. 당시 참여정부의 낮은 지지도와 미약한 정치적 기반으로 봤을 때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정권교체의 가능성이 높다고 점쳐졌던 만큼 선거를 통해서 단독 집권하면 그만이라는 여론이 팽배했다. 이렇다 보니 대연정 제안으로 인한 후폭풍은 어마어마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 기반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본인도 폭탄은 저 쪽을 향해 던졌는데 오히려 우리편 등 뒤에서 터져 버렸다는 말로 대연정 파동의 후폭풍을 인정했을 정도였다.

가장 큰 타격은 호남 지역(특히 광주전남권)에서 지지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그나마 국민의 정부 불법 대북송금 사건, 2003년 새천년민주당 분당 사태 이후 호남이 열린우리당을 밀어주면서[3] 일시적으로 봉합되었으나 대연정 파동이 터지면서 전라남도 기반의 민주당(구 새천년민주당)과 친노 계열의 열린우리당의 갈등이 다시 표면화되었다.[4] 세월이 지난 후에도 호남 지역에서 특히 중장년층 위주로 친노에 반감을 가진 사람들이 꽤 존재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대연정 파동 때문이었을 정도로 당시엔 후폭풍이 엄청났다.

4. 후폭풍과 결과

사실 기존에 알려진 것처럼 대연정은 순전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머릿속에서만 나온 구상은 아니었고 유럽의 대연정동거정부를 연구하는 강원택 교수 등 한국 정치학자들의 연구물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조언을 구하면서 나온 산물이었다.[5] 하지만 대통령을 모시는 청와대 비서관들도 의도는 좋지만 현실 정치에서 실현하기 힘들어서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며 만류했을 만큼 반대가 안팎으로 심했다.

반대 이유는 우선 승자독식이 굳어진 대한민국의 현 정치 체제에서 과연 사람들이 이를 바꾸려 들지에 대한 의문이었다. 일례로 김대중,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15, 16대 대선의 경우 대통령으로 당선된 승자는 인사권, 예산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력한 자리만 6000여 개였던 반면 아쉽게[6] 패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는 동네 이장 1사람 임명할 권한도 없었다. 이기면 거의 모든 것이 바뀌는 구조인데 과연 이 구조의 변화가 제대로 이루어질지 비관적으로 봤던 것이다. 또 승자독식이 무조건 나쁘기만 한 건 아니라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반대한 것도 있었다. 게다가 국민적인 합의도 거의 없던 상황에 한나라당이 대연정을 받아들일 가능성도 만무했고 제안한 선거구 개편만으로 지역주의가 해소될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도 여당 지지층에선 한나라당에 어느 정도 권력을 이양한다는 내용에 반발이 심했다.

그래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소속 정당인 열린우리당에서도 이것을 반대했으며 심지어 당시 당의장이었던 문희상[7]도 반대하여 청와대에 갈 때마다 연정 제안을 철회해 줄 것을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요청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결국 대연정을 공개적으로 제안했고 이로 인해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간의 의견 대립 과정이 수면 위로 떠올라 세간에 알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8] 게다가 아직 여권 내의 당론과 실력을 갖춘 당직자, 측근들의 이론적 뒷받침이 부족했던 상황에서[9] 막후 조율을 거치지 않고 성급히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기 때문에 당시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는 대통령중심제 하에서는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인사를 하고 국정을 이끄는 것이 맞다며 기자회견을 통해 민생에나 신경쓰라는 말 한 마디로 대연정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참여정부에서 게리맨더링까지 해서 당선되게 도와준[10] 신중식 전 의원은 대연정 발언을 비판하면서 열린우리당을 탈당한 후 민주당에 입당했다.

당시 상황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의도대로 중대선거구제로 선거를 치렀을 때 열린우리당은 영남 지역에서 이변이 없는 한 무조건 2위를 확보할 수 있으나 호남에서의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심지어 민주노동당에조차도 밀려 기껏해야 10%의 지지율에 머물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열린우리당의 과반 및 최대의석 확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더구나 호남에서 한나라당은 마지막 옵션 혹은 그런 위치에도 미치지 못하는(...) 정당으로 당시 기준에선 열린우리당, 민주당, 진보정당, 무소속 등이 모든 파이를 갖고 간 뒤 남은 부스러기나 챙길 확률도 높았다. 즉, 자신들의 주 기반인 영남은 일부 떨어져 나갈 것이 확실한데 호남에서 얻을 것은 별로 없는 거래라고 보았던 것. 당연히 한나라당은 동의해 줄 리가 만무했고 당시 일부 한나라당 의원은 "미쳤다고 침몰 중인 타이타닉에 올라타겠냐?"는 말까지 하기에 이를 정도였다.[11]

그럼에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설득 작업에 6개월 이상 매달렸으며 여야 영수회담에서도 이를 집중적으로 주장했으나 돌아온 건 조롱과 비웃음뿐이었다. 여권 인사 중 대통령의 지낭으로 불린 유시민 전 의원이[1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취지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대연정 추진을 도왔지만 도리어 "연정은 지역주의에 기반해 정치를 하는 수구세력 즉 한나라당을 향한 햇볕정책"이라는 언론의 자극적인 선동기사 소재로 활용당했으며 비판을 받은 한나라당의 반발, 열린우리당 일부 의원들의 탈당 후 민주당 입당 등의 상황이 전개되면서 수고는 많으나 실익은 거의 없었던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당시 대연정을 찬성하던 측에서는 민주주의 정치 하는 유럽 국가들도 정당들끼리 연립정부 만들어서 국정 운영을 하는데 우리도 연정 못할 게 뭐가 있냐?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대연정 제안을 지지하는 의견을 내기도 했지만 반대하던 측에선 의원내각제/이원집정부제인 유럽 국가들과 대통령중심제인 한국을 비교하기에는 정치 체제와 국가의 배경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공화국인 유럽의 국가들[13]도 국회의 원내 정당등이 힘을 합쳐 연정을 구성, 운영하는 사례들이 있지만 이들 나라들은 공화정이긴 해도 한국처럼 대통령제가 아니라 의원내각제나 이원집정부제 국가들이어서 대통령제보다 권력이 느슨한 이들 정치 체제의 특성상 한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기 어렵기 때문에 여러 정당들이 연립 정부를 구성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게다가 대연정이나 소연정등 연립정부를 구성, 운영하다가 나중에 정당들 간의 이견이나 불화가 생기면 국회를 해산시켜 다시 총선을 한 뒤 새로이 내각 구조를 재편한다. 한마디로 의원내각제/이원집정부제 체제가 다수인 유럽 공화국들에서나 하는 것을 모든 정치적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 대통령제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이걸 한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현실성이 없었고 반발과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탈지역주의를 기치로 한 정당으로서 '지역주의 구도를 손에 쥐고 기득권을 석권한 한나라당'[14]에 대한 반대를 기초로 한 정치 개혁을 추구하고 있었으며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그런 성원을 등에 업고 대통령이 된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오히려 자신들이 지목한 '수구적 거악'과 손을 잡으면 정치를 잘 할 수 있다고 입장 선회를 했으니 지지층 내 배신감이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당시 여권 핵심 지지층 중 하나였던 일부 호남 지지층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전폭적인 지지로 집권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영남끼리 뭉쳐서 자기들을 홀대하는 것 아니냔 의구심을 느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참여정부, 열린우리당, 노무현 전 대통령이 지역주의 극복을 표면에 내세웠음에도 이를 의심하거나 더 나아가 신지역주의 구축이라고 비판하는 시각에는 이런 요소들이 있었던 것이다.[15]

5. 대연정 파동 이후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대연정의 기치를 높게 평가하는 이들도 생겼는데 2014년 당선된 새누리당 남경필경기도지사가 대표적으로 남경필 전 지사는 경기도에서 대놓고 연정을 표방하면서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 대연정의 기치를 잇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다만 남경필 전 지사는 2014년 인터뷰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임기 초부터 제의하셨다면 대한민국 정치가 완전히 바뀌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서 대연정을 제안한 시기가 상대적으로 임기 말이라[16] 진정성을 의심받게 된 점이 아쉬웠다고 밝히기도 했으며 이런 점을 들어 경기도 연정에 반대하던 야당을 설득했다고 한다.

그리고 노무현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대한민국 정치라는 기사가 나온 지 고작 이틀 후인 2016년 10월 24일 대연정과 개헌론에 대해 철저히 부정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던 박근혜 전 대통령이 예산안 시정연설차 방문한 국회에서 직접 분열과 갈등의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임기 내 개헌 완수를 목표로 개헌론을 꺼내들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개헌카드 전격 공식화 그러나 이 개헌론은 당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점점 정국을 빨아들이기 시작하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술책으로 던진 것 아니냔 의심과 함께 진정성을 의심 받으며 박근혜 정부 시기에는 완전히 사장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에서 벌어진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어떤 정당도 단독으로 국회 과반을 얻을 수 없어 대통령 선거 이후 연립 정부가 필수적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었는데 그 와중에 안희정충청남도지사참여정부 시절 못 다 이룬 대연정을 이루겠다며 다시 한 번 대연정론을 띄워 주목받기도 했다. 특히 남경필 전 지사와 연대해 행정수도 이전 등의 공약을 함께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에 지리멸렬한 보수층에서 갈 곳 없는 중도보수층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안희정 전 지사의 대권 지지율이 2월 들어 급상승하기도 했지만 논란도 만만찮았기 때문에[17] 적폐청산파에선 지금은 통합보단 청산이 우선이라고 안희정을 비판하고 반대로 우상호, 김종인 같은 인사들은 안희정을 옹호하는 등 또 한 번 당내갈등을 일으킬 여지가 생겼다. 다만 2017년 4월 문재인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승리하면서 대연정 관련한 논란은 일단 잠시 수면 아래로 내려갔다.

문재인 후보가 대선에서 승리하여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는 사실상 대연정 논란은 소멸했는데 자유한국당, 정의당, 바른미래당을 비롯한 야권과 더불어민주당 등 여당의 대립이 대선 전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수그러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야당과의 대연정은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더불어민주당에서 연정을 주장하던 안희정이 2018년 3월 성추문으로 인해 당에서 축출당하고 정치인으로서의 생명이 끝장나면서 대연정을 꺼낼 만한 인사도 대한민국 정계에 없는 게 현실이다. 대연정안을 꺼낸 노무현 전 대통령의 후배/동료이면서 친노 계파의 계승자인 문재인 전 대통령조차도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실장을 역임하면서 대연정 파동 등 노무현의 정치적 실패들을 보아 온 일 때문인지 노무현과는 달리 연정에 대해서는 사실상 거론조차 하지 않았다.[18] 일부 법안 처리 과정에서 국민의당이나 정의당의 협조를 받은 적은 있지만, 이것도 통상적인 여야 협력이었지 연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문재인의 뒤를 이은 윤석열 대통령조차도 민주당계 정당들과의 대연정을 거론하지 않았으며 이재명, 홍준표, 한동훈, 안철수 등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인들 및 차기 대선주자들도 여야 정당 간의 대연정 가능성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고 있다.

[1] 대표적으로 19,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출마해서 전라남도 순천시에서 당선된 이정현 전 의원이나 박근혜에 대한 향수가 강한 대구광역시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로 출마해서 당선된 김부겸 전 의원 등의 사례가 있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친박계가 독점하다시피 했던 대구광역시장에 비박계였던 권영진이 당선되기도 했으며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박정희-육영수 부부의 출신지이자 보수계 정당의 지지세가 강했던 경상북도 구미시와 충청북도 옥천군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장세용과 김재종이 각각 구미시장옥천군수로 당선되기까지 했다.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거제시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등 경상남도 동부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득표율이 높게 나왔다. 하지만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주의가 부활하고 정치적 극단화가 심해졌다는 결과가 나왔지만 예전에 비해서는 그 세가 약해졌으며 보수 정당인 국민의힘은 호남의 지지율이 대구광역시, 경상북도의 더불어민주당 지지율과 비슷해졌고 호남 20대 남성 한정으로 국민의힘의 지지율이 더불어민주당을 넘기는 등 이러한 지역구도는 서서히 붕괴되고 있다.[2]영상에서 보여지듯 당시 김대중의 민주당 출신 후보가 부산에 출마한다는 것은 정말 온갖 수모를 감내해야 하는 일이었다.[3] 물론 이것도 광주광역시, 전북특별자치도 지역 한정.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광주광역시와 전북특별자치도는 열린우리당이 독식했으나 전라남도 지역은 새천년민주당이 지역구 5석을 차지했다.[4] 실제로 이듬해인 2006년에 열린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광역자치단체장 중 민주당은 광주광역시장, 전라남도지사 2곳을 당선시켰지만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전북특별자치도지사 1곳만 당선시켰다.[5] 참여정부 출신 김병준 교수가 2017년 2월 동아일보 사설에 기고한 바에 따르면 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그저 대통령이 추진하니깐 야당이 반대한다는 식의 반대를 위한 반대 구도를 우려했는데 이런 대립적 구도의 잘못된 국가운영체계를 학자나 언론은 문제삼지 않는다며 수시로 고민했으며 그리고 그 고민 속에서 나온 결과물이 대연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후술되어 있듯 대연정은 이뤄지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나온 게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켜 여소야대를 방지하는 일명 원포인트 개헌이었는데 이것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6] 두 대통령 선거 모두 시 또는 군 단위 1 ~ 2곳만 뒤집혀도 당락이 바뀌는 선거였다.[7] 훗날 2017년에 문재인 정부의 대일본 외교 특사 및 제20대 국회의 후반기 국회의장이 된다.[8]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정분리(당청분리)를 정치적 명분으로 내세웠는데 그 일환으로 2004년에 청와대 정무수석직이 폐지되었지만 정무수석직이 폐지되면서 여당과 청와대 사이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다.[9] 예를 들어 과거 장면 전 총리의 대변인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내 의견대립이 심하면 철저한 이론적 준비를 하여 설득 작업에 나서 담장 안팎에서 "대변인" 역할을 한 바 있었다. 국민의 정부 시절에는 박지원 전 비서실장이, 이명박 정부 시절에는 임태희 전 비서실장이 이 역할을 주로 맡은 바가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최측근에 대한 설득조차 못 했다.[10] 멀쩡한 화순군·보성군 지역구를 쪼개 화순군은 나주시와, 보성군은 고흥군과 같이 붙였다.[11] 사실 이러한 반응이 당연했다. 대통령의 국정 지지율이 수 년 동안 50% 미만에서만 놀고 그나마도 계속 하락세였는데 왜 연정이라는 이름으로 국정 책임을 나눠 지려고 하겠는가. 임기 초도 아니고 대선이 17개월밖에 안 남은 상황에서...[12] 유시민이 훗날 방송과 저서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당시 열린우리당에는 한나라당과 절대 한 하늘 아래 같이 살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즉,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고 있었고 한나라당도 사사건건 여당에 태클을 걸며 으르렁거리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나온 게 협치를 기치로 내건 대연정론이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은 상황에 대연정이라는 구상이 제대로 진행될 리가 없었다.[13] 독일, 오스트리아,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불가리아, 체코, 그리스, 아일랜드, 프랑스 등.[14] 이것이 타당한 시각인가와는 별개로 아무튼 당시 열린우리당 지지층의 인식이 이러했다는 것.[15] 혁신도시 항목만 봐도 알겠지만 참여정부는 철저하게 영남 우선 정책을 폈다.[16] 정확히는 임기 중반 쯤이었고 당시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남경필도 반대했던 바 있다.[17] 특히 국민의당/바른정당까진 몰라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국민들로부터 국민밉상 청산의 대상으로 낙인찍힌 새누리당(후신 자유한국당)과도 연대할 수 있다는 발언이 큰 논란을 야기했다. 오죽하면 남경필 전 지사나 국민의당도 새누리당은 아니라며 안희정 지사를 비판하였다. 다만 안희정 전 지사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헌재 결정을 불복하는 듯한 태도를 보인 일부 강성 친박들과는 연대하지 않겠다고 선을 긋긴 했다.[18] 다만 대선 후보 시기에는 소연정 형식으로 야당의 일부 입각을 검토한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