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01-24 00:35:25

독일/학술


1. 개요2. 소개3. 분야
3.1. 기초과학3.2. 인문학3.3. 공학•기술

1. 개요

독일의 학술 전반을 다룬 문서

2. 소개

"20세기는 가히 독일의 세기가 될 수도 있었다"

- 노먼 캔터[1]

독일의 학술계는 근대 시대부터 내려오는 유서 깊은 학문사와 체계적인 학술 제도를 지닌것으로 유명하다. 유서 깊은 학문사로부터 유래된 독일 고유의 학풍과 체계적으로 조직되어온 독일의 학술 제도는 독일의 학술계가 인류 문명사에 크나큰 발자취를 남기도록한 원인이었다.

독일의 학술계는 분야를 막론하고 “대상의 근본적인 탐구“를 지향한다. 대상의 본질에 대한 여러 탐구 가운데 유독 기초적인 접근을 중시해왔고, 독일 학술계가 철저한 과학철학적 사조로 유명해지게 되는 영향을 불러왔다. 가장 상기할만한 것은 독일의 학풍은 지나차게 간단하지도 않고, 지나치게 복잡하지도 않다는 점이다. 게다가 너무 추상적이지도, 너무 응용적이지도 않다. 이렇게 균형이 잘잡힌 학풍은 독일의 학술계가 전세계적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는 결과를 불러왔다.

근대 시대동안 철저하고 꾸준하게 쌓아온 독일 학술계의 명성이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 엄청난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분산되어있던 국제 학술계 체제를 프랑스를 중심으로 표준을 정하기 시작했고, 독일이 방점을 찍었다. 20세기가 시작되고, 수권법이 통과되기 전까지 수십년동안 전세계의 학술계를 아예 선도한 최전성기를 지냈다.[2]

1930년대 수권법이 통과되고 나치의 폭정으로 학술계가 탄압당하면서 기존의 명성을 영국과 미국에게 양도하게 되었고, 1940년대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잠시 쇠락했지만, 독일의 체계적인 체계와 균형잡힌 학풍, 몇백년의 세월동안 축적한 지식과 기술은 독일을 순식간에 회복시켰으며, 현대 독일의 중요한 사회적 기반중 하나이다.

이 문서는 독일의 학술 전반을 다룬 문서로, 분야별로 독일의 학술계 특징과 기록, 역사를 담고 있다.

3. 분야

3.1. 기초과학

19세기 중후반부터 2차 세계대전 발발 이전까지, 독일의 기초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유럽 학술계에서 대체적으로 채택되는 언어가 영어가 아니라 독일어였을 정도다.[3]

독일/오스트리아/스위스 출신 학자들이 이시기에 노벨상을 휩쓸었다. 영어권 대표주자 영국[4]과 미국은 그에 미치지 못했다.

1930년대 유대인 탄압으로 많은 유능한 과학자들이 이동하고, 전후 페이퍼클립 작전을 비롯하여 독일 과학자들을 섭렵하는데 미국, 소련[5], 영국등이 공작을 벌였지만,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오토 딜스, 다비트 힐베르트를 비롯하여 유능한 기초과학자들은 많이 남아있었다.

근대 시기부터 1933년까지 활약한 독일계 기초과학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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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리학: 게오르크 시몬 옴, 헤르만 폰 헬름홀츠, 루돌프 클라우지우스, 에른스트 마흐, 카를 페르디난트 브라운, 하인리히 헤르츠, 빌헬름 뢴트겐, 막스 플랑크, 막스 보른, 필리프 레나르트, 빌헬름 빈, 요하네스 슈타르크, 구스타프 헤르츠, 리제 마이트너, 알베르트 아인슈타인[6], 막스 폰 라우에, 제임스 프랑크, 발터 마이스너, 에르빈 슈뢰딩거[7],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현재 전 세계에서 미국영국 다음으로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 국가가 독일이다.[9] 노벨상을 제외하더라도 과학기술 전 분야에서의 명성이 높다. 전반적으로 공학/과학/기술분야에서 영국과 더불어 유럽 내 선두를 달리고 있지만, 특히 물리학, 화학, 재료과학의 특정 학계는 고유한 사조를 가지고 있다. 최근의 화두인 인공지능 분야에서도 영국과 더불어 유럽 내 선두권의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다. 독일의 연구기관중 막스플랑크 과학연구소가 스탠포드대와 더불어 노벨과학상 수상자 수 2위 기관이고, 바이온테크는 미국 화이자/모더나와 함께 최첨단 과학기술인 mRNA 백신 개발의 선두주자이다.

3.2. 인문학

1848년부터 1933년까지 활동한 학자들은 다음과 같다.

[ 인물 명단 펼치기 · 접기 ]
* 정신분석학: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오토 랑크, 빌헬름 분트, 헤르만 로르샤흐, 에밀 크레펠린, 빌헬름 라이히, 카렌 호니, 멜라니 클라인, 에른스트 크레치머, 게자 로하임, 야코프 브로이어,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
  • 역사학: 레오폴트 폰 랑케, 요한 구스타프 드로이젠, 게오르크 바이츠, 빌헬름 폰 기제브레히트, 하인리히 폰 지벨, 테오도어 몸젠, 야코프 부르크하르트,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 한스 델브뤼크, 루트비히 폰 파스토어, 율리우스 벨로흐, 에두아르트 마이어, 카를 람프레히트, 오토 힌체, 프리드리히 마이네케, 게르하르트 리터, 프란츠 슈나벨, 에른스트 칸토로비츠, 오토 브루너
  • 법학정치학: 프리드리히 카를 폰 사비니, 로렌츠 폰 슈타인, 베른하르트 빈트샤이트, 루돌프 폰 예링, 파울 라반트, 오토 폰 기르케, 게오르크 옐리네크[11], 구스타프 라트브루흐, 한스 켈젠, 카를 슈미트, 헤르만 헬러, 카를 뢰벤슈타인, 에른스트 프랭켈, 오토 키르히하이머
  • 고고학과 성서학: D. F. 슈트라우스, 하인리히 슐리만, 에른스트 쿠르티우스, 페터 호르흐하머, 게오르크 그로테펜트, 카를 리하르트 레프시우스, 브루노 마이스너.

3.3. 공학•기술

독일의 기술력은 세계 제이이일이라는 밈이 있는 것처럼, 독일의 공학도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한다. 세계 최초의 자동차, 전기열차, 양산 제트 전투기, 탄도미사일은 독일에서 제작되었다. 전후 페이퍼클립 작전을 비롯하여 미국, 소련, 영국등이 나치 신무기 개발의 핵심적인 공학자를 많이 영입했지만, 전후 몇십년뒤에 제작되고 양산 직전 단계까지 이른 MBB 람피리데를 보면 제도적인 기반이 매우 튼튼함을 보여준다.

19세기 중엽부터 1933년까지 활동한 유명공학자들과 기업은 다음과 같다.

[ 인물 • 기업 명단 펼치기 · 접기 ]
*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 베르너 폰 지멘스, 페르디난트 폰 체펠린, 고트리프 다임러, 카를 벤츠, 카를 폰 린데, 오토 릴리엔탈, 루돌프 디젤, 로베르트 보슈, 페르디난트 포르쉐


[1] 베를린에서 열린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오토 한, 리제 마이트너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 참석한 프랑스 철학자 레몽 아롱도 이 세 사람이 모두 1878~1879년에 태어난 것에 주목하여 독일계 미국인 역사학자 프리츠 스턴에게 유사한 발언을 한 바 있다.[2] 1933년 아돌프 히틀러라는 재앙이 닥치지만 않았더라면 이 시기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던 독일의 사상가, 예술가, 작가, 철학자, 과학자들이 힘을 합쳐 갓 통일되었던 조국을 누구도 꿈꿔보지 못한 새로운 나라로 만들 수도 있었다는 평가도 사학자들 사이에서 있었을 정도였다.[3] 정확히는 독어, 불어, 영어 고루 쓰였으며, 그 중 가장 비중이 컸던 언어가 독일어였다.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서구의 화학 원소기호나 용어들이 독일어라던지 등등 https://www.hani.co.kr/arti/culture/book/1109620.html[4] 영국은 그나마 독일 다음가는 과학강국이였지만(러더퍼드, 톰슨 부자, 1932 채드윅, 디랙, 브래그 부자, 리처드슨, 윌슨, 패트릭 블래킷, 알렉산더 플래밍, 프랭크 휘틀, 앨런 튜링, 프레더릭 소디 등. ) 그 외 경제학의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철학/수학의 버트런드 러셀, 화이트헤드 등도 있다.[5] 특히 소련의 경우에는 30년대 아인슈타인, 폰노이만 등을 위시한 유능한 과학자들이 절대다수는 영국, 미국으로 건너갔기에(프랑스나 스위스로 간 사람도 적은 판인데 소련은 없다.)더더욱 관심을 두었고 이는 이후 로켓, 핵물리학, 화학기술, 공학, 항공기술 등에 큰 도움이 되었다.[6] 1896년에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스위스에서 대학을 다니다 1901년에 스위스 국적을 얻었다. 1914년에 다시 독일 국적을 얻었고 1933년에 독일 국적을 포기하고 1940년에 미국 국적을 얻어서 1955년에 사망할 때까지 스위스와 미국 국적을 유지한다.[7] 독일에서 연구를 했지만 오스트리아 사람이다.[8] 기상학보다 대륙이동설로 더 유명하다.[9] 1위 미국과는 격차가 좀 크지만, 4등인 프랑스와는 차이가 2배 이상 크게 난다.# 영국과 2등 자리를 두고 거의 박빙이다. 표면상으로는 영국이 미세하게 앞서고는 있지만, 이는 꾸준히 엎치락 뒤치락 해 왔으며, 복수국적 등에 의해 집게방식에 따라 다르고 , 영어권 국가들 사이 학술교류와 학계이동이 활발하다는 점과 사실상 미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미국에서 키워낸&개발해낸 국적만 영국이 껴있는 사실상 미국학자(예시: 데이비드 맥밀런 등)인 사람들을 빼면 두 나라는 전반적으로 비슷한 수준인 편. 이공계 고급인력 양성수 역시 대등하게 두 나라가 유럽내 최선두를 달리고있다.#/# 여기서도 프랑스는 두 나라의 절반 수준이다. 인구가 서로 비슷한 나라들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독일과 영국이 과학분야에서 강하고 잘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 미술, 수학 등에선 프랑스가 두각을 보이기도 한다. 독일대학이 영국대학에 비해 세계 랭킹의 대학이 없다는 지적도 있는데, 이는 독일대학이 영국대학과는 달리 서열평준화되어있어서 판별기준이 달라서이지 수준이 떨어진다고 보기는 당연히 어렵다.[10] 헝가리인이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 시절 출생해 독일에서 공부한데다 학술 활동도 독일어로 했기에 독일 철학에 포함한다.[11] 헌법학에서 법실증주의의 대표주자로, 다임러 모터 코퍼레이션의 딜러였던 에밀 옐리네크의 맏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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