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봉남교(奉南敎)는 1937년 김봉남(金奉南)이 창시한 종교이다. 물법교(물法敎) 혹은 찬물교라고도 한다.1.1. 역사
1.1.1. 김봉남의 출생과 구도
| 김봉남의 영정 |
8세 때부터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그러다 14세 때 위장병에 걸려 한약과 침구의 치료를 받았으나 효과가 없었다. 또 귀신 들린 병이라 하여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았지만, 역시 효력은 없었고 가산만 탕진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김봉남은 학업을 중단해야 했으며, 몸이 점점 쇠약해져가자 자신의 삶을 비관하여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김봉남은 이후에도 병을 치료하기 위해 여러 종교단체의 주술적 치료를 받았고, 자연스레 도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 이때 당시에는 여러 신흥종교들이 난립하여 주술적 방법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했고, 이에 입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김봉남도 16세 때에 형인 김영선(金永善)을 따라 보천교에 들어가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김봉남의 원래 목적은 병의 치료였으나 수도 과정에서 접신이 되는 등의 종교적 체험을 하고는 깨달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김봉남은 18세 때에 집을 떠나 해녀들을 따라서 부산으로 가려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갑자기 배에 고장이 났다. 그래서 그 원인을 살펴보니 기계가 고장난 것이 아니라 기계에 먼지가 많이 끼어 있었기 때문이었고, 먼지를 쓸어내니 배가 정상적으로 운행되었다. 이때 김봉남은 사람의 병도 마음의 먼지, 즉 오염을 없애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수도 생활에 더욱 열중했다. 해녀들을 따라 부산으로 간 김봉남은 뱃사공이 되어 살아가다 23세 때에 제주도 출신의 해녀인 문씨와 만나 결혼하였다. 또 김봉남은 30세 때에 오대산에 갔다가 한 도사을 만나 그 밑에서 주문을 외우며 수행을 한 결과 칠성신의 계시를 통해 환자를 치료하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2]
김봉남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도 생활을 했는데 그 중에서 중요한 변환점이 된 것은 김봉남이 34세 때에 황보흠(皇甫欽)이라는 도인을 찾아간 것이다. 황보흠은 손치성(孫致成)이 세운 무량대도회(無量大道會)[3]의 신자이자 손치성의 팔대제자 중 하나였다. 황보흠을 찾아간 김봉남은 불단 앞에 놓인 물 한 그릇을 마시고 아미타불을 외웠는데 10분 만에 합장한 손이 떨리고 전신에 동요가 일어나며, 자신도 모르게 토설(吐說)[4]이 나왔다고 한다. 이에 매력을 느낀 김봉남은 무량대도회의 신자가 되었고,[5] 황보흠의 지도를 받으며 본격적으로 수행을 시작하였다. 김봉남은 황보흠의 제자들 중 수련에 가장 열중했다고 하며, 봉남[6]이라는 호도 이때 황보흠에게 받은 것이다. 또 김봉남은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황보흠의 수도장에서도 지도적인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수도장은 해산되었고, 황보흠과 다른 제자들도 수도 공부를 포기하게 되었다. 하지만 김봉남만은 자택에서는 물론이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도 생활을 계속했다.
1.1.2. 김봉남의 도각과 포교
김봉남은 세 단계의 깨달음을 얻으면서 교단을 형성하게 된다. 이는 김봉남이 오랜 시간 수도 생활을 하면서 도력이 성장하는 과정을 단계적으로 구분한 것이다. 이 세 단계의 깨달음을 나누어 초통(初通), 재통(再通), 삼통(三通)이라고 부른다.초통은 김봉남의 백일 기도 수련이 끝난 1937년 1월 15일 기장의 연화산에서 이루어졌다. 수 년간 전국을 돌아다니며 수도를 하던 김봉남은 동래군 기장면에 위치한 연화산에서 두 차례의 백일 기도를 하였다. 그런데 백일 기도를 마치자 하늘로부터 물법(물法)[7]을 받고, 뱃속에서 핏덩이가 토해져 나왔다. 이때부터 김봉남의 병의 완치되었으며, 영적인 능력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사실 김봉남에게는 이미 환자들과, 황보흠을 따라다니던 수도자들이 찾아왔다. 때문에 어떻게 보면 초통 전부터 김봉남의 교단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초통 이후 김봉남에 대한 소문이 퍼지며 사람들이 더욱 모여들었기 때문에 초통이 곧 봉남교가 형성되는 시초라고 볼 수 있다.[8] 처음에 신도들은 김봉남의 자택[9]에 모였으나 이후에는 인근 죽도에 있는 죽도사(竹島寺)에 도장을 두고 모였다.[10] 이때 김봉남은 무량대도회의 가르침과 자기 나름대로의 치료법, 주송 수행을 혼합하여 신도들을 지도했다. 신도들은 부처에게 물을 올리고 염불이나 주문을 외웠는데[11] 김봉남이 행한 염불은 순수한 불교의 염불은 아니었다. 하지만 죽도사에서의 활동은 일제의 종교 탄압을 피하고, 봉남교의 교리에 불교의 교리가 융합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김봉남은 자신이 북방 일육수(北方 一六水)의 기운[12]을 타고 태어났다고 하여 환자들은 김봉남이 주는 물을 김봉남의 도력이 깃든 약수라고 믿게 되었다. 또한 김봉남이 병을 낫게 한다는 소문이 퍼지며 50여 명의 신도가 모여들었고,[13] 그 중에는 김봉남의 고향인 제주도 사람이 많았다.
재통은 김봉남의 부인인 문씨[14]의 소상[15]을 지내는 날인 1943년 11월 15일에 이루어졌다. 이때 문씨부인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제자들 앞에서 김봉남은 접신이 되어 앉은 채로 2~3척[16]을 뛰어오르며 토설을 했다. 그때 김봉남은 문씨부인의 영혼과 만나 대화를 주고 받았고, 그 과정에서 다시 한 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김봉남은 재통을 통해 유불도 삼교의 원리와 중생의 고통[衆生三苦][17]에서 해탈하는 심수법(心水法)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한다. 심수법은 마음의 오염을 씻어내야만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며, 심수법의 원리를 깨달은 김봉남은 물법의 원리를 비로소 바르게 깨달았다고 한다.[18] 재통을 얻은 김봉남은 물 한 그릇으로 병을 고치는 등 기적을 부리는 수법선사(水法仙師), 생불이라 불렸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신도가 더욱 늘어났다.
봉남교의 교세가 갈수록 커지게 되자 일제는 사도난민(邪道亂民)[19]이라는 혐의로 김봉남을 체포하여 고문을 가했으며, 이 때문에 교세도 크게 위축되었다. 나중에 결국 석방되기는 했지만 포교 활동은 중단되었고, 교단도 해체되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던 종교 단체들은 다시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김봉남도 박씨부인[20]과 재혼하고 도장을 기장에서 부산 영도로 옮겼다. 영도에 도장을 두게 된 것은 영도에 고향이 제주도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21] 전에 기장에서 모이던 신도들이 찾아오고, 처음에는 병을 고치러 왔던 사람도 병을 고친 후에는 대부분 신도가 되었기 때문에 수백 명의 신도들이 생겼다.[22]
1946년 3월 15일 김봉남은 천일 수련을 마치고 그 밑에서 같이 수련한 제자들 몇 사람에게만 물법을 전수했다. 이 의식을 물법교화(물法敎化)[23]라고 하며, 매년 3월 15일을 물법교화일(물法敎化日)로 기념한다. 물법교화는 김봉남만이 할 수 있던 능력을 제자들에게 전수해 제자들이 직접 물법 치료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물법교화는 제자들 중에서도 수행을 많이 한 수제자에게만 전수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도맥(道脈)을 전수한 것과 다름이 없었다. 물법교화는 제자들이 봉남교를 널리 포교하게 하며 교세를 키우게 했다. 하지만 물법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포교와 동시의 자신의 교단을 세우기도 했기 때문에 김봉남의 사망 이후 봉남교가 여러 교단으로 분열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47년 10월 15일 김봉남은 제자들을 데리고 전라북도 정읍에 있는 용화사(龍華寺)에 수도 공부를 갔다. 그때 병을 치료받기 위해 모인 환자들에게 15일 동안 물법 치료와 함께 단식법을 하게 했다. 단식법은 일정한 기간 동안 밥을 먹지 않고 물만 먹으면서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다.[24] 이날 단식법을 처음 사용했기 때문에 매년 10월 15일을 전법일(傳法日)로 기념한다.
삼통은 1948년 경상북도 상주 성지산에서 백일 기도를 마친 후이다. 삼통을 얻기 전인 1947년, 김봉남은 용화사에서 기도를 하다가 우연히 이도화[25]와 전용태[26], 정영조를 만나게 되었다. 이들은 김봉남과 마찬가지로 수도 생활을 하며,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었다. 이때 이들과 대화를 나눴던 것이 인연이 되어 이들을 따라 수도 공부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경상북도 문경 청화산에서 수도를 하다가 1948년 상주 성지산에서 백일기도를 마친 후 마지막 깨달음을 얻었다. 이때에 김봉남은 팔팔정국십육계(八八井局十六界)의 대행대덕(大行大德)과 대명대덕(大明大德)을 보고, 심수법의 근원인 영해영국(靈海靈局)을 관통하는 눈이 열렸다고 한다. 영해영국은 곧 물법의 원리로서, 삼교의 진리가 모두 영해영국에 귀일된다고 한다. 또한 이 영해영국에 도달하는 방법이 도교에 있다고 보고, 이때부터 신도들에게 태상노군[27]을 외우게 했다. 또한 태화주(太和呪)라는 주문과 법방(法榜)[28]을 전수했다.
김봉남은 삼통 이후 경상남도 김해를 중심으로[29] 부산, 대구, 밀양, 거창, 청도 등지에서 많은 신도를 얻어 1~2년 동안 수천 명의 신도들을 확보했다. 그러면서도 김봉남은 제자들과의 수행에 전념했으며 황보흠, 전용태[30]와도 배움을 이어갔다.
1.1.3. 김봉남의 죽음과 분열
1950년 김봉남은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카더라에 의하면 병에 걸린 이유는 여신도와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김봉남은 죽기 3일 전,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제자들을 불러 자신이 곧 죽을 것을 예언했다. 그리고는 제관을 정하고 제상에 물 세 그릇과 밥 여덟 그릇을 올려 스승이 살아날 것을 빌게 했다. 이후 제자들에게 "보라. 비는 것으로 살아날 수는 없다. 비는 것은 모두 욕심이다. 이 뒤에 너희들은 일체 기도 형식을 취하지 말라."라고 가르침을 내렸다. 김봉남은 마지막으로 "봄날 하루 아침에 세상에 나온 풀이 여름날 저물게 다 자란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1950년 4월 8일 향년 53세의 나이로 병석에 누운 지 20여 일만에 경상남도 김해군 가락면 대사리[31]에서 세상을 떠났다.김봉남이 사망하자 그의 제자들이 모여 김봉남을 추모하고 교단 조직을 갖추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김해 대동면 수안리에 제각(祭閣)[32]을 마련하고,[33] 부산 아미동에 있는 강기춘[34]의 자택에 교단 본부를 두었다. 그런데 강기춘은 봉남교가 사회적으로 공인받기 위해서는 교단을 불교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법단 가운데에 미륵불을 모시고, 그 옆에 김봉남의 영정을 모셨다. 또한 용화사(龍華寺)라는 간판을 내걸고, 봉남교 신자도 아니었던 임화산(林華山)이라는 승려를 주지로 정했다.[35] 그러나 제자들은 봉남교의 교리를 불교적으로 해석한다며 반발하여 내분이 발생했다. 또한 김봉남이 후계자를 정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제자들은 각자 교단을 세우며 봉남교는 분열하게 되었다.
1.2. 교리
봉남교의 기본 교리는 물법[36]이다. 물법은 물로써 심신의 병을 치료할 수 있고, 도통(道通), 즉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봉남교에서는 종지로 '거병입리'(祛病入理)를 내세우는데 이 또한 '병을 떨치고, 이치를 깨닫는 경지에 들어간다'는 뜻이다.봉남교의 교리에 따르면 물은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된다. 또한 이러한 성질을 가진 물로써 자연의 이치와 바른 도덕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봉남교에서는 물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깨달음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는 깨끗하고 맑은 물의 기운, 즉 수기(水氣)가 있는데 이것이 부족하거나 마음에 오염, 즉 죄악, 번뇌가 생기면 병이 생긴다고 한다. 이것이 봉남교에서 말하는 병의 원인으로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수기를 보충하고 마음의 오염을 제거해야 한다. 수기를 보충하는 방법은 외부에서 주입하거나 내부에서 생수(生水)하는 방법이 있다. 외부 주입은 찬물을 마시는 것으로 봉남교에서 신도들에게 찬물을 마시게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부 생수는 마음에서 맑고 깨끗한 물의 기운인 수기가 저절로 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을 심전작정(心田作井)이라고 한다. 심전작정은 마음의 밭에 우물을 만들어 그로부터 물이 나게 한다는 뜻이다. 심전작정의 방법은 마음을 바르고 깨끗하게 하는 것이며, 이 심전작정을 봉남교에서 수련의 극치로 삼는다.
봉남교의 교리에는 삼교의 교리가 포함되어 있다. 윤리 규범으로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인의도덕(仁義道德)을 강조하는 것은 유교적인 것이며, 참회와 심성을 강조하는 것은 불교적인 것이고, 주문을 암송하고 물을 마심으로써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것은 도교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물법 치료는 단순히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삼교의 진리가 합일되어 있는 것이라고 한다.
주문으로는 심전작정주(心田作井呪)가 있다.
1.3. 물법계 종교
'물법계 종교'는 봉남교에서 비롯된 종교들을 부르는 말로 봉남계, 찬물교계라고도 한다. 기존에는 주로 봉남계라고 불렸지만 김봉남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교단도 있다는 점에서 물법계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는 주장이 있다.물법계 종교에는 성덕도, 삼법수도교화원, 천지대안도, 계운대안교, 대한도교, 도교, 봉남사, 봉남성사교리연구원, 봉남성사교리연구원본원, 삼법수도교화원(박명현), 삼천도,[37] 용화사, 용화삼덕도, 자아도, 적선도, 천지대안교(강사만), 천지대안교(조영자), 청강사, 타불교, 태화교 등 20여 개의 교단이 있다. 이외에도 봉남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손치성이 창시한 무량대도회나 수신을 신앙하는 창해수교를 물법계로 보기도 한다. 또한 봉남교에서 분파되었지만 물법을 교리로 하지 않는 단군성조수도원, 산신교 등의 교단도 있다. 하지만 물법계 종교 중에서 상당한 교세를 확보하고 있는 교단은 '성덕도', '삼법수도교화원', '천지대안도'뿐이다. 나머지 교단들은 교세가 매우 미약하고, 거의 활동하지 않는 상태이다.
봉남교의 분열에서 주목되는 것이 김봉남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 교단을 형성할 때 김봉남의 가르침을 부정하고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동학, 증산교 등 다른 신종교들이 분열될 때에도 교리를 제멋대로 바꾸거나 하는 경우는 있어도 자기의 스승을 부정하고 감추는 경우는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물법계는 교리, 경전이 통일되어 있지 않으며, 물법이 아니라 무속 신앙을 교리의 중심으로 하기도 한다. 천지대안도는 김봉남을 비판하며 의도적으로 부정하고, 대한도교는 아예 김봉남을 알지도 못한다. 성덕도는 김봉남을 자기 교단의 창시자인 김옥재가 성인이며, 도주가 될 것임을 알려준 선지자라고 본다. 이 밖에도 도교, 삼천도, 자아도, 적선도 등은 김봉남의 영향을 부정하거나 강조하지 않는 교단들이다.
봉남교의 교리에는 유교, 불교, 도교의 사상이 혼합되어 있다. 하지만 교단마다 더 강조하는 것이 다르다. 성덕도와 자아도는 유교, 봉남사와 용화삼덕도는 불교, 삼법수도교화원과 대한도교는 도교의 사상을 더 강조하는 교단이다. 또한 태화교는 무속적인 내용까지 포함하고 있으며, 태화교에서 분파된 삼천도는 아예 무속 신앙을 교리의 중심으로 한다.
또한 물법계에는 몸과 마음을 닦는 수련으로 병을 치료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자력 신앙'을 하는 교단과, 신의 권능으로 병을 치료하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타력 신앙'을 하는 교단이 있다. 자력 신앙을 하는 교단은 성덕도, 자아도, 태화교 등이 있으며, 그 외의 교단은 대부분 부처, 태상노군, 교주 등에 의지하는 타력 신앙을 한다.
물법계 종교들은 과거 부산과 제주도 지역에 밀집하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전국 각지로 넓게 퍼져 나갔고, 신도 수는 약 20여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1.3.1. 성덕도(聖德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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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성덕도#s-|]]번 문단을#!if 문단 == null & 앵커 != null
의 [[성덕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1.3.2. 삼법수도교화원(三法修道敎化院)
'삼법수도교화원'은 1960년 배무생(裵戊生, 1898~1961)이 창시한 종교이다. 배무생은 1898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나 처음에는 보천교를 믿었다. 그러다가 종교 교내 내부 구성원 갈등 등으로 인해 1941년 탈퇴 이후 경남 김해 지역의 농촌 야학당(農村 夜學堂)의 독농 독려 훈장(讀農 督勵 訓長)으로 있다가 1942년에 갑자기 질병에 걸리면서 김봉남을 만나 교류한지 불과 사흘 만에 병을 치료하고 나서, 결국 김봉남의 제자가 되었고, 1945년 광복 이후 김봉남의 제주도 지역 순회와 원래 제주도 북제주군에 있던 봉남교 본부 경남 부산 이전에도 모두 동참했으며, 김봉남과 서로 첫 교류 및 조우한지 어언 8년 후 창도주 김봉남 교조가 질병으로 사망하자, 김봉남의 사당 설립 운동과 경남 부산 소재 봉남교 본부의 경남 김해군 지역 재차 이전 촉구 등을 주장하다가 실패하였다.이후 같은 김봉남의 제자였던 김옥재(金沃載, 1909~1960)와 함께 1951년 경남 김해군에 봉남교 제각을 설립하여 향사 관리를 담당하였다. 그런데 김옥재가 1960년에 질병으로 인해 향년 52세로 갑자기 사망하자 김옥재의 아우 김윤재(金允載, 1914~1990)가 이미 1952년에서부터 성덕도(聖德道敎)라는 종파를 내세우고 나서 제각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고, 이에 당시 제각의 관리를 맡고 있던 배무생의 아들 배태수(裵泰秀, 1923~2006)가 반대하였지만, 결국 소송 재판 결과 패소하고 말았다.
이후 제각에 모셨던 김봉남의 영정을 봉남교 수석 신도 박봉규(朴鳳奎, 1899~1978)의 집으로 이안하고 이 곳을 본거지로 포교 활동을 시작하면서 교명을 유불선삼법대도(儒佛仙三法大道) 혹은 삼법원(三法院)이라 하였다. 교세가 점차 확장되던 중 1961년 배무생은 세상을 떠나자 배무생의 처(妻)인 오금순(吳今順, 1903~1995)과 배태수(裵泰秀, 1923~2006)가 종단의 봉직으로써 교단 운영을 맡아 삼법수도교화원이라는 명칭으로 교명을 바꾸었고, 오금순 삼법수도교화원 제2대 종도주(宗道主) 봉직 당시에 종통 종파의 개편을 단행하였으며, 1989년경을 기점으로써 경상남도 김해시 불암동에 교당을 신축하고 이전하였다. 이후 1994년 11월 10일경에 오금순이 어언 33년간의 제2대 삼법수도교화원 종도주를 은퇴하고, 이후부터 아들 배태수가 어언 8년간의 제3대 삼법수도교화원 종도주를 지내다가 2002년 8월 13일경에 은퇴했다.
현재 전국 24개 지부에 약 5천여명의 신도를 갖고 있으며, 2002년 8월 13일경 이후부터 현재 대표는 삼법수도교화원 제4·5대[38] 연임 종도주 양외환(梁外煥)이다. 신앙의 대상은 태상노군(太上老君)과 미륵불(彌勒佛), 그리고 창도주 김봉남(創道主 金奉南)이다. 사상은 삼법(儒·佛·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주로 주송 수련(呪誦 修鍊)으로 치병과 도통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수련 방법은 자기의 성명을 정면 벽에 부착하고 그 앞에 정좌하여 눈을 감은 채 태상노군과 아미타불을 외운다. 독송을 계속하면서 때때로 찬물을 마신다. 연중 여섯 차례의 정례 치성을 드리며, 매년 7주간의 단식 수련과 7주간의 식반 수련이 있다. ≪정경 正經≫·≪삼법수도진리 三法修道眞理≫ 등의 경전이 있다.
1.3.3. 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
'천지대안교(天地大安敎)'는 1952년 부경순(夫敬順, 1900~1965)이 창시한 종교이다. 해월선(海月仙) 부경순(夫敬順)은 1900년 전라남도 제주군에서 태어났다. 부경순은 한때 남편을 따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에서 살다가 1945년에 광복을 맞아 귀국하던 도중 대마도(對馬島)의 간첩(해적)들을 만나 남편과 자식들은 살해당하고 남은 두 자식(막내딸, 막내아들)과 함께 경남 부산에 도착하였다. 결국 이 충격으로 인해 정신 이상이 생겼으며 막내 아들은 중병에 걸렸다. 그러던 중 창도주 김봉남을 만나 1947년에 부경순 모자는 앓던 병을 모두 완치하고 나서 부경순, 막내딸, 막내아들 이 셋은 모두 김봉남의 제자가 되었다.부경순은 열심히 봉남교를 포교하는 한편, 스스로 주문을 외는 수련을 계속하여 환각을 자주 보거나 무당과 같이 강신 상태에서 토설(吐說)을 하는 경우가 있어 김봉남의 주의 당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신도들 사이에서 상당한 인정과 추앙을 받게 되고, 또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러다 김봉남이 질병으로 인해 1950년 사망하자 1952년 천지대안교를 창교하였다.
그런데 부경순은 오히려 김봉남의 도(道)는 선천 시대의 운도라 불로 다스려야 하는 운세였는데 버젓이 물법(勿法)을 썼다고 비판하면서, 봉남교 주요 간부급 중진들 전체와의 연을 끊었다. 그리고 물의 운도를 따르는 여성 중심의 후천세계(後天世界)를 주장한다. 이에 천지대안교 신자들은 거의 다 여성이다. 이후 부경순은 충남 계룡산 신도안으로 옮겨 가서 "차라리 계룡산이야말로 한반도 강산 팔도(韓半島 江山 八道)를 넘어선 세계(世界)의 중심(中心)이며, 만대 후손에게 감로의 혜택을 받는, 이른바 후손 만대 휴식의 평화(平和)가 더더욱더 광범위적(廣範圍的)인 새 천지대안교 여성 정부(政府)를 세울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1965년 부경순이 사망하자 김태순(金泰順, 1911~1996)이 교(敎)를 이끌었다. 전국에 24개의 교당을 갖고 있으며, 일본 오사카에도 2개의 교당이 있다. 한때는 신도가 3,000여 명에 달했으나, 현재는 약 500여 명 정도이다. 신도들은 대개 제주도에 많으며 충청 지역에 소수의 신도들이 있다. 김태순(金泰順)은 1986년경에 어언 21년간의 종도주(宗道主)를 은퇴했다.
신앙의 대상은 해월선(부경순)으로 해월선은 옥황상제(玉皇上帝)이며 미륵세존(彌勒世尊)으로서 용왕신(龍王神)으로도 받들어진다. 여기서는 찬물만 먹고 단식하며, 축문, 기도문을 외우면 병도 낫고 정신 수련도 된다고 가르친다. 주문을 계속 외우면 강신이 되어 몸이 흔들리고 귀신을 볼 수도 있게 되며 토설이 나오고 계시도 받게 된다고 가르친다. 경전으로는 김태순이 부경순과 자신의 토설을 정리하여 펴낸 『계운전(啓運典)』이 있다.
1.3.4. 자아도(自我道)
'자아도'는 1950년 안두승(安斗承, 1912~1985)이 창시한 종교이다. 1912년 일제 강점기 시대 전라북도 정읍군에서 태어난 안두승(1912~1985)은 처음에 한약방을 경영하면서 차경석의 보천교에 입교하였으나, 내부 구성원 갈등 등으로 인해 탈퇴하고 나서 이후 김봉남이 물법 치료를 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차경석처럼 사술(私術)일 것으로 생각하며, 김봉남 그에게 간세(세작)인양 접근하였는데, 오히려 김봉남의 물법 시술에 감복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안두승이 김봉남을 대신해 물법 시술을 할 수 있게 되자 김봉남은 안두승에게 포교를 맡기고 경남 부산으로 떠났는데, 사람들은 이 단체를 가리켜 찬물교(纂勿敎)라 하였다. 그러다 김봉남이 1950년 질병으로 죽자 초대 찬물교 종법주(宗法主)인 안두승은 직함을 개편하여, 초대 찬물교 교주(敎主)가 되었고 이후 자아도로 교명을 바꾸어, 그렇게 훗날 초대 자아도 종도주(宗道主)가 되었다. 초기에는 오로지 물법 시술만으로 치료하였으나 뒤에 한방 요법을 곁들여 육신 치료와 정신 치료를 겸한 시술을 하였다. 1985년에 안두승은 죽고, 임만봉(任萬奉, 1907~1988)이 뒤를 이었으나 그 역시 1988년에 사망하고 이후로는 창교조 안두승의 아들 안범룡(安凡龍, 1933~2016)이 종통 봉직을 맡았으나, 이미 교세가 쇠락하면서 종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신앙의 대상은 대부분이 물법이다. 물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근원이며, 도덕의 원리로 여겨진다. 아무리 토속적으로도 사람의 병고는 허욕과 악심으로 인해 유발되므로 이를 없애기 위해 청정한 찬물을 쓰는 것이 좋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악을 고치고 착한 일을 하며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이라 한다. 2001년 10월경에 안범룡(安凡龍, 1933~2016)이 제3대 자아도교 종도주(宗道主)를 어언 13년여만에 은퇴했으나, 연 4회 정기 의례 행사가 있고, 『심인경(心印經)』·『태화경(太和經)』 등의 경전이 있다.
1.3.5. 용화삼덕도(龍華三德道)
'용화삼덕도'는 1952년 강기춘(康基春, 1903~1996)이 창시한 종교이다. 강기춘은 1903년 전라남도 제주군에서 태어나 남편을 따라 일본 오사카(大阪)에 건너가 살다가 1945년 광복 이후 귀국하였다. 이후 부경순의 소개로 김봉남을 찾아가 치병되면서 신도가 되었다. 그러다 김봉남이 죽자 강기춘 여사와 남편의 부부 공동 주재로 하여금 '창도주 김봉남 제각'의 준설 등을 지휘해, 망자 김봉남 창도주의 제자들이 모여 제각을 마련하고 교단의 본부는 용화삼덕도 초대 종도주 강기춘의 남제주군 집에 두기로 하였다.그리하여 강기춘 여사의 남제주 집에다가 불교의 형식을 본따 미륵불상과 창도주 김봉남의 영상을 모신 뒤 용화사(龍華寺)라는 간판을 붙이게 되었다. 그러나 김봉남의 가르침을 불교적으로 해석한다며 내분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후 강기춘은 내분을 완전히 수습하지 못한채 독립을 하며, 1965년 용화삼덕도라는 간판을 걸고 정식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고, 1978년경에 초대 용화삼덕도교 종도주를 은퇴했다.
신앙의 대상은 창도주 김봉남(金奉南, 1898~1950)과 태상노군, 그리고 아미타불(阿彌陀佛)이다. 수련은 단식 요법과 냉수 요법을 통하여 정신병과 위장병 등을 고치는 치병 요법을 위주로 하고, 연 일곱 차례의 정례 의례일이 있다. 『태화경(太和經)』·『음부경(陰符經)』·『용화삼덕도경집요(龍華三德道經集要)』 등의 경전이 있다.
1.3.6. 타불교(陀佛敎)
'타불교(陀佛敎)'는 윤선유(尹善有, 1899~1983)가 창시한 종교이다. 윤선유는 1899년 전라남도 제주군에서 태어났고, 이후 김봉남을 만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다 잠시 전남 목포 지역으로 떠난 수행 수련 수도 여행을 모두 마치고 1945년 3월경, 즉 해방 5개월 직전에 윤선유는 ‘제주가 피난할 곳이니 제주로 가서 중생을 제도하라’는 창도주 김봉남의 토설이 내려와 북제주로 귀향하여 물법으로 치병 활동을 통한 포교를 시작했다.이후 염불당을 지어 아미타불을 모시고 용화사(龍華寺)라 했다. 그 뒤 윤선유는 염불에 열중하며 치병 활동을 하다가 1976년 연초 1월경에 첫째 아들 윤경대(尹景大, 1925~1976)를 갑자기 급성 폐렴으로 인해 잃는 슬픔을 겪었으며, 이후 1982년에 법도주(法道主)를 은퇴하고 이듬해 1983년 향년 85세로 사망했다. 이렇게 1983년 윤선유(尹善有)의 사망 이후로는 둘째 아들 윤영대(尹英大, 1929~2015)와 막내 외동 사위 권명환(權明煥, 1924~2006)이 이미 1982년에서부터 도주(道主)와 법주(法主)로 뒤를 이었다. 특히 도주 윤영대는 한때 1954년 3월경에 수민(修玟)이라는 승명(법명)으로써 대한 불교 태고종 승려가 되었으며, 1960년 11월경 이후 환속했으나 사상 경향이나 의례 등은, 오히려 모친[39]의 유지와 유업을 계승하려는 입장이다. 본교의 신앙의 대상은 아미타불, 미륵존불(彌勒尊佛), 태상노군이다. 경전은 『아미타경』·『봉남선사와 유·불·선 삼법』이 있다.
1.3.7. 태화교(太和敎)
'태화교(太和敎)'는 문필송(文弼松, 1926~2009, 태화교 초대 법주 역임.)과 고남규(高南圭, 1908~1965, 태화교 초대 도주 역임[40])가 1952년 창시한 종교이다. 문필송은 1926년 일제 강점기 시대 전라남도 제주군에서 태어나 김봉남의 소문을 듣고 나서 풍수지리를 배우려고 봉남교 교단 종파에 입신하였다. 고남규도 문필송과 동향 사람으로 고남규 그는 일본 제국 나라(奈良)에 건너가 약학을 전공하고 귀국하여, 전북 정읍에서 한의원을 경영하다가 그만두고, 1947년 경남 김해로 건너간 이후 물법 치료의 신비에 이끌려 김봉남의 제자가 되었다.김봉남이 1950년 질병으로 인해 향년 53세로 갑자기 사망하자 법주 문필송과 도주 고남규는 1952년 강기춘의 용화삼덕도에 출입하면서 별도로 태화교라 칭하였다. 교명은 창도주였던 망자 김봉남이 청화산(靑華山)에서 수련할 때 고남규에게 내린 태화주(太和呪)라는 주문에서 연유한 것이다.
1965년 고남규가 죽자, 망자 고남규의 아들인 고석균(高碩均, 1928~2020)과 문필송은 문필송의 집에서 본격적으로 태화교라는 이름으로 종교 활동을 시작하였다. 신앙의 대상은 첫 교조 김봉남이며 김봉남을 태상노군과 미륵불의 화현(化現)이라고 믿었다. 구도 수련은 태을주(太乙呪)를 주송(呪誦)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
여타 물법계의 신앙들이 대개 주송(呪誦)을 통한 치병에 중심을 두기 때문에 의타적(依他的)인 성격이 강한 반면, 태화교는 상급의 단계에 이르면 주송 수련(呪誦 修鍊)보다는, 오히려 도통(道通)을 목적으로 하는 법방 수련(法榜 修鍊)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의자적(依自的)인 측면도 아울러 지니고 있다.
1.3.8. 봉남사(奉南寺)
'봉남사(奉南寺)'는 김완진(金完珍, 1918~1995)이 1950년 4월경에 창시한 종교이다. 김완진은 1918년 일제 강점기 시대 전라남도 제주군에서 태어나 숙부인 김봉남이 가르치는 물법 수도를 하면서도 불교에 뜻을 두어 승려 박보륜(朴寶輪)의 도움을 받아 경남 동래 소재 범어사에서 1943년 1월부터 같은해 1943년 5월까지 백일 수련을 마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는 숙부 김봉남의 물법(勿法)도 불교적인 면에서 이해하려고 하였다. 1945년 해방 후 김완진은 서울에 잠시 건너가 미군정청 관련 정치에도 가담해 보고, 북제주군 고향에 돌아가 경찰 직에 종사하기도 하였으나, 모두 마음에 맞지 않아 그만두었으며, 1947년 경남 부산에서 수도하던 숙부 김봉남 곁으로 차라리 다시 돌아와 수련 공부를 계속하였고, 1949년 12월경에 숙부 김봉남과 함께 경상남도 김해군으로 구도 수련 수도 수행지 거주 이전에 동참했다.그러던 중 6.25 전쟁이 발발하기 석달전이던 1950년 4월 8일, 김봉남이 경남 김해에서 갑자기 질병으로 인해 향년 53세로 죽자 그 김해군에 집을 마련하여 김완진은 망자 김봉남 숙부의 영위(靈位)를 보관하였고, 경남 부산에 용화사라는 절을 설치, 불교적인 색채를 가하여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후 경남 부산 소재 봉남교 본부를 차라리 경남 김해로 옮기려 하였으나, 갈수록 종파의 내부 갈등을 야기한 종단 남제주 부인 강기춘 여사 그리고 강기춘 여사 부군 등의 각각 모두 반대로 인해 실패하자 자신들의 교파 교인을 모아 경상남도 김해의 자택에 봉남사라는 간판을 걸게 되었다. 한때는 수백 명의 신도들이 모여들었으나 그가 안보살(安菩薩[41], 1902~1972)이라는 여인에게 1955년 4월경에 총괄 병합적인 관리를 맡기고, 그 다음달인 1955년 5월경에 제주도로 건너가 같은해 1955년 11월경에 손후(遜厚)라는 법명으로써 불교 조계종 승려가 된 뒤 1958년 6월경에 소멸(와해)해 버리고 말았다. 봉남사의 멸파(滅派)는 창종(創宗)된지 8년 2개월여만의 일이었다.
그 이후 김완진은 승려(僧侶)로 출가한지도 한 5년여만인 훗날 1960년 연초 1월경 이후에 환속하여, 그 직후 자신의 친가 직계 가족들과 함께 경상북도 지역으로 건너가 [[성덕도를 입문했고 2년이 지난 훗날 1962년 이후부터 성덕도 종단에 간부급으로 봉직했다. 봉남사의 기본 교리는 봉남교(奉南敎)와 같으나 김봉남(金奉南)의 영상(靈狀)과 나란히 아미타불을 봉안하여 숭배하였으며, 창도주 김봉남을 기념하는 5대 치성이 주요 제의였다. 봉남 선사(奉南 禪師)의 기본 신념이 아미타불의 공덕을 염송하면서 자성불(自性佛)이라는 결과물(決科物)을 찾는 데에 있다고 본 것이다.
1.3.9. 대한도교(大韓道敎)
'대한도교(大韓道敎)'는 1957년 신백일(辛白一, 1908~1970)이 창시한 종교이다. 영산 신씨 후손 신백일(辛白一)은 1908년 대한제국 시대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태어나 1945년 을유 해방 후 미군정 시대 경남 창원 지역의 경찰 직에 잠시 종사하다가, 질병으로 인해 1946년 사퇴하고, 이후 그 병으로 10여 년간 고생 끝에 꿈에서 계시를 받았다.이후 1956년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산에서 수도 생활을 잠시 하다가 그만두고 하산하여, 1957년 도교수련원(道敎修練園)이라는 간판을 걸고, 도교수련원교(道敎修練園敎)라는 뜻의 수련원교(修練園敎)라 내세워 신도들의 병을 치료해 주었다. 그러다 교명을 1958년 대한도교로 고쳤다. 후일 1968년 3월경에 은퇴한 신백일의 뒤를 이어 수제자 강길룡(姜吉龍[42])이 대한도교 제2대 종도주 직을 봉직하였으며, 이후 1970년 작고한 신백일(辛白一)의 남겨진 미망인(未亡人)인 창녕 조씨[43] 부인(昌寧 曺氏 夫人)이 주도한 신부인파(辛夫人派, 도교)와, 그렇지 않은 신백일 제자 강길룡파(姜吉龍派, 찬물교)로 분열되고 결국, 대한도교는 해산되었다.
신앙의 대상은 태상노군과 단군(檀君)이다. 법단에는 노자상(老子像)과 단군영정을 모시고 그 뒤에 원형의 거울 3개를 삼각형으로 연결하여 걸어놓고 있는데, 이는 도교의 '만물 생성 원리'를 의미한다고 한다. 수련심수기(修練心修氣)의 방법으로 모든 병을 다스리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경지에 들어가 인간 자신의 진실을 찾으며 도덕을 실천하여, 지상 낙원을 건설하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치병과 수련의 방법은 태상노군 법단 앞에 정좌하여 천고문(天告文)과 심고문(心告文), 『청정경(淸淨經)』과 『도덕경(道德經)』을 외고 법단에 놓인 찬물을 마시며, 타골(打骨)·안찰(按擦)·단식요법을 행한다. 『청정경』·『대한도교경전』 등의 경전이 있다.
2. 참고 문헌
이강오, 1971, 봉남교계 총론문무병, 1992, 제주도의 생수신앙과 물법신앙
조성윤, 2003, 제주의 무속신앙과 신종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신종교사전
[1] 現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2] 안찰(按擦)과 침구의 치료법을 받았다고 하며, 김봉남과 그의 제자들은 이를 통해 환자들을 치료해주고는 했다. 안찰은 전신을 두드리거나 문질러 혈액이 잘 흐르도록 하는 치료법이다.[3] 무량대도회는 1920년 손치성이 창시한 종교이다. 손치성은 병으로 고생하다가 어느 스님에게 염불 수행을 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수도 생활을 하다가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고는 병이 나았다고 한다. 무량대도회에서는 물을 신이나 부처에게 올리고 앉아, 염불과 주문을 몇 시간 동안 외운다. 그러면 전신에 동요가 일어나고 환자는 자신의 환부를 두들기며 병이 낫게 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강신(降神, 접신)이라고 하는데 강신이 되면 자신도 모르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게 된다. 이것을 토설(吐說)이라고 하며, 신의 말씀으로 믿는다.[4] 토설은 주송 수행에 의해 수도자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말로, 기독교의 방언과 유사하다. 봉남교에서는 토설을 곧 신의 계시로 믿어 매우 중시된다.[5] 그러나 무량대도회는 교단 조직이 짜여져 있는 종교가 아니었고, 제각기 주문을 외우며 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한 종교였다.[6] 황보흠의 호인 백남(白南)과 남(南)자가 겹치는데, 이는 둘의 형제지연(兄弟之緣)을 뜻하는 것이다.[7] 물법은 물로써 심신의 병을 다스리는 법을 말한다. 김봉남이 정확히 어떻게 물법을 받았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봉남이 오랫동안 수도를 하는데 때때로 굶어가며 물만 먹다가 우연히 자신의 병이 낫자 이것을 계기로 물의 효력을 깨달은 것으로 추정된다.[8] 그러나 김봉남이 봉남교나 어떠한 교명을 직접 내세운 것은 아니었고, 이후에도 따로 자기 교단의 명칭을 지은 적은 없다. 봉남교, 물법교 등의 교명은 후대에 김봉남의 교단을 지칭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9] 경상남도 동래군 기장면 연화리 소재.[10] 김봉남은 죽도사의 주지인 박보륜(朴寶輪)에게 불교적인 감화를 받았는데 박보륜이 범어사의 주지가 되어 죽도사를 떠나면서 김봉남에게 이 절을 빌려주었다. 이는 김봉남의 포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11] 주로 아미타불, 미륵존불을 염불했으며, 무량주(無量呪), 칠성주(七星呪), 음부경(陰符經), 태을경(太乙經), 삼용주(三𢏝呪) 등의 다양한 주문을 외웠다.[12] 북방과 숫자 1, 6은 오행에서 수(水)를 의미한다. 신흥종교에서는 수의 운수는 후천개벽의 운수라고 한다. 고로 김봉남이 북방 일육수의 기운을 타고 났다는 것은 자신이 후천개벽의 기운을 가지고 태어난 성인이라는 것이다. 후천개벽은 현재의 혼란스러운 선천(先天)시대가 끝나고,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후천(後天)시대가 오게 되는 사건을 의미한다.[13] 대부분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김봉남을 교주로 받들며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을 계속하는 교인이 되기도 했다.[14] 1905년 제주목 구좌면 종달리에서 태어났다. 딸 한 명을 낳고 1942년 향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5] 사람이 죽은 지 1년 후에 지내는 제사.[16] 1척은 대략 30cm로 2~3척은 약 60~90cm가 된다.[17] 중생삼고(衆生三苦)는 기(飢), 한(寒), 질(疾) 즉, 굶주림, 추위, 질병에 의한 고통을 의미한다.[18] 초통에서는 물로 병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재통에서는 마음의 오염을 씻어내야 병이 고쳐진다는 원리를 깨달은 것이다.[19] 사악한 가르침으로 질서를 어지럽히는 백성.[20] 경상북도 포항에서 태어났으나 고아가 되어 제주도에서 자랐다. 김봉남과 결혼한 뒤 아들 김도문(金道文)을 낳았으며, 1950년 사망했다.[21] 처음에는 제자들의 집을 썼다가 이후에는 평화여관, 흥법사(興法寺) 등으로 도장을 옮겨 다녔다.[22] 이때 교단 내에서 중심 역할을 하던 윤유선, 이희남, 부경순, 강기춘, 문필송 등은 모두 제주도 출신이었고, 이 밖에도 대부분의 신도가 제주도 출신이었다.[23] 물법교화는 물법을 널리 전파함으로써 질병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을 건져내고 교화하게 했다는 뜻이다.[24] 기간은 대개 1주일에서 2주일이지만 사람에 따라 1개월 이상 계속하기도 한다. 확증할 수는 없지만 천지대안도의 2대 도주인 김태순은 무려 백일 단식을 했다고 한다.[25] 경상남도 의령에서 태어났다. 남편의 병을 고치기 위해 절에 다니다가 접신이 되었다. 이 때문이었는지 한 달 동안 굶어도 힘이 넘치고 토설이 자주 나오게 되었다. 이후 계룡산, 청화산 등지에 다니면서 수도를 했고, 이도화를 추종하는 사람도 생겼다고 한다.[26] 경상북도 문경에서 태어났으며, 이후 이름을 정만인으로 바꿨다. 수도 생활을 하며 자기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교주가 되어 보려는 꿈이 깊었다고 한다. 그가 이름을 정만인으로 바꾼 이유도 정감록 등에서 정씨가 계룡산에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세계를 통일한다고 했는데 그 이름이 정만인이라고 했기 때문이다.[27] 도교 등에서 노자를 신격화하여 부르는 이름이다.[28] 법방은 법방 수련이라는 수련에 쓰이는 도안이다. 법방은 우주 자연의 축소판이라고 하며, 4096개의 칸에 태화주와 여러 문구들이 적혀 있다.[29] 김해 대동면 수안리에 있는 제자 김옥재, 배무생의 자택을 본거지로 포교했다.[30] 전용태로부터 천강서(天降書)와 시중역(時中易)이라는 글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봉남이 썼다는 설도 있다. 천강서와 시중역은 김봉남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천강서에서는 우주가 변화하여 현재의 선천시대가 가고 후천시대가 온다고 한다. 후천시대에는 도덕 문명이 발전하여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극락세계가 열린다고 한다. 시중역에서는 팔괘가 선천에서는 건(乾)이 남(南), 곤(坤)이 북(北), 이(離)가 동(東), 감(坎)이 서(西)에 대응했는데 후천에서는 곤이 남, 건이 북, 태(兌)가 동, 간(艮)이 서에 대응한다고 한다. 이는 선천시대가 끝나고, 음(陰)과 양(陽)이 뒤바뀐 새로운 후천시대가 열린다는 의미이다.[31] 現 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32] 묘제를 지내기 위해 무덤 가까이에 짓는 건축물.[33] 김봉남의 제자 중 하나인 김옥재의 주장으로 그의 고향인 김해 대동면 주중리 인근 수안리에 제각을 둔 것이다. 김옥재는 이후에 물법계 종교 중 하나인 성덕도(聖德道)를 창시한다.[34] 강기춘은 김봉남의 제자 중 하나로, 이후에 물법계 종교 중 하나인 용화삼덕도(龍華三德道)를 창시한다.[35] 또한 총무에 김봉남의 조카였던 김완진(金完珍), 서무(庶務)에 문필송(文弼松), 감사에 고남규(高南圭), 박봉규(朴鳳奎), 구광서(具光書), 교무위원에 강기춘(姜基春), 배무생(裵戊生), 김옥재(金沃載), 김원숙(金元淑), 변규선(邊圭善), 이옥춘(李玉春), 김용국(金鏞國), 김성수(金成洙), 임구상(林句相), 고만선(高萬善) 등으로 정하였다.[36] 물법은 처음 찬물로 병을 치료하는 '찬물 치료법'의 약칭으로써 쓰인 것이지만 이후에는 도통 수련까지 포괄하는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37] 1973년부터 삼천교라는 교명으로 활동하였으나 2002년 삼천도로 바꾸었다.[38] 2002년 8월 13일 삼법수도교화원 제4대 종도주 취임, 종도주 종파 순봉직 직분 체제 개편 직후 2013년 8월 13일 이후 재취임하여 삼법수도교화원 제5대 종도주 연임.[39] 1983년에 하세한 윤선유(尹善有)의 먼저 1977년에 작고한 배우자 신우지(愼又只).[40] 1908년 전라남도 제주군에서 출생.[41] 속세의 본명는 안상제(安㜀娣)라 알려진다.[42] 대한도교 제2대 종도주, 찬물교 초대 법도주 등을 두루 역임했다.[43] 본명은 조가원(曺佳苑)이라 알려진다. 후일 초대 삼법수도교 종법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