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8 19:59:38

양침

십육국춘추(十六國春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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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1. 개요

梁琛
생몰연도 불명

전연의 인물. 자는 불명. 사주(司州) 광평군(廣平郡) 출신.

2. 생애

후조가 멸망하고 군벌로 독립한 여호(呂護)의 밑에서 참군을 지내던 양침은 야왕(野王)이 함락되고 여호가 도망갈 때, 태원왕 모용각에게 투항하여 중서자작랑(中書著作郎)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에는 급사황문시랑으로 승진하였다.

건희 10년(369년) 10월, 전진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부사 구순(苟純)과 함께 전진의 수도인 장안(長安)으로 향하였다. 이윽고 양침이 장안에 이르자, 당시 만년(萬年)에서 사냥 중이던 전진의 천왕 부견은 사신인 양침을 그 자리에서 회견하려 하였다. 이에 양침이 거부하며 말했다.
"진(秦)의 사신이 연나라에 이르면 연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은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예를 다하여 궁정을 깨끗이 한 뒤에 알현하였습니다. 지금 진왕(秦王)은 들판에서 사신을 회견하고 싶어하니, 신은 감히 이에 응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전진의 상서랑 신경(辛勁)이 반박하였다.
"빈객이 국경 내에 이르면 그에 대한 처우는 그 나라의 주인이 원하는 바에 달려있는 법이거늘, 어찌 그대가 그 예의를 혼자서 마음대로 결정하려 하는가? 게다가 천자의 승여(乘輿)가 위치하는 곳을 곧 행재소(行在所)라 칭하거늘, 거주하는 곳이 어찌 항상 정해져 있단 말인가? 또, 《춘추》에 따르면 '우(遇)'인 상황에서는 들판에서 회맹하는 것 역시 예로 삼고 있는데, 어찌 불가하다 이르느냐!"
양침이 답했다.
"진실(晉室)이 기강을 잃음에 따라 영조(靈祚)는 덕이 있는 두 나라에게로 돌아가, 함께 하늘의 명명(明命)을 받들게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환온이 미친듯이 사납게 날뛰면서 북벌하여 연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진나라의 왕은 고립되어 홀로 서게 될 것을 우려해 우리를 구원해주고 서로 좋은 의를 맺지 않았습니까? 동조(東朝)의 군주와 신하들이 서쪽을 바라보면서 다투지 않은 것을 창피스럽게 생각한다면, 이는 이웃이 근심거리가 되는 꼴이니, 서쪽에서 사자가 오면 공경하며 대하여야 합니다. 강대한 적이 떠나간 지금이야말로 나라 간의 교류를 활발히 하여 예를 숭상하고 의를 두텁게 해야함에도 갑자기 거만해져서 사자를 홀대한다는 것은 곧 연나라를 천시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어찌 수호(修好)의 의리라 할 수 있겠습니까! 또, 무릇 천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기에 떠나면 '승여(乘輿)'라 말하고, 머물면 '행재(行在)'라 합니다. 하나, 지금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의 빛도 쪼개져 있는 마당에, 이를 가리켜 승여니 행재니 따질 수 있습니까? 게다가 그대가 말한 예에서 '우(遇)'란 정식으로 정해진 시기가 아닌 때에 알현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위급한 상황에서 예를 간략히 치르기 위해 정해놓은 것인데, 어찌 평시에 이것을 적용하려 합니까! 사신이 손님으로 오면 그 세력은 비록 주인만 못할 지라도 예에 맞지 못한 대접을 하면 감히 따르지 않는 법입니다."
이를 전해들은 천왕 부견은 양침에게 임금의 명령을 받드는 재주가 있다 칭찬하고 양침을 가상히 여겨, 행궁(行宮)을 마련하고 백관을 배치하면서 연나라 사신이 요구하는대로 예법에 합치되게 하였다.

행궁에서 정식으로 양침을 만난 천왕 부견은 의례가 끝난 뒤에 따로 사석을 마련하고 양침을 불러 물었다.
"동쪽 나라에서 이름난 신하로는 누가 있는가?"
이에 양침이 답했다.
"태부•상용왕 모용평께서는 밝은 덕이 융성하여 황족으로서 왕실을 광활히 보좌하게 있습니다. 또, 거기대장군•오왕 모용수의 웅략(雄略)은 세상을 압도하고, 힘 쓰는 것이 절륜하여 나라의 안을 밝히는 동시에 사방면을 방어하여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관리들 또한 각자 자신의 직무에 충실히 임하고 있고, 현명한 이들 중 등용되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여러 선비를 거느리던 주문왕이나 수많은 인재를 보유하던 한무제라 할지라도 이에 필적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당시 양침의 사촌형 양혁(梁奕)은 전진에서 상서랑을 지내고 있었기에, 천왕 부견은 양침으로 하여금 양혁의 저택에서 머물게 하려 하였다. 이에 양침이 거듭 거부하며 말했다.
"과거 제갈 형제는 천하가 삼국으로 나눠졌을 때 각자 다른 나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때 제갈량은 그의 형 제갈근이 오나라를 위해 촉을 방문했을 때조차 공식석상에서만 만났을 뿐 사적으로 교류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군자(君子)가 되고자 하여 이러한 뜻을 사모해 왔습니다. 지금 비록 형님의 집에 머문다면 당장은 안락함을 누릴 수 있어도, 저의 뜻은 이루지 못할 것이기에 감히 그곳에 머물지 않겠습니다."
부견은 양침의 의견을 존중하여 다른 숙소를 마련해주었다.

양침이 전진에 머무는 동안 그의 사촌형 양혁은 공을 세우기 위해 수 차례 숙소를 찾아와 은근히 물음을 던지면서 전연의 내부 정보를 캐내려 들었다. 어느 날, 양침이 양혁에게 말했다.
"지금 두 나라가 정족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형제가 나란히 서로 다른 나라에서 영총(榮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이 양침은 연나라를 섬기고, 형님께서는 진나라를 섬기면서 그 본심은 각기 다른 곳에 두고 있습니다. 이 양침은 동국(東國)의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고 싶지만 그것은 서국(西國)이 두려워하는 것이고, 반대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오히려 묻고 싶습니다만, 형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쓰고자 이러한 질문들을 하십니까?"
양침은 자신의 의사를 전한 뒤에 양혁의 물음에 응답하지 않았다.

양혁으로부터 이를 전해들은 부견은 양침을 더욱 흠모하여 태자 부굉으로 하여금 그와 대화를 나누도록 하였다. 양침이 태자 부굉을 만났을 때, 전진의 관리들이 그에게 태자 앞에서 배례할 것을 요구하며 말했다.
"이웃나라의 군주는 그 나라의 군주와 같은 법이다. 이웃나라의 저군(儲君) 역시 어찌 다르다 할 수 있으랴!"
그러자 양침이 반박하였다.
"천자의 아들은 원래 신하나 다름없다. 태자의 자리란 곧 천한 지위에서 고귀한 지위로 올라가기 하나의 단계에 불과하다. 본국에 있어도 천자의 아들에게 배례하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나라의 신하라면 더더욱 그럴 필요 없지 않겠는가! 또, 나는 사신으로서 불순한 경의를 표함 없이 예로써 두 나라 사이에 정을 오가게 함에 있다. 어찌 공손함을 잊고 두려움에 굴복하여 번거로움을 행하겠는가!"
결국 진나라의 관리들의 계획은 실패하였고, 양침은 끝내 태자 부굉 앞에서 배례하지 않았다. 양침은 이후로 한 달여 간 전진에 머물다가 떠났고, 왕맹은 양침을 억류시켜야 한다 주장했으나 천왕 부견이 불허하였다.

건희 10년(369년) 11월, 양침이 업(鄴)으로 향할 당시, 전연에서는 오왕 모용수가 가족혼 태후와의 불화로 갈등하다가 전진으로 망명하였다. 겸정(兼程)에 이르러 상황을 파악한 양침은 모용평에게 나아가 간하였다.
"진나라에서 밤낮으로 군사 훈련이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양의 군량이 섬동(陝東)으로 운반되고 있는 것을 보건대, 신의 소견으로는 지금의 평화가 오래가지 못할 것으로 보입니다. 심지어 오왕 모용수가 진나라로 망명하였으니, 진나라는 그를 이용해 우리 나라의 국경을 침범하려 들 것입니다. 청컨대 당장이라도 국경의 방비를 강화하십시오."
이를 들은 모용평이 노하여 외쳤다.
"말도 안 된다. 진나라가 어찌 나에게 반역한 신하를 받아들여 화친을 깨려 하겠느냐!"
양침이 다시 간하였다.
"이웃나라들이 모두 병합되어 자연스럽게 오늘날의 형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두 나라는 서로를 병탄할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부견은 명철하고 결단력이 있어, 좋은 것은 물 흐르듯이 받아들입니다. 왕맹은 왕을 보좌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어 이루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예리하게 이를 해내고 맙니다. 이러한 군주와 신하의 덕이 부합하여 스스로 천재일시(千載一時)라 칭하고 있습니다. 이제 환온은 염려할 가치도 없으므로, 결국에 걱정해야 하는 인물은 오직 왕맹뿐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모용평은 끝까지 양침의 말을 무시하였다. 양침은 헌무제 모용위에게도 간언해보았으나, 모용평 때와 같이 무시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양침은 황보진을 찾아가 이 일에 대해 의논하였고, 심각성을 느낀 황보진 역시 상소해보았으나 모용평의 훼방으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건희 11년(370년) 5월, 천왕 부견이 마침내 대군을 일으켜 전연 정벌을 선포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놀란 헌무제 모용위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 물었다.
"진나라의 무리는 어떠한가? 지금 대군이 출발하였다 들었는데 왕맹 등과 능히 싸울 수 있겠는가?"
이에 산기시랑 이봉(李鳳)이 나아가 말했다.
"진나라의 병력은 적고 약소한데, 어찌 왕의 군대의 적수가 될 수 있겠습니까? 경략(景略: 왕맹의 字)는 평범하여 태부에 필적하지 못할 것이니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그러자 양침과 중서시랑 악숭(樂嵩)이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병법서에 의하면 싸우기 전에 적을 헤아리고, 계략을 미리 갖추어야만 그들을 취할 수 있다 하였습니다. 적과 싸우지 않기를 기대하는 것은 만전(萬全)의 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경정이 이르길, '진(秦)의 병력은 우리보다 적으나, 전사(戰士)는 우리의 곱절이다.'라 하였으니, 무리의 많고 적음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진나라는 천 리의 먼 길을 진군하여 고된 전투를 치르는데, 어찌 먼저 싸우려 하지 않는 것입니까!"
헌무제 모용위는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다.

건희 11년(370년) 10월, 양침이 전진에 사신으로 갔을 때 부사로 따라간 순순은 항상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자신의 의견을 물어봐주지 않은 양침을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이에 헌무제 모용위를 알현해 양침을 모함하며 말했다.
"양침이 장안에 있을 적에 왕맹과 더불어 친분을 쌓았으니 다른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헌무제 모용위는 진왕 부견이 양침을 가리켜 여러 차례 칭찬하였다는 소식과 양침이 부견과 왕맹의 재주에 대해 뛰어나다고 한 발언까지 모두 들은 바 있었다. 또, 양침이 돌아온 이후로 전진이 침공해올 것에 대비해야 한다 일관되게 주장하였는데, 진짜로 전진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는 이내 양침이 적과 내통한 것이라 크게 의심하여 그를 붙잡아 투옥하였다.

건원 6년(370년) 11월, 수도인 업이 함락되면서 전연이 멸망하자, 양침은 석방되어 천왕 부견을 알현하게 되었다. 부견은 양침을 불러 중서저작랑으로 삼고 그에게 말했다.
"경은 과거 상용왕과 오왕이 모두 기이한 재주를 보유하였다 말했는데, 어찌하여 그 기이한 모략이 쓰이기는 커녕 나라가 망하고 말았는가?"
양침이 답했다.
"국가의 흥하고 망함이 어찌 단 둘에 의해서 결정될 수 있겠습니까."
부견이 그를 책망하며 말했다.
"경은 망국의 조짐을 능히 살피지 못하였고, 연나라의 미충(美忠)을 거짓으로 칭하는 바람에 도리어 화를 자초하고 말았소. 어찌 이것을 가리켜 지혜로운 자의 소행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에 양침이 다시 답했다.
"신이 듣기로 어떤 사람은 옅은 길흉의 징조를 보고 움직인다 하였는데, 신처럼 우매한 자로서는 도저히 그에 미칠 수 없습니다. 다만 신하의 충(忠)이란 자식의 효(孝)와 같아 한 마음으로 충효를 다하지 않는다면 이룰 수 없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과거의 열사들은 위기에 놓여도 결코 마음을 바꾸지 않았던 것이고, 죽음을 앞에 두고도 피하지 않은 채 군친(君親)을 따라 죽은 것입니다. 하나, 몇몇 사람들은 자신의 안위만 신경쓰고 국가를 돌보지 않았는데, 신은 그러한 사실을 알고도 차마 그들을 어찌 할 수 없었습니다."
양침의 답변을 들은 부견은 흡족해하며 칭찬하였다.

건원 6년(370년) 12월, 왕맹의 청에 의해 주부, 영 기실독(領記室督)으로 옮겨져 업성에 그대로 남았다.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