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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131230><colcolor=#ffffff> 유승민 柳承敏|Ryu Seung-min | |
출생 | 1982년 8월 5일 ([age(1982-08-05)]세) |
인천광역시 강화군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 |
본관 | 진주 류씨 토류계 (晉州 柳氏 土柳系)[1] |
신체 | 178cm |
학력 | 도화초등학교 (전학) 오정초등학교 (졸업) 내동중학교 (졸업) 동남고등학교 (졸업) 경기대학교 예술체육대학 (체육학 / 학사) 경기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 / 석사[2]) 경기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 / 명예 박사) |
전형 | 오른손 / 펜홀더 드라이브 |
종교 | 개신교 |
가족 | 아버지 유우형(1955년생), 어머니 황감순(1957년생) 배우자 이윤희(1987년생, 2011년 결혼) 장남 유성혁(2012년생), 차남 유성공(2014년생) |
링크 | |[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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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탁구 선수 출신 코치, 행정가, 교수.[4] 팀유승민 탁구클럽 단장, 2018평창기념재단 이사장, (재)국제스포츠전략위원회 이사장도 맡고 있다.2. 선수 경력
이렇게 실력이 뛰어나다 보니, 중학교 3학년 땐 이미 실업팀들 간의 스카우트 경쟁 대상이 되어 삼성생명의 후원을 받을 정도였다.[5] 16살 때 1997 아시아 주니어 탁구 선수권에 출전해 단식 4강에 진출했고 단체전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이때 같이 출전한 주세혁과 함께 한국 탁구의 미래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1. 1999년
주니어 아시아 선수권에서 완성형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기대주 왕하오를 단식 결승에서 압도하고 우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등장을 알렸다. 복식에서도 김정훈과 함께 탕펑-왕하오 조를 꺾고 우승하며 2관왕을 달성했다. 이 시점에서 세계 최고 유망주인걸 입증한 셈이다. 허나 단체전에서는 중국에 가로막혀 아쉽게 은메달을 차지하며 대회 2연패는 놓쳤다.2.2. 2000년
만 18세의 나이에 2000 시드니 올림픽에 출전하면서 기존 탁구 최연소였던 유남규(만 20세)의 기록을 경신했으나, 이후 이중 등록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참고로 올림픽에선 이철승과 함께 남자복식 동메달 결정전에 진출했지만 프랑스에 패해 4위를 기록했다.[6]2.3. 2002년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남자복식 종목에도 이철승과 함께 출전하여 우승했다.그러나 단식에서는 4강에도 채 오르지 못했는데, 당시 한국은 오상은이 동메달을 건진 것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에 일각에선 기대만큼 못 컸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관심을 받았으니.. 물론 탁구는 예나 지금이나 중국이 절대 강세를 보이는 종목이지만, 이미 유남규와 김택수가 중국을 넘어 올림픽 및 아시안 게임 등에서 금메달을 따온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라 기대치가 더 높기도 했다.
중국과의 단체전에서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쿵링후이와 맞붙었었는데 좋은 경기력을 보이다 쿵링후이의 노련미에 밀려 패배했다.
2.4. 2004년
그렇게 여전히 중국의 벽을 실감하며 세계 랭킹 5위권을 맴돌다 이집트 오픈 등에서 우승하며 올림픽 직전 세계 랭킹 3위까지 올라간다.남자 단식 결승 영상 |
이 금메달로 직후 세계 랭킹도 2위로 올라섰고, 전후 한국 남자선수 중 유승민 랭킹에 도달한 선수는 아직 없다. 이전 세대인 김택수도 3위가 최고였고, 비슷한 세대인 오상은과 주세혁도 최고 랭킹 5위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후 중국 탁구가 2008, 2012, 2016 올림픽에서 메달을 싹쓸이하는[11] 넘사벽의 실력을 보여준 것을 고려하면, 2004년의 이 금메달은 시기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한국 탁구가 거둔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사족으로 아테네 올림픽 이후 유승민의 기량은 다시 왕하오에 뒤처져[12] 결국 은퇴 전까지 둘의 최종 전적은 유승민 기준 2승 18패(?)로[13] 절대적인 열세를 기록한다. 그런데 그 드문 승리 중 하나가 올림픽 결승에서 나왔다.
한편, 왕하오는 이후 은퇴하기 전까지 올림픽 단식 금메달을 바라보며 그 뚫기 어렵다는 중국 탁구 국가대표팀에 3차례나 승선하지만, 단식 3연속 은메달이라는 안타까운 결과를 받아들이며 결국엔 은퇴하고 만다. 덕분에 농반진반 중국 탁구사 최강의 준우승자라는 소리도 듣는다. 다만 단체전까지 본다면 왕하오는 2008년 이후로 개인전 은메달 3번, 단체전 금메달 2번을 딴 것에 비해 유승민은 2004년 이후 개인전은 올림픽 기준 메달권에 들지 못했고, 단체전은 베이징 올림픽에서 동메달, 런던 올림픽에선 단체전 은메달을 마지막으로 2014년에 은퇴했다.
2.5. 2007년
2007 바르셀로나 월드컵 단식 결승전에서 왕하오와 리매치를 하게 됐는데 패배하여 은메달을 들었다.2.6. 2008년
2008 베이징 올림픽에도 출전해 단체전 동메달을 획득했다.단식에서는 1회전(32강전)에서 홍콩의 고라이착에게 세트 스코어 2-4로 패배하며 조기 탈락했다. 1~3세트를 연속으로 내준 뒤 4, 5세트를 따내며 추격했으나, 6세트에서 매치포인트를 먼저 내고도 상대방의 노련한 플레이에 범실이 나오며 무너졌다. 그리고 고라이착은 8강전에서 왕하오에 졌다.
2.7. 2012년
2012 런던 올림픽에서는 오상은, 주세혁과 함께 단체전 결승에 올랐으나 중국에 0-3으로 패하며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유승민 현역 커리어의 마지막 불꽃이었다.3. 은퇴 이후
3.1. 2014년
3.2. 2016년
차기 IOC 선수 위원이 되기를 희망하여 2015년 하반기부터 장미란, 진종오와 한국 대표가 되기 위한 국내 경합을 벌였다. 일반적인 예상으로는 다른 두 후보가 성적 면에서 압도적인 면모가 있어 유승민이 한국 대표가 되기엔 조금 어렵지 않나 싶었는데, 영어 시험에서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며 두 후보를 물리치고 결국 한국 대표가 되었다. 또한 선수들을 찾아다니며 어필을 하는 등 많은 노력을 했다고 한다.참고로 IOC 선수위원은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투표로 이루어지며, 총 23명의 후보 중 상위 4명만 당선된다. 이후 폐막식 날 열리는 IOC 총회에서 과반 찬성을 얻어야 한다. 유승민은 올림픽 시작 10일 전부터 브라질에 넘어가 세계 선수들에게 열심히 선거 유세를 펼친 끝에 2016년 8월 19일(리우 현지 시각 18일), 선수위원에 당선되었다. 선수 투표 순위도 예상보다 높은 2위를 기록했다. 용감한 기자들 178회에 따르면 출마 당시 인지도가 너무 없어서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선거운동 규정도 매우 까다로워서 발품 팔기를 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수촌 내를 걸어다니면서 만나는 모든 선수에게 밝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홍보책자를 보여주고 자신과 정책을 소개했다고 한다. 선거 유세 첫날 선수촌 내에서 약 25km를 걷고 선거 유세 기간에 매일 5시 반에 일어나서 15시간 동안 발품 팔기를 했다고 한다. 선수들의 컨디션을 체크해가며 25일 간 열심히 활동한 결과 미국 기계체조 대표팀이 먼저 와서 인사를 하고 일본의 탁구 선수 후쿠하라 아이(福原 愛)는 자신이 챙겨온 주먹밥과 간식을 챙겨주며 고생했다고 응원을 하고 한 아프리카 선수는 "하루도 쉬지 않고 밝게 웃으며 인사를 건넨 네 모습에 감동받아 너를 투표했다"라고 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14]
사실 유승민은 2000년부터 스포츠외교에 관심을 가져왔다고 한다.# 북한 선수들을 2000년부터 겪으면서 세계평화 및 화합에 스포츠가 최적이라고 생각했고, 경기장이 아닌 IOC에서 한국의 스포츠외교에 이바지하길 원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대한체육회 이사로도 선임되었다. IOC 위원은 2024년까지 역임했다.
3.3. 2018년
1월 17일 2018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수촌장으로 임명되었다.4월 스웨덴의 할름스타트에서 열린 탁구 세계 팀선수권에 한국 팀 단장 자격으로 참석했는데, 마침 8강전에 남북한이 만났다.
이에 ITTF 회장과 북한탁구협회장과 이런 저런 얘기로 출발하다가 일이 커지며 본격적으로 협의하고, 남북 선수 및 8강에 진출한 모든 타국 팀들의 동의를 받고, 본국과도 협의를 거쳐서 현장에서 8강전을 치르는 대신 남북단일팀을 구성해서 4강전에 자동 진출하기로 전격 합의하였다. 유승민의 스포츠 외교가로서의 역량을 보여준 일화다.[15]
다만 당시 다른 팀들의 동의를 얻었다고 할지언정 행사 전 협의 없이 경기 도중 팀을 합쳐 차기 라운드로 진출하는 경우는 없었고, 추후 단일팀이 상대하는 팀들 간의 선수 숫자의 불균형 뿐만 아니라 남북 선수들 개인에게 돌아가는 기회 자체가 줄어드는 부작용도 있었다. 때문에 넷우익 등 일각에선 '대만이 홍콩을 준결승에서 만나 서로 합쳐 결승 진출하고 결승에서 중국과 만나면 또 합쳐서 3개국 공동 우승을 해도 되는거냐'라는 식의 비판 댓글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한창 남북정상회담 등이 이어지던 시기였음을 감안하면 못할 것도 없는 문제긴 했다. 실제 중국-대만도 훈풍 불면 할 수도 있는거고. 더구나 언론 탈 일도 별로 없는 대회를 이런 이슈거리라도 만들어 화제성을 일으키면, 대중의 관심도가 고조되어 탁구 전체에 이득이 되는 면도 있다.
이후 2018 코리아 오픈에서는 한국 장우진 - 북한 차효심 혼합복식 조가 결승에서 중국을 꺾고 우승하는 등 결과적으로도 진일보한 성과를 내었다.
3.4. 2019년
5월 31일 조양호 前 회장의 별세로 공석이 된 대한탁구협회장 보궐 선거에 출마해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2020년 12월까지 임기를 역임했다. 이후 치러진 회장 선거에 단독으로 출마해 다시 당선되었고, 2024년 12월까지 대한탁구협회를 이끌게 되었다.[16]3.5. 2021년
7월 18일에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백신 2차 접종을 마쳤고, 일본에 출국하기 직전에도 음성이 나왔는데, 돌파감염이 된 것으로 보인다.3.6. 2022년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쇼트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남자 5000m 계주[17] 메달 시상 위원으로 참여했다.3.7. 2024년
2024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유튜브 예능 태양의 운동부에 출연하여 ZEROBASEONE의 장하오, 김태래, 리키, 김규빈에게 탁구를 가르쳤다.#유승민은 대한탁구협회 회장 자격으로 2024 파리 올림픽에 참가했고, 한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경기장에도 자주 방문하였다. 이때 정장 차림으로 임종훈-신유빈 혼합복식조의 연습 파트너가 되는 희귀한 풍경도 선보였는데, 이들의 16강 상대 선수 중 1명(독일의 당 치우 선수)이 이젠 프로 세계에선 잘 사용하지 않는 '펜홀더 그립'을 사용하고 있었고, 이에 연습 상대가 없어서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마침 유승민이 현역 시절 펜홀더 그립을 사용하였기에 연습 상대를 했다고 한다. 이후 임종훈-신유빈 조는 16강에서 무난히 승리하였고, 최종적으로 동메달을 수상하며 12년간 노메달이었던 한국 올림픽 탁구 대표팀에 첫 메달을 선사했다.# #
이외에도 선수들의 편안함이 경기력에도 직결된다는 신념 아래, 2인 1실 방 운영을 1인 1실로 바꾸고 찜통 버스 문제 등 선수들 컨디션 조절에도 관여한 흔적이 보여,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당시 배드민턴 등 다른 상당수 체육협회들과 다르게 일단 협회장으로 평균 이상은 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무래도 비교적 젊은 협회장이다 보니 고참 선수들이랑은 선수 시절 연도 있어서 직접적인 소통이 가능한게 장점으로 보인다.
2024 파리 올림픽을 끝으로 임기가 만료된 IOC 선수 위원 자리에서 내려왔다.
2024년 9월, 대한체육회장직 선거 출마를 밝혔다. 이와 함께 12월까지 임기가 남아있던 대한탁구협회장 자리도 사임했다.#
4. 플레이 스타일
선수 시절의 유승민은 탁구 역사상 최강의 포핸드를 가릴 때 쉬신, 마린, 왕리친, 마룽과 함께 그의 이름이 언급될 정도로 굉장히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선수였다. 포핸드 한 방 드라이브의 스피드는 쉬신, 왕리친보다도 빨랐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실제로 중국에서도 유승민의 포핸드 능력은 고평가받는다.또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직접 득점률이 높은 편인 강렬하고 변화무쌍한 서브[18]와 일본식 펜홀더를 사용하는 드라이브 공격전형을 구사했다. 테크닉적인 부분에서 극찬을 받았던 스승이자 같은 펜홀더 선배들인 유남규나 김택수와 비교하면 유승민은 기술적인 이점보다는 본인의 파워 드라이브에 의존하는 탁구를 구사했다. 그렇다고 마냥 드라이브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라, 유승민은 탑급의 서브&리시브 기술과 그 기술들을 적재적소에 알맞게 선택해 사용하는 판단력도 있는 선수였다.
최전성기의 유승민을 보면 엄청나게 빠른 풋워크로 포어 사이드와 백사이드를 빠르게 이동하며, 강력한 포핸드 드라이브를 구사하는 모습과 랠리를 길게 가져가지 않고 빠르게 끝내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유승민 선수의 명장면 모음집들에 다음을 완전히 버린, 온몸을 날리는 한 방 드라이브가 많은 이유. 물론 이런 스타일은 장점이자 단점이었다. 체력 소모가 커 경기력을 꾸준히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 노가다식 탁구란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펜홀더라는 전형 특징상 수비 선수 상대로는 매우 상성이 좋은 편이었다. 또한 탁구 선수로서는 귀중한 신체적 재능이라 할 수 있는 긴 팔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도 이점. 하지만, 스피드 글루[19] 사용 금지 조치로 인한 한 방 드라이브의 파워가 약화되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특유의 풋워크를 잃게 되면서 점차 하향세를 걸었다.
펜홀더의 이점인 강렬한 서브와 김택수 선수의 트레이드 마크인 파워 드라이브를 계승, 한 방 파워는 더욱 강해진 반면 또하나의 트레이드 마크인 완강한 방어는 마이너 판이라는 말도 있으나 세계 탁구의 백핸드를 비롯한 기술의 빠른 발전을 고려해야 한다. 실제 올림픽 이후로도 꾸준히 일정 이상의 성적을 냈으며 뚜렷한 약점을 공략당하면서도[20] 빠른 풋웤과 돌아서기, 좋은 서브와 리시브, 끈질긴 쇼트 방어, 불편한 자세임에도 때로는 백핸드 드라이브로 역습을 하는 등 저력을 보여주었다. 이런 스타일의 희소성으로 인한 어드밴티지도 없진 않았겠지만 포핸드 파괴력의 이점에 비해 백핸드 약점의 페널티로 인한 한계가 더 컸음에도 불구하고 롱런하며 활약했다. 하지만 전형의 한계와 신체적 부상 속에서 중국을 상대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실상 일본식 펜홀더로 제대로 성적을 낸 마지막 선수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21] 프로급에선 이미 사용자조차 많지 않은 일본식 펜홀더이기에 그가 마지막 일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될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유승민이 보여줬던 바람 같은 풋워크와 이어지는 불꽃 같은 포핸드 드라이브는 탁구 애호가들에게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5. 수상 기록
대회 | 금 | 은 | 동 |
올림픽 | 1 | 1 | 1 |
세계 선수권 | 0 | 0 | 2 |
세계 팀선수권 | 0 | 2 | 3 |
아시안 게임 | 1 | 3 | 1 |
아시아 선수권 | 0 | 1 | 2 |
월드컵(단식) | 0 | 1 | 0 |
월드컵(단체전) | 0 | 1 | 1 |
주니어 아시아 선수권 | 3 | 1 | 1 |
합계 | 5 | 10 | 10 |
올림픽 | ||
금메달 | 2004 아테네 | 단식 |
은메달 | 2012 런던 | 단체전 |
동메달 | 2008 베이징 | 단체전 |
세계 선수권 | ||
동메달 | 2001 오사카 | 단체전 |
동메달 | 2007 자그레브 | 단식 |
세계 팀선수권 | ||
은메달 | 2006 브레멘 | 단체전 |
은메달 | 2008 베이징 | 단체전 |
동메달 | 2004 도하 | 단체전 |
동메달 | 2010 모스크바 | 단체전 |
동메달 | 2012 도르트문드 | 단체전 |
아시안 게임 | ||
금메달 | 2002 부산 | 남자 복식 |
은메달 | 2002 부산 | 단체전 |
은메달 | 2002 부산 | 혼합 복식 |
은메달 | 2006 도하 | 단체전 |
동메달 | 2006 도하 | 단식 |
아시아 선수권 | ||
은메달 | 2005 제주 | 단체전 |
동메달 | 2003 방콕 | 단식 |
동메달 | 2005 제주 | 남자 복식 |
월드컵(단식) | ||
은메달 | 2007 바르셀로나 | 단식 |
월드컵(단체전) | ||
은메달 | 2009 린츠 | 단체전 |
동메달 | 2007 마그데부르크 | 단체전 |
주니어 아시아 선수권 | ||
금메달 | 1997 파나지 | 단체전 |
금메달 | 1999 첸나이 | 남자 복식 |
금메달 | 1999 첸나이 | 단식 |
은메달 | 1999 첸나이 | 단체전 |
동메달 | 1997 파나지 | 단식 |
6. 기타
- 어떤 시합에 출전하면 상대 선수가 누구든 본인이 무조건 이긴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출전한다고 한다. 유승민을 지도했던 유남규 감독도 인터뷰에서 일단 무조건 "자기가 이긴다"고 말하는 유승민의 성격이 그를 이 자리까지 이끌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는 상대에 대해 계산적으로 생각하거나 주눅들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치겠다는 각오이기도 하다. 실제로 2004 아테네 올림픽 결승전에서 전술적인 움직임도 있지만 기세 싸움에서도 왕하오를 압도했다는 의견이 많았다. 또 본인은 딱히 왕하오를 라이벌로 생각해본 적은 없고, 중국 선수들은 누가 상대로 나오든 똑같다고 생각하고 경기한다고 한다.
- 은퇴 이후 꽤나 생활체육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추어 탁구인들을 상대로도 원 포인트 레슨을 자주 진행하며, 특히 같은 펜홀더 전형의 동호인들에게는 각별하다고 한다.
- 생활 체육인들에게 "고정관념을 버려라" 라는 식의 말을 자주 한다. 대표적으로 몸을 쓰고 큰 스윙을 반복하는 노가다 탁구 드라이브만 드라이브인 것이 아니고 상황에 따라서 작은 스윙으로 치는 드라이브도 드라이브라고 강조한다.
- 2016년 11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을 당시, 수영선수 박태환에게 2016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 당시 문체부차관 김종의 녹취록에서 김종이 유승민에 대해 "흠이 있어서 IOC 선수위원이 될지 모르겠다"며 비난한 것이 알려졌고, 이에 유승민은 인터뷰에서 "김종의 발언은 황당하고 불쾌하며, 스포츠계의 폐단이 사라지고 선수의 인권과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 2021년 5월 본인 페이스북에 당시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이준석의 도전을 응원하는 깜짝 메시지를 냈다.# 요점은 본인도 젊은데 협회장 같은데 나온다고 무시 많이 당했는데, 그게 젊은 세대들을 더 위축시키는거라며 이런 도전들이 세대 갈등이 아닌 세대 결속의 모멘텀이 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허나 이때 당선된 이준석은 1년만에 쫓겨난다. - 2022년, 본인 유튜브 채널에서 이천수가 밝히길 체력이 엄청나게 좋았다고 한다. 과거 현역 시절 태릉선수촌에서 산 올라가기 훈련을 했는데, 체력이 좋다는 인상이 강한 권투, 레슬링 선수 등이 빠진 날이긴 했지만 유승민이 1등을 하는 걸 보았다고 한다. 2~10위는 전부 축구 선수.#
- 슬하에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축구를 좋아해 축구 선수를 꿈꾸고 있다고 한다.
[1] 계참판공파(사의공파) 28세손 승○(承○) 항렬.
(족보(1)족보(2))[2] 석사 학위 논문: 남자 중·고 및 실업 탁구선수들의 스포츠상해 연구(2012).[3] 현재 비공개 계정이다. 2020년대 들어선 페이스북을 더 많이 활용한다.[4] 경기대학교 석좌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농업기술대학원 특임 교수.[5] 다만 이후 몇 년이 흘러 유승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상황이 바뀌어버려 신생팀 참가 규정에 의해 제주 삼다수가 유승민의 지명권을 가지게 됐는데, 이때 유승민은 이를 거부하고 삼성생명 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중등록 파문으로 법정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6] 훗날 유승민은 자신이 올림픽 1~4위를 모두 해봤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단식 금메달, 단체전 은,동메달, 복식 4위.[7] 올림픽 직전까지만 해도 세계 랭킹 1~3위는 2000년대 중국 탁구 트로이카였던 왕리친, 마린, 왕하오 순이었으나 유승민이 왕하오를 제치면서 시드 배정에서도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즉, 유승민이 상대전적에서 절대열세긴 했지만 기세가 최고조로 오른 당시 기준으론 마냥 언더독은 아니었다. 참고로 왕리친은 준결승전에서 왕하오에게 패해 동메달 획득, 마린은 16강전에서 스웨덴의 얀오베 발드네르(발트너)에게 일격을 맞고 침몰한다.[8] 21세기 올림픽 기준으론 유일한 비(非)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의 미즈타니 준, 이토 미마 조가 혼합복식에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유일은 아니게 되었다.[9] 이는 코치였던 김택수의 전략이 먹혀들어간 부분도 있었는데, 김택수는 왕하오가 결승에 올라올 확률이 높다고 예상하고 맞대결시 왕하오는 이면드라이브로 유승민의 백사이드를 집중 공략할 확률이 높으므로 이는 백핸드 푸쉬로 대응하고, 쇼트와 푸쉬를 제외한 다른 백핸드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포핸드 파워드라이브의 공격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전략을 세워,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이정삼 파트너를 선수촌에 불러와 하루 평균 10000개의 볼을 치게 했다고 한다. 실제 경기에선 1세트 왕하오가 긴장한 탓에 스트레이트 백드라이브를 미스한 것을 재빠르게 캐치하고 리시브 커트를 집요하게 왕하오의 백사이드로 준 뒤 포핸드 랠리를 유도해내 힘으로 압살하는 전략이 주효하게 먹혔다.[10] 참고로 유승민과 왕하오는 사적으론 친하다고 한다.[11]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남녀 개인 단식에서 금은동을 중국이 모두 석권하고, 남녀 모두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2012, 2016 올림픽에서도 남녀 개인단식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석권한 데다 단체전까지 남녀 모두 금메달을 땄다. 2012년부터 단식 선수로는 2명까지만 출전하게끔 규정이 바뀐 것을 고려하면 그냥 중국이 다 해먹는다고 보면 된다.[12] 유승민 커리어의 약점이기도 하다. 다만 아예 곤두박질친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까지도 메달은 획득하며 당시 올드보이 삼인방(유승민, 오상은, 주세혁)의 한 축을 담당한다.[13] 보통 2승 18패라고 언론에서도 거론되는 경우가 많긴 한데, 정작 탁구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성인이 된 이후엔 올림픽 무대 외 유승민이 왕하오를 승리한 경기가 잘 회자되지 않고, 유승민 본인도 인터뷰에서 2승이 주니어 때 2승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있는걸 보면, 주니어때 2승 포함 3승이고 성인 땐 1승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이 필요한 부분.[14] 사실 문대성도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비슷한 방법을 취해 당선된 바 있었다.역시 인지도가 낮으면 열심히 뛰어야[15] 사실 유승민도 현역 시절 남북단일팀에 소속된 바 있었는데, 베이징에서 2004년 열린 남북한·중국 친선탁구대회와 2011년 카타르 도하 '피스 앤드 스포츠컵'이 여기에 해당한다. 특히 피스 앤드 스포츠컵에서는 남북 단일팀의 일원으로 복식을 제패하기도 했다.[16] 다만 후술되어있듯 2024년 9월에 대한체육회장 선거 출마를 명분으로 중도 사임한다.[17] 한국이 이 종목에서 은메달을 받았다.[18] 아테네 올림픽 결승 vs 왕하오 전을 보면 중국 중계진의 해설이 유승민의 서브가 회전도 매우 강하며 서브 에이스(서브 자체로 득점하는 것) 확률이 높은 편임을 언급한다. 왕하오 역시 서브를 제대로 받지 못해 직접 실점하거나 회전을 잘못 읽어 리시브가 뜬 바람에 3구 공격을 제대로 얻어맞는 경우가 자주 나왔다.[19] 벤젠, 솔벤트 등이 함유된 러버 접착제. 러버 내부에 장력을 주어, 스피드와 스핀이 비약적으로 상승하지만 유해성으로 인해 ITTF에서 금지시켰다. 이후 인체에 비교적 무해하고 냄새도 안나는 새 '부스터오일'이 개발되어 이걸 쓰는 선수들도 공공연하게 많고 ITTF에서도 묵인하고 있지만, 공식 승인한건 아니라 탁구계 난제 중 하나다.[20] 백핸드를 드라이브로 선제공격을 당하면 쇼트로 방어하든지 기회를 봐서 백핸드 쪽으로 돌아서서 포핸드 대결을 해야 하는데, 프로 급에서 여유있게 돌아설 수 있게 만만한 공을 주는 것도 아니고 어렵사리 돌아서더라도 이번엔 포핸드 쪽이 뻥 뚫리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렇기 때문에 백핸드 드라이브를 연속으로 당하면서도 쇼트로 계속 밀어주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21] 2010년대 이후 일본식 펜홀더는 백핸드 수비 등의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사장되는 추세며, 사실상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었던 한국마저 셰이크핸드가 주류가 되었다.
(족보(1)족보(2))[2] 석사 학위 논문: 남자 중·고 및 실업 탁구선수들의 스포츠상해 연구(2012).[3] 현재 비공개 계정이다. 2020년대 들어선 페이스북을 더 많이 활용한다.[4] 경기대학교 석좌 교수, 서울대학교 국제농업기술대학원 특임 교수.[5] 다만 이후 몇 년이 흘러 유승민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될 때 상황이 바뀌어버려 신생팀 참가 규정에 의해 제주 삼다수가 유승민의 지명권을 가지게 됐는데, 이때 유승민은 이를 거부하고 삼성생명 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중등록 파문으로 법정 공방이 벌어지기도 했다.[6] 훗날 유승민은 자신이 올림픽 1~4위를 모두 해봤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단식 금메달, 단체전 은,동메달, 복식 4위.[7] 올림픽 직전까지만 해도 세계 랭킹 1~3위는 2000년대 중국 탁구 트로이카였던 왕리친, 마린, 왕하오 순이었으나 유승민이 왕하오를 제치면서 시드 배정에서도 좀 더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다. 즉, 유승민이 상대전적에서 절대열세긴 했지만 기세가 최고조로 오른 당시 기준으론 마냥 언더독은 아니었다. 참고로 왕리친은 준결승전에서 왕하오에게 패해 동메달 획득, 마린은 16강전에서 스웨덴의 얀오베 발드네르(발트너)에게 일격을 맞고 침몰한다.[8] 21세기 올림픽 기준으론 유일한 비(非)중국인 탁구 금메달이었다가, 2020 도쿄 올림픽에서 일본의 미즈타니 준, 이토 미마 조가 혼합복식에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유일은 아니게 되었다.[9] 이는 코치였던 김택수의 전략이 먹혀들어간 부분도 있었는데, 김택수는 왕하오가 결승에 올라올 확률이 높다고 예상하고 맞대결시 왕하오는 이면드라이브로 유승민의 백사이드를 집중 공략할 확률이 높으므로 이는 백핸드 푸쉬로 대응하고, 쇼트와 푸쉬를 제외한 다른 백핸드 기술의 완성도를 높이는 대신 포핸드 파워드라이브의 공격력을 최상으로 끌어올린다는 전략을 세워, 이면타법을 구사하는 이정삼 파트너를 선수촌에 불러와 하루 평균 10000개의 볼을 치게 했다고 한다. 실제 경기에선 1세트 왕하오가 긴장한 탓에 스트레이트 백드라이브를 미스한 것을 재빠르게 캐치하고 리시브 커트를 집요하게 왕하오의 백사이드로 준 뒤 포핸드 랠리를 유도해내 힘으로 압살하는 전략이 주효하게 먹혔다.[10] 참고로 유승민과 왕하오는 사적으론 친하다고 한다.[11]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남녀 개인 단식에서 금은동을 중국이 모두 석권하고, 남녀 모두 단체전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2012, 2016 올림픽에서도 남녀 개인단식에서 금메달, 은메달을 석권한 데다 단체전까지 남녀 모두 금메달을 땄다. 2012년부터 단식 선수로는 2명까지만 출전하게끔 규정이 바뀐 것을 고려하면 그냥 중국이 다 해먹는다고 보면 된다.[12] 유승민 커리어의 약점이기도 하다. 다만 아예 곤두박질친 건 아니라, 2010년대 초반까지도 메달은 획득하며 당시 올드보이 삼인방(유승민, 오상은, 주세혁)의 한 축을 담당한다.[13] 보통 2승 18패라고 언론에서도 거론되는 경우가 많긴 한데, 정작 탁구 매니아들 사이에서도 성인이 된 이후엔 올림픽 무대 외 유승민이 왕하오를 승리한 경기가 잘 회자되지 않고, 유승민 본인도 인터뷰에서 2승이 주니어 때 2승이라는 식으로 말한 적도 있는걸 보면, 주니어때 2승 포함 3승이고 성인 땐 1승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사실 관계 확인이 필요한 부분.[14] 사실 문대성도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비슷한 방법을 취해 당선된 바 있었다.
분류
- 1982년 출생
- 강화군 출신 인물
- 진주 류씨(토류)
- 동남고등학교 출신
- 경기대학교 출신
- 대한민국의 남자 탁구 선수
- 펜홀더
- 2014년 은퇴
- 삼성생명 탁구단/은퇴, 이적
- 원클럽맨/탁구
- 대한민국의 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
- 2000 시드니 올림픽 탁구 참가 선수
- 2004 아테네 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
- 2008 베이징 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
- 2012 런던 올림픽 탁구 메달리스트
- 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2006 도하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
- 병역특례자/탁구
- 대한민국의 남자 탁구 코치
- 탁구 행정가
- IOC 선수 위원
- 대한민국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