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3-12-24 13:49:30

왕윤지

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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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00080><colcolor=#fff> 번옹충후(番禺忠侯)
王允之 | 왕윤지
시호 (忠)
작위 번옹현후(番禺縣侯)
(王)
윤지(允之)
심유(深猷)
생몰 303년 ~ 342년 10월 11일
출신 낭야군(琅邪郡) 임기현(臨沂縣)
부친 왕서(王舒)
배우자 순씨(荀氏)
자녀 왕희지(王晞之), 왕중지(王仲之)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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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진의 인물. 명문 귀족인 낭야 왕씨 집안 출신으로 회계내사 왕서의 아들.

2. 생애

아버지의 사촌형인 왕돈은 어린 왕윤지를 보고 총명한 것이 마치 어렸을 때의 자신을 보는 것 같다며, 어딜 가든 항상 왕윤지를 수레에 태워 데리고 다녔고, 잠을 자거나 식사를 할 때조차 그와 함께 했을 정도로 매우 총애하였다.

태녕 원년(323년) 8월, 어느 날 밤, 장성하여 총각이 된 왕윤지는 왕돈과 술을 마시다가 취기를 견디지 못하고 잠을 청하기 위해 드러누웠다. 왕윤지가 뻗은 것을 확인한 왕돈은 자신의 심복인 전봉과 그 자리에서 반란 계획을 상의했는데, 아직 잠에 들지 않았던 왕윤지는 그것을 엿듣고는 잠에서 깨고 말았다. 왕윤지는 이들의 의심을 피하고자 누운 상태로 즉시 구토하여 자신의 옷을 일부로 더럽혔다. 전봉은 왕윤지가 일어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자리를 떠났으나, 왕돈은 왕윤지가 술에 과하게 취했으리라 여기고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이후 왕윤지는 왕돈의 허락을 얻고 수도로 귀환해 아버지 왕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왕서는 이를 승상 왕도에게 보고해 반란에 대비케 했다.

태녕 원년(323년) 11월, 왕서가 형주자사에 임명되자, 왕윤지는 아버지를 따라 서부(西府)[1]로 들어갔다.

태녕 2년(324년) 7월, 반란을 일으킨 왕돈은 명황제 사마소의 군대에 의해 평정되었다. 명제가 왕윤지를 출사시키려 하니, 왕서가 반대하며 말했다.
"신의 아들은 아직 너무 젊은 나머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에 명제가 왕서의 말을 따랐다.

함화 원년(326년) 8월, 왕서가 회계내사에 임명되자, 왕윤지는 이번에도 아버지를 따라 회계로 이동했다.

함화 3년(328년) 5월, 소준의 반란군이 도성 건강(建康)을 장악했을 때, 왕서는 역적 소준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3오(三吳: 오, 오흥, 회계)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러나 왕서의 선봉은 소준의 장수 장건(張健)과 관상(管商)에게 연거푸 격파당했고, 오흥(吳興)까지 적에게 함락되어 오흥태수 우담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왕서는 비책으로 왕윤지를 행양열장군으로 삼고, 장수 서손(徐遜), 진유(陳孺), 주도(朱燾)와 함께 정예병 3,000으로 무강(武康)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게 했다. 왕윤지는 승리에 취해 있던 적을 기습해 대파하고, 반란군이 버리고 간 배랑 병장기를 거둔 뒤, 별동대를 보내 우담까지 구원했다.

당시 소준의 장수 한황(韓晃)은 의성(宣城)을 허물고, 그곳에서부터 고장(故鄣)까지 이어지는 긴 성벽을 축조하고 있었다. 왕윤지는 겨우 얻은 승세를 놓치지 않고자, 주도, 우담, 하준(何準)[2] 등을 보내 한황을 공격했고, 두 군대는 호수 위에서 전투를 벌였다. 우담이 강노를 이용해 한황군을 궁지에 몰아세우니, 한황 등은 마침내 패배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주도 등은 한황을 격파하고 적군의 수급 1,000여 개와 포로 2,000여 명을 얻었다.

함화 3년(328년) 10월, 도간이 건강에 남겨진 소준의 반란군을 몰아내고 도성 건강에 입성했다. 도간은 행대를 세우고 상표해 왕윤지를 오군, 의흥(義興), 진릉(晉陵) 3군의 정토군사로 삼았다.

함화 4년(329년) 11월, 소준 사후 그의 동생 소일을 옹립했던 반란군들이 마침내 패배해 석두성(石頭城)마저 잃고 남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석두성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수괴인 소일이 전사하자, 한황은 잔당을 거느리고 곡아(曲阿)에 있는 장건과 합류했다. 반란군 잔당은 오흥을 공략하기 위해 계속 남쪽으로 이동했는데, 왕윤지가 연릉(延陵)과 장당호(長塘湖)에서 이들을 요격해 대파하고 남녀 10,000여 명을 사로잡았다. 이후 흩어진 잔당은 서주자사 치감에게 소탕당하면서 소준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였다. 왕윤지는 소준의 난을 진압한 공을 인정받아, 건무장군, 전당현령(錢唐縣令), 영사감도위(領司鹽都尉)에 제수받고, 번옹현후(番禺縣侯)에 봉해져 식읍이 1,600호에 이르렀다.

함화 8년(333년) 6월, 아버지 왕서가 사망하자 부친상을 이유로 사직했다. 왕서의 시신이 묻힌 후, 왕윤지는 조정으로부터 의흥태수로 부임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그는 슬프다는 이유로 받들려 하지 않았다. 친척인 사도 왕도가 서신을 보내 왕윤지를 설득했다.
선조이신 태보 왕상과 안풍후 왕융께서는 천하에 효로 이름을 떨치시고, 관직에 임명되었을 때 마다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문은 겨우 죽음을 면하고 자제들도 뿔뿔이 흩어졌는데, 친족인 네가 관직을 거부한다면 나는 조정에 뭐라 설명해야 하겠느냐!
하지만 왕도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왕윤지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함화 9년(334년), 선성내사, 감양주강서4군제군사(監揚州江西四郡諸軍事), 건무장군에 제수받고 우호(于湖)를 진수했다.

함강 원년(335년) 4월, 후조중산왕 석호가 척후 기병 10명과 함께 장강 인근을 순수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역양태수 원탐이 이를 보고 조정에 후조의 기병이 이르렀다고만 보고하고 그 수에 관한 정보를 누락하니, 조정은 석호가 대대적인 강동 정벌에 나서는 줄 알고 크게 진동했다. 이때 왕윤지는 후조의 침략을 막으라는 조정의 명을 받아 군대를 거느리고 무호(蕪湖)에 주둔했다. 얼마 뒤, 원탐이 조정에 다시 제대로 보고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고 왕윤지는 서중랑장, 가절로 승진했다.

함강 6년(340년), 조정에서 천거되어 남중랑장, 강주자사에 임명되었다. 왕윤지는 정무에 임함에 있어 위엄과 은혜가 대단하여 여러 사람들의 신임을 받았다.

함강 8년(342년) 초, 유량의 동생인 예주자사 유역(庾懌)이 왕윤지를 독살하고자 그에게 술을 보냈다. 이를 수상하게 여긴 왕윤지는 개에게 그것을 마시게 했는데, 개가 술을 마시고 죽자 이 사실을 은밀히 성황제 사마연에게 상주했다. 이에 성제가 크게 화를 내며 소리쳤다.
"큰삼촌(유량)이 이미 천하를 어지럽혔거늘, 작은삼촌마저 이를 따르려 하는가!"
그러고는 짐독을 보내 작은외삼촌 유역을 사사했다.

함강 8년(342년) 8월, 왕도의 아들 왕태(王恬)는 부친상을 마치고 예장태수에 임명되었다. 그 소식을 들은 왕윤지는 놀라, 유빙(庾冰)에게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승상의 아들을 먼 외지로 보내서는 안 된다 주장하며, 강주자사에서 해임시켜 줄 것을 자청했다. 유빙은 이를 몹시 부끄럽게 여겨, 왕태를 오군태수로 옮기고, 왕윤지를 위장군, 회계내사로 삼았다.

함강 8년(342년) 10월 11일[3], 세상을 떠났다. 향년 40세. 시호는 '충(忠)'. 아들 왕희지(王晞之)가 그의 작위를 이어받았다.


[1] 형주 강릉(江陵)에 위치한 형주자사 치소.[2] 목장황후 하법예의 아버지 하준과는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이인이다.[3] 양력으로 계산할 시 1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