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1 16:34:57

우원식/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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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실향민 2세2. 정계 입문
2.1. 서울시의원2.2. 제17대 국회의원2.3. 제18대 국회의원 낙선2.4. 제19대 국회의원
2.4.1. 을지로위원회 위원장
2.5. 제20대 국회의원
2.5.1. 원내대표
2.6. 제21대 국회의원2.7. 제22대 국회의원
2.7.1. 국회의장

1. 실향민 2세

1957년 9월 18일, 서울특별시 성동구에서 아버지 우제화와 어머니 김례정 사이에서 9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우제화 옹은 황해도 연백군 출신이고, 누나 둘은 북한에 살아 있다고 한다. #

2010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모친인 김례정 씨가 남측 최고령자(당시 나이 96세)로 참석해 화제가 된 바 있다. 헤어진지 60년 만에, 상봉신청을 한지 15년 만에 누나 정혜 씨와 상봉이 이루어졌다.
파일:상봉2.png
2010년, 누나와의 상봉

서울경동초등학교(57회), 서울 성수중학교(3회), 경동고등학교(32회), 연세대학교 공과대학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2008년 12월 연세대학교 공학대학원에서 환경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78년 2월 25일 육군에 입대하여 수도방위사령부 예하 제60훈련단에서 공병(야전건설 특기)으로 복무하였으며, 1980년 7월 24일 병장으로 만기전역하여 병역을 마쳤다.

2. 정계 입문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익환 목사 등과 함께 김대중 지지운동에 참여했다. 이듬해인 1988년 문동환, 박영숙, 임채정, 이해찬 등 재야민주화운동가 98명이 결성한 평화민주통일연구회(약칭 평민연)을 통해 평민당에 입당하면서 현실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파일:2. 이희호여사와 박영숙 국회의원과 함께.jpg
이희호 여사, 박영숙 국회의원과 함께

평민당 인권위원회 민권부국장을 맡아 군부독재 정권의 인권유린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88-89인권백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당시 김대중 총재가 노태우 대통령과의 회동 시에 전달했다고 한다. #

2.1. 서울시의원

1991년 서울 노원구 제4선거구에서 서울시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2년 재검표 끝에 서울 노원구 을에서 당선된 임채정 국회의원의 보좌관을 거쳐,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서울 노원구 제3선거구에서 서울특별시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 노원구 상계동 쓰레기 소각장 문제가 불거지자 주민대책위원으로 참여하면서 환경운동에 나선다. 시의원으로 당선된 후 폐기물 관련 조례 개정, 단식농성 등을 통해 문제해결에 앞장섰다. 결국 1996년 서울시와 주민 간의 쓰레기 소각장 운영협의를 4년간의 분쟁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특히 1996년에 경실련 지방의회 평가에서 전문성 등 7개 항목 모두 만점을 받아 700점 만점으로 환경관련부분 서울시의회 1등 의원으로 선정되는 명예도 얻었다.

2.2. 제17대 국회의원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노원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7대 국회에서 4년간 환경노동위원회에서 활동했으며, 2006년에 열린우리당 수석 사무부총장으로 활동했다.

‘서울균형발전을 위한 국회의원 연구모임’ (대표의원 임채정, 연구책임의원 우원식)을 만들어서 강·남북간 재정불균형 해소를 위한 지방세법을 개정하여 강북지역에 자치 재정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2007년 4월, 당시 열린우리당 우원식 의원은 재산세 100%를 공동과세하는 ‘지방세법개정안’을 발의했지만, 당시 강남지역 구청장 및 한나라당 의원들의 법안처리 반대로 인해 결국 재산세 40~50%만을 공동과세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개정안의 주요내용은 서울특별시 자치구의 재산세를 서울특별시가 2008년도에는 40%, 2009년도에는 45%, 2010년도 이후에는 50% 공동과세하여 각 자치구의 재정력, 인구, 면적 등을 고려하여 각 자치구에 배분하는 것이다.

공공기관의 장애인을 전체 직원의 2% 이상 의무 고용을 법제화해 장애인도 교사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2005년 대표발의한 ‘장애인고용촉진 및 직업재활법’에 의해 의무고용 대상에서 제외됐던 법관, 헌법 연구관, 공립 유치원 및 초등학교 교사, 정무직 및 일부 기술직 공무원 분야에도 장애인 의무고용 원칙이 적용되었다. #

2007년 주한미군기지 반환 협상의 문제점과 미군의 기름 유출에 따른 환경오염 치유를 위한 국회청문회를 이끌어 냈고, 반환 협상의 부당함과 미군의 환경오염 은폐 사실을 밝혀냈다. #

2.3. 제18대 국회의원 낙선

이후 2008년에 재선 출마를 선언했다. 그리고 민주당 공천을 받고 출마해 경선에 승리해 후보자가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 권영진 후보에게 5.84%p 차로 밀리며 낙선해 재선에 실패했다.

2.4. 제19대 국회의원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통합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새누리당 권영진 후보에게 설욕하였다. 2012년 원내대변인을 거쳐, 18대 대선 문재인 후보 총무본부장으로 캠프 살림살이를 맡기도 했다. 원내수석부대표를 거쳐 2013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당선됐다.

2014년 세월호 참사(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 당시, '세월호 침몰 사고의 진상 규명을 위한 국정조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세월호 특조위는 정부의 초동대응 실패, 해경 녹취록 공개, 해수부의 관리부실 등을 밝혀냈다.

2.4.1. 을지로위원회 위원장

2013년 ‘남양유업 갑질 사태’(남양유업 대리점 상품 강매 사건)와 같은 연이은 대기업 갑질 사건이 벌어지자 ‘갑의 횡포를 막고, 을의 눈물을 닦아주자’라는 목적을 갖고 ‘을지로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을지로위원회’는 중구 을지로가 아니라 ‘乙’을 위한 길(路), 법(law), 노력(勞)라는 뜻이다.

을지로위원회는 각종 불공정·부당 행위로부터 자영업, 중소기업, 간접고용 비정규직 등 을(乙)의 권리를 보호하고 갈등을 중재하며 2017년 전당대회 때 전국위원회로 승격되었다. 대표적인 갑질 사례인 남양유업 교섭을 이끌어 낸 것을 시작으로 대기업 기술편취로부터 중소기업 보호, 학교비정규직 처우개선 예산 확보 및 정규직화 추진, 우체국 택배 기사 처우개선, 국회 청소노동자 직접고용, 용산 화상경마도박장 폐쇄 타결, 삼성 반도체 백혈병 피해보상 중재, 간접고용 비정규직 위험의 외주화 개선 등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성과를 냈다. 더불어 2015년에는 자영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 3,000명이 ‘을 당원’으로 입당하기도 했다.

‘을지로위원회’는 문재인 대통령의 제1호 경제민주화 공약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당·정·청 을지로민생회의’를 만들어 민생과제 해결을 위한 당·정·청의 공조·협력체계를 구축했다. 또한 자영업, 중소기업, 노동자 등 현장 전문가들이 함께 민생과제를 발굴하고 해결하는 ‘민생연석회의’출범을 주도하여 카드 수수료 1%대 인하, 편의점주 최저수익보장 및 상생협력 확대, 제로페이 활성화, 택배노동자 과로사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 등 국민들이 체감하는 성과를 내는데 기여했다.
파일:국회 청소노동자 정규직전환.jpg
국회 청소노동자와 함께
또한 국회 청소노동자의 정규직 전환에도 직접 나서,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가 이루어지던 2016년 말에 결국 이를 성사시켰다.[1] 이를 마지막으로 을지로위원장을 이학영 의원에게 인계한다.

2.5. 제20대 국회의원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 지역구에 현역 단수공천을 받아 출마한다. 그리고 당선되어 3선에 성공한다.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에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출마선언문 우상호 후보에게 결선 투표에서 7표차로 낙선하였다. 2019년 한 언론사의 초선의원 대상 설문조사에서 의정활동 롤모델로 삼고 싶은 선배의원 1위로 뽑혔다.

2016년 가습기살균제 사고 진상규명과 피해구제 및 재발방지 대책마련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특위 위원들과 함께 영국에 있는 옥시레킷벤키저(RB코리아) 본사를 방문하여 옥시레킷벤키저(RB코리아)의 영국 본사인 레킷벤키저(Reckitt Benckiser) 그룹 최고경영자(CEO)가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과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파일:가습기살균제 특위 위원장.jpg
가습기살균제 특위 위원장 시절

2.5.1. 원내대표

2017년 5월 16일,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 선거에서 홍영표 의원을 61표 대 54표로 꺾고 원내대표에 당선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조기 대선(제19대 대통령 선거)으로 인수위도 없이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안정적인 출범을 뒷받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원내대표 당선 이후 야당과의 타협과 유화적 메시지에 앞장섰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김명수 대법원장 후보의 인준을 위해 당시 국민의당 당 색깔인 초록색 넥타이를 매고 야당과의 협치를 주문했던 게 있다. 정치인에게 넥타이의 색은 보이는 메시지 중에서는 가장 눈에 띄므로 일반적으로 자신의 당 색깔에 맞추는데, 대통령이 직접 야당의 색에 맞춘 것이다. 이를 근거로 추경안 통과, 헌법재판소장 임명 등 문재인 대통령이 강조한 협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야당과의 협치 행보를 보였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파일:이야기6_녹색넥타이.jpg
대법원장 인준을 위해 맨 초록 넥타이

2018년 예산안 통과 과정에서 법정 시한은 지키지 못했지만 자유한국당을 패싱(...) 하고 국민의당에 올인한다는 전략을 세워 공무원 인원을 양보하고 거의 모든 정부 정책을 지켜내 우 원내대표를 미심쩍어 하는 강성 지지자들도 이번에 우 원내대표가 선방했다고 평가했다. 우 원내대표 개인적으로는 이번 협상에서 아동수당 지급 대상에서 상위 10%를 제외해 '보편 복지'의 의미가 퇴색된 것이 가장 아쉽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다.

드루킹 특검으로 국회 파행이 장기화되자, 드루킹 특검과 추경안 통과, 판문점 선언 국회 비준, 그 외 민생 법안 처리 등을 맞바꾸는 '빅딜'을 제안했으나 야당에서 '무조건 특검 수용'을 주장하면서 성사되지 않았다. 다만, 일부 지점에서 여야 합의가 이루어졌고, 국회가 정상화되나 싶었지만 5월 9일,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가 특검 대상에 문재인 대통령도 포함된다고 주장하여 판이 깨졌다. 우 원내대표는 야당의 본심이 드러났다며 "더 이상의 협의는 어렵겠다"고 하여 특검 관련 협의를 중단했다.#

2018년 5월 9일부로 원내대표 임기가 마무리되었다. 우 원내대표는 마지막 원내대표회의에서 "문재인 정부의 첫 원내대표 자리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자리였지만 그 책무와 숙명이 참 무거웠다"고 소회를 밝혔다. 그리면서 "한국당의 정치 파업으로 6월 국민개헌의 기회를 놓친 것은 천추의 한"이라고 말한 뒤 한국당에 추경 및 민생입법에 대한 협조를 촉구했다. #

마지막 대표회의를 끝마치고 같은 날 오전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김성태 원내대표의 병문안을 갔다. 이때 김 원내대표가 “힘들어 죽겠다. (합의) 좀 해주고가”라는 말을 되풀이했지만, “그럴 수 없게 됐잖나. 어제 유승민 바른미래당 대표가 (특검 수사범위를) 문재인 대통령까지 해야 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하겠나”며 거절했다. #

2.6. 제21대 국회의원

21대 총선에서는 예비후보로 등록하고 지역구에 단수공천을 받아 4선에 도전한다. 상대는 한때 같은 당 동지로서 노원구 5회 지방선거를 지휘한 미래통합당 이동섭 전 의원이었지만, [2] 이변 없이 62%의 득표율로 큰 차이로 4선에 성공했다.

그리고 2020년 8월에 열릴 예정인 제4차 정기전국대의원대회에서 당 대표 선거에 출마 할 것을 시사했다. 그러나 이낙연 전 의원과 김부겸 전 의원이 당대표로 출마하게 되자 “당 안팎의 많은 분들과 상의한 끝에 비상한 시국에 치열한 경쟁보다는 위기 극복을 위해 현장에서 당의 개혁을 일구며 뒷받침할 때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불출마 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2021년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열린 조기 전당대회에 출마했다. 그러나 총 득표율 29.38%를 기록하며 35.60%를 득표한 송영길 , 35.01%를 득표한 홍영표 후보에게 밀려 3위로 낙선했다.

20대 대선 민주당 경선에서는 이재명 지지를 공식적으로 선언하며 이재명 캠프에 합류했다. 그는 이재명과 회동에서 불평등, 불균형, 양극화 해소라는 시대 정신을 실천할 사람이 아니면 국민의 선택을 받을 수 없고 우리는 이길 수 없다며 강력한 사회경제적 개혁을 해낼 사람을 통해서만 우리는 승리하고 정권 재창출을 해낼 수 있다고 밝혔다.#

연세대학교 출신 우원식 의원은 동문 김성환 의원과 함께 2022년 7월 13일 연세대를 방문했다. 연세대에서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파업하는 청소노동자들과 면담했다. #

2022년 9월 26일 '공짜노동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 및 고용정책기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노동현장에서 연장·야간수당을 주지 않기 위해 실제 근무 시간과 상관없이 정해진 임금만을 주는 포괄임금제를 금지하는 법이다.

2023년 6월 28일부터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며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2023년 7월 10일 15일차 만에 이재명 대표의 요청을 받아들여 단식을 중단했다. 6일간 단식을 함께한 김한정 전 의원도 단식을 함께 중단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략이 장기적 대응으로 바뀐 것으로 풀이 된다.

8월에는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총괄대책위원장을 맡아 일본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8월 24일 육군사관학교 독립유공자 흉상 철거 논란이 나오고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였는가에 대한 논란이 나오며 홍범도장군 기념사업회 이사장인 우원식 의원도 라디오 매체 등에 불려다니며 유감을 표명했다.

9월 이재명 대표가 단식 투쟁을 실시하자 이재명의 왼편에서 자리를 지켰다. 이재명이 단식을 중단하고 국회에서 이재명 체포동의안이 가결되어 영장실질심사 일정이 잡히자 당 지도부가 사퇴하였는데 원내대표 유력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보궐선거에 출마하지 않았다. 홍익표원내대표 선출 직후에 SNS를 통해 이재명 대표를 지키자고 말하며 본인은 이미 원내대표 경험이 있고 주변에서 타인에게 양보해야 한다는 말이 나와 그를 따랐다고 밝혔다.

2.7. 제22대 국회의원

선거구 개편으로 3개였던 노원구 선거구가 2000년 16대 총선 이후로 24년 만에 2개로 줄어 노원구 갑 현역이던 고용진 전 의원과 공천장을 놓고 한판승부를 벌이게 되었다.[3] 자신의 지역구가 분해되어서 각각 갑, 병에 붙은 만큼 어딜 가도 불리했지만 을구 행정동 7개 중 4개가 갑에 붙었고, 갑구의 공릉동은 을구의 중계, 하계동과 연계가 되어서 좀 더 나은데다가, 무엇보다 병구의 김성환 의원과 절친한 사이라 갑구 출마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4] 조직싸움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원내대표예결위원장을 모두 지낸 중진의원인데다, 범친명계이기까지 해서인지 비명계로 분류되는 고용진 의원을 꺾은 것으로 보이며, 2004년 17대 총선부터 6회 연속으로 공천[5]되는 기록을 세웠다.

본선에서도 60%에 육박한 득표율로 전직 국회의원이었던 국민의힘 현경병 후보를 무난하게 누르고 5선에 성공하였다. 제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에 출마했으나 하필이면 경선 상대가 6선의 추미애 당선인이라서 패배할 가능성이 크게 점쳐지고 있었다. 추미애 의원이 선수가 앞서는데다 다른 친명계 후보들과의 단일화를 이뤄내는 모양새까지 연출해 추 의원의 의장 당선이 확실시되는 상황. 사실상 러닝메이트 느낌이 강했었다.

그러나 5월 16일,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추미애를 제치고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후보자로 선출되었다. # 언론에서도 의외라는 반응인데, 추미애는 초강성으로 분류되어 당 내 재선 이상 의원을 중심으로 반감이 상당했던 것으로 알려졌다.[6] 국회가 생산적으로 결과물을 내야 하는데 너무 강경 일변도로 갈 수 있다는 당 내 우려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우원식 의원 역시 민주당 내에서는 꽤 강경한 성향이다. 국회의장 선거 입후보 당시에도 "중립은 몰가치가 아니다"라며 강성임을 어필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런 우원식을 상대적으로 온건하게 보이게 할 정도로 추미애 의원은 동료들 입장에서는 굉장히 강경파로 보였다는 것이다.

친명계에게 어필하는 측면에서도 사실 '명심'은 추 당선인에게만 쏠린 것이 아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우원식 의원 역시 더불어민주당 제20대 대통령 후보 경선 때부터 이재명을 지지했던 원조 친명으로 분류되면서도 당 내 신뢰가 높고 이 대표와 함께 21대 국회에서 개혁입법을 위해 호흡을 맞춰온 사이인 만큼 이재명 대표 입장에선 우원식 의원도 국회의장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또한 이재명 대표 역시 추미애 의원을 부담스러워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한 비밀로 돌아다니기도 했다. #. 한 재선 의원 역시 언론사 인터뷰에서 "그간 의원들에게 전달된, 명확하게 '명심은 추미애'라는 확실한 시그널이 없었다"고 귀뜸했다. 이렇다보니 상대적으로 구설수 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우원식이 의도치 않게 반사이익을 얻은 측면도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일부 민주당원들의 여론은 썩 좋진 않은 편이다. "박병석김진표를 겪고도 아직도 협치 운운하며 국민의힘과 손잡길 원하다니 정신을 못 차렸다"는 비판적인 반응이 우세하며, 정청래 의원 역시 "당원이 주인이어야 하는 정당이 당원을 무시하고 묵살하며 의견을 귀담아듣지 않는 현실이 착잡하다"며 우원식의 후보 당선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강하게 내세웠다. # 더불어민주당 의원들끼리만 선거를 했음에도 당심과 판이하게 다른 결과가 나온 것은 의외로 볼 수 있다. 우원식 의원 입장에서는 가시적인 대정부 투쟁력을 보이면서 당원들의 반발을 달래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으며,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의장상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를 의식한 듯 당선 소감문에 <우리는 이재명 대표를 중심으로 하나 된 민주당입니다>라며 단합의 메세지를 냄과 동시에 "이번 의장선거를 두고 언론에서 명심, 당심에 대한 부풀리기 기사가 너무 많았습니다."라며 언론에 대한 강한 불쾌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에 정청래 의원은 "현재 당원들이 분노하는 것은 우원식 개인의 능력에 관한 문제가 아닌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당원들의 여론과 의견을 묵살했다."라는 점이 논쟁점이지 이것을 당 갈라치기로 여기고 있다며 우원식 및 우원식의 지지자들이야 말로 당 갈라치기의 여론으로 몰고가지 말라며 요점을 제시함과 동시에 우원식 의원이 논점 흐리기를 하고 있다며 정면으로 재반박 및 비판하는 답변을 했다.#

2.7.1. 국회의장

2024년 6월 5일에 열린 제22대 국회 첫번째 본회의에서 추미애법무부장관을 꺾고 전반기 국회의장으로 공식 선출되었다. 선출 직후 국민의힘과의 상임위원장 문제로 충돌하자 합의를 위해 최대한 노력했지만 결국 의견 차이가 전혀 좁혀지지 않자 국회법에 따라 국회를 개원하여 논란의 중심이던 법사위원장을 포함해 11개의 상임위원장을 선출할 수 있게 했다. 여기에 과거의 의장들과 달리 현장 친화적 행보를 자주 보이고 있는데[7], 사실 이는 우 의장이 본진인 민주당에서도 을지로위원회를 처음 만든 것 등 적극적 민생주의자에 가까웠단 걸 생각한다면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11개 상임위원장 선출 이후로는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6월 17일에 했던 인터뷰에서는 여야가 최대한 협상을 해봐야 겠지만 협상이 잘 되지 않는다면 머지않은 시점에 결단을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국민의힘에서도 초기와 달리 점차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 상황인 만큼 좀 더 지켜보자는 취지인 것으로 보인다.

2024년 6월 19일에 입장문을 통해 23일까지 협상을 마무리 해달라고 최후통첩을 했다#. 결국 국민의힘이 6월 24일에 기자회견을 통해 추경호 대표의 사직 선언 및 7개 상임위를 수락하며 항복을 선언함으로서 줄다리기 같았던 상임위 논쟁은 일단락이 되었다.

2024년 7월 17일, 국회의장으로서 야당에게는 방송4법 단독 입법과 방통위원장 탄핵 논의 중단을, 정부여당에게는 방통위의 공영방송 이사진 선임을 중단하고 방송4법에 대해 범국민협의체를 만들어 논의하자는 중재안을 제안했다.# 이후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중재안을 수용했지만 국민의힘에서 중재안을 거부하자 "상황의 변화가 없다면 의장은 본회의에 부의된 법안에 대해서 내일부터 순차적으로 처리해 나갈 수밖에 없다"라고 밝혔고#, 다음날인 2024년 7월 25일 채상병 특검법과 방송4법 등을 순차적으로 처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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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대 총선 결과 더불어민주당 출신 국회의장이 뽑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2] 이동섭 전 의원은 당시 민주당 노원구 병 지역위원장이었다. 20대 총선에서 턱걸이로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된 뒤 지역구를 모교 용인대가 있던 용인시 갑으로 정했다가 21대 총선 직전에 노원구로 리턴한 상황. 자신의 원래 지역구에는 이준석 최고위원이 공천을 이미 받은 탓에 노원구 을로 대신 나오는 것.[3] 3개 지역구 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라 당시 상대의 지역구들에 플래카드를 걸어서 노원구 곳곳에서 의원 2명의 플래카드가 걸리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4] 김성환은 22대 국회 전반기 국회의장 선거에서 우원식이 깜짝 선출되어서 당원들의 거센 항의가 일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우원식에게 투표했음을 밝히며 그를 응원할 정도였다. 물론 친분을 떠나서 고용진도 지역에 상당한 기반을 구축한 지역 밀착형 정치인이긴 하지만 재선 구청장 출신인 김성환보다는 훨씬 쉬운 상대로 여겨졌을 것이다.[5] 다만 선거구가 개편되어 (구) 노원구 을 일부가 노원구 갑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동일 지역구라는 조건은 충족하지 못한다. 그리고 구로구 갑7회 연속 공천된 이인영의 사례가 있다.[6]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최측근 중진인 정성호 의원이 21대 국회 시절 추미애에게 보였던 모습을 보면 의원들의 표심은 생각보다 쉽게 짐작 가능하다.[7] 국가의전서열 2위가 되고 나서도 지역구에 거의 매 주말마다 나타나 민원을 청취하고 있다. 심지어는, 11개 상임위원장 선출을 위한 본회의 개최를 지역구 현장민원실에서 선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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