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이 카즈히사의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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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이 카즈히사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NPB 일본시리즈 우승반지 | |||||||||||||||||||||||||||||||||||||||||||||||||||||||||||||||||||||||||||||||||||||||||||||||||||||||||||||||||||||||||||||||||||||||||||||||||||||||||||||||||||||||||||||||||||||||||||||||||||||||||||||||||||||||||||||||||||||||||
1993 | 1995 | 1997 | 2001 | 2008 |
1995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고 승률 | ||||
키토 마코토 (히로시마 도요 카프) | → |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사이토 마사키 (요미우리 자이언츠) |
1998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
야마모토 마사 (주니치 드래곤즈) | → |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200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다 탈삼진 |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드래곤즈) |
2000년 일본프로야구 센트럴 리그 최우수 방어율 | ||||
우에하라 코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 → | 이시이 카즈히사 (야쿠르트 스왈로즈) | → | 노구치 시게키 (주니치 드래곤즈) |
이시이 카즈히사의 역임 직책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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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fffff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스왈로즈]] 등번호 16번}}} | |||||||||||||||||||||||||||||||||
팀 버트서스 (1991) | → | 이시이 카즈히사 (1992~2001) | → | 타카이 유헤이 (2003~2005) | ||||||||||||||||||||||||||||||
{{{#ffffff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등번호 17번}}} | ||||||||||||||||||||||||||||||||||
제로니모 베로아 (2000) | → | 이시이 카즈히사 (2002~2004) | → | 제이슨 렙코 (2005~2009) | ||||||||||||||||||||||||||||||
{{{#ffffff [[뉴욕 메츠|뉴욕 메츠]] 등번호 23번}}} | ||||||||||||||||||||||||||||||||||
제이슨 필립스 (2003~2004) | → | 이시이 카즈히사 (2005) | → | 훌리오 프랑코 (2006~2007) | ||||||||||||||||||||||||||||||
{{{#ffffff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등번호 16번}}} | ||||||||||||||||||||||||||||||||||
타카이 유헤이 (2003~2005) | → | 이시이 카즈히사 (2006~2007) | → | 카토 미키노리 (2008~2011) | ||||||||||||||||||||||||||||||
{{{#fff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61번}}} | ||||||||||||||||||||||||||||||||||
호시 히데카즈 (2005~2007) | → | 이시이 카즈히사 (2008) | → | 타자와 유야 (2010) | ||||||||||||||||||||||||||||||
{{{#ffffff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등번호 16번}}} | ||||||||||||||||||||||||||||||||||
와쿠이 히데아키 (2005~2008) | → | 이시이 카즈히사 (2009~2013) | → | 키쿠치 유세이 (2014~2018) | ||||||||||||||||||||||||||||||
{{{#ffffff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번호 99번}}} | ||||||||||||||||||||||||||||||||||
스테판 로메로 (2020) | → | 이시이 카즈히사 (2021~2022) | → | 결번 | ||||||||||||||||||||||||||||||
{{{#ffffff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등번호 16번}}} | ||||||||||||||||||||||||||||||||||
와쿠이 히데아키 (2020~2022) | → | 이시이 카즈히사 (2023) | → | 결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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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GM | |
이시이 카즈히사 石井一久 | Kazuhisa Ishii | |
<colbgcolor=#900><colcolor=#fff> 생년월일 | 1973년 9월 9일 ([age(1973-09-09)]세)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출신지 | 치바현 치바시 와카바구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좌투좌타 |
프로입단 | 1991년 드래프트 1순위 (야쿠르트) |
소속팀 | 야쿠르트 스왈로즈 (1992~2001)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2002~2004) 뉴욕 메츠 (2005)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2006~2007)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2008~2013) |
지도자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감독 (2021~2023) |
프런트 |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이사 GM (2018~2022)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수석 디렉터 (2024)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이사 GM (20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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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前 일본프로야구, 메이저리그 선수. 2021년부터 일본프로야구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감독을 맡는다.2. 선수 경력
2.1. 일본프로야구 1기 시절
2.1.1. 야쿠르트 시절
도쿄 학관 우라야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1년에 열린 일본프로야구 신인선수 선택회의에서 1순위로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했다. 원래는 축구 선수가 하고 싶었는데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프로야구 선수가 되었다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다. #1년차인 1992년부터 1군 무대를 밟았고, 같은 해 일본시리즈 3차전에서 선발 투수로 등판하기도 했다. 무려 정규시즌 무승리 고졸 신인 투수의 사상 첫 일본시리즈 선발 등판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는데, 아쉽게도 4회에 리드를 허용하고 조기강판되면서 3.1이닝 2실점 패전 투수가 되었다.
1993년 8월 3일 한신 타이거스를 상대로 프로 첫 승리를 기록했고, 1995년부터 붙박이 선발 투수로 뛰면서 26경기(21경기 선발) 등판, 153이닝, 13승 4패, ERA 2.76, 159K의 호성적을 내며 야쿠르트를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고 팀의 중심 투수로 성장했으나 1996년에는 어깨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았고 후반전 복귀 후에도 5점대 ERA로 부진했다. 1997년에도 어깨 문제로 시즌 중반까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합류해 재활 훈련을 받았고, 후반전에 복귀해 다시 뛰었는데 9월 2일에 요코하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와의 원정경기에서 피안타 0개, 사사구 4개로 일본프로야구 역대 76번째 노히트 노런[1][2]를 기록했다. 그 해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2년 만의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일구어내고 이시이 본인도 1차전에서 당시 일본시리즈 타이기록이었던 12탈삼진 완봉승, 시리즈 제패가 결정된 5차전에서는 구원 등판 후 승리투수가 되어 2승을 거두며 시리즈 우수선수상을 수상하는 겹경사를 맞았다.
1998년에는 개인 첫 타이틀인 최다탈삼진 타이틀과 함께 K/9 1위[3]를 기록했고, 2000년에는 2번째 최다탈삼진 타이틀과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수상했다.
2.2.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시절
2.2.1. LA 다저스 시절
소속팀 야쿠르트가 센트럴리그 우승과 일본시리즈 우승[4]을 차지한 2001년 시즌이 끝나고 MLB 도전을 선언하는데, 하필이면 9.11 테러가 일어나는 바람에 잠시 MLB행을 중단한다. 그러다가 2002년 1월 7일에 LA 다저스가 포스팅 시스템에 입찰해 단독 협상권을 따냈고, 결국 이시이는 LA 다저스와 3년 1230만 달러의 계약을 맺고 자유계약으로 입단하며 노모 히데오와 한솥밥을 먹게 됐다.4월 6일에 열린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홈 경기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여 5⅔이닝동안 2피안타 3볼넷 10탈삼진을 기록하며 승리 투수가 됐다. 시즌이 개막한 뒤로 처음 여섯 경기에서 5승 무패를 기록하며 4월 내셔널 리그 이달의 신인 선수로 뽑혔다. 전반기에만 11승을 올려 올스타전에도 뽑힐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6월부터 차츰 부진하기 시작하며 올스타전과 멀어졌고, 설상가상으로 9월 8일에 열린 휴스턴 애스트로스전에서 브라이언 헌터가 친 타구에 얼굴을 맞아 병원으로 이송돼 응급 수술을 받았다. 이시이는 두개골 균열 골절을 진단받아 뼛조각을 제거하고 작은 티타늄판을 이식했는데, 간발의 차로 큰 혈관의 손상과 과다 출혈을 피했다고 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어 그대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그래도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상 투표에서 4위를 차지하며 좋은 인상을 남겼다.[5]
2004년 시즌에는 최희섭과 한솥밥을 먹게 됐다. LA 다저스는 디비전 시리즈에 나갔지만 이시이는 명단에서 제외됐다. 이시이는 2003년과 2004년 시즌에서도 초반부에는 잘 나가다가 후반부로 갈수록 퍼지는 문제점을 드러냈는데, 2002년부터 2004년까지의 기록을 살펴보면 올스타 브레이크 전에는 29승 15패 평균자책점 3.50을 기록하다가 올스타 브레이크 뒤에는 7승 13패 평균자책점 5.77을 기록했다. 또한 제구력에서도 문제점이 드러났는데 473이닝을 던지는 동안 305개의 볼넷을 허용했고, 2002년부터 2004년까지 내셔널 리그에서 볼넷을 가장 많이 허용한 투수 5위 안에 항상 들었다.
2004년 시즌이 끝난 뒤에는 LA 다저스와 뉴욕 양키스,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사이의 삼각 트레이드[6]로 랜디 존슨과 함께 뉴욕 양키스로 이적할 뻔했지만 LA 다저스가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트레이드 직전에 이를 무르는 바람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2.2.2. 뉴욕 메츠 시절
2005년 3월 이시이는 제이슨 필립스와 트레이드돼 뉴욕 메츠에 입단하며 서재응과 구대성, 마쓰이 가즈오 등과 동료가 됐다. 그러나 왼쪽 무릎에 부상을 입으며 부상자 명단에 들기도 하고 마이너 리그로 강등되기도 하는 등 갖은 고생을 했다. 2005년 시즌에 3승 9패에 5.1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자 뉴욕 메츠는 12월에 이시이를 방출했다.2.3. 일본프로야구 2기 시절
2.3.1. 야쿠르트 복귀
2006년 1월 20일 이시이는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복귀했다. 복귀 이후 붙박이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며, 2007년 5월 17일에 나고야 돔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곤즈와의 경기에서 일본프로야구 사상 48번째로 1500탈삼진을 달성했다.2007년 시즌이 끝난 뒤 FA권을 행사했다.
2.3.2. 세이부 시절
2007년 11월 22일에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입단했다.2008년 3월 29일에 열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일본프로야구 통산 100승을 일구었다. 이 시즌에도 초반에는 다승왕 후보로 뽑힐 만큼 출발이 좋았지만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시리즈에서도 선발 투수로 올라왔으나 패전 투수가 됐고, 이후 구원 투수로 등판했다. 결과적으로는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다.
2011년 8월 7일에 열린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통산 2000탈삼진을 달성했다. 특히 1967⅔이닝만에 이루어냈는데, 이는 당시 일본프로야구 최고의 속도였다. 다만 이 시즌에는 선발 투수로서 활약이 미진해 시즌 후반부터는 구원 투수로 기용됐다.
2013년에는 어깨 부상으로 고전했고, 결국 9월 24일에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
3. 투구 스타일
데뷔 시즌이던 1992년의 투구폼.
LA 다저스에서 뛰던 2002년의 투구폼. 96마일이 인상적이다.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활약하던 2008년의 투구폼.[7]
선수 시절 초중반에는 최고 156km/h에 이르는 패스트볼과 변화가 큰 슬라이더로 삼진을 잡아내는 전형적인 파워 피처였고, 후반에는 구속은 낮아졌지만[8] 커브, 체인지업, 투심 등 다양한 구종들을 추가하며 기교파 투수로 변신해[9] 삼진을 잡아냈다.
다만 불안한 제구력이 고질적인 문제점이었다. 일본프로야구 통산 폭투 2위(115폭투) 기록이 있으며, 다저스 시절 팀메이트였던 노모 히데오(일본: 1990~1993, 미국: 2003)와 함께 일본프로야구(1998, 99)와 메이저리그(2002) 모두에서 볼넷왕에 오른 투수라는 진기록을 갖고 있다.
4. 은퇴 이후
선수 은퇴 이후 구단 경영을 목표로 경영을 배울 목적으로 요시모토 흥업에 계약 사원으로 들어갔다. 계약 조건은 일반 고졸 직원과 같다고 한다. 동시에 후지 TV와 닛폰 방송에서 해설자로 활약하기도 했다.2015년 4월 29일에 다저 스타디움에서 열린 LA 다저스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경기에서 시구를 했다.
2018년 9월 1일에 호시노 센이치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GM으로 취임했고 2020년 11월 12일 1군 감독직도 동시에 맡게 됨에 따라 이사 GM 겸 감독으로 불리게 되었다.
4.1.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GM 겸 감독
감독 겸임 첫 해 3위를 기록했고 클라이맥스 시리즈에서 2위 롯데에 1무 1패를 기록하며 시즌을 마쳤다.
그러나 성적과는 별개로 라쿠텐 팬덤으로부턴 평가가 좋지 못하다. 2018년 감독대행으로 팀을 잘 추스른 공적을 인정받아 2019년 정식 감독에 취임한 히라이시 요스케가 3위로 시즌을 마치자 "3위는 B클래스나 마찬가지"라는 발언을 외치며 경질시킨 것도 모자라 원클럽맨으로써 1군 감독까지 역임했던 히라이시 입장에선 한직에 가까운 팜 디렉터 보직으로 보내려 하여 팀에서 나가게 하거나[10], 그렇게 히라이시를 내치고 세운 후임 감독 미키 하지메가 2020년에 4위로 시즌을 마치자 1년 만에 2군 감독으로 보내고 그 자리를 본인이 빼앗듯 1군 감독에 취임하며 시작부터 좋지 못한 행보를 보여줬기 때문.
거기다 감독에 앉자마자 타나카 마사히로를 복귀시키고 거물급 신인이라던 하야카와 타카히사를 지명하는데 성공하면서 전력이 좋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감독 첫 시즌인 2021년에 우승경쟁은 커녕 전년도 순위에서 숫자가 딱 하나 올라간, 그것도 본인이 B클래스나 다름없다고 말한 3위에 그쳤기 때문에 자신이 1년 만에 내쳤던 전임 감독들과 별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1년 만에 연달아 물러난 전임 감독들과 달리 본인은 GM 직책을 방패 삼아 감독 연임을 선택했기 때문에 팬들 입장에선 내로남불이 따로 없다며 여론이 더욱 나빠졌다.
2022년엔 닛폰햄에서 논텐더로 풀린 니시카와 하루키 등 신전력의 호투에 힘입어 개막 초반에 24승 6패 1무로 승률 8할을 찍는 역대급 스타트와 함께 팀을 선두로 이끌어 나갔지만, 6월 이후 니시카와를 비롯한 타선의 전체적 부진으로 급격하게 하락세를 타면서 소프트뱅크, 세이부에게 1위 자리를 내줬고, 이후 투타 밸런스가 점차 하락하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상위권 다툼을 이어갔으나 결국 버티지 못한 채 최대 +18이었던 승패마진을 지키기는 커녕 -2로 깎아먹는 역대급 DTD와 함께 4위로 추락하며 진짜 B클래스로 시즌을 마쳐버리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시즌 최종전이었던 10.2 결전에서마저 패하며 홈구장에서 오릭스 버팔로즈의 리그 2연패를 허용했다. 그동안의 전적 때문에 라쿠텐 팬들 사이에선 올해야말로 당장 물러나라며 험악한 여론이 형성되었으나 끝내 2023년에도 감독직을 연임하는 것이 결정되면서 팬들에게서 계속 비판의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라쿠텐 팬들에게서 GM으로썬 FA 등으로 거물 선수들을 연달아 영입하며 충실히 전력을 보강한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나 감독으로썬 전혀 아니다라는 의견이 많이 나오는 편. 그런데 12월 4일 감독 역할에 전념한다는 이유로 GM 직책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상술했듯이 GM으로써의 평가와 감독으로써의 평가가 극과 극이라서 팬들에게서 '물러나야 할 역할이 정반대 아니냐'라는 반응이 많다.
23시즌 오픈전이 진행중인 3월 6일에 등번호를 99번에서 선수시절에 달던 16번으로 변경했다.
2023 시즌은 초반부에 처참한 타선으로 인해 B클래스에 머물다가 8월 이후 상승세를 타며 A클래스 진입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막판에 퍼지면서 결국 10월 10일 최종전에서 롯데에게 지며 2년 연속 4위에 그쳤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 감독 자리에서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그런데 이틀 후인 12일에 구단 수석 디렉터로 영전했다는 소식이 발표되며 경질은 커녕 사실상 승진이 확정되었다(...)
5. 기타
이시이가 MLB 무대에서 활약하던 2000년대 초반에는 박찬호와 김병현, 김선우, 서재응 등의 한국인 선발 투수들도 많아서 이들의 비교 대상이 되곤 했다.최훈의 MLB 카툰에서 이시이를 다룬 적이 있다.#
NPB로 돌아온 후에는 이승엽의 천적 투수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11]
라쿠텐 GM이 된 이후로 와쿠이 히데아키, 마키타 카즈히사, 키시 타카유키, 아사무라 히데토[12], 스미타니 긴지로 등 세이부 라이온즈[13] 출신의 선수를 많이 데리고 왔는데, 이 때문에 각각 치바 롯데, 요미우리를 거쳐 라쿠텐에 트레이드된 와쿠이, 스미타니의 사례를 빼면 세이부 팬들에게서 탬퍼링으로 선수들을 빼간 거나 다름없다며 이시이에 대한 여론이 나빠졌다. 코치직에도 세이부 출신 인물들이 많은데, 거기에 더해 친정팀인 야쿠르트 출신의 코치들도 많이 데려왔다.
6. 연도별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통산 기록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1992 | 야쿠르트 | 12 | 28 | 0 | 0 | 0 | - | 4.18 | 23 | 4 | 17 | 22 | 13 | 13 | 1.43 |
1993 | 19 | 59 ⅓ | 3 | 1 | 0 | 0.750 | 4.70 | 48 | 8 | 38 | 66 | 32 | 31 | 1.45 | |
1994 | 54 | 108 | 7 | 5 | 0 | 0.583 | 4.08 | 92 | 11 | 77 | 98 | 56 | 49 | 1.56 | |
1995 | 26 | 153 | 13 | 4 | 1 | 0.765 | 2.76 | 112 | 14 | 77 | 159 | 49 | 47 | 1.24 | |
1996 | 8 | 31 | 1 | 5 | 0 | 0.167 | 5.23 | 28 | 6 | 22 | 26 | 19 | 18 | 1.61 | |
1997 | 18 | 117 ⅔ | 10 | 4 | 0 | 0.714 | 1.91 | 73 | 5 | 50 | 120 | 28 | 25 | 1.05 | |
1998 | 28 | 196 ⅓ | 14 | 6 | 0 | 0.700 | 3.30 | 149 | 12 | 105 | 241 | 78 | 72 | 1.29 | |
1999 | 23 | 133 | 8 | 6 | 0 | 0.571 | 4.80 | 123 | 16 | 71 | 162 | 75 | 71 | 1.46 | |
2000 | 29 | 183 | 10 | 9 | 0 | 0.526 | 2.61 | 137 | 15 | 73 | 210 | 54 | 53 | 1.15 | |
2001 | 27 | 175 | 12 | 6 | 0 | 0.667 | 3.39 | 135 | 18 | 82 | 173 | 74 | 66 | 1.24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2 | LAD | 28 | 154 | 14 | 10 | 0 | 0.583 | 4.27 | 137 | 20 | 106 | 143 | 82 | 73 | 1.58 |
2003 | 27 | 147 | 9 | 7 | 0 | 0.563 | 3.86 | 129 | 16 | 101 | 140 | 72 | 63 | 1.56 | |
2004 | 31 | 172 | 13 | 8 | 0 | 0.619 | 4.71 | 155 | 21 | 98 | 99 | 97 | 90 | 1.47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5 | NYM | 19 | 91 | 3 | 9 | 0 | 0.250 | 5.14 | 87 | 13 | 49 | 53 | 59 | 52 | 1.49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6 | 야쿠르트 | 28 | 177 ⅔ | 11 | 7 | 0 | 0.611 | 3.44 | 177 | 16 | 59 | 170 | 82 | 68 | 1.33 |
2007 | 28 | 166 ⅔ | 9 | 10 | 0 | 0.474 | 4.16 | 156 | 21 | 49 | 163 | 90 | 77 | 1.23 | |
<rowcolor=#ffffff>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승 | 패 | 세 | 승률 | ERA | 피안타 | 피홈런 | 4사구 | 탈삼진 | 실점 | 자책점 | WHIP |
2008 | 세이부 | 25 | 135 ⅓ | 11 | 10 | 0 | 0.524 | 4.32 | 150 | 16 | 40 | 108 | 78 | 65 | 1.40 |
2009 | 22 | 130 | 9 | 9 | 0 | 0.500 | 4.32 | 113 | 18 | 67 | 131 | 71 | 62 | 1.38 | |
2010 | 18 | 104 ⅔ | 9 | 6 | 0 | 0.600 | 3.70 | 105 | 10 | 34 | 93 | 50 | 43 | 1.33 | |
2011 | 23 | 117 | 6 | 9 | 0 | 0.400 | 4.31 | 122 | 7 | 32 | 94 | 61 | 56 | 1.32 | |
2012 | 24 | 132 ⅓ | 10 | 5 | 0 | 0.667 | 3.33 | 126 | 14 | 44 | 74 | 57 | 49 | 1.28 | |
2013 | 7 | 5 ⅓ | 0 | 0 | 0 | - | 6.75 | 5 | 2 | 4 | 5 | 4 | 4 | 1.69 | |
NPB 통산 (18시즌) | 419 | 2153 ⅓ | 143 | 103 | 1 | 0.581 | 3.63 | 1874 | 213 | 941 | 2115 | 971 | 869 | 1.31 | |
MLB 통산 (4시즌) | 105 | 564 | 39 | 34 | 0 | 0.534 | 4.44 | 508 | 70 | 354 | 435 | 310 | 278 | 1.53 |
[1] 여담으로, 이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까지 1이닝을 남겨두고 스스로 마운드에서 내려가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작년에 입었던 어깨 부상의 영향도 있었고 8회까지 공을 많이 던진 터라 더 이상 던지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해서 자진 강판하려 했는데, 노무라 카츠야 감독이 "바보야! 좀처럼 없는 기회니까 끝까지 던져!"라고 일갈해서 그대로 9회까지 던지고 노히트 노런을 달성해냈다고..[2] 당시 상대였던 요코하마의 중심타자이자 이해 센트럴리그 수위타자를 수상한 스즈키 타카노리가 이시이의 투구에 압박을 느꼈던 건지 경기 종료 후 "어서 메이저리그로 가줬으면 한다"(...)라는 감상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로부터 5년 후에 이시이는 정말로 메이저리그의 마운드를 밟게 된다.[3] K/9이 무려 11.047로, 2019년 센가 코다이가 경신할 때까지 규정이닝을 채운 투수로서는 일본프로야구 단일 시즌 K/9 1위 기록이었다.[4]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구단 사상 마지막 대권 도전이었다. 킨테츠는 이후 2004년 해체되고 오릭스에 합병된다.[5] 이 해 내셔널 리그 올해의 신인상은 콜로라도 로키스의 제이슨 제닝스에게 돌아갔다.[6] 숀 그린+α(LAD) ↔ 랜디 존슨(ARZ), 랜디 존슨+이시이 카즈히사(LAD) ↔ 하비에르 바스케스+α(NYY)[7] 스포하자면 이승엽이 폭삼쳐먹는 장면도 있다(...)[8] 2000년대 중후반에는 스피드건에 151~2km/h가 한번씩 찍혔었고, 이후론 최고구속이 2009년 149km -> 2010년 145km/h -> 2012년 143km/h -> 2013년 140km/h가 되고나서 은퇴하였다.[9] 구사비율은 포심 55 : 슬라이더 35 : 나머지 10 정도.[10] 결국 팜 디렉터엔 치바 롯데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은퇴 후 구단 특별 고문으로 활동하던 오무라 사부로를 데려왔다.[11] 제구력 안 좋고 큰 변화를 보이는 슬라이더가 결정구인 파이어볼러 좌완이라 커리어 내내 좌타자들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커리어에 분명 클래스 차이가 있지만, 투구 스타일이 이혜천처럼 좌타자들 괴롭히기 딱 좋은 형태였다. 메이저 진출 당시에는 '일본의 랜디 존슨'이란 설레발도 들어본 적이 있었고...[12] 특히 아사무라는 작년 일본시리즈 우승팀 + 돈을 더 준다고 하는 소뱅의 제안을 뿌리치고 라쿠텐 이적을 선택했다.[13] 세이부가 마지막으로 우승했던 2008년 일본시리즈의 선발투수 중 2명이(키시 타카유키, 이시이 카즈히사) 현재 라쿠텐에 선수 내지 지도자로 몸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