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문서: 임꺽정은 살아있다/개변된 역사
<colbgcolor=#000> 임꺽정은 살아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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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대조선국 大朝鮮國 | Diosion[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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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적 | 약 22만 km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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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조선민족 | ||||
언어 | 조선어 (중세 한국어) | ||||
문자 | 국문 (한글), 한자 | ||||
종교 | 유교(성리학), 불교, 가톨릭 | ||||
군대 | 조선군 |
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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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원수 | 국왕 이환 ,(1545년 ~ ), | |||||
정부수반 | 영의정 이준경 | |||||
주요 정당 | 민주당 탕평당 대동당 선우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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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체역사물 임꺽정은 살아있다에 등장하는 조선을 소개하는 문서.2. 정치
2.1. 헌법
신 등은 삼가 엎드려 생각하옵나이다.
살피건대 우리 조선의 국인(國人)이 한마음으로 태조대왕을 받들어 임금으로 모시고 새 나라를 조조(肇造)한 이래, 군신(君臣)은 화합하여 마치 성주(成周)에 비길 만하고 조종(朝宗)의 성덕(聖德)은 동방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어 내려오기를 여러 대에 걸쳐, 오늘에 이르러 아국 조선의 문명은 해내(海內)에 떨치고, 그 문헌(文獻)과 물산이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 넉 자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맞이하여 상께서는 다음과 같은 밝은 도리를 널리 밝히시어, 나라의 근본과 앞날에 대해 한 점 의혹도 남지 않게 하시옵소서.
아(我) 대조선국 국인들이 생각건대, 대조선국의 국체(國體)는 곧 국인이요, 모든 법과 권병(權柄) 중 국인에게서 나오지 않음이 없습니다.
기자가 홍범을 전하며 황극(皇極)을 이름에, 오복(五福)을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어야 비로소 백성이 임금의 법을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 다섯 복은 곧 모든 사람이 응당 누려야 할 의권 중에서도 가장 중한 것이요, 곧 모든 법이 나오는 근원이요, 곧 임금이 사람 위에 서는 까닭입니다. 성상 전하께옵서는 삼가 살피시어 조종에 길이 남을 헌법을 세우시옵소서.
오복의 첫째는 수(壽)이니, 그 누구든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함부로 죄를 받지도, 죽임을 당하지도, 부림을 당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의 삶을 능히 지켜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복의 둘째는 부(富)이니, 그 누구든 자신의 가산을 능히 지니고 화식(貨殖)에 힘쓰며 까닭 없이 이를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복의 셋째는 강녕(康寧)이니, 그 누구든 스스로 강녕함에 이르기 위해 배우고자 할 때 배우고, 일하고자 할 때 일하며, 까닭 없이는 원하는 배움과 일로부터 내쫓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복의 넷째는 유호덕(攸好德)이니, 그 누구든 덕이 있는 자를 천거하여 국사를 도우며, 또 스스로 덕이 있는 자는 나아가 벼슬함으로써 나라와 국인을 돕는 것입니다.
오복의 마지막은 고종명(考終命)이니, 그 누구든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태어나 천수를 다할 때까지 그 존귀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기자가 또한 이르기를, 백성은 별과 같고 별은 비와 구름을 사랑하며, 해와 달이 별들 사이를 지나니 비로소 비와 구름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붙박이 별들 사이에서 일월(日月)이 영원히 운행하듯 조종의 대업 또한 헌법으로써 영세토록 이어지게 하시옵소서.
- 경신년(1560) 제정된 어정헌법(御定憲法)의 초안 서두
살피건대 우리 조선의 국인(國人)이 한마음으로 태조대왕을 받들어 임금으로 모시고 새 나라를 조조(肇造)한 이래, 군신(君臣)은 화합하여 마치 성주(成周)에 비길 만하고 조종(朝宗)의 성덕(聖德)은 동방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이어 내려오기를 여러 대에 걸쳐, 오늘에 이르러 아국 조선의 문명은 해내(海內)에 떨치고, 그 문헌(文獻)과 물산이 모두 해동성국(海東盛國) 넉 자에 부끄럽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때를 맞이하여 상께서는 다음과 같은 밝은 도리를 널리 밝히시어, 나라의 근본과 앞날에 대해 한 점 의혹도 남지 않게 하시옵소서.
아(我) 대조선국 국인들이 생각건대, 대조선국의 국체(國體)는 곧 국인이요, 모든 법과 권병(權柄) 중 국인에게서 나오지 않음이 없습니다.
기자가 홍범을 전하며 황극(皇極)을 이름에, 오복(五福)을 백성들에게 베풀어주어야 비로소 백성이 임금의 법을 따른다 하였습니다. 이 다섯 복은 곧 모든 사람이 응당 누려야 할 의권 중에서도 가장 중한 것이요, 곧 모든 법이 나오는 근원이요, 곧 임금이 사람 위에 서는 까닭입니다. 성상 전하께옵서는 삼가 살피시어 조종에 길이 남을 헌법을 세우시옵소서.
오복의 첫째는 수(壽)이니, 그 누구든 법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함부로 죄를 받지도, 죽임을 당하지도, 부림을 당하지도 아니하며, 자신의 삶을 능히 지켜 보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복의 둘째는 부(富)이니, 그 누구든 자신의 가산을 능히 지니고 화식(貨殖)에 힘쓰며 까닭 없이 이를 빼앗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복의 셋째는 강녕(康寧)이니, 그 누구든 스스로 강녕함에 이르기 위해 배우고자 할 때 배우고, 일하고자 할 때 일하며, 까닭 없이는 원하는 배움과 일로부터 내쫓기지 않는 것입니다.
오복의 넷째는 유호덕(攸好德)이니, 그 누구든 덕이 있는 자를 천거하여 국사를 도우며, 또 스스로 덕이 있는 자는 나아가 벼슬함으로써 나라와 국인을 돕는 것입니다.
오복의 마지막은 고종명(考終命)이니, 그 누구든 만물 중에서 가장 귀한 사람으로 태어나 천수를 다할 때까지 그 존귀함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기자가 또한 이르기를, 백성은 별과 같고 별은 비와 구름을 사랑하며, 해와 달이 별들 사이를 지나니 비로소 비와 구름이 생긴다 하였습니다. 붙박이 별들 사이에서 일월(日月)이 영원히 운행하듯 조종의 대업 또한 헌법으로써 영세토록 이어지게 하시옵소서.
- 경신년(1560) 제정된 어정헌법(御定憲法)의 초안 서두
2.1.1. 기미년 제헌 권점
기미년(1559) 제헌 권점 | ||||
지역 | 총 고을 | 참여 고을 | 오복헌법 유일 이지함 | 재조헌법 숭록대부 겸 전 좌찬성 이언적 |
한성5부 | 1(5) | 1(5) | 1(5) | 0(0) |
경기 | 38 | 38 | 26 | 12 |
황해 | 23 | 23 | 22 | 1 |
평안·함경 | 64 | 61 | 61 | 0 |
강원 | 26 | 26 | 16 | 10 |
충청 | 53 | 53 | 33 | 20 |
전라 | 56 | 56 | 31 | 25 |
경상 | 71 | 71 | 36 | 35 |
합 | 332 | 329 | 226 | 103 |
기미년 동지~대한 간 시행된 권점으로, 최초의 전국 단위 권점이자 최초의 헌법을 정한 권점으로서의 의의를 가진다. 헌법이 명과의 관계가 틀어지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을 걱정한 사족들이 재조론 지지를 철회하면서 권점 논의에서 빠지고, 임꺽정의 전국 유세로 많은 군현 여론이 오복헌법 쪽으로 돌아서면서 결과적으로 오복헌법의 안이 압도적인 표차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군현 단위가 아닌 단순 인구 수로 집계했다면 표차가 비등했을 것으로 보고있다. |
2.2. 국인선서
아 조선국 공회의 공임은 국인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생각건대 천하의 자명한 이치가 있으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태어나, 똑같은 의권을 누리며 똑같이 저희 뜻대로 살아감이 마땅함이 하나요.
모든 나라는 오직 사람이 모여 약조하는 데서 말미암으니 오직 국인을 위하고 그 의권을 지키는 데 뜻이 있음이 둘이요.
무릇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고 그 의권을 제한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의 사람 모두를 위할 때만 가함이 셋이요.
이 차등과 제한은 오로지 국인의 뜻에 따라 제정되는 법도에 의거해야만 마땅함이 넷이요.
법도로 정해지지 않은 모든 것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어 응당 모든 이들이 뜻한 바대로 펼쳐 이룰 수 있음이 다섯이요....
(중략)
아 조선국 국인은 이상을 자명한 천하의 도리로 여기고 또 목숨으로써 지킬 뿐이니, 이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조선 국인의 벗이로다. 이로써 온 천하가 개명된 나라로 발돋움하고, 모든 나라와 그 군주와 백성이 공히 무한한 복록 누리기만을 바랄 따름이라.
조선 국왕 이환. (이하 공회 공임 298인의 서명)
생각건대 천하의 자명한 이치가 있으니,
모든 사람이 똑같이 태어나, 똑같은 의권을 누리며 똑같이 저희 뜻대로 살아감이 마땅함이 하나요.
모든 나라는 오직 사람이 모여 약조하는 데서 말미암으니 오직 국인을 위하고 그 의권을 지키는 데 뜻이 있음이 둘이요.
무릇 사람 사이에 차등을 두고 그 의권을 제한하는 것은 오로지 나라의 사람 모두를 위할 때만 가함이 셋이요.
이 차등과 제한은 오로지 국인의 뜻에 따라 제정되는 법도에 의거해야만 마땅함이 넷이요.
법도로 정해지지 않은 모든 것은 그 누구도 가로막을 수 없어 응당 모든 이들이 뜻한 바대로 펼쳐 이룰 수 있음이 다섯이요....
(중략)
아 조선국 국인은 이상을 자명한 천하의 도리로 여기고 또 목숨으로써 지킬 뿐이니, 이를 따르기를 원하는 자는 모두 조선 국인의 벗이로다. 이로써 온 천하가 개명된 나라로 발돋움하고, 모든 나라와 그 군주와 백성이 공히 무한한 복록 누리기만을 바랄 따름이라.
조선 국왕 이환. (이하 공회 공임 298인의 서명)
2.3. 왕실
2.4. 삼문(三門)
행정부인 중추부(조정)를 정문, 사법부인 통의부를 서협문, 입법부인 공회를 동협문에 빗대 통틀어 일컫는 말. 처음에는 몸고생하지 않고 출세하는 세 길이란 뜻으로 점차 쓰이게 되었으나, 공식적으로 위로는 왕, 아래로는 백성을 모시고 위하는 세 곳이라는 의미를 가져다 붙였다. 세 기관의 권력과 역할이 철저히 분리되어 삼권분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중에서 중추부의 위세가 높아 행정국가의 특성을 띠고 있다.2.4.1. 중추부
2.4.2. 통의부
2.4.3. 공회
본디 토지문제를 논하는 전정공회에서 시작되었으나, 노산군의 신원 문제를 계기로 입법 전반을 담당하는 기관이 되었다. 과거에는 흑의군 훈련장을 의사당으로 삼았지만, 현재는 도성 안의 공터에 서도대(瑞圖臺)를 세워 그곳에서 공회를 진행하고 있다. 공회의 구성원인 공임(公任)은 300여명으로, 각 고을의 향회에서 4년에 한 번씩 권점을 통해 선출되며, 향회의 향임 또한 권점으로 선출된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에는 남녀노소 계층을 불문하고 제한이 없다. 헌법 개정은 공임 전체의 3분의 2 동의가 있으면 할 수 있다.2.5. 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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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평당 | |||
야당 | |||
민주당 | 대동당 | 선우당 | }}}}}}}}} |
2.5.1. 민주당
1550년 창당한 조선 최초의 정당이다. 공회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주요 지지층은 중인과 상인 이하 일반 백성들이다. 이름의 뜻은 대외적으로는 민(民)의 주(主)인 임금을 위한다는 근왕적 의미이다. 물론 당수 임꺽정이 진짜로 의도한 의미는 '민(民)이 주(主)'라는 의미이다.2.5.2. 탕평당
첫 전정공회가 열린 1554년에 창당하였다. 한시적으로만 유지하다 해산할 계획으로 모였기 때문에 당명에 특이하게 '당(黨)'과는 모순되는 '탕평(치우치지 않음)'을 내걸었다. 하지만 현재는 민주당과 합쳐 공회 의석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어 '민탕일색(民蕩一色) 공회'란 말을 들을 정도로 어엿한 하나의 당을 자처하고 있다. 주요 지지층은 경화사족을 비롯한 시류를 잘 읽고 부귀하게 된 선비들이며, 민주당과 같이 자본주의와 중상주의에는 동의하지만 비교적 온건한 성향이다.2.5.3. 대동당
1563년 재조론을 따르던 노론 향반의 일부가 모여 정여립의 대동주의를 내걸며 창당하였다. 자본주의가 제대로 정착되지도 않은 마당에 대동주의가 세상에 퍼지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라는 이이의 지적에 정여립은 뜻을 잠시 접고 자본주의의 폐단을 바로잡으며 이론을 완성하고 향반을 하나로 뭉치는데에 먼저 집중하기로 한다. 재조론 내에서도 이언적보다는 두리손의 사상을 계승한 것에 가까운 대동당은 서도대의 네 당 중 어찌보면 가장 근본 없는 아웃사이더 당이라 할 수 있으며, 그 탓에 첫 공임 권점에서 선우당과 지지층이 갈라져 3분의 1도 되지 않는 적은 의석수를 차지하였다. 자금도 매우 부족해 주공동 앞의 허름한 집에 겨우 당사를 마련하였다. 자기(自譏)란 이름으로 자아비판을 하고 있다.2.5.4. 선우당
대동당이 세워지자 이를 따르지 않는 노론 향반들이 1564년 창당한 당이다. 당명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한다(先天下之憂而憂)'는 범중엄의 말에서 따왔다. 다른 당처럼 중심이 되는 영수가 없어 어느 당보다 더 공론 위주로 처결하는 당이 되었다. 그 덕에 급진적인 의견을 내기 힘들어져 재조론이 내세우던 상공업 억압 정책은 점차 중농주의로 바뀌는 등 당론이 온건해졌다. 삼남의 고루한 향반들로 이루어진만큼 명과 조선 사이의 정세도 늦게 알아차리는 등 시세 파악에 느리지만, 그만큼 헌법과 공회 제도와 같이 자신들이 지키기로 한 법에는 우직한 성격이다. 조선이 가장 개명된 나라이며 명 또한 작은 주나라에 시작된건 마찬가지라는 소중화와 유사한 사상을 가지고 있다.2.6. 외교
- 조선-명 관계
조선이 서경덕의 화담자의와 이이의 의권론, 서림의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민본 중심의 정책을 펼치게 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그나마 엄숭을 숙청하고 종계변무를 해결하기까지는 서로 목적이 비슷해서 협력한 임꺽정과 장거정이었지만, 장거정이 민주당의 의도를 불순하고 부당하다 생각한 끝에 대일통론을 주창하면서 천명(天命)을 두고 부딪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됐다. 게다가 임꺽정이 천자로부터 조서를 받고 유럽과 중동을 들쑤시고 돌아온 탓에 이를 장거정이 더더욱 곱게 볼 리가 없었고, 급기야 조명을 포함한 전세계가 전란에 휩싸이는 천하대란(세계대전)으로까지 비화된다. 이 과정에서 장거정이 중금속에 중독되어 오늘내일하던 가정제 주후총을 죽음으로 몰아넣어 융경제로 갈아치우고, 각종 공사를 설립해서 중원의 부를 조정으로 집중시키며, 동서대전에서 패배한 오다 노부나가를 영입하여 한양을 들이치게 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분전한다.
그러나 압카이 아파시 구룬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척계광이 이끄는 명군이 큰 피해를 입었고, 오다 노부나가와 에스파냐 용병단의 한양 습격대는 종묘지뢰악(...)[3]에 패퇴당했다. 게다가 오승은이 이끄는 국민당이 조선 민주당과 협력해 서계와 해서를 포섭하고 대일통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비폭력 시위를 통해 중국 남부의 민심을 휘어잡아 내우외환이 이어졌다. 결국 대일통론 부활을 기원하며 장거정이 오다 노부나가에게 살해당함으로써 천하대란이 일단락되자, 분열된 중원이 제국(帝國)이 아닌 제국(諸國) 연방으로 변화하면서 조명 관계의 긴장도 다소 풀린다.
- 조선-일본 관계
천하대란에 동맹 관계로 참전할 정도로 우호적이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화력덕후지만 유황과 초석이 부족한 조선을 일본의 자원이 보완하면서 조선이 조총과 화포를 원없이 쓸 수 있게 되었고, 조선이 동서대전을 린쇼 히데요시와 서군의 승리로 이끌어 안정시키면서 정치 및 경제적 파트너로서 끈끈한 관계를 맺게 된다.
- 조선-여진 관계
일본과 마찬가지로 우호적이다. 임꺽정이 이명희와의 결혼을 피하려고 둘러댄 백정여진(白丁女眞) 얘기가 지탕카이와 니탕카이의 회를 동하게 하고, 이것이 압카이 아파시 구룬 건국의 발단이 되었다. 이러니 압카이 아파시 구룬으로서는 임꺽정이 곧 개국공신의 일환이고, 그가 이끄는 조선과 민주당이 정책적 파트너가 될 수밖에 없다.
3. 경제
3.1. 기업
- 사업당
민주당 산하의 다국적 기업 - 경제사
왕립 무역회사. 사업당의 최대 주주이기도 하다. - 은정고
이황이 설립한 은행. - 임천당
조선에 시집온 류큐의 공주 쇼 세이가 세운 제과점 겸 보드게임회사. 사타안다기부터 유럽에서 들여온 디저트까지 두루 판매하고 있다. 최근에는닉값을 위해승람도(勝覽圖), 운주희(運籌戱) 등 보드게임 사업까지 그 영역이 확장되었다.
4. 문화
4.1. 언론
- 공보
- 정론보
- 정언보
4.2. 교육
- 삼락서원
4.3. 종교
- 불교
- 가톨릭
5. 군사
의민당의 난, 경신병란, 동서합전 파병 등 여러 실전 경험이 축적 되고 군제 개혁도 진행되어 군사력도 덩달아 강해졌다. 특히 외부 교류가 활발해지며 구리, 염초 등 화약 무기 원재료 수급이 수월해졌으므로 화력이 굉장히 강화되었는데. 천자총통은 컬버린을 능가하는 거포가 되었고, 황자총통도 불량기 비슷한 물건이 되었다. 여기에 일본으로 부터 부싯돌을 안정적으로 수입함에 따라 제식 병기로 정착한 플린트락은 덤.6. 인물
자세한 내용은 임꺽정은 살아있다/등장인물 문서 참고하십시오.7. 개변된 역사
- 화담자의 저술
제자로 들어온 임꺽정의 영향을 받아 서경덕이 생애 마지막으로 남긴 책으로 이를 통해 데카르트보다 90년 먼저 방법적 회의를 논하게 되었다. 정순붕과 이기가 윤원형을 견제하고자 이홍윤 옥사 사건에 더 강력한 대응을 외치며 이지함이 가진 화담자의를 금서로 정할 것을 상소로 올렸는데 이 때문에 사림 선비들의 관심을 크게 사는 계기가 되었다. 훗날 사람들은 세대 구분을 화담 이전, 화담 이후로 구분할 정도로 이후 조선과 온 세계의 변화를 일으킨 첫 단추가 되었다.
- 정미사화
윤원형의 무리인 이희손이 서경덕을 회유하러 찾아왔을 때 임꺽정이 쫒아낸 일로 윤원형이 서경덕의 제자들을 손봐줘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데다, 양재역 벽서 사건 없이 바로 이홍윤 옥사 사건이 터지면서 원 역사에서는 연루되지 않았던 이지함이 연루되어 잡혀가게 되고, 임꺽정이 이지함을 구하기 위해 파옥하면서 의민당이 결성되는 계기가 된다.
- 국한문혼용체 사용
서경덕에게 일정 수준까지 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언문을 사용함에 거리낌이 없는 임꺽정에 의해 원 역사에서 최초로 쓴 유길준의 서유견문보다 훨씬 앞서 사용되었다. 이지함도 향찰, 구결보다 술술 읽힌다는 점에 놀라며 의민당 내에서도 점차 사용된다.
- 광통교 도술 사건
도르래와 철사를 이용해 병해가 광통교를 공중에서 건너며 이를 도술이라고 사람들을 속인 사건. 곧바로 이것이 법력이나 도력의 힘이 아니라 도르래를 이용한 눈속임이었다고 밝히며 이러한 허황된 술수와 이설에 현혹되지 말고 스스로 배우고 생각하며 사리에 맞는 것만 헤아리라고 설파하였다. 이는 풍수와 도참으로 문정왕후를 비난하는 여론을 잠재워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함이었다. 이후 병해의 언변에 넘어간 황언징과 여러 유생들이 각미사(覺迷社)란 단체를 꾸려 괴력난신들을 때려잡게 된다.
- 의민당의 한양 상경 및 부민고소금지법 폐지
두리손의 보고를 받고 의민당을 의심하게 된 윤원형의 수작을 막기 위해 임꺽정과 이지함은 일부러 이웃 고을 수령을 부추겨 의민당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게 한 후 억울함을 풀겠다며 문정왕후가 남편 중중의 능인 정릉을 이장할 때 동원할 사역군을 이끈다는 명목으로 의민당 500여명을 이끌고 상경한다. 상경하면서 황해도와 경기도의 여러 고을 백성들이 합류해 세가 불어난 상태로 숭례문 밖에 진을 치고 백성들의 억울함을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마당을 깔아놓아 의민당을 쉽게 없앨 수 없음을 보여주자 윤원형도 일단 그들이 요구한 부민고소금지법을 폐지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물론 나중에 의민당이 사림파의 사주를 받아 이런 행위를 했다고 역모죄를 덮어씌울 요량으로 의민당의 요구를 들어준 것이었지만 꺽정과 지함은 이를 기회로 윤원형과 이기 사이를 벌려놓기 시작한다.
- 격물법 창시
고전의 권위가 아닌 가설과 변인을 설정하고 실험을 통해 입증하는 실증주의가 이이와 이지함의 논쟁에 의해 격물치지의 방도로서 창시되었다. 격물법을 주세붕과 임꺽정은 평범한 내기와 다를 바 없다 여기나, 이지함은 병해를 통해 각미사의 유생들에게 이를 전파하게 된다.
- 대녕학당, 수양서원 창립
- 성명방 방화 약탈 사건
- 의민당 봉기
청석골에 잠입한 두리손이 의민당의 역모 계획을 탈취하자, 차라리 봉기를 앞당기자고 결심한 임꺽정과 이지함이 봉기를 일으켜 황해도의 절반을 장악한다. '백성이 물이고 임금은 배'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민생을 돌보지 않는 조정에 대한 항의이지 임금에 대한 반역이 아니라고 선전하며, 황진이가 지은 노래 덕분에 경상도에까지 의민당 봉기에 호응하는 분위기가 퍼질 정도. 의민당의 훈련을 받은 소속 병력은 2,000여명, 임꺽정 직속의 흑의군은 수백에 불과했으나 초반에 투입한 오천명의 관군이 허무하게 패배하고 황해도 전체가 의민당 손에 들어온다. 이에 바짝 독이 올라 위기를 느낀 윤원형은 명종을 구슬려 철렴을 통한 분위기 쇄신을 노리던 문정왕후를 아예 정계에서 확실하게 밀어내버렸다. 그리고 어린 명종의 지지를 업고 황해를 제외한 각 칠도에서 병력을 모아 약체화된 조선군에서도 북방군을 제외하고 49,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모아 의민당 토벌에 나선다.[4]
이윤경이 도원수, 윤원형의 측근인 진복창이 부원수로 편성된 의민당 토벌군은 압도적인 대군을 4로로 나누어 동시다발적으로 의민당의 본거지 고을 4개를 공격하지만. 의민당은 도시를 버리고 산성들로 후퇴한 후 주로 야간에 횃불을 이용해 자신들의 군세를 부풀려 관군을 겁먹게 하고, 싸우러 나온 관군들 중에서 군관, 갑사들만 골라 처치하고 오합지졸인 군졸들은 돌려보내는 식으로 게릴라전을 벌인다. 관군이 전반적으로 불리해지고 황해도의 민심도 완전히 의민당 편임을 알게 된[5] 관군 지휘부가 당황한 사이 이지함이 찾아와 회담을 요청하는데, 사실 황해도에서의 봉기는 경군 전체를 황해도에 묶여있게 만들려는 성동격서 전략이었고, 그 사이 임꺽정이 정예부대인 흑의군을 이끌고 참수작전을 단행, 한양이 의민당 손에 떨어지게 된다.[6]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고 그저 부랑자들이 좀 뭉쳤다고 생각하던 포졸들은 순식간에 겁에 질려 도주했고, 윤원형이 역적으로 선포되었다고 소리치는 흑의군의 구호를 들은 한양의 민중들은 그대로 합류해서 윤원형의 호화저택들로 쳐들어간다. 윤원형의 빈객들이 무장하고 대항했으나 흑의군에게 참살당하고, 한양에 남은 윤씨 일가의 집과 재산은 그대로 흑의군과 민중의 손에 불타고 빼앗기면서 모조리 사라지게 된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임꺽정은 일부 병력을 돌려서 노비문서를 보관하는 장예원을 불사르고 궁궐까지 공격할 기세를 보인다.
이에 겁먹은 명종을 문정왕후가 데리고 파천하려 했다. 중간에 합류한 윤원형은 자기 근거지로 임금을 끌고 가려 했으나, 이전에 병해 대사의 계책에 낚인 문정왕후의 주장에 따라 병해대사를 만났다가 미리 대기하던 임꺽정의 흑의군에게 모두 붙잡혀 궁궐로 복귀해야 했다. 결국 그렇게 임금과 윤원형과 문정왕후마저 의민당의 손에 떨어졌고, 이준경은 의민당이 국왕조차 포로로 잡은 상황을 숨기기 위해 의민당의 모든 요구를 수락한다. 기존의 의금부, 형조, 삼사 등의 법치기관과 무관한 새로운 재판기관인 통의부의 설립, 궁궐 안의 사람을 배제한 국정의논기구 설치, 황해도에 있는 관군을 즉시 해산하고 흑의군이 금군의 역할을 대리한다는 의민당의 3대 요구가 받아들여지면서 의민당의 승리로 봉기는 마무리된다.
- 편곤의 재발견
흑의군이 갑사나 군관 때려잡는데 유용하다고 애용한다.
- 통의부 설치와 호관 제도 실시
의민당이 조정과 동등한 지위의 사법기관을 요구하며 통의부(通義府)가 세워졌다. '의로움이 두루 통하게 한다'라는 의미를 가졌으며, 비어있던 축성사(비변사) 관청에 대신 자리잡았다. 동시에 변호를 담당하는 관리인 호관(護官) 제도도 신설하였다. 무고한 누명이 씌인 죄인이 있을 수 있으므로 추관과 호관이 논박하며 죄상과 누명을 밝혀내도록 하였다. 법에 따라 죄인을 옹호하는 것이므로 변호 행위에 대해서 죄를 물을 수도 없도록 하였다. 의송(재판)이 법조삼륜인 위관(판사), 추관(검사), 호관(변호사)으로 구성됨으로써 원시적인 사법부가 완성되었다. 이준경을 비롯한 많은 사림들이 그동안 있었던 사화에서 목숨을 잃은 선비들을 신원할 길과 억울한 옥사에서 죄를 면할 방도가 생겼다는 점에 크게 반겼다. 첫 의송은 의민당의 거병에 대해, 두 번째 의송은 윤원형의 죄상에 대해 열렸다.
부민고소금지법 폐지와 향전 격화로 늘어난 온갖 송사에 관찰사들이 시달리게 되면서 통의부의 법제를 따라 통의청(通義廳)이라는 이름으로 각 지방 관속에 비슷한 것들이 들어선다. 통의청에서도 결착이 나지 않으면 통의부로 올려보내는 것이 관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두 단계의 심급제가 생겨났다. 동시에 그곳에서 의송을 도맡는 대의사(代義士)라는 사설 변호사 직업군이 생겨났고 형조정랑과 그 아래 율관의 심사를 거쳐야만 가능하도록 체계가 잡혔다.
- 자연권과 사회계약론
이이와 이지함의 논의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 사람에게는 마땅히 갖춰야 할 것(의, 義)가 있는데 이를 타인이 함부로 빼앗고 억압하는 것은 잘못이므로 그것을 막을 만큼의 권(權, 다른 사람의 뜻을 꺾고 저의 뜻대로 하는 것)을 의권(義權)이라 정의하였다. 서유럽 계몽주의의 천부인권과 유사한 개념이 1~2세기 빠르게 등장한 것이다. 나아가 나라가 나라인 까닭은 백성이 있기 때문이며, 백성이 스스로 하지 못하는 것을 도와 의권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함이므로 그것을 하지 못하는 나라라면 목적을 잃은 것이니 백성이 일어나 나라를 폐하려 해도 잘못이 없고 오히려 의로운 일이라 주장하였다. 이황과 조식은 이이에게 직접 들으며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의권에 대한 논쟁이 이뤄진 의민당 의송이 글로 정리되어 밖으로 전해지면서 새로운 개념에 놀란 도성의 서생들에게도 널리 퍼졌다.
심지어 이 이론의 주창자인 이이와 거기에 공감한 이황이 명나라 사신단에 참가해 따라가면서 명나라에서도 왕직의 유언과 같이 이 사상이 퍼질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 의민당 해산 및 민주당 창당
의민당의 봉기에 대해 죄를 묻지는 않되 비슷한 무리의 등장을 막기 위해 통의부는 의민당의 해산을 결정하였다. 어차피 황해도에 있던 기반을 계속 가져갈 명분도 없고 새롭게 시작할 필요가 있었기에 임꺽정은 임금의 윤허를 받아 곧바로 민주당(民主黨)이라는 새 당을 창당한다. 군주 대신 백성을 주인으로 세우겠다는 속뜻 대신 겉으로는 임금이 만백성의 참된 주인이 될 수 있도록 보필하자는 뜻이라 내세우며 흑의군과 핵심층만 계승한 채 출범하였다. 운종가 근처 동네 한복판에 큼직한 집 두 채를 마련하여 사업당(事業堂)이라 이름 붙이고 의민당 당청으로 쓰고 있다. 여담으로 하필 이 '민주당' 내용이 올라온 날(2022년 2월 21일)은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겨우 2주일 남짓 남은 날이라서 연재 댓글란과 대체역사 갤러리는 뒤집어졌다. 파딱 왈 (소설이) 재밌으니 집행유예.
- 학제 정비 및 전국적인 학당 설립
윤원형이 전국의 농장들을 민주당에 가져다 바치자 이를 모두 처분해 학당을 세우기로 한다. 주세붕이 고안한 촌항학제(村港學制)에 따라 전국 각지에 작은 학당을 여럿 세우거나 기존 서당에 재원을 마련해 주고, 고을마다 한두 곳 학당을 정해 성취가 뛰어난 이들을 모아 더욱 깊게 가르치도록 체계를 정비하였다. 백성이 공부에만 오래 몸 담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라 학년제를 통해 2~4년 내에 수료하도록 하였다. 정학 이외에도 농학, 산학, 역사, 의학, 율학, 상학, 공학, 항해술 등 잡학도 가르치기로 하면서, 아전과 중인을 비롯해 온갖 이들이 학당 교수가 되기 위해 민주당청을 찾아온다. 상인들 중에서 상학 교수를 뽑기 위해 논쟁하는 자리인 논상원(論商院)이 세워졌고, 허엽과 박순이 농서 정리를 맡았으며, 이지함은 주즙지학(배와 항해의 학문)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 중추부 개편
궁궐 바깥에 국정을 논할 자리를 만들어달라는 임꺽정의 요구에 이준경이 제시한 방안으로, 실직 없는 원로 당상관들이 거쳐가는 중추부의 관제를 고쳐 국정 현안을 논하게 하도록 하였다. 임꺽정이 중추부 첨지사로서 참여하였으며, 청사는 그대로 적선방에 위치한다. 어전에서 처리할 사안에 대해 중신들끼리 미리 논의할 수 있게 되고 절차도 훨씬 간결해지면서 임꺽정과 흑의군을 좋지 않게 보는 이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기구의 필요성과 운영방식에 동의하고 인정하게 되었다.
- 공보와 정론보의 창간
향약을 시행해 전국 여론을 다시 이끌려 하는 사림의 계획을 방해하기 위해 민주당은 주자소 장인들을 빼돌려 공보(公報)를 창간한다. 조보의 내용을 첨삭하고 더하여 도성과 지방의 시사를 흥미있게 전하며, 첫 헤드라인으로 윤원형의 사망 소식을 실어 입소문 마케팅을 펼쳤다. 덕분에 매출이 급격하게 늘어 종이와 인쇄 수요가 폭증하였다. 진언혼서(국한문혼용)로 쓰인데다 공보 내용을 맛깔나게 읽어주는 이야기꾼도 생겨나 양민과 천민들도 그 내용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공보에 맞서 올바른 글과 소식을 전한다는 목적으로 이황은 정론보(正論報)를 창간하고 공보를 못마땅해 하던 사족들의 환영을 받는다. 몇 년 후 시사보다는 성리학의 이치와 논변을 주로 다루게 되며 공보와 내용이 겹치는 일은 줄어든다. 성격 상 공보는 타블로이드, 정론보는 학술지에 가까워보인다. 두 언론은 조선양보라 불리며 읽을 글이 부족한 일본의 사족과 호민들, 그리고 요동 지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 정론보는 매달 7, 17, 27일 발행된다.
- 기묘명현 신원과 승과의 재개
병해와 보우가 승과를 재개하는 대신 동시에 기묘명현을 신원시켜 드리고 승과 과목 중에 유교 경전도 포함시키며 도첩제를 통해 사이비 승려를 스스로 정화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자 조정과 사림파는 기묘명현 신원을 실행하기 위해 이를 받아들인다.
- 여진, 왜와 화친
백정과 여진이 같은 뿌리라는 임꺽정의 주장이 퍼지면서 여진족이 귀부했고, 일본에서도 임꺽정 정권을 일본식 막부로 이해하면서 오우치 가문과 쇼니 가문이 대마도와 함께 임꺽정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한다. 특히 니탕개가 임꺽정을 따르게 되면서 니탕개의 난도 없어질 것이고, 소 모리타네에게 왕직 이야기를 들은 임꺽정이 바다로 진출하여 왕직 세력도 흡수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면서 을묘왜변도 없어질 것이다.
- 향전의 격화
임꺽정의 혼사 이후 저항의식이 생긴 백정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사족들과 충돌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런 사족들에게 학당의 일로 반감을 갖고 있던 향리들이 맞서고, 혈기 넘치는 유생들은 학당에 쳐들어가 난동을 벌인다. 그 난리에 잡학 훈장들을 비롯한 평범한 양민들이 휘말리자 겨울 내내 삼남 전체가 싸움터로 변해 관도 통제할 수 없는 사태가 되었다. 원 역사에서도 향전은 있었으나 작중에서는 의민당 난리를 겪으며 백성이 뭉치면 조정도 국법도 어찌 할 수 없다는 믿음이 생긴 탓에 천민과 일반 농민들까지 폭넓게 참여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다.
- 대동법 시행 및 경제사 설치
민주당이 배를 만들 재정이 부족하자 방납을 철폐하고 조운선 수요를 늘려 나라가 배를 만들 수 밖에 없도록 하는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이준경은 '나라의 모든 것이 왕의 소유인데 개인의 재산이 따로 있겠느냐'는 명목으로 아예 공납과 내수사까지 철폐해버리는 안으로 맞선다.[7] 이에 임꺽정은 왕을 설득하여 내수사를 재편하고 그 자리에 일종의 왕립 무역 회사인 경제사(經濟司)를 세우게 된다.
- 임자경장(壬子更張)
대동법과 함께 이준경이 준비한 균역법과 사창제까지 세 절목으로 이뤄진 경장. 1552년(임자년)에는 일부 군현에, 1553년에는 도 별로 각각 시범 시행되었다가 다시 이듬해에 전국 시행되었다. 사창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남는 곡식을 은으로 바꾸고 상인들에게 빌려주며 이자를 받는 지방 사족들이 생겨났다.
- 영남대로 정비
격화된 향전에 시달린 사족들이 어떻게든 자신들의 평판을 되살려보고자 다리를 만들고 길을 닦았다. 그 길로 공보, 정론보와 온갖 재화들이 오가기 시작하고, 역리와 역졸들이 서한과 물건 날라주는 장사 시작하며 말을 여럿 장만한 덕분에 불과 몇 달 사이에 영남대로가 매우 편리하게 정비되었다.
- 판옥선 조기 개발
- 상 투메 호의 항해
혼천설과 지구설의 옳고 그름을 가리기 위해 암본까지의 항해가 결정되었다. 바다로 진출하는 이유가 학문적 증명이라는 점이 특이한 부분. 그런데 마카오까지 갈 중간 기착지가 애매해지자, 임꺽정이 왕직을 처치하는 조건으로 명나라에 중간 기착지 제공을 요구하기로 했고 여기에 명종이 종계변무까지 끼워버리면서 명나라 조정이 한바탕 뒤집어지게 된다. 대양서생이라는 이름으로 기대승, 고경명, 이정 등 스무 명의 선비들이 참여하였고, 항해하는 도중 명나라의 선비들과 교류가 있었다.[8] 이 과정에서 이탁오가 항해에 합류하게 된다. 항해를 하며 남반구 까지 넘어가면서 지구설을 부정하기 어렵게 되자 이지함이 천원지방은 천지의 덕을 성현들이 논한 것이고, 중화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약속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기대승은 이에 덧붙여 건곤의 이치[9]를 따지면 오히려 하비에르가 말한 천동설과 다르게 땅은 움직여야 할 것이라 말한다.
- 격몽요결 편찬
저자는 원 역사 대로 율곡 이이. 여기서는 유학은 물론 지리, 상업, 수학 까지 폭넓게 다루는 종합 계몽서가 되었다. 작 중 언급으로는 천지(天地), 인사(人事), 이재(理財), 상수(象數) 편이 존재하는 듯.
- 조선의 왜구 선제 공격
상 투메 호의 출항 전에 왕직이 조선에 쳐들어올 조짐을 보이자 이에 임꺽정이 가정왜구에 대한 선제공격을 제안하여 그대로 시행되었다. 이때 무로마치 막부에 '도적을 정벌하려 하니 길을 빌려주시오.'라는 내용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어쨌든 그리하여 상 투메 호와 판옥선 11척, 도합 12척 규모의 함대가 왜구 토벌에 나섰다. 판옥선 함대가 포격전으로 왜구들의 집중을 끄는 사이 임꺽정이 이끄는 흑의군이 가정왜구의 본진인 고토 열도 후쿠에 섬을 쳐서 왕직의 집을 털고 왕직을 생포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명 황실이 하사한 은과 비단을 미끼로 왕직의 왜구들을 포섭, 히젠국의 마츠라 타카노부, 왕직의 옛 부하 서해, 대마도의 소 모리타네가 공동으로 자유민주당(自由民主黨)이라는 댱여를 꾸려 왕직의 옛 영역을 관리하기로 했다.
- 서양 항해술의 도입
핀투 선장이 직접 서양식 항해술를 전해주고 있다.
- 독도의 개명
울릉도 동남쪽 뱃길 따라 15레구아에서 외딴 바위섬을 발견한 임꺽정이 자기 마음대로 꺽정섬(거정도(巨正島))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대승은 이는 '우산도'라며 반박했으나 결국 핀투의 해도에도 콕종 암(巖)으로 기록되었다.
- 조선의 조총, 정크선 제작 기술 확보
왕직의 포로 중에 조총 제작이 가능한 대장장이들, 그리고 정크선 제작이 가능한 장인들이 있어 조총과 정크선을 제작할 기술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뒤 조총은 주로 부산에서 만들어지는데, 흑의군의 일제 사격이 가능할 정도로 양산이 되었고[10], 가마야마라는 이름으로 일본에도 수출이 되고 있다. 한편 복선과 한국 전통 배가 합쳐진 내선, 그리고 내선을 개량한 어양선(禦洋船)이라는 새로운 배가 만듵어졌으며, 주사도감(舟師都監)이 설치되어 조선 관련 사업을 관장하고 있다
- 자본주의
사업당의 사업 분야가 광범위해지고 있고, 상업의 활성화로 독점구조가 깨질 가능성이 생기자 더이상 모든 사업을 혼자 관리할 수 없는 상황이 오게 되리라 예감한 서림은 앞으로는 장사의 밑바탕이 될 만한 사업[11]만 챙기기로 한다. '장사의 밑바탕'을 어떻게 불러야 할 지 고민하던 중 논어의 화식(貨殖)에서 따와 화본(貨本)이라는 용어를 만들었고 마침 말린 북어 안주를 먹다 목에 걸린 서림이 떨어뜨린 먹물 방울에 글자가 자본(資本)으로 바뀌었다. 다음날 글자를 다시 쓰기 귀찮았던 서림이 자본 늘리는 것을 민주당의 주의(主義)로 삼을 것을 천명하며 자본주의가 세상 밖으로 나온다.
- 인천의 국제화
건물개(제물포) 포구에 해외관(海外館)을 설치하여 그 안에서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대신 바깥에 오갈 때는 조정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이후 전국 각지의 상인들 뿐 만 아니라 일본 규슈, 중국 강남, 포르투갈의 상인들도 드나드는 국제 무역항으로 공격적으로 확장 중이다.[12] 아예 색주가와 만재루(萬財樓)라는 이름의 카지노까지 들어섰을 정도.[13] 이에 따라 민주당에서도 망양당이라는 이름의 지부를 따로 설치해 두었다.
- 향회의 보통 선거 제도 도입
임꺽정의 압박으로 양주 향회 향안 선출에 권점(權點)의 형식으로 투표가 도입되었다. 수령의 관리하에 공개적으로 행해졌던 만큼 비밀투표는 아니지만, 계급은 물론 성별에 무관하게 표를 행사하는 보통선거는 달성되었다.[14] 이 소식이 공보와 정론보를 통해 전국에 퍼지며 이 권점이 차츰 보편화 된다.
- 원시적 통계학의 태동과 인포그래픽 사용 시작
출산에 대한 문제로 임꺽정과 이명희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이에 이이가 격물법을 활용해보기로 하여 의녀들, 의원들, 산모들과 산파들로 부터 설문조사를 받은 뒤 그 조사 보고서를 사임당이 정리한 막대 그래프와 같이 공보에 개제했다. 이를 본떠 서림이 자신의 사업을 프레젠테이션할때 배의 크기나 민주당의 수익률 등을 인포그래픽으로 만들어 사용하게 된다.
- 위생 관념의 발전
산모의 출산에 관한 통계에서 도출한 손씻기의 중요성이 사임당이 정리한 보기 좋은 막대 그래프 덕분에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 격몽요결
저자는 원 역사대로 율곡 이이지만, 유학 교육서가 아니라 정치 사상은 물론 지리를 비롯한 다앙한 방면의 학문을 아우르는 민중 계몽서로 그 내용이 바뀌었다.
- 전정공회(田政公會)
토지의 소유 상한을 어떻게 정해야 할 지에 대해 논의하는 자리로서 만들어졌다. 해가 넘어가도록 진전은 없으나, 점차 한전제[15]로 가닥이 잡히는 중. 한편 두리손의 농간으로 육신전이 민간에 퍼지자 이를 계기로 노산군과 사육신의 신원이 논의되기도 하는 등 점차 입법부의 역할을 가져가고 있다. 현재는 아예 공회(公會)라는 이름으로 운영 중이며, 4년에 한번 권점을 통해 인원을 교체토록 했다.
- 탕평당(蕩平黨)의 창당
이준경을 필두로 이언적, 조식, 이황을 위시한 사림들이 모여 세운 당. 당명은 조식이 지었다.
- 갑인대훈(甲寅大訓)
명종이 직접 개개인의 사유재산권을 공인하였다.
- 은행의 등장
이황이 은정고(銀政庫)라는 이름의 은행을 설립했다. 예금 이외에도 대출, 보증 등 다양한 금융 사무를 구상 중. 이황의 은정고는 특히 신용도가 높아 예금증서가 지폐로 통용되기에 이른다.
- 노산군의 신원
명종이 임꺽정의 조언을 듣고 공회에 안건을 회부, 공회의 논의를 따라 노산군을 ‘단종’으로 추존하고 종묘에도 다시 모셨다.
- 투전의 이른 등장
- 달력의 대중화
보산역편(保算曆篇)이라는 이름의 달력이 민주당을 통해 유통되고 있다.
- 지적재산권 개념의 도입
모리 가문 과의 이와미 은광 관련 협업 건을 계기로 존저술법(尊著述法)이라는 지적 재산권 보장 법안이 도입되었다.
- 사간원의 역할 변화
국왕이 하는 일이 줄어들며 자연스레 간쟁할 일도 줄어들자, 아예 간쟁을 빙자한 정보 조사-보고로 주 업무가 바뀌는 중이다. 첩보기관이라면 첩보기관이고, 어찌보면 왕실 직속 심부름센터라고도 볼 수 있다.
- 삼락서원 개원
주세붕이 민주당의 지원을 받아 세운 서원. 삼락(三樂)이라는 이름은 맹자의 군자삼락에서 따왔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재능이 있다면 뽑아서 가르치는데, 이황과 조식이 직접 강의를 하고 서원 유생 선발을 이이가 하고 있는 만큼 커트라인이 꽤나 빡빡한 편.[16]
- 헌법 제정 국민투표
[17]
두리손이 이끄는 재조론파의 도전에 대해 민주당이 내놓고 탕평당도 동의한 방안인 헌법을 제정하여 재조론파가 나라를 퇴보시키지 않도록 하기로 한다. 재조론파도 시골 향반들과 농민들의 여론은 예전같은 농본사회를 원하는 여론이 높으므로 권점(투표)에서 자기들이 승리할 것이라 믿고 받아들여 국민투표가 이뤄지게 된다. 헌법 초안은 이이가 작성했는데, 권력의 근본은 민에게 있고 민의 다섯 가지 기본권리[18]는 불가침이라고 명시하는 등 상당히 현대적인 헌법 초안이 나와서 탕평당 측 제헌위원인 이황과 조식이 머리를 싸매게 만든다. 그 뒤 민주당의 뒷공작으로 헌법의 내용을 정하는 전국적 권점이 확정되고, 임꺽정은 권점에서의 승리를 위해 병해 스님과 흑의군, 스페인 용병 대와 광대들을 이끌고 전국을 순회하며 유세하기로 한다. 전국적인 권점 끝에 민주당이 근소우위로[19] 승리를 거두지만 임꺽정과 두리손의 물밑거래를 통해, 수정된 오복헌법을 기본으로 하되, 공회의 논의를 거쳐 중추부가 건의하면 수정이 가능하도록 결론이 나고 1560년 1월 대조선국 어정헌법이 정식으로 공포된다.
- 탈춤의 전국적 확산
- 기학(氣學)의 탄생
말하자면 조선식 자연철학(과학)이다. 병해대사가 전우치의 권위를 써서 전국의 도사, 점쟁이, 박수무당들을 불러모은 다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으니 괴력난신을 추종하며 백성을 속이지 말고 합리적인 실험관찰을 통해 민생을 개선하자고 설득하여 기학도 조직이 세워진다. 첫 실험관찰의 결과물로 감자의 보급이 이뤄진다.
- 인경 폐지
한양의 야간 통금이 폐지되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조금 골때리는게 어영청 경관들의 더 많은 성과급을 위해서(...).이후 한양은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별명을 새로 얻었다.
- 경신병란(庚申兵亂)
1561년 늦봄 드디어 두리손이 반란을 일으킨다. 꺽정과 민주당, 탕평당은 반란 수뇌부부터 잡기 위해 일부러 이황의 은정고에 뱅크런을 유발하고 반란이 있다는 소문을 퍼트려 이에 지레 겁먹은 반란 수뇌부들이 모이자 꺽정이 금군을 이끌고 가 들이치지만 이것 자체가 두리손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난 것이었다. 두리손은 꺽정이 반란 수뇌부를 먼저 칠 것을 예상하고 탐관오리들이 대부분이던 수뇌부를 미끼로 내어주고, 실제 병력을 움직이는 군관급 실무자들을 포섭해 한양 도성을 바로 포위하고 포격을 가하며 꺽정파의 허를 크게 찌른다. 게다가 조선인민군을 칭하면서 자신은 인민의 대표자로 헌법을 수호하기 위한 봉기를 한 것이라고 선전하여 민주당을 지지하던 민심도 교란시카고, 명나라와 포르투갈과도 손을 잡아 군사고문단과 화포 지원까지 받는다. 하지만 꺽정파도 준비한 상책인 참수작전에 실패하자 중책으로 꺽정이 황해도로 탈출하여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이윤경, 니탕카이가 준비한 진압군 병력 1만 5천을 전부 말에 태워 고속기동으로 한양으로 진군, 뚝섬에서 벌어진 결전에서 교묘한 기병 운용으로 인민군을 제압하고, 패배를 직감한 두리손은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백기 투항한다.
- 임무형 지휘체계
두리손이 자신의 반란군인 조선인민군에 도입한다.
- 워게임의 등장
명과 있을지도 모르는 일전을 대비하기 위해 황해도 시절 이이와 이지함이 교육차원에서 하던 놀이를 발전시켰다.
- 감자의 보급
병해대사가 모은 기학도들이 대조군 실험을 거쳐 다른 구황작물들보다 스페인에서 들여온 감자가 월등한 구황작물 효과를 가짐을 증명하게 되어 감자가 보급된다.
- 안민제설석의
규슈 격물의 결과를 바탕으로 이황이 저술한 책이다. 조정이 상공업을 통제하지 않을수록 왜 이익이 늘어나고 그것이 고루 분배되는지 이유와 원리를 성현의 말씀이 아닌 이치와 논리로 증명하였다. 국부론보다 200년 빠른 경제학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 회사법
작중 표현으로 계사율(契社律). 민주당과 사업당의 애매한 관계를 정리할 겸 논상원에서 자유민주당 분표를 발행하기 위해 민주당에서 발의하였다.
- 화페의 도입
원역사 대비 상업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졌으니 만큼 자연스레 화폐도 200년 가까이 일찍 도입되었다. 조정에서 주전도감(鑄錢都監)을 세워 은화와 동화를 제작중에 있다.
- 보드게임의 발전
정여립이 만재루에서 판돈을 크게 잃고 오자 도박에 대한 규제를 공회에서 주창했다. 이에 발등에 불이 떨어진 한온은 서림에게 조언을 구했고, 결국 다른 놀이가 부족해서 그런거라고 물타기를 시도하며 서림이 고안한 승람도(勝覽圖)[20]라는 놀이를 새로이 내놓는다. 그런데 이원수의 주책, 검손이네 새끼들의 난동, 꺽정이네 아들 철수의 장난질 같은 여러 변수에 의해 승람도 파는 일은 임천당 주인 쇼 세이의 몫이 된다. 이후 투전패에 그림을 넣어 팔거나, 워 게임을 개량한 운주희(運籌戱)를 고안해 내는 등 그 사업을 적극 확장 중에 있다.
- 국인선서
명나라 장거정의 음모에 맞서 일본 자민당과의 군사동맹 및 총력전 체계를 세우기 위해 공회에서 조선의 정당성을 밝히고 명나라에 대한 사대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공포한 선서로, 노론 향반 중 가장 고루한 자들이 모인 선우당에서조차 동의할 정도로 온 국민의 총의를 모아 공회에서 298명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으며 국왕 이환이 가장 먼저 서명하였다. 이 선서는 6개월만에 엘리자베스 튜더를 통해 유럽에도 알려졌으며, 빌럼 판 오라녀가 이끄는 네덜란드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준다.
- 한양의 맹
조선, 일본, 압카이 아파시 구룬 3국은 명나라가 이 동방 상국의 법도를 받아들일때 까지 단독으로 명과 교섭하지 않으며, 군병을 낼때도, 물릴때도 함께하고, 그 이후의 이권도 나눠가지기로 맹세하였다. 출병 날짜는 무진년(1568년) 가을.
- 커피의 정착
대만산 커피가 분화두라는 이름으로 조선에 수입되었다.
- 싱크탱크 설립
- 자명종의 도입
- 플린트락의 발명
김성일, 황윤길 등 전국에서 차출한 선비들을 갈아넣어 자생화총(自生火銃)이라는 이름의 플린트락이 개발되었다.
8. 기타
[1] '코레(고려)' 대신 '디오시온(됴션)'으로 부르는 것이 서양 국가들에게 거의 정착되었다.[2] 작중 언급과 기존 좌독기의 색상을 바탕으로 예상한 디자인이다. 연합군을 결성하며 여진의 십자기와 구분하기 위해 좌독기를 간략화해 '팔괘태극기'라 이름붙인 기를 사용하고 있다.[3] 역대 군왕의 신위를 치우고, 그 안에 폭약을 대량으로 설치하여 에스파냐 용병단을 말 그대로 터뜨렸다. 이 와중에 화력덕후 문종대왕에게 칭찬받겠다는 해설은 덤[4] 당연히 의민당은 이준경 포함 중신들은 물론이고 조식, 이황 등의 지방 명사들이 봐도 나라의 기둥을 기울여가며 토벌해야 할 반군은 절대로 아니었고, 대병을 일으켜보았자 전국 각지 여론의 악화를 포함해 큰 후유증이 확실했기에 반대가 격렬했으나, 명종은 완전히 윤원형 손에서 놀아났다.[5] 의민당의 실질 수가 자기들 십분지 일이라는 걸 이미 확신했으나, 황해도 백성들이 수천 단위로 몰려와서 여차하면 관군과 맞붙을 기세로 대치했다.[6] 이때 어우야담에 나오는 큰 물고기 야사와 엮는 연출이 압권이다.[7] 여기에 이이는 왕 또한 개인일지언대 어찌 개인의 사유재산에 손을 댈 수 있냐는 논리를 제기한다. 둘 다 역적 소리 들어도 할 말이 없다.[8] 오승은도 언급되었으며, 덕분에 서유기가 일찍 일본에 전해져 베스트셀러가 된다.[9] 곤(땅)은 지극히 유순하되 그 움직임은 강직하다[10] 이장손의 제안으로 분업화 공정이 도입되었다.[11] 배 만드는 일, 조총 만드는 일, 경제사의 재정 융통하는 일[12] 이미 카스테라가 가수과(嘉壽菓)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을 정도로 교류가 활발하다.[13] 투전 판이 주로 열리는데, 판돈과 패를 주고 받으며 사단칠정논쟁이 오가는 진풍경이 벌어진다.[14] 신분제 시대인 조선시대에는 비밀투표를 시행하면 유력 가문들의 담합이나 부정이 생길 소지가 높아 차라리 모두가 지켜보는 공개투표가 더 민심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15] 원 역사에서는 성호 이익이 주장했다.[16] 성혼, 정인홍 같은 원 역사의 거물들도 버거워할 정도로 묘사된다. 다만 류성룡, 이산해, 정여립같은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 듯.[17] 대체역사 갤러리의 유저가 만든 헌법 제정 국민투표 결과 지도이다. 현재 작품 공지에도 올라온 반 공식인 자료이다. 공지 원본[18] 기자가 말한 오복을 기본권으로 해석했다.[19] 단 지역구 수로 셌을때는 민주당 우위 지만 사람 머릿 수로는 재조론이 우세할 수도 있다는 언급을 한걸로 봐서는 거의 박빙이었다.[20] 전국의 땅을 사들이고 농장이나 공방을세워 치부하는 놀이라는 언급을 보면 모티프는 부루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