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2 13:27:05

진무 덴노

진무천황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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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대 천황
진무 천황
神武天皇
파일:神武天皇.jpg
출생 기원전 711년 2월 13일
사망 기원전 585년 4월 9일 (향년 126세)
나라현 가시하라궁
(現 일본 나라현 카시하라시)
능묘 우네비야마우시토능([ruby(畝傍山東北陵, ruby=무방산동북릉)])
재위기간 초대 천황
기원전 660년 2월 11일 ~ 기원전 585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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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d0029><colcolor=#dca600> 히코호호데미([ruby(彦火火出見, ruby=언화화출견)]), 사누([ruby(狭野, ruby=협야)])
부모 부친 히코나기사타케우가야후키아에즈
모친 다마요리히메
형제자매 4남 중 4남
배우자 아히라쓰히메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
자녀 3남
종교 신토
관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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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네비노카시하라노미야([ruby(畝傍橿原宮, ruby=무방강원궁)])
우네비노카시하라노미야([ruby(畝火之白檮原宮, ruby=무화지백도원궁)])
카시하라노우네비노미야([ruby(可之波良能宇禰備乃宮, ruby=가지파량능우니비내궁)])
한풍 시호 진무 천황([ruby(神武天皇, ruby=신무천황)])
화풍 시호 {{{#!wiki style="margin: 0 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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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반여언천황
(神日本磐余彦天皇)[1][2]
신일본반여언존
(神日本磐余彦尊)[3][4]
치삼모야존(稚三毛野尊)[5][6]
약어모소명(若御毛沼命)[7][8]
협야존(狹野尊)[9]
시어천하지천황
(始馭天下之天皇)[10]
반여언화화출견존
(磐余彦火々出見尊)[11]
반여언존(磐余彦尊)[12]
반여언의제(磐余彦の帝)[13]
언화화출견존(彦火火出見尊)[14][15]
풍어모소명(豊御毛沼命)[16]
신왜이파예비고명
(神倭伊波禮毘古命)[17][18]
우니비능가지파량능궁어우천황
(宇禰備能可志婆良能宮御宇天皇)[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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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진무 천황 승리.jpg
진무 천황과 황금 솔개
1. 개요2. 민족시조 겸 건국시조3. 생애
3.1. 내력과 진무동정3.2. 나가스네히코의 공격3.3. 야타가라스의 도움3.4. 결정적인 일격과 승리3.5. 천황 즉위와 붕어
4. 능과 궁전5. 실존 여부와 진실
5.1. 스진 천황 관련5.2. 가키모노토 히토마로의 노래 관련5.3. 기타
6. 가족

[clearfix]

1. 개요

일본에서 초대 천황으로 여겨지는 인물이다.

이름이 《고사기》에는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神倭伊波禮毘古命)라고 기록되었는데 《고사기》 표기를 표준으로 간주한다. 《일본서기》에는 칸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神日本磐余彦尊), 와카미케누노미코토(若御毛沼命), 사노노미코토(狹野尊),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彦火火出見尊) 등으로 나왔고 황명도 하츠쿠니시라스 천황(始馭天下之天皇)로 불린다.

일본사에서 신화시대 인물들의 이름은 매우 길다. 초대 진무 천황으로부터 제44대 겐쇼 천황까지의 시호는 나라 시대의 대문장가였던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 722~785)가 지었다고 한다.

2. 민족시조 겸 건국시조

진무 천황은 일본인의 비조(鼻祖)로도 통한다. 일본 황실의 시조이자 일본 역사상의 웬만큼 대단한 인물들의 시조로 그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에는 진무 천황이 나오기 때문이다.[20] 일례로 백제계 도래인 계통의 모후를 두었던 제50대 간무 천황의 현손자인 타이라 타카무네오로부터 시작된 타이라 가문(헤이시)의 경우, 헤이케 정권의 개창자인 타이라노 키요모리를 비롯한 모든 타이라 사람이 진무 천황의 후손이었다.

그리고 타이라 가문의 영원한 맞수인 미나모토 가문(겐지) 또한 진무의 자손으로, 열거해 보자면 다음과 같았다. '최초의 미나모토'인 미나모토 마코토를 시작으로 제52대 사가 천황의 황자 중 17명이 하사받은 사가 겐지 가문과 사가 겐지 가의 후손들에서 분파된 키타베 家, 히로하타 家, 히가시산조 家, 요코가와 家, 시조 家, 요인 家, 야기우메 家, 다나카 家, 니시시치조 家, 다케다 가문이 그 후손들이었다. 또 성을 하사받은 황자 중 12번째인 미나모토 토오루가 사가 겐지 토오루류의 시조로서 거기서 분파된 미타 家, 와타나베 家, 마츠우라 家, 카마치 가문 또한 진무의 후손들이었다. 그리고 제53대 닌묘 천황의 자손에게 하사된 닌묘 겐지 가문과 그 분파들인 하나부사 가문, 타테이시 가, 타테이시 가문의 분파인 우루시마 家, 키타야마 家, 스가 家, 우루시마 家, 와다 家, 나츠메 家, 타나카 家, 타치카와 家, 모리 家, 오오나 家, 칸부미 家, 이치마시마 가문도 진무 천황의 후손들이었다.

게다가 제56대 세이와 천황의 6남 사다즈미 친왕의 두 아들 미나모토 츠네모토미나모토 츠네오가 하사받은 세이와 겐지 가문이 특히 유명한데, 대표적인 인물로 가마쿠라 막부의 개창자로 중세 무가 정권 시대의 서막을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겐페이 합전의 레전드급 명장이었던 미나모토 요시츠네가 있다. 세이와 겐지 가문은 미나모토 가문 중에 가장 분파가 많아서 모든 분파와 후손을 다 거론할 수는 없다. 또 대표적인 후손들이 츠네모토의 손자 미나모토 요리노부를 시조로 두는 카와치 겐지 가문에서 나오는데, 이 가문에서 난보쿠초 시대를 풍미한 닛타 가문과 아시카가 가문이 나왔고, 특히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남조와 대립하며, 일본 역사상 두 번째 무가 정권인 무로마치 막부를 세웠다. 또한 미나모토 요리노부의 8대손이 마츠다이라 가문의 시조였던 마츠다이라 지카우지였는데, 그의 9대손으로, 마츠다이라 가문[21]의 당주였던 사람이 바로 아즈치모모야마 시대를 종결시키고, 세 번째 무가 정권인 에도 막부를 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22]

이렇게 따지고 보면 호겐의 난, 겐페이 전쟁, 조큐의 난, 난보쿠초 시대, 오닌의 난, 센고쿠 시대세키가하라 전투집안 싸움이 된다.[23] 천황가를 압박한 미나모토 가문, 아시카가 가문, 도쿠가와 가문이 각각 천황가의 분가, 천황가의 분가의 분가, 천황가의 분가의 분가의 분가가 되기 때문이다.[24]

이러니 아무리 신화시대의 인물이라 할지라도 진무 천황은 일본 역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진무 천황을 시작으로 일본 역대 천황들을 주욱 살펴보다 보면 일본의 웬만한 모든 귀족가들의 계보를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할 사람들은 역대 천황들을 차례대로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진무 천황의 형 이나히노미코토(稲飯命)를 두고 9세기 초 일본 서적이었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서는 신라 국왕과 조상이 같다고 주장했다.[25] 이 때문에 일본의 학자들이 일선동조론을 주장하는 데 이용하기도 했다.

3. 생애

가독성을 위해서 존칭 '미코토'(命)를 한글 음역에서는 생략하고, 신명도 존칭 부분을 제외하고 '신'으로 대체한다.

3.1. 내력과 진무동정

진무는 히코호오리와 도요타마히메의 아들이자 세 번째 신대통치 신인 히코나기사타케우가야후키아에즈(彦波瀲武鸕鶿草葺不合命)와 바다의 신 와다츠미의 차녀였던 다마요리히메(玉依姬命)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 황태자가 되어 아히라츠히메(吾平津姬)와 결혼해 타기시미미(手硏耳命)와 키스미미(岐須美美命)를 낳았다.

이후 《일본서기》에 따르면 45세가 된 갑인년(기원전 667), 히무카국(日尙國)[26]의 다카치호노궁(高千穗宮)에 형제들을 모아서[27]
천손강림 이후 179만 2,470여 년[28]이 지났지만 아직도 서국 근처에서만 살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로다. 동쪽에 아름다운 땅이 있어 푸른 산맥이 4바퀴에 걸쳐 형성된, 천하를 다스리기에 어울리는 토지이다. 따라서 이곳을 정벌해야 한다.
라고 말하니, 모든 형제들이 이에 동의하여 동쪽으로 진군했다. 이것을 진무동정(神武東征)이라고 부른다. 이로써 3대째 살아온 휴우가국을 뒤로 하고 기나긴 여행을 시작했다.

파일:진무동정.jpg

진무 천황이 동정(동쪽 정벌)하며 갔다는 길을 표시한 지도.

츠쿠시(筑紫)[29]의 우사(宇佐)[30]로부터 오카다궁(岡田宮), 아키(安芸)[31]의 타케리궁(タケリ宮)을 거쳐 이듬해 을묘년(기원전 666)에 키비(吉備)[32]의 타카시마궁(高島宮)에 도착했다. 진무는 그곳에서 3년간 군사와 무기를 준비하기로 했다. 3년이 지나 무오년(기원전 663)이 되자 나니와[33] 곶(岬)에서 가와치[34]의 오쿠모(青雲), 시라카타(白肩) 나루터에 이르러 상륙하려고 했다.

3.2. 나가스네히코의 공격

하지만 그 땅의 대호족 나가스네히코(長髄彦)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아 멀리 후퇴했다. 이때 맏형 이츠세(彦五瀬命)가 적의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진무는
태양신의 자손인 우리가 태양이 뜨는 방위를 공격한 것이 좋지 않았다.
하며 깊이 후회하고는, 키이(紀伊)[35]로 상륙하여 카마야마(竈山)로 진군했다. 그 와중에 이츠세가 결국 숨을 거두었다. 진무는 형의 제사를 지낸 뒤 쿠마노(熊野)의 미와노무라(神邑)에 도착하여 바다를 건너지만 폭풍을 만나 남은 형들인 이나히(稲氷命)와 미케이리(三毛入野命)를 잃었다.

진무가 이끄는 군대가 겨우 겨우 쿠마노(熊野)[36]에 상륙하여 쿠마노시의 산중에 접어들자 토지신이 곰의 형상으로 변하여 갑자기 나타나 독기를 내뿜었다. 군사들이 독기에 모두 정신을 잃고 쓰러졌는데, 이 모습을 보고 천계 타카마노하라에서 타카미무스비 신(高御産巣日神)과 일본 천황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37]타케미카즈치 신(武甕槌神)을 원군으로 보내려 했지만, 타케미카즈치는 굳이 자기가 내려갈 필요가 없다면서 영검 후츠노미타마를 내려보냈다. 영검은 쿠마노의 호족 타카쿠라지(高倉下)의 창고 지붕을 뚫고 마루에 우뚝 꽂혔다. 이튿날 아침 타카쿠라지가 검을 발견하고 진무에게 진상하자마자 군사들이 모두 회복되어 일대의 호족을 쳐부숴나가며 계속 진군했다.

3.3. 야타가라스의 도움

허나 난관이 하나 있었다. 진무도 군사들도 규슈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에 주변 지리에는 익숙하지 못했다. 부락이라면 모르겠지만, 산중에서 행군을 하는데 지리를 모름은 큰 문제였다. 결국 의기양양하게 진군했던 것이 잘못이었는지 금세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보고 타카미무스비 신이 즉시 카모타케츠노미(賀茂建角身命)를 호출하여 진무를 도우라고 명령했다. 카모타케츠노미는 곧바로 다리가 3개 달린 까만(혹은 붉은) 까마귀 야타가라스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동정군의 머리 위로 춤추듯이 내려갔다. 진무는 갑자기 나타난 이 희한한 까마귀를 신의 사자라고 확신하고, 전군에게 까마귀의 뒤를 쫓도록 명령했다. 야타가라스 덕분에 진무군은 무사히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동정군은 이제 요시노(吉野), 우다(宇多)로 진군했다. 그 땅은 에우카시(兄宇迦斯), 오토우카시(弟宇迦斯)라고 하는, 누가 봐도 형제임을 뻔히 알 수 있는 호족들이 통치하는 땅이었다. 에우카시는 진무에게 자청하여 이 땅을 양보하고 연회를 베풀 테니 참석하라고 권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라고, 에우카시는 연회장에 장치를 설치하여 진무가 들어가면 천정이 떨어져내리도록 했다. 하지만 형의 파렴치한 행동에 질려 동생 오토우카시가 진무에게 그 일을 밀고했다. 진무는 에우카시가 연회장에 제일 먼저 들어가게 했고, 연회장은 바로 에우카시의 무덤이 되었다.

3.4. 결정적인 일격과 승리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mperor_Jimmu.jpg
그리하여 우다까지 정벌한 뒤 진무는 드디어 야마토까지 쳐들어가 맏형 이쓰세를 죽인 숙명의 라이벌 나가스네히코와 다시 대립했다. 양자의 싸움은 태양신의 후손과 긴키 일대를 다스리는 패자(覇者)의 대결이었다. 양군 모두 사력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원정에 지친 진무군이 밀려나 배수진을 치게 되었다. 이렇게 모두 죽음을 각오하는데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나 전황이 뒤바뀌었다. 진무가 최후의 돌격을 각오하고 하늘을 올려다 본 바로 그때였다. 하늘에서 황금빛 솔개(킨시)가 날아와 진무가 쏘려 하는 활을 막았다. 솔개는 마치 번갯불과도 같이 빛을 비추며 나가스네히코의 군대가 친 진을 바라보았다.

그 빛을 보고는 나가스네히코의 군사들이 모두 눈이 멀어 전의를 상실한 채 도망쳐버렸다. 바싹 뒤를 쫓는 추격군을 피해 어떻게든 체계를 바로 세우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던 나가스네히코의 앞으로 뛰쳐나온 자가 바로 그의 식객 니기하야히(饒速日尊)였다. 니기하야히가 십종신보(十種神宝) 중 야츠카노츠루기(八握剣)를 번쩍이며 한 번 휘두르자 나가스네히코의 머리가 경악한 표정을 띄운 채 땅으로 떨어졌다. 니기하야히는 처음부터 이때를 위해 나가스네히코의 곁에서 지냈던 것이다.

니기하야히는 그대로 진무의 진영으로 향해 야마토의 지배권을 진무에게 헌상했다.

3.5. 천황 즉위와 붕어

이로써 호노니니기로부터 대대로 숙원으로 삼은 국토 통일의 꿈이 이루어졌다. 진무는 52세가 되던 해(기원전 660년?)에 가시하라궁(橿原宮)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여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媛蹈鞴五十鈴媛命)와 결혼하여 98세에 카무야이미미(神八井耳命)와 카무누나카와미미(神渟名川耳尊, 스이제이 천황), 그리고 히코야이(日子八井命)를 낳았다. 이후 정사를 돌보다가 재위 76년(기원전 585년?)에 붕어했는데, 《일본서기》에서는 향년 127세, 《고사기》에서는 137세라고 서술했다.[38]

4. 능과 궁전

고사기》에서는 진무 천황이 나라현 우네비산[39] 가시하라궁에 좌정하여 통치했다고 매우 짧게 서술했다. 《일본서기》에서는 진무 천황이 즉위하기 2년 전(기원전 662?)에 아래와 같이 말했다고 서술했다.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 땅은 안주할 만한 곳이니 거기에 도읍을 정하자.
진무 천황은 신화적 인물이니 당연히 능이 확실하지 않다. 게다가 천황릉은 발굴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막부 말기에는 그래서 어느 고분이 진무 천황의 능인가를 두고 학설이 분분했다. 분큐 2년(1862)에는 에도 막부의 자금으로 전 천황릉을 수리하는 '분큐의 수복' 작업을 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공적 영역에서 진무천황의 능의 위치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크게 세 가지 설이 있었으나 다니모리 요시오미(谷森善臣, 산조 사네토미의 국학 스승)의 설이 채택되었으니, 바로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였다. 《일본서기》에서 우네비산 동남쪽 가시하라에서 즉위했다고 했는데, 바로 우네비산 동남쪽 근처에 큰 무덤이 있으니 당연히 진무 천황릉이라는 것이다. 그때 채택한 설이 현재까지도 궁내청의 공식 입장이다.[40]

메이지 정부는 1890년 진무천황릉 옆에 가시하라 신궁을 창건했다. 창건시에는 면적이 2만 195평(6.7헥타르)이었지만 1911년 제1차 확장사업으로 3만 600평(10.1헥타르)으로 넓혔고, 1916년에는 총 13마을 208가구 1054명이 이주했다. 현재는 가시하라진구마에역이 근처에 세워져 있다.

1938년에 진무 천황 즉위기원(황기) 2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가시하라 신궁 전체를 발굴하는 대규모 조사작업을 진행하였는데 신궁 마당 지하에서 조몬 시대 후기~말기의 대규모 취락지와 소년, 소녀들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도쿄학예대학의 가누마케 이요(鹿沼景揚) 교수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유물들의 대부분을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 반입하여 탄소연대측정한 결과, 당대로부터 2,600년 전의 물건들이며 그 전후 오차는 ±200년이라고 하여, 실제로 가시하라 신궁 터가 진무 천황의 도읍지라고 증명된 사례라고 주장했다. 그에 힘입어 1938~1940년 제2차 확장사업을 시작해 연못과 산림을 늘렸다고 한다. 2차 확장사업의 전액은 국비와 황기 2600년 기념 봉축헌금으로 충당했다고.

5. 실존 여부와 진실

진무 천황은 황실의 정통성 및 역사, 권위를 높이기 위해 후대에 창조된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1868년 대정봉환 때는 선언문(〈왕정 복고의 대호령〉)에
진무 천황께서 창업하신 당초에 근거하여…
라는 문구가 들어가기도 했다. 고다이고 천황 항목 참조. 메이지 5년(1872)에는 기원절을 제정했다. 당초에는 음력 1월 1일이었던 1월 29일이었으나, 음력이 불편하다는 이유와 이듬해부터 양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진무 천황의 즉위일을 양력으로 계산하여 2월 11일로 정했다. 이는 연합군 총사령부가 폐지시켰으나 1960년대 건국기념일이란 이름으로 부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 일본 사학계는 진무 천황을 비롯한 상고시대의 천황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치부하여 아예 건드리지 않았다. 하지만 다이쇼 시대의 역사학자인 와세다대학의 츠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가,
일본 최초의 천황은 제10대 스진 천황이다. 초대 진무(神武) 천황부터 제9대 카이카 천황까지는 역사에 없는 조작된 인물이다.
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41][42] 이후 《고사기》와 《일본서기》 또한 엄격한 사료 비판을 받았다. 또한 다이쇼 천황의 4남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1915-2016)도
진무 천황은 신화이지 역사가 아니다.
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다카히토 친왕은 '빨갱이 왕자님'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큰 역사학회 중 하나인 사학회 자리에서, 앞서 언급한 건국기념일 제정에 대해 사학회가 결의를 해서 공식적으로 그에 대해 반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가(이른바 '사학회 발언')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화가 나서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고도 한다.

중세사학자로 유명한 아미노 요시히코도 2000년에 발간한 저서 《일본이란 무엇인가》[43]에서 전혀 사실과는 상관없는 허구의 천황을 기념하여 국가에서 따로 날까지 지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다카히토 친왕도 그러한 맥락에서 반대했을 것이다.

문헌과 기록은 둘째치고 127살이라는 나이는 당대 기준으로도 어이없을 정도로 오래 산 것이고 지금 기준으로도 세계 최고령으로 기네스북올라갈 수준인 저 엄청난 고령까지 살았다는 게 진무 천황의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이유 중 하나가 되고 있다.[44]

5.1. 스진 천황 관련

현재 일본 역사학계에서 그 실체를 확신할 수 있는 것은 10대 스진 천황부터라는 것이 정설이다.[45] 진무 천황이 즉위했다고 기록된 기원전 660년은 후기 조몬 시대에 해당한다. 이때의 일본은 토기를 만들고, 물고기를 사냥해 먹으며, 도래인 집단에 의해 농사가 시작된 부족국가 시대로, 정사(正史)에서 교차 검증이 가능한 일본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후한 광무제 때(57년)이다. 지금의 규슈 북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나노국(奴國)의 왕이 후한에 조공하여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46]이라는 칭호와 금인[47]을 하사받고 나서이다. 그 후에도 후한 안제 때(107년) 왜왕 수승(帥升: 스이쇼)이 후한에 입조하여 노예 160명과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이후 등장하는 기록은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야마타이국히미코(기원후 2세기)이다. 진무 천황 이후 결사팔대에 속하는 천황들은 업적이나 행적에 대한 기록이 부실할 뿐만 아니라 재위기간 또한 비정상적으로 길다. 오래 사는 것이야 있을 수 있다 해도, 어지간히 후사를 늦게 보지 않는 이상(왕의 의무 중 하나가 후계자를 두어 후계구도를 명확히 하는 것이다) 왕이 오래 살면 그 아들은 어쩔 수 없이 재위기간이 짧아진다. 청나라에서 성조 강희제가 61년간이나 재위하는 바람에 아들 세종 옹정제는 재위기간이 13년에 불과했듯이.[48]

기원전 660년이 60갑자로 신유년이기 때문에, 후대의 〈신유혁명설[49]을 의식하여 연대를 만들어냈으리란 설도 유력하다. 현대 역사학계에서 진무 천황은 가상의 존재로 간주되긴 하지만, 아직도 많은 신사의 신관들과 신화를 신앙하는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진무를 실존인물로 여긴다.[50] 물론 실존인물이라면 스진 천황이 속한 부족의 비조(9대조)쯤 되거나 혈통적 관계가 없는 선대 부족장 정도의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은 있다. 살던 시대도 기원전 660년보다는 수백 년쯤 뒤에 살았을 것이다. 또 신화적인 의미에서 진무 천황과 아마테라스의 손자라는 호노니니기, 아마테라스는 같은 존재이다.

5.2. 가키모노토 히토마로의 노래 관련

또한 7세기 후반에 궁중 가인 가키노모토노 히토마로(柿本人麻呂)가 지은 〈빈궁 반카〉(장례용 노래)에 따르면 아마노하라[51]에서 덴무 천황이 내려와 아스카에서 다스리고, 석실 문을 열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기록하는데, 여기에는 진무천황이 전혀 언급되지 않았을 뿐더러 아마테라스 신화 내용의 일부까지 있다. 이 노래는 8세기 초반에 편찬된《고사기》보다 오래되었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가 아는 일본의 기기신화가 제대로 정착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니면 극단적으로는 아예 고사기 편찬 이전까지 우리가 아는 기기신화의 내용이 없었을 수도 있다.

이외에도 일본에 소중화사상이 대두될 때[52] 진무 천황이 사실 춘추시대 오나라의 시조인 태백의 후손, 혹은 형제라는 속설이 주목받기도 했다.[53]

5.3. 기타

1882년, 미에현에서 활동하던 민권운동가 오바 나리아키(大庭成章)[54]가 연설을 하면서
진무 천황은 외국에서 힘을 키운 뒤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의 겁쟁이들을 제압하고 일본 전체를 먹은 큰 도적이요, 그 후손인 금상천황(메이지)은 물론 고관대작들도 모두 큰 도적이다.
라는 논조로 주장하다가 불경죄로 잡혀들어가 재판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현대 일본의 넷 우익들은 진무 천황을 가리켜 '민주주의의 시초'라고 찬양하고 있는데[55] 이를 두고 일본의 자유주의자들은 "현대 일본인의 정치적 감각과 수준은 오바 나리아키 때보다 더 퇴보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6. 가족

태양의 여신 아마테라스의 5대손이라고 전한다.
  • 제1비: 아히라츠히메(吾平津姬)
    • 1남: 타기시미미노미코토(手硏耳命, ?~기원전 585?)
      아버지 진무 천황이 붕어한 뒤, 의붓어머니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를 아내로 삼고, 이복동생 3명을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그 전에 이복동생들인 카무야이미미노미코토와 스이제이 천황에게 살해됨.
    • 2남: 키스미미노미코토(岐須美美命)
      《고사기》에서만 나옴.
  • 제2비: 히메타타라이스즈히메노미코토(媛蹈鞴五十鈴媛命) 황후
    • 3남: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 4남: 카무야이미미노미코토 또는 카무누나카와미미노미코토(神八井耳命 또는 神渟名川耳尊, ?~기원전 578?)
      타기시미미의 반역 사건 때 동생 스이제이 천황과 함께 타기시미미노미코토를 죽임.
    • 5남: 히코야이노미코토(日子八井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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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토스메라메코토[2] 《일본서기》(日本書紀)[3] 카무야마토이와레히코노미코토[4] 《고사기》(古事記)[5] 와카미케누노미코토[6] 《고사기》(古事記)[7] 와카미케누노미코토[8] 《고사기》(古事記)[9] 사노노미코토[10] 하츠쿠니시라스스메라미코토[11] 이와레비코호호데미코토[12] 이와레비코노미코토[13] 이와레비코노미카도[14] 히코호호데미노미코토[15] 이상 《일본서기》(日本書紀)[16] 토요미케누노미코토[17] 카무야마토이와레비코노미코토[18] 이상 《고사기》(古事記)[19] 니아메노시타시로시메스스메라미코토[20] 일본 고대사는 도래인 말고 진무 이 양반과 관계가 없으면 기록이 되지 않는다.[21] 카와치 겐지 가문의 분가인 닛타 가문의 분가.[22] 다만 마츠다이라-도쿠가와 가문은 족보를 위조했다는 설이 유력하다.[23] 하지만 딱히 이것이 특별하다고 볼 수만도 없는 게 원래 고대에 일어났었던,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반란 대부분은 주류에서 밀려난 황족이나 지방 호족이 주도하여 벌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또 그런 지방 호족도 거슬러 올라가보면 황족인 경우가 많았다. 일단 밀려나긴 했어도 황족이긴 하니까. 그만큼 기반이 되는 지지층이 많기 때문에 사람을 모아 반란을 일으키기도 쉬웠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부여 계통이었던 백제 부여씨와 고구려 고씨의 전쟁도 거대한 집안 싸움인 셈이었다. 오늘날에도 재벌끼리 유산을 두고 싸우거나 그 싸움에서 밀린 재벌의 자손이 갈라져나와 새로운 대기업을 차려 경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24] 족보를 날조하기 쉬운 난세의 인물들임은 감안해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게 조상을 갈아치울 수 있는 시대였다. 예를 들어 오다 가문이 타이라 가문의 후손을 칭한 것은 오다 노부나가 때 시작되었다.[25] 흘해 이사금 시기 왜국(야마토 왕권)의 황자비가 된 아찬 급리(急利)의 딸 소생이 아닌가 추측된다.[26] 현재의 미야자키현.[27] 정말 여담이지만 이 중 진무의 둘째형 이나히노미코토는 신찬성씨록에 무려 신라 국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당연히 일본서기와 고사기에는 이런 내용이 없고, 진무동정 중 바다로 군대를 이끌고 가는데 바닷길이 험해 나아갈 수가 없자 '우리의 어머니가 바다의 신의 아들인데 왜 바다가 우리 길을 막아서냐?'며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한다.[28] 호노니니기가 31만 8,543년, 야마사치히코가 63만 7,892년, 우가야후키아에즈가 83만 6,042년을 다스린 기간을 합치면 179만 2,477년이다.[29] 현재의 후쿠오카현[30] 단, 현재의 우사 지역은 오이타현에 속한다.[31] 현재의 히로시마[32] 현재의 오카야마오카야마시[33] 현재의 오사카시. 오사카시 키타구(北区)에 있는 오사카 덴만구(大阪天満宮)에는 1940년 (황기 2600년을 기념하여) 세운 비석이 있다. 비석의 앞면에는 '신무천황성적난파지기현창비'(神武天皇聖蹟難波之碕顯彰碑)라고 새겼다. 진무와 그의 군대가 무오년(기원전 663)에 나니와곶에 들렀음을 기념한다.[34] 현재의 오사카부[35] 지금의 와카야마현 오노미나토(雄水門)[36] 오늘날 미에현 쿠마노시의 어딘가이다. 정확한 위치를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1937년 지역민들이 호보정(甫母町)의 남쪽 곶에 기념비를 세웠으나 1959년 태풍 때문에 유실되었다. 지역민들이 위치를 조금 바꾸어 2019년에 비석을 다시 세웠는데 세부 모습은 달라졌다. '쿠마노 아라사카 나루'(熊野荒坂津)라고 새긴 비석과 '신무천황최종어상륙지'(神武天皇最終御上陸地)라고 새긴 조금 작은 비석이 같이 있다.[37] 구태여 신화의 기록에 따라 촌수를 따지면, 아마테라스는 진무 천황의 5대조가 된다.[38] 기원전 585년에 붕어했는데 세는 나이로 향년 127세라면 진무 천황의 생년은 기원전 711년, 향년 137세라면 생년은 기원전 721년이다.[39] 나라현 가시하라시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다. 정상의 높이가 해발 220m 불과할 정도로 낮은 편이지만, 야마토 3산 중 하나로 손꼽히며 헤이안 시대에는 중요한 곳이었다.[40] 여담으로, 당시 전 천황릉 중에 가장 시간과 돈을 많이 들인 곳이 진무 천황의 능이다. 천황릉이 100여 기가 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진무 천황의 능에만 전체 자금의 17.7%를 쏟아부었다. 그만큼 진무 천황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는 반증일 것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진무 천황릉의 수리를 시작하자, 고다이고 천황의 능이 명동(鳴動)해서 담이나 석물 등이 무너져 부서졌다는 기록도 있다.[41] 《日本上代史硏究》, 1930[42] 이 때문에 쓰다는 일본 정부로부터 '황실을 모독했다.'는 지탄과 함께 3개월 금고형의 유죄 선고를 받자, 흑화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43] 원제: 《日本 とは何か 日本の歴史00》. 강담사 발행. 우리나라에는 2003년 창작과비평사가 번역 출판했다.[44] 비슷하게 한국사에서도 수로왕(157세), 태조왕(118세)이 엄청나게 장수했지만 장수왕(98세)과는 달리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나라의 사서들과의 교차검증이 없고 지나치게 장수한 것도 한 몫을 했다.[45] 《천황제 50문 50답》, 歴史教育者協議会(일본역사교육자협의회)/ 36p.[46] 실물 사진[47] 단, 지금 현재 에도 시대 때 발견되어 일본의 국보로 지정된 '漢委奴國王'(한위노국왕)이라는 현존하는 '금인'은 날조 조작 논란이 있다.[48] 다만 옹정제가 사인이 과로사로 추정될 정도로 워커홀릭이라 짧아진 것도 있다. 아버지가 68세, 아들이 87세까지 살았다는걸 감안하면 옹정제가 워라밸을 지켜 살았다면 56세까지 산 수명이 더 늘어났을 것이다.[49] 간지가 신유인 해가 되면 세상에 큰 변화(혁명)가 생긴다는 도참설이다.[50] 참고로 NHK 조사에 따르면 신토를 자신의 종교로 여기는 일본인은 소수이고 무종교인의 비율이 높다고 한다. 사실 많은 일본인들은 종교관이 매우 협소해서 교단으로 체계화된 종교만을 종교라고 여긴다. 신토가 교단으로 조직되고 운영하며 가르치는 종교가 아니므로 신토에 몸 담았더라도 자신을 무종교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전승된 민간신앙을 따르는 사람들도 무종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51] 타카마노하라와 표기가 다르다.[52] 조선왕조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로 비판을 받긴 했지만 사실 일본, 베트남 모두 조선왕조만큼은 아니지만 중화계승사상이 존재했다.[53] 대표적인 경우가 하야시 라잔이었다.[54] '오니와 시게아키'로도 알려졌지만 성은 원래는 오-바(おおば)라고 장음으로 읽으며 헤이안 말기의 무장 오바 카게요시(大庭景義)도 있으니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 사람이 원래 성이 없는 평민 출신이었을 수도 있고 나중에 스스로 고쳤을 수도 있다. 이름의 독음은 요미가나 자료가 보이지 않아 확정할 수는 없으나 成은 대개 나리, 章은 대부분 아키라고 읽으므로 아마도 '나리아키'일 것이다. 이 사례는 일본 판례 자료인 〈메이지 15년(1882) 형법 시행 직후의 불경죄사건9(明治十五年刑法施行直後の不敬罪事件)〉 (https://koara.lib.keio.ac.jp>modules>xoonips>download.php, 게이오기주쿠대학 사이트)에도 나오지만, 일본 논문·서적에서는 자주 인용되진 않는다. 오바 나리아키가 불경죄로 입건되었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많이 알려진 사례는 아닌 듯하다.[55] 재특회에서도 했던 주장인데, 사실 매우 황당하지만 일본인들 중에서 우익 성향이 강한 인물들은 아예 일본이 서구보다 더 먼저 민주주의를 만들었다면서 자국사를 찬양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