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04:45:02

진주 정씨

진양 정씨에서 넘어옴
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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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진주 정씨 종문.svg
晉州 鄭氏 (晉陽 鄭氏)
진주 정씨 (진양 정씨)
}}}
<colbgcolor=#FFFFFF> 관향 경상남도 진주시
비조 지백호 (智伯虎)
시조 정예 (鄭藝)
정자우 (鄭子友)
정장 (鄭莊)
정헌 (鄭櫶)
집성촌 대전광역시·세종특별자치시
경상남도 진주시·고성군·남해군·하동군
경상북도 상주시
전라남도 영광군·화순군·광양시·고흥군·장흥군
전라북도 고창군
충청남도 공주시·서산시·아산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강원도 홍천군
평북 영변군
인구 324,521명(2015년)

1. 개요2. 역사3. 번영4. 몰락5. 본관6. 분파, 계파7. 인물
7.1. 역사적 인물7.2. 정치인7.3. 공무원7.4. 법조인7.5. 학자7.6. 연예인
8. 집성촌9. 항렬10. 인구11.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12.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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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동래 정씨와 연일 정씨, 경주 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 등 시조를 달리하는 네 계통이 있다. 이 문서에서는 편의상 진주 정씨와 진양 정씨 중 인구가 조금 더 많은 진주 정씨로 언급한다.[1]

2. 역사

진주 정씨의 원류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전하는 신라 6촌 중 자산진지촌(觜山珍支村)의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다. 그러나 그 후 세계(世系)가 실전(失傳)되고 각기 시조를 달리하는 진주 정씨가 여덟 파가 되어 진주8정(晋州八鄭)이라고 한다. 진주 정씨(晉州 鄭氏), 진양 정씨(晉陽 鄭氏)는 경상남도 진주시를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동래 정씨 경주 정씨 다음으로 많은 성씨이다.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 등 시조를 달리하는 네 계통이 있다. 8정(鄭)을 편의상 크게 나눠 정예(鄭藝), 정자우(鄭子友), 정장(鄭莊), 정헌(鄭櫶)을 시조로 하는 4계통으로 크게 구분하는 것이 통설이다.

3. 번영

시조 영절공(英節公) 정예(鄭藝) : 고려(高麗)의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으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를 지냈다.

고려(高麗) 때 양관대제학을 지낸 정시양(鄭時陽), 병부상서를 역임(歷任)한 정신열(鄭臣烈), 판도판서인 정임덕(鄭任德), 예의판서의 정유(鄭愈),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수(鄭需),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정록, 찬성사를 지낸 정을보(鄭乙輔)[2] 등이 있다.

정천익(鄭天益) : 공민왕(恭愍王) 때 전객령(典客令)을 지내고, 중국(中國)에서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장인으로 목화종자를 재배하고 보급하는데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이다. [3]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상신 1명(정분), 대제학 2명(정이오,[4] 정경세),

문과(文科) 급제자(及第者) 59명과 정척(鄭陟), 정성근(鄭誠謹)[5] 등의 청백리를 배출해냈다.

조선(朝鮮) 인조(仁祖) 때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정경세(鄭經世):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수제자였던 그는 나이 스물셋에 문과에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혔던 수재.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募集)하여 공(功)을 세웠고 예학을 연구하여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예학파를 형성했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의 명장 정기룡(鄭起龍) 장군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상주성 탈환, 정유재란 때의 성주, 초계, 의령성 탈환 전투에도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광해군 9년 삼도통제사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에 올라 남해안을 방어하던 중 통영진중에서 숨졌다.

4. 몰락

여말선초 때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문벌 가문으로서 어느 정도 기반을 다져나가며 번영하는 듯했다. 그러다 세종대왕의 고명대신 가운데 한 명이었던 대종손 우의정 정분계유정난에 휘말려 사사당하면서 진주 정씨 종문도 함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상당수의 진주 정씨 후손들이 숙청당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지방으로 뿔뿔히 흩어짐에 따라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나마 정계에 발을 여전히 들이거나 훈구-사림 세력으로서 잔존하던 진주 정씨도 갑자사화에서조차 화를 면치 못하게 되면서 제대로 몰락한다. 이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본 진주 정씨들은 정예(鄭藝)의 후손들로[6], 때문에 조선 중후기에 이르러 훗날 출사해 이름을 알리게 되는 이들은 대부분 그 외 계파 출신들로, 예계는 기껏해야 현감[7]이나 호장[8]을 지내면 다행인 정도의 몰락 양반 가문, 심지어 중인이나 양인까지 떨어지는 경우도 생겨난다.

임진왜란 때 활약한 명장인 정기룡조차도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경남 남해의 대종(大宗)을 이루는 화헌공파(和軒公派)의 경우 아예 파조인 정결(鄭潔)[9]계유정난을 계기로 부인인 전의 이씨와 더불어 남해로 피난한 것이 시초다. 때문에 화헌공파는 조선 시대 내내 벼슬길이 아예 막혀 대대로 호장(戶長)을 지내며 부를 축적한 몰락 양반 가문으로 존속했다.

5. 본관

진주(晋州)는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백제의 거열성(居烈城)이다. 663년(문무왕 3) 신라에 편입되어 거타주(居陀州)가 설치되었으며, 685년(신문왕 5)에 청주(菁州)를 설치하였다가, 757년(경덕왕 16)에 강주도독부(康州都督府)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 청주(菁州)로 개칭되었다. 고려 건국 후 940년(태조 23)에 다시 강주로 환원되었고, 983년(성종 2)에 12목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개편하였다. 995년(성종 14)에는 정해군(定海軍)이라 하고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산남도(山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1012년에 안무사(按撫使)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진주목으로 복구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로 승격하였다가 1402년(태종 2)에 진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896년 경상남도 진주군으로 개편되었다. 1939년 진주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나머지 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으며, 1995년 진양군이 진주시에 통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경상도 진주목의 토성(土姓)으로 정(鄭)·하(河)·강(姜)·소(蘇) 4성이 기록되어 있다.[10] 한 고을에서 통혼이 매우 잦았기 때문에 종친회 어르신들은 하씨, 강씨, 소씨와는 한 집안처럼 여기며 통혼을 꺼린다.

6. 분파, 계파

진주 8정(晉州八鄭)으로 불렸던 진주 정씨(晉州 鄭氏)는 동성동본이면서도 세계를 달리하는 4계통, 8파로 계대(繼代)를 이어왔다. 예계, 헌계, 장계가 모두 정시양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는 자료도 있으나 신빙성은 높지 않다.
  • 예계: 시조 영절공(英節公) 정예(鄭藝)는 고려 통합 삼한벽상공신 광록대부(光祿大夫)·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 平章事)를 지냈다. 그 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문종조 양관대제학인 문익공(文翼公) 정시양(鄭時陽)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계대(系代)하고 있다.
    • 충장공파(忠莊公派): 시조 정예(鄭藝)는 고려 때 문하시랑(門下侍中)을 지냈다. 예계, 헌계, 장계의 큰집이다. 파조는 조선 세종~단종조 문신인 14세손 정분(鄭苯)이다.
      • 화헌공파(和軒公派): 시조 14세손이자 정분의 사촌인 정결(鄭潔)을 파조로 하는 집안. 계유정난 당시 정분이 숙청당했을 때 화를 피해 남해에 들어가 터를 잡았다고 전해지며 이후 대대로 향리를 지내왔다고 한다.
    • 첨정공파(僉正公派): 시조 4세손 정중공(鄭仲恭)은 정시양의 증손으로, 고려 때 첨정(僉正)을 지냈다.
    • 내부사공파(內府事公派): 시조 6세손 정안교(鄭安校)는 정중공의 손자로, 고려 때 판내부사(判內府事)를 지냈다.

  • 헌계: 시조 9세손 정헌(鄭櫶)은 정시양의 8대손으로, 고려 말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진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정헌의 손자 정택(鄭澤)은 고려말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 우곡공파(愚谷公派): 시조 11세손 정온(鄭溫)은 고려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다.
    • 어사공파(御史公派): 시조 11세손 정택(鄭澤)은 고려 때 감찰어사(監察御使)를 지냈다.
    • 지후공파(祗侯公派): 시조 정신(鄭侁)은 고려 때 지후(祗侯)를 지냈다.
  • 장계: 시조 10세손 정장(鄭莊)은 정시양의 9대손으로, 고려 말엽에 통종첨지중추원사(通政僉知中樞院事)를 지냈다.
    • 공대공파(恭戴公派): 공대공 정척(鄭陟, 1390~1475)은 정장의 아들 정자순의 아들 정설의 아들로, 조선 태종 때 판윤을 지냈다. 정척의 아들 정성근(鄭誠謹, ?~1504)은 성종 때 직제학을 지냈다.
  • 자우계: 시조 정자우(鄭子友)는 호장(戶長)을 지냈다. 정자우의 6대손 정신열(鄭臣烈)이 고려 현종 때 진양부원군에 봉해졌고, 정자우의 8대손 정진경(鄭晋卿)은 중랑장을 지냈다.
    • 은열공파(殷烈公派)

7. 인물

7.1. 역사적 인물

7.2. 정치인

7.3. 공무원

7.4. 법조인

7.5. 학자

7.6. 연예인

8. 집성촌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사곡리
경상남도 진주시 사봉면 마성리
경상남도 진주시 진성면 구천리
경상남도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경상남도 남해군 서면 정포리
경상남도 남해군 설천면 문항리
경상남도 남해군 남면 운암리
경상북도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전라남도 고흥군 도덕면 용동리
전라남도 광양시 골약동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 각동리
전라남도 장흥군 장동면 조양리
전라남도 영광군 군서면 덕산리
전라남도 화순군 백아면 서유리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기산리
전라북도 고창군 무장면 덕림리
전라북도 완주군 구이면 광곡리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호계리
충청북도 영동군 양강면 양정리
충청북도 보은군 삼승면 우진리
강원도 홍천군 서면 길곡리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성기리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대치리
평안북도 영변군

9. 항렬

28세손영(泳), 중(重), 찬(燦)
29세손口식(植), 口규(奎), 口감(鑑)
30세손헌(憲), 종(鍾), 일(一)
31세손口희(喜), 口원(源), 口인(仁)
32세손종(鐘), 삼(三), 휴(休)
33세손口순(淳), 口헌(憲), 口수(壽)
34세손근(根), 오(五), 길(吉)
35세손口묵(默) , 口진(鎭)
36세손치(致), 호(浩)
37세손口선(善)석(碩), 口주(柱)
38세손해(海), 병(炳), 원(元)
39세손口래(來), 口기(基)
40세손대(大), 석(錫)
41세손口태(泰)
42세손상(相)
  • 은열공파
23세손한(漢), 해(海), 제(濟)
24세손口식(植), 口모(模), 口채(采)
25세손연(然), 병(炳), 형(炯)
26세손口기(基), 口효(孝), 口달(達)
27세손종(鍾), 용(鎔), 진(鎭)
28세손口태(泰), 口호(浩), 口수(洙)
29세손상(相), 병(秉), 래(來)
30세손口현(炫), 口희(熹), 口혁(爀)
31세손재(在), 규(圭), 채(埰)
32세손口석(錫), 口호(鎬), 口일(鎰)
33세손영(永), 순(淳), 택(澤)
34세손口빈(彬), 口표(杓), 口근(根)
35세손경(炅), 영(煐), 찬(燦)

10. 인구

1985년 55,464가구 231,289명
2000년 74,777가구, 238,505명
2015년 진주 정씨 197,242명 + 진양 정씨 127,279명 = 324,521명

11. 조선 왕실과의 인척관계

12. 참조

https://www.segye.com/newsView/20130101022008


[1] 대체로 부산/경남 쪽은 진양 정씨, 그 외의 지역은 진주 정씨로 더 많이 부른다. 같은 진주(진양)를 본관으로 하는 진주 강씨, 진주 하씨도 마찬가지다.[2] 조일신이 배경이라 집안 말아먹을 뻔 했다.[3] 다만 문익점의 목화 붓두껍 반입 이야기는 후대에 최무선의 일화를 보고 베낀 것일 가능성이 높다.[4] 정을보의 증손, 정분의 부친으로 시문으로 명망이 높다. 여말선초에 고려와 같이 망할 뻔하던 집안을 동향 동갑내기인 하륜과 태종 줄을 잘 타서 살려놨다.[5] 그 유명한 창경궁 통명전 지당 구리수통 사건의 주인공.[6] 충장공파, 첨정공파, 내부사공파, 화헌공파 등. 다만 정기룡 같은 드문 경우들도 존재하기도 한다.[7] 충장공파 공주계[8] 화헌공파[9] 우의정 정분의 종형제, 즉 사촌지간.[10] 세종실록 150권, 지리지 경상도 진주목[11] 조일신과는 달리 목숨은 부지한 채 좌천되었다.[12] 문화 류씨 우부대언 유총(柳總)과 권한공(權漢功)의 딸인 안동 권씨의 증외현손.[13] 진주 정씨 첨정공파[14] 계파마다 항렬자가 다르다. 첫번째 열은 공주계의 항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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