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14 18:20:41

최향남/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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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해태 타이거즈 시절2. LG 트윈스 시절3. KIA 타이거즈 1기 시절4. 버팔로 바이슨스 시절5.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6. 앨버커키 아이소톱스 시절7.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8. KIA 타이거즈 2기 시절
8.1. 2012 시즌8.2. 2013 시즌
9. 고양 원더스 시절10.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시절

1. 해태 타이거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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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신안군 출신으로 초등학교 시절 목포로 이사가서 목포 영흥고등학교에서 고교 선수 생활을 보냈다. 선배들이 구타를 하려고 해도 몸이 하도 말라서 차마 때리지 못했다는 웃지 못할 전설이 있는 선수다. 그래도 영흥고등학교 시절에는 제법 수준급의 선수라서,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가 호시탐탐 노렸던 선수였다.[1] 하지만 정작 최향남 자신은 동국대에 진학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해태의 입단 제의를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이 체육특기자로 원서를 써 줘야 하는데 실수로 일반 전형으로 원서를 쓰는 바람에 당연히 불합격.[2] 최향남은 충격과 공포에 빠졌고 담임 선생님은 미안하다며 가방을 사주는 걸로 퉁쳤다고 한다. 본인 말로는 그 때부터 자기 야구 인생이 꼬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 동국대학교 진학이 좌절되고 야구 선수로서의 길이 막혀 막노동판을 전전하다가 소식을 들은 해태가 1990년 단돈 500만 원에 입단시키면서[3] 프로 선수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뒤의 LG 트윈스 시절의 에피소드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자유분방한 타입의 최향남은 해태의 엄격한 군대식 분위기에 도저히 적응을 못 했고, 결국 입단 첫 시즌 후 별 활약을 보여 주지 못한 채 현역으로 입대하는 선택을 하기에 이른다. 경기도 연천군제26보병사단 포병부대에서 30개월 동안 현역으로 복무했다고 한다.

대개 이쯤되면 조용히 방출되는 것이 정상인데 그렇지 않았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유인즉슨 김응용 당시 감독이 그를 엄청 아꼈기 때문이었다. 김응용이 사석에서 최향남을 '향기나는 남자'라 부르며 선동열의 후계자로 최향남을 꼽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많이 아꼈지만[4], 해태 시절에는 결국 이렇다 할 꽃을 피우지 못했다. 선동열의 후계자로 꼽았던 것처럼 해태시절 별명은 불펜 선동열일 정도로 연습투구에서는 뛰어난 모습을 보여줬지만 실전에서는 새가슴으로 불리며 기대에 부합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결국 1996시즌이 끝난 후, 좌타자 보강을 노리던 해태 타이거즈최훈재LG 트윈스로부터 데려오면서 대신 최향남을 맞트레이드했다.[5]

2. LG 트윈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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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 감독이 아꼈던 재능은 정작 LG에서 터졌다. 이적 첫 해인 1997년 120.1이닝을 던지면서 8승 3패 평균자책 2.99를 기록하면서 일약 LG의 에이스로 도약한 것.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이 마운드에서의 자신감과 결합하면서 드디어 터지기 시작했다. 5월 17일 OB전 생애 첫 선발승을 시작으로 한 달 가까이 한화전 완봉승 등 패전 없이 6연승에 1점대 방어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LG 트윈스/1997년/5월LG 트윈스/1997년/6월 참조. 그러나 시즌 말에 급성 충수염 수술을 받아 포스트시즌에는 출전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듬 해인 1998년에도 12승을 거두면서 LG 마운드의 핵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두 시즌 동안 LG는 한국시리즈에 오르면서 불꽃을 피우던 때였고, 그 중심에 최향남이 있다고 해도 좋았다.

그러나 한창 도약하려고 하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어깨 뼈가 웃자라는 부상[6] 때문에 결국 더 성장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점차 LG 마운드에서의 비중은 사라지게 되었다. 1999년 8승[7], 2000년에는 구원 투수로 잠시 활약했고[8], 2001년을 부상으로 날린 후[9], 2002년 다시금 재기에 성공해서 7승을 올리면서 돌아오는가 싶었지만, 2002년 추웠던 KIA와의 PO에서 다시 어깨 부상을 당하면서 결국 2003년 10월에 자유계약선수로 풀리면서 LG 생활을 접게 되었다.

그런데 실제로 LG에서의 생활을 접게된 결정적인 계기는 아파치 머리로 비롯된 코칭스태프와의 충돌이 발단이었다. 1998년 7월 처음 머리 가운데만 노랗게 염색한 아파치 머리를 하고 나타나자 당시 천보성 감독이 머리에 대해 지적을 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오히려 머리 전체를 염색하고 나타났다! 당연히 구단은 난리가 났고 이를 미루어보아 반항심이 많은 듯하다. 본인 말로는 가운데만 노랗게 한 것이 문제가 된다고 판단하고 전체를 노랗게 했다. 결국 화난 천보성 감독은 당초 선발투수로 예고했던 최향남을 제외한 적이 있었으며 이때 선발투수 예고제가 처음 실시됐기 때문에 최향남은 KBO로부터 벌금과 출전 정지 징계를 받았다. 어쨌든 이 사건도 그렇고 나중엔 이광은 감독에 반발하여 2군에서 1군 복귀를 거부하는 일도 있었으며 선수협 문제로 최향남은 단단히 찍히고 결국 팀을 떠나게 되었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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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말에 6살 연하인 최성미 씨(1977년생)와 결혼했다.

3. KIA 타이거즈 1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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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을 재활로 완전히 날린 후 LG가 최향남을 방출시키자, 2004년 3월 초에 연봉 6천만원으로 게약을 맺고 친정 팀인 KIA로 돌아갔다. 이 때 입단 조건으로 내건 것이 해외로 나갈 경우 조건 없이 보내준다는 것[11]이었다고 한다. KIA 입장에서는 입단 당시 만 33세인 선수가 가봤자 어디를 가겠냐고 생각해서 이 조건을 수락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어쨌든 KIA에서 2004년과 2005년 그럭저럭 계투진에서 힘을 보태는 정도로 활약을 했다. 그리고 계속 타진하던 해외 진출을 위해 트라이아웃도 보고, 미국으로 건너가 테스트도 받았는데, 마침내 결실을 맺어 2005 시즌 종료 후에 미국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트리플A 팀인 버팔로 바이슨스에 입단하면서 진짜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4. 버팔로 바이슨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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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사람들은 그의 도전에 아무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흔히 더블 A 평가를 받기도 하는 KBO 선수가 트리플A에서 하면 얼마냐 하겠느냐, 또 34세의 나이니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던 것. 그런데 여기서 최향남은 8승 5패 평균자책 2.37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내면서 팬들을 깜짝 놀라게 한다.[12] 만일 최향남이 24세였다면, 정말 한 경기 정도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를 밟았을지도 모르는 성적.

최향남 자신에 따르면, 도전하는 것 자체가 즐거웠던 시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향남은 엄연히 처자가 있는 몸인지라 계속 도전을 할 수는 없었고, 국내 복귀와 잔류에서 고민하는 모습 때문에 버팔로 측에서도 재계약을 진행하지는 않았다.

5. 롯데 자이언츠 1기 시절

2006년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마친 뒤 결국 국내 복귀를 타진하게 되었는데, KIA, LG, SK 3개 구단과 접촉했으나 최향남이 1년 계약에 시즌 종료 후 자유계약으로 풀어주는 조건과 보장 금액 5억 옵션 포함 총액 7억 5천 이상을 요구 [13][14]하여 LG, KIA와 협상이 결렬되었고 SK 와이번스 프런트가 최향남의 조건 등을 수락하여 최종 싸인 직전 현장 지도자들에게 계약 조건과 영입 의사를 전달 하였으나 김성근 감독이 생각보다 비싼 금액이라며 거절 의사를 밝혀 계약이 무산되었다.[15] SK 와이번스 계약 무산 뒤로 고액의 몸값 때문에 다른 팀들도 최향남을 외면했고 무적선수가 되어 미아가 되기 직전 롯데 자이언츠와 접촉을 하게 되었고 계약금 1억 연봉 1억 옵션 3억 총액 5억에 계약을 맺었다. 이때 옵션액이 보장금액보다 크고 마이너스 옵션 발동시 KBO 최저 연봉이 되어 화제가 되었다. [16] KIA 타이거즈는 그의 권리를 포기한지라 그의 롯데행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17]

시범경기에서는 완벽투를 선보이며 기대를 높였다. 그런데 정작 시즌 개막을 며칠 앞두고 식중독에 걸리는 바람에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바람에 체중이 줄어드는 등 몸을 만들어 놓은게 허사가 되었고 , 4점대 초반의 방어율에도 불구하고 개막후 무려 10경기 연속 선발등판에서 단 1승도 따내지 못하는 불운에 울어야 했다. 6월 13일 두산전에 8이닝 무실점 호투로 가까스로 국내 복귀 첫 승을 신고했다. 직전 두 경기인 삼성전 8이닝 1실점, KIA전 7⅓이닝 1실점의 호투에도 불구하고 승을 못 챙기는 등 천신만고 끝에 거둔 승리였다. 이후 5경기에서 4승 1패를 거두는 등 순항하는 듯 했으나 앞에 서술한 시즌 초 식중독 문제로 체력이 떨어져 더 이상 승수를 쌓지 못하고 5승 12패 평균자책점 5.00이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마무리했다.[18] 계약 조건대로라면 8천만원을 토해내고 최저연봉급인 2천만원만 수령해야 했으나 롯데 프런트는 여러 불운한 사정 등을 감안하여 마이너스 옵션을 행사하지 않고 연봉 1억원을 지급했다.

기대가 컸던 2007년의 부진으로 인해 2008년에는 별다른 기대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원래 롯데 자이언츠의 마무리였던 임경완이 난조에 빠지면서 마무리 공백이 생기자 궁여지책으로 최향남에게 마무리를 맡기게 되었고[19], 이것이 대박이 터졌다. 공의 구위나 빠르기는 일급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인터벌을 짧게 가져가는 투구방식과 마무리로서의 대담함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훌륭하게 롯데의 뒷문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이 때, 짧은 인터벌 때문에 "술이 식기 전에 목을 베어 온 관우에 빗대어 향운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다비드 코르테스가 오기 전까지 롯데 자이언츠의 마무리를 수행하면서 2승 4패 9세이브를 기록하며 2008년 롯데 돌풍의 한 축을 맡았다. 이때 군대 갔던 게 도움이 되기도.

6. 앨버커키 아이소톱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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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계속 롯데의 불펜에 남을 것으로 보였으나, 2009시즌 다시 한 번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며 미국으로 건너가기에 이른다. 당시 나이는 무려 39살/ 이 때, 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포스팅 시스템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원래 최향남은 롯데에게 공짜로 풀어주기를 요청했지만, 최향남이 KIA에게 퉁수치는 걸 체험한 롯데가 그냥 풀어줄리는 만무한 일 상징적인 의미라도 보류권을 갖기를 원했고, 결국 최향남은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이 때 포스팅 금액은 101달러. (롯데선수로는 유일하게 포스팅 시스템으로 해외에 진출한 케이스, 롯데 역사상 최초이자 최다액 포스팅 사례) 원래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가 입찰해서 그를 데려갔지만 시범경기가 끝난 후 웨이버 공시했고, 그가 간 최종 행선지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의 트리플A 팀이었다.

2009년 마이너리그 트리플A 앨버커키 아이소톱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산하 AAA팀)에서 뛰며 9승 2패 평균자책 2.34를 기록했다. 세부 수치로 보면 FIP 3.25에 50이닝 기준 PCL에서 FIP 9위를 찍었지만, 결국 나이가 걸림돌이 되어서 메이저리그 승격에는 실패했다.[20] 2010년에도 같은 팀에서 뛰었지만, 이 해에는 1승 2패 평균자책 5.84로 부진하면서 결국 팀에서 방출되기에 이른다. 이 때 조쉬 린드블럼과 한솥밥을 먹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 오릭스 버팔로스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지만 탈락하고 롯데 자이언츠와 접촉 중이었으나 결렬. 다시 마이너 재도전을 시도했다. 당시 로이스터 감독은 차라리 롯데로 오는 것이 선수생활을 더 할 수 있을 것이라며 아쉬위하고 있다고..

이 때 롯데로 돌아오지 않은 이유가 롯데에서 10시즌을 치룬 후 다시 메이저리그로 도전하기 위해서였는데 그게 되지 않아서였다. FA 조건을 채우지 못했기에 돌아올 경우 한 해를 더 넘겨야 한다. 애초에 메이저리그 진출 때 로이스터 감독 및 롯데가 적극 지원해주어서 가 놓고 안 될 거 같자 롯데로 돌아온다고 했다가 다시 말을 바꾼 것이기 때문에 롯데에는 그냥 돈 받고 쉬러 오냐고 팬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 후 최향남을 옹호하는 기사가 계속 떠서 욕을 더 받는 중. 그렇게 꿈을 강조하고 싶었으면 돌아온다는 얘기를 하지 말든가. 그렇게 집착할 정도로 메-쟈리그에 대한 꿈이 있다고 볼 수도 있고...

7. 롯데 자이언츠 2기 시절

2011 시즌에 최향남이 롯데로 돌아올 것이라는 소식이 들어왔다. 메이저리그에 미련을 못 버린 최향남은 롯데에 피해를 주기 싫다며 일본 독립리그인 도쿠시마 인디고 삭스에서 계속 공을 던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서 롯데가 계속 최향남을 찔러보고 있지만 아직 확답은 없는 상태. 현재 서울에서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인데 롯데가 현재 마무리 투수가 없는 실정이고 계약을 하게 되어 롯데에 온다면 롯데의 마무리로써 큰 힘이 되어주리라. 그리고 1년, 연봉 7000만원에 정식 계약했다.


하지만 2011 시즌이 25% 정도 진행된 5월 중순, 1군에서는 물론 2군에서도 완벽하게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이 분에 이어 또 한 명의 실종자 탄생.

결국 2011년 7월 23일 웨이버 공시가 나왔다. 초반에 팔꿈치 부상을 당한 후 재활 훈련을 꾸준히 했으나 회복이 안 되고 있다고 한다. 벌써 만 40세로 사실상 선수생활을 마감할 수밖에 없는 나이.

2008년 이후에도 계속 롯데의 마무리 투수로 남았으면 팀이나 본인 모두 달랐을 거라는 롯데 팬들의 아쉬움은 여전하다. 그렇게 은퇴할 것으로 보였으나....

8. KIA 타이거즈 2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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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6월 17일 월명 야구장에서 마운드로 나가는 모습.

2012 시즌 중 뜬금없이 친정 팀 KIA 타이거즈에서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는 기사가 나왔다. 선동열 감독이 보는 앞에서 볼을 뿌렸는데 선동열 감독은 스피드는 느리지만 볼은 아직 쓸만하다는 판단을 내려 구단에 계약하라고 했다고 한다. 정식으로 계약을 마치면 2군에 합류해 몸을 만들게 될 예정이라고. 젊고 강한 팀을 만들기 위해 이종범을 은퇴시켜놓고 그보다 불과 1살 어린 최향남을[21] 중용하는 선 감독의 행보에 일부 팬들이 크게 문제를 제기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선 감독은 최향남은 투수이기에 중용하게 되었다는 발언을 남겼다. 다만 선동열 감독 인터뷰에서 이종범이 젊은 선수들에게 밀리는 상황이었다고 말하였으나, 시범경기 당시 이종범의 타율은 3할을 넘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사실상 투수 출신인 선동열 감독의 투수를 바라보는 시각과 야수를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로 보여진다. 뭐 사실 일반적으로 타자보다는 투수가 선수생명이 길기에 전혀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22]

6월 5일 KIA와 연봉 7000만원에 입단 계약을 맺었다. 선수로 복귀하게 됨에 따라 2012년 기준 KBO 선수들 중 최고령 선수가 되었다. 같은 1971년생 선수들 중 생일이 가장 빠르다. 최동수는 9월 11일생, 류택현은 10월 23일생.

8.1. 2012 시즌


그리고 2군에서 3경기 등판해서 컨디션을 조절한 이후 6월 17일 1군에 올라왔다. 이날 LG전 9회에 등판해 1이닝 2피안타 무실점을 기록하였다. 이때 맘 고생이 좀 심했다.

6월 19일 삼성전에 등판해 진해수가 남겨놓은 승계주자를 깔끔하게 분식. 6월 20일 경기에서는 연장전에 등판해서 기대 이상의 제구력을 보여주며 1.1이닝을 퍼펙트로 막았다.

6월 27일 LG전, 9회말 6:4로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등판하여 선두타자 박용택에게 2루타를 맞았지만 후속타자들을 모두 범타로 처리하여 2008년 9월 11일 이후 1,358일만의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7월 4일 무등 야구장에서 열린 두산와의 경기에서는 팀이 0:1의 살얼음판 리드를 잡고 있는 상황에서 9회초 등판하여 13개의 공을 던지며 이종욱을 2루 땅볼, 정수빈을 삼진, 김현수를 2루 땅볼로 잡으며 경기를 깔끔히 마무리, 시즌 두번째 세이브를 기록했다.

7월 8일 목동 야구장에서 열린 넥센전에서 2:1로 아슬아슬한 리드를 가져가던 상황에서 9회말에 등판. 유한준과 대타 정수성을 루킹삼진으로 잡고, 이후 김민성에게 좌익수 앞 안타를 맞기도 했으나 서건창에게 다시 루킹삼진을 얻어내며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이날은 1이닝 18투구수 4타수 1피안타 3탈삼진을 기록, 시즌 세 번째 세이브를 올렸다. 이로써 역대 2위의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경신하게 되었으며, 송진우의 최고령 기록과는 5일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7월 17일 광주에서 열린 두산과의 경기에서 2:0으로 뒤지던 9회초 등판하였으나 이종욱에게 중견수 쪽 안타를, 최주환에게 희생번트를 허용, 김현수는 볼넷으로 보내고 김동주에게 2타점 2루타를 얻어맞으며 부진했다. 이후 양의지는 유격수쪽 땅볼, 오재일은 우익수 뜬공으로 잡았다. 이날은 1이닝 21투구수 6타자 4타수 2피안타 1사사구 2실점 2자책점을 기록.

7월 19일 두산과의 경기에서 0:6으로 이기던 9회초, 박지훈이 2아웃을 잡고 제구가 흔들리며 만루 위기를 맞자 이어서 등판. 단 2개의 공으로 광고가 끝나기도 전에 이원석을 3루 땅볼로 잡아내며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7월 25일 넥센전에서 1:3으로 앞선 상황의 9회초에 등판하여 삼자범퇴를 잡으면서 드디어 한국 프로야구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경신하였다. (41세 3개월 28일) 이후로도 계속 기록을 경신해나갔으며, 2016년 4월 최영필이 새로 기록을 세우기 전까지 계속 최고령 세이브 기록 자리를 지켜나갔다.

복귀 이후 마무리 투수로 뛰면서 좋은 활약을 보이고 있다. 나이 탓에 파워는 압도적이지 못하지만, 대신 배짱과 노련함을 갖추었으며 특유의 짧은 인터벌은 여전하다. 좋은 공을 가지고도 자신있게 뿌리지 못하는 젊은 투수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모습이다.

8월 2일 롯데전에서 팀이 4:2로 앞서던 9회말 오랜만에 등판했으나 영 불안한 모습이었다. 홍성흔황재균에게 안타를 허용하며 1실점을 하였고, 이후 정훈은 삼진으로, 손용석은 1루수 땅볼로, 김주찬은 중견수 뜬공으로 잡으며 경기 마무리. 구속은 140km/h대까지 올라왔으나 제구가 제대로 되지 않았고, 인터벌도 길어진데다 새가슴 기질이 다시 발동한 듯한 모습을 보였다. 이날 2피안타 1탈삼진 2실점 1자책점을 기록하였지만 4:3으로 팀이 이기면서 어찌어찌 세이브는 챙겼다.

8월 3일 잠실 두산과의 3연전 첫 경기에서 9회말 1사 1루 상황에서 등판, 김현수는 뜬공으로 잡았으나 정진호에게 볼넷을 허용, 이후 양의지에게 끝내기 2타점 2루타를 맞으며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팀은 4:5로 패. 어제의 컨디션 난조와 연투로 인한 구위 저하가 겹친 모습을 보였다. 이날은 ⅔이닝 7타자 25투구수 4타수 2피안타 3사사구 2실점 2자책점을 기록.

8월 4일은 쉬었고, 8월 5일 6:4로 앞서던 9회말 1사 상황에 등판. 이원석에게 안타를 맞았지만 이종욱임재철을 각각 뜬공과 삼진으로 잡아내며 경기를 끝냈다. 이날은 ⅔이닝 3타자 11투구수 3타수 1피안타 1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또 경신했다.

8월 6일 광주 넥센전에서 2:3으로 아슬아슬하게 리드하던 9회초 무사 1,3루 상황에서 유동훈에 이어 등판. 희생플라이로 1실점을 하긴 했으나 이후 타자들을 뜬공으로 잡아냈고, 9회말 밀어내기 볼넷으로 팀이 승리를 하면서 1승을 챙겼다.

8월 7일 넥센과의 연이은 경기에서 9회초 호투하던 김진우에 이어 마무리로 등판하였다. 연투 상황이라 걱정하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오히려 빠른 인터벌을 되찾으며 13투구수 무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하며 경기를 깔끔히 마무리했다.

이후 갑자기 장염 증세를 보였고, 어쩔 수 없이 마무리 경험이 있는 윤석민이 당분간 대신 마무리로 올라오게 되었다.

8월 22일 광주 LG전에서 팀이 4:5로 리드하던 9회초 등판. 오랜만에 짧은 인터벌과 공격적인 피칭을 선보이며 경기를 깔끔히 마무리지었다. 김용의는 삼진으로 잡고, 윤요섭에게 몸에 맞는 공[23]을 허용한 후 대주자 이대형이 나가며 위기를 맞았지만, 김상훈이 2루 도루하던 이대형을 잡아내고(!) 윤정우는 우익수 뜬공으로 잡아내며 경기 마무리. 이날은 1이닝 3타자 18투구수 2타수 1사사구 1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 시즌 8번째 세이브를 챙겼다. 최고령 세이브 기록은 계속 경신되고 있다.

9월 6일 광주 SK전에서 팀이 0:2로 리드하던 9회초 등판. 박재상최정을 깔끔하게 삼진으로 잡아내고 이호준은 우익수 뜬공으로 처리하며 경기를 마무리지었다. 이날은 1이닝 3타자 14투구수 3타수 무피안타 무사사구 2탈삼진 무실점 무자책점을 기록, 오랜만에 시즌 9번째 세이브를 챙기며 최고령 세이브 기록을 또 갈아치웠다.

9월 8일 잠실 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와 경기에서 스코어 4:4, 11회말 2사 2, 3루의 위기 상황에서 등판하여 큰 이병규를 2루수 플라이로 잡고 이닝을 종료시켰으나, 여전히 스코어 4:4인 12회말에 선두 타자 이대형(!)에게 3루타를 맞고 김용의에게 끝내기 희생 플라이를 허용하여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이번에는 중요한 순간에서 너무 성급한 피칭을 했던 게 도리어 해가 되었다는 평이다. 이날 최향남의 기록은 ⅔이닝 8투구수 1피안타 1실점 1자책점 패전.

9월 12일 광주 롯데전에서 팀이 0:1로 간신히 리드하던 9회초에 등판하여 선두 타자 홍성흔을 초구만에 2루수 플라이로 잡아냈으나 강민호에게 11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안타를 맞고 박종윤을 삼진으로 잡고 조성환에게 안타를 맞아 2사 1, 2루의 위기를 자초하였다. 그리고 황재균에게 1타점 적시타와 도루, 황성용에게 2타점 적시타를 허용하며 스코어 3:1을 만들고 강판되어 서재응의 승리도 날림과 동시에 블론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다음 투수인 한승혁전준우를 우익수 플라이로 잡고 이닝을 끝내서 최향남의 추가 실점은 늘어나지 않았고, 팀이 스코어 3:1 그대로 패하여 패전 투수가 되고 말았다. 이날 최향남의 기록은 ⅔이닝 32투구수 4피안타 1탈삼진 3실점 3자책점, 블론세이브, 패전.

9월 15일 어깨와 팔꿈치 통증으로 1군에서 말소되며 시즌 아웃되었다. 일부 타이거즈 팬들은 최향남에게 퇴근본능을 잘 발휘한다고 말했다 한다. 당연히 마무리를 잘하니까...

8.2. 2013 시즌

3월 30일 넥센과의 홈 개막전에서 9:10으로 앞서던 8회초에 등판하여 김민성을 2루수 땅볼로 처리하고, 서건창에게 안타를 허용했지만 정수성을 삼진으로, 이택근을 유격수 땅볼로 처리하면서 1이닝을 실점없이 막으며 '홀드'를 기록했다. KIA팬들은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해서 기뻐했지만, 한편으로 젊은 계투 요원들이 43세의 최향남보다도 못한다는 현실에 씁쓸해하기도 했다. 한편 데뷔 24년차의 고충을 토로하기도 했다.

4월 2일 한화전에서 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으며 홀드를 기록했다.

4월 5일 롯데전에서는 1⅔이닝 동안 1실점(1자책)을 허용하고 내려왔으나, 팀은 넉넉하게 앞서고 있어서 승패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4월 7일 롯데전에서는 7회말 2사 2루 상황에서 구원 등판하여 뜬공으로 아웃카운트를 잡아내며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8회말 연속 안타를 맞고 무사 1,3루 상황에서 마무리 투수 앤서니로 교체되었다. 다행히 앤서니가 파울플라이-병살타로 위기를 넘기고, 9회말도 무사히 막아 내면서 세이브를 기록하였다. 최향남은 ⅓이닝 동안 2피안타를 기록하며 조금 부진하였지만, 앤서니 덕분에 홀드를 챙겼다.

4월 10일 광주 두산전에서 연장 10회초 3:3 동점 상황에서 등판하여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다. 그의 호투는 이후 팀이 연장 12회말에 끝내기 안타로 승리하면서 빛을 발할 수 있었다.

4월 16일 광주 LG전에서 6회초 2:1 박빙 상황에서 등판하여 선발 양현종이 적립해둔 2사 1,2루 위기를 삼진으로 극복한 다음, 7회초에도 등판하여 삼자범퇴로 깔끔하게 처리., 홀드를 챙겼다.

하지만 잦은 등판으로 피로가 쌓였는지 제구나 구위 모두 조금씩 안 좋아졌고, 결국 고질적인 팔꿈치 부상 문제로 4월 28일 재활군으로 내려갔다.

7월 23일 1군에 다시 올라와 괜찮은 활약을 해주고 있다. 7월 28일 NC전에서 8회 동점 상황에 등판하여 1이닝 무실점 2K, 삼자범퇴로 막고 다음 이닝 팀이 역전하며 시즌 첫 승을 올렸다.

8월 29일에는 시즌 2승을 기록하며 송진우에 이어 역대 2위 최고령 승리(42세 4개월 30일)를 따냈다.

올 시즌 최종 성적은 26경기 30⅓이닝 2승 2패 8홀드 방어율 4.45 28피안타 2피홈런 8사사구 24탈삼진으로 마감하였다.

시즌이 끝난 뒤 방출되었는데 또 미국 무대에 재도전하기 위에 팀에 방출 요청을 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여기에 대해서는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도전하는 모습이 아름답다"라며 지지하는 의견과 "KIA에 와서 도대체 한게 뭐냐?"라는 비판이 나오는 등 의견이 상당히 갈렸다. 특히 선동열이종범을 은퇴시키면서 타자와는 달리 투수는 계속해서 던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으며 그 명분으로 내세운 게 최향남이었으니. 물론 최고령 기록을 세우긴 하였지만 지난 2년간 딱히 보탬이 안된 것도 사실. 다만 그 당시 KIA 불펜이 막장이었는지라[24][25] 비교적 준수한 편은 맞긴 했다.

결국 어디에서도 오퍼가 들어오지 않아 미국 재도전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44살이라는 나이를 감안할 때 더 이상의 도전은 무리일 듯.

9. 고양 원더스 시절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진출에 실패했고 이후 선수 생활 연장을 위해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다고 한다. 앞으로의 메이저리그 도전은 완전히 접겠다는 의사도 밝혔다고 한다..관련기사

2014년에는 고양 원더스의 퓨처스 리그 교류전도 90경기로 대폭 늘어나면서 주축 선수로 활약하며, 자신의 풍부한 경험을 후배 선수들에게 전하는 멘토 역할을 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교류전을 ⅓ 가까이 소화한 2014년 5월 20일 현재 교류전 등판 기록은 없다.

그 후 등판 성적은 처참한데... 방어율 7.71 1패, 4.2이닝 4실점이라고.

교류전 81경기 중 8월 24일 경기에서 3이닝 무실점으로 간만에 좋은 성적을 냈다.[26] 고양 원더스에서의 1년간의 성적은 5경기 등판, 1승 1패 9.1이닝 방어율 3.86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냥 그럭저럭 성적은 나온 듯.

9월에 고양 원더스가 해체되면서 다시 야인으로 돌아갔다. 2015년 기준으로 한국나이 45살이고... 특유의 성격도 고치지 못한 것으로 보아 현역 연장은 힘들 듯하다...고 생각했는데...

10.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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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이 오스트레일리아도 아니고 오스트리아 야구리그에 진출했다. 역시 풍운아 다운 선택이라는 평이다. 팀은 비너노이슈타트 다이빙 덕스. 롯데 트레이너 출신의 한국인인 하승준씨가 감독으로 있는 구단으로 하승준 씨의 연줄을 통해 진출한 듯. 해당 팀은 리그 내 강팀 급은 아니지만, 최상위 리그에 소속되어 있으며, 최향남 뿐만 아니라 SK 출신의 황건주도 함께 오스트리아로 건너갔다. 초빙 선수이므로 한국-오스트리아의 야구 교류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대사관 차원에서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2015년 파이널 시리즈에 진출 해 일본인 선수들이 있는 비엔나 원더러스와 맞붙게 되었다.

정규 시즌 MVP로 선정되었다.


[1] 영흥고는 1982년 프로야구 출범과 동시에 야구부가 창단되었으나, 2003년에 해체되었다. 롯데의 박건우, KBO 심판으로 활동하는 문승훈, 추평호 등이 이 고등학교 출신이다.[2] 조금 비슷한 케이스로 일본의 후쿠이 유야가 있다. 후쿠이 유야는 2005년 드래프트에서 요미우리의 4라운드 지명을 받았으나 와세다대학에 진학하겠다는 이유로 지명을 거부하였는데, 체육특기자 접수기간을 모르고 지나치는 바람에 일반 입시(한국의 정시)로 지원해야만 했다. 결국 당연히 광탈했다. 물론 최향남이랑은 다르게 입시 일정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은 본인 잘못이 더 크다지만... 다행히도 재수해서 체육 특기자로 와세다에 입학했고, 재수생이라 1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2010년 드래프트에서 히로시마에 1라운더로 지명받았다. 프로에서는 1라운더치고는 부진하여 히로시마와 라쿠텐 두 팀에서 5-6선발과 추격조를 오가며 2022년까지 뛰고 전력외통고를 받았다. 통산 성적은 12시즌 154경기 106선발 32승 41패 1홀드 ERA 4.58.[3] 원래 1800만원으로 들어오기로 되어있었는데, 대학 진학이 무산되어 연봉이 반보다 더 줄어버렸다고 했다. 최종으로는 계약금 500만, 연봉 600만원에 입단했다.[4] 투수코치 방수원의 보고서에서는 '제 2의 선동열이었다고.[5] 이때 최훈재 말고도 제2의 김재현이라는 평가를 받던 고졸 2년차 조현도 받아왔으며, 반면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으로 김응용 감독의 눈 밖에 나버린 송유석동봉철이 LG로 트레이드되었다. 이 트레이드 결과는 해태가 LG에게 2선발급의 투수와 필승조를 조공한 꼴이 되었다. 최훈재도 입단 1년차때는 중심타자로서 V9에 일조하였으나 2년차때는 평범한 성적을 남기며 두산으로 트레이드되었다.[6] 회전근개가 움직이면서 견갑골의 일부인 견봉과 부딪혀 계속 자극을 받게 되는데, 자극을 받으면 우리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자주 쓰는 손에 굳은살이 박히듯 노폐물을 뼈 끝에 쌓고 그게 굳어져 마치 뼈가 자라난 것처럼 된다. 보통 중노년에게 많이 일어나는 퇴행성 질환인데, 투수들은 직업특성상 젊은 나이에도 앓는 선수가 종종 있다. 유명선수로는 KIA 윤석민이 이 질환으로 은퇴했다. 보통 수술로 웃자란 뼈를 깎아내는 식으로 치료하는데 결국 과사용이 원인이라 선수생활을 계속하는 한 재발할 수밖에 없다.[7] 99년 LG의 투수진은 말 그대로 손혁김용수 정도를 빼면 초토화 되었는데 그나마 최향남이 제 몫을 해줬다. 그러나 9월 부상으로 이탈하면서 김용수가 마무리에서 선발로 이동했고, 투수진 붕괴로 LG의 포스트시즌 진출 희망도 사그라졌다.[8] 다만 이 시기에 이런 경기를 보이며 털리기도 했다. 이 해에만 마무리 보직은 초보감독 이광은의 미숙한 운영으로 5번 이상이나 변경되었다. 그 과정에서 이광은에게 반발하여 2군에서 1군 복귀를 거부한 적도 있었고, 이광은이 대놓고 "최향남이 싫다"라고 밝힌 적도 있다.#[9] 게다가 이 시기 선수협에 동조하는 바람에 구단에게 찍혔다.[10] 지금은 선수단 내에서 우규민, 이동현, 최동환, 오지환, 김지용 등 머리 염색하거나 장발로 기르는 선수들이 꽤 나온 것을 보면 구단 내에서 머리 염색에 이젠 신경을 크게 쓰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15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고 한국 사회도 많이 변했으니...[11] 처음에는 최향남의 부활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본 구단이 일단 1달 단위로 계약하기로 하고, 조건 달성 시에 최향남이 원하는 조건을 들어주기로 했다.[12] 그 윤석민도 AAA에서 불이나 지르던 것을 생각해보면 최향남이 굉장히 잘 한 것임을 알 수 있다.[13] 당시 프로야구 최고 연봉이 심정수의 7억 5천이였다.[14] 사실 최향남이 AAA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을 보면 실력이 아예 없는 선수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하지만 국내 복귀를 결심할 당시 나이는 37살로 하락세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으며, KBO에서 거둔 성적도 LG 시절을 빼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잘 쳐도 2억 내외에서 계약할 수준?[15] 김성근 감독이 최향남의 자유 분방한 성격때문에 거절의사를 밝혔다는 말이 있으나 사실이 아니며 최초 최향남 영입을 요청한건 김성근 감독이다.[16] 최향남 본인 스스로 10승 달성시 1억, 15승시 2억, 20승시 3억 총 3억원의 플러스 옵션과 8승 미만시 마이너스 옵션 8천만원을 넣어달라 요청하였다. 이는 미국 야구에 도전하며 한 단계 스텝업한 기량에 대한 자신감의 표출이었다.[17] 사실 이건 KIA의 실수다. FA가 아니었기 때문에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최향남에 대한 권리를 확보해둬야 했는데 최향남 본인의 말만 믿고 무조건으로 풀어줬다 통수를 맞은 것.[18] 최향남의 선발때마다 유독 타선은 안터지고 수비에서 에러가 나왔으며 불펜은 불을 질렀다.[19] 정확히는 5월 한화와의 3연전 때 롯데의 선발투수들은 모두 QS를 기록했으며 타선도 적절히 점수를 내주면서 리드하고 있었는데, 임경완을 비롯한 당시 롯데의 필승조 전원이 무너지면서 3일동안 3번의 역전패를 당했다. 마지막으로 올라간 것이 당시 패전처리 투수였던 최향남이었는데 특유의 짧은 인터벌로 좋은 투구를 선보였고 이후 필승조, 마무리 순으로 올라가게 되었다.[20] 애초에 마이너 리그가 유망주 키우려고 있는 곳이지, 나이 든 선수의 MLB 입성을 위해 있는 것은 아닌지라 불가피한 부분이기도 했다. 한 경기 쯤은 가 볼 만헀는데 아쉬운 부분.[21] 심지어 이종범이 대졸인 데 반해 최향남은 고졸 신인 출신이라 프로 입단은 이종범보다 3년이나 빠르다.[22] 사실 선동열 감독이 삼성 감독을 역임하던 시절에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71년생인 김한수는 2007년 시즌 후 FA 계약이 1년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교체를 명목으로 강제 은퇴시켰고, 정작 비슷한 시기 김한수와 71년생 동갑내기인 투수 이상목이 롯데에서 방출되자 곧바로 연봉을 1억이나 주고 영입해온 사례가 있었다.[23] 비디오 화면을 보면 준비 동작을 취한 윤요섭의 배트에 공이 먼저 튕겨지면서 어깨를 맞힌 것으로 보이지만, 주심은 일단 몸에 맞는 공 판정을 내렸다. 대주자 이대형이 홈으로 들어오며 동점이 되었다면 엄청난 논란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판정이다.[24] 12시즌 KIA의 불펜 투수 중에서 박지훈, 홍성민, 한기주, 최향남만 3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으면서 준수한 모습을 보였다. 그 중 한기주는 부상 때문에 제대로 못 나왔으니 실질적으로 풀타임을 뛴 선수는 박지훈, 홍성민 둘 밖에 없었다. 진해수, 유동훈, 양현종은 5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으면서 팬들의 속을 뒤집어놨고 박경태, 한승혁도 7점대 방어율을 찍었다. 이 상황에서 최향남은 시즌 중 후반기부터 24경기에 올라 20 1/3이닝을 던지면서 3.98의 평균자책점을 올려 나름 준수한 성적을 올렸다.[25] 13시즌 KIA의 불펜 투수들도 크게 다른 수준은 아니었다. 유동훈 혼자 2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으면서 노익장을 과시했고 그 다음으로 잘 한게 4.48의 박경태, 4.88의 신승현이다. 박지훈은 전년도에 굴려진 여파로 10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으면서 뜨겁게 타올랐고, 앤서니 르루가 4.50이지만 외국인 마무리 투수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대 잘 한 성적이 아니다. 심동섭이 3점대 평균자책점을 찍었다고는 하나, 후반기에 돌아와서 낸 성적으로 하필 그 시기는 타어강 여파로 팀이 꼴아박던 시기였었다. 최향남도 전 시즌과 달리 전반기와 후반기에 조금 나온 수준에 불과해서 팀에 도움이 별로 되지는 못 했고, 1년 정도 더 써먹을 수 있던 수준에 가까웠다.[26] 고양의 2014년 마지막 경기는 8월 27일 경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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