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필로스의 아바스 전쟁 영어: Theophilos' Abbas wars | ||
시기 | 830년 ~ 841년 | |
장소 | 아나톨리아 | |
원인 | 동로마 제국과 아바스 왕조의 아나톨리아 패권 경쟁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 아바스 왕조 |
지휘관 | 테오필로스 테오포보스 아르메니아인 마누일 | 알 마문 알 아바스 알 무타심 알 아프신 |
결과 | 테오필로스와 알 무타심의 잇따른 사망으로 인한 전쟁 중단. | |
영향 | 동로마 제국의 대반격의 발판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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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30~841년, 동로마 황제 테오필로스가 아바스 왕조를 상대로 벌인 전쟁.2. 배경
아나톨리아는 7세기 이슬람의 발흥 이래로 동로마 제국과 무슬림 세력의 격전지였다. 무슬림군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을 달성하기 위해 대대적인 원정을 감행할 때마다 아나톨리아를 거쳐갔고, 설령 원정을 감행하지 않는 때에도 지하드를 명분삼아 아나톨리아 각지에 침투해 약탈을 자행하고 기독교 신자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드넓은 아나톨리아 일대에서 무슬림들이 거쳐가지 않은 곳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이들의 약탈 원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동로마 제국은 이로 인해 크게 위축되었다.740년 아크로이논 전투에서 레온 3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우마이야 왕조군 2만 명을 궤멸시킨 후에는 무슬림군의 침략 빈도와 위력은 약해졌지만, 무슬림들의 약탈 원정은 이후에도 종종 벌어졌다.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이슬람 세계의 새 칼리파가 된 아바스 왕조는 초기엔 각지의 반란을 제압하느라 여념이 없었기에 동로마 제국과의 대규모 전쟁을 미뤘지만, 각지의 에미르들이 아나톨리아에 개별적으로 침입해 약탈을 벌이는 건 용인했다.
그러다가 778년, 동로마 황제 레온 4세가 파견한 동로마군이 타우루스 산맥 너머 시리아에 거주하던 기독교인들을 트라키아에 강제 이주시키자, 칼리파 무함마드 알 마흐디는 780년 아들 하룬 알 라시드에게 10만에 달하는 병력을 맡겨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군하게 했다. 무슬림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가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척인 칼케돈 인근까지 이르렀고, 아르메니아 장군 타차테스의 항복을 받아냈다. 당시 어린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하여 통치하던 이리니 황태후는 향후 3년간 7만 디나르를 바치고 칼리파에 경의를 표하겠다는 조건하에 평화 협약을 맺어야 했다.
802년, 이리니 여제를 몰아내고 동로마 황제로 등극한 니키포로스 1세가 그동안 바치던 조공을 더이상 보내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이에 하룬 알 라시드는 친히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아나톨리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을 크게 격파하고 배상금을 받아냈다. 그러나 805년 니키포로스 1세가 또다시 평화 조약을 파기하자, 그는 크게 분노하여 14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하여 806년까지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다. 이에 니키포로스 1세는 조공을 다시 바치겠으니 군대를 물려달라고 부탁했고, 당시 호라산 일대에 쳐들어온 투르크족을 물리쳐야 했던 하룬은 이를 받아들이고 철수했다.
이렇듯 무슬림들이 아나톨리아를 제집처럼 들리며 약탈을 일삼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종종 위협했지만, 동로마 제국은 이에 전력으로 대항하지 못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이 발칸 반도에서 날로 강성해지며 북방 전선을 위협했기 때문에 아나톨리아 전선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816년 크룸 전쟁이 종식되고 불가리아와 동로마 제국 양자의 20년 평화가 성립되면서, 동로마 제국은 아나톨리아에 힘을 기울일 수 있게 뙤었다. 820년 12월 25일 레온 5세의 피살과 미하일 2세의 등극에 반발한 슬라브인 토마스의 대규모 반란, 무슬림의 시라쿠사 정복 전쟁과 크레타 함락으로 인해 한동안 아나톨리아 방면에 신경쓰기 힘들었지만, 829년 미하일 2세가 사망한 후 황위에 오른 테오필로스는 점임 황제들이 미뤘던 아나톨리아 전선 문제를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테오필로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아바스 왕조군의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830년, 테오필로스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일부를 카파도키아 테마로 분리했다. 카파도키아 테마는 서로는 타타 호, 북으로는 할리스 강, 남으로는 타우로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그는 테마를 가로지르는 타우로스 산맥에 20개 이상의 요새를 설치하거나 강화했다. 특히 시리아에서 아나톨리아로 진입하려면 일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킬리키아 관문의 방위를 대폭 강화했다. 칼리파 알 마문은 이에 대응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카파도키아 테마의 수도인 코론을 점령하고 순두스와 시난 등 2개 요새를 함락시킨 뒤. 지난날 동로마 제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도로 아바스 왕조의 영역으로 데려갔다.831년 봄, 킬리키아의 아랍인들이 아다타 고개를 통해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테오필로스는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하시아논 인근에서 적을 급습해 섬멸하고 7,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뒤이어 타르수스를 공략하고 무슬림 1,600명을 살해했다. 그 후 금문교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아야 소피아로 행진하며 군중의 환호를 받은 뒤, 승리를 기념하는 경마 대회를 개최했다. 알 마문이 이에 보복하고자 그해 가을 킬리키아로 이동했을 때, 테오필로스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을 용의가 있다는 전갈과 함께 500명의 아랍인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알 마문은 이를 무시하고 형제 알 무타심, 아들 알 아바스와 함께 각각 한 개 분견대 씩 거느린 채 카파도키아로 진입하여 티아나 요새를 공략하고 테오필로스가 이끄는 구원 부대를 격파한 뒤 상당량의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한 후 귀환했다.
테오필로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했지만, 알 마문은 서신에서 동로마 황제가 칼리파보다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832년 봄, 아랍군은 다시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이 지역의 주요 군사 거점인 로우론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요새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알 마문은 부하에게 포위를 맡긴 뒤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로우론 수비대는 야간 기습을 가해 적장을 포로로 잡는 등 분투했지만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그해 9월 테오필로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아랍군에게 패해 철수했고, 결국 로우론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군은 그해 겨울을 로우론에서 보내면서 카파도키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하고자 했다.
테오필로스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알 마문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며 목 박았다. 833년 5월,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랍군이 재차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카파도키아 전역을 석권하려 했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금화 10만 개와 아랍 포로 7천 명을 석방할 테니 물러가달라고 청했고, 알 마문은 일단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알 마문은 장차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833년 여름 돌연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그해 8월 7일에 사망했다. 이후 이복동생 알 무타심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지만, 각지에서 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느라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
834년, 나스르가 이끄는 15,000명의 아르메니아 반란군이 아바스 왕조군의 공세를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나스르는 테오필로스의 지시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테오포보스로 개명했으며, 그의 부하들 역시 기독교로 개종했다. 황제는 아내의 누이를 테오포보스에게 시집보내고, 그가 데려온 병사들을 로마군에 편입시켜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렇게 준비를 갖춘 그는 837년 7만 대군을 일으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소조페트라를 공략한 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시키고 멜리테네(말라티아)를 조공 도시로 만들었다.
838년 봄, 알 무타심은 작년의 패배에 보복하고자 타르수스에 8만 대군을 집결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바스군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복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알 아프신과 칼리파의 부대로 나뉘었다. 알 아프신의 부대는 카파도키아로 진군했고, 칼리파의 부대는 칼라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했다. 테오필로스는 두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얀첸)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했다. 당시 동로마군에 귀순한 뒤 용맹을 떨쳤던 아르메니아 장군 테오포보스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아바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알 아프신이 급파한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테오필로스가 말을 잃고 친위대와 함께 동분서주할 때, 병사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해버렸다.
결국 다지몬(얀첸)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완패했고, 아바스군은 여세를 몰아 앙카라를 공략한 뒤 아모리움을 포위해 2주만에 함락시키고 7만에 달하는 시민 중 절반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에로 끌고 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알 무타심은 알 마문의 아들 알 아바스가 주변인들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얄 사흐르 이븐 샤히, 아므르 알 파르하나,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 아흐마드 이븐 알 할릴을 처형하고 아바스는 감옥에 갇힌 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다지몬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알 아프신 마저 정적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한편, 테오포보스는 다지몬 전투 패배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시노페에서 아랍군에 대항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병사들은 테오필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믿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필로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테오필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겠으니 직위를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대신 그가 이끌고 있던 부대를 여러 연대로 나누어 각지의 테마로 분산시켰다. 이후 839년 소규모 아랍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왔다가 격퇴되었고, 841년에는 동로마군이 게르마니키아와 아다타를 약탈했다. 842년 1월 테오필로스와 알 무타심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전쟁은 중단되었다.
4. 이후
844년, 말라티아의 에미르 우마르 알 아크타가 이끄는 아바스군이 동로마 제국의 아나톨리아 영역 깊숙히 침입하여 보스포로스 해안까지 이동했다. 이후 우마르는 마우로포타모스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비슷한 시기에 동로마 제국에서 이단으로 낙인찍혀 박해받은 파울리키아파가 지도자 카르베아스의 인솔 하에 아바스 왕조에 망명했다. 그들은 아바스-동로마 국경 지대에서 테프리케 요새를 중심으로 파울리키아 공국을 세우고 아랍인들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수시로 공격했다.845년, 칼리파 알 와시크는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하여 4,362년의 무슬림들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했다. 이것은 알 아민이 809년 또는 810년에 동로마 제국과 포로 교환을 한 이래 30여 년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해 3월 아모리온에서 포로로 잡힌 42명의 동로마 장교들이 이슬람교로의 개종을 거부한 후 사마라에서 처형되었다. 그 후 포로 교환을 위한 임시 휴전이 끝나자, 아바스 왕조의 타르수스 총독 아흐마드 이븐 사이드 이븐 살람은 845년 겨울 7,000명의 장병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다. 그러나 그러나 원정은 수많은 병사가 동사하거나 익사하고 상당수가 포로로 잡히는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그 후 양국은 6년간 전쟁을 벌이지 않았다.
855년 5월 22일, 동로마 제국 함대가 환관 다미아누스의 지휘하에 나일강 삼각주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다미에타로 파견해 사라센 함선들을 모조리 불태우고 무기고를 파괴하며 많은 포로를 잡아들였다. 856년 킬리키아 아나자르부스에 동로마군이 들이닥쳐 무슬림들을 살해했다. 아랍 문헌에 따르면, 약 300척의 함대로 이뤄진 제국 함대가 에게 해와 시리아 해안 일대를 3차례 이상 공격했다고 한다. 칼리파 알 무타와킬은 일련의 사태에 분노했고 힘스에 살던 기독교인들을 동로마 제국과 내통하고 있다는 혐의를 씌워 추방했다. 하지만 각지의 반란이 극심했기에 동로마 제국으로의 역공을 감행하지 못했다.
863년 9월, 말라티야의 아미르 우마르 알 아크타가 파울리키아파 수장 카르베아스와 함께 흑해 연안의 삼순을 공략하고 아르메니아콘 테마를 거쳐 아미수스를 약탈했다. 이에 동로마 제국의 실권자 바르다스는 동생 페트로나스가 이끄는 5만여 제국군을 파견해 이들을 치게 했다. 페트로나스는 병력을 셋으로 나눠 북쪽, 남쪽, 서쪽에서 동시에 진격해 포손-할리스 강과 그 지류인 랄라카온 강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우마르 이븐 아브둘라의 군대를 포위했다. 곧이어 벌어진 처절한 전투에서, 우마르, 카르베아스 등 아랍군 수뇌부와 장병들이 몰살당했다. 페트로나스는 뒤이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아미다(지금의 디야르바키르)까지 진군해 많은 포로를 확보하고 트라키아로 이주시켰다. 이후 아바스 왕조에서 알 무스타인과 알 무타즈의 내전(5차 피트나)가 발발하면서 혼란에 빠지자,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는 이 때를 틈타 866년 친정을 감행해 유프라테스 강을 넘어 메소포타미아 일대를 타격한 후 귀환했다.
그 후 아바스 왕조는 튀르크 장군들의 잇따른 칼리파 폐위와 각지에서 발발한 내란으로 인해 대혼란에 빠졌고, 동로마 제국은 남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서 세력을 회복하는 데 중점을 두다가 불가리아 제1제국 역사상 최고의 명군 시메온 대제의 침략(시메온 전쟁)에 직면하면서 위축되었다. 이 때문에 동로마 제국과 아바스 왕조의 대규모 전쟁은 오랫동안 벌어지지 않았고, 동로마 제국령인 카파도키아 테마와 아바스 왕조령인 킬리키아 사이의 국경 지대에서 국경분쟁이 일어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던 926년, 로마노스 1세에 의해 아나톨리아 방면 제국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요안니스 쿠르쿠아스가 장장 22년간 이어질 사라센 원정을 감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