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24:19

티베리우스/생애

1. 황제가 되기 전
1.1. 어린 시절1.2. 청년기1.3. 은퇴와 로도스 섬 유학1.4. 후계자 등극
2. 황제
2.1. 즉위와 위기2.2. 재위 초중반기
2.2.1. 내치와 카이사르 가문 내 경쟁2.2.2. 게르마니쿠스의 요절과 대 드루수스파의 반발2.2.3. 소 드루수스의 의문사와 세야누스의 등장
2.3. 세야누스의 전횡과 몰락2.4. 말년의 공포정치
2.4.1. 세야누스 일파 숙청과 복수2.4.2. 근위대장 마크로
2.5. 사망

1. 황제가 되기 전

1.1. 어린 시절

티베리우스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1]리비아 드루실라의 맏아들로 기원전 42년[2] 11월 16일에 로마의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태어났다. 수에토니우스는 위의 기록을 제시하면서 다른 견해도 밝히고 있는데 티베리우스가 외할아버지의 출생지이자, 훗날 티베리우스 시절 원로원의 지시로 운명의 여신상이 세워진 푼디가 티베리우스의 출신지라는 학설과 기원전 43년생 혹은 41년생이라는 학설이 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수에토니우스는 공식 관보와 달력에 기원전 42년에 팔라티누스 언덕이 티베리우스의 출생지라고 쓰여 있고 나머지 학설들은 근거가 부족하다며 부정하고 있다.

반 옥타비아누스(훗날 아우구스투스)파[3]였던 아버지 클라우디우스 네로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반란(페루시아 내전) 때 참여하자 1세 때부터 로마를 떠나서 페루시아네아폴리스, 시칠리아, 그리스에서 도망치며 생활해야 했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도피 당시 네아폴리스에서는 몰래 항구로 도망치던 중, 어린 티베리우스가 2차례 울음을 터뜨려 일행이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으며, 이때 일행들에 의해 버려질 뻔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 후로도 어딘가에서(이탈리아 반도로 추정) 어머니 리비아가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야반도주를 할 때 숲에서 산불이 났고 티베리우스 모자는 이 산불에 휩쓸려 죽을 뻔 했다가 간신히 머리와 옷만 그을리고 살아남았다. 그리스에서는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클리엔테스였던 스파르타인들의 공공 탁아소로 맡겨지기도 했다고. 이때의 고난들은 티베리우스에게도 가슴 깊이 남았는지 시칠리아에서 어머니가 폼페이아[4]에게 받았던 망토와 핀 금제 장식들을 보관했고 100여 년 뒤인 오현제 시절, 수에토니우스도 바이아이에 남아있던 이 유물들을 보고 기록으로 남겼다(출처: 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티베리우스편 6장).

티베리우스의 친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노빌레스를 대표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중에서도 풀케르[5] 가문과 함께 공화정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서깊은 네로 가문[6]의 수장이었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는 드루수스[7]의 아들로 부모 양쪽 모두로부터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피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는 콰이스토르(재무관)의 직분을 맡을 당시 율리우스 카이사르 밑에서 알렉산드리아 전쟁 당시 함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때부터 티베리우스의 친부는 카이사르파의 일원으로 있었고, 상관인 카이사르로부터 신임을 받던 사람이었다. 따라서 당시 최고제사장이었던 카이사르에게 제사장 지위를 받았고 그가 정복한 갈리아에서 식민지 건설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카이사르가 암살당하고 2차 3두정치가 시작될 무렵, 티베리우스 네로(티베리우스의 친부)는 프라이토르(법무관)가 되었는데 법무관 임기가 끝날 무렵인 기원전 41년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8]가 아우구스투스에 반발해 반란을 일으켰고, 실패하자 페루시아(현재 이탈리아 페루자)로 도주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때 그도 집정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를 따라서 페루시아로 들어간다. 그러나 바로 다음해 페루시아는 함락되었고 루키우스 안토니우스는 항복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네로는 항복하지 않고 프라이네스테로를 거쳐 네아폴리스(오늘날의 나폴리)로 도망쳤고, 여기서 노예반란을 시도하다 또 실패하고는 시칠리아까지 도주한다. 그리고 시칠리아에서 반 옥타비아누스 세력이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9]에게 찾아갔지만 섹스투스는 티베리우스 네로와의 접촉을 피했고 법무관 네로의 파스케스(Fasces)의 사용도 금지하면서 사실상 그를 거부한다.[10] 결국 티베리우스 네로는 가족들을 데리고 그리스로 건너가 루키우스 안토니우스의 형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찾아갔다.

티베리우스가 3세가 될 무렵,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협약을 계기로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 일가에게 사면령이 내려지자 부모와 함께 로마로 귀환하였다. 이후 티베리우스의 부모는 한때 정적이었던 옥타비아누스와 화해하고, 그와 만났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와의 우호증진을 위해 자신보다 7살이나 많은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한 상태였다. 이 결혼이 이뤄지기 전, 옥타비아누스는 사이가 껄끄러웠던 안토니우스와 화해의 뜻으로 정략결혼을 진행했다가 서로 화해한 뒤,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처제인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자신보다 나이도 많고, 첫 결혼으로 이미 전 남편의 아들까지 있던 스크리보니아에 대해 썩 내켜하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아내 스크리보니아가 임신 중이었고, 곧 출산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부부 사이는 상당히 험악해져 옥타비아누스 부부의 이혼은 금방이라도 될 것으로 보였다. 그러던 중, 옥타비아누스는 우호 관계였던 섹스투스 폼페이우스 측과 사이가 험악해지면서, 정략적으로도 가치가 없어진 아내와 이혼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성별도 모르는 첫혈육의 탄생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스크리보니아가 아이를 낳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 모두 아이가 태어난 직후 이혼하기로 결정을 내렸기 때문. 그리고 우연치 않게도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한때 정적이었지만, 화해한 인사들을 만나면서 티베리우스의 친부모도 만나게 됐다.

티베리우스의 어머니인 리비아 드루실라는 상당한 미인인 데다 교양도 풍부하고,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문(친가)와 리비우스 드루수스 가문(입양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이 상당했던 여장부였다.[11] 그녀의 아버지는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클라우디아누스였는데, 필리피 전투 후 클라우디아누스가 자결해 리비아는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했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는 출신 가문이나 나이로도 훌륭한 배필이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 네로의 아내였던 리비아 드루실라를 처음 만난 순간, 엄청난 미인이었던 리비아의 외모와 뛰어난 지성 등 모든 부분에 홀딱 빠져버려 진심으로 리비아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얼마 안가 옥타비아누스는 아내가 첫 혈육인 율리아를 낳자 기다렸다는 듯이 상호 합의하에 이혼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첫 혈육에게 형식상 관례대로 자신의 외할머니의 이름과 똑같은 율리아라고 지어주고,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인지 결정만 통보한 채, 스크리보니아 모녀에게 무관심했다. 이런 옥타비아누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스크리보니아 역시 애초부터 옥타비아누스와 이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어서 갓 낳은 딸 율리아를 데리고 곧바로 다른 남성과 재혼해버렸다.

옥타비아누스 부부가 이렇게 이혼하게 된 직후, 최고 권력자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친부를 찾아가 자신이 리비아 드루실라와 결혼해야 한다고 밝히고, 일방적으로 아내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다. 옥타비아누스의 요구는 사실상 명령에 가까운 요청이어서 강제로 이혼이 이루어졌다. 이때 티베리우스 네로는 이혼의 조건으로 유이한 혈육인 장남 티베리우스와 곧 태어날 아이에 대한 친권과 양육권을 옥타비아누스 측에 요청했다. 이에 옥타비아누스 측은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 뒤, 전 남편이 될 그에게 자신들의 결혼식에서 신부 아버지의 역할을 요구하는 것을 제안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부모는 이혼했다.

티베리우스의 부모가 이렇게 이혼하게 된 이후, 이례적일 정도로 결혼 준비가 진행되더니 1월 17일 티베리우스 네로의 둘째[12]임신 중이었던 리비아 드루실라와 옥타비아누스가 티베리우스 네로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말해 자신에게 죽자고 반란을 일으키던 사람의 아내를, 그것도 그의 아이를 임신 중일 때 빼앗아서 자신의 아내로 삼은 것.

부모의 이혼과 어머니 리비아의 재혼 이후, 결혼 전 약속대로 티베리우스는 친아버지 밑에서 자라게 된다. 리비아와 옥타비아누스의 결혼 후 3개월 뒤 동생 드루수스[13]가 옥타비아누스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드루수스 역시 태어난 이후 약속대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집에서 자랐다. 티베리우스의 부친은 이혼 후, 두 아들을 키웠는데 끝내 재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마저도 9살이 되던 해 아버지가 병으로 사망하자, 이들 형제는 친권을 갖게 된 어머니 리비아와 함께 살게 되어 옥타비아누스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따라서 이때부터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옥타비아누스 밑에서 자라게 되는데, 친딸 율리아 외에는 자식이 없던 옥타비아누스가 두 형제를 친아들처럼 대우하고 키웠기에 사실상 그의 양자가 된다. 하지만 정식으로 입적된 것은 아니었고 옥타비아누스는 자신과 성격 등이 여러모로 비슷하고 과묵한 티베리우스보다는 쾌활하고 매력있는 드루수스를 더 예뻐하며 사랑했다고 한다.

티베리우스는 9세의 나이에 아버지가 죽자 클라우디우스 가문을 대표하여 로스트라에 올라 아버지를 기리는 추도 연설을 했고, 이 나이때부터 로마에서도 최고로 불리는 클라우디우스 가문 중 가장 영향력있는 네로 가문의 수장이 됐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여전히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였다. 이때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의 친모 리비아는 진심으로 남편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의 두 아들을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시키기를 바랐는데, 옥타비아누스는 티베리우스 형제를 아들처럼 키우고 사랑했음에도 지극히 정치적 목적을 이유로 양자로 삼지 않았다. 왜냐하면 만약에 정식으로 입적되어 이름을 바꾸게되면 티베리우스가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대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아우구스투스로서는 티베리우스를 그냥 그대로 자신의 밑에 두는 것이 클라우디우스의 가문도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이 되어 굳이 티베리우스를 입적시키지 않다가, 혹은 입적시켰다간 억지로 자신의 자리를 물려줘야 할지도 모르니까 미루다가 나중에 그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게 되고 나서야 정식으로 입적시키게 된다.[14] 즉 이때까지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키울 생각은 전혀 없었고, 어디까지나 그를 측근으로 키워서 티베리우스 개인의 능력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힘을 가지려고 한 것이다.[15] 이런 아우구스투스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티베리우스는 계부 아우구스투스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아니었음에도 엄청난 후원을 받게 된다.

1.2. 청년기

티베리우스가 12살이 되는 기원전 29년, 양아버지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연합함대를 악티움에서 격파한 이후 지중해 세계의 1인자가 되었다. 이때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서 열린 자신의 개선식에서 티베리우스를 자신이 타는 개선전차에 티베리우스의 먼 친척이자 사촌이었던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아우구스투스의 조카)[16]와 나란히 타게 했다. 로마에서 개선식이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안다면, 또 아우구스투스가 제일 처음 후계자로 밀었던 것이 바로 저 마르켈루스라는 것을 안다면, 그가 자신의 양자 티베리우스를 얼마나 중요하게 기용하려고 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 후로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서 축제를 주관하거나 키르쿠스에서 트로이 경기의 연장자 무리를 이끌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출처:수에토니우스, 황제열전, 티베리우스편 6~7장).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와 마르켈루스를 갈리아 일대의 로마군 전초기지로 데리고 갔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마르켈루스와 함께 처음으로 로마군영과 게르마니아로 향하는 국경 일대를 시찰했고, 황제와 장군들로부터 로마군의 수비방법, 전투태세, 군율, 요새 관리 등 군무를 교육받았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외동딸 율리아와 마르켈루스를 결혼시켰다. 마르켈루스와 달리 티베리우스는 기사계급(에퀴테스)이지만 제국의 2인자인 아그리파의 장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17]와 결혼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결혼은 로마 상류층에서 굉장히 드물었던 연애결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를 데리고 출석한 뒤 티베리우스에게 남들보다 5년 이상 빨리 모든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특권을 선사했다. 이 조치는 3살 어린 드루수스에게도 똑같이 적용됐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19세가 되자 콰이스토르(재무관) 직위까지 부여받는다(출처: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Historiae, 2권 94장). 성인이 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주재하는 재판정에서 아르켈라오스 왕, 트랄레스인, 테살리아인들의 변호를 통해 공적인 삶에 첫발을 디뎠다. 그리고 그는 지진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원조를 호소하는 라오디케아, 티아티라, 키오스 사람들을 위해 원로원에 탄원하는 일을 맡았다. 또한 검사로서 아우구스투스에 대한 음모를 꾸민 파니우스 카이피오, 무레나를 대역죄로 고소하여 유죄 선고를 받아내기도 했다.

티베리우스는 고작 약관의 나이에 속주 총독에 임명됐는데, 일반적인 총독 경험자들보다 평균 20살 정도가 어림에도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통치 역시 놀라울 정도로 침착하고 차분했다. 일례로 티베리우스는 시간이 날 때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실력을 갈고 닦으면서, 고대 그리스 문학들을 읽었고 통치에 필요한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진중하고 차분한 성격보다 더 찬사를 받은 것은, 늘 공정하면서도 본인에게 특히 엄격한 성품이었다. 따라서 주변에게 그는 '애늙은이' 소리를 들었는데, 본래부터 워낙 진중하고 내성적인 성격인 탓에 이를 신경쓰지 않았다.

이후 그는 3살 아래의 동생 드루수스[18]와 함께 본격적으로 중용되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군복무를 시작한 티베리우스는 갓 공직에 발을 디딘 동생 드루수스와 함께 협공 작전을 펼쳐 이탈리아를 위협하던 알프스 일대 이민족들을 격파했고, 갈리아와 일리리쿰, 레누스 강(라인 강)[19] 일대의 게르마니아 전선을 휩쓰는 등(게르마니아 전쟁) 출중한 군사적 재능을 선보였다. 이때 그는 부하들을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해 용감하게 그 위기에 맞선 장군이었고, 공정하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친절하고 자신에겐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 뛰어난 상관으로 존경과 명성을 얻었다.

이런 생활과 태도처럼 티베리우스는 일평생동안 그 흔한 스캔들도 없었다. 이를 증명하듯 그는 죽을 때까지 여자 문제가 있다거나 예의없다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 또 그는 죽을 때까지 고가의 사치품이나 고급음식에 관심도 없었고, 귀족들과 부자들이 여는 연회장이나 경기장 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명문가의 당주이고, 황제의 양자인 까닭에, 티베리우스는 일찍부터 네로 가문의 엄청난 클리엔테스들을 후원했으며, 친아버지 티베리우스 네로를 기리는 검투경기를 포룸 로마눔에서 열었다. 이어 할아버지 드루수스를 기념하는 검투 경기를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열었는데, 소년 티베리우스가 대형 행사들을 주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금전적으로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였다. 이런 까닭에 티베리우스는 일찌감치 최고 명문 중 하나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대표자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여는 행사나 경기장에 출입조차 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상 사람들은 이런 그의 성격을 안 좋게 생각해 "차갑다", "너무 엄격하다", "재미없다"고 비난했다.

이처럼 티베리우스는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설계와 자신의 계획대로, 어디까지나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 황제의 친족으로 활약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내 빕사니아와 동생 드루수스 부부를 진심으로 사랑해 그들과 사적으로 많은 시간을 함께 했는데, 그가 보낸 여가 생활들은 놀라울 정도로 소박하고 가정적이었다. 또 그는 자신에게는 항상 엄격하면서도, 몇 안 되는 불알친구들과 자신 밑에서 능력이 없더라도 최선을 다한 부하들에게 늘 친절했다. 이는 엄격하지만 능력에 따라 부하들을 차별하는 여타 명망가들과 차이가 있던 태도였다. 그래서 왁자지껄하고 여럿이 어울려 음주가무를 즐기기 좋아한 대다수의 로마인들은 이런 티베리우스의 성격과 생활태도를 "재미없다", "폐쇄적이고 이단자 같다"는 식으로 비난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를 근처에서 겪어본 인사들은 당대의 위대한 덕목을 지닌 훌륭한 로마인으로 찬사를 보냈고, 양부 아우구스투스 역시 이런 티베리우스의 장점을 높이 평가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양부에게 사랑받기보다는 존중받길 원하는 아들인데다 꾸밈없이 행동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 자신과 가문의 명예만 신경썼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 본인도 이런 안배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다. 동생인 드루수스는 옥타비아의 딸인 안토니아와 결혼해서 황실가족의 일원이 된 것에 비해, 본인은 아그리파의 딸인 빕사니아와 결혼했으니[20] 가능성이 있던 드루수스와는 달리 당시 아우구스투스가 구상해뒀던 후계구도에서 티베리우스의 자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부인인 빕사니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아우구스투스의 총애를 한몸에 받았던 친동생 드루수스와 깊은 우애를 나누었다. 이처럼 제위에 대한 큰 욕심 없이 황제의 측근, 이후에는 아우구스투스가 지명한 후계자의 후원자로서 공적 역할을 수행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누리는 순탄한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으나...

이러니하게도 그의 인생은 서서히 꼬여가기 시작했다. 먼저 장인 아그리파가 심장질환으로 급사했다. 이어서 누구보다 아끼던 친동생 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 낙마 사고로 중태에 빠졌다.[21] 이때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사고 소식을 듣고, 밀라노 남쪽의 포 강 근처 도시 티키눔에서 밤낮으로 말을 달려 임종 직전의 동생을 만났다. 티베리우스는 도착 후 자신의 품 안에서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봐야 했는데, 기지 내 군단병들이 자신들의 사령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의 군단병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태까지 겪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군단병들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상황을 전해, 아우구스투스로부터 로마로 드루수스의 유해를 안장할 것을 명령받았는데, 자신의 임지로 떠나지 않고 맨 앞에서 동생의 시신을 직접 이탈리아 국경까지 운반했다. 이때 그는 게르마니아에서 이탈리아 국경까지 가는 길 내내 말을 타지 않고 동생의 관 앞에 서서 걸었다.[22]

1.3. 은퇴와 로도스 섬 유학

상술했듯 장인과 동생이 사망한 일들은 "슬픈 일" 선에서 끝나지 않고 티베리우스의 인생을 직접적으로 꼬이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의 연이은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가 기존에 생각해놓은 후계자 구도가 엉망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슬하에 아내 리비아가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 형제, 전처 스크리보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외동딸 율리아가 있었다. 그는 부단히 리비아와의 사이에서 후계를 보려고 했지만 모두 유산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뒤를 이어줄 친아들이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아우구스투스가 누구보다도 자신의 혈통에 편집광적으로 집착한 까닭에 유아기 때부터 키운 두 의붓아들(리비아의 친아들)을 친아들처럼 대우하고 사랑했음에도 정치적 이유 등을 이유로 양자로 삼지 않았다는 것이다.[23] 하여 그는 외동딸 율리아의 남편이자 자신의 사위를 후계자로 삼고, 그 남편과 율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황위를 잇게 해서 최종적으로 자신의 핏줄이 황제가 되게 하는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계산들이 시작부터 완벽하게 어그러졌다는 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리비아와 재혼 이후 유일한 친혈육 대 율리아가 결혼적령기가 되자, 가부장의 권한을 내세워 누나 옥타비아의 아들(본인의 조카) 마르켈루스를 율리아의 남편으로 결정내린 뒤 결혼시켰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이자 사위인 마르켈루스는 로마를 휩쓴 전염병에 걸려 요절해버리고 만다. 따라서 그는 과부가 된 율리아를 곧바로 제국의 2인자이자 자신의 오랜 친구 아그리파(티베리우스의 장인)와 결혼시킨다. 이 결혼 결정은 아우구스투스의 왼팔 마이케나스 조언과 강권 때문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미혼인 티베리우스를 율리아의 남편으로 세울 생각을 했다. 그러나 마이케나스는 소 옥타비아, 리비아 드루실라를 견제할 요량으로, 교묘히 사탕발림하여 아우구스투스에게 티베리우스와 대 율리아 결혼을 흐지부지 만들고 아그리파를 율리아의 남편으로 내세웠다.

헌데 친구 아그리파마저 그의 예상과 달리 먼저 사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가 이 무렵 원로원에게 “진지하게 내 후계자로 고려 중이다”라고 말해온, 누나 옥타비아의 사위이자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둘째 아들, 즉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드루수스마저 낙마사고로 일찍 사망했다.[24] 물론 드루수스가 후계자가 되는 것은 위에서 말한 "사위를 후계자로 삼아 외손자를 후원하게 한다" 라는 계획대로의 일은 아니지만, 정황상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차남인 드루수스를 자신의 양자로 입적시켜 후계로 삼은 뒤, 율리아의 아들인 외손자와 드루수스의 딸을 결혼시키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드루수스와 조카딸 안토니아 부부의 자녀들이 율리우스 가문에 입적돼 후계자가 늘고, 티베리우스의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드루수스의 율리우스 가문의 결합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또 드루수스가 양자가 된다면 드루수스 입장에서는 자신의 두 외손자와는 법적으로 형제관계가 되므로 근친혼을 통해 사위가 다음 후계자가 되는 것이므로 클라우디우스 가문(리비아 드루실라)의 입장과 율리우스 가문(아우구스투스)의 입장 모두에게 최고의 타협책이었다.[25] 하지만 이런 계획도 부질없이 의붓아들 드루수스가 개선식을 앞두고 요절해버리면서 허무하게 끝나고 만다.[26] 이것은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가 후계자 후보로 생각한 세 사람이 내리 요절해버렸다는 소리다.

그래도 다행히 아그리파는 죽기 전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3남 2녀를 남겼다. 아우구스투스는 당연히 자신의 피를 직접 이은 외손자들 중 한 명이 자신의 뒤를 잇기를 원해서, 아그리파와 상의 후 외손자 두 명을 일찌감치 양자로 삼고 황궁에서 직접 키웠다. 이때 그는 두 손자를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율리우스 가문에서 가장 위대하고 영향력 있는 이름을 지어줬는데, 그들이 바로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형제다. 하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모두 아우구스투스의 기대만큼 유능한 인물들도 아니었고, 외조부의 엄청난 지원에도 인망도, 뚜렷한 공적도 이루지 못했다. 더해서 이들이 성장해줄 때까지 후견인으로서 중간다리 역할을 해줄 이들의 친아버지 아그리파도 호민관 특권을 부여받은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아우구스투스보다 먼저 사망하면서 원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평소 골골대던건 아우구스투스였고, 아그리파는 아주 건장한 사람이었기에 자신보다 훨씬 건강하던, 동갑내기 친구 아그리파가 먼저 죽은 것은 곧 60을 바라보는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정말로 예상 밖의 일이었다.[27]

그리하여 아우구스투스는 유아기 때부터 친아들로 키운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 드루수스가 맡았어야 할 역할을 맡기기로 결정하고 그를 후계자로 삼게 된다. 그러나 이 결정은 어쩔 수 없이 내린 행동이었다. 다시 말해 아우구스투스는 처음부터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티베리우스를 자신의 정식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갑작스러운 사망 등으로 황제 자리가 공석이 되었을 때 자신이 가장 믿을 만한 아내의 친아들(본인의 의붓아들)에게 중간다리, 혹은 대타 정도로 생각해 내린 조치였다.[28] 동시에 아우구스투스는 의붓아들 티베리우스의 이혼을 지시한 뒤, 아그리파의 죽음으로 과부가 된 율리아와 명령으로 이혼하게 될 티베리우스의 결혼을 지시내린다. 이 결정은 아버지의 명령이기도 했지만, 황제로서의 명령이었다. 그런데 이런 명령의 배후에는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있었다.

원래 아우구스투스는 외동딸 율리아가 두번째 남편 아그리파와 사별해 홀몸이 되자 가문에 상관없이 기사계급 출신 남성 중 한명과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런데 결혼 직후부터 자신의 두 아들을 남편의 공식적인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황제로 만들고 싶어한 리비아는 이 결정에 반대하면서, 후계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율리아의 결혼상대자는 티베리우스가 되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런 리비아의 판단과 결정은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를 배려하지 않고 강압적으로 명령하는데 큰 영향을 끼치게 됐다.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일처리와 인간관계가 지나치게 정치적일 정도로 냉정했는데, 본인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차갑지 못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먼저 가족들의 일이 아니라고 부담감을 덜어주자 본래 그의 방식처럼 티베리우스의 이혼, 티베리우스와 율리아의 재혼을 명령했다. 이는 티베리우스를 아예 가이우스와 루키우스의 계부로 만들어버림과 동시에, 아내 리비아의 가문(클라우디우스)과 자신의 가문(율리우스)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고, 만약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난다면 이를 통해 후계자 후보를 늘리겠다는 계산도 담겨 있었기 때문에, 늘 후계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절대 양보해줄 수 없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일방적인 결정은 티베리우스로서는 그야말로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위에도 말했듯이 그는 아내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소 드루수스[29]라는 아들까지 둔 상태였다. 심지어 저 빕사니아 아그리피나는 바로 아그리파가 율리아 이전 첫 번째 아내와의 사이에 낳은 딸이기 때문에, 즉 티베리우스는 장인의 딸과 이혼하고 형식적이긴 하지만 장모인 율리아와 결혼하게 된 셈이다. 거기다 티베리우스는 정략적인 이유로 결혼한 케이스가 아닌, 연애결혼으로 빕사니아와 결혼한 사람이었다. 결혼 전까지 동료들과 부하들에게 베스타 여사제 같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혼전순결을 지킬 만큼 상당한 애처가였다. 그래서 금슬이 좋던 빕사니아와 이혼하기 진짜 싫어서 계부에게 제발 안 된다고 사정하고, 아우구스투스를 유일하게 설득할 수 있는 어머니[30]에게 강제적인 이혼과 재혼을 막아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명령과 태도는 강압적이고 절대적이었기에 결국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31]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이 강제이혼 후에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거리에서 우연히 빕사니아를 만났는데, 빕사니아가 티베리우스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떠나가자 티베리우스는 빕사니아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바라보고만 있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도 전해진다.

아그리파와 드루수스의 죽음 이후, 티베리우스는 늘 슬픔과 상심에 젖어 있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겐 두 사람에게 가야 될 짐이 온전히 부과됐고, 책임은 막중했다. 따라서 이 시기의 티베리우스는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사실상 공동 황제로 아우구스투스와 책임을 나누어지게 되며, 후계자로서 국정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황제의 특권 중 하나인 호민관 특권까지 부여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다르게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재혼임에도 처음에는 본인이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또 다시 티베리우스에게 불행은 찾아오게 된다. 원래부터 율리아는 티베리우스와 달리 교양도 부족하고 문란하기 짝이 없는 사생활로 유명했는데 결혼 생활 내내 두 사람은 끊임없이 부딪쳤다. 이런 상황에서 고부갈등이 벌어지고 티베리우스와 율리아 사이에서 얻은 아들[32]마저 얼마 안 되어 잃으면서 부부 관계가 급속히 나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 최전방 근무를 지원해 전장으로 향하거나 힘든 업무를 떠맡기도 했다. 그럼에도 율리아는 여러 남성들과 불륜관계를 맺는 등 좋지 않은 품행으로 사태를 악화시켰고, 부부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하지만 이때도 티베리우스는 묵묵히 견뎠는데, 더 불행한 것은 세간이 바라보는 티베리우스, 율리아 부부에 관한 평이었다. 이 당시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가 법이 부여한 권리보다 남편으로서의 의무에 따라 부인을 간통죄로 고발하지 않은 것은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을 잃지 않으려는 야망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과 달리 티베리우스는 이혼하거나, 가부장법에 따라 율리아를 처벌하고 싶어도 여러 현실상 그렇게 하지 못했고, 동생 드루수스의 사망과 스승이기도 한 장인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따라서 기원전 6년, 티베리우스는 36살의 나이로 말 그대로 모든 공직을 내던지고 스스로 평범한 자연인이 되어 로도스 섬으로 은퇴를 해버린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율리아와의 문제뿐 아니라 그간 쌓였던 티베리우스와 아우구스투스간의 애증어린 갈등이 폭발한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도 있다. 애초에 티베리우스의 아버지는 아버지인 아우구스투스에게 반발하여 한때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망명생활도 하다가 정적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내를 빼앗긴 뒤 실의에 빠져살다 병으로 죽었고, 본인 역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아내 빕사니아와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 계획 때문에 억지로 이혼해야 했다. 다시 말해 티베리우스 부자는 모두 아우구스투스 때문에 강제 이혼을 하게 된 것.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던 빕사니아 대신 결혼한 것은 로마에게 가장 바람난 여자인 율리아... 거기다 그렇게 해서 결혼한 율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라도 건강하게 자라 자신의 피로 후계를 이었다면 어느 정도는 위로가 되었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문자 그대로 ‘징검다리’ 역할을 하다가 자신의 뒤는 생판 피도 안 섞인 가이우스나 루키우스에게 강제로 물려줘야만 했다. 진짜 이쯤되면 반란을 일으킨 것도 아니고 그냥 섬으로 은둔해서 조용히 살자라고 생각한 것이 성인군자로 여겨질 판이다.[33]

티베리우스가 계속되는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로도스 섬으로 도피해 은둔 생활을 하는 동안, 율리아는 로마에서 더 화려하고 문란한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켰다. 그녀는 공개된 신전에서 관계를 맺거나, 불륜을 저지르면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년 친딸 율리아를 자신이 만든 간통죄로 고발한 뒤, 직접 처벌했다. 이때 그녀는 티베리우스와 이혼을 당해 로마에서 영구 추방되었고 모든 상속권이 박탈됐다.

율리아가 추방될 당시, 어머니 리비아는 아들 티베리우스가 다시 영광스러운 인물로 돌아오길 원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는 맨처음 화를 냈음에도 티베리우스가 다시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랬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소망과 달리 무려 7년간 로도스 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34]

아우구스투스는 평소 책임감이 강하고 건실한 티베리우스에게 아그리파 사후부터 의지했다. 그래서 의붓아들이자 사위인 티베리우스가 무책임하게 가족들을 버리고 야반도주하듯 로마를 떠나자 처음에는 단단히 화가 났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은퇴를 선언하고 로도스로 떠났을 때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아내 리비아가 계속 설득하고 본인도 티베리우스를 유아기 때부터 정을 주면서 키웠기 때문에 끝내 자연인 티베리우스에게 로도스로 파견된 황제 대리인 자격을 하사했다. 물론 감히 자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로도스로 은퇴를 해버렸다는 괘씸함이 있었겠지만, 애초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의 능력을 인정했고, 본인이 친아들로 여길 정도[35]로 티베리우스를 생각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아내의 두 아들을 ‘사랑하는 내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아꼈음에도 티베리우스를 유쾌하고 사람 좋은 드루수스만큼 좋아하지는 않았다고 한다.[36][37]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소(小) 드루수스[38]의 성년식 참석을 위해 로마 방문을 요청하자, 후계자들의 반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원로원 참석을 하지 않고 어떤 정치적 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전제 아래에서 로마 복귀를 허락해 복귀시켰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계부와의 약속대로 로마 귀환 이후에도 아들을 공적인 삶으로 인도한 이후, 곧바로 카리나이에 있는 폼페이우스의 옛 집에서 나와 에스퀼리누스 언덕마이케나스 정원에 위치한 저택으로 이사한 것과 3년간 사적인 일을 제외하고는, 아우구스투스와의 약속대로 원로원에 출석하지도 않았고, 공적인 일에도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

1.4. 후계자 등극

티베리우스는 상술했듯 스스로 은퇴한 이후, 거의 8년 가까이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살았다. 이때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는 그를 수도로 데리고 오길 원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커갈수록 그의 로마 복귀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세습왕조에 대한 야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자신의 분신같이 키운 예비 후계자 가이우스, 루키우스 형제[39]가 성년식에 접어든 나이가 되자마자, 서둘러 성년식을 치르게 한 뒤 이들을 원로원에 데리고 갔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두 외손자를 위해 원로원과 정치적 타협을 하고, 자신을 지지하는 민중들과 민회까지 원로원과 프린켑스의 협상장에 끌어들여 우격다짐으로 10대 소년들에게 각종 특권들과 집정관 등 공직을 하사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또 그는 엄청난 돈을 들여 국가 행사로 자신의 혈육들을 홍보했음에도 호응이 없자, 유벤투스라는 소년단을 만들어 두 손자에게 단장, 부단장 자리를 주고 각종 행사들까지 주최시키는 등 엄청난 지원을 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 모두 로마 일반 시민들과 원로원 모두에게 인망이 지나치게 없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들에게 기회를 줬는데, 그의 기대와 달리 두 사람 모두 황제의 재목이 아니라는 것이 곧바로 밝혀지게 된다.

아우구스투스의 첫 번째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의 친모 율리아(티베리우스의 아내)가 간통죄로 기원전 2년 판다테리아로 추방된 이후 티베리우스의 로마 복귀가 기정사실화된 상황에서 그의 귀환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이 무렵부터 거취에 불안을 느껴야 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첫 시험대에 오를 동방 문제 해결 파견 직전, 대 드루수스의 딸 리빌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그는 외할아버지에게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임무를 부여받았는데, 그것은 때마침 발생한 유대 왕국 소요사건과 파르티아의 개입으로 촉발된 아르메니아 문제였다. 고령의 아우구스투스는 당시 동방 문제를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직접 맡기면서, 이 정치적 이벤트를 외교적으로 성공시킨다면 자신의 양자가 단번에 민중들과 원로원에게 인정받을 거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황제 본인이 심혈을 기울여, 동방속주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전직 집정관 마르쿠스 롤리우스를 고문단장으로 임명했고 베테랑 원로원 의원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 누미디아의 유바 2세도 포함시켜 경험이 없는 자신의 외손자를 보좌케 했다. 또 티베리우스와 친분이 있으면서 동방, 서방 일대에서 경험이 풍부한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5대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등을 고문단에 임명해 돋보이는 성과를 내야 할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돕게 했다.

그러나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의 바람과 달리 머리아픈 문제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뽑아 선정한 고문단에게 다 맡긴 뒤, 새신부 리빌라를 남겨두고 로마를 떠났다. 그는 로마를 출발할 때부터 요란스럽게 떠났고, 급한 일이 아닌 사람처럼 느긋하게 이동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1년 넘게 가야할 유대 속주와 시리아 속주로 가지 않고 시간을 지체했는데, 이탈리아 반도를 떠난 일행을 태운 배는 부유한 그리스 지역으로 향했다. 이때 황태자는 일행들과 함께 모든 일은 잊어버린 사람처럼 생전 처음 방문하는 그리스, 이집트 여행에 치중했다. 또 얼마나 거만하게 행동했는지 지나가는 도시마다 그를 위해 환영 만찬과 축제를 성대하게 열어줬다. 그래서 그 행렬이 그리스를 출발해 이집트로 가기 전 로도스 섬을 지날 거라고 알려지자, 로도스 섬에서 조용히 공부하면서 학자들과 학술 토론을 나누던 티베리우스마저 그 소문을 들은 뒤 아랫사람처럼 그를 알현하러 마중나와야만 했다.[40]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 중 고문단장을 맡고 있던 롤리우스는 원로원 내에서 티베리우스와 철천지 원수일 정도로 사이가 최악이었다. 롤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공식 후계자에게 스승이기도 했는데, 로도스 섬 방문 당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거만한 태도로 숙부 티베리우스를 무시하고 모욕한 일이 벌어지게 됐다. 그런데 이런 황태자의 행동을 옆에서 본 롤리우스는 앙숙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당하는 것을 방치했고, 두 사람 사이를 이간질하면서 겨우 20살이 넘은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부추겨 티베리우스에 대한 적대심까지 키웠다. 따라서 참다 못한 다른 수석고문단 일행들은 이 사건을 해프닝으로 넘어가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에 보고했다.

이 당시, 티베리우스는 어린 조카의 미숙함을 이해하면서 넘어갔지만 배후에 롤리우스가 있다는 사실을 안 뒤, 티베리우스 친구들과 일부 원로원 의원들은 이 문제를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로도스섬 방문 직후, 로마에서는 롤리우스가 황제의 양자이자 사위이며 정부 공식 대리인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받는 사건을 의도적으로 방치했다고 논란이 일기도 했고 동방에서는 고문단 사이에서 ‘롤리우스 vs 티베리우스’구도의 미묘한 신경전이 계속 벌어졌다. 이는 양자와 외손자가 서로 앙금을 풀고 잘 해결해내기를 원한 아우구스투스의 심정과 상반된 일이어서 황제는 원로원과 함께 자신의 양자이자 대리인 신분인 티베리우스가 모욕당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정황을 구체적으로 알기 위해 고문단 일행 중 몇명과 가이우스 카이사르 호위 백인대장을 소환해 조사까지 했다.

반면, 로도스 섬에서 문제를 일으킨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이집트에 들렀다. 그는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를 비롯한 이집트 전역의 유명 관광지와 부유한 도시들을 도는 여행에 치중했다. 그 사이 롤리우스를 포함한 베테랑 고문단들은 서둘러 유대 지방과 시리아 속주에 도착해 아우구스투스와 원로원이 지시내린 문제 해결에 집중했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스승 롤리우스가 모든 골칫거리를 정리한 이후에야 움직였다. 하지만 이때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도착해 한 일이라고는 도착 후 파르티아와의 국경까지 이동해 파르티아 측과 형식적인 조인식을 거행한 일 뿐이었다. 조인식 종료 직후, 가이우스 카이사르 일행은 로마에 보고서를 보낸 뒤 다음 행선지인 아르메니아로 떠났다. 한편 원로원에서 열린 회의에서 조인식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기뻐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얼마나 외교문제를 잘 해결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원로원에게 자신의 후계자가 일을 잘 해결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로마인들과 원로원에서는 이 성과의 보고서를 토대로 한 아우구스투스의 주장에 수긍했다. 왜냐하면 롤리우스가 어려워 보인 문제들을 해결하면서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공으로 교묘히 잘 돌려 놓은 까닭에 아우구스투스의 칭찬을 비판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 입장에서는 불행하게도 얼마 안 가 고문단장 롤리우스가 뜬금없이 파르티아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고발됐다. 내통의 증거로 거론된 것은 그가 동방 속주에 도착한 이후 파르티아 왕과 지방 유력자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수령한 행동이었다. 사실 롤리우스는 뛰어난 행정가, 장군이었고 아우구스투스의 열혈 지지자였지만, 늘 자신이 통치하던 속주의 속주민들을 쥐어 짜내거나 뇌물을 받아 막대한 재산을 축적한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행동 자체가 굉장히 위선적이어서 티베리우스 등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적이 많이 없었다.[41] 그래서 이 당시, 로마에서 그 고발장을 접수받은 아우구스투스는 고발 소식을 보고받고도, 숙고 끝에 소환형을 내리지 않고 넘어갔다. 어떻게 보면 티베리우스 입장에서는 천운일 수도 있는 사건이 이때 벌어지는데, 그동안 롤리우스를 믿고 따르던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자신의 버팀목이던 롤리우스를 맹비난하면서 아우구스투스에게 이 문제를 재차 거론한 것이다. 결국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개입하게 되면서 롤리우스 고발 사건은 새로운 전개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사실 황태자와 스승의 사이는 이탈리아를 떠난 이후부터 서서히 대립관계로 변해갔는데, 롤리우스 고발 사건 이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이 문제를 아우구스투스에게 제기하면서 틀어지게 됐다. 따라서 황제와 원로원에게 신뢰를 잃었다고 판단한 롤리우스는 고발 소식을 들은 뒤 비관하다가, 재판 결과를 기다리는 중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 로마에서 독약을 마시고 자살해버린다.[42]

이렇게 황태자의 고문이자 스승인 롤리우스가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자, 젊은 황태자가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의 중책을 떠맡게 된다. 사실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자신을 올바르게 통제해주던 고문 롤리우스에게 적정선 수준으로 컨트롤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고문단의 빈자리가 생기자 그는 더 오만해졌으며, 자신을 수행하던 군대와 수행원들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 따라서 아르메니아 도착 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거만한 태도와 언행들로 자존심 강한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자극하더니, 결국 아르메니아 왕실과 귀족들까지 피해를 입히는 폭동사태를 유발시켰다. 이때 생긴 폭동은 함께 온 로마군에 의해 진압됐지만,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동방에서 다툼에 휩쓸리게 됐다. 그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에게 공격을 당해 복부에 심각한 상처를 입고 도망치듯 소아시아로 탈출했다. 그 이후 그는 편지를 보내 외할아버지에게 티베리우스처럼 모든 것을 내버리고 자연인이 되어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가이우스가 편지로 은퇴선언을 하자, 이를 평소 투정으로 여기고 자상한 어투로 달래며 로마로 속히 돌아오라고 설득했다. 그럼에도 가이우스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의 말을 듣지 않았으며, 귀국을 거부하고 소아시아 일대를 떠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아르메니아에서 얻은 상처 후유증이 악화돼 그해 4월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선박에 오르기도 전에 죽었다. 이렇게 어이없게 자신의 후계자가 사망하자 그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는 굉장히 절망했다. 이에 앞서 둘째 손자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군복무를 위해 히스파니아로 향하던 중 뜬금없이 그리스계 도시인 마르세유에서 머물다가 갑작스레 질병에 걸려 별 공적이나 능력도 증명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어버렸다. 따라서 유일한 후계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죽음은 그동안 그가 공들여 완성한 후계구도가 완전히 끝장났다는 사망선고였다. 하지만 다른 로마 시민들이나 원로원에서는 슬픔에 잠긴 아우구스투스를 위로해줬음에도, 이번 사건으로 완전히 무능함을 드러낸 아우구스투스 외손자의 요절을 추모하지 않았다.[43] 아우구스투스: 이상하다, 티베리우스랑 드루수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하던데...

이런 일련의 급변사태가 벌어진 것이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귀환하고 3년 후 일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당하고도 어이없게 두 외손자를 잃어버린 뒤에도, 본인 친혈육에게 제위를 주겠다는 열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두 외손주가 사망한 이후, 다음 계획에 따라 후속조치를 공식화했다. 그것은 누나 소 옥타비아의 외손자 게르마니쿠스를 차기 황제로 삼는 결정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로, 티베리우스의 친동생 대 드루수스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딸[44] 소 안토니아다. 즉,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양친을 통해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피를 잇고 있었다. 성년식을 갓 치른 티베리우스의 친조카 게르마니쿠스는 이 당시 18살에 불과했지만, 아버지를 일찍 잃을 당시부터 효심과 책임감이 대단해 그를 보호자로 챙긴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었다. 더군다나 게르마니쿠스는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처럼 외종조부와 외종손 사이였기에 이 당시 황제와 가장 가까운 남자 피붙이였다.[45]

사실 아우구스투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살아있을 무렵부터, 죽은 드루수스와 조카 안토니아의 삼남매[46]의 법적 보호자 역할을 하며, 이들을 후원하고 그들의 아버지 역할을 자처해 떠맡고 있었다. 그래서 본인의 두번째 외손녀인 빕사니아 아그리피나[47]를 일찌감치 게르마니쿠스와 약혼시켰고, 게르마니쿠스의 성년식을 할아버지 자격으로 손수 떠맡았다.

아우구스투스를 더 흐뭇하게 한 것은, 이 당시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가 가진 인품과 자질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10대 후반에 불과했지만, 천성적으로 용감하고 쾌활한 성격을 가진데다 뭇사람에게 호감을 줄 정도로 누구에게나 상당히 겸손했다. 이는 천성적인 인성이었는데, 그는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절게 된 동생 클라우디우스를 보호하고 홀어머니 소 안토니아에게 효심의 끝을 보여준 효자로도 명성이 자자했다. 이런 성격은 아버지 드루수스를 쏙 빼닮았다고 하는데, 부모 모두 상당한 외모를 가진 까닭에 게르마니쿠스는 잘생긴 외모를 가진 데다 키가 상당히 큰 미소년이라서 주변의 인망이 저절로 모이고 있었다.[48] 이런 분위기 속에서 게르마니쿠스는 결혼 이후에도 가정에서의 화목한 삶을 중요 덕목으로 생각하는 아우구스투스의 평소 철학처럼, 아내 아그리피나와 이미 화목한 가정 생활도 하고 다복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그가 후계자가 되면 본인이 일평생 그렇게나 원하던 자신의 직계 혈통이 모두의 지지 속에서 황제를 잇게 될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아직 경험이 많이 부족했고, 그 뒤를 잇기에는 보수적인 로마 사회에선 너무 어렸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또다시,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후견인이 되어줘야 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아내 리비아와 오랜 상의 후, 티베리우스를 불러 그 뜻을 묻고 생각할 시간을 준다. 두 사람은 진지한 대화를 나눴고,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쌓인 감정도 턴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백부로서 요절한 동생이 남긴 장조카의 미래를 위해 그 짐을 지겠다고 동의했다.

결국 서기 4년, 로마로 귀환했던 티베리우스는 정식으로 계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이름을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바꾸고,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모든 특권도 포기했으며 율리우스 가문의 일원으로 들어갔다.[49]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보다 2살 어린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드루수스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가문인 율리우스 가문에 자동적으로 손자로 입적하도록 조치를 취했다. 왜냐하면 이 소년 역시 게르마니쿠스처럼 인격자인데다, 재능이 탁월해 혹시 모를 또 다른 사태때 필요한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티베리우스가 로도스 섬으로 홀연히 떠난 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키우면서 성품, 능력 역시 증명해 가이우스 카이사르 요절 직후 리빌라의 새남편이 된 아내의 손자였다. 이런 이유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 자리는 티베리우스의 조카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아우구스투스의 외종손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 넘어가게 된다.[50][51]

이런 조치와 함께 티베리우스의 전처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막내 아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역시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자신과 함께 율리우스 가문에 들어갔음에도,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와의 약속대로 죽은 동생의 아들이자 친조카인 게르마니쿠스를 양아들로 삼았다. 이때 다음 황제 자리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것을 명시한 것은 당연한 조치로 확정됐다.

같은 해,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인생에서 2번째로 호민관 직권을 부여받게 된다. 동시에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의 아들이자 율리아와 결혼했던 시절 티베리우스의 양아들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어 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두 사람과의 양아들 관계가 파기되고 추방되게 된다.[52] 이로써 티베리우스는 본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아들이며 카이사르의 손자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후계자이며 유일한 정치적 후계자임이 확고히 굳혀지게 된다.

후계자 시절에도 티베리우스는 감출 수 없는 출중한 재능으로 전공을 세우는데, 바루스의 3개 군단이 게르마니아 땅에서 궤멸당했을 때 아우구스투스가 말아먹은 레누스 강을 지키면서 뒷처리를 담당했고, 다누비우스 강 전선 재구축과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에서도 공을 세워 입지를 더욱 단단히 굳히기도 했다. 그리고 2년 뒤 돌아와서 미뤄두었던 일리리아에서의 전쟁 개선식을 거행했다. 곧이어 집정관은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와 속주를 공동 관할하는 자격을 부여하고 다음 5년 동안 그를 도와 인구조사 임무를 맡기게 하는 법안을 제출했다. 아우구스투스로서는 분하겠지만, 정말이지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자손들과는 능력치부터가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행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다 서기 13년 로마군 총사령관과 종신 호민관 직권을 아우구스투스와 공동으로 지명받아서 공동황제에 오르게 된다.

2.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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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즉위와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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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신임 프린켑스가 저지른 첫번째 범죄(Primum Facinus novi Principatus)였다."
타키투스, <연대기>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의 건강이 악화되자 프라이토리아니가 티베리우스가 머문 사저를 둘러싼다. 이와 동시에 근위대장이 두 현직 집정관을 집무실로 불러, 형식상 로마 원로원의 평범한 의원 신분인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절대 복종할 것과, 그와 그 일가에게 충성하라고 명령한다. 이 조치는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마지막 명령 중 하나였는데, 두 집정관에게 근위대장과 무장한 프리아토리아니 장교들이 이를 당장 이행하라고 명한 것은 일전에 없던 조치로,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이에 두 집정관은 머뭇하다가 티베리우스에게 절대 복종하고 충성을 다하겠다고 밝힌다. 이어 원로원이 긴급 소집되는데, 이날 두 집정관이 티베리우스에게 정식 충성맹세를 한다. 원로원 전체도 프라이토리아니의 감시 속에 티베리우스에게 절대 복종하겠다고 외친다. 그리고 그 직후, 아우구스투스 서거가 공식 발표된다.

아우구스투스 장례식 날, 상주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를 필두로 프라이토리아니가 이들을 완전무장 상태로 경호하고 각 계급에 따라 전 병력이 도열해 다시 한 번 티베리우스와 카이사르 가문으로 명시된 아우구스투스 유언장 상 직계혈육들에 대한 절대복종을 외친다. 이런 모습은 과거 로마군을 사병화 시킨 마리우스, 술라, 카이사르 장례식에서도 전혀 없던 장면으로, 완전 무장해 도열한 프라이토리아니의 일사불란한 모습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그들은 장례식이 국장으로 마무리된 직후에도, 도열해 시가지를 행진하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이를 지켜본 원로원은 그 분위기에 압도돼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리고 이렇게 티베리우스는 로마 건국 역사상 최초로, 부자세습 방식을 통해, 평화롭게 아우구스투스 생전의 모든 직위, 특권을 오롯이 물려받는다.

그 다음날,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출석해, 임페라토르 승인 절차를 밞는다. 그런데 이날, 티베리우스는 공화정의 재건을 위해 자신을 퇴위시켜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원로원은 시큰둥했고, 그들은 두려움에 떨며, 그 요구가 부담스럽다고 밝힌다. 이는 그들 나름엔, 매우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그들은 티베리우스가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독대를 나눈 뒤, 반대파를 제거하기 위한 각본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벌인 명령과 조치가 제대로 먹힌 결과였다.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 승인을 퇴위 형식으로 요구한다고 해도, 여러 정황상 씨알도 먹히지 않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티베리우스는 그 특권을 내려 놓지 않았고, 티베리우스의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 생전처럼 우선 발언권을 포기하지 않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정식 소개됐으니 이후 원로원의 태도는 의심, 체념,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이들은 티베리우스가 "승인 절차를 거부하겠다"고 사양하는 자세를 취한 것을, 조상들의 관습에 따라 겸양 떠는 것으로 해석했다. 더군다나 원로원은 자신들 앞에서 프라이토리아니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다 본 상황이라서 되레 더 공손히 행동하며 눈치까지 봤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계산대로 죽은 아우구스투스의 손바닥 위에서 여전히 놀아나고 있었다. 그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자 세번째 카이사르로 올라선 티베리우스에게 겁에 질려, 티베리우스와 그 일가에게 완전히 납작 엎드린 상태였다.

이에 원로원은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유일무이한 아들'이 된 그에게 다시 한 번 신성불가침권을 약속하면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존함을 월(月)의 새 이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까지 올린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크게 당황해 한다. 어쩌면 진심으로 거부했던 건데, 아우구스투스가 서거 전 프라이토리아니를 제대로 활용해 이런 분위기로 낙장불입을 만들었으니 되돌릴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임페라토르, 프린켑스 등극 요청을 수락한다. 허나 이 수락 동의에도 그는 원로원의 월 이름 변경엔 완고히 거부의사를 밝히며 불쾌감을 표시했다. 이때 그는 "1년은 열두 달인데, 장래에 열세 번째 후계자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라고 평소의 무뚝뚝한 말투로 반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즉위 등극식은 처음부터 스텝이 꼬이게 됐는데, 어쨌든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으면서도 여러가지가 의심받는 형태로 썩 내키지 않는 황제 자리에 오른 모양새가 됐다.

티베리우스의 제위 등극이 처음부터 상당한 약점을 안고 시작해야 했다는 점은, 본인 입장에서 더 끔찍한 사실이었다. 이는 후대의 로마황제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불행했다. 먼저 타키투스가 자신의 책인 <연대기>에서 밝혔듯이 티베리우스의 치세는 아우구스투스의 손자 아그리파 포스투무스[53] 처형사건으로 불길하게 시작됐다. 포스투무스는 포악하고 잔인했으며 고집 센 사람이었고, 힘이 황소도 때려 잡을 정도로 장사였다. 여기에 황실 사람 중 누구도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문제가 많아, 외조부 아우구스투스에게 적대적인 논쟁을 펼치고, 스스로를 신으로 자처하면서 과대망상 증세까지 보이더니 잔인하기까지 했다. 서기 7년 아우구스투스의 명에 따라 황량한 섬으로 유배된 상태였다. 그는 율리아의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리비아의 친아들일 뿐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인 티베리우스에게 큰 위협이 될 인물이었다. 여기에 더해 포스투무스와 대 율리아를 앞세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를 제거하려고 한 실제 반란 시도도 터졌다.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와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가 그들이었는데, 이들은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 속에서 율리아와 포스투무스를 구출해, 이들을 앞세워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부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 시도는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 도처에 깔아 놓은 정보망 덕에 무위에 그쳤다.

루키우스 아우다시우스, 아시니우스 에피카두스 반역에 이어, 외손녀 소 율리아와 그녀의 남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모종의 사건으로 숙청된 직후,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를 살려두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우다시우스와 에피카두스가 자신의 딸과 외손자를 군대로 데리고 가려고 한 것까지 알게 되자, 그는 포스투무스를 영구 추방 형태로 살려두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지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후계자인 '아들' 티베리우스가 가진 불안정된 권력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죽기 전 티베리우스에게 포스투무스를 처형하라고 조언하면서, 뒤로는 본인 직속 프라이토리아니 장교들에게 처형 집행을 준비시키고 명했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로마로 소환되기 전, 일리리쿰으로 향했던 터라, 이 사실을 전혀 몰랐고, 급히 로마로 소환된 직후 조언이라는 명목으로 양부 아우구스투스에게 포스투무스 문제를 들었을 때에도, 이미 처형 집행 준비가 끝남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전 측근들과 티베리우스에게 딸 율리아에 대한 감정을 드러냈고, 자신이 이미 포스투무스를 포기했음을 여러 번에 걸쳐 밝혔다. 이때 그는 율리아를 용서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스크리보니아와 결혼해 외동딸을 낳은 것을 후회까지 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한때 아내였던 율리아를 동정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장례식이 진행될 무렵, 세간에 후일 티베리우스는 조언에 따라 백인대장 등을 보내 포스투무스를 죽였다고 알려진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이 진행됐다.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추방된 섬에서 엄격한 보안 하에 구금되어 있다가, 연락 한 번 없던 할아버지 아우구스투스가 보낸 처형단에게 맨손으로 격렬하게 저항하다가 교살됐다. 그는 덩치가 크고,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이때 아우구스투스가 명을 내려 보낸 프라이토리아니 장교와 병사들은 겨우 이 명령을 완수할 수 있었다. 이후, 포스투무스 사형과 죽음 사실이 발표되고, 유가족 중 포스투무스의 어머니 대 율리아에게 전달됐다. 이때 아버지와 전남편에게 아들 교살 소식을 들은 대 율리아는 홧병으로 건강이 악화됐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와 전남편을 저주하다가 죽었다.

14년 8월에 벌어진 이 결정과 일련의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냉소적이고 거만한 위선자' 이미지 탓에 원로원 내 귀족들에게 대놓고 미움을 받던 티베리우스의 이미지[54]를 "친족 살인을 정당화시키는 프린켑스"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이때 티베리우스는 억울함을 호소하면서, 자신이 친족을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 파렴치한이 아니라고 수없이 강조했다. 그렇지만 원로원 안팎에서는 당시 아우구스투스가 서거 전에 함께 여행했던, 원로원 의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최측근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가 저택에서 급사한 일과 엮여, 티베리우스가 포스투무스를 죽이면서 입막음을 하고자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죽였을 것이라는 괴담까지 퍼졌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후대의 타키투스가 <연대기>에 아우구스투스가 파울루스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함께 여행을 떠났을 때 포스투무스를 몰래 만났고, 기원후 14년 여름에 파비우스가 죽은 것은 직간접적으로 아우구스투스가 신뢰를 저버린 것에 분노한 결과라고 전하면서, 티베리우스가 현대까지도 이 사건의 흑막 내지 진범으로 알려지게 된다.

이 사건에 기름을 부은 것은 로마시대의 역사가들이나 일부 현대 연구자들의 추정이다. 이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율리우스 가문원을 죽이라고 조언한 것을 믿지 않는다.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이라는 태생적인 지위가 티베리우스와 리비아에게 큰 위험이 된 건 분명했기에 아마 티베리우스 또는 리비아 아니면 둘 다의 의도에 의해서 살해되었을 걸로 추정하고 있다. 티베리우스의 이 판단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원수정의 설계자가 죽은 후 첫 즉위라는 불안정성에서 이루어진 불가피한 조치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거의 같은 시기에 이미 프라이토리아니 소속 백인대장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55]에게 하달된 뒤, 크리스푸스의 지휘 아래 집행된 터라, 로마시대 사가와 일부 현대 연구자들의 의문에 관해 아직도 논란이 많다. 다만, 티베리우스 입장이 아닌 제3자 입장에서 보면 티베리우스는 진짜 이 처형을 몰랐다. 따라서 고대 사가 중 일부와 일부 학자들은 아우구스투스의 아내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를 종종 의심 중이다. 그렇지만 리비아가 주도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 항상 그녀가 무화과에 독을 발라 남편을 죽였다는 주장이 세트로 언급되고 있고, 리비아가 아우구스투스 생전과 사후 모두 아우구스투스 직속 프라이토리아니 경호대를 통제하고 명하지 못한 점은 분명해,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숙청과 처형으로 최대 수혜자가 된 리비아, 티베리우스 모자가 이 사건을 명했다고 단정짓기에는 무리가 많다는 평이다.

다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 집행 후 보고가 있던 아우구스투스 장례식 직후의 일로 돌아가면, 새로 황제에 오른 티베리우스는 임무를 완수하고 귀환한 아우구스투스 휘하 프라이토리아니에게 자신의 의붓아들이자 조카 , 한때 의형제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을 듣는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보고받을 때, 누구보다 격분했다. 티베리우스는 이때 양부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장을 아들 소 드루수스의 낭독 아래 원로원 앞에서 들으면서 자존심이 크게 상해 있었고, 충격이 컸었기 때문에, 이 보고를 듣자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아득해진 나머지, 그들에게 욕을 하거나 따지지도 못했다. 더군다나 그는 이 보고를 크리스푸스에게 들을 때, 크리스푸스로부터 이 말을 들으면서, 자신이 공동황제였을 때 양부가 비밀리에 이미 명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56]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보고를 들은 직후, 티베리우스는 이 문제를 곧바로 원로원에 제기해, 아우구스투스 측근들에게 따지기로 했다. 원로원은 급히 긴급 소집되었다.

긴급 소집 직후, 티베리우스는 모두의 앞에서 자신이 들은 것을 솔직히 공개했다. 하지만 원로원 반응은 혼동 속에서도 대체로 시큰둥하거나, 침묵 속에서 비평을 자제한 모습으로 흐르다가 티베리우스를 의심하는 것 같은 분위기로 진행됐다.

아우구스투스가 명을 내렸던 부분이었고, 아우구스투스 사후 누군가 만약 포스투무스를 제거하지 않으면, 법적으로 포스투무스는 상속권이 박탈당하지 않았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어, 아우구스투스의 조치는 곧 티베리우스를 징검다리 삼아 게르마니쿠스에게 제위를 가게 할 승계 구도에 치명타로 갈 염려가 컸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명예를 중요시했고, 이를 덮어둘 경우 자신에게 닥칠 정치적 위험이 크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원로원에 밝히면서, 자신이 한때 아들이었던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를 죽이지 않았다고 억울함을 이렇게 호소했다.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습니다. 전 로마로 소환되었을 때, 여러분도 알고 계시듯이 일리리쿰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이후 티베리우스는 이 명령이 명확히 아우구스투스의 지시로 내려진 것을 증명한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원로원 대다수는 이 성명에 이은 증거물 공개에도 티베리우스가 뻔뻔하게 거짓말을 한다고 의심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되기 전에 살해됐고, 그가 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 결정을 내렸다는 것은 티베리우스가 이 사건의 수혜자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티베리우스는 제위 등극 시작부터 이런 골치 아픈 사건을 경험했는데, 아그리파 포스투무스 처형은 이후 세야누스, 네로가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 아우구스투스 핏줄을 자주 살해하게 되는 선례를 만들어내었기에 결과적으로 왕조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생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그를 아예 '대타'라고 명시를 해버리면서 인준식부터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다. 유언장은 친아들 소 드루수스 낭독으로 원로원 앞에서 공개됐는데, 티베리우스는 일찍 요절한 친동생 대 드루수스의 대체자, 일찍 요절한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 부재 속에서 어린 게르마니쿠스의 징검다리로 대놓고 선포됐다. 더 큰 굴욕은 이어 공개된 재산배분 및 비문 공개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제1상속자로 공표했고, 그 다음은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 그 다음은 게르마니쿠스로 하면서, 티베리우스 친아들 소 드루수스를 일찌감치 제위 계승 순번에서 밀린 클라우디우스와 묶어 그 다음이라고 콕 찍었다. 그와 동시에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의 어머니로 자신의 조카이며 죽은 대 드루수스의 아내인 소 안토니아의 몫을 게르마니쿠스에게 가도록 설계해, 티베리우스의 선택권을 줄였다. 비문 문구 역시 상속자 명단에 클라우디우스를 정식 제왕교육을 받은 소 드루수스와 함께 표기해 티베리우스가 대타라고 보여준 것은 덤이었다. 이렇게 되니, 티베리우스는 당연히 사적으로는 가족원 중 친아들 다음으로 친밀하고 함께 식사하면서 의지한 죽은 동생의 가족들인 처제 안토니아, 두 조카 게르마니쿠스, 클라우디우스를 견제할 수 밖에 없게 됐다. 하여 티베리우스가 인준 확정 후 가장 먼저 은밀히 취한 것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장으로 명시한 상속자들인 죽은 동생 일가 식구들의 황족 특권을 사실상 제한시킨 일이었고, 이는 후일 세야누스 손에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인 친동생의 가족들이 대부분 비명횡사한 비극으로 이어진다.

티베리우스는 이렇게 즉위식도 거행하기 전에 장례식 후 면전에서 정통성에 큰 타격을 받았다. 따라서 호사가들 사이에서는 “아우구스투스가 양자 티베리우스를 친양자로 법적 입양을 하면서도 이를 불쾌해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임종하면서 "저토록 굼뜬 주둥이에 내맡겨지다니, 아 불쌍한 로마 시민들이여"라고 한탄했다.”는 내용의 악의적인 비방성 뜬소문이 돌면서, 일반 민중들에게도 폐쇄적이고 경직된 사람으로 인식되게 됐다. 여론 악화 속에서 대타로 확정된 티베리우스는 당연히 정통성이 약할 수밖에 없고, 이는 황권의 약화를 야기해 그가 정국 운영에서 자신의 뜻을 마음껏 펴기 힘들게 만들었다.[57] 실제로 이 약점은 재위 시작부터 티베리우스를 딜레마에 빠트려 모순적인 행동을 하도록 강요했는데, 티베리우스 본인은 공화정을 존중하고 싶었지만 이렇게 정통성이 약하다보니 자신에게 반발하는 자들에게 인정을 베풀 여력 따위는 없었다. 하여 그는 오랜 기간 동안 황제라는 칭호를 받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등극 이후 주저하지 않고 가장 먼저 황제의 권력을 행사하여 근위병들을 불러 자신을 호위케 하는 모순된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티베리우스는 본디 공화정 시대를 대표하는 귀족인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다. 때문에 그는 적어도 초기에는 나름 공화정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애썼고, 아우구스투스 때처럼 원로원을 무조건 황제의 의견에 찬성만하는 거수기로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래서 원로원의 진정한 동의를 통해 원로원으로부터 주권을 부여받고 싶었는데, 그런 티베리우스가 자신이 원하지도 않은 약점 때문에 근위병들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다보니 원로원은 원로원대로 등극하자마자 황제의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티베리우스가 좋게 보일 리가 없었고, 결국 삐딱하게 "아우구스투스가 지명했으니 어쩔 수 없이 지명한다.", "마음에 안 들지만 어차피 너는 황제고 우리는 거수기잖아? 너 마음대로 해."라는 식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해버린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더 이상 원로원의 사정을 보아줄 수가 없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저런 원로원의 태도 때문에 그들은 정말로 손만 드는 거수기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것이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의 끊임없는 충돌의 시작이었다.

거기다 이런 내적인 갈등뿐 아니라, 외적으로도 사방에서 위험이 대두되어 티베리우스를 더욱 더 조심히 행동하게 만들었다. 위에서 티베리우스가 정식 후계자가 되는 과정에서 방해가 될까 처형된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의 노예였던 클레멘스는 주인의 복수를 위해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기도 했고, 귀족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비밀리에 반란을 계획했다가 조기에 알려져 로마 사회를 충격에 빠뜨렸다.

반란을 기획한 루키우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는 티베리우스의 외삼촌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조카였는데, 이 사람의 이란성 쌍둥이 형제인 외삼촌의 양자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도 티베리우스 제거와 아우구스투스 일가 멸문 음모에 개입돼 티베리우스의 충격은 배가됐다.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부조리를 좋아하는 뚱보 청년"으로 악명을 떨쳤는데, 그럼에도 티베리우스 외삼촌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의 호의와 드루수스 리보의 누나로 티베리우스의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 법적으로 인척 관계로 맺어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비호 아래 부귀영화를 누렸다. 그래서 이런 리보의 행동에 티베리우스는 큰 배신감을 느꼈고, 원로원은 두 사람과 그를 따른 인사들을 원로원 법정에 세웠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리보에 대한 비판은 터무니없고 무의미하다고 했지만, 두 사람의 반란 음모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모든 비밀을 알고 있는 리보의 노예를 심문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시 로마법상 노예를 고문하거나 심문해 얻은 증거물은 불법이라서, 리보의 명령을 강압적으로 따라야 하는 노예를 설득해 증거를 얻기란 불가능 했다. 더욱이 기소된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건장한 뚱보 청년임에도 몸이 아프고 병이 들어 재판에서 제대로 변호를 할 수 없다며 발뺌해 티베리우스의 분노를 키웠다. 하여 티베리우스는 리보 형제를 기소한 직후, 리보의 노예를 황제 휘하 재무부 관리에게 소유권을 넘긴 뒤, 리보의 전 노예가 된 이에게서 자발적으로 증거물을 받은 뒤, 그를 증인으로 삼아 다시 재판을 진행시켰다.

티베리우스를 안 좋게 본 원로원 반대파 인사들은 이런 그의 행동을 냉혹하고 잔혹하다고 비난했다. 이런 상황에서 리보의 외삼촌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퀴리누스, 고모 스크리보니아(아우구스투스의 전 부인)까지 가세해 리보 편을 들고, 황제의 태도를 비난한다. 이렇게 여론전이 터지고, 증거가 명확함에도 피해자인 황제가 나쁜 사람으로 매도되자 티베리우스는 상황이 곤혹스럽게 됐다. 이런 이유로 티베리우스는 스스로를 "나는 늑대의 두 귀를 붙잡고 있다."고 말하며, 리보 재판에 대한 억울함과 답답한 마음을 드러냈다.

재판이 마무리되던 서기 16년, 압박감과 유죄판결에 대한 공포에 휩싸인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는 9월 13일 고모와 외삼촌에게 그 심정을 말하고 스스로 복부를 두 번 찌른 뒤 죽었다. 이 날은 원로원이 재판 끝에 여러 증거가 명확해 유죄판결을 내리고 리보 드루수스의 재산을 모두 압류해 이를 국고에 귀속하겠다고 발표한 날이었다. 그래서 발표 직후 함께 기소된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형제와 그 추종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특별 공휴일로 지정됐다. 당연한 말인데, 반역법에 따라 원로원은 죽은 마르쿠스 스크리보니우스 리보 드루수스의 장례식에서 그 조각상과 영예를 기록말살형 차원에서 제거하라고 명령한다. 이어 황제의 이름으로 티베리우스의 외가와 아우구스투스 일가에서 자랑스럽게 사용한 이름 '드루수스'는 리보 드루수스의 유가족들은 남녀 모두에게서 영구히 금지당한다. 그렇지만 이 조치는 모두 티베리우스가 악감정을 가지고 모두 명령한 듯 알려져, 정적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갓 즉위한 직후 암살미수로 신변을 위협받은 티베리우스는 권력을 위해 양부의 외손자에 이어, 전처 율리아에 대한 악연으로 그녀의 외가와 그녀의 친모 스크리보니아의 조카에게 죄를 덮어 씌운 파렴치한으로 뜬소문까지 퍼져 이미지가 최악이 됐다.

이런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장군으로서 공적을 수없이 쌓은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주둔 군대들로부터 파업을 선포받기에 이른다. 티베리우스: 진짜 다들 나한테 왜 이래...

일리리쿰과 게르마니아 땅의 군대는 봉급 인상, 복무연한 단축, 아우구스투스의 유증금 증액 등을 요구했고, 자신들이 티베리우스를 투표로 뽑지 않았기에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도나우 전선에서 일어난 파업은 친아들 소(小) 드루수스를 파견해 수습하도록 했고, 성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라인 강에서의 파업은 심각했다. 이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내정된 게르마니쿠스가 파견되었지만, 군대는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게르마니쿠스황제로 옹립해 자신들의 요구사항을 관철하려 들었다. 이에 게르마니쿠스는 군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식으로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해 일단 군인들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래도 불만을 품은 군사들을 한밤중에 야습해 살해하고, 반란의 주모자들을 체포해 처형했다. 이어 군대를 이끌고 라인 강 너머로 쳐들어가 피로 피를 씻은 다음에야 반란은 잦아들었다. 군대의 불만은 이로써 적당히 수습되었지만, 군사들이 게르마니쿠스를 황제로 옹립하려 했던 것과 게르마니쿠스가 황제의 명령서를 위조했던 일은 뒤에 불화의 불씨가 된다.[58]

2.2. 재위 초중반기

2.2.1. 내치와 카이사르 가문 내 경쟁

이렇게 군사적인 위협이 안정되자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뜻을 이어받아 귀족들과 부유층 시민들에게 지나친 사치와 향락을 하지 말 것을 촉구했으며[59] 검소한 절약 생활로 국고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아울러 본인 역시 겸손하게 행동하고 일개 시민보다 더 공손하게 굴었다. 특히 그는 자신의 생일과 겹치는 평민들의 축제일에 자신의 이름으로 신전에 봉헌하거나 동상과 흉상을 허락없이 세우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새로운 공공건물을 만들지도 않았고, 검투사 경기 같은 것은 꿈도 꿀 수 없었기에 시민들은 지루해했다.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티베리우스의 검소한 정책 기조 덕분에 로마는 수백년을 이어갈 기반을 탄탄하게 다지게 되는데, 바로 이 점이 그가 시민들에게 인기가 떨어지게된 주요 원인이었다는 소리다.

티베리우스가 인기가 떨어진 원인 중 하나로 그가 집권 이후 민회와 평민회를 없애버린 것도 들 수 있다. 당시에 매년 선거로 인하여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었던 탓에 선거를 폐지하고 호민관, 안찰관, 재무관, 법무관, 감찰관, 집정관, 총독, 행정관, 군단장까지 이른바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하는 선출직 공무원을 선출할 권한을 원로원에 돌려주었는데 이로써 지금의 미국 대통령이 상원의 동의를 받아 장관과 차관을 임명하는 것처럼 황제가 원하는 인물을 원로원이 승인하는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 탓에 원로원은 시민들과 단절되어버렸고 시민들은 정치참여 기회를 잃어버려서 군인이 아니면 정치적인 영향을 주기 어려워졌다. 그로 인하여 티베리우스는 인기가 더 떨어져 버린다.

여기에 더해, 즉위 직후부터 그를 곤란하게 하는 또 다른 요청서와 탄원문까지 도착하면서, 시험대에 오르게 된다. 바로 선대 아우구스투스가 본격적으로 도입해 활용한 '황제우상숭배'였다. 이 일은 매우 이성적이고, 우상숭배 같은 조치에 관심조차 없던 티베리우스를 상당히 곤란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리스인들과 아시아 속주 내 주민들이 앞다투어 "제발 티베리우스 카이사르 당신을 신으로 우상숭배하도록 해달라"고 청원하고 11개 도시끼리 서로 외교전까지 벌이면서, "우리 도시가 로마 여신과 율리우스 가문, 그리고 티베리우스 당신을 신으로 우상숭배할 정통성을 갖췄다"며 싸웠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잠잠하던 히스파니아 주민들까지 "우리도 티베리우스 당신을 신으로 생각한다. 당신 조부(카이사르)와 부친(아우구스투스)와 함께 당신의 조각상까지 숭배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이때 그는 진짜 곤란해하면서 자신을 그렇지 않아도 미워한 원로원과 로마시민들의 눈치까지 봐야만 했다. 왜냐하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살아있는 자신을 신으로 모시라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그렇지 않아도 미워 죽겠는데 이제 스스로 신으로 해달라고 한다"며 가루 빻이듯 씹힐 것이 뻔히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선황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9년 명령을 통해 그리스인과 아시아 속주민들을 시작으로 제국 각지에 황제 우상숭배를 통치술로 활용해 효과를 보고 있는 터라 마냥 "그렇게 하지 마라"고 할 수도 없었다. 여러 연구에서 밝혀졌듯,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우상 숭배를 도입하긴 했지만, 이는 어디까지 허락 형태로 특권을 부여해 실질적으로는 황제의 클리엔테스로 인정받아 보호받는 혜택이 있었다. 이런 이유로 아우구스투스는 황제 우상 숭배를 시행하면서 이 점을 명확히 했고, 이 조치를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서는 대놓고 하지 않았다. 실제 기원전 29년의 조치 이후 공화정 시대때 문제가 된 마구잡이식 세금강탈, 인신매매 등으로 고통받던 그리스, 소아시아 일대 주민들은, 이러한 조치가 지속되길 바랬고 그들은 공화정 시대부터 원로원을 우상숭배하기도 했다. 그래서 제국 각지의 여러 도시들은 티베리우스가 곤란스러워 해도, 속주 총독과 원로원으로부터 보호막 역할을 한 '황제를 숭배해 받는 특권'을 위해 치열하게 신경전까지 벌였다. 이런 복잡한 사정으로 티베리우스는 마지못해 그리스와 아시아 속주 등 소아시아 일대 주민들에게는 "당신들 사정도 있고, 아우구스투스 때처럼 로마 여신과 함께 봉헌한다는 개념으로 나를 존경하는 차원에서 허락한다. 단, 나만 봉헌하지 말고, 내 모후(리비아 드루실라)와 원로원도 함께 봉헌해라"고 현명한 결정을 내렸다. 반면, 히스파니아의 경우에는 이런 선례도 없는 이유 등으로, "이미 당신들은 내 조상(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들을 로마 여신과 함께 신으로 모시며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 살아 있는 나까지 함께 숭배하면 아주 곤란해진다. 제발 그런 제안을 해서 내 아버지 아우구스투스의 명예와 업적까지 폄훼하지 말아달라"고 정중히 거절했다.

이렇게 티베리우스는 황제에 등극한 후에도 딱히 자신의 잘못도 아니고 아우구스투스 때문에 원로원에도 욕먹고, 군대에도 욕먹고, 시민들한테도 욕먹고, 속주민들에게는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들으면 "미쳤다"는 소리가 나올 요구까지 받으며 고통받았다. 따라서 같은 편이라고는 하나 없이 사방팔방으로 까이게 된다. 여기에다 카이사르 가문 내의 대립은 티베리우스가 골치를 썩는 또 다른 고민을 안겨줬다.

카이사르 집안 대립은 아우구스투스 생전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 요절 이전부터, 그 두 혈육을 지지하는 쪽과 아우구스타 리비아 드루실라의 두 아들을 지지한 티베리우스 파벌과 드루수스 파벌 간의 대립 형태로 꾸준히 있어왔다. 이 상황은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손자, 대 드루수스는 모두 요절하고, 고령의 아우구스투스가 집안 최연장자 티베리우스의 손을 들어주면서 일단락되는 듯 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프린키파투스 체제 아래에서도 카이사르 가문 내 파벌 다툼은 지속됐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가 뒤를 이었어도 아우구스투스는 자신의 혈육(게르마니쿠스)를 실질적 후계자로 확정지은 터라,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파벌 간의 경쟁 형태로 대를 잇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옛 가이우스 카이사르 지지세력까지 대 드루수스 파벌과 소 드루수스 파벌에 각각 붙어 버린 터라 이에 따른 암투가 벌어졌다. 다행이라면, 대 드루수스 생전부터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형제의 우애가 대단했던 것처럼 게르마니쿠스, 소 드루수스도 우애가 대단해 각 파벌의 대표격 황족들이 카라칼라게타의 예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일텐데 그럼에도 여러 변수가 많은 터라 티베리우스 ~ 칼리굴라 시대에 먹구름을 끼게 했다.[60]

이런 체제상 불안 속에서 티베리우스 인기는 즉위 전부터 항상 바닥이었는데, 티베리우스는 전처 아그리피나 빕사니아와의 사이에서 얻은 외아들 소 드루수스가 있었지만 친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또 로마 정치구도와 상황상 대 드루수스소 안토니아의 장남으로 아우구스투스에게 우선권을 얻은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카이사르 가문 내 지지가 확고한 현실로 인해 티베리우스 입장에선 골치 아픈 연속이었다. 그 이유에 관해, 타키투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두 소년 중 게르마니쿠스가 혈통상 지지세력이 견고할 수밖에 없었으며,[61] 티베리우스에 대한 반발심까지 겹쳐 그 인기가 허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더 큰 고민은 소 드루수스의 외조부가 하필이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구성한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전체에게 "우리 가문의 오점"으로 평가받으며 흑역사 내지 원수 취급을 받던 티투스 폼포니우스 아티쿠스[62]였다는 것에 있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가 각각 얻은 자녀들 역시 그 수에 있어, 게르마니쿠스 부부가 많았고 정통성도 있던 터라 이 부분에서도 대 드루수스-게르마니쿠스 파벌이 유리했다고 하며, 리비아 드루실라와 티베리우스 사이가 나쁜 이유 등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내 파벌 다툼에서 티베리우스와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아우구스투스 밑에서 정치, 행정과 관련된 제왕교육을 받았고, 판노니아 반란 건에서도 볼 수 있듯 기대를 충족시킬만한 능력을 아버지로부터 이어받은 인재였다. 특히 아버지처럼 인기가 없는 사람도 아니었고, 원로원과 민중들에게 인기도 상당히 있었던 후계자였다. 하지만 여기서도 복잡한 것이, 소 드루수스는 카이사르 가문 내 파벌 다툼이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차기황제가 바로 될 수 없는 계승서열 3위 위치의 후계자였다. 즉,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손자'이며 황제의 아들이고 또 능력이 뛰어남에도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결코 황제는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는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가 남긴 아들 게르마니쿠스로 내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 이미 자신의 피가 흐르고 있던, 대 드루수스 파벌의 손을 들어준 상태였다. 그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은 뒤 자신의 혈육인 게르마니쿠스를 타베리우스의 양자로 삼게 해 법적으로 자신의 손자로 만들었다. 이때 그는 2살 차이인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 모두에게 나란히 제왕교육을 받게 하면서, 3년마다 함께 집정관을 받는 특권 등을 수여했다. 이 조치는 티베리우스 이전의 공식 후계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밟았던 코스였는데,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대타였던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역할은 소 드루수스가 담당하게 됐다. 문제는 아우구스투스의 이런 계획대로라면 소 드루수스는 어디까지나 아버지가 죽어도 넘버2로서 황제를 보좌해주는 황제의 동생이 최고인 상황이었다. 따라서 게르마니쿠스와 나란히 영예와 경험을 얻고 있어도, 유사시 대체자로 즉위할 수는 있는 위치였기에 티베리우스 입장에서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이런 불리한 상황을 알고 있음에도 양자로 입적되기 전 계부 아우구스투스와 친모 리비아의 결정에 동의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이렇게 황실 내 서열도 복잡한 와중에 티베리우스에게는 훗날 만악의 근원이 될 원흉, 세야누스(Lucius Aelius Sejanus ? ~ 31. 10. 18.)가 접근해 신임을 얻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생전 동방으로 따라갔던 기사계급 출신 친위대 장교 출신으로, 티베리우스 재위 직전부터 티베리우스와 소 드루수스쪽 인사이기도 했다.

2.2.2. 게르마니쿠스의 요절과 대 드루수스파의 반발

한편, 아우구스투스 시절 잠깐 중단되었던 게르마니아 정복은 게르마니쿠스의 주도하에 계속 이어졌다. 게르마니쿠스는 승승장구해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궤멸당했던 바루스의 군단기 3개 중 2개를 되찾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덕분에 티베리우스와는 달리 게르마니쿠스는 시민들로부터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이 원정이 진행되는 와중에 티베리우스는 돌연 게르마니쿠스를 동방에 파견한다는 명목하에 수도로 소환해 버린다. 이에 게르마니쿠스는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했지만 티베리우스는 라인 강 너머로 진격하는 것을 금지했고, 게르마니아 정복은 조용히 일단락되었다. 이에 대해 티베리우스가 너무 커져가는 게르마니쿠스를 견제하기 위해 그의 게르마니아에서의 전공이 확립되기 전에 소환해버렸다는 의견도 있고, 그런 것치곤 게르마니쿠스를 대 파르티아 전선에 보내면서 외교관 직책에 군통수권까지 모두 쥐어줬다는 점에서 정말 필요해서 내린 조치라는 의견도 있다. 또 설사 게르마니아를 완전히 정복한다고 해도, 당시 긴축재정에 시달리던 로마로서는 정복한 게르마니아에 군대까지 주둔시키며 그 영토를 유지하기가 힘들었던 이유도 있다.[63] 하지만 중요한건 당시 사람들은 모두 전자의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유야 어찌되었든 게르마니쿠스는 소아시아로 옮겨간 이후로도 훌륭한 처신과 뛰어난 능력으로 적에게까지 인정받으면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있었는데, 티베리우스가 조카를 보좌시키기 위해 시리아 총독으로 파견시킨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게르마니쿠스와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면서 오해를 일으켰다. 그러다가 게르마니쿠스가 황제와 이집트 장관 허락없이 가족들과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여행을 온 일이 벌어져 논란도 벌어졌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잘못을 지적하고 혼을 냈지만 더 이상 언급을 금지하고 넘어갔다.[64] 그런데 호시탐탐 게르마니쿠스의 실수만을 노리던 피소가 티베리우스의 경고와 달리 직속상관인 게르마니쿠스에게 이 문제를 딴지걸더니, 급기야 게르마니쿠스와 함께 있던 안티오키아를 부인과 함께 무단으로 떠나는 항명까지 일으킨다.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되는데, 건강하던 게르마니쿠스가 피소가 떠난 그날 밤 두통과 어지러움을 호소하고 쓰러지더니, 이곳에서 갑작스러운 열병으로 돌연 사망하고야 만다. 이 죽음에 대해서는 말라리아 때문이라는 것이 현대의 정설이지만, 문제는 위의 게르마니아에서 소환한 일도 있고, 티베리우스가 보낸 피소와의 갈등도 상당히 유명해져서 당대의 모든 이들이 티베리우스가 피소를 사주해 게르마니쿠스를 죽인 것이 아니냐면서 의심했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게르마니쿠스 부부와 피소 부부가 쌍으로 원수 지간이 되어서 게르마니쿠스의 아내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아그리피나는 물론이고, 게르마니쿠스 본인마저 자신이 피소 부부에게 암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복수해달라고 유언을 남겼을 정도.[65]

인기가 하늘을 치솟던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뒤, 법적으로 아버지였던 티베리우스가 국장으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아서 논란에 기름을 부었다. 게르마니쿠스가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친어머니였던 소 안토니아와 친할머니 리비아 역시 충격으로 쓰러지게 돼 티베리우스는 이들을 병간호하느라 참석하지 못했고, 이를 사실 그대로 알렸지만 민중들이나 원로원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터라 문제가 더 커지게 됐다.[66] 이미 미운털이 박힌 탓에 민중들은 크게 흥분해 쓰레기를 신들의 제단에 쳐박거나 혹은 아예 쳐부수어 그를 죽인 운명에 대한 분노를 애꿎게 표출하는 등 난동을 일으킬 정도라, 의심의 대상이 된 티베리우스를 아주 곤란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티베리우스도 의심가는 행동을 하기는 했는데, 장례식도 불참한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게르마니쿠스 추모 열기가 일었던 중 독살 혐의로 기소된 피소 재판에서 매일같이 참석해 아버지 자격으로 피소 쪽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사건을 꼼꼼히 검토한 뒤, 끝내 암살 혐의자들에게 관대하게 판결을 내렸다. 판결 직전 피소는 주위의 비난과 압박감에 못이겨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는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항명을 여러 차례 일으키고, 직속 상관이자 최고결정권자인 자신에게 동방지역 전권을 위임받은 황태자의 조치들을 취소시킨 피소에 대해서는 명백히 유죄로 판결내렸다. 반면 독살 사건에 대해서는 모든 정황을 종합해 함께 기소된 피소의 아들은 관대하게 처분했고, 주술을 부리고 동방 마술사들에게 저주를 요청했을거라고 의심받던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는 무혐의 처리로 하면서 재판을 마무리했다. 이 조치는 게르마니쿠스가 정말로 병으로 죽은 것이라면 지극히 합리적인 처결이지만, 민중들은 그런 판단을 못 할 정도로 게르마니쿠스를 사랑하고 있었고, 이것이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죽였다는 소문과 결부되면서 의혹이 끊임없이 커져갔다.[67]

2.2.3. 소 드루수스의 의문사와 세야누스의 등장

하지만 어찌되었든 아우구스투스가 티베리우스의 후임으로 내정했던 게르마니쿠스는 죽었고, 이에 후계구도는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기서 유력한 후보로 지목된 것이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인 네로 카이사르,[68] 드루수스 카이사르,[69] 가이우스[70]들과,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장자이자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두번째 연장자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소 드루수스)였다.

하지만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이들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 것인지는 자명한 사실이었다. 물론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이 있으니 티베리우스가 대놓고 자신의 친아들인 소 드루수스에게 황위를 물려주기는 힘들었지만, 유언장에 명시됐던 게르마니쿠스가 죽은 마당이니 일단 아들인 소 드루수스에게 황위를 물려준 다음, 그 다음 후계자를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로 한다면 충분히 명분도 챙길 수 있는 일이니 말이다. 이는 좋든싫든 아우구스투스가 생전부터 내린 결정들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온 티베리우스의 경험에서 충분히 도출할 수 있는 계획이었다.

실제로 게르마니쿠스 사후,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공식적인 보호자이자 후원자가 되면서 원로원에게도 다음 후계구도가 어떻게 될 지 충분히 예상케했다.[71]

이때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아그리피나는 티베리우스를 믿지 못해 결국에는 소 드루수스의 어린 쌍둥이 아들 형제가 자신의 아들들을 밀어내고 차차기 황제가 될거라고 의심해 이를 걱정했는데, 티베리우스는 그녀의 의심과 달리 네로 카이사르를 소 드루수스의 딸이자 자신의 손녀인 율리아와 약혼시켰으며, 20년 이들을 결혼시켜 입지를 강화시켜줬다. 또한 소 드루수스와 함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 중 가장 먼저 성년식을 치른 네로 카이사르에게 16살 이상 로마 남성들이 입는 토가를 입혀 원로원으로 데리고 갔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소 드루수스와 함께 그를 원로원에 소개했고, 5년 일찍 공직을 시작할 특권을 부여했다. 또한 치안 판사 직위를 내려주고, 네로 카이사르를 위해 로마에 이를 홍보하는 돈을 하사했다. 즉 티베리우스는 차기 황제는 자신의 아들인 소 드루수스에게 물려주고, 소 드루수스는 다시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의 후견인이 되어 그를 차차기 황제로 만든다는, 어떻게 보면 예전 아우구스투스가 세웠던 것과 거의 흡사한 후계구도를 설계한 것이다.[72]

이후 이 계획대로 소 드루수스는 22년 아버지와 처음으로 공동 집정관에 취임했는데 신구갈등과 황제와의 갈등으로 복잡한 원로원 관계를 본인이 직접 나서 완만히 통제했고, 공사 수주 중 발생하는 비용문제 해결과 비리 문제를 잡아내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었다. 또 로마를 떠나 네아폴리스(나폴리) 근처로 떠난 티베리우스 대신 내정을 담당하는 중에도 행정에서 능력을 증명해 평가가 좋았다. 따라서 고령에 접어들어가던 티베리우스는 능력을 증명해준 아들에게 호민관 특권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이를 원로원에 알렸는데 원로원 역시 소 드루수스의 호민관 특권 부여에 대해 동의해 무난히 통과됐다.[73] 그렇게 티베리우스가 세운 후계구도는 제법 잘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런데 서기 23년, 건강하던 티베리우스의 아들 소 드루수스가 갑자기 급사한다.

소 드루수스의 죽음에 대해 당시에는 병사로 알려졌지만, 진상은 드루수스의 아내인 리빌라가 근위대장인 세야누스와 불륜을 저지르고 결탁해 드루수스를 독살한 것이었다.

세야누스는 서기 22년 폼페이우스 극장 화재 당시, 불을 잘 끈 공로를 인정받아 티베리우스에게 큰 신임을 얻고 세야누스를 기린 동상 제막식까지 선사받았다. 여기에 더해 그는 1만 2000명의 프라이토리아니 부대원을 모두 통솔할 수 있는 지휘권과 함께, 기사계급임에도 황제에게 법무관에 추천돼 원로원 의원에 오를 특권까지 선사받았다. 이렇게 되니, 원로원은 반발했고 서기 14년 직전부터 세야누스를 부관으로 데리고 다니며 그 본심을 꿰뚫어 본 소 드루수스는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서기 20년, 세야누스가 의도적으로 클라우디우스에게 접근. 4살밖에 되지 않은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를 사위삼고자 압박하는 것을 보고 그 야심을 눈치챈 상태였다. 따라서 드루수스는 세야누스 일당의 노골적인 고속 승진, 편가르기가 문제가 되자, 원로원의 입장, 기사계급들의 불만 등을 경청한다. 그리고 이를 아버지에게 직접 전달하면서, 논리적으로 세야누스와 그 파벌이 속주 총독, 지방 장관, 고위 관료 자리를 독점하게 되면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효자로 이름난 드루수스가 이전까지 단 한번도 하지 않은 반항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논리적, 이성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아들을 크게 혼냈다.

따라서 서기 23년, 세야누스와 소 드루수스 사이의 갈등은 심화됐다. 이런 상황에서 원로원 회의가 열리는데, 세야누스가 제대로 국정 문제도 파악못하고, 이로 논쟁이 펼쳐지자 두 사람은 충돌한다. 세야누스는 이 논쟁에서 드루수스가 논리적으로 토론 주제를 설명하고 세야누스를 지적하자, 그에게 막말을 퍼부었고, 이는 인격자로 이름난 드루수스를 격분시킨다. 그 결과, 드루수스는 참다 못해 자리를 박차고 나간 뒤, 세야누스를 주먹 한번으로 때려 눕히고 땅바닥에 쳐박았다. 이렇게 되자, 귀가 후 큰 충격을 받은 세야누스는 부하들에게 "황제가 고령이라서 곧 서거하면, 황제 아들인 아우구스투스 손자놈이 황제가 될 것이다."며 드루수스를 증오하고 그 복수심을 표출했다.

이에 세야누스는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의도적으로 리빌라에게 접근해 불륜의 관계가 되었고, 리빌라를 온갖 말과 약속으로 구워 삶아 재혼을 약속하고 소 드루수스를 제거하기로 한 뒤 리빌라의 주치의 등과 공모해 드루수스에게 아주 약간씩 독을 먹여 암살해 병사로 위장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훗날 세야누스가 체포되어 처형당할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고, 이 당시 세야누스는 자신이 죽인 드루수스를 잃어 상심한 티베리우스의 곁에서 그 빈자리를 채우며 차곡차곡 신임을 얻어간다.[74]

하지만 그것으로 티베리우스의 마음이 다 채워질 수 없었고, 로마를 비롯한 만사에 염증을 느낀 티베리우스는 결국 서기 26년 근위대장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 섬에 은둔, 이는 치세 끝까지 이어진다.

2.3. 세야누스의 전횡과 몰락

비록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에게 로마를 맡기고 카프리 섬에 은둔했다고 하지만, 실상은 세야누스에게는 원로원과 황실에 대한 대처만 맡긴 것이고 실제 행정은 전부 티베리우스가 처리했다. 그리고 이 멀리 떨어진 섬에서도 모든 행정을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던 것은 전임 황제인 아우구스투스가 우편제도와 우편배송시스템을 만들어놓은 덕분이었는데, 황제가 어디에 있던 간에 적어도 빠르면 몇시간 뒤에서 늦어도 20일 정도면 총독과 행정관들이 제국 각지의 소식을 적어 보낸 보고서가 도착했다. 이를 통해서 황제는 상황에 맞는 조치를 취할 수 있었고 훗날 사람들이 그의 정치적 능력을 먼치킨이라 평가하는 이유다. 사실 정치적 능력이라고 하기 보다는 행정적 능력에 가깝지만. 하지만 그와는 별도로 황제가 장기간 부재하는 상황이 이어지자, 긴축재정 때문에 지루해진 시민들은 그가 어린 소년, 소녀들과 성관계 등을 즐긴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씹으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했다.[75]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돌아오지 않았고, 심지어는 어머니 리비아 드루실라가 사망했을 때에도 코빼기 하나 비추지 않았다.[76]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카프리 섬)에 방대한 시설을 갖춰 두어 사실상 그곳은 황궁이나 다름없었으며, 이탈리아와 연락선으로 연결되어 있어 통신에도 불편함이 없었다. 또 그가 카프레아이로 떠날 당시, 그의 몇 안 되는 친구들도 함께 거처를 옮겨 함께 살았기에 모든 사람과의 관계가 단절되지 않았다.[77] 다만 바다가 험해지는 겨울에는 티베리우스는 로마와 제국 각 속주들의 연락망을 위해 카프레아이와 가까운 본토로 돌아왔다.

이렇게 되자 로마는 완전히 세야누스의 세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후계구도에 관한 일만은 여전히 티베리우스가 단호하게 전권을 쥐고 있었다. 잠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티베리우스는 아들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기 전후로 아들에게 보호를 받던 게르마니쿠스의 세 아들 중 성년이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새로운 공식후견인이 됐다. 이때 티베리우스는 네로 카이사르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도 원로원에 데리고 가 자신의 공식적인 후계자로 데뷔시켰다.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 네로 카이사르와 마찬가지로 5년 먼저 공직을 경험할 특권 등을 똑같이 하사받았으며, 형과 함께 각종 특권들을 선사받았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조치들은 지극히 당연한 결정이었고,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들은 후계자로 적합한 인물들이어서 원로원에게 찬사를 받았다. 그러다 친아들 소 드루수스가 급사한 직후인 23년 게르마니쿠스의 두 아들을 후계자로 못박은 후, 24년엔 아예 친동생 대 드루수스의 손자이자 자신의 법적손자가 된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위해 이들의 건강을 소원하고 비는 제사를 지내면서 이들 형제를 홍보하기에 이른다. 티베리우스는 비록 친아들을 잃었지만, 그 아들의 사위인 네로 카이사르에게 황위를 물려줄 것이라는 걸 확고히 보여준 것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런 티베리우스의 행보는 황제가 될 야심을 품고 있던 세야누스와 그의 추종자들에게 전혀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그래서 25년 세야누스는 일단 황제가 될 혈통과 명분을 얻기 위해 죽은 소 드루수스의 미망이자 아우구스투스 가문의 피를 잇고 있는 리빌라와 재혼할 뜻을 밝혔지만, 티베리우스는 이 요청을 단호히 거부하며 리빌라와의 재혼은 씨알도 안 먹힐, 분수에 맞지 않을 일이라고 통보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세야누스는 방법을 바꿔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남성 황족들의 씨를 완전히 말리는 방식으로 자신이 황제에 오르겠다고 결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에게 준 권한을 이용해 고발과 날조, 협박 등을 통해 걸림돌이 되는 정적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이때 그에게 가장 유력한 방해물로 타켓이 된 것은 당연히 게르마니쿠스가 남긴 두 아들들과 게르마니쿠스의 미망인 대 아그리피나였다. 따라서 그는 이들을 제거하기로 하고 실행에 옮긴다. 이때 티베리우스가 골칫덩이였던 대 아그리피나 제거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던 것이 거의 확실한데, 이는 대다수 연구자들의 말에 따르면 사실이 명확하다고 한다. 하지만 훗날 세야누스 잔당 소탕에서 드러나듯,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암묵적 동의에도 이런 계획을 세울 때부터 그 선을 넘었고[78] 이는 종국적으로 티베리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전체가 단명하는 비극으로 연결된다.

세야누스는 아그리피나 모자를 몰락시키는 과정에서 아주 교활한 방법을 사용하는데, 바로 네로 카이사르와 제위 경쟁을 하던 동생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부추겨[79] 세 모자간을 이간질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도와주는 척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지지하는 파벌을 만들어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갈라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티베리우스와 대 아그리피나 사이의 갈등을 이용해 아그리피나가 반역을 꾸미고 있다고 티베리우스를 속여 자신이 날조한 증거들을 믿게 했다. 따라서 카프레아이에 머물던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가 내민 증거에 따라 서한을 통해 대 아그리피나와 그녀의 측근들을 반역죄로 고발했다. 이때 세야누스는 소 드루수스의 사위이자 게르마니쿠스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를 반역에 참여한 공범으로 위조해 함께 반역죄로 고발했는데, 원로원에서는 황족인 이들 모자에 대한 처벌을 티베리우스가 확실히 정할 때까지 결정을 거부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다시 한 번 아그리피나 모자에 대한 문제를 제기했고,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의 운명은 그대로 결정됐다.

이렇게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생각보다 쉽게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왜냐하면 아그리피나는 아직까지도 남편 게르마니쿠스를 독살한 피소 부부의 배후가 티베리우스라 의심해 반티베리우스 파벌까지 만들어 사사건건 대립한데다 그 정도가 심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시어머니 소 안토니아와 살아생전 소 드루수스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장남 네로 카이사르에게 임페라토르 직위를 내리지 않을 거라고 매일 같이 주장하던 상황이었다. 또 그녀는 티베리우스에게 이를 갈고 있던 것도 모자라, 황제의 아들 드루수스가 악습에 빠졌다고 주장하거나, 소 안토니아가 티베리우스를 옹호하는 것에 말대꾸를 하면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 티베리우스의 인내심을 한계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여기에 더해 아그리피나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고, 남편이 요절한 이후부터는 과거와 달리 우울하고 쉽게 화를 잘 내던 터라 그녀를 미워하는 이들도 많아졌다. 거기다 세야누스의 정부가 된 리빌라 역시 평소 아그리피나를 미워한 까닭에 집안팎에서 합세해 쪼아대니, 아그리피나로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손주사위인[80] 네로 카이사르는 비록 어머니의 후원을 받고 있었어도 티베리우스가 직접 차기 황제로 결정내리고 후원하던 청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국가의 적으로 규정된 것은 의외의 일이긴 하다. 아마도 이 과정에서 세야누스가 또 다른 황위계승자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그의 파벌을 움직여 네로 카이사르를 찍어내는데 동원하지 않았나 추측된다.

어찌되었든 세야누스의 음모대로 아그리피나 모자는 포파이우스 사비누스와 엮여 '위험하고 거대한 음모'라는 이름 아래 고발됐다. 이 사건 당시 원로원은 의문을 표해 재검토를 요청했는데, 그럼에도 이 음모는 반역죄로 재기소됐다. 따라서 아그리피나와 네로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의 손에 국가의 적으로 규정돼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서로 다른 섬으로 추방됐다. 이때 어머니와 함께 억울하게 반역죄로 엮여 폰티아로 추방된 네로 카이사르는 얼마 후 유배지에서 풀려날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는지 31년 10월 세야누스가 몰락할 무렵, 일찌감치 스스로 곡기를 끊어서 자살했다.[81] 그런데 수에토니우스는 자신의 책을 통해서 유배된 폰티아로 사형집행인이 가자 네로 카이사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렇게 네로 카이사르를 끝장낸 이후, 세야누스는 이용가치가 다한 게르마니쿠스의 둘째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말도 안 되는 사건을 만들고 위조해 제거한다. 물론 이 사건을 벌이기 전, 세야누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대 드루수스 일가의 보호막 역할을 할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거나 그들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다. 이와 함께 그는 더 큰 신망을 얻고, 성공하기 위해 티베리우스가 하고 싶지만 하지 못한 일을 공작을 벌여 현실로 만들어 준다. 디오에 따르면,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얻고자, 또 티베리우스가 자신의 전처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와 결혼한 원로원 의원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갈루스를 좋게 생각하지 않음을 알고 갈루스 숙청 작전을 세워 갈루스와 그 친구 시리아쿠스를 모두 제거했다고 한다. 갈루스는 평소 세야누스의 야심을 알고, 그를 위험인물로 규정했는데, 세야누스는 이를 교묘하게 바꿔, 빕사니아 아그리피나의 남편 갈루스가 마치 티베리우스와 세야누스의 우정을 경멸하고 질투하고 있다는 식으로 보고했다. 카프리 섬의 별궁 안에 있던 티베리우스는 애당초 갈루스가 자신의 전처와 재혼한 것을 좋게 생각하지 않아서 이를 철석같이 믿는다. 따라서 세야누스의 요구에 따라 갈루스 숙청에 동의함에도, 겉으로는 그렇지 않는 듯 서신을 보냈다.
티베리우스의 승인을 사실상 받아낸 세야누스는 갈루스를 로마에 있던 티베리우스의 집에서 열린 연회에 초대해, 우정의 잔을 나눠 마시며 서약한 다음, 그를 체포해 원로원 안에서 유죄를 내리고 집정관을 보내 결박 후 사형에 처하게 했다. 이때 갈루스는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의 반역죄 개정으로 불경죄가 명확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 받았다. 하지만 이때 티베리우스는 본인은 전혀 이 사건을 몰랐다는 듯 서한을 보내면서, "로마 시민은 정당하게 자기변호의 기회를 얻고, 판결은 그 내막을 알아야 한다"고 의견을 밝히고 갈루스를 보호해주겠다면서 그를 카프리 섬으로 데리고 오라고 지시했다. 이에 원로원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갈루스를 황제 옆으로 보내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갈루스는 아주 끔찍한 일을 경험하면서 카프리 섬으로 끌려가 상고심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다. 디오는 이 사건에 관해 티베리우스가 악감정을 가지고 연적 갈루스에게 혹독한 조치를 취하게 했다고 평했다. 갈루스는 노예, 변호사 등도 대동하지 못하고 포승줄에 묶어 두 눈은 가려진 채, 로마에서 나폴리를 거쳐 카프리까지 음식도, 물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는 고통에 시달렸다. 더 끔찍한 것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인지 세야누스의 지시인지 몰라도, 갈루스가 죽으려고 해도 살 수 있을 정도의 음식, 물이 제공되어 숨이 붙은 채 티베리우스 앞으로 끌려갔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갈루스가 죽은 뒤, 로마에 있던 시리아쿠스도 세야누스의 공작과 티베리우스의 명령으로 "너는 반역자 갈루스와 친구이며, 불경죄를 방치했다"는 이유로 똑같이 유죄를 선고받고 죽임을 당했다.

이렇게 갈루스, 시리아쿠스가 죽자 세야누스는 보호막이 완전히 사라진,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제거할 준비에 들어간다.
파일:드루수스 카이사르.jpg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드루수스 카이사르)

당시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형과 함께 처음으로 원로원에 공식 후계자로 소개된 이후 복점관 등을 지내면서 평가가 괜찮았기에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자신에게 나름 우호적이더라도 반드시 제거할 대상이었다. 이때 세야누스는 겉으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차기 황제로 밀어주며 그를 가장 후원하는 측근인 척하면서, 티베리우스의 아들인 드루수스를 독살했을 때와 똑같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 아이밀리아 레피다[82]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불륜관계를 맺었다. 당시 세야누스 입장에서는 이들 부부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은 소 드루수스보다 훨씬 쉬웠는데, 우선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아내인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부주의한 여성인데다 남편을 너무 쉽게 배신했다. 따라서 그녀는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자주 충돌을 일으켰고, 끝내 자신의 남편이 30년 억울하게 체포될 당시 음모임을 알고 있음에도 뻔뻔하게 남편을 공격했다.[83]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후계자로 능력이 출중하고, 본인에게 순종적인 종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인격적, 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스캔들을 벌일 리 없다며 판결을 유보케 했다. 이에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를 완전히 속이기 위해, 유능하나 잔혹한 수사관 카시우스 세베루스[84]를 포섭하고, 유배간 네로 카이사르의 아내로 죽은 소 드루수스의 딸이자 자신의 애인 리빌라의 딸인 율리아를 속여 그녀와 동맹을 맺는다. 남편과 사이가 데면데면해도, 어머니 리빌라가 나쁜 말을 하고 그녀 역시 세야누스가 카이사르 가문에게 헌신한다고 생각해,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남은 희망마저 잃고 만다. 이렇게 되니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나빠지게 된다. 이 결과,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법정에서 억울함을 호소했음에도, 반역죄로 고발돼 체포 직후 위조된 증거물이 확실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유죄를 선고받는다. 이후 그는 강제로 황궁 지하실에 유폐됐다.

세야누스는 이렇게 합법적 후계자 중 본인을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파멸시켰다. 이후,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 이외의 율리우스 일가[85]를 모조리 제거한 뒤, 황제 자리를 얻기 위해 리빌라, 율리아에게 자신의 충성심을 호소해 모두 본인 편으로 포섭한다. 이때 그는 아직 미성년자인 게르마니쿠스의 막내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와 대 드루수스의 아내(드루수스 카이사르, 칼리굴라의 할머니)이자 가이우스의 유일한 보호자로 움직인다면 가공할 만한 위험인물이 될 소 안토니아마저 제거하려고 했다.[86] 다만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의 경우는 뇌성마비라는 설이 유력하기에 더 이상 자신과 후계를 다툴 경쟁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반대로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이라는 정통성을 노리고 자신의 장녀를 클라우디우스의 아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결혼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했다.[87] 결국 세야누스는 처음 원했던대로 리빌라와 재혼하지는 못했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혈족의 씨를 말려버리며 자신이 황제가 될 계획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는 이렇게 야심을 키워 나가면서도 겉으로는 티베리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티베리우스와 공동으로 집정관으로 임명되고, 결국에는 원로원 의원직까지 손에 넣으며 권력의 절정을 맞이하였다. 이때 세야누스는 많은 반대파 원로원 의원들을 처형하며 권력을 휘두르고, 원로원 내 친세야누스 세력을 만들며 티베리우스마저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

이 때가 서기 30년으로, 당시 티베리우스 외의 아우구스투스 후손들을 거의 제거한 세야누스의 권력과 위세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그는 로마인들 눈에 티베리우스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자 최고 권력을 곧 쥘 사람으로 인식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체포된 이후 상황들을 본 이후부터 이미 세야누스의 이런 속셈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본능적인 촉은 티베리우스의 동생 대 드루수스의 아내 소 안토니아가 "세야누스는 위험한 인물이다. 우리 가족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편지가 그에게 전달된 순간부터 확신이 됐다. 이때 소 안토니아는 로마에서 세야누스에게 감시당하는 와중에 마지막 남은 손자 가이우스(칼리굴라)를 지키기 위해 자신의 그리스인 노예 팔라스[88]를 은밀히 카프리 섬으로 보내 도움[89]을 요청한 상태였다. 제수씨 안토니아의 편지 내용이 워낙 급박했고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고발과 유폐 과정에도 의문이 많았기에 티베리우스는 서둘러 가이우스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90]

아울러 이때부터 세야누스 제거 작전을 시작했는데, 프라이토리아니 전체를 직접 움직일 수 있던 세야누스는 티베리우스가 임페라토르라고 해도 쉽게 제거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인물이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일단 세야누스를 자신의 동료 집정관으로 임명했는데, 이는 그를 찍어내기 위한 준비공작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관습으로 집정관 가운데 한명은 로마에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데,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 틀어박혀 있으므로 세야누스는 발이 로마에 묶여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세야누스는 그때까지 티베리우스에게 전달되는 서신, 면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로마에 발이 묶이자 이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인해 새로운 정보를 손에 넣은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의 음모를 확신하고 그를 찍어낼 결심을 하게 된다.

거기다 세야누스의 부하의 밀고까지 더해져 그의 반역은 완벽히 드러나지만, 티베리우스는 능청스럽게도 겉으로는 여전히 그를 신뢰하는 척을 하면서 프로콘술 명령권까지 쥐어주며 호민관 특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갖게 하였다.[91]

그리고 마치 자신이 이제 세야누스에게 후계를 양도하려는 것처럼 돌연 집정관을 사임하는데, 집정관은 공동 사임이므로 세야누스도 자동으로 사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세야누스가 이를 의심하기도 전에 나이비우스 수토리우스 마크로를 세야누스 대신 근위대장에 임명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의 행동은 아주 신중했고 내전 당시의 젊은 아우구스투스와 비슷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마크로에게 도움을 구한다고 말하며 그가 세야누스를 제거하기 위한 도구용이 아닌 것을 간접적으로 약속했으며, "세야누스를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말했다.

티베리우스의 서신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마크로는 티베리우스가 만든 각본 아래 행동했다. 먼저 그는 세야누스에게 근위대장에서 해임되었음을 알리며 동시에 내일 원로원에서 세야누스에게 호민관 특권이 주어진다고 알려주었다. 마지막 남은 권한인 호민관 특권을 준다는 것은 곧 세야누스를 차기 황제로 지명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는 매우 기뻐하면서 자신이 티베리우스의 덫에 걸린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세야누스는 당당하게 원로원에 출석하였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서한을 전달받은 집정관 레굴루스는 낭독을 시작했다. 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처음에는 시시한 국정 문제를 줄줄히 늘어놓으며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 사이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는 거액의 하사금을 미끼로 근위대를 장악해두고, 소방대장 라코는 부하들을 팔라티누스 주변에 배치하여 봉쇄, 근위대의 무력 발동에 대응하였다.[92]

이 즈음에서 레굴루스가 낭독하는 서한도 세야누스 파의 의원들을 비난하는 것을 시작으로, 서서히 세야누스 본인을 비난하는 내용으로 변해갔다. 이에 낭독이 시작될 때 세야누스 주변에서 아부와 아첨을 하던 의원들은 슬금슬금 세야누스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티베리우스의 서한은 세야누스에게 티베리우스 자신이 고발자가 되어 국가반역죄를 선고하고, 그 증거를 나열하였으며, 원로원에게 세야누스를 즉시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끝맺어졌다.

낭독 직후 원로원은 환호했으며, 황제가 될 기대감에 부풀어 있던 세야누스는 갑작스러운 상황변화에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자신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다고 한다. 세야누스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구속되었으며 바로 그날 밤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렇듯 참으로 티베리우스다운 대처로 세야누스의 반역을 큰 장애없이 처리하기는 했지만, 세야누스의 권세가 워낙 강하고 근위대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이끌고 있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 역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세야누스가 근위대로 반란을 일으킬 것을 경계하여, 긴급시에는 유폐되었던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풀어주고 군대를 지휘하여 세야누스에 대항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카프리에서 세야누스가 속주의 군단으로 도망칠 것도 생각하고 선박도 준비해 해상봉쇄작전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세야누스가 믿던 근위대는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가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많은 보너스를 주었기 때문에 세야누스를 돕지 않아 일이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이 사건의 여파는 상당했다.

2.4. 말년의 공포정치

2.4.1. 세야누스 일파 숙청과 복수

원로원 의원 여러분! 만약 내가 지금 이 순간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쓰면 좋은지, 바꾸어 말하면 이 경우 절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면 모든 신과 여신들께서 날마다 나 자신이 타락해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보다 더 비참하게 나를 파멸시켜 주시길![93]

타키투스, <연대기> 중 티베리우스의 서한 마지막 문구 중 일부.[94]

세야누스 제거 후인 티베리우스의 재위 말년은 타키투스가 공포정치, 공포시대라고 자신의 저서에 표현할 만큼, 숙청과 고발의 연속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자기 잘난 맛에 산다", "외골수에 냉담하고 잔정없어 보인다"는 소리에도 본래부터 가정적인 면이 강하고 가족애와 가문의 명예를 대단히 중시했다.[95]

따라서 그의 재위 말 몇년은 '죽은 혈육들을 위한 대대적인 복수'국가 기강 잡기의 연속으로 흘러갔다고 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남아있는 친혈육들을 보호하면서 원로원 내 반대파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더욱 강화하는데 주력했고, 이런 모습은 그가 숨을 거둔 순간까지 계속됐다. 오늘날 이탈리아에서 말하는, 벤데타에 자신의 명예와 권력, 목숨을 모두 집중한 것이다. 그 결과, 말년의 티베리우스는 과거의 티베리우스와 달리 자비와 관용 따윈 신경쓰지 않았고, 자신과 혈육들에 대한 도전은 곧 그 자의 파멸이었다. 따라서 이를 지켜본 이들은 황제가 황실의 반대파를 가차없이 제거하는 공포정치를 더욱 강화한다고 비난하면서도 극도로 몸을 사렸다.

이 과정에서 세야누스와 공모했던 세야누스파 의원들은 친족들을 모두 잃은 티베리우스에게 반역죄로 모조리 처형되거나 추방됐으며 법적 절차에 따라 모든 재산들을 압류당했다. 기록들에 의하면 말년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세야누스 일파 숙청은 그 규모가 대단했고 그 과정들이 매우 잔인했다고 하는데, 혈육을 비극 속에 잃은 티베리우스는 꾸준히 세야누스 친구들과 지지자들을 색출하고 도망간 사람들을 추적해 모조리 죽였다.

세야누스와 그 핵심측근들이 처형된 직후 세야누스의 시체는 시민들에게 모욕을 받고 티베르 강에 버려졌다. 동시에 세야누스의 동상은 모두 파괴되고 세야누스의 이름이 적힌 동전 등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남아 있던 세야누스의 가족들도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모두 반역죄인이 되어 그 씨를 남기지 않고 모두 처형되는데, 세야누스의 오른팔로 활동한 세야누스의 장남과 삼촌 블라이수스는 즉시 처형됐다. 그리고 세야누스의 남은 자녀들도 모조리 연좌 대상으로 처벌받았는데, 어린 차남과 장녀는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로마에서 처녀를 교수형에 처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처녀였던 장녀는 처형 직전에 망나니들이 강간한 후에 처형했다고 타키투스가 기록한다.

하지만 원로원과 프라이토리아니, 소방대, 경비대, 예술계 등에 세야누스 친구와 그 추종자들은 광범위하게 있어 상황은 심각했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야누스 몰락 직후부터 수많은 고발장이 원로원에 도착했고 매일 같이 세야누스파 처벌이 논의됐다고 한다. 이때 티베리우스도 고소장을 보냈고 자신이 로마에 있는 것처럼 서한을 계속 보내며 세야누스 잔당 사냥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게 엮인 이들도 있었다.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최측근이었던 전직 법무관 세르바이우스, 테르무스였다. 두 사람은 세야누스에게 말 그대로 이용당했다가 이를 알고 대립한 인사들었는데, 그럼에도 어떤 이유 때문인지 티베리우스의 서한에 이름이 그대로 적혀 공모자로 공격받고 반역죄로 엮여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은 이들에게 동정의 눈길을 주면서 이들을 구명하려고 했는데, 억울하게 죽은 친족들을 위한 복수와 세야누스에 대한 분노로 가득찬 티베리우스에겐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세야누스파 숙청 기간동안 고발된 이들은 매일 같이 나왔고, 고발과정에서도 계속해서 여러 사람들의 이름이 나오고 추가폭로와 새로운 고발이 현직 법무관과 티베리우스의 이름으로 진행됐다. 이때 세르바이우스나 테르무스 같이 억울하게 엮인 이들 외의 대다수의 세야누스파 사람들은 자신의 범죄혐의가 사실임에도 원로원에서 “난 결백하다”, “세야누스와 난 친구가 아니다”라고 거짓말을 하거나, 물귀신 작전으로 다른 인사를 거론하기도 했다. 또 사형을 면하기 위해 추가폭로를 하겠다며 형량을 줄이는 딜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야누스파에 대한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고소는 멈추지 않았고, 용서는 없었다고 한다. 그 결과, 아예 포기하고 발악을 하면서 저주를 퍼붓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중 십중팔구는 자기변호로 점철된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야누스와 우정을 나눴다고 고발당한 인사 중 예외도 단 한 명 있었다고 한다. 바로 원로원 내에서 기사계급에 속한 마르쿠스 테렌티우스였다. 이 사람은 같은 신분의 세야누스와 우정을 잠시 나누다가[96] 세야누스의 권세가 올라갈 무렵부터 손절한 케이스였는데, 결국 반대파들에게 억울하게 고발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원로원에서 최후변론의 기회를 가지게 됐는데, 마르쿠스 테렌티우스는 거짓말 대신 대담하게 “그렇소. 난 한때 세야누스와 우정을 나눴소이다”라고 시원하게 자신의 죄를 인정하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 이후 그는 담담하면서 호소에 찬 목소리로 ‘어차피 부인해도 난 죽고, 인정해도 죽습니다. 나는 고발장 내용처럼 세야누스라는 나쁜 놈의 동료인것도 맞고 이 사람이랑 더 친해지고 싶어서 한때나마 그랬소이다’라고 말한 뒤, 티베리우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황실도 나쁜놈인 세야누스를 그들의 가족 구성원처럼 대우하고 사위 취급했다며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자꾸 믿고 그에게 집정관 자리도 주고 하니 자신은 다른 동료들처럼 “카이사르[97]께서 그를 부재 중인 당신의 국정 담당 대리자로 여기시니까, 세야누스가 하는 일은 모두 카이사르께서 지시한 내용이니까, 나는 원로원 안에서 카이사르를 존경하는 뜻에서 ‘세야누스에게도 뭐라도 해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어서 그는 “신이 된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신 카이사르 당신에게 저를 비롯한 원로원 여러분 모두는 카이사르를 위한 보호 의무와 복종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세야누스가 당신(티베리우스)에게 우리의 생사여탈권과 권력을 (세야누스가) 부여받은 것을 반대도 못하고, 나쁜 마음을 먹은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와 우정을 나눠야 하는 처지가 됐습니다”고 자신과 원로원 내 다른 동료들의 심정을 말했다.

또 최후 진술 마지막 연설 부분에서는 “카이사르께서는 본인이 한 잘못은 왜 용서하시고 처지가 비슷한 저는 반대로 처벌받아야 합니까? 또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전 그 관계를 끊은 나와 원로원 동료들까지 당신과 달리 유죄를 받아야 합니까?”라고 변호한 뒤 “원로원 여러분도 알듯이 나는 16년동안 세야누스와 우정을 나누려고 시도했지만 거기까지였소이다. 그런데 고발한 인간들과 원로원 여러분 중 대부분은 대놓고 세야누스의 해방노예와 집안 문지기들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고 우정을 가졌소이다. 그런데 누가 올바른 상황에서 자신을 변호하고 그러겠소이까. 나도 여러분들처럼 그때 국가 전복 음모와 임페라토르[98] 암살계획은 처벌받아야 하는 나쁜 행동이고 반역이라고 당연히 생각했고 우리는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또 저는 모두 알듯이 이미 세야누스와는 완전히 갈라선 상태였습니다. 그건 카이사르 당신께서도 잘 아시고, 원로원 여러분들도 다들 알지 않습니까.”라고 최후진술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테렌티우스의 배짱에 감격했고, 형량을 사형이나 유형이 나오지 않게 결론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 역시 이 진술을 서한으로 보고받은 뒤, 이 사람의 용기에 감동했는지 몰라도 테렌티우스가 세야누스와 친구 이상이고 반역죄 공범이라는 고소장을 파기해주고, 고발한 사람들을 역으로 기소해 죄를 묻고 사형, 유배형 등에 처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세야누스의 뒤처리를 하며 티베리우스가 경악할 일이 일어나는데, 그 시작은 31년 10월 세야누스 몰락 직전 네로 카이사르가 억울함을 호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티베리우스는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어한 터라 이는 노황제를 침통하게 했다. 당연한 말인데, 네로 카이사르 죽음 소식으로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가 친동생의 핏줄을 후원해주겠다고 입양한 다음 죽인 냉혹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하고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며칠 뒤, 더 큰 사건이 터진다. 세야누스의 전처 아피카타가 자살을 강요당해 죽으면서 유서로 티베리우스에게 편지를 써 드루수스 독살의 진상을 알린 것이다. 이는 친족을 잃은 분노와 자신이 세야누스에게 농락당해 갖게 된 죄책감으로 똘똘 뭉친 티베리우스를 복수귀로 바꾼다.

카프레아이 별궁에 있던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칼리굴라)를 사실상 후계자로 못 박은 직후, 그와 자신의 이름으로 친족들이 연루된 사건을 재조사하라고 요청하고 고소한다. 이후 소 드루수스의 술잔 관리인, 주치의 등을 엄격히 조사해달라고 원로원에 요청한다. 이렇게 되니 소 드루수스의 노예, 해방노예, 술잔 관리인, 주치의 등은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이들이 기소되는 과정에서 여러 증거가 발견되는 와중에 여기에는 며느리 리빌라가 연루됨이 드러난다. 리빌라의 노예들은 자기 주인이 기소되자, 자기 주인이 드루수스에게 독을 먹였다고 모두 폭로했고, 이는 카프레이아 별궁에 머물던 티베리우스에게 보고되자 더 큰 복수로 이어진다.

이렇게 되자, 티베리우스는 서기 31년 아직 살아있던 며느리 리빌라에게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리빌라 노예들의 폭로 이후부터는 상술한 것처럼 세야누스의 어린 아들, 딸도 모두 학살되고, 도망자는 과거 마리우스와 술라의 시대 당시 술라의 살육 그대로 추격대까지 편성돼 목에 현상금을 걸고 모조리 잡아 죽였다.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기소는 "유죄=연좌제"로 결론나고, 조사 과정에서 그 이름이 언급만 되면 그 사람과 그 일족은 노예까지 전부 고문받고 몰살됐다.

카시우스 디오 등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며느리 리빌라를 그냥 자살시키지 않고, 제수씨이자 리빌라의 어머니 안토니아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때 딸 때문에 사위, 큰며느리, 첫째 손자, 둘째 손자 등 혈육들을 모조리 잃은 안토니아는 살려달라고 사정하는 딸을 방에 유폐시킨 뒤 아무 것도 주지 못하게 해서 굶겨 죽였다고 한다.[99] 이어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요청이 없음에도, 리빌라가 생전 누린 황족 특권을 모조리 박탈해 기록말살형에 준하는 조치를 내리고 그 시신을 대역죄인 그대로 처분케 한다.[100]

그리고 이 무렵, 아그리피나도 큰 아들 네로 카이사르의 뒤를 따라 사망하는데, 사인은 역시 아사.[101] 이러다보니 그가 '폭군'이라는 인식은 더욱 강해졌고, 멀쩡한 사고방식을 가진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를 냉혹하고 인간 이하의 말종으로 생각해 증오하게 된다. 그의 말년에는 모두가 저 더러운 늙은이 왜 이렇게 안 죽어라고 한마음으로 생각했을 지경이었다.[102]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세야누스파 사냥은 이후에도 계속됐는데, 이것은 세야누스의 농간으로 거의 모든 혈육들을 잃은 늙은 황제의 집요한 복수로 잔혹하게 흘러갔다. 그 예로 연좌제가 보편화되지 않은 로마에서 옛 세야누스파 인사들의 어머니, 누이들까지 “죄인이 죽었는데 운다”는 이유로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고, 세야누스 파의 일가 여성들은 남성들만 대상이 되는 국가 전복혐의 대신 그들이 흘린 눈물과 비통함을 이유로 티베리우스에게 비난받고 처형됐다. 그래서 세야누스파 중 한명인 푸피우스 게미누스의 늙은 모친 비티아는 죽은 아들을 위해 눈물을 이유로 국가 전복 혐의와 비슷한 방식으로 탄핵돼 바로 처형됐고, 노예들과 해방노예 가족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같은 해인 33년, 게르마니쿠스의 둘째 아들인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황궁 지하실에서 석방되지 못한 채 결국 생을 마감했다. 간신히 세야누스의 마수를 피하나 싶었던 그는 반역죄 혐의와 난잡한 동성애 범죄라는 억울한 누명을 벗었지만, 황실의 지하에 갇힌 채로 침대를 뜯어먹을 지경까지 굶주리다 아사했다. 이때 이야기에 따르면 티베리우스가 세야누스를 몰락시킬 무렵, 세야누스를 너무 믿은 것을 후회하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석방시켜려고 했고,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다행히 석방된 뒤 카프레아이로 향한다"는 등의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드루수스 카이사르는 황궁 지하실에 여전히 감금돼 있었고, 이런 혼란한 상황 중에 음식은 제공되지 않았다.

이때 티베리우스의 화를 더 돋군 것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석방 결정이 하달되기 9일 전부터, 소홀해진 죄수 관리로 인해 음식이 아주 형편없이 제공돼 불과 9일 사이에 후계자가 비참하게 아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때 원로원은 티베리우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깨닫고 겁에 질린 나머지, 티베리우스 요청으로 공개된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일기장 낭독을 방해하고자 시끄럽게 굴기도 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 황제와 드루수스의 동생 가이우스 카이사르, 카이사르 가문을 따른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원로원의 행동에 더 분노했다.

은둔 중인 티베리우스 황제는, 손자의 일기장을 전체 공개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자신의 손자이며 동생의 친혈육, 아우구스투스의 증손자가 음식 한 입이라도 얻어 먹기 위해 비굴하게 백인대장과 노예에게 간청한 것을 원로원에게 직접 내보이게 했다. 아티우스와 디디무스가 엄격하게 조사한 다음 올린 보고서였기 때문에 사태는 심각해졌다. 이렇게 되니 티베리우스는 이 내용을 모두 읽은 뒤, 보낸 서한을 통해 죽은 혈육을 위해 자신이 지금부터 차근차근 여기에 관련된 모든 사람과 그 일가를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일갈했다. 노쇠한 티베리우스는 온몸의 힘을 모아, 그 증오심을 서한장 글귀 하나하나에 표현했다. 이에 티베리우스는 복수를 언급한 위의 서한장을 보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죽더라도 억울하게 죽은 혈육을 위해 복수를 하겠다고 선전포고한다.
백인대장 아티우스와 해방 노예 디디무스가 각기 카이사르에게 제출한 보고서 속에서 방을 떠나려 할 때마다 드루수스를 때리거나 위협한 노예의 이름이 하나하나 열거됐다. 그뿐만 아니라 그 백인대장은 냉혹함으로 가득 찬 말을 늘어놓으며 죽어가며 드루수스가 남긴 몇 마디를 잘했다는 듯이 덧붙이고 있었다. (중략) 확실히 원로원 의원들은 차마 듣고 있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시끄럽게 굴며 낭독을 방해하고 있었다. 허나 실은 뭐가 말할 수 없는 공포와 전율이 그들의 마음속을 관통하고 있었다.
타키투스, <연대기>

티베리우스는 카프레아이 별궁에서 후계자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그가 너무 오래 지하실에 투옥된 탓에 생사를 확신하지 못했다고 한다. 따라서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불과 9일만에 일개 노예 따위에게 조롱받고 황궁 지하실에서 굶어 죽은 채 시신이 되어 나왔을 때, 모든 로마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티베리우스는 이미 벤데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기 때문에, 그 분노를 제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록들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후계자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죽기 9일 전 이미 그의 생존을 바란 탓에 그가 사망한 이후 굉장히 슬퍼하고 분노했다. 따라서 후계자의 생존을 몹시 바랬던 황제는 원로원에 보낸 편지들을 통해 매일 같이 원로원의 행태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면서, 그와 자신의 삶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언급했다. 티베리우스는 편지들을 통해 자신이 세야누스 같은 인간들 때문에 본인의 단란하고 화목한 가정이 파탄남을 지적하기도 했고, 옛 세야누스파들의 발언이나 원로원의 행태를 그대로 적고 이 내용이 담긴 서한을 원로원 회의장에서 공개했다. 그러면서 그는 신이 자신을 저주하고 복수가 나쁜 일임을 알고 있어도 억울하게 죽은 혈육들을 위해 자신이 복수해 모조리 죽이겠다고 밝혔다.

또 어느날에는 그가 어떤 이유로 인해 그 많던 친혈육을 잃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분노가 담긴 문구로 지적하고, 그 결과를 언급한 뒤 이를 원로원에 대한 비난으로 귀결해 발표했다. 아울러 황제는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성추문을 일으킨 범죄자로 몰린 것에 대한 분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정신착란자 행세를 하다가 반역을 일으켰다고 모함한 인사들과 원로원은 똑같다고 강하게 비난했다.[103] 그런데 티베리우스의 이런 행동은 간혹 죽은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성추문으로 인해 이름을 더럽힌 사실까지 들추어 죽은 친혈육까지 비난하는 듯 보였다. 그래서 하필 이 시기에 티베리우스의 서한장을 통해 접수된 비난과 고발 내용을 담당한 법무관들은 황제의 오락가락한 비난과 고소장에 대해 상당히 곤욕을 치렀는데, 이 사건을 전담한 법무관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의 경우에는 이 고민을 하다가 원로원과 이 문제를 상의한 뒤, 결국 황제의 요청에 따라 세야누스파로 지목된 이들을 '티베리우스가 원하는대로' 반역죄로 고발해 조사를 집행했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드루수스가 죽어 나온 서기 33년부터 벌어진 세야누스 일당 제거는 세야누스 일가의 씨를 말리는 것을 넘어 모든 가담자의 씨를 말리는 방식으로 확대된다. 드루수스의 일기장이 공개될 당시, 아티우스가 낭독하는 동안 근위대 병사들과 티베리우스 측근들은 원로원 안에서 그 내용 공개를 방해하거나, 시끄럽게 굴면서 분위기 파악을 못한 이들의 이름과 언행을 모두 티베리우스에게 제출했다. 그러자 티베리우스는 이를 통해 살생부를 만들어 그들을 반역죄로 기소했다. 이렇게 되니 드루수스 카이사르 사후, 티베리우스 시대는 세야누스 몰락 직후 상황 못지 않게 친족들을 위한 황제의 보복조치로 인해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과거 마리우스술라의 내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숙청이 매일같이 벌어진다. 눈만 뜨고 일어나면 옆에 있던 동료들이 반역죄로 목이 달아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족 전체가 몰살되는 일이 반복되니 원로원은 벌벌 떤다. 로마 원로원 전체는 매일같이 공포 분위기가 조성됐다. 세야누스의 정체를 안 이후, 티베리우스는 예전과 달리 자신과 혈육들을 비난한 인사나 음모를 꾸몄다고 이야기가 나오면 관용 대신 무조건 잡아서 제거했던 터라,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비참한 죽음은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티베리우스의 마지막 자비마저 없앴다.

서기 33년부터 티베리우스와 카이사르 가문의 친족들에 대한 비방은 곧 비방자의 처절한 몰락과 숙청으로 결론났다.

당연한 말인데 드루수스 카이사르 죽음에 직접 관여된 노예와 그 친구들은 그 일가까지 모조리 제거됐다. 원로원 앞에서 황제의 서한장과 드루수스의 일기, 사건 보고서를 낭독한 백인대장 아티우스가 법무관, 호민관, 원로원 인사들을 만나 황제의 뜻을 전달했다. 이어 황제와 호민관, 법무관의 고발장을 받아든 원로원은 복수심으로 가득찬 황제의 요청에 따라 서기 33년부터 세야누스와 공모한 혐의로 기소돼 감옥에 있던 죄수들을 모조리 사형시킬 것을 승인했다. 이들은 티베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죄수와 가족 모두 참수됐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그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 학살된 시체가 겹겹이 가로놓이고, 유명인과 무명인을 불문하고 남녀노소 모두 참수된 다음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고 한다. 티베리우스는 그 시체 수습까지 금지해, 감시 병력을 세워놓고 그들의 유족, 친구들의 접근도 막고 그들이 눈물을 흘리거나 보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다. 더욱이 이 시기부터 티베리우스는 서기 31년 네로 카이사르가 누명을 쓰고 추방됐다가 자살했다는 것을 침통해하면서, 친구 네르바의 위로에도 복수심을 곱씹으며 격노한 상태였다. 이렇게 되니 세야누스 일당에게 누명을 쓰고 죽은 두 혈육을 기리는 듯 그 시신들을 모조리 테베레 강에 던지게 하고, 썩을 때까지 방치됐고, 그들에 대한 약간의 위로는 곧 국가 전복 혐의자들을 옹호한 국가 반역과 모욕에 따른 처형 명령이었다. 이는 아우구스투스,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로 이어진 그 직계에 대한 향수가 대단한 민중들도 비슷해, 그들은 티베리우스의 잔혹함을 욕하면서도 사필귀정으로 여겨 세야누스 일당을 위로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내 로마인들은 티베리우스가 정찰병을 보내 감시하지 않더라도, 떠내려온 세야누스 잔당과 그 가족들의 시신을 손 대지 않고 매장조차 해주지 않았다.

서기 33년 이래 티베리우스는 이 당시 숙청 대상자들을 원로원에 이를 통보할 때 근위대장 마크로 등을 보내 서한장을 전달한 뒤, 집정관이나 원로원 인사들이 서한장을 회의장에서 읽게 했다. 이때 서한장에는 그 인사들의 실명을 공개됐고 황제는 정중하게 말하는 듯 하면서도 글귀 하나하나에서는 분노와 복수심이 가득찬 어조가 느껴졌다. 또 그는 비방자들에게 “죽일 놈” 등의 원색적인 비난 용어를 사용해 그들 스스로 공포감을 느끼게 했고, 이 서한의 끝은 늘 로마법 절차대로 본인 또는 법무관의 고소, 고발이었다. 아울러 황제가 서한장으로 알린 모든 고소 사건은 원로원 심의 후 재판을 거치는 합법적 방법으로 진행되고 형은 추방형이나 사형으로 결론나고 이 조치는 신속하게 집행됐다. 그래서 원로원 의원들은 "카이사르여, 그 분노는 잘 알지만..." 등의 발언들을 조심히 내뱉으며 티베리우스의 날선 고소장에 자신들의 이름이 오르지 않도록 주의했다. 하지만 이들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티베리우스가 보낸 이런 서한들은 프라이토리아니를 앞세운 가운데 항상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공개됐고, 황제는 이런 자신의 서한에 대해 그들의 입장을 명확히 요구해 이를 보고받았기 때문에 공포 분위기는 사그라들지 않았다.

티베리우스의 재위 말기 동안, 티베리우스는 일가 친인척과 자신을 향한 비난과 음모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했다.죽은 친혈육들 외의 일에는 보통 무관심했는데, 반역 이야기에는 굉장히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 그래서 타키투스에 따르면, 황제는 자신의 외삼촌 리비우스 드루수스 리보(리비아 드루실라의 남동생)가 자신의 친구 베스쿨라리우스에게 비난받고 그의 표적이 되자 굉장히 분노했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베스쿨라리우스가 카프리 섬에서 같이 살던 친구임에도 그를 직접 고발한 뒤 원로원에서의 심리를 통해 반역죄로 처형했다.[104] 또 그는 직계친인척에 대해서는 상당히 과보호하면서도 이중적으로 변했다. 그래서인지 후계자 네로 카이사르의 아내였던 친손녀 율리아 리비아의 재혼에는 무관심했고, 침울해한 반면[105][106] 동생의 손자(게르마니쿠스의 아들), 손녀(게르마니쿠스의 딸) 중 가이우스, 율리아 리빌라, 율리아 드루실라의 결혼에는 집착을 보일 정도로 신경을 쓴 뒤 후보자들의 인간됨까지 살핀 끝에 손수 배필을 정해 결혼적령기가 되자마자 결혼시켰다. 이 외에도 티베리우스는 조카 게르마니쿠스 사망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피소 부부를 이때부터 굉장히 증오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피소의 아내 플랑키나가 대 아그리피나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죽었을 때, 그녀가 악행을 저지른 끝에 파멸해 뒈졌다고 거친 표현까지 하며 좋아했다. 반면 대(大) 아그리피나 사망 소식에는 일절 애도의 표현은 없었고 끝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아그리피나가 문란한 사생활로 문제를 일으켰던 문제 있는 귀부인이라는 헛소문을 전혀 막지 않았는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 보낸 서한을 통해 아그리피나에 대한 이상한 소문을 정확한 문장으로 정리해 "아그리피나가 음탕하고 누구누구의 정부였다는 말이 왜 나왔겠느냐"라고 대놓고 비꼬기도 했다.

아울러 그는 자신과 종손자 가이우스(통칭 칼리굴라)를 씹어댄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해 반역죄로 고발한 뒤 추방, 사형 판결 후 처벌했고, 과거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성추문을 진실로 왜곡한 인사들과 세야누스파에 속한 도망자들을 끝까지 추적해 그 가족의 씨를 말렸다. 이런 이유 때문에 타키투스에 따르면 친 티베리우스파, 반 티베리우스파에 상관없이 황실과 황제에 대한 음모는 곧 처벌이었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동생 대 드루수스의 최측근이자 자신의 참모였던 전직 법무관 섹스투스 비스틸리우스[107]를 황제의 식탁에서 추방시킨 뒤[108] 그를 처참하게 몰락시키고 죽였다. 기록에 따르면, 비스틸리우스는 재미삼아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비꼬며 섬에서 방탕하게 지낸다는 풍자시를 지었는데, 이게 티베리우스의 역린을 건드리고 말았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카이사르(티베리우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풍자시로 만든 이유를 직접 언급한 서한을 보내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는데, 고령의 비스틸리우스는 자신이 총애를 잃었다고 판단해 혈관을 잘라 자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이런 그를 말린 뒤 탄원서를 통해 “비스틸리우스가 농담으로 한 풍자시인데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했는데, 티베리우스는 냉혹한 답변서를 보내며 "(풍자시가) 거짓말이라고 해도 용서할 수 없다"고 일갈했다. 그래서 비스틸리우스는 체념하고 스스로 혈관을 끊어버리는 방식으로 죽었다. 그 외에도 가이우스 안니우스 폴리오의 아들을 비롯해 유니우스 실라누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등 명문귀족 원로원 의원들과 저명한 연설가 등이 정적들의 모함 등으로 애꿏은 피해를 입었고, 일부는 유죄 확정 후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언급된 명사, 연설가들 중 몇몇은 타키투스의 주장과 달리, 티베리우스 측근과 친구들의 탄원서와 끊임없는 설득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지거나, 티베리우스가 "우리 집안 친척인 이 사람(유니우스 실라누스)이 양같이 순한 건 세상이 다 안다. 그런 일을 꾸미거나 비열한 행동을 할 위인도 아니지 않느냐. 이것은 누명이다"며 고소 자체를 파기해줬다.

한편 서기 36년,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미망인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남편과 카이사르 가문을 욕정이 대단하고 국가에 대한 증오심이 대단하다고 허위 증언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과정에서 아이밀리아 레피다가 세야누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그 이전부터 자신의 노예, 주치의 등과도 불륜관계를 맺으면서 드루수스 카이사르에게 그 죄를 덮어 씌운 것까지 드러났다. 이에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의 명령으로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스스로 양 손목 혈관을 자르고 과다출혈로 고통스럽게 죽은 뒤, 그 시체가 테베레 강에 던져지는 전통적인 자살형태의 처형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2.4.2. 근위대장 마크로

시간이 흘러 세야누스가 몰락한 이후 2년이 지난 33년, 당시 로마 사람들은 “원흉 세야누스가 죽고 복수도 끝난 만큼 티베리우스가 로마로 돌아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런 기대는 원로원도 가지고 있었는데 원로원에서는 티베리우스가 동생 드루수스의 손녀들의 배필을 선택하고 서한을 보내 가볍게 추천사를 덧붙이며 기분이 좋아보이자, 로마 귀환 요청의 뜻을 간곡히 전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마모될대로 마모된 티베리우스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서한을 통해 아무런 조치도 하지 않고, 무작정 "로마로 돌아와달라"고 요구하는 원로원의 행동을 대놓고 지적했다. 또 티베리우스를 몹시 미워한 타키투스의 표현에 따르면, 이때 그는 특유의 아주 애매한 말로 수도를 비우고 있는 이유에 대해 말하고 나서 좀 더 중대한 문제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고 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게 자신이 로마에 오지 못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저는 국가를 위해 몸을 (암살)위험에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가 원로원에 등원할 때에는 언제나 친위대장 나이비우스 코르두스 수토리우스 마크로와 소수의 프라이토리아니 부관, 백인대장을 동반할 수 있도록 해주길 요청합니다."


- 타키투스, <연대기>

이에 당시 원로원과 두 집정관은 황제의 요청에 따라 황제를 경호하는 프라이토리아니 경호 인력의 위계, 인원수를 따로 규정하지 않는 포괄적 결의안을 통과시켜줬다. 하지만 누구보다 믿었던 세야누스에게 진짜 암살될 뻔하고 혈육들이 비극 속에 희생된 경험을 한 티베리우스는 여전히 불안한 로마로 돌아갈 생각도 안 했다고 한다. 그래서 티베리우스는 살아있는 동안 수도의 성벽 근처에도 접근하려고 하지 않았고, 회의장 근처에는 그림자도 비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고리대 사건'이 터지면서 티베리우스는 더더욱 위기 의식을 느끼고 거취의 불안함을 재확인했다.

티베리우스가 수도 귀환을 거부하면서 벌어진 고리대 이야기에 대해 타키투스는 원로원이 티베리우스의 요구안에 따라 황제의 호위인원과 관련된 포괄적 결의안 통과 무렵에 폭발해 일이 커졌다고 한다. 사실 타키투스에 따르면 '세르비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루키우스 술라가 집정관이 된 해(서기 33년)'에 티베리우스는 카프리 섬에서 이전까지 사채업자들이 이자의 원금을 자기들이 정하고, 이탈리아 본토 내에서 벌어진 금융대부와 <종신독재관 카이사르 법> 위반 소식을 처음 보고받았다.

사실 티베리우스는 젊은 시절부터 지나친 고리대나 롤리우스 같이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증식한 가렴주구들을 매우 혐오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말년부터 티베리우스는 혐오, 비난 수준을 넘어, 고리대의 경우 자비없이 반역죄 수준으로 모조리 죽였고 연좌제까지 적용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와 로마에서 금융대부를 하는 기사계급과 부자들이 티베리우스를 대놓고 무시하고, 직접적으로 그에게 도전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 고리대를 통한 이자놀이 문제가 발생했을 당시, 황제는 같은 일이 터질 때마다 큰 문제를 발생시킨 이 소식에 굉장히 분노했음에도 이전 로마의 권력자들과 마찬가지로 법적 테두리 내에서 대응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를 진짜 미워한 타키투스가 오히려 티베리우스 편을 들 정도로,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서의 고리대는 금융대부와 토지 소유 문제가 결합된 로마인들의 생존문제와 직결된 탓에 그 불행의 역사는 매우 오래되고 위험한 일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처음 보고를 받을 당시, 소송을 법무관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에게 맡기면서 원로원에게 심리를 담당케하고 과거 12동판법을 통한 이자 제한 조치와 기원전 347년부터 호민관들이 입법한 고리대 제한법령,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법적 할아버지가 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리대 제한 법령 등의 전례를 통해 문제를 해결했다.

그럼에도 로마 부자들은 섬에만 틀어박혀 있는 티베리우스를 무시했는지, 아니면 티베리우스가 해봤자 얼마나 심하게 하겠냐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간 큰 행동을 대놓고 했다. 그들은 법적 이자를 넘는 이자놀이를 꾀한 것을 넘어, 자신들의 이익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그 선을 넘는 행동을 계속했다. 이들은 수백년째 그들과 자신들의 조상들이 이전까지 법을 어겨가며 마음대로 이자를 받고 편법적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왜 티베리우스가 개입하냐고 불만을 드러냈다. 그리고 황제와 민회 의결을 조롱하는 듯 간악한 돈놀이로 로마와 이탈리아에 화폐부족 문제를 발생시키면서 맞대응했다.[109]

당시 고리대금업자들이 한 방식은 오래되고 로마를 오랫동안 괴롭힌 그 방식이었고, 필연적으로 폭동과 항의는 로마 최고권력자와 원로원에게 돌아갈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의 간교한 계책으로 인해 로마와 본국에서는 통화까지 부족해졌는데, 이는 모든 부채가 일시에 회수된 이유와 많은 현금이 황제 개인금고와 국고에 쌓여있던 상황 때문이었다고 해도 문제를 초래했다. 그래서 이 일은 국가 기강 잡기에 여념이 없던 티베리우스에게 명분을 제공하고 만다. 그런데 티베리우스는 일단 원로원을 통해 즉각 대응에 나서며, 원로원을 앞세워 사전에 각 채권자들에게 "대부 총액의 3분의 2를 이탈리아의 토지에 투자하라"고 명했고, "채무자는 같은 비율만큼의 부채를 곧 현금으로 갚지 않으면 안 된다"고 다시 옛법을 들춰내는 방식의 자발적인 시정요구 방법을 사용했다. 즉, 시간을 주면서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마지막 경고를 날린건데 이런 정중한 경고에도 고리대금업자들은 티베리우스가 앞세운 원로원의 결의안을 비웃었고, 한술 더 뜬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로마와 이탈리아 내 채권자들 대부분은 원로원을 통해 발표된 티베리우스와 로마 정부의 명령을 무시하면서 물러서지 않고, 법적 테두리 이상을 넘어가면서 이자놀이를 계속했다. 또 채무자들에게 전액을 다 갚을 것을 요구하고, 채무자들의 신용 실추를 수치로 여기게끔 사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결과, 수도 로마의 경우 원로원과 법무관 사무소들은 채권자들의 행패와 협박 이상의 행동에 분노한 채무자들이 몰렸고, 이들의 항의로 몸살을 앓게 됐다. 그런데 이때도 티베리우스는 어떤 상황이 전개될 지 뻔히 알았다는 듯 행동할 뿐 최후의 수단은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우선적으로 개인 국고를 통해 1억 세스테르티우스가 훨씬 넘는 거액을 직접 풀어 황제 개인이 무상으로 고리대 피해자들을 돕고, 일반 로마 민중들에게 무상으로 3년의 기한을 정해 돈을 빌려주도록 했다. 그래서 로마 민중들은 평소 돈을 풀지 않은 티베리우스의 이런 시혜책에 상당히 놀랐는데, 많은 이들은 은둔정치를 해도 놀라울 정도로 발 빠른 황제의 대응방식과 시혜책에 대해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그러나 티베리우스의 원조에도 사태는 빨리 해결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원로원이 황제에게 받은 1억 세스테르티우스의 기금을 각 은행에 할당하고 3년간 무이자로 대출한 조치 외에는 굉장히 무력하게 행동했고, 토지 매입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의결 사항과 달리 일을 신속하게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티베리우스는 수백년째 로마를 괴롭힌 고리대를 해결하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던 로마 권력자 중 한명이었고 애당초 이런 부류의 비열한 행동을 진짜 혐오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는 서둘러 이 문제를 해결짓고 싶어했고, 가이드라인까지 마련해 일일이 원로원에게 이를 서한으로 해결토록 해줬다. 반면, 당시 원로원과 로마 행정관료들은 "황제가 섬에 틀어박혀 있고, 보고도 늦을텐데 천천히 해도 된다"하는 느긋하고 급한 일이 아니라는 말년병장 같은 태도로 일관했다. 이는 타키투스가 자신의 저서에서 고리대 문제가 더 빨리 해결되지 못한 이유가 됐다고 대놓고 언급할 정도로 사태를 키우고 말았고, 시간이 지체될수록 티베리우스의 심기만 건들게 되면서 공포시대를 초래하게 됐다고 한다.

따라서 참다못한 티베리우스는 더이상 원로원과 로마 관료들에게 고리대 문제를 주도적으로 해결하도록 기회를 주지 않았으며, 자신이 얼마나 진지하고 신속히 이 문제를 해결할 지 몸소 보여줬다. 이는 그가 즉위 직후, 원로원이 무기력하게 행동하거나 책임을 회피하면서 자신에게 그 책임을 떠맡기는 행태를 경멸해 대놓고 "노예가 준비된 사람들"이라고 원로원에게 일갈을 했던 일화의 연장선이기도 했다. 결국 티베리우스의 서한이 원로원에 당도한 직후부터 다시 로마에는 피바람이 몰아쳤다. 오랫동안 쌓인 원로원의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행동들은 고리대 문제 등으로 정신없던 늙은 황제를 자극한 만큼, 황제에게 시범 케이스로 지목된 사람은 반역죄와 연좌제를 통한 숙청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던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와 그의 누이 산키아는 반역죄로 처형됐다. 타키투스는 이때 일에 대해 머리 끝까지 열이 받은 황제가 손수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를 반역죄로 기소하는 것을 시작으로 고리대 및 부정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고리대 문제에 직접 개입했다고 한다. 따라서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는 불길한 예감도 느끼지 못하고 자신의 생일을 자축하다가 그 자리에서 원로원으로 끌려가 유죄를 선고받고 살해됐다. 이후, 티베리우스의 조치는 전방위적으로 시작됐고, 반역죄로 기소된 프로쿨루스의 누이 산키아가 2번 타자로 고발돼 물과 불을 제공받지 못하는 조치와 고문를 받고 최후에는 반역죄로 잔혹하게 숙청됐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원로원은 뒤늦게나마 티베리우스가 고리대 문제는 물론이고 자신들의 무기력한 행동에 대해 가만두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따라서 콘시디우스 프로쿨루스 남매가 고리대 혐의를 통한 반역죄 기소 후 숙청된 이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본국 이탈리아 내에서 불법적 고리대 사업을 한다면 황제의 지시 후 법무관들이 고발하는 방법으로 기소돼, 국가 전복 혐의 수준에 버금가는 형량을 선고받고 모조리 처형됐다.[110] 다행인 것은 이 당시 원로원 의원들의 경우에는 고리대에 개입해 이자놀이를 하는 불법행위를 하지 않았고, 티베리우스의 심기를 건들지 않는데 주력해 피해가 적었다는 건데 그래도 다시 시작된 황제의 차가운 서한과 고소, 고발은 원로원 의원들 앞에서 낭독되고 그 분위기는 살벌했다.

특히, 이때 티베리우스가 사망하기 직전까지 이탈리아에 거주하면서 편법적 고리대 사업을 하던 수 많은 기사계급 사람들은 이 혐의로 고발될 경우 모두 처형되고 그들의 모든 재산은 압류됐는데, 여기에는 눈감아준 인사들 역시 전직 법무관 등 고위직 출신이거나 지방 유력자라고 해도 죄다 포함돼 처벌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종국적으로 원로원 역시 온전히 넘어가기 힘들게 됐는데, 티베리우스의 대대적인 고소장에는 소방대장 라코의 며느리 폼페이아 마크리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폼페이아 마크리나 일가 사건은 이 케이스의 전형이었다고 하는데, 일단 이자놀이를 하다가 기소된 폼페이아의 경우에는 다행히 추방형에 처해졌다. 반면 이를 방치했던 그녀의 오빠, 남동생 등 그 일가는 전직 법무관까지 있던 최상류층이었음에도 그녀와 달리 명예와 목숨을 모두 잃게 됐다. 따라서 폼페이아 마크리나 사건으로 그녀의 친정 식구들은 죄다 공직에서 쫓겨난 뒤 단죄됐고 그들은 반역죄로 기소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유죄판결을 받고 모조리 처형됐다. 또 이 귀부인의 시댁 역시 연좌제로 인해 그녀의 친정 식구들처럼 풍비박산이 났는데, 그녀의 남편 아르콜리쿠스와 시아버지 라코는 상위 기사계급인데다 엄청난 지방 유력자임에도, 또 라코는 세야누스 처단 당시 소방대장으로 공을 세웠음에도 티베리우스에게 면죄부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라코와 그의 아들은 폼페이아 마크리나가 기소되고 티베리우스의 조치가 단행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다.

아울러 티베리우스 또는 고발인들에게 기소 내지 고발돼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들은 주변인들도 혀도 내두를 방식으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거나 비참하게 몰락한 뒤 그 재산이 몰수됐다. 그리고 그들의 시신은 대역죄인들을 다루듯 처형 후 티베리스 강에 던져지고 감시인들이 그 주변을 그 시체가 썩을 때까지 지키면서 시체를 몰래 회수해가지 못하게 감시했다. 그래서 퀸투스 폼포니우스 같은 사람들은 티베리우스에게 찍힌 동생 푸블리우스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첫 희생양인 프로쿨루스 남매 중 산키아를 고발하면서 다른 문제로 자신과 그 가족이 숙청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여기에 더해 고리대 사건은 그 규모가 커지면서 다시 세야누스파 잔당 중 감옥에 가둬진 죄수들에게 그 불똥이 튀게 됐으며, 감옥 안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참수형을 당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렇게 티베리우스가 개인 비리나 일탈행위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한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로마와 이탈리아 내에서의 고리대 문제와 불법 행위들은 놀라울 정도로 근절됐다. 따라서 이런 사회 분위기는 나름 로마에 공포감을 조성했어도 꽤 긍정적이었는데, 이런 경우가 대부분 그렇듯 여기에는 애꿏은 피해자도 있었다. 바로 히스파니아 굴지의 사업가 섹스투스 마리우스가 대표적인데, 그는 친족과의 성추문(그가 딸을 범했다는 의심)을 이유로 고발됐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예전의 그처럼 냉철하게 이를 재조사하지 않고, 절차에 따라 인간보다 못한 범죄자인 그를 처형하라고 명했다. 그래서 마리우스의 막대한 재산과 그가 소유한 수많은 금광들이 모조리 몰수됐고, 마리우스를 비롯한 사건의 관련자들은 모조리 절벽에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처형됐다. 이런 이유로 인해 모든 로마인들은 죄없는 마리우스가 명예도 잃고 처형된 뒤 재산이 몰수됨을 추모했다.

이때부터 로마와 이탈리아에서는 세야누스 처단에 앞장선 프라이토리아니 근위대장 마크로가 라코 숙청 직후 문자 그대로 세야누스처럼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고 한다. 따라서 타키투스는 당대 로마인, 특히 원로원 인사들의 발언이나 일화를 적으면서 티베리우스의 근위대장 마크로가 벌인 대대적인 기소와 끊임없는 원로원 견제를 지적하고 마크로가 티베리우스의 통제를 받았음에도 했던 일들이 세야누스 이상으로 악랄하고 음험했음을 기록했다.

이렇게 마크로가 전면에 나서고, 피바람이 불고 간 고리대 사건이 마무리될 즈음, 다시 한 번 로마는 술렁인다. 이번에 그 원인을 제공한 이는 뿌리가 뽑힌 줄 알았던 옛 세야누스 파 중 실질적인 2인자였던 루키우스 풀키니우스 트리오였다. 당시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은 트리오의 계산적이고, 상대의 심리를 활용한 고도의 정치술에 속아 세야누스 일당의 숨은 2인자를 찾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내는 당시 그 지위와 악랄한 웅변 실력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어 그 파장은 작은 듯 하면서도 컸다.

트리오는 평민 계급 출신으로, 세야누스가 처음 등장했을 당시부터 카시우스 세베루스와 함께 사악하고 악랄한 델라토르(고발자, 검사관)로 악명을 떨친 원로원 의원이었다. 그는 세야누스와 둘도 없는 친구였는데, 세야누스 못지 않게 연기력이 뛰어나고 사악해 31년 세야누스가 몰락할 당시에도 살아남았다. 그는 피소 재판과 소 드루수스의 공공 건축물 개보수 비리 감찰 사건 당시 보여준 인상적인 활약으로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유가족, 소 드루수스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 제국 훈장을 받고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직과 원로원 의석을 꿰찼던 경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경력을 가진 트리오는 비밀리에 세야누스파의 핵심인물로 활약하며 악행을 벌였는데, 그럼에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은 그가 세야누스와 친해도 세야누스파와 함께 궁중음모와 티베리우스 암살 계획에 개입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이 사내가 철저히 정체를 숨길 수 있었던 비결은, 서기 21년에서 31년까지 10년 동안 오늘날의 포르투갈 일대인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으로 재임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는 총독 시절에 티베리우스와 신격 아우구스투스와 그 남성친족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꾸준히 기부를 하고 공공건축물 개보수를 적극 추진해 이 부분에서 높은 점수를 땄다. 그래서 그가 로마 귀환 후 세야누스 옛 잔당을 공격했을 때, 노황제와 원로원은 황제의 복수극을 최전선에서 돕는 그를 순전히 믿고 구국의 영웅으로 여겼다. 이런 분위기 덕에 트리오는 세야누스가 몰락한 31년, 자리가 빈 보결집정관에 뽑혀 7월 31일자로 취임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극도로 예민해진 까닭에 세야누스와 가장 친한 친구였던 트리오를 온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 때문에 세야누스 잔당 제거 임무는 원로원과 신임 근위대장 마크로, 소방대장 라코가 담당했다. 따라서 트리오는 방법을 바꿔, 제 지위를 이용해 정체를 숨기고 모든 죄를 죽은 세야누스와 자기를 따른 세야누스파 원로원 의원들에게 덮어 씌웠다.

트리오는 젊을 적부터 카시우스 세베루스의 공격적인 언행과 상대의 약점을 잡고 뒤로 협박하면서 거짓 증거를 내세워 끝까지 꼬투리 잡는 특유의 방법에 매료돼, 이를 그대로 모방하기로 유명했다. 덕분에 그는 일찍부터 정적 제거와 죄 덮어 씌우기 재능이 당시 로마에서 최고 수준이었다. 따라서 트리오는 약 5년여간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복수극에 유용한 트리오를 사냥개로 이용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기 32년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리파의 외손자로 티베리우스 전처의 조카인 데키무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가 세야누스 후임으로 집정관이 된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 트리오를 탄핵했다가 역공격을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하테리우스 아그리파는 한때 이모부였던 티베리우스조차 "졸린 생물"이라고 평했을 정도로 황제에게도, 원로원 동료와 대중들에게도 악평이 쏟아지는 인물이었다. 그는 황제가 총애한 인사와는 거리가 멀었고, 인기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그리파의 탄핵 연설은 눈에 불을 켜고 세야누스 잔당의 남은 뿌리를 찾고 있던 노황제와 원로원이 트리오 정체를 궁금해 한 이유가 됐다.

세야누스가 몰락한 직후, 티베리우스의 사임과 세야누스의 몰락으로 자리가 빈 31년 집정관에 나란히 오른 레굴루스와 트리오는 볼썽 사나운 모습을 보여줬다. 두 사람은 집정관 취임과 동시에, 서로를 세야누스 잔당이라고 주장하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레굴루스와 트리오는 집정관 임기가 끝난 이후에도 서로를 삿대질하고 욕설을 퍼부으면서 "법정에 세워 죽여버리겠다"고 으르렁댔다. 더군다나 트리오는 상황이 불리해질 법하면 정적이 될 동료를 세야누스 잔당으로 몰아세워 법정에 세우고 리보, 피소 등 원로원 주요 인사들에게까지 협박을 일삼았기에 원로원 의원들은 이런 그를 미워했다.

이런 모습을 보고 꼴사납게 여긴 원로원 동료들은 하테리우스 아그리파가 진짜 싫어도, 그 주장에 관심을 가졌다. 이는 티베리우스도 비슷했는데, 황제는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17일 전 세야누스와 그 부하들의 음모를 고변해 신임받게 된 레굴루스와 무언가 꺼림직한 트리오의 관계를 주시했다. 허나 트리오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아그리파의 고발과 탄핵에 예상 밖으로 티베리우스 황제와 황실을 따른 대표 중진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는 레굴루스, 트리오 모두를 재판에 세웠지만 상황은 레굴루스가 트리오의 다음 희생자가 될 것 같아보였다.

재판이 열리자, 황제를 대신해 이를 중재한 퀸투스 산퀴니우스 막시무스는, 탄핵과 재판의 포문을 주도한 하테리우스 아그리파에게 두 피고의 심문을 맡도록 하고 질문권을 줬다.

여기에서 모두의 기대를 받고 있지 않던 하테리우스 아그리파가 제대로 일을 내는데, 평소의 지루하고 멍청한 모습과 달리 그 활약은 대단했다. 그는 재판장에 선 트리오에게 "당신은 왜 레굴루스를 죽일 듯 협박했다가 침묵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트리오는 평소의 공격적이고 선동가적 기질을 가진 태도로 자신을 변호하기보다는, 침착하게 "동료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에 대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더 적절해서다."라고 답했다. 이에 무언가를 눈치챈 막시무스는 트리오의 발언을 듣고, 재판을 중지시킨다. 이에 관해 타키투스는, 막시무스가 본의 아니게 미끼가 된 푸블리우스 멤미우스 레굴루스를 보호하고 트리오를 완전히 파멸시키기 위한 고도의 연기였다고 이 분위기를 평했다.

이 재판은 이렇게 중단되는데, 티베리우스와 마크로는 말빨이 딸려도 재판장에서 떳떳한 레굴루스와 달리,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한 트리오의 발언과 언행을 보고 트리오의 본색을 눈치챘다. 이에 근위대장 마크로는 서기 35년 기습적으로 트리오를 체포해, 그를 지하감옥에 가둔다. 그러자 원로원과 막시무스는 황제의 의중대로 행동한 마크로를 관찰한 뒤 반역죄 재판을 여는데, 이때 철저한 계산 아래 레굴루스, 아그리파가 피해를 입지 않는 방향에서 일을 진행시킨다. 이렇게 되자 영악한 개인기로 정체를 숨겨왔던 트리오는 힘도 못 쓰고 극적으로 몰락하게 된다. 감옥에 있던 그는 아들에게 전할 유언을 보내며 티베리우스 황제와 근위대장 마크로를 모욕한 뒤 비참하게 죽기 싫다며 목숨을 끊는다. 이렇게 트리오가 죽자, 티베리우스는 예상 외로 죽은 트리오의 아들에게 연좌제를 씌우지 않고 도리어 개인의 의견 표현은 자유로운 권리라면서 이를 넘어간다. 그렇지만 이는 전형적인 티베리우스 스타일의 정적 제거라서, 트리오의 뻔뻔한 유언은 원로원에 공개돼 유가족은 사실상 사회적으로 파산선고를 받고 몰락하게 된다.

이렇게 트리오가 깔끔하게 제거된 서기 35년 이후, 마크로 아래 본격적인 공안 통치가 시작된다. 티베리우스는 늙었고 시간이 부족해, 황제와 그 명령을 받든 마크로는 제2, 3의 트리오 같은 인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됐다.

타키투스에 따르면, 마크로의 원로원 견제 및 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세력 숙청 작업은 티베리우스가 서한으로 명령해 내린 것이 아닌 마크로의 판단 아래 이뤄진 조치들이었고 지극히 티베리우스의 실질적 후계자 가이우스의 권력 안정화를 위한 사전작업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원로원은 이런 마크로의 행동에 대해 “마크로 저놈이 세야누스보다 더 악랄하게 분위기를 몰아간다”며 분노했는데, 사실 마크로는 세야누스와 달리 황실 전체를 사적인 이유로 숙청대상으로 올리지 않고 티베리우스와 가이우스 입장에서는 꽤나 일처리를 잘했다. 다시 말하면, 마크로는 이 시기동안 전적으로 티베리우스 사후 후계자들을 위한 조치로 세간에 욕을 먹는 일들을 대신 처리했기에, 이 문제로 골몰하던 티베리우스에게 신임을 받았을지언정 질책을 받거나 공격당하지 않았다. 또 마크로가 사적 감정으로 몇명을 기소해 처벌했어도 나름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다고 한다. 바로 네로의 친부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기소가 대표적인데, 이 사람은 진짜 악랄했고 문제도 많았다. 네로의 친아버지는 마크로에게 간통 및 국고황령 사유로 고발당했다. 그런데 이 사람의 경우에는 진짜 악랄했고 문제도 어떤 사람보다 많았지만, 끝까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고 거액을 들여 원로원 최후 변호를 철저하게 준비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는 국고횡령, 거액의 사기, 폭행, 협박, 근친상간, 간통 등의 각종 혐의로 기소된 이후, 그렇게 노력했어도 뚜렷한 혐의와 증거들로 인해 모두 유죄로 결론났다. 특히 이 사람은 티베리우스에게 문제 많은 범죄자로 단단히 찍혔는데, 늙은 황제는 그의 어머니 대 안토니아가 황족이고, 아버지 루키우스가 젊은 시절 자신과 함께 게르마니아 전쟁에서 싸운 동료이자 오랜 친구였다고 해도 용서해주지 않고 손수 사형을 언도했다. 따라서 네로의 친아버지는 티베리우스에게 직접 사형 판결을 받고 지하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다가 죽을 상황에 몰렸는데,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사망하면서 사형이 중지됐고 이후 가이우스(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말년 기소된 이들에게 사면령을 언도하면서 죽기 전 가까스로 석방됐다.

2.5. 사망

티베리우스의 이런 대대적인 복수혈전과 공포정치 외에도, 후계자 선정과 교육에 열을 올렸다. 이 당시 아우구스투스 가문 내에서 그의 남은 후계자 후보는 남자혈육 중 본가를 합쳐도 3명 정도만 있었다. 그 중 티베리우스가 속한 율리우스 가문 안의 남자혈육은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게르마니쿠스(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셋째 아들인 가이우스(칼리굴라)였다. 그리고 티베리우스가 본래 속했던 본가(本家)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아우구스투스 가문 남성은 조카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가 있었다. 이중 성인은 클라우디우스, 가이우스였고, 미성년자는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였다.

티베리우스 머리를 복잡하게 한 것은 그가 친손자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네로 게르마니쿠스에게 자신의 모든 직위, 권한 등을 온전히 물려주려고 하더라도, 마땅한 것이 없던 점이었다. 손자 게멜루스의 외삼촌이며, 본인의 조카인 클라우디우스를 징검다리 삼으려고 하더라도, 조카 클라우디우스가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 사람이라서, 멀쩡한 성인 1명과 곧 성인이 될 손자가 있는 상황은 티베리우스를 답답하게 만들었다고 타키투스는 전한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당시 건재했고, 건강에 자신이 있었다.

당시, 티베리우스의 조카 클라우디우스를 제외하고 가장 유력한 황족은 율리우스 가문에 속한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와 종손 가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칼리굴라)였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의 손자인 게멜루스는 남들보다 5년 이상 먼저 공직 입후보를 할 나이에 도달하기도 당시 너무 어렸고, 게멜루스의 어머니 리빌라 공주가 세야누스와 함께 벌인 악행이 상당해, 티베리우스 머리를 굉장히 복잡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는 자신이 죽은 해인 37년이 거의 돼서야, 지시를 내려 로마에 머물던 손자 게멜루스를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불러, 제왕교육을 받게 했다. 그렇지만 이 과정을 위해 티베리우스는 마크로를 이용해 원로원 내 반대 여론을 무자비하게 잠재우고, 풍자작가들의 입을 틀어 막는 등 공포정치를 강화해야만 했다.

따라서 티베리우스가 사망 5년 전부터 황족 중 차기 황제에 가까워진 쪽은 당연히, 죽은 동생 대 드루수스의 손자이며, 게르마니쿠스의 살아남은 아들인 가이우스 칼리굴라였다. 칼리굴라는 모계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아 정통성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가지고 있었고, 머리가 비상하고, 잘생긴 외모와 함께 원로원 내에서 대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의 후광을 보고 지지한 세력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얻고 있었다. 더해 그는 세야누스가 몰락하기 전, 할머니 소 안토니아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티베리우스 결정으로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건너가, 치근거리에서 지극히 ‘티베리우스적인 방식’으로 후계 수업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111][112]

그렇지만 타키투스, 디오, 필로, 요세푸스, 대 플리니우스로 대표된 믿을 만한 고대 기록과 믿을 수 없지만 참고사료로 가치가 분명한 수에토니우스의 기록, 현대 학자들 모두 밝히듯이,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는 친족이라는 유대관계가 깊으면서도, 애증 관계였다. 이렇게 된 이유는 지극히 티베리우스에게 있었다는 평가를 듣는다. 왜냐하면 칼리굴라 입장에서 볼 때, 티베리우스는 법적 할아버지이자 보호자임에도, 자신을 사랑하고 아낀 가족들을 간신 세야누스에게 잃게 하거나, 그들을 슬프게 한 원수였기 때문이다. 이는 카프리 섬 생활 중에도 같았다. 칼리굴라는 티베리우스 곁에서 큰형 네로 카이사르의 자결, 어머니 대 아그리피나의 아사, 둘째형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석방 직전에 아사한 일을 들었고, 티베리우스의 지시로 만삭인 아내 유니아 클라우딜라가 열악한 환경 속에서 출산 중 산고로 죽고, 갓 태어난 첫 아이까지 잃었다. 또 로마에 있던 할머니 안토니아, 삼촌 클라우디우스와의 서한 교환을 티베리우스 측근들에게 사전 검열 당하는 등 감시받는 삶을 보내고 있었다. 따라서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에게 느낀 감정은 정상적으로 좋을 리 만무했다. 허나 티베리우스는 본인 기준으로는 나름 칼리굴라를 배려해주고, 자신과 칼리굴라를 상대로 한 풍자시 등이 보고되면 작가와 그 친구들을 모두 반역죄로 기소해 처벌하는 등, 티베리우스적으로 사랑을 베풀었다.

이런 복잡한 상황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일단 후계자 교육의 기회를 죽은 동생의 손자인 칼리굴라에게 부여하면서, 그를 시험하고, 능력을 확인했다. 이때 칼리굴라는 큰할아버지 티베리우스와 티베리우스의 친구들에게 인정받을 만큼, 웅변, 수사학, 역사 등을 배워 그 능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티베리우스의 친구 중 칼리굴라에게 호의적인 네르바가 카프리 섬에서 병으로 죽고 난 뒤, 남은 티베리우스 친구들이 칼리굴라를 시험하면서 의도적으로 속내를 알고자 하는 등 티베리우스 후계 구도는 여전히 안갯속에 빠져 있었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티베리우스는 확실히 친손자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에게 애정을 품고 있었고 18살이 된 혈육에게 제위를 넘기고 싶어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생각과 달리 소 드루수스의 아들은 전형적인 10대 소년에 불과했고 제위를 물려받기에는 아우구스투스의 친혈육들인 동생 대(大) 드루수스의 아들과 손자가 건재한 상태인 탓에 유리하진 않았다고 한다. 이중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동생의 손자 가이우스는 로마인들에게 외모와 혈통, 혈기 왕성한 청년인 탓에 인기가 많고 기대도 높았다. 그런데 가이우스 칼리굴라는 두 형을 비롯한 연이은 혈육들의 죽음 이후 자신의 감정을 최대한 숨기면서 티베리우스의 밑에서 속마음을 숨기는 법을 배웠고, 카프레아이로 건너간 이후에는 격한 감정과 분노를 통제하면서 종조부의 여러 정치술들을 연마하고 있었다. 이는 티베리우스 역시 잘 알고 있었는데, 고령의 황제가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젊은 가이우스가 티베리우스 밑에서 '제2의 세야누스'를 연상시킬 정도로 힘을 키우던 마크로 세력에 대해 지극히 자신의 방식대로 접근해 견제하고 있는 부분이었다고 한다. 이 당시 칼리굴라는 아내 유니아 클라우딜라가 출산 중 사망해 홀로 된 상태였는데, 근위대장 마크로가 자신의 여러 호의를 이용해 자신에게 의도적으로 아내 엔니아를 이용해 가이우스를 유혹하고 결혼약속을 받아 내게 하는 술수[113]를 본인이 역이용해 티베리우스 후계자로 자신을 확정짓는데 활용 중이었다. 이런 가이우스의 행동은 훗날 그가 마크로의 아내 엔니아를 꼬셔 결혼약속을 하고 난 뒤, 티베리우스를 배게로 질식사 시킨 다음 제위에 올랐다는 막장 소문의 배경이 된다. 그리고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런 가이우스의 고단수 행동[114]은 후계자 문제로 고민하던, 그의 종조부 티베리우스에게 반감을 사는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타키투스 생전 소문으로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떠보는 투로 수수께끼 같으면서도 그 뜻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말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타키투스는 이 이야기에 대해 "예를 들면"이라는 문구를 먼저 거론하면서 그 소문을 기술했는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세야누스처럼 권력욕을 키우던 마크로에게 "자네는 솟아오르는 태양에 마음을 빼앗겨 지는 태양을 버리고 있어"라고 말했고, 같이 있던 25살의 후계자 칼리굴라 역시 자리에 있자 종신독재관 술라를 거론해 그의 속마음을 은근히 떠보았다고 한다. 또 타키투스는 소문에서 전해진 카프레아이 이야기에 대해 말하면서 어느날에는 티베리우스가 술라 이야기를 꺼냈고, 이를 경청하고 있던 가이우스가 루키우스 술라 이야기가 나오자 비웃듯 미소를 띠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때 티베리우스는 이런 종손자에게 "가이우스는 술라의 악덕은 다 갖추어도 미덕은 하나도 지니지 못할 것이야."라고 말한 뒤 눈에 눈물을 머금으면서 같이 있던 친손자 게멜루스를 꼭 껴안고 가이우스의 음험해보이는 얼굴을 보면서 "네(칼리굴라)가 이 애(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일 거야. 그리고 누군가가 너도 죽이겠지."라고 예언했다고 한다.[115]

후계자 선정에 고민하면서도 쉽게 결론을 못 내리는 상황에서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아들인 조카 클라우디우스를 차기 황제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 이유는 클라우디우스가 온화한 성격에 46세로 나이가 적당히 지긋하면서도 아우구스투스와 자신의 친혈육이라는 점, 그리고 문학에 취미가 많고 역사가인데다 여타 다른 취미들도 고상해 문제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과 동시에 그는 클라우디우스가 황제를 하기에는 지극히 온화한 성품인데다, 그의 의지가 박약한 것[116]을 이유로 걱정했다고 한다. 아울러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조카가 아우구스투스의 혈육임에도 법적으로는 율리우스 가 사람이 아닌 카이사르 가 남성인 것도 걱정했다고 한다. 이런 탓에 세간에게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에 멀쩡한 성인 남성 한 명과 곧 성인이 될 청년이 있는데, 본가 내 카이사르 가 혈육을 후계자로 삼아 아우구스투스의 유덕과 가문의 이름에 비웃음과 모욕 대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를 들을 것을 매우 신경썼다고 한다. 따라서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는 즉위 당시에는 훌륭한 후계자들이 있던 상황과 반대로 이런 저런 복잡한 사정을 이유로 후계자 선정에 대해 결단을 내리지 못했고, 본인 스스로도 확실히 생존시 평판보다 사후에 로마인들에게 나올 평가를 더 신경쓰고 있다고 서술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이런 태도와 별개로 30살부터 언제나 의술을 비꼬고, 자기 자신의 판단 아래 남의 충고를 무시한 채 건강을 관리한 습관을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건강은 갈수록 나빠져 갔고, 고통을 참으면서 기력이 정정한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리고 이런 황제의 건강 악화 중 수도 로마에서는 티베리우스 사후 벌어질 권력 교체를 노린 일들이 마크로 주도 아래 연이어 터졌다. 먼저 그 시작은 데키무스 라일리우스 발부스가 푸블리우스 비텔리우스의 전 아내 아쿠티아를 반역죄로 고발한 뒤 유죄를 받아낸 일이었는데, 이때 호민관 유니우스 오토는 원로원에서 "고발자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수를 주자"는 동의안을 거부해 발부스와 오토 간의 대결이 벌어지고 그 과정에서 오토가 파멸하는 일이 벌어졌다. 아울러 로마내에서 난잡하고 음란한 행동으로 이름을 떨친, 귀부인 알부킬라가 자신과 불륜관계를 맺고 있던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아버지), 루키우스 아룬티우스를 비롯한 다른 2명의 원로원 의원들과 함께 불경죄로 고발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일들에는 임페라토르 티베리우스의 서한도 없는, 지극히 근위대장 마크로 주도로 모든 심문과 노예들에 대한 고문이 이뤄졌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마크로가 노쇠한 티베리우스가 곧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이 아룬티우스에 대해 품고 있던 원한을 풀기 위해 일련의 죄를 황제 몰래 날조했다고 판단했다. 또 원로원과 로마 사람들은 그동안 티베리우스 밑에서 온갖 해로운 행동을 배운 칼리굴라가 세야누스 이상의 끔찍한 근위대장 마크로의 지도를 받는 것을 걱정했는데, 이는 피고로 고소된 아룬티우스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헤노바르부스, 마르수스 등이 자기 변호를 구상하는 것과 달리 자살을 결심하고, 자신의 결정을 말리려는 친구에게 세야누스와 마크로를 비교하는 말을 진지하게 한 뒤 "티베리우스가 숨을 거둔다면 어린애에서 갓 벗어나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티베리우스, 마크로에게 온갖 해독을 다 배우고 있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더 비참하게 예속될 것이네. 나는 이런 상황을 걱정한다네"이라고 말하고 자신의 혈관을 자르고 죽었다.

이렇게 마크로가 세야누스처럼 온갖 활개를 치기 시작하고, 칼리굴라는 어떻게든 그 뒤를 잇기 위해 노력하는 가운데 별궁에서는 티베리우스의 건강과 체력이 눈에 띨 정도로 쇠약해지고 있었다.[117]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후계자를 확실히 정하는 것을 망설인 티베리우스는 결국 칼리굴라를 차기황제로 지명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그가 그나마 게멜루스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유언장에 게멜루스를 칼리굴라와 함께 자신의 공동상속인이자 공동황제로 지명하는 것뿐이었다.[118][119] 이 유언장을 작성한 뒤, 티베리우스는 서기 37년에 79세로 사망한다.[120][121]

이리하여 25살의 젊은 황제 칼리굴라가 온 제국의 환호에 뒤덮여 그의 뒤를 이었다.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 임종을 사촌동생 게멜루스, 티베리우스의 친구와 측근 등과 함께 지킨 그는 함께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왔다.[122] 이때 잘생긴 외모에 상당히 큰 키를 가진 칼리굴라를 본 민중들은 “우리의 별”, “귀염둥이” 등으로 젊은 칼리굴라를 환영했고, 원로원 역시 아우구스투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직계인 칼리굴라에 대한 기대감으로 찬사를 보냈다. 반면 칼리굴라, 게멜루스와 로마로 함께 돌아온 티베리우스의 관은 칼리굴라 일행을 환호하는 민중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돼 성난 민중들이 "티베리우스를 테베레 강에 던지자!"라고 외쳐대는 지경이 됐다.[123] 비록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드디어 소원성취한 아우구스투스 하지만 이 칼리굴라가...

칼리굴라가 압도적인 군중들의 환호를 등에 업자, 원래부터 티베리우스와 사이가 나빴던 원로원은 티베리우스의 유언을 깡그리 무시하고서 칼리굴라만 단독황제로 인정해버렸다. 이때 칼리굴라는 사촌동생이자 티베리우스의 친손자 게멜루스를 자신의 양자로 삼고, 아예 프린켑스 유벤투티스라는 직책까지 줘서 차기 황제로 못박아버렸다. 그러나 이런 상황도 8개월 뒤, 심한 열병을 앓고서 사경을 해매다가 깨어난 직후 심각한 불안감과 신경질적인 증세를 보이게 된 칼리굴라에게 원로원 귀족들이 도전하고,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보필하면서 티베리우스 유언장 집행을 실행하라고 계속 주장한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가 벌인 일 때문에 끝난다. 특히, 황제령 아이깁투스 장관으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최측근이자 후원자였던,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124]가 티베리우스 유언장에도 원로원이 칼리굴라, 게멜루스 공동승계 대신 칼리굴라 단독 승계를 좋게 여기지 않는다며 세를 모으고, 불만을 밝힌 일은 칼리굴라와 원로원 모두의 심기를 제대로 건든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가 생전에 직접 고발한 일을 파기하고 재수사를 약속한 일과 맞물려, 티베리우스가 끝까지 지키려고 한 손자 게멜루스 숙청으로 이어진다.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와 티베리우스 측근들이라면 이를 가는 원로원은 이 모든 과정 속에서 분노했고, 칼리굴라 역시 자신의 어머니와 큰형을 반드시 반역죄로 추방시켜야 하고, 추방 직후 자살을 강요해 죽여야 할 것을 건의한 아빌리우스 플라쿠스가 자신에게 계속 항명하자 더는 참지 못한다. 따라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는 칼리굴라에게 가부장권으로 보호받다가, 38년 초 결국 자살을 강요받는 식으로 처형됐다.[125][126] 따라서 티베리우스의 대는 칼리굴라 즉위 1년도 안 돼서 끊기게 됐고, 법적으로 마지막 혈육인 칼리굴라마저 약 4년 뒤 원로원과 근위대 일부로 하여금 불만을 품게 만들었다가 암살당하면서, 티베리우스 사후 불과 4년만에 ‘율리우스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티베리우스-칼리굴라’로 이어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은 로마 역사에서 완전히 멸문했다.[127]

[1] 오타가 아니라 부자의 이름이 똑같다. 로마에서는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는 경우가 빈번해서 뒤에 대(大), 소(小)를 붙여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덕분에 이 당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머리를 헷갈리게 만들어 과부하를 일으킨다[2] 수에토니우스는 "필리피 전투 때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와 루키우스 무나티우스 플랑쿠스가 집정관이던 해"라고 기록했다.[3]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가문의 부흥을 위해 최대한 자기 가문에 이득이 가게끔 행동한 이 당시 전형적인 로마귀족이었다. 티베리우스의 친부는 부모 양쪽이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인 사람으로 골수 원로원파였던 리비우스 클라우디아누스의 사위가 되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부터 민중파를 대표하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밑에서 일한 카이사르파였고, 직속 상관 카이사르 밑에서 카이사르군 해군을 지휘했다. 이후에도 그는 카이사르의 신임을 받아 갈리아 지역의 속주 행정작업 책임자로 파견되기도 했다. 카이사르 암살 당시, 그는 장인이 속한 원로원파와 달리 급진적 원로원파와 손을 잡지 않았고, 장인처럼 원로원파의 일원으로 활동하지도 않은 채 급박한 암살 이후 사태를 관망하다가, 삼두파 중 옥타비아누스 대신 안토니우스 쪽과 손을 잡은 인사였다.[4] 폼페이우스의 딸이자 섹스투스 폼페이우스의 누이.[5] 장님 아피우스의 장남(정확히는 차남) 푸블리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가문. 표기상 클라우디이 풀케리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파비우스 막시무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가문과 함께 공화정 파트리키 가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명문귀족가문이다. 이런 이유로 보나 데라 스캔들 당시, 피해자이자 당시 법무관 율리우스 카이사르조차 풀케르 가문에 속한 푸블리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를 기소하지 못했다. 가문의 대는 최소 3세기 이후에도 이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 가문 출신 중 한명이 3세기 시대의 황제인 푸피에누스인 것으로 최근 연구에서 발표되기도 했다.[6] 장님 아피우스의 차남(정확히는 사남) 티베리우스를 시작으로 하는 클라우디우스 씨족 분파 가문. 표기상 클라우디이 네로네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 티베리우스와 그의 아들 티베리우스, 푸블리우스 시절에는 집정관도 배출하지 못한 클라우디우스 분파 가문이었다. 그러다가 시조 티베리우스의 손자때 이르러서 집정관 등 거물급 인사들을 하나둘 배출해냈다. 그중 한명이 2차 포에니 전쟁 당시 집정관으로서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운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인데, 그는 시조 티베리우스의 손자이다. 그리고 전쟁영웅 가이우스의 직계손이 티베리우스 황제의 친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이다.[7]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의 친할아버지로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의 수장이자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의 직계손이다. 또 다른 이름은 아들, 손자와 똑같은 이름인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8] 3두의 일원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동생.[9]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둘째 아들.[10] 섹스투스 폼페이우스는 지나치게 고지식한 전형적인 로마 귀족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훗날 이런 단점으로 인해 삼두파에게 패하게 되는데, 이 당시에도 끝까지 티베리우스의 아버지의 면담 요청을 절차상 이유 등을 들어 거부했다.[11] 이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클라우다우스 네로 역시 외모가 잘생긴 명문귀족이었다. 그는 부계, 모계가 모두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이었고 젊은 시절부터 카이사르에게 능력으로 인정받은 당대 최고의 엘리트 귀족이었다. 따라서 자신의 본가와의 연결고리를 두텁게 하려는 티베리우스의 외조부는 그를 딸 리비아 드루실라의 남편으로 점찍고 두 사람의 결혼을 진행시켰다.[12] 대 드루수스, 혹은 네로 드루수스. 칼리굴라부터 네로까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황제 중 3명이 이 사람의 아들, 손자, (외)증손자이다.[13] 옥타비아누스와 리비아가 결혼했을 당시 리비아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드루수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소문도 파다했다.[14]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수장 자리는 가문 남성 중 가장 연장자인 동생 네로 드루수스의 차남이자 자신의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그는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상실했으며 본인 역시 공식 서명할 때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에서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했다. 외아들 역시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고 서명을 바꿨다.[15] 이때까지는 아우구스투스에게도 자신의 핏줄을 이어줄 대안이 많이 있었고, 본인과 아내 모두 나이가 젊었다. 더해서 클라우디우스 씨족과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문이 가진 힘을 생각해보면 아우구스투스 입장에서는 굳이 의붓아들을 입양하기 보다는 티베리우스와 드루수스가 자라서 자신과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을 돕는게 더 괜찮다고 판단한 듯하다.[16]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인 옥타비아가 가이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첫 결혼을 통해 얻은 아들로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17]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인 아그리파의 첫결혼에서 얻은 장녀이다. 그녀는 카이킬리우스 아티쿠스의 증손녀이기도 했다.[18] 동생 드루수스도 게르마니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우는데, 로마는 이를 기리기 위해 그에게 "게르마니쿠스"(게르만을 정복한 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붙여주었고, 이는 그의 아들에게 그대로 계승된다. 동생 드루수스의 전공은 대 드루수스 항목을 참고.[19] 로마인들과 갈리아인들이 부른 라인강의 옛 이름이다. 어원은 갈리아어인 레노스(흐른다)에서 따왔다.[20] 빕사니아의 어머니는 그 유명한 아티쿠스의 딸 카이킬리아 아티카였다. 카이킬리우스 씨족 출신의 명문귀족이긴 했어도, 아우구스투스의 혈통과는 연관이 전혀 없었다. 티베리우스 본인도 아우구스투스와 혈연이 없었던 판에 배우자도 마찬가지였으니...[21] 아우구스투스는 누나의 사위이자 의붓아들 중 티베리우스보다 아끼고 사랑했던 드루수스가 죽자 몹시 슬퍼했다고 한다. 당시 그는 원로원과 측근들에게 드루수스를 자신의 후계자(황제)라고 말해온 터라 충격이 더 컸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드루수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친조카 안토니아와 결혼해 죽기 전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 삼남매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외손자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리빌라를 결혼시켰고,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시키면서 드루수스의 장남 게르마니쿠스를 양자 티베리우스의 후계자로 입적시켰다. 그리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무능함과 거만함 끝에 소아시아에서 요절하자 리빌라를 양자 티베리우스의 외아들과 결혼시켰다.[22] 이야기에 따르면 드루수스는 낙마 당시, 의사로부터 다리 절단을 권유받았지만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드루수스가 죽어 유해가 이탈리아 반도에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자 평소에 승마를 그토록 꺼리던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말을 타고 이를 마중나갔다고 한다. 이후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드루수스의 유해와 함께 로마로 돌아왔다.[23]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혈연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내전에서 승리했다고 생각했고, 어린 시절 이탈리아 농촌에서 성장한 이유 등으로 유독 혈통에 집착했다. 이런 개인적인 이유 외에도 그는 티베리우스 형제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네로가의 힘을 지키기 위해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하지 않으려 했다.[24] 정황상 아우구스투스의 이후 행보 등을 종합적으로 파악해볼 때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를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해 양자로 삼을 의도도 있었을 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이 당시 너무 어렸는데 몸이 건강치 않아 골골대던 아우구스투스에게 믿을 남성 친족이라면 아내 리비아가 데려온 두 아들뿐이었다. 이중 자신의 조카사위였던 드루수스는 클라우디우스 네로 가의 수장도 아니었고, 능력도 뛰어난데다, 로마인 중에서 그가 진짜 아우구스투스의 친아들이라고 믿는 사람들도 많아서, 양자로 삼을 경우 티베리우스의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연합이 더 공고해질 최고의 카드였다.[25] 이 계획이 무산된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비록 드루수스가 죽은 다음이긴 해도 외손자인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드루수스의 딸인 리빌라를 결혼시켜 준다. 그러나 이 방법도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요절해버리면서 부질없이 끝나고 말지만, 그러자 다음에는 아예 드루수스의 아들인 게르마니쿠스와 자신의 외손녀인 아그리피나 부부에게 후계를 물려주기로 후계 방식을 바꿔버리기까지 한다. 심지어 이는 자신의 또 다른 외손자가 남아있는 상황에서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자신의 누나의 손자, 손녀라는 점도 작용했겠지만, 아우구스투스 본인 역시 드루수스를 얼마나 예뻐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26] 드루수스의 죽음이 전해질 당시, 아우구스투스는 너무 큰 충격을 받은 나머지, 하늘에게 신을 원망하는 말을 하면서 왜 드루수스를 나에게서 빼앗아가냐고 통곡했다.[27] 단순히 예상 밖인 정도가 아니라,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가 죽은 후에도 무려 26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원래 잔병치레가 많은 사람이 오래 산다[28] 같은 후견인 역할이라도 아그리파와 티베리우스의 입장은 전혀 다른데, 아그리파의 경우에는 가이우스나 루키우스 모두 자신의 친자식들이니 중간다리 역할 내지 후원자 역할을 맡는 것이 억울하거나 할 일이 없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 손에서 친아들 수준의 대우를 받으며 인생 대부분을 자란 의붓아들 티베리우스는 말 그대로 자신과는 피 한방울 안 섞인 계부의 아이들을 섭정 자격으로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이는 추측이 아니라 실제 아우구스투스가 유언장을 "가이우스와 루키우스가 없어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에게 황제 자리를 넘기지만, 그 다음 황제는 무조건 내 핏줄에게 물려줘야한다"라고 작성한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29] 대부분 로마인들이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을 돌려 쓴 것과 마찬가지의 예인데, 티베리우스의 아들 드루수스 이름은 티베리우스의 할아버지 드루수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와 죽은 티베리우스의 동생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왔다. 그리고 애초에 그 동생 드루수스의 이름은 할아버지인 드루수스에게서 따온 것이고, 동생 드루수스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형의 이름을 따서 티베리우스라고 지었다. 그리고 그 형의 티베리우스의 이름은 아버지 티베리우스에게서 따온 것이다...[30] 아우구스투스가 내린 결정을 바꿀 수 있던 사람은 그의 누나 옥타비아, 아내 리비아,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10대 때부터 친구였던 아그리파와 마이케나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에는 리비아를 제외한 세 사람이 모두 사망한 터라 아우구스투스의 결정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티베리우스의 친모 리비아가 유일했다.[31]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티베리우스 본인은 물론이고 아내 빕사니아에게까지 해가 미치기 때문이다.[32] 티베릴루스(Tiberillus)라고 하며, 유아기에 죽었다.[33] 황제에 오른 후에도 티베리우스가 말년에 또 섬으로 은둔이라고 하기에는 티베리우스는 제국의 모든 일을 처리하고 있었지만했던 것도 이와 연관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34] 이 당시 티베리우스가 로도스에서 로마로 돌아오지 못한 이유 중 한 가지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존재도 컸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지위에 위협이 될 티베리우스의 복귀를 허가하지 않으려고 했고, 실제로 티베리우스를 복귀시킬 때 아우구스투스는 이들의 반발을 최소화시키기 위해서 '어떤 공직도 맡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어야 했다.[35]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편지들에서 티베리우스를 언급한 부분들은 항상 “나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 “우리의 사랑하는 아들 티베리우스”, “내 아들 티베리우스”라고 적혀있었다고 한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성년식을 치른 이후 그를 장남의 자격으로 대하며 가족 중대사를 의논할 정도로 티베리우스에게 상당히 의지했다고 한다.[36] 상대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일 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장남으로 생각했고, 원로원 귀족들이 티베리우스를 비난하거나 안 좋게 말하면 분명한 어조로 이에 대해 불쾌함을 표시하거나 티베리우스의 행동을 변호했다.[37] 드루수스는 태어날 때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아닌가 하는 소문이 돌았고, 실제로 그렇게 믿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를 친아들 이상으로 매우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에게 전령을 통해 드루수스가 낙마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서 절망하며 자신에게 드루수스를 빼앗고 왜 데리고 가냐고 외치며 통곡했다. 그래서 드루수스의 관이 이탈리아 국경에 거의 다 왔다고 소식을 전해듣자마자 평소 말타기를 끔찍히 싫어함에도 손수 말을 몰고 드루수스 유해로 달려 갔다. 훗날 자신의 직계인 후계자 후보들이 모두 탈락하자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적했음에도 드루수스의 아들이자 사랑하는 게르마니쿠스를 다음 후계자로 생각해 티베리우스의 양자로 입적시키고 차기 후계자로 낙점시켰다. 아울러 신체적 결함으로 적합한 후계자가 되지 못하는 드루수스의 차남 클라우디우스에게도 다른 황실 사람들과 달리 굉장히 다정다감했다. 그래서 아내 리비아가 클라우디우스를 가문의 수치라고 부끄러워함에도 자신과 함께 저녁식사를 하도록 하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며 관심사를 파악하고, 그가 가진 비범함과 연설 실력들이 자신을 기쁘게 한다고 칭찬했다. 또 자신의 친구인 당대 최고의 역사가 리비우스를 그의 스승으로 붙여주며 후원해 어린 나이였던 클라우디우스를 명망높은 역사가로 자리잡게끔 후원했다.[38] 본명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이고, 아우구스투스의 손자로 공식 입적되기 전까지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였다. 이 이름은 삼촌 대 드루수스의 이름을 그대로 따온 이름인데, 오늘날 알려진 이름인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휘는 아버지 티베리우스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된 이후 바꾼 이름이다.[39] 아우구스투스는 두 외손자를 양자로 입적시킨 뒤 키우면서 이례적으로 본인이 직접 교육을 관장했다. 여기에는 글쓰기, 식사예절, 걸음걸이 등등을 모두 자신과 똑같이 하는 훈련도 있었다.[40] 로마인들의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식간의 위계질서가 상당히 강조되고, 가부장법이 있을 정도로 권리를 보장받았다. 따라서 상식적으로 ‘황태자와 신하 간의 관계’라는 특수성을 생각해봐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의 친모 율리아와는 법적으로 결혼했던 상태였고,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되었어도 계부이자 의붓외삼촌이었다. 또 티베리우스는 집안어른의 자격으로 가이우스 카이사르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에게 군무 경험을 쌓도록 해준 웃어른이자 엄연히 로도스로 파견된 황제의 공식 대리인 신분이었다. 그래서 이 사건은 티베리우스가 황제 대리인으로서 예를 갖췄다고 해도 당대 로마인들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41] 롤리우스는 티베리우스와 라이벌이었고 그를 굉장히 싫어하는 인물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런 롤리우스와 마찬가지로 티베리우스 역시 롤리우스를 굉장히 싫어했다. 왜냐하면 롤리우스의 위선적인 태도와 속주민들을 강탈해 막대한 부를 취득한 행동을 굉장히 경멸했기 때문이다. 이런 티베리우스의 태도는 롤리우스가 자살한 이후에도 바뀌지 않았는데, 귀국 후 티베리우스는 다시 정치 활동을 재개하면서 평소 그답지 않게 롤리우스를 공개적으로 강하게 비난했다. 이때 그는 원로원에서 롤리우스의 파렴치한 재산 축적과 위선적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성토했다.[42] 당시 아르메니아 문제 해결 과정에서 또 다시 같은 일이 생긴다면 그때는 가이우스 카이사르에게 버림받은 상태에서 로마로 귀환이 확정될 티베리우스 측의 고발 및 문제 공론화가 벌어질 상황이었다. 따라서 롤리우스 입장에서는 가이우스 카이사르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실제로 롤리우스가 음독 자살을 한 이후, 그의 막대한 재산들은 국고로 귀속되지 않고 모조리 롤리우스의 손녀에게 상속됐다. 이때 아우구스투스는 롤리우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에 롤리우스 고발 사건을 넘어갔는데, 공식 후계자로 등극하게 된 티베리우스는 롤리우스의 부정한 재산 증식과 약탈에 가까운 착취 문제 등을 거론하면서 맹비난했다.[43] 아우구스투스의 두 외손자는 살아생전 원로원과 민중 모두에게 진짜 인기와 인망이 없었다. 그 원인에는 두 사람의 지나친 거만함과 매력없는 성격 탓도 있었지만, 이들의 어머니 대 율리아의 행실 문제 등이 큰 이유였다고 한다.[44] 아우구스투스의 누이인 옥타비아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딸이다.[45] 게르마니쿠스의 처남인 아그리파 포스투무스와 조카 대 안토니아가 시집가서 낳은 외종손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네로의 친부)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아그리파 포스투무스는 밑에서 언급되듯이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이미 부적격자로 판정받아 유배됐다가 티베리우스의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명으로 처형됐다. 또 게르마니쿠스와 이종사촌지간인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의 경우에는 친가 자체가 워낙 평판이 안 좋고, 그나이우스 역시 상당히 문제가 많은 사람인데다, 리비아 드루실라의 친손자인 게르마니쿠스와는 부계 혈통적으로도 상대가 안 되는 방계 황족 정도였다.[46] 게르마니쿠스, 리빌라, 클라우디우스.[47] 흔히 그녀와 게르마니쿠스의 장녀와 구분하기 위해 대 아그리피나라고 하는 사람이다. 그녀는 율리아와 아그리파의 딸이자 세 번째 아이인데,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자손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정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128][48] 단점이 있다면 하체가 호리호리했다는 부분이었는데, 이 약점까지 군복무를 하면서 승마 등으로 튼실하게 단련시켰다고 한다.[49]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아들이 되었기에 율리우스 가문의 가장이 아닌 피보호자가 되었다. 따라서 이전처럼 클리엔테스들에게 선물을 하거나 노예들에게 자유를 줄 수가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유산을 임의로 상속받을 수도 없게 되었다.[50] 드루수스의 둘째 아들로 위에서 말한 게르마니쿠스의 친동생이다. 그리고 이것이 이미 이때부터 티베리우스의 다음 황제로 게르마니쿠스가 내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51] 참고로 이 조카 클라우디우스의 풀 네임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게르마니쿠스로, 티베리우스 본인과 아버지 티베리우스와도 이름이 거의 똑같다. 그만해 이것들아!!![52] 마찬가지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아그리파 포스투무스가 있으면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의 계승에 걸림돌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아그리파가 후계자 선정에서 탈락된 이유는 성격이 본래 난폭하고 힘이 세서 주변 사람들도 제어하기 힘들었던 ‘망나니’ 내지 골칫거리였기 때문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후 아우구스투스가 죽기 전 완전한 일처리를 위해 그가 있던 유배지에 병사들을 보내 죽이게 하는데, 힘이 장사여서 죽이기가 아주 힘들었다고 한다.[53] 포스투무스는 입양관계를 통해 파양 전까지는 법적으로 티베리우스의 '동생'이었고, 파양 이후에는 율리아의 양오라버니였기 때문에 외삼촌과 조카 사이였다. 여기에 더해 포스투무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유일한 혈육인 율리아가 아그리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54] 티베리우스는 동생 드루수스와 마찬가지로 외모가 잘생기고 키가 상당히 컸으며 체격도 좋았는데, 젊은 시절부터 원로원에게 대놓고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그 이유 중 가장 큰 원인은 성격 자체가 상당히 과묵하고, 아부를 굉장히 싫어했기 때문. 여기에다 상대와 대화를 주고 받을 때 천천히 말하면서 손 제스처를 많이 쓰고, 상대의 두 눈을 계속 응시해서 그게 싫다고 미워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그를 유년기 때부터 친아들처럼 키운 아우구스투스는 살아생전 여러 번에 걸쳐 티베리우스를 변호하고, 아버지로서 티베리우스에 대한 오해를 거둬달라고 부탁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아우구스투스도 자신이 키운 티베리우스의 이런 행동을 썩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데, 재밌게도 두 사람은 성격이 많이 비슷해 전반적으로 차가운 얼음같을 정도로 냉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차이가 있다면, 아우구스투스의 경우에는 정적들과 달리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진심으로 굉장히 따뜻한데다, 원로원의 각종 아부를 흔쾌히 받아줄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는 점.[55] 동시대 역사가 가이우스 살루스티우스 크리스푸스의 조카이며 양자이다.[56] 아우구스투스[57] 특히 이 부분에 대해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공정성을 잃을 정도로 비판적이었던 수에토니우스에게 심하게 까였다.[58] 하지만 그때까지 뚜렷한 전공도 없던 게르마니쿠스가 반란을 잘 처리한 것은 그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59]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상당히 많은 지출 - 그는 시민들의 제정에 대한 지지를 확고히 하기 위해 이런저런 지출을 많이 했다. 게르마니아와 도나우 강 일대의 군사작전으로 인한 군사비 지출도 만만치 않았다. - 이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지출을 수습해야 했고, 긴축재정은 필연적이었다.[60] 과거 칼리굴라의 악행 중 하나로 설명된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숙청 사건이 그것인데, 근현대에 이르러 티베리우스와 칼리굴라가 재연구되고 재평가되면서 티베리우스와 대 드루수스 이래 3대째 내려온 카이사르 가문 파벌 다툼의 종결판으로 이 사건은 해석되고 있다.[61] 게르마니쿠스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외손자였던 반면, 드루수스는 어머니가 기사계급 출신에 더해, 클라우디우스 가문에게 가문의 오점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단단히 찍힌 아티쿠스의 후손인 터라 카이사르 가문 내에서 혈통적으로 차이가 명확했다고 타키투스는 기술했다.[62] 키케로의 친구로 유명한 로마 공화정 후기의 저술가이다. 기사계급 출신이었으며, 소 드루수스의 외할머니가 아티쿠스의 딸 아티카였다.[63] 즉 티베리우스는 로마의 재정으로 감당할 수 있는 영토가 딱 라인 강까지라고 판단했다는 소리다.[64] 게르마니쿠스가 티베리우스와 이집트 장관의 허락 없이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한 행동은 아우구스투스 생전부터 누구라도 크게 처벌받을 위법행위였다. 그럼에도 티베리우스는 큰 사건이 될 법한 이 사건을 해프닝처럼 마무리지었다. 그는 황제로서 원칙에 따라 게르마니쿠스에게 편지로 행동을 지적하고, 혼을 낸 뒤 원로원 앞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는 선에서 넘어갔기 때문이다. 만약에 티베리우스가 진짜 자신의 친조카 게르마니쿠스를 견제하려 했거나 꼬투리잡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국법상 엄벌에 처할 수 있음에도 이렇게 혼만 내고, 원로원과 휘하 관료들에게 더 이상 이 문제를 걸고 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피소가 재판을 받을 당시, 명령불복종죄와 함께 이 부분을 딴지 걸고 넘어간 사건은 티베리우스에게 유죄사유 중 하나로 제시됐다.[65] 이에 아그리피나는 끝까지 피소 부부가 남편을 독살했고, 그 뒤를 사주한 건 남편의 양부이자 백부인 티베리우스라고 의심해 갈등을 일으켰다. 이후 아그리피나의 보호막이었던 소 드루수스가 급사하고, 이 틈을 노린 세야누스가 리빌라와 함께 집안팎에서 티베리우스와 아그라피나를 이간질한 뒤, 그녀에게 누명을 씌워 반역죄로 장남과 함께 유배보내버린다.[66] 티베리우스는 장례식 불참을 알린 이후에도 원로원에서 여러 번에 걸쳐 친조카이자 양자인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여러 번에 걸쳐 아쉬워했다고 하는데, 민중들은 거짓말까지 한다고 더 폭발했다.[67]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탐탁찮게 보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위에 명령서 위조나 게르마니아에서의 소환처럼 게르마니쿠스와 정책적인 면에서 충돌이 있었고, 게르마니쿠스가 이집트가 황제직할령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사전통보도 없이 가족들과 알렉산드리아에 방문했던 일도 있어서 이를 티베리우스와 원로원에게 지적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인기가 많다고 해서 이를 견제하려는 성격도 아닌 사람이었고, 이집트 사건에서 보여지듯 잘못을 지적하고 혼내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여기에다 소문처럼 독살 등을 피소에서 사주하는 방법을 이용해 게르마니쿠스를 굳이 죽일 이유도 없었다. 당장 게르마니쿠스가 죽으면 티베리우스가 잃을 것은 상당히 많았다. 하지만 이를 몰랐던 민중들은 이 사건 이후 티베리우스를 더 미워하게 됐다. 여기에다 마지막 기대를 갖게 만든 피소 재판마저 결과가 나오니, 티베리우스는 더더욱 민중의 지지를 잃어버렸으며, 집 안에서는 재판 결과에 상당히 실망한 대(大) 아그리피나의 끊임없는 반항에 매일 직면해야 했다. 게르마니쿠스 사후 황실 내부에서 내분과 불화가 끊이지 않았으며 통치의 안정성이 떨어졌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티베리우스가 굳이 위험을 감수해가면서까지 게르마니쿠스를 죽일 이유는 없었다.[68] 후에 황제에 오르는 네로의 외삼촌인 사람이지만, 네로와는 동명이인이 아니다. 5대 황제 네로의 이름은 네로 클라우디우스 카이사르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인 반면, 이 사람의 풀네임은 네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정혼받은 약혼녀가 있었음에도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파혼당하고 성년식 후 소 드루수스의 딸과 결혼했다. 따라서 그는 티베리우스에게 일찌감치 차차기 황제로 지명받았다.[69] 칼리굴라의 둘째 형으로 풀네임은 드루수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 네로 카이사르가 세야누스의 음모로 억울하게 죽은 뒤 티베리우스에게 후계자로 낙점되고 원로원에 공식적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훗날 그는 세야누스의 음모로 황궁 지하실에 감금됐고, 세야누스 숙청 직전 은밀히 명이 내려져 후계자인 그를 풀어주고 근위대를 지휘하게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지만 풀려나지 못하고 굶어 죽었다.[70] 훗날 황제에 오르는 칼리굴라이다. 칼리굴라는 "작은 군화"라는 뜻인데, 그가 아버지인 게르마니쿠스를 따라 병영 돌아다닐 때 얻은 별명이다. 이때 어린 칼리굴라의 인기는 거의 아이돌 수준이라, 아우구스투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단병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때, 어떤 짓이라도 할 것 같던 군단병들이 칼리굴라의 모습을 보자 금세 진정하고 정신을 차렸다고 한다. 하지만 게르마니쿠스는 칼리굴라를 보호하기 위해 이웃 도시로 보내려 했고, 이를 안 병사들은 로마인들인 자신들의 품에서 갈리아 지방으로 칼리굴라를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못을 크게 뉘우쳤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병사들은 마차를 붙잡아 세운 다음 게르마니쿠스에게 간곡히 용서를 빌기도 했다.[71] 게르마니쿠스와 소 드루수스의 관계는 혈연상 사촌, 법적으로는 형제지간이면서 인척관계였다. 그럼에도 둘은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가 워낙 좋았다. 소 드루수스는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판노니아 총독으로 있던 중에 밤낮으로 달려 먼저 게르마니쿠스의 유해가 도착할 도시를 들린 뒤 다시 로마로 가서 클라우디우스와 정부 인사들을 데리고 다시 내려갔다고 한다. 이후 그는 직접 게르마니쿠스 유족들을 위로하고 함께 아피아 가도를 통해 로마로 올라간 뒤 모든 장례절차를 주관했다. 이때 그는 상주노릇을 했고, 작은아버지이자 고모부로서 게르마니쿠스의 아들들의 보호자가 됐다고 한다.[72]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에서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가 자신에게 한 것과 똑같이, 네로 카이사르를 멀쩡히 잘 있던 혼약자와 파혼시키고 자신의 손녀와 결혼시킨다. 그렇게 싫어하더니, 하는 짓이 양아버지와 판박이다[73] 로마의 독특한 황제 제도상, 공동집정관과 호민관 특권을 부여 받는다는 것은 거의 공동황제이자 후계자로 임명받은 것이나 다름없다.[74] 한번은 티베리우스가 이동 중에 낙반 사고가 일어났는데, 세야누스는 자신의 몸으로 티베리우스를 보호하여 티베리우스의 믿음을 굳혔다.[75] 수에토니우스가 이를 받아들여 자세히 기록해 두었지만, 그가 가십을 주로 기록했던 것을 감안하면 신빙성은 높지 않다. 심지어 티베리우스에게 비판적인 타키투스조차도 이런 이야기는 싣지 않았고 거기다가 티베리우스 자신은 무척 자기 절제가 뛰어난 인물이었다.[76]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이후에도 황태후 리비아는 남편 아우구스투스 생전처럼 율리우스 가문 내 중대사를 처리하고, 아들 티베리우스에게 정치적으로 간섭까지 했다. 당연히 황제이자 율리우스 가문의 수장인 티베리우스는 지나치게 권력을 행사하던 친어머니에게 가문의 일과 정치에 더이상 개입하지 말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리비아는 그런 친아들의 요구를 거부했고 자신이 가진 권한을 행사했다. 따라서 친모자관계임에도 두 사람은 대립하였고 급기야 티베리우스는 어머니 리비아가 남편 아우구스투스 생전에 누린 특권과 명예들을 박탈하게 된다.[77] 티베리우스의 대표적인 단짝친구로는 훗날 황제가 되는 네르바의 할아버지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가 있다. 그는 티베리우스가 진심을 털어놓고 말할 수 있는 친구이자 황제의 법률자문이었고, 당대 최고의 법률가 중 한명이었다. 네르바는 자신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마자 친구 티베리우스를 따라 자발적으로 카프레아이 별궁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카프레아이에서 티베리우스가 죽기 4년 전에 사망했다.[78] 티베리우스는 대 아그리피나를 제거하면서 네로 카이사르 제거까지는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듯 했지만, 드루수스 카이사르마저 긴급체포되자 상당한 의문을 표했고 이를 알고자 했다. 따라서 세야누스 음모가 여러 사람에게 고변되자, 세야누스 처단 과정과 그 이후 과정 내내 드루수스 카이사르 석방, 복권을 지시할 정도로 그 선은 지키려고 했다.[79] 로마사 연구자들은 드루수스 카이사르 측과 티베리우스가 내세운 세야누스 측의 연합이며, 티베리우스의 시나리오는 드루수스 카이사르를 후계자로 확정지은 결정이었다고 말한다.[80] 당시 23살이었던 네로 카이사르는 원래 아버지 게르마니쿠스가 정해준 유니우스 살리누스의 딸과 약혼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 약혼은 티베리우스의 결정에 따라 파기됐고, 네로 카이사르는 티베리우스의 결정에 따라 차기 황제로 확정된 삼촌이자 고모부 소 드루수스의 장녀 율리아와 결혼했다.[81] 또는 백부장 등을 보내 자신을 죽일 거라는 말을 듣고 난 뒤, 본인 스스로 운명을 결정해 자결했다고 한다.[82] 원로원 의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후손인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의 친척으로 29년 드루수스 카이사르와 결혼했다.[83] 아이밀리아 레피다는 남편 드루수스 카이사르가 33년 황궁지하실에서 죽은 뒤, 3년이 지나고서야 죄가 밝혀졌는데 그 과정에서 그동안의 간통이 밝혀졌고, 이후에도 자신의 노예들과 간통관계였음이 또 밝혀져 자살 형식을 빌린 방법으로 처형됐다.[84] 카시우스 일족 출신의 수사관이다. 32년 추방됐으며 추방된 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저서들은 네로 카이사르와 드루수스 카이사르의 동생 칼리굴라 시대에 모든 저서 출판이 금지되었다. 그는 수사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지만, 워낙 냉소적인 냉혈한으로도 유명한 변호사였는데, 상당히 공격적이고 잔인한 방법으로 상대를 공격하던 것으로도 유명했다.[85] 소 드루수스, 아그리피나,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86] 율리아 안토니아(소 안토니아)는 아우구스투스의 외조카, 안토니우스의 딸로, 티베리우스가 진심으로 존중하고 신임한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87] 대략 20년경의 일인데, 약혼 이야기가 나오고 얼마 안 되어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가 요절하는 바람에 흐지부지되었다.[88] 그리스 출신으로 이 당시 대략 30살에서 37살 사이였다고 전한다. 그는 이 사건 이후,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한 안토니아에게 자유를 선사받고 해방노예가 됐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안토니아와 그녀의 가족들을 도왔다. 팔라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이자 훗날 4대 황제가 되는 클라우디우스의 해방노예 관료 3인방 중 한명으로도 유명하며, 게르마니쿠스의 장녀 소 아그리피나의 최측근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89] 세야누스의 음모 사실을 알리고, 티베리우스의 동생 드루수스와 그의 장남 게르마니쿠스의 마지막 혈육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보호해달라는 간곡한 호소.[90] 티베리우스는 평상시 냉소적이고 잔정이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친동생 드루수스에게만은 유독 다정다감했고 진심으로 동생을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형제 간 우애가 아주 좋았다. 또한 티베리우스는 동생의 아내 소 안토니아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신뢰했다. 이유는 소 안토니아가 20대 중반에 남편과 사별했음에도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적인 명령도 거부하면서 재혼을 거부한 뒤 남은 아이 3명을 그 누구의 도움도 요청하지 않으면서 키웠고, 어떤 남자와의 염문도 없을 정도로 남편 드루수스에 대한 정절을 지켰던 부분 때문이었다. 그래서 소 안토니아는 시아주버니 티베리우스와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에게 큰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91] 호민관 특권은 다름아닌 신체불가침특권이기 때문에, 이걸 주면 제거해버리기가 곤란해지기 때문이다.[92] 이 당시 소방대는 단순히 불을 끄는 것만이 아니라 경찰의 업무도 겸하고 있는 무력집단이었다.[93] 자신을 우월화하면서 도미누스라는 표현을 사용케한 도미티아누스와 달리 티베리우스는 말년 공포정치 중 분노의 일갈을 서한에 보내면서도 늘 원로원에게 존칭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줬다.[94] 타키투스는 이 문구에 대해 티베리우스가 자신이 공포정치로 한 행동이 얼마나 죄악이고 파렴치한 건지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쓴 내용이라고 언급했다.[95] 친동생 대 드루수스와 처제 소 안토니아를 무척 아끼고 다정다감했다거나, 젊은 시절 양부 아우구스투스가 한 원로원 의원에게 "연설 소리가 작네요. 뭐라고 하셨지요?"라고 조롱받자 이성을 잃고 그 의원들을 죽일 듯 달려들었다던지, 조카 클라우디우스에게 쌀쌀맞게 구는 것 같아도 아우구스투스와 함께 조카의 미래를 걱정해 "우리부터 이 아이에게 자신감을 심어줘야 한다"고 한다던지 등.[96] 그것도 아직 세야누스가 음모를 꾸미기 전이었던, 세야누스의 아버지 생전 친분이 있던 사이였다고 한다.[97] 황제를 뜻하는 명사가 아니라 티베리우스의 성씨가 카이사르였기 때문에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가이우스(칼리굴라)를 부를 때 카이사르라고 했다. 이는 테렌티우스의 발언 외의 타키투스 저서 중 티베리우스, 가이우스 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로마에서 카이사르가 황제명사로 변해 원로원에서 사용된 건 클라우디우스 시대부터였다. 따라서 법정에서 최후진술 중 테렌티우스가 티베리우스를 카이사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타키투스는 마치 티베리우스가 평소 원로원에 있던 것을 연상케 하듯 그를 이렇게 불렀다고 말하고 있다.[98] 원로원 의원들은 기소 당해 변론을 할 때 세야누스 사건을 티베리우스의 공식직책 임페라토르를 사용해 ‘국가 전복 음모계획과 임페라토르 암살계획”이라고 했다.[99] 소 안토니아의 삶을 생각하면 딸 리빌라의 행동은 배신 그 자체였을거라고 분석되고 있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남편이 요절하면서 홀로 세 아이를 키우면서도 외삼촌 아우구스투스의 강압적인 재혼 명령들을 끝까지 거절한 안토니아는 그 흔한 뜬소문도 내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정절을 지키며 자신의 자녀들과 손주들을 손수 키웠다. 물론 이때 남편이 남긴 세 자녀에 대한 기대치도 상당해서 몸이 불편한 막내아들 클라우디우스에게는 상당히 냉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 대해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진심으로 그녀를 존경하고 아꼈다고 한다.[100] 이 말은 리빌라의 시신을 로마시를 돌면서 질질 끌고 조롱하다가, 티베르 강과 통하는 하수구에 버려버린다는 것을 뜻한다.[101]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비극적인 가족사 덕분에 셋째 아들인 칼리굴라는 로마 시민들의 동정표를 얻었고, 여기에 아버지의 후광이 더해져 그는 티베리우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은 인기를 얻고서 황제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102] 티베리우스가 사망했을 때의 나이는 79세로 그 당시의 평균 수명을 보면 굉장히 오래 살았다.[103] 이는 칼리굴라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역시 자신의 어머니와 두 형을 죽인 것은 세야누스 외에 공범인 원로원도 있다고 울분을 토했다.[104] 이때 원로원은 베스쿨라리우스가 그동안 했던 악행을 그 자신이 그대로 뒤집어 쓴 것이라고 좋아하면서, 티베리우스의 고발 서한을 열렬히 환호했다고 한다.[105] 타키투스의 표현처럼 20대 중반의 황녀가 다른 젊은 귀족 중 한명과 재혼한 것이 아닌, 55살의 늙은 기사계급 태생의 원로원 신참자인 전직집정관 루벨리우스와 재혼했다는 점에서 안 좋은 이야기가 나왔다고 한다. 따라서 율리아 리비아의 재혼은 로마 사회에서 “누구에도 환영받지 못한 결혼”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루벨리우스가 북아프리카 속주 총독 시절 벌인 안 좋은 사건과 평판, 그리고 일부러 독신으로 살다가 갑자기 재혼한 이유 등이었다고 하는데 이는 루벨리우스의 조부 루벨리우스 플라우투스가 로마 역사상 최초로 수사학을 가르친 인물인 점과 그가 기사계급 출신임에도 훌륭한 수사학자 집안에서 자란 뒤 집정관까지 역임한 점, 티베리우스 시대 내내 그 능력이 뛰어났음에도 티베리우스와 원로원 모두에게 안 좋게 비춰질 수 밖에 없었다.[106] 이 재혼은 이후에도 재혼 전 신랑의 행보로 인한 이미지 탓인지 출신의 차이로 인한 귀천상혼인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결국 비극으로 끝나게 된다. 클라우디우스 시대 당시, 메살리나 황후는 자신의 남편과 어린 아들을 위협할 정적으로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아들들을 생각했고, “제위를 노린다”는 합리적 이유를 들어 견제하다가 43년 반역죄로 기소했고 재판 후 유죄 판결이 나오면서 티베리우스의 손녀와 몇 없는 후손들은 처형과 자살로 모두 제거됐다. 아울러 이 기소 당시 온화한 성격의 클라우디우스 역시 율리아 리비아와 그녀의 아들들의 기소 당시 다른 반역죄 건과 달리 조사 후 끝내 유죄 선고를 내릴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107]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 밑에서 상당히 총애받은 인사이자 대 드루수스가 각별히 아낀 참모로, 제정시대의 충신이자 명장 코르불로의 외삼촌이다.[108] 더 이상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일가의 지지를 받는 클리엔테스가 아니라는 정치적 사망선고였다.[109] 이 방식으로 반기를 든 부자들은 기사계급에 속한 사람들이었고, 놀랍게도 원로원 의원이나 고위귀족들은 고리대를 금지한 법을 잘 지킨 탓에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들이 인격적으로 우수했거나 청렴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들은 31년부터 시작된 티베리우스의 진노를 경험해 몸을 사리면서 꼬투리잡힐 일까지 전부 포기한 경우가 많았다.[110] 실제로 고리대 문제로 인한 불만은 폭동을 유발하거나 로마 내에서 호민관 같이 신성불가침권을 가진 인사들조차 암살될 정도로 문제가 심각했고 이때 고리대 문제로 폭동이 시작된 터라 반역죄로 처벌해도 기소된 고리대급업자들 입장에서는 할 말이 없었다고 한다.[111] 칼리굴라의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아우구스투스의 직계일 뿐 아니라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피, 아그리파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까지 모두 이어받은 후덜덜한 혈통이다. 반면 게멜루스는 티베리우스의 손자로서 클라우디우스 가문과 아그리파의 피, 안토니우스의 피를 이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아우구스투스의 조카인 안토니아의 외손자로 아우구스투스의 직계는 아니다. 심지어 게멜루스의 경우, 어머니 리빌라가 세야누스와 불륜 관계를 맺고 황실 남자황족들을 제거한데다 간통 및 반역죄로 처형당한 상태였다. 따라서 세야누스의 아들이라는 루머까지 돌았고, 티베리우스 생전부터 어머니 문제로 정통성에 흠집까지 생긴 상태였다.[112] 티베리우스는 자신의 곁에서 강한 권력을 가지고 원로원을 상대하는 통치 등을 칼리굴라에게 가르쳤다. 이 때문인지 칼리굴라는 제위를 이어받은 이래 어리고 미숙했다. 따라서 즉위 8개월 만에 중병에서 쓰러진 이후, 건강을 회복한 직후부터 티베리우스 재위 후반과 똑같은 방법으로 정국을 운영했고, 똑같은 방식으로 근위대와 원로원을 대하다가 결국 근위대 손에 암살됐다.[113] 로마에서 원로원 계급 내 결혼은 지극히 이해중심적이었고 형식적인 경우가 많았다. 또 출산이 가능한 여성들이 20살부터 감소한 이유 때문에 기원전 1세기 카토가 자신의 친구 호르텐티우스에게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아내를 친구의 아내로 준 일도 있기도 했고, 남편이 먼저 아내를 상대방에게 신붓감으로 제안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114] 마크로가 자신의 아내 엔니아와 함께 공모 후 칼리굴라에게 접근해 그에게 결혼약속을 하게끔 한 일을 마크로 측과의 동맹 형태로 바꾼 일.[115] 영화에서는 티베리우스가 게멜루스와 칼리굴라가 다 같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면 게멜루스를 죽일 테니 조심하라고 주의를 준다.[116] 두번째 아내의 부정한 행동에 휘둘리고, 해방노예들을 비서로 삼고 통제하면서도 그 결정이 좌지우지된듯한 태도, 그리고 클라우디우스가 어린 시절부터 황실과 원로원 귀족들에게 신체적 장애 탓에 보통은 무시당하고 소외된 일들.[117] 명의 카리클레스가 이때 연회를 베풀며 평소처럼 행동한 티베리우스의 맥박을 체크했고, 그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짐작한 티베리우스는 일부러 연회를 계속 진행케하면서 카리클레스의 위신을 높여줄 요량으로 오랫동안 긴 안락의자에 누워 자신이 건강한 척 행동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런 그의 행동에도 의사는 마크로에게 이를 말했고, 주변에 있던 황제 측근들은 서둘러 회의를 연 뒤 속주 총독과 각 군대에 급사를 파견해 그 사망을 대비했다고.[118] 하지만 정통성에서도 칼리굴라가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민심도 칼리굴라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었고, 게멜루스의 나이마저 너무 어렸기에 이 정도로 게멜루스가 칼리굴라를 상대하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일설에는 티베리우스가 생전에 게멜루스를 위해 칼리굴라도 트집을 잡아서 죽이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지만, 칼리굴라가 처신에 극도로 신중을 기하고 자신을 낮춰 이를 전부 피해갔다고 한다. 자세한 것은 항목을 참고.[119] 당대 로마인과 후대 로마인 그리고 현대 학계까지 입을 모아 말하듯이, 티베리우스의 이 조치는 결국 38년 초 티베리우스 게멜루스 처형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되돌아오고 만다. 티베리우스가 내린 오판 중 최악의 결말이었는데,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숙청하게 된 원인은 공교롭게도 티베리우스 유언장이었다. 왜냐하면 티베리우스 유언장을 명분으로 아울루스 아빌리우스 플라쿠스로 대표된 티베리우스 측근, 친구들이 칼리굴라를 골탕 먹이고, 항명한 일련의 도전들은, 티베리우스 생전 관계가 최악인 원로원과 이런 권력 투쟁 속에서 황권을 공고히 해야 될 칼리굴라 모두에게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이지 않고는 해답이 없다고 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120] 이 죽음에 대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기술은 참으로 후덜덜한데 그 내용은 이렇다. "경기장에서 창을 던지는 시범을 보여달라는 요청을 받은 티베리우스는 어깨가 탈골되면서 혼수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황제가 혼수상태가 되는 일이 길어지자 로마 원로원은 칼리굴라를 황제로 추대했는데, 갑자기 티베리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식사를 요구하자 로마와 칼리굴라 모두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모두가 황제가 무슨 광태를 벌일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상황에 빠진 것을 구원한 것은 근위대장인 마크로였다. 그는 잠자고 있던 티베리우스를 베개로 눌러서 질식사시켰다." 브리태니커의 기술에 사용된 자료는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거한다. 수에토니우스의 기록은 타키투스의 기록을 참조한 이야기. 다만 티베리우스 치세 당시의 로마인이었던 박물학자 대(大) 플리니우스는 그냥 노화에 의한 자연사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티베리우스를 굉장히 혐오했던 타키투스의 기술이었던 만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곤란하다.[121] 말년의 스탈린을 다룬 영화 <붉은 황제>에서 스탈린의 죽음 부분은 티베리우스의 죽음에 얽힌 소문과 매우 흡사하게 묘사된다. 죽은 줄 알고 다가갔는데 눈을 번쩍 뜨길래 목을 졸라 살해...[122] 이런 까닭에 칼리굴라가 암살된 이후 나온 소문이 오늘날에는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확정된 “칼리굴라가 티베리우스를 베게로 질식사시키고 억지로 손가락에서 반지를 뺐었다. 이때 근위대장의 아내와 간통을 하고 주변에 거액의 후원금을 미끼로 충성을 받아낸 뒤 본토에 돌아와 실감나게 우는 연기를 펼쳤다”이다.[123] 고대 로마 시절에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르지 않고 테레베 강에 던지는 건 극악무도한 범죄자에게나 행해지는 행위였는데 이런 인식은 로마가 교황령이 되고 오랜 시간이 흐른뒤에도 남아있었다.[124] 에퀴테스 출신의 로마 원로원 의원이자 관료로, 티베리우스의 최측근이자 소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게멜루스의 지지자였다. 세야누스가 대 아그리피나, 네로 카이사르를 모함해 반역죄로 기소할 당시, 결정적으로 대 아그리피나를 공격하는 등 칼리굴라 입장에서는 원수와 같았다. 하지만 그는 칼리굴라의 조부 대 드루수스와 죽마고우로, 칼리굴라와 게멜루스 사이의 가교 노릇을 티베리우스 생전 내내 했고, 칼리굴라의 두 형 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구명을 적극적으로 하고, 카프리 섬에 있던 칼리굴라를 챙긴 존재였다. 그렇지만 그는 티베리우스 게멜루스가 황제로 만들고자 칼리굴라를 견제했고, 38년 초 게멜루스가 처형된 뒤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벌어진 그리스인 폭동을 방치하고, 무고한 유대인과 그리스계 주민들을 십자가형으로 죽여, 칼리굴라가 유대인 필로로 대표된 인사들과 면담하고 개입하는 사태를 유발시켰다. 이런 이유로 그는 이 사건 해결 직후, 머리 끝까지 열받은 칼리굴라에게 반역죄로 기소됐고, 원로원 동료들에게도 지탄을 받아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뒤, 추방지에서 처형됐다.[125] 그나마 게르마니쿠스의 어머니이자 칼리굴라의 할머니, 동시에 게멜루스의 외할머니가 되는 안토니아만이 게멜루스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지만, 열병 이후 권력과 자신의 안위에 집착하게 된 칼리굴라를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친손자가 외손자를 죽이는 동족상잔을 보고 크게 상심한 안토니아는 얼마 안 가 병으로 사망한다.[126] 안토니아는 바로 저 칼리굴라를 살리기 위해 티베리우스에게 피신을 보냈던 장본인인데, 얄궂게도 그녀의 이런 선택의 결과로 외손자가 죽게 된 셈. 거기다 아우구스투스의 조카로 태어나 티베리우스의 제수씨이자 동생 드루수스의 아내로 일찍 남편을 여의고도 오랜기간 생존한 그녀이지만, 자신의 딸이 사위를 독살하거나 다른 손자들을 죽이는데 일조하고, 손자들끼리 죽고 죽이는 등 온갖 못 볼 꼴을 다 지켜봐야했던 기구한 인생을 살았다.[127] 이 뒤는 오히려 티베리우스의 원래 가문인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황제들이 잇게 되는데,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클라우디우스와 그의 양자이자 조카손자인 네로이다. 이 네로는 칼리굴라의 여동생인 소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라 클라우디우스 가문 출신이면서도 아우구스투스의 피도 이은 인물이지만, 결국엔 이 클라우디우스 왕조마저도 27년만에 끝장났으며 네로의 광적인 친족 살해로 인해 이쪽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 처럼 전멸하고 로마는 네 황제의 해라는 극심한 혼란기에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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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아우구스투스 이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주요 인물들 중 정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은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장애인이긴 하지만 능력적인 평가로), 대 드루수스, 소 드루수스, 게르마니쿠스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 중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은 사람은 없고 죄다 옥타비아의 자손이거나 리비아가 데려온 자식이거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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