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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1] | 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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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4 ~ 1620/1830년 [2] | |||||
위치 | 나바라 | ||||
수도 | 팜플로나 | ||||
정치 체제 | 전제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주요 국왕 | 안초 3세 알폰초 1세 헨리케 3세 | ||||
면적 | 10,000 km2 (1300년) | ||||
인구 | 100,000 명 (1300년) | ||||
민족 | 바스크인, 옥시타니아인 등 | ||||
언어 | 바스크어 오크어 등 | ||||
종교 | 가톨릭 | ||||
현재 국가 | 스페인,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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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7세기까지 나바라 지역에 존재했던 유일한 바스크계 왕국 및 국가였다. '나바라'는 스페인어(카스티야어) 명칭이며, 나바라 지역을 프랑스어로 나바르(Navarre)라고 했기 때문에 나바르 왕국이라고도 한다. 원주민인 바스크인의 말로 나파로아(Nafarroa), 현재의 바스크 지역 대부분을 다스렸다.2. 역사
1212년 ~ 1589년 국기.
1589년 ~ 1620년 국기.
2.1. 에네코 왕조
서기 8세기, 피레네 산맥에 거주하는 바스크인들은 프랑크 왕국과 후우마이야 왕조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서로 다른 주군을 섬겼다. 많은 바스크인들은 카롤루스 대제가 이베리아 반도에 쳐들어왔을 때 아랍 토후국의 편에 서서 피레네 산맥을 통과하던 프랑크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는 등 친 아랍 성향을 보였다.[3] 반면 일부 바스크인들은 프랑크 왕국을 지지했는데, 벨라스코 가문이 이들의 지도자를 자처했다. 이들은 피레네 산맥의 패권을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였다.799년, 프랑크 왕국 지지자들이 에네코의 친척인 무타리프 이븐 무사를 암살했다. 이후 프랑크 지지자들이 피레네 산맥의 패권을 장악했고, 그들의 지도자인 가스콘 벨라스코는 806년경 프랑크 왕국으로부터 '피레네 총독'으로 지명되었다. 812년, 루도비쿠스 1세가 파견한 프랑크군이 팜플로나로 진군했다. 그러나 아랍 부족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본국으로 귀환했는데, 그 과정에서 퇴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바스크 여자와 아이들을 인질로 잡아갔다. 이로 인해 바스크인들 사이에서 프랑크 왕국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1세기 코르도바의 아랍 역사가 이븐 하이얀(Ibn Hayyan)에 따르면, 816년 아브드 알 카림 이븐 아브드 알 와히드 이븐 무깃(Abd al-Karim ibn Abd al-Wahid ibn Mugit)이 팜플로나의 사히브이자 '신의 적' 가스콘 벨라스코를 상대로 전쟁을 감행해 사흘 만에 벨라스코를 잡아 죽였다고 한다. 이리하여 벨라스코 가문은 몰락했고, 계부가 아랍 족장이고 에브로 계곡 상류에 정착한 아랍 가문인 무왈리드 바누 카시 일족의 지도자 무사 이븐 무사 알 카사위(موسى بن موسى القسوي)를 이부형제로 둔 에네코 아리차는 평소 반 프랑크 입장을 표명해왔기에, 이 일을 계기로 바스크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820년, 에네코는 아라곤 백국의 분쟁에 개입해 프랑크 가신을 자처한 아스나르 1세 갈린데스를 몰아내고 가르시아 갈린데스가 백작에 선임되게 해줬다. 이후 가르시아 갈린데스는 에네코의 사위가 되었다. 824년 아에블루스 백작과 아스나르 산체스가 이끄는 프랑크군이 팜플로나로 쳐들어왔지만, 론첸스발레스 전투에서 에네코가 이끄는 바스크군에게 패배했다. 10세기에 기술된 나바라 왕국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이때부터 팜플로나의 국왕을 칭했다고 한다. 반면 9세기 아랍 연대기에서는 그를 "팜플로나의 사히브"라고 칭할 뿐 왕으로 지칭하지 않았다.
840년 이복형제인 무사 이븐 무사 알 카사위가 후우마이야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자, 에네코는 즉시 알 카사위와 합세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2세는 토벌군을 파견했으나 격퇴되었다. 843년 알 하리트가 이끄는 토벌대 역시 알 카사위와 에네코에 의해 격파되었고 알 하리트는 체포되었다. 이에 진노한 아브드 알 라흐만 2세가 친정에 나섰고, 이번에는 반란군이 크게 패했다. 에네코의 친동생인 포르툰 에네코이츠는 전사했고, 알 카사위는 말을 잃고 도보로 탈출해야 했으며, 에네코와 아들 가르치아는 부상을 입은 채 도주했다. 844년 에네코와 알 카사위는 후우마이야 왕조에 귀순했고, 에네코의 아들 가르치아와 알 카사위의 아들 루브 이븐 무사는 코르도바에 인질로 보내졌다.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가 바이킹의 침략으로 세비야가 초토화되는 등 혼란에 휩싸이자, 알 카사위는 이 때를 틈타 반기를 들었다가 846년 아브드 알 라흐만 2세의 왕자 히샴에게 패배하고 귀순했다. 847년, 알 카사위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군이 당도하자 또다시 항복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850년 에네코 아리차와 함께 또다시 봉기했다. 이번에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쉽사리 진압하지 못하면서,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결국 852년 9월 아브드 알 라흐만 2세는 알 카사위와 팜플로나의 반란을 진압하지 못한 채 사망했고, 뒤를 이어 아미르에 오른 무함마드 1세는 팜플로나 왕국과 알 카사위로부터 명목상의 충성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들이 자기네 영토를 알아서 통치하도록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때 팜플로나 왕국의 군주로 에네코가 아니라 아들 가르치아 1세 에네코이츠가 언급되는 것을 볼 때, 에네코는 852년경에 이미 사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에네코 사후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가르치아 1세 에네코이츠는 초기엔 바누 카시 일족과의 우호 관계를 이어갔다. 그러던 859년 뵤른 야른시다(Bjǫrn Járnsíða)와 하스타인(Hásteinn)이 이끄는 69척의 함선으로 구성된 바이킹 함대가 바스크로 쳐들어왔다. 이때 알 카사위는 이들이 자신의 영토를 지나 팜플로나를 공격하도록 허락했다. 이로 인해 바이킹들이 팜플로나로 쳐들어오자, 가르치아 1세는 이에 맞서 항전했으나 참패하고 사로잡혔다. 이후 70,000 디나르의 몸값을 지불하고 나서야 석방된 그는 바누 카시와의 동맹을 포기하고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인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접근했다. 859년 알 카사위가 아스투리아스 왕국에 속한 알베이다 시를 빼앗고 그곳을 요새화하자, 그는 이에 위협을 느끼고 아스투리아스 국왕 오르도뉴 1세와 동맹을 맺고 2차 알베다 전투에서 알 카사위를 공격해 대승을 거두었다. 아브로 강 계곡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랍 군주였던 알 카사위는 이 패전의 여파로 쇠락했다.
그러나 860년 무함마드 1세가 이끄는 후우마이야 왕조군의 공세를 막지 못해 팜플로나가 함락되었고, 아들 오르티 가르체이츠는 생포되어 코르도바로 끌려간 뒤 20년간 그곳에 억류되었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은 후우마이야 왕조에 조공을 매년 바쳐야 했다. 870년 우에스카의 군주이자 형제 안초 가르체이츠의 아들인 무사 이븐 갈린도를 살해하고 집권한 아무르 이븐 우마르 이븐 아무르와 동맹을 맺었고, 871년에는 코르도바에 반기를 일으킨 무사 이븐 갈린도의 아들들과 새로운 동맹을 맺었으나, 그 외에 별다른 행적을 보이지 않았다.
가르치아 1세의 통치 말년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가르치아 1세가 871년경에 사망했고, 가르치아 세메노이츠(팜플로나 국왕 안초 1세와 세메노 가르체이츠의 아버지)가 오르티가 팜플로나로 돌아오는 880년까지 왕국을 섭정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사실을 확인하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스페인 역사가이자 정치가 클라우디오 산체스-알보르노스는 882년 가르치아가 동맹인 우마르 이븐 하프신과 함께 후우마이야 왕조군에 맞서 알리바르 전투를 치른 후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학자들은 대체로 가르치아가 882년경까지 살아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가르치아 1세 에네코이츠 사후 20년 만에 코르도바에서 풀려나 팜플로나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오르티 가르체이츠의 통치에 대한 기록은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레이라 산 살바토레 수도원에 여러 차례 행차하여 많은 기부를 했다는 사실만 전해진다. 905년 바누 카시 일족의 지도자 루브 이븐 무함마드와 동맹을 맺었다가, 그들이 팜플로나에 끼친 해악을 미워하던 귀족들의 반발에 직면했다. 결국 귀족들은 그를 폐위하고 가르치아 세메노이츠의 아들이자 아랍인들과의 전쟁에서 훌륭한 활약을 하면서 백성의 신망을 얻고 있던 안초 가르체이츠를 새 국왕으로 옹립했다. 오르티는 레이라 산 살바토레 수도원에 보내진 후 여생을 보내다 922년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2.2. 세메노 왕조
2.2.1. 초기
오르티 가르체이츠를 폐위시키고 세메노 왕조를 개창한 안초 1세는 907년 팜플로나 왕국의 동맹자였던 루브 이븐 무함마드를 공격해 전투에서 처단했다. 911년 아라곤 백작 갈린도 2세 아스나레스와 바누 카시 일족의 무함마드 알타윌, 아브드 알라 이븐 루브 알 카사위의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써 에브로 강 계곡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바누 카시 일족은 쇠락했고, 팜플로나 일대에 머물던 왕국은 영역을 급격히 팽창했다. 917년 아라곤 백작 갈린도 2세 아스나레스가 죽자 곧바로 아라곤을 병합하고 백작의 딸 안드레고토 가린도이츠와 아들 가르치아 산치츠를 결혼시켰다.918년, 산초는 레온 국왕 오르도뉴 2세와 연합해 알안달루스의 북동부 행정구역인 알 타흐르 알 아일라(الثغر الأعلى, 상부 고지)를 공격했다. 그들은 나헤라 공략에 실패했지만, 바누 카시 일족에 영역에 속한 칼라호라, 아르네도, 비게라를 공략하고 발티에리 주변의 영지와 모스크를 파괴했다.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이븐 아브디 아브다 장군을 파견해 이들을 저지하려 했으나 세비야 북동부의 산 에스테반에서 격파되었다. 920년 리바고르사 백작 베르나르 1세, 무함마드 알 타윌의 아들 암루스 이븐 무함마드와 연합하여 바누 카시가 장악하고 있던 몬손을 공격해 또다시 큰 타격을 입혔다. 그는 이 일련의 승리로 왕국의 영역을 남쪽의 나헤라와 에가 강 계곡과 칼라호라 계곡까지 확장했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 역사상 처음으로 동전을 주조하는 등 국가 경제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924년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군대를 모집해 팜플로나로 쳐들어갔다. 이후 벌어진 격전에서 팜플로나-레온 연합군이 격파되었고, 안초 1세는 팜플로나를 등지고 산지로 후퇴했다. 그러나 후방에서 반란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점령지에 수비대를 배치하지 않은 채 철수했기 때문에, 안초 1세는 곧 돌아와서 잃어버렸던 영토를 도로 확보했다.
925년 12월 10일, 안초 1세가 에브로 강 인근의 레사에서 사망했다. 당시 그의 아들 가르치아 2세 산치츠는 아직 어렸기에, 형제 세메노 가르체이츠가 팜플로나 국왕에 즉위했다. 세메노에 대한 기록은 927년 바누 카시 일족과 연합하여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군대를 패퇴시켰다는 것 외에는 전하는 기록이 없다. 931년 세메노가 사망한 뒤 가르치아 2세 산치츠가 왕위에 올랐지만 여전히 나이가 어렸기에 어머니 토타 아세아리츠의 섭정을 받았다.
934년 5월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아브드 알 라흐만 3세가 레온 왕국의 라미루 2세를 공격하여 타격을 입힌 뒤 여세를 이어가 팜플로나 왕국을 침공하려 하자, 토타가 아랍군 진영에 찾아와서 자신이 그의 고모라는 점을 상기시키며[4] 군대를 물려달라고 요청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과의 관계를 끊고 무슬림들을 해치지 말며, 무슬림 포로들을 전원 석방시키고 코르도바에 조공을 바치며, 후우마이야 왕조군이 팜플로나를 통과하여 카스티야를 공격하는 것을 허용하라고 요구했다. 토타는 이를 받아들였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팜플로나 왕국의 영토를 빠르게 통과한 뒤 알라바와 카스티야를 공격해 각지를 파괴한 후 귀환했다.
937년, 가르치아는 레온 왕국의 라미루 2세, 사라고사 총독 무함마드 이븐 하심과 동맹을 맺고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와 대결했다. 아브드 알 라흐만 3세는 이에 대응해 갈라타유드와 사라고사를 거쳐 팜플로나 왕국으로 쳐들어갔다. 939년 7월, 가르치아는 라미루 2세, 카스티야의 페르난도 곤살레스와 함께 시만카스 전투에서 아브드 알 라흐만 3세의 아랍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후우마이야 왕조와 레온-카스티야-팜플로나 연합은 평화 협약을 맺었다.
942년, 사라고사 총독 무함마드 이븐 하심이 이끄는 무슬림군이 북상하여 우에스카의 센 성채를 공략했다. 이에 가르치아 2세와 페르난도 곤살레스는 힘을 합쳐 무슬림군에 맞섰고, 그해 4월 5일 투델라 전투에서 무함마드 이븐 하심을 격파했다. 951년 레온 왕국의 라미루 2세가 사망하고 956년 후계자 오르도뉴 3세가 잇따라 사망하면서 왕국 내부에서 내란이 벌어지자, 가르치아 2세는 레온의 산추 1세를 지지했다. 카스티야 백국의 백작 페르난도 곤살레스가 산추 1세를 몰아내고 사위 오르도뉴 4세를 레온 왕위에 앉히자, 팜플로나 측이 반발하면서 연합이 깨졌다.
960년, 가르치아 2세는 후우마이야 왕조와 연합하여 레온 왕국으로 진군해 이에 맞서 싸운 페르난도 곤살레스를 격파하고 생포한 뒤 오르도뉴 4세를 축출했다. 이후 페르난도는 오르도뉴 4세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일부 영토를 넘기는 조건으로 풀려났고, 964년 가르치아 2세의 딸 우라카 가르체스와 결혼했다. 가르치아 2세는 970년 2월 22일에 팜플로나에서 사망했고, 비야마요르 데 몬사르딘에 있는 산 에스테반 데요 성에 묻혔다.
가르치아 2세 사후 아들 안초 2세가 팜플로나 왕위에 올랐다. 그는 972년 산 안드레스 데 시루에냐 수도원을 설립했다. 976년 팜플로나 왕국의 알벨다 수도원에서 비길라 사본(Codex Vigilanus)이 제작되었다. 이 저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를 고대부터 10세기까지 서술한 여러 사료를 수집하여 편집한 것으로, 이베리아 국가들의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사료로 취급된다.
976년 10월, 후우마이야 왕조의 아미르 알 하킴 2세가 사망했다. 그 뒤를 이어 11살의 어린 아들 히샴 2세가 즉위했고 알 하킴 2세의 부장이자 사위인 알 하지브 알 만수르가 섭정을 맡았다. 알 만수르는 기독교를 혐오했고 이베리아 반도를 통합하겠다는 야망에 불탄 인물이었다. 그는 알안달루스 내 기독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레온 왕국, 카스티야 백국, 팜플로나 왕국 등 북방의 기독교 국가들을 향한 대규모 원정을 단행했다. 기독교 군주들은 이에 맞서 연합했지만, 981년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에서 12km 떨어진 루에다(Rueda)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압도적인 패배를 당했다.
안초 2세는 왕국을 어떻게든 보전하고자 코르도바로 직접 가서 알 만수르에게 많은 선물을 바치고 충성을 서약하는 한편, 자신의 딸 우라카 산치츠를 그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알 만수르는 989년, 991년, 992년에 걸쳐 팜플로나 왕국을 포함한 북방의 기독교 국가들을 계속 침략했다. 결국 안초 2세는 992년에 또다시 코르도바로 가서 봉신 서약을 맺고 993년 아들 온찰루 산치츠를 인질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만수르는 994년에 또다시 팜플로나 왕국을 침략했고, 안초 2세는 왕국의 암울한 운명을 근심하다가 사망했다. 참고로 안초 2세는 987년 산 후안 데라 페냐 수도원에 엘라스투(Alastue) 마을을 기증하면서, 기증 문서에 '나바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것이 나바라 왕국이 공식 문서에서 언급된 최초의 사례다. 하지만 '나바라 왕국'이란 호칭은 11세기 즈음에서야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안초 2세의 뒤를 이어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가르치아 3세 산치츠는 아라곤 관리를 어머니 우라카아게 맡겼다가 나중에는 남동생 우라카 가르체이츠에게 맡겼다. 그는 왕국에 쳐들어온 후우마이야 왕조의 실권자 알 하지브 알 만수르에 맞서 싸우면서 아버지가 후우마이야 왕조와 맺은 봉신 협약을 파기했다. 그러나 996년 후우마이야 왕조의 강력한 공세에 버티지 못하고 코르도바로 사절을 보내 봉신 서약을 맺어야 했다. 997년 갈라타유드(Calatayud)에 들렀다가 그곳 총독의 동생과 갈등을 벌인 끝에 살해했다. 알 만수르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50여 명의 기독교 유지들을 처형했다.
1000년 7월 29일 카베라 전투에서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체스, 살다냐의 가르시아 고메스 백작과 함께 알 만수르에 대적했으나 패배했다. 이후 아들 안초 3세가 처음으로 왕으로 언급되는 1004년까지의 행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그가 카베라 전투의 여파로 사망했고 사촌인 비구에라 왕 산초 라미레스가 팜플로나를 이끌었을 것이라 추정하지만, 이를 입증할 증거는 부족하다.
2.2.2. 안초 3세: 히스파니아의 렉스
안초 3세가 즉위할 당시 팜플로나 왕국은 알 하지브 알 만수르의 연이은 침략으로 인해 후우마이야 왕조의 봉신으로 전락하여 코르도바에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다. 하지만 1002년 알 만수르가 사망한 후 후우마이야 왕조가 내란에 휩쓸리면서 기독교 국가들을 신경쓸 여력이 없어지자, 안초 3세는 이 때를 틈타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하기 위한 확장 정책을 추진했다. 1010년경 카스티야 백작 산초 가르시아의 딸 무니아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백국과 연합했고, 1015년 무슬림들을 소브라베 주에서 밀어내고 그 땅을 점거했다. 1017년 2월 5일 장인이 사망한 뒤 카스티야 백작에 오른 가르시아 산체스의 보호자를 자처했다.1018년 초 리바고르사 백작 기예르모 이사르네스(Guillermo Isárnez)가 발 다랑(Val d'Aran) 정복을 위해 공세를 벌이던 중 암살당했다. 당시 리바고르사는 1010년 기예르모 이사르네스와 필라르 백작 레몽 3세, 그리고 레몽 3세의 아내인 카스티야의 마요르 가르치아 사이에 분할되어 있었다. 레몽 3세가 기예르모의 영지를 자기 것으로 삼아 리바고르사 백작을 자처했지만, 안초 3세는 자신 역시 리바고르사 백국의 상속권이 있다고 주장하며 군대를 동원해 레몽 3세를 축출하고 그 땅을 점거했다. 이들간의 분쟁은 1025년 안초 3세가 레몽 3세의 주군이 되고, 마요르 가르치아는 레몽 3세와 결혼을 무효화한 뒤 수도원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리바르고자로의 귀환을 허용하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1029년, 카스티야 백작 가르시아 산체스가 레온 국왕 알폰수 5세의 딸인 산차와 약혼한 뒤 결혼식을 치르러 레온으로 향했다가 카스티야에서 추방됐던 귀족의 아들들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안초 3세는 즉시 카스티야 백작령을 점거한 뒤 자신의 아들이자 죽은 백작의 조카인 페르난도 1세를 카스티야 백작으로 세워서 카스티야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했다. 이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의 바로 위에 있는 차 강과 피수에르가 강 사이의 국경 지대를 점령하고, [5] 전임 백작을 살해한 레온 왕국을 응징하겠다는 명분을 내걸어 레온으로 쳐들어갈 태세를 갖췄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레온 국왕 베르무두 3세는 자신의 누이인 산차와 안초 3세의 아들 페르난도의 결혼을 주선하고 안초 3세가 빼앗아간 영토를 '지참금'으로 가지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안초 3세는 얼마 안가 레온 왕국과의 전쟁을 재개했고, 1034년 레온 왕국의 수도 레온과 사모라, 아스토르가 등을 함락시키고 베르무두 3세를 갈리시아로 축출한 뒤 스스로 레온 국왕을 겸임했다. 이리하여 팜플로나 왕국은 서쪽의 갈리시아 국경에서 동쪽의 바르셀로나까지 이어지는 이베리아 반도 내 기독교 국가들을 통합했다.
한편, 그는 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프랑스에서 전래된 봉건제를 이베리아 반도에 도입했으며, 통치 체제를 프랑스 식으로 재편하고 여러 도시를 육성하고 길을 닦았으며, 산 후안 데 라 페냐 수도원장에 클뤼니 수도원의 방식을 익힌 수도사 파테르노를 앉힘으로써 서유럽에서 맹위를 떨치던 클뤼니 수도원 개혁을 팜플로나 왕국에 그대로 실시하게 했다. 이렇듯 팜플로나 왕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안초 3세는 1034년 자신을 '히스파니아의 렉스(Hispaniarum rex)'라고 명시한 동전을 주조하는 등 기세를 올렸지만 1035년 10월 18일에 사망했고, 산 살바도르 데 오냐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2.3. 분할과 아라곤과의 동군연합
팜플로나 왕국의 전성기를 이끈 안초 3세가 사망한 뒤, 그가 생전에 확보한 영토는 자식들에게 분할되었다. 장남 가르치아 4세 산치츠는 팜플로냐 국왕이 되었고, 라리오하, 부레바, 아라바, 비스카야 등지가 가르치아 4세의 영지로 편입되었다. 아라곤 백작위는 이복형제 라미로 산치츠의 것이 되었으며, 안초 1세의 차남 페르난도 산치츠는 카스티야 백작을 맡았으며, 삼남 온찰루 산치츠는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사의 왕이 되었다. 1037년 안초 3세에게 축출된 뒤 갈리시아에 망명했던 베르무두 3세가 왕국을 되찾기 위해 쳐들어오자, 가르치아 4세는 페르난도 산치츠와 함께 이에 맞서 싸워 1037년 9월 4일 타마론 전투에서 베르무두 3세를 전사시켰다. 페르난도 산치츠는 곧바로 레온 왕국의 국왕 페르난두 1세가 되었다.1043년, 라미로는 자신이 가진 영역을 확장하거나 이복형 가르치아 4세가 소유한 팜플로냐 왕위를 빼앗을 의도를 품고 사라고사, 투델라, 우에스카 등 무슬림 토후국들과 함께 팜플로냐로 쳐들어갔다. 가르치아 4세는 페르난도와 동맹을 맺고 이에 대항했다. 양측은 타팔라에서 맞붙었고, 가르치아 4세-페르난도 연합군이 대승을 거두었다. 가르치아 4세는 수많은 무기와 보급물자를 노획했는데, 그 중 라미로가 타고 다녔던 검은 말을 노획해 자신에게 바친 알페레스(alférez: 중세 이베리아의 왕실 고위 관리) 오르티 산치츠에게 오로비아 마을을 하사했다. 가르치아 4세는 토레타와 바랑켈에 승리를 기념하는 큰 바위를 세웠다. 이후 가르치아 4세와 라미로는 무니아도나의 중재하에 화해했고, 때마침 소브라베와 리바고르사의 왕 온찰루 산치츠가 사망하자 라미로가 그 땅을 물려받게 했다.
1045년 칼라호라를 공략한 뒤 나이아라 데 리오하에 안드레 마리아 수도원 건설을 명령하고, 왕실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겼다. 1054년경 병환에 시달리던 가르치아 4세는 자기가 죽으면 페르난도가 자신의 아들들을 몰아내고 팜플로나 왕국을 삼키려 들 거라 예상하고, 병문안을 하러 온 페르난도를 체포해 카에 성에 가두었다. 하지만 페르난도는 간수를 매수해 극적으로 탈출한 뒤 레온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 후 가르치아 4세가 무슬림들과 연합하여 카스티야를 침공하자, 아라곤 백작 라미로 산치츠와 함께 동맹을 맺고 대항했다. 양군은 아타푸에르카 계곡에서 맞붙었는데, 전투 도중에 가르치아 4세가 전사했다. 다만 팜플로나군은 해질 무렵까지 전투 대열을 유지했고, 왕의 시신을 수습한 뒤 팜플로나로 이송하여 안장했다.
가르치아 4세 사후 왕위에 오른 안초 4세는 18살 때까지 어머니의 섭정을 받았고, 어머니가 1058년 사망한 후 친정을 시작했다. 당시 팜플로나 왕국의 서쪽에 있던 많은 영주들이 카스티야 백작 및 레온 국왕 페르난두 1세에게 귀순하자, 아라곤 왕을 칭한 라미로 산치츠(레미로 1세)와 동맹을 맺고 페르난도 1세와 대립했다. 그러다가 1062년 12월 29일, 안초 4세와 페르난두 1세는 그들의 국경을 확정짓는 조약에 서명했다. 페르난두 1세는 카스티야의 단독 군주로 인정받았고, 안초 4세는 리오하, 알라바, 비스케이 등지를 돌려받았다.
1063년, 아라곤 국왕 레미로 1세가 사라고사 토후국의 전진기지인 그라우스를 포위 공격하다가 사라고사 토후국에 고용된 용병대장 엘 시드의 역습을 받고 전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유럽 각국에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국가들을 돕기 위해 원조를 보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067년 레온과 카스티야의 산초 2세가 팜플로나 왕국 국경지대에 군대를 배치하고 팜플로나를 위협하자, 안초 4세는 위협을 느끼고 아라곤 국왕 산초 레미리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이에 산초 레미리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면서, 이른바 "세 명의 산초 전쟁"이 발발했다. 그 결과, 엘 시드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대승을 거두었고, 안초 4세는 부레바, 알타 리오하, 알라바 일대를 카스티야에 넘겨줘야 했다.
1076년 6월 4일, 안초 4세는 나바라 마을 인근의 페날렌에서 사냥하던 중 형제 라몬 가르체이츠가 고용한 암살자가 내지른 단검에 찔려 협곡 아래로 굴러 떨어져 사망했다. 라몬 가르체이츠는 팜플로나 왕국의 새 국왕이 되려 했지만, 귀족들이 형제를 살해한 그를 왕으로 받들기를 거부하자 사라고사 궁정으로 도주했다. 이후 레온-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6세가 비즈카이아, 기푸스코아 등 여러 영토를 빼앗아갔고, 아라곤 국왕 산초 레미리스가 팜플로나의 왕위를 겸임했다.
이후 팜플로나 왕국은 산초 레미리스(안초 5세 라미리츠), 페로 1세(페트리 1세), 알리폰소 1세(알폰초 1세) 등 아라곤 국왕들의 통치를 받았다. 그러다가 1134년 9월 7일, 알리폰소 1세가 무슬림과의 전쟁 도중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사망했다. 알리폰소 1세는 유언장에서 자신의 왕국을 성전 기사단, 구호 기사단, 성묘 기사단에 양도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아라곤과 팜플로나 귀족들은 이를 수용하기를 거부했다. 아라곤 귀족들은 알리폰소 1세의 동생이며 수도 생활을 하던 레미로를 속세로 꺼내 아라곤 국왕 레미로 2세로 추대했다. 팜플로나 귀족들은 처음에는 아라곤에서 가장 강력한 귀족 가문인 아타레스 가문의 일원인 페드로 데 아타레스를 왕으로 추대하려했지만, 그가 무척 거만한 태도를 보이면서 자신들을 깔보자 마음을 바꿔 가르치아 5세 라미리츠를 새 국왕으로 추대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팜플로나 왕국과 아라곤 왕국은 68년만에 갈라섰다.
2.2.4. 후기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팜플로나 왕위에 오른 가르치아 5세 라미리츠는 이에 반발한 아라곤 국왕 레미로 2세이 침공을 준비하자 사절을 보내 화해를 신청했고, 1135년 1월 레미로 2세가 받아들이면서 바둘루엥고 조약이 체결되었다. 가르치아 5세는 아라곤 왕국이 팜플로나 왕국의 주권자임을 인정하며 레미로를 아버지로 모시기로 했고, 레미로 2세는 그가 팜플로나에서 통치를 행사하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하지만 가르치아는 1135년 7월에 입장을 바꿔 자신이 레온과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7세의 봉신이라고 선언하고 알폰소 7세의 보호를 받았다. 알폰소 7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가르치아에게 사라고사를 봉토로 내줬다. 그러나 1137년 바르셀로나 백작 레이몬드 베렝가르가 사라고사를 가로채면서, 팜플로나 왕국의 사라고사 통치는 1년만에 종식되었다.
1137년, 가르치아 5세 라미리츠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1세와 동맹을 맺고 알폰소 7세와 전쟁을 벌였다. 그러다 1139년에서 1140년 사이에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카스티야와 동맹을 맺고 1147년 카스티야 왕국이 알메리아를 정복하는 데 일정 부분 기여했다. 1146년에는 아라곤에 속한 타우스테를 공략했고, 알폰소 7세의 중재하에 아라곤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50년 11월 21일 데예리에서 사망했고 팜플로나의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가르치아 5세 라미리츠 사후 안초 6세가 팜플로나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당시 나바라 왕국의 입지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팜플로나 왕국의 이웃 국가들인 아라곤 왕국과 레온-카스티야 왕국은 자기들을 상대로 봉신을 자처하다가 전쟁을 일으켜서 이득을 챙긴 뒤 화해하는 식으로 일관하는 팜플로나 왕국을 불신했다. 레온과 카스티야의 국왕 알폰소 7세와 아라곤에서 바르셀로나 백작이자 아라곤 여왕 페이로넬라의 남편으로서 왕권을 행사하던 라몬 베렝게르 4세는 1151년 1월 27일 투딜렌 협약을 체결해 나바라 왕국의 영역을 분할하기로 했다. 두 강대국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안초 5세는 투딜렌 협약을 따르겠다고 맹세해야 했다.
이후 안초 6세는 자신의 여동생 수리아를 알폰소 7세의 장남인 산초와 결혼시킴으로써 알폰소 7세의 호의를 얻어내려 애썼다. 1153년 중반에는 소리아에서 알폰소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봉신 협약을 갱신했으며, 1157년 6월 2일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현재 팔렌시아)에서 알폰소 7세의 딸 산차와 결혼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알폰소 7세는 1157년 중순에 라몬 베렝게르 4세와 레리다에서 만나서 나바라 왕국을 분할하기 위한 새로운 협약을 맺었다. 안초 6세에겐 다행히도, 알폰소 7세가 레리다 협약을 이행하기 전인 1157년 8월 2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레리다 협약 집행이 미뤄졌다.
이후 알폰소 7세의 아들 산초 3세가 레온-카스티야의 새 국왕으로 등극했으나, 1158년 8월 31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왕관이 갓난아기였던 알폰소 8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섭정을 놓고 레온과 카스티야 귀족들 사이에 분쟁이 벌어지면서, 레온-카스티야 왕국은 나바라 왕국에 더는 신경쓰지 못했다. 여기에 1162년 8월 8일 라몬 베렝게르 4세가 사망한 후 홀로 통치를 이어가던 페이로넬라 여왕이 1164년에 7살된 아들 알리폰소 2세에게 양위하면서, 아라곤 왕국 역시 나바라 왕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해졌다.
안초 6세는 이 때를 틈타 세력 재건에 착수했다. 우선 아라곤 왕의 섭정을 맡은 인사들과 13년간의 휴전을 체결했다. 이후 'Pampilonensium Rex(팜플로니아인의 왕)'이라는 칭호를 더 이상 쓰지 않고 'Rex Navarre(나바라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겠다고 선포했다. 이때부터 '팜플로나 왕국'이란 명칭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고, 왕국의 명칭은 '나바라 왕국'으로 굳어졌다.
1162년 가을, 안초 6세는 카스티야를 침공해 라리오하 지역 일부를 공략했다. 1163년에는 무와히드 왕조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무르시야의 타이파 무함마드 이븐 마르다니스(Muhámmad ibn Mardanix)[6]를 지원함으로써 무슬림의 공세를 받을 위험성을 줄였다. 1165년 1월 28일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레온 왕국의 페르난두 2세와 투델라 협약을 체결해 빼앗겼던 영토를 돌려받았고, 1167년 10월에는 카스티야와 휴전을 맺었으며, 1168년 12월 19일 아라곤의 알리폰소 2세와 만나 무슬림으로부터 정복한 땅을 분할하기로 했다.
1170년 6월 카스티아 국왕 알폰소 8세와 아라곤 왕 알리폰소 2세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2세의 중재로 사하군에서 어떠한 적을 만나든지 서로 힘을 합치기로 합의하고 과거에 알폰소 7세와 라몬 베렝게르 4세가 맺었던 투딜렌 협약을 재차 비준했으며, 동맹을 강화하기 위해 알폰소 8세의 고모인 산차와 알리폰소 2세의 결혼을 주선하기로 했다. 여기에 헨리 2세는 자신의 딸인 엘레오노르를 알폰소 8세에게 시집 보내기로 했다. 이로 인해 나바라 왕국은 또다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에 포위된 형세에 몰렸고, 여기에 잉글랜드까지 두 나라에 도움을 줬기 때문에 문제 해결이 버거워졌다. 나바라 왕국의 일부 귀족들은 대세가 떠났다고 여기고 아라곤이나 카스티야 왕국에 귀순했다.
하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모두 내부사정과 무슬림과의 전쟁으로 인해 나바라 왕국에 큰 압박을 가하지 못했고, 상황을 가만히 살펴보던 안초 6세는 1173년 카스티야를 공격해 상당한 성과를 거둔 뒤 알마잔에서 빼앗은 영토를 귀족들에게 분배했다. 그러나 1174년 봄,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군대가 나바라 왕국을 합동으로 공격했다. 그해 7월 아라곤 왕 알리폰소 2세는 밀라그로 성을 공략하고 파괴했으며,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는 나바라군을 격파한 뒤 안초 6세가 있던 르귄 성을 포위 공격해 함락시켰다. 안초 6세는 가까스로 빠져나가 산골짜기로 도주했고, 양군은 나바라 각지를 파괴한 뒤 철수했다.
1175년 여름 아라곤과 카스티야 연합군이 재차 나바라를 침공해 타격을 입히고 돌아갔고, 1176년 여름엔 카스티야군이 쳐들어와 르귄 성을 재차 공략했다. 이에 안초 6세는 그해 8월 25일 알폰소 8세와 7년간의 휴전 협약을 맺은 뒤 영국 국왕 헨리 2세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1177년 3월 16일, 알폰소 8세와 안초 6세는 헨리 2세의 중재에 따라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두 나라는 1158년의 국경으로 돌아가야 했다. 안초 6세는 로그로뇨, 나바레테, 엔트레나, 아우세호를 반환해야 했고, 알폰소 8세는 레귄 등 여러 성을 복구하기로 했다. 또한 알폰소 8세는 안초 6세에게 10년간 매년 3,000 마라베디를 보상금으로 지불하기로 했다.
1179년 4월 15일, 안초 6세와 알폰소 8세는 나헤라와 로그로뇨 사이의 지점에서 만나 국경을 명확하게 정의해 영토를 둘러싼 갈등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때 나바라 왕국은 더이상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지 않고 오로지 아라곤 왕국에 복종하겠다는 문구가 협약서에 삽입되었다. 이후 두 나라는 서로에게 빼앗았던 영토를 상호 반환했다.
안초 6세는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간의 분쟁을 종식한 뒤 내치를 다지는 데 힘을 기울였다. 세금 징수를 개선하기 위해 인구 조사를 실시했으며, 여러 도시에 특권을 부여하고 무역을 장려했다. 1190년 9월 7일에는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2세와 보르하에서 맞아 상호 우호 및 원조 협정에 체결했다. 두 왕은 1191년 7월에 타라조나에서 다시 만나 서로간의 우정을 재확인했다. 또한 카스티야의 알폰소 8세에 대항하는 우에스카 동맹(아라곤의 알리폰소 2세, 레온의 알폰수 9세, 포르투갈의 산슈 1세)에 가입하라는 제의를 받아들이고 1192년 아라곤 왕국과 함께 카스티야 왕국을 침공하여 소리아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한편, 안초 6세는 푸아티에 백작을 맡고 있던 리처드 왕자와 친밀한 관계를 맺었다. 리처드는 1186년 아라곤 왕 알리폰소 2세와 안초 6세의 분쟁을 조정해준 적이 있었는데, 안초 6세는 이때부터 그를 눈여겨봤던 것으로 보인다. 리처드의 어머니이자 잉글랜드의 왕비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가 헨리 2세에 대한 반란을 촉발했다는 잉유로 유폐되었을 때, 그는 산차 왕비와 함께 엘레오노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1190년 2월 잉글랜드 왕이 된 뒤 나바라 왕국 국경 근처까지 영지를 순회하던 리처드 1세는 안초 6세와 서신을 주고받은 끝에 그의 딸인 나바라의 베렝겔라와 결혼하기로 마음먹었다.
리처드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착수하면서 베렝겔라를 함께 데려가기로 마음먹고 리처드의 모후 엘레오노르를 나바라를 방문해 자신이 있는 곳으로 베렝겔라를 데려오게 했다. 베렝겔라는 결혼을 위해 시어머니가 될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함께 시칠리아의 메시나에 도착한 뒤, 리처드 1세의 누이이자 서거한 시칠리아 선왕의 왕비였던 조안과 함께 지중해를 항해하는 리처드를 따라갔다. 그러다가 폭풍우를 만나 베렝겔라와 조안이 탄 배가 키프로스에 표류했는데, 키프로스에서 황제를 자칭하고 있던 키프로스의 이사키오스 콤니노스에게 납치되었다. 리처드 1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키프로스를 공격해 이사키오스 콤니노스를 체포하고 베렝겔라를 구출한 뒤 1191년 5월 12일 비로소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나바라 왕국은 푸아티에 백국의 후원을 받았다.
1194년 6월 27일, 안초 6세는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사망했다. 이후 나바라 왕위에 오른 안초 7세는 카스티야 왕국과의 전쟁을 이어가고 싶지 않아 우에스카 동맹을 탈퇴하고 카스티야 왕국과 화해했다. 1195년 가을 무와히드 왕조의 침략에 직면한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 알폰소 8세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군대를 소집했다. 그러나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이, 알폰소 8세의 카스티야군은 레온 왕국과 나바라 왕국의 구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알라르코스 전투를 감행했다가 무와히드 왕조군에게 완패했다. 알폰소 8세는 나바라 왕국군이 제때 오지 않아서 패배했다며 책임을 그에게 떠넘겼다. 이에 격분한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동맹을 맺은 뒤 카스티야 왕국을 공격해 소리아와 알마잔 일대를 황폐화시켰다. 알폰소 8세는 앞선 전투의 참화로 인해 대응할 여력이 없었기에 상당한 배상금을 바치는 조건으로 나바라 왕국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1196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알라르코스 전투 소식을 듣고 이베리아 반도의 기독교 세력이 약화될 것을 우려해 레온, 아라곤, 카스티야, 그리고 나바라 왕국에 특사를 보내 하나로 뭉쳐서 무슬림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이에 국왕들은 타라조나 인근에 모여서 통합 논의를 했지만 서로의 입장차가 너무 커서 무산되었다.
1198년 알라르코스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야쿱 알 만수르가 안초 7세에게 마그레브로 와서 자신을 도우라고 권고하자,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우호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 직접 마그레브로 향했다. 아라곤 왕국의 페로 2세와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8세는 칼라타유드에서 만나서 안초 7세가 없는 사이에 나바라 왕국을 반으로 나누기로 합의했다. 알폰소 8세는 1199년 가스테이스(현재 스페인 바스크 지방 알라바 주의 주도 비토리아)를 포위 공격해 1200년 1월에 공략했으며, 뒤이어 알라바, 두랑갈데와가, 기푸스코아 지방을 빼앗았다. 안초 7세는 마그레브에서 뒤늦게 이 소식을 전해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무와히드 왕조가 내전에 시달리던 중이어서 원군을 보내주지 못했기에 아라곤-카스티야 연합군을 상대로 대적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에게 외면당했다. 당초 리처드 1세는 베렝겔라와 결혼했을 때 나바라 왕국이 위급해지면 군사적 원조를 보내기로 약속했지만, 그는 1196년 봄에 남프랑스 자작들로부터 리처드 1세와 전쟁을 벌일 때 지원을 해주겠다는 서약서를 받아낼 정도로 리처드 1세를 적대했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리처드는 자신을 도와달라는 안초 7세의 호소를 무시했다. 그러다 1202년, 리처드 1세는 나바라 왕국,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에 평화와 상호 협력을 위한 협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안초 7세는 리처드 1세가 제시한 협약서에 서명했고, 1207년 10월 29일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8세와 "카스티야 왕국이 나바라 왕국으로부터 빼앗은 영토를 그대로 인정받는 대신 더 이상 나바라 왕국을 적대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과달라하라 협약을 맺었다.
1212년 교황청의 강한 압력을 받은 안초 7세는 무와히드 왕조와 맺었던 동맹을 해지하고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포르투갈 왕국, 레온 왕국, 성전 기사단이 연합한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에 참가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 무와히드 칼리파인 무함마드 앗 나시르의 천막을 보호하는 쇠사슬을 끊는 등 상당히 활약했다. 이후 아버지가 시작한 팜플로나 대성당 건설을 마무리짓고 투델라의 에브로 강 위에 고딕 양식의 다리를 건설했으며, 인구 조사를 실시해 세금을 보다 많이 거둬들이려 노력하는 등 내치에 전념했다.
그는 생전에 두 번 결혼했다. 첫번째 부인은 툴루즈 백작 레몽 6세의 딸 콩스탕스였다. 1200년 콩스탕스와 이혼한 그는 새 아내를 맞이했다. 그가 맞이한 두번째 여인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일부 문헌에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딸 클레망스라고 주장했지만, 다른 문헌에서는 무와히드 왕조의 칼리파 유수프 2세의 딸이라고 기술했다. 그는 두 아내 사이에서 자식을 낳지 못했다.
그러다 오른쪽 다리에 정맥류 궤양이 생긴 이래 제대로 걷지 못하면서 비만이 심해지자, 그는 이를 부끄러워 해 투델라에 은거했고, 여동생 블랑슈(수리아)가 샹파뉴에서 와서 1229년 사망할 때까지 나바라 왕국의 행정을 맡았다. 또한 큰 누나 베렝겔라는 1230년에 사망했고, 안초 7세는 1234년 4월 7일 투델라에서 궤양과 관련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이리하여 세메노 왕조는 단절되었고, 상파뉴 백작 티보 3세와 블랑슈의 아들이자 안초 7세의 유일한 조카였던 티발트 1세(샹파뉴 백작 티보 4세)가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2.3. 샨파냐 왕조
나바라 왕국의 샨파냐(샹파뉴) 왕조를 개창한 티발트 1세는 국정을 샹파뉴 귀족들에게 맡기고 나바라를 4개 구역으로 나누었으며, 프랑스식 법률과 나바라 왕국 고유의 전통을 조합한 성문법을 기획했다. 또한 딸 블랑슈(수리아)를 카스티야 왕자 알폰소(미래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약혼시켰지만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 브르타뉴 공작 장 1세와 결혼시켰다.1239년 프리드리히 2세의 제6차 십자군 원정으로 탈환했던 예루살렘 왕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출진한 '귀족 십자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여기에는 부르고뉴 공작 위그 4세, 몽포르 공작 아모리 6세, 프랑스 궁재 로베르 드 코트네, 브르타뉴 전임 공작 피에르 1세가 참가했으며, 기게스 4세 드 포레즈, 앙리 2세 드 바르, 루이 드 산체르, 장 드 브라네 드 마콘, 기욤 드 조그니, 앙리 드 그랑프레 등 하급 귀족들도 대거 참여했다. 티발트 1세는 1,500명의 기사들을 이끌고 1239년 8월에 프랑스를 떠났고, 9월 1일 아크레에 도착한 뒤 현지의 기독교 인사들과 접촉했다. 이후 아크레에서 아내에게 보낼 시를 짓는데 시간을 보내면서, 자신과 함께 온 귀족들에게 예루살렘 원정을 맡겼다.
귀족 십자군은 무슬림군을 몇 차례 격파하고 아스칼론과 예루살렘 인근 내륙 지대를 공략하는 등 상당히 선전했지만, 1239년 11월 13일 가자 전투에서 룩 알단 알 히자위가 이끄는 아이유브 왕조군과 맞붙었다가 앙리 2세가 전사하고 아모리 6세가 포로로 잡혔으며 수백 명의 병사들이 사로잡히는 참패를 당했다. 이후 트란스요르단의 지배자 앗 나시르 도우드가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공략했다. 이후 티발트는 아이유브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고 콘월의 리처드가 새 병력을 이끌고 현지에 도착하기 직전인 1240년 말에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나바라 왕국에 돌아간 후, 티발트 1세는 팜플로나와 트루아를 오가며 왕국을 평화롭게 다스렸다. 그러나 1242년 팜플로나 주교로 선출된 페드로 히메네스 데 가졸라스와의 관계가 점점 악화되었다. 급기야 그로부터 교구의 재산을 모조리 몰수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받자, 주교는 아라곤 왕국의 나바둔으로 피신한 뒤 1250년 2월 25일 우에스카, 비흐, 레리다, 사라고사, 발렌시아 주교들을 불러들여서 공의회를 개최한 뒤 티발트 1세를 파문했다. 그러나 교황 인노첸시오 4세는 교황청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나바라 국왕을 파문할 수 없다며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티발트 1세는 이후에도 통치를 무탈하게 이어가다가 1253년 7월 8일 팜플로나에서 사망했고, 팜플로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장남 티발트 2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4세 또는 15세로, 21세부터 통치가 가능하다고 규정한 나바라 법률 때문에 어머니 마르그리트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 12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귀족 위원회의 자문을 반드시 받아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바라 왕국은 인근에서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위협에 직면했다. 1254년 3월, 아라곤 국왕 차이메 1세는 자신이 나바라의 국왕이라고 주장하며 에브로 강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켜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다. 티발트 2세는 이에 대응하여 투델라 성 인근에서 군대를 사열시켰다.
그러다 1254년 4월 5일 차이메 1세와 티발트 2세가 에브로 강변에서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 뒤 양국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티발트 2세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차이메 1세를 주권자로 섬기며, 아라곤 왕국이 전쟁을 벌일 때 병력을 반드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와 다시 만나 화해했고, 알폰소 10세는 차이메 1세를 나바라 왕국의 보호자로 인정했다.
1255년 4월 6일, 티발트 2세는 멜륀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복 누이 블랑슈의 남편이며 나바라 왕위를 요구하는 인물인 브르타뉴 공작 장 1세과 협상한 끝에, 장 1세가 나바라 왕관을 포기하게 하는 대가로 총 3,000 리브르를 지불했다. 1256년 1월 1일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딸 베렝겔라가 루이 9세의 아들 루이와 약혼했을 때, 카스티야 왕국은 푸엔테라비아와 산세브스티안 항구 사용권을 나바라 왕국에 양도했다. 그 후 1257년 교회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고, 1259년 프랑스 방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비로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티발트 2세는 아버지가 시작한 세입 개선 사업을 이어갔다. 인구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해 총 15만 명의 인구가 나바라 왕국에 거주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티발트 2세는 장인인 루이 9세로부터 파리의 성 앙데르 데스 아르트 교구의 토지를 수여받고, 그곳에 '나바라 호텔'을 건설했다. 1258년에는 루쇠유레뱅(Luxeuil-les-Bains) 수도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가 그 땅을 다스리던 바르 공작의 분노를 샀다. 바르 공작은 티발트 2세와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루이 9세가 이를 금지하자 중지했다. 1259년, 티발트 2세는 루이 9세가 주관한 엥게랑 드 쿠시의 재판에 참석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왕실 사유지에서 토끼를 사냥하던 3명의 젊은 플랑드르 귀족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1260년, 바르 공자 장과 위그 드 샬롱이 티발트 2세가 가지고 있던 루쇠일 영지를 빼앗았다. 루이 9세는 부르고뉴 공작 외드에게 티발트 2세와 바르 공국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바르 공국 측이 루쇠일을 내놓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해 6년간 이어졌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다가 1266년 12월 루이 9세의 중재로 휴전을 맺었다.
1267년, 리니의 영주 발레랑 드 뤽상부르리니가 앞으로는 티발트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본래 리니 영지의 주권자였던 바르 공작 티보 2세가 본노해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드르 백작 기 드 담피에르, 메스 주교와 함께 1267년 7월 5일 리니를 공략했다. 티발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바르 공국을 침공해 슈와쇨을 황폐화했다. 이후 양자는 1267년 10월 루이 9세의 중재에 의해 화해했다. 티발트 2세는 리니의 주권자로 인정받았고, 바르 공국과 샹파뉴 백국은 프랑스 국왕에게 더 이상 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티발트 2세에게 6만 리브르를 바치고 5개 요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티발트 2세가 아라곤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후 양자는 곧 화해했고, 하이메 1세가 라틴 제국을 회복시키기 위한 원정에 착수할 때 티발트 1세가 라틴 제국 영토의 1/4를 미리 부여받았다. 1269년에는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앙주 공작 샤를이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카를루 1세를 자처한 뒤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를 진정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티발트 2세는 나바라 왕국의 부르주아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들에게 도시에서 자치를 행사하고 정책 결정에 관여할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 팜플로나의 푸에로스를 란츠로 확장했고, 에스텔라를 티에바스와 토랄바 델 리오로 확장했다. 1269년에는 에스피날 시를 건설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는 산세르닌, 산니콜라스, 그리고 나바레리아의 3개 자치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자치구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뚜렷한 특징들을 갖추었으며, 서로간의 분쟁이 심했다. 티발트 2세는 남부 프랑스 출신이 많은 산니콜라스 자치구를 지지해 현지 주민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2개 자치구들이 이에 반감을 품고 1258년 산니콜라스 자치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티발트 2세는 폭동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치안을 정비했고, 1266년 자치구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1270년 7월, 루이 9세의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튀니스 원정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동생 헨리케를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하고 이자벨 왕비와 함께 마르세유에서 출발했다. 이후 원정군은 튀니스를 포위했지만, 루이9 세가 8월 25일에 이질에 시달리다가 사망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티발트 2세는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함께 전투를 이어갔지만 튀니스 공략에 실패했고, 1270년 11월 11일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11월 14일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 상륙한 직후 전염병에 걸렸고, 12월 4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티발트 2세는 생전에 자식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남동생 헨리케가 헨리케 1세로서 나바라 국왕 및 샹파뉴 백작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카스티야 왕자 펠리페가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자 자기 형인 알폰소 10세에 맞서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자신의 편을 들면 나바라 왕국에 영토를 일부 떼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나 그는 일이 잘못될 것을 우려해 펠리페의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실제로 펠리페의 반란은 실패했다.
1272년 헨리케 1세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와 만나 2살 된 아들 티발트와 알폰소 10세의 딸 비올란테와 결혼시키는 문제를 상의했다. 그러나 티발트는 1273년에 유모가 에스텔라 성 창문에서 실수로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망했다. 헨리케 1세는 그해 딸 호아나를 낳고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지만, 1274년 7월 22일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후 헨리케 1세의 유일한 자녀인 호아나가 1살에 나바라 여왕이자 샹파뉴 여백작 호아나 1세로 등극했고, 어머니 블랑슈가 섭정을 맡았다.
블랑슈는 남편의 장례를 마친 뒤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의회를 소집해 여왕이 성년이 될 때까지 나바라 왕국을 다스릴 총독을 뽑았다. 카스칸테의 영주이자 티발트 2세 치세 때 궁재를 맡았던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와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구성하는 3개 자치구 중 하나인 나바레리아 대표자인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왕실군 사령관인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이 경합했다. 의회는 논의 끝에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를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했다.
얼마 후, 아라곤 왕국의 차이메 1세가 나바라 왕위를 노리고 아들 페드로 왕자(훗날 페로 3세)를 나바라 왕국에 파견했다. 페드로는 여러 나바라 귀족들과 접촉해 지난날 산초 레미리스, 페로 1세, 그리고 알리폰소 1세가 나바라 왕위를 겸했던 과거를 상기시키면서, 아라곤 국왕들은 나바라인들의 관습을 존중했지만 샹파뉴 백국 출신 국왕들은 이를 무시하고 프랑스식 법률을 강요하고 착취를 일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을 왕으로 세우거나 후계자로 선정한다면 나바라인들의 관습이 존중받고 특권을 인정해주겠다고 제안했다.
1274년 8월 27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의회가 재차 열렸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 팜플로나의 주교,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은 아라곤 왕국과 마찰을 벌이는 것은 좋지 않으니 여왕을 페드로 왕자와 맺어주는 게 좋겠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르시아 알모라비드와 나바레리아 및 산 미구엘 자치구 의회는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를 여왕의 후견인으로 삼자고 주장했다. 블랑슈와 그녀를 추종하는 샹파뉴 출신 귀족들은 프랑스 국왕 필리프 3세의 보호를 받기를 희망했다. 의원들은 논의 끝에 총독과 주교를 대표로 삼은 사절단을 페드로 왕자에게 보내 자세한 사항을 협의하기로 했다.
나바라 대표단은 타라조나에서 페로 왕자와 만났다. 페드로는 자신에게 나바라 왕위를 승계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자신의 아들인 차이메 왕자와 호아나 여왕을 결혼시킨다면 여왕의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이 결혼이 성사될 경우 나바라 왕국을 지켜주겠으며, 나바라 의회가 국정을 자유롭게 운영하도록 해주겠다고 덧붙였다. 1274년 11월 1일, 올리테에서 팜플로나의 3개 자치구 출신 귀족들 외에도 60개 넘는 마을에서 선정된 성주와 변호사들이 참석한 나바라 의회가 재차 소집되었다. 그들은 페드로 왕자의 제안을 검토한 끝에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최선이니, 하이메 왕자를 팜플로나로 초대하여 1년간 지내게 한 후 결혼식을 거행하고 공동 왕으로 세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역시 나바라 왕위를 노리고 있던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가 이를 가로막았다. 그는 나바라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경 지대인 라 리오하에 군대를 집결시킨 뒤 장남 페르난도 데 라 세르다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페르난도는 곧장 군대를 이끌고 나바라 왕국 영내로 쳐들어가서 11월 18일 멘다비아를 공략한 후 비아나를 포위했다. 하지만 비아나 수비대와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쉽사리 공략하지 못하다가 겨울 추위가 도래하자 많은 병력을 잃고 멘다비아로 철수했다. 블랑슈 왕비는 카스티야 왕국군을 물리친 비아나 시민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그들의 세금을 몇 년간 면제하고 특권을 부여했다.
1275년 4월 14일, 블랑슈는 샹파뉴 백작령에 잠시 들르겠다며 딸을 데리고 팜플로나를 떠났다. 그녀는 샹파뉴에 도착하자마자 프랑스 국왕이자 사촌인 필리프 3세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프랑스 왕의 두 아들 루이 또는 필리프와 호아나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필리프 3세는 즉시 수락하고 팜플로나에 사절을 보내 이 사실을 알리며,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보장해줄 테니 자신이 여왕의 후견인이 되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와 대다수 귀족들은 블랑슈 왕비의 선택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프랑스 국왕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그러나 친 카스티야 성향인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은 일부 귀족들과 함께 나바레리아 자치구 주민들에게 반란을 선동했다. 나바레리아 주민들은 자치구를 둘러싼 성벽 위에 농성전에 필요한 무기를 세우고 식량을 비축했다. 나바라 의회는 이를 문제삼아 나바레리아 귀족들의 포도원, 과수원 및 토지 작물을 베어버리는 식으로 처벌을 내렸다. 그러나 나바레리아 측은 이에 굴하지 않고 농성을 이어갔고, 알폰소 10세에게 사절을 보내 속히 팜플로나로 와달라고 청했다.
나바라 총독 페드로 산체스 데 몬테아구도는 군대를 이끌고 나바레리아 자치구를 둘러싼 성벽 앞으로 가서 설득을 시도했지만, 가르시아 알모라비드는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그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결국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던 페드로 산체스는 총독 직을 사임했고, 호아나 1세의 후견인을 자처한 필리프 3세는 프랑스군 장군이자 남작인 외스타슈 드 보마르카이를 나바라 총독으로 세웠다. 외스타슈는 툴루즈에 기사와 석궁병들을 소집한 뒤 팜플로나에 입성했다. 그 후 나바레리아에 복종하라고 명령했으나 묵살당하자, 나바라 의회를 소집한 뒤 나바레리아 자치구 인사들을 멘다비아를 점령한 카스티야군과 내통한 반역자로 간주하고 토벌하기로 결의했다.
1276년 7월 4일, 프랑스군 및 팜플로나의 다른 2개 자치구(산세르닌, 산니콜라스)에서 모집한 민병대를 이끌고 나바레리아 성채를 포위했다. 그 후 2개월간 이어진 공방전 끝에 9월 말 프랑스군이 성벽을 돌파하면서 종결되었다. 가르시아 알모라비드, 곤살로 이바녜스 데 바스탄 등 일부 귀족은 탈출했지만, 미처 피하지 못한 주민들은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프랑스군과 2개 자치구 민병대는 나바레리아로 쏟아져 들어가서 그 일대를 철저히 약탈하고 남자를 죽이고 여자를 강간했으며, 곳곳에 불을 질렀다.
많은 주민이 대성당으로 피신했지만, 약탈자들은 대성당 역시 쳐들어가 닥치는 대로 죽이고 약탈했다. 그 결과 대성당에 보관된 재물들을 포함한 모든 귀중품들이 도난당했으며, 금박을 입힌 헨리케 1세의 묘관도 파괴되었다. 나바레리아에 있던 건물들은 대성당을 제외하고 전부 파괴되었고, 인접한 산 미구엘과 유대인 지구도 화재가 번지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그 후 나바레리아는 거의 반 세기 동안 버려졌다가 1324년 카페 왕조의 샤를 4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에서 이같은 참극이 벌어졌지만,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은 내부의 반란과 무슬림들의 침략으로 인해 이를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 사이에 프랑스 본토에서 파견한 추가 병력이 나바라 왕국 전역을 통제했고, 강대국인 프랑스를 적대할 수 없었던 아라곤과 카스티야 왕국은 프랑스가 나바라 왕국을 보호국으로 삼는 것을 받아들였다.
한편, 호아나 1세는 1275년 필리프 3세의 아들 필리프와 약혼했다. 이후 파리의 프랑스 궁정에서 자란 그녀는 1284년 8월 16일 필리프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1285년 필리프 3세가 사망하고 남편 필리프가 필리프 4세로서 즉위하면서, 그녀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또한 필리프 4세는 나바라의 공동 왕 펠리페 1세로 즉위했고, 나바라 왕국은 이때부터 프랑스와 동군연합이 되었다.
호아나는 프랑스 왕비가 된 이래 나바라에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고 궁정에 머물렀다. 1294년 필리프 4세는 자신이 아들 루이가 아직 미성년자일때 사망할 경우 그녀가 프랑스 왕국의 섭정을 맡는다는 법령을 공포했다. 그녀가 이렇듯 프랑스에서 왕비로 지내는 동안, 나바라 왕국에서는 필리프 4세가 선임한 총독들이 통치를 이어갔다. 그녀의 이름으로 칙령이 내려지고 그녀의 얼굴이 새겨진 동전이 발행되긴 했지만, 그녀는 나바라에 대해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반면, 호아나는 샹파뉴 백국에 보다 많은 관심을 뒀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샹파뉴를 방문해 백작으로서의 의무를 수행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전쟁을 벌이고 있던 1301년,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의 딸 엘레오노르와 결혼했던 바르 백작 앙리 3세는 장인의 지시에 따라 샹파뉴를 침공했다. 당시 남편은 잉글랜드군과 대적하느라 샹파뉴 방위를 도와줄 수 없었지만, 그녀는 홀로 군대를 일으켜 앙리 3세를 격파한 뒤 플랑드르 백국의 지하감옥에 수감했다. 앙리 3세는 4년간 감옥에 갇혀 있다가 일부 요새를 샹파뉴에 넘기는 대가로 풀려났다. 1305년, 호아나 1세는 출산하던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이리하여 샨파냐 왕조는 단절되었고, 카페 왕조가 나바라 왕국의 주권자가 되었다.
2.4. 카페트(카페) 왕조
호아나 1세 사후, 필리프 4세와 호아나 1세의 장남인 루이 10세가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에 즉위했다. 그는 1314년 11월 29일 아버지가 사망한 뒤 프랑스 왕위를 겸임했다. 그러나 2년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루이 10세의 갓 태어난 아들 장 1세가 프랑스 국왕이자 나바라 국왕으로 선임되었으나 5일만에 사망했다. 이후 루이 10세의 동생 필리프 5세가 살리카법을 앞세워 루이 10세의 딸 잔의 왕위 계승권을 부정하고 자신이 프랑스 국왕 겸 나바라 국왕으로 즉위했다.하지만 필리프 5세 역시 즉위 6년만에 29세의 나이로 갑작스럽게 사망했고, 필리프 5세의 자녀인 잔, 마르가리트, 이자벨, 블랑슈는 살리카법 때문에 프랑스 왕위를 계승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필리프 5세의 동생인 샤를 4세가 왕위에 올랐으나, 즉위 6년만인 1328년 33세의 나이로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잔은 남편 필리프와 함께 프랑스 왕위에 도전했다. 하지만 그녀의 세력은 발루아 가문의 필리프에 비할 바 아니었기에 프랑스 왕이 될 가망은 별로 없었다.
이에 잔과 필리프 부부는 나바라 국왕이 되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지만, 필리프 6세는 여기에 문제를 제기했다. 나바라 왕국과 샹파뉴 백국, 에브뢰 백국이 통합된다면 프랑스 국왕의 권위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국가가 탄생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필리프 6세는 과거 외드 4세와 필리프 5세가 약속한 대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잔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에, 코탕탱 반도의 일부인 모르탱, 벡생, 퐁투아즈, 보몽쉬르우아즈, 아스니에르쉬르우아즈를 넘겨주기로 했다. 이때 앙굴렘 역시 양도하기로 했지만, 필리프 6세는 죽을 때까지 앙굴렘을 넘기지 않았다.
그렇게 합의를 이룬 후, 잔과 필리프는 쉴리의 영주 앙리 4세와 필리프 드 멜룬을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해 통치를 대행하게 했으며, 통치 권한을 놓고 나바라 왕국의 귀족들과 긴 협상을 벌였다. 나바라인들은 잔을 여왕으로 받드는 데엔 동의했지만, 지금까지 나바라 왕국과 별 관련이 없던 에브뢰 백작 필리프까지 왕으로 추대하는 것엔 주저했다. 하지만 잔이 총독들을 통해 남편 역시 공동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들은 1328년 11월 론체스발레스에서 열린 나바라 회의에서 이 문제를 놓고 협의했다. 그 결과, 그들은 필리프를 공동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다만 새 군주가 방패에 오르거나 군중에게 돈을 던지는 등 대관식의 모든 전통적인 요소들은 오직 잔만 수행할 수 있다는 조건을 붙였다.
1329년 초 나바라로 향한 잔과 필리프는 3월 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각각 호아나 2세와 필리페 3세로서 나바라의 공동 왕으로 등극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나바라 통치에 긴밀하게 협력했다. 두 사람의 통치 기간 동안 발효되어 현재까지 전해지는 85개의 왕실 법령 중 41개의 문서가 두 사람의 이름으로 발행되었다. 호아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법령은 38개였고, 필리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문서는 6건이었다.
한편, 호아나와 필리페가 나바라 귀족들과 장기간 협의하고 있던 사이에 팜플로나에서 반 유대 폭동이 벌어져 많은 유대인이 막대한 재산 피해를 입었다. 두 사람은 즉위식을 마무리한 뒤 폭동 주모자들을 처벌하고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또한 왕궁의 요새들을 수리하고 카스텔레노에 새로운 성을 세웠다. 투델라 주변의 건조한 들판을 관리하는 관개체계도 두 사람의 지원으로 조직되었다.
또한 두 사람은 아라곤, 카스티야 왕국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1329년 아라곤 국왕 알리폰소 4세의 아들 페로(훗날 페로 4세)와 맏딸 호아나와의 약혼에 대한 협상을 시작했으며, 1330년 3월 15일 살라망스에서 카스티야 왕국과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호아나와 페드로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지만, 1336년 두 번째 딸 마리아와 페드로의 결혼이 성사되면서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결혼 동맹이 맺어졌다.
부부왕은 1331년 9월 나바라 왕국을 일시적으로 떠나 각자의 영지를 관리했으며, 프랑스 총독들이 그들을 대신해 나바라 왕국을 관리했다. 1335년 카스티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서 무력 충돌이 벌어졌지만 규모는 크지 않았고, 1336년 2월 28일 평화 협약이 재차 체결되었다. 1336년 4월, 두 사람은 나바라로 돌아와서 1337년 10월까지 직접 통치를 행사했고, 이후에는 다시 프랑스의 영지로 돌아갔다. 필리페는 몇년 후에 나바라로 이동했지만, 호아나는 프랑스에 계속 머물렀다.
1343년 9월 필리페 3세가 그라나다 토후국을 상대로 원정을 떠났다가 알헤시라스 공방전에서 화살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팜플로나로 옮겨졌고, 심장은 파리로 이송되어 쿠벵 드 자코뱅에 안장되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호아나는 나바라 총독 필리프 드 멜룬을 기욤 드 브라에로 교체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기욤 드 브라에를 해임하고 장 드 콩플랑스를 선임했는데,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호아나는 나바라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았는데, 이는 백년 전쟁 동안 프랑스에 있는 자신의 영지가 잉글랜드군에게 침략당할 위험에 대처해야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전쟁 초기에는 필리프 6세를 지지했지만, 프랑스군이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연전연패하자 1346년 11월 에드워드 3세와 휴전 협약을 맺고 잉글랜드를 더는 적대하지 않았다. 1349년 10월 6일 페스트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카페트 왕조는 막을 내리고 에브레우슈(에브뢰) 왕조가 들어섰다.
2.5. 에브레우슈 왕조
호아나 2세 사후 왕위에 오른 카를로스 2세는 프랑스 영지 관리에 집중하면서 동생 루이에게 나바라 왕국을 대신 통치하게 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빼앗겨버린 프랑스 왕위를 자기 손으로 되찾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던 1350년 8월 22일, 필리프 6세가 사망했다. 필리프 6세의 아들 장 2세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나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가 이때를 틈타 프랑스 왕을 칭할 것을 우려해, 아버지가 사망한 지 한 달밖에 안 된 9월 26일에 랭스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가 필리프 6세의 사망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는 이미 장 2세가 프랑스 국왕에 즉위해버린 터라 지지자들을 미처 규합할 시간이 없었다. 그는 일단 장 2세의 즉위를 받아들였지만, 어머니가 돌려받지 못한 브리와 샹파뉴 백국을 돌려받는 데 초점을 맞췄다. 필리프 6세가 주기로 약속했던 앙굴렘을 끝내 주지 않았으니 마땅히 브리와 샹파뉴를 회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카를로스는 노르망디와 센 계곡에 풍부한 재산을 가진 에브뢰 가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의 왕비이자 카를로스의 외숙모인 잔 데브뢰는 프랑스 왕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카를로스와 장 2세 사이의 중재 역할을 수행했다. 동생 필리프는 잉글랜드 등 외국에서의 지원을 받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으며, 또다른 동생 루이는 나바라 왕국을 대리 통치하면서 형을 위해 인적, 물적 자원을 징발했다.
그러던 1350년 11월 19일, 장 2세는 라울 2세 드 브리엔을 긴급 체포한 뒤 하루 만에 곧바로 참수형에 처하고 그의 재산을 압류했다. 라울 2세는 프랑스-잉글랜드-아일랜드 등지에 영지를 둔 귀족으로, 1346년 잉글랜드군이 캉을 공략했을 때 토머스 홀랜드가 이끄는 영국군에 의해 체포된 뒤 4년간 잉글랜드에 억류되었다가 1350년 60,000 프랑을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풀려났다. 하지만 그 큰 돈을 마련할 길이 없자, 에드워드 3세에게 자신의 소유물인 긴느 성을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이를 모든 프랑스 영토의 주권자인 자신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고 참수형에 처했다. 상당한 거물이었던 라울 2세가 순식간에 처형된 사건은 프랑스 귀족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겼고, 발루아 왕조에 대한 불신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카를로스는 이 때를 틈타 푸아 백작 가스통과 불로뉴 백작가, 아르투아 백작가 등 발루아 왕조에 불만을 품은 귀족들을 끌어들였다.
1352년, 장 2세는 카를로스에게 갓 8살된 딸 잔을 아내로 삼으라고 권유했다. 카를로스는 이를 거부한다면 장 2세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을 테고, 아직은 그에게 맞설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또한 장 2세가 신부의 지참금으로 왕실 수입에서 차출한 10만 에쿠스를 매년 송금하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결혼에 동의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1352년 2월, 카를로스는 장 2세의 딸 잔과 결혼했다. 그러나 장 2세는 약속과는 달리 10만 에쿠스를 지불하는 것을 차일피일 미뤘다.
여기에 더해 장 2세가 가장 신뢰하는 신하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앙굴렘 백작에 선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카를로스 2세는 격노했다. 앙굴렘은 지난날 필리프 6세가 어머니 호아나 2세에게 양도하기로 약속해놓고 끝까지 주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런 곳을 카스티야 출신의 남작인 샤를 드 라 세르다가 가로챘다니, 그로서는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샤를 드 라 세르다를 가만 놔두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353년, 프랑스와 잉글랜드 국왕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호소와 중세 흑사병 유행으로 인한 참상으로 파탄 지경에 몰린 내치를 고려해 평화 협상을 가졌다. 하지만 카를로스는 평화가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고 판단하고, 협상을 훼방놓기 위해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기로 했다. 1354년 1월 18일, 카를로스의 동생인 롱그빌 백작 필리프가 이끄는 무리가 레글(L'Aigle)의 한 여관에 투숙하고 있던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습격했다. 그 과정에서 샤를의 수행원들이 대거 척살되었고, 샤를은 도주하다가 체포된 뒤 목숨을 구걸하다가 살육에 흥분한 필리프의 부하들에게 참수되었다.
카를로스는 동생 필리프가 샤를 드 라 세르다를 체포하지 않고 암살해버렸다는 소식을 듣고 일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자신이 살인을 주도했으며 샤를 드 라 세르다가 자신을 해치기 위해 음모를 꾸몄기에 정당방위로 행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후 에드워드 3세, 흑태자 에드워드, 에드워드 3세의 왕비인 에노의 필리파, 랭커스터 공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장 2세는 이러다가 잉글랜드와의 전쟁이 재개될 것을 우려해 1354년 2월 22일 카를로스와 망트 조약을 체결했다. 카를로스 2세는 장 2세가 아직 주지 않았던 영토를 포기하는 대가로 보몽-르-로거 군, 브레퇴일 성, 콩체스 성, 퐁-오데메르 성, 체르부르 시, 코탕탱의 폐쇄, 노르망디의 카렌탕, 쿠탕스 및 발로그네 일대를 영지로 수여받았다. 또한 노르망디 공작의 모든 특권을 직함 없이 누릴 수 있었다.
이렇듯 많은 것을 얻어낸 대가로, 그는 왕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파리로 가야만 했다. 장 2세의 둘째 아들인 앙주의 루이는 카를로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에브뢰에 인질로 보내졌고, 카를로스는 1354년 3월 4일 파리로 가서 삼부회 의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왕에게 공개적으로 용서를 구해 허락을 얻어냈다. 그러나 장 2세는 아끼던 신하를 살해하고 망트 조약을 통해 수많은 이득을 챙긴 카를로스를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그해 8월, 그는 카를로스, 필리프, 루이 형제를 자신의 궁전에서 열린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세 형제는 이에 참석하러 가던 중 경고를 받자 급히 파리를 탈출해 암살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후 노르망디를 침공한 장 2세를 피해 교황청이 있는 아비뇽에 은거한 카를로스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평화 협약을 맺을 조짐이 보이자 이를 막기 위해 행동에 나서기로 했다. 그는 비밀리에 랭커스터 백작 헨리에게 서신을 보내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국왕으로 세워지는 대신 노르망디, 샹파뉴, 브리, 랑그도크를 자신에게 넘기는 조건으로 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그를 신뢰할 수 없는 자라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장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이 카를로스와 손잡고 자신을 도모하려 들 것을 우려해 카를로스에게 화해를 권했다. 이후 협상을 벌인 끝에, 양자는 1355년 9월 10일 발롱크스 협약을 체결하고 정식으로 화해했다.
이후 자기 영지로 돌아온 카를로스는 1356년 초 장 2세가 모든 노르망디 영주들을 루앙 성에 초대했을 때 이를 받아들였다. 일전에 자신을 죽이려 했던 장 2세의 초대를 받아들인 이유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자기만 빠졌다가 "왕의 초대에 불응한 역적"으로 낙인찍힐 우려가 있고 노르망디 귀족들이 장 2세에게 포섭될 우려도 있으니 참석해야겠다고 판단한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한 세력을 갖춘 자신을 어쩌지 못하리라는 자신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잔치가 한창일 때, 장 2세가 느닷없이 자식들과 같은 상석에 앉아있던 카를로스에게 달려들어 그의 목덜미를 붙들며 외쳤다.
"이 배신자! 너는 내 아들의 식탁에 앉을 자격이 없다!"
카를로스의 종자 콜린 더블레(Colin Doublet)는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칼을 뽑았지만 왕실 근위대에 의해 즉시 체포되었다. 그 후 현장에서 체포된 카를로스는 측근 4명과 함께 샹폴 성에 잠시 수감되었다가 두에의 아를뢰 요새로 이송되었다. 이때 추종자 4명[7]이 참수되었고, 그들의 유해는 광장에 내걸렸다.
카를로스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에브뢰 가문과 노르망디 귀족들은 프랑스 왕에 대한 충성 서약을 철회하고 에드워드 3세에게 충성을 서약했다. 1356년 5월, 카를로스의 동생 필리프와 노르만 영주들은 휴젼 협약을 깨고 노르망디와 기옌을 통과하는 잉글랜드군에 대거 가세했다. 장 2세는 이에 대응해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잉글랜드군에 대적했으나, 1356년 9월 19일 푸아티에 전투에서 참패하고 영국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그 후 장 2세의 큰아들 샤를이 아버지를 대신해 국정을 돌봤지만, 프랑스 각지는 무정부 상태로 전락했고 카를로스의 추종자들은 카를로스를 석방하라고 압박했다. 필리프는 랭커스터 공작 헨리가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힘을 합쳐 노르망디 전역에서 프랑스군과 지속적으로 전쟁을 벌였다. 결국 샤를 왕자는 1357년 11월 9일 카를로스를 아를뢰 성에서 석방시키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아미앵에 잠시 들렀다가 삼부회의 초대를 받아 파리로 갔다.
11월 30일, 파리에 도착한 그는 민중들에게 자신을 투옥시킨 자들을 규탄하는 연설을 감행했다. 이에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파리 시민들이 "나바라 국왕을 부당하게 대우한 자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샤를 왕자는 일단 카를로스와 협상하기로 했다. 카를로스는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영지에 가해진 모든 피해를 보상할 것, 자신과 추종자들을 사면할 것, 장 2세에 의해 처형된 동료들을 명에롭게 매장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이와 더불어 노르망디 공국과 샹파뉴 백국을 자신에게 정식으로 넘기라고 촉구했다.
샤를 왕자가 그의 요구를 들어줄 기색을 보일 때, 잉글랜드군에 포로로 잡혀있던 장 2세가 에드워드 3세와 평화 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카를로스는 평화 협정이 성립되면 자신에게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에티엔 마르셀을 부추겨서 파리에 수감된 죄수들을 풀어줘서 왕의 군대와 맞서게 한 뒤 자신은 노르망디로 가서 병력을 규합했다. 1358년 1월 10일, 그는 루앙 대성당에서 장 2세에게 처형된 추종자 4명을 기리기 위해 장례식을 거행한 뒤 이들을 죽인 자들에게 복수하겠다고 선언했다.
1358년 2월 22일, 에티엔 마르셀이 이끄는 폭도들이 샤를 왕자의 최측근인 장 드 콩플랑과 로베르 드 클레르몽을 척살한 뒤 샤를 왕자를 사실상 포로로 잡고 카를로스에게 파리로 속히 오라고 초대했다. 그는 파리로 즉시 가려 했지만 도중에 병에 걸려버렸고, 그 사이에 샤를은 극적으로 파리를 탈출한 뒤 동쪽에서 병력을 규합하여 반격에 착수했다. 이후 파리 주변의 영토는 카를로스가 파견한 노르망디군과 샤를 왕자가 보낸 선봉대에 의해 약탈당했다. 에티엔 드 마르셀은 카를로스에게 샤를 왕자와 협상해달라고 간청했지만 묵살당했다.
1358년 5월, 그동안 가혹한 수탈을 당하던 프랑스 북동부의 농민들이 대대적으로 봉기했다.(자크리의 난) 에티엔 마르셀은 자크리들을 지지한다고 선언했고, 프랑스 북부 기사들은 카를로스에게 자크리 토벌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들의 요청에 따르기로 하고, 1358년 6월 10일 멜루 전투에서 지도자 기욤 칼레를 비롯한 자크리들을 모조리 학살했다. 이후 파리로 들어와서 민중을 소집한 뒤 자신을 "파리의 대장"으로 선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자크리와 손잡았던 에티엔 마르셀을 토벌하지 않고 손잡는 것에 반감을 품고 샤를 왕자 쪽으로 등을 돌렸다.
이후 샤를이 귀족들의 지지에 힘입어 파리로 진군했다. 이때 파리 시내에서 반 잉글랜드 감정을 품은 주민들이 대거 봉기해 에티엔 마르셀을 포함한 친 잉글랜드, 친 나바라 성향 인사들을 모조리 죽였다. 카를로스는 파리 외곽의 생드니 수도원에 숨었다가 노르망디로 도주했다. 이후 에드워드 3세에게 서신을 보내 프랑스를 침공해 샤를 왕자를 격파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하고 노르망디, 피카르디, 샹파뉴, 브리의 영주로서 충성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장 2세와 평화 협정을 맺어둔 터라 그를 프랑스를 좌지우지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존재로 여겼다. 1359년 3월 24일, 에드워드 3세와 장 2세는 런던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장 2세는 인질들을 남긴 채 프랑스로 귀환한 뒤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며, 카를로스가 소유한 프랑스 영지를 포함한 많은 영토를 에드워드 3세에게 양도하기로 했다.
그러나 삼부회는 협약 내용이 부당하다고 여기고 샤를 왕자에게 전쟁을 지속하라고 촉구했다. 이에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직접 침공하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카를로스는 샤를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맹공격으로 인해 노르망디 영지가 피폐해진 데다 잉글랜드군이 또다시 노르망디에 상륙하려 한다는 정보까지 들어오자 샤를 왕자와 화해하기로 했다. 양자는 오랜 협상 끝에 1359년 8월 19일 퐁투아즈에서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그는 더 이상 영토와 돈에 대한 요구를 하지 않기로 했고, 샤를 왕자는 그가 그동안 프랑스에 해악을 끼친 행위들을 사면하기로 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59~1360년에 노르망디를 침공했지만 카를로스와 샤를 왕자가 전투에 전혀 응하지 않고 청야 전술을 구사하는 바람에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되어 많은 병사가 죽어나가자 어쩔 수 없이 철수했다. 이후 샤를 왕자가 장 2세와 에드워드 3세가 맺은 협약을 받아들일 테니 아버지를 돌려달라고 하자, 에드워드 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카를로스는 칼레에 도착한 장 2세와 만나 장 2세에게 용서를 구하고 추종자 300명과 함께 사면받았다. 그 대가로 프랑스 왕실에 대한 충성 서약을 재차 맺었고, 프랑스에서 약탈을 자행하는 잉글랜드-나바라 용병대를 토벌하는 데 도움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1361년,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 1세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다. 카를로스는 부르고뉴 공작 로베르 2세의 딸 마르그리트[8]의 손자인 점을 이용해 자신이 부르고뉴 공국을 물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베르 2세의 둘째 딸 잔의 아들인 장 2세가 부르고뉴 공작이 되었고, 자신이 죽은 후에는 아들 호담공 필리프 2세에게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카를로스는 교황 인노첸시오 6세에게 자신이 부르고뉴 공작이 되는 것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지만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자 1361년 11월 나바라 왕국으로 가서 그곳의 장정들을 소집해 전쟁을 준비했다.
1362년 5월 추종자들을 부추겨 노르망디에서 봉기를 일으키게 했으나 실패하자 1363년 나바라 해군을 노르망디로 파견해 그곳을 장악하고 나바라 육군을 형제 루이에게 맡겨 가스코뉴인들과 힘을 합쳐 부르고뉴를 공략하게 했다. 1364년 1월, 카를로스는 아헨에서 흑태자 에드워드와 만나 잉글랜드 왕국이 보유하고 있는 아키텐 공국에 나바라 왕국군이 통과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해 승낙을 얻어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사전에 노출되었고, 1364년 5월 16일 코르슈렐 전투에서 나바라 왕국군과 잉글랜드 용병 연합군은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참패했다. 그 직후 장 2세가 잉글랜드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샤를 왕자는 프랑스 국왕 샤를 5세로 즉위하고 형제 필리프를 부르고뉴 공작으로 확정했다.
1364년 8월, 로드리고 데 우리즈가 이끄는 소규모 나바라군이 바욘에서 세르부르로 항해했고, 노르망디의 카를로스 추종자들이 이에 호응해 반란을 일으켰다. 한편 카를로스의 동생 루이는 아키텐 공국을 지나 가스코뉴군과 합세한 후 9월 23일 노르망디에 도착했다. 그러나 9월 29일 코크렐 전투 소식을 전해들은 루이는 부르고뉴 침공을 포기하고 코탕탱 반도를 탈환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러나 루이는 부하들이 프랑스 마을들을 심하게 약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고, 이로 인해 민심은 카를로스에게 등을 돌렸다. 여기에 교황 우르바노 5세가 부르고뉴와 노르망디의 국경지대인 앙스 마을을 초토화한 루이의 부하 세갱 드 바드폴을 파문하는 등 교회마저 등을 돌리자, 카를로스는 도저히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샤를 5세와 화해하기로 했다.
1365년 5월, 카를로스와 샤를 5세는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었고 자신의 추종자들의 사면을 받아냈으며, 처형된 나바라인들의 유해를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고, 포로들이 몸값없이 상호 석방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영토는 하나같이 초토화되었기 때문에 별다른 실익이 없었으며, 부르고뉴 공작위에 대한 요구는 교황의 중재에 회부되기로 했지만 교황청이 이에 대해 언급 자체를 하지 않으면서 흐지부지되었다. 그 후 카를로스는 다시는 프랑스 왕위를 탐하거나 영지를 늘리는 데 관심을 두지 않고 나바라 왕국에 머물렀다. 1365년 말, 세갱 드 바드폴이 나바라 왕국에 찾아와서 카를로스가 자신에게 지불하겠다고 약속한 상당한 급료를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그가 쓸데없이 주민들을 학살하고 교회 재산을 털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고 여겼기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일단 겉으로는 받아들이는 듯한 태도를 취했다가, 나중에 사람을 시켜 독살했다.
한편, 카를로스는 공식적으로는 카스티야 국왕 페드로와 동맹을 맺고 있었지만 1365년 말에 페드로를 폐위시키고 그의 이복동생인 엔리케 2세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기를 원하는 게클랭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나중에 마음을 바꿔 통과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대신 그들이 나바라 왕국을 통과하면서 약탈을 최소화하기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다. 이후 엔리케 2세가 카스티야 국왕에 성공적으로 선임되었고, 페드로는 아키텐을 다스리던 흑태자 에드워드에게 망명했다.
1366년 7월, 카를로스는 보르도로 가서 페드로와 협의해 흑태자 에드워드의 잉글랜드군이 나바라 산길을 통과하게 해주는 대신 상당한 보상금을 받기로 했다. 이후 그해 12월에 엔리케 2세와 접촉한 뒤 로그로뇨에서 만나서 더 많은 보상금을 받는 대가로 잉글랜드군의 통과를 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흑태자 에드워드는 이중계약을 맺은 그에게 분노해 나바라 국경지대에 군대를 집결시키고 원래 약속한 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카를로스는 급히 에드워드를 찾아가서 자신이 엔리케 2세와 거래한 적이 없다면서, 잉글랜드군이 산길을 통과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는 카를로스를 신용할 수 없다고 여기고 올리버 드 매니에게 카를로스를 붙잡아놓게 했다. 그 후 카를로스는 흑태자 에드워드가 엔리케 2세를 몰아내고 페드로를 카스티야 국왕으로 복위시킬 때까지 잉글랜드 군영에 억류되었다.
1369년, 백년 전쟁이 재개되자 나바라를 떠나 낭트로 가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와 만나서 상호 방위조약을 체결했다. 그러면서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와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에게 동시에 사절을 보냈다. 그는 양측에 노르망디에 있던 자신의 영토를 회복하고 부르고뉴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몽펠리에를 관장할 권리를 주라고 요구하면서, 에드워드 3세에게는 "노르망디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프랑스를 공격하기 위한 전진 기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했고, 샤를 5세에게는 "잉글랜드의 침략에 대항하여 전력으로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샤를 5세는 그의 제안을 노골적으로 거절했고, 에드워드 3세는 카를로스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1370년 7월, 로버트 놀스가 이끄는 잉글랜드군이 센 강 하구에 파견되었다. 로버트는 왕이 좀더 심도 높은 논의를 하고 싶어하니 런던으로 와달라고 청했고, 카를로스는 이 말에 따라 런던으로 향했다. 1370년 12월 2일, 에드워드 3세와 카를로스는 정식으로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로버트 놀스의 잉글랜드군이 퐁발랭 전투에서 베르트랑 뒤 게클랭이 이끄는 프랑스군에게 궤멸되면서 일이 틀어져버렸다. 결국 카를로스는 샤를 5세에게 또다시 충성을 서약해야 했고, 1372년 초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곤트의 존이 페드로의 딸 콘스탄차와 결혼해 장차 카스티야 국왕이 될 야심을 품고 페드로에게 접근하자,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2세는 이를 감지하고 1373년 카를로스에게 결혼동맹을 맺을 것을 제안하면서 곤트의 존이 카스티야 왕국으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카를로스는 1374년 3월 기스코뉴에서 곤트의 존을 만나서 엔리케 2세가 지난날 빼앗아간 나바라 왕국의 도시들을 탈환하는 데 힘을 보태준다면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침공기지로 사용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곤트의 존은 얼마 안가 계획을 포기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가버렸고, 엔리케 2세로부터 보복당할 위기에 몰린 카를로스는 1375년 5월 장남 카를로스와 엔리케 2세의 딸 레오노르의 결혼에 동의하고 나바라 왕국이 카스티야 왕국의 봉신이 되는 것을 받아들였다.
1377년, 카를로스는 잉글랜드에 자신이 여전히 보유하고 있는 항구와 성들을 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줄 테니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게 해주고 카스티야군과 맞서 싸우는 것을 도울 병력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여기에 더해, 시종장 자크 드 루를 요리사로 위장시켜서 파리의 프랑스 왕궁에 잠입시킨 뒤 샤를 5세를 독살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이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샤를 5세는 잉글랜드군이 노르망디에 진입하자마자 군대를 출동시켜 적이 더 해안 요새에서 더 이상 이동하지 못하게 묶어놓았다. 또한 노르망디에 파견되었던 아들 카를로스는 샤를 5세의 군대에게 패배해 항복한 후 프랑스군에 배속되었다. 또한 자크 드 루는 1378년 3월 25일 코르베유에서 체포된 뒤 카를로스의 지시를 받들어 샤를 5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사실을 자백한 후 레스 할레스에서 공범자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1378년 6~7월, 샤를 5세로부터 카를로스의 음모를 전해들은 엔리케 2세가 이끄는 카스티야군이 나바라 왕국을 전격 침공해 각지를 황폐화시켰다. 카를로스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생장 피에 드 포르로 도주한 후 보르도로 가서 잉글랜드 장군 존 네빌에게 원조를 간청했다. 네빌은 토마스 트리벳 휘하의 소규모 병력을 나바라 왕국에 파견했지만, 그들은 나바라 왕국을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의사가 없었기에 얼마 안가 되돌아왔다. 결국 모든 희망을 잃은 카를로스는 1379년 3월 31일 투델라를 포함한 나바라 왕국 남부의 20개 요새를 카스티야 왕국에 넘겨주고 잉글랜드에 맞서 카스티야-프랑스 왕국과 군사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내용의 브리오네스 협약에 서명했다.
나바라 왕국 주민들은 자신들과 별다른 관련이 없는 모험적인 계획을 집행하기 위해 자신들을 쥐어짜고, 외적이 쳐들어와서 자신들을 해치고 재산을 약탈하는 걸 막지도 못하는 국왕에게 분노했다. 카를로스는 이로 인해 재위 말년을 나바라 왕국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을 진압하는 데 허비해야 했다. 그러던 1386년 10월부터 심각한 질병에 시달린 그는 자신의 유해를 팜플로나의 성모 마리아 성당에, 심장을 우후에 성모 마리아 성당에, 내장을 롱세스바예스 성모 마리아 성당에 안장해달라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던 1387년 1월 1일 사고로 사망했고[9], 맏아들인 카를로스 3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카를로스 3세는 나바라 왕이 된 뒤 카스티야 왕국을 섬기는 대가로 지난날 카스티야군이 빼앗아간 나바라 영토를 돌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곧 가정 문제에 직면했다. 레오노르와 자녀들이 나바라 왕국으로 향했다가 심각한 질병에 걸린 후 건강이 나아지자마자 카스티야로 가버린 뒤 7년 동안 나바라로 돌아와달라는 그의 요청을 거부한 것이다. 카를로스가 그녀가 일국의 왕비인데 그 나라에 발을 들이려 하지 않는 것에 문제를 제기하자, 레오노르는 그가 자신에게 적합한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카를로스는 일생 동안 4명의 정부와 랑슬로를 비롯한 여섯 명의 사생아를 두었다고 알려졌으며, 그들을 레오노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같은 대접을 해줬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레오노르가 사생아 랑슬로가 자신이 낳은 딸들을 제치고 왕위 계승자가 될까 우려해 남편을 압박하고자 이런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결국 카를로스는 1390년 홀로 대관식을 치러야 했다. 그 후 아내를 달래기 위해 장녀 호아나를 나바라로 불러 왕위 계승자로 공식 지명했다. 또한 사절을 꾸준히 카스티야로 보내 레오노르와 가족들의 신변을 보장하며 좋은 남편으로서 대하겠다고 약속했다. 레오노르는 그래도 쉽게 넘어가지 않다가 1394년 11월이 되어서야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와 투델라에서 카를로스와 재회했다. 그 후 두 사람은 베아트리체와 이사벨라를 추가로 낳았으며, 카를로스는 1397년 9월 다섯 딸의 왕위 계승권을 귀족들로부터 인정받았다. 이후 고대하던 아들 카를로스가 1397년에 태어났고 루이도 1402년에 태어났지만 모두 일찍 죽으면서, 나바라 왕국의 차기 군주가 여왕이 되는 것이 확정되었다.
1393년, 카를로스는 누이 마리아를 아라곤 왕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간디아 공작 알폰소 2세와 혼인시키고 아라곤 왕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또한 같은 해에 잉글랜드로부터 셰르부르를 반환받았고, 또다른 누이 호아나를 브르타뉴 공작 장 4세와 잉글랜드 국왕 헨리 4세와 잇따라 결혼하게 했으며, 딸들과 사생아들을 이베리아와 남부 프랑스의 귀족들 및 통치자들과 결혼시킴으로써 나바라 왕국의 안위를 도모했다.
1402년, 카를로스의 딸 수리아와 시칠리아 국왕 마르티누 1세의 결혼식이 거행되면서,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시칠리아 연합 왕국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1406년에는 라마르슈 백작 하이메 2세와 넷째 딸 베아트리체의 결혼을 주선했다. 1408년 아내 레오노르와 장녀 호아나에게 나바라 왕국을 맡긴 뒤 파리로 가서 프랑스 왕실에 에브뢰 백국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1411년까지 이어진 협상 끝에, 네무르 공국을 대신 받고 매년 프랑스 왕실이 에브뢰 백국에 대한 '임대료'를 카를로스 3세와 후계자들에게 지불하는 선에서 해결되었다
1409년 마르티누 1세가 사망하면서 수리아가 미망인이 되자, 카를로스는 수리아를 바이에른-잉골슈타트 공작 루트비히 7세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1410년 초 약혼이 취소되자 같은 해에 바르 공작 로베르토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에두아르도와 약혼시켰다. 그러나 에두아르도가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 역시 물거품이 되었다. 1413년 7월 장녀 호아나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카를로스는 수리아를 왕위 계승자로 삼는 동시에 든든한 사위를 얻어서 왕국의 미래를 보장받으려 했다. 그러나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아라곤의 시칠리아 대리 통치자로 계속 군림하기 위해 마르티누 1세의 사생아 페데리코를 상대로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였고, 이로 인해 시칠리아는 혼란에 빠졌다. 이 상황을 우려한 카를로스는 아라곤 국왕 페란도 1세와 교황청에 사절을 보내 그녀를 돕거나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1415년, 페란도 1세가 파견한 군대가 시칠리아의 혼란을 진정시켰고 4명의 대표들이 위원회를 결성해 내치를 담당했다. 이후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보내졌고, 아버지와 재회한 뒤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확인되었다. 딸 호아나의 남편이었던 푸아 백작 장 1세가 수리아와 재혼하고 싶다고 제의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페란도 1세의 장남인 알리폰소 왕자에게 결혼을 제안했다. 하지만 알리폰소 왕자는 이미 약혼했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고, 페란도 1세는 그 대신 셋째 아들 엔리케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얼마 후 페란도 1세의 차남 추안이 카를로스의 작은 딸 이사벨라와의 약혼을 파기하자, 카를로스는 분개해 페란도 1세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에 아라곤 왕국 측은 나바라 왕국을 카스티야 왕국으로부터 빼내서 자신들에게 복속시키려면 반드시 수리아와 추안 왕자의 결혼이 성사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아라곤 국왕에 등극한 알폰소 5세가 군대를 동원해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배치하고 무력시위를 벌이자, 카를로스는 어쩔 수 없이 협상에 응하기로 했다. 이후 추안 왕자의 어머니인 알부르케르케의 엘레오노르의 중재 하에 추안 왕자와 수리아가 대면했고, 1420년 6월 10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맺은 협약에 따르면, 수리아의 권리는 그녀와 후안의 아들에게 물려줄 것이며, 만약 그녀가 남편보다 먼저 죽으면 후안은 나바라를 떠나야 했다. 또한 카를로스는 다른 아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려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수리아 1세가 아들 카를로스 4세와 딸 수리아 2세를 낳자, 카를로스 3세는 귀족들을 소집해 두 손자와 손녀를 수리아 다음의 후계자로 소개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1423년, 카를로스는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구성하는 세 자치구(나바레리아, 산세르닌, 산니콜라스)를 통합하라고 명령했다. 이들 자치구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상이했고, 서로간의 분쟁이 심했다. 1258년 나바레리아와 산세르닌 자치구 주민들이 산니콜라스 자치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많은 건물을 파괴한 사건이 벌어졌으며, 1276년에는 산세르넨, 산니콜라스 민병대가 나바레리아를 공격해 수많은 시민을 학살하고 팜플로나 대성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파괴해버린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제 카를로스 3세가 세 자치구 통합을 집행하면서, 오랜 세월 이어지던 분쟁이 마무리되었다.
1425년 9월 8일 카를로스 3세가 사망하고 딸 수리아가 나바라 여왕 수리아 1세로 즉위했다. 그러나 호아네스 2세가 될 남편이 그녀를 카스티야 내 자신의 영지에 붙들어놓는 바람에, 그녀의 대관식은 지연되었다. 그러다 남편이 1428년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에게 밀려 카스티야에서 추방된 뒤에야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갔고, 1429년 5월 15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이후 카스티야 왕 후안 2세와 맞서는 남편을 지원하다가 국경의 여러 영토를 잃었지만, 1436년 나바라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 간의 평화 협약이 톨레도에서 체결되고나서 딸 수리아와 후안 2세의 아들 엔리케의 결혼이 성사된 후 지참금 형식으로 잃어버린 땅을 돌려받았다.
1440년 9월 16일 바야돌리드에서 열린 엔리케 왕자와 딸 수리아의 결혼식에 참석하고자 카스티야로 간 뒤 무슬림이 이베리아 반도를 지배하는 계기가 되었던 과달레테 전투가 벌어진 장소를 순례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건강을 해친 그녀는 본국으로 귀환한 후 1441년 4월 1일 산타 마리아 라 레알 데 니에바(오늘날 세고비아)에서 사망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에브레우슈 왕조는 단절되었고 트라스타마라 왕조가 들어섰다.
2.6. 트라스타마라 왕조
수리아 1세는 죽기 2년 전에 작성한 유언장에서 자신의 왕권을 아들 카를로스에게 물려주겠다고 밝히면서도 다음의 문구를 덧붙였다."그리고 우리의 사랑스런 왕자, 우리의 사랑스러운 아들이 우리의 죽음 이후 상속의 권리로 나바라 국왕과 네무르 공작이 될 수 있지만, 그의 아버지이자 왕이신 분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그에게 간청한다. 우리는 아버지의 동의와 축복 없이는 이러한 칭호를 취해서는 안 되니, 할 수 있는 가장 큰 부드러움으로 아버지에게 승인을 구하길 바란다."
수리아 1세는 아마도 남편의 동의를 받고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는 모양새를 연출해 부자간의 사이가 원만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 호아네스가 나바라 왕국의 왕권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호아네스 2세는 수리아 1세의 유언장을 확대 해석해 아들을 나바라의 총독으로 삼을 뿐 왕으로 세우기를 거부하고 자신이 나바라 국왕으로 계속 재위했다. 이후 카를로스는 나바라 총독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는 한편,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와 아버지의 전쟁에 동참했다. 그러면서도 내심 아버지가 자신이 마땅히 취해야 할 왕위를 빼앗았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
그러던 1447년, 호아네스 2세는 아라곤의 명문 귀족 파드리케 엔리케스의 딸인 추아나 엔리케스와 재혼했다. 이후 1450년 1월 1일 나바라 왕국의 올리테에 자신만의 궁정을 세웠으며, 카를로스에게 위임했던 나바라 왕국 통치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급기야 1451년 추아나의 꼬드김에 넘어간 호아네스는 현 나바라 총독인 카를로스를 해임하고 추아나를 총독으로 삼기로 했다. 이에 분노한 카를로스는 나바라 귀족들을 모아 아버지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나바라 왕국과 아라곤 왕국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는 카스티야군을 나바라 왕국과의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해 대대적으로 침공할 준비에 착수했다. 카를로스는 이에 위협을 느껴 추종자들과 함께 나바라 왕국 밖의 산세바스티안으로 피신했다. 이후 호아네스와 카를로스간의 군사적 충돌이 몇 차례 벌어졌지만 사상자는 얼마 되지 않았고, 1451년 5월 양자는 일댠 화해하고 카스티야군을 공동으로 저지하기로 합의했다.
1451년 8월, 카스티야군은 알바로 데 루나의 지휘하에 나바라 왕국으로 쳐들어가 부라돈 성을 함락하고 카를로스를 에스텔라에 가둬놓고 포위했다. 호아네스 2세는 아들을 돕기 위해 사라고사로 진군했지만, 아버지를 믿지 못한 카를로스는 카스티야군과 동맹을 맺기로 한 뒤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리하여 아버지와 완전히 갈라선 그는 1451년 10월 23일 에이바르에서 아버지와 맞붙었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카를로스는 포로로 잡힌 뒤 아라곤으로 끌려가 한 요새에 수감되었다가 1453년 5월 24일 아버지가 살아있는 한 왕을 자칭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맹세를 강요받은 후 풀려났다. 하지만 석방된 후 맹세를 어기고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레린 백작 루이스 데 보몽과 손잡고 아버지에 대항했다.
그러다가 1453년 12월 7일 카스티야 왕비 마리아[10]의 중재로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이 바야돌리드에서 1년간 휴전 협약이 맺어졌을 때, 카를로스 역시 아버지와 휴전하기로 했다. 1년간 휴전이 끝난 후 양자간의 전쟁이 재개되었고, 1455년 3월 27일 보몽 가문의 사병대가 산 후안 데 피에 데 푸에르토를 공략했으며, 1455년 8월 4일에는 토랄바 전투에서 아라곤 왕국군을 격퇴했다. 이에 분노한 호아네스 2세는 1455년 12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동생 수리아 2세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딸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카를로스는 1456년 투델라를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한 데다 푸아 백국으로부터 지원군을 받아낸 아라곤군의 반격이 거세자 나폴리에 있는 삼촌이자 아라곤-시칠리아-나폴리 국왕 알리폰소 5세의 도움을 받기로 하고 그해 5월에 나바라를 떠나 나폴리로 향했다. 이후에도 보몽 가문을 비롯한 나바라 귀족들은 카를로스를 위해 아라곤군과 격전을 치렀고, 1457년 3월 16일 카를로스를 나바라 국왕으로 선포하고 카스티야 왕국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후안 2세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 국왕에 오른 엔리케 4세는 바야돌리드 협약에서 합의된 대로 아라곤 왕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나바라 귀족들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게다가 1454년에 호아네스 2세를 아라곤과 카탈루냐의 대리 통치자로 임명했던 알리폰소 5세는 조카를 위해 아우와 싸우기를 거부했다. 그 대신, 후안과 카를로스의 갈등을 해결해주기 위해 발렌시아 귀족이며 자신의 측근이었던 루이스 데스푸이그를 중재자로 보내 양자를 화해시키게 했다. 카를로스와 후안 모두 이에 동의해, 1458년 3월 6개월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후 알리폰소 5세가 합의안을 제시할 예정이었지만, 그가 1458년 6월에 사망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이리하여 아라곤-시칠리아 국왕[11]이 된 호아네스 2세(추안 2세)는 1459년 12월 카를로스와 평화 협약을 맺고 그를 카탈루냐의 총독으로 세웠으며, 추아나 엔리케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페란도를 몽블랑 공작에 세웠다. 또한 그는 여전히 지지자들의 수중에 남아있는 나바라 영토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겠다고 약속했으며, 나바라와 시칠리아에 다시는 거주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1460년 3월 카탈루냐 공국으로 향한 카를로스는 그해 3월 31일에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뒤 통치를 행사했다. 1460년 9월, 추안 2세는 레리다에서 카탈루냐 궁정을 소집하고 아들 카를로스에게 카스티야 공주 이사벨과 결혼하지 말고 포르투갈의 카타리나 공주와 결혼하라고 권고했다.[12] 그러나 카를로스는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4세의 사절과 비밀리에 만났고, 그의 수행원들은 후안 2세가 페르난도 왕자에게 나바라 왕위를 주기 위해 그를 독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일을 첩자를 통해 전달받은 추안 2세는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 사실인 게 분명해지자 고뇌했다. 그러다 아내 추아나의 부추김에 따라 1460년 12월 2일 카를로스를 체포해 아라곤의 어느 요새에 가두었다.
그러자 카탈루냐와 아라곤, 나바라 등지에서 대규모 반란이 일어났다. 봉기의 규모에 경악한 추안 2세는 1461년 카를로스를 석방하고 왕위 상속인으로 인정했지만, 페란도 역시 계승권이 있다고 못박았다. 그러던 1461년 9월 23일, 바르셀로나로 돌아간 카를로스가 사망했다. 나바라 귀족들은 추안 2세가 미워하는 장남을 독살했을 거라 여기고 수리아 2세를 나바라 여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수리아는 얼마 안가 추안 2세의 군대에 사로잡힌 뒤 올리테에 이송되었다. 하지만 나바라 왕국의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레오노르와 레오노르의 아들인 비아나 공 가스통, 그리고 아라곤 국왕 추안 2세 간의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벌어진 것이다.
당시 나바라 왕국은 나바라 왕국의 평야 지대인 레린 백국에서 세력을 키운 보몽(Beamont) 가문과 피레네 산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그라몽(Agramont) 가문 간의 첨예한 세력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전부터 보몽 가문은 레오노르와 비아나 공 가스통이 나바라 국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아그라몽 가문은 추안 2세가 나바라 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나바라 왕위를 둘러싸고 내전이 벌어졌고, 어느 쪽도 쉽사리 우열을 가리지 못하면서 왕국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1462년 4월 12일, 추안 2세는 딸과 사위와 함께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추안 2세는 나바라 국왕으로 받들어졌고 레오노르는 왕위 후계자이며 아버지를 대신해 나바라를 통치할 섭정으로 세워졌다. 그 후 추안 2세는 베리 공작 샤를과 결혼하기를 거부한 딸 수리아 2세를 푸아 백국으로 보냈고, 레오노르는 언니를 오르테즈의 몽카다 탑에 수감했다. 1464년 12월 2일, 수리아는 독살의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그러나 왕위 분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남편인 가스통 4세가 나바라 왕위를 탐내면서 부부간의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보몽 가문은 레오노르를 지지했고, 아그라몽 가문은 가스통 4세를 지지했다. 급기야 1468년 11월 28일, 팜플로나의 주교이자 레오노르의 고문이었던 니콜라스 드 에차바리가 아그라몽 가문 지지자인 페드로 데 페랄타 이 에스페레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추안 2세는 딸을 나바라 왕위에서 배제하기로 하고 1469년 레오노르의 아들 가스통을 나바라의 총독으로 선임했다.
1470년 레오노르의 아들 가스통이 사망한 뒤, 레오노르는 아그라몽 가문과 화해했다. 그러나 보몽 가문은 추안 2세의 또다른 아들 페란도를 나바라 국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레오노르는 아버지의 지지를 받기 위해 노력한 끝에 1471년 아라곤 왕위 승계를 포기하는 대가로 나바라 섭정으로 재선임되었다. 1472년 7월 10일 가스통 4세가 사망하면서 겨우 지위가 안정된 그녀는 수년간 무탈하게 통치하다가 1479년 1월 28일 후안 2세가 사망하면서 나바라 여왕 레오노르 1세에 등극했다. 그러나 15일 만인 1479년 2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녀는 죽기 전에 손자 푸아 백작 프랑수아에게 나바라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유언을 남겼다. 이리하여 푸아 왕조가 나바라 왕국의 집권 가문으로 등극했다.
2.7. 포이슈 왕조
푸아 백작 프랑수아(프란치스코 1세 페부스)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나바라 왕위에 올랐지만, 당시 나이는 12세에 불과했기에 어머니 마들렌의 섭정을 받았고, 가스통의 형제이자 베아른 주교, 아를의 대주교였던 푸아의 피에르가 조카를 도왔다. 당시 나바라 왕국은 나바라 왕국의 평야 지대인 레린 백국에서 세력을 키운 보몽(Beamont) 가문과 피레네 산맥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아그라몽(Agramont) 가문 간의 심각한 내전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고, 이로 인해 나바라 국왕 대관식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그러다가 내전이 진정된 1481년이 되어서야 나바라 왕국으로 들어왔고 그해 12월 9일 팜플로나 대성당에서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이후 1482년 2월 베아른으로 돌아갔다.한편, 그의 결혼 상대가 누가 될 것인지는 국제적 이슈가 되었다. 삼촌이자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5세의 미망인이자 이사벨 1세에 맞서 카스티야 왕국의 정당한 왕위 승계자라고 주장하는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와 그를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아라곤 국왕이며 이사벨 1세의 남편인 페란도 2세는 이에 대응해 이제 갓 3살된 딸 후아나와 결혼시키자고 제안했다. 모후 마들렌은 이에 대한 대답을 최대한 미루면서 가능한 한 많은 이득을 챙기고자 했다.
그런데 1483년 1월 30일, 프란치스코 1세는 16세의 나이에 베아른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여동생 카탈리나 1세가 나바라 여왕으로 등극했고 어머니 마들렌이 섭정을 이어갔다. 1484년, 모후 마들렌은 나바라 왕국을 노골적으로 노리는 아라곤 왕국의 페란도 2세에 맞서기 위해 딸을 가스코뉴 서부의 귀족 가문인 알브레 가문의 장과 결혼시키기로 했다. 결혼식은 1484년 6월 오르테즈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당시 나바라 왕국은 아라곤 왕국을 등에 업은 보몽 가문과 반 아라곤 성향을 띄던 아그라몽 가문간의 내전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바라 여왕 대관식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1494년 아그라몽 가문과 보몽 가문이 평화 협약을 맺고 페란도 2세가 조인한 후에야 대관식을 겨우 치를 수 있었다. 이때 남편 장 역시 호아네스 3세로서 공동 왕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이자 페란도 2세의 아내인 이사벨 1세는 호아네스 3세를 몰아내고 그들의 아들인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카탈리나 1세를 결혼시키려 했다. 그런 상황에서 1495년 모후 마들렌이 사망했고, 카탈리나 1세와 호아네스 3세가 공동으로 통치를 이끌었다. 1504년, 그녀는 아들 헨리케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아야 하며 자신이 죽으면 팜플로나 대성당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또한 1512년 헨리케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의 딸 사이의 혼약을 논의해, 장차 있을 지도 모를 아라곤-카스티야 왕국의 침략에 대비해 프랑스 왕국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그러나 당시 아라곤 국왕이자 이사벨 1세 사후(1504년) 카스티야 왕국의 섭정을 맡던 페란도 2세는 나바라 왕국이 프랑스 왕국과 결혼 동맹을 맺는 것을 좌시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1512년 7월 25일, 페란도는 알바 공 파드리케 알바레스 데 톨레도에게 군대를 맡겨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게 했다. 아라곤군은 순식간에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를 함락하고 피레네 산맥 이남의 상(上)나바라를 휩쓸고 아라곤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 카탈리나와 호아네스 3세는 적의 공세에 압도되어 피레네 산맥 너머로 도주한 뒤 파우, 오르테즈, 타르베 등 피레네 산맥 이북의 하(下)나바라만 겨우 건졌다. 페르난도 2세는 한동안 나바라 왕을 자칭하다가 1513년 3월 23일 팜플로나에서 회의를 소집해 모든 귀족들에게 충성 서약을 받아낸 후 1515년 나바라 왕국 자체를 없애고 아라곤 왕국의 직할지로 삼았다.
1516년 1월 23일 페란도 2세가 사망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정세가 어수선해지자, 호아네스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나바라 출신의 페드로 장군과 함께 피레네 산맥을 넘어 빼앗겼던 영토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현지에 주둔한 적군에게 격퇴된 뒤 모냉에 있는 에스구아라바케 성으로 후퇴했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그 후 카탈리나 1세가 1517년 2월 12일 몽드마르상에서 사망하면서, 포이슈(푸아) 왕조는 막을 내리고 알브레트(알브레) 왕조가 들어섰다.
2.8. 알브레트 왕조
카탈리나 1세 사후 아들 헨리케 2세가 나바라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는 그 외에도 베아른, 푸아, 비고라, 리바고르사, 아르마냐크, 페리고르, 투르산, 가바르단, 타르타스, 리모주 일대를 상속받았다. 하지만 아직 14살밖에 안 됐기에, 큰누나 아나가 몇 년간 섭정했다. 1521년, 성년이 된 헨리케는 부모대에 잃어버린 나바라 본토를 되찾기로 마음먹었다.당시 나바라인들은 1515년 페란도 2세가 나바라 왕국을 아라곤 왕국에 병합하기로 한 이래 아라곤 관리들의 직접 통치를 받으면서 각종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고, 자연히 강한 불만을 품었다. 과거에 아라곤 왕국 편을 들며 아라곤 왕국이 피레네 이남의 나바라 전역을 공략하는데 큰 도움을 줬던 보몽 가문 역시 정작 자신들에게 별다른 보답을 하지 않고 정치에서 소외시킨 것에 분노했다. 또한 스페인에서는 카를 5세가 프랑스와의 전쟁에 별 관련이 없는 자신들에게 막대한 세금을 부과한 것에 분노한 주민들의 반란이 터졌고, 자연히 옛 나바라 왕국에 대한 당국의 관심이 떨어졌다. 헨리케는 이런 상황에서 나바라 왕국의 부흥을 명분으로 내걸고 군대를 일으킨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1521년 봄, 레스파레 영주 앙드레 드 푸아가 지휘하는 군대가 헨리케의 명령을 받들어 원정을 단행했다. 원정군은 나바라인, 가스코뉴인, 프랑스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병력 규모는 보병 12,000명, 기마 기사 800명, 대포 29문이었다. 이들은 셍-쟝-삐에-드-뽀흐를 거쳐 피레네 산맥을 넘어 나바라 본토에 진입했다. 이후 대다수 나바라인들의 환영을 받으며 순조롭게 행군해 5월 19일 팜플로나에 입성했고 뒤이어 리자라, 타팔라 등 나바라 대부분을 장악했다. 앙드레는 여세를 몰아 카스티야로 진격해 로그로뇨를 포위했다.
그러나 카를 5세에 대항해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이니고 페르난데스 데 벨라스코가 25,000명의 병력을 소집한 뒤 나바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앙드레는 6월 11일 로그로뇨 공략을 포기하고 나바라로 철수했다. 6월 30일, 나바라의 부왕 나헤라 공작이 지휘하는 부대까지 합해 3만 이상으로 늘어난 스페인군은 팜플로나와 에스퀴로즈 사이의 넓은 평원에서 앙드레의 군대와 맞붙었다. 앙드레는 수적으로 열세한 상황임에도 과감하게 선제 공격을 가해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파드리케 엔리케스가 이끄는 카스티야 기병대가 후방을 요격하면서 전세가 기울었고, 결국 나바라군은 5,000명의 사상자를 낸 후 항복했다. 앙드레는 눈에 상처를 입은 채 체포되었다가 헨리케가 거액의 몸값을 지불한 후 풀려났다.
헨리케는 이후에도 더 많은 병력을 파견해 영토 탈환을 시도했지만, 1521년 9월 아말이우 성을 점령하고 1521년 10월 18일 온다리비아를 공략해 바즈탄 계곡을 장악한 것 외에는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522년에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보낸 지원군과 함께 나바라 탈환에 착수했지만, 그 해 6월 30일 산 마르시알 전투에서 알부르케르케 공작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이끄는 스페인 민병대의 기습 공격에 완패했다. 1522년 7월, 레링고 백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착수해 아말이우 성을 탈환했다.
1523년 10월 9일, 카를 5세는 친히 팜플로나에 입성한 뒤 나바라 왕국이 스페인의 일부임을 선언했다. 그 해 가을, 오랑주 공 필리베르 드 샬롱이 이끄는 스페인군은 피레네 산맥을 넘어 리푸르댕, 하나바르, 베아른 일대를 파괴해 헨리케가 다시는 나바라 왕국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못하게 만들었다. 나바라인들은 이후에도 저항을 이어갔지만, 1524년 2월 푸엔테라비아 성에 포위된 저항군이 항복한 후 더 이상의 저항을 포기했다.
헨리케는 자기 힘으로는 카를 5세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프랑스 왕국의 후원을 좀더 얻기로 했다. 그러려면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의 신임을 얻어야 했기에,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원정에 가담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참패를 막지 못하고 프랑수아 1세와 함께 신성 로마 제국군의 포로로 전락했다. 2년 후 감옥에서 탈출하여 본거지로 귀환한 헨리케는 1527년 앙굴렘 백작이자 프랑스 국왕 샤를 5세의 후손인 샤를의 딸이며 프랑수아 1세의 누나이기도 한 마르그리트와 결혼해 프랑스 왕실과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려 했다.
1528년 여름, 헨리케의 동생 카를로스와 아그라몽 가문의 가주 호아네스가 이끄는 나바라군이 나폴리 공방전에 참여했다가 스페인군에게 궤멸되었고, 카를로스와 호아네스 모두 목숨을 잃었다. 이후 1529년 프랑스 왕국과 신성 로마 제국간에 캉브레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 왕국의 지원을 더 받기 어렵게 되자, 그는 무력으로 나바라 왕국을 회복하려는 시도를 단념하고 현재 가지고 있는 영토의 통치력을 강화하고자 노력했다. 1530년 카를 5세가 전략적인 이유로 셍-쟝-삐에-드-뽀흐, 생팔레, 바스티다에서 병력을 철수시키자, 그는 즉시 그곳에 군대를 이동시키고 요새를 건설했다. 또한 베아른 인근 포 지역에 본성을 세웠으며, 1538년에서 1546년 사이에 나바렌고세에 대포를 견딜 수 있는 성채 요새를 건설했다.
한편, 헨리케는 결혼 정책을 통해 상 나바라를 회복하기로 하고, 딸 호아나를 카를 5세의 아들 펠리페와 결혼시키려 했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이 그렇게 했다가는 알브레 가의 영토가 스페인의 손에 넘어가서 자국에 큰 위협이 될 것을 우려해 이를 막았다. 결국 호아나는 펠리페 왕자가 아닌 부르봉 가문의 앙투안과 결혼했다. 1553년 12월 13일 포에서 헨리케 2세의 손자 헨리케가 태어났고, 나바라 왕국의 관습에 따라 즉시 비아나 공으로 지명되었다.
1555년 5월 25일, 헨리케 2세는 하게마우 마을에서 사망했고 레스카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사후 딸 호아나와 사위 앙투안이 각각 호아나 3세와 안토니오 1세로서 나바라 공동 왕이 되었다. 그들은 겉으로는 가톨릭 신자를 자처하면서도 위그노들을 공공연히 옹호했다. 그해 말 개혁적인 전직 수도자이자 설교자인 피에르 다비드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찾아갔다가 다비드가 앙리 2세의 위협을 받고 개혁 신앙을 포기하자 크게 실망해 그와의 교류를 끊어버리기도 했다.
1558년 남편과 함께 개신교 예배에 참여한 호아나는 장 칼뱅의 편지에 고무되어 종교개혁을 완전히 수용했고, 1560년 크리스마스에 자신이 칼뱅주의자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이후 종교 관용 정책을 포기하고 모든 남녀 수도원을 몰수하고 사제와 수도자들을 나바라 왕국에서 추방했으며, 가톨릭 의식을 금지하고 칼뱅파의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했다. 또한 신약성경을 바스크어와 베아르네세 방언으로 번역하게 했으며, 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문맹 퇴치 정책을 실시했다. 반면 안토니오는 가톨릭 미사를 여전히 드리는 등 아내와는 달리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입장을 확실히 정하지 못했다.
1561년,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아들 샤를 9세의 섭정을 맡고 안토니오 1세를 프랑스군 중장으로 임명했다. 1562년 3월 가톨릭 교도들이 50명의 위그노를 살해한 바시 학살 사건이 벌어졌다. 그 달 말에 호아나와 안토니오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파리 왕궁으로 향했다. 이때 안토니오는 왕실의 압력에 따라 가톨릭을 수호하고 위그노를 배척하겠다고 맹세했지만, 호아나는 위그노 학살 사건에 항의하면서 미사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자 안토니오는 그녀를 아내로 여기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위그노 세력과 가톨릭 세력의 갈등을 어떻게든 중재하고 싶었던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호아나에게 평화를 위해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간청했지만, 호아나는 끝까지 자신의 입장을 고수했다.
이후 남편과 카트린의 분노가 두려워 1562년 3월 파리를 떠나 나바라 왕국으로 향하던 그녀는 도중에 방돔에 들러서 400명의 위그노 폭도들이 가톨릭 교회를 약탈하고 성상을 파괴하도록 허용했다. 안토니오는 이에 분노해 그녀를 체포하고 파리의 수녀원으로 보내려고 군대를 파견했지만 잡지 못했다. 호아나는 나바라 왕국에 도착한 뒤 위그노 군대를 재정적으로 지원했고, 왕실군의 침략에 대비해 나바라 전역을 요새화했다. 장 칼뱅 역시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 안토니오의 배신은 진리를 배신한 것이라고 비난하며 올바른 신앙을 이룩하는 데 전념하라고 촉구했다.
안토니오는 방돔에서 병력을 규합한 뒤 1562년 10월 나바라 왕국으로 진격했지만, 루앙 공방전 도중 치명상을 입었다. 남편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던 호아나는 이 소식에 크게 놀라 적진에 사절을 보내 자신이 직접 간호하고 싶으니 허락해달라고 청했지만, 안토니오는 이를 듣지 않고 정부 루이즈 드 라 베아루디에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이리하여 나바라 왕국의 단독 군주가 된 호아나 3세는 왕실군의 침략에 맞서 방어전을 수행했다. 전쟁은 1563년 3월까지 이어지다가 카트린과 호아나가 휴전 협정을 맺으면서 일단 소강 상태가 되었었지만, 양자는 휴전 기간 중에도 서로를 꺾기 위해 병장기를 가능한 한 많이 모으고 병력을 징발했다.
교황 비오 4세는 사절을 보내 가톨릭으로 돌아오고 이단을 폐지하도록 권고했지만, 호아나는 "베아른에서는 교황 사절의 권위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답하며 거부했다. 비오 4세는 이에 분노해 호아나를 체포해 종교재판에 넘기고 나바라 왕국을 프랑스와 스페인에 분할시켜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나바라 왕국을 자기 영토로 여기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프랑스 섭정 카트린 모두 교황이 부당한 내정간섭을 하고 있다고 여기고 교황청에 항의 서신을 보냈고, 비오 4세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의견을 철회했다.
1568년, 위그노 전쟁이 재발했다.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이 동시에 압박하면서 상황이 위태로워지자, 호아나는 아들 헨리케와 함께 위그노의 본거지인 라로셸로 피난했다. 이후 자신에게 동정적인 외국 통치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서신을 작성했다. 그녀는 라로셸이 위치한 기옌 지방을 "프로테스탄트의 고향"으로 상징화하면서, 올바른 신앙이 관철될 때까지 투쟁하겠다고 밝혔다. 이후 요새화 작업을 감독하고 군대 유지를 위한 재정 마련에 골몰하는 한편, 정보 수집 및 민간인 규율 유지를 담당했다. 여기에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로부터 거액의 돈을 대출받으면서 자신의 보석을 담보로 사용했고, 라로셸에 피난한 수많은 난민들의 복지를 감독했다. 그녀는 종종 콜로니 장군과 함께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전장을 시찰했고, 방어 시설을 감독하고 위그노 군대를 사열했다. 여기에 라로셸에 칼뱅파 신학교를 세우고 학식이 뛰어난 위그노들을 교사로 세웠다.
1570년 가톨릭 진영과 위그노 진영간의 화해를 논하는 생제르맹앙레이 조약이 맺어졌다. 이 조약 체결 과정에 큰 영향력을 행사한 그녀는 카트린 드 메디시스와 만나서 자신의 아들인 헨리케와 카트린의 딸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의 결혼 문제를 논의했다. 그녀는 처음에는 이 결혼을 탐탁치 않아 했다. 왕위 후계자인 헨리케가 가톨릭 신자가 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트린의 설득에 결국 승낙했고, 4월 11일 헨리케와 함께 파리로 향했다. 이후 2달 간 다가오는 결혼식을 준비하기 위해 매일 쇼핑하다가 결혼식이 열리기 2달 전인 1572년 6월 9일 갑작스러운 중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리하여 알브레트 왕조가 단절되었고, 부르봉(보르보이) 가문이 나바라 왕국의 지배 가문으로 등극했다.
2.9. 프랑스에 흡수되다
호아나 3세 사후 아들 헨리케 3세가 나바라 왕위에 올랐다. 그는 나바라 왕국을 근거지로 삼고 위그노의 지지를 받으며 1587년부터 1593년까지 위그노 전쟁을 치른 끝에 앙리 3세의 암살 이후 지리멸렬해진 반대 세력을 격파하고 파리에 접근했다. 그는 대다수가 가톨릭 교도인 파리 백성에게 왕으로서 인정받기 위해 1593년 7월 25일 프랑스 국왕이 묻히는 생 드니 대성당 앞에서 서서"파리는 미사를 드려서라도 가질 가치가 충분하다"(Paris vaut bien une messe)
라고 외친 뒤 가톨릭으로 원복했다. 그 후 가톨릭 교도와 위그노 모두에게 프랑스 왕으로 인정받으면서, 그는 200여 년간 이어질 부르봉 왕조를 개창했다.1610년 헨리케 3세가 암살당하고 장남 루이스 2세(프랑스의 루이 13세)가 나바라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1620년 나바라 왕국은 폐지되고 프랑스 왕국에 합병되었다. 그래서 나바라 왕국은 사라지고 대신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으로 프랑스 왕위에 따라붙는 부가적인 칭호로만 남았다. 프랑스 혁명 시기 루이 16세의 칭호가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에서 '프랑스 국민의 왕'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에 흔적조차 없어져 루이 16세를 끝으로 소멸했다. 그 후 루이 18세, 샤를 10세의 복고 왕정 시기에 잠시 부활했지만 루이 필리프가 다시 '프랑스 국민의 왕'을 칭호로 사용하면서 완전히 소멸했다.
3. 역대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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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나바라 국왕 문서 참고하십시오.
[1] 1589년 헨리케 3세가 프랑스 왕 앙리 4세로 재위했을 때의 왕실기로 1212년부터 1589년까지 이 깃발을 사용했다. [2] 칭호폐지[3] 이 사건을 모티브로 창작한 작품이 롤랑의 노래이다.[4] 그녀는 오르티 가르체이츠의 딸 오네카 오르티츠와 압둘라 이븐 무함마드의 사촌인 아스나르의 딸이었다.[5] 이 땅은 카스티야 백국과 레온 왕국이 오랫동안 영토 분쟁을 벌인 지역이었다.[6] 일명 '루보 왕'[7] 그중 2명은 샤를 드 라 세르다 암살에 관여한 이들이었다.[8] 루이 10세의 첫 번째 왕비이자 호아나 2세의 모친으로, 불륜을 저질러 감금되었다.[9] 자세한 경위는 카를로스 2세 문서 참고[10] 아라곤 국왕 페란도 1세의 딸이자 호아네스 2세의 여동생이었다.[11] 나폴리 왕위는 알폰소 5세의 사생아인 페르디난도 1세에게 넘어갔다.[12] 카를로스의 아내 이네스는 1448년에 자식을 낳지 못한 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