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5-14 13:04:04

프랭클린 D. 루스벨트/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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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0044C9> 일생 생애
가족 아내 엘리너 루스벨트 · 친척 시어도어 루스벨트
역대 선거 193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3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0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44년 미국 대통령 선거
관련 정치인 아돌프 히틀러 · 이오시프 스탈린 · 윈스턴 처칠 · 해리 S. 트루먼 · 마오쩌둥 · 장제스 · 허버트 후버 ·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 존 낸스 가너 · 네빌 체임벌린
기타 구축함과 기지 협정 · 그 개새끼는 우리 개새끼 · 제2차 세계 대전 · 루스벨트 계획 · 루스벨트 가문
FDR 행정부
사상 뉴딜 자유주의
국내정책 뉴딜 정책 ·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 · 금주법 폐지
대외정책 헐 노트 · 면맥차관 · 중미은협정 · 무기대여법
사건사고 대공황 · 뉴 런던 학교 폭발 사고 · 애디슨 카운티 살인사건 · 미국 유령 비행선 사건 · 클리블랜드 토르소 살인사건 · 파나이 호 사건 · 코코넛 그로브 나이트클럽 화재
전쟁 제2차 세계 대전 ·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 로스앤젤레스 전투)
핵무기 계획 트리니티 실험 · 맨해튼 계획
파일:노란색 깃발.svg 자유주의 }}}}}}}}}

1. 개요2. 어린 시절과 정계 입문 초기3. 부통령 후보 출마와 뉴욕주지사 재임4. 대통령 취임과 뉴딜 정책 추진5. 제2차 세계 대전 참전6. 승전을 눈앞에 두고 사망

1. 개요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일생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어린 시절과 정계 입문 초기

파일:프랭클린 루스벨트 여장.jpg
1884년 2살 때 여장을 한 모습오토코노코[1]
파일:RvKf4Sp.gif
10대 시절
1882년 1월 30일, 뉴욕주 하이드파크에서 태어났다. FDR의 아버지는 지역 사회의 유복한 지주이자 델러웨어 앤 허드슨 철도의 부사장인 제임스 루스벨트 1세(1828~1900)였고, 미들네임인 어머니의 가문 델러노(Delano)는 보스턴 브라민의 일원이었던 만큼 매우 유복하게 자랐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FDR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가정교육여행으로 견문을 쌓다가 14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그후 하버드에 입학하여 3년간 사학을 전공했고 컬럼비아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률을 공부한 후 뉴욕주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뉴욕의 법률회사에 취직했다. 학창 시절은 큰 재미없이 보낸 듯 하다. 어려서부터 귀공자처럼 혼자 자라서 그런지 친구는 별로 없었다고. 다만 본인은 공부만 파는 체질은 아니었고 운동과 밖에 돌아다니는 옥외활동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1905년 3월 17일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이자 자기에겐 먼 친척뻘(13촌)인 엘리너 루스벨트와 결혼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Franklin_Roosevelt_Secretary_of_the_Navy_1913.jpg 파일:swuyNgB.jpg
1913년 해군 차관보 시절 그의 젊은 시절
그러다 1910년 공화당 최강세 지역인 더치스 카운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뉴욕주 상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한 후, 1913~1918년까진 제1차 세계대전도 겪으며 제프 대니얼스 해군 장관 아래에서 해군부 차관보를 역임한다. 이 때의 인연으로 그는 대통령 임기 내내 미합중국 해군에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이때부터 루스벨트는 대니얼스 전 장관을 '보스'로 모셨는데, 이때 대니얼스는 루스벨트가 자기를 깐 적도 있지만 대인배스럽게 계속 그를 후원해주었다고 한다. 이래선지 혹자는 대니얼스를 둔 루스벨트가 천운의 소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고. 이후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2차 세계대전 직전에 대니얼스를 멕시코 대사로 보내기도 한다. 또 이때 루스벨트는 '루이 하우'라는 비서 겸 동료를 얻게 되는데, 이 사람은 이후 루스벨트의 킹메이커로 많은 정치적 조언을 해주게 된다. 해군차관보 시절 해군에서 일하는 일반 노동자들과 루스벨트가 친분을 맺게 해 이들을 루스벨트의 지지그룹으로 만든 것도 루이 하우의 작품이라는 말이 있다. 출처

3. 부통령 후보 출마와 뉴욕주지사 재임

1920년 오하이오 주지사 제임스 M. 콕스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부통령 후보에 지명되지만[2], 당시 민주당 윌슨 대통령이 주도하다 결실을 맺지 못한 국제연맹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 등으로 제임스 콕스 후보가 공화당 워런 G. 하딩 후보에게 패하며 FDR도 함께 낙선한다.

게다가 본인 건강에도 큰 문제가 생기는데, 1921년 8월 캐나다 캄포벨로의 별장에서 쉬다가 찬물에 빠져 소아마비 진단을 받았으며,[3] 때문에 반신불수가 되어 통증에 시달린다. 이후 몇 년간 뼈를 깎는 재활훈련 끝에[4] 완벽하진 않아도 부축없이 겨우 걸을 정도가 되자 사람들은 그의 의지에 찬사를 보냈고 이에 힘입어 다시 정계로 복귀했다.

어느 정도 병세가 회복되자 1924년 뉴욕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참가했는데 이 때 버팀목에 의지하여 연단까지 스스로 올라가 군중들을 감동시켰고 뉴욕주지사 앨프리드 스미스를 대통령 후보로 지명하는 연설을 했다. 여기서 얻은 별명이 '뉴욕주지사의 행복한 전사'였다.[5] 그 후 1928년 정계에 완전히 복귀하여 민주당의 뉴욕 주지사 후보가 되어 당선되었고 1930년에 큰 표 차이로 재선되었다. 이 때부터 혁신 정책을 실행했는데, 대공황 시대를 맞아 주(州) 차원의 구호 프로그램인 산업보험, 자연보호 관련 일자리 창출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화로에 앉아 라디오로 연설을 한 이른바 노변담화(Fireside chat)를 실시한 것도 바로 이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나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일반 대중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병세는 훨씬 심각했지만 의도적으로 숨긴 감이 많았다.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도 하반신 치료를 계속 지속했으며 비공식 석상에서는 여전히 휠체어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파일:external/thepresidentialpool.files.wordpress.com/fdr-chair.jpg
뉴욕주 하이드파크 자택에서 애견 팔라, 저택 관리자의 손녀와 함께. 참고로 이 사진에서는 다리가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반신이 찍히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위 사진은 루스벨트가 휠체어를 타고 찍은 몇 안 되는 사진 중 하나다.

사족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기자들이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자동차나 열차에서 내리거나 걸으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찍지 말아달라는 일종의 보도지침 역시 기자들이 자발적으로 지켜주었다. 백악관 출입기자로 처음 발령받은 신참 기자가 대통령이 휠체어 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사진을 찍으려하자 동료기자들이 밀쳐서 카메라를 떨어뜨린 일화도 있다고 한다. 그의 장애는 잘(?) 숨겨졌는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맞아주었다고 기억한 방문객이나 지인이 많았고[6], 그가 죽고 나서야 대통령이 장애가 있었다는 사실을 안 국민들도 많았을 정도였다고 한다.[7]

다만, 장애를 의도적으로 숨겼다는 식의 내용은 과장된 감도 없잖아 있다. 실제 1932년 전당대회 당시부터 정적들은 루즈벨트의 건강을 물고 늘어졌고, 루스벨트도 대통령 후보 지명을 수락할때 대놓고 휠체어를 타고 나올 정도로 당내에서는 이미 그가 반신불수라는게 공공연한 비밀 수준이었다. 마이애미대 교수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토빈도 소아마비 사실을 기를 쓰고 숨겼다는건 과장된 사실이며, 루즈벨트 세대 미국인들은 대부분 루즈벨트가 최소한 걸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자세한건 이 글도 참고. 즉, 애초에 반신불수인 이상 주변인들은 당연히 알았을 것이며, 그 외 타지에 사는 사람들은 몰랐을 가능성도 있었다고 보는게 좀 더 합리적일 것이다.

4. 대통령 취임과 뉴딜 정책 추진

파일:external/www.achievement.org/tel0-056.jpg

1932년 1월 대통령직에 도전하겠다고 발표했고 민주당의 지명을 받아 민주당 후보가 되었다. 그 결과 당시 대공황의 원흉으로 지탄받던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파일:the-new-yorker-cover-march-4th-1933-peter-arno.jpg
루스벨트가 당선될 당시인 1933년 3월의 시사 잡지 더 뉴요커 표지. 왼쪽이 허버트 후버이며, 오른쪽이 루스벨트이다.

1933년 2월 즈음 취임을 앞두고 마이애미에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다. 범인은 시카고 마피아의 사주를 받은 주세페 장가라(Giuseppe Zangara). 다만 장가라의 총알은 FDR에게서 빗겨가 그 옆에 있던 시카고 시장 안톤 서맥의 가슴에 맞았고 결국 시장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참고로 이 암살사건에 대한 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사건의 목표가 애초에 루스벨트가 아닌 서맥이라는 것이다. 서맥 시장의 전횡(?)[8]에 화가 난 시카고 마피아들이 장가라를 미끼로 하여 루스벨트를 암살할 것처럼 액션을 취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서맥을 죽였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 당시 장가라의 총과 서맥이 맞은 총탄 구경이 각각 다르다는 것이 내세워지기도 한다. 물론 지금에 와선 믿거나말거나 수준이라 어느 설을 신뢰할진 알아서 판단하자.

여하간, 한 달 뒤 그가 1933년 3월 4일 대통령에 취임할 때 했던 말은 길이길이 남았다.
"So, first of all, let me assert my firm belief that the only thing we have to fear is...fear itself."(후략)
"우선, 제 확고한 신념을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다."(후략)

파일:external/www.hermes-press.com/FDR_labor2.jpg
노동자의 선택, 루스벨트.
-1936년 대선 포스터.#

대통령이 된 후 루스벨트는 당시 대공황에 빠져있던 미국경제를 살리기 위해 취임하자마자 일단 은행의 파산을 막기 위해 은행을 휴업시켰고, 공공사업 확대와 실업자 구제, 복지 확충과 금융 개혁으로 대표되는 이른바 뉴딜(New Deal) 정책을 수립하기에 이른다.[9] 예를 들어 테네시 계곡 개발공사(TVA)로 대표되는 대대적인 공사 사업으로 일자리를 실업자들에게 제공하고, 당시 방임적인 기업정책을 수정하여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한 법인 와그너법의 제정과 오늘날 미국의 사회복지 체계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는 사회복지법 제정 등이 이때 이뤄졌다. 또한, 1933년 증권법1934년 증권거래법을 통해 증권 거래에 대한 규제의 틀을 잡았다.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이자 과감했던 이런 정책들이 시행된 후, 그의 집권기간 실업률은 줄고 국민소득은 올라가는 등 경제 상황이 빠르게 호전된다. 그리고 이러한 호경기에 힘입어 그는 1936년 대선에서 상대편 공화당 후보인 알프레드 랜든(Alfred Landon)을 압승하며 재선에 성공한다. 1936년 대선 선거운동을 하면서 루스벨트는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다음과 같은 연설을 하기도 했다.


[ 연설 전문 ]
||For twelve years, our nation was afflicted with hear-nothing, see-nothing, do-nothing Government. The Nation looked to Government but the Government looked away.
12년 동안 우리 국민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일하지 않는 정부로 인해 고통받았습니다. 국민은 정부를 바라보았지만 정부는 국민을 외면했습니다.

Nine mocking years with the golden calf and three long years of the scourge! Nine crazy years at the ticker and three long years in the breadlines! Nine mad years of mirage and three long years of despair!
9년의 금송아지 환락[10]과 3년의 기나긴 천벌! 9년의 주식 광란과 3년의 기나긴 배급줄! 9년의 신기루 환상과 3년의 기나긴 절망![11]

Powerful influences strive today to restore that kind of government with its doctrine that that Government is best which is most indifferent.
오늘날 강력한 세력가들은 무관심한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는 자신들의 교리를 앞세워 그러한 정부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For nearly four years you have had an Administration which instead of twirling its thumbs has rolled up its sleeves. We will keep our sleeves rolled up.
지난 4년간 여러분은 손가락을 휘두르는 대신 소매를 걷어붙이는 정부와 함께 하였습니다. 우리는 계속 소매를 걷어붙이겠습니다.

We had to struggle with the old enemies of peace—business and financial monopoly, speculation, reckless banking, class antagonism, sectionalism, war profiteering.
우리는 평화의 오랜 적들과 투쟁해야 했습니다 - 산업과 금융독점, 투기, 무절제한 은행업, 계급간 대립, 파벌주의, 전쟁으로 부당 이득을 챙기는 이들.

They had begun to consider the Government of the United States as a mere appendage to their own affairs. We know now that Government by organized money is just as dangerous as Government by organized mob.
그들은 미국 정부를 자신들의 사업을 돕는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조직적 자금에 의한 정부는 조직적 폭력배에 의한 정부만큼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Never before in all our history have these forces been so united against one candidate as they stand today. They are unanimous in their hate for me and I welcome their hatred.
우리들의 역사상 한 번도 이 세력들이 한 명의 후보에게 이토록 대항해 힘을 모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만장일치로 저를 증오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들의 증오를 환영합니다.
ㅡ 1936년 10월 31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연설. 편집 영상.||


한편, 이 1936년 대통령 선거는 선거 여론조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유명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당시 잡지사인 리터러리 다이제스트(The Literary Digest)는 대규모 전화 여론조사 및 독자들에 대한 우편 설문을 통해서 공화당의 알프 랜던이 선거에서 이길 것[12]이라고 발표했는데 결과는 정반대로 루즈벨트의 압승. 그것도 미국 대통령 선거 역사상 2번째로 높은 전국 득표율인 60.8%(1위는 1964년 린든 B. 존슨의 61.1%)를 기록하며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상하원 선거도 상원 76석, 하원 총 435석 중 334석을 쓸어담는 그야말로 압승.[13]

사실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이전에 여러 번 선거 예측에 성공한 선례가 있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처참할 정도의 오판을 한 이유는 리터더리 다이제스트의 조사 방법 때문이었다. 뭔 소린가 하면 위에서 언급한 전화 및 우편 설문은 그 표본의 대표성이 크게 떨어졌다. 당시 리터러리 다이제스트의 독자는 잡지를 사서 읽을 정도가 되는 중산층 이상 계층이 주를 차지했고, 당시에는 꽤 고가품이었던 전화기를 집에 설치할 정도의 계층 역시 중산층 이상이 다수였다. 때문에 표본은 편파성을 띄게 되었고, 결국 잘못된 결과를 도출한 것. 그리고 이 실패로 인해 다이제스트는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고 2년 후인 1938년 폐간하고 만다. 반면 조지 갤럽이란 언론인은 무작위 표본 추출을 통한 조사를 통해서 루스벨트의 승리를 예측했고 이것이 맞아 떨어지면서 인기를 얻는데,[14] 이 성공으로 갤럽은 독자적인 여론 조사기관을 만들었고 이게 바로 현대의 그 유명한 갤럽이다.[15]

그렇게 루스벨트는 집권 2기에 들어섰으나, 1937~1938년엔 뉴딜정책의 효력이 떨어졌는지 다시 불경기가 찾아왔고, 외교적으론 파시즘의 도래로 전운이 감돌던 유럽 지역에 적극 개입할 것인지 여부를 두고 고심하게 되었다. 당시의 불경기에 대해선 경제 주기상 자연스레 찾아오는 일시적 패턴이란 설도 있고, 또 고전학파 전문가들은 뉴딜 정책의 재정지출 효과가 한계에 부딪혔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다만 케인즈주의자들은 3년간의 호황이 지속되자 재정지출을 잠시 줄였더니 즉 뉴딜을 하지 않았더니 오히려 일어난 참사였다고 주장한다. 실제 이 때의 경기 침체란 것도 상대적인 것으로 대공황 시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또 집권 1기와 달리 집권 2기는 의회와의 상대적 불화로 애초에 뉴딜이 제대로 작동할만한 법안을 많이 통과시키지도 못했다.[16]

실제 집권 1기 동안에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과반 의석에 힘입어 뉴딜 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을 거침없이 통과시켰지만, 1937년 들어 민주당의 진보화에 불만을 가지던 보수적인 상당수 남부 민주당원 의원들은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이른바 보수연합을 구축하게 된다. 그리고 보수연합은 1930년대 중후반 이후에 상정된 뉴딜정책을 뒷받침하는 법안들의 거의 대부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실제로 가장 마지막으로 입법화되는데 성공한 뉴딜 정책 관련 중대 법안은 1938년에 제정된 "공정한 노동기준에 대한 법(Fair Labor Standards Act of 1938)"이다. 또 보수연합은 뉴딜 정책에 대한 법안들의 상당수를 위헌으로 판결한 당시의 보수적인 대법원을 무력화하기 위한 루스벨트 행정부의 대법관 증원 시도를 무산시키는 데에도 성공했다.[17]

하여튼 그런 와중 1940년, 루스벨트는 조지 워싱턴 이래로 (명문화되진 않았지만) 지켜져오던 3선 금지의 룰을 깨고 대통령 선거에 3번째로 출마한다. 물론 이런 그의 행동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에서도 반발이 있었고, 실제로 민주당 내에서 그의 3선을 반대하는 포스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전쟁의 여파가 미국에도 서서히 드리워지는 상황 속에서 미국인들은 그를 다시 지지했고, 비록 지난 선거보다는 득표율이 떨어졌어도 여전히 넉넉한 표차로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Wendell Willkie)를 누르고 3선에 성공한다. 미국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서 1941년 공식 참전 선언을 할 때까지 개전 후 약 2년 정도 중립을 유지했는데, 루즈벨트가 3선에 출마, 당선된 1940년이 정확히 그 사이였던 것.

5.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그의 3기 임기가 시작되던 무렵인 1940년경에는 미국의 1차대전 참전이 '잘못'이었다는 여론이 많이 줄어든 상태였다. 미국인들도 미국이 전쟁에 참전할 것을 지각하고 있었다는 정황이기도 하다.[18] 또한 루스벨트 본인도 세 번째 취임 때 4가지 자유라는 연설에서 부분적으로 전쟁을 예고하기도 했다. 여기서 밝힌 4가지 자유란 '표현과 언론의 자유', '종교의 자유', '궁핍으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인데, 여기서 말하는 '공포'란 다름아닌 전쟁을 의미. 물론 방법적으론 세계적 규모의 군축을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여튼 서서히 미국도 전쟁에 참전할 준비를 하게 된다.[19]

그리고 역사적인 1941년 일본제국진주만 공습 이후, 루스벨트는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을 선언한다. 이른바 태평양 전쟁의 시작이었다.
고립주의 성향의 국민을 참전으로 이끌고 갔던 루스벨트의 역할은 여론조사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현대 정치인들에게 민주주의 체제에서 리더십의 범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한 좋은 본보기가 된다. 유럽의 세력균형이 위협을 받았기 때문에 미국은 세계지배를 향해 폭주하는 독일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조만간 개입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국력이 가파르게 증가함에 따라 미국은 궁극적으로 국제무대의 중심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일이 이런 속도로 그리고 이렇게 결정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업적이다.

모든 위대한 지도자는 홀로 걷는다. 동시대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직 분명하지 않았던 도전을 간파해낼 수 있는 능력에서 이들의 비범함이 드러난다. 루스벨트는 고립주의 성향의 국민을 이끌고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의 가치와 모순되며 대체로 미국의 안보와 무관하다고 간주되었던 국가들 간의 전쟁에 동참했다. 루스벨트는 1940년 이후 불과 몇 년 전에 압도적 표차로 일련의 중립법(Neutrality Acts)을 통과시켰던 의회를 상대로 계속 증가하고 있었던 대 영국 지원을 정식으로 승인하도록 설득했고, 전면적인 교전상태 직전까지 갔으며, 때로는 심지어 그 선을 넘기도 했다. 결국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하자 미국이 마지막까지 붙들고 있었던 망설임이 사라졌다. 루스벨트는 2세기에 걸쳐 스스로 난공불락이며 안전하다고 믿어 왔던 사회를 상대로 만약 추축국이 승리한다면 심각한 위험에 직면할 것이라고 설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이번에는 미국의 개입이 항구적인 국제적 관여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되게 했다. 전쟁 기간 동안 루스벨트의 리더십 덕택에 동맹이 단결했고 오늘날까지도 국제공동체에 계속 기여하는 다자적 제도가 형성되었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383~384p
루스벨트의 첫 번째 임기는 제1차 세계대전에 관한 수정주의의 전성기와 겹쳤다. 1935년에 노스다코다 출신 상원의원인 제럴드 나이(Gerald Nye)가 주도했던 상원 특별위원회는 군수업체 때문에 미국이 전쟁에 참여했다고 비난하는 1,400페이지의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이후 얼마 안 되어서 월터 밀리스(Walter Millis)의 베스트셀러인 <전쟁으로 가는 길(The Road to War)>을 통해 일반 대중이 이 주제에 익숙해졌다. 이런 시각들의 영향 하에서 미국의 참전은 근본적이거나 항구적인 이익보다 부정한 행위, 음모, 배신 등으로 설명되었다.

미국이 또다시 전쟁의 유혹에 빠져드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의회는 1935년부터 1937년 사이에 소위 중립법(Neutrality Acts)을 세 건이나 통과시켰다. 나이 상원의원이 발간한 보고서로 촉발된 이 법은 교전당사국(전쟁의 원인이 뭐가 됐건 간에)에 대한 차관 제공이나 다른 재정적 원조를 금지했고, 모든 당사국(누가 피해국인지를 막론하고)에 무기 금수조치를 부과했다. 현금을 통한 비군수물자의 구매는 미국 선적이 아닌 선박으로 운송될 때에만 허용되었다. 의회는 위험을 거부했지만 이윤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침략국들이 유럽을 주름잡고 있을 때 미국은 침략국과 피해국 양쪽 다 똑같이 제약하는 법안들을 제정함으로써 침략국과 피해국 간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392p
루스벨트는 과거 윌슨의 측근이었던 에드워드 하우스(Edward House)대령에게 1937년 10월에 "우리가 폭동을 억제하기 위해 길거리로 나가 우리의 영향력을 행사하기보다 문과 창문을 걸어 잠근다면 전쟁이 우리에게 훨씬 더 위험해질 것임을 국민들이 깨닫게 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미국이 침략 행위를 진압하는 것을 돕기 위해 국제문제에 관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루스벨트가 직면한 시급한 과제는 분출하는 친고립주의 정서였다. 1938년 1월에 미 하원은 미국이 침략당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선전포고를 하려면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개헌안을 거의 통과시킬 뻔했다. 루스벨트는 이 개헌안이 통과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개인적 호소에 의지해야 했다. 이런 여건에서 루스벨트는 대담하기보다 신중한 게 더 낫다고 보았다. 1938년 3월에 미국 정부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Anschluss)에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형식적 항의에만 그친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을 따른 것이다. 뮌헨 회의로 이어지는 위기 동안 루스벨트는 미국이 히틀러에 대항하는 공동전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반복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런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내비치는 부하나 심지어 가까운 친구조차 부인해야 했다.
...
뮌헨 회의는 루스벨트가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과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하지만 점차 실질적으로 공동전선을 펼치겠다고 마음먹게 한 전환점이 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때부터 독재자를 좌절시키겠다는 그의 강한 의지는 거침 없었고, 3년 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정점에 달했다. (...) 그는 미국을 깊이 신뢰했다. 나치즘이 사악하면서 동시에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동시에 이례적으로 간교했다. 그리고 루스벨트는 고독한 결정이라는 부담을 짊어질 각오가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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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10월 26일 뮌헨 협정이 발표된 지 4주도 안 되어서 루스벨트는 격리연설이라는 주제로 돌아갔다. 헤럴드-트리뷴(Herald-Tribune Forum)에 보내는 라디오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국명을 거명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침략국들에 대해 이 나라들의 "국가정책이 전쟁 위협을 고의적 수단으로 채택하고 있다."라고 경고했다. 이어서 루스벨트는 군축을 원론적으로 옹호하면서도 아울러 미국의 국방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우리는 주변국들이 완전히 무장한 이상, 우리나라건 어떤 나라건 군축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일관되게 지적해왔습니다. 만약 전반적인 군축이 없다면, 우리 스스로도 계속 무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좋아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는 조치입니다. 하지만, 침략을 할 수 있는 무기가 전면 폐기될 때까지 국가의 신중성, 그리고 상식이라는 일반적인 원칙에서 볼 때 우리는 준비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루스벨트는 비밀리에 훨씬 더 많이 나갔다. 루스벨트는 1938년 10월 말에 영국 공군장관 및 네빌 체임벌린 총리의 개인적인 친구와 별도의 회담을 하면서 중립법을 우회하는 계획안을 제시했다. 자신이 최근에 서명한 중립법을 노골적으로 회피하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미국 국경과 가까운 캐나다에 영국과 프랑스 비행기 조립 공장을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미국이 모든 부품을 공급하고 최종 조립만 영국과 프랑스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조치는 짐작건대 부품이 민수물자라는 이유로 기술적으로 중립법의 규정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체임벌린의 특사에게 "만약 독재자와 전쟁을 하게 된다면, 체임벌린은 미국의 산업 자원을 배후에 확보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붕괴된 공군력 복구를 도와주려고 했던 루스벨트의 계획은 그 정도 규모의 사업을 비밀리에 착수하는 게 순전히 물류 측면에서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루스벨트의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지원은 의회와 여론을 피해가거나 극복할 수 없었을 때만 제한되었다.

1939년 초 의회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이탈리아, 독일, 일본을 침략국으로 지목했다. 격리연설의 주제를 내비치면서 루스벨트는 "침략국 정부가 우리 국민의 총체적 감정을 절실히 느끼게 할 수 있는, 단순한 말보다 더 강력하고 더 효과적인, 전쟁 이외의 수단이 많이 있습니다." 라고 언급했다.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한 지 한 달도 안 된 1939년 4월에 루스벨트는 처음으로 약소국들에 대한 침략이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1939년 4월 8일 기자회견에서 루스벨트는 기자들에게 "세계의 모든 약소국들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독립을 유지하는 게 분명히 우리나라의 안전과 번영에도 영향을 줍니다. 약소국들이 하나씩 사라질수록 우리나라의 안전과 번영도 취약해집니다."라고 말했다. 3월 14일 범미연맹(Pan American Union)에서 했던 연설에서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미국의 안보 이익이 더 이상 먼로 독트린의 제약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앞으로 몇 년 내로 항공기들이 오늘날 유럽의 내해(內海)를 가로지르듯이 대양을 쉽게 횡단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세계는 경제적 기능 측면에서 반드시 하나의 단위가 될 것입니다. 미래에는 어디에서라도 교란이 발생하면 모든 곳에서의 경제 활동이 지장을 받을 것입니다.
범미주지역 문제와 관련해서 과거 세대는 서반구가 다 함께 협력하는 원칙과 방법을 구축하는 데 관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는 신세계가 구세계와 평화롭게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에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1939년 4월에 루스벨트는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메시지를 직접 전달했다. 비록 독재자들의 비웃음을 사기는 했지만, 이 메시지는 추축국이 실제로 침략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사실을 미국 국민에게 보여주려고 교묘하게 고안된 것이었다. 확실히 미국 대통령 중 가장 미묘하면서도 가장 기만적인 사람 중 한 명이었던 루스벨트는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독재자들에게 앞으로 10년 동안 유럽과 아시아 31개국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고 나서 루스벨트는 이 31개국으로부터 독일과 이탈리아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유사한 안전보장을 받으려고 나섰다. 마지막으로 긴장완화의 결과로 개최되는 어떠한 군축회의에도 미국이 참여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루스벨트의 편지는 외교사에서 참모진들이 꼼꼼하게 검토한 문서로 기록되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각각 프랑스와 영국의 위임통치령인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이 독립국으로 등재되어 있었다. 히틀러는 제국의회(Reichtstag)에서 연설하면서 루스벨트의 메시지를 흥미를 돋우는 소재로 활용했다. 히틀러는 루스벨트가 히틀러에게 그대로 두라고 간청했던 국가들의 명단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독일 총통이 우스꽝스러운 어조로 국명을 하나씩 발음하자 제국의회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루스벨트의 편지에 적힌 각각의 국가들에게 그들이 실제로 위협을 느꼈는지 물어봤다. 그중에 많은 나라들이 히틀러 앞에서 떨고 있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강하게 부인했다.

히틀러가 연설 측면에서는 점수를 땄지만, 루스벨트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만 보장을 요청함으로써 루스벨트는 당시 루스벨트에게 중요했던 유일한 청중인 미국 국민 앞에서 이들을 침략자로 낙인찍었다. 민주주의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해 미국 여론을 동원해야 했던 루스벨트는 이 문제를 세력균형을 넘어서는 측면에서 틀을 짜야 했고, 사악한 침략자에 맞서 무고한 피해자들을 수호하는 투쟁으로 그려야 했다. 루스벨트의 편지와 히틀러의 반응 둘 다 루스벨트가 이런 목표를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의 새로운 심리적 문턱을 잽싸게 전략적 자산으로 바꿔놓았다. 같은 달인 1939년 4월에 그는 영국과 사실상의 군사협력을 할 수 있도록 미국을 조금씩 이동시켰다. 양국 간의 합의로 영국 해군은 모든 전력을 대서양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고, 미국은 미국 해군 함대의 상당 부분을 태평양으로 배치했다. 이런 역할 분담은 미국이 일본에 맞서 아시아의 영국령들을 방어할 책임을 진다는 점을 암시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 간에 유사한 합의가 있었고(이로 인해 프랑스 함대는 지중해에 집중하게 되었다), 영국이 프랑스의 대서양 해안을 보호하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야 할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주장의 근거로 원용되었다.

루스벨트의 행동을 지켜보던 고립주의자들은 매우 불안해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9년 2월에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erg) 상원의원은 고립주의자들의 주장을 유창하게 제시했다.
우리가 워싱턴의 시대와 비교했을 때 시공간이 상대적으로 사라져버린 축소된 세계에 살고 있다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전히 하느님께서 외부와 단절시키는 두 대양을 주신 데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 두 대양도 결국 축소되겠지만, 현명하고 신중하게 사용한다면 여전히 우리에게 최고의 축복이 될 것입니다. ⋯
우리 모두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국가적 혹은 국제적 불법행위의 피해자들에 대한 동정심과 자연스러운 감정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전 세계의 수호자나 경찰관이 아니며, 될 수도 없습니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 대한 대응 차원에서 영국이 1939년 9월 3일에 선전포고를 했을 때, 루스벨트는 중립법을 발동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영국과 프랑스가 미국 무기를 구매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법을 개정하려고 했다.

루스벨트는 일본과 중국 간의 전쟁에는 표면적으로 전쟁이 선포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립법 발동을 회피해왔다. 실제로는 무기금수 조치가 일본보다 중국에 더 많은 피해를 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약 전쟁이 유럽에서 발발한다면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포될 것이고, 루스벨트는 중립법을 우회하는 속임수에 의존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1939년 초에 루스벨트는 중립법이 "불균형하고 불공평하게 적용될지도 모르며, 실제로 침략국에 원조를 제공하면서 막상 피해국에는 원조를 거부하게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개정을 촉구했다. 의회는 유럽에서 전쟁이 실제로 발발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고립주의 정서가 강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듯이 루스벨트의 제안은 그해 초 의회에서 세 번 부결되었다.

루스벨트는 영국이 선전포고를 한 당일인 9월 21일에 의회에 특별 회기를 요청했다. 이번에는 그가 승리했다. 소위 1939년 11월 4일의 제4차 중립법은 교전당사국들이 현금으로 지불하고 구매품을 자국 선적이나 중립국 선적 선박으로 운송하면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구매할 수 있게 허용했다. 영국의 해상봉쇄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만 구매하고 운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립국"은 갈수록 기술적인 용어가 되었다. 중립법은 중립적이어야 할 게 아무것도 없는 동안만 지속되었다.

소위 가짜 전쟁(phony war) 동안에 미국 지도자들은 그들이 물질적 지원만을 요구받고 있다고 계속 믿었다. 일반 통념에 따르면 마지노선 뒤에서 버티면서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는 프랑스군이 수세적 지상전과 해상 봉쇄를 통해서 독일의 목을 조를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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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6월 10일에 프랑스가 나치 침략자들에 의해 쓰러지고 있을 때, 루스벨트는 공식적으로 중립을 포기하고 수려한 달변으로 영국 편에 섰다. 루스벨트는 버지니아주 샬러츠빌(Charlottesville)에서 했던 강력한 연설을 통해 이탈리아군이 이날 프랑스를 공격한 데 대해 무솔리니를 통렬하게 비난했고, 독일의 침략에 저항하는 모든 국가에 전면적으로 물질적 원조를 하겠다는 미국의 의지를 밝혔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미국의 방위력을 증강하곘다고 선언했다.
1940년 6월 10일 이날, 민주주의를 최초로 가르쳐준 위대한 미국인이 설립한 이 대학교에서 우리는 바다 건너 저편에서 자유를 위해 용명하게 싸우고 있는 분들을 위해 우리의 기도와 희망을 전합니다.
우리 미국은 단결하여 두 가지 명백한 노선을 동시에 추구할 것입니다. 우리는 강압적인 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이 나라의 물질적 자원을 제공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는 미주 지역에서 우리 스스로가 어떠한 비상 상황과 어떠한 방어라도 감당할 수 있는 장비와 훈련을 갖추기 위해 이러한 자원의 활용에 박차를 가할 것입니다.
루스벨트의 샬러츠빌 연설은 분수령이 되었다. 영국의 패배가 임박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어떤 미국 대통령이라도 서반구의 안보를 위해 영국 해군이 긴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 그리하여 미국이 조만간 영국의 동맹국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처칠이 홀로 계속 싸우겠다는 결정을 확실히 견지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되었다.
우리는 끝까지 갈 것입니다. ⋯ 그리고 잠시라도 믿지 않겠지만, 우리 영국 본토나 본토의 많은 부분이 정복되거나 굶주리게 된다면, 바다 너머에 있는 우리의 제국이 영국 함대의 무장과 보호 하에 투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언젠가 신세계(미국)가 강력한 힘과 무력으로 구세계(유럽)을 구원하고 해방할 때까지 싸울 것입니다.
루스벨트의 방식은 복잡했다. 목표를 발표할 때는 고상했고, 전술은 기만적이었으며, 이슈를 규정할 때는 노골적이었고, 특정 사건의 복잡한 속성을 설명할 때는 덜 진솔했다. 루스벨트의 많은 행동은 합헌성(合憲性)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만약 오늘날 어떤 대통령이더라도 루스벨트가 했던 방식대로 했더라면 대통령직을 계속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395~401p
루스벨트는 미국 국방예산을 대폭 증액했고, 1940년에는 의회를 설득해서 평시 징병제를 도입했다. 고립주의 정서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강했기 때문에 하원 표결에서 이 법안은 전쟁 발발로부터 4개월도 남지 않은 1941년 여름에 불과 한 표 차이로 갱신되었다.

루스벨트는 재선되자마자 즉각 미국의 군수물자를 현금으로만 구매 가능하다는 제4차 중립법의 요건을 삭제하자고 제안했다. 루스벨트는 노변담화에서 윌슨의 용어를 빌려, 미국이 "민주주의의 병기창(arsenal of democracy)"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한 법적 장치가 렌드-리스법(Lend Leasd Act, 무기대여법)이었다. 이 법에 따르면 대통령은 "어느 나라건 간에 그 나라를 방어하는 것이 미국의 방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대통령이 판단할 경우, 그 나라의 정부에" 대통령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조건에 따라 어떤 군수물자라도 대여, 리스, 판매, 혹은 물물교환을 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받았다. 원래 열정적인 윌슨주의자였고 집단안보의 옹호자였던 헐 국무장관은 평소답지 않게 전략적인 이유로 렌드-리스법을 정당화했다. 그는 미국의 대규모 지원이 없으면 영국이 함락될 것이고, 대서양의 제해권이 적대세력에 넘어가서 서반구의 안보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미국은 영국이 스스로 히틀러를 물리칠 수 있을 때만 참전을 피할 수 있게 되는데, 처칠조차 이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태프트(Taft)상원의원은 렌드-리스법을 반대하면서 이 점을 강조했다. 고립주의자들은 소위 미국우선주의위원회(America First Committee)를 조직했다. 시어스 로벅 앤드 컴퍼니 회장인 로버트 E. Wood) 장군이 위원장을 맡았고, 많은 분야의 저명한 인사들이 지지했다. 이 중에서 캐슬린 노리스(Kathleen norris), 어빈 S. 콥(Irvin S. Cobb), 찰스 A. 린드버그(Charles A. Lindbergh), 헨리 포드(Henry Ford), 휴 S. 존슨(Hugh S. Johnson) 장군, 체스터 볼스(Chester Bowles), 그리고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인 니콜라스 롱워스 여사(Mrs. Nicholas Longworth)가 있었다.

렌드-리스법을 반대하는 고립주의자들의 격한 감정은 이들을 가장 사려 깊게 대변했던 아서 반덴버그(Arthur Vandenberg) 상원의원이 1941년 3월 11일에 한 발언에 잘 담겨 있다. "우리는 조지 워싱턴의 이임사를 쓰레기통에 집어던졌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권력정치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의 강대국 전쟁에 그대로 내던졌습니다. 이제 다시는 후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첫걸음을 뗐습니다. 반덴버그의 분석은 정확했지만, 그렇게 만든 것은 세계였다. 바로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루스벨트의 공이었다.

렌드-리스법을 제안한 뒤에 루스벨트는 갈수록 나치를 패망시키겠다는 의지를 더욱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심지어 이 법이 통과되기도 전에 영국과 미국의 참모총장들은 이 법이 통과될 것으로 예상하고 곧 가용해질 자원들을 조직화하기 위해 만났다. 또한 미국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하게 되는 시점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기획자들로서는 미국의 참전 시기만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전쟁이 발발할 경우 독일과의 전쟁에 최우선순위를 부여한다는 소위 ABC-1 협정(ABC-1 Agreement, 미국, 영국, 캐나다군 참모부 간 비밀회의에서 유래했다. - 옮긴이)에 가서명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순전히 국내적 필요와 헌법적 제약 때문이었지 루스벨트의 목표가 애매모호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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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4월에 루스벨트는 미군이 그린란드(그린란드는 덴마크령이다. - 옮긴이)를 점령하는 것을 허용하기로 한 워싱턴 주재 덴마크 대표(그의 직급은 공사였다)와의 합의를 재가함으로써 전쟁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뎠다. 덴마크가 독일의 점령하에 있었고 덴마크 망명정부가 구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라가 없던 이 외교관은 덴마크 영토에 있는 미군기지를 "승인"한다고 독자적으로 결정을 내렸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앞으로 미국 군함이 북대서양 전체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아이슬란드 서부의 북대서양을 초계(哨戒)할 것이며, "미국의 초계 해역에 있는 침략국의 선박이나 항공기의 추정 가능한 위치를 공표"하겠다고 처칠에게 개인적으로 통보했다. 3개월 후에 현지 정부의 초청을 받은 미군 병력이 영국군 병력을 대체하고자 또 다른 덴마크 소유령인 아이슬란드에 상륙했다. 그러고 나서 루스벨트는 의회의 승인 없이 덴마크령과 북아메리카 사이의 모든 구역이 서반구 방어 체제에 속한다고 선언했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403~404p
1941년 9월에 미국은 선을 넘어 교전당사국이 되었다. 루스벨트가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영국 해군에 보고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조만간 충돌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1941년 9월 4일에 미국 구축함인 그리어호(USS Greer)가 독일 잠수함의 위치를 영국 항공기에 알려주다가 어뢰 공격을 받았다. 루스벨트는 9월 11일에 상황에 대한 설명도 없이 독일의 "해적행위"를 비난했다. 루스벨트는 독일 잠수함을 공격하려고 똬리를 튼 방울뱀에 비유하면서 아이슬란드까지 확장된 기존 미국의 방어 구역에서 발견되는 어떤 독일 잠수함이나 이탈리아 잠수함이라도 "현장에서" 격침하라는 명령을 미 해군에 내렸다. 사실상 미국은 바다에서 추축국과 전쟁상태에 있었다.

동시에 루스벨트는 일본의 도전에도 응했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1941년 7월에 인도차이나를 점령한 것에 대한 대응으로 일본과의 통상조약을 폐기했고, 일본에 대한 고철 판매를 금지했으며, 네덜란드 망명정부에 동인도(오늘날 인도네시아)로부터 일본으로의 석유 수출을 중단하라고 권유했다. 이런 압박으로 인해 일본과 협상이 이루어졌고, 1941년 10월에 협상이 개시되었다. 루스벨트는 미국 협상단에게 미국이 이전에 일본의 점령행위를 "승인"하기를 거부했음을 상기시키고 만주를 포함한 모든 점령지를 포기하도록 요구하라는 훈령을 하달했다.

루스벨트는 일본이 이를 받아들일 가능성이 없다고 틀림없이 알고 있었다. 일본은 1941년 12월 7일에 러-일 전쟁의 방식을 따라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미 태평양 함대 전력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다. 12월 11일, 일본과 이탈리아와의 삼국조약에 가담했던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왜 히틀러가 루스벨트가 항상 주적으로 여겨왔던 국가를 상대로 자유롭게 미국의 전쟁 노력을 집중할 수 있게 해줬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만족스럽게 설명된 적이 없다.

미국이 참전함에 따라 위대하고 대담한 지도자가 추진해왔던 비범한 외교적 노력이 그 정점을 찍었다. 3년도 안 되어서 루스벨트는 확고하게 고립주의적이었던 국민을 전세계적인 전쟁으로 끌고 갔다. 1940년 5월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인 중 64퍼센트가 나치의 격퇴보다 평화의 보전이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18개월 후인 1941년 12월의 진주만 공격 직전에는 이 비율이 역전되어서 불과 32퍼센트만이 나치의 승리 저지보다 평화를 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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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참전이 미국인들에게 너무나 급작스럽게 보였다는 점은 세 가지 요인에 기인한다. 미국인들은 서반구 외부의 안보를 우려해서 참전했던 경험이 없었고, 많은 사람들이 유럽의 민주주의 국가들이 스스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반면,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나 미국을 상대로 한 히틀러의 성급한 선전포고가 있기 전에 전개되었던 외교의 본질을 이해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진주만이 폭격당하고 나서야 미국은 태평양에서 전쟁에 들어갔고, 유럽에서 최종적으로 미국에 선전포고를 한 건 히틀러였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는 사실은 미국의 고립주의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추축국이 전쟁을 개시함으로써 어떻게 하면 미국 국민을 전쟁으로 끌고 갈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루스벨트의 해묵은 딜레마가 해결되었다. 만약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공격하는 데만 집중하고 히틀러가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인들을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 루스벨트의 임무가 한층 더 복잡해졌을 것이다. 루스벨트가 선언했던 도덕적, 전략적 확신에 비추어볼 때, 의심의 여지없이 루스벨트는 결국에는 자신이 자유의 미래와 미국의 안보 모두에 결정적이라고 여겼던 전쟁에 어떻게든 미국을 참전시켰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 헨리 키신저의 외교 406~408p
미국은 비록 실제로 전쟁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유럽에서 확고하게 연합군 쪽이었다. 미국은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고, 그들의 구축함들은 서대서양에서 함선들에 대해 호위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것들이 너무 동쪽으로 가서 독일 잠수함들이 심각하게 불편을 느꼈을 가능성도 있다. 심지어 구축함과 잠수함이 교전한 사례도 하나 있다. 전후(戰後) 조사에 따르면 이것은 자신들이 공격을 당하고 있다고 양측 사령관들이 생각한 사고였다.

태평양에서, 미국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데서 확고하게 중국편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자면 이것은 실제의 군사력 사용이 아니라 재정적인 원조였다. 일본은 국내 석유 공급원이 없었기 때문에 네덜란드령 동인도에 그 공급을 의존하고 있었다. 미국은 네덜란드인들이 석유 공급원을 차단하고 그래서 일본의 작전에 심각하게 피해를 입혀야 한다고 결정했다. 영국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은 이것이 일본으로 하여금 인도네시아를 빼앗고 대체로 남쪽으로 진군하게 할지 모른다며 반대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고집했고, 결국 그들은 일본인들에 대한 수출을 정말 금지했다.

여기서 태평양에서의 해상 상황을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 1923년의 군축 회의는 미국에게 일본인들보다 현저하게 더 강력한 해군을 가지게 했다. 러시아인들이 자기들의 함대를 분리했기 때문에 1904년 러시아인들이 패배한 것을 기억하고서, 미군의 대부분은 태평양에, 특히 진주만에 보존되었다. 상당히 수수께끼 같은 이유로, 루스벨트 대통령은 하나의 전함 분함대와 항공모함 절반을 대서양으로 이동시킬 것을 고집했다. 그것들은 대서양에서 독일 잠수함에 대해 아무 소용이 없었는데, 결국 태평양으로 도로 돌아간 하나의 항공모함을 제외하면, 그것들은 대부분의 전쟁 기간을 항구에서 평화롭게 보냈다.

해군 작전 참모(Chief of Naval Operations)는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 함대를 샌디에이고로 이동시키기를 원했다. 거기서는, 12월 7일에 가해진 유형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했을 것이다. 대통령은 그를 해고했고, 그 다음 역시 샌디에이고를 선호했던 그의 후임자도 해고했다. 결국, 루스벨트는 자기의 어리석은 전략적 견해에 더욱 협조적인 해군 작전 참모를 찾을 수 있었다.

전쟁 직후 공화당이 의회를 지배했고 진주만에 대한 조사를 실시했는데, 여기서 그들은 루스벨트가 의도적으로 많은 미국 수병들의 죽음을 마련했다고 비난하려고 시도했다. 정략상의 제스처로서, 이것은 완전히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것은 실수였지 음모가 아니었다.

고든 털럭, 미국의 외교 문제: 간결한 역사(American Foreign Affairs: A Compact History) 158~159p
진주만 공격 이전에 일본 외무성이 국무부에, 비록 그저 아주 짧은 시간 전일 뿐이었지만, 전쟁 통고가 전달되도록 마련했던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마셜 장군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아주 공격받을 것 같은 곳들에 신속하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경고를 알래스카와 필리핀에서는 받았음에도 왜 진주만에서는 받지 못했는지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인용자주]

고든 털럭[21], 미국의 외교 문제: 간결한 역사(American Foreign Affairs: A Compact History) 161p

이러한 연유로, 전후에 진주만 공격에 관한 의문점들을 미국 의회 진주만 공격 공동 조사 위원회(United States Congressional Joint Committee on the Investigation of the Pearl Harbor Attack)가 조사하였다.


1941년 12월 8일 루스벨트 대통령 대일 선전포고 연설 영상. 앞 부분을 따서 '치욕의 날 연설(Day of Infamy Speech)'이라고 불린다. (40초부터)

[ 연설 전문 ]
||Yesterday, December 7, 1941 - a date which will live in infamy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was suddenly and deliberately attacked by naval and air forces of the Empire of Japan.
앞으로 치욕의 날로 기억될 1941년 12월 7일인 어제, 미합중국은 일본 해군과 항공대로부터 고의적이고 기습적인 공격을 받았습니다.

The United States was at peace with that nation, and, at the solicitation of Japan, was still in conversation with its government and its Emperor looking toward the maintenance of peace in the Pacific.
미국은 일본 제국과 평화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요청으로, 그들의 정부황제를 상대로 함께 태평양에서의 평화유지를 목표로 하는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Indeed, one hour after Japanese air squadrons had commenced bombing in the American island of Oahu, the Japanese Ambassador to the United States and his colleague delivered to our Secretary of State a formal reply to a recent American message. And, while this reply stated that it seemed useless to continue the existing diplomatic negotiations, it contained no threat or hint of war or of armed attack.
사실, 일본 비행 편대들이 미국 오아후 섬에 폭격을 개시한 지 한 시간 후, 주미 일본 대사와 그의 동료는 우리의 국무 장관에게 미국 정부의 최근 서한에 대한 공식답변을 제출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답변서는 외교 협상을 지속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었지만, 군사적 공격 혹은 전쟁과 관련된 협박이나 암시는 포함하고 있지 않았습니다.[22]

It will be recorded that the distance of Hawaii from Japan makes it obvious that the attack was deliberately planned many days or even weeks ago. During the intervening time the Japanese Government has deliberately sought to deceive the United States by false statements and expressions of hope for continued peace.
하와이에서 일본까지의 거리를 고려한다면 공격은 수일 혹은 심지어 수주 전부터 고의적으로 계획되었음이 명백합니다. 그 준비 기간 동안 일본 정부는 평화유지를 희망하는 표현과 진술로 고의적으로 미국 정부를 기만하였습니다.

The attack yesterday on the Hawaiian Islands has caused severe damage to American naval and military forces. I regret to tell you that very many American lives have been lost. In addition, American ships have been reported torpedoed on the high seas between San Francisco and Honolulu.
하와이 제도에 대한 어제의 공격은 미국 해군과 군사력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유감스럽게도 매우 많은 미국 국민들이 희생되었음을 여러분께 알려드립니다. 덧붙여, 샌프란시스코호놀룰루 사이의 공해상에서 미국 군함들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Yesterday the Japanese Government also launched an attack against Malaya.
어제 일본 정부는 또한 말레이반도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Hong Kong.
어제 밤 일본군홍콩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Guam.
어제 밤 일본군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Japanese forces attacked the Philippine Islands.
어제 밤 일본군필리핀 군도를 공격하였습니다.

Last night the Japanese attacked Wake Island.
어제 밤 일본군웨이크섬공격하였습니다.

And this morning the Japanese attacked Midway Island.
그리고 오늘 아침 일본군미드웨이 군도(群島)를 공격하였습니다.[23]

Japan has therefore undertaken a surprise offensive extending throughout the Pacific area. The facts of yesterday and today speak for themselves. The people of the United States have already formed their opinions and well understand the implications to the very life and safety of our nation. As Commander-in-Chief of the Army and Navy I have directed that all measures be taken for our defense, that always will our whole nation remember the character of the onslaught against us.
그러므로 일본은 태평양 전역에 걸쳐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 벌어진 일들이 이를 스스로 증명합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미 뜻을 굳혔고 우리나라의 생명과 안전에 초래된 결과를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24] 미국 육군과 해군의 통수권자로서 본인은 국가 방위를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였으며, 이 조치는 모든 국민이 우리에게 가해진 침략의 성격을 기억하도록 할 것입니다. (박수갈채)

No matter how long it may take us to overcome this premeditated invasion, the American people, in their righteous might, will win through to absolute victory.
우리가 이 계획적 침공을 격퇴하는 데에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미국 국민들은 정의로운 힘을 모아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박수갈채)

I believe that I interpret the will of the Congress and of the people when I assert that we will not only defend ourselves to the uttermost but will make it very certain that this form of treachery shall never again endanger us.
최선을 다해 우리 자신의 방위를 위해 노력해야 할 뿐 아니라 이러한 식의 배신 행위가 앞으로 다시는 우리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은 의회와 국민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이라고 믿는 바입니다. (박수갈채)

Hostilities exist. There is no blinking at the fact that our people, our territory and our interests are in grave danger.
이제 침략의 위협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 국민, 우리 영토, 우리의 이익이 심각한 위험 사태에 처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With confidence in our armed forces, with the unbounding determination of our people, we will gain the inevitable triumph. So help us God.
우리 군대에 대한 신뢰와 우리 국민의 결연한 의지로써, 우리는 기필코 승리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가호를 빕니다. (박수갈채)

I ask that the Congress declare that since the unprovoked and dastardly attack by Japan on Sunday, December 7, 1941, a state of war has existed between the United States and the Japanese Empire.
본인은 1941년 12월 7일 일요일에 일본의 일방적이고 신의 없는 공격이 개시된 시점에서, 미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음을 의회에서 선언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25] (박수갈채)||


대 일본 선전포고 직후 미국나치 독일이탈리아 왕국의 선전포고도 받으며 동시에 2개의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게 된다.[26]

이렇게 전쟁을 지도하던 와중에 1944년에 공화당에서는 토마스 E. 듀이[27]가 대권에 도전하나 여기서도 또 승리하여 마침내 대통령에 4번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듀이는 루스벨트에게 있어서 제일 위협적인 상대였던 것도 사실. 훗날 해리 S. 트루먼에게 역전패를 당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때 FDR 4선 저지를 위해 반대진영에서 내놓았던 논리 중 하나가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쟁에 개입하기 위해서 일부러 모른 척 했다."라는 음모론이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상 그런 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결국 4선 저지는 실패.

다만 3선과 달리 4선은 당시 내부적으로도 논란이 많았다. 3선은 미국 내에 루스벨트만한 대안이 없는 상황인데다 외부 분위기도 별로 좋지 않아서 일단 대통령으로 뽑고 나중에 생각해 보자는 인식이 강했으나, 4선 당시에는 이야기가 달라서 이미 일본도 독일도 망해가는 상황이라 전쟁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고, 어차피 전쟁은 공화당이 재집권해도 계속 수행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루스벨트가 4번이나 대통령을 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 상태가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는데[28] 자칫 사망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후계자가 없다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었다. 물론 트루먼이라는 유능한 후계자의 등장으로 큰 문제 없이 넘어가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이 문제는 루스벨트 사후에도 논란이 되면서 1951년 수정헌법 개정에 따라 미국 대통령의 3선 이상 중임을 무조건 금지하게 된다.

1945년 2월이 되어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영국윈스턴 처칠, 소련이오시프 스탈린과 전후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얄타 회담을 가지기도 했고, 국제연합의 창설모임을 4월 25일 가지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의회에 제출한다.

6. 승전을 눈앞에 두고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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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타에 모인 20세기를 풍미한 세 정객들.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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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하루 전 마지막 사진
1945년 3월 말, 루스벨트는 휴식을 위해 웜스프링스의 별장에 있었다. 그리고 4월 12일 여기서 애견 팔라와 산책을 하고 벽난로 앞에서 자신의 안락의자에 앉아 비서와 농담을 하면서 테이블의 여러 서류들을 검토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옆에서 한 화가가 그리고 있었는데, 오후 1시 15분 뇌출혈로 루즈벨트는 갑자기 "뒷머리가 너무 아프군"이란 말을 남기고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쓰러졌다.[29] 급히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1945년 4월 12일 오후 3시 35분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이미 얄타 회담 당시 루스벨트를 찍은 영상들을 보면 이때부터 건강이 좋지 않은 걸 알 수 있다. 얼굴은 수척한 데다 악수도 몹시 힘들어하던 상태였다. 사망 하루 전 찍힌 마지막 사진인데, 상태가 매우 안 좋아보임이 한 눈에 보인다.

한편 루스벨트의 사망에 아돌프 히틀러는 잠깐 들떠서 과거 프리드리히 2세7년 전쟁에서 멸망 직전에 몰린 순간,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망으로 인해 기사회생한 전례를 재현하길 꿈꿨다. 이런 생각을 한 게 히틀러 혼자만은 아니였는지 괴벨스는 루스벨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 히틀러에게 전화로 "여제가 죽었습니다."라고 전했다고 한다. 옐리자베타 페트로브나의 사망과 루스벨트의 죽음을 동일시한 것이다.[30] 이렇게 잠시 동안 베를린 전체가 살았다는 열광에 휩싸였지만 후임자인 트루먼표트르 3세의 삽질을 반복하지 않았다. 서방 연합군은 전혀 흔들리는 기색 없이 독일을 압박해왔고, 결국 아돌프 히틀러는 자결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대통령 사망 혹은 탄핵 등 유고시 선거를 하지 않고 부통령이 자동으로 대통령이 된다. 이에 따라 부통령 해리 S. 트루먼이 33대 대통령에 올랐다. 트루먼은 영부인 엘리너의 전화를 통해 부고를 접했는데, 엘리너가 "트루먼 씨, 대통령께서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하자 한참을 침묵하던 트루먼은 "제가 부인을 위해 무엇을 해 드려야 할까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앨리너는 "아니요. 제가 당신을 위해 뭘 해드려야 할까요? 앞으로 골치 아프실 일이 많으실 테니까요."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루스벨트가 남겨 놓은 과제가 많았다는 소리다. 그래서 트루먼은 대통령 취임 직전에 "달, 별, 그리고 모든 유성이 나에게 떨어지는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그의 부고를 접한 윈스턴 처칠 총리는 눈물을 흘리며 당시 미국의 라디오 특파원으로 있던 에드워드 머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젠가 이 세상과 역사는 당신네 대통령에게 큰 신세를 졌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오.

[1] 당시에는 부모가 남자아이를 여장시키는 일이 상당히 흔했다고 한다. 여장남자 문서 참조.[2] 당시 38세의 매우 젊은 나이였다.[3] 오늘날에는 이 질병을 소아마비가 아니라 자가면역 질환인 길랭-바레 증후군으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4] 재활의 일환으로 온천이 있는 조지아주의 웜 스프링스(Warm Springs)를 방문하여 온천욕을 경험한 후, 사재를 털어서 온천수를 치료 목적으로 사용하는 요양원을 세우고 다른 소아마비 환자들과 같이 치료를 받았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임기동안 16차례나 찾았을 정도로 애용하였으며 일종의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듯 하다. 이 요양원은 Roosevelt Warm Springs Institute for Rehabilitation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존재한다.[5] 다만 앨 스미스는 나중에 1936년 대선과 1940년 대선에서 루즈벨트를 지지하지 않고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다.[6] 루스벨트는 당연히 자력으로 앉았다가 일어날 수 있는 몸이 아니었기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의 카리스마 때문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벌어진 기억의 착각이다. (출처: The Roosevelts: An Intimate History, Ken Burns, PBS 다큐멘터리 6화)[7] 이와 관련해 영화 The American President(국내명 대통령의 연인)에선 비서실장(배우는 마틴 쉰)이 "지금처럼 텔레비전이 있던 시절이라면 루스벨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거다."라는 대사를 하기도 했다.[8] 조직 범죄를 뿌리뽑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다.[9] 당시 민주당은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했기에 속도감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10] 여기서 금송아지란 출애굽기에 나오는 우상숭배, 나아가 물신숭배를 의미한다.[11] 9년의 활황은 1920년부터 시작된 광란의 20년대를, 그 거품이 꺼진 3년의 불황은 대공황을 의미한다.[12] 실제로 루스벨트 당선 확률이 43%이라고 예측했다.[13] 참고로 FDR 집권 이후 민주당은 20세기 후반까진 대선 결과와 상관없이 상하원 선거에선 수십년간 주로 우위를 차지한다.[14] 심지어 갤럽은 다이제스트가 루스벨트 당선 확률을 44% 정도로 볼 것이라는 예측까지 했다. 실제와 단 1%p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던 것.[15] 다만 갤럽도 이후 1948년 미국 대통령 선거해리 S. 트루먼의 재선을 예측하지 못해서 체면을 구긴 적도 있었다.[16] 다만 정부의 경기부양을 지지하는 케인즈 학파도 경기가 호황에 들어서면 흑자재정을 실시해야 한다는 입장은 크게 다르지 않다. 적자재정은 정부부채 증가를 의미하기 때문. 결국 출구전략을 어느 시기에 적절히 쓰느냐의 문제. 자고로 논쟁이란 본인의 정치/사상적 신념 문제까지 끼여들 확률이 높기에 어느 나라, 어느 사상이든 서로 유리한 자료만 가지고 떠드는 경우가 많은 문제이니 적당히 걸러듣자. 그만큼 뉴딜이 세상에 큰 파급력을 미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17] 다만 이때까지만 해도 보수적인 남부 당원들은 FDR의 위세에 눌린건지 아님 정치적 입지가 불안해서인지 어쨌는지 민주당 당적은 유지하며 붙어있었지만, FDR 사후 1940년대 후반부턴 독자 출마 등 본격적인 이탈 조짐을 보이게 된다. 완벽하게 갈라선건 공화당의 남부 전략 등이 겹친 1960년대 이후.[18] 물론 진주만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여전히 참전 반대 여론이 압도적이었지만, 그건 내 지인과 가족이 전쟁터 가는건 안된다는게 크지 유럽이 나치의 손에 들어가는걸 놔둬야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니었다.[19] 이미 세계대전이 본격적으로 개전하기 전인 1938년 나치의 위협이 커져감에 따라 미국인들이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The War of the Worlds의 라디오를 청취한 청자들이 공황에 빠졌다는 일화로도 잘 알 수 있다. 하물며 1940년에는 거의 전 유럽이 추축국의 손에 떨어진 시기다. 고립주의랍시고 마냥 안심하고만 있지는 않았던 것.[인용자주] 다만 진주만이 받지 못한 것이 수수께끼로 남아있다는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마셜은 실제로 하와이 육군사령부에 전보로 경고를 보냈지만 워싱턴 부근 상공에 발생한 강력한 정전기로 보내지지 않았다.(통신 수단으로 전화도 있었지만 암호화된 통신이 불가능해 보안이 유지될 수 없었으므로 전보를 사용했다.) 그래서 통신 담당자는 민간 통신으로 다시 경고를 발송했고 간발의 차로 하와이 호놀룰루의 RCA 통신국에 도착했으나 일반 전보로 분류되어 사령부로 바로 보내지지 않았다. 사령부가 전보를 입수했을 때는 이미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함대가 초토화된 후였다.#[21] 고든 털럭은 국무부 소속으로 1947년에서 1956년까지 중국과 홍콩과, 한국의 주한 미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외교관을 그만두고 사우스 캐롤라이나 대학에서 국제학 조교수 겸 부교수를 역임하였다가 이후로는 경제학으로 진로를 바꾼다. 경제학 쪽에서 제임스 뷰캐넌과 함께 공공선택론을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22] 일명 Fourteen Part Message라 불리는 일본의 선전 포고문에는 전쟁을 선포한다는 의미와 관련이 있는 표현(Declare, War against, State of War 등)이 하나도 없었다.[23] 이 모든 것은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났다.[24] 루스벨트 대통령이 생략한 문장.[25] 미국의 헌법상 전쟁 개시 권한은 의회에 있으므로 대통령은 의회에 전쟁 개시를 요청하는 절차를 거친다.[26] 당시 유럽 전선에서 고전중이던 윈스턴 처칠은 히틀러의 뜬금없는 미국 선전포고를 듣고 "이제 우리 연합군이 이겼다. 히틀러운명은 결정되었다. 무솔리니운명도 결정되었다. 일본인의 경우가루가 돼버리겠지." 라며 좋아했다. 한편 독일에선 "총통 각하, 굳이 왜..."라는 반응이었다고 한다.[27] 검사로서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인 럭키 루치아노에게 콩밥을 먹인 것으로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또한 루스벨트와 지역 기반이 뉴욕으로 같다.[28] 스탈린이 대놓고 오래 못 살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다.[29] 당시에는 고혈압의 이해도가 낮아 혈압 관리가 잘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병원에서 측정한 마지막 혈압이 무려 350/190mmHg이었다.[30] 실제로도 루스벨트가 죽었다는 소식이 퍼지자 동부 전선의 병사들을 비롯한, 독일 고위층 사이에서 서방 연합군이 독일과 함께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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