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2007년 시즌 KBO 리그에서 일어난 지금 생각해도 미스터리한 일들의 일람.
2. 목록
2.1. 이현곤의 타격왕
2002년 입단 후 2006년까지는 잦은 부상과 부진 등으로 인해 타격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이 해에 타신이 들렸는지[1] 양준혁과의 타격왕 경쟁에서 1리 차이, 정확하게는 0.3378과 0.3371의 7모 차이로 반올림에 성공하면서 타격왕 + 최다 안타왕에 등극했다. 심지어 이현곤은 갑상선기능저하로 체력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고 경기 마다 기복이 심한 선수인데, 그런 선수가 전 경기 출장까지 달성했다. 더구나 2007시즌 KIA는 장성호의 연속 3할 행진이 깨지는 등 김기아로 대표되는 막장 타선으로 팀 역대 최악의 시즌을 달리고 있었는데, 그런 와중에 독보적인 호성적을 올린 것이다.그리고 2008년이 되자 이현곤의 활약은 눈 녹듯 사그라졌다. 은퇴 전까지 모든 시즌에서 3할은커녕 그 근처도 가지 못했고, 오히려 항상 지적되던 체력적 약점과 고질적인 부상으로 골골댔다.
나중에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서 이 해 이현곤의 성적은 천운이 따랐음이 드러났다. 이현곤의 2007년 BABIP는 무려 .379로, 개인 커리어 평균이었던 .308, 리그 평균 .311에 비해 터무니없이 높았다. 물론 BABIP는 타자의 타구 속도나 발사각도 등 실력적 요인에 따라서도 좌우되며, 라인드라이브 타구를 양산하는 중장거리형 선수는 BABIP가 높게 나오기도 하지만[2], 이현곤은 그 시즌이나 다른 때나 라인드라이브 히터와는 거리가 있었다.
2.2. 이승화, 이대형의 3할
2007년 이승화[3]는 비록 중간에 부상으로 인해 규정 타석은 채우지 못했지만 0.301의 타율을 기록했고, 올스타전 멤버에도 선정되었다. 이대형은 0.308의 타율에 도루왕을 차지하며 LG의 리드오프로 맹활약하고 KBO 골든글러브까지 수상했다. 그런데 2007년 이후에는 3할은 커녕 2할도 힘든 이우민과 도루말고는 깝깝한 이대형으로 돌아왔다.이에 대한 분석으로 가장 유력한 것은 둘 다 내야안타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4] 다음해부터 상대팀들이 이에 대비해서 극단적인 전진 수비 시프트를 사용하면서 BABIP가 하락해서 성적이 안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두 명 모두 실질적으로는 2007년이 첫 풀타임 시즌이었기 때문에 분석이 덜 되면서 3할을 기록할 수 있었지만, 대응책이 나오자 그대로 성적이 급전직하한 것.
이대형은 한동안 깝대라는 멸칭으로 불리며 발과 수비 빼고 혹평을 들었지만, 2013시즌 후 FA를 통해 KIA로 옮긴 뒤 2014시즌에 타율 0.323을 기록하였다. 역대급 타고투저 시즌임을 감안해서 타율에서 2푼을 빼도 3할이다. 이때부터 정착한 특유의 타격폼을 기반으로 2016년까지 3년 연속 3할을 기록했고, 2016년에는 200안타에 근접한 192안타까지 쳤다. 본래 이대형은 배트를 돌리며 몸이 1루로 나가는 탓에 공이 제대로 맞지 않고 땅볼 타구만 나왔으나, 앞머리를 낮게 숙이는 타격폼을 만들자 타격시 앞발이 고정되어 타구질이 좋아지는 효과를 보며 BABIP가 상승했다. 아쉽게도 2017년 후반 주루툴에 치명이 갈 수 있는 무릎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했고, 복귀는 했지만 결국 더이상의 활약을 남기지 못하고 은퇴했다.
이우민은 2017시즌 초반에 좋은 활약을 해주었으나 결국 내려갈 타율은 내려간다고 3할과는 좀 거리가 있는 타율을 기록했지만, 그래도 다른 시즌에 비해서는 좋은 활약을 하며 일명 10년 주기설이 돌았다. 2007년 이후 정확히 10년 뒤인 2017년에 좋은 활약을 보였으므로 이우민은 10년마다 한 시즌 잘한다는 의미.
2.3. 현대 유니콘스의 팀 타율 1위
KBO의 위탁 관리를 받을 정도로 멸망한 현대 유니콘스는 .271의 팀 타율을 기록하며 2위 롯데 자이언츠와 1리 차이로 팀 타율 1위를 기록했다. 그렇다고 타율만 높은것도 아니라서 팀 OPS는 .729로 SK 와이번스에 이은 2위, 팀 홈런도 96개로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에 이은 3위였다.그러나 이런 훌륭한 스탯에 비해 팀 득점은 530점으로 고작 6위에 불과했다. 이렇게 비율스탯과 실제 득점의 격차가 큰데는 여러 추측이 나오는데, 일단 홈런은 클리프 브룸바 버프를 받아 3등이라지만 2루타+3루타는 전체 꼴찌에 그치며 중장거리 장타를 잘 생산해내지 못했다. 그리고 냉정히 말해 홈런도 당시 투고타저 영향이 커서 3등을 한거지 객관적인 수치로 보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2~3루타가 잘 나오지 않으니 생각보다 공격이 원활이 풀리지 않은 것. 여기에 51도루 36실패로 리그 도루 7위, 도루 성공률 최하위에 그친 점도 영향이 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서 언급한대로 이 시즌이 워낙 투고타저였던만큼 강공 위주의 빅볼보다는 도루나 작전 위주의 스몰볼에 강점이 있는 팀들이 잘나갔다.[5] 문제는 홈런 빼면 장타도 안나오고 주루 플레이를 통한 득점도 안나오니 결국 타율에 비해 생산력이 뚝 떨어질 수 밖에 없던 것.
그나마 마운드라도 잘 굴러갔으면 모르겠으나 이해 현대는 투수진도 썩 좋지 못했다. 3점대 ERA를 기록한 선발투수가 김수경(3.88), 장원삼(3.63) 둘 뿐이었는데, 또 말하지만 이 시즌은 투고타저였다. 김수경과 장원삼은 저 ERA로 ERA+ 102, 110을 기록해 평균보다 살짝 좋은 수준이었다. 저 둘이 1, 2선발에서 버텼으니 3선발 이후는 뭐... 불펜에서는 조용훈. 송신영, 박준수가 호투하긴 했으나 저 셋이 전부였다. 거기에 수비도 좋지는 않았는데, 당시 기록의 한계상 완전한 수비 능력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리그 최다 실책, 최저 수비율을 보면 수비도 마운드를 도와주지 못한 듯 하다. 그래선지 평균자책점은 4.41, 팀 전체 자책점은 552실점으로 리그 7위인데, 실점은 612실점으로 리그 최하위다. 이 해 KIA 타이거즈가 투타에서 총체적 난국을 보이며 최하위로 처진걸 생각하면, 그 기아보다도 실점이 많았던 것.
결국 현대는 6위에 그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 현대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공격 생산력을 보여준 한화 이글스가 리그 최소실점 3위를 기록한 마운드와 수비의 힘으로 가을야구까지 간 것을 보면 현대의 부족한 투수력과 수비력이 하위권으로 처진 결정적인 이유라고 할 수 있어보인다.
그리고 더 이상의 지원을 받지 못하던 현대 유니콘스는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해체되었고, 이후 현대의 선수들을 바탕으로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된다.
2.4. 김동주 두 자릿수 도루 + 최준석과의 더블스틸
커리어 내내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한 적이 없고 몸집도 꽤 있어 도루와는 상당히 거리가 멀어보였던 김동주였지만, 이 해에만 11개의 도루로 커리어에서 유일한 단일시즌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했다. 참고로 11개는 같은 시즌 전준호, 이우민과 동률이었으며 1번 타자였던 정수근, 박한이보다 1개 많은 수치였다.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은 2007년 6월 9일 잠실 삼성전에서는 최준석과
사실 두 선수의 도루 성공에는 나름의 타당한 이유가 있다. 김동주는 고교 시절만 해도 호타준족 유격수로 이름을 날린 선수였다. 비록 프로 입단 후 벌크업을 하는 바람에 체중이 증가하면서 발이 느려졌고 부상 위험으로 인해 도루 자체를 시도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여전히 주루센스 만큼은 살아있었고 그 덕에 두 자릿수 도루를 기록해볼 수 있었던 것. 베이징 올림픽 때 홈에 슬라이딩해 들어오면서 간결하게 손바닥으로 홈 플레이트를 찍는 장면이 김동주의 주루 센스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7]
최준석도 고교때는 발이 빠르고 마른 포수였으며, 입단 당시엔 100m를 12초에 끊는 호타준족형의 포수였다고 한다. 이후 프로 초년생 시절 동거하던 이대호와 야식을 즐겨먹다보니 급격히 살이 쪘지만[8], 그래도 두산 초기 시절에는 이후에 비해 비교적 날렵하기도 했다. 물론 어디까지 비교적이라는거지 두산 시절 초반에도 이미 세 자릿수 몸무게를 찍는 거구였다. 이 더블스틸이 나온 2007년에도 두산 타자들 가운데 가장 무거웠고 가장 느렸다. 나중에 FA로 롯데에 돌아간 이후에 더 비대해졌기 때문에 이 시절이 날렵해보일 뿐이다.
2.5. 투수 20승 및 200이닝
이 해가 투고타저임을 감안해도 어마어마한 기록이다. 두산 베어스의 다니엘 리오스가 234⅔이닝 투구에 22승을 거두었고, 한화 이글스의 류현진이 211이닝을 투구했다.이후로 20승 및 200이닝은 나오지 않다가 2012년에 넥센 히어로즈의 브랜든 나이트가 208⅔이닝을 던지면서 5년 만에 200이닝을 넘긴 투수가 나왔다. 그리고 2014년에 넥센의 앤디 밴 헤켄이 187이닝을 투구해 20승을 거두면서 7년 만에 20승을 달성한 투수가 되었다.
여담으로 다니엘 리오스는 이 해 6월 16일 문학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이진영, 박경완, 최정을 모두 3구삼진으로 잡아내 역대최초 1이닝 3타자 연속 3구삼진을 잡아내 KBO 최초의 무결점 이닝을 만들어냈다. 특히 이날 경기는 10일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미국 마이애미로 떠나 서둘러 장례식을 치른 뒤 15일 오후 5시10분에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해 하루 쉬고 16일 SK 와이번스전 선발 등판을 자청해 9회까지 3피안타 2볼넷 7탈삼진 무실점 완봉승을 거둔 것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슬픔도, 22시간의 장거리 비행과 14시간이나 나는 시차도 다니엘 리오스의 투혼을 막지 못한 것.
또한 이 해 다니엘 리오스는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에서 8⅓이닝동안 퍼펙트 피칭을 펼치고 8번 9번 타자만을 남겨둬 대기록을 목전에 뒀으나 부진하던 8번 강귀태[9]에게 3유간에 빠지는 안타를 맞아 퍼펙트 게임과 노히트 노런이 날아갔다. 그리고 다니엘 리오스는 바로 강판됐고 덕아웃에서 뻐큐를 날렸다. 그리고 이 해 그야말로 리그를 씹어먹고 리그 MVP까지 수상한다.
2.6. 우규민 30세이브
후반기 체력이 떨어지면서 13블론세이브를 기록하긴 했지만[10] 이 해 우규민은 시즌 중반까지 오승환과 팽팽한 경쟁을 하였고 최종 성적으로도 30세이브를 기록해 오승환의 뒤를 이은 세이브 2위자리를 찍으며 LG의 새 수호신으로 우뚝 서는 듯했다. LG팬들은 김용수, 이상훈의 뒤를 잇는 철벽 마무리 투수의 계보에 이름을 올리길 바랐지만…그 당시 우규민의 투구스타일은 사이드암보다 낮은 언더핸드 투구폼으로 제구력은 떨어지지만 135키로대의 낮게 깔리는 힘있는 직구를 던저 땅볼을 얻어내는 스타일이였다. 그래서 힘이 떨어지면 털리는 스타일의 선수였다. 몸에 부담이 많이 가는 언더핸드 투수인 우규민을 김재박감독은 그냥 엄청난 혹사를 시켰다. 그래서 30세이브 중 20세이브 가까이를 전반기에 기록하였고 후반기에 블론세이브를 하며 꾸역꾸역 30세이브를 기록하였다. 이후 군대에서 회복되기 전까지 망가진 팔로 지속적으로 혹사를 당했다.
2.7. 양준혁의 20-20
양준혁이 이전에 20-20을 달성했던 적은 3번 있었을 정도로 준족이긴 했지만 가장 최근이 1999년, 2002년 이후로는 두 자릿수 도루는 커녕 5개 이하의 도루 개수를 기록하다가, 2005년에 10개를 하고 2006년에 12개를 하더니 2007년에는 20개를 해서 만 38세의 나이로 덜컥 20-20을 달성해버렸다. 이로써 당시 기준 역대 최고령 20-20을 경신.[11] 발 빠르던 선수들도 나이를 많이 먹으면 도루 개수가 점점 주는데 마흔이 다 되던 나이에 20도루를 했으니…그런데 양준혁의 19, 20호 도루는 강민호가 대놓고 도루를 허용했다.
박경완 역시 20도루를 한적이 있다. 대채로 팀이 이기고 있을 때 기회를 봐서 도루를 시도하게 지시한다. 이는 팀이 최고의 시즌을 보내며 승패에 비교적 자유로울 때 의식적으로 기록을 노리고 시도하며 팀에서도 그걸 허용해 주기 때문이다.
통산 홈런과 도루 수만 보면 박재홍 다음으로 양준혁이 최고의 호타준족마냥 되어 버린다. 하지만 둘의 도루 성공률을 보면 성공률이 높은편이 아니다. 박재홍은 64%, 양준혁은 고작 61% 이다. 도루는 도루성공률이 70~71%는 나와야 본전으로 보는데 이 둘은 이 확률보다 성공률이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그리고 투수에게 위협을 주기 위해서라도 성공률을 의식하지 않고 도루를 시도하는 톱타자 들과 달리 중심타선인 이 둘의 도루는 항상 이길 때 시도하고 심지어 성공률까지 낮기 때문에 투수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결론은 이들은 타석에서나 부담스럽지 루상에서는 오히려 뛰어주면 땡큐인 케이스라 호타준족으로 보기에는 애매하다.
2.8. 이호준의 3할
1998년 해태 시절 때 0.303의 타율을 기록한 것을 제외하고 평생 3할 타율과는 인연이 없을 것 같던 이호준은, 공익근무요원으로 이탈했다가 부상으로 1년만에 돌아온 후 복귀한 2007년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391 타석으로 규정 타석(390타석)을 아슬아슬하게 채우며 타율 0.313을 달성했다. 103경기를 뛰면서 당시 팀내 타점 1위, 타율은 정근우에 이어 팀내 2위이자 전체 8위, 홈런은 팀내에서 4위를 기록하며 2007년 SK의 통합 우승에 큰 이바지를 하였다.2007년 시즌 후 이호준이 FA가 되었고 팬들은 프랜차이즈라 할 수 있는 그를 꼭 잡아야 한다고 하며 FA 릴레이까지 펼쳤다. 그리고 결국 4년 34억 원에 FA 계약을 체결했고 팬들의 기대는 컸다. 하지만 계약 첫 해인 2008년 무릎 부상으로 인해 달랑 8게임 뛰고 시즌을 접고 말았고 2009년에는 타율 0.298을 기록하면서부터 다시 반등세(?)를 타는 듯 했지만 스탯관리만을 하며 돈값 못한다고 까였고 2010년과 2011년에는 기대에 못 미치고 말았다. 그리고 2012년 시즌, 504타석에 0.300의 타율과 18홈런, 78타점으로 괜찮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이호준이 이렇게 괜찮은 성적을 낸 이유가 다음 해가 FA라 FA로이드를 빨았기 때문이라는 것이 팬들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2013년 NC 이적 후의 활약으로 이것이 뽀록이 아님을 증명했다.
이호준의 은퇴 이후, 결과적으로 놓고 봤을 때 통산 성적이 KBO 레전드라고 불려도 손색없을만큼 뛰어났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먹튀로 많은 비난을 들었으나 은퇴 시점에서는 오히려 당해 함께 은퇴를 한 이승엽의 은퇴투어를 본따 9개구단이 이호준의 비공식 은퇴투어를 함께 치뤄주었다.
3. 부진했던 경우
3.1. 김재현
잠실을 오랜 기간 홈으로 썼는데도 통산 OPS가 0.860을 넘어가는 캐넌히터 김재현이 이 해엔 타율 .197와 0.661의 OPS를 기록하며 멸망했다. 2007년을 제외하면 커리어 내내 OPS가 0.785 이하로 떨어진 시즌이 없다!그래서 감독 김성근과 갈등이 심했고, 트레이드 요청을 하거나 은퇴까지 고민했지만 결국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그 해 한국시리즈 MVP에 오르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4. 그 밖에
- 쌩신인 손용석(1987년생)이 백전노장 구대성(1969년생)을 상대로 역전 적시타를 친 것도 2007년의 일이다.
- 2007년 7월 14일 LG 트윈스와 KIA 타이거즈의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경기에서 1회초 무사 만루에서 최희섭의 희생플라이로 이용규와 김종국을 불러들이는 2타점 희생플라이를 기록했다.[14] KBO 역사상 여섯 번째이다. 일곱 번째는 2019년 9월 26일 한화 이글스와 NC 다이노스의 마산 경기에서 8회초 무사 만루 상황에서 송광민이 기록했다. 출처
- 사직 야구장에서 나온 최초의 장외홈런도 2007년이다. 2007년 4월 21일 현대 유니콘스의 정민태를 상대로 타자 이대호가 기록하였다. 알다시피 사직 야구장은 타 구장에 비해 펜스 높이가 높아 홈런을 치기 힘든 구장이다. 그런데 그 구장에서 장외홈런이 나온 것이다. 현재 사직 야구장에는 첫 장외 홈런을 기념하는 동판이 당시 낙하지점에 있다.
- 2007년 5월 4일엔 이우민이 끝판대장 오승환을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쳐냈다.[15]
- 엠스플 선정 대첩 1위에 기록된 522 대첩도 이 해 나온 것이다.
- 2007년 6월 13일에는 손지환이 그 나오기도 어렵다는 무보살 삼중살을 기록했다. MLB나 NPB에서는 퍼펙트 게임보다도 기록된 횟수가 적은 진기록인데, KBO에서는 퍼펙트 게임보다 먼저 나왔다. 2군에서도 퍼펙트 게임은 나온 적 있지만 무보살 삼중살은 없으므로, 현재까지도 한국 프로야구를 통틀어서 유일무이한 기록. 자세한 내용은 무보살 삼중살 문서 참고.
- 2007년 8월 29일에는 이종열이 한 이닝에 좌.우 양 타석에서 안타를 쳐냈다. 이 또한 2021년 현재까지 유일무이한 기록이다.
- 8개 구단 중 한화 이글스가 이상하리만치 우천연기 경기가 많았다.[16] 특히 한여름이었던 6월~8월 중에 우천취소된 경기가 많았고, 당연히 9월 이후 우천연기 경기 추가편성 기간에 그 많은 경기를 소화해야 했다. 그런데 9월 중에도 계속 우천연기가 걸리는 바람에 잔여경기가 계속 미뤄지고 말았고, 심지어 KIA 타이거즈와의 원정 경기 1경기는 준플레이오프 2일 전인 10월 7일에 열리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10월 7일마저 광주에 비가 내리면서 우천취소. 결국 포스트시즌 예정일 전까지 정규리그 경기를 소화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자, KBO는 "한화의 포스트시즌 일정이 끝나면 차후 연기된 경기를 개최한다" 라는 정책을 내놓았다. 결국 그 남은 1경기는 한화가 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에게 3전 전패로 탈락이 확정된 다음에야 치러졌다. KBO 슈퍼 한국시리즈 문서 참고.
5. 비슷한 시즌
이와 비슷한 시즌으로 2009년이 있다. 주전-백업의 경계에 있던 수준의 선수에서 역대급 플루크 시즌을 보내며 MVP를 차지한 KIA 타이거즈의 김상현[17]이나 CK포로 같이 활약한 최희섭, 역대급으로 운이 따라주면서 BABIP과 FIP에 비해 0.53이라는 터무니없이 낮은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유동훈[18], 데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두 자릿수 홈런(12홈런)과 65타점 달성, 골든글러브 포수 부문을 수상한 김상훈이나 95⅔이닝 투구에 평균자책점 4.05를 기록한 곽정철, 94이닝 투구에 5승 2패 12홀드 1세이브에 2.97의 평균자책점을 기록, 수위급 불펜으로 활약한 손영민 등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우주의 기운 참조.김원섭도 이해 100경기를 턱걸이로 뛰며 커리어하이를 찍으며 날아다녔는데, 사실 김원섭은 물론 그 전해와 2012년에도 100경기 100안타를 치고 타선에서 깨알같이 활약해 왔으며, 이후 세이버메트릭스를 통해 2009시즌은 타고투저로 비율 스탯만 올랐을 뿐 이전과 기여도가 비슷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다만 우주의 기운을 받은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는데, 이 해 김원섭은 시즌 초반 무등구장에서 수비하다가 발목이 나가버린 이용규를 대신해 수비부담이 큰 중견수로 뛰면서 이 성적을 냈기 때문이다.
KIA는 이렇게 우주의 기운을 몰아 받은 결과 시즌 전 4강권 후보로 예상되지도 않던 팀이 2009년 한국시리즈를 제패하며 세간을 깜짝 놀라게 했다. 여기에 팀 타율도 .267에 불과해 우승팀이 팀 타율 리그 최하위에 내려앉는 진기록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당시 KIA는 타율만 낮았다 뿐이지 출루율 5위, 장타율 4위로 팀 OPS는 4위에 올랐으며, 홈런도 3위(156홈런)에 오르며 팀타점 2위, 팀득점 3위로 타율만 낮았다 뿐이지 생산성은 훌륭했다. 팀 자체가 OPS 히터화 된 셈.[19] 의도하진 않았지만 2010년대 메이저 리그를 풍미한 '플라이볼 혁명'을 미리 보여준 셈. 여기에 팀 ERA 2위, QS 1위, 피사사구와 피홈런 최소 1위에 오를 정도로 강력한 마운드가 힘을 보탰기에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아울러 2000년대 중반 우승팀이나 우승 경쟁권 팀들은 선동열-김경문-김성근으로 이어지는 스몰볼 선호 감독들이 불펜 이어던지기와 기동력 야구로 성과를 내오고 있었는데, 여기에 처음으로 균열을 내고 OPS 중심의 타선과 강력한 선발 야구로 대표되는 2010년대 빅볼의 시대의 서막을 올렸다는 재평가까지 받고 있다.[20]
또한 준수한 성적과는 거리가 멀던 삼성 라이온즈의 강봉규와 신명철이 동반으로 20-20 클럽에 가입하기도 하였고[21], 부상이 잦아 풀타임 출장이 힘들었던 SK 와이번스의 박재상이 2번 타자로 전 경기 선발출장에 성공하고 타율 .295 15홈런 81타점 33도루의 기록을 찍는 등 커리어에 길이 남을 플루크 시즌을 보낸 이들이 많았다.
원래 이 명단에 .372라는 역대급 타율로 타격왕을 수상한 LG 트윈스의 박용택[22]도 추가될 예정이었으나 평소에 2할대 후반을 치던 실력에서 이 시즌 이후 각성한 것인지 2018년까지 10년 연속으로 3할 타율을 기록하고 2000안타 레전드의 반열에 올라서며 스스로 이 시즌이 플루크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이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비슷하게 KIA 타이거즈의 양현종이나 나지완, 안치홍 등도 본인들이 실력으로 증명하고 이 명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프로야구 최장시간 경기도 이 해 나왔는데 2009년 5월 21일 KIA 타이거즈와 LG 트윈스의 경기. 자세한 내용은 KIA 타이거즈/2009년/5월/21일 참조. 또한 2007년의 다니엘 리오스에 이어 KBO 역사상 두 번째 무결점 이닝도 나왔는데 2009년 5월 27일 금민철이 9회 서울 히어로즈의 클리프 브룸바 - 김일경- 송지만을 차례로 잡아내며 만들어냈다.
[1] 당시 서정환 감독으로부터 망치 타법을 전수받았다고 한다.[2] 추신수가 대표적인 케이스. 사실 이러한 선수들은 특정 시즌만 BABIP가 높은 것이 아니라 커리어 내내 BABIP가 리그 평균보다 높게 나온다.[3] 이우민의 개명 전 이름[4] 두 명 모두 2007년 안타 중에 내야안타 비율이 30%에 육박한다.[5] 1위 SK는 감독이 김성근이었으니 설명 생략. 2위 두산도 당시 이종욱-고영민-민병헌으로 이어지논 '육상부'를 위시한 스몰볼을 주로 활용했다.마침 당시 감독도 작은 김성근이었다[6] 게다가 이 날은 양준혁의 통산 2,000안타도 달성된 날이다.[7] 김동주 이후 이와 비슷한 성향의 선수로 나지완을 꼽기도 하나, 사실 나지완은 주루 센스는 그냥저냥인데 체격 대비 주력이 꽤 빠른거라서 사정이 조금 다르다. 김동주는 체격 대비 주력이 그냥 나쁘지만 않은 수준인데 주루 센스가 뛰어난 것. 오히려 느린 발+좋은 주루 센스라는 점만 착안하면 소속팀 후배인 양의지가 더 비슷한 스타일. 물론 김동주도 동시대의 발 느린 거포로 유명한 이승엽, 심정수, 이대호, 김태균같은 선수보다는 당연히 빠르며 같은 팀이었던 손시헌, 이원석 같이 호리호리하지만 발이 느린 선수보다 빨랐다. 당연히 양의지보다도 빠르다.[8] 또 나중에 알려졌지만 이대호와 마찬가지로 백인천의 만행으로 무릎이 작살난 영향도 있었다.[9] 다만 강귀태 선수는 기록 브레이커로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강귀태 문서 참조.[10] 페넌트레이스 결과 5위 LG가 4위 삼성과의 경기차가 얼마 나지 않아 우규민의 블론세이브 수에서 몇 세이브만 더 챙겼으면 LG를 10년동안 괴롭힌 비밀번호가 탄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11] 2021년에 추신수가 만 39세로 20-20을 기록하며 다시금 경신됐다.[12] 도루로 2루까지 진루한 뒤 최희섭의 적시타로 역대 4번째 1000득점도 달성했다.[13] 부상 이후 167일만의 도루였다. 참고로, 이 도루는 전준호의 커리어 마지막 도루로 훗날 549번째 도루로 정정된다.[14] 구장이 워낙 큰 잠실이기도 하고, 2루 주자 김종국이 발이 매우 빠른 편인 데다 우익수 발데스의 수비가 영 좋지 못한 편인 것이 모두 합쳐졌다. LG 수비진이 느슨하게 수비한 것도 있고...[15] 여담이지만 이 날은 이우민의 생일이기도 하다.[16] 하지만 어찌보면 이는 한화가 이득을 본 것도 있는데, 시즌 중 우천연기가 계속되는 상황을 써먹으며 선발 로테이션을 '류현진-정민철-비-비-비-류현진 혹은 류현진-정민철-세드릭-비-비-류현진' 으로 주축 선발투수 3명을 적절히 돌려쓰는 희대의(?) 전략을 구축하기도 했다.[17] 그나마 kt wiz에서 한 시즌 부활하면서 이 시즌이 순도 100% 플루크는 아님이 드러나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09시즌의 성적은 플루크가 많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기록할 수 없었을 괴물급 성적이었다.[18] 세부스탯은 57경기 67.1이닝 6승 2패 22세이브 10홀드 3블론 4자책점 평균자책점 0.53에 WHIP 0.74 ERA+는 882.2로, 50이닝 이상 기준으로 09유동훈보다 더 높은 조정 평균자책점 시즌을 기록한 투수는 KBO 역사상 단 한명도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미친 활약을 했다. 기록만 놓고 보면 93/95선동열, 11오승환, 07정대현보다 잘 던졌다.[19] 이로 인해 2010년대 한국에서도 세이버메트릭스가 대중화되면서 당시에 비해 평가가 상승했다.[20] 이 해 전까지는 외국인 선수로 클리프 브룸바, 카림 가르시아, 로베르토 페타지니 등 강타자를 데려오거나, 호세 카브레라와 같이 외국인 클로저를 데려오는 등 외국인 선수들의 포지션이 상대적으로 다양했다. 그러나 이 시즌 이후 대부분의 팀은 내국인으로 타선을 채운 뒤 선발진 강화를 위해 외국인 선수 두 명을 모두 선발진에 투자하는 모습이 정착됐다. 이러한 기조는 2014년 규정 개정까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 창단 초 신생팀 특혜로 외국인 3명을 기용할 수 있던 NC 다이노스는 아예 아담 윌크, 찰리 쉬렉, 에릭 해커로 외국인 선발 트로이카를 구성하기도 했다.[21] 플루크 시즌이라면 비정상적인 BABIP의 증가가 따라오기 마련인데 본인들의 통산 BABIP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신명철은 2010 시즌에도 활약을 이어간 반면, 강봉규는 본인의 평균 커리어로 도로 되돌아갔다.[22] 졸렬택이라는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그 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