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1-30 22:31:04

FC 바이에른 뮌헨/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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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련 시설 제베너 슈트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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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대 엠블럼3. 창단과 시련4. 첫 우승과 황금기5.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 시대
5.1. 침체기와 FC 브라이트니게5.2. FC 할리우드 시절5.3. 오트마어 히츠펠트 시대 (1998~2004)
5.3.1. 2000-01 시즌, 25년만의 챔스 우승5.3.2. 2001-02 시즌5.3.3. 2002-03 시즌5.3.4. 2003-04 시즌
6. 펠릭스 마가트 시대 (2004~2007.1)7. 히츠펠트 2기 (2007. 2~2008)8. 위르겐 클린스만 시대와 하인케스 2기(2008-09)9. 루이 판할 시대 (2009~2011. 4)
9.1. 2009-10 시즌9.2. 2010-11 시즌
9.2.1. 극과 극으로 갈리는 평가
10. 하인케스 3기와 트레블의 위업11. 펩 과르디올라 시대 (2013~2016)12. 카를로 안첼로티 시대 (2016~2017. 10)13. 하인케스 4기 (2017. 10~2018)14. 니코 코바치 시대 (2018~2019. 11)15. 한지 플릭 시대 (2019. 11~2021)16. 율리안 나겔스만 시대 (2021~2023)17. 토마스 투헬 시대 (2023~ )

1. 개요

FC 바이에른 뮌헨의 역사를 설명하는 문서.

2. 역대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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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이에른 뮌헨 역대 엠블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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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01 1906~1919 1923~1938 1938~1945[1]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24~1954).svg 파일:FC-Bayern-München-logo-1954-1961.png 파일:FC-Bayern-München-logo-1961-1965.png 파일:FC 바이에른 뮌헨 로고(1965~1970).svg
1945~1954 1954~1961 1961~1965 1965~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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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1979 1979~1996 1996~2002 2002~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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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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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치 독일이 강제로 엠블럼을 교체했다.[2] 2002년부터 2017년까지 사용한 엠블럼에 비해 현재 엠블럼은 바이에른 주의 공식 깃발 안의 다이아몬드 형태가 좀 더 커졌다.

3. 창단과 시련

FC 바이에른 뮌헨은 뮌헨의 체육 클럽인 'MTV 1879'의 멤버들에 의해 1900년에 창단되었다. MTV 1879의 선수들이 1900년 2월 27일 집회에서, 축구부가 독일 축구 연맹(DFB)에 가맹이 불가능해지자, 11명의 축구부 선수들이 MTV 1879에서 탈퇴하여 같은날 오후에 축구 클럽 'FC 바이에른 뮌헨(Fußball-Club Bayern München)'을 창단하였다.

이후 바이에른은 지역 라이벌을 상대로 모두 대승을 거두었고, 1900-01 시즌 남독일 챔피언십 준결승전에 진출하였다. 이어지는 후년에 바이에른은 남부 지역 여러 리그에서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1910-11 시즌, 바이에른은 새로 출범한 바이에른 주의 1부 리그 '크라이슬리가'에 편입된다. 바이에른 뮌헨은 첫 해에 크라이슬리가 우승을 거두었지만,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까지 몇년간 무관에 그쳤고, 1차 대전으로 독일 전체의 축구 활동이 중지되었다.

이후 바이에른은 1926년 독일 남부 챔피언쉽이 출범하기 전까지 몇기의 지역 우승컵을 들어올렸으며, 28년에도 지역리그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다. 바이에른이 공식 기록상 처음으로 획득한 우승 타이틀은 1932년의 리그 우승으로, '리카르트 콘'은 바이에른을 이끌고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와의 당시 독일 챔피언쉽 결승에서 2-0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파일:external/www.südkurve.com/fc_bayern_muenchen_wappen_logo_alt_1938_1945.jpg
나치 시대의 엠블럼

그러나 독일이 나치 휘하의 암흑기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창단 멤버들에 유대인이 여럿 있기에, 1930년대 나치에게 구단 간부들이 강제로 해임당하기도 했다.[1] 이 조치에 구단은 저항했지만, 나치는 바이에른을 '유대인 클럽'이라고 조롱하며 분쇄했다.[2] 클럽의 간부진 및 서포터즈의 열혈 회원 중에서 유대인은 속속 빠져나갔다. 다행히 국경을 넘어간 사람도 있지만 '커트 란다우어' 당시 클럽 회장처럼 수용소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남부리가를 호령했던, 강력했던 바이에른은 그렇게 추락하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에른은 '남부 오베르리가'에 속해있었다. 당시에는 통합된 리그가 없는, 총 5개로 나눠진 각 지방 리그 체제였으며, 남부 오베르리가 또한 독일의 1부 리그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1945년에서 1963년까지 13명의 감독을 해임하며 암흑기를 보냈다. 1955년에는 2부 리가로 강등되었지만 1시즌만에 복귀했고, DFB-포칼 결승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1-0으로 꺾으며 창단 후 첫 우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시 바이에른은 심한 재정난을 겪었고, 결국 1950년대에는 부도 크리까지 맞는다. '롤란트 엔틀러'는 재정 지원을 하였고, 4년간 구단의 회장직을 맡았다. 1963년, 독일의 오베르리가는 단일 1부 리그인 '분데스리가'로 통합되었다. 이때, 출범 멤버로 각 지역의 5개의 오베르리가 팀이 3~4팀씩 포함되는데, 바이에른은 남부 1부 리그 3위로 마쳤지만, 같은 뮌헨을 연고로 한 지역 라이벌인 TSV 1860 뮌헨이 오베르리가 우승을 거두었다. 독일 축구협회는 같은 연고지의 2팀을 1부 리그에 넣는 것을 거부함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1963년 분데스리가의 출범 멤버에 들지 못한다. 바이에른 뮌헨은 그로부터 2년 후에 분데스리가로 승격했다.

4. 첫 우승과 황금기

파일:external/golcalcio.it/Bayern_1973-74.jpg
바이에른 뮌헨의 전설적인 1970년대 전성기. 주축 선수들인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 등은 클럽뿐만 아니라 서독 대표팀도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다.

그렇게 바이에른은 서독의 통합 리그인 분데스리가의 출범 당시 바이에른 뮌헨은 1부리그 멤버로 초대받지 못했고, 2년 후에,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제프 마이어등을 앞세워 1부리그로 올라온다.[3] 분데스리가로 승격된 첫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리그 3위의 호성적을 거뒀고 DFB-포칼 우승을 가져갔다. 독일 컵 우승으로 인해서 UEFA 컵위너스컵 출전권을 획득했고, 레인저스 FC와의 결승전에서 프란츠 로트의 극적인 추가 시간 골로 1 - 0 승리를 거두고 우승했다. 1967년, 바이에른 뮌헨은 다시 한번 DFB-포칼에서 우승했지만, 전반적인 과정이 실망스러웠고 즐라트코 차이코프스키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이 된 브란코 제베치 감독이 부임했다. 브란코 제베치 감독은 공격적인 스타일의 축구를 선보였으며 1968-69 시즌,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DFB-포칼까지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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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축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 최고의 수비수, 최고의 골키퍼가 함께.

1970년대 초중반에 들어와 분데스리가는 바야흐로 '바이에른 천하' 시대를 맞는다. 바로 '우도 라테크' 감독이 부임한 것. 우도 라테크는 첫 시즌에 DFB-포칼 우승을 이루어냈다. 1971-72 시즌에는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는데, 이 우승이 결정지어진 경기는 FC 샬케 04와의 경기였는데, 1972 뮌헨 올림픽을 위해 지어진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펼쳐진 첫 경기임과 동시에 분데스리가 역사상 최초의 TV 중계가 이루어진 경기였다. 바이에른 뮌헨은 5 - 1 로 승리하고 챔피언이 되었다. 이 시즌은 최다 승점 기록과 최다 골 기록을 세운 역사적인 시즌이었다.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분데스리가 사상 첫 3연패(1971-72 시즌, 1972-73 시즌, 1973-74 시즌)의 위업을 달성했다. 또한 3년 연속 유러피언컵 우승을 차지하며 그 절정을 맞았다. 그러나 유러피언컵 3연패 과정이 그리 순탄치 많은 않았다.

1973-74 시즌 첫 번째 유러피언 컵 결승전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와 붙었다. 그러나 좋지 않은 경기가 펼쳐졌고, 경기가 종료되기 직전까지 0 - 1 로 끌려가고 있었으나, 한스게오르크 슈바르첸베크의 극적인 동점골로 재경기를 가지게 된다.[4] 이 경기에서는 게르트 뮐러[5] 울리 회네스가 각각 2골씩 터뜨리며 4 - 0 으로 손쉽게 승리했다. 추후에 울리 회네스 같은 레전드들은 이 경기가 바이에른 뮌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경기 중 하나였다고 평했다. 1974-75 시즌 도중인 1월에, 바이에른이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자 구단주는 팀의 중흥을 가져온 우도 라테크를 경질하고 '데트마어 크라머'[6] 를 새로 감독으로 임명하였다. 이 시즌의 리가는 10위로 마무리하였으나 , 유러피언컵에서는 지속적인 성공이 이어졌다. 1974-75 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리즈 유나이티드 FC와 붙었고, 프란츠 로트와 게르트 뮐러의 골로 승리했다. 빌리 브렘너를 중심으로 한 전성기의 리즈 유나이티드를 꺾으며 우승하였고, 그 다음 시즌의 유러피언컵 출전권을 확보하였다. 1975-76 시즌의 리그 성적은 3위였으나, 이 시즌에도 유러피언컵을 우승하였다.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상대로 홀로 세 골을 몰아친 게르트 뮐러의 활약으로 합계 3 - 1로 꺾었고, 햄든 파크에서의 결승전에서 AS 생테티엔을 '프리킥 스페셜리스트' 프란츠 로트의 결승골로 꺾으며 유로피언 컵 3연패에 성공한 바이에른 뮌헨은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하게 되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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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러피언컵 3연패를 자축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

5.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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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26일 개장한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은 1972 뮌헨 올림픽을 대비해 뮌헨 올림피아 파크 내에 건축된 경기장으로 6만 9천명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1972-73 시즌 분데스리가부터 2005년 여름 새로운 홈구장 알리안츠 아레나로 옮기기 전까지 33년 동안 바이에른의 홈구장으로 쓰이며 고락을 함께 했다. 독일의 명건축가 '귄터 베니쉬'와 '프라이 오토'에 의해 설계되었는데, 사상 최초로 강철 케이블에 지탱되어 안정된 거대한 아크릴 유리 덮개를 설치한 신선하고 혁신적인 구조에 당시 최첨단 시설등을 갖춘 경기장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한쪽 면은 완전히 개방된 형태라 겨울에 경기를 관람하게 매우 추웠고, 관중석 절반 정도는 아예 지붕으로 덮여있지 않아 비, 눈등의 악천후에 그대로 노출되는 등 여러 애로사항이 알록달록 꽃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종합경기장이다보니 피치와의 거리가 너무 먼 것등이 계속해서 문제가 되어 추후 알리안츠 아레나가 신규 건립되게 되는 원인이 된다.

5.1. 침체기와 FC 브라이트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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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이 중원사령관 파울 브라이트너, 우측의 득점왕 트로피를 든 선수가 바이에른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자 전 바이에른 사장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70년대말 구단은 적자의 늪에 허덕이며 졸전을 거듭하게 되었다. 크라머를 경질한 구단은 '로란트 줄러'를 감독으로 앉혔고, 역시 이는 분위기 반전을 가져오지 못하였다. 76-77 시즌에는 리그를 7위로 마무리하였고, 그 다음 시즌에는 구단 역사상 최악의 분데스리가 성적인 12위를 기록하였다. 바이에른 수뇌부는 결국 로란트를 경질, 수석코치였던 '체르너이 팔'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주전 선수들의 이탈도 이어졌다. 팀의 주장이자 상징 프란츠 베켄바워는 1977년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했고, 전설의 수문장 제프 마이어가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은퇴한데다, 인대부상에 시달려오던 울리 회네스마저 회복에 실패하고 조기 은퇴를 결정한다. 거기다 팀의 득점을 책임지던 '폭격기' 게르트 뮐러마저 포트로더레일 스트라이커즈로 이적했다.

1980년대에 들어 팀은 재정난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보드진의 다수가 교체됐다. 부상으로 인해 조기에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회네스를 구단 보드진으로 불러들였다. 당시 부상으로 조기 은퇴한 울리 회네스는 미국으로 건너가 스포츠 마케팅 관련 공부를 했다. 그 이후 바이에른 뮌헨에 돌아와 미국의 스포츠 마케팅 방식을 적용하게 된다. 바이에른 뮌헨에 메가 스토어를 설치하고, 자국 내 기업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도 이때부터다. 특히 이 메가 스토어는 대단한 혁신이었는데, 머천다이징을 전문적으로 행한 첫 케이스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서포터들의 구단' 이라는 인식을 계속해서 심어주어 이미지 형성에 노력하게 된다. 또한 바이에른 주에는 세계적인 대기업들이 많이 몰려있는데 그 기업들이 모두 바이에른 뮌헨의 공식 파트너가 되는 것도 울리 회네스가 주도했다. 결국 구단은 기사 회생에 성공하였다. 그의 마케팅 방식은 여기에 나와있다.

이렇게 기사 회생한 바이에른 뮌헨은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독주하기 시작하고 10년간 7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같은 시기에 유럽 무대에서의 성적은 썩 만족스럽진 않았다. 1981-82 시즌과 1986-87 시즌 두 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올랐으나 둘 다 준우승에 그쳤다. 1981-82 시즌 결승전에는 아스톤 빌라 FC와 결승전에서 만났는데 경기 내내 압도하다가 뜬금포 한 방에 무너졌고 1986-87 시즌 결승전에선 FC 포르투에게 경기 내내 1골차로 리드하다가 막판에 79분이랑 81분에 연속골을 얻어맞고 역전패했다.

또한 1980년대의 바이에른은 공격과 수비의 핵심인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파울 브라이트너'[8] 에게 의존한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당시의 바이에른은 'FC 브라이트니게'라고 불릴정도로 둘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5.2. FC 할리우드 시절

1987년 부임한 '유프 하인케스' 체제 하의 바이에른은 리가 2연패를 성공하지만 1990년대 들어 노쇠한 주축 선수를 떠나보내며 전력이 약화되었고, 클럽은 위기를 맞았고 1990-91 시즌에는 준우승을 차지했으나 1991-92 시즌에는 10위를 기록하며 체면을 구겼다. 이는 강등권과 승점이 겨우 5점차밖에 나지 않는 부진이었다. 유프 하인케스는 경질되었고, 1993-94 시즌 UEFA컵에서는 2라운드에서 노리치 시티 FC에게 홈에서 덜미를 잡히며 조기 탈락의 수모를 당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프란츠 베켄바워가 94년 1월에 임시감독을 맡음에 따라 바이에른 뮌헨은 화려하게 부활하며 다시금 정상의 자리에 오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 기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대행을 이어 새로 감독이 된 '조반니 트라파토니'와 '오토 레하겔' 감독은 당시 벼락부자가 되어 막강한 선수를 쓸어담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대결에서 힘을 쓰지 못하며 패배했고, 각각 1시즌씩 무관으로 끝냈다.

1995-96 시즌 막판에 팀의 부진을 보다 못한 베켄바워는 또다시 임시 감독직을 맡았고, 결승에서 지롱댕 보르도를 꺾고 팀의 UEFA컵 우승을 이끌어냈다. 정말 이쯤되면 이 사람이 트로피를 부르는건지 구분이 안갈 정도다. 그리고 또다시 감독직이 조반니 트라파토니에게 넘어갔다. 그나마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1996-97 시즌에 팀에게 3년만에 리그 우승을 선사했으나 같은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무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해버려서 복수하는 느낌이 제대로 들지도 않았다. 이 시즌 도르트문트는 유벤투스를 꺾고 챔스 우승을 했는데, 그 장소가 다름아닌 바이에른의 홈구장 올림피아 슈타디온 뮌헨이었다. 다음 시즌에는 승격팀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에게 패배하는등 고전이 이어졌다. 공교롭게도 이 때 카이저슬라우턴 감독은 바이에른에서의 처참한 실패를 경험했던 오토 레하겔이다.

이 시기, 선수들은 형편없는 경기력에 반해 그라운드 밖에서 소란을 자주 피우는 등, 스포츠지보다 촌평지에 등장하며 'FC 할리우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획득하였다. 1998년 3월 10일, 선수들의 태도에 빡친 조반니 트라파토니는 분노의 인터뷰를 하였다. 근데 문법이 이상하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자 조반니 트라파토니 감독은 사임하였다.

5.3. 오트마어 히츠펠트 시대 (1998~2004)

1998년부터 2004년까지 바이에른 뮌헨의 지휘봉은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최전성기를 이끈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이 맡게 된다. 히츠펠트가 부임한 첫해, 바이에른은 분데스리가 정상에 올랐고 DFB-포칼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했다. 다음해 바이에른은 리그[9]와 독일컵 타이틀을 차지하며 더블을 기록했고 2001년 다시금 리그를 제패, 분데스리가를 3년 연속으로 우승했다.

그동안 부진했던 유럽대항전에서도 기세가 엄청났다. 부임 첫 시즌 1998-99 시즌, 바이에른은 조별리그에서 FC 바르셀로나를 침몰시킨데다 토너먼트에서 안드리 셰브첸코가 이끌던 FC 디나모 키이우까지 꺾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하지만,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게 후에 '캄프 누의 비극'이라 명명된, 비극적인 패배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른다. 전반 6분만에 마리오 바슬러가 강력한 땅볼프리킥으로 피터 슈마이켈을 무너뜨리며 앞서간데다 경기 내내 메멧 숄을 필두로 맨유 수비진을 농락하며 골대만 3번 때리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여줬으나, 후반 91분과 93분 두번의 코너킥 상황에서 테디 셰링엄올레 군나르 솔샤르에게 실점해 4번째 빅이어를 눈앞에 두고 종료직전에 믿기지 않는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그라운드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는 주장 올리버 칸사무엘 쿠포르의 통한의 절규는 바이에른 뮌헨 팬들로서는 눈물없이 볼 수 없었던 장면이자 기억하기도 싫은 장면이다.

5.3.1. 2000-01 시즌, 25년만의 챔스 우승

그리고 2년 뒤의 2000-01 시즌의 바이에른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바이에른은 '게르만의 혼' 로타어 마테우스가 은퇴했지만 주장인 '미친 호랑이'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거인' 올리버 칸을 중심으로 절치부심했다. 뿐만 아니라 비셴테 리사라수지오반니 에우베르의 부상 결장을 고려하더라도 결승전 선발 멤버 중 사무엘 쿠포르를 제외한, 벤치 멤버 중 알리 다에이하산 살리하미지치를 제외한 전원이 독일인으로 채워져 있었던 2년 전과는 달리 윌리 사뇰파울루 세르지우 시우베스트리 두 나시멘투 등 거물 용병을 영입하고 오언 하그리브스등 유망주를 성장시키며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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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초반에는 사무엘 쿠포르, 파트리크 안데르손, 토마스 링케 등으로 이루어져 있던 수비진이 흔들리며 리그에서 휘청였고, DFB-포칼은 2라운드에서 1. FC 마그데부르크에게 승부차기 끝에 탈락하며 좋지 못했다.

그러나 챔피언스리그에선 바이에른은 조별 예선에서 아스날 FC을 1승 1무로 제압하며 기세를 과시했고, 8강에서 2년 전 통한의 아픔을 안겨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를 홈 / 원정에서 모두 털며 4강에 진출했다.[10] 4강에서 만난 레알 마드리드 CF도 홈/원정 모두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진출했다. 스타디오 주세페 메아차에서 열린 결승전 상대는 작년에도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아깝게 고배를 마신 발렌시아 CF였다. 에펜베르크와 가이스카 멘디에타페널티 킥으로 한 골씩 기록하며 1:1로 승부차기까지 간 이 접전은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중 유일하게 PK로만 득점이 난 경기로 기록이 되어 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가장 긴장감 넘치는 승부차기로 불리어지는 이 혈투에서 양팀 모두 7번째 키커까지 나온 끝에 끝에 PK를 3개나 선방해 낸 올리버 칸의 활약에 힘입어 PK 스코어 5:4로 25년만에 빅이어를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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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UTE IST EIN GUTER TAG, UM GESCHICHTE ZU SCHREIBEN(오늘은 역사를 쓰기 좋은 날!)[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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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가장 긴장감 넘치던 승부차기의 주인공이 된 올리버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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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주역들인 올리버 칸 - 사무엘 쿠포르 - 슈테판 에펜베르크 - 비셴테 리사라수 - 카르스텐 얀커 -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

그리고 2000-01 시즌, 분데스리가에서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사건 하나가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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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1 시즌 분데스리가, 당시 33라운드의 순위표이다. 1위 바이에른 뮌헨과 2위 샬케 간의 승점 차이는 3점이었다. 득실차는 샬케 04가 앞서고 있었다. 마지막 34라운드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함부르크 SV를 상대하고, 샬케 04는 SpVgg 운터하힝을 상대했다. 그리고 두 경기는 같은 시간에 진행되었다. 샬케의 경기가 먼저 끝났다. 샬케 04는 5 : 3 으로 승리했다. 그러나 바이에른 뮌헨은 함부르크 SV와 0 : 0 으로 비기고 있었다. 경기 시간은 90분을 지나고 있었다. 그 때, 함부르크의 세르게이 바르바레즈가 선제 헤딩 골을 넣는다. 샬케 04 팬들은 환호하며 운동장으로 뛰쳐나왔고, 우승을 확정한 듯한 분위기였다. 반면 프란츠 베켄바우어는 화난 표정을 지었고,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고개를 가로 지었다. 울리 회네스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주심은 4분의 추가 시간을 주었다. 바이에른 뮌헨의 마지막 공격이 시작되었다. 슈테판 에펜베르크가 파울루 세르지우에게 공을 띄워 주었다. 하지만 파울로 세르지오의 마크맨이었던 토마스 우이팔루시는 골키퍼에게 백패스를 했다. 그런데 골키퍼가 공을 잡았다! 바이에른의 벤치에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반칙!" [12] 간접 프리킥이 주어졌고, 이것은 바이에른 뮌헨의 마지막 찬스였다.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파트리크 안데르손이 프리킥 준비를 했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이스터샬레는 샬케 04에게 돌아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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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정말로 기적이 일어났다. 파트리크 안데르손이 강력한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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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 역사상 가장 극적인 우승, 마이스터샬레는 바이에른 뮌헨에게로...

5.3.2. 2001-02 시즌

2001-02시즌 마이스터샬레마티아스 자머가 이끄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내줬고, 챔피언스리그도 1, 2차 조별리그 12경기에서 무패를 달렸으나 4강에서 지난 두 시즌 연속해서 승리했던 레알 마드리드 CF를 만나 이번엔 바이에른이 떨어졌다. 1차전 홈경기는 이른 시간 선제골을 내주고도 82분에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동점골과 경기종료직전 클라우디오 피사로의 극적인 역전골로 승리했다. 그러나 원정에서는 명경기를 펼친 끝에 이반 엘게라구티에게 비슷한 패턴으로 골을 먹히며 패했다. 포칼도 우승 실패하며 무관에 그쳤다.[13]

5.3.3. 2002-03 시즌

2001-02 시즌 종료 후 주장 슈테판 에펜베르크와 떡대 피지컬을 자랑했던 스트라이커 카르스텐 얀커가 떠났지만, 미하엘 발락, 제바스티안 다이슬러, 클라우디오 피사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 뉴페이스들이 대거 등장한 2002-03 시즌 다시 한번 국내 리그/컵 더블을 달성했지만 챔스에서는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 AC 밀란, RC 랑스를 상대로 1승도 거두지 못하고 2무 4패라는 충격적인 성적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이후 바이에른은 이때 자신들을 철저히 파괴했던 데보르티보의 공격수 로이 마카이를 영입해 지오반니 에우베르, 카르스텐 얀커를 대체한다.

5.3.4. 2003-04 시즌

2003-04 시즌에는 포칼 16강에서 당시 2부리그였던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발목을 잡히는 등 부진이 여전하였고, 챔피언스리그도 16강에서 레알 마드리드 CF를 만났는데, 나쁘지 않은 경기력으로 홈에서 낙승을 따내나 싶더니 올리버 칸호베르투 카를로스의 프리킥을 캐칭한 것을 흘려 알까기 골을 내주는 수모를 당하며 무승부. 원정에서 1대0으로 패해 합계 2대1로 조기에 탈락하고 말았다.

이 시즌 리그는 토마스 샤프 감독이 이끄는 '닥공' SV 베르더 브레멘에게 우승을 내주었는데, 바이에른이 계속해서 추격했으나, 후반기 맞대결에서 3대1로 충격적으로 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렀다. 결국 무관에 그친 바이에른은 시즌 종료 후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과 결별을 선언하며 그의 시대도 조용히 끝나고 말았다. 뒷모습이 쓸쓸했지만, 그래도 몰락해 가던 팀을 화려하게 부활시킨데다 다시 한 번 바이에른이라는 팀을 유럽 대항전의 강호로 만든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지도력은 박수를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바이에른 홈팬들도 그간의 우승행진과 영광스러웠던 업적을 칭송하며 34라운드 경기 시작전 치러진 고별식에서 기립박수와 히츠펠트를 지지하는 문구들로 그에게 화답했다. 지금까지도 오트마어 히츠펠트는 바이에른 뮌헨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뽑힌다.

6. 펠릭스 마가트 시대 (2004~2007.1)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물러난 후 후임 감독은 '마가트 유치원' 스쿼드 구축으로 VfB 슈투트가르트의 리가 준우승을 이끈 '펠릭스 마가트'. 그는 바이에른 감독 부임 후 2004-05, 2005-06시즌을 연속해서 더블로 우승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독일 클럽 사상 최초의 연속 더블 우승이기도 하다.

이렇게만 보면 마가트도 뮌헨의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보이겠지만, 실상은 안 그렇다. 마가트가 나쁜 평가를 받는 이유는 2006-07 시즌 워낙 죽을 쒀서 그렇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이에른을 말아먹은 건 아니었다. 게다가 2004-05 시즌의 승점 77점 우승은[14] 2011-12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경신하기 전까진 최다 승점 우승이었다.[15] 하지만 독재자 타입의 감독인데다 선수들에게 혹독한 체력 훈련을 감행했고, 워낙에 특이한 규정을 많이 만들어 선수단과 마찰도 많았고, 결과적으로 바이에른의 UEFA컵행을 이끈 흑역사로 남았다. 실제로 마가트의 별명은 '사담 마가트(마가트+사담 후세인)', '크밸릭스(Quälix, 이름 Felix와 괴롭히다는 뜻을 지닌 quälen의 합성어)'[16]였다.

또한 히츠펠트에 비해 유럽대항전 성적이 신통치 않았는데, 마가트 첫 시즌에는 조별리그를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다비드 트레제게 등이 버티는 유벤투스 FC에게 밀려 2위로 진출해 바로 아스날 FC를 만났으나 올리버 칸의 어시스트 등 떡대 플레이로 그냥 밀어붙여 꺾더니 8강에 올라갔다. 그러나 8강 상대는 이제 막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투자가 시작된 첼시 FC였고, 프랭크 램파드에게 환상골을 허용하는 등 원정에서 4대2로 패한 것을 뒤집지 못하고 합계 5 - 6로 패했다. 홈 승리도 2대1로 밀리다가 막판에 가서야 메멧 숄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등이 억지로 우겨넣은 골이라 완패였다고 할 수 있다.

05-06 시즌에 유벤투스를 또 만나 이번에는 1승 1패를 거뒀으나 뮌헨전 외에는 무패였던 유벤투스에 비해 브뤼헤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고 말았고, 그 대가로 지난 시즌 준우승팀인 밀란 제너레이션 2기의 AC 밀란을 만나버렸고, 뮌헨 킬러 필리포 인자기와 쉐도르프 등에게 맹폭을 당하며 산 시로 원정에서 4대1로 발렸다. 그나마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장거리에서 냅다 때린 것을 지다가 불안정하게 처리해 게레로가 주워먹어서 1골 넣었을 뿐. 홈에서는 미하엘 발락이 환상골을 넣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이렇듯 히츠펠트 말기의 부진에서부터 마가트 시대, 그 이후의 클린스만까지, 바이에른의 위상과 맞지 않게 조기 탈락이 이어졌다. 2001 - 2002 시즌 4강 진출 이후 거의 10년간 8강 이상을 뚫지 못하는 부진이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유럽대항전 경쟁팀들에 비해 돈을 쓰지 않는 보드진들을 비관한 팀의 중원사령관 미하엘 발락은 재계약을 거부하고 자유이적으로 첼시 FC로 이적하고 만다. 이 공백을 극복하지 못한 뮌헨은 06-07 시즌 멸망하며 챔스 진출권을 잃는다.

2005/06 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은 1972년부터 홈구장으로 사용했던 정든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을 떠나 독일월드컵을 앞두고 도시 북쪽에 새로 준공한 66,000석의 알리안츠 아레나로 자리를 옮긴다.[17] 최첨단 시설과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기장 외벽 색깔을 바꿀 수 있는 이 경기장이며,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현대적인 스포츠 경기장으로 꼽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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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피지컬과 조직력을 앞세워 2시즌 연속 더블을 달성했던 바이에른의 주축들. 좌로부터 하산 살리하미지치, 미하엘 발락, 클라우디오 피사로, 로이 마카이, 그리고 뒤에 있는 제 호베르투.

만능의 중원 사령관 발락을 필두로 헌신적이며 다재다능한 제호와 하그리브스, 최고의 재능 다이슬러의 등장, 마카이의 결정력과 기동성, 그리고 살리하미지치와 메멧 숄 등의 베테랑들, 그리고 레전드 골리 올리버 칸이 버티는 골문 앞에 루시우, 필립 람, 윌리 사뇰, 그리고 데미첼리스 등으로 벨런스 자체는 괜찮은 시절이었다. 하지만 유럽대항전에서는 경쟁자들에 비하면 한수씩 떨어진다는게 문제였다.

그리고 이어진 2006-07 시즌에 제대로 문제가 터졌는데,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발락이 떠나자 마르크 반 봄멜로 이를 메우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하그리브스는 맨유 보내달라고 꼬장을 부리지, 예레미스는 무릎 부상만 계속 당하다 은퇴했지, 다이슬러는 매일 누워있지,[18][19] 새로 사온 유망주들은 똥이나 싸대지, 여기에 함부르크에서 맹활약하던 젊은 피 다니엘 반 부이텐이 수혈된 수비진은 레전드 골키퍼 올리버 칸이 버티고 있음에도 안정감이 뚝 떨어졌으며, 산타 크루즈와 피사로의 득점력도 급감했다. 그나마 월드컵에서 대활약해서 희망이 보였던 루카스 포돌스키는 애국자답게 시즌 7골밖에 못 넣으며 그 기대를 제대로 씹었다.

2006-07 시즌이 진행되며 DSC 아르미니아 빌레펠트, VfL 볼프스부르크, 하노버 96에게도 패하고 베르더 브레멘 원정은 3:1 패배를 당하면서 11경기 만에 4패를 당해 5위에 머물렀다. 팬들은 '마가트 나가라!' 구호를 외치고, 겨울 이적 시장에서 곧바로 모가지가 잘릴 듯 했던 마가트는 겨울 휴식기 전까지는 일단 리그에서 7경기 무패를 달리며 일단 위급한 불을 끈데다 챔스에서는 인테르 원정에서도 행운의 승리를 거두는 등 무패로 조 1위를 했기에 일단 보드진은 후반기 결과를 지켜보기로 하고 마가트에 대한 신뢰를 표명했다. 그러나 포칼 8강에서 승격팀인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뜬금없이 어이없게 탈락하더니 후반기 첫 경기였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원정에서 3대2로 패했고, 승격팀인 보훔에게도 홈에서 눈이 썩는 경기력으로 0대0으로 비기자 결국 보드진은 바로 모가지를 치기로 결정했고, 그렇게 펠릭스 마가트는 시즌 중이던 2007년 1월 31일 자로 해고되었다. 마가트의 뮌헨 경력은 그렇게 2년 반만에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7. 히츠펠트 2기 (2007. 2~2008)

팀이 여전히 4위에 머물러 있자 절체 절명의 위기에서 오트마어 히츠펠트가 급히 팀을 구하기 위해 부임했다.[20] 시작은 매우 불안했는데,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0:3 참패를 당했고, 히츠펠트 1기 시절 포칼에서 충격의 탈락을 안긴 알레마니아 아헨에게 또 패했다. 그러나 차츰 팀을 수습한 히츠펠트호는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에서 라울 곤살레스, 데이비드 베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등이 포진하고 '우승 청부사'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피 말리는 혈투 끝에 홈에서 로이 마카이가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최단시간 골인 10.5초 만에 골을 기록하며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꺾고 올라갔다. 특히 1차전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2:3 패배는 뮌헨과 레알의 역대 최고의 명경기로 꼽힌다. 라울 - 반니 투톱의 화력과 뮌헨의 역습의 대결이었고, 뮌헨은 패배했으나 종료 직전 마르크 판보멀이 멋진 중거리로 추격골을 넣으며 2차전의 희망을 만들어냈고 결국 이 골 덕분에 홈에서 2:1 승리로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레알을 꺾고 8강 진출에 성공했다.

그런데 8강에서 천적 AC 밀란을 또 만났고, 1차전 원정에서 2: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기대감을 높였으나 홈에서 0:2로 떡실신하며 탈락했고[21], 분데스리가에서도 순위를 회복하나 했으나 후반기 막판에 슈투트가르트전 완패, 함부르크전 패배로 브레멘과의 승점차가 6점으로 벌어져 결국 UEFA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자력으로 장담하지 못하는 처지에 놓였고, 우려는 현실이 되어 4위로 쳐지며 UEFA컵에 나가게 되는 수모를 겪게 된다.

2007-08 시즌 다시금 오트마어 히츠펠트의 지휘 아래 슈투트가르트에게 뺏긴 우승컵을 되찾기 위해 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 프랑크 리베리 등을 영입하는 분노의 영입 시즌 1을 보여주며 2위와 승점 10점 차이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분데스리가와 DFB-포칼에서 더블을 기록하며 체면치레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통산 20회 분데스리가 우승으로 차기 시즌부터 엠블럼 위에 별 4개를 달 자격이 생겼다. 해축팬이라면 잘 아는 바이에른 뮌헨 엠블럼 위의 4성은 이 때부터 달기 시작했던 것이다. [22] [23]

클럽 레코드를 경신하며 데려온 리베리는 곧바로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상 등을 휩쓸며 팀의 핵심이 되었고, 여기에 토니 - 로제 라인이 가동되어 이타적인 성향의 클로제와 세리에 득점왕 출신의 토니가 케미를 발휘해 둘이 60골을 넣는 엄청난 화력으로 UEFA 컵과 분데스리가를 휩쓸었다. 올리버 칸은 은퇴 전 마지막 시즌임에도 연륜이 묻어나는 안정감으로 뒷문을 굳건히 잠궜고[24], 중원의 제호베르투와 판보멀의 적절한 조합에 서브로 나쁘지 않았던 오틀, 새로 합류한 하밋 알틴톱마르셀 얀센 등의 적절한 활약이 조합되어 승승장구했다. 포지션상 애매한 자원으로 남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와 여전히 신통치 않은 루카스 포돌스키의 활약 등이 그나마 옥의 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UEFA컵에서는 16강까지는 RSC 안데를레흐트, 애버딘 FC 등에게 6~7골을 퍼부으며 8강에 진출한 바이에른은 헤타페 CF에게 탈락 직전까지 갔다가 극장 경기 끝에 극적으로 4강에 진출했는데[25] 제니트 상트페테르부르크에게 2차전 원정에서 안드레이 아르샤빈에게 농락당하며 4:0 대패를 당하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미니 트레블에는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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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시즌 종료 후 바이에른 뮌헨의 상징이던 주장 올리버 칸이 은퇴했다.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도 눈물의 은퇴식을 가졌고, 그외에도 윌리 사뇰, 베른트 드레어 등 많은 정신적 지주들이 떠났다.

8. 위르겐 클린스만 시대와 하인케스 2기(2008-09)

'위르겐 클린스만'이 새롭게 지휘봉을 잡은 2008-09 시즌은 말 그대로 '역사스만 시대'라고 불리는 암흑기 그 자체였다. 브레멘에게 홈에서 믿기지 않는 5대2 대패를 당한다거나, 그라피테 - 에딘 제코 - 미시모비치 삼각 편대를 앞세운 볼프스부르크에게 원정에서 5 - 1로 대패하는 등 철저히 밀리면서 시즌 내내 단 한 번도 리가 선두를 달리지 못하는 부진의 연속이 이어졌다. 그래도 전반기는 막판 11경기 무패를 달리며 돌풍의 승격팀 호펜하임과 동률의 승점으로 마쳤지만 윈터브레이크 후 맞은 후반기가 시작되자마자 4경기 중 3경기에서 함부르크, 헤르타 베를린, 쾰른에 차례로 패했다. 급기야 26라운드 볼프스부르크 원정은 위에 나온 것처럼 처참한 경기력 끝에 굴욕스러운 대패를 당했다. 결정적인 순간마다 번번히 대기권으로 날아가는 공격진의 슈팅, 지난 시즌 주전급으로 부상했으나 결국 부족한 기량으로 대량 실점하면서 경기마다 데미첼리스와 함께 삽질 1순위로 지목되며 구멍화된 크리스티안 렐총체적 난국이 이어진데다, 올리버 칸 은퇴 후 생긴 골키퍼진의 구멍도 미하엘 렌징이 처참한 폼을 보여주며 삽질만 줄창 반복되어 더욱 위태로워만 보였다. DFB-포칼도 8강에서, 리그에서 엎치락 뒤치락 싸우던 레버쿠젠에게 4대2로 참패를 당했다. 그나마 토니 - 로제 라인은 밥값은 했으나 번갈아 부상을 당하며 듀오 구성이 어려워졌고, 지난 시즌 폭발적인 경기력을 보여줬던 알틴톱이 장기 부상을 끊으며 극심한 부진을 보인데다, 보로프스키도 포스트 발락의 역할을 하기엔 무리였다. 리베리도 두자리수 골을 넣었지만 부상에 시달리며 시즌 3~40%는 날렸고, 그나마 슈바인슈타이거가 UEFA 유로 2008 때의 플레이 스타일을 그대로 옮겨와 뜬금없이 9골을 넣었으나 팀의 상황을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 가장 심한 문제가 렌징이었는데, 칸 은퇴 전에 서브로 나올 때는 몇 번씩 멋진 선방을 보여주어 멋지게 대체제가 되나 했으나, 페이크였다. 마치 장갑에 기름을 바르고 출전하는 듯한 경기력으로 후반기부터는 한스외르크 부트에게 주전 자리를 내 줬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조별리그를 1위로 가볍게 돌파한데다 16강에서는 스포르팅 CP를 원정에서 5 - 0, 홈에서 7 - 1 로 대파하여 도합 12 - 1이라는 엄청난 점수차로 격파[26]하며 8강에 진출했으나, 주전 수비 3명이 부상당한 채 렐 - 브레누 등 유망주와 하락세가 뚜렷하던 오또를 긴급 투입시켜 치른 8강에서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에게 원정에서 4 - 0으로 대패하는 등 처참한 패배를 당하며 합계 5 - 1로 탈락한다.[27] 세대교체는 커녕 뮌헨 본연의 성적도 거두지 못하자 가시방석에 앉은 듯 하던 클린스만은 29라운드 샬케 04에게 홈에서 패하며 UEFA 컵으로 떨어지는 4위로 쳐지자 결국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은 시즌 종료 무렵에 가차없이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모가지를 쳤다.

천만다행으로 시즌 막판, 은퇴 후 야인으로 지내던 유프 하인케스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잔여 경기들에서 승리를 거둬주었다. 88년부터 92년까지 4년간 뮌헨을 이끌며 두 차례 리그 우승을 거둔 하인케스의 두 번째 뮌헨 부임이었다. 잔여 경기 5경기에서 4승 1무를 거두며 팀을 도로 분데스리가 2위를 이끌며 차기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직행에 성공했지만 시즌은 무관으로 끝났다. 32라운드에서 선두 볼프스부르크와 승점 동률이었으나 33라운드 호펜하임 원정에서 무승부를 거두면서 승점 2점차로 벌어졌고 최종전에서 승점 동률인 3위 슈투트가르트와 홈에서 단두대 매치를 벌어야 했다. 만일 패배할 경우 4위 헤르타 베를린이 강등권 카를스루에에 이기면 2006-07 시즌과 마찬가지로 4위로 챔스에 못 나가는데, 다행히 2-1로 승리하며 자력 2위를 확보하는데 성공했다.[28] 1위 볼프스부르크가 패할 경우 역전 우승도 가능했으나 포칼 결승을 앞두며 힘 빼고 나온 베르더 브레멘에 5-1 대승을 거두면서 그럴 일은 없어졌다.

애초에 필립 람이 자서전에서 디스했듯 클린스만의 감독 스타일은 지략가 타입이 아닌 팀에 사기를 불어넣거나 훈련 방식과 스트레스 관리, 선수 복지 등에 주로 관심을 가지는 스타일이었다. 감독 경력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을 성공적으로 세대교체 시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3위에 올려놓은 것 뿐이었고, 클럽 경력은 전무했다. 그나마 그 3위도 전술적인 부분은 요아힘 뢰프 수석코치가 알아서 했지 클린스만이 뛰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월드컵에서도 그러했듯 노장 선수들과의 불화도 잦았고, 엽기적인 훈련 방식 탓에 선수들의 불만도 쌓여갔다. 뮌헨 보드진은 독일 대표팀의 10년여간 이어지던 오랜 부진을 씻고 유망주들을 대거 발굴해 세대교체에 성공한 클린스만이 뮌헨에서도 그런 리빌딩을 해 주기를 바랐겠지만, 클린스만은 그 정도 역량이 있는 감독이 애초에 아니었던 것이다. 어설프게 베테랑 대신 주전급으로 기용하던 어린 선수들은 큰 경기에서 멘탈부터 무너지며 대량실점을 내주기 일쑤였고, 팀 벨런스 자체가 붕괴되고 말았다. 뮌헨에서의 3년 내내 애국자 모드만 보여주던 포돌스키를 살려내지도 못했다. 결국 현역 시절 레전드급 선수라 할지라도 명지도자까지 되기는 어렵다는 걸 이 쪽도 몸소 증명한 예시 중 하나가 되었다.

뮌헨은 의외로 반 할이 오기 전까지 여전히 매우 고전적인 축구를 펼쳤는데, 믿을 구석은 지난 시즌 독일을 집어 삼키며 유럽 무대 어느 팀에 견주어도 부럽지 않았던 루카 토니 - 미로슬라프 클로제 라인에 크랙으로 리베리가 있었다. 전술이라고는 후방에서 뻥 차놓으면 토니가 몸빵으로 받아내서 클로제랑 골 만들어주겠지&리베리가 알아서 하겠지+제 호베르투의 기동력과 슈슈, 알틴톱의 뜬금포 등이 주 전술이었다. 이는 히츠펠트가 2000년대 초반 슈테판 에펜베르크의 뻥축 패스로 지오반니 에우베르카르스텐 얀커가 마무리를 하던 시절에서 크게 진보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07/08 시즌 때는 유럽무대에 내놓지 못해 한이었던 그 둘이 막상 유럽에 내놓으니 08/09 시즌,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번갈아서 부상을 당하기 일쑤여서 동시 가동이 잘 안 됐고, 에이스 프랑크 리베리도 부상으로 시즌의 40% 정도는 날려먹었으며, 무엇보다도 믿었던 유망주 수비진은 빌드업도 안 되고 멘탈관리도 안 되는 폭탄들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이 어린이들의 멘탈을 잡아준 대선배 올리버 칸은 07-08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해서 떠났고, 그 자리엔 기름손 of 기름손 렌징이 있으니 뭐가 되겠는가? 결국 08-09 시즌은 뮌헨빠들에게는 기억도 전혀 하기 싫은 최악의 흑역사+금지어 시즌 중 하나로 남았다.

9. 루이 판할 시대 (2009~2011. 4)

9.1. 2009-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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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판할' 감독이 부임한 2009-10 시즌, 바이에른 뮌헨은 볼프스부르크에게 빼앗긴 우승컵을 되찾아오기 위해 아르연 로번, 마리오 고메스등을 대거로 지르는 등 2007-08 시즌 때에 이어 분노의 영입 시즌 2를 보여주었다. 이를 통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준우승을 기록하고, 분데스리가와 DFB - 포칼을 우승하며 더블을 기록한다. 같은 더치 커넥션이었던 마르크 반 봄멜에게 주장완장을 맡길 정도로[29] 신임했던 루이 판 할은 마르크 반 봄멜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원 라인 구성에 로베리라 불리는 세계 최강의 황금 날개를 만들어냈고, 유스 출신인 토마스 뮐러의 1 - 2선을 오가는 활용의 극대화, 홀거 바트슈투버, 디에고 콘텐토등의 발굴을 통해 대 성공을 거두었다. 특히 애매함으로만 남았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중앙미드필더로의 보직 변경은 신의 한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처음부터 상황이 좋은건 아니었다. 시즌 초반엔 리그에서나 챔스에서나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로 간 루시우, 부상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이르다면 이른 나이에 은퇴한 윌리 사뇰 등의 공백으로 꽤 부진하여 많은 사람들의 걱정을 샀으나 아르옌 로벤과 프랑크 리베리 없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4 - 1로 꺾는 쾌거를 올리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다. 물론 우승 레이스를 펼치던 샬케와 SV 베르더 브레멘이 바이에른 뮌헨이 진 라운드에서 함께 패해주는 등 운이 따라주기도 했으나, 결국 전반기를 4위로 마쳤음에도 역전에 성공하여 샬케와의 치열한 우승경쟁[30] 끝에 승점 5점차로 제치고 22번째 분데스리가 우승을 확정했고, DFB-포칼 결승전에서도 SV 베르더 브레멘을 4 - 0으로 누르며 더블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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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아르옌 로벤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 발리골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승승장구 하는 것까진 아니었던게 ACF 피오렌티나[31]맨체스터 유나이티드전에서는 말 그대로 탈락 직전까지 가는 위기 속에서 아르옌 로벤의 환상적인 두 방[32] 으로 원정 다득점으로 승리해 두 경기 다 4 - 4 무승부에서 원정 다득점으로 4강에 진출했고, 4강에서 올림피크 리옹을 이비차 올리치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격파하고 2000-01 시즌 이후 9년만에 결승에 진출하게된다.
비록 결승전에서는 인테르디에고 밀리토에게 멀티골을 헌납하며 2 - 0으로 완패했지만 불완전한 스쿼드로[33] 국내 리그 더블에 UEFA 챔피언스 리그까지 기록한 것으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이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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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리는 주장 마크 반 봄멜

9.2. 201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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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시즌 초반부에는 꽤 부진한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나마 차츰 마리오 고메즈의 좋은 활약과 돌아온 프랑크 리베리 덕에 안정세를 되찾고 있지만, 리그 절반이 진행된 17라운드에는 5위를 달성했다. 1위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승점 차이는 14점이나 되기에... 루이 판 할 감독은 잘해봐야 2위가 될 것 같다는 인터뷰까지 하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선수층이 굉장히 얇아서 샬케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은 바이에른 뮌헨이 충분히 우승할 것 같다고 전망했다. 하지만, 결국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승했다. 더불어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선 전번 대회 결승에서 맞붙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와 16강전을 벌이게 되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 TSG 1899 호펜하임에서 미드필더 루이스 구스타부를 영입함으로서 미들진이 강화되었다.[34] 그러나 가장 중요한 센터백과 풀백진은 여전히 많이 부족한 상태였다. 필립 람을 빼면 수비진은 정말 처참한 수준이다. 그럼에도 영입을 못하는 이유는 루이 판 할 감독이 본래 유스 출신 선수들을 많이 중용하는 성향이기에 그런 것도 있으며, 동시에 저번 시즌에 마리오 고메즈아르연 로번을 사올 때의 지출이 커서도 있다.

어쨌건 당장 유명한 선수를 영입하기보다는 유망한 선수를 육성하는 것이 바이에른 뮌헨의 방침이다.

로베리 라인은 그야말로 가공한 파괴력을 보였으나 계속해서 수비진이 흔들리고 패배를 거듭하면서 루이 판 할 감독은 시즌 종료와 동시에 계약 해지라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후 '안드리스 욘커'가 임시 감독이 되었고, 시즌 종료 시 1980년대 말에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을 맡았던 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가 다시 감독이 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 그리고 떨어질 줄 알았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도저히 떨어지지 않고 결국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전에서 원정 1차전에서 1:0으로 이겨놓고,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 신나게 전반 내내 밀어붙이다가 2:1로 앞서던 후반 경미한 부상으로 이유로 아르연 로번을 뺐다. 그리고 지친 프랑크 리베리를 빼지 않았다. 그러더니 동점골과 역전골을 허용하면서 2:3으로 역전패,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상 두 번째로 원정에서 이기고, 홈에서 져서 떨어진 팀이 되었다. 교체 미스 및 수비진 붕괴를 두고 판 할 감독은 욕을 바가지로 먹는 중. 결국 올 시즌까지만 감독직을 유지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마무리되었다.

승점 줄타기하듯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한때 3위를 탈환했으나 결국 다시 어이없이 패배하고 4위로 떨어지자, 결국 시즌 끝나고 결별하기로 한 방침을 깨고 바로 경질하였다. 후임은 일단 수석 코치가 감독대행을 하는 것으로. 우승은 사실상 물 건너갔고, 관건은 UEFA 챔피언스 리그 티켓이 걸린 3위 자리를 탈환하는가가 되었다.

팀 부진의 원흉이 판 할이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판 할이 짤리자마자 4월 16일 경기에서 리그 2위 TSV 바이어 04 레버쿠젠 상대로 5:1 완승을 거두었다. 일단 좀 동 떨어졌던 선수들의 기용과 포지션이 안정을 찾았다. 아르연 로번이 복귀하면 다시 벤치로 밀리겠지만 어쨌든 루이 판 할 체제에서는 절대 나올 일 없던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선발로 복귀해 미로슬라프 클로제 - 마리오 고메즈 투톱을 이루고, 제니트 우승 당시 월드 클래스 수미로 추앙받던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드디어 수비형 미드필더로 복귀해 펄펄 날았다. 골키퍼도 토마스 크라프트에서 한스외르크 부트로 주전이 바뀌었다. 결국 UEFA 챔피언스 리그 티켓(정확하게는 플레이오프)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

9.2.1. 극과 극으로 갈리는 평가

루이 판 할 감독 재임 시절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갈리는데, 펠릭스 마가트 시절과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 때의 말로처럼 마지막 시즌에 챔피언스 리그 티켓을 잃을 뻔 했고, 수비진 영입이나 수비 전술 개선에는 전혀 노력하지 않고 아르연 로번과 프랑크 리베리의 파괴력에만 의존했다고 비판하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많은 유스들의 포텐을 터지게 한데다 잉여 자원이 될 뻔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재발견[35], 토털 풋볼의 재조명 등 많은 전술 변화를 시도하며 공격 루트를 개척해 이후 바이에른의 유럽 정상권으로의 성장의 초석을 다졌다는 옹호론도 존재한다.

특히 4- 4-2, 4-1-3-2 위주의 투톱 전형에서 이후의 강력한 중원장악을 바탕으로 한 토털 풋볼과 포제션 풋볼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4-2-3-1 체제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판 할때였고, 이것을 유프 하인케스 감독을 거치면서 수비적인 부분에서의 안정화와 부분 전술의 보완이 이루어졌다. 즉,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볼 배급에서 나오는 물 흐르듯 이어지는 공수 전환에 이은 강력한 양쪽 측면 (윙과 풀백)을 이용한 공격 → 공격진의 받아먹기라는 매커니즘을 확립하며 추후 바이에른 전술의 밑바탕을 깔았던 것이다. 루이 판 할 감독이 훈련할 때 패스 연습을 아주 중요시했는데, 심지어 수비수들에게 수비 연습을 시키지 않고 패스 연습만 시켜서 불만을 샀을 정도다. 하지만 이러한 조치들이 결국은 후에 황금기를 맞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또한 토마스 뮐러, 홀거 바트슈투버, 디에고 콘텐토 등 유스 출신 스타들을 대거 발굴해낸 것도 루이 판 할이었다. 특히 토마스 뮐러의 발견은 향후 바이에른에게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보물을 안겨준 것이나 다름 없는 업적이다. 토마스 크라프트, 브레누 같은 실패 사례도 있기는 하지만 토마스 뮐러와 홀거 바트슈투버의 발굴은 다른 실패 사례들을 커버하고도 남는다.

그러나 공이 있지만 과도 있다. 가장 큰 문제점인 수비 부분을 살펴보자면, 루시우가 떠난 후 다니엘 판 바위턴마르틴 데미첼리스라는 주력이 느린 센터백들을 기용했던 것은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에 큰 문제를 불러왔다.[36] 게다가 이들의 서브조차도 전무한 덕분에 거의 모든 경기를 출장했다는 게 더 신기했지만[37], 일단 2009-10 시즌은 결과론적으로는 더블 우승에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수비진이 구멍을 보이긴 했으나 준우승이라는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어 일단 바로 물갈이는 면했다. 게다가 2009-10 시즌의 마르틴 데미첼리스는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상대 공격수를 깔끔히 지워버리는 등 건재함을 보여줬고, 다니엘 판 바위턴은 2009-10 한 시즌에만 무려 9골이나 기록했을 정도의 뛰어난 세트피스 가담력을 보여주며 바이에른 뮌헨의 주요 득점 자원으로 분류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문제점은 2010-11 시즌에는 한술 더 떠서 3골 먹히면 4골 넣어서 이긴다고 할 정도로 다른 부분에서의 보완은 이뤄졌지만 수비진은 루이스 구스타부의 영입 외에는 전혀 개선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는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10. 하인케스 3기와 트레블의 위업

암흑기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2010-11 시즌 종료 직전,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돌풍을 이끌던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복귀 확정 오피셜이 떴다. 이미 유프 하인케스는 1988년부터 4시즌 동안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며 2회의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한 경험이 있고, 2008-09 시즌 팀이 다시 한번 UEFA 유로파 리그로 떨어질 위기에서 임시 감독으로 부임해 2위로 끌어올린 경험이 있는 명장이며, 바이에른 뮌헨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올리버 칸의 은퇴 후 고질적인 골키퍼 문제를 2010-11 시즌 신들린 선방을 보여주던 마누엘 노이어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유럽 명문 구단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면서 영입하는데에 성공하면서 해결했고, 수비진의 잔혹사도 제롬 보아텡하피냐라는 검증된 자원의 영입으로 해결했다. 2011-12 시즌부터 시작된 바이에른 뮌헨의 부활은 신입생들의 활약도 분명 한몫했다.

10.1.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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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이었던 8월 8일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한 홈 개막전에서 0 - 1로 패했다. 시종일관 두드려대다 뻥 걷어찬 공중볼을 신입생인 제롬 보아텡과 마누엘 노이어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엉키며 한 골을 실점하고 패배한다. 참고로 묀헨글라트바흐가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바이에른을 상대로 승리한 것은 통산 3번도 안된다고 한다.

2라운드에선 추가시간에 터진 루이스 구스타부의 골로 1 - 0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3라운드에선 함부르크 SV를 상대로 5 - 0 완승을 거두며 프리 시즌 리가 토탈컵에서 패한 굴욕을 되갚았다.

그리고 2011-1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조 편성 추첨에선 맨체스터 시티 FC비야레알 CF, SSC 나폴리와 맞붙게 되었다. 죽음의 조라며 말이 많았으나[38] 1~2차전에서 비야레알과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각각 2 - 0 의 완승을 거두며 4득점 0실점이라는 압도적인 기록을 보여주었다.

리그에서는 더욱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개막전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전을 제외하면 11경기 무실점 행진을 이어나갔으며, 21득점 1실점이라는 굉장한 성적을 내고 있다. 마누엘 노이어는 무려 1000분 넘는 무실점 기록을 기록했다. 프랑크 리베리, 아르옌 로벤,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마리오 고메즈 등이 모두 미친 듯이 날아다니며 득점했다. 수비진에서는 홀거 바트슈투버와 새로 영입한 제롬 보아텡, 필립 람, 마누엘 노이어 등이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나폴리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 3번째 경기에서 결국 홀거 바트슈투버의 자책골을 먹으며 시즌 통틀어 2번째 실점을 당했다.

바로 다음 경기인 하노버와의 경기에서는 PK로 한 골을 먹고 퇴장까지 당한 상태에서 슛이 몇 번이나 골대를 막고 나오거나 골키퍼나 수비수의 선방에 막히는 등 10:11 상태에서도 대등한 경기를 하다 쐐기골을 먹고 2대1로 패배했다.[39] 다비드 알라바가 만회골까진 성공했지만 역전을 하지는 못했다.

전반기가 끝날 때 즈음에는 어느새 부활해서 돌아온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맹추격을 받았지만 승점 3점을 앞선 상태에서 전반기를 끝냈다.

다득점 1위 최소실점 1위로 다득점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 10점을 앞선 상태였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에서 4위로 탈락하며 유로파 리그마저 출전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에 UEFA 챔피언스 리그를 병행하는 바이에른이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맹추격을 받을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결국 시즌 후반기 첫 라운드에 패배를 당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 또 다시 패배하며 이것이 현실화 되었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후반기 초반에 급 상승세를 이어간데 반해 바이에른 뮌헨은 삐끄덕거리며 UEFA 챔피언스 리그가 다시 시작하기 한참 전인 2월 5일에 함부르크 원정에서 1:1 무승부에 그치며 선두 자리를 내주어버렸다. 도르트문트가 연승을 달릴 때 뮌헨은 22라운드 프라이부르크 원정에서 0:0 무승부. 24라운드 레버쿠젠 원정에서 0:2로 패하며 도르트문트와 승점이 7점 차로 벌어져 도르트문트가 남은 10경기를 삽질하지 않는한 리그 우승도 힘든 상태까지 갔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여러 경기를 비기는 덕분에 28차전까지 승점 3점차로 크게 좁혀졌다. 골 득실에서 앞서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면 리그 1위로 올라설 수 있었으나 0 - 1로 패하면서 6점차가 되었고 31차전 마인츠와의 안방 경기를 득점없이 비기면서 8점으로 벌어져서 리그 우승이 사실상 좌절되었다. 남은 3경기를 죄다 이기고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3경기에서 도르트문트가 3경기 다 지던가 1무 2패를 거두면 극적인 역전 우승이 가능하지만 강등된 카이저슬라우테른과 느긋한 경기를 남겨둔 도르트문트가 이제 1승만 거두면 상태였기 때문에 사실상 리가 경쟁은 끝난 상태였다. 그리고 결국 분데스리가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승하면서 2위로 마치게 되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1차전 FC 바젤 원정경기에선 0 - 1로 패배했다. 이 시기 여기저기 이길 경기인데 지거나 비기거나 하며 삐그덕거렸지만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전 바로 전 리그 경기인 호펜하임전에서 양 측면만 냅다 파는 전술을 중앙도 적극 활용하는 전술로 일신하며 7 - 0 대승을 거두었고, 2차전 안방 경기에선 바젤을 7 - 0으로 꺾으며[40] 8강에 진출했다.

8강 추첨 결과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가 뽑혔는데 1차전 원정경기에서 2 - 0 승리를 거둬서 4강 행에 청신호가 들어왔다. 경고가 한 장 붙어있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도 카드 세탁에 성공했다. 이어진 2차전 홈에서도 이비카 올리치의 멀티골에 힘입어 2 - 0 으로 이겨 4강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4강 상대는 유럽 대항전 최대의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 CF와의 일전이었다. 1차전 홈경기에서 프랑크 리베리의 강력한 슈팅으로 선제골을 넣었으나 후반 초반 메수트 외질의 동점골로 1 - 1, 그 후 홈에서 승리를 따내려는 바이에른의 엄청난 파상공세를 마드리드가 어떻게든 틀어막는 양상으로 흘러갔고, 경기 막판 필립 람파비우 코엔트랑을 제치고 크로스를 올렸고 마리오 고메스가 극적인 결승골로 연결하며 2 - 1로 승리했다.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홈에서 극강[41]인 모습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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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킥을 막아내는 마누엘 노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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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에서 승리한 뒤 환호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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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엘 노이어, 홈에서의 결승행을 이끌다![42]

그리고 이케르 카시야스마누엘 노이어의 선방 대결이었던 2차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무리뉴가 이끄는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결승에 진출하면서 2010년 결승에서 주제 무리뉴가 이끌던 인테르에게 패하여 우승이 좌절된 설욕을 했다.[43] 합계 점수 3 - 3 동률인 상황에서 돌입한 승부차기에서 마누엘 노이어가 레알 마드리드의 두 발롱도르 수상자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카카의 킥을 연달아 막아버리며 분위기를 올렸고, 이케르 카시야스 역시 토니 크로스필립 람의 슛을 쳐내며 과연 그의 클래스가 어느정도인지 보여줬으나 세르히오 라모스가 힘 조절에 실패하여 공을 골대 위로 크게 날려버리며 을 날리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분위기는 차갑게 식었고, 5번 키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침착하게 성공시키며 결승행을 확정지었다! 이 승부차기로 마누엘 노이어는 자신의 이름을 전 세계 축구 팬들에게 각인시켰다.

한편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개최되기 일주일 전에 치러진 2012년 5월 12일 DFB-포칼 결승에서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2 - 5로 대패하며 준우승에 그쳐야했다. 리가에 이어 포칼마저도 준우승. 적어도 빅 이어를 들어올려야 팬들을 만족시킬 수 있었다.

바이언의 안방 푸스발 아레나 뮌헨에서 열린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상대는 FC 바르셀로나를 극적으로 따돌리고 올라온 첼시 FC. 이 경기에서 바이에른 뮌헨은 30개가 넘는 슈팅을 퍼부으며 그야말로 경기를 압도했으나 마지막 결정력이 2% 부족했던데다 페트르 체흐의 선방쇼까지 겹치며 계속해서 득점을 올리지 못했다. 그리고 83분, 토니 크로스의 크로스를 토마스 뮐러가 원 바운드 헤딩으로 연결해 선제골을 넣으며 우승이 눈앞에 다가온듯 했다. 그러나 5분 뒤 첼시에게 내 준 첫 번째 코너킥에서 디디에 드록바에게 동점골을 허용하며 경기는 연장전으로 갔다. 연장에서 프랑크 리베리가 만들어낸 페널티 킥을 만들어내어 마침내 우승하나 했지만... 아르연 로번이 실축했다.[44] 결국 승부차기로 돌입했고, 바이에른 뮌헨의 필립 람, 마리오 고메즈, 마누엘 노이어(?)가 성공한 반면, 첼시는 1번 키커 후안 마타의 킥이 마누엘 노이어에게 막혔기에 양 팀의 3번 키커가 모두 찬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이 3 - 2 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비차 올리치가 실축하고 애쉴리 콜이 성공시키며 다시 원점으로 돌렸고, 5번 키커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실축하며... 경기장은 고요해졌다. 결국 드록바가 마지막 승부차기를 성공하며 바이에른 뮌헨은 홈에서 주어진 절호의 우승 찬스를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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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부차기에서 패배한 이후 좌절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45]

이렇게 한 시즌에만 준우승을 3번하며 트리플 러너업에 등극하고 말았다. 이보다 10년전에는 바이어 04 레버쿠젠이 트리플 러너업을 한 적이 있다. 그로 인해 이 날 백업 골키퍼였던 한스 외르크 부트는 두차례 트리플 러너업을 경험한 선수가 되었다. 그리고 마리오 고메즈는 소속팀 트리플 러너업에다가 분데스리가와 DFB - 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 득점 2위로 한 시즌에 2위를 무려 6번이나 경험해야 했다. 게다가 시즌이 끝나고 펼쳐진 UEFA 유로 2012에서 독일이 4강에서 탈락해서 유로 준우승이 날라갔지만 페르난도 토레스가 결승전에서 1골 1도움을 하여 유로 2012에서까지 득점 2위가 되어 버렸다. 한 마디로 마리오 고메즈는 2012년에 무려 7번의 2위를 경험했다.

그리고 뮌헨은 이번 시즌의 아픔을 바탕으로 재도약하는데...

10.2.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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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시즌을 앞두고 바이에른은 여러 선수들을 정리했다. 그동안 꾸준히 활약해준 이비차 올리치를 자유 계약으로 떠나 보냈고, 한스 외르그 부트는 은퇴했다. 우사미 타카시와 브레누는 계약 만료로 결별했다.

그리고 유로 2012의 스타인 크로아티아의 마리오 만주키치와 묀헨글라트바흐 돌풍의 일원인 센터백 단테를 영입했다. 또한 지난 시즌 이미 영입을 확정 지었던 세르단 샤키리가 합류했고 과거 바이에른 선수였던 클라우디오 피사로, 그밖에 90년생 이하의 여러 유망주를 영입했다. 이렇게 해서 팀의 1990년생 이하만 토니 크로스를 포함해 6명이 되었다.

시즌 개막전에 마리오 고메즈의 발목 부상이 발견되어 수술에 들어갔다. 꽤나 긴 기간을 결장하게 되어 팬들은 놀랐지만, 백업 역할로 마리오 만주키치를 영입했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어 보였다. 이 때만 하더라도 그 누구도 마리오 고메즈가 마리오 만주키치에게 완전히 주전 자리를 내줄것이라는 것은 꿈에도 꾸지 못했다.

시즌 개막전 펼쳐진 DFL-슈퍼컵[46] 에서 있었던 데어 클라시커 더비에서 부상으로 결장하는 마리오 고메즈 대신 마리오 만주키치가 출전했는데, 1득점 1도움의 훌륭한 활약을 보이며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뤘다. 더군다나 이 경기는 세르단 샤키리, 단테 등 신입생들이 많이 출전한 경기였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시즌 대패를 면치 못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2 - 1로 승리했기 때문에 팬들의 기대감은 상당히 고조되었다.

그리고 분데스리가 개막. 1라운드는 비교적 손쉬운 승격팀인 퓌르트와의 경기. 예상대로 토마스 뮐러 - 마리오 만주키치 - 아르옌 로벤의 연속 골로 3-0으로 완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여름 이적 시장 내내 이슈를 들여왔던 이적이 끝을 맺었다. 이적 시장이 종료되기 이틀 전인 8월 29일, 하비 마르티네스의 영입이 발표되었다. 이적료는 4000만 유로[47]로, 바이에른 뮌헨 최고 이적료와 더불어 분데스리가 최고 이적료이다. 세르단 샤키리, 단테, 마리오 만주키치, 클라우디오 피사로에 하비 마르티네스까지 저번 시즌에 분노한 바이에른 뮌헨이 오랜만에 분노의 영입을 진행했다. 하비 마르티네스가 영입됨으로 인해서 부상 때문에 불안 불안하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걱정도 덜게 되었고 센터백도 볼수 있는 자원이기에[48] 제롬 보아텡의 기복있는 수비 역시 걱정 없게 되었다. 한 선수의 여러 가지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2012-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조 추첨식에서는 발렌시아 CF, 릴 OSC, 벨라루스의 바테 보리소프와 한 조가 되었다.

2라운드,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경기였다. 어렵지 않게 승리를 예측한 경기였으나 초반에 슈투트가르트 쪽에서 먼저 멋진 발리슛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 골은 바이에른의 부활을 알리는 축포가 되었으니... 그 뒤 바로 이어진 토마스 뮐러의 자기가 찬 공 다시 차 넣는(...) 골로 1-1, 1분 후 토니 크로스의 중거리 슛으로 2-1, 그 뒤 중원에서 누비던 루이스 구스타부가 자신의 인생 골로 기록될만한 중거리 감아차기로 3-1 을 만들었다. 후반에는 토마스 뮐러의 공을 마리오 만주키치가 받고 이어서 4-1, 골키퍼 손 맞고 뜬 공을 토마스 뮐러가 헤딩으로 밀어넣어 5-1 을 만들었고, 토마스 뮐러의 크로스를 받아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헤딩으로 연결해 최종 스코어 6-1을 기록하며 화려한 역전 승리를 거두었다. 특히 이 경기는 하비 마르티네스의 출전 여부에 상당히 관심이 주목되던 경기였는데, 후반 76분에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대신 교체 투입되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리 뛰어난 활약은 없었다. 토마스 뮐러와 마리오 만주키치는 3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으며 토마스 뮐러는 3골과 3어시스트를 달리며 분데스리가 득점 순위와 도움 순위에서 모두 1위를 달렸다.

3라운드는 마인츠전. 선수 모두가 지난 시즌과는 달리 향상된 경기력을 뽐냈고 2분만에 토마스 뮐러의 땅볼 크로스를 마리오 만주키치가 받아먹어 선제골을 기록했다. 마리오 만주키치는 슈퍼컵을 포함해 4경기 연속골을 달성하는 위엄을 세웠다. 그 후 홀거 바트슈투버의 왼발 크로스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가 헤딩으로 꽂아 넣어 추가골을 기록했으나, 후반 15분경 단테의 백 태클로 페널티킥이 선언되어 만회 골을 허락했다. 경기가 끝나갈때 쯤 세르단 샤키리 대신 하비 마르티네스가 출전했고 마리오 만주키치 대신 클라우디오 피사로가 출전했다. 허나 클라우디오 피사로는 많은 골 찬스를 날렸다. 결국 경기 끝나기 직전 하비 마르티네스의 크로스를 받은 토니 크로스가 환상적인 논스톱 슈팅으로 연결시키면서 한 골을 추가하여 3 - 1로 승리하였다. 하비 마르티네스는 첫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였다.

리그 경기가 끝나고 UEFA 챔피언스 리그가 개막하였는데 같은 조의 강력한 2위 후보라고 여겨지고 있는 발렌시아와 경기를 하게 되었다. 리그에서 푹 쉬었던 아르옌 로벤과 프랑크 리베리가 투입되었고 루이스 구스타부 대신 하비 마르티네스가 선발 출장했다. 언제나처럼 노련하게 경기를 진행하다가 프랑크 리베리 - 아르옌 로벤 -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로 이어지는 멋진 패스 플레이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첫 골이 터졌다. 후반전에도 역시 65 : 35의 점유율을 가져가며 홀거 바트슈투버의 패스를 받은 토니 크로스가 추가골을 넣으며 압승을 예고했으나, 세트피스 상황에서 터진 발데스의 헤딩골로 실점을 하고 말았다. 지난 시즌부터 여러번 지적되는 마누엘 노이어의 세트피스 상황의 취약함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49] 경기 끝나기 전 경기 내내 불안 불안한 플레이를 보이던 클라우디오 피사로 대신 투입된 마리오 만주키치가 로벤이 얻어낸 페널티킥을 찼으나 실축했고, 최종 점수 2-1로 승리했다. 경기력에서 앞선 경기에 비해 뭔가 찜찜한 결과였다.

4라운드 FC 샬케 04 원정경기. 지난 시즌 전반기에는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함께 3파전을 이루던 샬케이기도 하고 이브라힘 아펠라이를 비롯해 네덜란드의 거물급 선수들이 포진된 샬케이기에 많은 관심을 받았다. 포지션을 보자면 프랑크 리베리가 빠지고 토마스 뮐러가 선발로 들어왔다. 앞선 경기에서 큰 활약을 보인 마리오 만주키치가 이번에는 그닥 활약을 하지 못했고, 전반전에는 양 팀이 지극히 수비적인 운영을 보였다. 그러나 후반 10분, 토마스 뮐러의 센스 있는 스루 패스가 토니 크로스에게 이어져 능숙하게 바이에른이 첫 골을 뽑아냈다. 그 후 3분 후 토마스 뮐러가 환상적인 드리블 이후 골을 터트렸다. 프랑크 리베리의 빈 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경기 내용이었다. 그리고 후반 25분에 다소 부진한 마리오 만주키치 대신 하비 마르티네스가 들어가 토마스 뮐러가 원톱에 서고, 아르옌 로벤 - 하비 마르티네스 - 토니 크로스의 포메이션을 구축했다. 아틀레틱 빌바오에서도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는 소화해본적이 그닥 해본적이 없기에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스트라이커 바로 뒤의 뛰어난 수비력(...)을 뽐냈다. 그 후 지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대신 아나톨리 티모슈크가 들어가며 경기 굳히기에 나섰고 클라스 얀 훈텔라르 등 선수들이 맹공격에 나섰지만 득점을 내지 못하고 2 - 0으로 종료되었다.. 토니 크로스는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 포함 4경기 연속골 (분데스리가 3골, UEFA 챔피언스 리그 1골)을 달리고 있고, 토마스 뮐러는 현재 4경기 4골로 마리오 만주키치를 제치고 단독 득점 선두에 올라섰다.

그리고 경악스러운 10월 3일 UEFA 챔피언스 리그 2차전 바테 보리소프 원정 경기, 아무리 원정이지만 조 최약체로 평가되었던 바테에게 1-3으로 완패당했다! 바이에른은 마리오 만주키치, 프랑크 리베리, 토마스 뮐러, 토니 크로스, 하비 마르티네스, 단테, 필립 람 같은 핵심 선수들이 모두 선발 출격, 볼 소유권도 지배했다. 그러나 바테의 고르부노프 골키퍼의 선방을 넘지 못했으며 3골을 실점하는 굴욕 속에 추가 시간에서야 리베리가 1골을 만회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릴 OSC 원정에서 3-1 대승을 이끌 때 이변이라고 여기던 바테가 바이에른도 잡을 줄은 누가 예상했을까. 참고로 바테는 이전 챔피언스 리그에서 무승을 달리던 팀이었고 릴을 이긴 게 역사상 첫 UEFA 챔피언스 리그 승리였던 팀이다.

이런 패배에 대한 설욕인지 8전 전승을 달렸으나 9차전 바이엘 레버쿠젠과의 안방경기에서 운도 지지리도 없는 경기끝에[50] 1-2로 패하며 시즌 첫 분데스리가 패배를 당했다. 그래도 10차전 쉽지않은 함부르크 원정에서 3-0으로 이기면서 승점 27점으로 계속해서 리가 1위 자리를 지켰다. 2위인 프랑크푸르트와 승점차는 7점을 유지했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 리그 4차전 릴과의 안방경기에서 필립 람의 3개 도움에 힘입어 6-1로 크게 이기면서 3승 1패로 역시 1위로 올라섰다.

11월 20일에 있었던 발렌시아 (3승 1패) 원정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거뒀으며, 12월 5일 안방 경기에서 바테 보리소프에 4-1로 승리를 거두면서 1위로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 16강전 상대는 바로 아스날 FC.

11월 24일 13차전 하노버 96과의 홈경기에서 5-0 대승을 거뒀다. 13라운드까지 기준으로 11승 1무 1패 승점 34 점에 38득점과 5실점으로 득실이 +33이라는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다. 2위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는 승점 9점 차이를 유지했다.

이후에 2승 2무를 보태며 전반기까지 13승 3무 1패 44득점 7실점이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2013년 2월 17일에는 분데스리가 2위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승점차는 15점으로 벌어졌다. 22경기 18승 3무 1패, 분데스리가에서 당당히 승점 100점을 향해 나아갔다.[51] 게다가 11월 24일부터 2월 17일까지 약 석 달동안의 리그경기 10경기에서 겨우 2실점, 5경기 연속 무실점을 달성했다. 뿐만아니라 리그 25경기에서 10실점, 특히 원정 경기 10경기에 1실점을 기록중이다.

사실상 리가 우승을 확정 지었다. 26차전까지 치룬 2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승점 차가 무려 17점이라서 바이에른 뮌헨이 연패를 하지 않는한 역전은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25차전까지 겨우 1패 (21승 3무) 인 바이에른 뮌헨이 그럴 일은 없어 보였고, 실제로도 그런 일은 없었다.

2013년 2월 20일 아스날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1차전에서 아스날을 3-1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런 표현이 이상하지 않은 것이 이 경기는 아스날의 홈인 아스날 스타디움에서 벌어졌다. 전반에 토니 크로스의 환상적인 발리 슛과 토마스 뮐러의 코너킥 상황에서의 골로 일찌감치 앞서나갔으며 아스날은 슈팅 2개밖에 때리지 못할 정도로 부진했다. 그나마 후반에는 정신적으로 무장한 아스날이 맹공을 퍼붓고 바이에른 뮌헨이 조금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며 루카스 포돌스키에게 만회골을 먹혔지만 이 날 월드클래스 풀백의 모습을 보여준 필립 람의 크로스를 받은 마리오 만주키치의 원더골[52]로 3-1로 다시 차이를 벌리고 그대로 경기 종료. 후반전에 잠시 밀린 것은 아쉬웠지만 전체적으로 분데스리가 1위다운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프랑크 리베리, 제롬 보아텡,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결장이 컸는지 2차전에선 홈에서 0-2로 패했지만 원정 다득점 규칙으로 8강에 진출하는데는 성공했다. 그리고 8강전 상대는 유벤투스.

DFB-포칼 8강에서 성사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데어 클라시커 더비 전인 전 경기 16강에서 구자철과의 충돌로 퇴장 징계를 받은 팀의 핵심 프랑크 리베리가 결장했음에도 시종일관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몰아붙이며 아르옌 로번의 결승골로 승리한다.

4강에서 만난 VfL 볼프스부르크도 인정사정없는 경기력으로 6-1로 대파했다. 더욱이 이 경기에서는 후반 교체해 들어온 마리오 고메즈단 6분만에 해트트릭을 달성하는 진기한 기록도 나왔다. 결국 DFB-포칼은 1라운드부터 4강까지 15득점 1실점, 전승으로 결승진출에 성공했다.

3월 30일 리가 홈경기에서 함부르크 SV9-2라는 스코어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4월 6일, 프랑크푸르트 원정에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환상적인 백힐슛이 결승골로 이어지면서 1-0 승리로 우승을 확정지었다! 28라운드만에 확정지은 우승으로, 이는 역대 분데스리가 최단기간 우승기록이다.

그리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홈에서 2-0, 원정에서 2-0으로 종합 스코어 4-0 완승을 거두며, 2년 연속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했다. 클라우디오 마르키시오 - 아르투로 비달 - 안드레아 피를로의 MVP 편대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건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 - 하비 마르티네즈의 중원에서의 콤비도 역할이 컸지만, 홈 / 원정 모두 마리오 만주키치가 엄청난 활동량으로 수비 가담까지 담당하며 안드레아 피를로를 완전히 묶음으로 인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야말로 최전방 수비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는 2차전 토리노 원정에서 2어시스트를 기록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그리고 추첨으로 4강에서 만난 상대는 끝판왕 FC 바르셀로나. 전 세계 축구 팬들로부터 엄청난 관심을 모았다. 4월 22일,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핵심 선수이자 독일 최고의 유망주인 마리오 괴체의 영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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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는 없다. 합계 점수에서 무려 6-0으로 앞섰는데도 계속 공격을 하며 결국 7-0을 만든 토마스 뮐러의 추가골에 기뻐하는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

4월 23일, 홈에서 벌어진 4강 1차전에서 4-0이라는 큰 스코어차를 기록하며 FC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그야말로 압승을 거두었다. 4년전 2008-09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1차전 원정에서 당했던 0-4 대패를 완벽히 설욕하는 경기이다. 심판의 판정에 약간의 논란이 있었지만[53], 그러한 논란이 나오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내용상 압도적으로 FC 바르셀로나를 찍어눌렀다. 바르셀로나가 4골차로 참패한 경기는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였다는 팬들의 반응은 이 경기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2차전이 남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럽 축구의 패권이 넘어가는 상징적인 경기라는 평까지 나왔다. 근 5년간 FC 바르셀로나의 포스가 어느정도였는지, 그리고 현재 바이에른 뮌헨의 포스가 어느정도인지를 나타내는 평을 받았다. 다만 이것이 FC 바르셀로나가 단순히 최강자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일 뿐인지, 바이에른 뮌헨이 정말로 유럽 축구의 패권을 거머쥐는 것인지는 향후 몇 년을 지켜봐야 할 것이다. 특히 2013-14 시즌에서 바이에른이 과연 UEFA 챔피언스 리그 개편 이후 최초의 2연패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인지에 많은 관심이 모이고 있다.[54]

5월 2일 벌어진 캄 노우 원정 경기에서도 3-0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합산 스코어 7-0으로, 믿기지 않는 수준의 스코어였다.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아르옌 로벤이 환상적인 왼발 슈팅으로 선제 골을 넣었다. FC 바르셀로나는 5골이나 넣어야 하는 상황임에도 바이에른 뮌헨의 안정적인 수비 라인 때문에 결정적 기회를 만들어 내지를 못했고, 되레 헤라르드 피케가 자책골을 넣었다.[55] 1차전과 2차전 모두 승리를 확신할 수 있는 상황이라 적당히 뛰어도 될 법했지만, 경기가 완전히 기운 마당에도 한 골을 더 추가하려고 바이에른 선수들은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고, 결국 토마스 뮐러가 또 다시 한 골을 추가하면서 바이에른 뮌헨의 자비심 없는 모습을 전 세계 시청자들에게 각인시켰다. 세계 축구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4강전이었다.

이로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영국 축구의 심장부인 웸블리 스타디움에서의 데어 클라시커 더비로 치러지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우승한지 12년된 UEFA 챔피언스 리그의 정상을 차지할 수 있을지, 또한 2010년에 아쉽게 실패한 트레블을 이번에야 말로 달성할 수 있을지 팬들은 기대를 모았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2주 전에 있었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의 전초전이었던 분데스리가 32라운드 경기는 1-1 무승부로 끝났다. 하지만 후반전 경기가 굉장히 과열된 상황에서 하피냐가 퇴장 당할 때 양 팀이 몸 싸움 직전까지 갔으며, 위르겐 클롭마티아스 자머 바이에른 뮌헨 단장 사이에 설전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공교롭게도 마티아스 자머 단장은 1990년대 중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전성기를 이끌고 감독으로써도 분데스리가 우승을 이끌었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역사상 최고의 레전드이다.

33라운드, 시즌 마지막 홈경기였던 FC 아우크스부르크전 홈경기에서 3-0 낙승을 거두며 홈 팬들과 바이에른 뮌헨의 23인의 레전드들의 축하 속에서[56] 마이스터 샬레를 들어올렸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2시즌 연속 빼앗겼던 분데스리가 타이틀을 3년만에 되찾아오는데 성공한 것이다.

분데스리가 시즌 마지막 경기인 34라운드, 그 까다롭다는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원정에서는 전반 11분만에 3골을 내준 상황에서도 프랑크 리베리의 환상적인 논스톱 발리슛을 포함한 2골 1도움 맹활약을 앞세워 4-3으로 끝끝내 역전해버렸다. 이로써 승점 90점 돌파, 91점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세우며 분데스리가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5월 26일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열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개최되었다. 중세 전쟁을 형상화한 거대한 스케일의 오프닝을 시작으로 킥 오프 휘슬이 울렸고, 전반전은 득점은 없었으나 양 팀 골키퍼 스페셜이라 할만큼 슈퍼 세이브가 많이 나왔다. 오히려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우세를 점하여 바이에른을 상대로 엄청난 전방 압박을 통해서 경기를 자신들의 스타일로 끌고 나갔다. 그러나 후반이 되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선수들의 체력이 떨어지고, 컨디션이 올라온 바이에른 뮌헨이 공세를 시작했다. 후반 14분, 마리오 만주키치가 페널티 지역 오른쪽을 돌파한 아르옌 로벤이 골문 앞으로 올린 땅볼 크로스를 왼발로 차 넣으며 선제골을 기록했다. 그러나 후반 22분, 단테가 마르코 로이스에게 페널티 박스 안에서 반칙을 하며 페널티 킥을 내주었고, 일카이 귄도간이 이를 성공시키면서 경기는 동점이 된다. 그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파상공세를 이어 갔으나 로만 바이덴펠러의 환상적인 선방이 이어졌고, 또 네벤 수보티치의 역사에 남을만한 세이브# 를 기록하며 계속해서 찬스가 무산되었다. 하지만 후반 43분, 제롬 보아텡이 전방으로 넣어준 공을 프랑크 리베리가 힐 패스로 연결했고, 아르옌 로벤이 수비수 사이를 단숨에 돌파하며 센스 있는 슈팅으로 극적인 결승 골을 터트렸다. 결국 바이에른 뮌헨이 2-1 승리를 거두며 12년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통산 5회 우승이었다. 당시 기준 레알 마드리드 (9회)와 AC 밀란 (7회)에 이어 우승 횟수 세 번째로 올라섰으며, 오랜 숙원을 이루어 낸 선수들은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았던 설움이 북받쳐오른듯 그라운드에 주저앉아 기쁨의 눈물을 쏟았다. 특히 저번 시즌 트리플 러너업을 경험했던 선수들은 더욱 벅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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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 HEUTE IST WIEDER EIN GUTER TAG(그리고, 다시 한 번 좋은 날!)[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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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골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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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만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그리고 6월 2일,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에서 있었던 VfB 슈투트가르트와의 DFB-포칼 결승전에서 후반 20분이 넘기도전에 3-0으로 멀찌감찌 달아나며 거의 우승했다 싶을 찰나에 마틴 하르닉의 투혼의 두 골로 3-2까지 추격했으나 남은 시간동안 노련하게 잘 막아내며 우승에 성공, 셀틱 FC, AFC 아약스, PSV 아인트호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바르셀로나, 인터 밀란에 이어 7번째로 트레블을 달성했다!

유프 하인케스가 몇 년 전부터 계속해서 은퇴하려는 의사를 밝혔기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은 2012-13 시즌 중반 이미 펩 과르디올라와의 계약을 발표한 바 있다. 유프 하인케스 감독은 2012-13 시즌을 마지막으로 연세와 건강상의 이유로 은퇴했다.[58]

2012-13 시즌 바이에른 뮌헨이 달성한 기록들

분데스리가
  • 최다 승 (29승)
  • 최다 승점 (91점)
  • 최소 패 (1패)[59]
  • 개막전 이후 최다 연승 (8연승)
  • 최다 원정승 (15승)
  • 최다 원정승점 (47점)
  • 최소 원정패 (0패)
  • 최소 실점 (18실점)
  • 최다 득실차 (+80)
  • 최다 승점차 우승 (25점)
  • 최단기간 우승 (28 라운드에서 우승 확정)
  • 최단기간 전반기 마이스터 (14 라운드)

컵 대회 (DFB - 포칼, UEFA 챔피언스 리그)
전체 시즌을 통틀어 54경기에서 단 3패, 득점은 무려 153골을 기록했다.[61] 실점은 불과 31실점.

2013년 UEFA 슈퍼컵FIFA 클럽 월드컵마저 우승하며 5관왕을 달성했다.

11. 펩 과르디올라 시대 (2013~2016)

FC 바르셀로나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과르디올라가 유프 하인케스의 후임으로 부임했고, 과르디올라의 스타일이 바이에른에 씌어지기 시작했다. 템포가 빠르고 짧은 패스 위주의 경기로 바뀌었고, 포백라인은 하인케스 시대보다 더더욱 높아졌다.

지난 시즌 하비 마르티네즈에게 주전경쟁에서 밀렸던 루이스 구스타보가 2014 월드컵에서의 주전자리를 위해 VfL 볼프스부르크로 이적했고, 마리오 고메즈 역시 같은 이유로 피오렌티나로 떠났다. 주요 영입으로는 차비 에르난데스의 후계자로 여겨졌던, 과르디올라의 수제자 티아고 알칸타라가 영입되었고,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플레이메이커 마리오 괴체를 무려 바이아웃을 지르고 샀다.

과르디올라의 3년 뮌헨 시절을 종합하자면, 양학은 잘했는데 강팀과의 경기에서 경기력이 기복이 굉장히 심했다.[62] 포백 라인이 매우 높고 점유율을 높이 가져가다보니 이길 때는 엄청나게 대승을 거두고, 패할때는 똑같은 패턴(박스주변에서 볼돌리다가 뺏김 → 순식간에 역습 → 실점)으로 처참히 무너졌다. 무엇보다도 역습에 특화되어있는 팀들을 만나면 이 단점이 극한으로 발휘되었는데, 13/14 시즌에는 레알 마드리드에게 합계 5대0으로 패한 것도 앞에 말한 패턴 그대로 발렸으며,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홈에서 3대0 대패라던가, 그 다음 시즌 케빈 더브라위너의 볼프스부르크에게 4대1 패배, 그리고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4강에서 원정다득점으로 패했을때도 그리즈만의 역습골 한방에 무너졌다.

특히 첫 시즌이었던 13/14 시즌은 그야말로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했던 시즌이었는데, 마치 14/15 시즌의 레알 마드리드마냥 3월까지는 지구를 집어삼킬 기세로 연승기록, 무패기록, 최단기간 우승 확정 등 기록이란 기록은 다 갈아치우며 심심하면 6골 7골을 퍼부어대며 화력쇼를 보여줬는데, 챔스 8강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원정에서 답답한 경기 끝에 1대1 무승부를 기록하더니 4강 레알 마드리드전에서는 팬들을 모두 암걸리게 만드는, 점유율만 높지 역습에 말그대로 초토화되며 5대0으로 참패했다. 특히 홈에서의 4대0 패배는 길이길이 남을 치욕으로 기록되며 팬들에게 과르디올라가 스페인에서 온 첩자라는 소리까지 들을 정도였다. 리그에서는 27라운드에, 무려 3월에 리그 우승을 확정하며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줬고, 챔스에서도 맨시티, 아스날, 맨유 같은 웬만한 강팀들은 그야말로 경기력에서 압도를 해버렸다. 물론 위에 언급되었듯 역습 잘하는 팀 만나면 처발렸다는게 문제였지(...).

14/15 시즌은 수비 라인에 대한 비난을 하도 많이 들었다보니 어느정도 미친듯이 볼만 돌리는 축구가 아니라 회춘한 아르연 로번과 뮐러-레반도프스키 조합을 이용해 수많은 공격루트를 창조했는데, 문제는 후반기에 엄청난 부상 악령이 강림하며 그 두껍다는 바이에른 뮌헨의 스쿼드가 반토막이 나버렸다. 그 상태로 M-S-N 라인이 결성된 FC 바르셀로나에게 힘도 못쓰고 3대0으로 발렸다. 홈에서 그나마 3대2 승리를 거두며 체면치레 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DFB-포칼에서는 레전설로 남을 4연뻥 사건으로 라이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4강에서 발목잡히고 말았다.

15/16 시즌은 위의 단점들을 하나씩 보완해가며 완전체 팀이 탄생하나 싶었는데, 끝끝내 부상과 역습에 발목잡히고 말았다. 레반도프스키 - 토마스 뮐러 듀오는 둘 다 오프더볼에 강점이 있었으나 대신 루트가 비슷해서 지난 시즌 동선이 워낙 겹쳤는데, 15/16 시즌 들어서는 뮐러가 중앙까지 내려오며 역할분담이 되어 엄청난 화력 시너지를 보여줬으며, 레반도프스키 42골, 뮐러가 30골을 넣는 화력쇼를 보여줬다. 여기에 큰 경기에서 빛을 발하는 프랑크 리베리의 활약도 여전했고, 후반기 들어 바이에른 중원의 구원자가 된 아르투로 비달, 추후 독일과 뮌헨의 미래로 떠오른 요주아 키미히의 등장, 최고의 기동력으로 경기 템포를 확 바꾼 더글라스 코스타킹슬리 코망의 영입 등, 약점이 없는 팀이었다. 그러나 후반기 들어서 센터백이란 센터백이 모조리 부상당해버리며 풀백인 데이빗 알라바요주아 키미히가 평균신장 178cm로 센터백을 꾸려야하는 어려움이 생겼으나 꾸역꾸역 극복해내며 리그 우승 확정, 포칼 우승, 그리고 챔스에서도 유벤투스에 대역전승을 거두고 SL 벤피카까지 꺾으며 또 다시 4강에 진출하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원정다득점 우선 원칙으로 또 다시 통한의 4강 탈락을 거둔다. 3년 연속 스페인 3강 클럽들에게 차례로 패하며 향후 오랜 기간 타팀 팬들에게 놀림거리가 될 떡밥을 엄청나게 던진 채로 과르디올라 시대는 막을 내렸다.

과르디올라를 옹호하는 측에서는 보통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한다.
  • 유프 하인케스의 트레블로 바이언 팬들의 눈높이가 너무 높아져있다. 챔스 우승이나 트레블 직후 동기부여가 떨어지며 급격하게 몰락하는 팀들의 사례는 매우 흔하다. 과르디올라는 트레블 직후의 팀을 이어받아 그 부담감을 이겨내고 뮌헨을 레바뮌의 한 축으로 유지시켰다.
  • 과르디올라 아래에서 급성장을 거둔 선수들이 많다. 틈만 나면 정줄 놓던 제롬 보아텡은 과르디올라 시대를 거치며 세계 최정상급 센터백이 되었고, 데이비드 알라바는 유럽 많은 빅클럽들이 탐내는 멀티 플레이어가 되었으며, 토마스 뮐러는 마의 13골의 장벽을 넘어 커리어 하이를 기록했다. 필립 람은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WK 판정을 받을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둔 포변이었다. 이기적인 성향으로 방출이 예상되었던 아르연 로번도 회춘하여 전성기가 몇년이나 더 연장되었다. 그 외에도 선수단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은 매우 많다.
  • 양학은 일단 매우 확실히 잘했다. 뮌헨의 뜬금패 본능이 과르디올라 시절 만큼은 매우 드물어졌다. 리그 4연속 우승 기록도 70년대 뮌헨과 묀헨글라트바흐, 2000년대 초 뮌헨의 3연속 우승 이후 누구도 이루지 못한 기록이다. 그만큼 리그만큼은 확실하게 제패했고, 한수 아래 클럽들에게 압도적인 실력차를 과시하며 안정적으로 승점을 쌓았다.
  • PL 클럽들에게 매우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 경기가 안풀린다 싶으면 플랜 B를 적극적으로 이행했다. 실제로 전반에 0대0이다가 후반에 3골 4골 넣는 경기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과르디올라 시절을 흑역사라고 말하는 팬들은 보통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한다.
  • 이유가 어찌 되었건 스페인 3강 클럽(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에게 차례로 3년 연속 패한 것은 독일 축구의 수장이라는 자존심에 큰 흠집을 낸 것이다. 뮌헨은 전통적으로 라리가 클럽들에게 강했는데, 그 이미지를 싹 사라지게 만들었다.
  • 점유율 축구에는 두줄 수비 후 역습이라는 카운터가 매우 확실히 존재하는데, 그는 자신의 신념만을 믿으며 끝끝내 이 단점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실리를 추구할 때는 실리를 추구했어야만 했다.
  • 팀의 상징적인 선수들을 많이 내쳤다. 무엇보다도 13년을 헌신한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를 떠나보냈을 때 수많은 팬들이 분노했고, 과르디올라의 잘못은 아니지만 토니 크로스도 4강에서 대패를 안긴 레알 마드리드 CF에 뺏기며 팬들의 지지를 잃었으며, 트레블에 혁혁한 공을 세운 마리오 만주키치도 과거 바르셀로나 시절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를 대했듯 안좋게 갈라졌다.
  • 바이에른 특유의 힘있고 굵은 축구 색깔이 점점 사라지고 스페인 색깔의 축구가 어중간하게 입혀져 안풀리는 날에는 정말 이도저도 아닌, 박스 주변에서 볼만 돌리지 정작 박스 내부로는 볼 운반이 안되다가[63] 역습당해 지는 패턴이 반복되었다.

11.1. 2013-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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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2014-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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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2015-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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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카를로 안첼로티 시대 (2016~2017. 10)

DFL-슈퍼컵 2회 우승에 리그 우승, 그리고 챔스도 오프사이드 오심을 2번이나 겪는 불운끝에 탈락했다보니 언뜻 보면 중박은 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400여 일간의 안첼로티 천하에서 바이에른은 말 그대로 발전이 하나도 없이 정체되었으며(혹은 퇴보했으며), 내부에서 크게 분열되고 있었다.

일단 안첼로티는 아들과 사위를 앞세운 족벌 체제를 뮌헨에도 들였다. 특히 UEFA 코치 라이선스도 없는 그의 사위의 코치 선임은 말그대로 낙하산. 경기나 트레이닝 전에 실시하던 워밍업도 기존 3~40분 프로그램에서 5분으로 줄여버려 근육부상자들을 속출하게 만들었으며,[64] 팀 트레이닝 양도 급격하게 줄어들자 피지컬 저하를 우려한 제롬 보아텡, 아르연 로번 등 일부 선수들이 개인 트레이너와 추가 훈련을 실시하자 이것마저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쯤 되면 이탈리아에서 보낸 첩자 소리를 들어도 이상하지 않다[65] 결국 선수들은 몰래 추가 트레이닝을 진행해야 했다고. 필립 람사비 알론소조차 팀 훈련양에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할 정도였다.

경기 내적인 면에도 악영향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바이에른의 공격 패턴을 단조화시키고,[66] 각각 33세, 34세에 이른 로베리를 개인능력만 믿고 계속 중용했으며,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백업도 전혀 살 생각을 하지 않고, 토마스 뮐러의 특성도 전혀 파악하지 못해 잉여화 시켰으며,[67] 안첼로티 치하에서 요주아 키미히킹슬리 코망 등 현재 유프 하인케스 체제 하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자원들의 성장을 싹 멈추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레알에서 BBC라인에 맞춰 쓰던 4-3-3을 뮌헨의 특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대로 쓰려고 하니 일어난 일. 결국 펩 과르디올라 시절 경기가 잘 안풀릴 때의 패턴을 안첼로티 체제의 뮌헨에서도 그대로 복습했고, 17/18 시즌에는 선수들의 충성심도 사라져가는게 경기력에 보일 정도가 되었다. 말그대로 선수 개인 능력과 레반돕의 꾸역골로 버텼던 것. 결국 파리 생제르맹 FC 원정을 앞두고 사건이 터졌는데, 스포르트 아인스에 의하면 안첼로티는 선수단에 어떠한 전술적 설명 없이 경기 시작 직전에 라인업만 던져주고 그대로 선수들을 필드에 내보냈고, 아르연 로번, 제롬 보아텡 등 주전 선수들은 자신들이 왜 제외되었는지 설명조차 듣지 못한 채 들어갔다고 한다. 당연히 뮌헨 선수단은 분노했고, 경기는 3대0으로 대패했고, 보드진은 즉각 안첼로티를 경질함으로써 더 크게 번질뻔한 불을 조기에 진화할 수 있었다.

키커에 따르면 제롬 보아텡은 감독의 플랜에서 제외되었다고 느끼고 이적을 결심했을 정도였으며, 애제자 하메스 로드리게스조차 안첼로티가 떠난 후 하인케스 감독 하에서 행복하다고 할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물론 안첼로티를 변호하자면 뮌헨을 망치러 왔다기 보다는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팀을 운영하던 방식이 환경이나 팀 운영 분위기가 전혀 다른 독일에서, 그것도 독일어도 아직 회화가 익숙치 않은데 자기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려다 보니 잘될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12.1.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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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하인케스 4기 (2017. 10~2018)

위에 '팀 안첼로티' 항목에서 언급된 문제가 쌓이고 쌓여 터진 파리 생제르맹 FC 원정 대패 후, 보드진은 선수단 편을 들어 결국 안첼로티를 즉각 경질했다. 후임은 일단 코치였던 윌리 사뇰이 감독 대행으로 다음 라운드를 지휘하고, 다음 감독으로 율리안 나겔스만, 위르겐 클롭, 토마스 투헬 등이 물망에 올랐다. 특히 투헬은 독일의 여러 일간지들에서 뮌헨 감독으로 거의 확정이라는 기사까지 쏟아졌으나 결국 2012/13 시즌 트레블을 달성하고 은퇴하여 야인이 되어있는 하인케스를 설득끝에 다시 뮌헨 감독으로 모셔오는데 성공했다. 말 그대로 전설의 귀환.

만 72세의 백전 노장 하인케스는 17/18 시즌 종료 후까지 감독직을 맡기로 하고, 트레블을 함께 이루었던 헤르만 게를란트, 페터 헤어만 코치 등 일명 "하인케스 사단"이 다시 뮌헨으로 돌아왔다.[68] 첫 경기부터 SC 프라이부르크를 상대로 5대0으로 대승을 거두더니 주중 셀틱 FC에게도 3대0 대승, 이후에도 부상자들이 속출해 있는데다 서브도 많지 않아서 어려운 선수단 운영이 될 법 했지만[69] 적절한 로테이션과 플랜B 운용으로 그 어려움을 모두 극복해내며 바이언은 빠르게 안정세로 접어들었고, 부임 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승점 4점차로 밀리며 4위자리에 랭크되었던 뮌헨은 전반기가 끝나자 압도적인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데다 파리 생제르맹 FC에게도 노련미가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주며 2차전의 대패를 되갚는 동시에 네이마르의 PSG를 참교육 시키더니,[70] DFB-포칼에서도 강력한 우승 라이벌 RB 라이프치히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조기에 만나 모조리 탈락시키며 순항하고 있다.

겨울 이적시장에서도 뮌헨의 역린으로 지목되던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백업으로 산드로 바그너를 드디어 사왔으며, 미하엘 발락을 뛰어넘을 재능으로 평가받는 레온 고레츠카 역시 FC 바르셀로나에 빼앗기기 전에 미리 계약을 확정함으로서 바이에른의 세대 교체에도 초록불을 켰다.[71]

후반기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까다로운 레버쿠젠 원정에서 3대1 완승, 도르트문트와의 홈경기에서 무려 6대0 대승을 거두는 등 리그에서 계속 승승장구하며 결국 29라운드 아우크스부르크 원정에서 4대1로 깔끔히 이겨 무려 다섯 경기가 남겨놓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포칼에서도 파더보른과 레버쿠젠을 상대로 두 경기 연속 6득점이나 기록하며 결승에 진출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조 2위로 16강에 올랐음에도 상대적으로 수월한 상대인 베식타스 JK를 만났고,[72] 홈에서 5대0, 원정에서 3대1 승리를 거두며 종합 8대1 완승으로 유유히 8강에 올랐다. 8강 상대는 세비야. 과르디올라와 안첼로티 시절에는 생각도 할 수 없던 스페인 원정에서 2대1 승리를 거두었고, 홈에서는 실리적인 운영으로 0대0 무승부를 거두어 4강까지 진출했다. 4강에서는 레알 마드리드 CF를 만나며 2년 연속 붙게 되었다. 1차전은 선제골을 넣었으나 로벤과 보아텡의 부상으로 인해 억지로 경기 플랜을 바꿔야 했고, 결국 하피냐의 실수로 역전골을 허용해 1대2로 패했다. 2차전에서는 하인케스가 전술로 지단을 압도했지만, 이번에는 골키퍼 스벤 울라이히의 치명적인 실수로 2대2 무승부에 그쳐 탈락했다. 허나 전술 자체에는 큰 문제가 없었고, 오히려 마드리드 원정에서 레알을 궁지에 몰아넣기까지 하여 하인케스를 비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안타깝게도 하인케스의 마지막 시즌은 비극으로 끝나버렸다. 홈 최종전에서 슈투트가르트에게 1대4로 뜬금패를 당한데 이어 포칼 결승에서는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1대3 완패를 당해 준우승에 그쳤다. 하지만 하인케스가 돌아오지 않고 계속 안첼로티 체제로 갔거나 다른 검증되지 않은 감독을 데려왔다면 역대급 망시즌이 될 수도 있었지만, 전설의 귀환으로 분데스리가 우승, 포칼 준우승, 챔스 4강이라는, 끝이 아쉬웠으나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시즌을 보냈다. 그래서 팬들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하인케스에게 감사하다는 플래카드를 경기장에 내걸었고, 리그 우승 축하 행사에서도 감사를 보냈다.

여담으로 하인케스는 은퇴 1년 뒤에 감독 교체를 하던 친정팀에게 한지 플릭이라는 사나이를 추천했는데... 결과가 어땠는지는 후술.

13.1.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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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니코 코바치 시대 (2018~2019. 1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중상위권으로 이끈 니코 코바치 감독을 하인케스의 후임으로 결정했다. 참 공교롭게도 코바치의 프랑크푸르트는 하인케스의 마지막 경기에서 뮌헨을 꺾고 포칼 우승을 차지한 바 있다.

코바치는 부임 후 치른 첫 공식전인 DFL 슈퍼컵에서 레반도프스키의 해트트릭을 앞세워 자신의 친정팀 프랑크푸르트를 무려 5대0으로 완파하고 뮌헨 소속으로 첫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리그, 포칼, 챔스를 통틀어 7연승을 하며 뮌헨 커리어를 산뜻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리그 5라운드부터 1무 2패에 그치며 리그 6위로 추락했고, 이후 2연승으로 살짝 흐름을 되찾나 했으나 이번에는 2무 1패로 또 3경기 연속 무승을 달성하며[73] 여전히 5위권을 유지했다. 이 때 선두 도르트문트와의 승점차는 무려 9점. 포칼에서도 졸전이었는데, 4부 리그 뢰딩하우젠을 상대로 고작 2대1로 이겼고, 그마저도 후반 내내 똥줄을 타며 리드를 지켜야 했다. 상상 이상의 성적 부진에 선수단에 반 코바치 파벌이 생겼느니 뭐니 하면서 팀의 분위기는 점점 안 좋아져갔다. 팬들도 점차 인내심을 잃어가며 코바치의 경질을 외쳤다.

허나 연말이 다가오자 코바치호는 반전을 일으켰다. 챔피언스리그 SL 벤피카와의 홈경기에서 로베리의 맹활약을 앞세워 5대1 완승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리그에서는 5연승 13득점 1실점이라는 호성적으로 전반기를 마무리했고, 순위를 2위까지 끌어올렸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까다로운 AFC 아약스 원정에서 역대급 명경기 끝에 3대3 무승부를 거두어 조 1위를 확정지었다. 다만 16강 상대가 우승후보 리버풀 FC라는 게 흠.

후반기의 시작도 괜찮았다. 레버쿠젠 원정에서 패한 것을 제외하면 또 승리를 계속 쌓아가며 선두 도르트문트를 맹추격했다.[74] 그리고 25라운드에서 볼프스부르크를 상대로 6대0 완승을 거두며 마침내 계속 미끄러지던 도르트문트를 제치고 리그 선두를 되찾았다. 포칼에서는 헤르타 BSC를 상대로 고전했으나 연장 승부 끝에 꺾으며 8강에 진출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안필드 원정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으며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하지만 3월에 치른 리버풀과의 리턴매치에서 졸전 끝에 1대3으로 완패하며 무려 8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 탈락했다. 이에 팬들은 기껏 쌓아놓은 좋은 흐름이 또 끊기는 거 아니냐며 우려했지만, 며칠 뒤에 마인츠를 6대0으로 때려잡으며 우선 한숨을 돌렸다. 그리고 맞이하게 된 사실상의 리그 우승 결정전인 도르트문트와의 홈경기. 직전 경기에서 프라이부르크와 무승부에 그쳐 또 우려를 샀지만, 그 우려를 비웃듯 무려 5대0 대승을 거두며 리그 선두를 탈환했다.

이후에는 전반기에 자신들에게 굴욕을 안겼던 뒤셀도르프를 4대1로 완파했고, 돌풍의 팀 브레멘을 상대로도 꾸역승을 거두는 등 승점을 계속 쌓아나갔다. 중간에 꼴찌 뉘른베르크와 라이프치히를 상대로 무승부를 거두긴 했지만, 도르트문트 역시 레비어 더비에서 완패하고 브레멘전에서 무를 캐는 등 뮌헨을 추격하지 못했다. 리그 최종전을 앞둔 상황에서 양팀의 승점차는 단 2점. 뮌헨은 골득실 때문에 비기기만 해도 사실상 우승이었다. 공교롭게도 상대는 코바치의 친정팀인 프랑크푸르트였다.

그리고 뮌헨은 최종전에서 5대1 대승을 거두며 전반기에 멀게만 느껴졌던 분데스리가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는데 성공했다. 여담으로 이 경기는 프랑크 리베리아르옌 로벤의 고별전이기도 했는데, 두 선수 모두 득점에 성공하며 뮌헨에서의 커리어를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한편 포칼에서는 8강에서 2부 리그 하이덴하임을 맞아 손쉬운 승리가 예상되었으나, 니클라스 쥘레의 퇴장과 남은 수비수들의 저질 수비로 무려 4실점이나 허용했다. 다행히 이날 득점력도 제대로 터져 5골을 기록했고, 엄청난 난타전 끝에 5대4로 이기며 4강에 올랐다. 4강 상대는 브레멘.[75] 역시 저질 수비로 2실점을 허용했으나 또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3골을 넣으며 3대2 승리, 2년 연속 결승에 진출했다.

시즌의 마지막 경기였던 포칼 결승 라이프치히전에서는 어려운 경기가 될 거라는 우려와 달리 3대0 완승을 거두며 전 시즌 결승 패배의 아픔을 말끔히 씻어냈고, 과르디올라 시절 이후 첫 포칼 우승이자 첫 더블을 달성했다. 그렇게 정말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18/19 시즌은 결국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19/20 시즌은 시작부터 슈퍼컵에서 도르트문트에게 패하고 헤르타에게 홈에서 무승부를 거두며 불안하게 출발했다. 그래도 이후 치른 리그 경기에서 4승 1무라는[76] 호성적을 거두었고, 챔피언스리그에서는 FK 츠르베나 즈베즈다를 상대로 3대0 완승, 그리고 직전 시즌 준우승팀인 토트넘 홋스퍼 원정에서 무려 7대2라는 충격과 공포의 스코어로 이기며 다시 정상궤도를 찾는 듯했다.

그러나 호펜하임과 아우크스부르크를 상대로 1무 1패에 그쳤고,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올림피아코스를 상대로 3대2 진땀승을 거두는 등 불안감이 다시 생겼다. 그리고 포칼 2라운드 보훔전에서 역대급 졸전 끝에 간신히 2대1로 이기자 그 불안감은 더더욱 커졌다. 게다가 뮐러와 마르티네스 등 베테랑 선수들이 출전 시간 부족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나오면서 팀 분위기도 영 좋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운명의 날. 현지 시간 2019년 11월 2일. 코바치의 뮌헨은 프랑크푸르트로 원정을 떠났다. 직전 시즌에 3번 만나서 3번 다 이겼던 프랑크푸르트라서 아무리 경기력이 떨어진 뮌헨이라도 해볼 만할 것 같았지만...

코바치는 친정팀에게 5대1로 두들겨 맞으며 2010년대 뮌헨 역사에 남을 만한 흑역사를 생성했다. 결국 팀을 추스르는데 실패하고 역대급 참패까지 당한 코바치는 바로 다음날 책임지고 자진사퇴했다. 첫 시즌에는 좋은 후반기 성적으로 자존심을 건졌던 코바치였지만, 팀 분위기도 말이 아니었고 성적도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도저히 그를 믿고 남은 시즌을 맡길 수 없었다.

14.1.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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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한지 플릭 시대 (2019. 11~2021)

코바치의 사퇴 이후 뮌헨은 부랴부랴 새 감독을 찾기 시작했다. 17/18 시즌에 안첼로티가 떠나며 비슷한 상황에 놓였었지만, 그 때는 다행히 하인케스가 소방수로 와 새 감독을 찾을 시간을 벌어주었다. 하지만 하인케스가 완전히 은퇴를 선언한 이번에는 소방수로 부를 수도 없었고, 아직 시즌 초중반이라 마땅한 감독 매물도 없었다. 끽해야 아약스에서 잘만 감독하고 있는 에릭 텐하흐나 야인이자 뮌헨의 동네북 아르센 벵거 등의 이름이 거론되었을 정도.

일단 수뇌부는 급한 불 끈다는 마음으로 수석코치인 한지 플릭을 감독 대행으로 선임했다.

플릭 체제의 첫 경기인 챔피언스리그 올림피아코스전은 2대0으로 무난히 이겼지만, 하필이면 바로 다음 경기인 리그 데뷔전 상대가 도르트문트였다. 아무리 홈경기라지만 불과 1주일 전에 완패를 당했던 뮌헨이었고, 감독 교체로 인해 분위기가 아직 어수선해서 크게 기대하는 팬들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플릭은 많고 많은 우려를 비웃든 180도 달라진 경기력으로 도르트문트를 무려 4대0으로 격침했다. 코바치 휘하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강도 높고 체계적인 압박, 빠르고 효율적인 공격 전개 등 뮌헨다운 경기력을 이식하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는데 성공했다. 이어 뒤셀도르프 원정에서도 4대0 승리를 거두었고, 챔피언스리그 즈베즈다전에서는 레반도프스키의 4골을 앞세워 6대0 대승을 거두며 순항했다.

하지만 레버쿠젠전에서 1대2로 패하며 주춤했고, 지옥의 묀헨글라드바흐 원정에서도 똑같은 점수로 패해 리그 순위가 무려 7위로 떨어졌다. 유로파리그 진출권도 못 따는 7위로 추락한 뮌헨은 짧은 시간만에 또 위기에 빠졌다.

허나 뮌헨의 위기는 여기까지였다. 브레멘, 프라이부르크, 볼프스부르크 3연전에서 3연승을 거두며 리그 순위를 일단 3위까지 끌어올렸다.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최종전에서 토트넘을 3대1로 꺾어 조별예선 전승을 거둔 건 덤.

그리고 2020년 새해가 밝자 플릭호는 본격적으로 역대급 행보를 시작했다. 리그 후반기의 첫 세 경기에서 무려 12득점 1실점으로 분위기를 띄워 놓고, 라이프치히와 한 번 비기긴 했지만 이후 25라운드까지 또 연승을 거두며 리그 선두 자리에 올랐다. 이때까지 뮌헨의 기록은 무려 8경기 7승 1무 27득점 4실점. 이 기세를 이어가 포칼도 4강까지 진출했고, 챔피언스리그 16강 1차전에서 첼시를 상대로 3대0 원정승을 거두며 8강 진출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포칼에서 호펜하임에게 3실점을 하거나, 리그에서 꼴찌 파더보른을 상대로 극장골로 간신히 이기는 등 위기가 아예 없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즌 초반의 불안불안한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플릭은 좋은 성적에 힘입어 감독 대행에서 정식 감독으로 승격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좋은 흐름을 갑작스레 깨뜨린 게 있었으니, 바로 코로나 19 사태였다. 전세계를 마비시킨 팬데믹으로 인해 모든 경기 일정이 무기한 연기되었고, 시즌이 아예 취소되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었다.

다행히 시즌이 끊긴지 두 달만에 재개가 확정되었고, 플릭호는 재정비를 해 우니온 베를린 원정을 시작으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우니온을 2대0으로 꺾고 산뜻하게 출발한 플릭의 뮌헨은 자신들에게 대굴욕을 안겼던 프랑크푸르트를 5대2로 이겨 복수에 성공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경기인 도르트문트와의 리턴매치이자 사실상의 우승 결정전에서는 미친 압박과 체력, 그리고 수비를 앞세워 1대0으로 이기며 2위와의 승점차를 7점으로 벌렸다. 더 무서운 건 이렇게 체력 소모가 심했는데도 며칠 뒤에 열린 뒤셀도르프전에서 5대0 완승을 거두었다.

그렇게 찾아온 사실상 마지막 고비. 플릭에게 2연패를 안겼던 레버쿠젠-글라드바흐 2연전과 그 사이에 낀 프랑크푸르트와의 포칼 4강전. 시즌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 있는 중요한 1주일이었다. 하지만 좋은 흐름이 깨질 리 만무했던 뮌헨은 레버쿠젠 원정에서 4대2 승, 프랑크푸르트와의 포칼 준결승에서 2대1 승, 그리고 묀헨글라드바흐전에서는 경고 누적으로 인한 공백에도 불구하고 극적인 2대1 승리를 거두어 리그와 포칼 우승까지 각각 1승씩만을 남겨두었다.

그리고 브레멘 원정에서 1대0 승리를 거두어 리그 종료를 두 경기 남겨놓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포칼에서도 레버쿠젠을 무난히 4대2로 꺾으며 더블 까지 달성했다. 불과 몇 달 전만 하더라도 리그 우승도 불가능해 보이던 팀이 감독 교체 후 더블을 넘어 트레블까지 노리고 있던 것이다.

이제 남은 한 대회는 챔피언스리그. 코로나 때문에 남은 16강 일정이 종료된 후 홈 앤드 어웨이 방식을 버리고 8월에 중립 장소(리스본)에서 미니 토너먼트를 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플릭호는 우선 첼시와의 16강 2차전에서는 4대1 완승을 거두어 8강행을 손쉽게 확정짓고 리스본으로 향했다. 8강전에서 기다리고 있던 건 세계 최고의 선수 리오넬 메시를 앞세운 바르셀로나. 리스본 토너먼트 최고의 빅매치라서 양 팀의 팬들 뿐만 아니라 중립팬들도 명승부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뮌헨은 바르셀로나를 무려 8대2로 영혼까지 털어버리며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2013년 하인케스의 뮌헨이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거둔 7대0 합산 스코어보다 더 충격적인 결과라고 해도 무방했다. 단판이었기에 망정이지 2차전까지 있었으면 얼마나 더 처참히 털었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렇게 유유히 4강에 진출한 뮌헨은 복병 올림피크 리옹을 상대로 살짝 고전했으나 3대0으로 이겨 7년 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올랐다. 이제 트레블까지 단 1승. 상대는 똑같이 트레블을 노리고 있던 토마스 투헬파리 생제르맹 FC였다.

그리고 플릭의 뮌헨은 파리를 1대0으로 꺾고 7년 만에 챔피언스리그까지 우승, 역사적인 두번째 트레블 달성에 성공했다! 이로써 플릭은 망할 뻔한 시즌을 손수 뜯어고쳐 구단 역사상 최고의 시즌 중 하나로 바꿔놓았다. 팬들은 전혀 예상치 못했던, 그야말로 혜성 같은 플릭의 등장에 열광했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극찬을 늘어놓았다. 2019/20 시즌은 그렇게 최고의 결과와 함께 훈훈하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완벽할 것만 같았던 플릭 체제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한 건 20/21 시즌을 준비하면서였다. 선수 보강을 제대로 해주지 않는 보드진의 답답한 행보에 플릭과 팬들은 점차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큰 보강은 못한 채 3주의 짧은 휴식기를 뒤로 하고 바로 다음 시즌을 시작해야 했다.

지지부진한 선수 영입에도 뮌헨은 개막전부터 샬케를 8대0으로 이기며 산뜻하게 시작했다. 그리고 UEFA 슈퍼컵과 DFL 슈퍼컵을 모두 우승하며 5관왕 달성에 성공했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좋은 흐름은 이어져 강적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4대0으로 완파했다. 11월 들어 코로나 때문에 빡빡해진 일정으로 인해 선수단의 체력이 떨어져 뜬금무를 몇 번 거두긴 했으나, 어쨌든 뚝심으로 연말까지 꾸역꾸역 승점을 쌓아갔고, 레버쿠젠 원정에서 2대1 극장승을 거두며 역사적인 한 해를 마무리했다.

2021년 1월에는 위기를 겪었는데, 글라드바흐 원정에서 어이없는 역전패를 당한데 이어 포칼 32강전에서 2부 리그의 홀슈타인 킬에게 승부차기로 패하는 대굴욕을 당했다. 플릭 체제 최악의 흑역사로 남은 패배였다. 하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리그에서 5연승을 거두어 다시 정상궤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2월에는 코로나로 연기되었던 클럽월드컵에 참가했다. 그리고 클럽월드컵까지 우승해버리며 유럽 축구 역사상 유이한 전관왕을 달성했다.[77] 지난 시즌만큼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못하는 뮌헨이었지만, 그래도 새로운 역사를 쓰며 플릭의 위상은 더더욱 높아져만 갔다. 이후에 또 체력으로 인해 리그에서 1무 1패로 부진했지만, 또다시 절치부심하고 리그에서 연승을 달리며 선두 자리를 지켰고,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는 라치오를 합계 6대2로 꺾고 8강에 올랐다.

그러나 4월부터 본격적으로 팀이 어수선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플릭과 하산 살리하미지치 단장이 팀 내에서 가지는 권한과 영향을 두고 기싸움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게 점차 심해지며 언론들까지 떠들어댔고, 보드진과 감독 간의 불화설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사실 상술했듯 여름 이적시장부터 선수 영입 문제로 갈등이 있었는데, 이제 아예 감독의 권한까지 단장에게 뺏길 위기에 처하자 갈등이 고조된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유럽의 어떤 팀보다 더 미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뮌헨의 선수단은 마침내 완전히 퍼져버렸다. 주전 선수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부상으로 몸져누웠고, 팀 내외적으로 어둠이 드리웠다. 4월의 시작은 리그 2위 라이프치히를 1대0으로 이기며 괜찮았지만,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에서 파리 생제르맹을 상대로 2대3으로 졌고, 리그에서도 우니온 베를린을 상대로 무승부에 그치며 흐름이 끊어졌다. 설상가상으로 부상자들은 늘어가기만 해 8강 2차전을 앞두고 벤치는 커녕 선발 11명도 간신히 짜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플릭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플릭호는 파리 원정에서 최선을 다해 싸워 1대0으로 이겼지만, 원정 다득점으로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다음 경기인 볼프스부르크 원정에서 3대2로 이기며 리그 우승에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허나 이 와중에도 플릭과 살리하미지치 단장의 갈등은 해결될 기미가 안 보였고, 보드진 역시 중립을 유지하거나 살리하미지치의 손을 들어주며 플릭의 입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결국 참다 못한 플릭은 볼프스부르크전이 끝난 직후 시즌이 끝나고 팀을 떠날 거라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소식을 접한 뮌헨 팬들은 단체로 뒷목을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코로나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전관왕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플릭을 무시하고 무능한 단장의 편을 드는 구단 수뇌부가 좋게 보일 리가 없다. 안 그래도 여론이 안 좋았던 살리하미지치의 인기 역시 폭락했다. 구단의 정치 싸움과 챔피언스리그에서의 탈락으로 팀 분위기가 완전히 개판 오분전으로 돌아가자 기껏 잘 싸워오던 시즌이 막판에 무너지는 게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다.

다행히 플릭은 사적인 감정은 잠시 뒤로 하고 마지막으로 남은 리그 일정에만 집중했다. 31라운드에서 마인츠를 상대로 졸전 끝에 1대2로 패하긴 했으나, 바로 다음 라운드에서 뮌헨이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라이프치히가 도르트문트에게 패하며 분데스리가 우승이 확정되었다. 결국 플릭은 팀에게 마지막으로 우승컵을 하나 안겨주고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지막 경기인 아우크스부르크와의 홈경기에서 5대2 완승을 거두며 뮌헨 생활을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플릭 체제는 이렇게 화려한 발자취와 7개의 우승컵을 남긴 채 막을 내렸다.

15.1.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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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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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율리안 나겔스만 시대 (2021~2023)

한지 플릭 감독 사임 후 독일의 가장 유망한 젊은 감독인 율리안 나겔스만이 선임되었다. 아무래도 전임자의 성적이 워낙 역대급인지라 기대치가 높아진 뮌헨의 팬들은 나겔스만에 대한 회의감을 나타냈지만, 플릭을 내보낼 거면 차선책으로 나겔스만만한 매물이 없던지라 선임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분위기이기도 했다.

그리고 21/22 시즌 전반기까지만 해도 나겔스만의 선임은 대성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리그에서는 승점을 고작 세 번 잃으며 계속 상승세를 이어갔고, 결국 2위 도르트문트와 승점 9점차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특히 요주아 키미히가 코로나 여파로 거의 두 달 가까이 결장했고 레온 고레츠카 역시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위기가 있었지만, 이런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며 전반기를 잘 마쳤다.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바르셀로나, 벤피카, 그리고 디나모 키이우를 상대로 6전 전승을 거두며 당당히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다만 포칼에서는 묀헨글라드바흐에게 무려 5대0으로 완패하며 일찌감치 탈락하는 흑역사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도 이 때는 나겔스만이 코로나 양성으로 인해 감독 자리에 아예 앉지를 못했었고, 그것 외에 거둔 성적은 좋아서 그냥 넘어가는 여론이 대부분이었다. 이 흐름이 이어졌다면 좋았을 것을...

후반기 시작을 앞두고 갑자기 1군 선수단의 절반 가까이가 코로나에 걸리는 날벼락을 맞았다. 결국 몇 안 남은 1군 선수들과 유망주 위주로 울며 겨자먹기로 스쿼드를 짰지만, 천적 글라드바흐에게 패하며 후반기를 찝찝하게 시작했다. 다행이 이내 많은 선수들이 복귀하며 쾰른, 헤르타, 그리고 라이프치히를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리그 선두 자리를 공고히 했다. 허나 승격팀 VfL 보훔에게 뜬금없이 4대2 완패를 당하며 좋은 흐름이 끊겼고, 리그 꼴찌 그로이터 퓌르트를 상대로 선제골까지 허용했다가 간신히(?) 역전승을 거두는 등 어수선한 흐름으로 바뀌었다. 챔피언스리그 16강에서는 레드불 잘츠부르크라는 수월한 대진을 받았지만, 원정 1차전에서 시종일관 전술적으로 밀리며 끌려갔고, 후반 막판에 코망의 동점골로 간신히 기사회생했다. 다행히 홈에서는 7대1로 이기며 8강에 진출했지만, 리그에서 2연속 무승부를 거두며 주춤하기도 했다. 여기에 데이비스가 코로나로 인한 심근염으로 한동안 결장했고, 고레츠카도 부상 회복이 더뎌지자 나겔스만호의 흐름은 점차 망가져갔다. 다만 아직까지는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잠깐 슬럼프를 겪는 거라고 믿은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게 찾아온 운명의 4월. 국가대표 소집 후 첫 경기인 프라이부르크 원정에서는 4대1 대승을 거두며 시즌의 마지막 스퍼트를 산뜻하게 시작했다.[78] 그러나 챔피언스리그 8강부터 본격적인 참사가 시작되었다. 한 수 아래라 여겨졌던 비야레알 CF를 만났지만, 1차전에서 나겔스만이 우나이 에메리에게 전술적으로 완패하며 역대급 졸전을 펼친 끝에 0대1로 패했다. 2차전 직전에 치른 아우크스부르크와의 리그 경기에서 분위기 반전도 제대로 못 하고 또 졸전 끝에 레반도프스키의 페널티골로 간신히 승리한 건 덤이다. 그래도 어쨌든 뮌헨은 뮌헨이었기에 2차전에서 역전에 성공할 거라 믿은 팬들도 그때까지는 많았지만...

결국 천하의 바이에른 뮌헨이 홈에서 비야레알을 상대로 1대1 무승부에 그치며 8강에서 탈락해버렸다. 전술적인 면에서 아주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79] 비야레알의 통곡의 벽에 막혀 슈팅 23개를 퍼부은 끝에 1점 밖에 내지 못했고, 후반 막판에 역습으로 통한의 동점골을 허용하며 장렬히 탈락했다. 이 패배에 팬들의 인내심이 끝끝내 바닥나 나겔스만을 쉴드쳐주던 여론은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심지어 뮌헨의 흑역사로 평가받는 안첼로티와 코바치와 비교하며 빨리 나가라는 의견도 많아졌다. 게다가 감독 문제와 더불어 에이스 레반도프스키가 보드진의 미적지근한 태도에 환멸을 느껴 재계약을 거부하고 이적을 요청하는 등 팀 분위기가 완전히 박살나버렸다. 이에 팬들은 안 그래도 플릭의 사임 때문에 지지율이 폭락한 살리하미지치 단장과 보드진의 사퇴를 외치고 있다.

그나마 이어진 리그 빌레펠트전에서 3대0 승리를 거두며 분위기를 살짝 추스렀고, 다음 경기인 도르트문트전에서 3대1 승리를 거두며 분데스리가 10연패라는 대업을 달성하긴 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팀의 어수선한 분위기는 계속되며 남은 리그 3경기에서 1승도 못하고 시즌을 참 찜찜하게 끝내야 했다. 선수단의 동기부여가 완전히 떨어진 상태에서 나겔스만은 이를 전혀 제어하지 못했고, 결국 3연속 졸전 끝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믿음을 다 날려버렸다. 21/22 시즌은 그렇게 실망스러움만을 남기고 끝나버렸다. 리그 10연패를 달성한 건 물론 칭찬 받을 일이지만, 챔피언스리그와 포칼에서의 충격적인 탈락이 너무 임팩트가 컸고,[80] 차기 시즌에는 니클라스 쥘레와 레반도프스키의 이탈, 만천하에 드러난 나겔스만의 부족한 능력과 경험, 그리고 팀을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는 보드진의 3박자가 어우러져 역대급 대참사를 낼 거라는 관측도 보이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는지, 보드진은 여름 이적시장에서 엄청난 현질을 했다. 리버풀의 에이스 사디오 마네와 유벤투스의 수비 선봉장 마테이스 더리흐트를 비롯해 아약스의 누사이르 마즈라위라이언 흐라번베르흐 듀오와 프랑스의 특급 유망주 마티스 텔까지 데려왔다. 지난 여름 이적시장에서 마르셀 자비처 한 명만 산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였다. 이에 팬들은 드디어 보드진이 정신을 차렸냐며 차기 시즌에 대한 기대를 품기 시작했다.

새로운 무기들을 장전한 나겔스만호는 슈퍼컵에서 라이프치히를 꺾으며 시즌을 트로피와 함께 기분 좋게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 리그에서 3전 전승에 15득점 1실점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최고의 흐름을 탔다. 바로 다음 경기에서 묀헨글라드바흐를 상대로 비기며 살짝 주춤하긴 했지만, 이건 골키퍼 얀 조머가 무려 19선방이라는 사기적인 활약을 펼쳤기에 그나마 정상참작이 가능했다.

하지만 이어진 리그 3연전에서 2무 1패에 그치며 리그 4경기 연속 무승이라는 망신살을 타야 했다. 당연히 나겔스만이 애써 잠재워놓은 민심은 또다시 폭발했으며, 감독 교체를 외치는 팬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레버쿠젠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며 잠깐 한숨 돌리나 했지만,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또 극장골을 먹으며 무승부를 거두어 나겔스만은 크나큰 위기에 봉착했다.

다행히 도르트문트전 이후로 급격한 상승세를 타며 모든 대회에서 10연승을 거두며 2022년을 마무리했다. 리그 선두를 탈환한 건 덤. 게다가 부진하는 와중에 챔피언스리그 성적만큼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다. 바르셀로나, 인테르, 플젠이 속한 역대급 죽음의 조에 편성됐음에도 6경기 전승에 단 2실점밖에 하지 않는 등 당당히 조 1위로 16강에 올랐다.

그러나 월드컵 브레이크 이후로 나겔스만호는 또 침체기에 빠졌다. 원래 까다로운 라이프치히 원정에서 비긴 건 그렇다 치더라도, 쾰른과 프랑크푸르트를 상대로 졸전을 펼친 끝에 또 2무에 그치며 기껏 쌓았던 승점차를 다 깎아먹고 말았다. 게다가 챔스 16강 상대가 하필 월드컵 우승/준우승의 주역인 메시와 음바페가 버티고 있는 파리 생제르맹으로 확정돼 팬들 사이에서는 대참사를 낳는 게 아니냐는 등 또 말이 많이 나오기 시작했다. 또한 주장 노이어가 휴가 중 스키를 타다 다리 골절상을 당해 시즌 아웃이 되며 부랴부랴 조머를 수급해오는 등 바람 잘 날이 없던 뮌헨이었다.

그 이후의 행보는...솔직히 애매했다. 우선 가장 우려되었던 파리 생제르맹과의 2연전은 거의 흠 잡을 데 없는 전술과 선수 운용으로 원정에서 1대0, 홈에서 2대0 완승을 거두며 그 메시와 음바페를 무득점으로 묶어놓고 8강에 올랐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또 뜬금없이 승점을 떨구며 리그 우승에 노란불이 켜지기도 했다. 게다가 팀 내적으로도 말이 많아졌는데, 10년 넘게 팀의 골키퍼 코치를 맡고 있던 토니 타팔로비치를 뜬금없이 해고해버리는 바람에 타팔로비치의 절친이었던 노이어가 격노하며 언론에 자신의 불만을 떠들고 다녔던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 자체는 파리전 승리에 묻혀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래도 팀이 알게 모르게 흔들리고 있다는 건 사실이었다.

화룡점정으로 초짜 감독 샤비 알론소에게 전술 싸움에서 완패하고 레버쿠젠 원정에서 지며 리그 선두 자리도 도르트문트에게 내주었다. 또한 힘들게 올라간 챔스 8강에서는 최악의 상대인 맨체스터 시티를 만나는 바람에 불안감은 더더욱 고조되어만 갔다. 그러나 보드진이 시즌 내내 나겔스만에 대한 믿음을 천명한 만큼 이번에도 위기를 타파하길 바라는 방법밖에 없는 듯했으나...

3월 A매치 기간 중에 엄청 뜬금없이 나겔스만이 경질되었다.

전혀 예고도 없던 경질 소식에 선수들과 팬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당연히 소스라치게 놀랐다. 심지어 타 팀의 감독과 선수들도 놀랐다고 할 정도니 얼마나 뜬금없는 결정이었는지 알 수 있다. 나겔스만이 리그에서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 있던 건 사실이지만, 가장 중요한 챔스에서는 완벽에 가까운 모습이었고, 무엇보다 보드진이 이 결정을 내리기 불과 나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겔스만을 지지한다는 발언을 했었기에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일단 보드진이 댄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시즌의 목표가 위험해졌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엄청 틀린 말은 아닌 게, 시즌 초나 2023년 연초에 리그에서 조금만 더 좋은 행보를 보였다면 2위와 승점차를 넉넉히 벌려놓은 상태로 어느 정도 여유를 가지고 컵대회를 준비할 수 있었다. 허나 무려 9점차짜리 리드를 뺏기고 선두까지 내줬으니 보드진 입장에서는 위기의식을 느낄 만하다.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나겔스만이 펩 과르디올라를 상대로 얼마나 잘했을지는 애매하긴 하다. 보드진의 선택이 아예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이 불만을 제기하는 이유는 경질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는 것. 자를 거면 충분히 더 일찍 자를 수도 있었음에도 계속 안 자르고 있다가 시즌에서 가장 중요한 4월을 앞두고 갑자기 잘라버리고 새로운 감독 보고 팀을 재정비하라고 하는 건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사실상 불가능하다. 물론 4년 전 시즌 중에 한지 플릭을 선임해서 역대급 결과를 낳긴 했으나, 그건 아직 시즌 초반의 일이었고, 그마저도 플릭은 이미 수석코치로 합류해있던 상황이라서 팀을 파악하는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반면 이번 사태는 당장 리그에서 도르트문트와의 죽음의 일전과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체스터 시티와의 2연전이 코앞인데 새로운 감독보고 여기서 성공을 거두라는 건 태풍을 앞에 둔 배의 선장을 갑자기 갈아치우고 잘 몰아보라는 소리나 다름없다.

나겔스만이 경질되자 당연히 빌트를 위시한 황색언론들에서는 팀이 반나겔스만파-친나겔스만파로 나뉘어져 있었다니 나겔스만이 선수단의 지지를 잃었다니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진실은 저 너머에...

어쨌든 5년이라는 유례없는 장기계약을 받은 나겔스만의 다사다난했던 뮌헨 생활은 그렇게 갑작스럽게 끝나고 말았다. 후임 감독은 첼시를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토마스 투헬.

16.1.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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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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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토마스 투헬 시대 (2023~ )

나겔스만의 경질 타이밍에는 대다수의 팬들이 불만을 가졌지만, 후임으로 투헬이 온다는 것에 불만을 가진 팬들은 몇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투헬은 이미 첼시에서 중도 부임해 챔스 우승을 이끈 적이 있는 만큼, 이 상황에 꼭 필요한 감독이었다. 사실 투헬이라는 매물이 없었으면 나겔스만은 경질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검증된 매물이 시장에 나와있었고, 나겔스만의 성적도 시원찮으니 겸사겸사 잘라버렸다는 게 정론이다. 허나 아무리 투헬이라도 첫 경기가 도르트문트전이고 단 2주 후에 맨시티를 상대해야 하는 압도적인 임무가 코앞에 있으면 어렵게 느낄 것이다.

일단 투헬은 부임하자마자 나겔스만이 애용하던 스리백을 폐기하고 다시 포백으로 회귀하여 데뷔전에서 도르트문트를 4대2로 격침, 자신의 뮌헨 생활을 산뜻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불과 며칠 뒤 열린 프라이부르크와의 포칼 경기에서는 1대2로 충격패를 당하며 포칼 8강에서 탈락해버렸다. 트레블 희망을 살리려고 부임한 감독이었는데 데뷔 두 경기 만에 한 대회를 날려먹은 것이다. 물론 경기 자체는 뮌헨이 계속 주도했고 프라이부르크에게 운이 상당히 따른 결과이긴 했으나, 바쁜 일정을 앞둔 팀에게 이런 불상사가 좋게 다가올 리 없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맨시티 원정에서 0대3으로 완패했고, 홈 2차전에서는 몰아붙였으나 결정력 부족으로 1대1 무승부에 그치며 8강에서 탈락했다. 게다가 분데스리가에서도 마인츠에게 완패하며 도르트문트에게 선두를 내주었다. 다행히 도르트문트가 보훔과 비기며 선두를 탈환했지만, 시즌 마지막 홈경기에서 라이프치히에게 패하며 도르트문트에게 다시 선두를 뺏겼고, 자력 우승이 불가능한 상황까지 몰리고 말았다.

그렇게 맞이한 운명의 리그 최종전. 홈에서 이기면 우승이 확정되는 도르트문트가 의외로 마인츠에게 2점차로 끌려갔고, 뮌헨은 쾰른 원정에서 1대0 리드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80분 경 페널티킥을 내주며 다시 도르트문트에게 선두를 내줬고, 그대로 시즌을 무관으로 끝내는 듯 했으나...

후반 종료 1분 전에 자말 무시알라가 극적인 결승골을 넣었다! 결국 도르트문트는 마인츠를 상대로 무승부에 그쳤고, 뮌헨은 라스트 미닛 골로 이기며 승점 동률, 골득실차로 마이스터샬레를 11년 연속으로 들어올렸다. 말도 많고 탈은 더 많았던 뮌헨의 22/23 시즌은 그래도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하지만 해피엔딩이었다 하더라도 대참사만 면한 것이지 역대급으로 부진한 시즌이었던 건 변함이 없으므로 23/24 시즌은 구단과 투헬 감독 모두에게 시험대가 될 것이다.

17.1.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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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실 독일 및 여러 유럽 축구단에 유대인들이 연루되던 게 꽤 많다. 이를테면 2007년 분데스리가 우승한 VfB 슈투트가르트는 아주 초창기에 유태인 구단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구단 마크가 육각성이 들어가기도 했으니.[2] 바이에른 주의 뮌헨은 히틀러가 나치당을 창당하고 발기식을 행했으며, 나치당의 본거지 같은 도시이다. 당연 나치당 입장에서는 가장 크게 신경을 쓸 지역이다.[3] 따라서 바이에른 뮌헨은 강등당한 적은 없지만 1부 리그 개근 팀이 아니다.[4] 공교롭게도 40년 후인 2014년 챔스 결승에서 똑같이 재현되었는데, 74년 바이에른의 결승 상대였던 아틀레티코 마드리드가 40년 만에 결승에 진출했다. 그리고 1:0으로 앞선 상황의 경기 종료 직전까지 갔다. 그러다가 세르히오 라모스에게 극적인 동점골을 허용, 연장에 내리 3골을 얻어먹고 무너지는 악몽과 같은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겪었다.(...)[5] 이 중에는 환상적인 로빙 슛도 포함된다.[6]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지역예선 당시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총감독을 맡았으나, 스파르타식 훈련을 중시하는 김삼락 감독과의 불화로 인해 2회 연속 본선진출에 성공하고도 경질된 비운의 명장이다.[7] 빅 이어를 영구 소장한 클럽은 레알 마드리드 CF, AFC 아약스, FC 바이에른 뮌헨, 리버풀 FC, AC 밀란 이렇게 단 5개. 이 중에서 5회 우승과 3회 연속 우승 기준을 모두 충족한 팀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 뿐이다.[8]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12-13 챔스 결승에서 갑옷입고 트로피를 들고 나오신 그 노신사다. 현재 바이에른 뮌헨에서 수석 스카우터직을 맡고 있다.[9] 33라운드까지 1위팀 바이어 레버쿠젠에 승점 3점이 뒤졌으나 최종전에서 레버쿠젠이 약체 운터하힝에 미하엘 발락의 자책골로 패해 미끄러진 틈타 극적인 역전우승을 거뒀다.[10] 이 복수극은 오트마어 히츠펠트 감독에게 엄청난 인기를 안겨 주었다.[11] 200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팬들이 준비한 카드 섹션. 참고로 2012-13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도 바이에른 팬들이 비슷한 카드 섹션을 들고 나왔다. 그때의 문구는 HEUTE IST WIEDER EIN GUTER TAG, UM GESCHICHTE ZU SCHREIBEN(오늘은 다시 한 번 역사를 쓰기 좋은 날).[12] 여담으로 함부르크의 골키퍼였던 마티아스 쇼버는 샬케의 임대생이였다.[13] 그나마 FIFA 클럽 월드컵에서 CA 보카 주니어스에 1대0으로 이겨 트로피 하나는 챙겼다. UEFA 슈퍼컵에선 독일 천적인 마이클 오언이 활약한 리버풀 FC에게 3대2로 졌다.[14] 겨우 77점이라는 말이 나올 수도 있는데 분데스리가는 34라운드에서 끝나서 타 리그에 비해 승점 자체가 적다.[15] 물론 1년만에 유프 하인케스의 뮌헨이 기록을 따라잡았다.(2004-05 시즌 바이에른 뮌헨 : 77점, 2011-12 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81점, 2012-13 시즌 바이에른 뮌헨 : 91점)[16] 독일어 Q는 U와 만났을 때 ㅋ 발음이 아닌 ㅋㅂ(kv) 발음을 낸다. 그래서 쾔릭스가 아닌 크밸릭스로 발음해야 한다.[17] 추후 69,000석, 71,000석으로 좌석이 확대된다.[18] 결국 06/07 시즌을 끝으로 27세의 나이로 조기은퇴 하고 만다. 그야말로 비운의 재능.[19] 심지어 발락의 파트너로 중원의 핵심이었던 제 호베르투는 다이슬러에게 출전기회를 몰아주려는 마가트에게 실망하여 브라질 리그로 임대를 떠난다. 제호는 고향 리그에서 엄청난 활약을 펼쳤으나, 발락도 제호도 없는 뮌헨은 거의 멸망 수준이었다.[20] 이 당시만 하더라도 분데스리가는 UEFA 리그 순위가 이탈리아 세리에 A는 물론 프랑스 리그 1에도 뒤쳐지며 1, 2위만 직행, 3위는 플레이오프로 가던 시절이었다.[21] 1차전에서 판보멀이 경고 누적으로 2차전에 출전하지 못한 것과, 전체적으로 미드필드진이 붕괴되어 있었던 것이 크다. 결국 오른쪽 측면 미드필더를 크리스티안 렐이라는 그리 뛰어나지도 않은 유망주 윙백으로 땜빵해야 했다.[22] 공식 기록상 21회 우승이지만 엠블럼 위에 별을 달 수 있는 자격은 1963년 통합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기록만 계산하기 때문에 1932년의 우승은 합산되지 않는다.[23] 30회 우승을 달성한 21-22 시즌부터 현재 바이언은 5성을 달고 있다.[24] 칸의 후계자로 미하엘 렌징을 간간히 내보내 기량을 테스트했는데 이때까지는 괜찮았다.[25] 홈에서 1:1로 비겼고, 원정에서도 1:1로 연장전까지 갔는데 2:3으로 밀리던 와중에 막판 루카 토니의 골로 3:3으로 따라잡았고, 여기서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이게 결승골이 되면서 승리했다. 올리버 칸이 기쁨을 주체하지 못해 미쳐 날뛰다 실수로 마르크 판보멀의 얼굴에 죽빵을 날린 장면이 나온 게 바로 이 경기다.[26] 이 당시 스포르팅 감독은 클린스만의 바로 전임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파울루 벤투다.[27] 이 패배는 2012-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되갚아주기까지 꽤 긴 시간 바이에른 뮌헨 팬들을 괴롭히게 된다. 이 경기 전까지 바이에른 뮌헨은 압도적인 대 FC 바르셀로나 상대 전적을 자랑했으나 이 경기에서의 4 - 0으로 2012- 13 시즌까지 모든 상대 전적이 물거품 취급 당하게 된다. 이게 전력 승부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바이에른 뮌헨 입장에서는 최악의 부상 트러블까지 발생하며 그저 허물어지기만 했던 경기였다. 프랑크 리베리는 부상에서 복귀한지 2번째 경기, 루카 토니와 하밀 알틴톱은 부상에서 복귀한 첫 경기였다. 이들 말고 본격적인 부상자들은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스티븐 제라드와 득점 공동 선두였던 미로슬라프 클로제, 교체 1순위이던 보로프스키(막 부상 복귀해서 교체 명단에는 있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수비라인이 붕괴했다. 필립 람(명단에는 있었다.), 루시우, 다니엘 반 바이텐이 한 번에 부상 당하면서 그냥 생각해도 아뜩한 수비라인 유망주들 렐과 브레누로 리오넬 메시를 막으라는 꼴이 되어버렸다. 때문에 전성기를 구가하던 FC 바르셀로나 팬들이 이 4 - 0을 언급하며 바이에른 뮌헨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호언할 때 팬들은 그저 화가 날 수 밖에 없었다.[28] 헤르타가 의외로 4-0 대패를 당하면서 졌어도 3위로 챔스 플레이오프에 나가는 상황이기는 했다.[29]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부터 주장이긴 했다. 참고로 마르크 반 봄멜은 바이에른 뮌헨 역대 주장가운데 최초로 비 독일인이 주장을 맡은 것이다.[30] 후반기 선두 자리를 놓고 벌인 샬케 원정 단두대매치에서 2대1로 승리한게 결정적이었다.[31] 1차전 클로제의 결승골 장면에서 오프사이드 오심 논란이 있었다.[32] 특히 아르옌 로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터트린 발리 슛은 그야말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역사에 남을만한 골이다.[33] 특히 당시 바이에른 뮌헨의 수비진은 매우 끔찍했다.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다투는 강팀의 전력이라 보기엔 수비진이 매우 가관이었을 수준. 그리고 결승 당일은 프랑크 리베리가 퇴장 징계로 출장을 못하는 비극까지 있었다.[34] 루이스 구스타부를 파는 데에 강한 반대 의사를 비친 호펜하임의 랄프 랑닉 감독이 루이스 구스타부가 팔리니 사임을 하였을 정도이다.[35] 이때 중미로 포변을 안했다면 지금처럼 정상급 미드필더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36] 사실 루시우가 있었대도 과연 좋아졌을지는 의문의 영역인 게, 뮌헨이 비교적 안 좋던 시절 루시우는 육체 능력이야 두말할 여지가 없었지만 나는 앞으로 나갈 테니 뒤를 부탁한다 식의 플레이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수비적 마인드라도 확실한 두 사람이 서 있는 거와 비교했을 때 난형난제였을 수도 있다.[37] 홀거 바트슈트버와 아나톨리 티모슈크로 메울 수 있긴 했다. 허나 홀거 바트슈트버는 안 그래도 얇은 수비진 구멍 메꾸기 바빴고, 아나톨리 티모슈크의 본업은 수비형 미드필더.[38] 그래도 많은 전문가들은 챔스 경험이 많은 바이에른 뮌헨의 조 1위를 예상하였고, 실제로도 그렇게 되었다.[39] 그 쐐기골도 그냥 놔두면 마누엘 노이어가 쉽게 막을걸 루이스 구스타부의 발에 맞으며 방향이 완전이 꺾여 들어가고 말았다.[40] UEFA 챔피언스 리그 사상 최다 점수차 승리 기록을 경신했다.[41] 10전 9승 1무. 그야말로 무패다! 다만 이 기록은 2013-14 시즌에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다시 만나 홈에서 0 - 4 라는 충격적인 대패를 당하며 깨지게 되었다.[42] 2011-12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4강에서 레알 마드리드와의 승부차기에서 마누엘 노이어가 낀 장갑은 바이에른 뮌헨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문구는 그 전시된 장갑에 붙어 있는 수식이다.[43] 흥미롭게도 1997-98 시즌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7번째 빅 이어를 가져다 준 감독이 유프 하인케스였는데, 라리가 성적 부진에 책임을 물어 경질되었었다. 이 경기로 유프 하인케스는 그를 내팽겨친 친정 팀에 비수를 꽂았다.[44] 아르옌 로벤은 분데스리가 우승이 걸려있던 30 라운드 데어 클라시커에서도 페널티킥을 실축했기에 이 시즌에 엄청난 비난을 들어대며 사실상 이적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물론 지금은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고 있다.[45] 프란츠 베켄바워는 경기 이후 선수들이 모두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충격에 빠져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46] 분데스리가 우승팀과 DFB-포칼 우승팀이 펼치는 경기. 지난 시즌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더블을 했기때문에 2010-11 시즌 DFB-포칼 우승팀인 바이에른 뮌헨이 상대했다.[47] 원래 세금 포함 46m이었으나 라 리가에서 6m를 내주었다. 이를 두고 스페인 축구 협회는 엄청난 비난을 면치 못했으며 바이에른 뮌헨 또한 도덕성을 상실했다는 이유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하비 마르티네스가 자신의 연봉을 깎아 이적료에 보탰다는 사실마저 밝혀지며 그야말로 아틀레틱 빌바오와 하비 마르티네스와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48] 이적 직전의 시즌에서는 한 시즌 동안 센터백으로 뛰어서 라 리가 베스트 11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저 소화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센터백으로도,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월드 클래스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이다.[49] 물론 대부분의 골키퍼가 세트피스 상황에서 노려지는 슛을 막기가 쉽지는 않다. 다만, 마누엘 노이어는 대부분의 실점이 세트피스 상황이라는게 더 돋보이기에 들리는 말.[50] 필립 람의 허무한 실수로 선제골 실점, 그냥 놔두면 아웃일 시드니 샘의 부정확한 헤딩이 하필 앞에 있는 제롬 보아텡의 안면에 맞고 들어가 결승골 허용[51] 분데스리가는 34경기 밖에 없기 때문에 전승을 해도 102점이다.[52] 뒷 발 맞고 공중에 붕 뜨다가 골대 안으로 그대로 들어갔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골.[53] 바이에른 뮌헨의 3번째 골은 토마스 뮐러호르디 알바를 밀친 것이 파울로 인정되지 않는 오심논란이 있었지만...[54] 결국 실패했다. 2연패는 15-16, 16-17시즌 2연속 우승을 거둔 레알 마드리드가 달성했다.[55] 게다가 이 포즈가 분데스리가의 마크에 있는 인물의 슈팅 포즈와 닮아서 한 동안 패러디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헤라르드 피케는 경기전 인터뷰에서 "4-0으로 이기는게 불가능하지만은 않다. 기적을 만들어내고 싶다" 며 동료들과 팬들을 격려하기도 했었는데, 자책골 직후 굉장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뒤에 수비수를 따돌리고 들어온 마리오 만주키치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안 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즉, 자책골 아니었어도 어차피 99% 골이었던 상황이다.[56] 23번째 우승을 축하하며 바이에른 뮌헨 구단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레전드 23인을 초청했다.[57] 2012-13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팬들이 준비한 카드 섹션. 2000-01 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팬들이 준비했던 바로 그 카드 섹션을 오마주하여 준비한 카드 섹션이다.[58] 바이에른 뮌헨 보드진은 유프 하인케스 감독의 보드진 합류를 원했으나 유프 하인케스는 아내와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그리고 현재는 고향의 자택에서 농사를 지으며 지내고 있다. 가끔씩 인터뷰를 통해 바이에른 뮌헨에게 따끔한 조언을 하며 자문 역할을 하고 있다...가 2017-18 시즌 중반 바이에른의 감독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59] 9 라운드 바이어 04 레버쿠젠에게 홈에서 기록한 패배가 유일한 분데스리가 패배.[60] 오타가 아니다. 경기는 바이에른이 6-1 승리[61] 이게 왜 엄청난 수치냐면 분데스리가는 38라운드까지 진행되는 프리미어 리그, 라리가 등의 여타 빅 리그와는 달리 34라운드밖에 없고, FA컵인 DFB-포칼도 라리가는 홈 & 어웨이로 치르고, EPL은 EFL컵까지 병행하지만 독일은 오직 포칼밖에 없는데다 그것마저 단판 승부로 치러 경기 수가 상당히 적다. 150골이면 실로 엄청난 기록이다.[62] 물론 양학 잘하는것도 강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이다. 안정적으로 약팀들에게 1승을 기대할 수 있는 팀이어야 리그 우승을 할 자격이 있으며, 강팀으로 불릴 수 있는 것이다.[63] 흔히 U자 빌드업이라 불린다.[64] 이 근육부상 문제는 유프 하인케스가 부임하고 트레이닝을 다시 정상화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뮌헨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1년 넘게 매우 간소한 수준의 안첼로티 트레이닝을 실시하다가 하루아침에 원상복귀되었으니 당연한 일.[65] 말 그대로 이탈리아식이다. 예를 들면 안드레아 피를로는 자서전에서 경기 전에 트레이닝을 끔찍하게 싫어하여 경기 전 트레이닝 시간에도 그냥 걷기만 하다가 바로 경기에 출전해 우승컵을 들었을 정도였다고 한다. AC 밀란 감독일때는 선수단을 풀어놔서 개개인의 창의성을 존중해주고, "니들 알아서 해본나" 식으로 풀어놓는게 먹혔겠지만 감독의 권력과 발언권이 보다 강하고, 체계적으로 팀이 운영되는 독일에서는 그렇게 풀어놓고 워밍업을 5분으로 줄여버리면 "이놈이 지금 정신이 나갔나?' 반응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66] 로베리한테 롱패스 → 알아서 컷팅인사이드 하던지 크로스 올리던지 → 꾸역골. 말 그대로 요즘같이 두줄 수비가 일상이 된 시대에서는 지켜보는 팬들로 하여금 답답해 죽을 지경의 경기력을 불러왔다.[67] 중앙에서 공간 찾아다니라고 그냥 풀어놓으면 되는데 역할을 제한시킨 윙어로 사용한다던지, 레알과의 챔스 8강 1차전을 앞두고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어깨부상을 당하자 "전술 변화는 없다. 뮐러를 원톱으로 세우면 되니까"라고 밝히며, 말 그대로 뮐러 사용법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68] 특히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에서 코치를 하던 페터 헤어만을 다시 데려오기 위해 위약금까지 지불하고 다시 뮌헨으로 모셔왔다.[69] 셀틱 원정에서는 전문 공격수가 단 한명도 없는 상태로 원정을 떠나 2대1로 승리를 거뒀으며, 티아고가 쓰러진 중원도 코랑탱 톨리소제바스티안 루디를 매우 적절히 로테를 돌리며 메웠다.[70] 경기를 앞두고 하인케스 왈, 나는 은퇴 후에도 FC 바르셀로나 경기를 챙겨보았고, 네이마르의 움직임을 줄줄이 꿰고 있다고 밝혔다. 그 결과는 경기에 일명 안티 네이마르 플랜으로 그대로 나타났고, 무려 뮌헨이 점유율을 포기하고 전방압박 망을 가동해 PSG를 꼼짝 못하게 만들며 3대1 승리를 거뒀다. 과연 노장의 클래스란..[71] 바그너는 무려 10여년 만에 친정팀으로 돌아왔고, 교체출전 2경기만에 자신이 몸담았던 TSG 1899 호펜하임을 상대로 데뷔골을 넣었다.[72] 반면 뮌헨을 2위로 밀어내고 조 1위를 차지한 파리는 최악의 대진인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16강에서 광탈하고 말았다(...). 안첼로티의 큰 그림[73] 특히 두 번의 무승부는 홈에서 극장골을 두 번이나 허용하며 다 잡은 승리를 놓쳐 더더욱 뼈아프게 다가왔다. 심지어 한 번은 상대가 승격팀인 포르투나 뒤셀도르프였다![74] 특히 이 와중에 뮌헨의 천적이자 전반기에 0대3 대패를 안겨준 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원정에서 무려 5대1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리는 2022년 현재까지 뮌헨이 글라드바흐 원정에서 거둔 마지막 승리이다. 그만큼 뮌헨한테 어려운 게 글라드바흐 원정이다.[75] 스케줄 상 리그와 포칼에서 브레멘을 두 경기 연속 만나는 일정이었다.[76] 그 1무마저도 까다로운 라이프치히 원정에서 거두었다.[77] 이전에는 2009년에 과르디올라의 바르셀로나가 유일한 전관왕을 달성했었다.[78] 다만 이 경기에서 교체 사인 실수로 뮌헨 측이 잠시 12명으로 뛰는 사태가 발생했고, 이에 프라이부르크가 항소하며 몰수패 가능성도 제기되는 등 말이 많았다. 다행히 뮌헨이 승소하며 없던 일이 되었지만.[79] 그러나 이 전술적으로 나아졌다고 하는 것도 사실 비야레알이 작정하고 내려앉아 뮌헨에게 주도권을 준 탓에 그래보이는 것도 있다. 물론 비야레알의 수비가 굉장히 뚫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지만, 나겔스만은 단조로운 U자 볼 돌리기 및 무지성 크로스로 일관하며 패배를 자초했다. 당장 4강에서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이 그 똑같은 질식 수비를 상대로 2경기 5득점을 한 걸 보면 답이 나온다.[80] 졌잘싸라도 했으면 말이 안 나오겠지만 두 대회 모두 졸전 끝에 맥없이 무너져버려서 팬들의 분노를 더 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