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투수 운용에 대한 변호
이 항목이 강병철 전 감독의 능력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이고 실제로 그의 감독 재임기간동안 자잘한 논란이 있었지만, 그는 지금까지의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서 딱 두번 있었던 우승을 당해 끝판대장급 포스를 날리던 팀들[1]을 상대로 가져온 유일한 롯데 감독이다. 다른건 다 논외로 치더라도 이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강병철의 능력을 인정해 줘야 하는 이유가 된다. 1984년 우승은 최동원의 초인적인 힘으로 이룬 것이라 치더라도 1992년 우승의 경우 강병철의 신묘한 투수 운용이 빛났다. 해태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무려 플레이오프에서 패전조 불펜을 기용하며 지는 경기는 철저히 버리는 식으로 힘을 아꼈고, 빙그레와의 한국시리즈에서는 송진우만 굴리다가 자멸한 상대팀 감독 김영덕과 달리 시즌 성적도 평범했던 윤형배를 2차전 깜짝 선발로 기용해 일종의 논개 작전을 쓰기도 했다.[2] 이러한 성향 때문에 그는 만만디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최동원과 염종석의 힘을 빌어 우승했고 그들이 우승 달성 후 혹사 후유증으로 고생한 것 때문에 일부 롯데 팬들에게 여태껏 폄하되기도 하는데, 최동원과 염종석이 망가진 책임이 강병철 혼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2000년대 이전까지 투수 혹사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감독은 한국에 거의 없었던 데다[3] 최동원이 하락세를 탄건 프로 데뷔 이후의 혹사와 더불어 이미 아마 때부터 쌓이고 쌓인 혹사의 누적[4]과 더불어 선수협 관련으로 삼성으로 트레이드 되면서 한동안 운동을 쉬었던 탓이 크다.
염종석의 경우 1992년 한 해를 제외하면 혹사는 없었다. 게다가 당시에는 틈만 나면 등판하려는 염종석을 그가 말렸다. 그러나 이후 방위병으로 복무하면서 부족한 훈련량과 몸 관리의 실패로 1994년 말 결국 부상이 찾아오게 된다.[5] 당시 제반시설이 극히 열악했던 한국프로야구에서도 가장 형편없다고 이름난 롯데의 재활 시스템은 부상의 재발을 불렀고 결국 염종석의 전성기는 어이없게 끝나버렸다.
즉, 염종석의 부상은 2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롯데 구단의 무리한 욕심[6]과 당시의 열악했던 재활 시스템, 방위병[7][8] 제도 등의 복합적인 요소들이 작용한 결과인데 모든 독박은 강병철 감독이 뒤집어 쓴 측면이 있다. 게다가 감독이 김용희로 바뀐 이후에도 방위병 근무를 하면서 계속 등판해야 했고, 그 해를 끝으로 팔꿈치 수술을 확정지은 상태였음에도 한국시리즈까지 등판해서 승리투수가 되었다.
한화, SK 감독 재임시절 혹사에 관해서도 반박의 여지가 있다. 강병철 당시 한화는 기존 한화 투수진이 전부 붕괴된 상태여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며, SK 시절엔 에르난데스와 이승호, 채병용을 혹사시키긴 했지만, 신생팀이었던 당시 SK상황을 고려해야한다. 쌍방울 레이더스는 재정난 때문에 계속된 선수 팔아먹기로 전력이 거덜난 상태였다. 기존 투수진은 물론이고 2차 1픽 신인 마일영까지 현대 유니콘스에 팔아먹은 상태라 제대로 된 투수라곤 이승호, 김원형, 오상민과 2001년 영입된 외국인 에르난데스 뿐이었다. 게다가 김원형은 99시즌 여름 장종훈의 타구에 얼굴을 맞아 1년간 개점휴업 상태였다. (00년 2승 13패 다패왕) 결국 강 감독은 몇몇 투수에게 큰 부하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하필 2001시즌은 유래없는 대혼전이었다.[9] 꼴찌와 4강 컨텐더의 차이가 굉장히 적어서 8개 구단이 전부 4강을 노릴 수 있었고 덕택에 얼마 안 되는 투수진이 더욱 혹사당했다.
그래도 2002년에 이승호의 재활을 주장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어느 정도 휴식을 부여했고[10] 상술한 몇몇을 제외한 나머지 젊은 투수들은 별다른 혹사가 없었다. 아마 시절 부상후유증으로 고생하던 정대현은 프로 2년차 후반기부터 던지기 시작했고 제춘모, 윤길현에게 경험을 쌓게 하고 신예 엄정욱을 최대한 빨리 기용하려는 프런트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혹사는 부인할 수 없지만 온전하지 않은 투수진으로 4강 싸움을 벌였고 팀이 미래를 대비할 수 있도록 최대한 온전하게 남겨주어 후임 조범현 감독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기반을 다졌다. 이승호에겐 불행한 말이지만 신생팀, 창단 초 SK의 상황[11]을 고려하면 어차피 누군가는 제물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승호와 채병용은 조범현 시절 재활을 제대로 안 시키고 투수진이 없다고 계속 뽑아 먹기만 한 탓도 분명히 있다.
2. 비판
그러나 최동원과 염종석이 우승 이후 다시 일어서지 못한 것을 시대적인 착오에만 책임을 묻는 것 또한 옳지 않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을 4번 선발 포함 5경기나 등판시키고 우승을 거둔 것을 단순히 "시대가 시대인데..."라고 옹호하기에는 그 여파가 너무나 컸다. 애초에 투수 혹사라는 개념자체가 없던 시절이지만 이 정도로 특정 투수에게 과도하게 의존한 감독은 1983년의 삼미 김진영 감독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그리고 2007년 부진은 코칭스태프와 정치 놀음한 선수들 잘못도 적지 않게 있지만, 그가 팀을 휘어잡지 못한 것은 분명히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또한 1980~90년대 롯데 시절의 투수 운용을 최대한 선의로 해석한다 해도 그가 동년배 감독 가운데 투수의 체력 안배에 가장 무심한 감독이라는 데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롯데 시절을 제하더라도 한화와 SK에서 보여준 투수운용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혹사라 불리기에 충분했다. 강병철 감독이 재임하던 1994~98년동안 구대성은 선발, 중간, 마무리의 역할 구분 없이 무려 641과 1/3이닝을 던졌으며[12] 이런 기용은 분업화가 확실치 않아서 3이닝 마무리가 흔하던 당대의 다른 팀 투수들과 비교해도 극악한 수치다. 또한 당시 팀의 에이스였던 정민철은 강병철이 재임하던 5년 동안 세 번이나 200이닝을 넘겼다. 이들보다 못하긴 하지만, 송진우와 한용덕의 혹사도 제법 심했던 편.[13] 게다가 구대성을 제외하면 정민철, 송진우, 한용덕 모두가 이후 구위가 하락하거나 부상으로 신음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강병철의 막장행각이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는데, 송진우는 스타일을 바꿔서 이후로도 활약했고, 정민철과 한용덕은 강병철이 쫓겨난 직후에 구위가 하락했기 때문.[14] 그리고 정민철은 1999시즌에 에이스 역할을 했으며, 일본프로야구로 갔다가 부진했기에 강병철 감독 보다는 일본 진출의 영향이 더 커보일 정도이다.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이승호와 페르난도 에르난데스가 유명하다. 이전까지의 상황은 "그 시절엔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어떻게 쉴드를 칠 수 있다지만, SK 시절은 2000년대이다. 이미 혹사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지 않아진 시절이 되었는데, 꿋꿋하게 혹사를 시켰다는 것.[15]
2000년 고졸신인으로 입단한 이승호는 첫해부터 선발, 중간, 마무리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등판해 139.2이닝 10승 12패 9세이브, 2년차 풀타임 선발 시즌인 2001년에는 마무리 알바까지 해가며(2세이브) 220.2이닝을 던지면서 혹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2001년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서 영입한 에르난데스가 34경기에서 무려 233과 2/3이닝을 던졌는데, 이닝 자체도 2000년대 들어와서 다니엘 리오스의 07시즌 기록(234.2이닝)에 이은 2위의 기록이지만 이 선수의 경우 컨트롤에 고질적인 문제가 있는 파이어볼러였기 때문에 경기당 평균투구수가 120개를 상회했다.[16] 제구력이 극도로 나쁜 파이어볼러를 233이닝이나 던지게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결국 이승호는 이후 두 번 다시 데뷔 당시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한채 부상과 재활을 반복하는 전형적인 인저리 프론(유리몸)이 되었고 에르난데스는 바로 다음 시즌인 2002년 초에 어깨부상으로 퇴출되고 말았다.[17]
2002년에는 이승호가 힘들어 하자 고졸 신인투수인 채병용을 혹사의 제물로 삼아 예의 그 선발부터 마무리까지 시즌내내 왔다갔다하는 투수기용을 시전, 고졸투수가 무려 141이닝동안 7승 9패 11세이브, 완투 2회라는 기록을 작성하게 만들었다. 채병용은 이후 2004년을 통째로 쉬면서 재활에 성공하긴 했지만 기교파에 가깝게 변신하면서 데뷔 초의 묵직한 구위는 보여주지 못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야구에서 마무리투수가 규정이닝을 넘기거나 거의 육박하는 경우는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강병철의 경우 단순히 마무리투수에게 이닝을 많이 맡기는 차원이 아니라 시즌 중에 보직을 계속 바꾸면서 선발에게 마무리 알바를 시키거나 마무리를 선발로 돌리는 식의 무차별한 기용을 자주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90년대 초에 김성근이 삼성에서 김성길을 써먹었던 방식이나 김인식이 쌍방울에서 조규제를 써먹었던 방식을 강병철은 무려 2000년대 초까지 고수했다. 논외로 김성근은 나중에 자신의 방식으로 2000년대 후반 SK 왕조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것 때문에 여전히 그 방식을 고치지 못했다.
자신과 스타일이 안맞는 선수를 홀대한다는 비판도 있는데 김응용이나 김성근처럼 선수를 대놓고 구타했다거나[18] 눈밖에 난 선수를 노골적으로 팽해버린 경우는 없다.[19] 정수근[20]이나 손민한[21]과의 마찰은 선수 본인의 성격 탓이 컸고 그럼에도 선수 자체를 홀대한 적은 없었다. 정수근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FA옵션까지 챙겨먹었고 한화 시절부터 죽어라 속을 썩인 노장진[22]을 끝까지 안고가려 하는 등 뒤끝이 심한 지도자는 아니었다.
3. 인재 기용과 타자 코칭
자타공인 강병철 감독의 가장 큰 장점은 선수를 보는 안목과 타자코칭이다. 강병철의 양아들로 대표되는 그의 선수 기용은 성적때문에 까이기도 했지만, 대부분 성공을 거두며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했다.1984년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1984년에는 임호균을 기용해 간간히 최동원을 쉬게 하고 한문연, 조성옥 등 차세대 타자 자원들을 성장시키며 이뤄낸 결과였고 두번째 우승 전 해인 1991년에 대대적인 리빌딩을 단행. 1989~1992년 사이에 입단한 젊은 선수들을(박정태, 김민재, 김선일, 전준호, 이종운, 박계원, 공필성, 김태형, 김상현, 강성우) 발굴, 성장시켜 부임 첫해 정규리그 4위를 기록했다.강병철의 능력이 가장 빛을 냈던 1992년에는 특유의 Hit & Run 야구를 토대로 '남두오성'이라 불리던 전준호, 이종운, 김응국, 김민호, 박정태와 공필성, 김선일, 박계원 등이 활약하며 장타력 부족에도 빙그레와 해태의 뒤를 이어 3위를 기록하게 된다. 당시 신인이던 전준호와 중고신인인 이종운을 중용해 기동력을 극대화하고[23] 신인 박계원을 유격수로 기용하고 "움직이는 화약고"라고 불리울 정도의 불안한 수비를 보이던 공필성을 3루로 보내 내야를 안정시켰다.[24] 여기에 노련한 김선일과 신인 강성우의 콤비를 이룬 포수진은 8개 구단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했다.[25]
더불어 이글스의 수석 코치 시절엔 팀의 주축으로 성장한 장종훈, 강석천 등이 자리잡도록 하기도 하였다.
투수 쪽에서도 리빌딩에 성공했는데, 전해 14승을 올린 박동희가 전반기를 거의 날려먹는 공백이 있었음에도(1992년 8승), 윤형배(8승), 김상현(7승 4세이브), 염종석(17승 6세이브) 등이 가세하며 에이스 윤학길(17승)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이 모든 것을 바탕으로 선동열이 건초염으로 빠진 해태를 플레이오프에서 관광보내고[26][27] 리그 최강의 다이너마이트 타선과 송진우, 정민철, 한용덕이라는 극강 투수진을 보유한 빙그레를 4승 1패로 초살시키며 차지한 것이 두번째 우승이었다.
한화 감독으로 재임하던 1996년에는 일명 신인 4인방(홍원기, 임수민, 송지만, 이영우)을 전폭적으로 기용했다. 그러나 홍원기는 아마시절에 비해 못 미치는 활약으로 인해 1999년 두산에 트레이드되었다. 이외에도 조경택-강인권 더블 포수 체제를 만들었으며 백재호를 키워내기도 했다.
투수 쪽에서는 삼성에서 받아온 빼빼마른 투수 이상목을 정민철-송진우에 이은 확실한 선발 투수로 키워냈다. 거기에 이상열, 김해님 등을 기용하여 중간계투 쪽에서도 어느 정도 풀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상목 외에 선발투수 육성이 미흡하여, 1~3선발 외에 내리막 탄 4선발, 제대로 잡히지 않은 5선발[28]과 중무리 구대성 구조인, 일부 투수들의 혹사에 최적화된 기형적인 투수진 구조를 만들어버렸다.[29] 게다가 이후 입단한 신경현을 잘못된 훈련방식으로 부상당하게 만들었는데, 데뷔 당시까지 야구천재라 불리던 신경현은 이 이후로 하락세를 타며 그저그런 포수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일들로 한화 팬덤에서는 두고두고 까인다.
신생팀 SK시절에는 타자 전향한 지 얼마안된 이호준을 2000 시즌 중 성영재와 트레이드해 영입, 팀의 장타력을 크게 향상시키고[30] 채종범, 이진영을 발굴해 키워 냈으며 지명도 받지 못해 오갈 데 없는 신세였던 조동화, 이대수를 테스트해 신고선수로 받아들이고 투수로 지명한 김강민을 외야수로 전향시켰다. 삼성과 트레이드를 단행했을 때 틸슨 브리또와 오상민을 주고 정경배, 김동수, 김상진, 이용훈, 김태한을 영입했다.[31]
이렇게 영입된 선수들 상당수가 경험을 더 쌓아 조범현 시절 준우승, 김성근의 SK왕조 초창기[32]를 이끈 주역이 되었으니 그 공로는 결코 적지않다.
2006~2007년에도 팀 성적은 나빴지만 리빌딩은 충실히 진행했다. 정말로 친척 아니냐는 소리까지 들었던[33] 강민호는 2000년대 후반 대한민국 최고의 포수로 등극했고 김주찬은 수비와 작전수행에서 문제점을 드러내긴 했지만 정말 죽도록 욕을 먹어가면서도 끝까지 라인업에서 빼지않고 밀어준 결과 결국 호타준족의 외야수로 성장해 공격의 활력소가 되었다. 이인구는 2008년 후반기 정수근의 파행으로 위기에 빠진 롯데 외야진에 구원투수 역할을 했고 꾸준히 투구폼을 고정시키고 꾸준히 선발 수업을 시킨 장원준[34]과 신명철을 내주며 콕집어 트레이드해온 강영식은 각각 선발과 불펜에서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자리잡았다. 무명이었던 정보명을 발굴해 레귤러로 키워내었고 이우민의 경우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3할타율을 강병철 감독 재임기간에 달성하기도 했다.[35]
이들 모두 제리 로이스터가 부임한 2008 시즌 롯데 돌풍, 나아가 양승호 체제에서 2위까지 치고 올라가 1위에 도전하는 핵심 전력이 되었다.
4. 결론
전형적인 리빌딩 전문가 스타일 감독으로, 롯데 자이언츠의 모든 우승을 일궈낸 프랜차이즈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투수진 운용 면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심한 혹사로 인하여 많은 비판을 받는다.[36]타선 리빌딩에는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선수 보는 눈이 뛰어나서 그의 손을 거친 강병철의 양아들들은 상당수 대선수로 거듭났다. 단적인 예로 롯데 감독 2기 시절 남두오성, 1990년대 중반 한화 재임 당시에 비판받으면서도 송지만, 홍원기 등을 중용했고 2000년 신생팀 SK에서도 많은 비난을 들으면서도 이호준, 이진영, 채종범을 주축으로한 강타선을 구축했으며, 2006년 롯데에 부임해서 이대호를 1루로 옮겨 그의 타력을 극대화한 것을 시작으로 이승화, 강민호, 김주찬, 정보명을 중용하면서 경험을 쌓게 해준 것을 보면 분명히 리빌딩과 타격 코칭 능력만큼은 정상급인 감독이다.
특히 이대호의 경우 체중을 줄이기 위해 영남 알프스 전체에서도 가장 등반 난이도가 높은 통도사~백운암 코스를 매일 왕복시켰다고 한다. 해병대 조교 출신 프런트 직원까지 붙여서. 이대호는 그 덕에 엄청난 감량을 할 수 있었고 선구안도 개안되어 그전까지 장타력 있고 3할을 칠 잠재력이 있는 타자에서 타격 3관왕이 될 수 있었다. 그 해 개막부터 스윙 스피드가 달라졌다. 이대호가 여전히 수준 높은 리그에 진출할 때 마다 감량을 엄청나게 하는 것도 이 때의 경험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그저 살 쪘다고 사직구장 관중석 계단 오리걸음 시켜서 이대호 무릎을 한 번 작살냈던 어떤 노망난 사람과는 다르게 강병철은 이대호 감량에 대해서 "이대호가 가진 유연성이라는 장점을 키우기 위해"라는 꽤 합당한 명분을 내세웠고, 그렇기에 롯데를 넘어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라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는 팀 성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그의 손을 거쳐간 팀들은 리빌딩에 성공하여 다크호스로 부상한 적이 많다. 1998년 그를 경질했지만 그 다음 해에서 한화 이글스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2002년까지 그가 감독 생활을 했던 SK 와이번스는 다음 해 한국시리즈 준우승이라는 기염을 토해냈고 마찬가지로 2007년까지 감독 생활을 했던 롯데 자이언츠는 다음 해 암흑기를 탈출하고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그러나 단점 역시 확실하다. 가장 큰 단점은 올드스쿨한 운용으로, 2000년대 롯데 3기 시절은 운용 자체는 지나치게 올드스쿨한 운용으로 인하여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거기다가 투수 혹사 역시 상당히 심한 편이었다. 이러한 점만 보면 김경문과 유사해보이나, 포스트시즌에 극도로 약한 김경문과 달리 강병철은 포스트시즌에 극도로 강한 인물이었다. 실제로 1992년 우승 당시 당대의 명장들인 김성근, 김영덕, 김응용 감독을 모두 물리쳤다.
결론적으로, 야수 육성과 선수 보는 안목이 좋아 리빌딩에 능하며 장기적인 플랜을 잘 짜며 단기전 승부사 기질도 있었지만,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고 특정 투수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구세대적인 투수 운용을 한 감독이다.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 역사에 지금까지 단 두번밖에 없는 한국시리즈 우승을 전부 그의 지도로 이루었다는 점만으로도 최소한 롯데 역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지도자임에는 분명하다.
[1] 84삼성은 최동원을 제외한 나머지 롯데 선수들을 압도적으로 앞섰으며 92빙그레는 정규시즌 우승에 롯데를 14승 4패로 호구잡았다. 거기에 정규시즌 2위였던 해태의 포스도 만만치 않았었다.[2] 윤형배의 깜짝 호투로 2차전을 승리하며 롯데는 쉽게 우승할 수 있었다.[3] 예외라면 최초로 투수 분업 시스템을 정착시킨 1994년의 LG 이광환 감독, 정민태와 정명원(1989년에 입단한 대졸 신인투수 정명원을 누가 혹사시켰는지는 너무도 뻔하다.) 등을 재활시킨 태평양의 정동진 감독 정도 뿐이다. 사람들이 곧잘 잊어먹는데 1984~1985년의 삼성도 김일융과 김시진이 다 해먹었다. 권영호와 황규봉, 양일환이 이 두명을 받쳤고 롯데는 임호균과 배경환, 안창완이 받치는 형태였다. 임호균보다 김시진이 훨씬 나은 활약을 보인 삼성 투수진이 더 강했지만 롯데의 투수 운용 자체가 다른 팀보다 유별나지는 않았다.[4] 84년 한국시리즈 이전에도 최동원은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연세대 시절 박철순에게 폭행당해서 부상을 입은 상태였고, 이후 한국실업야구 시절 육군 경리단과의 한국시리즈 6경기에 다 나오는 등 정말로 말도 안 되는 혹사를 당했었다. 물론, 이 때도 팀은 롯데였다. 단, 감독은 강병철이 아니었고 전임자인 박영길이었다.[5] 염종석은 초등학교 때 팔꿈치 부상, 고교 시절의 구타 등으로 허리에 부상을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정상적인 투구 로케이션이 아닌 다소 변칙적인 투구폼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전문가들 사이에서 내구성에 대한 의문이 있었다. 당시 선동열이 염종석의 투구를 보고 "3년도 못갈 폼"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6] 강병철 감독은 92년 우승 후 구단에게 93년은 염종석에게 휴식을 주고 수술과 재활을 시켜줄 것을 분명히 주장하였으나 롯데 구단은 받아들이지 않았다.[7] 이 방위병 제도는 양날의 검이었다.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경기 출장도 가능하게 해줌으로써 많은 선수들이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서도 선수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제대로 된 훈련과 관리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경기에 나가게 만들면서 혹사가 만연했던 당시 염종석을 비롯한 수많은 선수들이 부상이라는 짐을 지게 만들었다. 염종석 본인도 스포츠 2.0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커리어를 망친 주범으로 이 방위병 제도를 꼽았다. 정민철도 1993년에 방위병 생활을 하느라 홈 경기만 출장했는데 김영덕 감독은 무려 19경기 중 10완투를 시켜버린다.[8] 다만 투수와 다르게 타자들은 오히려 플러스인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로 이종범은 1995년 방위복무로 절반밖에 뛰지 못했음에도 3할 2푼 이상의 고 타율을 기록했다.[9] 정규시즌 1위인 삼성이 넘사벽 수준이었고 그 뒤를 2위 현대가 쫓고 있었다. 3, 4위 자리는 결국 4강 싸움을 하던 두산과 한화가 차지했고, 두산은 준플레이오프에서부터 계속 올라와 끝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거두게 된다.[10] 대신 2군에서 올라온 2년차 신인 채병용이 짐을 졌다.[11] 전신격 팀이었던 쌍방울의 모기업 사정이 좋지 않아, 주축 선수들을 타 팀에 팔아넘기면서 받은 돈으로 간신히 구단을 운영할 정도였으니.[12] 1년에 거의 128~129이닝씩 던졌다. 이 정도면 누가 봐도 혹사가 확실하다. 오히려 이런 혹사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부상이 없이 일본-미국을 거쳐 꾸준히 커리어를 이어간 구대성이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이다.[13] 사실 송진우의 넘사벽스러운 기록에 묻혀서 그렇지 1997~1998년에는 100승을 거두고 부진해서 은퇴의 기로에 몰리기까지 했다. 교육리그에 가서 배워온 서클체인지업을 잘 적용했고, 관리를 받으면서 다시 살아난 것. 한용덕은 김영덕 시절부터의 혹사가 누적된 쪽에 가깝다.[14] 1998년에 2점대 평균 자책점을 찍으면서 회광반조를 보여주는데, 56경기에 올라와 131 1/3이닝씩이나 던졌다. 한용덕의 성적이 수직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1998 시즌의 혹사라고 봐도 무방하다.[15] 참고로 2000년대 이후 한 시즌 200이닝 투구를 시킨 감독은 강병철, 김응용, 김인식, 이광환, 김성한, 김경문, 김기태, 이종운인데 하나같이 소속팀과 끝이 영 좋지 않았거나 말년 커리어가 영 좋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16] 에르난데스의 2001시즌 투구수 4144개는 프로야구 역대 4위 기록이다. 에르난데스 외에 한국프로야구에서 한 시즌 4000구 이상 기록은 모두 4번 나왔는데 모두 1985년 이전에 나온 기록이다. 그리고 에르난데스의 기록이 나온 해는 2001년. 게다가 저기 나온 4000구 이상 던진 사례들은 적당히 구원투수 알바도 하며 기록한거지만, 에르난데스는 순수 선발경기만으로 기록한거다. 2001년 기록한 134볼넷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한시즌 최다볼넷 기록으로 남아 있다.[17] 정확히는 롯데 선수인 메기ᆞ조경환을 에르난데스ᆞ박남섭ᆞ윤재국과 바꾼 것이다.[18] 이 두 감독은 2000년대 초까지 구타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김성근의 경우 이진영이 맞은 이야기를 방송에서 대놓고 하기도 했고, 심지어 김성근이 지바 롯데에서 코치를 하던 시절에는 니시오카 츠요시도 맞았다.[19] 김성근은 간염을 앓고 있는 한대화를 불성실하다며 선수 생활 내내 박대했다. 결국 해태로 트레이드 됐는데 그 때 감독이 김응용이다. 김응용은 구타는 있었어도 적어도 김성근처럼 지병이 있는 선수를 꾀병 부린다고 박대하던 인간 쓰레기짓은 안 했다. 오히려 한대화는 지금까지도 김응용을 자기 평생의 은사로 생각하니까. 물론 김응용도 자기 눈밖에 나서 팽시킨 선수야 여러명있다. 일례로 이호준은 김응용 눈밖에나 인생이 꼬일뻔 하다 강병철에게 구제받았다. 이순철과 김일권 역시 해태 타이거즈 하와이 항명사건과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 등 사건 이후 삼성과 태평양으로 바로 쫒아냈다. 다만 강병철 역시도 구시대적인 마인드로 선수가 귀걸이나 염색을 하는 것에 대해서 바로 커트를 해렸고, 심지어 20대 이상의 프로선수들의 두발규제까지 했다는 당시 선수들의 이야기를 보면 결국 구시대의 꼰대 마인드로 현대 세대에서는 용납 못 할 기행을 많이 저질렀다. 거기다 눈에 걸리는 선수를 때리지만 않았다 뿐이지 휘하의 코치들이 와서 밑의 선수들을 건드렸다는 것을 보면 교묘하게 오더를 내린것일수 있다.[20] 당시 해설인 이순철도 방송에서 대놓고 깠고 이에 롯데팬이 좋아할 정도로 롯데 시절 야구계 전반에서 불성실한 선수로 낙인찍힌 상황이었다. 더욱이 덕아웃 화이트 보드에다가 "강감독. 우리 야구 대범하게 합시다."라고 적은 적이 있지만 강병철 감독은 그걸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넘어갔다. 하지만, 강병철을 대인배라고 보기만도 어려운 것이, 2019년 정수근이 박명환야구TV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강병철도 휴게소에서 정수근을 두고 가거나 2006 시즌을 앞둔 호주 전지훈련 중에 훈련에 불참하고 잠적한 노장진을 찾아오라고 요구하는 등 꼬장을 부렸다고 한다. 정수근은 강병철의 구시대적 야구관을 깠다.[21] 07시즌 정치놀음한 바로 그 선수로 꼽힌다.[22] 노장진은 김영덕 시기에 입단했지만, 강병철 시기에 군 입대를 마치고 1997년에 복귀했다만, 1998시즌중 강 감독의 해임 때 까지 여전히 강병철 감독의 속을 썩였다. 그리고 강 감독의 임기가 시작되던 2006년 개막전에서부터 무단이탈을 저질렀다.[23] 이종운은 뱃을 짧게 쥐는 타법으로 3루타 14개를 기록하며 3루타의 사나이로 등극했고 베테랑이 된 조성옥과 한영준 등은 백업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했다.[24]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필성의 3루수비가 좋았던 것은 아니다. "움직이는 화약고"라는 별명은 선수시절 내내 공필성을 따라다닐 정도로 수비능력은 좋지 않았다. 그나마 3루쪽 강습타구를 특유의 근성으로 몸으로 막아내는 수비를 하였기에 3루수로서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박현승 이전의 3루수 자원이 기껏해야 한영준 밖에 없었던 점도 공필성이 계속 주전으로 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25] 롯데가 우승할때는 언제나 안정된 수비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26] 이강철이 나름 탈삼진 1위로 잘했다만 그 선동열이 없었다.[27] 물론 해태의 막강 타선에 힘입어 그렇게 압도당한건 아니고, 한때 롯데에게 시리즈 전적 2승 1패로 앞었으나,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명언답게 염종석 한명에게 휘둘리며 결국 2승 3패로 밀렸다.[28] 신재웅, 노장진 등이 기용되었는데 노장진은 태업을 했고 신재웅은 별 볼일 없는 투수였다. 강병철이 사퇴하고 이 둘이 치워지면서 5선발은 우승 당시에도 제대로 잡히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한다.[29] 이때 1~3선발은 정민철, 송진우, 이상목이라는 정말 확실한 투수들로 이루어졌기에 우승할 수 있었다. 이 셋의 말로도 좋지 못한데 정민철은 일본 가서 혹사 후유증이 터져나오기 시작했고, 송진우는 기교파 투수로 간신히 버텨나갔으며 이상목은 FA 먹튀로 낙인찍히고 만다.[30] FA먹튀 이미지에 가려있어서 문제지 스탯상 최정 이전 SK 역대 최고 장타자는 이호준이다.[31] 김상진은 전천후로 투수진에서 2시즌 간 활약했고 정경배는 정근우가 입단하기 전까지 SK의 2루를 지키며 2003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일익을 담당했다.[32] 김성근 감독의 전임자인 조범현은 정근우, 최정, 김강민, 조동화, 박재상 등 김성근 왕조의 주축 야수들에게 1군 경험을 부여해 향후 치고나갈 기틀을 마련했다는데 공로가 있다. 반면 투수진에 관해서는 강병철 감독보다 남겨준게 없다. 혹사도 혹사고 선수 관리에도 소홀했다. 투수들이 어떠게 되었는지 보면 김희걸은 박재홍과 트레이드로 떠나고 채병용, 이승호의 몸상태는 더욱 안좋아졌으며 정우람은 김성근 첫해 안식년을 맞이했고 송은범은 놀아 버리고 제춘모는 공익갔다와서 사생활 관리의 실패로 망가졌으며 신승현은 2005년에 포텐이 터졌지만, 군미필+부상으로 김성근은 써먹지도 못했다. 그리고 윤길현, 엄정욱 등도 부상의 늪에서 해맸다.(엄정욱은 자기 관리가 소홀했던 점이 컸지만) FA 김민재 보상선수로 신체 건장한 양훈 대신 킬인식의 혹사로 맛이간 정병희를 선택하거나 신인지명에서 류현진 거르고 이재원과 김성훈을 선택한 것은 덤. (물론 이재원이 현재 포텐이 터졌지만 김성훈은 부상과 구단과의 불화가 겹치며 입단 1년 만에 방출되었다.) 이러한 처참한 상황에 투수FA를 요구한 김성근에게 구단은 당시 해외리그에서 방황하던, 그리고 적지 않은 나이 때문에 언제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을 최향남을 제시했다.[33] 성이 같아서 농담삼아 강병철의 양아들이 아니라 친아들이라는 소리도 나왔다.[34] 양상문 시절에는 특별한 혹사없이 선발수업을 받긴 했는데 투구폼을 못 잡아줘서 여러번 바뀌었다.[35] 그래서 강병철에게 여러모로 감정이 좋지 않은 정수근도 그 양반은 이건 확실해, 어린 애들 좋아해. 그리고 잘 키워내긴 해.라고 평가했을 정도. 어린선수 성애자 원조는 다름아닌 강병철의 부산상고 - 한일은행 선배인 김응용.[36] 이러한 면에 있어서는 김경문과 유사하나, 포스트시즌에 매우 약한 김경문과 달리 강병철은 포스트시즌에서는 강한 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