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9 01:37:48

경복궁 영추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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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정부상징.svg 대한민국 사적 제117호 경복궁
<colbgcolor=#bf1400> 경복궁 영추문
景福宮 迎秋門
소재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건축시기 1395년 (창건) / 1867년 (중건) / 1975년 (복원)
파일:경복궁_영추문_전경.jpg
<colbgcolor=#bf1400> 영추문[1]
1. 개요2. 이름3. 역사4. 구조5. 부속 건물
5.1. 영추문 수문장청(迎秋門 守門將廳)5.2. 영추문 군사방(迎秋門 軍士房)5.3. 영추문 초관직소(迎秋門 哨官直所)5.4. 영추문 훈국군번직소(迎秋門 訓局軍番直所)5.5. 서소위장직소(西所衛將直所)5.6. 누국(漏局)5.7. 일영대(日影臺)5.8. 파수간(把守間)5.9. 직소(直所)
6. 여담

[clearfix]

1. 개요

경복궁의 서문(西門). 주로 문무백관들이 이용했다.

고종 중건 당시 현판 글씨는 허계#(許棨, 1798 ~ 1866)가, 현재 글씨는 서예가 김충현(金忠顯. 1921 ~ 2006)이# 썼다.

2. 이름

‘영추’는 ‘가을(秋)을 맞아(迎) 서쪽의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오행에서 서쪽은 가을을 나타내므로, 경복궁의 서쪽 문에 ‘가을 추(秋)’ 자를 넣은 것이다.#

임진왜란 전에는 '연추문(延秋門)'으로도 불렸다. 송강 정철은 가사 《관동별곡》에서 '연추문'으로 적었다.#

3. 역사

1395년(태조 4년)에 조선 정부에서 경복궁을 창건할 때 건립했으며# 1427년(세종 9년) 6월에 수리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 1865년(고종 2년)에 흥선대원군이 중건했다.
파일:무너진 영추문1.png
파일:무너진 영추문2.png
<colbgcolor=#bf1400> 무너진 영추문 석축
일제강점기일제가 영추문 바로 앞에 전차 선로를 부설했다. 선로 위를 오가는 전차의 진동 때문에 1926년 4월 27일에 석축이 무너졌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전체가 헐렸다.
파일:복원 전 영추문.png
<colbgcolor=#bf1400> 복원 전 평삼문으로 있던 영추문
광복 이후 한동안 철거된 자리에 예전처럼 성문이 아닌 3칸짜리 평대문이 놓여있었다.
<colbgcolor=#bf1400> 영추문 복원 준공을 다룬 〈[[대한뉴스|{{{#gold 대한뉴스}}}]]〉
이후 1975년에 대한민국 정부에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다만, 당시 경복궁에 주둔해있던 군부대를 피하기 위해 북쪽으로 50m 이전했고, 목조가 아닌 1968년에 복원한 광화문처럼 철근 콘크리트로 지었다.[2] 이후 다시 원래대로 경복궁 2차 복원 공사 2단계(2023~2034)에 복원될 예정이다.#

4. 구조

  • 아치을 낸 석축 위에 단층짜리 문루(門樓)를 올렸다. 문루 4면의 가장자리 앞에는 벽돌로 쌓은 통여장을 두었다.#
  • 통여장의 바로 밑 부분 석축에 석누조 2개를 달았다. 이는 비가 올 때 빗물이 빨리 빠져나가게 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총 6칸이다. 지붕은 우진각 지붕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는 전부 양성바름을 했고 그 위에 취두와 용두, 잡상을 올렸으며, 추녀 끝에는 토수를 끼웠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공포는 이익공이다. 공포 사이마다 화반을 놓았으며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문루 내부를 전부 한 공간으로 텄다. 가운데칸 천장은 구조가 다 드러나 보이는 연등천장이며 가장자리 쪽 들보 위는 우물반자로 마감했다. 문루의 바닥은 전부 전돌을 깔았으나 가운데 칸만 마루를 깔았다.
  • 아치은 겉에만 아치를 구성하고 내부의 천장은 반자로 덮어 놓은 모습이다. 반자에는 백호를 그려놓았다. 그러나 고종 때에는 기린 두 마리를 그려두었다고 한다.# 문짝은 붉은색 나무이며 문짝 위에는 문둔테를 두었다.#
  • 경복궁 안쪽 부분의 석축 양쪽에 문루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두었다. 계단에 난간은 설치하지 않았다. 계단과 문루 사이의 통여장 가운데에는 전돌을 쌓은 을 두었다.#
  • 원래 건춘문과는 축이 살짝 틀어져 있었다. 그러나 위에서 말했듯 1975년 영추문 복원 공사 때 북쪽으로 50m를 옮겨 지었기 때문에 현재는 꽤 많이 틀어져 있다.#

5. 부속 건물

5.1. 영추문 수문장청(迎秋門 守門將廳)

파일:영추문 수문장청.png
<colbgcolor=#bf1400> 영추문 수문장청
파일:경복궁 대문 수문장청.png
《북궐도형》의 영추문 수문장청 내부 구성도
景福宮 迎秋門 守門將廳

영추문 안쪽의 수문장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심하게 변형되었다가 헐렸고 경복궁 2차 복원 공사 2단계(2023년~2034년)에 복원될 예정이다.

5.2. 영추문 군사방(迎秋門 軍士房)

景福宮 迎秋門 軍士房

영추문을 여닫는 군사들이 있던 곳이다.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없지만 1888년(고종 25년)에 제작된 다른 배치도인 《경복궁 배치도》에는 존재해서 《북궐도형》작성 이전에 헐린 것으로 추정된다.

5.3. 영추문 초관직소(迎秋門 哨官直所)

파일:영추문 초관직소.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영추문 초관직소 내부 구성도
景福宮 迎秋門 哨官直所

영추문 안쪽의 경비를 담당한 종 9품의 무관인 초관(哨官)의 처소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5.4. 영추문 훈국군번직소(迎秋門 訓局軍番直所)

파일:영추문 훈국군번직소.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영추문 훈국군번직소 내부 구성도
景福宮 迎秋門 訓局軍番直所

영추문 안쪽의 경비를 담당한 훈련도감 병사들의 처소이다.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실내가 모두 트이게 변형되어서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5.5. 서소위장직소(西所衛將直所)

파일:경복궁 서소위장직소.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서소위장직소 내부 구성도
景福宮 西所衛將直所

경복궁 서쪽의 궁성경비를 담당한 오위도총부 소속 위장들의 처소이다.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실내가 모두 트이게 변형되어서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5.6. 누국(漏局)

파일:경복궁 누국.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누국 내부 구성도
景福宮 漏局

시간을 알리던 물시계인 자격루를 관리하던 곳이다.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5.7. 일영대(日影臺)

景福宮 日影臺

해시계가 설치된 대다.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5.8. 파수간(把守間)

파일:경복궁 파수간.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파수간 내부 구성도
景福宮 把守間

경복궁 서쪽의 수문경비를 담당한 곳이다.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실내가 모두 트이게 변형되어서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헐려서 현재는 없다.

5.9. 직소(直所)

파일:영추문 직소.png
<colbgcolor=#bf1400> 《북궐도형》의 직소 일대 내부 구성도
景福宮 漏局

영추문 북쪽 일대에 있던 건물들이다. 원래는 남쪽부터 오위장들이 근무하던 오위장청(五衛將廳), 무관으로 선전관을 겸하는 무겸들이 근무하는 무겸청(武兼廳), 마굿간인 내마구(內馬廐) 2동이 있었으나 후대에 용도를 변경해서 남쪽부터 경복궁 북쪽의 궁성경비를 담당한 오위도총부 소속 위장들의 처소인 북소위장직소(北所衛將直所), 무관으로 선전관을 겸하는 무겸들의 처소인 무겸직소(武兼直所), 훈련도감 소속 국출신의 처소인 국출신직소(局出身直所), 훈련도감 소속 국별장의 처소인 국별장직소(局別將直所)로 사용했다.
1907년(광무 11년)에 제작된 《북궐도형》에는 이미 헐려서 '금무(今無)' 즉 '현재는 없음' 으로 표시하고 빈칸으로 그려두었다. 현재는 잔디로 터만을 정비해 두었다.

6. 여담

  •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4년(고종 31년) 7월에 일본군경복궁을 점령할 때 영추문을 부수고 들어왔다. 물론 다른 문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지만, 일본군은 특히 침전과 가까운 영추문에 공격을 집중시켰다. 자세한 것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서 참조.

}}} ||
<colbgcolor=#bf1400> 영추문 개방을 다룬 〈JTBC 뉴스
복원 후 정부에서는 한동안 닫아놓았다가 2018년 12월 6일에 일반에 개방했다. 그래서 영추문으로 관람객의 출입이 가능하다. 경복궁에서 서촌으로, 또는 그 반대로 가려면 영추문을 이용하면 훨씬 가깝게 갈 수 있으니 참조하자.
  • 2019년에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일본에 있던 《경복궁 영건일기》를 분석한 결과 영추문 현판이 검은 바탕, 흰색 글씨가 아닌 반대였다는 것을 밝혀냈다.#
  • 중건 당시의 현판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파일:영추문 현판(국립중앙박물관 소장).jpg
  • 석축이 무너진 영추문을 해체할 당시 문루로 통하는 작은 벽돌문이 경복궁 자경전의 동쪽 담장으로 이전되어 보존되어 왔음이 밝혀졌다.로드뷰 문화재청은 영추문 소문(小門)이 행방불명됐고 영추문 부재는 남아 있지 않다고 밝혀 왔다.#


[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2] 콘크리트 광화문은 2006년 철거. 2010년에 옛 방식대로 목조로 복원했다.[3] 신무문이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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