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8:42:35

그단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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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의 위치
행정
국가 파일:폴란드 국기.svg 폴란드
시간대 (UTC+1/+2)
포모르스키에
인문환경
면적 683km²
인구 486,492명[3]
인구밀도 712.29명/km²
홈페이지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1. 개요2. 인구 추이3. 역사
3.1. 도시의 건립과 초기 역사 (980s ~ 1308)3.2. 독일 기사단국의 지배 (1308 ~ 1466)3.3. 폴란드의 지배 (1466 ~ 1793)3.4.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지배 (1793 ~ 1919)3.5. 전간기제2차 세계 대전 (1919 ~ 1945)3.6. 전후 (1945 ~ )
4. 관광
4.1. 시내4.2. 교외
5. 기타6. 외부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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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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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dansk 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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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dansk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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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단스크는 발트해에 면한 폴란드항구도시로 폴란드 포모르스키에 주의 주도이다. 독일어로는 단치히라고 부른다. 인구는 2016년 기준 46만명 정도이며 광역권 인구는 약 108만명이다.[4] 그단스크 광역권은 폴란드에서 4번째로 큰 광역권이며 여기에 속한 그디니아는 폴란드의 가장 중요한 항구도시이다.[5]

도시 중심부는 함부르크의 경우처럼 바다에 바로 인접하지는 않고 내륙으로 살짝 들어가 있는데, 비스와강의 지류인 모트와바(Motława) 강 하류가 이 도시를 지나며 항구 기능을 부여했다.

2. 인구 추이

파일:그단스크.png
그단스크 인구추이
[2000-2019년]
2000년
462,995명
2005년
458,053명
2010년
456,967명
2015년
462,249명
2019년
470,907명

3. 역사

파일:gdansk 3.jpg
냉전이 끝나고 오랜 평화가 찾아오기 전까지 이 도시는 너무나도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쳐 왔다. 주인이 이리저리 바뀌는 동안 발트해 최고의 진주에서 지도상에서 지워지는 도시가 되기도 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시발점이기도 했으며, 오랜 기간 유럽을 갈라놓은 철의 장막 붕괴에도 큰 영향을 미친 도시였다. 어쨌든 이 역사적인 도시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3.1. 도시의 건립과 초기 역사 (980s ~ 1308)

그단스크는 폴란드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이자 포모제(포메른), 프루시(프로이센), 발트해 인근의 핵심 도시였다. 대략 980년 경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 최초의 왕 미에슈코 1세[6]가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이를 통해 내륙 국가이던 피아스트 왕조를 발트해로 연결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005년 포메른 일대가 현지인들의 반란으로 폴란드로부터 독립하면서 그단스크도 포메른인들에 의해 개발된다. 11세기 경, 작은 마을 수준이던 그단스크에 대형 제분소와 목재 요새가 차례로 지어지며 점차 도시의 모양새를 갖추었고 인구는 약 2000명 정도로 불어났다. 1102년~1121년 경 동 포메른 일대[7]볼레스와프 3세가 회복하면서 그단스크도 다시 획득하나 1138년 그가 죽은 뒤 폴란드가 분열되면서, 이 지역은 1155년부터 소비에스와프 가문(Sobiesławice)의 포메른 공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따라서 그단스크도 이 시기부터 1294년 까지 소비에스와프 가문의 지배를 받았다. 도시는 성장하여 12세기~13세기 이르는 기간에는 많은 성당들이 세워졌다. 1215년 그단스크는 이 나라의 수도가 되었고 1235년에는 뤼베크 법에 의거해 자유도시로 지정받았다. 1257년 이후엔 한자 동맹뤼베크, 브레멘 같은 도시에서 온 상인들이 이 도시에 정착하기 시작했다.[8] 이때부터 도시는 발트해의 주요 항구도시로 거듭났다. 이후 1282년 소비에스와프 포메른의 마지막 공작이었던 므시치보이 2세(Mściwoj II)가 폴란드를 다시 통합하고 있던 프셰미수 2세(Przemysł II)와 켕프노 조약(Układ w Kępnie, Treaty of Kępno)[9]을 체결해 자신의 사망 시 그가 통치하던 모든 영토를 폴란드공에게 양도하기로 한다. 1294년 그가 사망한 후, 그단스크는 다시 폴란드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3.2. 독일 기사단국의 지배 (1308 ~ 1466)

하지만 폴란드의 지배력은 강하지 못했고, 1308년 포메른 귀족 가문인 시비엥차(Święca) 가문이 중심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의 도움을 받았지만, 그단스크 통치자이던 보구샤(Bogusza)는 폴란드 왕 브와디스와프 1세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보구샤는 도시 바로 옆의 성으로 피신했으나 곧 브란덴부르크의 군대가 성을 포위했고, 궁지에 몰린 보구샤는 결국 독일 기사단에 도움을 요청한다. 독일 기사단은 브란덴부르크군을 몰아냈지만 도시를 폴란드에 돌려주지 않고 그대로 눌러앉아버렸다. 이 과정에서 도시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다고 한다. 기사단은 처음엔 이 도시의 각종 특권들을 폐지하며 도시의 발전을 가로막았지만, 이 도시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곧 특권들을 다시 부활시켜 주었으며 도시는 다시 발전하기 시작해 1361년에는 완전한 한자동맹의 회원이 되었다. 기사단의 도래 이전까지 도시 내에서 소수에 불과했던 독일계 도시민의 수도 이 시기 크게 늘었다. 하지만 이들도 기사단의 통치를 그리 좋아하지만은 않았는데, 기사단은 이 도시와 적국인 폴란드와의 무역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비스와강을 따라 더 많은 부를 창출할 기회를 상실한 도시민들은 기사단에 불만을 가졌다.

3.3. 폴란드의 지배 (1466 ~ 1793)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기사단국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10]에게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세가 크게 꺾였고 기사단은 폴란드가 요구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내기 위해 휘하 도시들의 세금을 크게 인상했다. 기사단은 1431년 폴란드를 침공해 또다시 도시들을 전쟁으로 몰아넣었는데 이 전쟁에서도 패배하여 세금을 올리자 도시들의 불만은 더욱 커져갔다. 결국 참다못한 그단스크(단치히), 엘블롱크(Elbląg, 엘빙), 토룬(Toruń, 토른)의 세 한자동맹 소속 도시들은 주변의 소도시들과 함께 1440년 프러시아 연합을 결성하고, 1454년엔 독일 기사단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며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카지미에시 4세의 종주권을 인정했다. 이와 함께 폴란드 왕에게 출병하라고 탄원하며 함께 참전하기로 했고 이에 응하여 카지미에시 4세는 13년의 전쟁 끝에 독일 기사단국을 종속시켰다.

이 전쟁에서 단치히는 폴란드의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프러시아 연합의 도시들은 폴란드를 따라 참전했는데 부유한 도시였던 단치히는 주로 동맹국에 자금을 공급해주거나 함대를 지원했다. 당시 기사단의 수도성이던 마리엔부르크 성(말보르크 성)은 중부 유럽 최강의 요새였는데 기사단의 군대가 모두 야전에 나가있어 보헤미아의 용병들이 방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이 지날수록 기사단의 자금 상황이 악화되자 기사단은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없었다. 단치히 시는 기금을 조성해 폴란드에 바쳤고 1457년 폴란드는 이 돈을 주며 보헤미아 용병들에게 성을 떠나줄 것을 요청했다. 그렇게 마리엔부르크는 빈 성이 되어버렸고 카지미에시 4세는 피 한방울 안들이고 적국의 수도이자 최강의 요새를 점령했다. 1463년 비스툴라 석호의 해전에서 단치히의 함대는 30척에 이르는 연합군 함대의 대부분을 구성하며 44척의 기사단 해군을 전멸시키고 전쟁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1] 결국 1466년 2차 토룬 평화협정을 통해 폴란드는 그단스크 포모제(Pomorze Gdańskie)[12] 대부분을 병합하고 기사단국을 폴란드의 봉신으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1793년 2차 폴란드 분할로 프로이센 왕국에 넘어갈 때까지 그단스크는 폴란드의 영토로 남게 된다. 카지미에시 4세는 폴란드를 도와준 도시들에게 많은 특혜를 주며 보답했는데 당연히 그단스크가 받은 특혜가 가장 컸다.

16세기 그단스크는 폴란드에서 가장 큰 도시이자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1502년엔 지금도 그단스크의 스카이라인을 아름답게 수놓는 거대한 성 마리아 성당이 지어졌다. 1520년에는 마르틴 루터 번역의 성서가 인쇄되었으며[13] 코페르니쿠스의 저작을 포함한 수많은 다른 서적들도 인쇄되며 선진문화의 중심지로도 기능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도 한번 반란이 일어났는데, 1570년 지그문트 2세가 도시의 특권을 살짝 철회하자 열받은 도시민들이 1577년 후임 왕인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hory)[14]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왕실군은 단치히 근처 루비에슈프(Lubiszewo Tczewskie)에서 반란군을 대파하는데엔 성공했지만, 동유럽의 손꼽히는 요새였던 단치히를 쉽게 점령할 수 없었고 반란군도 왕의 군대를 몰아내지 못하자 결국 도시는 20만 즈워티라는 거금의 배상금과 함께 왕의 도시 지배를 더 확실히 인정하고 왕도 도시의 특권을 돌려주며 반란이 진정되었다.

그단스크는 연방[15]뿐 아니라 한자동맹 내에서도 가장 크고 영향력있는 도시 중 하나였는데, 뤼베크와 더불어 발트해 연안 최대의 무역도시로서 1554년부터 한자동맹이 소멸할 때까지 동맹의 리보니아-프로이센-스웨덴 지구[16]의 수도였다. 또한 1669년 한자동맹의 마지막 회의 때까지 한번도 빼놓지 않고 동맹의 회의에 참석했다. 이 시기 그단스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사실상 유일한 항구로서 폴란드의 주요 교역품인 곡물이 그단스크를 통해 유럽 각지로 수출되었다. 이탈리아의 각 도시들을 비롯해 많은 유럽 나라들이 이 곡물을 경쟁적으로 사들였다. 그단스크와 교역이 가장 많던 나라는 당시 스페인으로부터 갓 독립하여 유럽 최대의 무역, 상업국가로 성장중이던 네덜란드였는데, 네덜란드와는 경제분야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교류도 잦아서 수많은 네덜란드 건축가들이 그단스크에서 모임을 가지기도 했다. 이 시기 그단스크의 거리는 네덜란드 건축가들에 의해 네덜란드 르네상스 양식으로 탈바꿈했고, 현재 복원된 그단스크 구시가의 원형은 이 때의 거리이다. 그단스크는 국제도시의 면모도 보여서 폴란드인, 유대계 폴란드인, 라트비아어를 쓰는 쿠로니아인, 네덜란드인, 남부 네덜란드인(현재 벨기에, 룩셈부르크인), 포메른 방언을 쓰는 독일인 등 수많은 민족이 어울려 살고 여러 언어가 쓰이는 도시였다. 이 무렵 연방은 1581년 체결된 드로히친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 최대도시이자 그단스크에 버금가는 항구도시인 리가(Riga)를 손에 넣었지만 리가의 번영은 그단스크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긴 평화와 함께 도시의 번영은 17세기 초반까지 계속되었다.

하지만 도시는 17세기 중반부터 스웨덴과의 연이은 전쟁에 휘말리며 발전이 멈춰버렸다. 1626년에서 1629년까지 '북방의 사자' 스웨덴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연방 북부해안을 침공하면서 벌어진 전쟁에서는 포모제 지역의 프로테스탄트 마을들이 싸우지도 않고 스웨덴군에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그단스크는 사실상 이 지역에서 고립된 상황이었음에도 끝까지 연방에 충성하며 스웨덴군을 번번이 격퇴했고 해군이 빈약한 연방에 함대를 지원해주기까지 했다. 자치도시인 만큼 자체적인 군대와 함대를 가지고 있었고 강력한 요새로 방어되었기에 스웨덴군이 이 도시를 점령하는 것은 여의치 않았다. 연방은 전쟁에서 지는 바람에 리가와 리보니아 상당 부분을 40년이라는 짧은 통치 끝에 스웨덴에 넘겨줘야 했지만, 스웨덴은 최대의 수확물이어야 했을 그단스크를 함락할 수가 없었기에 원정은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다. 약 30년 뒤 연방이 대홍수로 신음하던 시절 스웨덴은 다시 연방을 침공했는데(1655~1660), 연방의 북부 절반이 스웨덴에 점령당하고 바르샤바까지도 일시적으로 점령당하는 와중에도 연방에 충성하고 스웨덴군을 격퇴해 연방 북서부에서 혼자 스웨덴에 점령당하지 않은 도시로 남았다. 이렇게 큰 전쟁을 거치는 동안 도시는 자신을 지켜내는데엔 성공했으나 그때마다 경제는 괴사 지경에 이르렀다. 1709년엔 선페스트가 유행해 도시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1733~1735년까지 벌어진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는 스타니스와프 1세 레슈친스키를 지지하다 1734년 아우구스트 3세를 지원하는 러시아 제국군에 의해 결국 도시가 점령되기도 했다.

3.4.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의 지배 (1793 ~ 1919)

연방의 국운이 쇠하고 결국 폴란드 분할까지 오게 되었을 때, 그단스크는 1772년 1차 분할 당시 연방의 프루시 주가 거의 모조리 프로이센으로 넘어가는 중에도 격렬히 저항하며 연방에 남길 원했다.[17] 도시는 연방에 남았지만 본토와의 연결은 단절되었고, 결국 1793년 프로이센에 완전히 병합되었다. 도시에 살던 폴란드인 대부분이 도시를 떠나 이주했으며, 1797년에는 학생들 중심으로 프로이센에 저항하는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으나 신속히 진압당했다. 폴란드인의 이주로 말미암아 도시는 빠르게 독일화되었다.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제4차 대 프랑스 동맹을 쳐부순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방어군을 물리치고 1806년 이곳을 점령했다. 나폴레옹은 곧 이곳에 괴뢰정부인 단치히 자유시를 세웠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하고 몰락하자 단치히는 다시 러시아와 프로이센군에 포위되었고 1년여에 걸친 공성전 끝에 다시 함락되어 프로이센의 영토로 돌아갔다. 프로이센 통치기 때는 프로이센의 일부로서 관세동맹의 회원이 되기도 했고,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설립되었을 땐 대표자를 선출해 보내기도 했다. 19세기 후반엔 도시 내 독일인 인구의 증가가 살짝 둔화되고 포메른 지역의 폴란드인이 다시 도시로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단치히가 독일 제국의 일부가 될 무렵에는 이 폴란드인들도 도시 내에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바우티츠키(Bałtycki)'라는 폴란드인 은행이 생기고 1891년엔 '가제타 그단스카(Gazeta Gdańska)'라는 폴란드어 신문이 발간되었다. 1907년에는 폴란드인들을 중심으로 정부의 지나친 독일화에 반발하는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3.5. 전간기제2차 세계 대전 (1919 ~ 1945)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는 우드로 윌슨이 표명한 평화원칙 14개 조항 중 13번째 조항에 의해, '바다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가진 채로 독립했다. 하지만 이미 대다수의 시민이 독일인이던 이 도시는[18] 폴란드에 다시 복속되지 않고, 베르사유 조약에 의해 단치히와 그 근교지역을 묶어 단치히 자유시[19]라는 도시국가로 독립했다. 다만, 폴란드는 같은 조약에 의해 단치히와 관세동맹을 맺어 단치히의 세관을 통제했고 단치히 시내의 우체국 옆에 새로 우체국을 세워 우편 업무도 통제했다. 또한 단치히의 항구도 사용할 수 있었다. 폴란드 정부는 이런 행위들을 '바다로의 자유로운 접근을 위해 불가피하다'며 정당화했다. 따라서 단치히와 폴란드 정부간의 사이는 좋지 않았는데,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가 밀려 바르샤바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을 때 단치히의 부두노동자들은 파업을 벌여 폴란드로 들어가는 탄약의 하역을 거부해 폴란드를 위기로 몰아넣었다. 열받은 폴란드 정부는 전쟁을 바르샤바 전투에서 이겨 전쟁을 승리로 마무리한 뒤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에 보급 창고와 작은 요새를 세우고 소규모 군대를 주둔시켜 단치히를 종속화했다.

자유시는 단치히 굴덴이라는 통화를 발행하고 직접 우표를 만들어 유통했다. 이처럼 자유시는 자신들의 자치권을 강화하려고 애썼지만 폴란드 역시 단치히에서 영향력을 강화하길 원해서 자유시와 폴란드의 관계는 계속 악화되었다. 이러다 보니 폴란드 입장에서도 단치히의 항구를 계속 쓰는 것이 부담스러운 입장이었고, 결국 단치히에서 북쪽으로 20km 떨어진 곳에 그디니아라는 최신 항구를 만들어 발전시킨다. 1925년부터 1934년까지 이어진 폴란드-독일 관세전쟁 때는 바다를 통한 해외 수출에 집중한 폴란드가 그디니아와 실롱스크 간의 철도를 연결하면서 그디니아는 발트해의 중요한 항구로 발전한 반면 단치히는 점차 소외된다. 경제적으로 크게 고통받던 단치히의 시민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크게 불만을 가졌고 결국 1933년 나치당 정부를 세우기에 이른다. 독일 본토의 나치당과 더불어 단치히에서도 1937년부터 본격적인 유대인 박해가 시작되었고, 절반이 넘는 유대인들이 단치히를 떠났다. 단치히의 이런 상황을 이용해 나치 독일은 단치히와 함께 단치히로 향하는 폴란드 회랑을 넘길 것을 폴란드에 요구했고, 폴란드는 당연히 이를 거부하였다.

1939년 9월 1일, 우호친선을 명목으로 단치히 주위에 있던 독일의 전함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이 단치히의 베스테르플라테 요새에 포격을 가하면서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베스테르플라테와 단치히 우체국의 폴란드군은 압도적인 나치 독일의 군세에 맞서 일주일이 넘게 저항하다 전멸했고, 단치히는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다. 나치 점령 하에서 수백명의 폴란드인이 단치히에서 처형되었고 유대인은 거의 절멸당했다. 전쟁 중반을 넘어가면서, 독일의 주요 도시이던 단치히는 연합군과 소련군의 끊임없는 공습에 시달렸고, 1945년나치 독일의 패배가 임박하자 나치 정부는 단치히의 독일인들을 해상운송을 통해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방향으로 대피시켰다.[20]

단치히 최후의 발버둥
1945년 2월 한 행인이 상가 유리창에 나붙은 선전문을 읽고 있다. 왼쪽 : 병사들이여, 가까운 군기지로 응소하라! 오른쪽 : 단치히인들이여, 참아라! 패닉과 루머는 볼셰비키를 돕는다!

그간의 폭격, 그리고 소련군이 당도하기 직전 뒤집어 쓴 포격으로 인해 1945년 3월 30일 소련군이 이 도시를 점령했을 땐 시가지의 90%가 완파되어 있었다. 영화 몰락의 원작인 《히틀러 최후의 14일》에 따르면, 소련군의 단치히 진격 당시 단치히에 있던 티거 전차는 4대에 불과하여 사실상 유의미한 저항 자체가 불가능했다. 히틀러는 단치히 방어를 위한 병력보강을 약속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3.6. 전후 (1945 ~ )

얄타 회담을 통해 연합국은 전후 단치히를 '그단스크'로서 폴란드에 완전히 넘기기로 했고 포츠담 회담에서 이 약속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에 따라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 그단스크는 다시 폴란드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때까지 남아있던 13만 가량의 독일인들은 1950년까지 모두 추방되었다. 이후 1952년부터 196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구시가지의 일부가 폴란드 장인들에 의해 수준 높게 복원되었는데, 이 도시를 다시 복원하는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고 한다.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 도시를 과거의 독일스러운 도시보단 현대적인 도시로 재건하길 원했지만 폴란드 인민정부는 도시가 '다시' 폴란드와 통합되는 걸 상징하기 위해서라도 구시가 일부분을 복원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현재의 성 마리아 성당 주변, 드우가 거리, 그리고 모트와바 강변의 꽤 넓은 지역을 복원했다. 하지만 복원의 원형은 전쟁 직전의 모습이 아닌, 1793년 이전 도시가 연방의 일부로서 잘 나가던 시절로 하였다. 복원 도중에 독일인과 프로이센의 흔적이 보이면 종종 무시되었고 심하게는 '프로이센 반달리즘'으로 인식되어 파괴하기도 했다.[21] 하지만 어찌되었든 도시의 복원수준은 매우 양호했고, 그단스크의 구시가는 매년 많은 관광객을 불러모은다. 재건의 과정에서 도시의 인구는 순수 폴란드인들로 급격히 증가했으며 이에 따라 구시가 주변의 도심공산주의 특유의 칙칙한 성냥갑 형태 건물들이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폴란드 인민 공화국 내에서 그단스크는 주요 공업도시의 위치를 차지했다. 전후 1946년 폴란드 인민정부는 이곳에 레닌 국영 조선소를 설립했고(공산 정권 붕괴 후 현재는 그단스크 조선소로 개명했다) 폴란드의 조선 산업은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공산 정권 시절, 약 2만 명의 노동자가 이 조선소에서 일했고, 따라서 이 도시는 가히 조선 노동자들의 도시였다. 이 노동자들은 이후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1970년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였던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Władysław Gomułka)의 실정으로[22] 불만에 차 있던 그단스크 노동자들은 이 도시에서 대대적인 반정부 시위를 벌였고, 고무우카의 오른팔이던 제논 클리슈코(Zenon Kliszko)가 군대에 발포명령을 내려 41명의 노동자가 사망하는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분노한 폴란드 시민들에 의해 이 시위는 슈체친, 엘블롱크, 그디니아 등 폴란드 북부의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고, 결국 14년간 폴란드를 통치하던 고무우카는 실각하였다.

10년 뒤,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의 조선공이던 레흐 바웬사는 노동 환경도 열악한 가운데 인민정부가 또 임금 인상 없이 생필품 값을 올리자 조선소 노동자들을 규합해 1980년 4월 대대적인 파업 투쟁을 벌였다. 이 파업이 그단스크를 넘어 폴란드 각지로 확대되자 폴란드 정부는 그 해 9월, 자유 노조 설립을 합법화했다. 이에 레흐 바웬사는 1980년 9월 17일,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그 유명한 솔리다르노시치(Solidarność)를 결성하여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지친 노동자들을 규합해 반공운동을 이끌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폴란드 인민정부와 소련은 이 운동을 탄압하려 했다. 1981년 12월 당내 강경파이던 보이치에흐 비톨트 야루젤스키(Wojciech Witold Jaruzelski)가 소련의 지원을 받아 폴란드 공산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그는 1983년까지 계엄령을 내려 자유노조를 탄압했다. 그럼에도 레흐 바웬사가 굴하지 않고 노동운동을 이끈 결과, 1989년 폴란드 공산정권은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솔리다르노시치와 원탁회의를 진행해 민주적인 의회를 구성할 것을 약속했다. 결국 1989년 6월 4일 첫 민주주의 선거에서 솔리다르노시치가 압승을 거둬 공산권 최초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되었다. 그단스크라는 도시는 공산권 붕괴의 첫 시작을 알린 셈이었다. 지금 그단스크에는 이 사건들을 기념하는 솔리다르노시치 박물관과 기념탑이 잘 조성되어 있다.

이 시절의 솔리다르노시치 투쟁은 안제이 바이다대리석 사나이철의 사나이 2부작에서 다뤄지고 있다.

냉전이 끝난 현재, 그단스크는 참으로 오랜만에 긴 평화를 누리고 있다. 그단스크의 구시가지는 관광객으로 북적이고,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폴란드의 주요한 경제, 공업 중심지로 기능하고 있다. 최근 그단스크에는 다국적 기업들이 몰려오면서 그단스크에 지사를 세우고 있으며,# 투자도 활발히 이루어져 그단스크는 폴란드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그런데 2019년, 1998년부터 시장직을 6선 유지 중이었던 파벨 아다모비츠(53) 시장이 괴한에게 암살당했다.# 일각에서 폴란드 현 여당인 우파 '법과 정의당(PiS)'의 혐오 조장적 정치로 인한 사회적 혐오 분위기가 팽배해진 것이 이런 사태를 초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4. 관광

그단스크는 한국의 배낭여행객들이 주로 여행하는 루트에서 많이 비껴나가 있기 때문에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지 않고,[23] 따라서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도 않다. 중부 유럽만 여행하는 배낭여행객이 빡빡한 일정에 따로 가서 보기에도 순수한 관광지로서의 매력이(즉, '볼것이 얼마나 많은가') 이나 프라하, 부다페스트, 크라쿠프 같은 도시들보단 못하기 때문에 종종 지나치는 도시이다. 그렇기에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예 이 도시가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상술한 역사적인 사건들 때문에 이 도시도 나름대로 좋은 관광 포인트를 많이 갖추고 있고, 구시가지도 아름다운 편이기에 유럽에선 상당히 인기있는 관광지인데, 8월 초 3주간 열리는 성 도미니코 축제(St. Dominic's Fair)[24] 때를 피크로 1년 전체적으로 전세계에서 200만 정도의 사람들이 그단스크를 찾는다.# 도시의 과거 역사와 번영상을 온전히 느끼고 싶다면 축제가 열리는 8월 초~중순에 그단스크를 방문하는 것이 좋다. 또한 근교에도 볼 것이 좀 있어 시간이 넉넉하다면 1박 이상을 하며 둘러보는 것도 괜찮다.

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서 크라쿠프, 바르샤바, 브로츠와프 등 폴란드의 주요 관광도시에서 직통으로 연결되는 기차들이 많다. 크라쿠프를 방문하는 여행객 분들 가운데 시간이 며칠 남는다면 크라쿠프-그단스크-바르샤바 순으로 여행하는 것을 추천 드린다. 크라쿠프에서 그단스크로 가는 야간열차가 매일 있으며 약 9시간 정도 걸리기에 잠을 충분히 잘 수 있다. 가장 저렴한 6인 침대칸 기준으로 가격은 약 110즈워티, 우리 돈 35,000원 정도이다. 그단스크에서 바르샤바로 갈 때는 아침에 고속철(EIP)을 타고 가기 바란다. 1시간~ 2시간 간격으로 있으며 소요시간은 2시간 반~3시간, 가격은 약 30,000~40,000원 정도이다. 그단스크-바르샤바를 잇는 야간열차도 있긴 하나 6시간이면 도착하기에 미처 잠을 깨지도 못한 상태에서 여행을 시작해야 하는 불상사를 겪을 수 있다. 15,000원 정도 하는 일반 열차(TLK)도 있지만 4시간 걸린다. 바르샤바에서 여행하고자 하는 분들에게도 이 정보는 역으로 비슷하게 적용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본인이 직접 알아보는 것이 좋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폴란드 철도청에서 교통편 정보를 얻기 바란다. 영어가 잘 작동된다.

폴란드 철도청 PKP Intercity #
크라쿠프 중앙역: Kraków Główny(크라쿠프 그우브니)
그단스크 중앙역: Gdańsk Główny(그단스크 그우브니)
바르샤바 중앙역: Warszawa Centralna

다시 돌아와서 그단스크의 주요 관광지는 다음과 같다.

4.1. 시내

  • 황금 문 (Brama Wyżynna)
  • 드우기 거리 (Długi Targ)
  • 성모승천대성당 (Bazylika Mariacka)
  • 구 시청사 (그단스크 역사 박물관)
  • 솔리다르노시치 기념관(Europejskie Centrum Solidarności): 폴란드의 민주화를 이끈 솔리다르노시치가 그단스크에서 시작했다는 점을 기념하기 위한 박물관으로, 사실상 폴란드 인민 공화국부터 레흐 바웬사의 대통령 당선까지의 역사 전반을 다루는 박물관. 오디오 가이드를 대여해서 설명을 들으면 치밀한 구성으로 배치되어 있는 전시물들과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한국어 음성안내가 없다는 점은 흠이지만, 어느 정도 이상 영어 실력이 된다면 무리 없이 영어 가이드를 들을 수 있다.
  • 그단스크 2차 세계대전 박물관 (Muzeum II Wojny Światowej w Gdańsku): 건물 외형이 상당히 특이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2017년 폴란드 정부와 문화부, 그단스크 시 정부 합동으로 완공된 프로젝트로서,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아트를 이용한 디지털 인터랙티브 전시공간들을 운영한다. 전시 코너중에 독일 크릭스마리네우보트에서 주로 사용했던 에니그마 체험공간이 있다. 전시실의 벽이 렌티큘러방식으로 장식되어 보는 각도에 따라 암호전문이 교차되어 보이며 시뮬레이터를 통한 체험도 가능하다.#
  • 목조 크레인 (zuraw): 항구의 랜드마크. 부두에서 높은 건물 정면 윗쪽이 앞으로 툭 튀어나와 있는 특이한 건물이다. 중세 시대의 포트 크레인으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되고 거대한 사례다. 건물 윗부분에서 밧줄이 내려와 있고 건물 안에는 그 밧줄이 거대한 쳇바퀴[25] 감겨 있어 사람이 들어가 걸어가면서 바퀴를 돌리면 줄에 매달린 배에 있는 무거운 화물이 들어올려지는 구조다. 기록상으로는 14세기부터 이 곳에 크레인이 존재했다고 하며, 지금의 것은 15세기 중반(1442-1444)에 지어진 것이다. 1945년 소련군에 의해 목조 부분은 불타버렸지만 벽 등은 남아있어 복원되었다. 폴란드 게임 위쳐 3에서도 같은 모양의 건물이 등장한 바 있다.

4.2. 교외

  • 베스테르플라테(Westerplatte)
    파일:westerplatte.jpg
    행정구역상 그단스크에 속한 구역이지만 구시가에서 조금 멀리 있기에 교외로 서술한다. 이곳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곳이다. 지금은 바다를 낀 공원처럼 되어 있고 그냥 거닐기 좋다. 공원 군데군데에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전시물과 안내판들이 있고 폴란드군이 1주일간 버티던 벙커도 파괴된 채 그대로 남아있다. 공원 끄트머리에 가면 언덕 위에 반전을 상징하는 큰 조각상이 있다. 그단스크 시내에선 북쪽으로 좀 많이 떨어져 있는데, 대중교통으론 가기 힘들고[26] 택시를 이용하거나,[27] 16세기 갈레온 형태로 개조한 유람선[28]을 타고 모트와바 강을 따라 45분쯤 가면 도착한다. 유람선을 타고 가면 그단스크 조선소를 지나고 연방 시절 도시를 방어하던 성채도 지나기에 한번쯤 타고 갈만하다.
  • 올리바(Oliwa)
    파일:Oliwa park.jpg
    행정구역상 그단스크에 속한 구역이지만 구시가에서 조금 멀리 있기에 교외로 서술한다. 계곡물처럼 깨끗한 시내가 흐르고 숲길처럼 잘 조성된 올리바 공원이 있다. 공원 가운데에는 규모가 꽤 큰 올리바 성당이 있다. 과거 포메른 공작 일부가 이 성당에 잠들기도 했으며 스웨덴의 대홍수를 끝낸 올리바 평화 조약이 체결된 장소이기도 하다. 내부에 들어가면 약 2시간 간격으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한다. 값은 사실상 무료이고 연주 중간에 사제가 기부금 형식으로 동전을 받는다.[29] 이 지역을 반나절 쯤 여행하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다. 가는 방법은 어렵지 않아서 그단스크 중앙역에서 북쪽으로 가는 SKM이라는 열차를 타고 15분 쯤 가서 '그단스크 올리바' 역에서 내리면 된다.[30]
  • 말보르크 성(Zamek w Malborku)
    파일:malbork.jpg
    말보르크 성은(독일어로는 마리엔부르크 성) 13세기에 지어진 독일 기사단국의 수도이자 거성으로, 표면적 상 세계 최대의 성채이며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성 자체도 아름답고 내부에는 독일 기사단에 관한 전시물도 많아 그단스크를 여행한다면 꼭 가볼만한 근교 여행지이다. 그단스크에서 기차를 타고 남쪽으로 약 50분 쯤 가서 말보르크 역에 내린 후 15분 쯤 걸어가면 된다. 자세한 것은 문서 참조.
  • 소포트(Sopot)
    파일:sopot.jpg
    그단스크에서 북쪽으로 약 15km쯤 떨어져 있는 작은 도시로 트루이미아스토의 일부이다. 이 도시는 발트해에 면한 폴란드의 휴양 도시로 발트해의 해변을 보고싶다면 가볼 만하다. 수 킬로미터의 백사장이 뻗어 있고 바다 위로 길이 약 500m의 잔교가 있다. 또 이 도시의 명물로 비뚤어진 집(Krzywy Domek)이란 개성있는 건물이 있다. 그단스크에서 SKM을 타고 25분쯤 가서 소폿 역에서 내리면 된다.
  • 그디니아(Gdynia)
    트루이미아스토 중 하나이며 사실상 폴란드의 항구 기능을 담당하는 도시이다. 그단스크의 항구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 이 도시에서 이루어진다. 관광도시는 아니라서 크게 볼 것은 없으며, 부두에 정박해있는 2차 세계대전 시절의 폴란드 구축함 '브위스카비차(ORP Błyskawica)',[31] 그리고 해양박물관으로 쓰이는 범선인 '다르 포모자(Dar Pomorza)' 정도가 볼 만하다. 부두가 공원처럼 되어 있어 거닐기 좋다. 역시 그단스크에서 SKM을 타고 북쪽으로 35분 쯤 가면 된다.

5. 기타

독일의 지리학자 헤르만 라우텐자흐(Hermann Lautensach)는 포항시의 입지를 단치히와 비슷하다고 보기도 했다. 그가 조선을 답사하던 시기는 1930년대였다.

축구팀 레히아 그단스크의 연고지이다.

유로 2012의 개최도시 중 하나였다.

제26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2027년에 그단스크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에서 주인공 오스카 일가가 1차 대전 이후 전간기부터 2차 대전 종전 이후 추방당할 때까지 거주한 곳으로 중요하게 등장한다. 단치히 폴란드 우체국 방어전 역시 중요한 사건으로 작중에 등장한다.

보드게임 루미큐브도 3년에 한번 주기로 세계대회가 있는데 2024년에는 이 도시에서 개최되었다.

6. 외부 링크



[1] 폴란드어의 ń(eń, 엔)은 스페인어의 ñ(eñe, 에녜)와 같은 음가인 경구개 비음(/ɲ/)을 나타낸다(단, 대부분은 치경구개 비음(/ȵ/)으로 발음함). 따라서 음소적으로는 /ˈɡdaɲsk/(그단스크)로 표기되나, ń이 마찰음 앞에 올 때는 변이음인 활음으로 실현되어 [ˈɡdaj̃sk\](그다잉스크) 혹은 [ˈɡdãj̃sk\](그당잉스크)에 가깝게 조음된다. 1990년대 즈음 한국에서는 '그다니스크'로 표기하기도 했는데, 이는 일본어 표기 グダニスク(그다니스크)의 중역일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서양 관련 지식들이 일본어 중역본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현행 규정용례는 국립국어원의 폴란드어 표기법에 따른 '그단스크'이다.[2] 국제음성기호 표기는 [ˈdantsɪç\].[3] 2023년 6월 30일 기준.[4] 광역권의 큰 도시들인 그단스크, 소포트(Sopot), 그디니아(Gdynia) 셋을 묶어 트루이미아스토(Trójmiasto, '세 도시')라고 하며, 이는 곧 그단스크 광역권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5] 예로부터 그단스크가 폴란드 최고의 항구였지만, 현재는 선박 대형화에 따라 항구 기능 대부분을 바다와 직접 접한 그디니아에 넘겨줬다. 대신 그단스크는 여러 다국적 기업의 지사가 들어오는 사무직 중심의 도시가 되어 여전히 폴란드의 중요한 경제도시로서 기능하고 있다.[6] 970년 경 포메른 일대를 정복했다.[7] 포메른은 독일의 비스마르부터 폴란드의 그단스크에 이르는 발트해 해안과 내륙 일대 지역인데(하지만 시기에 따라 이 포메른이라 부르는 지역이 조금씩 바뀐다. 많은 경우, 일부 영역이 프로이센 지역과 애매하게 겹친다), 이 지역의 중세 역사는 대단히 복잡하다. 11세기까지 이 지역에는 특별히 국가가 생기진 않았고 슬라브계인 포메른 부족이 이 지역에 난립하며 주변의 강대국 폴란드와 보헤미아의 상황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했다. 힌터포메른은 10세기말, 11세기 중반 잠깐 폴란드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12세기부터 두 공작 가문이 각각 지배하는 공국이 두 개 생겨 포메른을 양분하는데, 오데르 강을 경계로 동쪽의 공국은 소비에스와프(Sobiesławice) 가문이 통치(1155~1294)했고 서쪽의 공국은 그라이펜 가문(1121~1637, 폴란드어로는 그리피치 가문)이 통치했다. 소비에스와프 가문의 포메른 공국은 폴란드 공작의 궁내관이 포메른 일대의 땅을 지배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폴란드의 봉신국이었다.[8] 하지만 도시는 여전히 폴란드인들이 주류였고 독일인들이 본격적으로 많아지는 건 14세기 독일기사단국의 지배 이후였다.[9]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독일 기사단국이 이 지역에 대해 공격적인 정책으로 일관하자 이에 직접적인 위협을 느낀 므시치보이 2세가 체결한 조약이다.[10] 1386년 폴란드의 여왕 야드비가는 크레바 법령(Krėva Act)을 통해 리투아니아 대공 요가일라(혼인 후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고 후일 브와디스와프 2세라고 불리게 된다)와 혼인하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를 공동 통치하였다(다만 리투아니아 통치는 명목적이었고, 실질적으로는 대공 섭정이 통치했다). 1399년 야드비가가 사망하자 브와디스와프 2세 야기에우워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 최초의 왕으로서 폴란드를 단독 통치한다. 한편, 요가일라 왕이 폴란드로 떠난 리투아니아에서는 스키르가일라(Skirgaila)가 1386~1392년까지 대공 섭정이 되어 리투아니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고 1392년부터 1430년까지 비타우타스가 리투아니아의 새로운 대공이 되어 리투아니아를 실질적으로 통치했다. 그룬발트 전투에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군은 이 두 명의 통치자 브와디스와프 2세(요가일라)와 비타우타스가 이끌었다. 따라서 아직 두 나라는, 흔히 생각할 수 있는 한 명의 통치자 아래에서 실질적이고 완전한 동군연합을 이룬 상태는 아니었다. 이런 형태의 동군연합은 1444년 요가일라의 장남 브와디스와프 3세바르나 전투에서 전사한 뒤 3년의 공위 기간을 거쳐 새로 즉위한 요가일라의 차남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엘론치크 대에 이루어졌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결성으로 실질적(연방이 두 나라가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한 것은 훨씬 후인 1791년에야 이루어지기 때문)으로 하나의 나라가 되는 건 1569년 루블린 연합으로 이루어진다.[11] 해군이 없어진 기사단은 더이상 수로, 해로를 이용한 무역 행위를 할 수 없어 자금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다.[12] 원래 그단스크는 포메른의 일부로 '포모제 그단스키에(Pomorze Gdańskie)'라고 하지만, 폴란드가 이때 획득한 그단스크와 그 주변을 서부 프로이센과 묶어서 '왕령 프루시'라고 하는 바람에 그단스크는 포메른과 프로이센 양쪽에 모두 속하게 된다. 훗날 프로이센 왕국은 이 지역에 서프로이센 주를 설치했다. 현재 이 지역은 폴란드 포모제 주에 속한다.[13] 곧 루터교도의 반란이 있었으나 진압되었다.[14] 헝가리인 귀족으로 모하치 전투헝가리-크로아티아이 사실상 멸망하고 들어선 합스부르크 헝가리, 오스만 헝가리, 에르데이 공국 3개 지역 중 에르데이 공국의 군주였다. 헨리크 발레지의 도망 이후 세임(Sejm)에 의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헝가리어 이름은 바토리 이슈트반(Báthory István). 소모적인 경기병 부대였던 폴란드 후사르를 전설적인 중무장 돌격 기병대로 개혁한 것으로 이름높다.[15]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1569년 루블린 연합을 통해 100년 넘게 지속되던 동군연합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히 한 나라로 통합했다. 1795년 마지막 폴란드 분할을 서술할 때까지 폴란드를 연방이라 기술한다.[16] 다른 세 지구는 벤덴-포메른 지구(수도 뤼베크), 작센-튀링겐-브란덴부르크 지구(수도 브라운슈바이크), 라인-베스트팔렌-네덜란드 지구(수도 쾰른). 1356년 세개의 지구로 나눴던 것을 기존의 지구들이 너무 넓어 의사결정과 협력에 방해가 되자 1556년 4개로 개편한 것이다.[17] 주민의 상당수가 독일계였음에도, 폴란드에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고 폴란드의 세법이 더 관대했기 때문이었다. 약 150년 후 도시의 상황이 완전히 역전되었음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18] 당시 독일인 비율이 얼마나 되는지는 자료마다 크게 다른데, 대략 85%~90% 정도가 가장 신빙성 있다.[19] 나폴레옹 시대의 단치히 자유시와는 다르다.[20] 단치히 뿐 아니라 동프로이센 전역에서 대피가 이루어졌다. 이 와중에 공습과 잠수함에 의한 공격으로 많은 배들이 침몰했고 수만에 달하는 독일인들이 발트해에 잠들었다. 이 중 빌헬름 구스틀로프호의 참사가 유명하다.[21] 의외로 귄터 그라스가 어린 시절에 살던 집은 지금도 남아있다.[22] 경제 침체에 시달리다 결국 생필품 값을 기습적으로 인상했다.[23] 이때문에 매표소 같은 곳에서 표를 살 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정말 멀리서 왔다면서 반가워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24] 1260년 도미니코회 수도자들이 성 도미니코의 축일에 대규모 미사를 위해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8월 4일을 기념일로 지정해 달라고 교황에게 요구했고 교황이 승낙하면서 만들어진 축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이자 도시의 중심에서는 자연스럽게 많은 상업활동과 문화 교류가 이어졌고 이런 전통들이 축제의 일부로서 비교적 현재까지 이어져오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중단되었다. 축제는 1972년 폴란드 인민정부에 의해 부활되었고 3주간 이어지도록 했다. 현재 이 축제가 펼쳐지면 도시에서는 수많은 예술가들이 거리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대규모 시장이 열리기도 한다.[25] 햄스터 등이 굴리는 쳇바퀴랑 비슷한 것을 사람이 굴려서 동력으로 쓰는 것을 Treadwheel이라고 부른다. 유럽의 중세시대에는 이것을 가지고 만들어진 크레인인 Treadwheel crane이 성당 건설 등 여러 방면에서 쓰였다.[26] 버스를 타려면 106번, 138번 버스가 중앙역에서부터 운행한다. 배차가 많지 않으므로 이곳에서 시간표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27] 편도 약 50 즈워티 (약 15,000원)[28] 서비스 업체에선 해적선으로 부른다. 왕복 티켓 값이 약 40즈워티 정도 한다.[29] 1그로시(3원...)를 내도 눈치 주지 않지만 대부분 50그로시(150원) 이상 동전을 내 주는 편이다.[30] SKM은 트루이미아스토 지역을 연결하는 통근열차 같은 것이다. 배차 간격도 빠르고 가격도 지하철 수준으로 저렴하다.[31] 박물관으로 쓰이는 만큼 깊은 사연이 있는 함이다. 대전 발발 직전에 압도적으로 열세인 해군전력을 조금이라도 보존하기 위해 브위스카비차는 자매함 그롬과 함께 영국으로 대피했고, 이후 영국 해군에 가담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싸웠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