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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양키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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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초창기3. 1920년대~1930년대 중반: 루스게릭의 시대4. 1930년대 후반~1940년대: 디마지오의 시대5. 1950년대: 스텡겔 감독과 베라의 시대6. 1960년대 초중반: M & M 포의 황혼7.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 1차 암흑기8. 1970년대 중후반~1980년대 초반: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등장과 짧은 부흥9. 1980년대 초중반~1990년대 초반: 사상 최악의 암흑기10. 1990년대 중후반: 제국의 귀환과 데릭 지터의 시대11. 2000년대: 가을 야구의 비극12. 2008 시즌: 실망스러운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시즌13. 2009 시즌: 27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14. 흔들리는 시기
14.1. 2010 시즌14.2. 2011 시즌14.3. 2012 시즌
15. 3차 암흑기
15.1. 2013 시즌15.2. 2014 시즌15.3. 2015 시즌15.4. 2016 시즌
16.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17. 참고 자료

1. 개요

MLB뉴욕 양키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초창기

1901년아메리칸 리그를 만든 벤 존슨 회장은 원래 뉴욕에도 팀을 만들려 했으나, 내셔널 리그뉴욕 자이언츠의 반대 때문에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명칭으로 팀을 창단하였는데 이게 뉴욕 양키스의 시작이다. 팀 창단을 주도한 선수 존 맥그로는 구단주와 감독까지 1인 3역을 도맡아 거친 야구를 추구했지만 1902년에 리그 측이 거친 플레이를 규제함에 따라 이웃 뉴욕 자이언츠로 옮겼고, 이 과정에서 오리올스 선수들을 몰래 세트로 그 팀에 데리고 가면서 논란이 되자 뉴욕으로 연고를 이전하는 것에 관한 투표를 진행했다. 이에 자이언츠를 뺀 총 15개 구단이 찬성하는 한편, 팀 소유권도 전 뉴욕시 경찰서장 윌리엄 스티븐 디베리와 사업가 프랭크 패럴에게 팔려 뉴욕으로 연고이전해서 '뉴욕 하이랜더스'로 바꿨다.[1][2][3]

연고이전 첫 경기이던 1903년 4월 22일 워싱턴 세네터스전에서 3-1로 졌으나, 다음날엔 그 팀을 만나 7-2로 이겼다. 하지만 이 시기 이미 수차례 우승을 거둬 뉴욕의 터줏대감이 된 뉴욕 자이언츠의 위세를 능가하지 못했다. 여기에 돈이 없어서 선수를 제대로 잡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로 뉴욕에서 완전히 밀렸다. 홈구장이던 '힐톱 파크'조차 맨해튼브로드웨이 168가 사이 고지대에 나무로 급히 지었다.

이 시기에 그나마 얻은 것이 있다면 팀 명칭인데, 1913년에 원래 하이랜더스였던 팀 명칭을 뉴욕 프레스 기자가 양키스라고 부르면서 오늘날의 뉴욕 양키스라는 팀 명칭이 공식적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리고 양키스의 그 유명한 NY 로고가 탄생하고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의 원형이 처음 도입됐다. 하지만 자신들만의 홈구장도 없어서 뉴욕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폴로 그라운즈를 빌려 쓰는 처지가 계속되었다.[4] 성적도 좋지 않아서 리그 2등을 세 번 한 것이 전부였다. 그중 1904년에는 월드시리즈 문턱에서 폭투 하나 때문에 2위에 그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당시 양키스의 유명 선수는 '잭 체스브로(Jack Chesbro)'로, 그는 20세기 최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41승을 기록하며 팀을 이끌고 있었지만 월드시리즈 진출자가 가려지는 마지막 등판 경기에서 치명적인 폭투를 저질러 월드시리즈 진출 기회를 놓쳤다. 이후 NL의 터줏대감 뉴욕 자이언츠가 AL과의 시리즈를 거부해 버려 아예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아서 의미가 없어지긴 했다.

그러던 그들에게, 제이콥 루퍼트라는 구단주와 밀러 허긴스[5]라는 감독이 등장하면서 변화의 서곡이 울리기 시작했다.

3. 1920년대~1930년대 중반: 루스게릭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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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게릭베이브 루스
새 구단주 루퍼트는 투자를 아끼지 않는 인물이었고, 새 단장으로 보스턴 레드삭스의 에드 배로(Ed Barrow)를 영입했다. 배로는 보스턴의 속사정을 잘 아는 인물이었고, 마침 극장 사업에서 실패하면서 손해를 본 보스턴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의 사정 또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돈으로 과감하게 보스턴의 선수들을 끌어오기 시작했다. 또한 선수뿐만 아니라 루 게릭과 계약한 걸로 유명한 스카우트 폴 크리첼(Paul Kritchell)도 레드삭스에서 영입했다.

한편 배로를 단장으로 영입하기 전에도 레드삭스에서 핵심 선수 한 명을 데려왔는데, 바로 왼손 투수 겸 타자인 베이브 루스였다. 당시 보스턴은 루스의 자질을 과소평가하였고, 보스턴의 구단주 해리 프레이지(Harry Frazee)가 펜웨이 파크 건설 자금 융자 조건을 붙여 12만 5000달러에 양키스에 트레이드를 시키게 된다. 루스의 뉴욕 입성은 이후 양키스가 메이저리그 최고의 팀으로 등극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사실 양키스가 이 12만 5000달러라는 금액으로 야구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꿨기 때문에 헐값이라는 인식이 있으나, 실제로는 매우 큰 돈을 지불한 것이다. 우선 보스턴의 구단주 프레이지는 당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던 레드삭스를 67만 5천 달러에 구입하였으며, 루퍼트는 양키스를 48만 달러에 구매했다. 게다가 루스의 연봉 역시 수만 달러였다(영입 당시 2만 달러였고 최고 8만 달러까지 받았다). 즉 루스의 영입에 구단 인수 비용의 절반 이상을 쓴 것으로, 말 그대로 루스의 영입에 구단의 운명을 건 것이다.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12만 5천 불 이상의 연봉을 받은 선수가 나온 것은 루스의 트레이드 이후 무려 46년 이후였다. 페이롤 제도가 정착된 현대라면 마이크 트라웃이라도 구단 인수 비용의 절반 이상을 주고 구입한다고 하면 반대 의견이 나올 정도이니 납득할 수 없는 거래는 아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루스의 트레이드는 보스턴에 어마어마한 비극을 안겨다줬고, 보스턴이 2004년 월드시리즈까지 우승까지 무려 85년 동안 우승하지 못하면서 밤비노의 저주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블랙삭스 스캔들로 야구가 위기에 처했던 시절, 루스의 홈런포는 미국인들을 열광시켰고, 한 시즌 60홈런이라는 대기록도 이때 나왔다. 그리고 루스만이 아니라 보스턴의 주축 선수들인 웨이트 호이트, 허브 페녹, 칼 메이스[6] 같은 선수들도 일제히 영입하면서 단숨에 팀 전력이 강해졌다. 여기에 루 게릭이라는 최고의 홈런 타자와 그들의 앞뒤에 포진한 외야수 얼 콤스, 밥 뮤젤과 2루수 토니 라제리, 아울러 빌 디키라는 명포수까지 가세한 데다가 밀러 허긴스 감독의 뛰어난 지도력이 시너지를 일으켜 팀 전력은 단숨에 정상을 넘보는 수준으로 급상승했다. 1921 및 1922 시즌에 월드시리즈에서 두 차례 이웃 팀 자이언츠에게 졌으나, 관중 동원에서 밀린 자이언츠가 홈구장을 비워달라고 요구하자 1923년에 미국 최초의 3층짜리 신축 구장 '양키 스타디움'을 세웠다. 1925년 5월 1일에 허긴스 감독은 신인 1루수 루 게릭을 대타로 기용시켜 새 스타의 등장을 알렸다.

이 시기를 상징하는 가장 극명한 말이 바로 살인 타선(Murderers' Row)으로 1927년에 정점에 달했다. 1927년 양키스는 154경기에서 110승 44패 승률 .714를 기록하여 당시 신기록을 세웠고, 페넌트 레이스에서 하루도 1위에서 내려오지 않고 2위와 19경기 차로 마감한 뒤 월드 시리즈까지 4:0 스윕으로 끝냈다. 특히 홈런 생산력이 최고점에 도달해서, 루스는 60홈런, 게릭은 47홈런을 쳤다. 1927년에 루스와 게릭 두 명이 기록한 107홈런보다 많은 홈런을 기록한 팀은 뉴욕 자이언츠뿐이었고 그나마도 109홈런으로 불과 2개 차이였다. 양키스 전체 홈런 수는 158개로 그해 메이저리그 홈런의 약 1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그리고 게릭은 175타점을 기록했는데 이것도 기존 루스의 171타점을 넘은 당시 신기록이었다. 그 외 주축 선수들이 모두 건재했고 에이스 웨이트 호이트, 1번 타자 얼 콤스 등이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을 과시하면서 아메리칸 리그와 월드 시리즈를 평정했다. 이 1927년 팀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강 전력으로 평가되며, 야구뿐 아니라 미국 프로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강력했던 팀으로 인정받기도 한다.[7] 드라마, 영화 등 각종 대중매체에서도 1920~30년대 양키스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연도로서 많이 언급되는 편인데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이 대표적이다.

루스가 팀에 합류한 1920년부터 팀을 떠나는 1934년까지 15년간 양키스는 리그 우승 7번, 월드 시리즈 우승 4번을 차지했고, 이 시기 팀 역사상 첫 리그 우승과 월드 시리즈 우승이 이뤄졌다. 그 사이 허긴스 감독은 1929년 시즌 도중 숨졌고, 이후 아트 플레처와 밥 쇼키를 거쳐 1931년에 전 시카고 컵스 감독 조 맥카시가 부임해 팀의 기강을 다졌다. 그는 클럽하우스 내 카드놀이 금지, 이동 중 정장 착용, 경기 전 면도 등 새 규칙을 마련해 프로야구 선수다운 사명감을 불어넣도록 했으며, 같은 해에는 마이너리그 팀 뉴어크 베어스를 인수하여 팜 시스템을 처음 짜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조지 와이스를 새로 만든 팜 디렉터에 앉혔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뉴욕의 2인자, 3인자 신세에서 벗어나 뉴욕 1인자이자, 전미의 인기 팀이 되었다는 점. 물론 이는 루스의 공이 가장 컸고, 그의 홈런으로 인해 몰려든 관중 수입으로 지은 양키 스타디움은 '루스가 지은 집(The House That Ruth Built)'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4. 1930년대 후반~1940년대: 디마지오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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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 게릭조 디마지오
베이브 루스가 팀을 떠나고, 명포수 빌 디키가 은퇴한 후에도 매카시 감독의 통솔 하에 양키스의 전성 시대는 계속되었다. 무엇보다 최고의 인기 팀으로 거듭나면서 드래프트가 없던 시기 우수 선수 확보가 훨씬 더 쉬웠던 것이다. 그리고 스카우트진도 그리 막장은 아니어서 우수한 선수에 대해서는 끝까지 쫓아다니면서 기어이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루스는 떠났지만 여전한 위력을 보여준 루 게릭이 있었고, 1934년 마이너리그 더블A 팀 샌프란시스코 실즈에서 건져올린 조 디마지오의 활약도 컸다. 하지만, 루 게릭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월드 시리즈 4연패를 달성했으나 1939년부터 심해진 루게릭병으로 인해 비운의 은퇴를 해야 했고, 그 뒤 양키스를 이끄는 책무는 디마지오의 것이 되었다.

비록 디마지오는 성적에 있어서는 동시대의 라이벌 테드 윌리엄스에 미치지 못했지만, 디마지오도 빼어난 선수였고, 56경기 연속 안타와 같은 이슈도 만들어 냈다. 이는 테드 윌리엄스가 세운 한 시즌 4할대 타율과 함께 메이저리그의 '불멸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팀으로서 양키스는 여전히 가장 강력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디마지오는 잠시 팀을 떠났고, 팀 성적도 주춤했지만 전쟁 후에도 여전히 양키스는 강했다.

디마지오가 본격적으로 데뷔한 1936년부터 그가 은퇴하는 1951년까지 양키스는 리그 우승 11번과 월드 시리즈 우승 10번을 차지했다. 이 시기 월드 시리즈에서 진 것은 딱 한 번, 1942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당한 패배뿐이었다.[8] 다른 한편 1939년 루퍼트 구단주가 숨진 후 1945년 1월 댄 토핑과 델 웹, 래리 맥페일[9]이 유족으로부터 팀을 샀고, 배로 단장이 떠나자 맥페일 구단주가 단장 자리까지 꿰찼다.

그러나 새 구단주 맥페일은 루퍼트와 달리 괴팍해서 인내심이 없었고(참고), 그래서인지 1946 시즌 도중 매카시 감독이 쫓겨나자 빌 디키와 조지 뉴엔으로 감독이 2번 바뀌는 등 혼란을 겪다 라이벌 보스턴과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이은 3위로 끝났다. 1947 시즌에는 베테랑 지도자 버키 해리스가 감독이 되어 팀을 다잡아 월드 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를 4승 3패로 이겨 트로피를 땄다. 시즌 후에는 맥페일 구단주가 지분을 팔자 조지 와이스 팜 디렉터가 단장으로 승진했고, 1949년에 '노교수' 케이시 스탠젤 감독을 각각 임명시켜 새 출발을 준비했다.

5. 1950년대: 스텡겔 감독과 베라의 시대

디마지오의 은퇴 후, 미키 맨틀이 본격적으로 부상하기 전까지 팀을 상징한 것은 '노교수(Old Professor)'라고 불린 케이시 스텡겔 감독과 명포수 요기 베라였다. 요기 베라는 1950년대 전성기를 맞아 리그 MVP를 세 차례 차지했고, 또 다른 명투수이자 월드 시리즈의 사나이인 화이티 포드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전성 시대를 이어갔다. 스텡겔 감독 역시 전력을 꾸준히 유지시키면서 디마지오의 은퇴 이후, 1950년대 중반 월드 시리즈 우승 4번과 리그 우승 6번을 기록했다.

특히 이 시기 동향의 브루클린 다저스를 거의 완벽하게 콩라인으로 보내버리기도 했다. 다저스는 매번 양키스에게 거의 다 졌다. 딱 한 번 1955년에 극적으로 승리하긴 했지만 그 외에는 모두 졌다. 양키스는 강한 전력을 구축하면서 1950년대 10시즌 중 두 번을 제외하고 모두 리그 우승을 기록했고, 이때의 활약상으로 인해 스텡겔 감독과 요기 베라, 화이티 포드는 모두 쿠퍼스타운에 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50년대 중반부터 이미 팀의 붙박이 중견수로 활약을 펼치던 미키 맨틀이, 본격적으로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타자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면서 베이브 루스에 거의 근접한 맨틀이었지만, 잦은 부상으로 인해 결국 루스를 넘는 데는 실패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양키의 유연한 상황 대처이다. 1940년대 브랜치 리키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했을 당시, 카디널스가 만들어낸 팜 시스템을 보고 이를 가장 먼저 모방한 팀이 바로 양키스였다.

6. 1960년대 초중반: M & M 포의 황혼

1960년에 스탠젤 감독이 물러나면서 랄프 후크가 감독직을 넘겨받았고, 요기 베라의 노쇠화 이후 팀의 타선은 미키 맨틀 혼자서 이끌어 갔지만, 또 다른 강타자 로저 매리스의 영입 이후 팀 타선은 더 강해졌다. 두 사람의 관계는 정말 좋았지만 문제는 언론. 뉴욕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였던 맨틀에게는 뉴욕 언론이 우호적이었지만, 매리스에게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특히 1961년, 매리스가 베이브 루스의 60홈런 기록을 결국 깨뜨리면서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경기 수가 루스보다 더 많았다는 이유로 기록에 점 표시를 해서 구분하자는 주장이 커미셔너에게서 나오지를 않나, 언론은 대놓고 맨틀이 깨야 했다고 하지 않나...[10]

어쨌든 이 시기는 1920년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메이저리그를 제패한 올드 그레이트 양키스의 마지막 전성기였다. 살인 타선과 디마지오, 베라와 같은 스타들을 계승한 맨틀과 매리스 쌍포는 1960년부터 1964년까지 리그 5연패를 달성했다. 하지만 월드 시리즈에서는 그리 강력하지 못해서 1961년과 1962년 두 차례 우승에 그쳤다. 그리고 1965년에 -영원한 호구-미네소타가 아메리칸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양키스의 시대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7. 1960년대 중반~1970년대 초반: 1차 암흑기

양키스가 암흑기에 빠져든 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전자는 1964년에 구단주가 댄 토핑&델 웹에서 CBS로 바뀌었고, 후크 감독이 단장으로 승진하자 감독직엔 요기 베라가 선임됐다. 양키스의 명성에 의존해 방송 사업에서 돈을 벌어보려던 방송국 CBS는 장기적인 투자 대신에 단기적인 성적에 집착했고, 그것은 오히려 팀에 큰 독이 되었다. 대표적으로 인수 첫 해 리그 우승을 차지했지만 월드 시리즈 우승에 실패하자 감독인 요기 베라를 경질한 것이 그 사례이다. 1966년에 랄프 후크 단장이 감독으로 복귀해 7년을 버티긴 했으나, 이런 우승에 대한 단기 집착은 결국 장기적인 플랜을 갖추지 못하면서 결국 팀의 안정적인 운영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1967년 숙적 보스턴 레드삭스가 21년만에 WS에 나가고, 1969년 같은 동네의 풋내기 팀 메츠가 WS에서 우승하면서 잠깐 타격을 입기도 했다.

더 중요한 원인은 시대의 변화에 뒤쳐졌다는 것. 1965년에 새롭게 도입된 드래프트 제도로 인해 양키스는 과거처럼 인기 팀과 강팀의 명성에 의존해서 스타급 유망주들을 입도선매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전력 보강이 그리 신통치 않았고, 팜 시스템은 비교적 빨리 구축했지만, 신인 수급에서 이제 동등한 위치에서 경쟁하게 된 이상 그리 유리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또한 괴뢰국이나 다름없던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아널드 존슨이 급사하여 구단주가 교체된 것도 영향이 있었다. 애초부터 돈 되는 캘리포니아로의 연고지 이전을 위해 캔자스시티에 잠깐 눌러 앉겠다는 불순한 의도로 구단을 운영했던 당시 에이스는 필라델피아를 뜰 때부터 양키스와의 유착관계가 형성된 상태였고, 양키스는 에이스가 캘리포니아로 터전을 옮길 때 이를 원활하게 해주는 역할을 맡을 예정이었다. 에이스가 양키스의 퇴물 선수 수납장 역할을 함과 동시에 로저 매리스 등의 선수들이 성장할 기미가 보이거나 즉시 주전감으로 성장했으면 양키스에 이들을 팔아 넘기는 운영을 한 것도 이의 연장선이었다. 실제로 당시 에이스는 언론에게 양키스의 산하 마이너 구단이나 다름없다는 비난을 적잖게 받았다. 구단주의 돌연사로 체제가 바뀌면서 에이스가 이런 운영에서 손을 뗀 것도 양키스에 타격이 있었다.

아울러 인종주의도 문제였다. 비록 흑인 선수 도입에 있어서 라이벌인 보스턴 레드삭스보다는 빠른 편이었지만, 스카우트나 팀 수뇌부에 남아 있었던 인종주의로 인해 우수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데 실패했다. 대표적으로 스카우트와 팀 수뇌부의 인종주의로 놓친 선수가 호타준족의 상징 윌리 메이스와 500홈런을 때린 유격수 어니 뱅크스였다. 반대로 1950년대까지 양키스에게 짓눌리던 LA 다저스재키 로빈슨의 영입 이후, 우수한 흑인 선수들을 대거 수급하면서 단숨에 1960년대 최강자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었다. 결국 이런 문제로 인해 양키스는 팀 역사상 첫 암흑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 암흑기는 1972년에 클리블랜드의 선박업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팀을 인수한 후 끝날 기미를 보이게 된다. 그는 1973년에 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사장 게이브 폴을 사장 겸 단장으로, 1974년에는 친정팀 출신 빌리 마틴을 감독으로 각각 불러 암흑기를 끝낼 단초를 마련했다.

8. 1970년대 중후반~1980년대 초반: 조지 스타인브레너의 등장과 짧은 부흥

스타인브레너는 괴팍한 구단주이지, 인내심이 강한 구단주는 아니었다. 또,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 팀원과 프런트를 믿어주는 타입도 아니었다. 하지만 어쨌든 이 양반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투자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다 못해 잡겠다는 선수는 사비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잡아서, 훗날 '사치세'란 제도가 생기는 데 한몫할 정도였다. 집권 초기 좌충우돌하던 스타인브레너가 1974년 대선 당시 리처드 닉슨의 재선을 위한 정치자금 불법 모금에 연루되며 2년간 자격정지를 받자, 게이브 폴 단장은 트레이드와 선수 지키기, 팜 재건 등을 필사적으로 벌여 서먼 먼슨과 같은 포수가 나타났다. 이에 돌아온 스타인브레너가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아 최초의 FA 캣피시 헌터라는 에이스와[11] 레지 잭슨이라는 강타자를 영입하면서 팀은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급기야 1976년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접전을 펼친 끝에, 12년 만에 다시 월드 시리즈를 밟았다. 다만 이때는 당대 최고의 강타선인 '빅 레드 머신'을 구축한 신시내티 레즈에게 팀 역사상 처음으로 0:4 스윕 패배를 당했다. 하지만 1977년1978년에는 LA 다저스를 2년 연속 누르고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이제 다시 전성기가 열리는 것처럼 보였지만...

문제가 생겼다. 먼저 당시 팀의 수장인 빌리 마틴은 팀원 및 구단주 스타인브레너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따라서 해고와 재기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특히 레지 잭슨과 사이가 엄청 나빴는데, 결국 레지 잭슨은 말년에 애너하임 에인절스로 이동했으며, 1977년에는 게이브 폴 단장이 클리블랜드로 돌아간 데다 1979년에는 리더 서먼 먼슨이 비행기 사고로 요절하면서 순식간에 팀의 구심점이 사라졌다. 세 번째로 스타인브레너의 우승 조급증이 또 발동했다. 1980년 리그 최다승을 거두며 ALCS에 진출했지만, 76-78년 ALCS에서 3년 연속 제압했던 캔자스시티 로얄스에게 3연패당하자 그 책임을 물어 감독인 딕 하우저[12]를 해고했고, 선수 노조 파업 때문에 전/후기제로 치러진 1981년에는 전반기 디비전 우승을 달성했으나, 후반기 우승에 실패하자 PO를 앞두고 진 마이클을 해고한 것. 그리고 1981년 월드시리즈에서 다저스에게 먼저 2승을 거두고도 내리 4연패하며 준우승, 이때부터 다시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양키스는 이 81년 월드시리즈에서 패배하고 이후 80년대에 최악의 암흑기를 겪으면서, 베이브 루스 입단 이후 매 10년 단위(decade)의 세대마다 우승을 차지하는 기록이 끊기고 말았다. 90년대와 2000년대에도 우승을 차지했었기 때문에 81년 월드시리즈만 이겼다면 192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각 세대마다 최소 1번은 우승했다는 기록이 2000년대까지 이어졌을 것이다.[13]

9. 1980년대 초중반~1990년대 초반: 사상 최악의 암흑기

단장이나 감독을 자를 수는 있지만, 자른 후의 별다른 대안이 없었던 것이 이 시기의 결정적인 문제였다. 그렇다고 선수 수급을 못했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리키 헨더슨이 입단한 것도 이 시기였고, 데이브 윈필드를 10년 계약으로 영입한 것도 이 시기였다. 아울러 방망이에 있어선 둘째 가라면 섭섭하다 하시는 잭 클락 역시 이 시기에 양키스 줄무늬 유니폼을 입었다. 한 마디로 돈질은 꾸준히 했다는 뜻. 하지만 단장들이 하나같이 제 역할을 못하는 데다 감독의 리더십이 안정되지 않았고, 장기적인 플랜 대신에 그때 그때 비싼 선수들을 사서 메우는 구조로는 도저히 강팀이 될 수 없었다. 이 시기를 비밀번호로 정리하자면 5332245575421.

결국 양키스는 이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PO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는 한 번도 승률 5할을 넘지 못하는 최악의 암흑기를 겪었고, 특히 1990년에는 67승 95패 .414의 승률으로 1966년 이후 두 번째로 꼴찌를 차지하는 수모를 당했다. 심지어 이 기간에 동향 팀인 뉴욕 메츠1986년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1988년에도 내셔널 리그 최고의 성적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양키스 팬들이 피눈물을 쏟게 만들었다. 또한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도 1986년 월드 시리즈 준우승, 1988년, 1990년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덕분에 죽어난 양반이 이 시기의 팀의 주장이었던 돈 매팅리. 매팅리는 양키스 주장 중에서 유일하게 월드 시리즈 우승 반지가 없을 뿐 아니라, 아예 월드 시리즈 한 번을 못 밟아본 주장이 되고 말았다.[14] 이 시기 양키스에 대한 이미지는 그냥 몰락한, 옛날에 좀 잘나갔던 팀. 사실 그럴 법도 한 것이, 1970년대 말 외에는 20년 가까이 우승하지 못했고 성적도 좋지 못했다. 우승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팀의 비애

2022년 1월 팟캐스트에서 그렉 매덕스가 1992시즌 이후 시카고 컵스를 떠날 때 본인은 양키스 행을 원해 뉴욕까지 넘어갔지만 정식 제의조차 받지 못해 결국 애틀랜타로 갔다고 밝힌, 그냥 되는 게 없던 시절.

또한 1991년에 방영된 심슨 시즌 2 10화에서도 당시 양키스의 침체기에 대해서 묘사가 되는데, 지옥에 간 바트에게 악마가 "넌 아직 죽을 때가 아니다. 넌 양키스가 페넌트 레이스에서 우승하면 죽게 되는데... 허, 거 참 그럼 100년도 넘게 걸리겠구먼"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다. 5년 뒤에 죽게 되겠네......

10. 1990년대 중후반: 제국의 귀환과 데릭 지터의 시대

데이브 윈필드의 부진을 보다못한 스타인브레너는 사설 탐정을 고용해 뒷조사를 시켰는데, 1990년에 이런 행각이 발각돼 구단주 자격이 두 번째로 정지됐다. 그래도 괴팍한 구단주가 횡포를 못 부리니 팀에 행운이 생겼던지 동년도에 부임한 진 마이클 단장은 고액 연봉자를 정리하고, 유망주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버니 윌리엄스, 마리아노 리베라 등. 여기에 데이비드 콘, 웨이드 보그스, 폴 오닐, 존 웨틀랜드, 티노 마르티네스 등 외부 영입 선수들이 가세하면서 다시 강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때 리빌딩을 주도한 감독은 1992년에 부임한 벅 쇼월터지만 정작 그는 1995년 디비전시리즈에서의 역전패로 인해 경질, 후임인 조 토레가 이를 기반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벅 쇼월터가 부임한 1992년부터 5할 승률을 회복하기 시작해 리그가 3개 지구로 개편된 1994년에 승률 .619를 기록하면서 오랜만에 지구 1위를 비롯해 AL 전체 1위를 달리며 포스트시즌 진출에 대한 희망을 키웠지만 선수단 파업으로 포스트시즌이 열리지 않으면서 13년 연속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었다. 게다가 양키스의 정신적 지주였던 돈 매팅리가 은퇴를 선언해 불운한 해가 되었다.

마침내 1995년에 와일드 카드로 14년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나, 랜디 존슨이 이끌던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1995 ALDS에서 2승을 먼저 따냈으나 역스윕을 당해 탈락했고, 인내심 없기로 유명했던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쇼월터 감독을 즉시 해고했다. 14년만에 플레이오프를 진출시킨 감독이 단박에 목이 달아난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타인브레너는 쇼월터에게 계약 연장을 제시하긴 했다. 하지만 그 조건으로 그의 측근이자 당시 양키스의 타격 코치였던 릭 다운을 해고할 것을 요구했고 여기에 발끈한 쇼월터가 차라리 자신도 해고해달라고 했던 것.[15]

1996년에는 조 토레 감독의 부임과 함께 코칭 스태프도 일대 변화를 주며 벤치 코치에 돈 짐머를, 투수 코치로 멜 스토틀마이어 코치를 임명해 코칭 스태프를 쇄신했다. 이와 더불어 선수단에도 변화를 주어 신인 유격수 데릭 지터를 주전으로 기용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트레이드를 통해 각각 조 지라디를 주전 포수로, 직전 해에 포텐이 터진 티노 마르티네스를 주전 1루수로 영입해 타선을 강화했으며, 여기에 이전부터 양키스의 타선에서 중심타자로 활약하던 버니 윌리엄스폴 오닐도 여전히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게다가 시즌 도중 합류한 선수들의 활약도 큰 힘이 되었다. 우선 디트로이트에서 슬러거로 이름 날린 세실 필더[16]부터 시작해서, 뉴욕 메츠에서 뛰어난 성적을 쌓았으나 20대 후반부터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가 꼬여버린 데릴 스트로베리, 찰리 헤이스 등과 같이 주전감은 아니더라도 각 포지션에서 실력있는 선수들을 트레이드 및 FA로 영입해 내실을 다졌다. 그리고 투수진은 ML 2년차에 21승을 기록한 앤디 페티트를 필두로 10승 투수를 4명이나 배출했으며, 불펜은 셋업 마리아노 리베라와 마무리 존 위틀랜드 듀오의 활약이 빛이 났다.

그렇게 1996년에는 정규시즌에서 92승 70패를 기록하며 15년만에 지구 우승을 달성했다. 그리고 포스트시즌에서는 ALDS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를 꺾었고, ALCS에서는 시리즈 스코어 4-1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꺾으며 15년만에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대망의 1996년 월드 시리즈에서는 먼저 2패를 하고 내리 4연승하면서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누르고 18년 만에 우승에 성공해 폭발적으로 상승 일로를 걸었다. 다시 돌아온 명가의 유니폼을 입고 싶어하는 선수들은 많았고, 예전과 달리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도 팀에 심하게 개입하지는 않았다. 물론 이는 조 토레가 기가 막히게 그의 비위를 맞춰준 탓도 컸지만.

1997년에도 지터 - 오닐 - 윌리엄스 - 티노로 이어지는 막강한 타선과 페티트 - 웰스 - 콘 선발 트리오, 그리고 새로운 마무리 리베라를 필두로한 불펜을 바탕으로 정규시즌에서 96승 66패를 기록하며 와일드카드로 ALDS 진출에 성공했으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아쉽게 시리즈 스코어 3-2로 패배하며 쓴맛을 봤다. 한편, 시즌 후 브라이언 캐시먼 부단장이 수석부사장 겸 단장으로 승진했다.

1998년에는 역대급 시즌을 보내며 정규시즌 114승을 기록해 지구 2위 보스턴을 무려 22게임차로 제치고 지구 1위 자리를 다시 수성했고, 메이저 전체 승률 1위를 기록하며 가볍게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그리고 이 114승 기록은 2001년 시애틀 매리너스가 116승을 기록하기 전까지 정규시즌 최다 승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자면 우선 호르헤 포사다가 드디어 주전 포수로 거듭났고,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한 새로운 주전 2루수 척 노블락과 3루수 스캇 브로셔스도 팀에 큰 보탬이 된 것이 주효했다. 게다가 지터 - 오닐 - 윌리엄스 - 티노 또한 지난 몇 년간 보여준 활약상을 유지했으며, 주전 선발 투수 로테이션이 모두 10승 이상을 거둔 것 또한 컸다. 불펜은 직전 시즌에 비해서는 성적이 살짝 하락했지만, 마무리 2년차 리베라를 필두로 준수한 경기력을 보여주며 압도적인 정규시즌을 보낼 수 있었다.

포스트시즌에서도 양키스의 괴력은 그대로 쭉 나가서 ALDS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를 싹슬이로 청소하고, 전년도 시즌에서 통한의 무릎을 꿇어야 했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ALCS에서 만나 4승 2패로 복수에 성공하며 2년만에 다시금 월드 시리즈 무대에 진출했다. 월드 시리즈 상대는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압도적인 경기력을 바탕으로 4승 셧아웃으로 2년만에 다시 월드 시리즈 챔피언이 되었다. 1998년 24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은 당시 NHL르 카나디앵 드 몽레알스탠리컵 24회 우승과 더불어 북미 프로스포츠 팀 최다 우승 보유기록와 동률을 이뤘으며, 포스트시즌 포함 메이저리그 역사상 단일 시즌에 가장 많은 승을 기록한 팀이 되는데 125승을 기록해 1906년 시카고 컵스의 기록이었던 118승을 경신했다.[17] 그리고 양키스의 월드시리즈 셧아웃 우승은 1990년 월드 시리즈에서 신시내티 레즈가 기록한 이후 1990년대에 들어선 두번째였다.

아직 배가 고팠던 양키스는 1999년을 앞두고 로저 클레멘스도 영입하고, 기존의 선수들도 지켜내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데릭 지터, 앤디 페티트, 호르헤 포사다, 마리아노 리베라 등 팜 출신의 젊고 재능 넘치는 선수들에다가 버니 윌리엄스, 티노 마르티네스, 데이비드 콘, 폴 오닐, 로저 클레멘스 등의 백전노장까지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하고 있었고 시즌 내내 별다른 문제없이 순항하면서 98승 64패, 승률 .604로 여유롭게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ALDS에서도 텍사스 레인저스를 3전 전승으로 가볍게 저지했고, ALCS에서는 영원한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 상대로 페드로 마르티네즈의 호투에 가로막힌 3차전을 제외하고는 시종 일관 한 수 위의 전력을 과시하면서 4승 1패로 가볍게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상대로 지난해처럼 4승 셧아웃을 기록하며 당대 최고의 팀임을 입증하면서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타이틀을 거머쥐었다.[18] 시리즈 MVP는 시리즈 기간 내내 애틀랜타 타선을 엿 먹이면서 1승 2세이브를 거둔 마리아노 리베라에게 돌아갔다. 정말 놀라운 것은 7월 말 이후로 월드시리즈 4차전 9회에 시즌을 본인의 손으로 끝낼때까지 리베라는 단 1점도 실점하지 않았다.

사장제를 부활시킨 2000년에는 데릭 지터, 스캇 브로셔스, 척 노블락, 티노 마르티네즈, 폴 오닐, 버니 윌리엄스, 데이비드 저스티스 등으로 구성된 타선은 무시무시함 그대로였고 데이비드 콘, 쿠바 출신 파이어볼러 올랜도 에르난데스, 앤디 페티트가 지배하는 선발진, 여기에 최고의 마무리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마리아노 리베라가 군림하는 마운드는 적어도 아메리칸 리그 최강 중 하나였다. 비록 지난 2시즌에 비해 정규시즌 성적은 다소 하락해 87승 74패를 기록했지만 어쨌든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를 1위로 마쳤다. 포스트시즌에서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와의 ALDS를 3승 2패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햐 후, 시애틀 매리너스와의 ALCS를 4승 2패로 마무리 짓고 3년 연속 월드 시리즈 진출을 이뤄냈다. 월드 시리즈에서는 지역 라이벌 뉴욕 메츠를 만나 서브웨이 시리즈가 성사되어 시리즈 스코어 4-1로 메츠를 꺾고 우승을 달성하며 월드 시리즈 3연패에 성공했다. 양키스의 월드 시리즈 3연패는 메이저리그에서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가 1972년에서 1974년에 이뤄 낸 이후로 27년 만이었고, 미국 내 프로 팀들 중에서는 NBA시카고 불스마이클 조던을 중심으로 1996년부터 1998년까지 이뤄낸 이후 불과 2년 만이었다.

11. 2000년대: 가을 야구의 비극

2001년에도 양키스는 여전히 막강한 타선을 바탕으로 95승을 기록해 지구 우승을 달성하며 4년 연속 지구 우승을 기록했다. ALDS에서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꺾었으며, ALCS에서는 116승을 올린 시애틀 매리너스를 누르고 월드 시리즈에 올랐지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랜디 존슨커트 실링 원투펀치의 호투에 눌리고, 두 차례 김병현을 두들겨 얻은 끝내기 승리에도 불구하고 7차전에서 철벽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가 끝내기 안타를 얻어맞아 결국 우승을 내줬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양키스는 다시금 우승 조급증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케빈 브라운, 라울 몬데시, 랜디 존슨, 마쓰이 히데키, 이가와 게이와 같은 선수들은 모두 우승이 잘 안 되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직접 사무실에서 전화를 때려 영입한 선수들이었다. 하지만 마쓰이를 제외하고 모두 망했다(...). 사실 암흑기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2002년부터 2006년까지 매년 지구 우승은 차지했고, 2007년에는 와일드 카드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문제는 2003년을 빼고 월드 시리즈에 오르지 못했고, 더욱이 이 시기에 보스턴 레드삭스가 오랜 밤비노의 저주를 극복하고, 차례나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특히 2004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유일무이한 먼저 3연승 후 4연패로 자멸, 레드삭스에게 86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허용하는 치욕을 맛본다.

일단 이 시기의 포스트시즌 성적을 정리해보자면...

결국 이 때문에 2007년을 끝으로 조 토레와도 결별하게 되었다.

앞에서 서술한 이가와 게이를 영입한 것도 이 시기였다. 문제는 에이스를 들여온 줄 알았더니 똥을 들여오고 만 것. 포스팅비 포함 5년 4,600만 달러를 들였는데 메이저리그 통산 성적은 2승 4패 평균 자책점 6.66(…). 결국 양키스는 1승당 2,300만 달러나 투자한 꼴이 되고 말았고, 여기서 피를 본 양키스는 다나카 마사히로를 영입할 때까지 일본인 투수라면 치를 떨게 되었다(구로다 히로키도 있지만 이쪽은 기존에 MLB에서 뛰던 선수였으므로 제외).[19]

12. 2008 시즌: 실망스러운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시즌

정작 문제는 2008년. 늘 그랬듯이 동부 지구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만 신경쓰면 될 줄 알았는데, 갑툭튀탬파베이 레이스에게 밀려서 지구 3위로 내려앉아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한 것이다.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기 때문에, 부진한 성적이 더욱 아쉬웠던 시즌이 되었다. 게다가 11월 20일,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건강상의 문제로 구단주 자리를 내려오면서 그의 39살된 아들 할 스타인브레너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이렇게 해서 1973년 CBS에게서 양키스 구단을 매입한 이후 36년간 구단주로 군림해오던 조지 스타인브레너 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그의 아들이 새 구단주로 자리를 물려받음으로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20]

그리고 11월 20일, 양키스의 마운드를 책임지고 있던 마이크 무시나긴 프로생활 마감을 선언하고 은퇴하게 되었다. 그 전 주인 2008년 11월 13일 윌슨 베테밋을 닉 스위셔와 맞교환하는 트레이드 형태로 시카고 화이트삭스로부터 스위셔를 영입하고 이후 칼 파바노제이슨 지암비가 팀을 떠나 각각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오클랜드 애슬레틱스로 1년 계약을 맺고 이적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바비 아브레유이반 로드리게스가 팀을 떠나 각각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휴스턴 애스트로스로 이적함으로서 양키스는 고액 연봉자들을 처분하면서 8,900만 달러를 절감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스타인브레너 측은 놀랍게도 조 지라디 감독을 해임하지 않고 유임했고, 오히려 분노의 지름신을 가동하기에 이른다.

파일:2009 Yankees FA.jpg

CC 사바시아(7년 $161M), A.J. 버넷(5년 $85M), 마크 테세이라(8년 $180M) 3명에게 무려 5,000억 원 넘게 쏟아부었다. 이들에게 몰아서 투자하면서 유망주 손실도 크지 않은 편이다. 사바시아, 테세이라, 버넷 3명 모두 영입시 FA 보상으로 다음해 1라운드 지명권을 양보해야 하는 A급 선수들이었지만 이들을 동시에 영입하였기에 1라운드 지명권을 1번만 포기하고 땡이었다. 투수 최대어인 사바시아를 보내고도 1라운드 지명권을 얻지 못한 밀워키 브루어스지못미.[21]

13. 2009 시즌: 27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

새 구장으로 이전한 2009 시즌 초에는 슬로 스타터인 CC 사바시아마크 테셰이라의 부진과 타선의 침체로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에 8연패를 당하고, 최악의 격전 지구인 동부 지구에서 보스턴과 탬파베이 레이스에 밀려 3위까지 떨어지는 등 2억 불 쓰고 그것밖에 못하냐며 무진장 놀림받았다.

그러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부상에서 복귀하면서부터 타선의 파괴력이 증대되고 시즌 초 부진하던 테셰이라 역시 5월을 기점으로 살아나기 시작,[22] 끝없는 질주를 시작하며 앞선 팀들을 근소하게 제치고 1위로 복귀했다. 후반기 첫 라이벌전인 레드삭스 3연전을 스윕하며 1위 체제를 강화하더니 레드삭스전 9승 1패로 상대 전적도 9:9로 맞추고 최종 103승을 기록하며 지구 우승을 확정지었다.

포스트시즌에서는 CC 사바시아-AJ 버넷-앤디 페티트의 막강 스리 펀치와 마침내 포스트시즌 울렁증을 떨쳐버린 알렉스 로드리게스의 맹활약에 힘입어 미네소타 트윈스, LA 에인절스를 연파하고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월드 시리즈에서 맞붙는다. 홈에서 치른 1, 2차전에서 로드리게스가 8타수 무안타 6삼진으로 다시 부진, 테셰이라 역시 정규 시즌에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해 1승 1패에 그쳤지만, 이후 마쓰이 히데키의 맹활약을 앞세워 4승 2패로 27번째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23]

14. 흔들리는 시기

14.1. 2010 시즌

WS 우승 후 디트로이트의 호타준족 중견수[24] 커티스 그랜더슨, 애틀란타의 에이스가 된 하비에르 바스케스멜키 카브레라를 내주는 트레이드로 영입하고 FA로 '출루 귀신' 닉 존슨을 다시 불러들이는 등 실속 있는 오프시즌을 보냈다고 평가되었다.

2010년 2월 22일에 박찬호를 영입했다. 구단 입장에서는 불펜에 괜찮은 우완 베테랑을 추가했고, 박찬호 입장에서는 우승 반지를 간절히 원하는 만큼 양측 다 만족할 만한 계약이라는 평가였지만 박찬호는 1승 후 평균 자책점이 5점 밑으로 내려간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진했고, 결국 데이비드 로버트슨을 육성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꾸면서 시즌 중 케리 우드가 오자 방출한다.

2010 시즌은 300승 가능성을 쌓고 있는 사바시아, 포텐이 터진 휴즈를 주축으로 한 선발진의 강세로 아메 동부 1위를 지켰지만, 리베라 앞을 지켜줄 셋업맨의 부재와 A-로드가 나가떨어지는 등 부진한 타선으로 결국 탬파베이 레이스에 1승 차 1위를 내준다.

어찌되었건 일단 와일드 카드를 통해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ALDS에서는 미네소타 트윈스를 가볍게 떡실신시키고 ALCS로 올라왔다. 상대는 텍사스 레인저스. 4-2로 패배했다. 2004년 보스턴 레드삭스에게 리버스 스윕당한 뒤로 6년 만에 맞는 사상 3번째 CS 패배였다. 텍사스의 불타는 타선을 막지 못하고, 첫 경기 승리 후 내리 3연패를 당했다. 이미 이 시점에서 WS 진출 가능성이 적었던 게 시리즈를 마지막까지 끌고 갔어도 그때 나올 선발 투수는 3차전을 완벽하게 틀어막은 클리프 리. 양키스는 텍사스 레인저스와의 클리프 리 쟁탈전에서 패배한 것을 뼈저리게 후회해야 할지도. 결국 '보스' 조지 스타인브레너 전 구단주가 타계한 해에 그의 영전에다 우승 트로피를 바치려던 계획은 이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14.2. 2011 시즌

2011 시즌을 대비하는 스토브 리그에서는 제국답지 않게 조용했다. 돈 좀 지르려고 했는데 엉뚱하게도 필리스에게 클리프 리를 뺏기면서 돈을 마땅히 쓸 데가 없어졌다.

별다른 전력 보강은 없었고, 지구 라이벌 탬파베이 레이스의 마무리 라파엘 소리아노를 셋업맨과 포스트 리베라로 활용하기 위해 영입한 정도에 그쳤다. 연봉 1000만이 넘는 특급 마무리를 마무리가 아닌 셋업으로 쓰기 위해서 데려왔는데도 돈을 별로 안 썼다는 소리를 듣는 제국 퀄리티 한때 미네소타 트윈스의 투수 칼 파바노 영입에 나선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파바노는 미네소타와 재계약했다. 사실 파바노가 양키스에게 먹튀짓하고 욕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서로가 서로를 원할 확률은 제로라 봐도 무방하다.

이로 인해 양키스의 선발진이 상당히 불안해졌다. CC 사바시아를 제외하면 200이닝을 장담할 수 있는 선발이 전무해진 심각한 상황. 이로 인해 페팃에게 까칠하게 굴었던 구단이 갑자기 계약을 급하게 제시하며 조급해졌지만 앤디 페티트는 은퇴. 본래 리가 올 경우 CC 사바시아-클리프 리-AJ 버넷-앤디 페티트-필 휴즈(좌우 균형을 맞춘다면)의 강력한 5선발을 구축할 수 있었지만, 정작 리는 필리스로 가버렸고, 버넷은 2007년 만한 성적을 못내고 있었고, 휴즈는 겨우 풀 타임 첫 해였고, 페팃은 더 이상 없었다.

2011 시즌이 시작되고 휴즈가 정신 못 차리자 급한 마음에... 로또식으로 영입해뒀던 왕년의 에이스들인 프레디 가르시아바톨로 콜론을 로테이션에 올렸는데, 이게 의외로 대박이 나서... 일단은 근근이 선발진을 꾸려갔다. 따라서 트레이드 데드라인 전까지 선발 영입을 하지 않을까 했는데, 놀랍게도 어떤 영입도 없었다. 일단 사바시아가 건재하고, 휴즈의 부활을 기대한 듯. 또 이반 노바라는 신예도 터진 상황이라 당장 급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다만 계속하여 완디 로드리게스나 카를로스 잠브라노(...), 제임스 실즈 등 여러 선발 투수들과 염문설을 뿌렸다.

불안했던 시즌 초 예상과는 다르게 결국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타이틀을 따 내는 데 성공하였다. 가르시아, 콜론, 존스, 차베즈 등 로또를 긁는 심정으로 영입한 선수들이 대박을 쳐준 것이 컸다. 데릭 지터의 3,000안타와 마리아노 리베라의 올타임 세이브 경신 등 화젯거리도 넘쳐났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메이저리그 대표 얼짱 드미트리 영의 동생 델몬 영이 갑툭튀한 것은 막지 못해 5차전 접전 끝에 2승 3패로 ALDS에서 탈락했다.

14.3.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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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3차 암흑기

15.1.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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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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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 2015 시즌

오랜만에 지름신 강림하고서도 결국 포스트시즌 진출을 또 실패한 상황에서 양키스는 결코 원치 않는 A-ROID가 복귀한다. 이리되면 사치세는 더 늘어나는 건 당연지사. 이미 기량이나 몸상태 모두 정상적이라고 할 수 없는 판국이고, 양키스는 이미 그를 지명타자로나 활용할 방침을 진작 내세웠다. 공백인 3루는 후반기 양키스로 트레이드 된 체이스 헤들리와 재계약을 통해 채우고, 지터가 은퇴한 뒤 유격수 자리에는 역시 시즌 후 트레이드로 데려온 디디 그레고리우스로 채웠다. 그리고 백업으로도 이제는 활용가치가 떨어진 스즈키 이치로를 잡지 않았다.

다만 선발진은 들인 돈에 비해 계속 불안한 상태. 다나카 마사히로는 전반기에는 굉장한 페이스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후반기를 거의 날려먹었고, 부상이 언제 다시 크게 도지게 될지 모를 불안한 요소를 가졌다. C.C. 사바시아는 여전히 살아날 수 있다는 장담을 하지 못한다. 즉, 현 양키스의 원투펀치를 해줄 두 투수의 건강이 불안 상태. 시즌 중반 보스턴에서 방출된 카푸아노가 일본 진출 루머와는 달리 양키스와 재계약했지만 일명 디지털 투수라 불릴 정도로 호투할 때와 털릴 때가 극명하다. 마이클 피네다는 기대주지만 확실하게 선발 라인을 지켜줄 수 있느냐는 아직 미지수. 이 셋을 제외한 나머지 선발 자리는 사실상 허허벌판이다. 트레이드로 온 브랜든 맥카시는 다저스와 계약을 맺으며 떠나버렸다. 거기에 구로다 히로키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돌아가는 걸 결정하면서 양키스와 결별해 2014 시즌 유일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지킨 투수의 공백까지 생겼다. 에고, 지터도 없고, 구로다도 없고...

한편 A-ROD는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양키스 수뇌부에 사과를 했으나, 여론은 싸늘.

2월 15일 2013 시즌 후 마리아노 리베라와 함께 은퇴한 앤디 페티트의 등번호 46번을 영구결번 처리한다는 발표를 하였다. 양키스 제2 전성기 때 활약한 선수 중 한 명이라지만 약을 복용한 약쟁이 선수를 영구결번한다는 소식에 야구 팬들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한국 시간 2월 17일, 호르헤 포사다의 20번, 버니 윌리엄스의 51번 역시 영구 결번으로 처리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약물 관련해서는 둘 다 깨끗한 선수이고 양키스의 전성기를 이끈 주축 멤버이니 더 일찍 영구 결번을 했어도 당연했을 것이다.

4월 6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홈 개막전에서는 다나카 마사히로가 선발로 나섰지만 4이닝 5실점 부진을 보였고, 타선도 전체적으로 무기력, 수비도 실책이 나와 6:1로 대패.

5월 10일 AL 동부 지구 1위를 유지했다. 크리스 영의 돋보이는 활약과 타선 먹튀라 불렸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마크 테세이라가 타선에서 제몫을 하고, 앤드류 밀러델린 베탄시스가 있는 탄탄한 불펜진을 원동력으로 순항하였다.

허나 이후 페이스가 주춤거리면서 1위를 탬파베이에게 내주고, 5월 22일에는 피네다, 23일은 사바시아가 털렸다. 데릭 지터로빈슨 카노 이후 새로운 양키스 키스톤 디디와 드류는 공수에서 양키스 팬들의 뒷목을 잡게 했다. 드류는 돈이 너무나 아까운 행보를 보여주고 있고, 디디 그레고리우스는 여러모로 지터의 말년과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며 까였다.

7월 19일까지 2위 볼티모어와 3.5경기 차이로 지구 1위를 달렸고, 7월 31일에는 6경기 차이까지 벌렸다. 그러나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10연승 질주를 하면서 결국 현지 시간으로 8월 13일, 아메리칸리그 2위로 내려앉고 말았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인 8월 14일,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맞대결에서 카를로스 벨트란의 극적인 역전 스리런 홈런으로 승리하면서 다시 1위를 찾아왔다.

그런데 현지 시간으로 9월 12일, 양키스는 마크 테셰이라가 부상으로 인해 올 시즌을 마감한다고 발표했다. 어쩐지 시망의 기운이 양키스에게로 향함을 느끼면서...

9월 13일 현재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홈 4연전 중 3개를 내주며 경기 차가 4.5개로 늘어나고 선발 투수가 3경기 모두 개털리며 굴욕을 당했다. 이제 믿을건 다낚아뿐. 그저 믿을 것이라곤 와일드카드밖에 없는 것 같으나... 텍사스 레인저스가 3게임 차로 바짝 추격하는 중이라 안심할 수가 없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 결국 토론토가 지구 1위를 빼앗고, 텍사스도 지구 1위가 되면서 급해졌다. 신에게는 아직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현지 시간 10월 1일, 숙적 보스턴 레드삭스를 4 대 1로 물리치면서 와일드카드 진출을 확정지었고, 아울러 아메리칸 리그 소속 팀 중 최초로 1만 번째 승을 달성하는 기록도 덤으로 세웠다. 확실한 이변이 없는 한,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와일드카드 단판 승부를 치르게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자세한 내용은 2015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게임 문서를 참조.
와일드카드를 따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한때 여유있게 지구 선두를 달렸던 상황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데드라인 때 토론토가 적극적으로 전력 보강에 나선 것과는 대조적으로 매우 소극적인 행보를 보였는데 이것이 정규 시즌 지구 우승 실패에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토론토와의 후반기 맞대결에서 부진했던 것이 매우 아쉬울 듯.

또 하나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사바시아가 10월 5일 알콜 중독 치료를 위해서라며 포스트시즌을 불참. 전성기 때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지만 그래도 선발진에 있어야 할 선수가 와일드 카드 경기를 앞두고 이탈한 건 양키스에게 찜찜한 소식.

10월 6일 홈에서 펼쳐지는 휴스턴 애스트로스와의 와일드 카드 게임에 예정대로 다나카 마사히로가 등판했지만 5이닝 동안 피홈런 2방을 맞으며 5이닝 2실점이라는 미묘한 피칭을 했고, 정규 시즌에 많이 등판한 여파인지 델린 베탄시스도 실점을 한다. 타선은 3일을 쉬고 등판한 댈러스 카이클을 상대로 6이닝 동안 단 1점도 뽑아내지 못하고 3안타 영봉패. 가을마다 물빠따가 되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지만 이 단판 경기에서는 정말이지 해도해도 너무했다. 지터가 있을 때 그나마 물빠따질이라도 했지만 이제는 공기가 따로 없다. 유체역학으로 검증해야...

당장 프런트에 대한 비난이 급등할 전망이다. 그야말로 '시일야방성대곡'이다(...) 특히 우승을 위해선 큰 돈도 마다하지 않았던 조지 스타인브레너와 달리, 자린고비 모드가 된 아들 할 스타인브레너와 행크 스타인브레너에 대한 문제점을 걸고 넘어질 공산이 크다. 아울러 동부 지구 우승을 위해 확실한 전력 강화를 시전한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단장 앤소니 앤소풀루스와는 달리 구단주의 알뜰살뜰(?) 경영으로 전력 강화는 고사하고 그저 바라보기만 한 단장 브라이언 캐시먼의 무능에 대한 질타가 높아질 것이다. 또한 사바시아가 알콜 중독 재활로 들어가 당장 선발에 대한 공백이 생겼고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다나카 마사히로마저 하향화를 겪는 대참사를 일으키면서 내년도 선발진 강화라는 과제가 발생했다.

여기에 포스트시즌만 되면 양키오적 고질적인 '물빳다화'가 되어버리는 타선에 대한 대대적인 손질 역시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2015 아메리칸 리그 와일드카드 게임 경기였다. 큰 맘 먹고 영입한 선수들이 포스트시즌에선 공기화가 되어버린 것은 물론, 테셰이라는 부상으로 아예 뛰지도 못했다. 하긴, 뭐 있었다고 해야 무슨 도움이 되었으랴마는... 그리고 포스트시즌만 되면 이상하게 범한 자가 되어버리는 A-ROD는 핀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한 평생까임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신세로 추락한 지 이미 오래다. 더 이상 예전의 거포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능력을 상실해버렸다.
한 시즌만 월드 시리즈를 진출하지 못해도 야단법석인 극성 양키스 팬들이 이번 졸전을 그냥 지나칠 리는 추호도 없고,[25] 어떤 식으로든 이번 포스트시즌의 졸전에 대한 책임을 요구할 것이니만큼 양키스의 시름이 깊어질 듯.

그러나 무엇보다 양키스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고 있는 것은 소속 지구가 더 이상 만만하게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지 스타인브레너 타계 이후, 양키스가 아나바다 모드로 들어서는 동안 나머지 팀들이 대대적인 투자를 단행하고 강팀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내년 시즌 역시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없는 딜레마가 발생했다. 물론 탬파베이 레이스 같이 하향세를 겪는 팀도 있기는 하지만, 이 역시 아직까진 조건만 맞고 충분한 투자가 이뤄진다면 얼마든지 강팀으로 떠오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이미 보여줬고, 블루제이스나 오리올스 역시 구단이 마음만 먹으면 강팀으로 만들 수 있는 여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양키스의 앞날은 그야말로 암울한 미래화가 도래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한 팀만 빼면 결국 구단 수뇌부의 팀 운영 전반에 대한 전환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양키스의 포스트시즌 진출은 이렇게 허망하게 끝날 수 밖에 없다는 점이 양키스를 초조함으로 몰고 가는 원인이 될 것 같다.
더구나 양키스의 팜 시스템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점도 상당한 문제점이다. 버니 윌리엄스, 호르헤 포사다, 데릭 지터, 앤디 페티트, 그리고 불세출의 마무리 마리아노 리베라를 배출한 예전의 포스를 잃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더구나 마운드가 취약한 양키스에게 있어서는 선발 투수 양성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실정이지만, 구단주 양반들이 돈을 쓸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고, 더구나 타선은 뭐 내다버린 것이나 마찬가지니 정말로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이다.

어쨋든 그렇게 스탈린 카스트로를 영입하는 등 무난하게 스토브 리그를 보냈다. 특히 아롤디스 채프먼을 영입하면서 불펜진을 더욱더 공고히 했다.

15.4. 2016 시즌

지난 시즌 2루를 책임졌던 스테판 드류 대신 스탈린 카스트로가 들어온 것을 제외하면 타선에 별다른 변화는 없다. 시즌 초반이지만 타선의 화력이 다른 팀들에 비해 약한 편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도 알렉스 로드리게스카를로스 벨트란, 마크 테세이라 등 중심 타선의 변화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이게 다 그놈의 장기 계약 때문이다...
선발진은 다나카 마사히로, 마이클 피네다, 네이선 이오발디, 루이스 세베리노, CC 사바시아로 로테이션이 돌아가고 있으며, 건강하기만 하면 사이영 상을 노려볼 수 있는 다나카는 시즌 초반 선전 중이다. 다만 후반까지 선발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불펜은 델린 베탄시스앤드류 밀러를 주축으로 막강한 불펜진을 가지고 있다. 5월에 채프먼까지 돌아오면서 캔자스시티의 불펜 3대장에도 밀리지 않을 막강한 MBCBMC 트리오를 구축했다. 엠스플 해설진이 정말 MBC 드립을 치기도...

그리고 5월 7일 10승 17패로 최악의 4월을 보내고 있다.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최하위를 유지하며 양키스 팬들이 뒷목을 잡게 하고 있다. 단체로 득점권만 가면 삽질하는 타격, 롤코 피칭도 못하는 선발들 때문에 최강의 불펜을 가지고도 못 쓰고 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아롤디스 채프먼이 돌아와봐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선발진들이 각성하면서 팀 성적이 조금 반등한 모습이다. 공격력은 여전히 암울하지만, 다나카 마사히로를 주축으로 선발진이 안정적으로 로테이션을 소화하면서 bmc 트리오를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오클랜드 4연전을 싹쓸이하는 등 분위기를 타면서 잠깐 동안 5할 승률을 맞추기도 했다.

6월에도 여전히 타선의 침묵은 깨지지 않고 있다. 양키스가 선발에서 안정적인 피칭을 보여주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게임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을 수 없기 때문에 타선의 득점력이 필요하지만 이 부분에서 계속 어긋나고 있다. 2일 토론토전에 등판한 다나카 마사히로가 6이닝 2실점의 호투를 보여줬지만 타선의 무득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4일 오리올스전에서는 카를로스 벨트란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연타석 홈런으로 양키스의 불펜 승리공식으로 이어가나 싶었지만 베탄시스까지 넘어오기 전인 6회를 다른 투수들이 막아내지 못하면서 리드를 지켜내지 못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7회 올라온 델린 베탄시스마저 실점하면서 볼티모어에게 리드를 빼았겼고, 9회 아메리칸리그 최고의 마무리 투수 잭 브리튼이 세이브를 기록하면서 역전패를 당했다.

4일 역전패의 충격을 뒤로한 채 크리스 틸먼보다 무게감이 떨어지는 볼티모어 선발 타일러 윌슨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면서 6회까지 7점을 득점하며 무난하게 승리하나 싶었다. 그러나 벌어진 점수차이로 빠르게 승부에 들어가던 이안 노바의 패스트볼을 마크 트럼보가 받아치면서 솔로 홈런을 만들어내었고, 노바의 바깥쪽 꽉찬 싱킹 패스트볼을 페드로 알바레즈가 기막힌 타격 기술로 투런 홈런을 따내면서 분위기를 볼티모어 쪽으로 이끌게 된다. 더 이상 지켜 볼 수 없었던 조 지라디 감독은 닉 구디를 등판시켰지만 애덤 존스에게 스리런을 허용하면서 무너졌고, 점수 차이는 어느덧 7-6, 한 점 차가 되고 만다.
그러나 양키스에겐 앤드류 밀러가 있었다. 차원이 다른 슬라이더로 오리올스 타자들을 녹여내며 2이닝을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이어 9회에 양키스 타선에서 1점을 추가하며 아롤디스 채프먼에게 2점차의 여유를 가져다 주었고, 채프먼이 이닝을 마무리하며 힘든 승리를 따내었다.

6월 한달 동안 다나카 마사히로CC 사바시아를 제외하면 여전히 선발진의 아쉬운 피칭으로 어려운 경기들을 이어나갔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데릭 지터의 후계자인 디디 그레고리우스의 일취월장한 타격 실력과 마크 테세이라가 조금씩 살아나면서 전체적으로 타선의 무게감이 좀 더 높아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볼티모어 오리올스나 보스턴 레드삭스 같은 타격 능력은 아니기에 선발진들이 조금 더 힘을 내야 할 필요가 있다.

결국 7월 말에는 5할 성적은 이루었으나 1위 싸움하는 토론토, 볼티모어,보스턴과 7경기 이상 차이가 나자 브라이언 캐시먼이 구단주 할에게 이번 트레이드 데드라인에서 셀러로 전향해야 함을 주장하였고, 그를 받아들여 아롤디스 채프먼, 앤드류 밀러, 카를로스 벨트란, 이반 노바를 각각 시카고 컵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텍사스 레인저스, 피츠버그 파이리츠에 넘겨주면서 대거 유망주를 받아와 내후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특히 이때 캐시먼이 중계 투수들을 트레이드하였음에도 매우 값비싼 유망주들을 받아와 MLB.com 기준으로 프리시즌에는 10위권 내에 있던 유망주 순위가 2위로 껑충 뛰게 되었다.

8월 5일에는 마크 테세이라가 이번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함을 밝혔다.

8월 13일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탬파베이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4타수 1안타 1타점을 기록했으며 이후 2017년 잔여 연봉 보전을 바탕으로 유망주들을 조언을 위해 양키스에서 특별 보좌 일을 할 예정이라고 한다.

다음날 8월 14일 콜업된 두명의 유망주 타일러 오스틴과 애런 저지가 루키 첫타석 백투백 홈런을 쳤다! 이는 MLB 역사상 처음으로, 특히 향후 양키스의 캡틴이 될 애런 저지는 넘버원 유망주 답게 446ft의 홈런비거리를 보여주며 양키팬들에게 인상깊은 파워를 각인시켜주었다.

내년을 기대하는 건 개나 주라는 듯이 신인 포수 게리 산체스의 엄청난 활약에 힘입어 와일드카드를 폭격하고 있다. 주전 선수들 팔아넘기고 리빌딩에 들어간 팀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많다. 3주 만에 홈런 11개와 .400 타율을 유지하며, 스탈린 카스트로와 양키스 타선을 하드캐리하는 중. 그 증거로 양키스의 8월달 홈런은 27일 기준으로 37개(!). 볼티모어와의 경기에서 승리로 와일드카드 2.5게임 차.

이후 열려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의 3연전 시리즈에서 막강한 토론토의 라인업을 상대로 3게임에 9점밖에 내주지 않으며 스윕에 성공하여 동부 지역 1위를 끌어내렸다. 3경기에 9점 내준 게 뭐 그렇게 대단한 거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블루제이스는 메이저리그 중에서 상남자의 상남자 야구를 하는 팀이다. 좌익수가 20홈런, 중견수가 30개의 2루타, 우익수가 90경기 뛰고 17홈런, 백업 외야수가 20-20, 1루수 에드윈 엔카나시온은 홈런왕 경쟁 중이고 3루수는 작년 MVP의 조쉬 도날드슨. 유격수 트로이 툴로위츠키도 20홈런, 2루수도 타격이 수준급에다가 포수마저 최근 한 달간 10개의 홈런을 때려냈다. 이런 팀을 상대로 3경기에 9점밖에 안 내준 것. 토론토 블루제이스는 평소 3경기에 15점, 20점은 가볍게 내주는 팀이다. 역시 리빌딩은 구라였어 와일드카드 리더인 토론토와의 경기 차이는 단 3경기. 2위인 볼티모어와는 2경기 차이고 지구 선두인 보스턴 레드삭스하고도 4경기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23경기가 남은 현재 시점, 아메리칸 동부는 사이어인들의 리그가 돼서 서로 치고 박고 난리가 난 상태. 보통 시즌의 마지막 달이 오면 1위 2위 중 누가 우승할까를 점찍어 볼 수 있는데, 아메리칸 동부 지역은 네 팀 중에 누가 지구 우승을 거뭐쥘지 아직도 알 수가 없다! 중부 서부 내셔널리그 할 거 없이 2위 팀이 동부에 오면 5등 싸움(!)을 해야 한다. 중부 지역의 디트로이트가 2위인데 동부의 4위인 양키스하고 단 1게임 차(...), 내셔널리그 서부 2위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가 양키스와 동률이고, 나머지 2위 팀들은 동부 4위인 양키스보다 승률이 낮다! 탬파베이: 제발 딴데 가서 싸워줘

9월 9일 탬파베이 레이스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와일드카드 1경기 차. 볼티모어와 디트로이트가 1경기씩 나눠갖고 양키스가 탬파를 스윕한다면 세팀이 와일드카드 공동 2위가 된다. 최근 10경기 성적은 8승2패, 6연승. 여러모로 조 지라디 감독의 좋은 의미의 명장놀이가 돋보이는데, 매 경기마다 투수를 6명 7경씩 갈아넣으면서 1 2 점 차로 이기며 총력전을 벌이고 있다. 40인 확장로스터로 인해서 가능한 경기운영.

시즌을 포기한 줄 알았다가 8월에 선수들이 폭발하며 가을야구에 대한 희망고문이 이어졌지만, 9월 16일부커 19일까지 있었던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4연전에서 스윕을 당하면서 올시즌 가을야구의 꿈을 접게 되었다. 보스턴과의 4연전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턴과 3경기 차였기에 여기서 잘 부비면 1위까지 노려볼만 했지만 스윕을 당하면서 보스턴과는 9월 20일 현재 8.5게임 차까지 벌어졌고 와일드카드 경쟁자들인 토론토와 볼티모어와도 4.5게임 차로 벌어져버렸다. 네 경기도 각각 2점 3점 1점 1점 차로 져서 매우 안타까운 상황. 그 전에 있었던 다저스와의 시리즈에서도 1승 3패를 기록한게 아쉬운 상황. 남은 토론토 4연전과 보스턴과 3경기를 반반씩 가져가고 최종 시리즈인 볼티모어와의 시리즈에서 스윕을 하면 가능할 수도 있었으나, 결국 오리올스와 블루제이스에게 밀려서 와일드카드 진출에도 실패하고 쓸쓸히 시즌을 마쳤다.

타자 fwar

16. 제국의 부활을 꿈꾸며

16.1.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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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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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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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20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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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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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20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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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20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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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보였던 여러 문제점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5할 승률 붕괴와 동부지구 꼴찌로 추락하는 등[26] 21세기 들어 가장 굴욕적인 시즌을 보내고 있다.

21세기를 넘어 이제는 20세기, 그리고 구단 창단 이래 11번째 불명예 기록인 9연패를 했으며 그나마 10연패는 애런 저지가 저지했지만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시즌 최종 성적은 82승 80패로 간신히 5할 승률은 넘겼지만 지구 4위에 머물렀다. 같은 지구의 볼티모어, 탬파베이, 토론토가 모두 훌륭한 성적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였고 최하위 보스턴조차 78승을 거두는 등 과열된 지구 내 경쟁으로 인해 손해를 본 측면도 있다.

16.8. 20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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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참고 자료


[1] 이 과정을 현대의 분석가들은 팀을 매각하여 새로운 프렌차이즈를 뉴욕에 만들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1901-02년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현재의 뉴욕 양키스를 다른 팀으로 본다.[2] 1902년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선수 39명 중 1903년 5명의 선수만이 '뉴욕 하이랜더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3] 출처:https://www.sports-reference.com/blog/2014/07/1901-02-orioles-removed-from-yankees-history/[4] 다만 1911년에 대화재로 폴로 그라운즈가 전소되자 양키스가 역으로 힐톱 파크를 빌려주기도 했다.[5] 뉴욕 양키스의 명감독. 양키 스타디움 모뉴먼트 파크에 베이브 루스루 게릭과 같이 비석이 헌액되었다.[6] 역대 최고 언더핸드 스로 투수 중 한 명이자 레이 채프먼 사망 사건을 일으켰던 투수.[7] [ESPN 선정] '27년 양키스' 20세기 최고팀[8] 다만 디마지오는 월드시리즈 우승반지가 9개다. 전쟁으로 인해 1943년 우승 반지는 끼지 못했다.[9] 현재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무능 사장으로 욕을 먹는 앤디 맥페일의 할아버지이다.[10] 이런 상황은 20년 뒤 돈 매팅리-데이브 윈필드가 있을 때 그대로 재현된다.[11] 그러나 뉴욕에 와서는 오클랜드 시절의 혹사 등의 이유로 부상이 깊어지며 조기에 은퇴하고 말았다.[12] 미국 대학 야구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상인 '딕 하우저 트로피'의 유래가 된 인물이다. 재미있게도 하우저는 양키스에서 해고된 뒤 양키스를 누른 로열스의 감독으로 취임했고 그의 지휘 하에 로열스는 1985년 월드 시리즈를 우승했다. 하지만 1986년 올스타전에서 AL 올스타 팀을 지휘한 것을 마지막으로 뇌종양 수술을 받았고 끝내 1987년 오프시즌에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 물론 2010년대에도 우승하지 못했기에 저 때 우승했어도 언젠가는 깨질 기록이긴 했다. 물론 2010년대는 한술 더 떠서 월드시리즈조차 가지 못했던 것이 포인트로, 1920년대부터 매 Decade마다 월드시리즈 진출은 계속 해오고 있었는데 이것마저 깨져버리게 되었다.[14] 하필이면 은퇴를 월드 시리즈 우승 1년 전인 1995년에 했다.[15] 웃기는 것은 스타인브레너는 2002년에 다시 릭 다운을 양키스 타격코치로 복귀시켰다.[16] 프린스 필더의 아버지 맞다.[17] 물론 양키스는 정규시즌 162경기에 포스트시즌도 디비전, 챔피언쉽 월드시리즈 세 단계에서 거둔거고, 시카고는 정규시즌 154경기 116승에 포스트시즌이라고는 월드시리즈밖에 없던 때에 거둔 기록이므로 컵스의 기록은 아주 의미가 없진 않다.[18] 역사상 2년 연속 월드 시리즈 스윕을 한 팀은 딱 세 차례 있었다. 1927, 1928년1938, 1939년1998, 1999년. 그리고 세 스윕 모두 양키스가 달성했다.[19] 다만 다나카도 양키스에 온 뒤로는 몸값과 비교해 미묘한 성적을 찍고 있는 편. 보스턴은 다나카 영입에 대해 이가와 게이 시즌 2가 될 거라는 저주를 한 적이 있다. 물론 그쪽에는 역대급이 따로 있어서...[20] 구단주 자리를 물러난 이후에도 조지 스타인브레너는 팀 회장으로서의 직책을 맡고있다가 2010년 7월 13일 지병으로 타계한다.[21] 이 당시 LA 에인절스는 테셰이라로 얻은 픽으로 마이크 트라웃타일러 스캑스를 지명했다. 참고로 양키스는 2008년 드래프트에서 게릿 콜을 지명했지만 게릿 콜이 보라스와 짜고 양키스를 물 먹이면서 UCLA 대학 장학생으로 진학해버려 양키스 팬들에게는 금지어 취급. 심지어 콜은 어린 시절 2001 월드시리즈에 직관 갈 만큼 엄청난 양키스 빠였다. 하지만 결국 FA로 양키스 유니폼을 입었다.[22] 티렉스는 원래 슬로 스타터로 유명해서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힘써야 될 포스트시즌에는 못 쓰고 물방망이가 된 건 그대로였다.[23] 이때 필리스에는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있었는데, 양키스 팬들은 그 옛날 레드삭스 시절의 악연을 기억하는지 "Who′s your daddy?"를 외쳤다.[24] 버니 윌리엄스의 은퇴 후 조니 데이먼, 멜키 카브레라 등이 있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결국 양키스의 중견수 포지션은 아킬레스 건이었다.[25] 이들은 양키스가 한 번이라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못 이루면 온갖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선수, 감독, 단장을 가리지 않고 당장 내치라는 의견이 쉽게 나온다.[26] 당연히 포스트 시즌 진출은 사실상 물건너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