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7:49:04

롤링 스톤스/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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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lling Stones
1964
The Rolling Stones No. 2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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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
Aftermath
1966
Between the Buttons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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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1967
Beggars Banquet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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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
Sticky Fingers
1971
Exile on Main St.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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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ts Head Soup
1973
It's Only Rock 'n Roll
1974
Black and Blue
1976
Some Girls
1978
Emotional Resc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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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ttoo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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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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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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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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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ges to Babylon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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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tchMojo.com, "The History of The Rolling Stones"
롤링 스톤즈의 역사 요약 영상

1. 개요2. 1960년대
2.1. 1960년 ~ 1964년2.2. 1965년 ~ 1966년2.3. 1967년2.4. 1968년 ~ 1969년
3. 1970년대4. 1980-90년대5. 21세기

[clearfix]

1. 개요

영국의 록밴드 롤링 스톤스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2. 1960년대

2.1. 1960년 ~ 19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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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좌측 인물이 바로 이언 스튜어트이다.
영국의 블루스 음악가인 ‘알렉시스 코너’의 밴드에 소속되어 있던 브라이언 존스는 1962년 5월 자신만의 밴드를 만들기 위해 알렉시스 코너의 밴드를 탈퇴한다. 이후 브라이언 존스는 5월 2일 Jazz News에 밴드 구인 광고를 걸게 된다. 여기에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이언 스튜어트였는데, 이언 스튜어트는 브라이언 존스와 함께 알렉시스 코너의 밴드에 소속되어 있던 키보디스트였다. 이에 브라이언 존스와 이언 스튜어트는 고전 블루스, 특히나 로버트 존슨이나 머디 워터스 스타일의 델타 블루스를 연주하는 밴드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 다음으로 구인 광고에 반응했던 인물은 믹 재거키스 리처즈, 그리고 딕 테일러였다. 원래 이들은 동네 친구로, 브라이언 존스와 마찬가지로 고전 블루스 곡들을 커버하는 개러지 밴드 ‘더 블루 보이스’를 결성했었다. 알렉시스 코너가 더 블루 보이스의 연주를 칭찬했던 적이 있었고, 이 때문에 더 블루 보이스와 알렉시스 코너의 밴드가 만난 적이 있었기에 브라이언 존스는 이들과 안면이 있었다. 믹 재거와 키스 리처즈, 딕 테일러는 더 블루 보이스를 나와 브라이언 존스의 밴드에 가입하려 했고, 오디션에 합격하여 밴드에 정식적으로 가입되었다. 이와 같은 달에 드러머 ‘토니 채프먼’ 또한 구인 광고에 반응하여 오디션을 보았고, 오디션에 합격함으로써 밴드에 가입하였다. 밴드의 이름은 브라이언 존스가 공연 계획을 잡을려고 전화를 하던 도중 지었는데, 키스 리처즈가 밴드의 이름을 물었을 때 머디 워터스 음반 수록곡 중 “Rollin’ Stone”라는 곡을 보고 롤링 스톤스라고 답했다. 이에 따라 ‘5인조 밴드 롤링 스톤스’가 결성되었다.

1962년 7월 12일, 브라이언 존스가 이끄는 롤링 스톤스는 런던의 마퀴 클럽(Marquee Club)에서 첫 공연을 펼쳤다. 곧이어 새롭고 신나는 음악을 원하는 젊은 관객들을 불러오며 크라우대디 클럽(Crawdaddy Club)까지 활동 범위를 넓혀나갔다.

1962년 12월, 베이시스트인 딕 테일러는 복학을 위해 밴드에서 탈퇴를 하게 되었고, 그를 대신하기 위해 빌 와이먼을 영입하게 된다. 다음해 1월, 드러머 토니 채프먼은 다른 밴드를 위해 탈퇴하였고, 찰리 와츠를 영입하였다.

1963년 2월, 훗날 애니멀스의 매니저가 되는 조지오 고멜스키와 계약을 맺고 고멜스키의 클럽에서 활동했다. 하지만 아직 고멜스키와 롤링 스톤스 사이에 제대로 된 계약이 없다는 것을 이용한 앤드류 올덤이 고멜스키가 부친상 때문에 고향으로 떠난 사이에 롤링 스톤스와 정식 계약을 맺으면서 고멜스키와는 파토.

한 때 비틀즈의 홍보를 맡기도 했던 앤드류 올덤은 비틀즈의 강점이었던 자작곡을 부른다는 것은 그대로 가져오면서, 비틀즈 및 그 유사밴드와의 차별성을 위해서 밴드의 이미지를 차별화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비틀즈 멤버인 존 레논의 악동 이미지를 참고하여 밴드의 이미지를 '잘생기고 반항적인 악동'으로 만들기로 결정했고, 나아가서 다른 멤버들보다 상대적으로 나이도 많던 이언 스튜어트[1]'주걱턱에 생긴 것도 광부같다' 라는 이유로 밴드에서 축출한다. 피아노 실력이 좋아서 브라이언 존스가 가장 먼저 뽑은 멤버였고, 유일하게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다는 이유로 온갖 잡일도 다했던 이언 스튜어트는 그렇게 잘렸고 정통 블루스를 지향했던 브라이언 존스 위주의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는 그렇게 피아노를 잃었다. 다만 이언 스튜어트에 대한 남은 멤버들의 애정은 각별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0년경 있던 인터뷰에서조차 키스 리처드는 "그가 없었다면 롤링 스톤스도 없었을 것이며 나는 아직까지도 롤링 스톤스는 그의 밴드라고 생각한다." 라는 요지의 인터뷰를 했다. 이언 스튜어트 또한 이후 꽤 오랜 시간 동안 롤링 스톤즈의 로드매니저로 활동했고 심지어 앨범 작업에도 한동안 계속 참여했다. 그러나 공연 등의 외부 노출은 없었다.

1963년 6월 7일 척 베리의 'Come On'을 커버하면서 데뷔한 롤링 스톤즈는 5개월뒤, 비틀즈가 써준 곡이자 밴드의 2번째 싱글 곡 "I Wanna Be Your Man"으로 싱글 차트 12위를 달하며, 첫 히트를 기록했다.[2] 이후 롤링 스톤즈는 버디 홀리의 곡 "Not Fade Away"를 커버하여 영국 싱글 차트 3위에 올리면서, 영국 최고의 인기밴드 중 하나가 된다. 음악도 음악이지만 당시 절정을 달리던 비틀즈와는 상반되는 음악스타일(깔끔한 앵글로색슨적 느낌 - 흑인적인 거친 느낌)과 이미지(터프, 반항, 퇴폐) 역시 인기의 커다란 요인이었으며 이러한 이미지는 후에 롤링 스톤스의 대표적인 상징이 된다.

1964년 6월, 영국 최고의 인기밴드가 된 이후 롤링 스톤스는 그들보다 먼저 미국으로 건너가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비틀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러나 "Time Is On My Side"라는 곡이 빌보드 싱글 6위를 기록한 것 말고는 비틀즈의 인기와는 감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오히려 애니멀스가 "The House of the Rising Sun"이란 곡으로 빌보드 1위를 차지해버린다.

롤링 스톤스 멤버들이 미국에 처음 왔을 당시 엄청난 컬쳐쇼크를 받았다고 한다. 호텔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는데 갑자기 경찰들이 들이닥쳤는데 호텔 투숙객 중 누군가가 웬 여자가 하의만 입고 수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건의 개요는 장발이었던 믹 재거가 수영을 하는데 호텔 투숙객이 그걸 여자로 착각을 했다고 했고, 경찰들 역시 장발 남자였던 롤링 스톤즈 멤버들 보고 놀랬다고 한다. 당시 미국에서 남자들은 짧은 머리인것이 당연했기 때문에 남자가 장발을 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상황이었다고...[3] 그 이외에 백인/흑인 전용 화장실이라던지 이런 인종차별적인 부분에서도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4]

2.2. 1965년 ~ 196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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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영국의 영광을 뒤로 한 채 묻혀가는가 하던 찰나, 롤링 스톤스는 키스 리처즈가 꿈에서 들었다는 멜로디를 통해 작곡했다는 "(I Can't Get No) Satisfaction"을 발표한다. 1965년 7월에 발표된 이 곡은 단번에 빌보드 1위를 차지했고, '세계를 뒤흔든 기타리프'라는 평가를 들으며 이후 롤링 스톤스의 대표곡이 된다. (본 곡은 VH1선정 20세기 최고의 록 음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후 절정의 흥겨움을 자랑하는 "Get Off of My Cloud", 아름다운 발라드 "As Tears Go By"[5] 등도 히트하면서 명실상부 최고의 인기밴드로 자리매김한다.

1966년 롤링 스톤스는 전곡을 모두 재거/리처즈의 자작곡으로 채우고 브라이언 존스가 처음으로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한 앨범 "Aftermath"를 발표했고 앨범이 평론가들과 대중 모두에게 극찬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그들의 음악성도 주목받기 시작한다. Aftermath는 암울한 분위기와 시타르의 음색이 절묘하게 조합된 명곡 "Paint It Black[6]'머나먼 정글'''의 주제곡으로 사용되었다.] 마림바가 주도하는 발랄한 멜로디와는 달리 여성 차별로 얼룩진 가사를 가진 "Under My Thumb"[7], 덜시머의 음색이 매력적인 발라드 "Lady Jane" 등의 명곡으로 채워져있다.

2.3. 1967년

"Aftermath" 이후 롤링 스톤스는 아름다운 발라드인 Ruby Tuesday, 통통 튀는 피아노 선율이 돋보이는 Let's Spend the Night Together가 수록된 앨범 Between the Buttons를 발매하여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밴드의 음악에 도입했고 앨범은 전작의 히트를 잇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밴드의 이러한 히트와는 별개로, 밴드의 리더인 브라이언 존스는 여러 사건으로 인해 약물에 빠져 완전히 폐인이 되어버렸다.

원래 롤링 스톤스는 브라이언 존스가 영국에 진정한 블루스를 알리겠다며 정통 블루스 밴드[8]로 만든 밴드였다. 그러나 브라이언은 키스와 믹을 내세운 밴드의 매니저인 앤드류 올덤에 의해 밴드 주도권을 빼앗겼고 밴드는 자신이 3류음악으로 경멸했던 로큰롤로 흥행, 정체성마저 그 쪽으로 바뀌게 되어버렸다. 그러자 브라이언은 우울증에 걸려서 약물 복용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롤링 스톤즈 멤버들 중 가장 먼저 마약에 중독된 멤버였다.

비틀즈의 레논/매카트니 콤비를 의식해서, 롤링 스톤스의 자작곡들은 모두 재거/리처즈의 명의로 앨범에 수록되었고 매니저 앤드류 올덤 또한 "본래 브라이언 존스는 작곡에 흥미가 없어서 작곡을 하지 않는다."고 거듭 강조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브라이언 존스가 롤링 스톤스에서 작곡하거나 작곡에 참여한 곡들마저 모두 재거/리처즈의 곡으로 알려지기까지 했다. 1965년 잡지 인터뷰에서 인터뷰어가 존스에게 "당신은 작곡을 하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브라이언 존스는 "언제나 자작곡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미 상당수의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대부분 블루스 스타일이다."라고 말하며 앤드류 올덤의 발표를 직접 반박하기도 했다. 다만 브라이언 존스가 정통 블루스 곡의 커버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올덤은 자작곡 위주로 가야 성공한다라는 지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한 모든 곡을 자작곡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9]

결국 밴드 활동에 환멸감을 느낀 브라이언 존스는 자신의 약혼녀이자 패션 모델인 아니타 팔렌버그와의 결혼 준비 및 새로운 밴드를 결성하기 위해[10] 1966년 멤버들에게 Between the Buttons 녹음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밴드에서 탈퇴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이후 브라이언 존스는 앨범 녹음과 아니타 팔렌버그가 주연한 아방가르드 영화 <A Degree of Murder (Mord und Totschlag)>의 사운드트랙 작업을 병행하면서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매니저인 앤드류 올덤은 뛰어난 악기 연주 실력과 카리스마를 지닌 인기 멤버인 브라이언 존스의 탈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브라이언에게 남아있는 계약기간 동안 밴드 활동을 지속하지 않으면 소송을 걸겠다는 협박을 했다. 결국 그 요구를 받아들인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에 재가입하기 전에 지친 심신을 치료하고자 모로코에 위치한 요양소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그 동안 아니타 팔렌버그와 키스 리처즈가 불륜관계가 되어버린다.[11][12]

1967년 3월 요양소에서 퇴소한 브라이언 존스는 새 유럽 투어를 준비하던 중 아니타에게 갑작스러운 결별 통보를 받게되자 큰 충격을 받았고 유럽 투어를 도는 동안 요양소에 가기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마약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결국 브라이언의 마약 중독으로 인한 컨디션 불량과 관객들의 폭동[13] 때문에 1967년 유럽 투어는 시작한지 2달이 채 안돼서 중단되고 만다.

이후 롤링 스톤스는 새 앨범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녹음 작업에 열중하게 되는데 이 앨범은 브라이언 존스의 주도하에 밴드가 유일하게 기존의 사운드를 버리고 당대 유행한 사이키델릭 사운드를 실험한 앨범으로 브라이언의 다양한 악기 연주 능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앨범이었다.

그러나 1967년 12월에 발매된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앨범은 반년전에 발매된 비틀즈의 명반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를 따라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상업적, 비평적으로 완전히 실패하고 만다. 하지만 아름다운 피아노 인트로사운드로 광고브금으로 사용되었던 "She's a Rainbow" 같은 수록곡들의 완성도와 변칙적인 박자를 사용하여 아방가르드 사운드를 실험하는 등 비틀즈의 페퍼상사와는 다른 음악적인 시도를 인정받아서 최근 들어서 재평가를 받고있다. 그리고 이 앨범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음 앨범부터 롤링 스톤스의 음악성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되는 계기가 되었다.

2.4. 1968년 ~ 1969년

이후 1968년 싱글로 발표된 흥겨운 로큰롤 넘버 "Jumpin' Jack Flash"[14], Honky Tonk Women같은 곡들이 성공하면서 롤링 스톤스는 재기에 성공하여 비틀즈의 아성에 비교할수 있는 유일한 록밴드라는 위치를 가지게 된다. 이 시기 밴드의 새 스튜디오로 훗날 많은 음악가들이 거쳐가게 되는 롤링 스톤즈 이동식 스튜디오를 제작하기도 했다.

1968년 키스 리처즈의 신경질적인 기타 솔로로 유명한 "Sympathy for the Devil"과 그들만의 투쟁적이고 풍자적인 스타일의 록큰롤 넘버 "Street Fighting Man"[15][16]이 수록된 Beggars Banquet, 1969년 말도 안되는 세련된 사운드와 극적인 구성의 명곡 중의 명곡 Gimme Shelter"와 롤링 스톤스의 곡 중 가장 깊이있는 곡이라 평가받는 7분짜리 대곡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 숨겨진 명곡이라 평가받는 "Monkey Man"이 수록된 1969년Let It Bleed[17] 등의 명반을 발표한다. 또한 동료 밴드인 더 후와 함께 롤링 스톤스 로큰롤 서커스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밴드가 재기에 성공한 것과는 달리 브라이언 존스는 Their Satanic Majesties Request 앨범이 상업적, 비평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자 음악에 흥미를 잃고 1968년 즈음부터는 스튜디오에 참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18]

다만, Beggars Banquet 앨범이 블루스 록 앨범이 된 것, 특히 델타 블루스의 요소가 섞인 것은 브라이언 존스가 "제발 다음 앨범은 블루스 록 앨범으로 만들자"고 다른 멤버들에게 간곡히 부탁해서였다고 한다. (브라이언 존스의 지인들은 브라이언이 롤링 스톤즈 멤버들과 관계자들에게 거의 "울면서 빌었다."고 회고했다.) 사이키델릭 시절에 나름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브라이언 존스지만 말년에도 블루스 음악을 가장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이언의 마약 복용은 점점 더 심해져서 자동차 사고를 연달아 일으켰고 마침내 기소를 당하게 되었다. 재판부는 브라이언에게 가벼운 벌금형으로 선처를 베풀었지만 이 문제로 인하여 브라이언이 미국 비자를 발급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마침 미국 투어를 계획 중이었던 롤링 스톤즈는 그를 자르고 새로운 멤버를 고용하기로 하였다. 1969년 6월 8일,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이 브라이언의 집에 방문해 그를 밴드에서 해고한다고 통보하였고 메스컴에 발표하는건 브라이언에 맡기기로 하였다. 그리고 3주 뒤인 1969년 7월 3일, 브라이언 존스는 자신의 집 수영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된다. 밴드를 떠난지 얼마 안되어 너무나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죽음에는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다, 약물 중독의 부작용으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가 고용한 정원사에게 살해당했다 등 여러 추측이 난무하다.

그리고 이 시기를 즈음해서 밴드의 매니저였던 앤드류 올덤도 해고되었다. 앤드류 올덤은 <(I Can't Get No) Satisfaction> 성공 후에도 계속해서 블루스를 고집하던 브라이언 존스를 제어하기 위해서 믹 제거와 키스 리처즈를 밀어주고 이들의 능력을 과장해서 선전했지만 막상 앤드류 올덤이 원했던 그 형태의 밴드가 완성된 시점에서 믹 제거와 키스 리처즈에게 더 이상 거추장스러운 앤드류 올덤은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다만, 웃긴 것은 앤드류 올덤을 배제하기 위해서 계약을 맺은 것이 바로 ABCKO의 앨런 클라인이라는 점이다. 앨런 클라인은 이 당시 흩어진 저작권을 되찾아주는 음악계의 로빈 훗으로 유명했고 비틀즈와의 계약에도 성공한 상태였다. [19]

게다가 1969년 미국 순회공연의 절정을 장식하는 캘리포니아 알타몬트 고속도로에서 벌어진 무료 콘서트에서 롤링 스톤스의 호위를 맡았던 폭주족 Hell's Angels의 단원이 공연을 보던 흑인 청년 메레디스 헌터를 죽이는 사건까지 일어나 당시 미국에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덕분에 사건의 순간 실제로 연주된 "Under My Thumb" 대신에 다큐멘터리 영화 "Gimme Shelter"에서 제목과 매칭시키기 위해 당시에 연주한 것으로 포장된 "Sympathy for the Devil"은 6년동안 연주하지 않았고 미국 순회 공연도 당분간 포기해야 했다. '알타몬트 공연' 항목 참고. 다행히 그 후 발매된 "Let It Bleed"가 상당한 성공을 거둬서 다시 원래 자리로 되돌아오긴 한다.

3. 197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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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 4월 8일, 롤링 스톤스의 라이벌로 불리던 비틀즈폴 매카트니의 탈퇴로 인해 해체된다. 이로써 비틀즈의 전 멤버들, 레드 제플린, 더 후, 핑크 플로이드, 에릭 클랩튼, 제프 벡 그룹, 롤링 스톤스 등이 주도하는 음악계의 전국 시대가 열린다.

1971년 발표된 "Sticky Fingers"와 1972년 발표된 "Exile On Main Street"는 그들의 대표적인 명반으로 자리잡았다. 앤디 워홀이 디자인한 앨범커버로 유명한 "Sticky Fingers"는 그들만의 퇴폐적인 로큰롤이 담긴 명곡 "Brown Sugar"를 포함해 새로 영입된 '믹 테일러'와 '키스 리차즈'의 기타 솜씨를 엿볼수 있는 하드 록 넘버 "Can't You Hear Me Knocking, 영미권에서 가장 사랑받는 발라드 넘버 "Wild Horses" 등 다양하면서도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롤링 스톤스다운 음악을 확실히 보여주며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과 평론가들의 극찬을 모두 받았다. 연달아 발표한 두 명반으로 인해 롤링 스톤스는 비틀즈가 없는 록음악계의 1인자로 잠시 우뚝선다.

하지만 "Exile On Main Street" 앨범 녹음 중 믹 테일러와 다른 멤버들의 불화가 일어났고, 결국 믹 테일러는 1974년 밴드를 탈퇴한다. 믹은 탈퇴한 직후 롤링 스톤스에서 활동할 시기, 앨범에 수록된 곡들 대부분에 자신이 작곡한 리프들이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작곡자명에 재거/리처즈로 표기되어 있다면서 무단 도용으로 키스와 믹을 고소한다. 믹 테일러 탈퇴 이후, 1000:1의 경쟁률을 뚫고 론 우드가 롤링 스톤스의 새 기타리스트로 발탁된다.

론 우드 가입 이후 1979년까지 발표한 앨범들은 분명 풍부한 사운드와 감각을 가진 훌륭한 앨범들이었지만 이전에 발표한 명반들이 너무 대단한 나머지 이전에 비해 평론가들의 평가는 좋지 못했다.

다만 이 시기에 "Angie"라는 롤링 스톤스 대표 발라드 넘버를 빌보드 1위에 올려 놓았고, "Doo Doo Doo Doo Doo(Heartbreaker)"라는 롤링 스톤스 최고의 하드록 넘버 역시 히트시키는 등 싱글 넘버들로만 친다면 이 시기도 매우 훌륭한 곡을 쏟아낸 시기로 평가받는다.

그러던 도중 1978년 롤링 스톤스가 제대로 사고를 쳐버린다. 디스코가 빌보드를 장식하던 시기, 하드록/로큰롤 밴드였던 롤링 스톤스가 디스코에 입각한 앨범인 "Some Girls[20]"을 내놓은 것! 초특급 히트곡인 "Miss You"를 포함해, "Beast Of Burden", "Shattered" 등의 명곡들이 대거 실린, 롤링 스톤스 특유의 스타일과 디스코, 펑키, 컨츄리 사운드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 앨범은 평단의 극찬은 물론, 거의 모든 곡이 메가 히트를 기록하며 대중들에게 사랑받는다. 당시의 최신장르인 디스코와의 크로스오버까지 완벽하게 성공시킨 롤링 스톤스는 "이젠 늙었다"라는 평단의 평을 노래로 화끈하게 날려버리고, 최고참이면서 가장 감각적이고 세련된 곡을 쏟아내며 화려하게 부활, 여전히 록씬의 1인자임을 다시금 확고히 했다.

롤링스톤즈의 70년대를 요약하자면 Sticky FingersExile on Main St. 그리고 Some Girls같은 명반들을 발표하고 빌보드 차트에도 Brown Sugar, Angie, Miss You [21] 같은 뛰어난 곡으로 빌보드 차트 1등을 달성한 비평적으로도 상업적으로도 가장 눈부신 그들의 최고 전성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위에서 서술한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 더 후 같은 밴드들이 펑크 록디스코에 밀려 그들의 인기를 80년대까지 끌고가지 못했지만 롤링스톤즈는 그 인기와 창작력을 어느정도 이어갔다는 점에서 70년대 록음악계의 최후의 생존자이자 승자는 그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1980-90년대

"Some Girl"의 메가톤급 대성공에 이어 1980년 "Emotional Rescue"를 통해 상당한 호평을 이끌어내면서 위치를 확고히 다졌고, 1981년 발표한 "Start Me Up", "Hang Fire" 등의 록큰롤 명곡을 수록한 80년대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는 "Tattoo You"가 엄청난 히트를 기록하면서 당시 순회공연이 당대 최고의 수입을 거두는 등 제 2의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후 잠시 롤링스톤즈는 음악적으로 방황한다. "Undercover Of Night"가 수록된 1983년 앨범 "Undercover" 앨범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지만, 세상에서 가장 거칠고 자유로운 음악을 했던 롤링 스톤스가 점차 팝적인 성향을 띄고 심지어는 대세 장르를 선호하던 믹과 락을 고수하던 키스가 음악적으로 갈등을 겪기도 했다.

그러다가 1989년 다시 의기투합해서 제작한 "Mixed Emotion"이 수록된 "Steel Wheels"가 다시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멋지게 복귀하였다. 라이브 앨범 발표 직후 1994년에 발표한 "You Got Me Rocking" 등의 곡이 실린 "Voodoo Lounge" 앨범은 1995년 그래미 최우수 록 앨범"을 수상하였고, "Anybody Seen My Baby" 등이 수록된 1997년 앨범 "Bridges To Babylon" 역시 좋은 평가를 받으며 제 3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98년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락밴드였던 메탈리카를 제치고 수익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5. 21세기

지난 2005년 발표된 정규앨범인 "Bigger Bang"으로 다시금 세계에 롤링 스톤스 열풍이 불게 만들었으며, 앨범에 수록된 "Rough Justice", "Rain Fall Down" 등의 신곡들은 도저히 환갑을 넘긴 할배들의 노래라고는 믿겨지지 않을만큼 세련됨을 자랑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들의 콘서트는 언제나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며, 2006년 월드 투어의 일부인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열린 콘서트는 무려 수십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또한 이들은 2006년~2007년의 "The Bigger Bang" 투어로 단일 콘서트 역대 수익 1위와 아티스트 중 투어수익 총합 역대 1위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50년동안이나 콘서트를 했으니 당연한걸지도 모른다. 다만 단일 콘서트 역대 수익 1위는 U2의 360도 투어에 빼앗겼다.

이들이 가진 콘서트 관련 최고기록은 바로 브라질에서 열렸던 공연. 이 공연에서 "최소 100만~130만명"의 인파가 몰렸다고 한다. 무료공연(!)에다 카니발 등 축제를 좋아하는 브라질이라 가능한 숫자겠지만, 숫자만 봐도 경이로울 정도다. 이 콘서트는 기네스북에 오른 "최다 관객이 모인 콘서트"로 선정되었다.

2016년 들어서는 남미에서 라이브를 돌고있다. 2012년 데뷔 50주년을 맞아 베스트앨범 "Grrr!"을 발표했다. 위에 차례대로 언급한 명곡들이 3CD로 수록되어 있다.

2016년 3월 25일 쿠바에서 라이브 공연을 가졌다. 쿠바는 원래 고립주의 정책을 펼쳐서 서구 록음악이 단속되던 국가인만큼 엄청난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일부 언론에서는 비슷한 시기에 이루어진 미국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만큼이나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다고 말할 정도.

2016년 12월에 신보 Blue & Lonesome이 발매되었다. 자작곡이 아닌 기존 블루스 곡들을 리메이크한 앨범이다.

아직까지 건재하신데 2018년에 열린 월드 투어 'No Filter Tour'에서도 28회 공연에 200만명을 동원하며 총 2억5천달러의 수익을 벌여들였다.

2020년 미공개들이 추가된 Goats Head Soup의 Delux Edition이 재발매가 되었는데 이게 영국 차트 1위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로써 스톤스는 데뷔한지 60년이 다 되가는 현 시점에도 본인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보여줬다. 이쯤되면 이 할배들은 노익장을 넘어서 불사조급 괴력이라고 해도 될 정도다.

한국 시간으로 2021년 8월 25일 새벽, 드러머 찰리 와츠가 향년 80세로 사망하였다.

2021년 전세계 투어 수익 순위 1등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2022년 60주년 투어를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리버풀 안필드에서 리버풀 출신의 밴드 에코 앤 더 버니멘과 공연을 하였고 그들의 데뷔곡인 I wanna be your man을 연주하였다. 쿠엔틴 타란티노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라는 영화에 수록되어 화제가 되었던 Out of Time이라는 곡이 60주년 투어에서 처음으로 라이브로 연주되었다.[22] 또한, 네덜란드 공연을 앞두고 믹 재거가 코로나 양성이 떠서 공연을 연기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많은 팬들이 걱정을 하였지만 다행히도 완치되었다고 한다.

2023년 새 앨범을 발매한다! 커버앨범을 제외하면 18년만의 앨범으로 9월 6일 첫 싱글 Angry를 발매하였다.


[1] 최연장자는 아닌데, 빌 와이먼이 사실 2살 많다.[2] "I Wanna Be Your Man"은 후에 비틀즈의 앨범 With The Beatles에도 링고 스타의 보컬로 수록된다.[3] 물론 영국에서도 장발 남자들에 대한 차별이 꽤 있었다. 데이빗 보위 역시 이에 대한 반발도 했었다[4] 영국은 미국보다 몇백년 일찍 노예제 폐지를 했고 흑백 인종 차별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롤링 스톤즈와 비틀즈가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도 흑인 음악을 핍박하던 미국과 달리 영국인들은 인종에 대한 편견없이 흑인 음악을 자유롭게 접했기 때문이다.[5] 본래 마리안느 페이스풀에게 준 곡이었지만, 비틀즈Yesterday의 히트에 편승하여 자기네들도 현악을 끼고 녹음을 한 것이다.[6] 영국 발매판에는 없고, 미국 발매판의 1번트랙으로 실려있다. 1987년 상영된 영화 풀 메탈 재킷미국 드라마[7] 믹 재거 본인도 이 곡의 가사를 셀프디스 했다. 후술할 알타몬트 공연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 당시에 연주한 곡도 바로 이곡.[8] 브라이언은 밴드 초창기만 하더라도 블루스만이 진정한 음악이라고 생각할만큼 블루스를 좋아했다.[9] 롤링 스톤스가 60년대에 발표한 곡들 중에서 재거/리처즈의 이름으로 발표된 브라이언 존스의 곡들이 얼마나 있는지 정확한 확인은 불가능하나 마리안느 페이스폴과 빌 와이먼의 증언에 의하면 브라이언이 작곡한 곡들은 주로 밴드 공동 명의인 Nanker/Phelge'(낸커/펠지)로 발표되었고, <Under My Thumb>, <Ruby Tuesday> 등의 히트곡들 작곡에도 관여했다고 한다. 더불어 빌 와이먼은 낸커/펠지'로 발표되어야 했을 곡들도 크레딧에 '재거/리처즈'로 오른 곡이 여럿 있다' 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런 사실과 관계 없이 믹 재거는 여전히 브라이언 존스의 작곡을 부정하며 '내가 본 사람 중 최악의 작곡 실력을 갖고 있었다' 고 주장했고 키스 리처즈는 "브라이언 존스는 밴드 멤버에게 자신이 작곡한 곡을 들려준 적이 없었다."며 그의 작곡에 대한 기여를 부정했다. 브라이언이 작곡 자체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그는 본래 블루스 음악을 하고 싶어했고 말년에는 자신의 엄청난 악기 실력을 바탕으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고자 했었다.[10] 아니타 팔렌버그는 1965년부터 브라이언 존스와 사귀면서 브라이언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아니타는 브라이언의 패션 스타일을 바꾸게 한 인물이었으며 재거/리처즈의 급부상으로 밴드내에서 위치가 하락한 브라이언에게 다양한 악기를 연주해 보라고 처음 권유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당시 키스 리처즈를 포함한 롤링 스톤즈의 멤버들은 아름다우면서도 지적인 면까지 갖춘 트렌드세터인 아니타 팔렌버그를 흠모하면서 그녀의 남자친구인 브라이언을 부러워했다고 한다.#[11] 키스는 자서전 Life에서 밝히기를 원래 자신은 모델인 린다 키스(Linda Keith)와 사귀고 있었는데 린다가 미국에서 지미 헨드릭스를 보고 반해서 키스를 차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린다에게 차여서 마음고생을 하고있던 중 브라이언이 모로코의 요양소에서 아니타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을 목격했고 그런 그녀를 도와주려다 서로 눈이 맞아서 영국으로 같이 돌아온 것이 관계의 시작이었다고 한다.[12] 이는 키스 리처즈의 일방적인 주장이고 주변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브라이언과 아니타는 원래 늘 사소한 문제로 다투다가 곧 다시 화해하는 격렬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브리이언 존스는 키스 리처즈의 여자친구를 빼앗은 지미 헨드릭스와 무척 절친한 사이였고 이 때문에 키스와 브라이언의 사이가 나빠진 상태였다고 한다. 키스 리처즈 역시 훗날 "나도 브라이언이 나를 죽기 직전까지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비난하지 않는다.라고 말하기도 했다.#[13] 해당 투어는 롤링 스톤즈가 처음으로 동유럽에서 공연을 한 투어였고 이들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공연의 열기에 흥분하여 폭동을 일으켰다.[14] 가왕 조용필이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기도 했다.[15] 그들의 노래 중 사회운동에 가장 밀접하게 관련된 곡이다. 1968년, 믹 재거는 런던에서 일어난 베트남 전쟁 반대시위에 참여했었고, 그 당시의 경험을 토대로 만든 곡이다. # 심지어 믹 재거는 좌파 매거진 "블랙 드워프"에 직접 손수 쓴 이 곡의 가사를 보내기도 했다.[16] 브이 포 벤데타 엔딩 크레딧에 사용됐다.[17] 앨범커버는 '피 흘리게 하라(Let It Bleed)'라는 제목과 어울리지 않는데, 옛날 축음기의 음관이 LP판 위에 올려져있고, 그 위로 양철로 된 테이프 상자, 시계판, 피자, 고무 타이어, 롤링 스톤스 멤버들의 미니어쳐 인형이 올려져있는 케이크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이 사진은 유쾌하고 귀엽다. 이것은 앨범의 가제였던 ‘자동 교환기(Automatic Changer)'를 시각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앨범에는 거친 록과 대단히 폭력적인 내용의 가사, 조용하고 예쁜 컨트리 송 등이 뒤섞여 있다. 커버 이미지는 이런 앨범의 다채로움을 즐기라는 의미를 담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최종 제목이 바뀌는 바람에 제목과 가장 동떨어진 커버를 가진 앨범이 되었다.[18] 1968년 즈음 촬영된 <Sympathy for The Devil>의 녹음 과정을 찍은 영상이 유튜브에 공개 되었는데(무려 장뤽 고다르가 제작했으며, Beggars Banquet 앨범 제작 과정과 정치 사회적인 기록이 결합된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스튜디오에 오랜만에 찾아온 브라이언 존스에게 믹과 키스가 곡조를 흥얼거리고 이것을 들은 브라이언이 혼자 고개를 숙이고 리듬 기타를 연주하는 장면이 확연히 보인다. 참고로 최종곡에서는 브라이언의 연주 분량이 삭제되고 니키 홉킨스의 피아노로 대체되었다.[19] 하지만 비틀즈가 해체하게 된 원흉 중 하나로 그의 지나친 속물 근성이 꼽히듯이 롤링 스톤즈도 이후 앨런 클라인과의 계약에 물리는 바람에 초기 곡들에 대한 상당수 저작권을 앨런 클라인에게 넘겨야 했다.[20] 스티브 잡스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앨범으로 꼽았었다.[21] 세 곡 다 다른 스타일의 곡이다[22] 롤링스톤즈의 오랜 팬이 아니라면 익숙하지 않은 곡이며 애초에 Aftermath영국반에 수록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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