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0-01 23:57:31

마이클 잭슨/사생활 및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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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동 성추행 논란3. 언론과 루머4. 어린 시절5. 여자와의 관계6. 가족 관계
6.1. 결혼 및 자녀 관계
7. 외모8. 백반증과 성형9. 타 연예인과의 관계10. 성격11. 한국과의 인연

1. 개요

마이클 잭슨의 사생활 및 기타일화를 다룬 문서이다.

2. 아동 성추행 논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아동성추행 논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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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언론과 루머

Just because you read it in a magazine or see it on the TV screen don't make it factual
(당신이 잡지나 TV 화면에서 봤다고 사실인 것은 아니에요.)
HIStory 앨범에 수록된 <Tabloid Junkie> 가사 中
친분이 있었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함께 황색 언론의 최대 피해자이며, 마이클 잭슨의 생애 전반에 있어서 언론은 가히 그의 주적이라고 보아도 될 정도로 루머에 시달렸다. 마이클 잭슨은 전성기 시절부터 2009년 사망 때까지 끊임없는 언론으로부터의 심각한 루머에 시달렸으며 이는 마이클 잭슨의 삶을 망가뜨린 근본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심지어 사후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는 여전하다. 대부분 그를 향한 저열한 루머들이 거짓으로 판명된 지금까지도 그를 향한 미디어의 흠잡기는 끊이질 않는다. 그리고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 그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다. 마이클 잭슨 같은 빅스타는 서구 언론에서 보도하듯 마이클 잭슨 이후에는 없었으며, 특히 마이클 잭슨은 이전에 서구 문화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았던 지역에 유명세를 펼친 첫 번째 대중문화인이기 때문에 언론의 관심도는 타 스타들과 강도가 완전히 다르다. 그는 죽었어도 아직도 살아있는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오른다. 전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가수이자 연예인으로서 이룰 수 있는 거의 모든 업적을 이룬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겠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미디어와 황색언론들의 미칠듯한 집중포화로 가장 불행하기도 했던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사실상 집에서도 편안히 쉴 수 없었던 그의 삶을 하나하나 따져보면 실사판 트루먼 쇼에 가까울 정도.

마이클이 생전에 살아있을 때는 영국의 'The Sun'이 마이클에 대한 악성 루머를 퍼뜨리기로 제일 악명 높았으나[1] 사망 이후에는 잠잠해졌고 이제는 미국의 '레이더 온라인'이 그 바통을 넘겨받았다. 루머는 주로 폭스 뉴스나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나온다. 온라인 인터넷 기사에 '충격, 마이클 잭슨 OO하다.' 이딴 식으로 올라오는 것들은 전부가 조작됐거나 문제가 있는 주장들이기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서 안 된다. 타블로이드는 '찌라시'를 뜻하는데, 서양에서는 타블로이드판으로 제작되는 신문들이 가십거리와 루머를 담는 황색 언론들이라 타블로이드라고 하면 찌라시라는 뜻을 지닌다. 요즘은 정론지도 타블로이드 판으로 제작하기도 하고 종이신문 사업이 뜸해져 인터넷 매체로 많이들 옮겨가 단순히 도구로서의 타블로이드 구분은 희미해졌지만 전통 때문인지 해외 가십 매체들은 다 타블로이드라고 부른다. 마이클에 대한 악의적인 루머 기사는 100% 출처가 폭스 아니면 타블로이드라고 생각하면 된다. 실제로도 그렇고... 간혹 LA타임즈 같은 데서도 마이클 잭슨의 루머와 관련된 글이 올라오는데 자세히 보면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그렇게 보도했다더라 라는 식으로 인용 보도하고 있다.

타블로이드 보도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바로 ''이다. 타블로이드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접촉한 사람들에게 돈을 줄 테니 인터뷰를 하라고 권유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타블로이드 언론에 가서 그들이 원하는 마이클에 대한 이런 저런 가십 이야기를 떠든다. 물론 그 사람들의 일방적 주장으로 대부분은 교차검증도 받지 않았다. 진실 여부는 애초에 중요하지 않다. 이야기 거리를 건진 게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바나커트 코베인은 1993년 아동 성추행 혐의에 대해 그들은 내용이 아닌 이야기 거리를 건진 게 중요하다며 무분별한 언론의 보도를 비판했었다.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는 2013년 7월 영국의 선데이 피플이라는 타블로이드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관련 기사 자신들이 단독으로 입수한 FBI 파일에는 마이클 잭슨이 24명의 어린이들 성추행하고 3500억 원의 돈으로 어린이들의 입을 막았다는 것. 물론 말도 안 되는 황당한 기사다. 이미 FBI는 2009년에 마이클 잭슨의 성추행 혐의 파일을 전부 공개한 적이 있다. 근데 4년 뒤에 선데이 피플은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렸는지 새로운 내용을 찾은 것도 아니고 기존에 있던 내용을 완전히 왜곡시켜버렸다. FBI 파일 원본을 보면 FBI는 수사 기관의 협조 요청을 받고 필리핀까지 오고 가며 마이클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했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며 합의는 1993년 챈들러 사건 한 건뿐이라고 나와있다. 아래는 CNN에서 선데이 피플을 까버린 기사. 관련 기사
“가격이 올라가니까, 그는 스토리를 점점 자극적으로 만들기 시작했죠.” 필립 르마르크에 대해 메저로우는 이렇게 말했다.
“잭슨 씨의 손이 (맥컬리)컬킨의 바지 속에 있었다고 하면 돈이 더 올라간다고 브로커가 말했다는 게 사실입니까?” 메저로우는 반대심문 중 이렇게 물었다.
“그가 그렇게 말했어요.” 르마르크가 말했다.

“그들을 도왔던 이유는 그들이 받을 돈의 일부를 내게 약속했기 때문이었죠.” 바레시는 말했다. “난 누군가를 정의를 위해 끌고 가는 정의의 사도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마이클이 당시에 진짜 죄가 있었던 없었던 간에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죠. 제 관심은 오로지 돈이었어요, 추가하자면 그들 돈도요.”
- 자세한 내용은 마이클 잭슨의 ‘FBI 파일’에 대한 타블로이드 보도의 신빙성
거짓 FBI 파일과 관련된 내용은 한 가지가 더 있다. 선데이 피플의 저 루머로 전 세계적으로 마이클에 대한 성추행 혐의가 불타오를 시점 영국의 '미러'라는 타블로이드는 FBI 파일 속에서는 '1984년 마이클이 멕시코 소년 2명을 성추행했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수사를 진행했으나, 레이건 대통령에게 백악관에서 상을 받기 위해 수사가 집행정지됐다'는 부분이 있다고 보도했다. 이것도 명백하게 보고서의 내용을 왜곡한 것으로 1993년 성추행 혐의를 다루는 부분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의 타블로이드들은 마이클을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음과 동시에 거짓된 내용의 기사를 계속해서 보도했는 데 그때 나온 루머가 저 내용이다. FBI 파일 원문을 보면 이렇게 써져 있는데 '익명의 사람으로부터 저 내용이 사실이냐고 FBI에게 문의가 접수됐고 FBI가 조사를 벌였지만 그런 사실은 없었다.' 근데, '미러'는 뻔히 자기들의 기사가 거짓임을 알고도 철판 깔고 저런 식으로 보도했으니 저널리즘의 가치를 스스로 똥칠하고 있다고 비판당해도 싸다.

2016년 6월에는 레이더 온라인이라는 타블로이드 인터넷 사이트에서 마이클 잭슨의 저택인 네버랜드의 경찰 수색 당시 대량의 아동 포르노가 발견됐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는 명백하게 거짓이고, 레이더 온라인은 경찰 보고서를 조작했다. 경찰은 '마이클 잭슨의 저택에는 아동 포르노 요건을 충족하는 것이 없으며, 불법행위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 없다."고 썼다. 또한 아동 포르노는 소지 자체가 불법으로 수사기관에 적발 시 기소된다. 근데 마이클 잭슨은 아동 포르노 소지 혐의로 기소된 적이 없다. 자세한 전말을 알고 싶으면 마이클 잭슨 아동 음란물 보도의 왜곡과 전말을 참조

2014년에는 마이클 잭슨의 前 가정부 3명이 폭로를 했다며 '충격, 마이클 잭슨 집안 세상에서 제일 더러워...' 라는 뉴스가 보도됐었는 데 출처는 뉴욕포스트라는 역시 미국의 타블로이드 언론이였다. 그러나 이 자칭 가정부들은 익명속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숨어 버렸다. 그래서 어느 가정부가 그런 말을 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또한 이것은 명백하게 문제점이 있는 증언으로, 마이클은 워낙 호들갑을 떨 정도로 깔끔을 챙긴 사람이며 자녀들을 위해 결벽증과 같은 태도를 보였는 데 자신의 저택을 더럽히고 살았다고? 말이 안 된다. 교차검증적으로도 그렇고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사실 마이클 잭슨은 워낙 거대한 저택에서 살았기에 그의 집에서 일한 사람들은 꽤 많다. 당연히 그중 몇 명의 직원들은 문제가 있었고, 일부 가정부는 마음대로 물건을 훔치다 해고당하기까지 했으며, 언론에게 돈을 받고 이야기거리를 판 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맥 마 누스' 친척들의 집에서도 물건을 훔치다 법적 분쟁을 일으켰었고 1993년 첫 번째 사건이 터졌을 때 문제를 일으킨 직원들과 함께 돈을 받고 마이클을 음해했었다. 또한 마이클과 친했던 사람들이 사이가 틀어지자 나중에는 오히려 언론에 마이클을 비난하고 그랬다. 대표적으로 밥 존스라는 마이클의 홍보 담당자는 언론에 돈을 받고 그를 비난했었다. 그런데 막상 2005년 재판 때는 검찰을 비판하며 마이클을 옹호했다. 검찰은 물론 충격, 마이클에게 안 좋은 말을 할 줄 알고 증인으로 불렀던 건데... 데비 로우도 마찬가지이고. 한 가지 더, 위 CNN 기사를 쓴 사람은 '알렌 듀크' 기자였는데, 그는 CNN에서는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타블로이드 보도를 가장 중립적으로 전체적인 맥락으로 다뤄 마이클 팬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CNN을 모종의 이유로 나가더니 레이더 온라인에 입사했는데, 오히려 이제는 자신이 마이클을 비하하는 전형적인 타블로이드 기사를 쓰고 있다.

최근에는 콘래드 머레이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 황당한 것은 머레이에 대해 설명할 때 언론들은 단순히 그를 주치의라고만 묘사하지 마이클 잭슨을 과실치사로 사망하게 하여 감옥에 수감됐다는 말은 안 해준다. 또한 주치의니 마이클의 모든 것을 알 거라는 식의 기사 내용도 문제다. 머레이는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기 고작 몇 개월 전에 고용된 의사일 뿐 마이클의 나머지 49년 삶에 대해 전혀 알 수가 없다. 또한 머레이뿐이 아니라 마이클과 함께 했던 의사들은 수십 명은 될 것인데 말이다. 어쨌든 당시 과실치사 재판을 통해 판사는 머레이가 반성하는 기미가 없으며 고용자 마이클 잭슨의 신뢰를 크게 배신했다고 판결했다. 또한 머레이의 과거가 가관인데 2009년 5월 기준으로 6명의 여자들로부터 7명의 자녀들을 두는 막장 불륜행각을 보였다, 2002년 캘리포니아에서 파산 신청을 했었고 2008년까지 텍사스와 네바다에서 의료장비와 시술에 쓰인 대여장비 대금 미지급에 대하여 법원으로부터 60만 달러 이상의 과징금이 누적됐으며 자녀들에게 갈 보육비가 지급되지 않았다는 것과 캘리포니아 여성 네니타 말리비란에게 1만 3천 달러의 부채가 있다는 이유로 캘리포니아 의료 자격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해 있기도 했다. 물론 마이클 잭슨 재판 때 징역형은 물론이고 의사면허도 박탈됐고 ... 머레이는 표면적으로는 마이클을 음해하는 타블로이드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고 하지만 7명의 자녀들을 돌봐야 하고 그의 소비벽을 보면 그 의도를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온갖 문제를 일으키지만 마이클 쪽에서는 대처할 수가 없다. 미국은 언론의 자유가 강한 나라로 사망한 사람의 인격을 지켜줄 방어를 할 법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저리 막나가는 것. 그리고 언론의 보도 내용은 전후 맥락이나 전체적인 상황을 보지 않고 그저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대다수이기에.

타블로이드뿐만이 아니라 기존 주류 미디어와의 사이도 좋지 못 하다.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이 보도되고 타임지, 롤링 스톤 등이 추모 특집 판을 찍어냈는데, 내용을 보면 잭슨을 까내리고 있는 부분이 있다. 특히 타임지는 2면을 크게 할애해서 'Wacko Jacko' 라고 한쪽에다 마이클의 굴욕짤을 크게 붙여놨다. 그래서 잭슨의 팬들에게 사진만 좋은 거 나열해놓고 팔아먹으려는 심보냐고 까였다. 하지만 주류 미디어와 타블로이드의 차이점은 적어도 주류 미디어는 타블로이드처럼 잭슨을 근거 없이 비난하는 원천 소스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마이클 잭슨 본인 역시 이러한 개소리들을 매우 싫어했고 생전에 상처도 많이 받았으며[2] 타블로이드를 모아서 산처럼 쌓아놓고 불태워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또한 언론과 파파라치, 루머들을 대놓고 저격하는 곡들을 발표하기도 하였고[3] 자신이 여자와 다니면 섹스광이라고 보도하고 남자와 다니면 동성애자로 보도하는 통에 자신은 늘 혼자 다닌다고 토로한 적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수염 없이 말끔한 자신의 얼굴을 보고 여성호르몬이 과다 분비되는거 아니냐는 기사에 대응해서 턱수염을 길렀더니 이번엔 턱에 모발을 이식했다고 하는 기사를 보고 황당해 했다고.

하지만 파파라치들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 잭슨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개별 파파라치들에게는 일일이 미스터라고 불러줄 만큼 친절했으며 그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다고 한다. 유일하게 화를 낸 순간은 아동성추행 재판 이후 기자가 마이클의 어머니에게 무례한 질문을 했을 때라고 한다. 이때 마이클은 "내가 마이클 잭슨일 뿐입니다. 나에게 말하세요." "당신의 삶을 소중히 하세요."라고 말하며 화냈다고 한다. 언론사에서는 마이클이 못생기고 괴물같이 나올수록 비싼 값을 불렀고 이 때문에 일부 파파라치들은 마이클이 지나갈 때 온갖 어그로를 다 끌어서 화내는 순간을 포착하려고 노력했지만 그를 오래 따라다닌 파파라치들은 최대한 정중하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4]

당시 추모특집 판 커버 사진.

파일:external/img.timeinc.net/1101090707_400.jpg

4. 어린 시절

파일:attachment/마이클 잭슨/jacksons_childhood.jpg[5]
마이클 잭슨이 직접 그린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다. 이 그림을 봐도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픈 추억을 엿볼 수 있다. <HIStory> 앨범에 실렸다.

"너무 일찍 데뷔해서 내 유년 시절은 없다고 생각한다."며 어린 나이에 데뷔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한 것을 보면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유년기를 보내야 했던 것이 상당한 트라우마가 된 것으로 보인다. 잭슨 가는 아홉 남매의 가난한 가정이었으므로 그의 아버지는 음악적 재능이 있었던 자식들을 밴드로 구성하여 공연을 다니게 했는데, 위에도 언급됐지만 잭슨 파이브 시절 확인된 공연만 500회이고 스트립 댄서들이 공연하는 성인 클럽에서 아이들을 노래하게 하는 등[6] 현재로서는 아동학대에 해당하는 수준으로 자식들을 가혹하게 굴렸다. 이러한 생활로 인해서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에 공연을 다니면서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며 그들의 평범한 일상을 동경했다고 한다.[7]

또 나머지 형제들이 아버지에게 맞는 것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이 맞았으며 따귀는 기본에 걸핏하면 폭언을 듣고 채찍(!)에 맞기도 했다. 또한 성숙되지 않은 초등학생 나이부터 여자들의 누드와 난잡한 성생활에 노출돼 섹스 자체에 혐오감을 가지게 된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조지프 잭슨은 본래 부인 캐서린을 내버려 두고 걸핏하면 다른 여자들과 외도를 해 사생아까지 낳았고 그럼에도 가족 관계를 위해 아무 일도 없었다고 엄마에게 말할 때 심한 고통을 입었다고 한다.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는데, 초등학교는 몇 년 다녔으나 잦은 공연 활동과 팬들의 교실 난입 등으로 학교생활이 불가능했고 개인 교사에게 따로 지도를 받아서 정규 교육을 마쳤다.

그가 아동 성범죄자로 의심받은 이유 중 하나는 이 트라우마로 인해 아이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하여 아이들과 노는 것을 좋아했고 아이들을 자기 침대에서 재우는 것을 개의치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자기 집에 놀러 온 아이들에게 자기 침대를 양보하고 자신은 바닥에서 잠을 잤다고 하는데 거기에 그 어떤 성적인 의미나 행동도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면모가 2003년 방영된 《마이클 잭슨과의 삶(Living With Michael Jackson)》이라는 다큐멘터리에서 아동에 대한 이상한 취향을 가진 사람처럼 묘사가 되어 곤혹을 치렀다.[8] 하지만 자신의 트라우마를 아동에 대한 각별한 애정으로 승화했으며 "Heal the world 재단"을 설립하는 등 아동보호에 앞장서기도 했다. "Childhood"와 "Heal the World" 등의 노래와 그가 그린 그림들에서도 그런 트라우마가 엿보이기도 한다.

평범한 어린 시절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스스로 "제 인생은 내 안에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을 찾아가는 과정이에요."라고 얘기했을 정도로 생전에 장난감을 사 모으거나 집을 놀이동산처럼 꾸며놓고 즐기는 등 키덜트적인 면모도 보였다.[9] 잭슨이 2005년에 아동 성추행 혐의로 소송을 벌이고 있을 때[10] 절친인 코미디 배우 크리스 터커가 코미디 쇼에 나와 80% 이상을 잭슨 이야기만 한 적이 있었는데[11]러시 아워 2》에 나와서 잭슨 춤을 흉내 내고 잭슨 집에 불려가서 하루 종일 산더미 같이 쌓아둔 피터 팬 동화책만 읽었다고 하며 그런 마이클 잭슨이 아이들에게 나쁜 짓을 했을 리 없을 거라면서 그를 옹호했다.

실제로 잭슨 형제들이 음악 연습을 할 때 잭슨 형제들의 아버지 조 잭슨은 노래를 잘 부르지 못한다는 이유로 벨트채찍처럼 휘두르고 구두 신은 발로 차는 등 온갖 학대를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밤에 창문을 열고 나가지 못하게 밤중에 무서운 가면을 쓰고 어린 마이클 잭슨의 방에 들어왔는데 그 공포에 대한 기억이 큰 충격이 되어 10대 시절 마이클 잭슨이 악몽에 시달리는 원인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 조 잭슨은 자신의 기타를 건드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자식들을 두들겨 패는 등 집안에서 공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 어린 시절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얼굴만 봐도 부들부들 떨면서 기절하거나 구토 증세를 보이는 등 아버지를 심하게 무서워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생전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빴으며 유언장에서도 아버지 언급을 전혀 하지 않았고 유산 분배에서도 어머니 캐서린과 자신의 세 자녀들에게만 유산을 상속, 아버지는 제외시켰고, 유산의 나머지는 기부했다. 자녀들의 양육권 문제에서도 어머니만 언급되었고 심지어 자신이 사망한 후 자신의 자녀들을 아버지가 자신처럼 스타로 만들려고 할지도 모른다며 싫어했다는 루머까지 있다. 마이클 잭슨 사후 그의 대변인은 마이클의 생전 악질 찌라시를 뿌리기로 유명했던 <더 선>에 조 잭슨이 25만달러를 받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고 폭로했으며 자신으로부터 독립한 마이클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온갖 악질적인 수단을 쓰기도 했다고 밝혀 조 잭슨은 폭풍까임을 받았다.

마이클 잭슨 본인은 인터뷰에서 이야기하기 꺼렸지만 그가 를 성인이 되어서 성형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어린 시절 아버지로부터 코가 못생겼다는 말을 하도 들어서 코에 대한 콤플렉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많은 팬들이 그의 아버지의 행동을 비난하고 있지만, 사실 잭슨 남매들의 가수로서의 트레이닝은 다 이 사람 손에서 이뤄진 것이기에 그 공헌도는 무시하지 못한다. 마이클 잭슨도 인정했듯이 아버지 조 잭슨은 그 자신에게 미스터리한 존재였을 뿐, 부동산 투자니 뭐니 어린이 스타들이 돈 때문에 겪는 일들을 하나도 겪지도 않고 음악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버지 덕분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조 잭슨은 자식들이 번 돈을 착복하지도 않았고 그대로 자식들에게 투자했다.[12] 그러나 그 아버지로 인해 잭슨 남매들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마이클 잭슨은 성장하고 나서도 애정결핍에 자기애가 부족한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9남매 전부 성인이 된 후 전부 폭력적이고 고압적이었던 아버지로부터 독립했다.

마이클 잭슨은 후에 여러 인터뷰에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다소 좋아졌고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한다고 이야기했다. 심지어 옥스퍼드 대학 연설 때도 아버지에게 애정을 느꼈던 작은 일화를 언급하며 자신을 학대하고 평생의 트라우마를 안긴 부친일지라도 자신의 일생을 부모에 대한 증오를 쏟는 데 낭비하지 말고 그들을 용서하고 사랑할 것을 드러내기도 했다. 또한 잭슨 남매들이 마이클에게 툭하면 집에 찾아와 돈 내놓으라며 행패를 부릴 때마다 마이클이 조에게 전화를 걸어 쫓아버렸다는 일화를 보면 아버지를 적당히 이용도 하면서(...) 아예 외면하고 살지는 않았던 모양.

지금도 몇몇 극성 안티팬이나 찌질이들이 "마이클 잭슨은 어린 시절 이야기로 동정 마케팅이나 한다."며 비난을 하지만 사실 잭슨 본인이 직접 나서서 어린 시절 얘기를 공식적으로 방송에서 한 것은 두 번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서전에서 몇 번 언급한 것이나 "Childhood"를 비롯한 자신의 자전적인 곡에서 드러낸 것이다. 대부분 언론과 팬들이 그 부분에 과도한 관심을 표했던 것인데 정작 본인은 남들이 어린 시절에 대한 어두운 얘기를 물어오면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그다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마이클 잭슨은 생전 수많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여담으로 2010년 조 잭슨은 마이클 잭슨 사망 관련 인터뷰에서 자신의 기업을 홍보했는데, 결국 아내인 캐서린은 아들의 죽음을 홍보로 이용하는 남편의 행동에 두 번이나 이혼을 요구하였으나 잭슨 가의 명예를 위하라는 자식들의 요구에 이혼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조 잭슨은 2018년 6월 27일, 아들의 기일 이틀 뒤 별세했다.

5. 여자와의 관계

다들 알다시피 잭슨은 여자 같이 곱상한 외모와 여자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 또 한때 잭슨이 1980년대에 친구를 따라 게이바에 출입했던 사실이 있어 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얼마나 사람들이 잭슨의 성에 관심이 많았냐면, 우리나라 국내 언론 1980년대 보도에도 잭슨이 동정인가와 관련된 보도가 있었다. 1993년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의 쇼에서 잭슨에게 직설적으로 아직도 동정이냐고 물어본다.[13] 잭슨은 당황하며[14]자기는 신사[15]라고 대답한다.

이에 대한 문제에서 잭슨의 전 매니저 프랭크 딜레오는 사람들의 편견과는 달리 잭슨은 활발하게 여성과 동침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같은 정보가 흘러나가면 팬층에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라 쉬쉬했다고 한다. 잭슨은 1994년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는데 리사의 친구들은 리사는 남녀 간의 활동에서 성적 만족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리사가 잭슨에게 푹 빠진 걸 보면 잭슨이 침대에서는 고수가 아니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물론, 이 주장의 진위 여부들은 잭슨 본인만이 알겠지만...

마이클 잭슨은 20대 중반에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혼전 관계를 반대한다고 밝혔다. 해당 인터뷰 기사에서는 그가 독실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이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적어놨다. Thriller 뮤비에서 좀비 분장을 한 것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파문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따라서 서른이 넘을 때까지 크리스마스 파티 한 번 하지 않을 정도로[16] 종교적 신념을 지키고 살았다. 실제로 이 무렵 잭슨이 결혼하겠다고 공언하고 다녔던 다이애나 로스와도 동침한 적이 없다는 통화 내용이 후에 유출됐다.

마이클 잭슨의 첫 여자친구는 흔히 테이텀 오닐[17]이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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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이였는지 돌아다니는 정보는 많지 않지만, 잭슨은 2003년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닐이 나를 침대에서 성적으로 유혹했다. 하지만 나는 부끄러워서 이를 거절했다." 1년 뒤, 오닐은 이 주장을 반박하고 "아니다, 잭슨이 나를 유혹했다."고 주장한다. 이 또한 본인들만이 잘 알겠지만, 국내에 알려진 테이텀 오닐의 인터뷰 중에는 마이클 잭슨의 키스가 매우 서툴렀다는 내용이 있다. # 오닐은 친구 세서 잭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마이클은 섹스를 무서워하는 거 같아. 그런 애가 제대로 된 연애를 할 수 있을 거 같아? 나랑 같이 있을 때 고작 두 마디 정도 밖에 안 할 정도로 부끄러움을 타는 애야. 누군가 이 부분에 대해 걔랑 얘기해봐야 해." 이렇게까지 말한 오닐을 생각하면 마이클의 말이 맞다고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또한 앞서 언급한 잭슨이 오닐을 유혹했다는 말은 오역이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잭슨의 첫사랑은 15살 연상의 다이애나 로스라고 마이클 본인이 여러 곳에서 밝히고 다녔다. 같은 모타운 소속이라서 마이클이 10살 때부터 알고 지냈던 두 사람은 1978년, 뮤지컬 영화 The Wiz를 찍으면서 급속도로 가까워져서 각종 시상식이나 행사에서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이 자주 포착된다. 마이클 잭슨의 모친인 캐서린에 의하면 마이클은 어렸을 때부터 다이애나 정도는 돼야 진짜 미인이라며 자신의 누나들에게 미인이 아니라고 관심을 끌었으며, 잭슨 본인 역시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자기는 어렸을 때부터 다이애나에게 항상 반해있었다고 말한다. 1980년대부터 마이클은 다이애나와 결혼하겠다는 발언도 종종하게 되는데 에보니 매거진 인터뷰에서는 다이애나 로스를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며 인터뷰어가 "누나로서 말인가?"라고 되묻자 마이클은 그런 종류의 사랑이 아닌 그녀와의 결혼을 원한다고 단언한다. 1984년까지도 마이클은 인터뷰에서 다이애나와 결혼할 거라는 의사를 밝히지만 1985년에 다이애나가 갑자기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되면서 둘 사이는 멀어지게 된다. 상대는 마이클은 누군지 전혀 알지도 못하던 남자였다고 하며, 다이애나의 결혼식 날 마이클은 끝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다이애나 결혼 이후 처음으로 재회하는 두 사람[18] 이후 1990년대 초반에 마이클이 친구와 통화하던 녹음본이 유출되는데, 마이클은 다이애나와 동침한 적은 없었고, 자신은 다이애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혼자만의 착각이었으며 다이애나를 잊는데 엄청나게 긴 시간(a hell of a long time)이 걸렸다고 고백한다. 다이애나가 결혼한 뒤에도 마이클은 다이애나를 위한 헌정곡인 "Remember the Time"을 작곡했고 유언장에 자신의 아이들의 2차 후견인[19]으로 다이애나를 지목해 놓는다. 마이클의 첫 여자친구으로 알려져 있는 테이텀 오닐조차 마이클 사후 출연한 방송에서 마이클이 게이였냐는 질문에 마이클은 다이애나를 사랑했다고 밝혔다.(He was in love with Diana Ross and that was real)

6. 가족 관계

  • 장녀 레비 잭슨 - 1950년 5월 29일 생. 본명은 모린인데 가족들 사이에서는 애칭인 레비라고 불렸다. 막내 자넷과의 나이차가 무려 16살이나 된다.
  • 장남 잭키 잭슨 - 1951년 5월 4일 생. 이름이 은근히 웃긴데 저 이름을 애칭으로 부르면 잭 잭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름으로 쟈니 존슨(존 존), 엘리자베스 베티(베스 베스) 등이 있다.
  • 차남 티토 잭슨 - 1953년 10월 15일 생. 이 사람의 아들들은 전부 아빠처럼 T를 이니셜로 쓰는데 이 세 아들인 타지, 타릴, TJ도 3T라는 그룹을 결성해 가수 활동을 하고 있다. 타지는 사촌동생이자 마이클의 아들인 프린스, 블랭킷과 영화 리뷰 채널을 만들기도 했으며 타릴은 마이클 사후 아이들의 후견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 3남 저메인 잭슨 - 1954년 12월 11일 생. 잭슨파이브의 원년 메인보컬이었다가 마이클의 합류로 메인보컬 자리에서 밀려났다(...) 이에 내내 불만을 품다가 모타운 설립자 배리 고디의 딸과 결혼하며 잭슨파이브를 탈퇴하고 솔로로 데뷔했다.
  • 차녀 라토야 잭슨 - 1956년 5월 29일 생
  • 4남 말론 잭슨 - 1957년 3월 12일 생. 마이클과는 한 살 터울 형으로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 4남 브랜든 잭슨 - 1957년~1957년
  • 5남 마이클 잭슨 - 1958년 8월 29일 생
  • 6남 랜디 잭슨 - 1961년 6월 23일 생
  • 3녀 자넷 잭슨 - 1966년 5월 16일 생

남매들과는 언론에 보여 지는 것처럼 그리 사이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큰 누나 레비, 자신을 키워준 큰 형인 잭키와 한 살 터울인 말론과 막내 동생인 자넷 잭슨[20]과는 절친한 사이였지만 다른 남매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명성과 비교도 안 되게 크게 성공한 형제인 마이클을 질투했다고 한다.

형제자매들이 벌이는 사업에 음반 작업에 돈을 대주는 등 80년대 말까지 마이클 잭슨이 형제들을 거의 업어 키웠다. 마이클 잭슨이 90년대 초부터 거의 형제들과 연을 끊고 살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특히 저메인, 랜디, 라토야가 잭슨 가족의 명성에 흠집을 내는 짓을 워낙 많이 했고[21][22] 특히 라토야와 랜디에게는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크게 입었다. 마이클 잭슨이 두 번째 성추행 스캔들로 고생하고 있을 때 마이클 잭슨을 협박하여 금전을 뜯어내고 판권을 매각하라고 강요하기도 했고, 이를 들어주지 않을 시에는 마이클 잭슨이 끔찍히 싫어하는 타블로이드지에 마이클에 대한 루머를 뿌리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마이클 잭슨이 법원을 통해 친형제를 대상으로 접근금지 신청까지 받아냈다. 그러자 랜디는 마이클 잭슨 자택의 대문을 자동차로 들이받아서 쳐들어왔는데 하도 심각한 막장짓을 해서 랜디를 개인 경호원으로 위협해서 쫓아냈을 정도였다. 라토야의 경우는 잭슨 가의 상당한 말썽꾼이자 해외 웹에서도 관종끼가 있는 여자로 악명높은데 일례로 플레이보이지 누드 사건과 93년 성추행 스캔들 당시 마이클을 비난하는 인터뷰를 했던 일과 90년대 초 마이클의 명성을 이용하여 Dangerous 향수 사업을 했다가 크게 망하여 마이클이 빚을 대신 갚아주는 등 마이클을 재정적으로 힘들게 만들었다. 현재까지도 라토야 잭슨은 마이클 잭슨의 누나라는 타이틀로 사업을 가장 활발히 벌이고 있다.

말년에는 아버지를 포함해 형제들 대부분과 갈등을 풀긴 했지만[23] 그간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잭슨 사후 그의 형제들이 그의 유산을 놓고 육탄전을 벌이거나 잭슨의 이름을 걸고 사업을 벌이며 VIP 대접을 받으며 다니는 것에 공분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를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은 잭슨의 생부인 조셉 잭슨이다. 티토의 아들들인 3T를 포함해 조카들과의 사이는 좋았던 듯 하다. #

6.1. 결혼 및 자녀 관계

결혼을 총 두 번 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은 2번 모두 이혼으로 끝나고 만다.

첫 부인은 엘비스 프레슬리의 딸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 리사 마리와 결혼 이전에 세기의 스캔들이 있었기에 스캔들을 잠재우기 위해 유명인의 딸을 이용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다. 또한 당시까지도 빈민가 출신에서 용 된 흑인 스타라는 이미지가 있던 마이클 잭슨이 남부 출신 백인(정확히는 혼혈)인 리사 마리와 결혼을 하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도 상당히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결국 리사 마리와는 얼마 못 가 이혼했다.

이혼 이유는 연애할 때는 몰랐지만 성격 차이가 생각보다 심했고, 바로 아이를 낳자는 약속을 하고 결혼을 했지만 마이클과 결혼 이전에 이혼하며 전 남편과 아이들에게 상처를 줬던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던 리사는 생각을 바꿔서 둘의 결혼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자녀계획을 미루자고 제안했지만, 이미 30대 중반을 넘어가고 있던 마이클은 아이를 재촉하는 상황이 가장 큰 문제였다고 한다. 밤마다 아이 인형을 들고 다니며 울 정도로 슬퍼했다고. 수많은 싸움 도중 마이클이 "네가 아이를 안 낳으니까 데비가 아이를 낳아준다고 했어"라고 말할 때는 죽여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결정적으로 마이클이 95년 공연 준비 도중 심장마비를 일으켜 쓰러지자 그의 진통제 의존증 문제를 알고, 마이클에게 기생하려는 흡혈귀들의 존재를 끊어내려 하다 갈등이 깊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시 타블로이드 언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가짜 사이'는 결코 아니였고, 리사와 마이클은 서로 사랑했고 섹스도 하는 정상적인 부부였다.[24] 악명 높은 다이앤 소여와의 인터뷰에서도 시종일관 그를 보호하고 소여의 무례한 질문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도 보였다. 이혼 후 리사는 후회하며 마이클에게 아이를 낳는 것도 포함해 원하는 것도 다 하겠다고 매달리기도 했지만, 마이클은 그녀와 지속적인 만남을 갖고 투어에도 대동하긴 했어도 재결합에는 선을 그었다고 한다. 리사는 아버지 엘비스와 마이클의 공통점으로 그들 각자가 본인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신이었음을 언급했다.[25] 그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마이클이 자신의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마이클은 확신에 찬 듯 "나는 처럼 죽게 될까 두려워." 라고 말했다고. 마이클이 사망한 뒤 리사는 정말 그렇게 되었다며 블로그에 심정이 담긴 글을 남기기도 했다.

두 번째 부인은 자신의 친구이자 호주에서 피부 치료를 돕던 간호사 데비 로우이며 그녀에게서 연년생 남매 프린스와 패리스를 얻었다. 1999년 이혼 후에도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고 마이클 잭슨이 성추행 누명으로 소송 중일 때 검사 측을 비판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1997년 2월 13일생 프린스 마이클 잭슨, 1998년 4월 3일생 패리스-마이클 캐서린, 2002년 2월 21일생 블랭킷(아명, 현재 이름은 비지 잭슨)[26]이 있다. 생전에 자기 아버지가 9명이나 되는 자녀를 거느렸으니 자기는 더 많이 가지고 싶다는 인터뷰를 했었는데 마이클이 세상을 떠나면서 실현되지 않았다.

프린스와 패리스는 아이들이 백인이라는 이유로 마이클 잭슨의 친자식이 아니다라는 설이 돌았고 심지어는 인터뷰에서 실제로 로와 성관계를 한 게 맞냐는 당혹스러운 질문을 받기도 했다. 사망 이후 친부가 아니라는 소문도 돌았다. 그러나 두 아이의 어머니 데비 로우가 프린스와 패리스는 마이클의 아이라고 인정했고 블랭킷 역시 지인들이 친부가 맞다고 인정했다. 성장한 모습을 보면 생물학적 모친이 불명인 블랭킷이 마이클을 가장 빼닮은 것이 아이러니한 일이다.

큰아들 프린스 잭슨은 수영복을 입고 있는 사진 등에서 마이클과 같이 유전병인 백반증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남으로서 마이클의 친아들임이 입증되었다. 마이클의 젊은 시절처럼 겨드랑이 부분은 이미 변색이 많이 진행되었고 몸 전체적으로 군데군데 하얗게 변한 흔적이 보인다. 물론 마이클도 부계에서 이 유전병을 받은 것. 마이클의 형제들도 마이클만큼 심하진 않지만 백반증이 있다.

패리스는 아직까지도 마이클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람들에게 시달리고 있는중인데[27]성장과정에서 상처가 매우 컸다고 한다. 그러나 패리스 잭슨 역시 다른 남매들과 마찬가지로 태어났을때 친자 확인을 거쳤고 결정적으로 어머니인 데비 로우가 '패리스는 마이클의 친딸'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러한 의혹은 어불성설이다.

실제로 흑인과 백인의 결혼에서 흑인 우성이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예외도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로직을 꼽을 수 있는데, 흑백혼혈임에도 불구하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순수 백인같은 외모를 가지고 있다. 프리즌 브레이크에 출연한 배우 웬트워스 밀러의 경우는 쿼터인데도 거의 완전한 백인 얼굴이다. 게다가 WWE 프로레슬러헐리웃 영화배우 양쪽 모두 성공을 거둔 드웨인 존슨 역시 아버지가 흑인에 어머니가 사모아 원주민임에도 되려 피부색은 미디엄 브라운이고 이목구비는 거의 백인인 외모를 하고 있다. 그럼에도 어떻게 연속적으로 아이 셋이 백인이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았는데 최근 성장한 패리스 잭슨의 공식 사진을 참고하면 피부 빛이 미디엄 브라운에 가까운 것을 알 수 있다.[28] 혈통 상으로 마이클 잭슨도 쿼터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피부 빛이 상대적으로 밝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실 미국 흑인들은 이민 온지 얼마 안 된 1,2세가 아니고는 백인 혈통이 안 섞인 경우가 거의 없을 만큼 혼혈이 많이 되어 있고, 인종적으로도 백인과 가장 가까운 쪽이 흑인이다. 마이클의 누나인 라토야 잭슨만 보더라도 백인 혼혈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피부색이 굉장히 밝은 편이다. 마이클 잭슨의 자식들과 라토야 잭슨의 사진 애당초 마이클 잭슨이 순수 흑인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아이들이 모두 밝은 피부색으로 태어나는게 가능했다. 마이클 잭슨의 여동생인 자넷 잭슨도 아랍인과 결혼해서 백인의 외모에 가까운 아들을 낳았다. 패리스 잭슨이 그녀의 고모인 라토야 잭슨의 소싯적 모습과 닮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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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찍으려는 파파라치들에게 욕을 하는 마이클 잭슨
1997년에 첫 아이인 프린스가 태어났을 때 병원 근처에 아기 사진을 찍으려는 취재진이 가득했고 헬리콥터까지 동원되는 등 큰 이슈를 끌었는데 그 때문에 아이들의 납치나 범죄를 우려하여 생전에 항상 애들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했다. 그러나 그의 사후 장례식에서 아이들이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면서 이제는 언론에도 자주 얼굴을 내비친다. 그의 생전에는 자녀 모두 홈스쿨링을 했으나 사후에는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패리스 힐튼은 잭슨 사후에 그의 딸 패리스의 이름은 마이클 잭슨이 자기 이름을 너무 마음에 들어 해서 자기 엄마에게 동의를 얻고 패리스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냥 헛소리 중 헛소리다. 마이클 잭슨과 패리스의 어머니는 유년 시절에 같은 학교를 잠시 다녔고[29], 힐튼가 사람들은 사적으로도 잭슨의 집에 초대받아서 노는 등 절친한 사이긴 하지만 딸 패리스의 이름은 딸이 만들어진 곳이 프랑스 파리였기 때문에 붙여졌다.[30] 이 때 패리스 힐튼은 괜히 잭슨과의 친분이나 부각시키려고 헛소리를 한다며 미국 팬들에게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또한 프린스 이름의 유래는 King of Pop 의 아들이기 때문에 프린스라고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저메인 잭슨의 인터뷰에 의하면 실제로는 캐서린 여사의 아버지, 즉 마이클의 외할아버지 이름이 프린스였고 거기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물론 마이클 본인이 King of Pop 이라는 별명을 마음에 들어했던 만큼 중의적인 의미였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두번째 성추행 재판 이후에는 말년까지는 대중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냈다. 아버지로서는 자상했던 한편 엄격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 아일랜드에서 살 때 비 오는 날 개를 안에 들여 집안을 어지럽혔을 때나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가수로서 교육받은 덕에 자녀들이 말할 때 발음을 똑바로 하지 않으면 단단히 혼내기도 했다고. 아이들의 말로는 집에서도 항상 부지런히 움직이고 자신의 작품을 보는 것도 매우 쑥스러워 했다고.

패리스 잭슨은 키 178cm의 상당한 미인으로 컸으며, 2017년에 세계적인 모델 에이전시 IMG와 계약을 맺고 모델로 데뷔한 것에 이어 5월에는 영화 출연까지 확정하며 배우 데뷔를 앞두고 있다.# 또한 남자친구와 밴드를 결성해서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다.

프린스는 패리스가 앨범을 낼 때 프로듀싱을 해줬다는 것을 보아선, 가수로서 활동하진 않아도 음악을 하는 모양이다.


2002년 마이클 잭슨독일에 방문했을때 한 호텔에 머물면서 생후 8개월된 자신의 자녀를 베란다 밖에 내미는 시늉을 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마이클 잭슨이 아이에게 위험이 될 수 있는 높이에서 아이를 보여주려고 한 것은 확실한 잘못이 맞다. 그러나 마이클은 그의 아이를 팔로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으며 아이를 보여준 후 바로 들어간다 근데 언론은 그 장면만을 느리게 보여주면서 마이클 잭슨을 마냥 아동학대범이라고 하면서 마이클을 비난한 것이다. 그의 주변인인 데비 로우나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이런 책임감 없는 언론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고 마이클 잭슨 본인도 2003년 Living With Michael Jackson 다큐맨터리에 출연해 이 사건에 대해 해명하면서 언론에게 받는 압박감을 토로한 적이 있다.

7. 외모

마이클 잭슨의 원래 외모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흑인들의 전형적인 외모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은 히스패닉, 아메리칸 원주민 혼혈이며 그의 아버지 조 잭슨은 아프리카 노예의 후손이지만 벽안을 가졌다.[31] 한마디로 순수 흑인이 아니라 혼혈이다. 특히 고조부와 증조부 대부터 아메리카 원주민 계통이므로 흑인치고는 광대뼈의 돌출이 도드라지고 흔히 말하는 t존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었다. 참고로 아메리칸 원주민생물학적으로 황인에 가장 가깝다. 형제들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누나인 라토야 잭슨만 봐도 거의 백인에 가까운 피부색이며 마이클의 조카 티토 잭슨의 아들들은 히스패닉계의 특징이 강하다. 아버지 조 잭슨은 마이클이 처음 태어났을 때 피부가 다른 형제들보다 더 까만편이라 "너 내 아들 맞냐?"라고 한 일화가 있다. Black or White나 Smile 뮤직 비디오에서는 그의 외모는 히스패닉 느낌이 상당히 강하다.
파일:MJ Smooth criminal.gif 파일:MJ Moonwalker socute.gif 파일:Michael Jackson Billie Jean 1988.gif
팬들 사이에서는 대체로 Bad 시기가 그의 비주얼 전성기로 꼽힌다. 당시 촬영한 문워커나 비슷한 시기에 촬영한 Captain EO를 보면 그의 리즈시절을 감상할 수 있다. 89년 소울 트레인 어워즈 영상의 댓글을 보면 대부분 "난 게이가 아니지만 마이클은 정말 잘생겼다"일 정도. 사실 Thriller 전후의 음악적인 성공 외에 열성적인 팬덤, 특히 젊은 여성 팬덤을 모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외모가 한몫했다. 물론 사람에 따라 Thriller의 소년미 넘치는 모습이나 Dangerous 이후의 중성적이고 가녀린 외모, 날카로움과 창백함이 강화된 HIStory, 아예 2000년대의 모습을 더 좋아하기도 하지만 Bad 시기의 인기가 가장 많다.

키는 175cm ~ 178cm로 아주 큰 키는 아니었지만 댄서로서 춤을 추기에는 적합한 신장이었다. 그리고 얼굴이 아주 작고 어깨는 넓은 편이어서 마른 몸매에 비해 덩치가 있어 보이는 편이었고, 팔다리가 키에 비해 길고 손도 매우 큰 편이어서 춤 출 때마다 시선을 끌고 동작을 표현하는 데 유리했다.

평생 동안 굉장히 마른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키가 175cm인데 체중이 가장 적게 나갈 땐 50kg밖에 안 나갔다고 한다. 본인이 평소에도 채식을 즐겼고,[32] 다른 사람들보다 더 소식했다고 한다. 어머니 캐서린의 자서전에 의하면 "사람이 아무것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다면 난 음식을 먹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밥을 잘 안 먹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다이애나 로스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숟가락을 가져가며 억지로 음식을 먹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33] Dangerous 투어 당시에는 체력 증진을 위해 적절한 닭가슴살 섭취와 피트니스를 병행하였다. 그래서 나오미 캠벨과 함께 한 In the Closet 뮤직 비디오에서는 나름 괜찮은 팔 근육을 만들었다. 다만 평소에는 운동을 즐기진 않았고 땀이 나도록 춤을 추는 것이 나름의 운동 방법이었다고 한다. 워낙 마른 탓인지 몇 없는 노출 사진을 보면 근육이 도드라지는 편.

40대에 접어들면서 마이클 잭슨의 외모에 대해서 성형 부작용이라는 가십이 엄청나게 많았는데, 사실 자연스러운 노화도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친 소니와의 불화, 2년 동안 이어진 소송으로 스트레스가 매우 심했기 때문에 거식증으로 인한 체중 감소가 성형한 얼굴을 안 좋게 부각시킨 측면이 강하다. 즉 마이클 잭슨의 후반기 비주얼 변화에는 자연적인 노화와 백반증, 육체적 및 정신적 건강 악화로 인한 체중 감량 등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아이러니한 건 급격히 변화한 마이클 잭슨의 외모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잭슨을 오래도록 바라본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백인인지 흑인인지 구별할 수 없는 모호한 인종적 특성과 남자인지 여자인지 가늠할 수 없는 중성적 외모와 하이톤의 미성, 탄탄하고 마른 몸매와 멋진 퍼포먼스 실력 때문에 생전에 게이 팬들도 많았다.[34][35]마초적인 근육질 외모 대신 잭슨의 가녀린 외모를 좋아하는
여성 팬들도 정말 많았다. 그의 삶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가 되었던 외모가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팬들을 끌어들인 요소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8. 백반증과 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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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잭슨의 부검 보고서 중 Diagnosis 2번 항목에 백반증(Vitiligo)이 적혀 있다. 마이클 잭슨이 백반증을 앓고 있었음은 검시관 크리스토퍼 로저스가 2011년 재판에서 직접 증언하기도 했다.[36] 영상(1분 29초부터)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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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마이클 잭슨. 파운데이션을 바른 것 같지만 화장을 일절 하지 않은 맨 얼굴이다.

마이클 잭슨이 백인이 되기 위해 피부를 표백한다는 소문은 그의 가장 유명한 루머이자 명백한 거짓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피부가 하얘진 것은 백반증 때문이다.

마이클 잭슨은 1984년에 피부과에서 공식적으로 백반증을 진단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백반증이 악화된 원인으로는 1984년펩시 CF를 찍던 중 일어난 화상 사고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CF를 찍던 잭슨은 펩시 측의 장비 부주의로 머리에 큰 화상을 입었는데, 백반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피부에 큰 자극을 받으면 악화가 급속도로 빨리지기 때문이다. 일단 본인이 이에 대해 언급한 바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하다. 그러나 1984년을 기점으로 백반증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이 화상 사고로 인해 발생한 유명한 루머가 '산소통' 이야기이다. 당시 마이클 잭슨은 화상 치료를 위해 산소 탱크 내에서 잠을 잔 적이 있었는데, 이 모습을 찍은 사진이 퍼지면서 '늙지 않고 오래 살기 위해 매일 산소방에서 잔다'라는 식의 루머들이 나돈 것.

마이클 잭슨의 안면 백화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형수술로 피부를 하얗게 만들었거나 성형수술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피부를 박피하든 태우든 성형수술로 피부를 하얗게 만드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단에 기재되어 있다시피 피부에서 멜라닌 색소가 점점 사라지는 백반증에 걸렸던 것이다. 백반증은 피부 표면 전체의 멜라닌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점점 탈색되기 때문에 피부가 표범처럼 얼룩덜룩해진다. 현재도 피부병 환자들이 받는 편견이 심한데 먼 옛날에 백반증을 앓는 흑인들은 동물원에 갇힌 괴물처럼 구경거리로 취급되었다. 백반이 덮은 부위가 넓었던 잭슨은 화이트 메이크업을 짙게 하여 변색 부위를 가리고 다녔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메이크업으로 커버할 수 있었는데 갈수록 백반이 넓게 퍼지면서 파운데이션으로는 커버가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장 밝은 샤넬 파운데이션으로도 커버가 안 돼서 마이클의 메이크업 담당인 카렌 페이가 다른 연예인의 메이크업 담당들에게까지 파운데이션을 빌리러 갔었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마이클 잭슨을 본 사람들의 증언으로는 그는 화면에서 본 것 이상으로 백금처럼 하얗다고 했다.

백반증에 걸리면 자외선이 백반을 퍼지게 할 수 있어서 노출 부위는 햇빛을 받지 말아야 한다. 백반증이 악화된 후부터 잭슨의 필수품은 양산, 우산, 중절모, 장갑, 선글라스였다.[37] 장갑을 착용한 건 손에 있는 백반을 가리기 위해 1979년부터 착용하였다.

마이클 잭슨은 자신의 백반증을 1993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직접 밝혔다. 이로 인해서 그 당시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백반증에 대해 대중들이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 사후 LA 검시청의 부검에 의해 실제로 백반증을 앓고 있었던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

하지만 잭슨의 몸이 완전 하얗게 보이는 게 오로지 백반증만의 결과는 아니다. 백반증은 피부를 백금처럼 변색시키긴 하지만 치료법이 엄연히 존재한다.[38] 그러나 그의 피부과 주치의인 아놀드 클라인은 잭슨처럼 백반이 심하게 퍼진다면 치료는 불가능하며 "탈색법"만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주장하였다. 탈색법이란 백반증이 심하게 번진 환자에게서 정상적인 피부를 제거해서 아예 하얗게 만드는 방법으로, 마이클처럼 백반이 60% 이상일 때 고려하는 치료법이다.[39] 마이클처럼 전신의 60% 이상을 백반이 덮는다면 전신을 아예 탈색시키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그 사람이 국제적인 슈퍼스타라면 다른 선택지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백반증이 발병하는 구체적인 원인은 의학계에서 지금까지도 완전히 밝혀내지 못했다. 잭슨과 80년대 중반부터 함께한 아놀드 클라인은 그에게 유전력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고 마이클 잭슨의 아버지 역시 A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기 집안에 문제가 있으며, 본인의 누나와 여동생도 똑같다며 마이클이 어릴 때부터 백반증을 앓고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로 마이클 본인도 1993년 오프라 윈프리와의 인터뷰에서 친가에 문제가 있는 걸로 안다고 발언하였다[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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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지 매거진《16》의 표지로 등장한 1972년의 마이클. 손가락 끝이 흰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이클 잭슨의 어머니 캐서린 잭슨도 2011년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피부가 얼룩덜룩해지는 게 싫어서 표백 크림을 사용했다고 발언했다. 잭슨의 시신을 부검한 크리스토퍼 로져스는 피부의 일부는 밝고 나머지는 어둡다고 증언하였으며, 부검 보고서에도 얼굴, 팔, 가슴, 배에 탈색이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한편 흑인이 심한 백반증으로 탈색 시술을 받은 것은 마이클 잭슨 뿐만 아니라 예전에도 꽤 있었던 사례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피부 색소를 잃은 흑인 댄서를 참고.

참고로 백반증은 흑인뿐만 아니라 다른 인종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피부가 검은 흑인에게 유독 두드러질 뿐이다. 얼굴 부위에 백반증을 앓은 흑인들은 정신적인 고통을 겪으며 대부분은 하얗게 변한 부위를 짙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거나 흰 부위에 맞게 다른 피부를 밝은 파운데이션으로 가리기도 한다. 마이클 잭슨의 사후에도 피부색 변화에 대해 말이 많자, 마찬가지로 백반증을 앓고 있는 저널리스트인 리 토마스가 자신이 출연하는 방송에서 민낯을 공개하고 백반증 환자들의 고충을 토로하면서 마이클 잭슨을 옹호하였다.

마이클 잭슨은 아버지의 지나친 외모 지적으로 인해 코에 큰 컴플렉스를 가져 성형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지만 막상 수술의 부작용 때문에 두려움을 겪고 망설이다 1979년 영화《The Wiz》촬영 당시 무대에서 넘어져 코가 부러지는 사고로 인해 처음으로 성형수술을 하였다. 그는 자서전에서 2번의 코 성형과 턱에 홈을 파는 성형 1번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41] 잭슨의 외모 변화는 1986년의 영화 "Captain EO"부터 두드러졌는데 거의 유러피안처럼 변한 얼굴로 변한 1987년Bad로 컴백했을 때 마이클 잭슨의 피부색 변화는 국제적인 논쟁거리였다. 정보 교류가 빈번한 지금도 마이클 잭슨의 성형수술은 논쟁이 되곤 하는데, 인터넷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당시에는 서서히 나타난 백반증 때문에 피부까지 하얘져서 "그는 백인이 되고 싶어 피부 표백을 했다."는 등의 루머가 엄청나게 돌았다.

마이클 잭슨 본인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성형은 3번이다. 하지만 사후 주변인들의 증언에 의하면 몇 차례의 수술이 더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 캐서린의 증언에 따르면 마이클은 성형중독으로 비칠 정도로 외모에 집착했다고 한다.[42] 그 이유는 앞에서 설명한 아버지의 지나친 외모 지적이다. 그는 아버지와 형제들에게 외모에 대한 많은 지적을 들었으며 본인 스스로가 내성적이라 자신감을 갖지 못하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것이 최종적으로 컴플렉스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백인이 되려고 한 시도라고 여기는 건 타당하지 않은 낭설이다. 그는 외모에 대한 컴플렉스 때문에 성형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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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1988년의 마이클 잭슨[43]

사후 마이클 잭슨을 부검한 결과 눈썹과 이마, 입술에 문신이 되어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백반증이 원인으로 추정되는데, 백반증은 몸에서 멜라닌이 사라지기 때문에 피부만 하얘지는 게 아니라 입술과 눈썹은 물론 머리카락도 모두 하얗게 변한다. 사람들이 마이클을 보고 놀랐다고 한 것이 그냥 하얘서 놀란 게 아니라 마치 백금처럼 하얗기 때문이다. 또한 백반증이 심해지면서 피부에는 하얀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이나 입술에는 진한 색조화장을 하게 되면서 20대 시절과 이미지가 많이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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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 전 화장 후

헤어스타일도 흑인의 전형적인 곱슬머리에서 직모로 변하는데, 펩시 광고를 찍던 중 입은 화상 때문에 두피가 손상되어 가발로 대체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투어 시절의 모습을 보면 분명한 곱슬머리이다. 마이클이 탈모였다는 설은 사후 부검에서 앞머리에 탈모가 있던 것으로 일부 사실이다. 마이클의 팬이라면 90년대 중반과 HIStory 투어가 끝난 공백기 즈음에 예전보다 머리숱이 줄어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라이브 공연처럼 격렬한 동작을 요하는 퍼포먼스가 필요 없는 공식 석상에서는 가발을 쓰고 나오는 것. 그리고 말년에는 50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상한 것도 아니고 놀림거리가 될 이유는 더욱 없다.

여담으로 마이클 잭슨의 성형수술 이후의 모습 사진이 위기탈출 넘버원 30회[44] 성형외과 의료사고 편에서 나왔다.

9. 타 연예인과의 관계

  • 흑인 음악계의 전설답게 흑인 배우, 뮤지션, 운동선수들과 친분이 있었다. 에디 머피, 어셔, 마이클 조던, 크리스 터커, 제임스 브라운 등 수많은 흑인 스타들과 같이 공연하거나 뮤직 비디오를 찍었다. 에디 머피의 음반에 "What's Up WIth You?"라는 노래에 피처링을 하였고[45] "You Rock My World"에는 크리스 터커를 출연시켰다. 후배 가수인 어셔는 종종 마이클의 노래 커버를 했고 30주년 콘서트에는 크리스 터커와 어셔가 깜짝손님으로 나왔으며참조 어셔는 마이클의 장례식에도 Gone Too Soon을 불렀다. 마이클 조던은 서로의 전성기 시절 Jam 뮤직 비디오에 출연해 서로에게 농구와 춤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 마이클 잭슨은 원래부터 비틀즈의 열렬한 팬이었고, 나중엔 비틀즈의 멤버였던 폴 매카트니와도 친분을 맺었다. 처음엔 팬과 멘토 관계로 시작된 둘의 사이는 나이 차이를 초월하는 절친한 친구이자 공동작업자 관계로까지 발전되었으나, 매카트니가 되찾아오려고 벼르던 비틀즈의 음악 판권을 잭슨이 가져가는 바람에 둘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기도 했다.
    잭슨은 70년대 후반에 직접 매카트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직접 만날 기회를 갖기를 원했고 마이클을 직접 만난 후엔 매카트니도 마이클을 마음에 들어했다. 매카트니는 작곡[46]과 음악에 대한 많은 것들을 마이클에게 알려주었고, 마이클의 첫 성인 솔로 앨범인 Off the Wall에 "Girlfriend"란 곡을 만들어서 선물까지 해준다. 또 명곡 "Say Say Say" 듀엣을 하여 빌보드 핫 100 6주 1위, Thriller 앨범의 "The Girl is mine"으로[47] 빌보드 핫 100 2위에 올려놓으며 같이 뮤직 비디오도 제작하는 등 한창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매카트니는 마이클보다 더 노래를 잘 부르려 하지 않았고 마이클은 매카트니보다 더 춤을 잘 추려고 하지 않는 등 상대방이 더 돋보일 수 있도록 서로를 배려했다고...
    이처럼 둘의 사이는 좋았으나, 후에 잭슨이 비틀즈의 판권을 사들이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저작권의 개념을 정확히 알고 있었던 폴 매카트니는 판권을 사들이는 것은 훗날 굉장한 재산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음악의 권리를 갖고 있다는 것 자체가 뿌듯한 일이고[48], 그 음악들의 사용 허가 권한을 가지고 적절한 곳에서만 쓰이도록 관리하는 일의 보람 등에 대해 설명해 줬다.[49] 아직 대중음악 판권의 중요성이 잘 인식되지 않았던 1960년대에 비틀즈 음악의 판권이 Northern Songs에 넘겨졌고 이것이 다시 ATV로 넘겨지는 것을 그저 지켜봐야 했기 때문에 비틀즈 멤버들은 언젠가는 자기들의 음악 판권은 자기들이 되찾아 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매카트니로부터 판권에 대한 얘기를 들은 잭슨은 판권에 상당한 호기심을 갖게 됐고 우선 시험삼아 70년대 다른 가수들의 히트곡 판권을 일부 사게 되었다. 이후 비틀즈의 음악 판권이 있는 ATV가 매물로 나오자 폴 매카트니를 포함한 여러 사람들이 비틀즈 판권을 사려고 했고 잭슨 또한 경쟁에 참여했다. 당시 폴 매카트니는 오노 요코에게 1000만 달러씩 각자 부담해서 2000만 달러에 사자고 제안했으나 오노 요코는 가격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구매 타이밍을 놓치게 된다. 그 사이에 잭슨이 경쟁 끝에 4750만 달러에 판권을 사들인다. 자신들의 음악에 대한 권리를 꼭 되찾고 싶었던 매카트니는 이에 매우 실망하였고, 그것도 자기가 70년대 후반에 음악적 멘토 역할을 해줬고 나중엔 콜라보도 같이 했던 잭슨이 자기가 얘기해준 판권에 대한 조언에 따라 자기 음악의 판권을 사버렸다는 사실에 어이없어 했다. 오노 요코는 비틀즈 판권을 얻지 못한 것에 자기도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마이클 잭슨처럼 비틀즈의 음악을 사랑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비틀즈 판권을 산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인터뷰하기도 했다. 실제로 잭슨은 이제 자기의 소유가 된 비틀즈의 음악 사용권을 상당히 소중히 여기며 아꼈고, 비틀즈의 음악을 원칙적으로는 다른 매체 삽입곡으로 쓸 수 없도록 하는 엄격한 판권 관리 지침을 내렸다. 그래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틀즈의 노래는 온라인 서비스도 되지 않았고 영화에서조차 삽입곡으로 쓸 수 없었다. 즉 비틀즈 음악 판권을 거액을 들여서까지 산 게 단지 그걸로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면 여기저기 마구 쓸 수 있도록 허가해줘서 막대한 사용권 수입을 얻었을텐데 전혀 그러지 않았던 걸 보면, 단지 상업적 목적을 위한게 아니라 진정으로 비틀즈의 음악을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무튼 이 판권 문제 때문에 둘의 관계가 소원해졌지만[50], 잭슨 사망 후 폴 매카트니는 "그는 부드러운 영혼을 가진 굉장히 재능 있는 젊은이였다. 그와 함께 했던 경험은 행복한 기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라며 조의를 표했다.
  • 데이비드 팩에 의하면 레너드 번스타인은 마이클의 재능에 경이로움을 느꼈고 비틀즈 이후[51] 자기를 가장 흥분시키는 뮤지션이라고 했다고 한다. 1986년 데이비드 팩은 번스타인의 생일을 앞두고 그에게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물었는데 이에 번스타인은 지체 없이 마이클을 보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마이클은 파티에 초대 받아 참석하게 됐다. 출처
  • 전설적인 의 보컬 프레디 머큐리와도 친분이 있어서 여러 번 조우했다. 마이클이 프레디의 팬임을 자처해서 80~82년 퀸의 공연에 여러 차례 찾아오기도 했다. 참조 1981년 발매된 퀸의 앨범 the game 수록곡들 중에 마이클은 “Another one bites the dust”와 “Crazy little thing called love”를 싱글 커트 하라고 자신 있게 권유해서 퀸이 그 조언에 그대로 따랐는데 두 곡 다 빌보드 싱글 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같이 세 곡을 작업하기도 했으나 스케줄 조정에 실패하여 연습 데모 수준에서 끝났고 생전에 완성곡이 발매되지는 않았다. 마이클 잭슨이 녹음 스튜디오에 애완 라마를 계속 데려와서라고 카더라 [52] 이후 두 사람은 소원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프레디는 인터뷰를 통해 마이클 잭슨이 'Thriller'로 엄청난 성공을 거둔 이후 매우 바빠졌고 프레디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조금 소원해졌다고 말했다. 프레디의 퍼스널 어시스턴트였던 피터 프리스톤에 의하면 프레디도 마이클에게 경외심을 가졌을 정도로 마이클을 좋아했다고 한다. 퀸 결성 전부터 이미 하드록을 좋아하는 룸메이트들에게 잭슨 파이브의 ‘I Want You Back’의 굉장함을 소리 높여 설명했다고..
  • 춤의 달인으로 수많은 후배 가수들과 댄서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못 추는 춤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뉴 잭 스윙이 열풍이었던 80년대 뉴 잭 스윙의 왕자인 바비 브라운을 자택에 초청하여 자존심을 버리고 춤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 퀸시 존스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이클 문서를 다 봤다면(적어도 'Bad' 항목) 어떤 지 대강 알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마이클 팬들에게 엄청나게 비난당했는데 사후 종종 이해가 안 되는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백인이 되고 싶다고 주장한다던가 얼굴을 하도 고쳤대던가 급기야 마이클을 용서하겠다는 발언까지. 그러더니 최근에 와서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나는 그가 죽은 후에 어처구니 없는 말들을 많이했다."며 "극한의 사랑 신뢰 존경이 없었다면 마이클과 함께 한 업적은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며 뉘우쳤다.
  • 생전 유명했던 절친으로는 엘리자베스 테일러맥컬리 컬킨, 스티비 원더, 다이애나 로스 등이 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와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오랜 시간을 친구로 지냈고 마이클이 1993년 혐의 이후 가장 먼저 마이클을 지지했으며 마이클이 사건을 이겨나가게 하는데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함께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마이클이 온갖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마이클은 엘리자베스를 위한 노래 "Liberian girl"을 만들기도 했고 네버랜드 랜치에서 결혼식을 열게 해주기도 했다. 또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97년 생일에는 직접 무대에 올라 팬들 사이에서 숨겨진 명곡이라고 불리는 Elizabeth I Love You를 만들어 헌정하기도 했다.[53] 엘리자베스는 맥컬리 컬킨과 함께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30주년 기념공연에도 참석했다. 2000년대에 Invincible 발매 이후에 재판을 겪은 이후로 마이클은 2009년까지 거의 잠적했는 데 이는 1993년 혐의 이후로 HIStory를 발매하고 재기한 것과 대조되는 상황이다. 이에 리사 마리 프레슬리[54]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곁에 없었기 때문[55]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을 만큼 엘리자베스는 마이클에게 정신적으로 기댈 곳이 되어주는 좋은 친구였다. 그녀를 "내가 꼭 껴안고 싶은 따뜻한 담요"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출처
      다만 마이클에게 큰 힘이 되주기도 했지만 마이클의 재정 상태에 부담을 주는 데도 한몫했다. 마이클은 엘리자베스에게 고가의 선물을 많이 했는데 90년대에는 그녀에게 줄 향수를 1개 구입하는데 1만달러를 쓰기까지 했다. 다만 받기만 한 것은 아니고 엘리자베스도 마이클에게 코끼리를 선물하는 등의 보답도 많이 했다. 이 역시 의도치 않게 재정에 부담을 주게 되긴 했겠지만.
    • 맥컬리 컬킨은 "Black or White" 뮤직 비디오에 출연하고 네버랜드 랜치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 다이빙대 위에서 춤추다가 밀어서 물에 빠뜨린 적도 있다 게다가 성추문 사건으로 힘들어할 때도 언제나 지지해주던 친구였다. 마이클의 성추행 혐의로 인한 재판이 벌어졌을 때 마이클을 변호하기 위하여 참석하기도 했고 현재까지 아주 단호하게 그의 결백을 지지하고 있다. 또한 2001년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린 30주년 기념 공연에도 참석했다. 사실, 둘 다 어떤 면에서는 동병상련을 겪었던 인물들이다.
      둘의 마지막 만남은 2005년 성추행 재판 때 컬킨이 증인으로 참석했을 때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라고 한다. 마이클은 그에게 컬킨의 증언에 영향을 주고 싶지 않다고 말을 아꼈고 둘은 잔잔히 웃었다고. 잭슨 사후, 잭슨의 딸인 패리스 잭슨의 대부가 되고 커플 타투까지 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다이애나 로스는 상술하였듯이 마이클의 첫사랑이었다고 한다. 모타운 시절부터 알고 지냈고 어렸던 마이클 잭슨에게 그림을 가르쳐 주는 등 멘토로도 지냈다. 자서전에서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이자 애인이자 누나라고 말했으며, 친구과 통화하며 그녀를 잊기까지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고 하기도 했다. 유언장에서도 자신의 어머니 다음 친형제들까지 제치고 후견인을 그녀로 지목했을 정도.
  • 머라이어 캐리는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의 일원일 정도로 그와 절친이었다. 실제로 머라이어가 모톨라와 안 좋게 이혼하고 잭슨에게 찾아와 엉엉 울었을 때 그가 토닥이며 위로해 줬었다. 마이클 사후 그의 생일 때마다 머라이어는 트위터로 그의 생일을 축하해 준다.
  • 마돈나는 마이클과 동갑인데다 둘의 별명도 엮기 좋은 King, Queen이고 90년대 초에 둘이 엮이는 일이 많았고 1991년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둘이 나란히 연인 느낌을 내며 입장한 적이 있다. 다만 둘의 사이는 자주 만나는 친구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둘은 엄연히 같은 부문에 종사하는 음악인들로 서로 질투 의식을 갖기도 했다고. 한편 마돈나가 유일하게 정복하지 못 한 남자가 마이클이란 설이 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건 마돈나의 전기책이다. 이 책은 마돈나가 직접 쓴 건 아니고 마돈나에 대해 자료를 수집한 기자가 집필한 책인데 내용을 보면 마돈나는 전 남자친구에게 자신이 유일하게 성적으로 유혹하지 못 한 남자가 마이클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마돈나가 직접 집필하거나 말한 게 아니기 때문에 그대로 이 책 내용을 신뢰할 수 있는 지는 미지수. NBC와 마이클의 인터뷰에서 좀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 마돈나가 먼저 마이클에게 데이트를 신청했고 마돈나가 "난 너와 디즈니랜드 같은 곳에는 안 갈거야."라고 하자 마이클은 "난 디즈니랜드에 가고 싶다고 한 적 없는데."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마돈나가 "그럼 레스토랑에 갔다가 스트립바에 가자."라고 제안하자 마이클은 "난 여자든 남자든 사람들이 옷 벗는 자리엔 안 갈거야."라고 거절했다고. 마이클의 사후 열린 MTV 비디오 뮤직 어워즈에서 마돈나는 '지금 어딘가에서 미소 짓길 바란다.'며 추모하였다. 한편 90년대에 아이큐 점프에서 연재되던 만화 달숙이에서는 마돈나와 마이클이 부부인 것처럼 등장한 바 있다.
  • 에미넴과 악연이 있다. 에미넴은 자신의 곡 Just Lose It의 뮤직비디오에서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루머, 성형수술, 1984년에 펩시 촬영 중 일어난 사고와 백반증을 조롱거리로 삼았다.[56] 이에 마이클 잭슨은 에미넴의 뮤직비디오가 불쾌하다고 밝혔으며 많은 마이클 잭슨의 팬과 잭슨의 절친한 친구인 스티비 원더는 에미넴의 행동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도의적으로 봐도 머리에 불붙은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은 아니며, 성추행 문제는 무혐의로 판결되었고 성형 문제도 에미넴과는 상관없는 개인의 문제일 뿐이다. 마이클 측은 해당 뮤직비디오를 방영하지 말라고 방송국에게 요청하기까지 했으며, 마이클 잭슨은 에미넴 관련 사건에 대해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공격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에미넴은 쇼 프로에서 마이클과 만나본 적 있냐는 질문을 받자 성적인 만남 말하는 거냐고 반문하고 호텔 창문에서 아이 인형을 던지며 마이클의 아기 흔들기 사건을 모방하는 등 끊임없이 마이클 잭슨을 조롱하고 다녔다. 마이클 잭슨의 사망 이후 에미넴은 마이클 잭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인터뷰에 "나는 마이클 잭슨을 좋아한다"라며 뮤비 건에 대해서는 그냥 장난으로 그런 것이라고 해명했다. 원래 에미넴은 다양한 유명 인사들을 광역으로 디스하며 인기를 끌었으며, 특히 당시 마이클 잭슨은 언론들의 악의적 보도로 성범죄자라는 인식이 퍼져 있었기 때문에 에미넴이 디스하기 좋은 상대였다. 실제로 Just Lose It은 공개 당시 '대형 문화 (음반) 산업'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고 높게 평가받기도 했으며 에미넴 본인도 대형 음반사 소속이기는 하지만 에미넴 열성팬들 사이에서는 지금도 높게 평가받는다.[57] 한편 에미넴의 노래 'Just Lose It' 판권을 마이클이 사들였다는 말이 나돌았는데 마이클 잭슨이 에미넴의 노래 몇 개의 판권을 사들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마이클은 저작권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당시 에미넴의 노래 포함 12만 5천곡을 4억 달러에 샀다고 한다.) 그러나, 'Just Lose It'을 사들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스티비 원더Bad 앨범의 "Just Good Friends"를 피처링 해주었으며, 만일 자신이 볼 수 있게 된다면[58] 두 가지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첫 번째가 자신의 딸의 얼굴이며 두 번째가 마이클 잭슨의 문워크였다고 했다. 또한 스티비는 에미넴이 위에 서술된 사건을 일으키자마자 바로 비판했다. 마이클 역시 스티비 원더를 베토벤과 동급으로 두고 싶으며 그의 노래를 완벽에 가깝다 칭찬할 정도로 좋아했다.
  • 70년대 디스코로 월드 스타 반열에 오른 비 지스와도 친분이 있다. 비 지스가 침체기에 있던 80년도 초부터 리더 배리 깁은 다른 가수들의 앨범을 프로듀싱해서 메가 히트 앨범으로 만들며 스타 프로듀서 반열에 올랐다. 그 와중인 84년도에 다이애나 로스Eaten Alive 앨범 작업을 진행하게 되었는데, 앨범 대부분의 곡을 형제들인 로빈 깁, 모리스 깁, 앤디 깁과 만들고 있었다. 이때 다이애나 로스와 친분이 있던 잭슨과도 만나게 되었고, 타이틀 트랙인 Eaten Alive[59]를 작업하게 되었다. 이때의 인연으로 비 지스 멤버들과 잭슨은 친분을 맺게 되었다. 나중인 2003년에 모리스 깁이 사망했을 때 장례식이 가족장으로 진행되었고, 소수의 인원만 참여할 수 있는데도 그중 잭슨이 껴있을 정도였다. 배리 깁과는 2002년 말에 다시 만나 All In Your Name을 작업하기도 하였다. 잭슨 사망 2주기에 맞춰 발표도 했지만 차트 진입에는 실패했다.

10. 성격

마이클 잭슨은 따뜻하고 친절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다. 잭슨의 따뜻한 성격을 볼 수 있는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06년 월드 뮤직 어워드 당시 잭슨이 머물고 있던 숙소 바깥에서 팬들이 진을 치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피자 배달원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우르르 와서 천 명 가까운 팬들에게 피자를 나누어주며 마이클 잭슨이 전부 계산을 한 거라고 하자 팬들이 환호성을 내며 마이클 잭슨에게 감사했다고 한다. 대신 잭슨이 탄산음료를 마시지 않아서[60] 팬들에게도 콜라 대신 생수와 커피를 배달해줬다고 한다. # 또한 마이클은 길거리에서 노숙자들이나 거지들을 보면 차마 내버려 둘 수 없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제공했다고 한다. # 일일 포토그래피로 초청받은 사진사에게도 먼저 다가가 친절하게 인사를 건냈을 정도였다. #

그것과는 별개로 무대에서 보여주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는 달리 실제로는 매우 내성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마이클 잭슨의 지인들, 함께 작업했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매우 소심하고 수줍음을 타는 성격'이라고 증언했을 정도... 레이건 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초청된 마이클 잭슨의 실제 모습을 보고 너무 수줍어하는 사람이라 깜짝 놀랐다고 했다. 다큐멘터리에서도 문워크를 보여 달라고 하면 부끄럽다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머니 캐서린 잭슨에 의하면 마이클은 심할 때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화할 만큼 수줍음을 탔다고 한다.본인의 성격에 관한 인터뷰 남말 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아서 다른 지인이 자기 앞에서 전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를 욕하면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고 전해진다. 매체에서 공공연하게 다른 연예인을 씹어서 어그로를 끌기도 하는 그쪽 연예계에서도 꽤 신사적이고 쿨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엄청나게 까칠한 성격으로 유명한 톱 모델 나오미 캠벨마저 인정한 사람. 그래서 에미넴이 자기를 욕하고 다니던 시절에 '뛰어난 아티스트는 다른 아티스트를 욕하지 않는다.'며 불쾌해 했다.

일적으로는 냉철하고 의심도 많고 경쟁심도 강했다고 한다. 잭슨의 변호사 존 브랑카 말로는 롤링 스톤즈가 자신이 로스엔젤레스에서 공연했던 공연장보다 더 규모가 큰 공연장을 섭외했다고 하자 미친 듯이 화를 냈다고... 쇼 비즈니스계에서는 영악할 정도로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도 들을 만큼 치밀한 사람이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쇼 비즈니스 관련된 쪽으로는 영리했으며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무대에 열광하고 흥분하는지 명확하게 캐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사적으로는 무척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한다.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썼다는 곡 'Stranger in Moscow'는 자신이 머무는 호텔 밖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고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크나큰 외로움을 느꼈으며 그때의 마음을 회상하며 쓴 곡이 이 곡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젊은 나이에 너무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주변에 비즈니스로 맺어진 사람들이 많았고 여자를 만나면 섹스광이라고 대서특필되고 남자를 만나면 동성애자라고 보도되는 통에 거의 혼자 다녔다고 한다. 안습. 그 때문에 진정한 친구가 적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 외로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집 밖을 뛰쳐나가 모르는 남자를 붙잡고 '저와 친구가 되어주세요'라고 했는데 그 남자는 '마이클 잭슨이다!'하고 소리를 질렀고 주변에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잭슨은 '이걸 원한 게 아닌데'라며 아연실색했다고 한다.

90년대에는 자신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여기고 접근하는 사람들을 질리도록 대하면서 환멸을 느꼈는지 자신에게 부담스럽게 접근하는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고 선을 긋게 되었다. 다만 오랜 연예계 생활로 인해 주변에 예스맨들이 넘쳐났고 이들을 한 번 좋아하면 덮어놓고 믿는 어리숙한 면이 있어서 이로 인해 만만치 않게 금전적, 정신적 피해를 자주 봤다. 대표적인 경우가 2001년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이었던 최규선과 유리겔라 같은 사기꾼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前 부인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2005년 성추행 재판 당시 마이클을 변호한 변호사 토머스 메제로우도 마이클 주위에는 마이클에게 무언가를 얻으려고 접근하는 흡혈귀, 즉 예스맨들이 무척이나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마이클이 도움이 필요할 땐 다들 거절했다고 말했다. 마이클 잭슨의 이러한 어수룩한 면모는 황색 언론의 집중 표적이 되어 오랜 세월 집요한 공격을 받기도 했다.

11. 한국과의 인연

1996년 HIStory 투어 내한 공연
1999년 MJ&Friends 자선 내한 공연
세계적인 스타들 중 한국과 인연이 꽤 깊은 것으로도 알려져있다. 최규선 게이트의 장본인인 최규선과 비즈니스 목적으로 친분을 쌓은 것이 대표적인 이유. 최규선은 어린이를 좋아하는 잭슨의 마음을 사기 위해 매일 본인의 아기를 안고 네버랜드 앞에서 기다렸다고 하며, 나중에는 국악 풍물패까지 동원하기도 했다는 얘기도 있다. 실제로 IMF 사태가 터지기 전후,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빈 탈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 등이 최규선, 잭슨과 가까운 관계여서 한국 투자 건과 관련된 얘기가 오갔다고 한다.

그가 한국을 처음 방문하기 한참 전인 1988년에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이 인터넷에 널려있다 이는 89년에 통일교의 주체로 열릴 예정이었던 잭슨의 콘서트를 위하여 당시의 찍은 사진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개런티 문제로 인하여 해당 콘서트는 취소되었고 당시 소송이 오간 것이 뉴스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후 1993년 Dangerous World Tour를 위하여 비자를 발급받기 위한 신청서도 제출하는등 노력을 하였으나 근검절약과 1992년 뉴 키즈 온 더 블록 내한공연 당시에 사고 그리고 당시에 있었던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루머로 인한 마이클 잭슨의 당시 이미지가 겹쳐 정부는 마이클 잭슨의 내한공연을 공식적으로 불허하였다. 이에 대해서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이런 식으로 막아도 되는 거냐는 비판도 있었다.[61]

본격연예 한밤이 한밤의 TV연예였던 시절, 사전 협의도 없이 마이클 잭슨에게 무작정 찾아가서 인터뷰를 해 논란이 된 적 있다.[62] 한창 스케줄 때문에 바삐 움직여야하는 마이클 잭슨을 붙잡고 들이댄 꼴이었기 때문. 하지만 마이클 잭슨은 조금도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고, 시종일관 웃는 얼굴로 인터뷰에 성실히 임했다. 이 일화는 마이클 잭슨 사망 후 한밤의 TV연예에서 직접 언급을 하며 추모에 동참했다.

처음 한국을 방문한 때는 1996년.[63] 공연 포함 한국에 온 횟수는 4번이다.(1996년 첫 내한 공연, 1997년 투자 목적으로 방문, 1998년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 4년간 해마다 온 셈이다. 1996년 첫 내한 당시에는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묵었으나 나머지 3번 방문 모두 남산 아래 서울신라호텔에서 묵었다. 대한항공에 탔을 때 먹었던 비빔밥이 생각났는지 서울신라호텔에서 대접받은 비빔밥을 극찬했다. 다만 매운 것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먹었던 비빔밥은 고추장 대신 간장을 넣고 삶지 않은 채소를 넣었다고 한다. 이후에도 비빔밥을 즐겨먹었는지 2007년 일본 팬미팅 당시 한국의 팬을 만났을 때도 비빔밥을 언급했다. 10:48 당시 호텔에서는 이른바 마이클 잭슨 비빔밥을 스페셜 메뉴로 내놓기도 했다. 호텔에서는 잭슨을 위해 최고급 객실인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내부 장식도 그의 취향대로 풍선을 데코레이션을 해주고 아케이드 게임 머신을 넣어주기도 했다. 그리고 나주시에 생산하는 특산품으로 유명한 나주배를 먹어보고 너무 맛있었는지 잔뜩 구입한 뒤 비행기에 포장해서 가져갔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한다.

내한 중에는 화장실에 가려고 명동 피자헛에 잠깐 들르질 않나, 강남역 타워레코드 본점(현재의 지오다노 자리), 아이의 아동복 쇼핑을 위해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압구정본점 등을 깜짝 방문하는가 하면 콘서트 전후에는 소외 아동들을 위해 직접 롯데월드, 에버랜드 등을 전세 내고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던 유일한 연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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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한국 측 정치인들과도 인연이 있는데 그 최규선의 소개로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97년 대선 직전에 한국에서 처음 만났고, 이듬해 취임 직후에도 만났다. 첫 만남에서 김대중 후보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휘호를 손수 써주면서, 이런 어려운 때에 마이클 잭슨 같은 세계적인 부자가 투자했으면 좋겠다며 을 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김대중대통령 취임식에도 초청받아 참석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64]하고 곧바로 청와대로 초청해 회동하기도 했다. 1996년 첫 방한 시에는 김수환 추기경과 만난 적이 있으며, 1997년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직후에는 투자 목적으로 한국을 극비리에 찾아 동아그룹 최원석 회장 측과 인천 매립지(현 청라국제도시)를 둘러보는가 하면 유종근 당시 전라북도지사쌍방울 초청으로 새만금무주 리조트를 방문하기도 했다. 주류 언론 대부분이 그의 루머들을 매번 악의적으로 보도한데다가 보수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내한공연까지 반대하던 일각의 상황을 감안하면 꽤 흥미 있는 행보였다. 이후 마이클 잭슨이 사망하자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직접 "우리는 세계의 한 영웅을 잃었다. 또한 우리는 한국의 통일에 부단한 관심을 가지고 성원해 준 사랑스러운 벗을 잃었다. 한국 국민은 슬프다. 나 역시 개인적으로 우정을 나눠온 좋은 친구를 잃어 슬프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라는 내용의 공식 애도를 표했다. 공교롭게도 김 전 대통령 역시 마이클이 사망한지 약 2개월 후인 2009년 8월에 사망했다.

민주당에서도 마이클의 사망 소식에 공식 애도 논평을 내기도 했다. 김유정 대변인은 "전 세계인의 스타였던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의 사망을 애도한다"며 "그를 사랑했고 그의 노래에 함께 감동하고 함께 어깨를 들썩거렸던 세계의 많은 팬들과 함께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오래도록 그를 기억할 것"이라고 애도했다. 김 대변인은 "마이클 잭슨은 특히 한국의 통일을 함께 염려하고 기원해 주었던 고마운 벗이었다"며 "짧은 생을 혼신을 다한 뜨거운 열정으로 살다간 마이클 잭슨의 명복을 빈다"고 덧붙였다.

내한할 때마다 앙드레 김이 의상을 제공하곤 했는데 마음에 들었는지, 전속 디자이너로 섭외를 요청하자 앙드레 김 측에서 정중히 거절한 일화도 있다. 대신 직접 디자인한 의상 몇 벌을 손수 골라 보내주기도 했는데, 2009년 런던에서 열린 기자회견, 즉 생애 마지막 공식석상에서 입었던 잭슨의 옷이 바로 앙드레 김이 디자인한 옷이다. 마이클 잭슨 세상을 떠난지 1년 뒤에 앙드레 김 역시 세상을 떠났다.

2018년 1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리자 한국 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마이클 잭슨의 '한국의 통일이 이뤄진다면 다시 이 곳에 와서 공연을 하고 싶다'라는 발언이 재조명되며 마이클 잭슨을 추모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같은 해 이방카 트럼프가 한국을 방문해 문재인 대통령과의 만찬 자리에서 K팝을 칭찬하자 문 대통령이 "마이클 잭슨은 한국 내에도 열렬한 팬들이 많았다. 그의 음악이 K팝이 만들어지는데 영향을 줬다고 본다”는 내용의 화답을 하기도 했다.

[1] 문서를 찾아보면 알겠지만 더 선은 마이클 잭슨 이외에도 각종 찌라시를 퍼트리기로 악명높은 황색언론이다.[2] Living With Michael Jackson 다큐를 보면 그런 류의 기사를 대할 때 본인은 어떻냐고 묻자 먹먹한 표정으로 "나도 사람이에요...."ㅈ하며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젊은 시절, 자신의 루머가 적힌 타블로이드 신문을 보며 많이 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3] 대표적인 곡들이 바로 <Leave Me Alone>, <Why You Wanna Trip On Me>, <Scream>, <They Don't Care About Us>, <Tabloid Junkie> 등등. 영화 문워커를 보면 그를 쫓아다니는 극성팬과 기자, 파파라치들에게 시달리는 클레이 애니메이션으로 <Speed Demon>이 흘러나온다.[4] 그러나 진짜로 빡치는 순간도 있었던지 파파라치를 향해 법규를 하는 샷도 돌아다닌다.[5] 왼쪽의 문장은 마이클 잭슨의 곡 "Childhood"의 가사 중 하나이다.[6] 유년 시절 이 성인클럽 공연에서 있었던 일은 잭슨의 자서전에도 충격적으로 묘사가 되어 있다.[7] 실제로 인터뷰에서는 유년 시절 레코드 사 건너편에 공원이 있었는데 아이들이 뛰는 모습을 보면서 곡 작업에 매진해야 했다고 한다.[8] 다행히 잭슨 측에서 따로 영상을 촬영한 것이 남아있어서 대조한 결과 악질적인 편집임이 드러났다. 그럼에도 이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아서 잭슨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되었다.[9] 주변 사람들이 그를 40살 어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10] 소송 사건 당시 법원에서 병에 들어있는 사탕을 고르는 사진이 있기도 하다. 그리고 평소에 사탕, 껌 등을 단 것을 굉장히 즐겨 먹었다. 어린 시절부터 마이클 잭슨은 사탕이나 과자를 무척 좋아했는데 가수를 안했으면 사탕가게 주인이 됐을 거라고 한다.[11] 영화 《러시 아워 2》에서 성룡과 더불어 홍콩으로 파견 근무를 갔을 때 성룡이 '홍콩에서는 내가 마이클 잭슨이고 넌 토토 잭슨이야' 라고 하자 터커가 '토토 잭슨이 아니라 티토 잭슨(잭슨의 형제 이름)이야. 토토는 니들이 저녁에 잡아먹는 개 이름이구'라는 장면이 나온다.[12] 막내 자넷 잭슨 역시 아버지가 프린스의 밴드 출신 프로듀서인 Jimmy Jam&Terry Lewis를 소개시켜주었기에 3집의 대성공과 가수로서의 탄탄대로를 걸을 수 있었다.[13] Are you a virgin?(당신은 동정인가?)[14] How could you ask me that question?(어떻게 나한테 그런 질문을 할 수가 있냐?)[15] a gentleman[16]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그를 위한 깜짝 크리스마스 파티를 열어주는데 마이클은 생전 처음 해보는 크리스마스 파티에 즐거웠지만 동시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방에서 혼자 울었다고 한다. 물론 언제까지나 이전 종교에 얽매여 있던 건 아니어서 이후에 크리스마스 메시지도 남기고 자신의 아이들과 함께 크리스마스 파티를 즐기는 홈비디오도 남겼다.[17] 최고의 최루 멜로 영화로 대히트를 쳤던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었던 남우 라이언 오닐의 딸이다. 이들 부녀간의 관계 역시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악명 높다.[18] 이 날 마이클의 표정이 굳어있는게 다이애나에게 화가 나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많다. 다이애나 결혼 이후로 마이클은 죽을 때까지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절친 사이로 지내게 된다. 영상 속 월드 뮤직 어워드 시상식 역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파트너다. 여담으로 노래 시작 전 마이클은 자신의 파트너인 리즈 여사를 챙기지만 노래가 끝날 무렵에는 어째서인지 다이애나 로스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있다.[19] 1차 후견인은 아이들의 할머니이자 마이클의 엄마인 캐서린. 캐서린이 죽게 되면 다이애나 로스가 마이클 아이들의 후견인이 된다.[20] 자넷과 마이클은 서로 고민을 털어놓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고, 1995년에는 듀엣곡 Scream을 발표하기도 했다. 또한 자넷은 1993년 라토야가 법정에서 거짓증언을 했을때 인터뷰를 통해 라토야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등 남매 중에서 유일하게 마이클의 편에 서기도 했다.[21] 저메인은 잭슨 파이브 당시 마이클처럼 보컬이었으며 마이클이 들어오자 메인 보컬 자리를 빼앗기고 불만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솔로 데뷔를 항상 원했고, 모타운 설립자 배리 고디의 딸과 결혼하며 소원 성취를 한다. 그리고 본인은 잭슨 파이브를 탈퇴한다. 웃긴 건 바람을 피워서 배리 고디의 딸과 이혼했으며 후에 알레한드라라는 여자 사이에서 아이를 보았으나 이후에 이 알레한드라는 랜디와 바람을 피워 아이를 또 가지는 등 형제가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동서지간이 되는 개막장 사태가 일어난다.[22] 라토야의 경우는 매니저였던 잭 고든과 연애를 하면서 플레이보이지에 누드 사진을 올리거나(미국에서 유명인의 누드 사진을 보는 시선은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막장짓을 일삼아 가족들과 척을 졌으며 93년 마이클 잭슨의 아동 성추행 스캔들 때 마이클에게 매우 불리한 증언을 언론에 대고 해서 마이클이 이성을 잃을 정도로 크게 분노했다고 한다. 이후 잭 고든이 사망한 후 인종차별주의자였던 잭 고든에게 협박, 폭행을 당해서 한 거라며 마이클과 화해했다고는 하나 당시 인터뷰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라토야는 잭슨 팬들에게 랜디와 함께 주요 까임 대상 중 하나다. 라토야 잭슨은 마이클의 리즈 시절 아예 스릴러라는 컨셉으로 마이클 잭슨 분장으로 플레이보이 잡지 누드에까지 나왔다. 참고로 최악의 플레이보이 표지로 손꼽힌다. 루머와 달리 포르노를 찍은 적은 없다. 라토야 잭슨은 앞서 언급된 잭 고든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잭 고든이 그녀를 포르노에 출연시키려고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고 언급했으며, 플레이보이 건도 잭 고든에 의해 찍게 된 것이라고 얘기했다.[23] 2차 아동 성추행 혐의로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 90년대와 달리 가족들 대부분이 그를 지지해주기도 했다. 2005년 재판이 끝났을 때 저메인 잭슨은 마이클을 바레인으로 데려가기 위해 전용기를 대기시키기도 했다. 형 저메인에 따르면 마이클은 이 계획을 알지 못했다고. 관련 글[24] 생전 마이클과 절친했던 도널드 트럼프가 마이클과 리사가 자신의 저택에 묵으며 며칠 동안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 섹스리스 부부가 된 부모 때문에 섹스를 중요시 여겼던 리사가 자신의 친구에게 마이클이 매우 Hot stuff하다고 자랑하기도 했다.[25] 오랜 시간 마이클의 메이크업 아티스트였던 카렌 페예를 포함한 지인들의 언급 중 하나가, 마이클은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를 하면 그 사람을 멀리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리사는 이 때문에 자신도 그에게 일회용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시 되짚어 보니 다르게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던 그가 나름 최선을 다해 자신을 사랑했음을 알게 되었다고.[26] 호적상 이름은 형과 똑같은 프린스 마이클 잭슨. 언론은 프린스 마이클 2세(주니어), 팬들과 아버지는 블랭킷이라고 부른다.[27] 외형상으로는 부계를 전혀 닮지 않고 모계 유전만을 닮았다.[28] 대신 눈은 엄마를 닮아 벽안이다.[29] 사실 마이클 잭슨은 학교를 얼마 못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이 도시 저 도시로 공연을 다녔던 탓도 있고 들이 교실에 난입해서 사인을 해달라는 통에 초등 과정도 다 못 마치고 개인 교사를 통해 의무교육에 해당하는 수업과정을 들었다고 한다.[30] 투어 중 파리 공연에서, 투어에 동행한 아내 데비 로우와 부부관계했다가 생겼다고. 원래는 첫째와 텀을 두고 둘째를 가지려 했는데 파리 투어 중 관계로 임신하는 바람에 연년생이 되었다고 한다. 이 일화만 봐도 부부 사이의 정상적인 부부관계로 생긴 애들임을 알 수 있다.[31] 새파란 눈은 아니고, 헤이즐에 가까운 녹색눈이다. 패리스 잭슨이 벽안이 열성임에도 어머니의 벽안을 가질 수 있었던 것도, 아버지쪽 혈통으로도 친할아버지가 벽안인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친할아버지 영향인지, 패리스는 새파란 어머니의 눈색깔에 비해선 약간 녹색끼가 있는 벽안이다.[32] 다만 아예 육식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굳이 정의를 내리면 가금류와 어류 정도는 적절히 섭취하는 폴로-페스코에 가까웠다. 무엇보다 좋아하는 음식 중 하나가 KFC오리지널 치킨이었다. 채식을 시작한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사춘기 시절 여드름 때문이었다고 한다.[33] 딸인 패리스 잭슨은 어릴 때 보면 마이클 잭슨을 빼닮은 체형인데, 키가 178cm이다. 마이클 잭슨이 그토록 안먹고도 175~178cm의 키인거 보면, 제대로 먹고 자랐으면 키가 더 컸을 수도.[34] 1990년대 초반에 한 기자가 "당신은 게이가 확실한가요?"라고 질문하자 마이클은 "카메라를 끄면 대답할게요."라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기자가 카메라를 끄자 마이클은 "아니요. 저는 게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전 세계에는 나의 팬인 게이들이 많아요. 나를 게이로 생각하고 싶다면,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그분들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요."라고 발언하였다..[35] 확실한 출처가 없어 신뢰하기는 어렵다. 어느 인터뷰에서 정확히 언제 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다.[36] 콘레드 머레이 재판[37] 그의 사진을 보면 온몸을 칭칭 감고 있거나 햇빛이 맑은 날에도 양산이나 우산을 쓰고 있는데 신분 은폐를 가장한 자외선 차단법이다.[38] 하지만 의사들의 소견에 의하면 백반증은 보통 난치병으로 취급되며 치료가 잘 되는지는 환자마다 복불복이라고 한다.[39] 전신의 모든 멜라닌 세포를 파괴시킬 수도 있고 노출된 부위의 세포만 선택적으로 파괴시킬 수도 있다.[40] 안타깝게도 마이클의 장남인 프린스 역시 부친에게서 백반증이 유전되었다.*.[41] 우리가 흔히 엉덩이 턱이라 부르는 턱에 파인 홈은 적당히만 파인다면 서양권에서는 미남의 상징이다. 참고로 턱의 홈은 유전.[42] 다만 캐서린 잭슨은 종교색이 뚜렷한 매우 보수적인 인물이고 아들 사후에도 팬들에게는 긁어 부스럼 격인 발언을 여럿 해왔던 터라 팬들은 대부분 적당히 넘기고 있다. 1차원적으로 해석하면 언론이 그를 공격하는 논리의 근거로 제공되기 딱 좋은 발언들도 다수 있기 때문.[43] 왼쪽이 2008년이고 오른쪽이 1988년이다.[44] 2006년 2월 25일 방송분[45] 뮤비를 보면 알겠지만 에디머피와 서로 장난을 치며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귀여운 마이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참조[46] 이때 마이클에게 자신이 부를 노래는 직접 쓰는 작곡 능력을 갖춘 아티스트로 발돋움하기를 적극 권유했고, 작곡 방법 등에 대한 구체적인 조언들도 해줬다고 한다.[47] 가사가 마이클과 폴이 한 여자를 두고 내 여자친구라며 투닥거리는 익살스러운 내용이다. 막판에는 노래가 아닌 대화체로 폴이 진지하게 "마이클, 싸우고 싶진 않네. 하지만 그녀는 어제밤에 나 밖에 없다고 했어" "나도 싸우고 싶진 않은데 폴, 그건 그녀가 나한테 한 말이에요" "그랬다고? 난 믿지 아~~~~~~않아~"하면서 또 보컬로 넘어가는 부분이 재미있다.[48] 그래서 폴 매카트니는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선배 뮤지션인 버디 홀리의 음악 판권을 통째로 사서 소유했다.[49] 매카트니의 인터뷰를 보면 매카트니가 이걸 설명해 줬을 때 마이클이 "그럼 내가 당신의 음악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라고 했고 매카트니는 "녀석 농담은" 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이 되고 만다.[50] 사실 소원해졌다고 말하기도 이상한 것이 1989년 폴 매카트니 솔로투어 시절에 마이클 잭슨과 폴 매카트니가 찍은 사진이 존재한다[51] 번스타인은 비틀즈의 페퍼 상사 앨범을 슈만의 음악에 견줄 수 있을 정도라고 극찬한 적이 있다.[52] 2014년 발매된 Queen Forever 앨범에는 프레디 머큐리와 마이클 잭슨의 데모곡을 합친 there must be more to life than this를 담아 발매했다.[53] 이 곡은 마이클잭슨의 의지에 따라 단 한번의 공연만 이루어졌을뿐 싱글컷이나 앨범 음원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직 그 날 공연을 위해서만 만들어졌고, 또 불려졌다. 마이클의 오래된 팬들 사이에서는 숨겨진 명곡으로 알려져있다.[54] 마이클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리사 마리 프레슬리는 아예 언급을 피하는 등 기피하는 모습을 보였다.[55]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2004년~2005년에 이미 70을 넘겼기 때문에 93년때처럼 마이클을 위하여 힘쓰기에는 너무나도 늙었기에 별 수가 없었다.[56] 해당 곡의 초반 부분에서 "... and that's not a stab at Michael/That's just a metaphor/I'm just psycho...." ("...마이클 잭슨을 말하려는 게 아니야/그저 은유일 뿐이야/난 그냥 싸이코야...") 라는 가사도 등장했다.[57] 여담으로 에미넴은 마이클 잭슨이 무혐의 판결을 받은 이후에도 라이브 무대에서 Just Lose It을 불렀고 마이클 사망 이후에 본인의 유튜브 공식 채널에 Just Lose It 뮤직비디오의 Director's Cut을 올리기도 했다. 애초에 에미넴은 마이클 잭슨에게 진지하게 사과를 한 적도 없으며 지금도 일부 에미넴의 극성 팬들은 마이클 잭슨이 소아성애자라고 주장하며 에미넴을 옹호하고 있다.[58] 스티비 원더는 신생아 때 시력을 잃었다.[59] 작곡에는 배리 깁, 모리스 깁, 마이클 잭슨만 참여. 보컬에는 다이애나 로스, 마이클 잭슨, 코러스는 배리 깁.[60] 건강관리를 위해서 되도록 탄산 음료를 마시지 않았다.[61] 근검절약이니 같은 소리는 말도 안되는게 당장에 돈이 없었던 아프리카 및 동구권 국가 그리고 소련해체 후 러시아 등에서도 문제 없이 공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996년 공연 당시에는 한국만 특별히 개런티를 저렴하게 해주었고 1999년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에서는 이전에는 절대 불허였던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TV 생중계를 최초로 했던 것도 한국에서의 공연이었다.물론 그 이후로도 마이클의 공연이 TV로 방영될 때에는 편집본이 나갔다 즉 완전 생중계는 마이클 잭슨과 친구들 공연이 유일하다.[62] 참고로 이 인터뷰를 진행한 인터뷰어는 당시 신인이었던 이제니였다.[63] 내한공연을 반대하던 여론이 있었음에도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직후에 미 뉴스위크지 와의 인터뷰에서 꼭 한국에 와서 공연을 해줬으면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64] 원래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가려고 했다가 건강 문제로 못 가고 대신 친필 편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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