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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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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족
苗族 | Miao People
파일:묘족_.jpg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명칭 <colbgcolor=#fff,#2d2f34> [ruby(苗, ruby=Miáo)][ruby(族, ruby=zú)] (중국어)
Miao people (영어)
인구 약 7,300,000 ~ 12,000,000 명
주거주지역 구이저우성

1. 개요2. 유래3. 언어4. 거주지5. 문화6. 베트남, 라오스에 살고 있는 묘족7. 치우 신앙8. 창작물에서9. 출신 인물10. 기타

1. 개요

중국 대륙 최남부와 인도차이나 반도 등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이다.[1] 중국어로는 먀오족(苗族)이라 한다. 중국 내에서 한족, 좡족, 만주족, 회족을 포함한 5대 민족에 들어가는 큰 민족 중 하나이며 인구수가 가장 불명확하다. 대부분 구이저우성에 거주한다.

2. 유래

파일:KBS 스페셜 로고.png
KBS UHD 문명기획
마지막 신화의 땅
<rowcolor=#ffff00> '전쟁의 신' 치우천왕의 후예!
중원세력의 탄압을 피해
산골 오지 구이저우로 숨어들었다!

마지막 남은 신화 속 후예들 '묘족'
(2018년 5월 31일 방송분)

묘족은 치우천왕을 조상신으로서 여겨서 매년 9명의 조상신과 함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이들은 오랜 세월 동안 한족 왕조의 핍박을 피해서 구이저우성의 험준한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여러 대에 걸쳐서 능력 중심으로 선출된 '묘왕(苗王)'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외부의 침입을 방어해 왔다. 역대 묘왕은 치우를 포함하여 65명이 있었다.

원래 남(南)이라고 불렸다. 남은 그들이 뫼마루에 묻었다가 제사에 꺼내서 쓰던 큰 쇠북을 본뜬 글자인데 이들을 뜻하게 되고 나아가 이들이 상나라의 남쪽에 있어서 남쪽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다.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묘족은 양쯔강 중류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족국가를 이뤘으며 계속 세를 넓히다가 황하 유역을 근거지로 하는 한족의 전신인[2] 화하족이 강성해짐에 따라 양쯔강 이남으로 밀려났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의 초나라의 구성원 중 상당수를 묘족과 관련이 있거나 조상격이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초나라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기도 했으며, 영토에 이민족 거주지가 많다보니 다른 제후국들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다. 이후 초나라가 중원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문화적으로 중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지 오래되어 중국 문명에 편입되었고, 진시황의 통일 이후에는 사실상 동화되었다.

한족화된 묘족 입장에서는 굳이 한나라를 적대시할 이유는 없었고,[3] 초한전쟁, 한나라, 삼국시대, 서진,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대거 남하한 한족과 섞이며 대부분의 묘족이 한족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동화되지 않은 이들이 현대 묘족의 조상이 된다.

이후, 한동안 역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다가 당나라 시기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한다. 명나라부터 한족과의 충돌이 잦아지기 시작하면서 청나라 말기까지 여러 차례 자체주도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때마다 진압 당하면서 많은 피해와 수모를 겪었다. 1370년대 명나라 시기에 첫번째 반란을 일으키나 명나라에 의해 등용된 위구르 군사에게 진압 당하고, 이때 소수의 위구르족이 이주하여 현재까지 후손이 존재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묘족은 포기하지 않고 1400년도 중반기에 몇차례의 반란을 더 일으키는데 1449년에 일으킨 반란은 구이저우성을 손에 넣는 등 나름 선전하지만 결국 10년뒤인 1459년, 명나라 관군에게 탈탈 털린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묘족은 불과 4년뒤에 또 반란을 일으키고 이번엔 야오족까지 합세해 구이저우 뿐만 아니라 후난, 광시, 광둥 등 중국 남부 전역으로 퍼지게 된다. 결국 명나라는 몽골족의 힘을 빌려 이 난을 진압하고 묘족은 한동안 중앙정부에게서 잔혹한 탄압을 받았다.1460년에 마지막으로 반란을 한 번 더 일으키는데 이마저도 진압 당하며 천여명에 달하는 묘족 남자 아이들은 거세를 당해야했다.총 1565명의 아이들이 거세를 당했는데 그 중 329명은 수술 도중 죽었고, 죽은이로 인해 할당량이 채워지지 않자 더 많은 묘족 아이들이 끌려와 강제로 거세를 당해야했다. 이렇듯 묘족은 수도 없이 탄압을 당해왔으나, 반대로 보면 명나라의 묘족 통제권은 생각보다 약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명나라는 묘족을 비롯한 서남지방의 소수민족을 완벽히 제어하지 못하고 지역의 유력자에게 토사라는 직책을 하사하고 자치권을 주는데 그쳤지만 청나라는 생각이 달랐다. 옹정제는 이 지역의 토사들을 완벽히 청나라의 제도권에 편입시키려고 작정하며 군대를 편성하여 1726년부터 1732년까지 6년에 걸쳐 묘족을 진압한다. 지역을 평정한 청나라는 새로운 도로를 잇고 거점을 방비하며 이 지역을 청나라로 편입시키려 했으나 이들의 군사통치는 반발을 더 불러왔을 뿐이었고 결국 묘족은 1795년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킨다. 청나라는 이에 팔기군으로 대응하며 군사를 파견해 이를 진압하려 하나 묘족의 분노도 만만치 않아 이를 진압하는데 11년의 시간이 걸렸다. 또한, 이때 투입된 녹영군은 주로 사천쪽의 병력을 끌어모아 파견됐는데, 이들의 부재로 인해 백련교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단단히 혼난 청나라는 반란을 진압하자마자 강경한 동화정책을 시행하게 되며, 대부분의 묘족들은 이때 중화문명에게 동화된다.

태평천국운동 당시 많은 묘족들이 태평천국군에 합류하였다. 묘족들은 총이나 대포, 석궁 사격술이 뛰어났기 때문에 태평천국 초창기 막강한 군사력과 화력을 가지고 있던 팔기군과 전쟁하는 데 군인으로 참전하여 나름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베트남, 라오스 등지에 거주하는 소수민족인 묘족의 일파는 스스로 또는 몽족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라오스, 베트남 주류민족에 의해 베트남 전쟁 때 미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어 미국, 태국 등지로 흘러 들어갔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나 보트피플 문서 참고.

3. 언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몽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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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몽몐어족(Hmong-Mien languages)에 속하는 몽어를 구사한다. 중국식으로는 각각 먀오야오어족(苗瑤語族), 묘어(苗語)로 표기한다. 고유 문자는 없고 20세기 중엽부터 로마자로 표기한다. 하지만 한족 주변의 다른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 언어의 음이나 뜻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역사가 길다. 때때로 고유의 문자를 만드는 일파가 나오기도 했으나 묘족 전체로 퍼지지는 못했고, 현재에는 묘족의 전설과 한족의 기록으로 그런 문자가 존재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지 제대로 된 유물이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면서 한자로 대체되었고, 한자를 대체할 또 다른 문자가 보급되기에는 한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지라 한자를 계속 사용했다.

4. 거주지

주 거주지역은 구이저우, 허난, 윈난, 광시, 사천, 하이난 등 성(자치구)에 분포하고 있는데, 그중 첸둥난 먀오족 둥족 자치주(黔东南苗族侗族自治州)는 묘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묘령산맥과 무릉산맥에 많이 산다. 베트남, 라오스 등 인도차이나 반도에도 묘족의 일파가 일부 거주하며, 이들은 흐몽족 또는 족이라 불린다. 참고로 미얀마 역사에 등장하는 몬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다.

주로 이웃한 야오족, 로로족과 함께 화전을 일구었으며, 보다 선진적인 농경 기술을 지닌 한족들이 밀림을 개간하고 남하하면서 거주 영역이 계속 축소되었다. 1466년 광서성 일대에서 묘족과 요족, 장족이 명나라에 반기를 들고 첸장강에 있는 대등협에서 봉기한 적도 있었다.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명나라는 정규군 3만여 명에 민병 16만여 명을 동원했다. 여기에는 몽골병 1천여 명에 위구르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묘족들과 요족들은 험준한 산골짜기에 목책을 짓고 저항했으나 명군이 화공을 사용하면서 목책이 무너지고 같이 봉기하였던 이족들이 묘족들의 뒤통수를 치면서 상당수의 묘족 봉기군이 학살당한다.[4]

중국 구이저우성 인근에 아파트 20층 높이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으며, 축구장 3~4개 크기의 동굴안에는 마을이있고,마을 안에는 18가구, 73명의 묘족이 살고있다.묘족 포스트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은 이들을 이용해 베트콩 및 북베트남을 공격했으나, 전쟁이 북베트남의 승리로 끝난 이후 베트남과 라오스에 살았던 몽족 난민들이 보복을 피해 태국과 미국으로 대거 망명했다.

5. 문화

이들의 문화는 외국에서도 유명하며 특히 공예 미술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00px-ShaveyZion1.jpg

혜성을 나타내는 기호로 문양이 쓰이기도 했다.

이들의 복식에서 곡거가 나왔다. 곡거가 묘족의 복장을 기초로 한 복식으로, 연구에서 한족의 고전에 나와있는 의복과 비교했을 때 전혀 같지 않았고 심지어 그 차이가 너무 심했다는 결론이 나왔다.

6. 베트남, 라오스에 살고 있는 묘족

중국 남부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베트남과 라오스에도 묘족의 일파인 소수민족 몽족이 100만 명 정도 살고 있다. 베트남에 사는 몽족은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했다. 현지 지형에 익숙한 몽족은 미군과 협력해 공산 베트콩(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했다. 라오스 왕국과 공산반군 사이에 벌어진 라오스 내전 때도 몽족은 라오스 왕국을 지원하는 미군의 비밀 용병으로 활약했다.

베트남 전쟁과 라오스 내전에서 미군이 패배하여 인도차이나(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반도가 공산화되자 미군을 도와 싸운 몽족은 졸지에 정치 난민 신세가 됐다. 결국 이들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떠나 미국으로 대량 이주를 감행했다. 이러한 몽족의 대량 이주는 몽족이 전세계로 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현재 미국에는 30만 명의 몽족이 살고 있다.

7. 치우 신앙

치우를 민족의 시조로 섬기는 이들이며 고유의 전승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치우 신화는 양쯔강 중류에서 한족에게 밀려 남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족에 떠밀려 남하한 것을 곱게 포장한 듯한 신화(#)도 있지만, 이와 별개로 전해 내려오는 묘족이나 한족의 전승으로 미뤄보면 한족이 묘족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수번의 대학살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갑골문에도 남(南)과 싸우거나 인신공양에 쓴 기록이 존재한다.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역사 시대 내내 한족은 묘족을 대놓고 오랑캐 취급하며 멸시했다.

현대에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도철과도 연관짓고 있으며 묘족들도 받아들이는 분위기.

김인희 박사는 저서[5]에서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묘족의 조상신도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현대 묘족 중에서도 지식인 정도만 치우를 알 뿐, 대부분의 일반인은 치우가 뭔지도 모른다고 한다. 저자는 묘족의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 감정에 기인하여 한족과 대립하는 위대한 조상을 만들고자 치우 신화를 끌어들인 것이고, 묘족의 전설이나 옛 설화 중 '치우'와 조금이라도 이름이 유사한 인물인 것 같으면 전부 치우와 연결지어 꾸며낸 것이라 보았다. 즉 맹획과 유사한 경우란 것.

8. 창작물에서

치우천왕기에서는 미아우족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비중은 높은 편.

소오강호 영화판 및 그 후속작인 동방불패에서 엄청나게 왜곡된 모습으로 나온 것으로도 익숙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일월신교의 모델이 됐을 백련교가 묘족에게 전파된 적도 없다.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고 묘족의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많이 사용하기 위한 각색. 소오강호 원작 소설에서는 남봉황만 묘족이고, 오독교의 교주로 나온다. 같은 김용의 소설인 벽혈검녹정기의 등장인물인 하철수도 묘족이자 오독교의 교주.

중국 드라마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에 묘족과 그들이 사는 광서성이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주인공 우성룡이 관직에 임용되고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 변방인 광서성의 변방 중의 변방인 나성이라는 곳으로, 이 곳은 오가는 길도 지옥길이 따로 없는 지경이고 현지 사정도 도적들에게 현령이 살해당하는 모르도르급의 생지옥이라 중앙 관리들이 가장 기피하는 임지였고 묘족들도 중앙에서 온 관료들을 불신하는데, 중국에서도 제법 추운 산서성 출신인 주인공 파티가 임지에 오는데만도 온갖 생사를 넘나들며 기껏 광서 순무한테 받은 관인, 관복, 관모까지 도적들에게 털린채 맨몸으로 와서도 버려진 관아를 정돈하며 열일하는 모습에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9. 출신 인물

10. 기타

  • 토속 주술(고술)로 고독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낯선 이민족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소설 등의 과장된 묘사로 인하여 생성된 문화적 편견이라고 여기는 주장도 있어서 실제로 어떤지는 연구가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묘족이 상당히 현대화되었음에도 계속 이쪽으로 엮이는 경우가 있어서 불쾌하게 생각한다는 듯.

  • Yang Asha (仰阿莎)라는 여신을 숭배하며 88미터에 달하는 동상을 세웠다.#


[1] 단, 정확히는 인도차이나 반도에 거주하는 건 묘족의 일파인 몽족이다.[2] 물론 한족 자체는 송나라대 들어와서야 그 정체성이 확립되었기는 했다. 춘추전국시대 때에는 같은 주나라 휘하에 있었다는 공통된 정체성이 있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각 지역별로 별개의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3] 후한 말에는 한나라에 반기를 든 묘족들이 많이 생겼지만 이건 민족적인 반감보다는 한 황실의 학정과 실정에 분노해서 들고 일어난 이유가 더 컸다.[4] 봉기가 진압된 이후 이족은 명군에 편입되었고, 이후 이족은 묘족의 화전(火田, 산을 불태우고 만든 농지)을 빼앗은 후 다른 소수민족들의 봉기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5] 치우, 오래된 역사병, 2017, 푸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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