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3 02:52:10

보응우옌잡

무원갑에서 넘어옴
<colbgcolor=#DA251D><colcolor=#fdfa00> 보응우옌잡
武元甲(무원갑) | Võ Nguyên Giáp
파일:보응우옌잡_정복.jpg
본명 불명[1]
출생 1911년 8월 25일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프랑스령 안남 꽝빈성
(現 베트남 꽝빈성)
사망 2013년 10월 4일 (향년 102세)
베트남 하노이
복무 베트남 인민군 (1944-1991)
최종 계급 베트남 인민육군 대장
주요 보직 베트남 국방부장
주요 참전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 전쟁

1. 개요2. 초기 생애3. 활약4. 논란5. 통일 이후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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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attachment/vogu.png 파일:attachment/2009822113640_giap.jpg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의 보응우옌잡 장군. 2009년의 보응우옌잡 장군.

베트남군인.

보응우옌잡이라는 이름은 가명이다.[2] 최종 계급은 대장. 흔히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 하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뒤이은 베트남 전쟁에서는 미군까지 박살낸 현대 베트남 최고의 명장이다. 베트남 역사 전체를 따지면 중세 몽골 제국의 침공을 막은 쩐흥다오도 포함되긴 하지만 그래도 대놓고 1위다. 쩐흥다오 정도의 업적을 세운 사람은 베트남에도 몇 명 있지만 잡은 식민지배국인 프랑스와 최강대국 미국을 단신으로 모두 이기며 조국의 독립과 통일을 모두 성사시켰기 때문에 냉전 시대의 최고 명장으로 손꼽힌다.[3]

하지만 베트남 전쟁에서 맞서기도 했던 한국에서는 그 평가, 인지도가 본인의 상관이자 베트남의 국부 호찌민에 비해 상당히 낮은 감이 있다.

동양권은 물론 미국을 비롯한 서구 사회에도 강렬한 인상을 남긴 군인이며 그에 걸맞게 '붉은 나폴레옹' 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

2. 초기 생애

부농 집안 출신이어서 어린 시절은 유복하게 보냈지만 일찍부터 프랑스식민지였던 베트남을 해방하려는 독립운동에 눈을 떴다. 고향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프랑스의 고등학교유학했기 때문에 프랑스어에 능통했고 인도차이나 전쟁 시절 외신 기자들 앞에서 이때 익힌 유창한 프랑스어로 회견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하지만 유학 시절 학생시위를 주도했다가 퇴학당해 귀국했고 22살에 하노이 국립대학에 입학했다. 어렸을 때부터 군사 서적을 읽기 좋아했는데 《손자병법》과 《전쟁론》을 여러 번 읽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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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 호찌민과 함께 찍은 사진

역사학경제학 학위를 받고 대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지방 사립학교역사교사로 생활하면서 생계를 꾸렸으며 여러 계파의 독립운동에 투신하다가 인도차이나 공산당에 가입했지만 이런 행위로 인해 프랑스 당국의 눈밖에 나면서 체포당했고 몇 년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중국으로 도피했다. 망명 생활하는 동안 아내와 처형, 처제를 비롯한 가족과 친지들이 연좌제로 체포되어 단두대사형당했고[4] 보응우옌잡은 프랑스에 강한 원한을 가지게 되었다.

도피 시기 호치민을 알게 되면서 일층 강경한 무장투쟁을 이용한 독립운동 노선을 택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장제스 지배하의 윈난성에 자리 잡았던 윈난군사학교(운남강무당)에서 미군에게 군사 훈련을 받았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미군 교관들은 결과상으로 호랑이 새끼를 키운 셈이었다.[5]

3. 활약

1944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뒤 같은 해 12월부터 베트남 해방군을 지휘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이끌었다. 일본이 항복하자 장제스국부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접수받으러 베트남 북부에 진입했고 호치민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지만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는 베트남을 다시 식민지로 삼으려고 했고 프랑스 행정부는 장제스 측과 협상한 끝에 중화민국군이 본국으로 돌아가도록 했다. 결국 1946년부터 프랑스군과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 인민군(약칭 베트민군) 사이에 인도차이나 전쟁이 벌어졌고 보응우옌잡은 당시 병력 10,000명을 보유한 베트민군을 이끌었다.[6]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격화되면서 보응우옌잡의 병력은 점증했고 인도차이나 전쟁의 분수령이 된 디엔비엔푸 전투에서는 병력 50,000명으로 식민국 프랑스 정예군 병력 16,200명을 포위해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7] 프랑스는 디엔비엔푸 전투에 진 것을 끝으로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 물러가면서 100년 동안 지속되던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가 끝났다. 그것도 베트남인들의 투쟁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물러난 후 베트남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프랑스 대신 미국에게 지원받은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사이에 베트남 전쟁이 시작됐다.

보응우옌잡 장군은 북베트남군의 총사령 겸 북베트남 국방부장을 맡아 북베트남군과 빨치산베트콩 등 공산군 병력을 총지휘하였다. 양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거치면서 붙은 보응우옌잡의 별명은 눈 덮인 활화산이었는데 CIA의 전신인 OSS에서 훈련받은 경력이 있었다. OSS는 일본을 대상으로 무장투쟁을 벌였던 호치민의 최대 후원자였는데 심지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뒤에도 미국에서 베트남 독립과 호치민 지원을 언급한 유일한 기관이 CIA였다. 그런데도 전술상 재능은 그다지 없었다고 평가받았다. 사실 이건 보응우옌잡 장군이 전술상 재능이 없다기보다는 민병대에 불과한 베트콩과 마찬가지로 빈약한 무장에 제대로 된 교육과 훈련도 못 받은 북베트남 정규군의 작전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기 때문이다. 질이 낮은 징집자원과 간부들의 교육수준 문제로 인한 체계적인 훈련 부족, 열악한 병참과 병기의 질 문제는 국가의 종합적인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해결 가능한 문제로 보응우옌잡 혼자서 어떻게 해 볼 수 있는게 아니었다.

하지만 전략상 목표를 향해 줄기차게 밀어붙이는 배짱과 뚝심은 알아 주는 인재였는데 실제로 북베트남군의 목표는 전술에는 패배해도 전쟁에는 지지 않는다였다. 남베트남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벌인 대규모 공세나 베트남 전쟁을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염전 분위기로 몰고 간 구정 공세는 남베트남에 있던 북베트남 게릴라 세력을 거의 소멸하게 하는 등 전술상으로는 재앙에 가까웠다. 구정 공세가 시작되기 10일 전인 1968년 1월 21일 보응우옌잡 장군은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 승리의 경험을 되살려 케산기지를 포위하게 했다. 케산 전투에 투입된 병력의 주력부대는 304사단과 308사단으로 이루어진 16,900명으로 케산 방면 포위군을 맡았으며 그 외에 320사단과 324사단으로 이루어진 16,900명의 병력까지 하여 총 34,000명과 그 지역에 있던 베트콩 부대까지 합세했다. 이 중 304사단은 14년 전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활약했던 부대였다. 케산 전투 당시 보응우옌잡이 군 총사령 겸 국방부장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현장에서 야전 지휘를 직접 한 게 아니냐는 서방 기자들의 설레발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선 '우리는 현장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라며 보응우옌잡 본인이 부정했다.

그러나 디엔비엔푸 전투와는 달리 미군은 포위당한 상태에서 막강한 화력을 동원하였고 그 결과 77일간의 포위 끝에 미군은 케산기지의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포위를 뚫었으며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이 준비했던 구정 공세시기 극심한 전력손실을 감당했다. 케산 기지 전투만 보더라도 거의 1만 명에 달하는 병력손실이 있었다.[8] 그러나 보응우옌잡 장군이 지휘한 이 공세로 결국 미군의 사기는 형편이 바뀔 수 없을 만큼 확실히 떨어졌고 미국 국민의 반전 여론도 강화하면서 미군을 협상장으로 이끄는 정치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특히 보응우옌잡 장군의 '3불 전략'은 기초이지만 반드시 명심해야 할 병법의 목적을 명확히 한 것으로서 이것을 이용해 베트남 전쟁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3불 전략'은 아래와 같다.
적이 원하는 시간에 싸우지 말고(회피 전략), 적이 유리한 장소에서 싸우지 말고(우회 전략), 적이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싸운다(혁파 전략)[9]

1973년 미국베트남 전쟁에서 소수의 고문단만 남겨놓은 채 철수하자 당시 북베트남의 지도자였던 레주언베트남 통일을 위한 총공세를 준비했다. 당연히 여기서도 레주언과 공산당 지도부는 보응우옌잡 장군의 조언을 바탕으로 군사전략을 세웠다.

다만 중월전쟁에서는 활약하지 않았다. 당시 잡이 일흔 가까운 고령이기도 하고 친중파, 주화파였기 때문에 전쟁 지휘에서는 손을 뗀 것이다.

4. 논란

베트남 국민당 반동들을 청산하는 일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우리는 그들 손에 있던 모든 지역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다.
1946년 베트남 공산당의 반우파 숙청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공산당은 1946년까지 프랑스와 여러 차례 협력하면서 비공산주의 내셔널리스트 독립운동가들을 프랑스한테 인계하고 돈을 받는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는 주장이 있는데[10] 보응우옌잡은 2차대전 종전 후 중국에서의 망명을 끝내고 하노이로 돌아온 베트남 화교 출신 국민당의 숙청에 큰 역할을 했다. 이러한 행보들은 보수파 인사들을 제거하고 북베트남에서 공산당이 혁명에 성공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레주언은 이런 행동들을 '우리의 힘을 모으고 프랑스의 침략행위에 대항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했는데 내부의 적을 외부의 적에게 보내 소멸시키는 일종의 마키아벨리즘적인 이이제이 전략이라는 뜻이다.[11] P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베트남 전쟁>에 따르면 프랑스-베트남 전쟁 이전 베트민 통제 영역에 있는 트로츠키주의자, 프랑스 협력자, 반공 민족주의자 등의 반대파 대량 숙청에 앞장선 것도 이 사람이다. 주된 처형 방식은 생매장이었고 고문과 파괴도 서슴치 않았는데 정도가 상당히 심해서 별명이 파괴적 분파주의자 일 정도였다.

5. 통일 이후

보응우옌잡은 베트남 통일 이후엔 정치 권력을 상실했다는 게 그에게 패배한 서방 여러 나라들의 주장이지만 늘그막까지 영화를 누린 것으로 봐선 그렇지도 않았던 듯하다. 사실 호치민이고 보응우옌잡이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주도한 공산주의자들은 이미 50년대 말 토지정책의 실패로 인해 북베트남이 내전 상황에 처하자 책임을 지고 1선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에서 비중 있는 행동은 애초에 많지 않았다. 베트남 공산당 내부 권력투쟁에서 이를 기회로 대두한 레주언 같은 남부 베트남 출신 공산주의자들에게 실권을 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적어도 전쟁 이후에 권력을 잃었다는 건 사실관계는 안 맞는 셈. 베트남 전쟁으로 널리 알려진 전쟁 기간부터 이미 실세와는 거리가 있었다.

종전과 베트남 통일 후에도 계속 국방부장 직책을 맡았으나 친중파였기 때문에 1978년에는 중국을 자극할 수 있었던 캄보디아 침공을 반대하기도 했다. 그래서 중국-베트남 전쟁이 끝나자마자 실권이 별로 없는 부총리로 전임되었고 국방부장 직책을 중국-베트남 전쟁의 지휘관이었던 반띠엔중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군권을 잃었다. 이후 친소파가 득세하자 1982년에 완전히 실각했고 정치국원 자리도 잃었다. 다만 이는 "나이가 많아 실권을 다음 세대 사람들에게 물려준 것"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1991년까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과 부총리로 있으면서 회고록이나 군사학 저작을 쓰는 등 저술 활동에 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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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베트남 국회에서 모인 베트남 전쟁 당시의 베트남 인민군 3거두. 오른쪽부터 국방부장 겸 총사령 보응우옌잡대장, 총참모장 반띠엔중 대장, 총정치주임 쭈후이먼 대장. 맨 왼쪽은 하노이 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철학자 응우옌주이꾸이(Nguyễn Duy Qu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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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 국방장관이었던 로버트 맥나마라와 함께

1995년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적장이었던 미국의 전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를 만나서 전쟁의 단초가 된 통킹만 사건을 주제로 환담하기도 했다. 맥나마라는 "그때 정말 무슨 일 있었습니까?"고 물었고 보응우옌잡 장군은 "아무 일도 없었는데요."라고 대답했다. 고령인데도 베트남 전쟁 당시 매설된 엄청난 수의 지뢰를 제거하는 계획의 자문을 맡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다가 2013년에 향년 10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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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정부는 국장(國葬)을 거행해 조국의 독립과 통일에 일등공신 역할을 한 전쟁영웅을 추모했다. 유해는 고향인 꽝빈(Quang Binh) 성의 해안가에 마련된 묘지에 안치됐는데 수많은 베트남인들이 방문하고 있으며 관심이 있다면 이곳을 방문한 한국인 블로그의 방문 후기를 참고하기 바란다.[12]

6. 기타

그동안 한국에서는 베트남어 원서는커녕 영문판 책도 아니고 일본판 서적을 주로 번역하다 보니 카타가나를 그대로 읽은 "보 구엔 지압 장군"으로 표기됐다. 정확한 표기는 물론 '보 응우엔 잡'인데 베트남식 이름의 특징처럼 성이 아닌 끝자로 불러 지압 장군, 잡 장군이라고 하는 경우도 잦다. 이는 영미권에서도 그렇다. 지압이라고도 하고 잡이라고도 한다. 지압하는 일자리 장군

2012년 그의 회고록 《잊을 수 없는 나날들》(원제: Những năm tháng không thể nào quên)이 대한민국에 번역 출간되었다. 주로 디엔비엔푸 전투를 비롯한 프랑스와의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시기를 다루고 있다.

2005년에는 베트남 전쟁 종전 30주년을 맞이해서 한겨레21에서 구수정이 직접 보응우옌잡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기사 링크 그는 구수정과의 인터뷰에서 2003년 미국이라크 침공을 비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디엔비엔푸 전투의 승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한 작은 식민지 국가가 제국주의 본국을 무찌른 사건이야. 이 승리는 그 뒤 유럽 제국주의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약소국들, 특히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식민지 국가들의 해방의 물결을 이끌었지. 미국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야. 이것은 베트남 인민의 영광스러운 승리이자 민족의 독립과 자주와 통일을 갈망하는 전세계 인민의 승리였어. 나는 우리나라의 역사만큼이나 긴 항전의 역사를 통해 자유와 독립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어. 그것은 21세기에도 유효하지. 오늘날의 강대국들도 독립과 자유를 바라는 약소국의 열망을 절대 얕봐선 안 돼.”

100세를 맞이한 2011년(즉, 자신이 사망하기 불과 2년 전)에는 중앙일보와 기념 인터뷰를 갖기도 했다.

그의 10주기를 앞둔 2023년 8월 호치민(구 사이공)시가 하노이 대로와 연결되는 도로에 그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

장군 존 헤켓의 가상 미소전쟁 보고서 제3차 세계대전의 외전판에서 모종의 사고로 정치국원이 전멸한 상태에서 실제 베트남의 실권을 장악한 원로 장군의 모델이다. 상황을 설명하면 1985년에 미국과 소련 간에 제한 핵전쟁이 벌어지고 이틈을 탄 화궈펑의 중화인민공화국이 동남아시아에 대한 진출을 시작할 때 베트남에서 친중 정권이 들어서서 미국에 유리한 중립 정책을 전개한다는 스토리다.

역사상 수많은 명장들은 결국 끝이 좋지 않았던 경우가 많다. 아무리 승리를 많이 했어도 마지막에는 패장이 되거나(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비극적으로 죽거나(예: 에르빈 롬멜) 만년에 명예가 손상되는 경우나(예: 펑더화이)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다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경우(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많았던 반면 잡은 민족의 영웅으로 죽었고 이후에도 계속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점에서 젊었을 때는 고난이 많았어도 이후에는 줄곧 긍정적인 업적을 남기면서 세간의 존경 속에서 일생을 마친 사례로 평가된다.


[1] 보응우옌잡이라는 이름은 가명이며 실제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2] 본명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보응우옌잡(武元甲)이란 이름의 뜻을 풀면 전쟁과 싸움(武)의 으뜸(元), 갑 오브 (甲)....[3] 사실 보응우옌잡급의 업적을 이룬 장군은 전근대, 아니 고대까지 포함한 전 세계사에서도 극히 드문 수준이다.[4] 아내가 아니라 처제가 사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5] 6.25 전쟁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이었던 최용건, 대한민국의 국방장관이었던 이범석, 중화인민공화국 인민해방군의 원수 주더와 원수 예젠잉(국방장관)도 여기 출신이다.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군사 엘리트들을 여럿 배출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큰 역할을 한 기관이다.[6] <컬러로 보는 인도차이나 전쟁>이라는 다큐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가던 무렵인 1945년 보응우옌잡 장군은 총 10,000명이나 되는 베트민군을 지휘하고 있었다고 한다.[7] 디엔비엔푸 전투 당시 프랑스군은 총 2,300명 이상이 전사하고 1만 명 이상이 항복했던 데 비해 베트민은 전사 8,000명을 포함해 사상자 23,000명의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의 수치를 떠나서 어쨌든 베트남이 프랑스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었다.[8] 반면 MAC-V 비밀보고서에 따르면 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의 전사자가 5,550명 정도라고 한다. 베트남사문화기행, 유일상 저, 하나로애드컴 2021 p.308 참조.[9] 사실 이 전략은 마오쩌둥의 16자 전법과 거의 비슷하다. 敵進我退(적이 공격하면 후퇴), 敵駐我擾(적이 멈추면 교란), 敵疲我打(적이 피로하면 공격), 敵退我追(적이 후퇴하면 추격). 그런데 은근 이를 망각하는 경우가 많다. 또 손자병법의 서술도 저와 비슷하니 둘 다 손자병법의 영향으로 인해 저런 구호를 만든 게 아닌가 싶다.[10] 여기에 링크된 디시인사이드 게시물의 출처는 반공주의 색체가 짙은 후버 연구소 Robert F. Turner의 저서인데 터너는 반공 강경 보수 성향이며 베트남 전쟁 참전 경력이 있고 이란-콘트라 사건에서 미국의 역할을 옹호한 법학자다. 확증편향에 빠져서 단편적인 자료를 보고 성급하게 판단하기보다는 여러 자료를 골고루 살펴보기를 추천한다. 에초애 갤러리도 '그' 갤러리다[11] 으레 공산국가들의 초창기 역사를 보면 외세와 싸우는 동시에 경쟁자들을 숙청하거나 제거하는 일을 동시에 행한 사례가 많은데 중국공산당 역시 중일전쟁 시절에 말로는 중국국민당과 연대하며 항일전쟁을 이어간다면서 마오쩌둥은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이며 우리 공산당의 기본정책은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반장(反蔣, 反장제스)에, 나머지 10% 항일에 사용한다."는 말을 남겼다. 결국 이들의 갈등은 환남사변으로 번졌고 훗날 중일전쟁에서 대부분의 군사력을 소진한 국민당은 일본과의 종전 후 국공내전때 공산당에게 궤멸적인 패배를 맞이했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아주 현명한 전략을 짠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명분상으로도 잘못된 것은 없다. 공산당 입장에서는 일제나 국민당이나 똑같은 적이기 때문이다. 또 예시로 언급된 신사군 사건만 하더라도 국민당군과 일본군이 협공해서 중국공산당 병력을 괴멸시켰다. 게다가 공산당만 그런 것도 아닌 것이, 미국도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악질 독재자, 이슬람 근본주의자, 범죄자들과 거래하는 것을 넘어서 협력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으며 한국 역시 적대적 공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12] 그로부터 50여 일이 지난 2013년 11월 말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 사령관을 역임한 채명신 장군도 사망했다.